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79식 기관단총

醉月 2021. 5. 9. 12:53

79식 기관단총

클래식의 변신은 무죄; 30년을 현역을 지킨 1세대 '사골' 기관단총

 

79식 기관단총 <출처 : Public Domain>


개발의 역사

중국은 냉전 초기 소련과의 공고한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현대적인 군사력 건설을 시작했다. 중국은 6.25참전을 기점으로 MiG 전투기에서 전차까지 다양한 소련제 무기들을 도입하거나 카피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망 이후 흐루쇼프(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1894~1971)의 스탈린 격하운동 등 이념격차로 중국과 소련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무기체계의 개발협력도 취소되었다. 중국은 독자적인 무기체계 개발에 나섰지만, 개발경험이 축적되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비교적 간단한 무기체계인 기관단총의 개발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중공군은 6.25전쟁을 계기로 소련과 군사협력을 본격화하면서 소련제 무기를 카피생산하기 시작했다. <출처 : Public Domain>

중국이 만든 최초의 국산독자모델 기관단총은 1964년식 7.62mm 소음기관단총이었다. 그러나 64식으로는 소련제 수다예프 기관단총(PPS)의 카피판인 54식처럼 다양한 작전환경과 부대의 소요를 충족할 수 없었다. 특히 인민해방군은 베트남전쟁 등을 고려하여 밀림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신형 기관단총을 요구했고, 병기국 산하의 한 연구소가 그 개발을 의뢰받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제대로된 연구시설은 커녕 시제총기를 제작할 기구나 시설조차 미비하여 개발환경이 전무했고, 연구원들도 실무의 경험이 없는 대학졸업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시제총기의 생산은 민수공장이 담당했는데,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진 시제총기는 발사조차 되지 못했다.

중국 최초의 국산 독자기관단총은 64식 소음기관단총이었다. <출처 : Public Domain>

게다가 1966년 5월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개발은 아예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총기의 개발필요는 절실해서 군의 요청에 따라 1967년에 연구개발사업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1969년 사업은 다시 정지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기에 개발자들은 연구개발에 집중하지 못하고 대중집회에 동원되기 일쑤였으며, 당연히 개발은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문화혁명의 광기 속에서 신형 기관단총의 개발은 이어질 수 없었다. <출처 : Public Domain>

그러나 1970년 3월 인민해방군의 정보기관인 총참모부 2부(解放军总参二部)가 정찰이나 공수 등 특수임무부대가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화기를 요구하면서 국산 기관단총의 개발사업은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중국 소화기 개발의 산실인 제208 화기연구소(中國兵器208研究所)가 개발을 담당하면서 사업은 본격화되었다. 동년 4월 208연구소는 연구인력을 모은 후 개발팀장으로 류지퉁(刘质桐, 1940~)을 임명하고, 기존에 "밀림 기관단총(丛林冲锋枪)"으로 불리던 사업명을 "7.62mm 경량 기관단총(轻型冲锋枪)"으로 명칭을 바꾸고 사업을 추진했다.

마오쩌둥과 린뱌오(좌), 린뱌오와 아들 린리궈(우)의 모습.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지만 상하이방과 충돌하면서 문혁에 반대하다가 쿠데타를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출처 : Public Domain>

사업팀은 서둘러 설계수정과 시제제작에 들어갔지만, 엉뚱한 일이 발생했다. 개발팀은 발족 초기에 공군의 요청으로 설계도를 빌려준 적이 있는데, 설계도에 컴패스 구멍자국이 남는 등 베껴진 흔적이 발견되었다. 문제는 바로 이 초기도면이 쿠데타를 기도했던 린뱌오(林彪, 1907~1971) 세력의 수중에서 발견되었으며, 심지어는 해당설계도로 만들어진 시제총기까지 만들어졌다는 점이었다. 이는 공군사령부 작전부 부부장이었던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林立果, 1945~1971)가 공작을 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물론 208연구소는 보안규정을 지켰기 때문에 사업팀에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린뱌오는 쿠데타 실패후 가족들과 소련으로 탈출하다가 몽골에서 추락하면서 아들과 함께 사망했다. <출처 : Public Domain>

208 연구소는 이듬해 말까지 시제총기를 개발하여 1971년 12월부터 1972년 1월까지 국립사격장에서 시험평가를 실시했다. 평가결과는 시제총기에서는 송탄불량과 기능고장에 주요부품의 낮은 신뢰도 등 다양한 문제점들 나타났다. 해당 문제를 수정하고 다시 시험평가를 시작한 것은 1974년이었는데, 여전히 평가결과 문제점들이 남아있었다. 수정작업을 거친 시제총기는 1975년 9월 또다시 시험평가를 실시했지만 여전히 문제점들은 남아있었다. 그러자 사업팀은 시제 기관단총 100정을 생산하여 지난(济南), 쉔양(沈阳), 란저우(兰州), 쿤밍(昆明) 등지에서 군 시험평가를 거치면서 군 부대들로부터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208 연구소의 기관단총은 무려 3차례의 시험평가를 거쳤으나 기술적 문제로 시평을 통과하지 못했다. <출처 : Public Domain>

이렇게 신형 기관단총이 완성을 향해 차츰 나아가던 중 개발팀은 또다른 정치적 광풍에 휘말렸다. 1976년 2월 국방공업국(国防工办)은 208연구소의 기관단총으로 상하이에서 시제생산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문제는 이 시제생산총기들이 상하이방 4인방에게 넘어갔으며,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선정된 화궈펑(华国锋, 1921~2008)이 4인방을 제거하면서 이들 총기도 압류되었다. 상하이 시제총기들은 208 설계를 거의 그대로 따라했지만, 총열 덮개의 설계가 일부 바뀌는 등 소소한 변경이 있었다. 208 연구소는 이들 총기를 수령하여 참조할 사항이 있나 살펴봤지만, 명중률도 208 설계보다 떨어지는 조악한 수준이었기에  개발에 별다른 참조가 되지 못했다.

상하이에서 생산된 208 기관단총의 변형모델들. <출처 : Public Domain>

드디어 신형 기관단총은 1978년 4월부터 5월까지 국립사격장에서 제4차 시험평가를 실시하면서 3차 시평에서 지적되었던 문제점들을 모두 해결하였음을 입증했다. 시험평가가 성공리에 끝난 이듬해인 1979년 9월 25일, 소화기확정위원회(轻武器定型委员会)는 새로운 기관단총을 "1979년식 7.62mm 경량 기관단총(1979年式 7.62mm 轻型冲锋枪)"으로 명명하고 제식 채용을 결정하였다.

중국 방문시 79식 기관단총을 사격하며 평가중인 AK-47의 설계자,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의 모습 <출처 : Public Domain>

 


특징

79식 기관단총은 접칠시 47cm에 불과한 컴팩트 기관단총이다. <출처 : Public Domain>

79식 기관단총은 7.62x25mm 토카레프 권총탄을 채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블로백 방식이 아니라 가스피스톤 방식에 회전식 노리쇠를 채택한 것이 특징이다. 7.62mm 권총탄보다 강력한 9mm 파라블럼 탄을 사용하는 기관단총들도 단순블로백 방식을 채용해온 통상의 사례를 생각하면 매우 독특한 방식인데, 이는 칼라시니코프의 가스피스톤 방식에 집착해온 중국 설계진의 한계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충분한 설계노하우와 데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간단한 단순블로백 방식의 설계조차도 주저한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79식 기관단총의 가동부와 노리쇠뭉치 구성품의 모습 <출처 : gearkr.com>

작동방식은 AK-47 소총과 유사하다. 방아쇠를 당기면 공이가 탄환을 격발하고 탄자를 밀어낸 가스압이 총열 위쪽의 피스톤을 밀어내며 피스톤은 다시 노리쇠뭉치를 밀어내는데, 노리쇠뭉치가 후퇴하면서 약실에 잠긴 노리쇠를 회전하면서 풀어낸다. 탄자가 총열을 빠져나갈 때 즈음 잠김이 풀린 노리쇠뭉치는 뒤로 후퇴하다가 리코일 스프링에 의해 다시 전진하면서 노리쇠가 차탄을 물고 들어가면서 약실을 잠근다. 조종간은 AK-47과 유사한 형식으로 안전-연발-단발로 조절된다.

79식 기관단총은 중국이 기존에 사용하던 51식 7.62mm 권총탄을 사용하여 (다소간 살상력에는 의문이 있으나) 최대 유효사거리가 약 200m에 이른다. 기존에 7.62mm 기관단총으로는 54식 기관단총이 사용되었는데, 3kg이 넘는 무게인 54식에 비하여 좀더 단순화되고 작아진 79식은 탄창을 제외한 총기 전체의 무게가 1.5kg에 불과했다. 총열길이는 250mm(약 9.84 인치)로 다른 기관단총에 비하여 크게 짧지 않았으며, 개머리판을 접었을 때 전체길이는 470mm에 불과하여 휴대가 매우 간편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79식 기관단총의 야전분해 모습 <출처 : Public Domain>

그러나 79식은 다소 복잡한 작동방식에 비하여 발사속도가 매우 빨라 분당 1,000발을 흩뿌릴 수 있었다. 과도한 작동속도로 인하여 노리쇠는 상당한 부담을 받았는데, 노리쇠뭉치에 일체로 가공된 장전손잡이가 깨지거나 급탄불량이나 노리쇠 격발불량 등 다양한 문제들이 뒤따랐다. 그러나 꾸준한 시험평가와 개량을 거쳐서 기계적 완성도를 높여 불량률을 0.25% 이하로 낮추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사격시 자세를 취하기 편리하다고 평가받는데, 이는 탄창결합부가 연장되어 사실상 전방손잡이 역할을 해주기 때문으로 보인다.

79식 기관단총의 현대화를 위해 만들어진 MAPS79 레일/개머리판 키트. <출처: mssn65 / Twitter>

한편 79식은 과거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1990년대 이후에 추세가 된 부가장비의 장착이 문제가 되었다. 특히 79식을 사용하는 부대들이 주로 인민해방군 특수부대나 공안의 특경(特警, 경찰특공대)이었기 때문에 도트사이트, 웨폰라이트 등을 장착할 필요성이 높았다. 이에 따라 간단한 웨폰 마운트 형식에서부터 피카티니레일의 형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가레일이 등장했으며, 가장 최근에는 개머리판까지 M4 카빈용으로 바꾼 MAPS79가 점차 제식으로 채용되고 있다.

MAPS79로 무장한 특경대원의 모습 <출처 : Public Domain>

 


운용 현황

79식 기관단총은 중국의 제1세대 기관단총으로 인민해방군과 공안부에서 모두 채용되었다. <출처 : Public Domain>

1979년 제식으로 선정되었지만, 79식 기관단총의 선행양산모델은 1981년에서야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인 양산은 1983년에서야 이루어졌다. 79식은 인민해방군의 특수부대나 공수부대는 물론 기갑부대 등의 자위무장으로 채용되었으며, 무경(人民武装警察部队, 국경경비대에 해당)과 공안(中华人民共和国 公安部, 경찰에 해당) 등에서도 주력무장으로 채용되었다. 이에 따라 1981년 선행양산시부터 1992년까지 약 10여년 동안 무려 20만 정이 생산되었다. 특히 1988년부터 1991년 사이에는 연간생산량이 3만정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생산되었다.

79식 기관단총은 이미 제식 채용전에 1979년 중월전쟁에 투입되었다. 사진은 제1정찰여단 정찰조의 모습으로, 나머지 대원들은 64식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가운데, 왼쪽에서 2번째 대원이 79식으로 무장하고 있다. <출처 : Public Domain>

79식 기관단총의 실전투입은 양산전의 시제단계에서 이루어졌다. 1979년 2월 중월전쟁에서 소수의 특수부대원들이 79식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참전하였다. 특히 한 정찰부대원은 한 야간전투에서 적과 조우하여 79식 기관단총으로 사격하여 적 4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외에도 몇차례 매복기습작전에서 79식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정찰부대원들은 괜찮은 기록을 세웠으며, 이는 추후 79식이 제식채용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79식 기관단총은 군경 특수부대들에 의해 애용되었지만 신뢰성이 낮아 일선의 불만이 잇달았다. <출처 : Public Domain>

79식은 나름대로 정밀한 사격이 가능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방아쇠가 가벼워 숙련된 사수의 경우에는 꽤나 정확한 사격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과도한 발사속도로 인하여 연사시 제어가 쉽지 않으며, 탄창수는 겨우 20발에 불과하여 실전에서 화력에 부족함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부품의 내구성이 높지 않아 야전에서 거칠게 사용하는 경우 기능고장 등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아, 결국 인민해방군은 79식을 대신하여 QBZ-95 자동소총의 기관단총 버전인 QCW-05 기관단총으로 교체를 시작했다. 

79식 기관단총은 가벼운 무게와 다루기 쉬운 크기로 인하여 여군과 여경의 총기로도 애용된다. <출처 : Public Domain>

그러나 2000년대까지 합치면 거의 30만 정 가깝게 생산되었으며, 익숙한 총기이므로 공안과 무경에서는 여전히 79식을 사용하는 부대들이 존재한다. 또한 작은 크기에 다루기가 쉬워 여군이나 여성 공안대원 등의 무장으로도 여전히 선호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무인정찰로봇에 무장으로 79식 기관단총을 장착하는 것이 목격되는 등 일선에서 물러난 총기들이 매우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인로봇에 장착된 79식 기관단총(좌)와 최신형으로 개량된 79식 기관단총(우) <출처 : Public Domain>

한편 79식을 애용하는 일부 특경부대들은 개량을 거듭하여 79식을 전혀 다른 총기로 개조해나갔다. 특히 광저우, 동관, 쉔젠, 판위 등의 특경부대는 ACE Mod, PEAK 79, TAPS79, MAPS79 등 다양한 사양으로 개조를 거듭했다. 특히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이들 부대들에 대테러 예산이 추가로 할당되면서 에임포인트 등 서구의 다양한 총기부가장비들이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MAPS79 사양이 적용된 79식 기관단총에 부가장비가 장착되면서 전혀 다른 기관단총으로 진화해나가고 있다.

가장 최신사양인 MAPS79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특경대원들의 모습 <출처 : Public Domain>

 


파생형

79식 기관단총: 양산형 모델.

79식 기관단총 <출처 : Public Domain>

ACE Mod: 79식의 부가장비 장착 초기형. 슈어파이어(Surefire, LLC.)의 택티컬 라이트를 사용하고자 했던 광저우와 동관 등 특경부대의 요청으로 홍콩의 전술장비유통사인 슈프림코(Supreme Co. 永高行)가 설계자 리쟈하오(李嘉豪)와 함께 만들어 납품했다.

ACE Mod는 79식 총열에 마운트를 장착하는 방식이다. <출처 : Public Domain>

PEAK79: 중국 특경부대들의 요청에 따라 설계된 부가장비 장착형으로, 홍콩 슈프림코에서 제작한 개량형 키트. MP5 기관단총에 사용되는 슈어파이어용 총열덮개를 장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또한 총열과 총몸의 결합부에 마운트를 만들어 도트사이트를 장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쉔젠 공안 등에서 특경을 위해 채용했다.

슈어파이어의 MP5용 웨폰라이트를 장착한 PEAK79 <출처 : Public Domain>

TAPS79:  79식에 최초로 MIL-STD-1913 피카티니 레일을 결합하여 만든 제품. TAPS는 Tactical Adapter Platform System의 준말이다. 총열 덮개부분에 최초로 피카티레일을 적용했으며, 총열덮개의 윗부분에 광학마운트를 결합시켰다. 사이드 레일은 피카티니 방식이 아닌 나사산 결합식으로 2000년대 중반 레일의 한계를 보인다. 역시 리쟈하오가 설계하고 슈프림코가 납품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오텍 홀로사이트와 웨폰라이트를 장착한 TAPS79 <출처 : Public Domain>

MAPS79: TAPS79의 개량형으로 훨씬더 현대화된 모델이다. 개머리판과 총열을 모두 개조하는 모델로, 특히 개머리판은 M4 카빈용을 장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레일방식은 독특하게도 피카티니 레일이 아니라 가이즐리(Geissele Automatics)의 방식을 참조하여 만들어졌다. 기관단총 몸체만을 넣으면 완전히 다른 총기로 바꿀 수 있도록 된 컨셉은 슈프림코가 교류하던 국내 D모사에서 최초로 개발한 K1A 개량형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편 최근에는 M lok 방식으로 개량된 버전도 개발되었다.

개머리판까지 통합된 MAPS79 기관단총 <출처 : Public Domain>

 

신형 M lok 레일을 채용한 레일/개머리판 키트(위)와 79식 기본형(아래) <출처 : Public Domain>

 


제원

제작사

중국 노린코 (Norinco, 北方工业)

작동 방식

가스피스톤, 회전 노리쇠

구경

7.62 x 25 mm 토카레프 탄

중량

총기 (탄창 제외)

1.75 kg

총기 + 빈 탄창

1.9 kg

총기 + 장탄된 탄창

2.1 kg

전체 길이

접철 시

470 mm

확장 시

740 mm

총구 초속

515 m/s

장탄 수

20

발사율

(이론 상) 최대

1,000 /

(실전 시 권장) 점사 시

70~100 /

(실전 시 권장) 단발

40 /

유효 사거리

최대 200m

 


저자소개

양욱 | 군사학 박사(군사전략)

중동지역에서 군부대 교관을 역임했고 민간군사기업을 경영했으며, 현장에서 물러난 후 국방대에서 군사전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국방안보포럼의 수석연구위원이자, 각 군의 정책자문위원과 정부의 평가위원으로 국방 및 안보정책에 관해 자문하고 있다. 또한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과 육군사관학교에서 군사전략과 국방정책 등을 가르치고 있다. 본 연재 '무기백과사전'의 총괄 에디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