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의 스승은 서경덕 제자, 선인(仙人) 박지화였다
2006 년 일본 한의학 연구의 메카인 도야마대학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식사 도중 일본 교수 한 분이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동의보감 드라마에 나온 허준의 스승 유의태 스토리가 참 감명 깊었습니다. 그분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한국을 넘어 일본 의사의 감성까지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은 한류 드라마의 위력에 크게 놀랐지만 필자는 곧 걱정에 사로잡혔다. 드라마의 내용이 전혀 사실(史實)과 관련 없는 내용일뿐더러, 질문을 받았으므로 어떻게든 진실을 말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유의태가 허준의 실제 스승이 아니라는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유의태와 유이태
사실 우리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허준의 스승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이 유의태라고 답할 게 뻔하다. 유의태라는 이름이 처음 기록에 등장한 것은 1965년 9월1일 대한한의학회보에 게재된 논문을 통해서였다. 집필자 노정우 선생은 논문에서 “허준의 할아버지가 경상도 우수사를 오래 역임하였고 허준의 할머니는 진주 출신의 류씨인 점으로 미루어 그의 어렸을 때의 생장은 역시 경상도 산청이라고 생각된다.(중략) 당시 산청 지방에 유의태라는 신의(神醫)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허준의 의학적인 재질과 지식을 키워준 스승이었다는 것이 여러 각도로 미루어 보아 부합하는 점이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허준이 젊은 시절 유의태로부터 의학수업을 받았다는 설(說)은 노정우 선생의 논문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소설 동의보감’의 저자 이은성씨는 바로 이 논문을 근거로 허준의 삶을 소설로 재구성했다. 드라마 종영 이후 유의태는 한의학의 큰 스승으로 받들어졌다. 심지어 허준이 극중에서 유의태를 해부한 장소인 밀양 얼음골이 관광지로 급부상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에 놀란 학자들은 ‘류의태(柳義泰)’라는 인물에 대한 검증에 나섰지만 그 어느 문헌과 기록에서도 그의 이름 석자를 찾지 못했다.
학자들은 그 대신 경남 산청 출신의 ‘유이태(劉以泰·?~1715)’라는 인물을 들춰냈다. 그는 조선 숙종 때 사람으로 어의로 천거되기도 한 인물. 문헌에는 그가 어의도 아니면서 숙종의 진료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곳곳에 보인다. 그는 왕이 아프면 내의원에서 재촉을 해 모셔올 정도(숙종 39년 12월16일 사헌부가 올린 보고)로 유명했으며, 결국 숙종의 어의가 돼 왕의 종기를 치료한 후에야 고향인 경남 산청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홍역과 전염병에 대한 연구서인 ‘마진경험방’을 저술했으며(1931년 한역 출간) 이재수의 한국한의학사에는 신이 내린 탕으로 알려진 ‘유이태탕’이 소개돼 있기도 하다. 그러나 유이태의 이런 명성에도, 그가 허준의 스승일 수 없는 치명적 이유가 있다. 유이태가 산 시대가 허준(1539~1615 ·선조 말, 광해군 때 어의)이 죽은 지 한참 후인 숙종 때이기 때문이다. 결국 드라마의 기초가 된 노정우 선생의 논문은 유이태의 전설적 명성을 재구성해 만든 설화에 불과했고, 실재가 아닌 가공의 사실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허준의 스승은 누구인가. 동의보감 연구자 중 일부는 드라마에서 허준을 괴롭히는 인물로 그려진 내의원 상관이자 어의인 하음 양예수(?~1597 ·명종, 선조 초기의 어의)가 실제 스승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근거로 양예수와 허준이 선임, 후임 어의였으며 동의보감 편찬에 참여하고 처방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허준은 선조의 스승이자 대문인이었던 미암 유희춘(1513~1577)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갔는데 유희춘이 쓴 ‘미암일기’에는 양예수가 매월 유희춘을 방문해 진료한 기록이 남아 있다. 허준도 평생 그의 후원자였던 유희춘의 집에 드나들면서 치료를 했는데, 이런 점으로 미뤄 허준은 내의원에 들어가기 전 양예수와 서로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
양예수는 허준의 스승 아니다
각종 설화를 담은 ‘어우야담’에 따르면 양예수는 도가(道家)의 ‘옥추경’과 ‘운화현기’를 되풀이해 읽은 후 장한웅이라는 도인을 만나 의술을 전수받았다고 하는데, 실제 그가 저술한 ‘의림촬요’를 사람들은 ‘장씨의방’이라고도 불렀다. 이는 허준의 동의보감이 정기신(精氣身·精髓와 氣分, 心身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는 도가적 논리를 바탕으로 저술된 점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양예수가 저술한 ‘향약집험방’은 “중국 약재 대신 우리 향약재료로 할 수 있는 처방을 만들라”는 선조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이런 정신 또한 동의보감의 민간처방과 조약 등에 스며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양예수가 허준의 스승이라고 하기에는 근거가 너무 미약하다. 우선 허준과 양예수가 만났던 때가 유희춘을 함께 진료했던 시점, 즉 이미 둘 다 의사로 성장한 시기이므로 누가 누굴 가르쳤다고 보기엔 힘든 측면이 있다. 더구나 허준 의학의 정신적 뿌리가 양예수의 의학이라고 말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동의보감의 중심사상은 황정경과 참동계 등 도가사상이고, 그 핵심은 정기신론의 관점인데 양예수가 쓴 ‘의림촬요’에는 그 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더욱이 그들이 진정한 의학적 사제간이었다면 약물을 쓰는 방식이나 진료 스타일에서 유사점이 발견돼야 하는데 둘은 그런 점에서 오히려 상극이다. 양예수가 인삼을 위주로 효과는 빠르지만 부작용이 큰 극한 온성(溫性) 약재를 선호한 반면, 허준은 서늘하고 차가운 기질을 가진 한성(寒性) 약물에 치중해 안전한 처방을 구사했다.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선조의 죽음을 두고 사간원에서 올린 상소에는 “허준이 망녕되이 찬 약을 써 마침내 선왕께서 돌아가셨으니 청컨대 다시 국문해 법에 따라 죄줄 것을 명하소서”라고 쓰여 있다.
알아낸 사실보다 경험칙에 더 큰 신뢰를 보이는 한의학에선 스승의 경험은 처방에 있어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된다. 이런 점에서 허준과 양예수는 진료 방식도 다르고 학맥에도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양예수가 동의보감 편찬에 동참했기 때문에 사제간일 가능성이 있다는 논리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선조는 1596년 동의보감 찬집을 명하는데 그 책임자를 당시 어의였던 허준으로 정했다. 그 외에 학자이자 유의(儒醫)였던 고옥 정작(1533~ 1603), 태의(太醫) 양예수 등 6명이 공동작업에 참여한다. 양예수가 허준의 스승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가르침을 줬다면 허준이 동의보감 편찬 책임자로 임명되지는 못했을 터. 당시 유교적 질서에선 사제간에 상하관계가 뒤바뀌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고, 설사 임명됐다 할지라도 제자가 양보하거나 양보하는 청을 올리는 게 관습이었다. 그러나 허준은 선조의 명을 군말 없이 그대로 따랐다.
더욱이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허준은 동의보감의 단독 집필에 나서게 되는데 당시 내의원의 우두머리였던 양예수는 이 역사적인 편찬 작업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기실 양예수의 저서로 알려진 ‘의림촬요’의 실제 저자는 조선 전기의 의학자이자 ‘향약제생집성방’을 쓴 정경선이며 양예수는 그 감수자에 불과했다. 동의보감을 단독 저술한 허준과 비교하면 양예수는 오히려 중량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허준과 박지화의 만남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허준이 태어난 곳은 경기도 양천(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이라는 게 정설이다. 양천 허씨는 조선시대 한강 어귀로부터 임진강을 따라 한강 상류로 집성촌을 이뤄 살았다. 그의 묘소가 경기도 파주군 진동면에 있다는 점은 활동무대가 그 인근이었음을 방증한다. 허준의 아버지는 허논, 어머니는 전남 담양 출신인 영광 김씨. 그러나 그는 소실의 자식, 즉 서얼 출신이었다. 허준의 젊은 시절 유일한 기록은 미암 유희춘의 일기에 잠깐 등장하지만 그마저 건조한 관찰자로서의 방문기록이 전부다.
역사를 기술하는 일은 과거의 문화와 인식론적 구조에서 당대의 맥락을 밝히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허준의 출생 후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이 이처럼 전무한 현실에서 그의 스승을 찾는 작업 또한 허준의 사상과 인식의 구조를 밝히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핵심 열쇠가 바로 동의보감이다. 동의보감은 기존 한의학 서적과는 전혀 다른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정기신론에 의한 한의학 이론의 재구성이고, 둘째는 민족의학의 재발견이다. 이 같은 의학적 특색은 지역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한강과 임진강을 배경으로 활동한 일군의 유불선(儒佛仙) 통합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런 조건들을 모두 만족하면서 허준과 개인적 인연이 있는 사람은 단연코 수암 박지화(1513~1592)밖에 없다. 그가 허준의 스승이라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박지화는 화담 서경덕의 문인으로 유불선에 모두 조예가 깊었고 특히 기수학에 뛰어나 명종 때 으뜸가는 학자로 인정받는다. 임진왜란 때 산에 들어가 시 한 수를 남기고 죽은 후 수선(水仙), 선인(仙人), 도사가 됐다는 설까지 있는 인물. 허준을 포함해 동의보감의 초기 편찬위원은 유의 정작, 태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6인으로, 이중 동의보감의 정기신론을 주도한 사람은 정작이었다. 정작은 유학자로선 유일하게 참여하는데 그가 바로 박지화의 제자다.
정작은 온양 정씨이며 정순붕의 6남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북창 정염(1506~1549·혜민서 교수 역임)인데 도가류 저술뿐만 아니라 의학에 조예가 깊었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미수 허목(1595~1682·기호 남인의 선구)이 지은 정작의 행적에는 “고옥(정작)은 일찍 백씨로부터 진결을 받았고 후에 수암 박지화를 따라 금강산에 들어가 여러 해 수련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정작이 형인 정염과 박지화로부터 도가 수업을 받았음을 뜻한다. 그의 형 정염은 의서인 ‘정북창방’과 ‘북창비결’ ‘용호비결’ ‘단학지남’과 같은 민족색 짙은 양생(養生論) 저서를 남겼다.
허준의 사상적 토대 서경덕 학파
동의보감은 특이하게도 유학적 음양오행론을 언급하지 않았다. 한의학의 발전기제와 이론구조에는 음양오행의 계통론 도식이 자리 잡고 있으며, 한의학은 또 그것을 인체의 생리와 진료의 설명 도구로 선택했다. 음양오행과 오운육기 등은 유학과 철저하게 밀착됐다. 당대 최고의 명의인 남·북의는 모두 유학과 밀접하고 음양오행의 논리를 축으로 의학이론을 설명했다. 유학과 음양오행의 관념을 기반으로 한 북의와 남의의 한의학을 해체하고 정기신의 새로운 관점을 도입한 세력이 바로 동의(東醫)였다. 정기신론은 중국 한의학 서적에서는 보기 힘든 논리구조로 이들은 정기신을 증상과 처방으로 직접 연결했다. 이는 그에 앞서 충분한 실천적 경험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허준은 “우리나라는 동쪽에 치우쳐 있고 의학과 약의 도가 끊이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정기신론은 바로 우리 한의학의 뿌리이면서 면면히 흘러온 전통의학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 같은 논리를 주도한 인물은 유의인 정작이었으며 그의 스승이 박지화였다.
이는 16세기 중·후반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 이북지역의 사상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조선의 통치기반은 성리학이 중심이었지만 당기 경기 이북지역에선 도가, 불교, 양명학 등이 서경덕을 조종으로 널리 퍼졌다. 서경덕의 제자 중 서얼이었던 박지화는 도가 양생법에 매우 해박했으며 유의 정작의 스승이었고, 그의 형인 정염과 절친한 사이였다. 즉 정작의 뿌리는 박지화이며 그는 동의보감의 이론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셈이다.
동의보감 초기편찬위원회가 정유재란으로 무산되고 난 후 허준은 단독으로 저술 작업을 계속한다. 전체적인 기획만 하고 구체적인 논리와 질병의 고리가 없는 상황에서 도가적인 논리를 유지한 것은 허준 자신이 정작에 못지않게 도가적 소양이 있었음을 방증한다. 미암일기에는 ‘1568년 30대 초반의 허준이 노자, 조화론 등의 책을 그에게 선물했다’고 적혀 있다. 이 같은 점은 그의 정신적 토양을 가늠할 수 있는 좀 더 구체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정작에 못지않은 의학 실력과 도가 양생사상을 연마한 사람은 정염이나 박지화 서화담뿐이다. 정염(1506~1549)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서경덕(1489~1546)은 연배가 맞지 않는다. 박지화(1513 ~1592)만이 허준에게 사상적 의학적 가르침을 줄 여건이 되는 인물인 셈이다.
허균과 허준의 관계
사대주의 성향이 강한 조선시대 중반, 허준의 민족적 성향은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동의보감의 민족적 색채 또한 박지화와 관련이 깊다. 선조는 동의보감 편찬을 하교하면서 “요즈음 중국의 의학서적을 보니 모두 조잡한 것들을 모아 볼 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중국에서 수입한 한의학은 금·원 시대 의학 4대학파인 금원사대가의 의학이었다. 금원시대는 중국의학사에서 의학 학설이 가장 왕성하게 쏟아졌던 시기. 하지만 선조는 그런 중국의 의학을 ‘조잡한 것’으로 ‘볼 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조롱했다.
선조의 그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문화는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은 세종 때 이미 왕명으로 중국 한의학을 모두 수집해 동양 최대의 의학사전인 의방유취를 편찬했고, 향약집성방을 통해 토종약물에 대한 분석을 마쳤다. 이에 더해 서경덕을 위시한 경기북부 일군의 학자들은 양생, 도학, 단학에 입각한 민족 선도(仙道)의 축적된 학문적 역량을 토대로 우리만의 조선의학을 완성했다.
미수 허목은 초기 동의보감 편찬에 허준과 함께 참여했던 정작(박지화의 제자)의 행장을 지었는데, 그는 허준과 같은 양천 허씨였으며 송시열과 예송논쟁을 벌인던 대표 유학자였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허교(포천 현감) 또한 정작과 함께 박지화에게 의술과 도가수업을 받은 제자였다. 허목은 후일 동사(東史)를 지었는데 단군문화 정통론을 내세워 단군세가 등 상고사 계통을 확립했다. 일화에 우암 송시열은 허목과 대립했지만 심하게 병이 나자 의술로 이름이 높은 허목에게 처방을 부탁했다. 허목은 비상이 든 약을 처방해 주변 사람을 펄쩍 뛰게 했으나 우암은 결국 그 약을 먹고 쾌차했다. 허목은 유학자였지만 민족사학과 뛰어난 의술을 겸비한 아버지 허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서화담으로부터 비롯된 민족적 성향과 도선사상은 박지화, 허교로 이어졌고, 이는 허준의 사상과 동의보감에 반영됐다. 허교의 아들 허목(1595~1682)의 집안은 양천 허씨의 다른 문중인 허균(1589~ 1618) 집안과도 밀접했다. 허균의 아버지 초당 허엽은 박지화와 함께 서화담의 제자이자 문인으로 오랫동안 함께 수학한 바 있다. 허균은 허준과 11촌간으로 집안 친척뻘이다. 따라서 허준은 허균을 통해 허목의 아버지인 허교와 스승인 박지화를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허균은 허준보다 10여 세 아래지만 허준을 내의원에 추천하며 평생 도와준 미암 유희춘의 제자였다. 적서(嫡庶)의 구별이 뚜렷한 시대 상황을 반영하더라도 서얼철폐를 주장한 허균과 실제 서얼인 허준이 서로 어울렸을 가능성은 작지 않다. ‘홍길동전’으로 이름을 떨친 허균은 대역죄로 죽기 직전 50여 가지의 양생법이 실린 한정록 20권을 완성했는데 이 중에는 남성의 불알을 만지는 회교(이슬람) 건강법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렇듯 외신을 만지는 양생도인법은 동의보감 정기신편에도 유사한 방식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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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은 동의보감을 집필하면서 전대의 학설을 널리 흡수하고 자신의 의견은 간략히 개진하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논리전개 방식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서경덕 학파의 대표적 특징이다. 서경덕의 학문적 경향은 궁리(窮理)와 격치(格致)를 중시하고 전대의 학설을 널리 흡수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간략히 개진하는 술이부작 방식이었는데 동의보감 또한 같은 논리전개 방식을 채택한 것. 서경덕의 논리전개 방식이 박지화를 거쳐 허준에게 그대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박지화를 똑 닮은 허준
박지화는 허준과 같이 서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다. ‘홍길동전’에도 나오지만 당시는 서얼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할 정도로 차별을 강요받던 시대였다. 이 같은 동병상련은 그들 사이에, 비록 외부로 드러낼 순 없지만, 깊은 연대감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시켰다. 당대의 시인 정지승은 박지화가 지은 부마 광천위의 만사를 읽고 “이 사람의 문벌은 낮으나 시인들의 세계에서 지위는 최고”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는 이이나 이황과 교유하면서 서신을 주고받는 등 당시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소양과 인격을 구비했음에도 웅지를 펼 자리를 얻지 못한 채 아웃사이더로서 삶을 마감했다.
1611년 11월21일 허준은 동의보감을 완성해 광해군에게 바쳤다. 크게 감탄한 광해군은 그의 노고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그에게 서족의 불명예를 씻어줬다. 특별교지로 ‘이후 양천 허씨에 한해서는 영원히 적서의 차별을 국법으로 금한다’라고 발표한 것. 그의 서얼 콤플렉스는 유교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그의 책 전반을 살펴보면 비슷한 시대의 의학서적에 단골메뉴로 들어갔던 역대명의(名醫)란이 사라지고 없다. 역대명의 편에는 유의가 맨 앞에 나오는데 그는 그게 꼴 보기 싫어 아예 난 자체를 없애버렸다. 사상의학을 창안한 이제마가 사단칠정론이나 태극도설 등 성리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의서를 만든 반면 허준은 철저히 유학을 배격하고 도가사상을 그 중심이론으로 의서를 편찬했다. 동의보감은 그 바탕 위에 서술됐다.
동의보감의 의학적 논리의 핵심은 정기신론. 그중에서 정(精)의 개념은 무엇보다 중요했으며 박지화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정은 몸의 근본이고 기는 신을 주관한다”로 시작하는 상호관계는 정을 삶의 뿌리물질로 파악한다. “정을 남에게 베풀면 아이가 생기고 내 몸에 머물면 나를 살린다. 정이 소모되어 흩어지면 질병이 생기고 죽게 된다”고 풀이한다. 우리가 남성의 생식능력을 흔히 정력이라고 표현하는데 정은 바로 씨앗이며 또 다른 내가 자손을 번식하게 하는 물질이다. 정을 태워서 신을 발현하게 한 것이 정신이며 이는 마음을 밝히는 것이다. 현대의학으로 말하면 신경, 면역, 호르몬이라고 하는 것들이 바로 정인 셈이다.
연구자들은 동의보감의 핵심논리를 정으로 파악하고 그 뿌리에 주목한다. 서경덕의 제자인 박지화는 “인간의 정(精)이 곧 자연의 수(水)로 생성의 시작을 알리는 일(一)임”을 강조했다. 자연의 생명은 물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천(千)은 자연이고 일은 자연의 근원적 물질로 물이 된다. 쉽게 말하면 인체의 근원적 물질은 정이란 뜻이다. 동의보감에서도 ‘남녀가 만나 교합하여 형체를 이루는데 항상 몸이 생기기 전에 정이 만들어진다. 정은 몸의 근본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글은 이황이 박지화의 저술에서 느낀 바를 퇴계집에 수록한 것이며 원문은 전하지 않는다. 동의보감의 기본정신과 박지화의 사유가 서로 관통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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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스승을 찾는 작업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일환이 아니다. 한국 한의학의 특질과 동의보감 집례에 전재된 민족의학의 뿌리를 찾는 일이다. 허준은 서경덕, 박지화, 정작, 정염, 이수광, 허목, 허균, 곽재우, 남사고 등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동의보감은 이 일군의 유학자들과 민족의학이 어우러진 지적 산물이다. 정기신 이론과 단학, 이를 넘어선 우리 고유의 철학과 의학은 좀 더 세밀한 연구 작업을 통해 재조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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