4백년 미스터리와 대논쟁의 현장답사
진실 둘러싼 논쟁 아직도 뜨거운데
순국의 현장은 낙서로 오염돼
『친일화가 金殷鎬가 그린 논개 영정 떼내라』는 치열한 시민운동, 『그러면 그 영정은 내가 모시고 싶다』는 일본인의 등장과 그 여파, 「通政大夫朱公」이 논개의 조부라는 口傳의 虛實, 논개-최경회가 만난 시기에 관한 通說을 뒤집는 새로운 推論의 대두 등등 「논개논쟁」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진주·장수·함양·화순 등지의 현장답사를 통해 「논개의 진실」을 추적한다.
『토니 오빠 사랑해』 『김동호 차기대통령 후보─애인 구함』 『꼭 연합(고사)에 붙게 해 주세요』 『김세진·박은영─꼭 결혼하게 해 주세요』 진주성(晉州城) 앞 남강의 의암(義巖)은 이런 낙서들로 빈틈이 없다. 의암의 수면 아래 돌출부에는 10원·1백원짜리 동전도 수두룩하게 걸려 있다. 의암을 동전만 던지면 못 이룰 사랑도 맺어 준다는 로마의 애천(愛泉)이나 기복신앙(祈福信仰)의 잡신당(雜神堂)쯤으로 여긴 때문일까? 의암은 임진왜란 때 논개가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몸을 던진 순국의 현장이다.
그런데 「토니」는 도대체 누굴까? 마침 강변쪽 바위로부터 의암 위로 폴짝 뛰어 건너온 10대 소녀가 『그것도 몰라요? H.O.T 멤버예요』라고 가르쳐 준다. 10대로만 구성된 노래그룹에 소속된 인기가수란 얘기였다. 한국민족주의의 성지(聖地)에 씌어 있는 이런 낙서를 통해 요즘 청소년들의 당돌함이랄까 구김살 없음을 느낄 수 있다. 어떻든 「의암」의 의미는 이처럼 가벼운 것인가?
反외세투쟁의 聖地에 『토니오빠 사랑해』
진주성은 1593년 음력 6월29일 왜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때의 진주성전투는 3천의 조선 관군·의병과 9만3천의 왜군이 9일간에 걸쳐 혈전을 벌인 임진왜란·정유재란의 7년 전쟁기간 중 최대의 격전이었다. 성이 떨어지자 김천일·최경회·고종후 등 수성장들은 남강에 투신 자살했다. 왜군은 항전에 참가한 2만~3만에 달하던 성민·피란민들까지 도륙했다. 진주성에 입성한 왜군은 7월7일 촉석루에서 전승자축연을 벌였다.
「피의 카니발」에는 진주기생들이 동원되었다. 논개는 기생으로 신분을 위장하여 왜군의 전승연에 잠입했다. 그녀는 진주성 함락때 자결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부실(副室)이었다. 논개는 당시에는 위암(危巖)이라 불리던 바위 위에 올라가 왜장을 유혹했다. 위암에서 논개는 촉석루에 차려져 있었을 전승연의 헤드테이블을 마주볼 수 있었을 것이다. 왜장 하나가 위암으로 달려들었다.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의 부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였다.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그는 가토에게 9백석의 연봉을 받았다. 그러니까 가토 막하 부장(副將) 24인 중 서열 1~2위에 랭크되는 인물이었다. 검술사범 출신인 그는 가토 군(軍)의 선봉장으로서 맹위를 떨쳤다고 한다.
게야무라는 만취상태였다. 논개는 그런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었다. 논개가 순국한 지 36년 만인 인조 7년(1629)에 정대륭(鄭大隆)이라는 선비가 의거 현장인 위암의 서쪽면에 전서체로 「義巖」(의암)이라고 새겼다. 그로부터 위암은 의암으로 불리게 되었다. 다시 1백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조정에서는 논개에게 「의암부인」이란 칭호를 내렸다. 의암을 논개로 의인화한 정대륭은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가등청정의 왜군과 싸운 의병장 정문부(鄭文孚)의 둘째아들이다.
촉석루 앞 남강은 그 상류에 진양호댐이 축조되어 수량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수심이 깊고 촉석루 앞 절벽에 부딪쳐 강물이 휘감아도는 곳이다. 더구나 거사 당시는 장마철였던 만큼 수량도 많고 유속도 빨랐을 것이다. 구전되어 오는 얘기지만 거사 당시 논개는 열 손가락에 모두 반지를 끼고 있었다 한다. 왜장을 껴안고 투신할 때 깍지를 낀 손가락이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런 논개의 거사를 기리기 위해 3공 때 축조된 남강다리의 교각들을 보면 그 상단부마다 둥근 청동제 조형물 2개가 감싸고 있다. 이를 진주사람들은 「논개반지」라고 부른다.
의암에서 촉석루로 올라가는 길목에 비각 하나가 보이는데 비각 안에는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진주사람들이 논개를 포상하라고 1백30여년간이나 조정에 건의해도 「증거를 제시하라」는 등 별 신통한 반응을 보이지 않자 경종 2년(1722) 4월에 정식(1683~1746)이라는 선비가 진주 사민(士民)들에게 금품을 모으고 그 자신이 비문을 지어 논개 의거의 징표로서 세운 공적비다.
그런데 정식이란 인물이 특이하다. 이홍식(李弘植) 박사가 편한 『새국사사전』(1978·대영문화사)을 찾아 보니까 「정식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신동으로 이름났고 장성해서는 유건(儒巾)을 찢고 패랭이를 쓴 채 명산대천을 돌아다녔으며 만년엔 지리산에 들어가 초옥을 짓고 세상일을 잊었는데 극도로 가난하여 고사리나 소나무잎으로 끼니를 이으면서도 태연히 지내다 죽었다」고 쓰여 있다. 그만한 인물이었으니까 세상명리와는 무관한 일에 발벗고 나섰을 것이다. 의암사적비가 세워진 바로 그해에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의 장계로 「의기논개지문」이란 사액(賜額)을 받아 촉석루 경내에 정려가 세워졌다.
조정에서 「論介 의거」 무시하자 백성들이 모금해서 事蹟碑 세워
의암사적비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진주성의 「진주」(眞珠)인 촉석루와 마주친다. 가파른 절벽과 맞닿은 진주성 남문(南門)에 바짝 다가서 있는 누각이다. 이곳에는 논개의 순국을 기리는 다산(茶山) 정약용과 매천(梅泉) 황현의 글 등이 적혀 있다. 촉석루 경내 서편에 조그마한 사당이 하나 있는데 바로 논개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의기사(義妓祠)다. 의기사는 영조 15년(1739)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주청에 의해 건립되어 나라에서 춘·추로 향제(享祭)했다. 의기사라면 의로운 기생을 기리는 사당이라는 의미다.
경상우병사 최경회의 부실(副室)이었던 논개가 기생으로 잘못 알려진 것은 논개의 행적에 대한 최초의 사료인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비롯되었다. 『어우야담』은 광해군 13년(1621) 어우당 류몽인(於于堂 柳夢寅·1559~1623)이 민간에 흩어져 있던 야담과 설화를 모아 저술한 필사본으로 그 인륜편 효열조(孝烈條)에 논개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논개는 진주관기(晉州官妓)였다」로 시작된다.
류몽인의 오해는 어디서 연유했던 것일까. 당대의 문장가였던 그는 진주성전투 다음해인 1594년 진주 사민을 위무하기 위한 세자 광해군을 수행하여 진주를 방문했는데 그때 진주 사람들로부터 논개의 신분에 대해 잘못된 제보를 받았던 것 같다. 당시 진주사람들은 논개가 「기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왜냐하면 논개 스스로가 의거 당시 기생으로 위장했는 데다 진주사람들도 타향사람인 논개의 정체를 자세히 알 턱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우야담』에 논개가 관기로 잘못 기록되는 바람에 후인들도 그런 잘못을 그대로 답습했다. 조선왕조시대의 관기라면 관리들을 상대하는 창녀의 신분이었다. 그 결과 논개의 친정쪽인 신안주씨(新安朱氏)와 시가쪽인 해주최씨(海州崔氏) 가문 양쪽 모두가 집안망신이라고 근 4백년간 논개와의 관계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의기사는 정조 4년(1780) 정약용의 장인이며 경상우병사이던 홍화보(洪和輔)에 의해 대대적으로 보수되고 순조 24년(1824)에 중건되었다. 중건 당시 사당의 현판은 관찰사 이지연(李止淵)이 썼는데 「의기사」가 아니라 「義娘祠」(의랑사)로 고쳐졌다고 한다. 의랑사라면 「의로운 낭자의 사당」이라는 뜻이다. 그때서야 논개의 신분을 제대로 파악했던 것 같다. 의랑사는 1950년 6·25전쟁 때 실화로 인해 불타버렸다. 사당은 60년 복원되었지만 그 이름이 웬일인지 의기사로 바꿔졌다. 「논개 부인」라고 하지 않고 「기생 논개」 운운하면 발끈하는 진주시민들은 논개 사당의 이름이 「의기사」로 되돌아간 데 대해 몹시 아쉬워한다.
『친일화가가 그린 의기사 영정 빨리 떼내라』
지금 진주는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논쟁의 와중에 파묻혀 있다. 「친일화가가 그린 의기사의 영정은 논개의 호국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므로 떼내라」는 시민운동이 맹렬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의기사에 걸려 있는 영정은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1892~1979)의 작품이다. 이당은 고종·순종의 어진(御眞)을 그린 인물화의 대가였지만 일제 때 「금차봉납도」를 그린 행적 때문에 해방 후 「친일파」로 지목된 바 있다.
금차봉납도란 일제의 「대동아성전」의 전비(戰費)에 보태 쓰라고 조선여성들이 몸에 지니던 은비녀·금반지를 벗어 일제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에게 헌납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진주정신 지키기모임」(대표 박노정 진주신문 사장)에서는 『논개의 영정만은 친일화가가 그려서는 안된다』면서 1993년부터 5년째 「의기사 영정 폐출운동」을 벌여 오고 있다.
진주지역의 10여개 시민운동단체와 경상대·진주교육대 교수 1백40여명 등이 참여한 영정 폐출운동에 대해 당국도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진주시 당국은 2차례에 걸쳐 「논개영정 하정(下幀)문제」 토론회를 열었지만 합의를 보지 못했다. 의기사의 영정을 떼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다는 반론도 있었다. 반대론자들의 논리는 대충 다음과 같다. 『김은호가 친일파라면 당시 조선사람 99%가 친일파다』 『논개 영정은 배일감정으로 보면 어느 누구보다 앞섰던 이승만 대통령이 지시해 만들었는데 그런 분이 친일파에게 제작을 의뢰했겠는가』 『화가의 사상과 작품은 별개의 문제다』 찬성론자들은 분개한다. 『역적이 쓴 가훈을 글씨가 좋다고 걸어 놓겠는가』 『김은호가 그린 논개 영정에 친일의 요소가 없다고 할지라도 논개의 영정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성보다 공적인 상징성이다』
이렇게 찬반논쟁이 빚어지자 진주시 당국은 아직도 의기사 영정 폐출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진주정신 지키기 모임」의 박노정 대표는 당국이 행정편의주의에 빠져 설득력 없는 일부의 반대이유를 동원·유도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의기사 영정의 폐출 여부는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충무 제승당의 이순신 영정, 서울 안중근기념관의 안중근 영정, 강릉 오죽헌의 신사임당과 이율곡 영정 등도 이당의 작품인 만큼 의기사 영정의 운명에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경상대 의류학과 정복남 교수 등은 의기사 영정이 16세기의 복식과 색깔·머리모양·화장법과 모두 어긋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예컨대 당시의 저고리와 치마의 길이는 거의 1대1이었는데 김은호가 그린 영정은 가슴께만 덮히는 19세기형의 저고리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박노정 대표는 『의기사의 영정은 애당초 춘향이를 그린 미인도』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비화를 귀띔해 주었다.
『1955년 전북 출신의 모 정치인이 성춘향 같은 미인도를 그려 달라고 김은호 화백에게 의뢰했어요. 그 정치인은 김은호가 그린 미인도를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선물했답디다. 불탄 의기사가 복원되던 무렵 이대통령이 진주에 들러 논개의 영정이 필요할 것이니 보내 주겠다고 말하고 상경했는데 60년 초 경무대에서 내려온 김은호의 작품인 미인도가 바로 지금 의기사에 봉안된 영정입니다. 이상의 얘기는 「이당 김은호 도록」에도 기록되어 있어요』「의기사 영정을 떼내라」 「그럴 필요는 없다」는 논쟁이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엉뚱하게도 논개를 숭배한다는 한 일본인이 수년 전 진주시장을 찾아와 『만약 논개님의 영정을 새로운 것으로 바꾼다면 지금 영정은 미숙하지만 제가 모시고 싶다』는 제안을 하고 나서기도 했다. 진주시장은 『만약 영정을 떼낸다고 하더라도 다른 어느 장소에 옮겨 잘 보존할 것이므로 다른 용도로 쓰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거절했다. 그러면 논개의 영정을 넘겨 달라고 했던 일본인은 누구이며 그 의도는 무엇일까. 그는 올해 67세의 은퇴한 건축설계사로서 현재 후쿠오카의 다가와(田川)시에 사는 우에츠카 하쿠유(上塚博勇)씨다. 그는 후쿠오카에서 자동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히코(英彦)산의 자기 소유지에서 게야무라의 조선출전 직전에 죽은 그의 처와 처제의 묘비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후 게야무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게야무라는 고행 끝에 무술사범으로 출세한 입지전적인 사무라이였지만 사후의 평판은 별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장렬하게 전사한 것도 아니고 전승연에서 「조선의 여성」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을 터이다. 그래서 그의 영주(領主)인 가토는 일본의 패권을 판가름한 1600년의 세키가하라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 히데요리를 옹립한 서군(西軍)을 격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東軍)에 가담함으로써 후쿠오카 일대의 대영주로 승승장구했지만 게야무라는 일본 전통연극 가부키 중에서 「불행한 사무라이」로 등장하는 정도였다. 우에츠카씨는 비운의 게야무라를 흠모했다. 그런 끝에 그는 실로 기상천외의 발상을 하게 된다. 즉 논개와 게야무라의 영혼결혼식을 추진하려 했던 것이다. 1973년 진주를 처음 찾아온 우에츠카씨는 논개에 대한 한국인들의 정서를 대번에 깨닫고 두번 다시 「영혼결혼식」 운운의 발언은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에츠카씨는 히코산에 논개와 게야무라를 모시는 사당인 보수원(寶壽院)을 세웠다.
그는 논개의 영혼을 모셔가기 위해 진주 남강에다 국화꽃을 뿌리고 1천마리의 종이학을 띄우면서 독경을 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후 그는 10여차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차림으로 방한하여 진주·함양·장수의 논개 사적지를 순례했다. 1976년에는 진주의 모래·나무 그리고 논개의 고향인 장수의 돌을 히코산으로 운반해서 「논개묘」를 만들고 비석도 세웠다.
한국민족주의의 상징이 일본에선 祈福信仰의 대상으로 변질돼
히코산의 사당 안에는 논개의 영정도 걸려 있다. 한국인 동양화가의 그림인데 의기사 영정과 비슷한 모습이다. 현장을 찍은 사진자료를 보니까 논개의 위패 옆에는 게야무라 그리고 그의 처와 처제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논개가 게야무라의 첩으로 오해될 수 있는 모습이다. 보수원에서는 진주성 함락일인 매년 음력 6월29일 「한·일 군관민 합동진혼제를 올린다. 1983년의 「제11회 합동진혼제」를 취재한 전북의 한 일간지 기자는 「히코산에 핀 논개의 얼」이란 제목의 5회 연재기사에서 제주(祭主)인 우에츠카씨가 읽은 제문(祭文) 전문도 소개했다.
다음은 그 골자.
「…히코산과 더불어 이름높은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힘이 세었으며 인품도 모범이었습니다만 시대의 흐름에 어쩔 수 없어 가토 키요마사의 선봉장으로서 진주성에 분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걸고 구국의 일념에 불타는 젊음의 의암 주논개에 의해 같이 남강의 수중 깊이 사라졌으니 그 무상함이 바로 인과정토(因果淨土)일 것이라 가슴을 세게 칩니다. 영령들이시여,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다면 영원히 원한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그 상대를 구원하는 데 노력하는 것이 원한을 스스로 없애는 길이며 이것이 원한을 승화시키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영령이시여, 이것이 곧 불교에 의한 대승(大乘)의 가르침입니다…」
이승에서 쌓은 원(寃)을 풀어야 극락왕생을 한다는 대승불교의 가르침도 좋고 한·일 양국이 구원(舊怨)을 씻고 진정한 우의와 친선으로 세계평화에 기여하자는 얘기도 논리성이 있다. 대형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게양하고 묘역에다 무궁화와 백일홍(전라북도의 상징화)을 심어 울타리로 삼으며 한국식으로 만든 떡을 제상에 올리는 등 온갖 정성을 기울인 우에츠카씨의 진정도 이해된다. 그러나 우에츠카씨의 발상법은 출발부터 위험천만하다. 논개는 게야무라와는 나란히 세울 수 없는 한국의 유부녀일 뿐만 아니라 한국민족주의와 반외세투쟁의 상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속의 논개는 일본의 잡신(雜神) 중의 하나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보수원에서 논개를 참배한 일본여인들이 『부부사이가 좋아지더군요』 『논개님에게 부탁하여 아들 둘을 낳았죠』라고 코멘트하는 모습이 수년 전 MBC-TV 특집프로그램을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임란 한·일합동진혼제」에는 근년에 이르기까지 진주시장이 화환을 보냈고 후쿠오카 주재 한국총영사관은 1982년까지 부영사를 파견했다. 특히 1976년에는 논개사당을 세운 우에츠카씨에게 진주시장 명의의 감사장이 수여되기도 했다. 논개를 둘러싼 의문 중의 하나가 그 출신성분이다. 그것을 알려면 그녀의 고향을 찾아가 볼 수밖에 없다. 논개가 태어나서 성장한 곳은 전라도 장수현 임내면 주촌(朱村)마을인데 지금의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다.
서울서 장계(長溪)로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로 하행선을 달리다 옥천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37번 국도를 통해 무주읍 3거리까지 남진한 다음 여기서 19번 국도를 타고 드는 코스가 지름길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무진장(무주·진안·장수)의 산하가 절경이다. 장계 4거리에서 대곡리(大谷里)로 가는 길은 경상도쪽으로 넘어가는 26번 국도를 따라 15리쯤 동진하면 길 오른쪽에 「논개생가」라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이 있는 이곳 명덕리에서 우회전하여 13번 군도를 따라 3km쯤 남진하면 「오동지」라는 큰 저수지가 보이는데 바로 그 윗동네가 대곡리다.
논개 생가의 답사에는 「논개박사」라고 불리는 고두영(高斗永) 선생과 동행했다. 금년 69세인 고선생은 장수군의 계남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후에도 필생의 사업인 논개에 관한 연구와 자료수집을 계속해 오고 있다. 그는 오랜 세월동안 방치되었던 논개 생가의 복원운동에 앞장섰고 「장수의 얼」이란 책자를 발간하여 논개의 위상을 바로 세웠으며 「논개님의 노래」를 지어 널리 불리게 한 분이다. 특히 1980년 주촌국민학교 교감 재직 당시 그는 문교부의 국난극복사례 모집에 「주논개와 임진란」이라는 발굴·연구결과를 제출하여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주논개와 임진란」은 영상교육자료로 수만부가 제작되어 전국 각급학교 등에 배부되었다.
정3품 通政大夫를 배출한 新安朱氏 가문
논개 생가의 경내에 들어가면 「주논개상」(朱論介像)이 눈길을 끈다. 조각가 배형식씨의 작품으로서 당시의 복식·머리모양 등에 관한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제작했다는데 진주 의기사의 영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얼굴 표정도 「19세기형 미인도」인 의기사의 영정과는 달리 당차면서도 의젓함을 느끼게 한다. 다만 20세에 순국한 논개의 모습이 40대 여성으로 보인다는 지적이 있기는 하다.
주논개상 뒤편으로는 5칸짜리 초가집이 있는데 바로 1987년에 복원된 주논개 생가다. 방안에는 고두영 선생이 제작한 논개 사적지에 관한 사진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주논개 생가사적비」를 보니까 「원 생가터는 대곡(오동)저수지 시설로 수몰됨으로써 같은 마을 둘레 내에 보존되어야 한다는 군민의 여망에 따라 남쪽으로 3백m 떨어진 곳에 부지 8천3백40평을 마련하여 복원하게 된 것」이라고 적혀 있다.
고선생에 따르면 논개 생가터는 옛 주촌국민학교의 건물과 함께 수몰되었다. 주촌학교 교실이 들어섰던 자리가 생가터였다고 한다. 2백여평의 생가터에는 우물과 유허비가 있었고 마을 입구에는 「주논개랑 생가지사적(生家址事蹟) 불망비」가 세워져 있었다. 1982년 수몰을 앞두고 주촌초등학교는 오동지 서쪽 언덕 위로 옮겨졌다. 당시 주촌학교 교감이던 고선생은 전교생과 합심하여 교정을 만들고 여기다 최초의 논개 동상을 세웠다. 그러나 주촌학교는 취학아동 부족으로 수삼년 전 폐교되었다.
고선생은 논개의 조부묘가 궐촌(闕村)에 남아 있다고 했다. 궐촌은 주논개 생가에서 13번 군도를 따라 5리쯤 내려가면 만나는 마을이다. 궐촌에서 마을 뒷산으로 10분쯤 오르니까 밭 사이로 고색창연한 묘비 하나와 문신상 한쌍이 눈길을 끈다. 문신상은 품에 안으면 들릴 만큼 작으만하나 매우 격조가 높다. 세월의 이끼가 낀 묘비명을 획수에 따라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니 「통정대부 주공 현비 장수서씨 지묘」라 쓰인 글씨가 드러난다. 고선생은 논개의 조부 주용일(朱龍一)과 조모 장수서씨(長水徐氏)의 묘비로 구전되어 왔다고 말한다. 통정대부(通政大夫)라면 정3품 당상관이다. 기자로선 주용일과 주논개의 관계를 확인할 도리가 없지만 그야 어떻든 문중에서 통정대부를 배출했다면 신안주씨는 당당한 반가(班家)다. 다음은 고선생의 배경설명을 곁들인 장수지역의 구전(口傳).
『논개의 조부 주용일은 벼슬에서 물러나 경상도 함양군(당시는 안의현) 서상면 방지마을에서 청빈한 선비생활을 했는데 이곳 장수사람들이 서당 훈장으로 모시고 왔다고 합니다. 장수와 함양은 전라도·경상도로 나눠져 있지만 오동지 동쪽 민재고개만 넘으면 오갈 수 있던 이웃이었죠. 민재고개는 옛날 경상우도에서 서울로 가는 지름길이었고 1950년대만 해도 나무하러 갔던 장수·함양사람들이 고개마루쯤에서 만나기도 했지요. 주용일은 방지마을에서 민재고개를 넘어 궐촌으로 이주해와 글방을 차린 겁니다. 논개의 부친 주달문(朱達文)도 훈장을 업으로 삼았는데 글방은 궐촌에서 주촌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궐촌은 주촌이 수몰된 이후 「주촌」이란 이름을 계승하고 있다. 최근 마을 입구에 논개를 기리는 정려도 세워놓았다. 논개의 거사는 진주에 간 지 불과 며칠 만에 단독 결심·결행한 때문이었든지 그의 가계·출생·성장 등의 신상이 2백여년간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논개는 장수인」이라고 밝힌 최초의 문헌은 1800년에 발간된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이다. 그후 발간된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1839)과 『장수읍지』(長水邑誌·1872)도 『호남절의록』의 기록을 인용했다.
논개의 碑銘 지으면서 스스로를 「썩은 선비」라 한탄한 양심
논개를 기리기 위해 장수에 세워진 최초의 금석문은 「촉석의기 논개 생장향 수명비」다. 「생장향 수명비」(生長鄕 竪名碑)는 원래 장수현 시장터에 세워져 있었는데 현재 장수읍 두산리 소재 의암사 경내에 옮겨져 있다. 비문을 보기 위해 장계에서 「싸리재」를 거치는 19번 국도를 따라 30여리를 남행하여 장수읍으로 들어갔다.
「수명비」의 비문은 헌종 12년(1846) 장수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지었다. 비문은 「…영웅열사라도 할 수 없는 일을 연약한 여자가 큰 뜻을 분별하여 자신의 목숨을 순수히 받쳤으니 어찌 열(烈)이 아니라 할 것인가」로 시작된다. 비문 가운데 가장 가슴을 쳤던 문구는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를 지킬 계책은 마련하지 못하고 60 평생이 되었으니 썩은 선비라서 오히려 부끄럽구나」라고 글쓴이가 자책한 대목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자들이 칠칠치 못하면 여성들의 수난시대가 도래하게 마련이다. 수퍼파워 소련이 무너지자 러시아의 일부 여성들이 한국에까지 진출하여 몸을 팔고 있는 것도 그러한 사례의 현대판이다. 우리로선 남의 얘기할 처지도 못된다.
고려 때는 몽고군의 말발굽이 60년간이나 전국토를 짓밟았고 조선조시대엔 임진왜란·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왜군·청군이 우리를 유린했다. 점령군이 휩쓸고 간 뒤에는 혼혈아의 집단수용소인 「이태원」(異胎院) 같은 동네가 생기거나 성의 노예로 붙들려 갔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귀국한 이른바 「환향녀」(還鄕女)가 집단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데 논개는 민족수난기에 처해 남자들도 못했던 일을 감행했다. 생각해 보면 임진왜란 7년 전쟁기간을 통틀어 장수급 왜적을 죽인 조선사람은 바다에서 왜의 수군장(水軍將) 「마다시」를 전사시킨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제외하면 논개뿐이다. 그러니까 논개 앞에서 고개를 쳐들 만한 조선남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장수현감 정주석은 그런 심경을 양심적으로 털어놓은 남자라고 할 수 있다. 「수명비」는 일제 때 금산 「7백의총비」라든가 남원 「황산대첩비」처럼 폭파될 뻔했다. 「수명비」를 파괴하려는 일본경찰의 흉계를 눈치챈 마을청년들이 야밤중에 10리밖 들판으로 옮겨 묻어 두었다가 해방 직후 파헤쳐 다시 세웠다.
의암사는 해방 후 함태영(咸台永) 부통령이 쓴 현판을 받아 건립된 논개 사당이다. 경내에는 논개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우(祠宇)와 전시관이 있다. 전시관에는 논개의 일생을 담은 4폭의 기록화가 걸려 있고 논개의 행장이 기록된 문헌의 영인본 등도 눈에 띈다. 4폭의 기록화는 논개가 동네 학동들과 함께 아버지 주달문으로부터 한문을 배우는 모습, 논개 모녀가 장수현감 최경회에게 재판을 받는 장면, 진주성전투 모습, 논개가 적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드는 장면을 각각 담고 있다. 그런데 논개와 어머니 밀양박씨가 최경회 현감에게 재판을 받게 되었던 사연에 대해 장수군에서 제작한 안내책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선조 21년(1588) 8월 김풍헌이란 토호가 논개의 자색에 탐을 내 논개의 숙부인 주달무를 돈으로 매수해 백치인 아들과 일방적으로 혼인을 시키려 했다(주달문의 별세 후 논개 모녀는 주달무에게 의탁해 있었다고 함). 그러나 논개 모녀가 완강히 반대하고 주달무가 도망하자 김풍헌은 논개 모녀를 상대로 장수현감에게 소장을 올렸으며 그 결과 박씨부인은 억울하게도 5년간 관가의 종으로 얽매이게 되었다. 이에 논개가 어머니를 대신하겠다고 간청하자 현감 최경회는 그 효성에 감동하여 모녀를 다 방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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