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숲의 유혹
한반도 허파, 녹색 낙원
숨을 힘껏 들이마신 뒤 10초간 멈춘다. 아랫배에 ‘꽉’ 힘을 주고 있다가 천천히 입으로 ‘후’ 내쉰다.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금세 맑아진다. 우리는 산소 없이 단 1분도 버틸 수 없지만 그 소중함을 잊고 지내기 일쑤다. 무한정 산소가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산소는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나무들이 이산화탄소를 들이마시고 산소를 내뿜는 광합성 작용을 하기에 우리가 마음껏 산소를 마실 수 있다.
각종 나무와 꽃, 야생초가 어우러진 숲은 그래서 중요하다. 숲 1ha는 40명이 1년 동안 숨 쉴 수 있는 12t의 산소를 만들고, 나무 자신들은 16t의 이산화탄소를 들이마셔 스스로 몸체를 키워간다. 숲을 ‘지구의 허파’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산소의 3분의 1을 공급하는 ‘세계의 허파’ 아마존이 있다면, 강원도는 ‘한반도의 허파’에 비견된다. 강원도는 전체 면적의 82%가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숲은 대한민국 전체 산림의 21%를 차지한다(137만ha).
강원도의 숲길을 거니는 것만으로 맑은 공기를 듬뿍 마시며 도시에서 찌든 몸과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다. 아름다운 풍경, 벌레 소리, 나무 감촉, 꽃향기 그리고 미각을 자극하는 나무 열매까지….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를 맡으며 숲의 아름다움을 오감으로 느낀다. 이것마저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면 잠시 눈을 감고 마음으로 느껴보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샘솟듯 생겨난다. 이를 두고 혹자는 마음으로 느끼는 것까지 포함해 육감으로 느껴야 진정한 숲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떤 방식이든 좋다. 스스로 느끼는 그대로가 진정한 숲의 아름다움이다. 숲길을 걷는 데 따로 준비할 것은 없다. 단단히 동여맨 운동화 하나면 충분하다. 함께 걸을 지기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혼자여도 결코 외롭지 않다. 숲으로 들어와 나무와 풀벌레처럼 자연과 식구가 되면 마주하는 모든 것이 내 친구가 된다.
태양이 지글거리는 한여름, 바다와 강 그리고 숲이 어우러진 강원도는 최고의 피서지다. 햇볕 한 줌 비집고 들어올 수 없는 시원한 숲길 곳곳에 밴 옛 선조들의 자취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나를 부르는 강원도 숲의 손짓에 벌써부터 엉덩이가 들썩들썩 들먹거린다. 지금이야말로 떠나야 할 때다.
우리는 왜 숲길을 걷는가?…마음의 주름 펴는 걷기 예찬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안도현의 ‘애기똥풀’ 전문
애기똥풀을 아는가? 요즘 산과 들에 지천으로 핀 게 노란 애기똥풀이다. 서울 청계천 시냇가에도 무수히 피어 있다. 봄엔 개나리, 진달래처럼 노랑, 빨강꽃이 많다. 알싸한 꽃샘추위의 봄날에 벌, 나비를 유혹하려면 그만큼 색깔이 강렬해야 한다. 여름엔 흰 꽃이 많다. 짙푸른 숲 속에서 흰색은 쉽게 눈에 띈다. 애기똥풀은 노랗다. 달맞이꽃도 그렇다. 둘 다 하늘하늘 가녀리다. 그러고도 벌, 나비가 즐겨 찾을까? 자주 찾는다.
애기똥풀은 봄부터 늦여름까지 줄기차게 피고 진다. 주로 숲 가장자리나 강둑 같은 확 터진 곳에서 자란다. 대부분 양지바른 곳이다. 그만큼 벌, 나비들의 눈에 잘 띈다. 왜 이름이 하필 애기똥풀인가? 한번 애기똥풀 줄기를 살짝 꺾어보라. 샛노란 물이 물감 짠 듯 나온다. 꼭 갓난아이의 묽은 똥 같다. 그래서 애기똥풀이다. 그 노란 즙엔 독이 들어 있다. 소는 그걸 본능적으로 안다. 풀을 뜯을 때 애기똥풀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길을 걸어가다 보면 수많은 들꽃이 있다. 바람이 살갗을 어루만진다. 푸른 하늘에선 새물내가 난다. 숲길엔 도토리를 달고 있는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가 줄 서 있다. 바닥엔 소나무, 전나무의 바늘잎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다.
나 자신이 스스로 열리는 시간
숲은 인간의 본적이다. 숲길도 사람의 본적이다. 산길, 골목길, 논두렁길, 밭길, 고샅길, 마실길도 모든 생명의 본적이다. 비행기 여행은 점에서 점으로의 이동일 뿐이다. 기차나 버스 여행은 선을 따라가는 이동이다. 걷기는 온몸으로 느끼는 전면 여행이다. 입체 여행이다.
나는 길을 걷는다. 길을 걸으면 나 자신이 스르르 열린다. 풀잎 하나, 이슬 한 방울에도 감동한다. 산들바람이 살짝만 살갗에 스쳐도, 못나고 부끄러운 나 자신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목적지를 갖고 걸으면 틀 속에 갇힌다. 아무런 목적 없이 걸어야 자유롭다.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면의 나’가 속삭이기 시작한다. 길은 무한도량이다. 꼭 절집에서 수행할 필요는 없다. 동안거니 하안거니 요란 떨 거 하나도 없다. 숲은 늘 열려 있다. 길은 모든 사람에게 자리를 내준다. 부처는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이 숲을 보아라.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다. 나는 이 숲처럼 열려 있다. 깨달은 자는 주먹을 쥐지 않는다. 깨달은 자는 주먹이 없는 법이다.”
악수를 하면 주먹이 펴진다. 길을 걸으면 마음의 주름살이 곧게 다려진다. 밤에 논두렁길을 걸으면 하늘의 별들이 머리 위에 쏟아진다. 농사의 ‘농(農)’자가 왜 ‘별(辰)을 노래(曲)’하는 뜻을 담고 있는지 금방 깨닫는다. 길이 사람을 보살로 만든다. 저절로 부처가 되게 한다. 길을 걸으면 사나이가 된다. 바람 맞고 눈비에 젖으며 길을 걸으면 나무가 되고 산이 된다. 바람 불어 쓰러진 산 있는가? 눈비 맞아 썩은 돌 있는가?
회사 인간들 일하다 막히면 걸어라!
머리에 쥐가 날 때면 발을 움직여야 한다. 지끈지끈 머릿속이 쑤시기 시작할 땐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기’가 으뜸이다. 한 번쯤 누렁이 앞세우고 논두렁길을 걸어보라. 해질녘 아이 손잡고 서울 동네 골목길도 어슬렁거려보라. 가슴에 강 같은 평화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골목마다 구수한 된장국에 매콤한 찌개 냄새, 여기저기 개 짖는 소리, 삐~걱 대문 여닫는 소리…. 사람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렇다.
아프리카 케냐에 사는 마사이족은 하루 평균 3만 보를 걷는다. 한국인은 잘해야 하루 5000보 안팎을 걷는다.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회사원은 3000~4000보, 주부는 4500보에 그친다. 하루에 1000걸음조차 안 걷는 사람도 있다.
마사이족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맨발로 걷는다. 스님들처럼 걸음걸이가 곧고 우아하다.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 리듬을 타듯 빠르게 걷는다. 무게중심이 뒤꿈치 → 발 바깥쪽 → 새끼발가락 부근 → 엄지발가락 부근 → 엄지발가락 순으로 이동한다. 달걀이 구르듯 자연스럽고 리드미컬하다. 척추와 관절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마사이족의 척추는 일자형이다. 현대인의 S자로 굽은 것과는 다르다. 많이 걸음으로써 허리 근육이 강철 같기 때문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마사이족의 평균수명은 80~90세로 추정된다.
현대 도시인의 걸음은 대부분 발끝과 발뒤꿈치가 거의 동시에 닫는다. 발바닥 전체를 일시에 땅에 내디딘다. 그만큼 빨리 지친다. 사람 몸은 원래 부드럽고 울퉁불퉁한 땅에서 잘 걷게끔 만들어졌다. 평평하고 딱딱한 곳은 안 맞는다. 아스팔트를 걸으면 몸에 충격이 온다. 잔디밭이나 흙길이 안성맞춤이다. 걸으면 상상력의 날개가 펼쳐진다. 아이디어가 번쩍 떠오른다. 브르타뉴 출신의 작가 피에르 자케 엘리아스는 농부의 걸음걸이에 감탄했다.
“마을에서 농부는 자신의 속도, 즉 일상적인 리듬으로 움직인다. 여기저기가 움푹 팬 길, 사람들의 발길로 다져진 흙길, 초원 등을 걸을 때 그의 걸음걸이는 도시의 보도를 걷는 사람과 다르다. …도시에서 농부는 방랑자이자 구경꾼이다. 일종의 관광객인 것이다. …그의 느린 움직임, 무겁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아서 경탄을 자아내는 경제적인 움직임은 그가 일을 하면서 익힌 리듬 덕분에 생긴 것이다.”
실내에 앉아서 토론을 하면 논리가 앞서게 마련이다. 조용하고 초록으로 둘러싸인 숲길에서 토론을 하면 논리보다는 인간에 대한 정이 앞선다. 서류더미와 씨름하는 회사 인간들은 일하다가 막히면 잠깐 길거리를 걷는 게 효과적이다. 보통 2시간 일하고 20분 정도 걷는 게 알맞다. 휴식시간에 커피나 음료수를 마시며 수다 떠는 것보다 백배, 천배 낫다.
글 쓰는 사람들도 글이 막히면 메모장과 볼펜을 들고 밖으로 나가 걷는 게 좋다. 다리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뇌가 펄펄 살아난다. 뇌로 가는 에너지 공급이 활발해지고, 뇌 호르몬 분비가 왕성해진다. 스트레스 쌓일 때도 마찬가지다. 약간 먼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씻은 듯이 사라진다. 부하직원을 꾸짖을 때도 함께 나란히 걸으면서 하면 꾸지람을 듣는 사람의 화가 덜 나게 마련이다. 칭찬은 안에서 하고 질책은 밖에서 해야 하는 이유다. 누구를 설득할 때도 걸으면서 하면 잘된다.
걷기는 두 발 중 한 발이 땅에 붙어 있다. 하지만 달리기는 두 발이 모두 허공에 뜨는 순간이 있다. 걷기는 체중의 1.2~1.5배 충격을 주지만, 달리기는 3~5배 충격을 준다. 그만큼 무릎이나 허리에 부담을 준다. 걷기는 시간을 일부러 낼 필요가 없다. 고층 아파트나 회사에 다닐 때 계단으로 오르내리면 된다. 버스나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경우엔 목적지보다 한두 정거장 먼저 내려 걸으면 그만이다. 물론 걸을 땐 만보계나 심박수 측정기, 물통 같은 것이 있으면 좋다. 요즘엔 속도, 시간, 거리, 칼로리 소비량까지 표시되는 만보계도 나와 있다. 걷기를 마치면 발을 높이 들어 피를 역류해주는 게 좋다. 발바닥을 문질러주거나 엄지손가락으로 눌러주고, 발가락을 하나씩 가볍게 잡아당겨도 피로가 풀린다. 냉수와 온수를 번갈아가며 5, 6회 ‘발 목욕’을 해도 효과적이다.
“인간이 직립보행을 시작한 지 600만 년이 됐다. 태초에 발이 있었다(마빈 해리스). 발은 제2의 심장이다. 모든 걸음걸이에는 걷는 사람의 에너지와 감정이 드러난다. 신발의 닳은 모습을 보면 그 주인의 직업을 알아낼 수 있다. ‘록(rock)’음악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짐꾼, 부두 노동자, 인부 등이 짐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고 몸을 흔들며 비틀거리던 오랜 전통에서 나왔다. 그래서 걷기는 말하기다. 인간은 평생 12만km를 걷는다. 미국 인디언이나 케냐인들은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무려 160km를 달리는 경우도 있었다.”(조지프 A. 야마토의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 중에서)
숲길은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걸어야 제맛이다. 어깨의 힘을 빼고 편안한 마음으로 어슬렁거려야 한다. 한 호흡에 한 걸음씩, 슬로모션으로 발을 떼야 한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발을 뒤꿈치부터 천천히 들어 올려 앞쪽으로 옮기고, 숨을 내쉬면서 발을 역시 뒤꿈치부터 땅에 내려놓는다. 누가 보든 말든 신경 쓸 것 없다. 정 마음에 걸리면 무심하게, 가는 듯 마는 듯 달팽이처럼 걷는다. 눈부신 보름밤, 구름에 달 가듯이 숲길을 왔다갔다 서성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여태 헛살았구나!” 하며 가슴을 친다.
걷기는 한순간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근육을 써서 ‘세상의 파도’와 맞서는 것이다. 도시의 새들은 랩처럼 빠른 리듬의 노래를 부르지만, 시골 새들은 민요나 컨트리 송처럼 느린 노래를 부른다. 걷기도 그렇다. 농부들의 걸음걸이는 서두르지 않는다. 느릿느릿 진양조장단으로 걷는다. 도시인들은 총총 빠르게 걷는다. 어디론가 종종걸음으로 끊임없이 오간다.
걸어서 가면 모든 게 넓고 감각적
‘살금살금 걷다’ ‘미끄러지듯 걷다’ ‘성큼성큼 걷다’ ‘발을 질질 끌며 걷다’ ‘터벅터벅 걷다’ ‘무겁게 걷다’ ‘그냥 거닐다’ ‘활보하다’ ‘산책하다’ ‘건들건들 걷다’ ‘어슬렁거리다’ ‘배회하다’ ‘천천히 걷다’ ‘느릿느릿 걷다’ ‘어기적거리며 걷다’ ‘뒤뚱뒤뚱 걷다’….
이 세상엔 사람 수만큼 걷는 방법이 있다. 신발의 어느 쪽이 어떻게 닳았는지를 보면 그 주인의 직업을 알아낼 수 있다. 걷기는 곧 말하기인 것이다. 하지만 요즘엔 누구도 걷지 않으려 한다. 탈것을 좋아한다. 말, 마차, 기차,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 트럭, 버스, 비행기…. 지난 200여 년 동안 앉아 있는 시간, 차를 타는 시간, 차를 운전하는 시간이 계속 늘고 있다.
주택도 이젠 동선이 짧을수록 좋은 집이다. 설계할 때부터 복도, 계단, 방 등을 하나로 통합해 계단을 없애버린다. 의자, 소파, 매트리스, 침대 등의 품질은 날로 좋아진다. 사람들은 그곳에 파묻혀 꼼짝도 하려 하지 않는다. 하기야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기도 하다. 휴대전화, 팩스, 복사기, 전자우편 등이 가만히 앉아서도 온 세상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결국 지구는 이제 구두닦이, 급사, 짐꾼, 인부, 도어맨, 심부름꾼, 웨이터, 거리 청소원, 노숙자, 거지 등 하류층만 걷게 됐다.
사막을 건너는 대상도 사라졌다. ‘사막을 건너는 배’ 낙타도 동물원에서나 겨우 볼 수 있다. 이젠 탐험가들이나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넌다. 사막을 걷는다는 것은 단조롭다. 삶도 단조롭기 짝이 없다. 그래서 사막을 걷는다. 사막을 걷다 보면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부조리한지 금세 깨닫는다.
“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면 땅은 밖에 있거나 우리 아래에 있게 된다. 우편엽서에서처럼 땅은 작고 말이 없다. 어떤 소리도 냄새도 없다. 그저 그림일 뿐이다. 걸어서 가면 모든 게 넓다. 땅은 감각적으로 지각되고, 냄새를 맡게 하며, 놀랍고 경이로운 일들을 늘 숨기고 있다.”(라인홀트 메스너 ‘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 중에서)
사람은 걷다 보면 곰삭는다. 시래기처럼 풀이 죽는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 거듭난다. 넉장거리로 땅바닥에 나동그라져보면 비로소 하늘의 별이 보인다. 걷기엔 시간이 없다. 아무도 시간을 재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걸을 뿐이다. 해가 뜨면 걷고, 해가 지면 그 자리에서 잠을 잔다. 이슬과 바람 맞으며 시래기가 된다. 들꽃과 하나가 된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안도현의 ‘무식한 놈’ 전문
수타사 산소길
숲 속 가득 풍기는 향긋한 송진 냄새는 비가 와서 그런지 더욱 진하게 느껴진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폐 속까지 숲의 향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산소길은 강원도가 야심차게 조성한 걷기 전용 길이다. 강원도 전역에 70개의 걷기 구간을 만들고 있어 2018년까지 해마다 새로운 길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 중 홍천군에 자리한 ‘수타사 계곡 산소길’은 지난해 조성된 제1호 산소길이다. 묘지가 아니라 ‘숲길을 걸으면서 강원도의 맑은 산소를 마신다’는 의미에서 산소길이란 이름이 붙었다.
욕망을 덜어내 완성되는 사랑나무
산소길은 숲길 입구에서 500m가량 들어간 수타사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수타사로 향하는 짧은 길의 아름다움도 결코 산소길에 뒤지지 않는다.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입구 오른쪽의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언뜻 봐도 이상하다. 소나무의 아랫배가 V자로 패어 붉은빛 살결을 드러내놓고 있다. 손으로 문지르면 금방이라도 핏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다.
“일부로 파놓은 건가요?”
차주원 숲해설사는 “아픈 시대적 생채기가 담겨 있다”며 안타까워한다. 1940년대 초반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부족한 전쟁물자를 채우기 위해 전시 총동원 체제에 돌입했다. 숟가락, 솥 등 자원으로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수탈해 갔다. 나무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는 원유를 대체하기 위해 소나무 송진 채취에 열을 올렸다. 소나무에 칼을 들이대 깊은 상처를 낸 뒤 송진을 채취, 이를 정제해 목탄차와 공업용 연료로 사용했다. 70년 넘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때 입은 상처가 이처럼 뚜렷이 남아 있는 것이다. 상흔은 소나무의 성장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광복 후 새롭게 심은 소나무들은 곧게 자란 반면, 송진을 채취한 나무들은 구불구불 자랐다.
“송진 채취로 영양이 부족하니깐 상처가 난 쪽으로 나무줄기가 기웁니다. 그러다 균형을 잡기 위해 다시 반대 방향으로 기울고, 이게 반복되다 보니 곧게 자라지 못하고 등이 굽고 구불구불한 형태가 됐습니다.”
인간에 의해 상처를 받았지만 나무는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 이산화탄소를 마시며 인간이 숨 쉴 수 있는 산소를 내보낸다. 소나무의 아낌없는 사랑에 감사하며 소나무를 살며시 안아주자 푸르스름한 솜털이 눈에 띈다. 이끼와는 다른 지의류로 물기를 먹을수록 파란색을 띤다. 북쪽을 향해 생기기 때문에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으면 방향을 찾는 데 유용하다.
상처 가득한 소나무 뒤편으로 100년이 훨씬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로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여느 나무와는 다르다. 분명 뿌리가 다른 두 그루의 나무지만 가지가 맞닿은 채 오랜 세월 자라면서 뒤엉켜 마치 한 그루 같다. 일종의 혼인목이다. 줄기가 이어지면 연리목, 가지가 이어지면 연리지, 뿌리가 이어지면 연리근으로 불린다. 혼인목은 일명 ‘사랑나무’라고도 한다. 그들의 사랑은 서로를 위해 각자의 욕망을 덜어냄으로써 완성된다. 같거나 다른 종의 두 나무가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가 되는 사랑이다.
고즈넉한 풍경 소리의 수타사
곧바로 수타사로 향하는 큰길이 있지만, 진정한 숲의 아름다움을 맛보려면 수변 관찰로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 계곡물을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만들어놓은 보를 건너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처음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가지가 층층이 올라가는 층층나무다. 층층나무의 꽃은 특별하다. 나무 이름 그대로 꽃이 층층(層層)마다 흐드러지게 피기 때문이다. 큰 나무에 무수하게 핀 하얀 꽃을 멀리서 보면 마치 아카시나무 꽃 같다. 꽃이 아름다운 데다, 보기 좋게 층을 이루며 무수히 피는 까닭에 관상수로 인기다.
“한번 씹어보세요.”
차 해설사가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건넨다. 망설임 없이 입에 넣었다가 이내 퉤퉤 내뱉었다. 소의 태처럼 쓰다는 소태나무다. 하도 쓰고 독해 귀신도 함부로 접근을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한참이 지난 뒤에도 입 안에 쓴맛이 가득하다. 소태나무 옆으로 귀퉁나무가 살짝 고개를 들이민다. 봄철이 되면 가장 먼저 잎이 나서 유난히 빛깔이 눈부시다. 겨우내 휴식을 취한 농부들이 “놀기를 끝내고 일터로 돌아가야 할 때”를 알게 된다고 해 귀농나무로 불리던 것이 귀퉁나무로 변했다.
0.55km의 짧은 거리지만, 갖은 꽃과 나무의 아름다움에 취해 걸음을 자주 멈추다 보니 한 시간이 족히 걸린다. 바람 소리로 들릴 듯 말 듯한 풍경 소리에 서둘러 발걸음을 수타사 쪽으로 돌린다. 공작산 끝자락에 자리한 수타사는 은은한 팔각지붕이 으뜸이다. 신라 성덕왕 7년(708)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수타사는 창건 당시 우적산 일월사로 알려졌지만, 조선 세조 3년(1457) 지금의 위치로 자리를 옮겨 이후 수타사로 불리게 됐다.
수타사는 이름 그대로 아미타불의 무량한 수명을 상징하는 절이다. 영서 내륙의 대표적인 고찰답게 귀중한 문화유산도 많다. 박건환 홍천군 문화유산해설사는 “문화재로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해 조선 세조 때 편찬한 ‘월인석보’ 제17권과 18권이 수타사 사천왕상 복장유물로 발견됐다”고 말했다.
수타사 경내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또다시 숲길로 향한다. 본격적인 산소길은 여기서부터다. 노란 어리연꽃이 가득한 연밭을 지나 한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오솔길로 접어든다. 새롭게 조성된 길이지만 전혀 눈치를 못 챌 만큼 자연스러운 숲길이다. 산을 깎아 길을 평평하게, 넓힌 것이 아니라 좁은 길로 만들어놓으니 수백 년 전에 조성된 길 같다.
숲에는 화려한 꽃과 웅장한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잡초라 불리는 갖가지 야생초도 당당한 숲의 일원으로 그 역할을 담당한다. 단지 인간에게 별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잡초로 분류되고, 경우에 따라 가차 없이 제거되지만 잡초는 생태적으로 소중한 존재다. 잡초 한 종이 존재함으로써 9종의 작은 곤충이나 벌레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가 잡초로 분류해서 뽑아버리는 행위는 결국 10종류의 생명을 빼앗는 셈이다.
산소길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지그시 풀이 밟힌다. 발목까지 누인 풀은 이내 먼저 일어난다. 질경이다. 질경이는 흔히 볼 수 있는 식물로, 사람과 우마의 통행이 잦은 길이나 길 한가운데 무리 지어 자란다. 언뜻 쓸모없어 보이지만 이 풀은 인삼, 녹용 못지않은 약초이자 무기질, 단백질, 비타민, 당분 등이 많이 함유된 나물이다.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질경이
질경이는 생명력이 대단히 강하다. 얼마나 질긴 목숨이기에 이름조차 질경이라 했을까. 심한 가뭄과 뙤약볕에도 죽지 않으며, 차바퀴와 사람의 발에 짓밟힐수록 오히려 강인하게 살아난다. 질경이는 민들레처럼 뿌리에서 바로 잎이 나는 로제트 식물로, 원줄기는 없고 많은 잎이 뿌리에서 나와 옆으로 넓게 퍼진다. 6∼8월에 이삭 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서 흑갈색의 자잘한 씨앗이 10월에 익는다. 이 씨를 수레차(車) 자를 써서 차전자(車前子)라고 한다.
질경이 씨앗에는 신통력이 있어 저승에 있는 사람도 볼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에 어떤 효자가 아버지를 여의고는 몹시 슬퍼해 다시 한 번 아버지의 모습 보기를 소원했다. 그는 100일 동안 기도를 드렸는데, 마지막 날 밤 비몽사몽간에 백발 노인이 나타났다. “질경이 씨로 기름 짜서 불을 켜면 아버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노인의 말에 효자는 제사상을 차리고 질경이 기름으로 불을 켰다. 그러자 죽은 아버지가 퉁퉁 부어서 썩어가는 모습으로 나타나 제사상 머리에 앉는 게 아닌가! 아들은 기겁을 하고는 두 번 다시 죽은 아버지 보기를 원치 않았다고 한다.
“일일이 다 설명할 순 없지만 이처럼 많은 들꽃과 풀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차 해설사의 말처럼 다 같아 보이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손톱 크기의 흰색 꽃이 장구 치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가는잎장구채’, 족두리풀의 일종으로 잎과 꽃에 다 무늬가 있는 ‘무늬족두리풀’, 줄기를 자르면 노란색 유액이 나오는데 이것이 애기 똥과 같다 해서 이름 붙여진 ‘애기똥풀’ 등 다양한 들꽃이 길 곳곳을 채우며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며느리배꼽’이다. 며느리배꼽은 잎자루가 잎 뒷면 배꼽 부분에 붙어 있는 데서 이름이 유래됐다. 마치 배꼽에 피어싱을 한 듯한 모습이다. 차 해설사는 “야생화 이름에 며느리가 들어가면 고부 갈등의 사연이 있는 경우가 많다”고 전한다.
‘며느리밑씻개’가 그런 경우다. 밭일하던 며느리가 급한 김에 뒤돌아 볼일을 보고 시어머니에게 콩잎을 따달라고 하자, 시어머니가 “네가 감히 시어미에게!”라며 따준 잎이 바로 며느리밑씻개다. 며느리밑씻개는 거칠고, 줄기와 잎에 난 가시 탓에 제대로 닦기가 어렵다. 그 밖에도 며느리를 격하하는 화명은 알게 모르게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깊은 산 계곡에 함초롬히 하얀 방울을 달고 서 있는 은방울꽃은 ‘화냥년속고쟁이가랭이’라 불렀고, 금낭화는 ‘각시볼락’이라 했다.
눈의 호사는 잠시 접어두고 아랫배에 힘을 준 채 물기 머금은 공기를 흠뻑 들이마신다. 어지러웠던 머리도 이내 맑아진다. 왼쪽으로 수타 계곡을 바라보고 40~50분 걷다 보면 계곡을 건너가게끔 하는 소 반환점이 나타난다. 소는 쇠여물통을 일컫는 강원도 사투리로, 수타사 계곡의 물웅덩이가 쇠여물통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비가 온 탓에 물이 불어 물살 또한 거세다. 행여 미끄러질까봐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긴다. 계곡을 건너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신봉마을에 이르며, 반대로 걸어온 만큼 다시 내려가면 산소길의 출발점인 수타사로 돌아온다.
수타사 계곡 산소길은 맑은 산소를 가득 마실 수 있는 데다 각종 야생초와 나무를 볼 수 있어 숲길로 최고다. 천년사찰 수타사의 고즈넉함은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도시의 매연과 사람에 지친 이라면 수타사 계곡 산소길에서 재충전해보길 권한다.
Tip.
☞ 교통편
승용차 서울을 기점으로 올림픽대로 강일IC·춘천 방면→서울춘천고속도로 춘천·화도·덕소삼패 방면→서울춘천고속도로 조양IC에서 홍천 방향으로 중앙고속도로 진입→중앙고속도로 홍천IC에서 속초·홍천 방면으로 좌측 방향→44번 연봉삼거리에서 수타사·속초·인제 방면으로 우측 방향→444번 홍천·동면·수타사 방면으로 우측 방향→444번 공작산로 서석·노천 방면으로 우측 방향→수타사 방면으로 좌회전해서 10여 분 들어가면 수타사 주차장 입구. 문의 수타사 종무소(033-436-6611). 강원 홍천군 동면 덕치리9.
대중교통 상봉시외버스터미널 및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홍천행 버스 이용→홍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수타사행 시내버스나 택시 이용.
☞ 코스
주차장 입구→수타사→연밭→팔각정→소→용담→수타사 4~5km
곰배령 가는 길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곰배령. 생긴 모양이 곰이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누운 모습과 닮았다 해서 그리 이름이 지어졌을까? ‘곰무’라는 토속 농기구를 닮았다 해서 그렇게 불렸다는 설도 전해진다. 어떤 연유로 인제의 점봉산 동쪽 봉우리에 곰배령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알 수 없지만, ‘천상의 화원’이라 일컬어질 만큼 아름다운 곳이란 점은 그곳에 발 디딘 사람 모두 공감한다.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될 만큼 태곳적 자연의 신비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2009년 7월, 22년 만에 개방된 뒤 여러 언론에서 소개해 많이 알려졌지만 그곳을 찾아가기란 쉽지 않다. 하루 2번 다니는 대중교통 시간을 맞추기 어려우니 따로 차를 가져가야 하고, 기분 내킨다고 무작정 찾아갔다가는 되돌아와야 한다. 인제국유림관리소에 늦어도 하루 전에는 팩스로 신청해야만 입산이 가능한데, 일일 인원은 100명으로 제한한다. 단체 관광객도 받지 않고 입장도 정해진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1일 인원 100명으로 제한 미지의 세계
7월 2일 곰배령을 찾았다. 이틀 전 신청했는데 장마 소식 덕분에 자리에 여유가 있었다. 곰배령 초소에서 명단 확인을 거치고 노란색 조끼를 입은 뒤에야 입장이 가능하다. 길은 안내인이 인도를 한다. 따로 걷고 싶은 사람은 무리에서 빠져나와 걸어도 되지만 곰배령에 있는 수많은 야생화와 나물, 나무의 이름을 모른 채 지나가고 싶지 않다면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기자는 안내인 한순애(44) 씨의 도움을 받았다.
초소에서 곰배령에 자리 잡은 유일한 마을이자 1차 목적지인 강선마을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울창한 숲에 들어선 사람들이 좋다고 탄성을 내지르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산새들은 저마다 소리를 내며 우는데 신갈나무, 서어나무, 피나무 숲이 워낙 울창해 어디에 있는지 찾기 쉽지 않다. 숲에 가려 햇빛이 들지 않으니 숲 터널은 어둑어둑하고 안개도 자욱해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같다. 마을에 전기를 대주는 전봇대만 없다면 영화에서 보던 원시림과 구분이 안 된다. 초소에서 조금 걸으면 만나는 약수물로 목을 적시는 것이 좋다. 곰배령까지 더 이상 약수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곰배령은 기후 변화가 심한 곳이다. 영동, 영서 지방의 경계라 산 아래쪽이 맑아도 정상에 오르면 눈이나 비가 내리는 경우가 많다. 7월에는 많은 꽃이 피어 약동하는 생명력을 만끽하기 좋다. 꿩의다리, 미나리아재비, 초롱꽃, 쥐오줌풀 등 안내인의 설명에 열심히 메모하며 하나씩 특징을 구별하려 했으나 종류가 워낙 많아 쉽지 않았다. 한씨도 “안내를 하려고 공부 많이 한다”며 웃었다. 곰배령에 있는 동식물이 워낙 다양해 공부를 해도 끝이 없다.
숲길을 따라 걷는데 하얀 캔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온통 초록색 숲 속에서 만나는 캔버스가 낯설어 다가가보니 안내판이 있다. 예술가 김아타 씨의 ‘The Project-Drawing of Nature’란 작품이다. ‘인간의 간섭 없이 캔버스가 스스로 자연의 변화와 흔적을 채집하는 프로젝트’로 ‘비와 눈과 바람과 자연의 향기가 캔버스에 스며들 것’이라고 한다. 곰배령에 6월 17일 설치돼 2년 뒤에 캔버스를 걷는다고 하는데 자연이 어떤 그림을 그릴지 무척 궁금하다.
곰배령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저마다 매력이 있다. 봄에는 겨울나무 사이 양지에 핀 작고 여린 꽃이 매력적이고, 여름에는 왕성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가을에는 단풍 숲길이 절경이고 겨울에는 험하지 않아 눈 쌓인 숲길을 만끽할 수 있다. 여름 곰배령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은 폭포. 작은 폭포가 진동계곡을 따라 군데군데 있는데 청량한 물소리를 낸다. 폭포도, 계곡물도, 야생화도, 나무도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다. 그렇다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놓친 풍경은 돌아 나올 때 보면 된다.
약초와 나물 지천 ‘거대한 식량창고’
이윽고 강선마을이 보였다. 신선이 내려와 살 정도로 아름다운 마을이라 강선이란 이름이 붙었다. 강선마을 첫 집은 염기영 할아버지 부부가 산다. 할아버지가 키우는 강아지 똘똘이, 호동이가 뛰어내려와 길손을 반겼다. 사람을 좋아하는 강아지들은 탐방객들에게 다가와 쓰다듬어 달라고 난리였다. 곰배령에서 만난 동물은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강선마을에서 풀어 키운 오골계도 사람 옆을 지나고, 산짐승인 다람쥐도 가까이 다가와서 사람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멧돼지는 예외다. 곰배령 오르는 길 곳곳에 흙이 마구 파헤쳐진 멧돼지 흔적이 있지만 멧돼지가 잘 나타나지는 않는다. 어쩌면 탐방객에게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마을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이 좀 더 걸린다. 마을이 끝나는 자리에는 계곡물 옆으로 215년 된 쪽버들나무가 서 있다. 돌징검다리에 앉아 세수를 한 뒤 숲길을 본격적으로 걸을 준비를 했다. 울타리를 지나면 곰배령 가는 좁은 숲길이 시작된다. 이제부터가 ‘진짜’ 곰배령길이다.
숲의 매력을 오롯이 간직한 이 길이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식량창고’로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약초, 나물이 많기 때문이다. 염기영 할아버지도 “오른쪽·왼쪽 바지주머니, 가방에까지 나물을 뜯어가는 사람들 때문에 속상하다”고 말했다. 안내인이 있어도 막기 쉽지 않다.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따버리기도 하고, 흩어진 탐방객을 일일이 단속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지난해에는 곰배령길 곳곳에 널린 박새를 산마늘로 착각해 생으로 먹은 사람이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다. 자칫 잘못 버섯이나 나물을 뜯었다가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곰배령길의 걷기 난이도는 등산과 산책의 중간이지만 가볍게 오를 수 있는 길은 아니다. 먼저 올랐다가 내려오는 사람에게 “얼마나 남았느냐”고 묻는 탐방객이 종종 있는 걸 보면 만만한 길은 아닌 듯하다. 안내인들은 저마다의 스토리텔링으로 탐방객들의 이목을 끌어 곰배령길 오르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곰배령 좁은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작은 폭포가 하나 나오는데 한씨는 나무꾼과 선녀 폭포라 소개했다. 부부, 연인 단위로 찾는 사람들에게 오르막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선물이다. 여자는 선녀란 비유에 기분이 좋고,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선녀라니 마다 할 리 없다. 폭포 주변을 곰배령 옛사람들은 ‘배판’이라 부르기도 했다. 현재 좁은 계곡물을 보면 전혀 상상할 수 없지만 몇천 년 전에는 배가 다녔다는 전설이 있다.
곰배령에 갔다가 오는 탐방객들에게 “어때요” 물으니 “정말 좋아요, 꽃들이 예뻐요, 행복해요”란 대답이 합창이 돼 전해온다. 내려오는 사람들은 여유가 있지만 오르는 사람들은 마지막 ‘깔딱고개’를 넘어야 한다. 체력이 달리는 사람들은 여러 번 나눠 쉬며 오르는데 간혹 곰배령을 눈앞에 두고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깔딱고개가 힘들다 해도 옛날에 다리도 없는 지게를 지고 곰배령을 오르내리며 쉴 때조차 선 채로 한숨을 돌려 선질꾼이라 불렸던 보부상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힘이 날 것이다. 토박이 김상배 씨는 “인제와 양양을 오가던 선질꾼들이 이곳을 지났다. 약초, 당귀, 콩을 인제에서 가져다 양양에 내려놓고 소금, 해산물을 다시 인제로 가져갔다. 무거운 봇짐을 메고 산길을 오르내렸던 선질꾼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고 말했다. 순간 등에 멘 배낭이 가볍게 느껴지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된 뒤 고즈넉한 숲의 정취만 남았지만, 한때는 이곳에도 선질꾼과 주막 안주인 사이의 뜨거운 로맨스가 피어나고, 위폐를 만들던 주전골의 무시무시한 산적들 이야기가 나돌았다.
기운이 나 힘차게 오르는데, 죽어 밑동만 남은 주목나무가 보였다. 앞서 걸어가던 일행은 별 관심 없이 지나쳤다. 기자도 무심코 지나치는데 안내인이 붙잡으며 주목나무에 대한 설명을 해줬다. 주목나무는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산다는 나무로서 나무껍질이 붉고, 속살도 붉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 모양은 전나무와 비슷하다. 남은 밑동에 낀 이끼가 시간의 더께처럼 앉았다. 나무의 나이를 가늠해보니 아득했다. 곰배령에 배가 다니던 그때 있던 나무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곰배령 정상엔 드넓은 초원 펼쳐져
어두웠던 숲길 사이로 햇빛이 비친다 했더니 어느새 곰배령 정상에 다다랐다. 언제 숲길이 있었느냐는 듯 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초원 곳곳에는 초여름 야생화, 점봉산을 배경 삼아 사진 찍는 사람들이 보였다. 올라오며 느낀 시장기를 해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낌없이 주는 자연을 배운 까닭인지 이것저것 서로 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뻥 뚫린 기분을 주체하지 못한 한 아주머니는 노래 한 자락 부르고, 창피하다며 말리는 일행도 흥이 나 절로 웃고….
고개를 들면 점봉산이 바로 보인다. 하지만 오를 순 없다. 출입금지 표시와 함께 산림대장군, 산림여장군 장승이 서 있다. 점봉산 오르는 길은 2026년까지 통제된다. 몰래 출입금지 구역을 넘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큰일이다. 겉으로 보기엔 길이 잘 닦인 것 같지만 조난당하기 십상이다. 이미 등산로들이 제 모습을 잃어 토박이도 찾기 힘든 길이 됐다.
되돌아 내려오는 길은 무척 짧다. 올라갈 때는 힘들어 미처 보지 못했던 야생화, 풀벌레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리막을 가는 발걸음이 자연스레 빨라지니 아쉬움에 숲의 정취를 붙잡고 싶었다.
Tip.
☞ 교통편
승용차 ① 서울→올림픽대교→미사리 방향→팔당대교→6번 국도→양평 용두리에서 44번 국도→홍천→철정삼거리→인제 방향 직진→31번 국도 현리(15분)→현리 시내 방태교→진동계곡 이정표 따라 우회전→곰배령 초입
② 내비게이션 이용 시 ‘진동분교’
대중교통 서울 동서울터미널, 상봉터미널→인제터미널→현리행 버스 이용, 현리 도착→설피밭행 버스 이용, 설피밭(곰배령) 도착. 설피밭 버스가 하루 2번밖에 없어 불편해 승용차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 코스 곰배령 출입 초소→강선마을→곰배령 왕복 약 10km
☞ 곰배령 탐방안내
참가비 무료
운영기간 12월 16일~1월 31일, 4월 16일~10월 31일
운영일시 4월 16일~10월 31일 수·목·금 1일 2회(오전 9, 10시), 주말 1일 3회(오전 8, 9, 11시) 12월 16일~1월 31일 수·목·금 1일 1회(오전 9시), 주말 1일 2회(오전 9, 10시)
탐방인원 1일 100명
탐방 신청 입산 전 오후 6시까지 인제국유림관리소로 신청자의 주소, 이름,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입산날짜를 적어 팩스(033-461-0450)로 보냄. 전화 문의 033-463-8166
☞ 주변 식당 및 숙소 곰배령 초소 주변 펜션 이용, 주차장에는 곰취 비누 등 기념품도 판매.
월정사 전나무 숲길
전북 부안 내소사, 경기 남양주 광릉수목원, 그리고 강원 오대산 월정사의 공통점은? 바로 전나무숲 좋기로 소문난 곳이라는 점. 특히 월정사의 전나무숲은 드라마 ‘겨울연가’, 영화 ‘가을로’ 등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소설가 윤대녕도 일찍이 “신새벽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걷노라면 허물린 마음이 기워지는 느낌”이라고 고백했다. 청명하고 로맨틱하고 건강한 전나무 숲길. 6월 말, 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린 후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찾았다.
폭신폭신 누구나 걷기 좋은 곳
해를 거듭할수록 여행지를 고를 때 점점 이름난 곳은 피하게 된다. 이미 유명한 곳인데 나까지 굳이 밥숟가락 얹을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사람들에게 치이기도 싫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름날 대로 이름난 월정사는 ‘아, 이래서 사람이 많이 찾을 수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곧게 뻗은 전나무가 빽빽이 들어섰고, 보드라운 흙이 소복이 쌓여 폭신폭신한 길에 그 길과 나란히 흐르는 오대산 약수까지. 삼박자가 딱 맞아떨어져 누구나 걸을 수 있고 누구나 좋아하는 완벽한 길이다. 꽃이 좋으니 벌이 꾈 수밖에.
월정사 전나무숲 걷기는 일주문(一柱門)을 통과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만약 차가 있다면 일주문을 지나 월정사 주차장에 세운 뒤 일주문을 향해 걷는 것이 좋다. 전나무 숲길 코스는 편도 0.9km로 천천히 걸으면 20분 걸린다. 워낙 땅이 부드러워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걷는 사람도 많고, 금방 걸음마를 뗀 아기도 아장아장 걸어 다닌다. 두 팔을 벌리고 자박자박 걸으며 눈을 감고 공기를 들이마시면 몸속에 솔향이 가득 차는 느낌이다.
곧게 뻗은 전나무 덕에 절로 시원해졌다. 전나무는 소나뭇과로 사계절 내내 푸른 뾰족한 잎을 뽐내는 큰키나무다. 전나무는 가지와 잎이 옆으로 퍼져 납작한 모양이 마치 전(煎)과 같아 전나무라 했다는 설과 줄기를 자르면 나오는 송진 같은 멀건 액을 ‘젓’이라고 해 젓나무라 부르던 것이 전나무가 됐다는 설이 있다.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전나무는 공해에 약해 도시에서는 잘 못 자라고 청정지역에서만 자란다. 따라서 이토록 곧고 길게 뻗어나간 전나무는 이곳이 얼마나 깨끗하게 잘 보존됐는지 보여주는 셈.
이곳에는 총 1700여 그루의 전나무가 있다. 고려 말 처음 심었던 나무가 절로 번식해 숲을 이뤘다니 1000년이 넘었다. 월정사의 진정한 주지 스님은 바로 이 전나무가 아닐까. 워낙 오랜 시간 지키고 있어서인지 이곳 전나무숲에는 전설도 있다. 고려 말,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부처에게 공양을 하던 중 전나무에 쌓인 눈이 공양그릇에 떨어졌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산신령이 “공양을 망쳤다”고 꾸짖으며 전나무 9그루에게 앞으로 절을 지키라고 벌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전나무는 오랜 세월 월정사를 지키게 됐다고.
따따다닥, 딱따구리 소리도 들린다.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곳을 찾으니 나도 질세라 다람쥐 한 마리가 두두두 지나갔다. 그리고 먼 데서 들려오는 꾀꼬리 소리. 날이 좋으면 오대산 자락에서 내려온 수달, 족제비 등 야생동물까지 볼 수 있다.
일주문을 돌아 다시 왔던 길을 걸었다. 길 왼편으로 오대산 자락에서 흘러나온 물이 계곡을 이뤄 노래한다. 소풍 온 유치원생들이 물에 들어가 올챙이 잡기에 한창이었는데 들여다보니 피라미 몇 마리가 있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 웅장한 월정사(月精寺)가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오대산이 문수보살이 머무는 성지라 생각해 지은 월정사. 앞마당에 국보 제48호 팔각구층석탑의 모습이 당당하다. 고즈넉한 합장 소리가 절을 가득 메웠다. 절 한 귀퉁이에서 약수를 마시니 단맛이 입에 한참 동안 감돌았다. 빈 생수통을 채우고 새로운 길을 나섰다.
반갑다! 섶다리·동피골야영장
절을 나와 홍천 쪽으로 걸으면 446번 비포장지방도로다. 초반 부분은 아스팔트다. 한창 공사 중이라 걷기가 좋지 않았다. 아예 걷는 길이 없는 곳도 군데군데 있었다. 그럼에도 포클레인 소리를 들으며 한 20분만 걸으면 다시 자연의 비경을 마주할 수 있으니 참아볼 만하다. 끝도 없이 곧게 난 흙길 옆으로 울창한 나무들이 자태를 뽐냈다. 빛이 살며시 들어 눈이 부시지만 건강한 길 걷기에 절로 흥이 났다. 오른쪽으로는 계곡이 흐르고 왼쪽으론 키 큰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줘 더위 걱정 하나도 없다. 중간 중간 계곡으로 내려가 물장구칠 수 있게 너른 디딤돌도 많다. 디딤돌에 철퍼덕 앉아 장난삼아 물속으로 돌멩이 하나 던졌더니 작은 피라미와 올챙이들이 질겁하며 도망쳤다. 길 중간 중간 누군가가 소망을 담아 쌓아놓은 돌탑이 있어 멋스럽다. 소박한 소망 하나 얹어두고 조용히 합장했다.
다시 지방도로로 나와 천천히 걸으면 특이한 모양의 다리 하나가 나타난다. 나뭇가지와 잎을 엮은 위를 흙으로 덮고 나무로 지탱한 다리는 섶다리다. 물에 잘 썩지 않는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든 조상들의 지혜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듬직하게 쌓인 흙을 밟으며 몇 번 오가다가 이번엔 446도로 반대편, 숲으로 들어서봤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폭이 좁은 오솔길이 있다. 자연과 가까이 걸으면 나도 몰래 겸손해지고 길과 나에게만 집중하게 된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그 끝에 햇살이 쏟아지더니 돌 징검다리가 나타났다. 그곳에 앉아 손을 씻었다. 세조가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월정사에 들렀다 상원사(上院寺) 가던 길에 이 물에 몸을 씻고 문수동자를 만나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 해발 1000m 오대산에서 흘러나온 물이니 약이라고 해도 믿을 만하다.
징검다리를 건너 다시 446번 비포장지방도로를 걸었다. 길 끝에는 간단한 다과, 식사,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오대산장과 텐트를 설치할 수 있는 동피골야영장이 있다. 거기서 계속 직진하면 오대산의 한 봉우리인 동대산에 오를 수 있는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조금 더 걸어 2km 거리의 상원사에 가보는 것도 좋다. 느릿느릿 총 4시간 걸었다. 오르막이 없고 흙길이 푹신하고 그늘이 많아 힘들지 않았다. ‘다음번에는 함께 와야지.’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Basic info.
☞ 가는 길
자가용 영동고속도로 진부IC→강릉·인천 방향→오대교사거리에서 좌회전, 8km 전방 월정삼거리→주문진·오대산 방향으로 좌회전→직진
대중교통 강릉행 고속버스 탑승 후 진부 하차(오전 06:32부터 1일 23회 운행), 진부터미널에서 월정사행 군내버스 이용(오전 06:20부터 1일 24회 운행)
대관령 옛길
“늙으신 어머니를 강릉에 두고, 외로이 서울로 떠나는 이 마음. 때때로 고개 돌려 북쪽 바라보니, 흰 구름 아래로 저녁산이 푸르구나.”
서른여덟 신사임당은 20년 넘게 살던 강릉을 뒤로한 채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한양으로 떠났다. 굽이굽이 대관령을 걷다 저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머니 계신 친정은 구름 사이로 잡히지 않았다. ‘언제 다시 이 험한 고개를 넘어 어머니를 뵈러 올까….’ 안타까움에 읊조린 노래가 바로 이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다. 그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이 험한 고개를 오르며 한숨 쉬고 눈물지었던 아흔아홉 굽이. 알알이 박힌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 대관령 옛길을 걸었다.
한양~강릉 이어준 천년의 길
강릉시와 평창군 사이에 있는 대관령은 영동과 영서를 잇는 길로 총길이가 약 13km다. 천년 동안 강릉과 한양을 통하게 한 고마운 길로 데굴데굴 굴러 넘어간다고 ‘데굴령’이라 불렀다. 옛 사람들은 짚신 신고 괴나리봇짐을 메고 걷고 또 걸어 한양으로 갔다. 율곡은 한양에 과거 보러 가며 곶감 100개를 챙겼는데 대관령 굽이를 넘을 때마다 하나씩 빼먹었더니 길이 끝날 때 곶감이 고작 하나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흔아홉 굽이란 별칭이 따라붙었다. 이제는 과거 보러 가는 선비도, 소금장수도, 그들을 털어먹으려는 도적도 없지만 솔향과 나무그늘 덕에 걷기 좋은 옛길로 남아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을 부른다. 대관령 옛길은 천천히 걸으면 6시간 코스. 양떼목장 옆길과 국사성황사, 반정, 주막터를 거쳐 대관령박물관까지 이어진다. 산에서 바다로 내려가는 길이라 험하지는 않지만 방금 지나간 소나기 때문인지 내리막길이 미끄러웠다.
길은 구(舊)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에서 시작한다. 해발 800m 고지대라 손끝에 한기가 스친다. 대관령의 명물, 풍력발전기를 뒤로하고 길을 떠나 휴게소를 바라본 채로 오른쪽 길로 걸으면 대관령 국사성황사 이정표를 볼 수 있다. 국사성황사는 강릉수호신 범일국사와 대관령산신 김유신을 모신 사당이다. 범일국사는 신라 말 강릉 출신 고승으로, 죽어서 강릉수호신이 됐다. 번갈아 나오는 흙길과 포장길을 걷다 보면 등산로 입구가 있다. 비교적 언덕길이 많아 힘에 부칠 수 있지만 주변에 핀 야생화와 키 작은 나무를 벗 삼아 걷다 보면 금방 KT 중계소 철탑에 닿는다.
KT 중계소를 지나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 중 등산길로 오르면 새파란 풀밭과 풍력발전기가 만들어내는 이국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선자령이다. 대관령 옛길을 가기 위해서는 오른쪽 길로 가야 한다. 1.7km 정도 가다 보면 456번 지방도로가 나오고 ‘대관령 옛길’이라는 커다란 돌표지가 있는 반정을 만난다. 예전에 나그네들이 쉬어 가던 주막터가 있는 곳으로 시에서 화장실, 조경 시설 등을 마련해뒀다. 망원경으로 먼 데를 바라봤다. 날이 좋으면 강릉 시내와 동해가 한눈에 보인다는데 금방 그친 비 때문인지 눈의 호사는 즐길 수 없었다. 대신 안개와 산줄기가 만들어낸 또 다른 절경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이곳에서 본격적인 대관령 옛길 걷기가 시작된다. 아예 이 지점부터 길 걷기를 시작하고 싶은 사람은 강릉시에서 주말에 운행하는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좋다. 상행선은 강릉 시내에서 오전 8시35분에 출발한다. 그 차를 타고 반정에 올라와 길을 걷고 대관령박물관에 간 후 오후 3시30분 버스를 타고 강릉 시내로 가면 좋다.
하제민원, 원울이재 재미난 이야기들
초입부터 녹음이 짙다. 구불구불한 길은 시원하고 아늑하다. 새파란 금강소나무가 울창하다. 대관령 일대에는 14만 그루의 붉은 금강소나무가 있다. 수백 년 된 늙은 소나무도 많다. 소나무의 고고한 자태를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길에 얽힌 이야기를 찾는 것도 이 길의 재미다. 길 나선 지 얼마 안 돼 비석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순조 24년(1824) 대관령 인근 어흘리에 살던 향리 이병화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추운 겨울 대관령을 건너는 가난한 나그네들을 위해 주막을 짓고 침식을 제공했는데, 그 이전에는 겨울에 대관령 길을 걷다 죽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고마운 마음은 시 한 수에 담겨 지금껏 내려온다.
“오가는 길손은 쉼터를 얻었고, 기거하는 사람은 오두막집이 생겼네. 조각돌에 그 행실 새겨, 오래도록 자랑스러움 기리도록 하였네.”
갑자기 쌩쌩 낯선 차 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높이 올라가 내려다보니 신(新)영동고속도로가 한눈에 보였다. 기존의 구불구불한 길 대신 2001년 개통해 서울과 강원도를 더 가까이 이었다. 조금 더 길을 걸으면 김홍도의 그림 ‘대관령도’ 한 폭이 손짓한다. 김홍도가 44세이던 1788년 가을,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 및 관동 팔경 지역을 사생 여행하던 때 이곳 풍경에 반해 그린 그림이다. 고갯마루에서 강릉을 조감하며 대관령을 그린 이 그림에서 대관령은 굽이굽이 흘러가다 하늘과 맞닿아 사라진다.
길을 이어 1시간 정도 걸으면 나그네들이 목을 축이고 더운 땀을 식혔을 어흘리 계곡에 닿고 곧 옛날 주막터가 나온다. 몇백 년 전만 해도 한양 가는 나그네들이 묵느라 북적북적했을 초가집이 텅 빈 채 외로이 서 있다. 이 길은 본래 한두 명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으나 1511년 1월 조선 중종 때 강원도 관찰사 고형산이 널찍하게 닦아 지금의 모습이 됐다. 하지만 워낙 으슥한 곳에 자리한 탓에 산적이 종종 출몰하기도 했다. 이곳의 옛 지명인 ‘하제민원(下濟民院)’도 서로 도와 길을 갈 사람이 여럿 모일 때까지 기다리던 주막(院)이 이곳에 있던 데서 비롯됐다. 오르막을 가면 ‘원울이재’에 닿는데 조선시대 강릉지역 원님은 이 고개를 넘으며 두 번 운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부임 때는 한양에서 너무 멀어서 울고, 떠날 때는 정든 백성을 두고 가려니 정 때문에 운다는 것이다. 재미난 이야기에 웃음꽃 피우며 물길 옆으로 구불구불 걸으면 흙길이 끝나고 어흘리 식당가에 닿는다. 외계인들도 대관령의 풍경에 반해 이곳에 하차했다는 재미난 상상력을 발휘한 ‘우주선 화장실’을 지나 1km 더 걸으면 대관령박물관. 걷는 내내 주위를 감싸던 금강소나무들이 멀찍이서 인사를 한다.
Basic info.
☞ 가는 길
승용차 영동고속도로 횡계IC→용평리조트·횡계 쪽으로 10km→(구)대관령휴게소
대중교통 횡계터미널에서 택시를 이용(1만 원 내외)하거나 강릉시 시내버스(주말만) 상행선 08:35, 하행선 09:45, 15:30(강릉 시내~대관령박물관~반정~대관령휴게소) 이용
☞ 참고
강원도 바우길(www.baugil. org)
구룡령 옛길
강원도 영동의 양양과 영서의 홍천을 연결하는 구룡령(九龍嶺) 옛길은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인간이 만든 길이다. 옛날 양양 사람들은 동해안에서 잡은 오징어와 새우젓을 등에 지고 이 고갯길을 넘어 옥수수와 감자로 바꿔 왔다. 홍천 사람들도 이 길을 걸어가 산나물과 해산물을 바꿨다. 사람들은 가파른 한계령이나 미시령이 아닌, 굽이굽이 완만한 구룡령을 좋아했다. 그렇게 하루 100명 가까이 오가던 ‘고단한 길’을 사람들은 ‘바꾸미 길’이라고도 불렀다.
하루 100여 명 오가던 ‘바꾸미 길’
하지만 일제강점기 말 신작로가 생기고 1990년대에 이 길이 아스팔트로 포장되자, 이 자그마한 산길은 그토록 오래 사람들과 함께했음에도 기억에서 잊혔다. 한동안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악인들만 찾았다고 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도 옛길 찾기 바람이 불자, 양양 갈천리 마을주민들이 수풀에 묻혀 있던 이 길을 찾아냈다. 구룡령 옛길은 2007년 정부로부터 ‘문화재 길’(명승 제29호)로 지정됐다. 3000년간 인간이 만들어왔지만, 최근 50여 년간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이 길은 울울창창한 숲을 오롯이 담고 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6월 28일 처음 가본 구룡령 옛길엔 나무와 바람, 그리고 새와 곤충이 속삭이는 소리만 가득했다. 2시간 30분여 걷는 내내 그 어떤 사람도, 소음도 접할 수 없었다.
시원하게 뚫린 서울춘천고속도로를 타고 30여 분 달린 뒤 고불고불한 국도로 들어섰다. ‘9마리 용이 지나간 흔적’이라는 뜻의 구룡령은 가는 길도 굽이졌다. 56번 국도를 쭉 따라가면 구룡령 정상이 보이는데, 이곳이 구룡령 옛길로 가는 출발점이다. 산 아래서 정상으로 올라가기도 하지만, 보통은 내려가는 길을 택한다. 국도 왼쪽에 있는 등산로를 따라 나무 계단을 한참 올라가니 백두대간 능선이 나왔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으니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갈천리 주민이자 숲해설가인 정선지 씨는 “여긴 산악인들이 걷는 백두대간”이라며 “조금만 더 가면 구룡령 옛길이 나오는데, 여기보다 훨씬 완만해 쉽게 걸을 수 있다”고 기자를 안심시켰다. 그러자 ‘이제 어디 가서 백두대간 걸어봤다고 자랑할 수 있겠다’ 싶어 괜스레 마음이 뿌듯했다.
그렇게 30여 분을 걷자 백두대간에서 구룡령 옛길로 접어드는 ‘구룡령 옛길 정상’이 나타났다. 여기는 과거 무거운 짐을 진 양양과 홍천의 아버지들이 쉬어 가던 곳이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물물교환을 하는 장터도 열렸는데, 지금은 무척이나 호젓했다. 사거리의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는 각각 갈전곡봉, 양양, 명개리, 구룡령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문화재 길로 지정된 구룡령 옛길을 걸으려면 양양 방향으로 가야 한다.
600여 종 다양한 나무에 여유가 저절로
정씨의 말처럼 갈천리로 내려가는 길은 완만했다. 밖에서 보면 험준한 산지지만, 굽이굽이 돌면서 부드럽게 이어진 길은 발품을 더 팔더라도 힘은 덜 들게 했다. 옛날엔 말이나 당나귀는 물론, 새색시가 탄 가마도 다녔다고 한다. 같은 고도의 등산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여유가 길에 절로 묻어났다. 특히 땅이 폭신폭신해 발에 전혀 무리가 가지 않았다. 봉우리 밑에 가랑잎이 모여 자연스럽게 쌓인 결과라고 한다. 숲이 전혀 훼손되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빽빽이 들어선 나무가 하늘을 가릴 정도였고, 그래서인지 더운 날씨에도 숲길은 무척 시원했다. 수종은 600여 종으로 다양했다. 정상에서부터 활엽수림이 펼쳐지는데, 길을 걷는 내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피나무 등이 차례로 ‘말간’ 얼굴을 드러냈다.
구룡령 옛길을 걸으면 3개의 반쟁이를 만난다. 반쟁이는 거리의 반을 뜻하는 반정(半程)의 강원도 사투리. 하지만 요즘은 ‘걷다가 쉬어 가는 곳’으로 뜻이 바뀌었다.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처음 만난 ‘횟돌반쟁이’에는 커다란 횟돌(석회암)이 계단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관을 묻을 때 횟돌을 갈아 뿌려놓으면 나무뿌리가 관을 뚫지 못한다고 한다.
조금 더 내려오면 솔반쟁이가 나타난다. 정상에서 이곳까지 활엽수림을 만끽했다면, 여기부터는 소나무 숲을 볼 수 있다. 특히 구룡령 옛길은 금강소나무가 좋기로 유명하다. 정씨는 “2000년 초반 정부가 경복궁을 복원한다며 몰래 300~400년 된 금강소나무를 40여 그루나 베어 갔다”며 아쉬워했다. 실제로 길을 걷다가 몸통이 잘린 채 굵은 밑동만 남은 소나무를 여러 그루 볼 수 있었다.
길을 따라가면 이번엔 묘반쟁이가 나온다. 왼쪽으로 조금 걸어가니 비석 없는 무덤이 하나 있는데, 여기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시대에 양양과 홍천의 경계가 불분명해 두 고을의 수령이 각자 출발해서 만나는 지점을 지역 경계로 삼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그런데 양양 수령이 나이가 많아 젊은 노비가 수령을 업고 현재 홍천군 내면 명개리까지 달려갔고 노비는 큰 공로를 세웠지만, 돌아오는 길에 지쳐서 죽고 말았다는 것. 그리고 이를 딱하게 여긴 수령이 노비의 무덤을 만들어줬다는 이야기다.
구룡령 옛길엔 철을 캐던 흔적도 있다. 묘반쟁이 인근에 ‘옛날 삭도’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전쟁물자 공급을 위해 이곳에서 철광석을 캤는데, 이를 운반하던 케이블선이 바로 삭도다. 이곳에서 당시 홍천과 양양 지역의 젊은이가 많이 죽고 다쳤다고 한다. 일제가 철광석을 캐기 위해 이 지역 젊은이들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철광석 채광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고 그때까진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이젠 슬픈 역사를 안은 삭도만 홀로 남아 있다.
길 중간마다 쓰러진 고목들 정취 더해
이처럼 옛길의 원형과 정취를 그대로 담고 있는 구룡령 옛길. 하지만 기자가 보기엔 이 길의 하이라이트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옛날 삭도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의 금강소나무가 길 양옆을 꽉 메우고 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특히 거대하고 우람한 금강소나무 7그루가 눈에 띄는데, 몸통은 성인 2명이 양팔을 벌려 안아야 닿을 정도로 굵다. 하늘로 높게 뻗은 가지 역시 그 하나하나가 웬만한 나무의 몸통만 하다. 사방으로 펼쳐진 푸른 나뭇잎들이 태양과 하늘을 여지없이 가려버렸다.
정씨는 “이 나무들은 구룡령 옛길을 지키는 금강소나무 7형제라고 불린다”며 “많은 양의 수분이 몸통을 타고 올라가고, 이를 통해 엄청난 산소를 뿜어낸다. 경복궁 복원 때 이 나무들마저 베어 가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인간들은 나무의 고마움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길 중간마다 비바람에 쓰러진 고목도 꽤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쓰러진 나무를 일부러 치우지 않는다. 옛날에도 그랬듯 숲이 알아서 고목을 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기품 있는 금강소나무를 보면서 내려오면 어느덧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상쾌하게 들려온다. 그렇게 구룡령 옛길은 끝이 난다.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르는 계곡에 발을 담그자 2시간 30분여 걸은 피로가 확 풀렸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몸과 마음이 모두 맑아진 기분이다.
Basic info.
☞ 교통편과 구간
서울춘천고속도로 동홍천IC→홍천·구성포 방면 좌회전, 44번 국도→구성포 교차로에서 춘천·서석 방면 우회전, 56번 국도→구룡령 정상(이곳에서 차를 세워둠)→왼쪽 등산로 따라 올라가면 구룡령 옛길 정상, 여기서부터 강원도 양양군 갈천마을까지의 2.6km 길이 ‘구룡령 옛길’. 갈천리에서 구룡령 옛길 정상으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대부분 내려가는 길을 택한다. 보통 2시간 30분 걸린다.
☞ 코스
구룡령 정상→백두대간→구룡령 옛길 정상→횟돌반쟁이→솔반쟁이→묘반쟁이→금강소나무→계곡→갈천마을
>>>구룡령 옛길 정상에서 홍천 내면 명개리 쪽으로 내려가도 된다. 최근에 다듬어진 이 길은 3.7km 거리로 계곡이 쭉 이어지고, 야생화가 많은 게 특색. 갈천리로 내려오는 길보다 조금 더 험하다. 또는 명개리에서 시작해 구룡령 옛길 정상까지 오른 뒤 다시 갈천리로 내려올 수도 있다. 5~6시간 걸리는데, 체력이 좋거나 등산을 즐긴다면 해볼 만하다.
백담사에서 영시암 가는 길
설악산(雪嶽山). 한가위부터 쌓이기 시작한 눈이 이듬해 비로소 녹는다 하여 설악이란 이름이 붙었다. 설악산은 찬 기운이 강해 한을 식히기 좋은 곳이라 전해진다. 만해 한용운 선생도 망국의 한을 달래기 위해 설악산 백담사를 찾아 이곳에서 ‘님의 침묵’을 썼다.
뜨거운 여름, 인공구조물에 갇힌 도시인도 저마다 스트레스 ‘불덩이’를 가슴에 품고 산다. 스트레스는 현대인의 한이 됐다. 설악산을 찾아 백담사부터 영시암까지 걷다 보면 뜨거웠던 불기운이 식고 마음이 편해진다. 시원한 계곡물 소리, 호젓하게 자리한 암자의 넉넉함이 도시인의 지친 기운을 북돋아준다. 설악이란 이름에 부담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왕복 9km 남짓, 평평한 숲길이 이어지니 초보자에게도 어렵지 않다.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워밍업하기 딱 좋은 곳이라 한다.
차는 백담사 용대리 주차장에 세워둬야 한다. 주차장에서 백담사 입구까지는 약 7km로 걸어서는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걷기가 부담스럽다면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백담 계곡의 정취를 만끽하려는 탐방객들에게는 걷기를 권하고 싶지는 않다. 차 한 대 겨우 다니는 좁은 길인데 셔틀버스를 신경 쓰다 보면 마음 편히 걷기 쉽지 않다.
백담사 입구에 내리면 커다란 설악산국립공원 안내판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수심교를 건너 백담사에 갈 수 있다. 왼쪽 숲길을 따라 500m 정도 올라가면 영시암 가는 길의 시작점인 탐방로 안내소가 나온다. 백담사-영시암 코스가 왕복 2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한 만큼 백담사에 들러도 된다. 백담사를 찾은 신자들도 백담사-영시암 코스를 많이 이용한다. 이곳을 몇 번 찾았다는 최신이(55) 씨는 “평지에 가까운 길이라 나이에 관계없이 찾을 수 있고 계곡물 소리, 새소리가 참 좋은 곳”이라고 추천했다.
백담사-영시암 코스는 수렴동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시원한 계곡 소리를 만끽하며 걷는 것도 좋지만 계곡, 폭포 이름을 맞춰가며 걸으면 길이 심심하지 않다. 수렴동 계곡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작은 폭포가 있는데, 바로 ‘황장폭포’다. 백옥 같은 바위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물이 절경이다. 첫 번째 나무데크 길이 시작되면 잠시 멈춰서 오른쪽을 바라보자. 굴참나무, 소나무, 물푸레나무가 쳐놓은 나무병풍 사이로 흑선동 계곡이 보인다. 계곡의 돌이 검다고 해서 흑선동이란 이름이 붙었다. 출입이 금지돼 먼발치에서 볼 수밖에 없어 돌이 검은지 확인할 수는 없다.
시원한 계곡소리, 새소리가 좋은 곳
탐방로 곳곳에 생긴 나무데크 길은 2006년 여름 심한 장마로 기존 등산로가 유실된 뒤에 만들어졌다. 일부 탐방객은 인공물이 자연경관을 해쳤다고 지적하지만, 나무테크 길이 생긴 뒤 길 아래는 식물이 다시 자라게 됐다. 수렴동 계곡이 자갈로 가득 차게 된 이유는 장마 때문이다. 쏟아져 내린 비로 산 위의 자갈돌이 떠내려와 물웅덩이였던 곳이 자갈로 가득 메워졌다.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첫 번째 철제 다리를 건넌다. 2006년 수해 때도 살아남은 다리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계곡은 길골 계곡이다. 설악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길골 계곡 안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인근에서 캔 산나물과 약초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는데, 길골 계곡과 용대리를 거쳐 멀리 속초까지 나아갔다. 영시암을 오르는 길에도 옛 집터가 남아 있다. 나무 아래 돌담의 흔적이 그것이다. 다리를 건너 조금 더 걸으면 수렴동 계곡이 다가온다. 천연 1급수라 두 손 가득 계곡물을 떠 마셔도 좋다. 오른쪽으로 수렴동 계곡으로 흘러 내려오는 물이 보이는데, 바로 귀떼기 계곡이다. 귀떼기 계곡을 따라 오르면 귀떼기 청봉에 이른다. 계곡길 따라 쌓아올린 돌탑을 보는 재미도 있다. ‘어떻게 쌓아올렸나’ 궁금하게 만드는 돌탑들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며 서 있다. 간절한 소망이 없다면 쌓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갈밭에는 잘라놓은 나무도 쌓여 있는데, 이른바 수해목이다. 수해로 떠내려온 나무를 그대로 방치하면 나무테크 등에 걸려 수해를 키울 수 있기에 적당한 크기로 잘라 쌓아둔 것.
“헉, 이거 오염된 물 아니에요?”
바닥이 훤히 보이는 수렴동 계곡을 바라보다 검은 웅덩이를 마주한 탐방객이 놀라 소리를 지른다. 무엇이 물을 검게 물들였을까. 설악산국립공원 동식물보호단 장세진 씨는 “물 바닥에 쌓인 나뭇잎이 썩어 물 색깔이 검게 변한 것이다. 웅덩이로 보이지만 땅속으로 물이 흐르고 있다. 잘 모르는 탐방객들이 물고기를 살려달라고 민원을 넣기도 하지만 1급수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장씨 말처럼 아래를 가만히 바라보니 갈겨니가 떼 지어 움직이고 있다. 탐방객들의 걱정처럼 유해물질에 오염된 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영시암에 오르며 만난 계곡길에는 1급수에서 사는 물고기가 많았다. 어름치, 꺽지, 갈겨니, 쉬리 등.
여기서 좀 더 나아가니 어느새 숲이 우거진다 싶더니 수렴동 계곡은 보이지 않고 물소리만 들린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숲이 울창하니 굵은 비가 쏟아져도 소리만 들릴 뿐 몸은 쉽사리 젖지 않는다. 울창한 숲길의 효과에 놀라며 걷는데 순간 공간이 넓어진다. 낙엽송 군락지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들은 왼쪽으로 눈을 돌려 항아리 모양의 부도탑을 발견한다. 부도탑에는 아쉽게도 안내판이 없다. 안내판이 없으니 영시암을 자주 오르는 사람들을 붙잡고 전설을 들을 수밖에 없다. 부도탑 자리 계곡 맞은편에 절터가 있었는데, 부도탑이 물에 떠내려 건너와 이곳으로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지만 역사적 근거는 없다.
영시암 가는 길은 법정 탐방로밖에 없으니 길을 잃을 염려가 전혀 없다. 두 번째 철제 다리 밑을 흐르는 계곡은 마등령에서 내려온 곰골 계곡이다. 예부터 설악산 반달가슴이 많이 살아 곰골이란 이름이 붙었다 한다. 곰골 계곡도 입산이 금지됐지만 종종 불법으로 오르는 등산객이 있다. 50만 원의 범칙금에 아랑곳 않고 불법을 저지르는 것. 일부 산악회가 등산객을 모으기 위해 일부러 불법 등산로를 코스에 넣어 홍보한다고 한다. 불법 등산로를 오르다 길을 잃거나 다치면 산악구조대가 구조하기도 힘든 만큼 법정 등산로를 꼭 지켜야 한다.
얼음골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곰골 계곡을 지나면 고개를 하나 넘는다. 오르막이 얕아 고개라 부르기도 어색할 정도. 고갯길 따라 줄지어 선 소나무는 대부분 100년 이상 됐다. 이곳 고지대 소나무는 곧게 자라는데 자잘한 관목을 제치고 올라가려는 습성 때문이다. 울창한 숲 속에는 박새, 곤들박이, 동고비 등이 산다. 산양도 가끔 눈에 띈다고 한다. 산이 깊다 보니 탐방객 사이에는 산짐승을 봤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전해진다. 혼자 사는 습성이 강한 고라니가 떼 지어 다니며 자신을 공격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등산객이 있을 정도다.
고갯길을 빠져나오니 저 멀리 영시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암자라 부르지만 규모는 사찰에 가깝다. 반가운 마음에 뛰다시피 영시암 초입의 짧은 나무다리를 건너니, 장세진 씨가 잠시 서보란다. 가만히 서 있으니 시원한 바람이 산속에서 불어온다. 얼음골 계곡에서 내려오는 바람이다. 한여름에도 이곳에 서 있으면 얼음골 계곡 바람에 추울 정도라고 한다. 정말 촉촉이 젖었던 티셔츠가 거짓말처럼 금세 말랐다.
영시암 주지인 도윤 스님을 만나 영시암의 역사를 들었다. 도윤 스님은 내설악에서만 40년 넘게 생활했는데, 백담사 주지로 있을 때는 오세암과 봉정암을 복원했고 1987년에 6·25 때 소실된 영시암을 복원한 뒤 주지 스님으로 지내고 있다. 영시암은 1689년 조선 숙종 때 삼연 김창흡 거사가 창건한 절이다. 삼연 거사는 아버지 영의정 김수항이 장희빈에 대적하다 사약을 받아 죽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도윤 스님은 “영시암(永矢庵)의 영시는 ‘시경’ 위풍의 영시고반에서 따왔다. 충분히 족하다, 여기보다 좋은 곳이 없다는 뜻이다. 삼연 거사가 전국을 돌아다녀도 여기만 한 곳이 없다며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산속 암자에서 수행하는 스님은 ‘불덩이를 지니고 사는’ 도시인 기자에게 “벽극풍동 심극마침((壁隙風動 心隙魔侵·벽에 틈이 있으면 찬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구니가 든다)이니 마음을 잘 잡으라”고 당부했다.
영시암에서 탐방객에게 나눠주는 차를 마시며 스님의 말씀을 곱씹는다. 이곳을 찾은 도시인은 불덩이를 영시암에 두고 돌아내려가도 좋고 오세암, 봉정암, 멀리 대청봉을 향해 올라도 좋다. 하지만 산책 수준의 걷기 좋은 길은 여기까지다.
Basic info.
☞ 교통편
승용차 ① 서울→영동고속도로→현남IC(3시간 20분)→양양 방면→양양삼거리에서 오색 방향으로 이동(20분)→한계령을 경유해 민예단지삼거리에서 미시령 방향으로 진입(30분) → 백담사 갈림길에서 우회전→백담 주차장 주차(15분)→백담 매표소까지 도보 이동(10분)
② 서울→양평→홍천→인제→원통→민예단지삼거리에서 미시령 방향으로 진입(2시간 30분)→백담사 갈림길에서 우회전→백담 주차장 주차(15분)→백담 매표소까지 도보 이동(10분)
고속버스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속초 고속버스터미널(3시간 30분)→시내버스(7, 7-1)로 속초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이동(20분)→원통행 버스 이용 용대리 하차(30분)→백담 매표소까지 도보 이동(20분)
시외버스 동서울터미널→백담(용대리, 3시간)→백담 매표소까지 도보 이동(20분)
☞ 코스
백담 탐방안내소 ↔ 수렴동 계곡길 ↔ 영시암(반환), 왕복 약 9km
☞ 운영 일시
3월 1일~5월 15일, 11월 15일~12월 15일 산불조심 기간 통제, 일출 2시간 전부터 일몰 2시간 전까지 입산 가능.
동강길
세상에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마음이 맞는 사람과 걸어가는 것이다. 물론 자동차나 비행기를 타면 시간상으론 훨씬 빠르게 도착할지 모른다. 하지만 왜 목적지에 가야 하는지 그 의미를 곱씹으면서, 마음 맞는 지기(知己)와 생각을 나누며 걷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불편한 사람과 비행기를 타기보다 차라리 혼자 걷는 게 낫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나야 한다면 마음은 복잡해진다. 얘기가 잘 통해 죽이 척척 맞으면 그보다 좋을 수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절경을 마주해도 그 길은 고행일 뿐이다. 누구와 함께 걷게 될지 모르는 설렘을 안은 채, 동강 트레킹의 첫발을 힘차게 내디뎠다.
마음 맞는 지기와 걷기
첫 만남은 서먹했다. 이날 트레킹은 가나안농군학교 및 한국분권아카데미 직원 10여 명과 ‘아름다운 길을 걸으면서 길을 통한 지역의 발전방향을 모색하자’는 취지에서 이뤄졌다. 그들은 난데없는 불청객의 등장에 약간은 당황해하는 표정이었다. 오전 10시, 가볍게 통성명을 한 뒤 줄지어 걷기 시작했다.
동강길 코스는 강원도 정선군 고성안내소에서 출발해 연포마을, 칠족령을 거쳐 평창군 문희마을에서 1박을 한 뒤, 다음 날 기화안내소까지 걸어가는 20여km의 트레킹 코스다. 아직 정식으로 개발되지 않은 탓에 이날 참여한 사람 중 서너 명을 제외하곤 모두 초행길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을 지나며 조금씩 속도를 냈다. 시큼털털한 쇠똥 냄새가 연신 코를 찔렀다.
“어디 가능교?”
사람이 반가워서일까, “안녕하세요” 한마디 인사에 밭에서 허리 굽혀 일하던 할머니가 어렵사리 몸을 세우며 말을 건넸다. 동강을 보러 간다고 답하자, 가는 길 끝을 가리키며 말없이 웃었다. 본격적으로 가파른 산길이 이어졌다.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혀 얼굴로 한두 방울씩 미끄러졌다. 길 건너편으로 어렴풋이 산성의 형태가 남아 있었다.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고성리 산성으로, 삼국이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을 벌인 격전지다.
20여 분을 부지런히 올라가자 숲 속의 오솔길이 펼쳐졌다. 소나무 그늘에서 잠시 땀을 닦은 뒤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평탄한 길이 계속되는가 싶더니 곧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10여 분을 내려가자 ‘솨솨’ 물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들리는 소리일까 귀 기울이며 굽잇길을 돌아서는 순간, 눈앞에서 청룡이 굽이쳐 춤을 췄다.
정선군과 평창군 일대의 깊은 산골에서 발원해 영월군에 이르는 60km의 장대한 강줄기는 산과 산을 굽이굽이 둘러싸고 있다. 평창군 오대산에서 발원하는 오대천과 정선군 북부를 흐르는 조양강이 합류해 흐르는 동강은 완택산과 곰봉 사이의 산간지대를 감입 곡류하며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에서 서강과 합쳐져 남한강 상류로 흘러든다. 이런 동강을 보고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국토의 오장육부’라고 표현했다. 누군가는 “들어가 함께 있으면 어느새 강의 일부가 돼버리고, 떨어져 바라보면 그리운 임을 먼발치에 둔 듯 간절함을 품게 하는 강”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외관의 아름다움과 대조적으로 동강은 아픈 갈등의 역사를 지닌 강이다. 2000년 6월 동강댐 건설 계획이 백지화될 때까지 댐 건설을 두고 정부와 환경단체, 주민 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생존권 확보 차원의 주민운동에서 시작한 동강댐 백지화 운동은 환경단체, 학계, 종교계, 문화예술계 등으로 확산됐고, 그린피스와 시에라클럽 등 세계적 환경단체들의 동참으로 이어지면서 국제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하지만 10년이란 세월의 흐름 속에 동강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말없이 흘러갈 뿐이다. 동강을 지키자는 온갖 바람이 담긴 노란 손수건의 물결, 각계각층 2000여 명이 참여한 33일간의 밤샘농성, 5000여만 원의 국민성금 등 숨 가쁘게 돌아갔던 지난 일들도 이젠 물결 속으로 아스라이 흩어졌다.
장마에 물이라도 불으면 금방 잠길 듯 보이는 다리 위에 서니 지금껏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된다. 인생의 이정표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다면 이렇게 잠시 가던 길을 멈춰 지난날을 돌이켜보자. 세상살이의 허허로움에서 몸살을 앓게 될 때 이보다 좋은 것은 없다. 쏟아지는 햇살이 잔잔한 강물에 부딪히며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천상의 칸타타 소리에 말없이 걷던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참 아름답죠.”
한국분권아카데미 김동식 본부장은 그림 같은 풍경을 놓치기 싫은 듯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미처 카메라를 준비하지 못한 이들은 살며시 양손을 총 모양으로 만든 뒤, 직사각형으로 이어 붙였다. 손가락 사이에 풍경을 담아가기 위해서다. 어색했던 분위기도 한 시간 남짓 걸으면서 많이 누그러졌다. 제법 옹기종기 짝을 이뤄 도란도란 얘기꽃도 피웠다.
강을 건너 연포마을에 들어서자 ‘왜 이제야 왔느냐’는 듯 외딴 폐교가 반갑게 맞이했다.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읍내 지역의 초등학교에 통합돼 지금은 생태전시관으로 이용된다. 이곳은 영화배우 차승원이 주연한 ‘선생 김봉두’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인상적인 강원도 사투리로 많은 관객을 울리고 웃겼던 김봉두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학교 외벽을 조심스레 만져봤다.
학교를 벗어난 이후는 또다시 산길. 외길이 이어지다 보니 걸음걸음 옮길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제법 올라간 탓에 강 주변의 사람들이 손가락보다도 작아 보였다. 자칫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시퍼런 강 속으로 빠지게 된다. 번지점프를 해 힘껏 밑으로 뛰어내렸으면…. 하지만 협곡 사이에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놓은 105m 높이의 ‘하늘벽 구름다리’에 서자 일말의 충동은 깨끗이 사라졌다.
떳떳한 자태를 뽐내는 동강할미꽃
구름다리를 지나 30여 분 걸어가면 트레킹의 하이라이트인 칠족령 전망대가 나타난다. 옻칠(漆)자와 발족(足)자를 써서 칠족령이다. 옻칠을 하던 한 선비 집의 개가 발에 옻칠갑을 하고 도망갔는데 그 자국을 따라 가보니 금강산 못지않은 동강 물굽이 풍경이 펼쳐졌다는 것이다. 칠족령은 칠죽령이라고도 불린다. 산봉우리가 7개의 죽순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칠족령 전망대에 올라서자 이제 청룡이 승천을 준비 중인 듯했다. 왼쪽으로 들어온 물이 ‘뼝대(바위로 이뤄진 높고 큰 낭떠러지의 강원도 사투리)’에 부딪혀 휘돌아가고, 다시 오른쪽 뼝대에 막혀 꺾이는 풍경이 가히 장관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제장마을과 소사마을은 물론 아득히 보이는 연포마을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칠족령을 거쳐 1km 남짓 걸어가면 문희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에 도착했을 땐 어느덧 주변이 어스름해졌다. 이 마을 민박집인 백운산방 주인은 “최고의 저녁을 기대하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는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동강할미꽃을 구경하라고 산장 아래쪽으로 등을 떠밀었다. 동강을 대표하는 어종이 어름치라면, 식물로는 동강할미꽃이 손꼽힌다. 동강할미꽃은 1998년 처음 발견돼 학계에 보고된 우리나라 특산 희귀식물로, 3월 하순에서 4월 중순의 짧은 기간에만 꽃이 핀다. 백룡동굴 진입로 공사현장을 지나자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다. 절벽의 암석 틈에서 자주색과 분홍색 빛깔을 내뿜는 동강할미꽃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놀라움에 한 번 놀라고, 그 당당함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할미꽃이 땅을 보고 고개를 숙이는 것과 달리, 동강할미꽃은 하늘을 보고 꼿꼿이 핀다. 동네 주민들은 “최근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채취하는 바람에 개체수가 부쩍 줄었다. 희소가치가 큰 꽃이 자칫 멸종될 수 있는 만큼 보호가 시급하다”며 안타까워했다.
다음 날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남은 길을 재촉했다. 30여 분을 걷자 진탄나루가 나타났다. 진탄나루 바로 위쪽 동강변으로 집채만 한 바위가 도로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주민들은 옛날 동강에 물이 불어 길을 따라 정상적으로 통행하기 어려우면 이 바위를 안고 돌았다고 해 ‘안돌바위’라는 명칭을 붙여줬다. 이 바위에는 2km 상류의 황새여울에서 뗏목을 운반하던 뗏군이 물에 빠져 죽은 뒤, 아내가 남편을 찾아와 바위를 안고 돌다 강에 빠져 숨졌다는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바위 앞엔 이를 기리기 위한 ‘뗏군부부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진탄나루에 떠 있는 외딴 뗏목이 마치 이별의 시간을 예고하는 듯했다. 짧은 인연일지라도, 헤어짐은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그러고 보니 이날 오전 트레킹은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만큼 순식간에 지나갔다. 한국분권아카데미 한태희 연구원이 “마음 맞는 사람끼리 걸어서 그런 것 아니냐”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빠르게 걷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닌가 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가장 먼저 마음속에 떠오른 사람과 꼭 다시 한 번 들르고픈 동강길이다.
Basic info.
☞ 교통편
서울을 기점으로 한남로에서 경부고속도로→신갈 분기점→영동고속도로 원주·이천 방면→만종 분기점→중앙고속도로 안동·남원주 방면→제천IC에서 5번 단양·영월·자동차전용도로·한국폴리텍대학4 방면으로 우측 방향→동막교차로에서 38번 영월·쌍용 방면으로 우측 방향→유문동 쪽으로 좌회전→동강로에서 좌회전→여기서 10여 분을 들어가면 고성안내소(033-378-2055).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 686-1.
☞ 코스
고성안내소→성재→물레재→소사나루→연포마을→가정→칠족령→문희마을(1일차 숙박)→진탄나루→기화안내소, 18~20km.
☞ 백운산방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문희마을. 영동고속도로 새말IC에서 빠져 안흥, 평창을 지나 문희마을까지 1시간 30분가량 소요된다. 예약 문의 (033) 334-9891
원주 싸리치 옛길
만 열여섯 살 단종은 한양을 떠나야 했다. 숙부 수양대군은 2년 전 조카의 왕좌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1457년 그를 연고도 없는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다. 6월 따가운 볕이 내리쬐는 길이 아스라했다. 금부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50여 명이 그를 호송했다. 유배지까지 700리 험한 길. 한 많은 길에는 굽이굽이 이야기도 많다. 어린 단종이 “아이고, 다리야” 했다는 제천 다릿재, 고개 이름을 묻는 단종에게 왕방연이 “이 고개는 임금이 오르시니 군등치(君登峙)이옵니다”라고 즉석에서 대답한 것이 이름으로 굳었다는 영월 군등치. 단종이 서산에 기우는 해를 향해 절을 한 곳이라 해서 이름 붙여진 신천면사무소와 남면 북쌍리 사이의 배일치(拜日峙). 그리고 원주에서 영월로 가는 관문, 싸리치 옛길에도 단종의 한이 서려 있다.
운 좋게 만난 ‘싸리치 지킴이’
싸리치 옛길은 원주시 신림과 황둔을 잇던 길로 옛사람들은 소금, 생선, 생필품을 지고 서울과 영월을 오갔다. 영월 출신 김삿갓도 이 길을 통해 한양을 다녔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측량해 넓힌 영월, 원주 간 유일한 신작로였으며 1990년 새로운 길이 생기기 전까지는 버스도 다닐 정도로 활발히 이용했던 길이다. 폐도(廢道)가 된 뒤 나무만 무성해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2002년 9월 새로 단장해 4.5km, 왕복 2, 3시간 코스의 걷기 좋은 길로 재탄생했다. 장마 들머리에 선 7월 첫 주말, 싸리치 옛길을 찾았다.
길에 들어서기 전부터 행운이 따랐다. 인터넷 포털에서 검색하다 싸리치 옛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수록한 블로그(blog. daum.net/chiakmtb)를 찾은 것. 블로그의 주인은 원주 신림초등학교 김래옥 교장과 원주 구곡초등학교 박광춘 교감 부부. 두 사람은 일요일 낮, 일면식도 없는 기자를 원주터미널까지 마중 나와 반겨주었다.
“서울에서 온 아가씨가 좋은 길을 걷는다는데, 함께해줘야지.”
두 사람의 함박웃음에 마음까지 넉넉해졌다. 원주에서 신림까지는 고속도로로 20분 거리. 버스도 30분~1시간에 1대꼴로 다닌다. 신림IC를 통과한 뒤 오른쪽으로 꺾어 500m쯤 더 가면 명성교회 수련원 인근에서 ‘싸리치 옛길’ 표지판을 찾을 수 있다. 김 교장은 주변 농장, 식당, 회사 표지판과 나란히 싸리치 옛길 표지판이 있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우리 소중한 싸리치 옛길이랑 저런 것들이 가치가 같나요? 싸리치 옛길 표지판을 더 크고 멋있게 써야 마땅하지요.”
구불구불 폭신폭신 신나는 길 걷기
싸리치 옛길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 하나 없다. 더불어 나무나 꽃 이름을 소개하는 팻말, 길에 서린 역사 등을 알려주는 팻말이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아쉬웠다. 다행히 2013년까지 강원도가 ‘산소(02)길·자전거길 강원 3000리’ 사업의 일환으로 4.5km를 정비해 ‘이야기가 있는 길’로 재탄생시킨다니 기대해볼 수밖에.
비포장도로에 하얀 자갈이 사이좋게 뒹굴었다. 비가 온 지 얼마 안 돼 땅은 폭신폭신, 이 흙길에 놓인 자갈이 자박자박 듣기 좋은 울림을 만들었다. 싸리치 옛길의 특징이자 장점은 갈림길 없는 한길이라는 것. ‘이 길일까 아닐까?’ 고민하거나 지도를 찾아볼 일 없이, 길이 난 대로 걷기만 하면 된다. 길은 곧게 나가다 지루할 때쯤 산을 휘감으며 구부러진다. 경사는 대부분 완만해 오르는 길도, 내려가는 길도 전혀 부담이 없다. 연로하신 동네 분들도 운동 삼아 지팡이 짚고 오르락내리락할 정도. 우거진 나무숲이 만들어준 음지와 뻥 뚫려 햇살을 제대로 받는 양지가 번갈아 나와 지칠 새가 없다.
5km 남짓, 완만한 경사에 울퉁불퉁한 자갈길은 산악자전거(MTB) 마니아들에게 인기다. 전문가들에겐 조금 싱거울 수 있지만 초보자에겐 안성맞춤 코스. 김 교장 역시 최근 MTB에 푹 빠졌다며 ‘MTB 예찬’을 했다. 자전거에 몸을 싣고 적당히 굽이치는 길을 씽씽 달리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한 20분 걸었을까. 목덜미에 살짝 땀이 배어나오는데 ‘콸콸콸’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바위를 손으로 짚으며 조심조심 들어가니 보물처럼 계곡 하나가 나타났다. 크지 않은 계곡이지만 손을 씻으며 땀을 식히기엔 그만. 손을 담갔더니 1분도 안 돼 팔뚝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물이 찼다. 게다가 바닥의 돌멩이 모양이 하나하나 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맑았다. 주변 검악산, 치악산에서 내려온 이 물에는 1급수에서만 산다는 버들치도 있단다. 아토피 피부염이 있는 아이들이 이 물로 씻으면 금세 낫는단다. 계곡 근처에 나무 탁자와 의자가 있어 잠시 쉬었다 일어서니, 구름도 쉬어 간다는 높은 고개도 쉬지 않고 지날 수 있을 만큼 힘이 솟았다.
다시 길을 재촉했다. 길에는 새침한 주홍빛 나리, 수더분한 흰 꽃잎의 망초, 화려한 보랏빛 패랭이 등 다양한 한국 야생화가 피었다. 앞서 걷던 김 교장 부부는 연신 감탄하며 새로운 꽃을 알려주었다. 박 교감이 새색시처럼 웃으며 말했다.
“가을엔 아카시아 나무가 얼마나 향기로운지, 코가 마비될 정도예요. 이끼 하나도 얼마나 탐스럽게 나는지. 이 길을 걸은 지 3년째인데 아직도 처음 보는 꽃이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30여 년 전, 초등학교 재직 시 처녀 총각 선생님으로 만나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은퇴 후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자 싸리치 옛길 초입 농바우골에 좋은 집터를 잡아놓았다. 그러고 매주 와서 오이, 호박, 고추 등을 기르고 이 길을 걷는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정스레 걷는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바쁜 서울에선 느껴보지 못한 따뜻한 마음이다.
나리·망초·패랭이 … 야생초 지천
이 길에는 단종의 복위를 꿈꾸던 이들의 한도 서려 있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다 경북 영주시 순흥으로 유배된 금성대군이 조카 단종의 복위를 위해 보낸 밀사들이 목숨을 걸고 이 길을 통해 영월의 단종에게 갔던 것. 하지만 얼마 안 돼 복위운동이 발각됐고, 가담한 인물은 모두 학살됐다. 단종 역시 유배 4개월 만에 사약을 받았다. 어린 단종은 이 길을 걸어 한양으로 얼마나 가고 싶었을까, 그의 서러운 마음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
길을 나선 지 1시간 20분쯤 됐을까. 싸리치 옛길 정상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전용찬 씨가 지은 ‘싸리치’라는 시가 늠름한 바위에 새겨 있다.
“산굽이 돌아돌아 골짜기마다/ 싸리나무가 지천이어/ 싸리치라네// 마디마디 거칠어진 손길로/ 서러움 쓸어내던 싸리 빗자루/ 그 사연 모여/ 보라 꽃으로 피어나는가//(이하 생략)”
이 길은 줄기가 곧고 가지가 많은 싸리나무의 이름을 땄다. 이 나무는 싸리비, 도리깨, 복주머니 등을 만들 수 있는 유용한 나무다. 보랏빛 꽃이 초여름에 핀다는데, 일찍이 내린 비 때문인지 색 바랜 꽃잎들이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있었다. 군데군데 늘어진 꽃망울을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꼭 싸리꽃이 만개했을 때 다시 오겠다’ 다짐하며.
정상에서 온 길로 되돌아와도 되고, 길을 이어가 신림터널 쪽으로 가도 된다. 신림터널로 나가면 가톨릭 신자들에게 성지로 꼽히는 용소막 성당이나 양양 현북면의 명주사, 치악산도 갈 수 있다. 명주사에서는 티베트, 인도, 네팔 등 동양 각국의 고판화 자료를 전시하는 고판화 박물관이 자리해 아이들 교육에 그만이다.
일행은 되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분명히 지나갔던 길인데 내려오는 길은 또 다르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산딸기, 우산나물, 할미꽃 등이 오밀조밀 모였다. 오른쪽에 늠름한 치악산과 하얗게 피어난 안개가 어우러진 절경이 펼쳐졌다. 강원도 길을 걷는 매력은 저 신비하고도 오묘한 어울림을 마주하는 것이 아닐까.
내려오는 길은 훨씬 빠르다. 길이 끝난 아쉬움도 잠시. 김 교장 댁에 가서 직접 기른 애호박과 부추, 청양 고추를 송송 썰어 넣어 부침개를 부쳐 먹었다. 간장을 찍지 않아도 간이 딱 맞는 웰빙 ‘부치기’와 치악산 맑은 물로 빚은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자 절로 ‘캬~’ 소리가 났다. 어둑어둑 해는 지고 다시 서울로 돌아갈 시간.
“농바우골 평생 이용권을 줄 테니 휴가 때 꼭 오세요!”
넉넉한 인심에 코끝이 찡. 이 길 넘어 한양 가던 김삿갓의 발걸음도 이토록 무거웠을까.
Basic info.
☞ 교통편
대중교통 원주 중앙시장(원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차로 5분 거리) 앞에서 23, 24, 25번 버스 탑승→신림면 명성교회 수련원 앞 하차(첫차 06:50, 총 11회 운행)→싸리치 옛길 표지판.
자가용 영동고속도로 만종분기점 통과→중앙고속도로 신림IC 통과→우회전→500m 직진→싸리치 옛길 표지판(참조 원주대중교통안내정보시스템 traffic. wonjucity. net).
☞ 참고
2009년 6월부터 2012년 5월 말까지 싸리치 계곡에 한해 자연보호를 위한 자연 휴식년 실시. 입차, 취사, 야영, 야유회 등 금지, 위반 시 20만 원 이하 과태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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