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강의 무덤’ 아프간에 갇힌 미국 오바마는 구해낼 수 있을까
- 1842년 1월 13일 아프가니스탄 동부 도시 잘랄라바드의 영국군 요새. 성벽에 서 있던 보초가 말을 타고 평원을 가로질러오는 군인 한 명을 발견했다. 머리와 손에 심한 상처를 입은 그는 영국군 제44 이스트 에섹스 보병 연대 소속 의사인 윌리엄 브라이든(William Brydon)이었다.
잘랄라바드 요새에는 그 전에 카불에서 전령이 달려와 영국군의 철수 계획을 알려왔다. 잘랄라바드 요새에서는 제44 보병연대 소속 4500명(영국군 690명, 나머지는 동인도회사 소속 인도인 세포이)의 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외에 군인 가족을 포함해 모두 1만2000명의 민간인도 철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카불에서 철수한 일행 중 아프가니스탄인의 공격을 피해 무사히 요새에 도착한 사람은 의사 윌리엄 브라이든이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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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1월 14일 아프가니스탄 경찰이 칸다하르에서 압류한 마약 2.2톤을 불태우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최대 아편 생산국이다. / photo AP
- 당시 브라이든이 참전한 전쟁은 훗날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839~1842년)으로 불렸다. 당시 영국군은 카불에서 140㎞ 떨어진 잘랄라바드를 거쳐 영국령 인도로 철수하던 중 전멸, 영국군 전사(戰史)에 치욕의 장을 남겼다. 3년 전 카불에 진격, 승전고를 울렸으나 점증하는 아프가니스탄인의 위협에 밀려 1842년 1월 6일 후퇴를 시작했다. 눈이 덮인 계곡과 고개를 넘어 철수를 시작했으나, 아프가니스탄 측의 공격을 받아 몰살됐다.
영국은 제1차 아프가니스탄전쟁의 경험을 교훈 삼아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878~1880년)에서 승리한 뒤 카불에 병력을 주둔시키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의 영구 점령은 불가하다고 보고 현지인을 지도자로 내세우고 빠졌다.
소련은 영국 다음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발을 디딘 초강대국이었다. 영국군 제44 보병
연대가 몰살당한 후로부터 138년이 지난 1978년이었다. 소련은 전차를 앞세우고 아프가니스탄 북쪽 국경을 돌파해 카불로 내려갔다. 이후 10년은 악몽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인의 비정규전에 시달렸다. 결국 소련은 1988년 들어왔던 길로 되돌아 나갔다.
‘강대국의 무덤’ 아프가니스탄에 찾아온 다음 손님은 미국이다. 미국은 2001년 11월 카불에 들어갔다. 당시 카불의 탈레반 정권에 맞서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북부동맹’을 뒤에서 도와 쉽게 아프가니스탄 수도를 점령했다. 국제 테러조직 알 카에다의 9·11 미국 테러 공격 직후였다. 탈레반 정권이 보호하고 있던 알 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 라덴 체포가 목표였다.
미국은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켰으나 7년이 되도록 아프가니스탄에 눌러 앉아있다. 카불을 바로 빠져나간 영국군의 방식 대신, 주저앉아 있으려 했다가 고통을 당한 소련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 결과는? 미 합참의장 마이크 멀린 제독은 지난 9월 하원 군사위원회의 증언에 나와 “병력 규모가 얼마가 되든, 시간이 얼마나 주어지든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를 아프가니스탄에서 달성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 아프가니스탄 반군 3대 세력
탈레반·하카니·헤크마티야르… 저항 갈수록 거세져, 미군 및 동맹군 사망 2001년 12명서 작년엔 232명
아프가니스탄 내 주요 저항 세력은 세 그룹이다. 탈레반, 하카니 네트워크(Haqqani Network·HQN), 군벌(軍閥) 굴부딘 헤크마티야르가 이끄는 ‘헤즙 이 이슬라미 굴부딘(HiG)’.
탈레반은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한 남부를 장악하고 있다. 2001년 미국의 공격 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했던 정치 군사세력이고, 무함마드 오마르(Omar)가 지도자이다. HQN은 동남부 가즈니주 인근 파키스탄 접경 지역에서, HiG는 북동부 잘랄라바드 인
근 파키스탄과의 접경 지역을 무대로 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군을 이끌고 있는 미국의 댄 맥닐(McNeill) 장군은 이들의 규모와 관련, 탈레반은 5000~2만명, 하카니와 헤크마티야르 그룹 병력은 각기 1000명 정도라고 말했다.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는 동부에서 반군 연합을 지원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반군은 카불에서 쫓겨나고 2년이 지난 2003년까지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2005년까지는 아프가니스탄 정부나 미국, NATO, ISAF(국제안전지원군) 병력을 위협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미군과 동맹군 사망자는 2001년 침공 당시 12명, 2004년 58명이었으나, 2005년 130명, 2007년 232명으로 늘어났다. 올 초 넉 달 사이에만 61명이 사망했다. 자살폭탄테러 공격을 보면 2006년 123건에서 2007년 160건으로 늘어났다.
미국은 이 같은 반군의 치열한 저항에 따라 병력을 증파하고 있다. 미국이 이끄는 다국적군은 현재 39개국 6만5000명이다. 2006년에 비해 곱절 수준이다.
- 반군 준동의 배경
양귀비가 생명줄… 이라크 비해 미군 전력도 약해, 민족 갈등 심각, 최대 민족 파스툰은 반군 지지
미국은 침략 5년째를 맞은 이라크에서는 올해 반군의 공세를 결정적으로 누그러뜨리고 정세를 크게 안정시켰다. 반면 이라크보다 2년이나 더 오래 주둔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고전 중이다. 그 이유를 보면, 일단 아프가니스탄은 이라크보다 땅덩어리가 훨씬 크고, 인구도 좀 많다(면적:아프가니스탄 64만㎢·이라크 43만㎢, 인구:아프가니스탄 3188만·이라크 2926만명). 지형도 아프가니스탄이 훨씬 험난하다.
미국은 돈도 적게 썼다. 1년 전비로 이라크에는 1089억달러, 아프가니스탄에는 214억6000만달러를 썼다. 이라크에 쓴 돈이 3.8배 많다(의회리서치서비스의 한 연구 보고서). CSIS(전략국제연구센터)의 앤서니 코즈먼 연구원은 “미 행정부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대지 않았다”고 말했다.
양귀비는 아프가니스탄 반군이 생존할 수 있는 자양분이다. 연 5000t 이상 생산되며, 이는 세계 생산량의 90%를 차지한다. 미군은 달리 수입원이 없는 아프가니스탄 농민의 비밀 재배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반군은 양귀비 농가에서 세금을 거두는 형식으로 군자금을 모으고 있다.
- 아프가니스탄의 다양한 민족 분포는 국가 안정을 조기에 이뤄내기 힘든 구조다. 국토의 허리를 지나가는 힌두쿠시 산맥은 아프가니스탄을 남북으로 나눈다. 남쪽에는 이 나라 최대 민족 집단(인구의 40~45% 차지)인 파스툰족이 산다.
힌두쿠시 산맥 북쪽 산록의 최대 민족인 타지크계는 페르시아어를 구사하며 인구의
20~25%를 차지한다. 타지크 민족 외에 투르크 민족도 11%에 달한다. 아프가니스탄의 중부 지역에는 하자라 민족(인구의 15~18%)이 살고 있다.
최대 민족인 파스툰계는 카불의 주인인 경우가 많았지만 미국의 점령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간판 인물인 대통령에는 최대 민족인 파스툰 출신 하미드 카르자이(Karzai)를 세웠으나, 국방부와 군 등 국가 보안기구는 타지크계가 장악했다. 개전 당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사는 타지크 주도 ‘북부 동맹’의 힘을 빌린 까닭이다. 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파스툰 민족은 카르자이 대통령을 미국의 얼굴마담으로 보았고, 탈레반 반군에 은근한 지지를 보냈다.
이와 관련 유엔주재 파키스탄 대사를 지낸 무니르 아크람은 아프가니스탄 해결책으로 “국방부, 정보기관, 내무부를 북부동맹의 타지크계의 손에 계속 맡겨놔서는 안된다. 이들 타지크계는 파스툰에 대해 안티 감정을 갖고 있다. 국가안보기구가 진정한 국가기구로 거듭나려면 아프가니스탄 내 민족 분포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월 4일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 저널 기고).
카불의 움직임
현 정권, 반군대표와 회동하고 탈레반과 대화, 외국 점령에 대한 국민 반발도 갈수록 거세져
지난 9월 말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성지 메카에서 압둘라 왕이 주관하는 라마단 금식이 끝나는 걸 축하하는 ‘이드 알 피트르’ 축일 행사가 있었다. 금식을 마치면서 식사를 하는 자리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손님 17명이 같이했다. 탈레반 반군 대표 11명과 또 다른 반군 지도자인 헤크마티야르, 그리고 두 명의 아프가니스탄 정부 관계자의 얼굴이 보였다. 2001년 탈레반 정권 몰락 이후 탈레반 등 반군과 현재의 카불 정권이 자리를 공식적으로 함께한 건 처음. 24일부터 27일까지의 4일간 회동에 탈레반 지도자 오마르는 불참했다. 회동에 참석한 모든 당사자들은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전투가 아닌 대화가 유일한 해법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미국의 CNN방송은 10월 5일 보도했다.
이로부터 한 달 반이 지난 11월 16일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탈레반 지도자 오마르에게 협상을 공식 제의했다. 카르자이 대통령은 오마르가 협상에 응한다면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탈레반의 2인자는 “외국 점령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한 협상에 응하지 않는다”면서 일단 거부했다. 카불 정권과 탈레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현재로서는 알기 힘들지만 대화가 시작된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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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1월 12일 파키스탄과의 접경지대인 호스트주의 스피라산맥 지역에서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병사가 자신의 뒤에 오는 당나귀들을 돌아보고 있다. / photo AFP
- 아프가니스탄 주재 러시아 대사 자미르 카불로프는 “미국은(소련이) 20년 전 저질렀던 잘못을 되풀이 하고 있다. 당시 소련과 마찬가지로 도시를 쉽게 점령했고 때문에 농촌 지역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무시하고 있다. 외국의 점령에 대한 아프가니스탄인의 저항을 무시하고 있다”고 말했다(뉴욕타임스 10월 19일 보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시작했던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시대는 곧 끝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는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그의 해법이 주목된다.
| 아프간 전쟁 小史 |
영국과의 80년 전쟁 뒤 1919년 독립… 소련 침공과 미국 점령 후 내전 만성화
근대 국가 아프가니스탄의 출발점은 1747년이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최대 민족인 파스툰 사람 아흐맛 샤 두르라니가 칸다하르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는 정복전을 벌여, 아프가니스탄 전역과 파키스탄, 인도 북부(델리 포함), 호라산(이란의 동부)을 포함하는 제국을 건설했다. 그의 아들이 수도를 카불로 옮겼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지배자는 영국에 시달렸다. 인도를 장악한 영국은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차단하기 위한 ‘대 게임(Great Game)’의 일환으로, 그 교통로인 아프가니스탄을 손을 넣으려 했다. 결과는 80년간 세 차례의 싸움이었다. 1919년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독립을 얻었다. 상처는 컸다. 영토는 대거 줄었다. 인도양으로 나가는 땅을 빼앗겨 내륙국가가 됐다. 파키스탄과의 국경선 분쟁도 영국 침공의 유산이다.
왕국은 이후 평화기를 보내다가 1973년 무혈쿠데타로 무너졌고 공화국 시대가 열렸다. 5년 뒤인 1978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주인이 됐다.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PDPA)은 1992년까지 정권을 이어간다. 소련이 1978년 침공했을 때도 PAPA는 살아남았다. 소련 철군 뒤 권력 공백이 오자 승리한 파벌 간에 내전이 시작됐다. 1996년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하고, ‘이슬람공화국’을 세웠다. 탈레반의 7년 통치는 미국 침공으로 2001년 끝이 났다. 그 이후로는 미국의 점령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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