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걸음은 나는 구름이요, 한 주먹으로 魔를 타파하니…
49세에 계룡산에 입산해 수련생활을 하고 있는 기천문 2대 문주 박사규씨. 1977년 1대 문주 박대양과 일전을 벌여 참패한 후 기천문의 길에 들어선 그는 “기천문이야말로 단군 시대부터 우리와 함께 해온 전통 무예”라고 주장한다. 민족 주체성을 중시하며 기천문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박 문주의 예사롭지 않은 삶을 알아보았다.
계룡산에 머무는 박사규 문주는 수련을 하고 지인들과 도담을 나누거나 수련생들을 지도하며 하루를 보낸다.
이세상에는 직업도 가지가지다. 이색적인 직업을 수소문해 봤더니, ‘문주(門主)’라는 직업이 있다. 문주는 글자 그대로 문파의 주인을 지칭한다. 무협지에 나오는 소림파, 무당파, 화산파의 장문인들이 바로 문주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문주가 무협지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현재 국내에도 있다. 기천문(氣天門)이라는 문파의 문주로 불리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박사규(56)씨다. 그는 기천문의 2대 문주로 알려져 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문주가 되는 것일까 궁금했다.
박 문주는 백두대간의 중악(中岳)인 계룡산 신원사 입구에 있는 허름한 민박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방안에 들어가니 조그마한 단군 영정이 놓여있는 앉은뱅이책상과 고목나무 밑둥을 다듬어 만든 차상(茶床)이 달랑 있을 뿐이다. 일개 문파의 문주가 기거하는 처소라기에는 너무나 소박하다.
그는 평범한 얼굴에 풍채가 우람하지도 않다. 키도 170cm나 될까. 그러나 눈을 보니 달랐다. 예사롭잖은 눈빛에서 어떤 기운이 뭉쳐있음이 느껴졌다. 사람의 내공은 눈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남자 나이 50대 중반이 넘어서면 외모의 매력은 떨어진다. ‘신정(腎精 : 신장에 뭉쳐 있는 정액)’이 고갈되기 때문에 눈빛이 흐려지면서 돈 욕심만 잔뜩 남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박 문주의 눈빛은 50대 후반의 사그라지는 그것이 아니었다. 정(精)을 축적하면서 공력을 충실하게 연마해온 사람의 눈빛이었다. 차상을 마주하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49세에 10만원 들고 입산
-가정도 있는데, 어떻게 해서 산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까?
“역대 조사(祖師)들이 불러서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복잡한 질문을 한마디로 압축한다. 역대 조사라고 하면 이 땅에서 도를 닦았던 정신계의 무수한 스승들을 가리킨다. 그 스승들이 자신을 산으로 불렀다는 말이다.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죠.
“지난 십수년 동안 서울에 살면서도 마음은 항상 산에 있었습니다. 꿩이 콩밭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저도 산을 그리워하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처자식이 있어 생계에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시간이 나면 3∼4일, 때로는 10일 일정으로 산에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 마흔아홉살 때 자연스레 산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때가 되니까 정신계의 스승들이 더 이상 세속적인 삶을 계속할 수 없도록 한 방 놓더군요. 한방 놓을 때 빨리 눈치채야 합니다. 그때 미적거리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KO 펀치를 맞아요. 저는 빨리 눈치를 채고 산으로 들어왔습니다. 처음 계룡산에 들어올 때 타고 다니던 승용차 1대와 단돈 10만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도 안 죽고 아직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入山 가능성 큰 사주
-현재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제가 서울 이태원에 옷가게를 갖고 있는데, 지금은 집사람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대로 가족들 생계는 거기서 버는 돈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박 문주는 2남1녀를 두었다. 자녀들이 이미 장성해 대학을 다니거나 결혼 적령기에 도달해 있다. 명절이나 제사 때만 서울 집에 들른다. 자식들에겐 미안한 마음뿐이지만 아버지가 의미 있는 길을 가고 있다며 자신의 길을 이해해주는 자식들이 무척 고맙다고.
“박 문주님은 생년·월·일·시가 어떻게 됩니까?”
필자는 특수한 길을 가는 사람을 만나면 사주팔자를 물어보는 습관이 있다. 산에 들어와 사는 방식은 누구나 쉽게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팔자를 타고난 사람이 입산해서 도를 닦는 것일까. 운명이 타고나는 것이라면 순응하는 게 상책이다. 사주는 내 나름대로 터득한 지인지감(知人之鑑)의 한 방법이다.
그는 1949년 2월4일(음력) 진시(辰時)라고 알려줬다. 진시라면 아침 7시 반에서 9시 반까지다. 육십갑자로 환산해 보니, 기축(己丑)年, 병인(丙寅)月, 임진(壬辰)日, 갑진(甲辰)時다. 중요한 대목은 일주이다. 박 문주는 임진일에 태어났다. 壬은 한강과 같은 큰 강물을, 辰은 용을 상징한다. 말하자면 흑룡으로서 힘이 좋은 명조이다. 임진일에 태어난 사람은 융통성과 배짱이 있다고 해석한다.
어떻게 해서 그가 입산수도 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박 문주의 지지(地支)를 보면 丑년辰일辰시로 입산할 가능성이 많은 사주다. 사주 전체로 보면 ‘식신생재(食神生財)’격이다. 식신생재란 ‘베풀어놓은 것이 결국 재물로 돌아온다’는 의미. 베풀 줄 아는 기질이므로 재물이 붙을 수 있다. 식신생재 격은 사업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
박 문주처럼 사업을 하다가 입산수도하면 이 사업적 자질이 어떻게 변하는가? 제자를 키우는 쪽으로 작용한다. 제자도 아무나 키울 수 없다. 식신(食神)이 없는 사람은 제자가 따르지 않는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승이 베풀 줄 알아야 제자도 따르는 법이다. 명리학(命理學)에서 보면 박 문주의 사주는 제자를 키울 수 있는 사주다. 이 사주에서는 甲辰시의 甲이 식신이다. 박 문주 밑에 제자들이 많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물론 이는 필자의 주관적인 해석일 뿐이다.
-계룡산에 들어와 산 지 7년이 되었습니다. 계룡산은 어떤 산이라고 생각합니까?
“민족의 성산(聖山)입니다. 유사 이래 수많은 도인들이 이 산에서 공부했습니다. 공자, 석가, 예수만 성인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 중에도 훌륭한 어른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은 조용히 살다가 가셨습니다. 어떠한 자취도 남기지 않았어요. 계룡산은 정신세계의 고단자들이 머물다가 간 곳입니다. 자신만의 안테나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어요. 또 계룡산은 인자한 산입니다. 어머니 품 같아 이른바 기돗발이 잘 받습니다. 흔히 다른 산을 섭렵하고 계룡산에 들어와야 좋다고 합니다. 그만큼 계룡산의 기운이 강하다는 뜻이지요.”
-안테나로 느낄 수 있는 기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과거에 수행했던 정신세계 고단자의 에너지가 시공을 초월해 남아 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불가나 도가, 요가의 고단자들도 그런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에너지가 시공을 초월해서 존재한다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고단자들이 성취했던 경지라고나 할까. 정신세계의 어떤 경지에 이르면 그에 합당하는 법이 존재합니다. 법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아요. 그래서 후학들이 공부할 때 그 법 또는 에너지와 접속하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록을 남기지 않아도 그 법을 찾아갈 수 있어요. 문제는 자신이 얼마나 예민한 안테나를 세울 수 있느냐죠.
산에 들어와 살면서 제 자신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죠. 일찍이 박대양 사부님께서 ‘부풀려진 고무풍선에 일침이 가해져서 터질 때는 엄청난 힘이 쏟아질 것이다’라고 예언했는데, 산에 들어와 살면서 그 의미를 체득했습니다.
처음 5년간은 갑사(甲寺) 입구에서 살았습니다. 갑사는 전통적으로 힘이 강한 무인을 많이 배출한 곳이죠. 갑사 주변은 에너지가 거칠고 강합니다. 그래서 역대로 갑사에서 장사 스님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2년 전 신원사(新元寺)로 옮겼는데, 이곳은 갑사에 비해 에너지가 훨씬 부드럽습니다. 살아보면 그걸 압니다.”
계룡산 주변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절터가 있다. 동쪽에는 동학사(東鶴寺), 서쪽에는 갑사(甲寺), 남쪽에는 신원사(新元寺)다. 북쪽에도 원래 절이 있었지만 폐사되어 현재는 비어있다. 북쪽을 상신리(上莘里)라 부른다. 소설 ‘단’의 주인공 봉우 권태훈(1900∼94) 선생이 상신리에서 오래 살았다.
신원사의 특기 사항은 절 오른쪽에 ‘중악단’(中岳壇)’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국가적인 차원에서 산신을 모신 곳이 세 군데 있었다. 묘향산의 상악단(上岳壇), 계룡산의 중악단, 지리산의 하악단(下岳壇)이 그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상악단과 하악산은 사라졌지만, 계룡산 신원사의 중악단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만큼 백두대간에서 비중 있는 포인트가 계룡산이요, 5000년 민족 정신사의 뿌리가 보존된 곳이 바로 계룡산 중악단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기천문의 문주가 계룡산에서 머무른 것도 우연은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는 갑사의 강력한 기운을 섭렵한 다음 부드러운 기운을 섭취하려 신원사로 오지 않았나 싶다.
단군 시절부터 전수된 기천문
그는 동이 틀 때 일어나 활동을 시작하고 해가 떨어지면 활동을 중지한다. 자연의 리듬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침에는 계룡산 봉우리를 순례한다. 우선 관음봉에 올랐다가 문필봉으로 간다. 천제단이 있는 문필봉에서 수련을 한 후 연천봉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한바퀴 도는 데 3시간 정도 걸린다. 아침 6시에 시작하면 9시가 약간 넘어 숙소로 돌아온다. 낮 시간에는 혼자 경전을 읽거나 방문객을 맞이한다. 지리산, 모악산, 설악산, 속리산 등에서 공부한 산사람들이 기천문 문주가 계룡산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데, 그들과 도담(道談)을 나누며 기운을 교차하기도 한다.
기를 공부한 사람들은 기운을 교차하면서 상대방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간파한다. 외공을 닦지 않고 내공만 닦은 사람은 아무래도 기운이 약하다. 주말에는 각지에서 올라오는 기천문 수련생들을 지도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수박도’의 자세.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한다.
세간에서 ‘산중무예’로 알려진 기천문(氣天門)이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전통 무술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해 여러 대학에 기천문이라는 동아리가 결성되기도 했다. ‘보보비운(步步飛雲) 일권타마(一拳打魔)’라는 문구는 대학가 기천문 동아리의 슬로건이다. ‘걸음걸음은 나는 구름이요, 한 주먹으로 마를 타파한다’는 문구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통쾌함과 그 어떤 신비함을 느끼게 한다.
기천의 기원은 5000년 전 단군으로거슬러올라간다. 고조선에서 시작해 고구려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를 이어 현재에 이어졌다는 것. 우리나라 상고사의 전통과 궤를 같이하는 만큼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문파다. 상고사의 중요한 경전으로 여기는 ‘천부경’과 ‘한단고기’는 기천의 이론적 배경이다.
기천은 겉으로 보면 무술이지만 한 단계 더 들어가면 한민족에게 면면히 내려온 마음 닦는 법이기도 하다.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는 말이 있듯 안으로는 심성을 닦고 밖으로는 몸을 닦는다. 먼저 몸을 강철같이 단련하고 그 과정에서 몸의 모든 기맥이 뚫리면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비우면 부수적으로 몸은 저절로 닦아진다고 본다. 하지만 기천은 몸이 먼저고 마음이 그 다음이다. 꽉 막힌 사무실에서 만성운동부족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기천의 몸 닦는 노하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천의 유래가 단군까지 소급된다고 하셨는데, 그걸 입증할 만한 근거가 있습니까?
“문헌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문파에서 사용하는 기본예법 중 ‘단배공(檀拜功)’이라는 인사법이 있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단군배공(檀君拜功)’으로 단군에게 올리는 인사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단군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기 때문에 ‘단군배공’을 ‘단배공’으로 줄여서 불렀던 것이죠. 기천에서 스승께 인사드릴 때 취하는 인사법이 바로 단배공입니다. 기천을 지켜온 역대 지킴이들로부터 쭉 내려온 인사법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기천은 단군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마침 문하생 2명이 박 문주에게 장중하면서도 복잡한 절차를 따라 하직 인사를 했다. 양손과 양발 끝에 기를 모아서 태산이 엎드린다는 심정으로 하는 인사로 4∼5분이 걸렸다. 인사하는 문하생의 무릎과 발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자체가 엄청난 수련으로 보였다. 저절로 단전에 에너지가 모아질 것 같았다. 박 문주는 이것이 바로 단배공이라고 말했다.
조선시대부터 무예의 전통 단절
-단군 이래로 기천이 전해져왔다는 또 다른 근거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납니다. 벽화에 수렵도가 있어요. 말을 타고 활을 겨누면서 사냥하는 모습이죠. 그 반대편에 보통 ‘수박도’라고 부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남자가 웃통을 벗고 두 손을 들어 상대방과 겨루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자세가 기천에서 연습하는 자세 중 하나입니다. 이 한 장면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기천에서는 이 자세를 ‘범도자세(虎勢)’라고 불러요. 범이 웅크리고 있는 자세로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습니다. 저희도 이 자세를 많이 연습합니다. 그런데 그 자세가 벽화에 나와 있는 겁니다. 기천을 모르는 사람은 벽화를 보아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천을 아는 사람은 대번에 그 의미를 알아차리죠.
이걸로 보아 기천은 고구려 시대에도 행해졌던 겁니다. 한쪽에는 수렵도, 다른 한쪽에는 범도자세가 그려져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바로 고구려 남자들의 상무정신(尙武精神)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고구려 시대를 대표하는 놀이가 ‘수렵’과 ‘기천’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수렵이 일종의 군사훈련이었다면 기천은 개인 차원의 무술연마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기천 동작 하나하나는 바로 전쟁터에 투입될 수 있어요. 칼을 잡으면 곧바로 검법이 됩니다. 고구려 남자들이 평소 이러한 연마를 했기에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군사강국 고구려를 지탱했던 이면에는 기천이 있었다는 거죠. 기천을 맨손으로 하면 권법(拳法)이요, 봉(棒)을 들고 하면 봉술이 되고, 검을 들면 검법(劍法)이요, 활을 들면 궁술(弓術)이 되고, 창(槍)을 들면 창법(槍法)이 됩니다.
기천문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의선인(早衣仙人)에 관한 것입니다. 고구려 선맥(仙脈)에 조의선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조의(早衣)는 검은 옷을 뜻합니다. 즉 검은 옷을 입은 선인이라는 뜻이죠. 고구려의 조의선인들은 국난을 당하면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지켰습니다. 당 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조의선인 3만명이 이들과 맞써 싸워 이겼습니다. 그런데 기천의 역대 스승들도 검은 옷을 입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천에서는 이들 조의선인을 기천을 수행했던 사람들로 추정합니다.
또 하나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연개소문은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부터 집을 나와 전국 각지의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기천을 수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천의 수련단계 중 ‘상박권(上膊拳)’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호랑이가 공격을 하기 위해 엎드려 있다가 솟구치는 자세입니다. 솟구치면서 상대의 윗부분, 즉 관자놀이나 턱을 강타할 수 있는데 그 파괴력이 엄청납니다. 상박권은 기천에서도 고급과정에 속하는 자세로 배우기 힘들기로 유명합니다. 연개소문은 상박권을 연마하다가 중도에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연개소문은 하산한 후 중국의 무술 고수들과 겨뤘지만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나라 태종의 팔대장군(八大將軍)을 기천의 무학(武學)으로 제압했을 뿐 아니라 중국 무림을 평정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연개소문은 정치인이기에 앞서 중국 무림세계에도 널리 알려진 무술의 고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더라도 기천은 고구려 시대에도 존재했던 무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를 볼까요. 고려 공민왕릉 석상의 옷매무새를 보면 양쪽 허리춤 부분에 매듭이 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기천의 입장에서 이 매듭을 주목합니다. 기천에서도 양쪽 허리춤에 매듭을 합니다. 저를 가르친 박대양 사부님도 양쪽 허리춤에 매듭을 짓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대양 사부님이 어렸을 적 설악산에서 공부할 때에도 조사부(祖師父)인 원혜상인이 반드시 양쪽 허리춤에다 매듭을 짓도록 지도했다고 합니다. 이 매듭은 기천 옷매무새의 관습입니다. 저는 그 전통을 공민왕릉 석상 매무새에서 발견했습니다. 고려시대까지도 기천으로 상징되는 상무정신이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시대입니다. 암흑시대죠. 조선시대에 들어와 무예의 전통이 거의 끊어져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금만 특수한 능력이 있어도 탄압을 했습니다. 문(文)을 숭상하면서 무인을 천대하고 억압했죠. 그래서 전통 무술은 깊은 산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깊은 산 속에서 간신히 그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이처럼 실날같이 이어져 오던 맥이 20세기 후반에 들어 수면 위로 나온 것입니다. 기천이 이렇게 세상에 등장한 것은 실로 수백년 만의 일입니다. 저로서는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박 문주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기천은 고구려의 상무적 전통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조선을 거쳐 고구려로 이어진 정신의 정수를 계승하고 있다고 할까.
고구려 정신의 핵심은 민족의 주체성이다. 그것이 많이 남아 있는 도맥이 바로 선가(仙家)다. 필자는 유·불·선 삼교 가운데 민족의 주체를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한다.
선가는 고구려와 많이 겹친다. 기천은 고구려와 선가의 유산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단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원혜상인과 1대 문주 박대양
박 문주의 이야기와 ‘기천’이란 책을 참고해 기천이 이어져 온 도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 박사규 문주의 사부는 박대양(朴大洋 : 1952∼현재) 진인이다. 박대양은 기천문의 1대 문주이다. 박대양이 기천에 입문해 현재까지 살아온 과정은 한편의 대하소설이다.
박대양은 강원도 양양 사람이다. 다섯 살이 되던 해 겨울, 양양의 설악산 계곡에서 얼음을 치고 놀다가 얼음이 깨져 계곡에 빠졌다고 한다. 이때 지나가던 노인이 그를 살려줬고 이 일을 계기로 노인과 어린 박대양은 인연을 맺게 됐다.
노인은 설악산 밑에 있는 암자인 보광암에 기거하고 있었다. 어린 박대양은 보광암에 자주 놀러갔다. 할아버지가 사탕도 주고 무동도 태워주면서 예뻐했기 때문이다.
보광암에는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스님이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스님이 노인을 보고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어린 박대양은 “스님도 할아버지인데 왜 저 할아버지를 보고 할아버지라고 부르느냐?”고 물었다. 스님 왈 “내가 어렸을 때도 저분은 할아버지였고 지금도 할아버지다”라고 답변했다. 이 노인이 바로 기천문의 지킴이였던 원혜상인(元慧上人)이다. 상인은 기천의 최고수를 일컫는 호칭이다.
1957년 원혜상인은 박대양의 어머니에게 승낙을 받고 아이를 설악산으로 데려갔다. 원혜상인은 박대양을 등에 업은 다음 눈을 감게 했다. 그는 경공술을 써서 거의 날아갔다고 한다. 바람소리가 휙휙 들리고 산이 휙휙 지나갔다. 눈을 떠보니 어딘지 모르는 깊은 산속이었다. 후일 설악산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날부터 혹독한 산중 수련이 시작됐다.
처음 3년간은 내가신장(內家神掌)만 했다. 선 채로 양쪽 무릎을 오무려 맞대고 두 손은 눈 높이에서 교차한 자세로 서 있는 자세다. 이렇게 서 있으면 단전으로 모든 기운이 모인다. 대단히 힘든 자세로 보통 사람은 5분 이상 버티기 힘들다. 필자도 해봤지만 바들바들 떨려서 도저히 5분을 넘기지 못했다. 박대양은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오직 이 자세만 취하는 훈련을 받았다.
식사는 거의 생식이었다. 어떤 때는 산짐승의 고기로 만든 육포조각을 먹기도 했다. 가끔 원혜상인이 마을에서 쌀 한 가마니를 가지고 왔는데, 마치 한 손으로 접시를 들 듯 가볍게 들고 단숨에 산을 올라왔다. 평상시 거처는 자연동굴이었다. 동굴 앞에는 대나무 발이 쳐있었다. 그런데 원혜상인은 동굴을 드나들 때 동굴 입구의 발을 건드리지 않았다. 너무 빨라서 발을 들어올리는 것을 못 본 것인지, 아니면 발의 틈새 사이로 연기처럼 빠져나간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큰 나무 한 그루를 ‘솔장법’으로 치면 벼락에 맞은 듯 재가 됐고 쌀 한 가마니 정도는 공깃돌 들 듯 가볍게 다뤘다. 또한 ‘돌단장’으로 집채만한 바위를 축구공 차듯 발로 차버릴 수 있었다. 또한 축지법을 구사했으며 수십 미터 높이의 절벽을 마음대로 뛰어내리고 올라가는 경공법도 구사했다. 저녁 무렵 설악산을 출발해 경북 봉화까지 다녀오곤 했는데 다음날 새벽에 설악산에 돌아오는 일이 예사였다. 물론 걸어서 다녔다.
‘진법’을 펼치기도 했다. 박대양이 수련도중에 하도 힘이 들어서 도망치려고 몇 번 시도했다. 하루종일 도망쳐도 처음 수련하던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진법’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원혜상인은 동네 할아버지처럼 평범했고 키도 170cm를 넘지 않았지만 힘은 장사였다.
박대양은 5세 때 입산하여 19세 때까지 설악산에서 기천을 연마했다. 엄청난 고행의 과정이었다. 스승이 시키니까 무조건 한 것이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속가에 있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진 박대양은 어머니를 보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원혜상인은 “네가 3년만 더 공부한 후 어머니를 만나면 어떻겠냐”고 제자를 달랬지만, 박대양은 산을 내려가겠다고 계속 떼를 썼다. 1970년 박대양은 나머지 3년 공부를 끝내지 못하고 하산했다. 당시 원혜상인의 나이는 159세였다고 한다. 그가 하산한 지 3년 후 원혜상인은 세상을 떠났다.
모래사장에 발자국 남기지 않아
산속에서 기천만 공부한 박대양은 사바세계에서 온갖 풍파를 겪는다. 1972년 계엄령이 선포됐을 때 계룡산에 있던 박대양은 간첩으로 체포된다. 호적이 없어 신분을 확인할 길이 없었던 것. 영락없이 간첩으로 몰릴 판이었는데, 산을 내려올 때 문득 스승님이 당부하던 말씀이 생각났다. “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탄허(呑虛) 스님을 찾아라. 그러면 도와줄 것이다.”
간신히 연락이 닿은 탄허 스님이 신원보증을 해줘 경찰서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강원도 설악산과 오대산 일대의 불교계 고승들은 원혜상인의 도력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탄허 스님이 원혜상인을 만날 때는 삼배를 올렸다. 두 사람은 가끔 만나 이런저런 도담을 나누는 사이였던 것 같다.
무술은 절정의 고수였지만 사회 경험이 전혀 없었던 박대양은 속세에 내려와 좌충우돌한다. 1970년대 중반 부산에서의 일이다. 당시 부산에는 칠성파라 불리는 조폭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은 박대양을 한번 손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맞짱을 뜨기로 했다. 박대양이 해운대 백사장에 가보니 칠성파 멤버 14∼15명이 각목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박대양은 바람처럼 빠르게 그들을 때려 눕혔다. 어찌나 빠른지 주먹과 발이 어디서 나오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싸움이 끝나갈 무렵 박대양은 모래사장을 빠져나갔는데,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칠성파가 놀란 것은 열댓 명이 한 사람에게 패했다는 것보다 그가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발자국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훗날 부산지역에 ‘늑대소년’이 나타났다는 괴담이 떠돌기도 했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것은 어떤 비법일까. 일종의 비보법(飛步法)이다. 칠성보(七星步)를 보여준 것으로, 후일 박대양은 7명의 제자를 일렬로 세우고 머리 위를 밟고 지나갔지만 제자들은 낙엽이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 것으로 느꼈다고 한다. 이것이 칠성보인데 해운대 백사장에서 칠성파는 그 칠성보에 놀란 셈이다.
박 문주의 방에는 조그마한 단군 영정이 놓여있는 앉은뱅이책상과 고목나무 밑둥을 다듬어 만든 차상이 하나 있었다. 문파의 문주가 기거하는 처소라기엔 너무도 소박하다.
박대양은 1970년대부터 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국내의 내로라하는 무술 고수들과 무수한 실전대결을 펼쳤는데, 밀려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속세가 싫어져 다시 산에 들어가 7년 동안 스님생활을 하기도 했다.
1대 문주 박대양은 1996년 제자인 박사규에게 문주의 자리를 넘겼다. 박대양은 지금은 결혼해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다. 박사규가 스승인 박대양을 만나게 된 사연도 매우 흥미롭다. 박사규는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진도는 예향인 호남에서도 알아주는 예향의 본거지다. ‘진도에서는 개도 붓을 물고 다닌다’ ‘진도 남자 중에서 북 장단과 판소리 못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
진도에서 성장한 박사규는 예인적인 기질이 있으면서도 무술을 좋아했다. 10대 후반부터 합기도를 시작해 합기도 공인 5단에 이르렀다. 1970년대 후반 장충체육관에 전국 합기도 고단자 30인이 초청되어 시범을 보인 적이 있었는데, 박사규도 30인 안에 들었을 정도로 고단자였다. 그러다가 무술의 고수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바로 박대양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당시 고단자가 있으면 찾아가서 한판 붙는 것이 유행이었다.
세 살 어린 박대양 스승으로 모셔
박대양이 있는 서울 약수동에 찾아갔다. 1977년 박사규의 나이 29세 때의 일이다. 합기도 고단자라는 자존심을 가지고 한판 붙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박대양의 한 수도 제대로 받아낼 수 없었다. 박대양이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렸지만 무릎을 꿇고 스승으로 모시기로 했다. 3년 동안 박대양을 직접 모시면서 혹독한 수련을 감당했다. 박대양 사부는 기벽(奇癖)이 있어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했는데, 박사규는 스승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드디어 1997년 그의 나이 49세 때 세속생활을 정리하고 계룡산에 들어왔다. 문주라는 법통을 이어받은 지 1년만이었다.
요즘 박 문주는 전통 춤사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기천의 동작 하나하나가 전통 춤동작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통 춤 동작이 3박자인데, 기천의 동작들도 3박자다. 3박자로 이뤄진 국악의 리듬에 맞춰 기천의 동작을 펼치면 그 자체가 바로 춤이 된다.
박 문주는 진도 출신의 ‘씻김굿 무형문화재’인 박병천(72)씨의 무가(巫歌) 녹음테이프를 수시로 듣는다. 박병천은 진도에서 8대째 내려오는 세습무(世襲巫)로 진도 씻김굿과 진도북춤을 이어받은 명인. 그는 박병천의 가락을 들으면 흡사 기천의 동작들을 위한 장단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가장 천대받았던 무속인들이 상고시대부터 내려오는 민족의 리듬과 가락을 보존해 왔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고심 끝에 박 문주는 ‘무예와 춤은 동전의 양면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도(武道)는 예도(藝道)로 통하고 예도는 무도로 통한다. 따라서 무도와 예도는 한 마음에서 갈라져 나온 오누이인 것이다. 그 한 마음은 기천의 심법(心法)이자 단군의 심법이며 ‘천부경’과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심법이자 결국 우리 민족의 얼이다. 기천의 2대 문주 박사규는 힘주어 말한다.
“기천은 우리민족의 얼입니다. 얼이 없어지면 민족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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