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落書 연구

醉月 2013. 3. 15. 01:30

落書 연구

“낙서는 의미심장한 도전의 흔적들

글 : 姜基洙, 김선희

 

사람들은 바닷가 모래밭에 내려서기만 하면 나뭇가지를 주워 들고 자기 이름을 쓰고, 동그라미를 그리며 즐거워한다.
이러한 본능적이고도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면 낙서라는 행위 속에는 내면적인 욕구의 배설이라는 쾌감도 있지만, 몸을 움직여 사물과 소통하며 행위하는 과정 그 자체의 즐거움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 내면에 쌓인 감정이 손끝에 들려진 연필을 통해 낙서로 형상화
⊙ 낙서는 소통의 도구… 들여다보면 진솔한 내면이 담겨 있어
⊙ 안티카페, 불법 다운로드 등 ‘디지털화된 낙서’에 대한 교육적 고민 필요

교실 창문에 그린 학생들의 낙서.
낙서는 누군가가 아무 곳에나 함부로 끄적거린 흔적을 말한다. 학교 곳곳에, 학생들의 공책이나 교과서, 필통과 같은 개인 사물에 다양한 낙서들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왜 낙서를 하는 것일까?

교육학자들은 ‘낙서는 은밀한 자기표현이며 다양한 표현들로 심리적·정신적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고 정의한다. 또 ‘낙서는 솔직하고 꾸밈없는 인간적 본능 행위여서 무의식 속에서 표출된 감정과 사상들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드러난다’고 분석한다.

낙서가 무의식적 본능의 표현이란 점을 전제할 때 학생들의 낙서는 일종의 공부 스트레스 해소법이며 학생들의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한 방법이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학교 낙서는 학교폭력, 욕설, 집단따돌림, 자살 등 많은 교육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최근의 우리 교육현실에서 학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우리말로 낙서의 정의는 ‘①글을 베낄 때 잘못하여 글자를 빠뜨리고 쓴 것 ②글자, 그림 따위를 장난으로 아무 곳에 함부로 씀 또는 그 글자나 그림 ③시사나 인물에 관하여 풍자적으로 쓴 글이나 그림’이다(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이 중 일반적인 낙서의 의미는 주로 두 번째의 글자, 그림 따위를 장난으로 아무 곳에 함부로 쓰는 행위 혹은 그 글자나 그림을 말한다.

영어에서 낙서는 a scribble, a scrawl, a doodle, graffiti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데 공통적인 의미는 휘갈겨 쓴 것, 흘려 쓴 것, 딴짓 하는 것, 낙서 등이며 이 중 a scribble, a scrawl, a doodle은 주로 낙서 행위자가 모임이나 강의 등에서 어떤 다른 행동에 몰두하며 책이나 원고, 압지첩(壓紙帖) 등의 여백처럼 예기치 않은 곳에 하게 되는 행위를 말한다. graffiti는 graffito의 복수형으로 낙서 혹은 낙서 행위 전체를 총칭하는데 주로 공공도로나 건축물, 공중화장실 벽 따위에 낙서하는 것을 의미한다(브리태니커 사전).

graffito는 이탈리아어 낱말로서 긁기(scratch), 또는 긁힌 자국(scratchings)을 뜻하는데 언어적 맥락에서 스그래피토(sgraffito)라는 벽화 기법과 연관이 있다. 원시시대의 벽화나 목욕탕 벽의 그림(latrinalia), 전반적인 정치적·성적 유머 또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벽을 긁거나, 그리거나, 표시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기도 한다. 벽화라는 측면에서 프랑스 라스코 동굴 벽화와 북부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 경남 울주의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도 낙서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낙서는 배설이다!

학생들이 교과서에 한 낙서.
낙서는 자신의 기분과 감정, 억누를 수 없는 충동 등을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표출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욕하는 낙서’나 ‘성(性)에 관련된 낙서’, 그리고 ‘폭력적인 낙서’ 등이 대표적이다.

먼저 ‘욕하는 낙서’는 남을 공격하거나 비방하는 글 또는 직접적인 욕을 써 놓은 낙서이다. 공격적 표현이 언어로 나타나는 전형적인 것이 바로 욕인데, 욕설의 공격성이 직접 대상에게 표출되지 않고 종이와 같이 다른 곳에 간접적으로 드러나게 되면 ‘욕하는 낙서’가 된다. 학생들은 부모님과 선생님에 대한 불만과 불평, 친구들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가 쌓이면 이를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가 심리적으로 발동하고, 이를 직접적으로 상대에게 표현하지 못할 때 낙서로 표출한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의 은밀한 낙서는 카타르시스의 동반과 함께 감정의 진정과 자신에 대한 객관화가 이뤄지며 낙서 행위에 대한 재미도 느끼게 해 준다.

또한 욕에 대한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자신을 멋있어 보이게 하려는 경우에도 욕하는 낙서가 나타난다. 학생들은 교실이나 복도의 벽에 ‘fuck’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낙서를 많이 하는데, 평소 학생들의 생활 속에서 ‘씨발’, ‘좆같다’와 같은 욕은 일상화된 상태이지만 한글 욕보다는 영문 욕을 낙서로 많이 표현하고 있다.

‘성 관련 낙서’는 성행위의 표현을 통한 성적 쾌락의 추구가 드러나는 낙서이다. 이러한 성 관련 낙서는 성행위의 직접적인 대상이 없이 혼자 낙서를 하면서 간접적으로 성적 쾌감을 상상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고자 하는 의도에서 표현된다. 이성적 쾌감은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재미’로서, 학생들은 학교생활에서의 단순한 재미를 위해 이러한 낙서를 한다.

남자 중학교에서 가장 많이 관찰되는 낙서가 주로 성기나 성적 행위를 그린 성 관련 낙서이며, 학생들은 낙서 속에 그들의 성적 호기심을 숨김없이 드러낸다는 연구 보고도 있다. 이것은 사춘기 남자 중학생들의 성적 호기심, 성행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내면에 담긴 것이다. 또한 누가 했는지 알 수 없는 이러한 성 관련 낙서는 주로 공공장소, 즉 기술실과 음악실, 미술실 등과 같은 특별실과 화장실에서 행해진다. 남들에게 공개하기 부끄러운 은밀한 성적 욕구와 쾌감을 익명성이 보장되는 장소에서 과감하게 표현하면서 즐기는 성 관련 낙서는 성적 배설의 쾌감과 동시에 재미를 추구하는 것으로 ‘놀이로서의 낙서’와 유사하다.

학교 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는 요즘, 욕과 마찬가지로 폭력성 또한 낙서에 드러난다. 폭력 낙서는 주로 살인에 관련된 내용이 많고 총, 칼, 도끼, 살인자와 붉은 색의 피, 마스크 맨 등을 그린다.

인물을 그릴 경우 표정은 대부분 무표정하고 화난 표정, 웃는 표정도 있다. ‘욕하는 낙서’는 낙서 행위를 통해 감정이 해소되고 정서가 안정되지만 ‘폭력적인 낙서’는 반복되는 폭력의 표현이 훈련 효과를 일으켜 점점 표현이 과격해지고 과감해지며 심할 경우 실제 폭력적인 행위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낙서는 재미이자 놀이!

놀이로서의 낙서는 ‘재미’를 위한 낙서이다. 인간의 특징을 규명하는 용어는 매우 다양한데, 호이징아(Huizinga)는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의 특성을 강조한다. 놀이는 무엇보다 재미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낙서도 놀이하는 낙서가 되면 놀이처럼 무의식적이고 무의도적으로 ‘재미’를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놀이로서의 낙서에는 ‘낙서하는 재미’, 즉 행위 자체의 재미도 있고, ‘낙서를 보는 재미’도 있다.

‘낙서하는 재미’를 위해 학생들은 용구와 재료를 가리지 않고 손에 닿는 거의 모든 것으로 낙서를 한다. 낙서에 사용하는 용구는 보통 필기도구, 미술도구지만 휴대폰, 컴퓨터와 같은 디지털 도구도 이용한다. 낙서에 사용하는 재료는 일반 문구류나 자연물, 심지어 배설물, 혈액, 음식물 등도 있다.

화장실에서 흔히 발견되는 낙서는 이러한 배설물이나 혈액이 낙서의 재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낙서하는 재미’는 낙서하는 과정이 즐겁고 재미있기 때문에 낙서한 결과물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표현하고 그리는 행위를 통해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보는 재미’를 위한 낙서는 무의도적이고 무의식적이지만 보다 정교하고 기술적으로 표현된다. 만화 캐릭터를 똑같이 따라 그리거나 기하학적인 도형을 회화적으로 구성하는 낙서, 자 또는 컴퍼스를 이용하여 구조적 모양을 나타낸 공학적 낙서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낙서는 보는 즐거움을 위해 정교하게 작업하는 시간을 요구하지만 자신의 표현 능력에 만족하며 기꺼이 낙서에 시간을 보낸다. 또한 글을 써서 두고 보며 즐기는 풍자와 위트의 낙서도 있다. 놀이하는 낙서가 지닌 재미의 취향이 깊어지면 미적 감수성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어 창조적인 예술성으로 발전하게 된다.

낙서 행위자가 정교하게 표현한 회화적이고 아름다운 낙서는 낙서 행위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는 재미를 느끼게 해 주어 결국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승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낙서는 자기표현이다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도 낙서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자기표현으로서의 낙서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을 표출하거나 개인적인 소망과 기대, 불안에 대한 해소의 심리를 드러내는 낙서로서 ‘자아 정체성 관련 낙서’와 ‘기원의 낙서’가 있다.

‘자아 정체성 관련 낙서’는 똑같은 교복과 실내화, 같은 책·걸상을 사용하는 학생들이 객관적인 귀속감과 일체감을 유지하면서도 주관적으로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른 고유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표출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학생들은 이름 외에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캐릭터나 이모티콘 등의 특징적인 표시를 즐겨 그린다. 하얀색 실내화에 재미와 창의력을 더해 자신의 이름과 문양을 디자인하여 낙서를 하기도 한다. 단순한 도난 방지를 위해서라면 이름을 적으면 그만이지만, 낙서의 내용은 자기 이름에서부터 유명 상표까지 다양하고 기발하며 아예 구멍을 뚫기도 한다.

그림 솜씨가 좋거나 표현력이 우수한 경우, 자신의 독특한 개성과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낙서를 한다. 낙서를 하는 사람은 자주 낙서를 하는 캐릭터와 그림체가 있고, 남들이 누가 낙서를 했는지 알아보게 되므로 타인의 반응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희열을 느낀다. 이렇게 즐거움을 느끼며 낙서를 계속하게 되면 학습효과가 발생하여 회화적 표현력이 향상되고 예술적 감성이 발달하여 낙서화와 같은 예술작품으로 승화될 수도 있다. 모두가 똑같은 책을 사용하는 교과서도 나만의 솜씨를 자랑할 수 있는 좋은 재료이다. ‘국어’가 ‘제국의 역습’으로 바뀌고, ‘기술·가정’이 ‘가출·결정’으로 바뀌는 등 제목으로 낙서를 하기도 하고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과 사진들을 오려 세워서 3D 교과서를 만들기도 한다. 획일화된 생활에서 나만의 독특함을 표현하고자 낙서를 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감과 존재감을 드러내는 한 방법이다.

‘기원 낙서’에는 선사시대 동굴벽화와 같이 샤머니즘적 성격과 종교적 믿음이 포함되어 있다. 학교에서는 성적 향상, 시험 합격, 소원 성취, 사랑, 행복 등의 개인적인 기대와 소망이 다양하게 낙서로 표출된다. ‘넌 할 수 있어!’, ‘시험 잘 쳐!’ ‘합격 기원!’, ‘미정♡동혁’ 등과 같은 긍정적인 낙서는 자기 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는다. 반대로 ‘넌 안 돼!’, ‘자신 없어…’ ‘못난 놈’ 등과 같이 부정적인 낙서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부정적으로 표현하지만 그 이면에는 ‘잘해야 하는데…’ 하는 불안한 심리가 내재해 있고 ‘자신 없어…’ 하면서도 자신감을 가지고자 하는 기원이 이면에 깔려 있다. 이러한 낙서들을 표출하면서 학생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안한 심리를 안정시키고 특정한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낙서는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의 매체가 되기도 한다. 낙서로 친구들끼리 나누는 ‘대화낙서’와 불특정 다수를 향한 ‘공공장소의 낙서’ 등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학생들은 말을 하면서 손으로 글을 써 내려가기도 하고 그림으로 그려 대화를 주고받기도 하며 글과 그림을 섞어서 쓰기도 한다. 학생들이 늘 머무는 장소, 교실은 그들의 기억을 자유롭게 보완해 주는 낙서 장소이다. 특히 학교를 상대로 한 낙서는 다른 낙서와 달리 수년에 걸쳐 학교 시설에 흔적이 남고 학생과 교사에게 오랜 기억의 대상이 된다.
  
낙서를 통해 본 인간의 본성

인간은 배설하는 존재이다. 배설이란 본래 생리적인 용어이나 여기서는 정신적 배설까지를 포함한다. 일반적으로 대·소변 등의 생리적인 배설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속에서 쌓이면 참으려 해도 달려가야 하고, 어쩔 수 없이 배설을 해야 한다.

하지만 배설 후에는 후련한 마음과 함께 즐거운 마음도 다시 생겨난다. 즉 ‘쾌변’이 되는 것이다. 쾌변을 하지 못하면 도리어 병이 된다. 낙서도 마찬가지이다. 부모에게 쌓인 불만을 덮어 두려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꼭꼭 숨겨 두려고 해도, 어느 순간 끄적거리는 낙서 속에 ‘엄마 미워!’가 나타나고 ‘똬랗해(사랑해)’가 쓰인다.

나도 모르게 내면에 쌓인 감정을 연필을 통해 낙서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각적으로 드러난 낙서를 보고 있으면 나와 분리된 낙서를 통해 어딘가에 털어놓은 심정이 되어 속이 후련해진다. 학생들의 개인적인 스트레스가 올바른 성장을 방해할 뿐 아니라 음주, 학교폭력, 흡연과 같은 일탈 행동으로도 표출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낙서로의 표출은 상대적으로 긍정적이다.

인간은 몸으로 표현하고 소통하는 존재이다. 낙서를 할 때, 우리는 머리로만 하지 않는다. 연필이든 볼펜이든 무언가 도구를 손에 들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몸을 움직이고 펜을 움직이다 보면 동그라미도 그리고 욕도 쓰고 사랑도 쓰게 된다. 벽에 붙은 포스터 속의 인물에는 유성매직으로 눈, 콧구멍, 입 등에 구멍을 낸다. 멀쩡한 사람의 볼에 털 달린 못생긴 점도 그려 넣는다. 사인펜, 자, 컴퍼스 등 낙서용 도구는 무궁무진하다. 재료도 다양하다.

배설물은 물론 물감, 찰흙, 먹물, 눈, 비, 먼지, 심지어 학교 급식으로 나오는 방울토마토도 던져서 흔적을 남기고 초코파이의 마시멜로 성분도 벽에 묻혀 굳혀서 낙서로 활용한다.

이렇게 눈에 보이고 손에 닿는 거의 모든 도구와 재료는 낙서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낙서하기 위해 주변 사물을 선택한다기보다 주변 사물을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낙서하고자 하는 충동이 발동하는 것으로도 생각될 정도이다.

사람들은 바닷가 모래밭에 내려서기만 하면 나뭇가지를 주워 들고 자기 이름을 쓰고, 동그라미를 그리며 즐거워한다. 이러한 본능적이고도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면 낙서라는 행위 속에는 내면적인 욕구의 배설이라는 쾌감도 있지만, 몸을 움직여 사물과 소통하며 행위하는 과정 그 자체의 즐거움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성장과정 중의 학생들은 감각기관이나 손, 다리 등의 신체를 통해 다양한 일을 체험하면서 자신이 ‘너무 작다’, ‘힘이 세다’와 같이 신체적으로 자기를 체험한다. 그리고 자기 신체를 통해 자신의 능력과 무능력을 확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학생들의 ‘낙서 행위’는 신체를 통한 세계와의 소통이며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 성공과 실패를 확인하는 수많은 작은 도전들이다. 그리고 ‘남겨진 낙서’는 잘못된 생활습관의 결과가 아니라 의미심장한 도전의 흔적들이 되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낙서를 가장 많이 하는 이유는?

낙서는 배설의 쾌감, 행위하는 즐거움과 더불어 또 다른 ‘재미(fun)’를 동반한다. 이 재미는 바로 놀이의 본질적 요소이다. 회의 중이나 수업시간 중에 갑자기 낙서를 끄적거리기 시작하는 현상은 호이징아에 의하면 그 순간 ‘일상적인’, 혹은 ‘실제’ 생활을 벗어나는 행위이다.

학생들은 심심해서 낙서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수업시간에 낙서를 가장 많이 한다. 이러한 모순적인 현상은 호이징아의 견해에서 보면, 학생들이 본성적으로 낙서를 통해 수업시간과 같은 제약된 환경에서 개인 활동으로 재미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며, 교사들은 노트나 시험지 공백과 같은 특정 개인 공간에 낙서하는 학생들의 재미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낙서들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자발적인 행위라는 것이 중요하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학생들은 스스로 재미있어서 놀이를 하는 것이며, 거기에 그들의 자유가 깃들어 있다

인간은 창조적인 존재이다. 낙서는 다른 행위와 달리 항상 ‘흔적’이 남는다. 단순한 끄적거림이나 그림, 혹은 의미 있는 글자 등과 같은 흔적들은 모두 시각적 표현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정신 속에 존재하는 집단 무의식과 ‘원형(archetype) 이미지’를 밝혀낸 융(Jung)은 이렇게 시각적 표현물로서 낙서가 창조되는 과정을 ‘반성 행동’에 의한 것으로 설명한다.

융에 따르면 원형은 ‘원시적 이미지’로 불리지만 원래 시각적으로 드러날 수는 없다. 대신 그것들이 내부 또는 외부의 힘에 의해 실현될 때, 스스로를 유기체적으로 조직화하는 활동, 즉 반성 행동에 의해 인간의 사고, 감정, 이미지로 나타난다. 무의식적인 행위의 과정에서 창조된 낙서는 결국 본능적인 반성 행동에 의해 창조된 시각적 이미지인 것이다. 또한 이 낙서와 같은 시각적 이미지를 토대로 인간은 문화와 예술을 창조하고 발전시켜 왔다.

무의식으로부터 드러난 낙서는 회화의 밑그림인 드로잉이나 스케치가 될 수 있고 음악의 기초인 악보가 될 수 있다. 춤추는 인간의 형상화일 수 있고 혹은 자유롭게 기술한 문학의 초고가 될 수 있다. 욕하고 싶은 충동, 억압된 성적 욕구와 같은 충동들이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반성 행동에 의해 조절되면서 낙서로 변환되어 나타나는 과정은 바로 탁월한 문화적 본능의 시작이자 창조성의 출발인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지향하는 존재이다. 낙서하고 있는 학생이나 그가 그린 낙서는, 표면적으로는 은밀한 내면을 드러내는 개인적인 행위로 보인다. 누군가에게 간섭을 받게 되면 자유로운 낙서의 재미는 방해받게 되고, 학생들은 곧 흥미를 잃고 낙서를 멈추어 버린다. 그러나 낙서 행위가 끝난 뒤 낙서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세계에 홀로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인간을 발견할 수 있다. 욕하고 싶은 사람, 내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 등 낙서에는 상대방, 즉 타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 ‘합격기원♡’과 같은 낙서는 시험을 잘 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며, ‘미희꺼, 손대면 죽음!’과 같은 낙서는 같은 물건을 사용하는 수많은 타인들 속에서 자기 소유를 확인하는 것이다.

혼자 재미있어서 끄적거린 그림도 누군가 옆에서 긍정, 혹은 부정의 반응을 보일 때 낙서하는 행위는 강화되고, 남이 그려 놓은 낙서를 보고 똑같이 따라 하다가 새로운 낙서를 하게 되기도 한다. 그냥 개인적으로 표출되고, 그냥 무심하게 보이는 것 같은 낙서 속에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사회 속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교육인간학적 의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작품 ‘L.H.O.O.Q’
학생들은 낙서를 통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내면의 진솔한 생각과 감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낙서에는 부모님과 담임선생님께 못다 한 이야기, 공부가 안 되는 이유 등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학교생활이 삶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요즘의 학생들은 가장 기초적인 학교의 일상과 관련된 낙서를 많이 한다. 따라서 교사는 낙서를 관심 있게 관찰함으로써 학생들의 고민과 문제들을 파악할 수 있다.

욕, 성, 폭력과 같은 ‘배설로서의 낙서’들은 학생들의 성적 관심과 신체적·정서적 변화를 드러낸다. ‘자아 정체성 관련 낙서’와 ‘기원 낙서’ 같은 ‘자기표현으로서의 낙서’는 학생들이 느끼는 자아 정체성의 혼란은 물론 공부에 대한 불만과 학업 스트레스 상황을 가슴 아프게 전해 준다. 이러한 학생들의 현실적인 고민들은 수업 시간의 성취도 평가나 의례적인 상담,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이뤄지는 학생 심리검사 혹은 생활조사에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학생들의 진솔한 내면이자 현실이다. 낙서는 숨어 있는 우리의 교육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현주소다.

학생들이 낙서로 배설하고 체험하며 노는 것은 일종의 긍정적인 해소방법이다. 학생들이 낙서하는 순간은 아주 단순하게 ‘하는 것’일 뿐, ‘무엇’을 위해 ‘누가’ 하는가, ‘무엇을 하는가’가 문제 되지 않는다. 단지 ‘한다’고 하는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대학입시를 위해 어른보다 더욱 바쁜 일과를 보내야만 하는 학생들에게 낙서는 가볍게 삶의 숨통을 열어 주는 즐거운 놀이가 되는 것이다.

낙서는 학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창의성 발달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특정한 의도 없이 시작되는 낙서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흔적이다. 학생들은 낙서하는 동안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끼게 되고 무엇이든 생각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표현할 수 있는 상상의 날개를 펴게 된다.

사실 과학적이고 주지적인 교과를 강조하고 있는 학교교육의 현실에서 지금까지의 교육은 상상과 독창성 대신에 기계적·획일적 지식의 습득에 치우쳐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적·획일적 지식 습득의 틈바구니에서 끊임없이 학생들은 자유롭게 낙서를 해 왔다. 학생들의 자유로운 낙서는 도구와 재료에 한정되고 손재주와 근면한 노력의 결과인 예술작품으로 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상력의 근원이자 직관적 사고의 원초적 표현 방법으로서 충분히 예술성을 지니고 있으며 학생들의 창의성 발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낙서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비판의 기능을 담당한다. 낙서가 최초로 예술작품으로 등장한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작품 ‘L.H.O.O.Q.’에서였다. 모든 전통적 가치를 전복하려던 이 작품은 전통적인 예술 자체에 대한 반어적 논평으로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19세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낙서화(graffiti art)’는 낙서가 핍박받고 박탈당하는 힘없는 소시민과 하층계급이 정치적·사회적 불만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자기 삶을 확인하고 자기 존재를 밖으로 드러내는 수단이 되어 대리 만족의 기능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낙서의 교육인간학적 과제

이모티콘을 이용한 학생들의 낙서.
학생의 입장에서 낙서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교육자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낙서는 부정적인 기능도 있지만, 학생들의 진솔한 내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귀중한 자료다. 또 학생들에게는 개인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즐거움을 주며 삶의 숨통을 열어 주는 즐거운 놀이이다. 무엇보다 낙서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키우고 예술적 직관력과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초보적인 활동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 학생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적 풍토 형성을 위해 교육자는 학생의 입장에서 낙서 현상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학생들의 부정적인 낙서를 줄일 수 있는 올바른 지도가 필요하다. 욕이나 폭력, 남의 비방과 성적인 놀림 등 자신에게는 욕구를 해소하게 해 주는 재미있는 낙서가 다른 사람에게는 심리적인 피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학생들이 알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소극적이고 개인적인 낙서보다 상대와의 적극적인 만남을 통해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감정을 해소하고 상호관계를 더욱 긍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공공장소에서 행해지는 익명의 낙서에 대한 지도도 필요하다. 특별실의 책·걸상, 화장실, 복도나 계단의 구석진 벽 등의 낙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피해가 될 뿐 아니라 페인트칠을 다시 하거나 교체해야 하는 물리적 피해도 발생하게 됨을 학생들이 알게 해야 한다.

이와 함께 학생들의 창의적인 낙서를 허용하는 교육적 배려가 필요하다. 자신도 모르게 낙서하는 학생들에 대해 교사들이 부정적인 태도를 일방적으로 취할 때, 학생들은 낙서의 긍정적 기능인 심리적 배설과 다양한 체험, 그리고 재미있는 놀이를 음성적인 것으로 치부하게 된다. 또 눈치를 보게 되며 인간적인 본성의 자유로운 발현을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자기 부정의 결과를 초래한다.

최근 디지털 매체의 활용을 통해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고 있는 낙서에 대한 사회적·교육적 관심과 지도가 필요하다. 요즘 학생들은 책상 위에 낙서하기보다 책상에 구멍을 뚫어 그 아래에 휴대폰을 두고 낙서하듯 문자를 주고받는다. 공책 낙서에도 그림과 글자와 함께 인터넷 채팅과 휴대폰 문자의 이모티콘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교실 구석진 담벼락에 담임교사를 욕하는 낙서를 써 감정을 해소하던 학생들은 이제 휴대폰으로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고 인터넷에 담임교사 안티카페를 만들어 ‘욕 게시글’을 올린다. 은밀한 화장실에서 남녀 성기를 그리며 성적 호기심을 해소하던 학생들은 지금 인터넷에서 야한 사진이나 동영상을 다운받아 보면서 호기심을 해소하고 있다. 과거의 학생들은 연필과 볼펜으로 낙서했지만, 현재의 학생들은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휴대폰의 문자와 앱을 활용해 낙서한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 인터넷 중독이나 휴대폰 증후군과 같은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이제 학생들의 디지털화된 낙서는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서고 있다. 연예인 팬카페 운영 및 왕따의 안티카페 운영, 불법 다운로드, 무분별한 악성 인터넷 댓글, 그리고 그로 인한 자살이나 폭력, 마녀사냥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은 학생들의 삶에도 낙서의 또 다른 유형으로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의 다양한 삶의 욕구와 충동들을 배설하고 해소하는 낙서와 같은 방법들이 급변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어떠한 변환의 과정을 겪고 있는지, 올바른 교육적 대처 방안은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를, 앞으로 가정과 사회, 교육계가 공동의 관심을 가지고 협력하는 가운데 지속해야 한다.⊙

<이 글은 한국교육철학회에서 발간하는 교육철학 48집에 게재한 글을 수정·재구성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