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습합과정서 나타나… 일부선 “단군 산신 가능성” 제기
이성계 조선건국과 관련한 산신 전설은 유명… ‘최고 기도처’로 꼽혀
남해 금산, 한국 최고의 기도처로 꼽힌다. 한국의 3대 기도처라 하면 남해 금산 보리암,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낙가산 보문암이다. 여수 향일암을 포함해서 4대 기도처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으뜸 기도처가 남해 금산 보리암이다. 이들은 모두 해수관음 기도 도량이다. 산신 기도처로서는 설악산 봉정암과 팔공산 갓바위 기도처를 으뜸으로 꼽는다. 때로는 영축산 통도사 자장암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산신 기도처와 해수관음 기도처를 총망라해서 꼽는 한국 최고의 기도처는 금산 보리암과 설악산 봉정암, 팔공산 갓바위라 한다. 해수관음이든 산신 기도처든 금산 보리암은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기도처인 셈이다.
사람이 기도를 하면 그 대상은 누구일까? 일단은 절대자로 보인다. 그러면 그 절대자는 누구인가? 종교에서는 부처와 예수, 마호메트를 꼽을 수 있지만 종교 이전의 우리 전통신앙에 있어서는 단연 산신(山神)이다. 산신과 최고 기도처가 있는 해수관음보살은 어떤 관계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남해 금산은 전통적으로 명산은 아니었다. 현대 들어서까지 명산으로 꼽히는 전국의 산들은 통일신라가 일찌감치 전국의 명산·대천을 삼산오악과 대사·중사·소사로 선정한 산에 모두 포함된다. 남해 금산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최초의 역사적 기록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온 전국의 산천제나 천제를 지내던 명산 30여 곳에 금산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포함되지 않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뚜렷한 이유는 아마 당시까지 육지에서 접근성이 매우 떨어졌던 섬이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남해’란 지명은 신라 신문왕 시절 행정구역 개편으로 첫 등장한다. 금산 절경의 진가를 서서히 알릴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고려시대까지 역사서나 관련 문헌에 금산에 대한 기록은 여전히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 들어서부터 남해와 금산 관련 기록이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금산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을까? 분명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계기는 조선 건국과 관련한 이성계와 금산 산신의 얽힌 이야기 때문이다. 왕과 관련된 내용이 전해지자 금산을 찾는 선비들이 부쩍 많아졌다. 금산에 대한 선비들의 유람록도 매우 많이 등장한다. 경승 자체가 뛰어난 데다 이성계의 건국에 얽힌 산신과의 관계에 대한 궁금증이 절대적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남해는 당시 거제, 제주와 함께 조선의 3대 유배지였다. 육지에서 섬으로 유배 온 많은 선비들은 육지와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달리 할 일도 없어, 학문을 하거나 유람이나 유산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금산유람록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성계와 금산 산신의 이야기는 보리암에 전한다. 구체적 장소는 금산 보리암 동쪽 삼불암(三佛巖) 아래 ‘이태조기단(李太祖祈壇)’에 있다. 원래는 ‘이씨기단’ ‘왕배석(王拜石)’ ‘성대처(聖臺處)’ ‘산제단(山祭壇)’으로 불렸던 것을 후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고 난 뒤 태조기단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곳이 바로 이성계가 기도를 올리고 금산 산신령의 은덕을 입었던 장소라고 전한다. 남해에서 구전되는 내용이다.
‘고려 말 이성계는 왕이 되기 위해 백두산부터 묘향산, 구월산, 금강산, 설악산 등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백일기도를 올렸다. 명산 산신에게 자신의 운명을 물었지만 어느 산에서도 감응이 없었다. 더욱이 고려 말 왜구를 물리친 3대 대첩에 속하는 황산대첩의 본거지인 지리산 산신은 “아직 그럴 만한 인물이 못 된다”며 등을 돌리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지리산이 한양을 등지고 있다는 설도 있다. 이성계는 그 어떤 산신에게도 왕의 자리에 오르리라는 계시를 받지 못하고 상심에 빠져 있었다(이성계가 전국의 명산 산신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은 곳곳에 소개된다).
백두산·지리산 산신은 이성계 거부… 금산 산신은 받아
지리산에서 마지막 날 기도를 하고 암담한 심정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남해 섬 어딘가에 서광이 비쳤다. 이성계가 찾은 그 섬이 남해였고, 서광이 비친 곳은 보광산(지금의 금산)이었다. 이성계는 삼불암이 보이는 절벽 아래 자리를 잡고 마지막 기대를 걸고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그는 맞은편 큰 바위 위에 작은 바위 3개가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산신에게 기도했다.
“산신이시여! 제가 중국까지 정벌하여 황제가 될 운명이라면 저 바위 3개가 모두 서게 하시고, 제가 한 나라의 임금이 될 운명이라면 2개를 세워 주시고, 한 나라의 재상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1개를 세워 주십시오. 만약 하나의 바위라도 서지 않고 백일기도가 끝난다면 저는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촌로로 살겠습니다.”
백일기도 마지막 날 기도를 올린 이성계는 꿈을 꾸었다. 개성으로 향하는 자신의 등 뒤에 말뚝 세 개가 지워져 있었다. 그 말뚝을 지고 개성에 도착하자 자신이 목 없는 물병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물병이 가마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놀라서 잠을 깬 이성계는 두 개의 바위가 벌떡 일어나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이 나라의 왕이 될 운명이라는 사실을 감지했다. 하지만 꿈이 마음에 걸린 이성계는 해몽가를 찾았다. 해몽가는 갑자기 그에게 큰절을 올렸다.
“몸이 세로 기둥이 되고, 세 개의 말뚝이 몸을 가로질렀으니 임금 왕(王)자입니다. 목이 없는 물병은 한 손으로 따를 수 없으니 두 손으로 떠받드는 분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물병이 가마솥 안으로 들어간 것은 장차 장군의 왕국이 철옹성처럼 굳건하리라는 암시입니다. 감축드리옵니다.”
이성계는 자신이 왕이 되면 보광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 주겠다는 약속을 한 터였다. 그 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신하들에게 보광산을 비단으로 덮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보광산 전체를 덮을 만한 비단이 없었다. 한 신하가 묘안을 냈다.
“전하, 보광산을 덮을 만한 비단도 모자라거니와 비단으로 덮은들 1년도 안 돼 비바람에 흩날려 썩고 흉물스럽기까지 할 것입니다. 보광산을 영원히 비단으로 덮을 수 없으니 산 이름을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산(錦山)이라 부르는 것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그래, 그대의 뜻이 옳도다. 그리하도록 하라.”
이성계는 남해 금산을 영원히 비단처럼 아름답게 한다는 의미로 산 이름을 금산으로 바꿨다.’
남해에서 지금까지 전하는 건국신화에 가까운 설화다. 죽은 자의 영혼과 대화하는 의례인 구명시식(救命施食)을 관장하는 차길진씨는 “옆에서 묘안을 낸 신하는 정도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적 문헌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조선 태조기단이 있는 보리암 동쪽에 1903년(광무 7)에 건립한 ‘남해 금산 영응기적비(南海 錦山 靈應紀蹟碑)’에 위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거의 500년이 지나서야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셈이다. 그 전에는 조겸(趙?: 1569~1652)의 <유금산록(遊錦山錄)>에 비슷한 내용을 처음으로 소개한다. 1609년(광해군 1)에 쓴 조겸의 유람록은 금산과 이성계의 전설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어쨌든 이 설화를 통해 보광산으로 불리던 것이 금산으로 명명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부에서는 전설보다 조금 더 과장해 ‘조선 개국공신으로 유일하게 사람이 아닌 산신으로 금산 산신이 책봉됐다’고까지 전한다. 믿거나말거나 하는 얘기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성계는 조선 개국공신으로 16명을 책봉했지만 태종 이방원이 자신을 포함한 3명을 더 늘려 19명으로 했으며, 전부 사람이다. 이와 같이 남해 금산에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전설과 설화가 너무 많다.
하지만 이성계가 기도했다고 전하는 산신의 실체와 남해 금산에 전하는 산신에 대해서 접근해 볼 필요는 있다. 그러기 위해서 보리암 창건설화와 금산에 있는 산신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창건설화는 대개 그 산의 산신과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기 때문이다.
보리암 창건설화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역사서에 ‘보리암’이란 단어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구전과 조선시대 유람록에 소개되는 내용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보리암 중수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보리암 창건설화는 두 가지가 전한다. 하나는 원효스님이 산이 마치 방광하듯 빛나기에 찾아와 초막을 짓고 수도하던 중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후 산의 이름을 보광산이라 하고, 초암은 보광사라 했다는 설이다. 원효가 친견한 관음보살은 남인도의 보타락가산(普陀洛迦山)에 산다. 이 산은 바다를 면하고 온갖 보배로 꾸며졌으며 숲이 우거져 꽃과 과일이 풍부하고 맑은 물이 솟는 연못과 연못 옆 금강보석에는 관음보살이 결가부좌로 앉아 중생을 이롭게 한다. 원효는 이를 본 따서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하고, 도량을 보광사라 했다고 전한다.
또 다른 하나는 가락국 김수로왕이 왕비로 맞아들인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許黃玉) 공주와 함께 배를 타고 온 장유(長遊) 선사가 세웠다는 설이다.
허황옥 관련 내용은 <삼국유사> 제2권 가락국기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인도에서 허황옥과 함께 온 장유선사가 김해에 가기 전 남해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의 장유선사 이야기는 지리산 반야봉에 위치한 칠불사 설화에 나온다. 장유선사는 왕후가 낳은 열 왕자 중 일곱 왕자를 데리고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하는데 왕후가 자주 가야산을 찾아 방해가 됐다. 이에 장유선사는 일곱 왕자를 데리고 지리산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후 장유선사는 성불하게 됐고, 김수로왕은 크게 기뻐하여 대가람을 이뤘다고 한다.
그외 보리암 창건설화는 아니지만 금산 관련 세존도 전설이 있다. 아득한 옛날 석가세존이 돌배를 만들어 금산 쌍홍문 앞에서 바다로 나갔으며,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지나갔다고 한다. 세존도는 남해에서 약 25.68km 떨어진 섬으로 동굴의 천장에 미륵(彌勒)이라는 각자가 있다고 한다. 남해의 지명 중에 ‘떠나는 미륵을 도왔다’는 의미의 미조(彌助),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의미의 관음포(觀音浦) 등은 이로 인해 생겼다고 전한다.’
창건설화 관련내용은 진위 여부를 떠나 곰곰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효가 보리암을 창건한 시기는 대략 문무왕 3년(683)으로 추정한다. 이때는 신라가 막 삼국을 통일한 뒤 국가적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새로운 사상을 체계화할 즈음이다. 불교사상을 통치이념으로 더욱 강화할 때였다.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되면서 우리 전통신앙의 삼신(三神)인 산신·용왕신·칠성신은 사찰에 습합되는 과정을 거친다. 산신은 재물을, 용왕신은 기복을, 칠성신은 수명을 관장하는 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삼신을 통틀어 광의의 산신이라고도 한다. 그 결과 기존에 있던 산신·용왕신·칠성신은 부처와 보살의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서 좌정한다. 산신 중 하나인 독성은 나반존자로, 용왕신은 해수관음보살로 불교의 신앙대상으로 모습이 바뀐다.
따라서 보리암의 해수관음보살은 우리 전통의 용왕신이 습합과정을 거쳐 불교식으로 변신 좌정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4대 기도처에 있는 해수관음보살은 원래 우리 전통의 용왕신의 불교식 형태일 수도 있다. 보리암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도 ‘용왕과 선재동자가 협시한 관음보살 삼존의 도상적 특징을 지닌 점과…’라고 적혀 있다. 용왕이 미륵으로 화해 나타난 지명이 미조나 관음포 등이다. 예로부터 지명은 그 지역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이나 다른 지명과의 관계에 의해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허왕후 관련 설화는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한 시기가 너무 이르다는 점에서 다소 무리가 따른다. 한반도에 불교가 첫 전래된 시기는 대략 4세기 직전으로 본다. 김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하고 허왕후와 결혼할 때는 서기 100년이 채 안 될 때다. 하지만 보리암 해수관음보살상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허황옥과 장유선사가 인도에서 배를 타고 남해로 올 때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한 돌로 건립했다고 전한다.
또한 지리산 이남 남해지역에서는 남방불교가 전래된 유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어 전혀 근거 없는 설로만 치부할 수 없다. 그런데 탑의 건축양식이 고려 초 형식으로 추정되고 있어 그 가능성을 더욱 낮게 한다. 전설이지만 어떤 것은 맞기도 하고 어떤 것은 낭설에 가까운 내용들로 뒤섞여 있다.
요약하자면 이성계가 왕이 되기 위해 백일기도를 한 절대자는 산신이었고, 보리암의 해수관음보살은 우리 전통신앙의 산신이 불교식으로 습합해 좌정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차길진씨는 “이성계가 조선 건국을 기원하는 100일 기도를 올리며 매달린 절대자는 환인과 환웅, 그리고 단군 3대”라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단군과 석가모니 부처가 서로 반목했던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한민족의 시조이자 산신의 시조인 단군이 불교식 습합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남해 민속학자인 박성석 경상대 명예교수는 “정상 부근의 단군성전은 남해 금산에 있는 가장 오래된 산신 제사 터 중의 하나이며, 단군이 금산의 산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상 부근에서는 산신 관련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정상 봉수대 옆에는 큰 바위 세 개가 나란히 있다. 두 개는 마치 거인이 신발을 벗어놓은 듯하다. 이 같은 내용은 1771년 남해 유배 중이었던 류의양(柳義養)의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에 자세히 나와 있다.
‘(전략) 남해 지형이 사면 바다인데 남쪽은 더욱 가이 없는 바다이라. 금산(錦山)이란 이름난 뫼가 있으니 읍내서 삼십리를 남으로 가서 평지에서 수십 리를 올라가니 초대 중대 상대라 바위 셋이 있다. 초대 중대는 볼 것이 별로 없고, 상대는 기이한 바위가 많으며 그중에 높고 큰 바위 위에 또 바위 둘이 있다. 바위 모양이 마치 큰 나막신 한 쌍을 남향하여 벗어놓은 듯하니, 목혜의 키는 사람의 길로 두어 길이나 되고 너비도 그렇게 큰지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신선(산신)이 여기와서 놀다가 나막신을 벗어두어 돌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 말은 극히 허황하나 모양을 보면 천연한 한 쌍의 대단히 큰 나막신 같으니 그런 부회(府會)한 말이 있기가 괴이치 아니하더라. 나막신 바위 옆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주세붕(周世鵬: 1495~1540)이라 새긴 것이 있으니, 유산 와서 자기 이름을 기록한 것이더라. (후략)’
류의양이 말한 나막신 바위에 ‘유홍문(由虹門) 상금산(上錦山)’이란 석각이 새겨져 있다. 이를 ‘홍문으로 해서 금산에 오르다’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홍문이 있으므로 금산이 으뜸이다’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석각이 있다고 해서 이 바위를 ‘문장암’ 혹은 ‘명필 바위’, ‘상제암(上帝岩)’이라 부른다. 문장암 위에 있는 바위를 목혜바위, 일명 나막신 바위라고 한다.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이 바위는 고대부터 개인 치성 터로 사용된 듯하다”고 말한다.
정상 문장암에서 서쪽 10분 거리에 ‘단군성전’이 있다. 이 자리가 옛날 금산의 산신각 자리다. 샘터 옆 큰 바위에는 이곳이 산신각 자리라는 사실을 말하는 석각이 있다. 석각에는 ‘금산산신탄생축원계원열명록(錦山山神誕生祝願契員列名錄)이라고 새겨져 있다. ‘금산 산신령의 탄생을 축원하는 계원들의 이름을 적은 목록’이란 뜻이다. 건립 시기는 건양 2년 정유라고 적고 있다. 1897년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20년 전이다. 여기서 말하는 금산 산신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오래전부터 주민들에 의해서 신성시되어 왔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샘터 중앙에는 단군상, 좌우에는 이성계와 최영 장군으로 추정되는 무장한 장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두 개의 장군상이 중앙의 단군상을 좌우로 보호하는 형국이다. 단군성전 법당 안에는 정중앙에 단군 영정과 함께 좌우로 전통적인 산신도(圖)와 칠성신도, 용왕신도 등이 모셔져 있다. 우리 전통신앙의 종합판 같다.
정상 능선에서 내려와 단군성전 반대편으로는 제석봉이 있다. 하늘에서 산신이 내려와 놀다가 간 바위로 통한다. 금산 38경 중의 하나다. 정상 능선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부소바위가 나온다.
금산 부소바위도 산신과 관련이 있다. 산신뿐만 아니라 단군과 중국의 진시황과도 관련 있다. 진시황의 아들 20명 중 첫째가 바로 부소(扶蘇)다.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금산에 유배 온 자리라고 전한다. 전설이지만 조금 과장이 심한 내용이다. 진시황의 아들은 남해가 아니라 중국 북쪽 변방을 지키며 진시황이 죽을 때까지 살았다.
진시황과의 관련은 부소보다는 오히려 삼신산 불로초와 연결된다. 진시황은 서복(혹은 불)을 보내 불로초를 구해 오게 한다. 서복은 인솔대장으로 동남동녀(童男童女) 500명을 데리고 신선(산신)이 산다는 삼신산을 찾아 한반도로 온다. 한반도 몇 곳에 도착한 것으로 전한다. 그중의 한 곳이 남해 금산이다. 남해 금산에 머물며 사냥만 하다 제주도로 갔다고 한다. 그 흔적을 남긴 기록이 ‘서불과차(徐市過此)’다. ‘서불, 이곳을 지나다’는 말이다. 그 금석문이 금산 아래 자락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부소란 지명이 나왔는지 궁금해진다. 부소는 ‘풋소’의 한자 표기다. 풋소는 ‘소나무’를 뜻하는 옛말이다. 단군의 둘째 아들도 부소로 알려져 있다. 결국 부소는 진시황이 아니라 우리 전통신앙과 관련성이 더욱 깊다는 얘기다.
신화와 전설은 현재로서는 밝혀지지 않은 내용이지만 언젠가는 사실로 밝혀질 가능성이 높다. 사실에 기반해서 조금 과장된 내용은 있을 수 있지만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남해 금산은 특히 그렇다. 역사서나 문헌에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이나 신화의 내용이 더 많고, 신빙성도 있다.
어쨌든 남해 금산의 산신은 3개의 실체로 압축된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위해 백일기도를 한 산신, 우리 전통 산신이 불교식 습합과정을 거쳐 나타난 해수관음보살, 그리고 진시황이 삼신산을 찾아 보낸 서복과 관련된 산신 등이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금산 산신은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또 팔공산 갓바위와 마찬가지로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 준다’는 최고의 기도처로 꼽힐 만큼 영험한 곳으로 평가받는다.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이순자씨가 금산 보리암을 수없이 드나들면서 기도를 올렸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금산 산신의 뛰어난 족보와 관련된 내용이 한 가지 더 있다. 한국에는 여덟 명의 큰 산신이 있다. 남해 금산 산신은 한국 8대 산신 중 한 명이다. 아버지는 백두산 산신이고, 어머니는 계룡산 산신, 그 아래 남해 금산 산신을 포함해서 여섯 명의 아들 산신이 전국에 분포해 있다고 전한다. 물론 지리산 산신이 들으면 얼토당토않은 얘기라고 부인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