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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여행, 그것도 옛 동독 땅으로 가는 여행의 감상이 다른 때와 전혀 달랐습니다. 오랜 적대의 시간을 보내고 어렵게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마주 앉았던 직후라 그랬겠지요. 독일을 여행하는, 마지막 분단국가에서 온 여행자들이라면 왜 안 그렇겠습니까. 옛 동독 땅에서 긴장과 적대의 시간을 지나 끝내 통일을 이룬 독일의 경험을 봅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한 적대와 증오를 어떻게 벗어버렸는지, 통일은 그들에게 무엇이었으며 우리에게는 또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것인지, 중부 유럽의 역사적 전통과 종교개혁의 자취들 사이로 수많은 질문이 끼어듭니다. 여행이 답을 줄 수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분단의 오랜 적의를 잊고 역사를 공유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기대와 위안을 얻습니다.
# 에르푸르트, 동·서독이 처음 만나다 독일 지도를 펴놓고 정중앙을 짚으면, 거기가 튀링겐주다. 독일의 주(州)는 모두 16개. 그중 5개 주가 독일 통일 전에 동독 땅이었다. 튀링겐주는 독일 통일 전 서독과 경계를 이룬 동독 땅이었다. 튀링겐주를 우리로 친다면 경기도나 강원도쯤 되겠다. 튀링겐주에서 가장 큰 도시, 그러니까 우리의 도청소재지쯤 되는 도시가 에르푸르트다. 그래 봐야 인구 20만 명 안팎의 그리 크지 않은 도시다. 접적 지역의 중소도시. 비유하자면 우리의 경기 포천이나 강원 철원, 혹은 고성쯤이나 될까. 우리의 접적 지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됐지만, 이곳 에르푸르트는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용케 폭격을 피했다. 전쟁으로 파괴된 지역이 전체 도시의 5% 남짓에 불과하다. 수백 년 역사의 건물들이 도심 곳곳에 남아 있어 중세 유럽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건 이 때문이다. 독일 튀링겐주를 말하면서 에르푸르트 얘기를 맨 앞에 꺼내놓는 건, 에르푸르트 역 앞의 한 호텔 건물 옥상에 간판처럼 올려놓은 한 줄의 문장 때문이었다. “WIILY BRANDT ANS FENSTER” 우리 말로 해석하면 이렇다. ‘빌리 브란트, 창문 쪽으로 나와주세요.’ 시곗바늘을 돌려보자. 지금으로부터 48년 전인 1970년 3월 19일의 일이다. 독일이 동서로 분단됐던 냉전의 시대. 분단 이후 최초로 서독과 동독 총리가 여기 에르푸르트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회담을 위해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독 땅인 에르푸르트로 건너왔다. 동독 국민은 서독 총리를 보기 위해 호텔 앞에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러고는 ‘창문 쪽으로 나와 달라’고 입을 모아 외쳤다. 호텔 건물 옥상에 걸어놓은 문장이 그때 군중이 외치던 그 구호다. 공교롭게도 서독의 총리도, 동독의 총리도 다 ‘빌리’였지만 군중이 창문 쪽으로 나와달라고 했던 ‘빌리’는 서독 총리였는데, 민망하게도 동독 총리가 자신을 부르는 것으로 착각해 창밖으로 나와 손을 흔들었다던가.
# 동·서독의 분단과 화해의 풍경 다른 시기였다면 예사롭게 지나쳤을 풍경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이 몰고 온 훈풍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상황에서 에르푸르트 역 앞에 내걸린 문장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28년 전에 통일을 이룬 독일 사람들은, 이제 그 문장 앞에서 아무런 감흥도 없는 모양이었지만, 마지막 분단국가에서 온, 그것도 최근에 남북 정상의 만남을 감격적으로 지켜봤던 한국인들에게는 남다르다. 에르푸르트에서 있었던 서독과 동독의 역사적인 첫 정상회담의 결과는 어땠을까. 기대는 컸지만, 소득은 없었다. 서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아 첫 만남은 그저 ‘둘이 만났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회담의 직접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그 만남만으로도 통일을 향한 거대한 수레바퀴는 돌아갔던 게 아닐까. 첫 정상회담 개최 후 2년이 지나 서독은 동독과 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동독을 통일의 대상이 아닌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에르푸르트는 첫 동서독 총리가 만난 공간이라는 것 외에 또 다른 정치적 함의를 품고 있다. 독일의 중도좌파 정당인 사민당이 여기 에르푸르트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원칙을 따르는 강령을 처음 채택했다. 비스마르크 정권의 사회주의 진압법으로 비합법 정당이었던 사민당이, 비스마르크 실각으로 법이 폐지되자 에르푸르트에 모여 당 대회를 열고 마르크스주의를 기치로 내건 에르푸르트강령을 채택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동독 총리가 첫 정상회담 장소를 에르푸르트로 정한 것도, 그곳이 마르크스주의의 기치를 처음 내걸었던 역사 공간이라는 상징 때문이었을까. 어찌 됐든 동독은 서독에 흡수됐고, 뒤이어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쇠퇴한 이념의 공간에서 치열했던 과거의 갈등과 반목이 덧없게 느껴지듯이, 우리도 통일 이후 분단의 공간을 그런 눈으로 볼 수 있을까. 남북정상회담의 감격이 그저 덤덤하게 복기해내는 과거의 일로만 기억될 날이 올까.
# 오래된 도시에서 시간을 잊다
에르푸르트에서 가장 이름난 관광지는 ‘상인들의 다리’다. 상인들의 다리란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에다 놓은 다리인데, 말이 강이지 강폭이나 수량은 개울 수준이다. 청색 염료 생산으로 이름났으며 중개무역도 발달했던 에르푸르트가 무역 중심지로서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중세시절 지어진 다리다. 다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놀랍다. 유럽 전역을 통틀어 건물이 들어선 다리로는 가장 규모가 크기도 하거니와, 700년의 역사에도 아직 여전히 가게와 주거지로 쓰이고 있다는 것도 그렇다. 다리 양옆으로는 빽빽하게 건물이 들어서 있어 다리 위에서는 그곳이 다리라는 걸 눈치챌 수 없을 정도다. 상점들이 밀집한 골목길이기도 한 ‘상인들의 다리’를 걷노라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몇백 년 전의 시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고색창연한 유럽의 도시에서는 종종 시간을 잊는 경험을 하게 되지만, 에르푸르트에서는 더 자주 그런 착각을 하게 된다.
# 마르틴 루터, 여기서 사제의 삶을 약속하다
동서독 총리의 정상회담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사실 에르푸르트는 종교개혁에 앞장선 루터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는 도시다. 에르푸르트 북쪽 100㎞쯤 떨어진 작은 도시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났지만, 1501년 대학에 진학하면서 에르푸르트에서 청년 시절을 보냈다. 에르푸르트를 대표할 수 있는 건축물이라면 계단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에르푸르트 대성당과 성 세베루스 교회다. 돔플라츠 광장에서 보면 마치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성당과 교회는 거대한 규모로 입이 딱 벌어지게 한다. 대성당은 고딕양식의 외양과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화려하고 정교한 바로크 양식의 제대가 인상적이다. 대성당을 마주 보는 성 세베루스 교회는 후퇴하는 아치형 입구와 화려한 부조로 성당 자체가 하나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처럼 느껴진다. 성당과 교회에서는 웅장한 건축과 섬세한 조각이 마치 서로 떼어낼 수 없는 한 몸처럼 느껴진다. 에르푸르트 대성당은 웅장한 건축미만으로도 모자람이 없지만, 종교개혁을 이끈 마르틴 루터가 그곳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는 사실로 더 특별하다. 에르푸르트의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하고 법관이 되기 위해 준비하던 루터는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고 고민하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수도원에서 1년 동안의 수도사 생활을 마친 루터는 에르푸르트 대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성당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빛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제대 아래 이 자리에서 500여 년 전 루터는 무릎 꿇고 사제가 되기를 맹세했으리라. # 마르틴 루터의 은수저와 신념
비텐부르크성당 정문에 로마 교황의 면죄부 판매 등을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여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마르틴 루터는 이곳 아이제나흐로 피신했다. 아이제나흐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정의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숨어든 그는 그곳에서 그리스어(헬라어)로 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루터의 성경 번역은 단순한 번역 이상의 의미였다. 당시만 해도 구약은 라틴어로, 신약은 그리스어로 쓰여져 사회지도층이나 성직자가 아니면 읽을 수 없었다. 성경의 말씀을 대중은 그저 예배 중 성직자의 말로만 전해 들었다. 중세 때 교황이나 성직자의 권위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은 당시 갓 발명된 활판 인쇄술로 널리 전파됐다. 누구나 성경을 읽게 된 시대에 사람들은 구원이 교회 의식이나 면죄부 구입으로 얻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됐다. 성경 번역 이후 급진적인 교회개혁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며 은신했던 바르트부르크 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명소다. 마르틴 루터의 은거지라는 역사적 의미 외에도 성은 중부 유럽 봉건시대의 뛰어난 기념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깎아지른 벼랑을 담처럼 두른 바위 위에 올라앉아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성은 마치 요새와도 같다. 성까지 이어지는 길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도시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숲이 깊다. 성안에는 루터가 머물며 번역을 했던 방이 그대로 남아있다. 나뭇결이 일어난 낡은 나무 책상과 의자, 초록색 타일을 붙인 난로 하나가 세간의 전부다. 고립과 은둔의 이 공간에서 500년 전 한 수도자의 뜨거운 신념을 본다. 성안의 전시품 중 인상적이었던 또 하나는 루터가 썼다는 수저다. 은수저라는데 어찌 된 일인지 수저는 금빛으로 빛났다. 그 수저를 쥔 손과 그 수저로 그가 먹었을 음식을 떠올리다가, 욕망을 뛰어넘은 신념의 힘을 생각했다.
# 적대와 통제가 길러낸 원시림
인간의 간섭을 받지 않은 숲이 꼭 접적 지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냉전 시대 후방 군사 주둔 지역도 접근이 엄격히 통제돼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는 곳들도 있다. 튀링겐주의 유일한 국립공원인 하이니히 국립공원이 바로 그런 곳이다. 1935년부터 사격장 등 군 시설이 들어서면서 군사제한구역으로 출입이 통제됐다가 2차 대전 이후 소련군에 의해 통제지역이 더 확장된 중부 독일의 원시림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곳이다. 국립공원 전체 면적 75㎢ 중 군사 통제로 묶여 있던 지역이 50㎢에 달한다. 하이니히 국립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최저 20m에서 최고 44m를 오르내리는 산책로 캐노피 워크다. 캐노피 워크는 철제 구조물을 덧대 만든 허공 위의 산책로. 300m 길이의 캐노피 워크 코스와 230m 길이의 캐노피 워크 코스가 8자 형으로 이어져 전체 코스의 길이는 530m에 달한다. 산책로는 유럽 최대 규모의 혼합낙엽수림 지역의 원시림 지붕 위로 이어져 있다. 캐노피 워크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에 올라보면 국립공원의 울창한 너도밤나무 숲의 신록이 이룬 초록의 바다가 펼쳐진다. 캐노피 워크 말고도 국립공원에는 수백 년 묵은 너도밤나무들이 호위하는 트레킹 코스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자연이 놓아둔 그대로 숨 쉬는 원시림의 숲길이다. 죽어 쓰러진 거목의 뿌리는 이끼로 뒤덮였고, 둥치에는 버섯이 피어나고 있다. 이런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걷노라면 마치 초록으로 샤워하는 듯한 기분이다. 여기다 때마침 국립공원 지역에는 산마늘꽃이 지천으로 피어났다. 흰 융단을 깔아놓은 듯 산마늘꽃이 만개한 숲길은 빨리 걷는 게 아쉬워 속도를 늦추게 된다. 우리도 앞으로 이런 숲을 누릴 수 있을까. 남북의 갈등과 긴장이 완화된다면 쇳내 나는 경계의 땅, 비무장지대에서 과연 눈부신 자연을 이렇게 누릴 날이 있을까. 우리 비무장지대는 이곳보다 더 오랜 시간 인간의 간섭이 닿지 않았던 땅이니, 그곳의 자연은 독일의 국립공원보다 몇 배나 더 훌륭하지 않을까. 독일에서는, 더더구나 옛 동독 땅에서는 냉전의 흔적 혹은 통일과정을 보여주는 것들은 모두 다 각별하다. ■ 여행정보
독일관광청의 올해 마케팅 테마는 식도락이다. 독일에서의 미식은 다소 낯설지만, 독일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이 전체 경비 중 18.2%를 식도락 활동에 쓴다는 게 독일관광청의 집계다. 독일 16개 주에는 각각 특유한 음식 문화가 있다. 튀링겐주는 로스트브라트 부어스트라는 소시지가 명물이다. 소금과 향신료 외에 다른 재료를 넣지 않고 만든 순수한 고기 소시지다. 또 독일 전역에서 이즈음 아스파라거스가 제철이라 웬만한 메뉴에는 삶거나 구운 아스파라거스가 딸려 나온다. 독일관광청 한국사무소 인터넷사이트(www.germany.travel/kr)에 미식을 포함해 다양한 독일 여행정보가 실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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