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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의 하나회 해체 20년의 明暗

醉月 2013. 4. 2. 01:30

김영삼 정부의 하나회 해체 20년의 明暗

글 :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 ‌1993년 4월 군인아파트에 하나회 명단 살포, YS정부의 군개혁 가속화 계기 마련
⊙ ‌쿠데타 모의설, 합참 회식사건 등으로 하나회 조직 동정여론도 잃어
⊙ ‌하나회는 七星會가 시초…朴正熙 대통령의 비호로 성장
⊙ ‌姜昌成 보안사령관, ‘윤필용 사건’ 수사하다 처음으로 발견
⊙ “김영삼 정부의 사조직 철폐를 폄하해서는 안 돼”
하나회 핵심 주역들. 앞줄 오른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김진영 전 육참총장, 노태우 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 이종구 전 국방장관.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금융실명제 실시와 함께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꼽는 것이 ‘하나회’ 해체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이전 군부 정권과의 차별화를 작심한 듯 군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김 전 대통령은 하나회 관련 군(軍) 수뇌부에 칼을 댄 것을 필두로, 12·12를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해 군내에 남아 있던 12·12 가담 인사들을 모두 제거했고, 1974년 이래 20조원 이상을 쏟아부은 군 전력증강사업인 ‘율곡사업’에 대해서도 수사토록 했다. 이와 함께 육군이 독점하다시피 해 온 합참의장에 공군대장(李養鎬)을 임명하고, 기무사 창설 이래 처음으로 ROTC 출신(林載文)을 기무사령관에 앉혔다.

군의 최대 환부(患部)로 떠올랐던 하나회 등 사조직을 도려내고 군의 정치색을 씻어내 군에 대한 확실한 문민통제 장치를 마련했다고 확신한 김 대통령은 1993년 10월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올해는 신한국군의 원년(元年)”이라고 선언한다.

3월 8일은 5·16 이래 되풀이돼 온 군부의 정치개입을 차단한 하나회 해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꼭 20년이 된다. 《월간조선》은 하나회 사건 20년을 맞아 군의 대표적 사조직, 하나회의 조직과 해체가 우리 군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조명해 보기로 했다.

《월간조선》이 취재를 시작하자, 하나회의 한 핵심 인사는 “하나회는 12·12사건을 주도해 세상을 뒤집은 정치조직으로 철저하게 매도당했다”며 “흘러간 것을 재탕하면 하나회를 전혀 모르는 육사(陸士) 후배들과 국민들도 있고, 군에 나쁜 영향만 줄 것”이라며 취재를 거부했다.

그러나 비(非)하나회 출신의 한 예비역 장성은 “군대 사조직의 폐해를 경계하는 의미에서 하나회 사건을 20년 만에 반추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며 “먼 훗날 하나회 해체를 평가하는 역사학자들을 위해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 전격 경질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 1월 20일 청와대에서 권영해 안기부장(오른쪽 두번째)으로부터 안기부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김영삼(YS) 정부의 하나회 해체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취임 10여일 만인 1993년 3월 8일, 김영삼 대통령은 박정희(朴正熙) 정권 이래 군부내 핵심 사조직 ‘하나회’ 출신인 김진영(金振永·육사 17기)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서완수(徐完秀·육사 19기) 기무사령관을 경질했다. 군개혁의 서막이었다.

YS 정부 출범 직후 5개월 동안 질풍노도처럼 진행된 숙군(肅軍)작업은 권영해(權寧海·육사 15기) 국방장관을 빼 놓고는 얘기가 안 될 정도다. 그는 하나회 숙정과 율곡 및 진급인사 비리척결, 12·12 관련자 예편조치 등 ‘군부 대수술’을 집도했다.

김 대통령의 군개혁은 어떤 배경에서 이뤄진 것일까. 당시 정치권 인사와 군 관계자들은 사전 시나리오설, 괘씸죄설, 개혁저항세력 제거설, 국면전환용 카드설 등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런 분석들은 나름대로 근거를 갖고 있다.

김 대통령의 후보 시절 정치행정 개혁안을 입안했던 주돈식(朱燉植)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김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이미 숙군의 청사진을 갖고 있었다”며 “사실 김 대통령은 1987년 대선 때부터 12·12사태 피해자인 정승화(鄭昇和) 전 육참총장과 깊은 교분을 갖고 군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사조직을 통해 군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했다.

박관용(朴寬用)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군 문제에 대해 김 대통령에게 조언해 온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었다”며 “김 대통령은 하나회 문제가 나오자 정확하게 해임 대상자를 지목했다”고 밝혀 사전 시나리오설을 뒷받침했다.


괘씸죄?

한 예비역 장성은 “하나회 척결도 폐해가 심한 일부 정치군인만 솎아내는 것이었지 하나회 전체를 치는 것은 아니었다”며 “다만 여론에 민감한 김 대통령이 지나치게 군을 정치에 이용했고, 그 와중에 문민 군부실세 그룹들의 군권장악 야심이 가세해 마녀사냥식 숙정이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당시 김진영 육참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이 괘씸죄에 걸렸다는 이야기도 설득력을 얻었다. 김 대통령은 후보시절인 1992년 7월 31일 대전에 간 길에 군의 새 메카인 계룡대에서 조깅을 함으로써 예비통수권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싶어했다.

김 총장은 김 후보가 뛰는 앞줄에 여군하사들을 몇 명 배치하는 등 꽤 세심한 배려를 했지만, 정작 자신은 조깅 대신 교회의 아침기도에 참석했다. 서완수 기무사령관은 1992년 민자당 대선후보 경선 때 김 대통령이 후보로 지명되는 데 대해 부정적이었고,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YS 불가론’을 폈다. 당시 계룡대에 근무한 장성의 말이다.

“김 총장은 김 대통령과 지나치게 밀착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습니다. 김대중(金大中) 정주영(鄭周永) 후보가 어떻게 나올지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죠. 1987년 대선 때는 노태우 후보 지원을 위해 군인 부인들까지 동원됐었는데, 김 대통령 진영으로서는 대단히 섭섭했을 겁니다.”

1992년 9월 18일 노 대통령은 민자당 탈당 및 중립선언을 한 뒤 기무사에 여당후보를 은밀히 지원하라는 지침을 내려 주지 않았다. 그러자 방향을 잃은 기무사가 김영삼 후보에 대한 중립 또는 소극적인 협조로 일관하다 화를 입은 것이다. 특히 기무사는 권영해 국방차관이 김 대통령 취임 전 상도동에 출입하는 사실을 포착하고 그의 재산형성 비리를 수집해 보고하려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3월 9일 오후 계룡대 연병장에서는 제29대 김진영 총장의 이임 및 전역식과 제30대 김동진(金東鎭) 총장의 취임식이 거행됐다. 김동진 총장과 함께 열병용 세단에 올랐던 김 총장은 잠시 후 단상에 올라 전역사를 시작했다.

“19세의 철모르는 소년의 몸으로 육군의 일원이 된 뒤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36년의 긴 세월 동안 오직 군인을 천직으로 알았습니다. (중략) 육군은 신한국 건설에 적극 동참해 사회와 역사 발전의 초석이 되기를 간곡히 당부합니다.” 2분도 걸리지 않은 짤막한 전역사였다. 정치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문구도 전혀 없었다. 하나회의 적통(嫡統)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진영의 별 넷은 그렇게 떨어졌다.

3월 9일 오전 김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모두 깜짝 놀랬재.” 그가 임기 내내 행했던 ‘깜짝쇼 인사’의 상징처럼 된 이 말에 긴장된 회의장 분위기는 한순간에 깨졌다.


군인아파트의 油印物

1993년 초 육사 31기생들이 동기회장 선출을 두고 하나회와 비하나회로 나뉘어 물리적 충돌까지 빚었던 사건이 발생했다. 사태는 양측이 한 선술집에서 맥주병이 깨지고 바닥에 뒹굴며 난투극까지 치르는 소동을 벌인 뒤에야 다소 진정되었으나, 이미 동기생들 간의 앙금은 씻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1993년 4월 2일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아파트에 ‘하나회 명단’이 살포됐다. 하나회 명단 살포는 ‘군정 종식’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김영삼 정부가 대대적인 숙군 작업을 하는 계기가 됐다.

1993년 4월 2일 오전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아파트촌.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바쁜 출근길에 나섰던 일부 장교들은 우편함과 승용차 윈도브러시에 꽂혀 있는 이상한 유인물을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육사 하나회 회원’이란 제목의 A4용지 크기 유인물 10여 장이었다.

유인물에는 현역 중장급인 육사 20기부터 중령급인 36기까지 각 기대표를 비롯해 기별로 7~11명씩 모두 142명의 이름을 타자기로 찍어 복사한 것이었다. 문서는 출근하는 장교들이 가져와 국방부와 합참에 즉각 퍼졌으며, 다시 복사돼 곧 육군본부와 전후방 부대에까지 전달돼 파문이 확대됐다.

1973년 윤필용(尹必鏞)사건 이후 26기를 끝으로 명맥이 끊어진 줄 알았던 하나회가 36기까지 뿌리를 내리고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 군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나회 핵심부에 대한 숙정으로 술렁이던 군심(軍心)은 이 사건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4월 13일 이 사건은 마침내 신문 사회면을 커다랗게 장식했다. 청와대가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등 사건이 확대되자 권영해 국방장관은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했다. 난상토론 끝에 강경대처 방침이 정해졌다.

4월 17일 대전의 육군 교육사 지원처장 백승도(白承道·육사31기) 대령이 자신의 ‘단독행동’이라며 자수했다. 수사는 급진전됐다. 육군은 5월 10일 명단에 오른 142명 중 105명이 하나회원으로 확인됐다며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하나회원들은 이후 5년 동안 진급과 보직에서 철저히 불이익을 받았다.

YS 정부의 숙군 회오리를 몰고 왔던 하나회 명단 살포사건은 5년이 지난 지금 누가, 누구의 지시로 명단을 살포했는지, 명단을 뿌린 배경이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의문투성이의 사건’이 돼 버렸다.

백승도 대령은 파면되지 않고 징계위원회를 거쳐 연대장으로 보직받았고, 1998년 2월에는 초급장교 시절 함께 근무했던 임동원(林東源·육사13기) 외교안보수석비서관에게 선발돼 청와대(외교안보수석실 육군담당관)로 갔다. 그는 2004년 10월 소장 진급심사에서 탈락해 이듬해 2월 전역했다.

권영해 전 장관의 국방차관 시절 보좌관을 지낸 김국헌(金國憲) 전 국방부 군비통제관(예비역 육군 소장)은 “당초 권영해 장관은 하나회 해체를 정기 인사를 통해 군 조직을 흔들지 않고 차분하게 하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며 “그러나 ‘하나회 명단 살포 사건’으로모든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됐고, 언론 보도로 사건이 확대되면서 YS는 하나회 조직 전체에 손을 대는 ‘망나니춤’을 추게 됐던 것”이라고 했다.


하나회 쿠데타 모의설 ‘모락모락’

전두환 대위가 박정희 대통령과 처음 인연을 맺을 때의 사진. 5·16 이후 최고회의의장 박정희 소장은 육사8기 윤필용 중령(앞줄 가운데)을 비서실장으로, 전두환 대위(뒷줄 오른쪽 첫 번째)를 민정담당비서, 이낙선 소령(앞줄 오른쪽 첫 번째)을 공보담당비서, 조상호를 의전비서로 두었다.
YS 정부가 출범한 지 5개월이 채 안 된 1993년 7월 중순 국군기무사령부는 비상상황에 돌입했다. 교육사령부 참모장 최승우(崔昇佑·육사 21기) 소장을 중심으로 한 전·현역 하나회 장성들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정보보고서 때문이었다.

문제의 보고서는 기무사가 자체 입수한 것이 아니라 청와대에서 “기무사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는 호된 질책과 함께 내려온 것이었다. 군부 내 쿠데타 방지 임무를 담당하는 기무사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용지 수십 장 분량의 이 보고서는 쿠데타 모의자들의 인적사항과 접촉일시 등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보고서 내용은 이렇다.

“4월 17일 정기인사 시 육본 인사참모부장에서 대전의 교육사 참모장으로 전보된 최승우 소장이 3월 초 전격 해임된 김진영 육참총장과 현역인 K중장 등과 함께 군사반란으로 문민정부 전복을 꾀하고 있다.

이들은 대전의 W다방 등에서 현역 및 예비역 동조자들과 비밀리에 수차례 회합해 왔다. 쿠데타 모의그룹은 미국 하와이에 사무실을 얻어 놓고 거사자금을 관리하고 있으며, K장군의 부인이 자금관리책으로 연루돼 있다.”

최 소장은 하나회 핵심으로 수도권 부대 사단장과 요직인 육본 인사참모부장을 역임하며 동기생 중 선두를 달려왔다. 그러나 그는 당시 인사참모부장으로는 처음으로 진급에 실패하고 교육사로 좌천된 뒤 기무사의 요시찰 대상에 올라 있었다. 청와대는 안기부가 올린 보고서에 극도로 긴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인 7월 9일 최 소장의 동기인 이충석(李忠錫) 합참 작전부장이 YS 정부의 군개혁을 비판한 이른바 ‘합참 회식사건’이 벌어져 여진이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기무사는 진상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한국통신과 전화국의 협조를 받아 최 소장의 지난 수개월 동안의 국제전화 및 카폰을 포함한 모든 전화통화 내용을 일일이 체크했다.

조사 결과, 기무사는 안기부의 보고내용이 근거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청와대에 보고했다. 쿠데타 모의설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최 소장은 93년 10월 인사에서 사실상 전역대기 자리인 육본 정책위원으로 밀려났고 1년 뒤 군문을 떠났다.

최씨는 지난해 2월 기자와 만나 “쿠데타설은 문민 군부 실세 그룹이 하나회를 치기 위해 기획한 것”이라며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육본 정책위원으로 있던 1994년 여름 기무부대 장교가 나를 찾아와 안기부가 올린 정보보고서를 보여주더군요. 그는 나에게 ‘처음에는 장군님이 굉장히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직접 조사해 보니 좋은 얘기만 들려 보고서를 보여주고 싶었다’며 ‘안기부에 있는 L장군이 만든 것’이라고 합디다. 전혀 터무니없는 일이었기에 보고서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그 뒤 L장군이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며 나에게 사과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회 명단살포 사건 때 내가 인사참모부장으로 있으면서 헌병감실 대신 법무감실에서 조사해야 된다고 강하게 버텼거든요. 새 파워그룹 입장에서는 내가 하나회 제거의 걸림돌로 판단됐을 것입니다.”

최승우 소장은 사단장 시절 ‘부대에 떨어진 낙엽을 쓸지 말라’고 말했을 정도로 낭만적인 지휘관으로 유명하다. 그는 현재 충남 예산군수로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최 장군은 “범죄자에게도 변호사를 통해 변명의 기회를 주는데, 하나회는 그렇지 못했다”며 “YS 정부의 이원종(李元鐘) 수석을 만난 자리에서 적장도 자기 편으로 만드는 판인데 문민정부는 굴러온 복도 차 버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권영해 장관이 교도소에 있던 내게 사죄의 편지를 보내신 적이 있다”며 “우리는 김재창 장군 자제 결혼식 때 만나 옛날의 감정을 모두 털어 버렸다”고 했다.


합참회식 사건에서 불만 토로

윤필용 전 수경사령관(앞줄 오른쪽 첫 번째)이 8개 죄목으로 기소돼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고개를 떨구고 있다. 윤 사령관 옆이 손영길 준장, 두 사람 건너가 권익현 대령이고 뒷줄 맨 오른쪽이 신재기 대령이다. 윤필용 장군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2년 뒤 석방됐다.
쿠데타 모의설은 당시 군부 내에서 일고 있던 김영삼 정부의 숙군 방식에 대한 비판과 하나회에 대한 동정여론을 일시에 잠재우는 계기가 됐다. 하나회로서는 마지막 입지를 잃은 셈이었다. 쿠데타 모의설 직전에 벌어진 합참회식 사건은 1993년 7월 9일 일어났다. 이날 저녁 7시경 서울 성동구 옥수동의 대형갈비집 S가든에서 이양호 합참의장의 취임 한 달을 맞아 합참의 소장급 이상 육·해·공군 장성 20여 명의 회식자리가 마련됐다.

술자리가 서서히 무르익어 가고 있던 저녁 8시30분경이었다. 갑자기 테이블 한쪽 끝에서 큰소리가 나자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쏠렸다. 작전부장 이충석(李忠錫) 소장이었다.

“군을 이런 식으로 막해도 돼? 선배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뭐냔 말이야. 소신도 없고, 다 죽었어. 정부가 장군들을 함부로 대하니까 외부에서도 제멋대로 군을 매도하잖아. 이래도 되느냐 말이야.”

순간 이 의장을 포함한 참석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이 소장은 내친김에 할 말을 다 하겠다는 듯 손으로 탁자를 치면서 언성을 높였다. 참다 못한 편장원(片將圓) 합참1차장과 하나회 선배인 김상준(金相駿) 합참 작전본부장이 “이 장군, 조용히 해. 자리에 앉아”라고 제지했다. 당혹감이 좌중을 휩쌌지만 당시 군내에서는 하나회 숙정에 대해 쌓인 불만이 만만찮던 때라 모두 그 정도에서 애써 끝내려 했다. 그러나 흥분한 이 소장은 찻잔을 집어던졌고 회식자리는 엉망이 돼 버렸다.

회식사건은 권 장관에게 직보됐고 1주일 만인 16일 이 소장은 전격 해임돼 두달 뒤 전역했다. 권 장관 등 군 수뇌부는 이 사건을 군개혁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합참회식 사건은 다시 한번 하나회 제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증폭시킨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한바탕 숙정의 회오리가 지나간 뒤인 94년 10월 25일 경북 영천의 제3사관학교에서는 교장 오형근(吳亨根) 전 육군3사관학교장(육사 22기·예비역 육군 소장) 이임식이 열렸다. 그가 옮겨갈 보직은 1군 부사령관으로 사실상 전역대기나 마찬가지였다. 오 소장은 생도들과 가족 외빈들 앞에서 원고도 없이 이임사를 시작했다.

“지금 군에서는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군 수뇌부는 보호막 뒤에서 자신을 지키는 데 급급하고 부하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군은 무방비 상태로 매를 맞았습니다. 일부 정치권도 군의 자존심을 짓밟고 사기를 저하시키며 분열을 조장했습니다. 군이 과거에 무슨 큰 혜택이라도 받은 것처럼 국민이 잘못 알고 있기까지 합니다. 이제는 군 스스로 목소리를 내 국민에게 실상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오 소장의 이임사는 며칠 뒤 군수뇌부에 보고됐다. 처음에는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지만 한 달 뒤인 11월 24일 언론에 오 소장의 이임사가 보도되자 분위기는 바뀌었다. 국방부는 “계통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지 않고 피교육생인 초급장교들 앞에서 수뇌부를 겨냥한 것은 명백한 군기강 저해행위”라고 규정했다. 오 소장은 곧 자진해서 전역했다.


호랑이를 키운 朴正熙

1995년 12월 26일, 김영삼 대통령은 하나회 등 군부를 숙정, 새로 임명한 김동진 합참의장, 윤용남 육참총장의 삼정도에 수치를 달아 주고 있다.
군의 사조직은 단순한 친목모임이 아니라 구성원 간의 배타적 이익을 위해 조직된다. 이런 사조직이 확대·발전하면서 군부 내 일정한 인맥을 형성한다. 지연·학연·장교 임관과정 그리고 근무지에서 맺어지는 군부인맥은 한국군의 창군(創軍) 과정부터 있어 왔다.

맹호사단 초대 재구대대장을 지낸 박경석(朴慶錫) 전우신문사 회장(예비역 육군준장)은 “세계 군사상(軍史上) 유례없이 95%의 장성진급을 기록한 초창기 군사영어학교 출신 장성들은 군의 요직을 장기간 독점하고 있었다”며 “이 같은 인사적체는 현대적 개념의 군사시스템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파행이었으며 이로 인한 폐단은 급기야 육사 8기생의 하극상 사건과 군사쿠데타로 이어지는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고 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 장성에 의해 군 수뇌직이 장기간 독점되었기 때문에 후진들은 진급과 진출의 기회를 놓침으로써 비능률과 함께 불평불만이 군 전체에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가령 육사 8기생의 경우 소위에서 소령까지 승진하는 데 4년이 걸린 반면, 소령에서 중령으로 한 계급 승진하는 데는 그 두 배인 8년이 걸렸다. 1960년 김종필(金鍾泌) 중령 등에 의한 8기생 16인의 하극상 사건은 마침내 5·16 군사쿠데타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박경석 장군은 “박정희(朴正熙) 군부의 특징은 상상을 초월하는 영남권 편중인사”라며 “가령, 1975년 장군진급에 있어서 진급자 22명 중 영남 출신이 거의 대부분인 17명을 차지했고 호남권은 남도와 북도가 각각 한 해 걸러 1명씩 진급시켜 차별을 둠으로써 훗날 광주사태의 원인(遠因)으로 작용했다”고 했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권력실세인 8기생 출신의 독주를 견제하고 권력누수를 미리 방지할 목적으로 4년제 육사출신인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하나회를 성장시켜 친위조직으로 육성했다. 따라서 이 무렵 8기생에 의해 ‘알라스카 토벌작전’이란 이름으로 축출된 이북출신과 육사5기생들은 완전히 거세되면서 8기생 권력 대표로 윤필용(2010년 작고) 전 수경사령관과 하나회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이 권력실세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윤필용은 수경사령관 직위에서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군부 실세들과의 유착관계를 맺고 수도권 주요 부대의 황금 직위로 알려진 모든 권력과 연관된 요직 독점에 성공했다. 당시 권력실세인 윤필용과 전두환의 직속상관인 거의 모든 고위 장성들은 영남권이었으며, 그들은 상급자이면서도 실세 하급자에게 이끌려 가는 수모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七星會

1972년 3월 27일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서울, 대구, 부산등지에서 17년 동안 장기 잠복활동해 온 고정간첩단 일당 22명을 검거했다는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하나회의 뿌리는 1961년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孫永吉), 정호용(鄭鎬溶), 권익현(權翊鉉), 최성택(崔性澤), 백운택(白雲澤) 등 육사 11기생들이 친목모임으로 결성한 ‘칠성회(七星會)’라고 한다. 전두환은 육본에서 박정희 소장을 단독으로 면담하고 혁명의 취지를 공감한 후, 육사 생도들을 동원해 5·16 군사혁명 지지시위를 벌였고, 이는 박정희 소장의 관심을 끌었다. 전두환 대위는 그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민원실 비서관으로 지근 거리에서 박 대통령을 보좌한다.

강창성 장군이 펴낸 《일본·한국 군벌정치》에 따르면, 4년제 정규육사 1기생들인 육사 11기생들은 이전 사관학교 졸업생들과 달리 강한 동료의식, 엘리트의식으로 무장했다. 그들은 융통성 없는 ‘원칙장교’로 불렸고, 후배들로부터도 실질적인 최고 선배로 대접받았다.

이들은 일찍이 정치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육사 11기생들의 재학 중 6차례나 육사를 방문했고, 그들이 일선에 배치된 후에는 일부 사단장·군단장과 군사령관으로부터 “선배는 무능하며 도둑놈이고, 너희들은 군의 참신한 등불”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성장했다.

박 대통령은 5·16 군사혁명을 주도한 육사 8기생들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이들을 친위세력으로 키웠다. 이들은 남모르게 정규육사 출신 중 영남 출신을 중심으로 후배들을 포섭해 조직을 확대하면서 이름도 ‘하나회’로 바꿨다.

하나회는 비밀 점조직이었기 때문에 문서화된 강령(綱領)이나 명단 등은 없지만 입회시에 엄격한 심사를 받았다고 한다. 회원들은 위기 때 정식 지휘계통보다는 사조직의 명령을 우선 따르도록 다짐을 받았다.

하나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충성을 맹세하며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엄청난 세력이 되었으며, 서로에 대해 ‘형님’이라는 암호명으로 하나회 멤버임을 과시했다. 강창성 장군은 그의 저서에서, 하나회 회원들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직급에 따라 승용차, 지휘봉 등을 받기도 했고, 일부는 ‘일심(一心)’이란 휘호와 함께 지휘봉을 전달받기도 했다. 1973년 1월 육사 11기생으로는 처음으로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 최성택 등 4명이 준장으로 진급했고, 박 대통령은 그해 2월 전두환과 손영길을 청와대로 불러 식사를 함께 하며 승용차(크라운 4기통 세단)와 금일봉을 전달했다.

이들은 1963년 7월 6일을 기점으로 육사 8기를 몰아내기 위해 ‘7·6 친위 쿠데타’를 기획하였으나 실패했다. 동향 출신 세력을 키우고자 한 박정희는 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후 육군사관학교의 각 기수를 내려오면서 주로 경상도 출신 소장파 장교들을 대상으로 3~4명씩 회원을 계속 모집했다.

하나회 회원들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보안사령부 내사과 등의 진급 담당 요직을 점거해 승진이나 자리이동 때 선배가 후배를 추천하고 밀어주는 식으로 군내 요직을 독점했다.


全斗煥, 특진케이스로 장군 진급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윤필용 수경사령관의 독단과 인사개입이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계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가 영남 출신이 아닌 경기도 포천 출신의 8기 선두주자 강창성(姜昌成) 소장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함으로써 윤필용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강창성은 혁명주체와 무관한 야전군 출신의 군인이었다. 1972년 10월 중순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대령과에 나타난 하나회 손영길 대령은 윤필용의 메모를 가지고 대령과장인 박경석 대령에게 내밀며 “윤필용 장군의 희망사항”이라며 명단을 건넸다.

거기에는 하나회 신참 대령 명단이 적혀 있었으며, 8명 모두 연대장 가용자로 선발해 줄 것을 요구했다. 보병 대령이 장군 진급권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보병 연대장이 필수 코스이기 때문에 10대 1의 경쟁이었다. 따라서 연대장 가용자 선발심사는 장군 진급 예비심사나 다름이 없었다. 인사운영감실 대령과장 박경석 대령은 이 심사위원회의 간사이기에 실무자에 지나지 않았다.

위원장엔 강직하기로 소문난 육사 8기생 강신탁 소장이 임명됐으며, 위원은 1, 2, 3군 인사처장인 준장급이었다. 1972년 10월 중순 이 심사가 시작됐다. 윤필용 메모는 대령과장인 박경석 대령에 의해 찢겨져 없어졌고, 심사는 공정하게 진행됐다. 그 결과, 윤필용 메모 가운데 6명이 심사에서 탈락했다. 그러자 수경사령관 윤필용과 하나회 쪽에서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 여파는 뒤이어 실시된 장군 진급 심사에 반영이 됐다. 장군 심사 마지막날, 이미 선발된 대령과장 박경석이 윤필용계의 김성배로 바꿔치기된 것이다. 김성배는 하나회원은 아니지만 그들과 밀착관계에 있는 간부후보생 출신이었다. 대령 진급 또한 대령과장인 박경석 대령보다 3년이 뒤졌다.

이 진급심사에서 하나회 핵심멤버인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 최성택 등 모두가 특진케이스로 장군이 됐다. 예비역 장성들에 따르면, 전두환 대통령의 육군대학 성적이 전체 수료인원 가운데 최하위권이라 정상적인 심사를 했다면 결코 진급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결과가 공개되자 육군 내 장교들의 분노와 불만이 고조됐다. 따라서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진급에 얽힌 비리를 수사하기 시작했다. 내사 결과 엄청난 부정비리가 개재돼 있음을 포착하고 수사를 확대하던 와중에 ‘윤필용 사건’이 터졌다.

윤필용 사건은 1973년 4월 당시 수경사령관이었던 윤필용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 대통령은 노쇠했으므로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군 간부들이 쿠데타 모의 혐의로 구속돼 처벌받은 사건이다. 이 자리에 동석했던 신범식 당시 서울신문사장이 그 사실을 박종규(朴鍾圭) 경호실장을 통해 박 대통령에게 보고함으로써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령부에서 조사한 것이다.

윤필용을 비롯 손영길(수경사 참모장으로 예편), 김성배(육본 진급인사실 보좌관으로 예편) 등이 군법회의에 회부돼 모두 유죄판결을 받고 파면되는 등 장교 30여 명이 옷을 벗었다. 그런데 윤필용 사건 수사 도중 ‘하나회’의 실체가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영남권 대통령 친위세력이 숙청되면 대위기가 온다” “경상도 출신 장교들을 모두 제거할 작정이냐”고 진언했고, 박종규 실장의 도움으로 중도에서 이 조사는 중단됐다. 사태는 오히려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이들에게 역습을 당하는 형국으로 역전된다.


姜昌成 보안사령관, 하나회원 구제

그해 3월 25일,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참모장 김귀수(金貴洙) 준장, 보안처장 김종진(金鍾振) 대령, 비서실장 박영선(朴永善) 대령, 연구실장 정상문(鄭相文) 대령 등 네 참모의 건의를 받아들여 육사 11기 정호용(鄭鎬溶·전 국방장관), 육사 12기 박준병(朴俊炳·전 자민련 부총재), 박세직(朴世直·전 재향군인회장) 세 사람의 전역을 재고해 달라고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박 대통령은 “강 장군이 세 사람을 잘 아느냐”고 물었고, 강 사령관은 “육본 보병과장 시절 만난 박준병 대령만 면식이 있을 뿐, 나머지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그제서야 부드러운 눈빛을 띠더니, “임자 마음대로 해!”라며 예편 대상에서 세 사람의 이름을 찾아내 펜으로 주욱주욱 긋고는 ‘생(生)’이라고 쓰고, ‘희(熙)’라고 서명했다.

강창성 보안사령관의 아들인 강규형(姜圭亨) 명지대 교수는 “아버지(강창성 의원·2006년 작고)는 윤필용 사건을 수사하다 육사 사조직 하나회도 수사했었다”며 “1980년대 초 하나회 리더인 전두환 장군이 권력을 잡자 아버지를 투옥했다”고 했다.

강 교수는 “아버지는 생전 증언을 통해, (영등포)교도소에서 삼청교육이라며 젊은 죄수들과 함께 봉체조에 원산폭격(체벌의 일종)을 받았다”며 “74kg이던 아버지의 몸무게는 54kg으로 줄고 당뇨까지 얻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 출신으로 5공초기 핵심이었던 허화평(許和平) 전 의원은 “우리는 강씨에게 관심조차 없었다”며 “교도소에서 강씨가 주장하는 그런 교육은 없었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한편, 김대중 내란음모 관련 사건으로 1982년 영등포 교도소에 투옥됐던 이신범(李信範) 전 의원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 교도소에서 일부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순화교육이란 걸 시켰다”며 “강씨는 나이가 많았는데도 눈 위에서 무거운 전봇대를 굴리는 등 심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증언했다.

이 전 의원은 “강씨는 내게 심한 고통과 신군부에 대한 분노를 토로했다”며 “교도관들은 ‘강씨에게 순화교육을 시키는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 보고하라고 청와대에서 지시했다’고 내게 말했다”고 전했다. 강 전 보안사령관의 가혹행위 부분은 당시 교도관이었던 황용희씨가 2010년 발간한 《가시울타리의 증언》에도 등장한다.

강 의원은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사조직을 뿌리뽑지 않고는 군개혁은 불가능하다”며 “사조직 전원에 대한 처벌과 명단공개는 바람직하지 않으나 주동자급은 반드시 색출해 축출해야 하며 단순 가담자도 진급 및 보직상의 불이익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보안사 감찰실장을 지낸 한용원(韓鎔源)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회고록 《1980년 바보들의 행진》에서 “윤필용 사건을 계기로 강창성 장군이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되고 하나회를 비호하던 진종채 장군과 전두환 장군이 보안사령관이 되면서 오히려 반하나회 세력이 판정패를 당한 것”이라며 “이로써 1979년말 정규육사 출신들이 일선 연대장의 3분의 2, 사단장의 3분의 1을 차지했고, 이들은 거의 하나회였다”고 했다.

한 교수는 “박 대통령 사후 하나회의 등장은 이미 예고된 상황이었다”며 “이런 맥락에서 12·12사태는 합수본부라는 공조직이 아닌 하나회라는 사조직의 작품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李鍾九 전 장관, “軍 약화시키면 敵이 넘봐”

윤필용 사건으로 손영길씨 등 일부 회원이 군에서 떨어져 나간 뒤 하나회는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다가 회장이던 전두환 소장이 1979년 보안사령관으로 취임하면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전두환의 상급 장성들은 그 움직임을 포착하고서도 전두환 그룹을 제재 못하고 그를 황태자 취급을 하면서 오히려 상전으로 대했다.

하나회원들의 독주(獨走)에 대해 당시 육사 교관으로 근무했던 이종찬(李鍾贊) 우당기념관 이사장(전 국정원장)은 “(1962년 무렵) 육사 교수부에 근무하던 동료들(소위 ‘청록회’ 멤버)이 하나회의 정치개입에 대해 육사 출신으로서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고 했다.

하나회원에는 초기에 정규 육사 각 기별 상위급 엘리트는 거의 포함되지 않고 중하위급으로 구성된 것을 특성으로 들 수 있다. 이는 전두환의 전횡에 무조건 따라올 수 있는 만만한 장교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분석할 수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전두환에게 적극 후원 또는 파격적 대우를 서슴지 않아 세 확장을 가능케 한 선임 장군들은 진종채, 유학성, 이희성, 차규헌, 윤성민, 황영시, 김윤호, 정진권 등을 꼽을 수 있다.

하나회의 독주는 진급과 보직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보안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 수도군단, 수도권 전투사단 등 이른바 권력형 직위를 모두 독점했다. 또한 그들은 인사법을 아랑곳하지 않고 특진혜택을 줘 진급하게 함으로써 육군 내 위계질서가 뒤바뀌는 기현상까지 초래했다. 따라서 육군의 지휘체계는 정상 채널과 정치군인 채널로 양분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바로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이었다.

이종구(李鍾九) 전 국방장관(육사 14기)은 1967년 경 전두환 수경사 30대대장 시절, 부대대장으로 근무하며 하나회의 총무로 활동했다. 그는 기자가 “하나회 사건 20년을 맞아 우리 군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라고 하자, “하나회 사건이란 없다”며 “김영삼 대통령이 군사독재를 없앤다는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군 수뇌부를 거세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 전 장관은 “1962년 전두환 대통령이 최고회의 민정비서관 시절 연락을 받고 하나회에 가입했다”며 “전 대통령은 ‘육사 출신들이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자’고 격려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1968년 1·21 사태 때 전 대통령(당시 30대대장)이 ‘당신이 연락을 하라’고 해서 총무를 2년간 맡게 된 것”이라며 “군을 약화시키면 정권은 안정될지 몰라도 적이 나라를 넘본다. 정치인들은 이 역사적인 사실과 진리를 꼭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회 해체는 사실일까

10·26사건이 일어나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인사 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10·26사건으로 사실상 최고 후원자였던 박 대통령이 서거하자 하나회 핵심 멤버들은 불안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정 총장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전보시키기 위해 노재현 국방장관과 논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신군부는 하나회에 대한 중대 도전으로 판단했다. 즉, 정 총장의 의도에 따라 하나회 출신 장교들을 전후방 부대로 분산시킴으로써 그들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육사 11기와 12기의 하나회 핵심세력은 정 총장을 선제공격했다. 그들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추석 때 김재규로부터 돈(떡값)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로 연행했다.

12·12 군사반란 이후 하나회 인사들은 군의 핵심 요직에 올랐다. 또한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을 묵인한 이희성을 계엄사령관 및 육군참모총장에, 황영시를 육군참모차장에 직접 임명하였다.

이 사건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됐으나, 그후 김영삼 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하나회원들은 하나회가 1981년에 이미 공식 해체됐다고 주장한다. 하나회가 주도한 12·12쿠데타를 계기로 정권을 잡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청와대 경호실장을 통해 하나회 해체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에 하나회가 해체됐다고 믿는 비하나회 장성이나 장교들은 거의 없다. 그들은 그 이유로 전 대통령이 하나회 해체 지시를 내렸지만, 이에 따르는 어떠한 가시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1992년 말 군내 사조직 파문을 일으켰던 알자회 회원들이 1986년 보안사에 노출됐을 때 조직활동을 다시 할 경우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서약서’를 쓴 것과는 달리, 이 당시 하나회원들은 해체에 따른 어떠한 행위도 강요당하지 않았다. 또 전 대통령은 해체 지시 뒤 줄곧 하나회원들을 요직에 등용했다. 때문에 비하나회 장교들은 1981년의 하나회 해체 지시가 기만술책이었다고 강조한다.

이와 관련해 한 예비역 장성은 “집권기반이 취약했던 전 정권이 정권의 최대기반인 하나회를 해체할 수는 없었다”며 “전 대통령이 하나회 해체 지시를 내린 것은 실제로 하나회를 해산시키려고 한 게 아니라 집권 뒤 군부 내 비하나회 세력의 소외감을 무마하는 한편, 반하나회 성향이 강했던 옛 군부 주축의 예비역장성 모임 ‘성우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명분축적용 제스처였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임기말까지도 하나회의 세력확충에 심혈을 기울였다. 육사 19기의 한 예비역 소장의 증언이다.

“87년 12월 준장 시절, 당시 군의 실세 한 사람(육사 15기)에게서 저녁을 먹자는 연락을 받고 어느 음식점으로 갔다. 거기에는 뜻밖에도 동기생 몇명이 모여 있었다. 선배 장군이 다짜고짜 ‘하나회 가입을 축하한다’고 말하자 동기생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면서 ‘축하한다’고 했다.”




全씨측과 ‘9·9 인맥’들과의 갈등

이러한 하나회 결속력은 6공 들어와 청문회 정국을 거치며 전씨와 노 대통령의 갈등이 빚어지면서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친 전두환계가 대부분인 하나회 장성들이 노 대통령의 처신에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민병돈(육사 15기·중장 예편) 전 육사교장의 1989년 3월 21일 육사졸업식 치사(致辭) 파문이다. 당시 민 교장은 노 대통령을 비롯한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등 고위 장성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치사를 통해 북한과의 관계를 포함한 노 정권의 온건·유화적인 북방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를 빌미로 노 대통령은 1989년 3월 28일 전씨의 심복들인 민병돈 중장과 최평욱 교육사령관(중장)을 예편시키고, 김진영 수방사령관을 교육사령관으로 전보시켰다. 또 그해 말 정기인사에서 전씨와 가까운 고명승(高明昇) 3군사령관을 예편시켰다.

노 대통령은 전씨 인물의 제거와 함께 자신이 9공수여단장·9사단장·수경사령관 재직 시절 거느렸던 부하들(이른바 ‘9·9인맥’)로 군 수뇌부를 점차 채운다. 1990년 6월 군 정기인사에서 노 대통령은 심복인 이진삼(李鎭三) 1군사령관을 육군참모총장에 발탁했다.

이어 4개월 뒤인 그해 10월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민간인 사찰 폭로사건이 일어나자 경북고 후배인 이종구(李鍾九) 전 육참총장을 국방장관에, 9·9인맥들인 구창회(具昌會) 수방사령관을 기무사령관에, 김진선(金鎭渲) 육본 인사참모부장을 수방사령관에, 안병호(安秉浩) 9사단장을 육본 인사참모부장에 발탁해 집권 후반기 군 수뇌부를 대거 ‘9·9인맥’으로 채웠다.

이렇게 친정체제를 구축한 노 대통령은 1990년 후반기에 하나회 해체 지시를 내린다. 군 관계자들은 그 당시 노 대통령이 하나회 해체 지시를 내린 이유를, 군 수뇌부에는 ‘9·9인맥’이 포진했지만, 그 아래에는 친 전두환계의 하나회 장성·장교들이 주축을 이뤘고, 하나회의 전횡에 대한 비하나회 장성과 장교들의 불만이 증폭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진삼 육참총장, 김진선 수방사령관, 안병호 육본 인사참모부장을 주축으로 하나회 해체작업이 시도됐다. 그들은 우선 수도권 주위에 배치된 이른바 ‘충정부대’의 사단장 인사에 손을 댔다. 90년말 정기인사에서 교체되는 충정부대의 사단장을 비하나회 장성으로 임명한 것이다.

충정부대는 수방사 예하사단과 특전사 1·3·7·9여단, 수도권의 17·20·26·30사단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대정부 전복진압과 소요진압 작전에 투입되는 부대들이다. 충정부대는 유사시 수방사의 작전통제를 받는다. 그들은 또 하나회의 온상이었던 수방사의 주요 보직에 하나회원들을 배제시켜 나갔다.

1991년 상반기까지 진행된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대해 하나회원들은 반발했다. 특히 그 당시 하나회의 후배 장교들은 “선배들은 다 혜택을 보고 우리에게 이럴 수 있느냐”며 강하게 반발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회 해체세력과 하나회 핵심 간의 갈등은 이종구 국방장관과 이진삼 총장 간의 알력으로 번진다.

결국 1년여 동안 벌어진 하나회 해체작업, 엄밀하게 말해 하나회의 군내 영향력 축소작업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작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군통수권자인 노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끝까지 뒤를 봐줘야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군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의 뿌리가 하나회였기 때문에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진삼 총장은 육사 15기의 하나회 초기 회원으로 선두주자였으나 5공 때 노태우씨와 가깝다는 이유로 동기생들보다 늦게 중장에 진급한 설움에서 이 작업을 주도한 측면이 강했다는 것이다. 20기 하나회원이었던 안병호 육본 인사참모부장은 하나회원이든 비하나회원이든 능력자를 발탁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하나회 해체작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全斗煥, “내가 무슨 군을 망쳤다고 그러나?”

12·12 당시 노태우 9사단장의 병력이 경복궁 앞에 진주해 있는 모습.
안병호(경남 진주·진주고·육사 20기) 수방사령관은 12·12 당시 9사단 작전참모로 이필섭 연대장·구창회 참모장과 함께 연대병력을 서울까지 동원해 온 공신이다. 노태우 수방사령관 시절 정보처 보좌관, 보안사령관 시절 비서실장으로 보좌하기도 했던 그는 6공의 실세로 꼽혔다.

그는 육사 20기의 선두로 육본 인사참모부장을 지냈다. 92년 2군 부사령관(중장)을 끝으로 경남 남해로 낙향한 안병호 전 사령관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金時敏) 장군을 재조명하는 사업에 골몰하고 있다.

안 장군은 “누구는 나를 6공의 실세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나는 하나회의 6두품에 불과했다”면서 “내가 하나회의 핵심이었다면 왜 군 경력에서 부(副)자가 박정희 대통령(3번)보다 더 많겠느냐”고 했다. 그는 12·12사건 당일 9사단 병력을 지휘해 서울로 올라왔다는 것도 “사실과 다른 이야기”라고 했다. 그의 말이다.

“79년 12월 12일 당일 내 직책은 9사단 작전참모가 아니었다. 보름전 대령진급 예정자로 발표가 났고, 12월 5일 이미 후임자 표순배가 작전참모로 부임해 근무중이었다. 나는 대대훈련(ATT) 훈련통제관으로 나갔다가, 그날 저녁 당시 참모장으로부터 서울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참모장은 ‘서울에 있는 사단장(노태우)이 자신의 차를 사단에 두고 갔으니 사단장 지휘지프를 타고 서울로 와 달라’고 했다. ‘최규하(崔圭夏) 대통령 신변에 문제가 있다’는 말만 듣고 사단장 전속부관과 12월 12일 새벽 3시쯤 지프를 몰고 서울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안병호 장군은 노태우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출마할 당시, 이른바 ‘9·9인맥’에 속한 장성 8명이 전임 대통령을 예로 들며 “잘하실 수 있겠느냐”고 하자 “내가 대통령으로서 능력이 부족하거나 잘못한 게 있다면 여기 있는 후배들이 내 등에 칼을 꽂으라”며 “내가 잘못할 경우, 후배들이 쿠데타를 해도 좋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는 “노 대통령은 죽음을 각오하고 난국을 돌파하는 무서운 사람이었다”고 했다.

안병호 장군은 얼마전 연희동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찾았다고 한다. 그는 전 대통령에게 “각하께서 대한민국 육군을 망쳤다”며 “(각하가) 대한민국 군인과 육사 하나회 출신들을 욕먹였다. 하나회 회원들이 ‘전통’ 쿠데타 도와주자고 열심히 노력했던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전 대통령은 “내가 무슨 군을 망쳤다고 그러느냐”며 더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껏 마음고생하는 회원도 있어

하나회 숙정은 단계적으로 계속돼 2012년 현재 우리 군에는 하나회 출신 장교 또는 장성이 남아 있지 않다. 때문에 군 일각에선 하나회원 중에도 군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인재가 있는 만큼 이들에 대해선 군 수뇌부에서 결단을 내려 선별 구제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었다.

허남성(許南渻) 국방대 명예교수는 “하나회 해체 과정에서 상당수의 인재를 잃은 것이 군 차원에서 아깝다”며 “26기까지 진급했으나 1992년말 준장 1차진급에 들어간 27기 출신 하나회부터 진급에서 배제됐다”고 했다. 그는 특히 육사 27기 가운데 선두주자로 ‘참모총장감’ 1순위로 꼽히던 김용석 중령, 육사 33기인 김열수(金烈洙) 성신여대 교수 등이 일찌감치 군복을 벗은 것이 가장 안타깝다고 했다.

민병돈 전 육사교장(예비역 육군중장)은 “사실상 육사 15기의 하나회는 내가 거의 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동기생 중 윤필용 사건으로 박정기(朴正基) 전 한전사장과 배명국(裵命國) 전 헌정회 사무총장이 잘려 나간 게 아쉽다”고 했다.

그러나 기수별로 구제된 케이스도 적지 않다. 육사 25기의 안광찬(安光瓚) 전 청와대 대통령실 국가위기관리실장(예비역 소장), 황진하(黃震夏) 새누리당 의원(예비역 중장), 육사 29기 이명구 예비역 소장(청와대 국가안보실 비서관), 육사 31기인 임치규(林致圭) 예비역 소장이 그들이다. 임 소장은 합참 전략기획차장(준장)을 거쳐 22사단장(소장), 합참 전력기획부장, 방사청 사업관리본부장 등을 지냈다. 또 현역 가운데 유제승(육사 35기·중장), 김현집(36기·중장) 장군이 남아 있다. 유제승 중장은 독일 육사를 졸업하고 수도군단장으로 있다. 김현집 중장은 합참 작전부장, 28사단장, 3군사령부 작전차장 등 야전지휘관과 정책부서의 요직을 거쳤다.

최승우 전 예비역소장은 “전사를 보면 비록 적군이라도 우수한 적장이 있으면 포용해 자기 사람으로 만들곤 했다”며 “그러나 지금은 아군에 있는 우수한 장수를 적군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재창(金在昌)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육사 18기)은 예편 직전 한 사석에서 “화려하지만 안 떨어지려고 버둥대는 장미꽃보다 버둥대지 않고 순응하며 미련 없이 지는 무궁화꽃이 되겠다”고 말해 주위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하나회원, 철저한 자기반성 해야”

정승화 전 계엄사령관이 1980년 1월 19일 합수부 조사를 받기 위해 호송을 받으며 걸어나오고 있다.
민병돈 장군은 “5·16 이후 처음 하나회를 할 때의 취지는 군의 부패에 대한 저항의식이 강했다”며 “초급장교들이 군을 깨끗하게 하자는 취지로 뜻있는 사람끼리 위아래 기수가 가까워졌던 것”이라고 했다. 민 장군은 “김영삼 정부의 사조직 척결은 이미 하나회가 전두환 대통령 취임 후 사라진 상태에서 친목모임 수준이었기 때문에 명분도 없었다”며 “송장에다 칼질을 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허화평 현대사회연구소장은 “만약 신군부가 권력을 잡으려 했다면 정승화 총장을 잡아넣고 바로 권력을 잡지, 왜 그렇게 긴 과정을 거쳤겠느냐”며 “김영삼, 김대중 양김씨가 우리의 퇴로를 열어 주지 않고 총궐기하겠다는 최후통첩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에 결국 정권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하나회가 오늘날 우리 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는 맞지 않다”며 “오히려 김영삼·김대중 정부 이후 군 통수권이 어떻게 행사됐는가, 어떻게 우리 군의 결정적 전투력 약화를 가져왔는가를 따져 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임규식(林奎植)씨는 한양대 행정대학원 석사논문 <군내 사조직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고찰 및 재평가>에서, “건전한 취지의 사조직이라도 자신들만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이기적 압력단체로 발전할 우려가 있다”며 “비대해질 경우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등 군의 공(公)조직을 마비시키고 와해시킬 수도 있다”고 했다.

임씨는 지난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정체가 드러난 하나회가 12·12사태와 5·17계엄 등을 통해 5공 정권을 창출한 것을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그는 또 현재 일반화된 지역, 출신학교 중심의 사조직도 지휘체계를 문란케 하고 이에 반발하는 세력을 유발, 군의 단결과 화합을 가로막고 있다고 강조했다. 임씨는 따라서 군의 통수계통을 무시하고 다른 장교들에게 소외감과 좌절감을 주는 하나회와 같은 사조직은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씨는 군의 사조직이라고 해서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했다. 동기회 등 일반적인 사조직은 귀속감, 안정감을 주는 등 순기능을 한다고 지적, “사조직을 무조건 해체하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오히려 건전한 사조직을 활성화해야 음성적이고 비밀스런 사조직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단기적으로는 사조직에 대한 통제감독을 철저히 해야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공정하고 효율적인 인사, 진급기준의 공개 등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독버섯 같은 사조직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당시 YS 정부에서 하나회 인사에 간여한 비하나회 출신의 한 예비역 장성은 “군인은 사조직이 아니라 정성적 조직에 충성을 해야 하는 게 기본”이라며 “김영삼 대통령도 처음부터 하나회 전체에 손을 대려는 생각은 없었고, 총장과 기무사령관 인사를 한 후 국민적 인기가 치솟자 12·12 사건까지 쿠데타로 규정하면서 하나회 척결에 속도를 냈던 것”이라고 했다.

허남성 국방대 명예교수는 “하나회 해체를 빙자로 군을 장악하려 했다는 식으로 김영삼 정부의 사조직 철폐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며 “가해자인 하나회원들은 오랜 기간 공조직을 독단한 것에 대해 자기합리화로 일관할 것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반성을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취재지원 : 南泰雄·車彦助 月刊朝鮮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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