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한바퀴 3.5㎞ 비양도·금잔디 빛나는 구좌마을…제주 삼춘이 ‘육지것들’에게 내놓은 숨은 보석

醉月 2025. 4. 17. 09:42

■ 뻔한 여정은 그만… 이야기 듣고 사람 만나는 제주여행

 

0.52㎢면적 협재앞바다 외딴섬

2000년대 초반 유인도로 분류

 

제주당근 산지 동부해안 구좌읍

집집마다 ‘정원 꾸미기’에 진심

‘부석희 삼춘의…’ 마을 해설도

 

우거진 숲 하늘가린 선흘곶자왈

산개구리·새 등 봄의 소리 듣는

40분 사운드 워킹 프로그램 인기

 

6월까지 ‘바다가는 달’ 캠페인

제주 이야기-여행자 ‘관계맺기’

제주 한림읍 협재해수욕장에서 보이는 비양도. 비양도는 제주 본섬과의 거리가 3㎞에 불과해 과거에는 헤엄치며 오갔다고 한다.

제주=글·사진 신재우 기자 shin2roo@munhwa.com

 

제주에 도착한 순간부터 관광객은 ‘육지것들’이 된다. 섬에서 멀지 않은 곳, 이제는 길어야 2시간이면 왕래할 수 있는 거리에서 왔지만, 제주도민의 눈에 그들은 여전히 낯선 존재다. 불쑥 듣게 되는 “육지에서 오셨죠?”라는 질문은 그들을 구별 짓는 말이자, 일종의 경계이기도 하다. 관광객이 제주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육지것들’의 일정은 어딘가 익숙하게 반복된다. 흑돼지를 먹고 렌터카를 빌려 해안도로를 달리며, 섭지코지나 성산일출봉, 오름 하나쯤을 찍고 돌아오는 1박 2일의 일정.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이런 여정은 너무도 뻔해서,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때로는 허무함을 남긴다.

하지만 제주는 아직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 돌담 너머의 할머니가 들려줄 이야기, 구좌읍의 항구 어귀에 숨어있는 옛 보물 같은 사연들, 곶자왈 숲에서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이름 모를 초록의 소리들. 여행의 순간은 그렇게 무심히 걷는 길가에서, 문득 마주친 사람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4월의 제주는 그런 숨겨진 ‘섬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여행자를 부른다. 진짜 제주 여행은, 보지 않고는 몰랐을 풍경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고, 듣지 않고는 몰랐을 이야기를 듣는 데서 완성된다.

 

# 제주의 막내섬, 비양도에서 만난 삶

제주의 화산섬 비양도를 아는가. 흔히 우도 비양도와 착각하지만 이곳은 제주시 한림읍 협재 앞바다에 떠 있는 외딴섬이다. 가파도, 마라도, 우도에 이어 제주 부속섬 가운데 가장 작은 유인도로 전체면적은 0.52㎢로 우도의 10분의 1에 불과하고, 해안선 길이도 약 3.5㎞로 손에 잡힐 듯 짧다. 협재해수욕장에서도 쉽게 보이는 이곳은 실제로 수영을 해 섬을 오간 사람도 있을 정도로 제주의 코앞에 있는 곳이고 본섬에서 배를 타고 10∼2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예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정주 여건이 조금씩 갖춰지기 시작하면서 공식적으로 유인도로 분류되었다.

“그래, 안녕 나 해녀야.” 비양도의 해녀는 섬에 오랜만에 찾아온 꼬마 손님이 “우와, 해녀다” 하며 가리키자 반갑게 화답한다. 본섬에서 바쁘게 물질을 하고 나와 서둘러 수확한 꾸러미를 들고 귀가하는 해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유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만큼 이곳에는 어린 손님이 귀하다. 어린아이들이 섬을 찾았다는 소식에 한 주민은 전화를 걸어 이웃 주민에게 “여기 애기들 있으니 나와 보라”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섬에 있는 유일한 초등학교인 한림초 비양분교는 3년 전 마지막 졸업생을 배출하고 현재는 휴교 상태다. 당시 교실과 교무실을 그대로 보존한 이곳 학교 건물에 들어서니 졸업 사진이 걸려있다. 졸업생은 단 두 명. 교실은 한 개에 학생은 둘 뿐인데 ‘또래 도움 신청함’과 ‘학교 117신고함’이 설치된 교실 풍경이 못내 귀엽다.

지금은 관광객보다는 낚시꾼들의 오징어낚시 명소에 가까운 이 섬은 제주의 자연과 일상이 고스란히 보존된 보기 드문 공간이다. 작고 소박한 예배당도 있는데, 40명 남짓 들어갈 수 있는 아담한 공간이다. 비양분교 출신이라는 주민이 운영하는 식당에서는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눌 수 있고, 밥 한 끼 먹고 섬 둘레를 걷는 데는 30분에서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섬 뒤편으로 돌아가면 이곳의 명소인 ‘코끼리 바위’가 있는데 본래 풀로 덮여있던 바위가 현재 맨몸이 드러나게 만든 범인은 염소다. 비양리 이장의 말에 따르면 비양도에 서식하던 염소들이 풀을 너무 많이 뜯어 결국 본섬으로 쫓겨났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진다.

다만 여객선은 하루에 네 차례뿐이다. 한림항에서 출발하는 첫 배는 9시고 비양도에서 나오는 배는 오후 3시 45분이 마지막이다. 이 배를 놓치면 꼼짝없이 하루를 섬에서 보내야 하는데 민박 외엔 숙박시설이 없어 열악하다. 그 불편함까지도 이 섬이 가지고 있는 매력의 일부이긴 하지만 말이다.

제주 구좌 평대마을에서 진행하는 ‘부석희 삼춘의 찐제주’ 프로그램. 마을 여행을 콘셉트로 곳곳에 숨겨진 사연을 들을 수 있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 구좌에 숨겨진 옛이야기, 해녀와 위스키의 전설

그간 듣지 못했던 섬 이야기에 솔깃해졌다면 이번엔 구좌읍으로 향해보자. 당근으로 유명한 구좌읍은 제주시 동부 해안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이다. 한적해 보이지만, 이곳에는 잊힐 뻔한 이야기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마을 이야기에 앞서 이곳에 오래된 전설 하나를 소개하자면 ‘해녀들과 위스키’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과거 구좌 앞바다에 난파된 외국 상선의 위스키병들이 해안으로 떠밀려온 적이 있다. 세화해수욕장 앞까지 떠밀려온 이 귀한 술을 마을 주민들은 주워 밤마다 파티를 열었고, 모두가 취해 웃고 떠들던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병이 점점 줄기 시작하자, 마을의 상군 해녀들(상급 잠수 실력을 가진 해녀들)이 직접 뗏목을 만들어 난파선이 있는 바다로 나아갔다. 그들은 거센 물결을 뚫고 술을 다시 가져왔고, 그렇게 며칠 밤 더 마을에는 환한 불빛과 웃음소리가 이어졌다고 한다. 이곳 상군 해녀들이 지금도 술 하면 ‘브랜디’를 떠올리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이 당시 위스키를 함께 구해온 협동심 때문일까. 세화항구 앞바다는 해녀들이 구역을 나누지 않고 공동으로 사용하기로 합의한 최초의 바다다. 이곳 해녀들은 물질을 함께 들어가고 함께 나온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명대사처럼 “천 리 길도 같이 같이 가면 십 리 길”이라는 말이 구좌에 새겨져 있다.

이같이 마을 주민이 아니라면 몰랐을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구좌에서 마을 해설사로 활동 중인 부석희 삼춘이다. 제주 구좌 평대마을에서는 ‘부석희 삼춘의 찐제주’라는 이름의 마을 여행이 운영되고 있는데 삼춘의 트럭을 타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숨겨진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다. 여행의 코스나 사연도 그날그날 달라진다. 어느 날은 평대 바다 앞에서 물질하는 식구들이 바다에서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리는 용왕당을 가기도 하고 또 다른 날은 돌담을 쌓고 당근농사를 짓는 농부 할멍의 집으로 안내한다.

이곳 구좌 마을에 들어서면 특이한 풍경이 하나 있다. 집집마다 카펫처럼 깔린 근사한 금잔디다. 여기에도 물론 이야기가 있다. 한 할멍이 육지에서 기르던 금잔디가 탐이 나 이를 한 줌 가져와 기르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보고 경쟁심이 붙은 이웃 할멍들이 너 나 할 거 없이 이 집 마당에서 잔디 한 줌씩 가져가 이곳 마을의 마당은 모두 이 폭신한 금잔디로 둘러싸였다. 금잔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 마을은 정원 꾸미기에 진심이다. 정원대회를 연 것도 아닌데, 모든 집마다 개성 있는 마당을 자랑한다. 어떤 집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마당과 노란 양철 지붕으로 색을 맞췄다. 또 다른 집에는 어디서 들여왔는지 모를 야자수 네 그루가 정원 한가운데 솟아 있고, 해녀가 사는 현대식 주택은 깔끔하고 단단한 인상을 풍겼다. 이런 집들을 천천히 지나 걷다 보면, 우리는 이 마을이 단순히 오래된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온 시간 자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부석희 삼춘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지금이 아니면 놓칠 수 있다. 삼춘이 마을 여행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이야기를 들었다던 10명이 넘는 할멍 중 이제 남은 이는 단 한 명. 남은 것은 그들이 살던 집과 이야기뿐이다. 그 집들을 찬찬히 걷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그 시간 속에 들어가 있게 된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 숲에서 만드는 ASMR, 선흘곶자왈의 사운드워킹

제주 하면 자연경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푸른 바다가 배경에 있고 4월이면 화사한 벚꽃과 함께 푸릇푸릇한 나무와 풀이 어우러져 사진실력이 없어도 어딜 가나 작품사진 하나 찍을 수 있다. 그런데도 곶자왈은 사진과는 거리가 좀 먼 곳이다. 우거진 수풀은 사시사철 푸르지만 하늘까지 빽빽해 곶자왈에 들어서면 어둡다. 그래서 우리가 집중할 것은 소리다. 이곳에서는 눈으로 보는 대신, 귀로 듣는 방식의 산책이 가능하다. ‘더사운드벙커’에서 운영하는 ‘사운드워킹’ 프로그램은 이러한 곶자왈의 특성을 살려 약 40분간 숲속을 걸으며 다양한 소리에 집중하는 체험이다.

이 시기 제주를 방문하면 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제주에서는 휘파람새의 울음소리와 습지에서 들려오는 산개구리의 울음으로 봄이 왔음을 알기도 하는데 맨 귀로는 듣기 어려울 수 있지만 사운드워킹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는 전문가용 소형 녹음기와 헤드셋으로 소리를 증폭시키면 조금만 집중해 들으면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나뭇잎 위를 걷는 발자국 소리, 딱따구리가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 직박구리의 노래, 풀벌레의 잔잔한 합창…. 말하자면 직접 만드는 ‘숲 ASMR’인 셈이다. 숲은 매일 조금씩 다른 소리를 들려준다. 어제 울던 새가 오늘은 조용하고, 밤새 울던 개구리와 풀벌레는 낮이 되면 숨어버린다. 사계절 내내 푸른 곶자왈이지만, 그 속의 생명은 늘 시간과 날씨에 따라 다른 호흡을 한다.

제주 방언으로 ‘숲속의 바위지대’를 뜻하는 곶자왈은 용암 지형 위에 형성된 독특한 생태계다. 바위와 숲이 복잡하게 얽힌 이 지역은 화산활동의 흔적과 제주 고유의 생물 다양성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국내에서도 유일한 생태적 특이성을 지닌다. 곶자왈에는 한겨울에도 푸른 상록수가 자라고, 멸종위기 야생생물과 제주특산식물들이 서식한다.

제주 애월읍 납읍리의 난대림. 제주는 용암 지형 위에 형성된 숲이 한겨울에도 푸르다.

 

# 제주 여행이 달라졌다…‘바다가는 달’ 캠페인

제주에는 지금, 다른 방식의 여행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해양수산부는 올해 6월까지 ‘바다가는 달’ 캠페인을 통해 다양한 해양관광 콘텐츠를 지원할 예정이다. 특히 비양도는 ‘삶과 자연을 경험하는 섬 여행’이라는 테마로, 서귀포는 생태교육과 마을 여행을 결합한 ‘책임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지역특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런 흐름은 단순히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 아니다. 제주라는 공간이 가진 고유의 삶과 이야기를 지키면서, 여행자들과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기 위한 시도다. 무분별한 소비형 관광에서 벗어나, 함께 오래 머물고 나누는 지속 가능한 여행으로의 전환이다.

제주는 이제 더 이상 관광지를 소비하는 공간이 아니다. 이곳은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곳이다. ‘육지것들’이라는 말이 조금은 무뚝뚝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안에는 제주의 방식대로 손님을 받아들이는 정서가 담겨 있다. 아무에게나 다 보여주지 않는 섬의 속살, 아무에게나 쉽게 말을 붙이지 않는 섬의 기품. 하지만 진심으로 물어보는 사람에게는, 제주는 언제든 오래된 이야기 하나쯤은 들려줄 준비가 되어 있다.

■ 제주하면‘구좌 당근’

구좌에 왔다면 당근을 빼놓을 수 없다. 구좌읍은 당근의 고장이기도 하다. 붉은 화산재 토양과 해풍이 어우러지며, 이곳의 당근은 당도와 향에서 확연히 차이를 보인다. 1월에서 3월 사이에 수확하는 ‘월동당근’은 다른 지역의 당근보다 단단하고, 당도가 훨씬 높아 프리미엄 상품으로 취급된다. 전국 당근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이 지역에서 나올 정도다. 요즘에는 당근 케이크·당근 주스는 물론이고, 농가에서 직접 운영하는 팜 카페에서는 당근으로 만든 잼과 디저트를 판매한다.

지난 5일 식목일을 맞아 제주 한림읍 비양도에서 진행한 황근 군락지 복원 행사. 한국관광공사 제공

 

비양도 찾은 어린 손님들, 무궁화 심고 쓰레기 줍고

■ 관광公 ‘황근 복원행사’

식목일이었던 지난 5일, 제주 한림읍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비양도에 오랜만에 어린 손님들이 찾아왔다. 한국관광공사가 비양리마을회와 함께 황근 군락지 복원 행사를 열고, 생태환경 보호 활동을 진행한 자리다. 이날 행사에는 여미지식물원, 제주올레, 제주국제고 학생 등 150여 명이 참여해 섬에 생기를 더했다.

참가자들은 비양도 펄랑못 일대에 제주 자생 무궁화인 황근 120그루를 식재했다. 황근은 염분이 많은 해안가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로, 한때 멸종위기 야생생물Ⅱ급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20여 년에 걸친 민·관 협력을 통해 개체 수가 회복됐고, 최근에는 맹그로브처럼 육상보다 3∼5배 많은 탄소를 흡수하는 ‘탄소주머니’ 식물로도 주목받고 있다.

이날 참가자들은 황근을 심은 뒤 섬 둘레길을 걸으며 해양쓰레기 수거 활동도 병행했다. 해류를 타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해양쓰레기는 비양도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다. 자체적인 쓰레기 처리시설이 없는 비양도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바지선을 이용해 연간 약 120t의 쓰레기를 육지로 옮기고 있다. 걷기 좋은 둘레길 풍경을 해치는 가장 큰 요인도 이 형형색색의 플라스틱과 유리 조각들이다. 이날 현장에는 폐박스를 재활용한 안내판이 설치됐고, 참가자들은 텀블러와 손수건을 챙겨와 ‘제로웨이스트’ 실천에도 나섰다.

현장을 찾은 박정웅 한국관광공사 제주지사장은 “비양도는 제주의 소중한 생태자원과 해양환경을 품고 있는 보물 같은 섬”이라며 “앞으로도 제주의 고유 생태를 활용해 지속가능한 해양관광 콘텐츠를 개발하고 알리겠다”고 밝혔다. 한편, 한국관광공사 제주지사는 지난 2월 비양리마을회와 ‘2025년 제주 해양관광 콘텐츠 발굴 및 판촉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