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新 한국의 명장_06

醉月 2014. 6. 27. 01:30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인간적인 공예

완초장 이상재

글·한경심 │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사진·박해윤 기자

 

왕골로 자리와 방석, 용기를 만드는 완초 공예는 풀의 색감과 감촉이 그대로 살아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공예품이다. 특히 소품은 어떤 기구도 없이 사람 손으로만 만든 가장 인간적인 공예품이기도 하다. 완초 소품으로 이름난 교동도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완초에 인생을 건 이상재(李祥宰·70) 명장의 작품은 솜씨가 뛰어날 뿐 아니라 색감이나 형태가 매우 아름다워 단번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았다.

이상재는 젊은 시절부터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많이 창작했다. 그는 전통 기술과 창의성을 겸비한 장인이다.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짓고 대나무를 쪼개 발을 엮고, 모시풀로 베를 짜는 것도 자연을 우리 삶으로 끌어들인 것이지만 풀로 엮은 기물만큼 자연미를 간직한 것은 없다. 벼를 닮은 왕골 풀로 엮은 완초 공예품은 마른 식물 줄기인 짚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는, 자연을 가장 잘 간직한 기물이다. 대나무를 이용한 죽세공품처럼 가볍고 시원한 느낌도 주지만 쓸수록 누레지는 그 빛깔은 참으로 정다워 할머니가 쓰던 물품처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한여름 대나무로 만든 자리에 누우면 촉감은 시원하지만 오래 있으면 땀이 찹니다. 그런데 왕골은 땀을 흡수해서 늘 상쾌하지요. 또 왕골은 온기도 보존하기 때문에 겨울에도 차갑지 않습니다. 그래서 왕골자리는 사시사철 쓸 수 있습니다.”

왕골에 대한 자부심을 내보이는 이상재 명장의 설명이 아니어도 어린 시절 대청마루에 깔던 왕골 돗자리에 대한 기억이 다사롭다. 다만 그런 자리가 더위를 식히는 용도로만 쓰인 줄 알았는데, 냉기도 막아주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하긴 일본의 다다미도 골풀이나 부들로 만든 것임을 떠올리면 풀로 만든 자리가 사계절용이라는 게 납득이 간다.

 

이처럼 왕골을 비롯한 골, 볏짚, 밀짚 등 모든 식물 줄기로 짠 품목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방석과 바닥에 까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화도 화문석이나 보성의 용문석처럼 큰 자리는 발을 짤 때처럼 고드랫돌(실패 비슷한 기구)을 이용하거나(강화 화문석), 돗틀을 써서 직물을 짤 때처럼 바디에 끼워서 짠다(돗자리, 보성 용문석). 이에 반해 방석이나 물건을 담아 보관하는 용기인 송동이 같은 비교적 작은 물품은 순전히 손으로만 엮어 완성한다. 이상재 장인은 큰 자리는 짜지 않고 손으로 만드는 완초 세공품만 전문으로 해왔다.

“제 다리가 불편하니 큰 자리는 처음부터 짤 생각을 하지 않고 소품에 주력해왔습니다. 큰 자리는 강화도의 특산품이고 제 고향 교동도는 완초 소품이 특산품이니 자연스러운 선택이기도 하지요.”

 

완초 공예의 고장 교동도

이상재에게 완초 공예는 선택이자 운명이었던 것 같다. 우선 그는 왕골 소품으로 유명한 교동도에서 태어났고, 그가 자라던 때 교동에서는 집집마다 왕골을 엮어 만든 방석이나 자리, 반짇고리, 송동이 등을 부지런히 내다팔았다. 지금은 귀한 자연친화적 공예품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그때는 그저 실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일상용품이었다.

“없어서 못 팔 만큼 만드는 족족 팔려나가던 때였지요. 솜씨가 시원찮으면 자기 집에서 쓰고 솜씨 좋게 엮은 것은 팔려나갔고요. 돈이 되니 누구든 이 기술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그의 집도 할아버지를 비롯해 부모 양친, 위로 두 누이와 남동생까지 모두 왕골을 엮었다. 여느 교동 아이들처럼 그에게 왕골은 자연스럽고 익숙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왕골 엮기가 흔한 일이라 해도 다 좋아할 수는 없는 법이고, 또 솜씨는 제각각이기 마련. 그의 빼어난 솜씨를 생각하면 특별히 재능 있는 핏줄을 타고났을 법하다. 하지만 그의 첫 스승인 어머니는 특별한 솜씨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보통 사람들처럼 부업 삼아 엮어 파는 정도의 솜씨였지요. 아버지도 특별한 솜씨는 아니었고요. 할아버지가 솜씨가 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봤자 담뱃값을 버는 정도였지만요.”

 

할아버지 솜씨를 이어받았으니 굳이 핏줄을 따지자면 격세유전의 재능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그는 ‘보통 솜씨’의 어머니에게 기초를 배웠다. 그러나 그에게는 특별함이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왕골 부업에 뛰어든 그의 첫 작품이 썩 잘 나온 데다 금방 팔려나갔으니. 그러나 진짜 그가 특별한 것은, 자신의 솜씨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한동네 사는 유형식 할아버지가 솜씨가 좋았는데,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그분께 배우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보통 솜씨로 만든 작품도 잘 팔리는 마당에 더 나은 실력을 갖추고자 하는 발심과 이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는 적극적인 선택이 있었기에, 오늘날 많은 완초 장인 가운데 그만이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면을 만들 때 쉬었다 하면 결이 달라지므로 한 호흡으로 끝내야 한다. 완초 공예는 원형이 대부분인데, 이상재는 사각형 작품을 많이 창작했다.

 

3년 만에 경진대회 1등

그가 왕골작업을 자신의 업으로 적극 받아들이게 된 데는 당시 왕골이 잘나가던 시기였기도 하지만 다리가 불편한 점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두 살 때 소아마비 열병을 앓은 뒤 그는 다리를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

“앉아서 할 수 있는 이 일이 제겐 잘 맞았습니다. 하도 오래 앉아서 일하다보니 지금은 몸이 많이 아프지만요.”

왕골을 배우는 데는 솜씨도 중요하지만 인내심이 없으면 견뎌내지 못한다고 한다. 한자리에 진득이 앉아서 한 호흡으로 해나가야 하는 왕골 엮기는 그의 불편한 다리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 이 또한 운명인가 싶기도 하다.

 

유형식 할아버지 밑에서 3년 동안 기술을 익히면서 솜씨가 익어갈 무렵, 드디어 그의 솜씨가 빛을 발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 당시 교동에서는 해마다 왕골경진대회를 열었는데, 그는 이 대회에 참가해 어린 10대의 나이에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유 할아버지 밑에서 배울 때도 잘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대회에서 1등을 한 것은 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잖습니까. 그 뒤로 사람들이 제게 배우러들 많이 왔지요.”

 

동네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왕골 일 하는 게 풍습이었던 만큼 사람들은 자연히 솜씨 좋은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처녀총각, 새댁까지 모여서 밤에 감도 먹고 무도 먹으면서 재미나게 작업을 하곤 했습니다. 저한테 어느 정도 배우면 또 자기네끼리 모여 만들기도 했고요.”

스승이나 제자라는 개념 없이 그저 솜씨 좋은 사람 곁에 모여들어 묻고 배워가며 함께 만드는 풍속은 왕골작업이 비법으로 전수돼야 하는 독점적인 기술이나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라 동네사람이 함께 어울려 사는 방법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유 할아버지에게서 ‘독립’한다거나 하는 생각도 없었다.

 

“제가 사람들을 가르치던 시절에도 제게 부족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할아버지한테 가서 물어보곤 했습니다. 한동네 사람인데요 뭐.”

서로 솜씨는 뽐냈을지언정 다투지 않고 어울려 일하며 또 작품도 잘 팔려나가던 그때, 이상재는 젊었고 행복했다. 공예니 예술이니, 친환경이니 하는 거창한 말도 없었고 그런 의식조차 없었지만 그래도 이상재는 그때가 좋았던 것 같다. 만들기 바쁘게 팔려나가던 신 나던 시절이었으니까. 지금 국가가 인정하고 보호하는 중요무형문화재가 돼 장인으로서 최고 명예를 누리고 있지만, 사람들에 둘러싸여 젊은 지도자로 살던 그 시절과 비교할 수는 없다. 지금도 한마디씩 촌철살인의 농담을 던질 줄 아는 그는 왕년에는 술도 즐겼다고 하니 젊은 시절엔 풍류 넘치는 장인이었을 것 같다.

 

실력과 카리스마를 갖춘 젊은 선생님 곁에는 동네 처녀도 많이 와서 배웠다. 지금 아내인 유선옥 씨도 그에게 배우러 온 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동네 처녀 총각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기도 한데, 어떻게 사랑이 싹텄을까?

“열네 살에 처음 배우러 왔으니 그때야 뭘 모르고, 열아홉 살에 눈이 맞아 스물두 살에 결혼했지요.”

아직도 소녀 같은 유선옥 씨는 수줍으면서도 귀여운 인상 그대로 얌전하게 있다가도 말할 때는 재치가 반짝인다. 이런 매력을 지닌 처녀와 실력파 총각 선생은 ‘눈이 맞아’ 1970년 결혼했다. 소녀가 여인이 되고, 젊은 스승이 남편이 되는 이야기는 언제나 로맨틱하다. 스승으로서 이상재가 기억하는 유선옥 씨는 ‘가르쳤던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제자’다. 실제로 1999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다과그릇 세트로 대통령상까지 받은 유선옥 씨는 이상재 완초장의 전수교육조교이기도 하다. 이 명장의 작품이 힘과 기품이 있는 데 비해 유선옥 씨의 작품은 아주 섬세하고 고와서 여자의 솜씨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강화로 돌아오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 딸 정민이가 태어나고, 딸이 네 살 되던 무렵인 1970년대 말 이상재는 처음 교동을 떠나 서울로 가게 된다.

“강화도에서 치과를 했던 할머니를 알았는데, 그 딸이 완초 공예에 관심이 있다고 소개를 해주어서 그 따님 되는 분과 일을 하게 됐습니다. 교동 애들 열댓 명 데리고 서울 안암동에서 작업을 했지요.”

이상재 부부가 제자들과 함께 살림집 겸 공방에서 작업을 하면, 물주인 치과원장 따님은 백화점에 낸 가게에서 작품을 팔았다. 이 시기 그는 새로운 작품을 많이 창작했다.

 

 

이상재 씨는 본명의 ‘상서로울 상(祥)’ 자를 ‘상자 상(箱)’으로 바꿔 예명으로 삼았다. “전통적으로 완초 소품은 방석과 송동이, 바구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백화점에서 팔려니 다양한 상품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장식용 항아리, 폐백이나 사주단자를 넣는 함, 색깔을 넣은 동고리 같은 그릇과 모자, 구두, 가방 등 여러 작품을 개발하게 됐습니다.”

 

교동에 있을 때부터 이상재는 남과는 다른 작품을 늘 새로 선보였고, 다른 사람이 그의 작품을 흉내 내어 그 형식이 퍼지게 되면 그는 또 새로운 것을 창작해내곤 했다. 그와 아내가 만든 작품을 보니 풀로 이런 것도 만들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런데 한창 잘되던 이 사업은 물주가 다른 사업까지 손대는 바람에 곤경에 처했고 나중에는 제자 몇 명만 데리고 부산에 내려가 작업을 해야 했다.

 

“어디서 작업하든 왕골은 강화도 것을 써야 해요. 사실 왕골은 교동 것보다 강화산이 더 좋습니다. 그러니 부산에서 작업하기란 쉽지 않았지요. 부산에서는 1년도 채 못 있다 올라왔습니다.”

아이가 네 살 때 떠났던 강화로 돌아온 것은 아이가 일곱 살 되던 해인 1982년. 이번에는 교동이 아니라 강화읍내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그는 물주도 없이 예전처럼 제자들을 가르치며 함께 작업해서 팔아야 했다. 그런데 판매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플라스틱이 급속도로 퍼지면서 왕골 소품이 잘 안 팔리게 된 겁니다. 그래도 1980년대까지는 모자가 잘 나갔는데, 나중에 중국산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중국산에 밀려났죠.”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소파를 들여놓게 됐고, 예전처럼 바닥에 왕골자리나 방석을 잘 깔지 않게 됐다. 물건을 담아 보관하는 송동이도 플라스틱 수납상자에 자리를 내주게 됐다. 설혹 왕골제품을 쓴다 해도 값싼 중국산을 선택하니, 국산은 판로를 잃고 만 것이다.

“왕골은 강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부드럽고 윤이 나고, 내구성도 강해서 질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국산품은 중국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솜씨가 뛰어나지요. 일본 것은 보지 못해 잘 모르겠지만 왕골자리는 남북교류전에서 보니 북한 것이 참 좋더군요.”

 

1980년대 말이 되자 정말로 왕골 소품 팔아서 먹고살기 힘들었다. 그가 공예전에 나서게 된 것도 참가 장려금이라도 받아볼 요량에서였다.

“전통 공예니까 참가하면 얼마 나오는 데다 상을 받으면 상금도 받을 수 있으니 제자들 데리고 출품하게 된 거지요.”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오늘날도 형편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의 세련된 작품에 전통문화 연구자들은 찬사를 바치지만 대중이 알아주지 않으니, 그의 말마따나 “작품 만들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작품으로 먹고 살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한번은 어느 기자가 취재해서 기사를 썼는데, 방바닥이 냉골이었다는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이 말을 하는 유선옥 씨의 목소리가 참 쓸쓸하다. 그래도 공예전에 꾸준히 나간 덕택에 ‘참 쉽게’ 문화재가 됐다.

“우리는 문화재가 뭔지, 그런 데 관심 가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상도 많이 타고, 제자도 여럿 기르다보니 군청에서 문화재 신청하라고 연락을 해 와서 한 거예요.”

다른 공예 분야에서 문화재, 그것도 국가가 지정하는 중요무형문화재가 되려면 몇 십 년을 기다리기도 하고, 문화재로 선정되기까지 장인 간에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재 명장이 무형문화재가 되는 길은 이렇게 저절로 쉽게 열렸다. 그만큼 이 분야에서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일용품

왕골로 만든 작품이 토속미 물씬 풍기는 자연친화적인 공예품인 건 맞지만 예부터 왕골로 만든 기물은 귀한 물품이었다. 특히 자리는 삼국시대 기록부터 조선시대 말 김삿갓의 시에도 등장할 만큼 오랫동안 왕실부터 일반 서민까지 사용해온 귀하면서도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풀로 엮은 물품 가운데 기록상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역시 바닥이나 탁자, 의자에 까는 방석과 자리다. ‘삼국사기’ 신라편에 6두품과 5두품은 완초 자리를 쓰되 가장자리는 비단과 가죽, 베 등으로 구분한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고려의 풍물을 기록한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대청 위에는 비단 보료를, 양쪽 행랑에는 단을 두른 자리를 깔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평상 위에는 비단 보료를 깔고 다시 큰 자리를 깔았으며 의자에는 푸른색 단을 두른 자리를 깐다고 했으니, 과연 공예가 꽃피던 고려답게 다양하고 화려한 자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땅에도 자리를 깔았고 자리의 테두리 단은 청자색을 주로 썼다는 기록이 보여 흥미롭다.

자리에 꽃무늬를 새긴 화문석과 채석(색깔이 있는 자리)은 이미 고려시대에도 있었는지 원나라와 명나라에 보낸 기록(‘고려사’)이 있다. 화문석으로 유명한 강화도에서 언제부터 자리를 집중적으로 짰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고려 왕실이 강화도로 건너왔을 때부터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자리를 만드는 일은 전국적으로 퍼졌고 종류도 한결 다양해졌다. 각 도에서 바친 자리가 5000장이 넘는다는 기록(‘세종실록’)과 함께 잡채화문석(여러 색깔의 꽃문양을 넣은 자리)과 만화방석(여러 꽃문양으로 가득 채운 방석)에 화문석, 용문석(용을 수놓은 자리), 문양이 없는 백문석 등 자리류가 매우 다양하게 발전했고, 지방마다 특산품으로 내놓은 자리가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완초 제품이 지방마다 달리 발전하게 된 것은 그 지방에서 잘 자라는 골풀이나 부들, 왕골 등을 골라서 쓰고, 작품에 따라 씨실로 선택하는 종류나 처리하는 과정도 다르기 때문이다.

 

 

거북 모양으로 엮은 그릇은 기존 송동이 상자와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풀마다 색깔이 약간씩 차이가 나기 때문에 풀을 골라 쓸 수 있지요. 흰색을 낼 때는 바닷가에서 나는 마령풀(풀피리 부는 풀)을 썼어요.”

특히 씨실은 삼으로 만든 어저귀나 칡에서 나온 청올치 등을 쓰기도 하고 요즘에는 면이나 종이를 꼬아서 쓰기도 하지만 이상재 장인은 언제나 씨실 날실 모두 왕골을 쓴다. 다만 날실은 꼬아 써야 완성했을 때 탄력성이 생겨 잘 망가지지 않게 된다.

왕골은 한자로는 주로 완초(莞草), 현완(懸莞), 석룡초(石龍草) 등으로 기록하고 골풀은 용수초(용의 수염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 등심초(줄기 속을 말려 등 심지로도 썼다) 등으로 기록했는데, 자주 혼동을 일으키며 정확히 어떤 풀을 가리키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고급 자리로 쳤던 등메(또는 등매라고도 한다)는 용수초로 짜서 수를 놓고 부들로 뒤를 댄 것이 남아 있다.

“유 할아버지 때만 해도 화문석은 왕골로 짰지만 소품은 골풀로 짰습니다. 골풀은 거칠지만 물들이기가 쉽고, 왕골은 부드럽지만 천연염색이 잘 안 돼 화학염료를 써야 해요. 제가 어릴 때 이미 왕골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힘들다 생각하면 끝이 없고…”

소품까지 재료가 왕골로 바뀐 것은 아마 화학염료가 나오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예전에 골풀로 많이 짰던 것은 왕골처럼 재배할 필요 없이 아무 데서나 잘 자라던 것을 그냥 뽑아 쓰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골을 쓰기 시작하면서 왕골 재배에 주력하자 골풀은 점차 사라지게 됐다. 한편 왕골 소품은 안팎을 같이 짜서 두 겹으로 만드는데, 예전에는 안쪽에 들어가는 것은 여량이라는 풀로 짰다고 한다.

“여량은 거무튀튀한 빛을 냅니다. 한번은 왕골 소품을 좋아하는 서양 신부님이 안쪽도 왕골로 하라고 힌트를 주셔서 제가 왕골로 하기 시작했지요. 지금은 모두 안도 왕골로 엮게 됐습니다.”

강화에 와 있던 서양 신부들은 왕골 소품의 아름다움에 일찍이 눈을 떠 많이 수집해갔다고 한다.

완초 공예는 지금 전환기를 맞은 것 같다.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 비하면 돈이 되지 않지만, 이것이 귀한 것이라는 명예는 얻었다. 하지만 아직은 전문가나 몇몇 눈 밝은 멋쟁이의 사랑만 받고 있을 뿐이다. 선진국에서는 털실이나 짚으로 만든 자연친화적인 옷과 모자, 장신구 등이 각광을 받고 브랜드로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니 완초 공예도 앞으로 재발견되는 시대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일찍이 이상재의 작품에 눈길을 주는 이도 있었다.

“영국에서 전시할 작품을 고르려고 온 영국인이 빛바랜 것들을 다 골라가더군요. 또 일본 사람들은 매끈하게 만든 것보다 우리 딸이 서투른 듯 자유롭게 만든 작품을 다 사갑니다.”

딸 정민이의 작품은 보면 저절로 미소가 나올 만큼 귀엽고 천진한 데가 있다. 실생활에 쓰이는 공예품이라기보다 보고 즐기는 예술품으로서 더 가능성이 보이는 작품이다.

 

“정민이는 한번 시작하면 지나치게 몰두하는 성격 때문에 요즘엔 하지 말라고 말리고 있습니다.”

그가 만든 모자와 가방은 영국 귀족이 쓰고 들면 꼭 알맞을 그런 품격이 있다. 여자로 치면 금방 눈길이 가는 화려하고 세련된 여자라기보다 조용하게 앉아 있는 귀부인 같다고나 할까.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우리가 그 귀부인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한때 이상재의 기술을 배우려고 남녀노소 몰려들어 북적이던 그의 집은 이제 너무 조용한 게 아닌가 여길 무렵 하나둘 제자가 모여들었다. 다만 이제는 가장 어린 사람이 마흔아홉 살일 정도로 나이 많은 제자들이다. 그것도 죄다 여자들뿐이다.

“돈이 안되니 젊은 사람, 남자들이 배우러 오질 않아요. 처음에는 젊은 여자들이 오더니 이제는 나이 든 여자만 오는군요. 그래도 큰 자리를 짜는 선생님과 비교하면 제가 나은 편이랍니다. 선생님 제자들은 60대가 젊은 축이라고 하니까요.”

그의 제자들은 이상재 장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선옥 씨와 함께 커피도 마시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쉴 새 없이 손을 놀려 열심히 만든다. 유선옥 씨는 말했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끝이 없고…. 다행히 왕골 일을 하다보면 하루 이틀 날 새기가 일쑤일 만큼 생각을 잊게 됩니다.”

비록 다른 문화재 장인처럼 전수관 같은 것은 없지만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나이 들어서까지 제자들과 어울려 사는 것만으로도 썩 괜찮은 인생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잊고 있던 귀부인을 더는 모른 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新 한국의 명장_07  (0) 2014.07.28
조용헌 명당순례_06  (0) 2014.07.16
음식과 藥의 道를 말하다_24  (0) 2014.06.26
안영배 기자의 풍수와 권력_03  (0) 2014.06.25
조용헌 명당순례_05  (0) 2014.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