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고래잡이 추억·문화공간 된 여인숙…근현대사 박물관으로 재탄생한 옛 항구

醉月 2022. 9. 18. 03:53

박경일 기자의 여행 - 압축성장의 시간 켜켜이 쌓인 울산 2

흥망성쇠 반복한 방어진
방어 등 잘잡혀 일제때 급성장
해방뒤 몰락 ‘亡어진’ 불리기도
옛가옥 개조, 작년 박물관 개관

포경 전진기지였던 장생포
고래마을·모노레일 조성하고
선원묶던 숙소, 아트스테이로
문화창고 북카페 전망 압권

도심 랜드마크 된 대관람차
느리게 한바퀴…‘20분의 낭만’
화려한 번화가 풍경이 한눈에
21년째 운영… 복고정서 소환


울산=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 일제강점기 번영을 이룬 곳…방어진
울산의 근대 중심이라면 중구와 함께 울산 동구가 꼽힌다. 중구가 일제강점기 이래 상업의 중심이었다면, 동구는 방어진으로 대표되는 어업의 중심이었다. 고즈넉한 어촌마을이었던 방어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동해안 굴지의 항구로 급성장했다.

울산 ‘동면’에 속한 작은 어촌마을인 방어진은 단숨에 면 소재지가 되더니, 아예 지명까지 빼앗아 ‘방어진면’으로 개명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읍(邑)’으로 지위가 격상했다.

내륙의 남목동에 있던 면사무소가 방어진으로 옮겨간 것이 1925년, 동면이 ‘방어진면’으로 이름을 바꾼 건 1931년, 방어진면이 ‘방어진읍’으로 승격한 건 1937년의 일이었다. 방어진은 6년 주기로 덩치를 키웠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서른 가구 남짓의 고즈넉한 어촌마을이 한창 성어기에 주변 인구가 3만여 명을 헤아리는 항구가 됐으니 가히 멀미가 날 정도의 속도였다.

일제강점기에 방어진이 급속도로 성장했던 건 일본인들이 좋아했던 방어와 삼치, 고등어가 잘 잡혔기 때문이었다. 방어진이란 지명도 물고기 ‘방어(방魚)’가 잘 잡혀서 붙여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게다가 방어진은 일본이나 부산과도 가까웠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어부의 증가, 조업기술의 발달, 어장 황폐화 문제에 직면한 일본 정부는 자국 어민들의 국외 출어를 장려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 어민들이 방어진에 속속 정착한 이유다. 대부분 일본 오카야마(岡山)현과 가가와(香川)현에서 온 어민들이었다.

일제강점기 방어진에는 한국인보다 일본인 수가 오히려 더 많았다. 1915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방어진 인구는 446가구에 2076명이었는데, 그중 287가구 1413명이 일본인이었다. 방어진 전체 인구의 68%가 일본인이었던 셈이다. 한국인은 157가구에 661명으로 일본인 숫자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인근 바다에 고등어와 참치떼가 나타날 때면 일본에서 건너온 어선들까지 합세해 방어진항에는 1300∼1400여 척의 배가 몰려들었다.


# 주민이 만든 박물관에서 역사를 보다
내내 변방의 항구 방어진은 일제강점기에 도시의 중심인 울산읍에 견줘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다. 방어진에 일찌감치 터를 잡은 일본인들 때문이었다. 방어진에는 일본인회가 만들어지고, 그들에 의해 우편소 설치, 해안도로 축조, 하수도 정리 등이 이뤄졌다. 방어진이 내세우고 있는 도시재생의 가장 큰 ‘인문적 자산’은 바로 그때 그 시절이다.

울산에서 전기생산과 공급이 처음 이뤄진 곳이 방어진이었다. 1922년 울산전기주식회사가 설립됐고, 이듬해인 1923년 5월 전기가 공급돼 전등이 켜졌다. 그 무렵 방어진에는 20곳이 넘는 요릿집과 여관이 성업했고 유곽에서 일하는 여성이 500명이 넘었다. 부산과 원산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이미 1910년대 초에 울산 최초의 극장인 ‘대정관(大正館·다이쇼칸)’이 세워졌고, 이곳이 문을 닫은 뒤 지금의 리젠파크 아파트 자리에 상설극장 ‘상반관(常盤館·도키와칸)’이 들어섰다. 이 극장에서 나운규의 ‘아리랑’ ‘임자 없는 나룻배’ 등의 영화가 상영됐다.

그 시절 모습을 지역 주민들의 손에서 탄생한 방어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박물관은 2016년부터 진행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 4월 개관했다. 마을 골목 안쪽에 있는 박물관은 두 개 동으로 이뤄져 있다. 일제강점기 지어진 옛 가옥 두 채 중 건축적 가치가 없는 한 채는 허물어 다시 짓고, 다른 한 채는 뼈대와 구조를 그대로 두고 일부를 개조해 박물관으로 문을 연 것이다.

박물관의 지역 주민 마을해설사 중에 뜻밖에 일본인 해설사가 있다.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방어진에 정착했다는 일본인 사카시타 사나에 씨다. 도시재생 현장지원센터에서 마을활동가로 5년 넘게 일해온 그는 일제강점기 방어진의 역사를 손금 들여다보듯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박물관에서 눈길을 붙잡은 건 ‘조선여행안내기’라는 책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여행 책인데 철도 노선별로 주요역 주변의 관광지를 다뤘다. 동해중부선 경주∼울산 구간의 울산역 편에서는 울산 왜성과 방어진 두 곳을 소개했다. 그 무렵 울산을 대표하는 관광명소가 이 두 곳이었다는 얘기다.


# 디자인과 조명으로 복원한 과거
방어진 박물관 1관과 2관 사이 골목에 딱 붙어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울산 최초 대중목욕탕 ‘장수탕’이 있다. 1915년 방어진에 설립된 수산회사 하야시카네의 직원 전용목욕탕으로 처음 문을 연 곳이다. 해방 이후 목욕탕 소유권을 인수한 이가 ‘장수탕’으로 이름을 바꾼 뒤 주인이 한 번도 바뀌지 않고, 대를 이어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아쉬운 건 목조로 마감한 외벽을 붉은 벽돌로 쌓아 세월의 자취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남탕은 손님이 없어 진작 영업을 중단했고, 여탕만 운영해 보지는 못했지만 목욕탕 내부는 예전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목욕탕 뒤의 높고 거대한 굴뚝도 당시의 목욕탕 규모를 짐작게 한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어선과 어로 도구를 챙겨 철수하는 통에 방어진은 그야말로 추락의 길을 걷는다. 급작스러운 몰락으로 한때 방어진은 ‘망어진(亡魚津)’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울산이 공업 도시로 성장하며 1973년 방어진에 현대중공업이 들어서면서 방어진은 다시 번영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고 보면 일제강점기 방어진의 번성도, 해방 이후 급격한 몰락도, 조선산업의 유치도 모두 다 ‘외부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방어진에서 목격하는 건 지난 100년 동안 이 포구를 지나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다.

방어진에는 남겨진 근대의 자취가 희미하다. 적산가옥이 드문드문 있긴 하지만, 원형이 훼손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남았나 싶은 게 딱 하나 있다. 포구 뒷골목의 붉은 벽돌담에 있는 옛 전당포 창구의 흔적이다. 나무 창살을 가운데 두고 담 이쪽과 저쪽에서 저당 잡힐 물건과 돈을 주고받았으리라. 창구 위쪽 담벼락에는 등불을 걸었던 자리까지 있다.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이 별로 없으니 방어진 도시재생사업은 ‘디자인’으로 방향을 잡았다. 둥근 포구를 둘러싼 상점가의 뒷골목 건축물 입면 디자인을 간판과 차양 등을 이용해 개선하고, 야간 조명으로 거리마다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골목을 단장했다.

목재와 개량형 기와, 창호문살 문양 스티커 등으로 상점을 장식한 ‘옛 시가지 재현 거리’가 있고, 동양적 건축물의 외관을 조명으로 표현한 ‘동양의 거리’, 서양이 대표건축물을 외벽 조명으로 그려낸 ‘서양의 거리’도 있다. 공간의 깊이가 없고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조명이 켜지는 저녁 시간에는 제법 분위기가 그럴듯하다.

# 공업도시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
국가공단 설립과 시 승격으로 울산 상업의 중심은 중구에서 남구로 넘어갔다. 이동의 속도는 압축성장의 속도만큼 빨랐다. 1980년대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남구를 살리자’는 구호가, 불과 10여 년 만에 ‘쇠락해가는 중구 상권을 살리자’는 구호로 바뀌었을 정도니까.

울산은 지난 1962년 공업지구로 선정된 이후 60년 동안 그야말로 숨 가쁘게 달려왔다. 시 승격 당시 인구 8만 명을 겨우 넘긴 작은 신흥도시는, 이제 인구 100만 명이 넘는 광역시가 됐다. 공업화와 도시화가 압축적으로 이뤄지는 과정에서 공업지대와 상업지대를 두루 가진 남구가 명실상부한 울산의 중심이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울산 남구는 장생포와 도심 번화가 두 곳으로 나뉜다. 장생포는 공업 도시 울산의 출발지이자 고래잡이의 추억을 간직한 어촌이고, 도심지역은 고층빌딩과 호텔, 쇼핑센터, 식당가와 트렌디한 카페들이 늘어선 울산 최고의 번화가다. 고래잡이의 근대와 압축 성장기의 추억, 그리고 휘황한 대도시의 분주함까지, 남구가 두루 다 가진 셈이다.

먼저 장생포 얘기부터. 1962년 2월 3일, 울산의 미래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신호탄이었던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이 장생포 인근 남구 매암동 납도 마을에서 열렸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출범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정권 주체였던 시절이었다. 울산 공업센터 기공은 대한민국의 경제 기적 신화의 첫 줄이었다. 그 첫 줄이 이곳 남구에서 쓰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 역사적 현장이 아무런 표식도, 기념식도 없이 공장 부지에 편입되고 말았다. 30년이 지난 1992년에야 한국엔지니어링플라스틱(KEP)과 현재 효성그룹인 동양나일론이 기공식 현장에 자그마한 ‘한국공업입국 출발지 기념비’를 세웠다.

출입이 불가능한 공단 내 민간기업의 공장 안에 있던 기념비는 기공식 60주년을 앞둔 지난해 냉동창고를 리모델링해 만든 장생포 문화창고 2층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이제야 뜨거운 격문과도 같은 기념비의 문장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념관에는 기념비와 함께 울산의 공업 역사를 담은 다양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이곳의 가치는 ‘내용’보다 ‘의미’에 있다. 뒤늦게 세워진 비석이지만, 이 작은 비석은 공업 도시 울산의 시작을 상징한다. 비석이 기리는 건 ‘자리’다. 그렇다면 비록 접근이 어렵더라도 제자리에 두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 폐업한 여인숙이 문화공간으로
장생포 문화창고에는 기념관과 함께 갤러리와 푸드코트, 소극장 등이 있다. 그중 돋보이는 곳이 6층 북카페 ‘지관서가(止觀書架)’다. 통유리창으로 펼쳐지는 바다 너머로 물드는 노을이 속된 말로 ‘끝내주는’ 곳이다. 북카페만으로도 장생포 문화창고는 충분히 가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SK의 사회공헌사업으로 조성된 북카페 지관서가는 장생포점을 포함해 남구에만 세 곳이 있다. 분위기만 좋은 게 아니라 서울대 인문 확산센터와 인문 360이 산업수도 울산을 특성을 살려 ‘일’을 테마로 비치해놓은 책들도 흥미로워서 자연스럽게 손이 간다.

장생포 문화창고 인근의 ‘아트스테이’도 놓칠 수 없는 곳이다. 아트스테이는 1972년 공장 경비원 숙소로 지어졌다가 50년 넘게 여인숙으로 운영됐던 곳이다. 신진여인숙이 폐업한 뒤 10여 년간 방치된 폐가를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며 예술적 감각을 발휘해 청년 입주작가의 예술활동공간 겸 근사한 복합 커뮤니티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아트스테이에서는 커피도 팔고,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작품 전시도 한다.

신진여인숙은 장생포에 정박한 고래잡이배 선원들이 단골손님이었다. 아트스테이 한쪽에다 그 시절의 여인숙 방의 모습을 재현해놨다. 낡은 ‘호마이카’상 위에 소주병과 술잔, 유엔 팔각성냥이 놓여 있고, 자개장 위에는 브라운관 TV와 비디오테이프가 쌓여 있다. 벽에는 당시 대한숙박업 울산시지부의 ‘숙박요금표’를 걸었다. 갑급은 1박에 5000원, 을급은 4000원, 병급은 3400원이다. 여인숙 요금은 2700원이었다.

# 생계였던 고래, 추억이 되다
장생포는 지난 2008년 지정된 ‘고래문화특구’다. 고래를 테마로 관광 자원화하는 지역이란 얘기다. 1899년 러시아의 포경 전진기지가 설치된 이후 상업포경이 금지된 1986년까지 장생포의 경제는 고래로 지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경선을 타고 고래떼를 쫓던 시절에 장생포에서의 삶이 고래와 뗄 수 없었듯, 지금도 장생포의 경제는 고래로 굴러간다. 그때의 고래가 생계였다면, 지금의 고래는 추억이자 관광상품이다.

장생포에는 고래박물관과 고래생태체험관이 있고, 고래바다여행선이 출항한다. 마을 언덕 위에는 고래문화마을이 있다.

고래문화마을에는 장생포의 옛 마을을 재현해놨다. 이곳에서 고래빵도, 기념품도 판다. 언덕 정상에는 고래 조각을 실물 크기로 조성해놓은 공원이 있고, 5D 영상관도 있다. 모노레일이 고래문화마을까지 관광객을 실어나른다.

고래가 주인공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인기 덕에 장생포를 찾는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고래의 인기에 밀려 찾는 이들이 거의 없지만, 장생포 번개골에는 가수 윤수일의 생가가 있고, 장생포 고래빵집 뒤쪽에는 일제강점기 악명높았던 친일경찰 노덕술 생가가 있다.

해방 후 국회의원까지 출마했다가 낙선한 노덕술은 1968년 서울대병원에서 사망했는데, 사망 당시 주소지가 ‘서울 종로구 궁정동 22번지’였다. 훗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궁정동 안가’ 바로 그곳이었다.

# 남구의 대관람차가 상징하는 것.
울산 남구는 울산에서 가장 번화한 상권의 중심이다. 호텔이 있고, 극장이 있고, 쇼핑몰과 백화점이 몰려 있다. 이름난 맛집들이 늘어선 먹거리 골목이 곳곳에 있고, 문화와 디자인을 앞세운 세련된 거리도 있다.

저마다 개성 있는 카페들이 가득 늘어선 ‘공리단길’이라 불리는 거리도 있다. 짐작하다시피 서울 경리단길에 빗대 붙인 이름이다. 남구의 도심이야말로 공업 도시 울산이 압축성장을 통해 쌓아온 경제적 과실이 드러나는 소비의 공간이라 할 만하다.

가장 번화한 남구 중심에 있는 ‘대관람차’는 그걸 상징하는 듯하다. 롯데영플라자 7층 옥상에 들어선 대관람차는 2001년 8월 운영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21년째다. 지난해 11월에 개점 20주년 리뉴얼을 마치고 새로 운영을 시작하면서 이름을 ‘롯데 그랜드휠’로 바꿨지만, 주민들에게 이곳은 여전히 ‘울산 대관람차’다.

대관람차가 환기하는 건 복고의 정서다. 아무리 새로 만든 것이라 해도 대관람차는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새로운(NEW)’ ‘복고(RETRO)’. 즉 ‘뉴트로’라는 얘기다. ‘새로운 오래된 것’은 과거를 소환한다.

울산의 대관람차는 왜 과거를 소환하는 것일까. 도시의 미래에 대한 꿈과 기대로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매진하던 시대를 건너와서, 이제 비로소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돌아보는 때가 됐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지금의 삶이 어렵고 팍팍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과거 좋았던 시절의 추억을 되새김하는 것으로 고단한 현실을 잊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대관람차는 느리다. 비명과 공포의 롤러코스터의 스릴이나 속도감과는 결이 다르다. 롯데 그랜드휠에는 4인승 캐빈 42대가 매달려 있는데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분이다.

대관람차의 느린 속도는 타고 있는 사람이나, 보고 있는 사람을 편하게 한다. 그랜드휠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롯데호텔이다. 롯데호텔 울산에는 ‘그랜드휠 뷰’ 룸이 있다. 울산 여행의 가장 낭만적인 순간은 롯데호텔 고층객실에서 해 질 무렵이나 어둠이 내린 뒤 창밖으로 야간조명이 켜진 대관람차를 내려다보는 장면이 아닐까.

울산의 번화한 도심을 여행하는 법은 여느 대도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달동의 먹자골목도 좋고, 왕생로 40번지 일대의 왕생먹거리마실도 나무랄 데 없다. 현대백화점과 롯데백화점 사이의 보행자 중심 거리인 삼산동 문화의 거리는 울산 최대의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곳이다. 다양한 프랜차이즈 가게와 특색 있는 카페들이 즐비하다.

마지막으로 한 곳 더. 울산에 전국적으로 이름난 로또 명당이 있다. 달동 삼성아파트 인근 복권판매점 ‘영화유통’이다. 이곳에서 1등 당첨자가 10번, 2등 당첨자가 자그마치 53번이 나왔단다. 즉석복권 20억 원과 5억 원 당첨자도 나왔다고 했다. 이런 얘기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더라도, 복권판매점이 써 붙인 ‘2022년 6월 25일 추첨. 당첨금 7500만 원’이란 53번째 2등 당첨 축하문구를 보면 슬며시 기대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 신화마을의 옛 풍경
공단도시 건설로 도시 전체가 송두리째 바뀐 울산 남구에서 가장 오래된 풍경의 시대는 ‘1960년대’다. 그 시절 풍경이 남구 야음동 신화마을에 있다. 신화마을은 1960년대 미포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만든 공단이주민촌. 야음동에는 공업 도시 개발 초기사택도 곳곳에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이 한국석유공업 사택이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파견 직원이 사택 접근은 물론이고 먼발치에서의 사진 촬영마저 거칠게 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