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딴지일보>
1965년 9월 20일, 역사상 최초로 첫 전투부대인 해병대가 월남에 파견되는 결단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환송사를 읽어내려 가다가 그만 연설문을 놓쳐 원고가 연단 아래로 날아갔다. 주변의 별들은 바람에 굴러 다니는 연설문을 잡기 위해서 네 발로 기어 다니고 박 대통령은 그 모습을 태연히 지켜보고 있었다.
결단식을 마친 병사들이 막사로 돌아와 보니 갑자기 막사 안이 어두워져 있었다. 방금 낭독 했던 '자유의 십자군'이니, '평화의 사도'니 하는 미사여구가 무색하게 보안상의 이유로 창문을 모두 합판으로 가려버렸고 출입구를 모두 막았기 때문이었다. 막사 밖에서는 대통령이 인근에서 동원한 여고생들에게 둘러싸여서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금년은 1964년 시작된 국군의 월남참전이 50주년 되는 해이다. 나의 월남전 이야기는 대양의 한 바가지 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한 바가지 물에서도 바닷물의 기본적인 속성은 찾을 수 있다.
초대 월남전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이 전쟁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루어야할 만한 목표가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5,099명이 희생 되었다.
1970년대 미국은 CBS에서 방영한 한 편의 월남전 다큐멘터리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 존 로렌스라는 기자가 월남의 한 중대에 들어가 생활을 같이 하면서 그들의 실상을 그대로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작전을 위한 부대이동을 앞두고 상부에서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산길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병사들이 이를 거부하는 장면이 그대로 전파를 타고 나갔다. 부대원들은 베트콩에게 훨씬 익숙한 지형인 산길을 택하는 것은 아군이 공격 당할 가능성이 많아서 자살행위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비록 명령위반으로 감옥엘 가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월남전 당시, 정글에서는 절대로 남이 갔던 길은 가지 않고 새로 길을 내면서 가는 것이 상식이었다. 왜냐하면 적이 어디에다 매설물을 설치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찰리 중대>에서 공공연히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미군의 행태가 보도되자 난리가 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전쟁의 현실은 그런 것이다.
사람을 죽일 때는 상대가 멀수록, 보이지 않을수록 쉽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공군, 해군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적다고 한다. 일단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판정을 받으면 치료가 필요한데, 아예 후방으로 빼버리면 다시는 복귀를 못하기 때문에 통상 3일 후에는 원대복귀를 시킨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월남전이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전이어서 적과 대면할 기회가 적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축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공식집계에 의하면 베트남전에 참전한 8년 동안 한국군이 사살한 적군의 숫자는 4만 명이다. 그렇다면 4만 명을 죽이는 현장에 있었던 병사들의 심리 상태는 어떠했을까?
월남전에서 십자성 부대 야전병원에 입원해 있는 부상 전우들을 방문하는 것이 내 임무의 하나였기 때문에 부상병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입원한 환자들 가운데 자기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다고 이야기하는 전우는 거의 없었다. 간혹 자기가 베트콩을 사살했을 것이라고 믿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군인이 팔자일 것 같은' 전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진짜로 자기가 쏜 총에 적이 맞아 죽었을 것이라고 인정하기를 꺼려했다. 그것이 인간이다.
먼저 밝힐 것은, 나는 전장에서 적과 조우하는 직접적인 전투는 해보지 못했지만 적이 나타날 가능성에 대비하는 매복과 정찰의 경험은 있다. 즉 전투 준비의 심리적 경험은 있되 직접 전투의 경험은 없다는 것이다. 전투 준비의 심리와 직접 전투의 심리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또는 그것이 계량이 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막상 적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면, 그때 나의 심리는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다. '용기가 더 생길까, 불안이 더 앞설까' 하는 것이다. 만일에 모든 병사가 전투를 앞두고 공포심에 사로잡힌다면 전쟁은 수행될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구분 되어야 할 것은 전투에서 타의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병사들과 자의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더 큰 지휘관의 심리 차이다. 전투를 앞두고 느끼는 지휘관의 부담감과 일반 병사들이 느끼는 부담감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타의적으로 움직이는 일반 병사들이 느끼는 공포심이 더 클 것이고 전투의 결과에 따라서 자신의 앞날이 달려 있는 지휘관은 보다 계산적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냉철한 지휘관을 만나도 정작 죽어 나가는 것은 병사들이다.
미국은 월남에서 1천 700억 달러의 전비를 소모했고 전쟁이 끝난 뒤로도 월남전 참전 군인을 위해 2천억 달러를 더 지불했다. 1982년 11월 헌정된 월남전 참전 기념관은 280만의 생존 귀환자들에게 통곡의 벽이었다. 그중 80만의 귀환 군인이 전후 정신질환과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렸고, 1970년대 초만 해도 수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퇴역군인 중 약 6만 명이 자살했다. 이 숫자는 실제로 전쟁기간에 죽었던 군인들의 숫자보다 많은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나는 지금까지 월남전에 참전했던 전우들 가운데 TRAUMA(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 편집부 주)에 시달린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한국인이 미국인보다 더 독종이어서 그런가? 아니다. 한국인은 만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서 면역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사는 것이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원인이 분명치 않게 애매하게 겪는 일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겪는 일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다른 법이다. 한국군의 경우 대게 '외국에 대한 막연한 선망', '돈을 벌어야겠다' 등등의 이유로 지원을 했었다. 그러므로 월남전을 바라보는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이라는 시선이 객관적인 자세를 갖는데 조금은 도움이 된 것은 아닐까? 한국 군인과 비슷하게, 2차 대전을 치룬 일본 군인들이 TRAUMA에 시달리는 비율이 낮은 것은 스스로를 윤리적인 책임의 주체로 설정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주장을 접한 기억도 있다. 한마디로 전체주의에 빠진 윤리적 감수성이라고 할까?
TRAUMA라는 측면에서 월남전의 결과를 객관적으로 보면 미국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개인적으로 겪고 있고, 월남은 그것을 민족적으로, 집단적으로 겪고 있다. 때린 놈은 개인적인 TRAUMA를 느끼지만 맞은 놈은 집단적인 TRAUMA를 느낀다는 것이다. 전쟁의 상처가 개인적으로 내상을 입히기도 하지만 민족이나 국가도 집단으로 내상을 입는다.
치렀던 전쟁의 성격, 정도에 따라 후유증도 다르게 나타난다. 월남전은 형식상 내전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외세와의 싸움이었고 한국전은 유엔 16개국이 참전하고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기본적인 성격이 내전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외세와의 싸움이 아닌, 우리끼리 싸우다 지친 한국은 서로 간에 의심만 늘었다.
군용열차를 세운 여자.
어떤 이유로든 자기가 속한 집단과 '다르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자기가 속한 집단과 정서를 같이 하지 못하는 것은 고통일 수 있다. 왕따든 자따든 소외의 결과는 타인과 다른 자기만의 내적 동기가 더 강화되거나 왜곡되어 나타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최근 한국 사회에 나타나는 일베 현상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월남전에 참여했을 당시의 내 처지도 그러했다.
1971년 한 해 미국의 대학에서 4,800회의 반전 데모가 벌어졌고 체포 7,400명, 3분의 2가 경찰이었던 부상자 462명, 방화 247명, 사망이 8명이나 되었고 도서관이나 연구소에도 방화가 발생했었다. 닉슨 대통령이 한 베트남 참전 장교의 부인에게 베트남에 있는 병사들은 훌륭히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데 대학에서 일부 건달패(Bums)들이 소동을 부리고 있다고 언급한 말이 보도되어 학생들의 반전 데모를 더욱 점화시켰다.
오하이오 주 켄트 주립대학에서 주지사는 주방위군을 파견하였고 발포명령이 떨어져 대학생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잇달아 전국적으로 데모가 번져 450개에 달하는 대학이 휴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에서 대학생들이 반전운동을 주도하여 미국의 전의를 감소시키고 있을 때에 남베트남 대학생들은 격렬한 반정부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매달 수천 명의 젊은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남베트남의 대학생들은 징집이 연기되어 상아탑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의 젊은이로서 가장 큰 특혜를 누리고 있는 셈이었다. 따라서 그들도 국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그들의 생각은 존망의 기로에 서있는 나라의 대학생들이 이대로 학업만을 계속해서는 안 되고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있는 독재정부를 타도하여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박정희 정권은 외신을 통제해서 한국군이 파병되어 있는 월남에 관한 부정적인 정보는 일체 보도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
6, 7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탈출해보려고 몸부림쳤었다.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아르헨티나나 브라질로 집단 이민을 떠나 가족 단위로 길을 찾았고 개인별로는 독일의 광부나 간호사로, 노동자들은 중동건설 현장으로 살 길을 찾아 떠났었다.
월남 참전 초창기 또한 마찬가지여서 참전군인들 가운데는 부산 제 3부두에서 태극기 물결 속에 배에 오를 때 속으로는 가족을 위한 희생양(scapegoat)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고기값이라도 해보자.’ 즉 죽으면 보상금이라도 타서 부모님에게 효도하자는 자조적 농담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최소한 누구나 “내가 무사히 돌아가면 우리 집에 황소 한 마리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파월 되었던 1972년은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었다. 그때는 월맹 정규군이 마지막 총공세를 펼쳐서 한국군 사상자가 많이 나온 시기였던 만큼 진급을 위한 경력 관리를 하려고 하는 장교가 아닌, 사병으로는 지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부대에서는 부대별로 할당이 떨어져도 지원병이 없으니까 할 수 없이 차출을 하는데 보통 평소에 부대장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병사를 보냈다. 그래서 월남차출이 떨어지면 부대장에게 '앞으로 부대 생활 착실하게 할 터이니 제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울고불고 사정을 하는 희극도 벌어지곤 했다.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당사자에게는 바로 전날 통보를 해서 정신 없이 보내버리기도 했다. 실제로 대대에서 PX병으로 근무하던 대학 동창은 월남차출이 되어서 내일 떠난다며 연대본부에 있던 나에게 인사과에 돈을 써서라도 자기를 빼달라고 울면서 전화를 했었다. 일개 사병인 내 입장에서 더욱이 출발 전날 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나는 “야! 인마 월남 간다고 다 죽냐? 걱정 하지 말고 가. 나도 곧 뒤 따라 갈게”라고 했다. 실제로 당시의 나의 삶은 너무 단조롭다 못해서 권태롭기도 했고 아무 희망이 없는 삶이었다.
사실 나는 훈련소에 입대를 하자마자 기회만 있으면 월남으로 가려고 했던 참이었다. 그러나 나는 연대장이 필요해서 특별히 데려다 놓은 필수 요원이었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연대장이 사흘간 서울로 휴가를 간 기회에 월남차출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때는 이 때다’ 하고 지원을 했다. 내가 지원을 하자 사병계는 이상하게 생각해서 인사과장에게 보고를 했고 인사과장은 부연대장에게 보고를 했다.
지금도 그 모습이 어제 일처럼 너무도 선명하다. 인사과장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를 연대장실로 데리고 가서 부연대장에게 "이 녀석이 연대장님이 월남 간다고 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니까 부연대장은 “그렇다면 허락하셨겠지. 뭐?” 라고 하며 눈을 껌벅이던 모습이.
아마도 내가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 좋은 부연대장은 나중에 연대장에게 혼 좀 났을 거다. 요즘처럼 휴대폰이 있는 시대였다면 그런 거짓말이 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흘 후에 연대장이 돌아와서 내가 없어진 것을 알더라도 연대장의 힘으로는 이미 사단 밖을 벗어나 있는 나를 도로 불러 올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저지른 행동이었다. 항상 아는 놈이 범죄도 저지르는 법이다.
오음리 제 7 보충단에서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월남으로 떠날 날이 다가왔다. 흰 색깔로 선명하게 백마가 그려진 부대마크가 달린 얇은 흑록색 정글복을 갈아입고 보니 기분이 좀 이상해지고 막연하기만 했던 월남이란 나라가 비로소 조금씩 피부에 닿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새벽녘에 우리를 태운 트럭들은 끝없이 노란 흙먼지를 피우며 구비 구비 꼬부라진 배후령 고개(일명 빼찌 고개)를 넘어서 춘천역에 도착했다.
춘천역에는 푸르죽죽하고 시커먼 군용열차가 색종이를 칭칭 감고 큼직한 태극기와 함께 머리와 꼬리에는 형형색색의 꽃다발이 걸린 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그런 군용열차의 모습이 내게는 꼭 거대한 영구차 같아 보였다.
춘천역 광장에는 3군단 군악대가 쿵작거렸고, 평소에 사병들을 보면 승냥이처럼 '뜯어 먹을 것 없나'하고 눈을 부라리던 헌병 녀석들도 그날만큼은 모처럼 상냥한 눈빛-사실은 불쌍하게 보는 눈빛이었겠지만-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광경들이 정작 나에게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오직 나의 관심은 '과연 마지막으로 정희를 다시 한 번 더 볼 수 있을지 없을지' 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훈련생 신분인 나로서는 막연히 오늘 출발하는 것만 알았지 부대가 몇 시에 출발할지 정희에게 정확하게 알려 줄 수가 없었다. 정확하지도 않은 시간에 맞추어서 서울의 북쪽 끝인 구파발에서 춘천까지 오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맞은 편에서 경춘선 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하자(이 당시 경춘선은 단선이었기 때문에 반대편의 기차가 와야 출발 할 수가 있었다) 간단한 환송식을 마친 군용열차가 드디어 출발할 시각이 왔다.
맞은 편 철로에 방금 서울에서 도착한 경춘선 열차에서 승객이 쏟아져 내리는 사이로 이쪽을 향하여 정신 없이 달려오는 하늘색 투피스를 입은 정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정희를 알아 볼 수 있었지만 정희는 똑같은 제복을 입고 창가에 매달려 있는 수백 명의 병사들 가운데서 나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통로에 서 있는 녀석들을 제치고 승강구로 달려가서 정희를 향하여 “여기야! 여기!”하고 소리를 질렀다. 정희가 혼란스런 상황에서 나를 발견하고 다급한 표정으로 내가 있는 승강구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승강구 마다 헌병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승강구를 내려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 군용열차가 그 거대한 몸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그저 서로 황망한 시선으로 서로 쳐다만 볼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우리의 상황을 보고 감을 잡은 다른 병사들이 이구동성으로 “태워! 태워!”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홀려서 나도 모르게 팔을 뻗어 정희의 손을 붙잡아 승강구로 끌어 올렸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놀란 헌병이 제지를 하려고 열차에 올라타려 했다. 그러자 승강구에 있던 파월 병사들이 "어딜 올라와? 개새끼들아!" 하며 발로 걷어차버린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순식간에 주변의 헌병들이 달려오자 내가 서 있는 승강구로 몰려든 병사들과 기차에 올라 타려는 헌병들 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평소 같으면 고양이 앞에 쥐처럼 헌병 앞에 주눅이 잔뜩 들 수밖에 병사들이었지만 그때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죽으러 가는 마당에 더 이상 헌병이 무서울 리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주변에서 높은 사람들을 비롯해서 많은 시민들이 보고 있는 판이라 헌병들은 평소처럼 거칠게 할 수 없었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병사들은 개판을 쳐도 상관이 없기 때문에 상황은 헌병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는 군용 열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헌병들은 닭 쫒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버렸다.
베트콩보다 헌병을 먼저 물리친 전공(?)을 세운 병사들은 기세등등해졌다. 우리가 객실에 들어서자 병사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야! 거기 자리 비켜줘!”, “모포로 가려 줘!”하고 술과 과자를 가져다주고 난리도 아니었다. 평소에는 지나가던 여자들만 보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천박한 군바리 기질은 순식간에 어디로 가버리고 그 순간에는 모두 중세 기사가 된 것 같았다. 어떤 병사들은 먹을 것과 음료수를 가져다주면서 ‘부산까지 가야 돼. 절대로 내리면 안 돼!' 하고 후까시를 잡기도 했다. 훈련을 끝내고 전장으로 가는 마당에 ’뭐 시비 걸 게 없나? ‘했던 병사들의 심리상태에서는 재미있는 판이 벌어진 셈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우리 둘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차분히 할 수 있는 상황이나 기분이 아니었다. 우리는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빠져서 말도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서 쳐다만 보고 있었다. 우리들의 일은 이미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 제대 전체의 사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열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병력을 부산까지 수송하는 책임을 맡은 호송 장교 대위가 나타났다. 물론 그는 우리와 같이 월남으로 가는 사람이 아닌 군용열차를 관리하는 수송부대 장교였다. 대위는 우리들에게 명령이 아닌 통사정을 했다.
“나도 여러분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규정상 군용열차에 민간인이 탈 수가 없다. 그리고 용산에 도착하면 육군본부에서 고위 장성들이 나와 환송식을 하는데 이대로 타고 가면 나는 영창에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수송 장교 대위가 통사정을 해도 병사들은 한 마디로 '좆까지 마라! 영창을 가면 네 놈이 가지 내가 가냐?’는 식이었다. 이제는 다른 열차 칸에서 심심한데 재미있는 일 생겼다고 관광(?)을 오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천 명의 젊은 병사들이 탄 군용열차에 젊은 처녀가 한 명 타고 있다는 것만 해도 관심거리일 터인데 전쟁터로 가는 군용열차이니 그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그 시간만큼은 정희는 전체 병사들의 애인이었던 것이다.
한 참 있다가 스피커에서 점잖은 목소리로 방송이 나왔다.
“장병 여러분! 나는 여러분과 같이 월남으로 가는 제대장 김OO 중령이다. 여러분과 나는 한 마음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냐? 우리는 군인 아닌가? 보안대가 모두 보고 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월남으로 간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보안대는 월남에도 있다. 여러분을 월남까지 인솔하는 것은 본관의 책임이다. 여러분의 협조를 간곡히 부탁한다. 이제 열차가 역이 아닌 곳에서 설 것이다. 그 때 전우의 애인이 내릴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한다.”
우리와 같이 월남으로 파병되는 장교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은 중령이 공갈 반 호소 반으로 하는 소리였다. 같은 말도 시어머니가 하는 말 다르고 친정어머니가 하는 말 다른 법이다. 김 중령의 합리적이고 간절한 부탁이 있은 다음 분위기가 갑자기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방송이 끝나고 잠시 후 기차가 서서히 속력을 줄이더니 드디어 섰다. 호송장교 김 대위가 다시 우리 칸으로 와서 정희 보고 내려 달라고 했다. 다른 병사들이 “그런데 여기가 도대체 어디냐? 역도 아닌데 여자를 혼자 내려놓는다는 말이냐?”고 시비를 걸었다. 호송장교는 “군용열차는 운행 계획에 없는 역에 세울 수가 없다. 양해해 달라.”고 설명을 하고 정희에게 논두렁으로 조금만 가면 경춘 국도가 나오니 안심하고 내리라고 난처한 표정으로 설명을 해 주었다.
열차가 선 곳이 마침 오른 쪽으로 굽어진 곳이라서 정희가 내리는 모습을 모든 열차 칸에서 볼 수 있었다. 모든 병사들이 창문마다 승강구 마다 매달려서 정희에게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댔다. “영자야! 말자야! 순자야!” 제멋대로 이름을 부르면서 마치 제 애인에게 작별이라도 하는 듯이 “잘 가라! 잘 있어라!”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어떤 놈은 “고무신 거꾸로 신지 마라!”라고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 당황한 정희는 뒤도 돌아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논두렁을 따라서 걸어가고 기차는 서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광란의 시간이 지나고 서울이 가까워지자 열차 안은 점점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버렸다.
박..ㅈㅎ
군용열차가 서빙고역에 멈추었을 때는 이미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밤이었다. 샛노란 전등이 환히 켜진 플랫폼에는 춘천역의 3군단 군악대보다 훨씬 세련된 육본 군악대가 뿡빵거렸고 허우대 좋은 육군본부 의장대와 옷깃에 별들이 반짝이는 고위 장성들이 도열해 서 있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파월 장병 가족들이나 민간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헌병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는 가운데 공식 환송행사가 서빙고역에서 잠시 벌어졌다. 이미 파월 장병을 30만 명이나 보냈기 때문에 별 새로운 것도 있을 수가 없는 닳을 대로 닳아빠진 완전히 기계적인 환송행사였다.
행사가 끝나고 기차가 막 출발하려고 한 차례의 기적이 울릴 때였다. 갑자기 아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또 다시 벌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삼엄한 헌병들의 경비를 뚫고 들어왔는지 어디선가 뚱뚱한 처녀 아이 하나가 갑자기 철로로 뛰어들더니 사색이 되어 “오빠! 오빠!” 하고 울부짖으면서 열차 창문에서 제 오빠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그 여자애는 열차 창문마다 새까맣게 매달려 있는 똑같은 군복의 병사들 사이에서 제 오빠를 찾을 수가 없으니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마 두 시간 전의 춘천역에서 정희의 심정이 그랬으리라!
그런데 헌병들이 미처 그 여자애에게 다가가기 전에 기차에서 한 병사가 총알같이 뛰어내렸다. 필경 그 놈은 나보다도 훨씬 절박한 놈이었던 모양이었다. 두 남매가 철석같이 달라붙은 채 철로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며 몸부림치는 것이 아닌가? 무슨 절절한 사연이 있는지 두 남매가 처절하게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남매는 오빠가 군에 오기 얼마 전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서 고아가 된 처지였다는 것이었다. 그 광경은 아무리 목석 같은 인간이라도 감정이 동요되지 않을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열차에 탄 파월장병의 눈에는 모두 이슬이 맺히고 마음 여린 병사는 새로 입은 정글복 소매로 연실 눈물을 닦아냈다. 환송행사에 나왔던 높은 장교들도 제대로 쳐다보지를 못하고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높은 사람들은 말은 못하고 헌병들에게 손으로 빨리 떼어 놓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기차 안의 1,000여 명 장병들이 쳐다보고 있는데 두 남매를 떼어 놓아야 하는 헌병들의 입장은 아주 난처했다. 결국 친절한 유치원 선생처럼 태도를 바꾼 헌병 장교의 간곡한 설득 탓에 드디어 남매는 떨어지고 오빠는 헌병들에게 마지못해 등을 떠밀려 승강구에 올랐다. 그런 오빠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하는 듯 기차도 느릿느릿 출발하기 시작했다. 멀어져가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여동생이 철로의 자갈 위에 주저앉아서 발을 구르며 넋을 놓고 우는데 내 생애에 그렇게 절망적으로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오빠! 오빠!” 부르며 울부짖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하나 둘 눈물을 짓기 시작하더니 금방 돌림병이 번지듯이 열차 안은 너나 할 것 없이 오열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울다가 코가 메여 코를 풀어대는 놈, 자기도 모르게 울고 있다가 슬픈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상이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욕지거리를 해대는 놈, 있는 대로 소주건 맹물이건 닥치는 대로 들이키는 놈 등등 열차 안은 통제 불능의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그 때 어느 열차 칸에선가 군가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훈련기간에 이가 갈리도록 불러서 듣기도 싫던 군가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갈수록 격렬해졌다.
마치 군가소리가 작으면 누가 때려죽인다고나 한 것처럼 모든 병사들은 모두들 악을 쓰는 듯 군가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1,000여 명의 병사들이 두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 것이나 두드리면서 바락바락 악을 써대면서 아는 군가라는 군가는 모조리 메들리로 불러 제켰다. 마치 악을 쓰며 군가를 부름으로써 마음 속 밑바닥에서부터 밀려오는 허전함을 물리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우리를 태운 군용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점점 캄캄한 어둠 속을 달리는 동안 악을 쓰며 군가를 부르던 병사들은 더 이상 목이 쉬어 군가를 부르지도 못하고 하나씩 지쳐서 잠에 떨어졌다. 눈을 떠보니 기차는 이른 새벽 부산항의 제3부두에 도착해 있었다.
또 다시 간략하고 형식적인 환송식이 벌어졌다. 부산에 있는 여고생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파월장병의 환송식에 순번제로 동원되어서 나눠가진 태극기 몇 번 흔들다 가는 것이 행사의 전부였다. 드디어 배가 바다로 미끄러져 가고 육지가 점점 작아졌다.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는 나라 한국을 떠난다는 것이 시원했지만 “드디어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살아서 돌아 올 수 있을까?
미군 수송선의 선실은 마치 영화 <빠비용>에 나오는 죄수 호송선 같았다. 누에가 고치를 치기 위해 시렁 위에 누운 것처럼 병사들은 3층짜리 철제 침대 위에 올라가서 잠을 잤다. 코를 찌르는 바다냄새, 병사들의 땀 냄새가 뒤죽박죽이었지만 전쟁터로 가는 길이었기에 불평스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
수송선에서의 하루는 눈을 뜨자마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끼니때마다 식당 앞에서부터 배의 좁은 복도를 따라 줄줄이 늘어서야 했다. 1,000명이 좁다란 선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니까 밥 한 끼를 먹으려면 두 시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새벽의 서울역 대합실처럼 썰렁한 분위기를 풍기는 통로에 줄지어 서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해 밥을 타 먹느라고 하루에 여섯 시간을 보냈다. 아침 먹고 조금 있다가 줄 서서 점심을 먹고, 조금 있다가 또 줄을 서서 저녁을 먹으면 배 안에서의 하루 일과가 끝났다. 줄을 서는 것이 귀찮아서 한 끼쯤 밥 먹는 일을 거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다른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노는 셈치고 줄을 서서 노닥거리는 것이다.
줄을 서는 것은 식사 때만이 아니다. 아침이면 화장실 앞에도 병사들이 길게 늘어서서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밥 먹는 줄인 줄 알고 무턱대고 서서 한참을 기다리다 보면 화장실 가는 줄이기도 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곳곳에서 사천만의 오락인 화투판이 벌어졌다. 배 안에서는 한국 돈은 쓸모가 없고 달러는 아직 받지 않았기에 배급받은 양담배를 걸고 화투를 쳤다. 나는 화투를 할 줄 모르고 담배도 피우지 않아서 심심풀이로 밑천이 필요한 병사들을 대상삼아 내가 받은 담배를 이용해 이자놀이를 했다. 사흘이 지나자 내 더블백에 다 들어가지가 않을 정도로 담배가 많아졌다. 담배를 벌어들이다보니 사채시장의 돈놀이꾼들이 돈 버는 재미가 이런 것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나중에 하선 하자마자 정신없이 배치를 받아 가는 판에 큰 더블백을 짊어지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닥치는 대로 주변 전우들에게 나누어 주고 말았다.
1969년 월남에서 돌아온 한 병사의 귀국 기념품
닷새 동안의 불안한 항해가 끝나고 곧 퀴논에 상륙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모두들 마음이 뒤숭숭해서인지 갑판에 나와 하루 종일 서성거렸지만 어두워질 때까지 육지는 보이지 않았다.
부산항을 떠난 지 엿새 되는 아침, 남보다 먼저 잠자리에서 일어나 선실의 문을 여는 순간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바람이 ‘훅-’ 하고 콧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놀라서 어디서 ‘불이 났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배는 이미 밤새 퀴논 항에 도착하여 부두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뜨거운 열기 속에서 호흡을 다시 한 번 가다듬었다. 아직 새벽이어서인지 그런지 쥐죽은 듯한 부두의 모습이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월남 땅을 처음 본 순간 이제까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내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날이 완전히 밝았졌다. 부두에 내린 우리들을 환영하는 공식 행사는 없었다. 그 대신에 야전잠바를 입은 부관부 준위가 어깨에 힘을 주고 버티고 서서 우리를 기다렸다. 찌는 듯 한 더운 날씨에 더욱이 대낮에 준위가 왜 야전잠바를 입고 왔을까 하는 의문은 곧 밝혀졌다. 현장에서 금반지로 된 짜웅 '뇌물' 을 받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소문에 의하면 병력이 도착할 때마다 야전잠바 주머니가 축 늘어질 정도로 금반지를 걷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준위의 야전잠바는 그 후에 내가 목격한 주월 한국군의 엄청난 부패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나는 병사들이 하도 잘 죽는다고 해서 '병력을 보내나 마나' 라는 소문이 붙었다는 일명 도깨비부대로 떨어졌다. 우리들은 닌호아에 있는 사단 사령부로 가는 병력과는 달리 도깨비 부대가 있는 투이호아로 가기 위해서 사단 부관부의 준위가 부르는 대로 대열을 이루었다. 미군이 대부분 철수한 퀴논 비행장은 그야말로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더블백을 어깨에 메고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며 기다리고 있는 쌍발 프로펠러 수송기의 활짝 열려 있는 뱃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원래 화물을 나르던 수송기는 안에서 밖이 훤히 내다보여서 '이 비행기가 날 수는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폭음과 한증막 같은 바람 속에서, 비행기 바닥에 더블백을 깔고 쭈그려 앉은 우리들은 비행기가 날기를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갑자기 뭐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우리들의 염려를 무시하는 듯이 300명을 태운 고철덩어리는 활주로를 힘겹게 벗어나 날기 시작했다.
30 분쯤 지나 우리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사막에 도착했다. 그곳은 활주로만 있는 야전비행장이었는데,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앞뒤에서 기관단총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는 수십 대의 무장트럭이었다. 마치 소떼를 몰듯 정신없이 몰아치는 인솔 하사관들의 고함소리에 쫓겨 올라타자 트럭은 전속력으로 사막을 가로질러 달리고 또 달렸다.
얼마 뒤 마치 사막 한가운데 있는 외인부대의 기지처럼 겹겹이 두른 철조망 담을 몇 개 지나서 부대 안에 있는 교육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머나먼 월남 땅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는 따뜻한 위로나 격려의 말 한마디는 고사하고 “이 새끼들 좆 빨려고 월남 왔나?” 며 조교들이 정신을 못 차리도록 기합을 주고 숨이 턱에 닿도록 더블백을 짊어진 그대로 뺑뺑이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한국에서부터 들고 온 관물들이 가득한 40 Kg 더블백을 둘러메고 뜨거운 모래밭인 연병장을 돌면서 월남에 도착하는 첫 순간부터 기합으로 일관하는 한국 군대는 참으로 구제 불능의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신입병들이 딴 생각 못하도록 군기를 잡는 일종의 일본식 군대의 운영방법이었다.
다시 교육대에서 2 주간 현지 적응 훈련을 받았다. 교육대의 소대 막사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땅을 파고 들어가 반지하 연립 마냥 벙커로 만들어졌다. 마치 움막같이 생겨서 한국에서는 구경도 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벽에는 모래를 넣은 마대가 차곡차곡 쌓여 있고 지붕위에도 마대를 몇 겹씩 얹어놓았다. 날씨가 더우니까 문이나 창은 없고 밤에 잠을 잘 때는 모기장을 치고 잤다. 밤에도 등화관제를 해야 했기 때문에 불을 켤 수가 없어 막사 안은 항상 어두웠다.
부대가 모래뿐인 사막에 있기 때문에 날마다 땀으로 목욕을 하며 며칠을 지냈더니 온 몸에서 소금기가 버석버석 거렸다. 군복에는 소금기가 허옇게 베어 나왔고 내무반에 들어서면 소금기에 찌든 냄새가 진동했다. 급수트럭으로 물을 하루에 한 번씩 보급해주는데 급수사정이 나빠서 샤워는 고사하고 세수할 물도 부족했다. 어쩌다 운 좋게 수통 3개에 물을 채울 수 있으면 손수건에 물을 적셔서 대강 목욕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조건이었지만 우리들 300여명의 교육생들은 훈련이 끝나면 곧 바로 전투현장으로 투입이 될 처지였기 때문에 보름 동안 한눈 팔 사이가 전혀 없을 정도로 맹훈련을 받았다.
보통 군대에서는 훈련받을 때 적당히 요령을 피우려는 것이 피교육자의 상식이다. 그러나 월남에서의 훈련은 경우가 달랐다. 교육생들 입장에서도 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훈련에 임해야 할 판이었다. 교육생들이 자발적으로 훈련을 열심히 받으려고 하니 군대의 다른 교육처럼 기합을 받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 심각한 문제가 잠복해 있었다. 그것은 하사와 병장 사이의 권위 문제였다. 군대 짬밥을 먹을 만큼 먹은 사병들과 6 개월간의 하사관학교 교육을 받고 바로 하사 계급장을 단 일반하사들과의 갈등은 한국의 군대안에 어디에나 존재했다. 짬밥이 많은 병장이 교육 마치고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신임 하사에게 고분고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국내에서는 티격태격 하면서도 그럭저럭 지냈다.
그런데 엄연히 하사가 분대장으로서 지휘권을 가져야 하는 전쟁터인 월남에서는 하사의 권위가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권위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서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론적으로 교육은 그렇게 받았어도 잘되지 않는 것이다. 본국에서 하사와 어영부영 맞먹고 지내던 병장들이 월남에 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하사들에게 고분고분해 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이미 고국의 파월 훈련소에서 한 달 동안 같이 훈련을 받고 같은 배를 타고 와서 함께 교육 받는 교육생들끼리 사병과 하사 사이를 엄격하게 구별 한다는 것은 더욱 곤란한 일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파월 장병들의 이런 풍조를 잘 알고 있는 교육대에서 훈련 기간 중에 하루 날을 잡아서 조교인 하사들과 교육생 하사들이 짜고 사병들을 반쯤 죽여 군기를 잡는 비공식 교육과정이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도록 기습적으로 진행되었다.
재앙은 달이 뜨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느닷없이 비상이 걸려 집합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필 왜 달이 없는 날이냐 하면 어두워서 사병과 하사들이 서로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병장에 집합 한 후 교육생들과 하사를 분리 시켜놓고 조교 중에 가장 악명이 높은 고참 하사가 사열대에 올라서서
“여기는 전쟁터이기 때문에 오늘 기합을 받다가 너희들 중 한 놈쯤 죽어도 사고처리 하면 그만이다.”
라고 겁을 잔뜩 주었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을 몇 번 하더니 '포복 앞으로!'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는 끝이다. 계속 앞으로 전진이다. 연병장을 무릎과 팔로 기어서 몇 바퀴 도는 것이다. 그러나 훈련소에서 갓 전입해 온 신병들도 아니고 본국에서 나름대로 군대생활에 이력이 붙은 월남 전입병들에게 조교들의 공갈이 쉽게 먹혀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군대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겁주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어쭈? 겁 주는데?'하며 형식적으로 적당히 슬슬 포복을 했다. 그러나 그날은 그게 아니었다.
조교들은 반복되는 교육을 통하여 교육생들의 이런 심리까지 파악을 하고 있었다. 조교들이 점점 살기가 등등해서 날치는 것을 보고서야 ‘어이구. 이거 장난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날 밤 기합의 목적은 단 한 가지. 사병들이 하사들을 무서워하도록 만들 것. 정상적인 교육을 통한 설득으로 위계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루 밤에 사병들을 길들이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하사들의 친위 쿠데타인 셈이다.
조교들은 교육생 하사들에게 기어 다니는 사병들이 요령을 부리면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리도록 명령했다. 하사 조교들은 사병을 감시하지 않고 교육생 하사들을 감시했다, 사병들을 다루는 것이 시원치 않은 교육생 하사들에게 '그렇게 밖에 못해?'하면서 무자비하게 군화발로 걷어찼다. 조교 하사는 교육생 하사들을 조지고 교육생 하사는 사병들을 조지는 것이다.
물론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교육방법이기 때문에 장교들은 전혀 개입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알고도 모르는 척 해주고 있었다. 제법 각본이 치밀하게 짜여 있는 셈이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처음에는 마음에 걸려 머뭇머뭇 거리던 교육생 하사들도 나중에는 눈에 핏발이 서서 사병들을 잡아먹을 듯이 날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도 마음이 약한 교육생 하사들은 조교들이 미친 듯이 날뛰는 중에도 차마 연병장 바닥을 포복으로 박박 기는 동기생들을 때리지 못해 흐느껴 우는 이들도 있었다. 삽시간에 평소에 만만하게 보던 교육생 하사들이 퍼붓는 매와 하사 조교들이 퍼붓는 욕설이 난무하는 공포의 밤이 되었다.
야간에는 철모 뒤에 은박지로 표시한 비표로 아군끼리 계급을 구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날 밤은 악을 써대며 닥치는 대로 손과 발로 치는 하사 조교들과 일체 소리를 내지 않고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교육생 하사들과 무릎과 팔뚝이 모두 까지도록 연병장 바닥을 설설 기어 다니는 사병으로 구분이 되었다.
교육의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그날 아침부터 하사만 보면 저절로 경례를 하기 위해 손이 올라가고 식사 시간에 배식은 물론 취침 시간에 모포를 까는 것까지 분대장을 받들어 모시도록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렇게 해서 조교들이 계획한대로 하사들의 권위가 하룻밤에 완벽하게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기성부대에 배치되면 분위기에 따라서 저절로 될 일을 야만스럽게 저지르는 이런 행태가 저질 군대 문화의 단면이라고 하겠다. 힘을 가진 자들이 옳다고 생각하면 야만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단 번에 고치려고 하는 것이 군대문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공 시절 박정희가 국가재건 최고위원회를, 5공 시절 전두환 정권이 국가 보위위원회라는 것을 설치해서 사회악을 일소한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삼청교육대로 보내서 원한이 사무치게 만들던 일도 바로 그런 발상에서 나온 일이다.
기다림의 전쟁
보름간의 현지 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중대에 배치되었다. 미군이 연대나 대대 급으로 주둔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중대단위로 작전지역을 나누어 공군이 없는 베트콩이 접근 할 수 없는 고지대에 3, 4 중 철조망을 치고 진지를 지어 주둔 했다. 그 때까지 '뭉쳐야 산다'는 고전적인 전술을 고집하고 있었던 미군은 한국군이 이렇게 "흩어져야 산다."는 전술을 펴자 처음에는 위험한 전술지역에서 소규모의 부대가 고립해서 주둔하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름 없다며 매우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치 두더지가 굴을 파고 들어가 앉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 고립되어 벽을 쌓고 사는 것 같지만 명령이 내려지면 가까운 거리의 기지에서 나와서 작전과 매복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비교적 사상자가 적은 것으로 판명되자 나중에는 미군도 따라 해보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기다림의 전쟁
보름간의 현지 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중대에 배치되었다.
미군이 연대나 대대 급으로 주둔하는 것에 비해서, 한국군은 중대단위로 작전지역을 나누어 공군력이 없는 베트콩이 접근할 수 없는 고지대에 3, 4 중 철조망을 치고 진지를 지어 주둔했다. 그 때까지 '뭉쳐야 산다' 는 고전적인 전술을 고집하고 있었던 미군은 한국군이 이렇게 '흩어져야 산다'는 전술을 펴자 처음에는 위험한 전술지역에 소규모의 부대가 고립해서 주둔하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름 없다며 매우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두더지가 굴을 파고 들어가 앉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 고립되어 벽을 쌓고 사는 것 같지만 명령이 내려지면 가까운 거리의 기지에서 나와서 작전과 매복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비교적 사상자가 적은 것으로 나타나자 나중에는 미군도 따라 해보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나로서는 그 이유가 다름이 아니고 편의시설과 오락시설까지 갖춰야 하는 미군들이 최소 생존 조건만 갖춘 한국군 같은 생활을 장기간 동안 할 수 없었던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당시 미국과 한국의 생활 수준 차이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두 나라의 생활 수준은 마치 오늘날 이것저것 다 갖추고 사는 남한과 밥만 먹으면 되는 북한의 생활 수준 만큼 차이가 났기 때문에 한국군에게는 가능한 열악한 기지 생활이 미군에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내가 가본 미군 중대 단위 막사는 개인용 침실에 냉장고는 물론이고 당구대까지 갖추고 있었다.
미군의 경우 월남전에서 3,000여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이에 비해 한국군의 실종자 수는 놀랍게도 달랑 6명이다. 이 숫자도 월북으로 간주된 2명 중 가족들의 기나긴 싸움 끝에 나중에 납북으로 판명된 안학수 하사까지 포함된 것이다. 안 하사도 붕타우에서 사이공으로 출장을 갔다가 납치가 되었다고 하니 부대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로운 보직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전방도 없고 후방도 없는 게릴라전이 펼쳐지는 곳에서 감히 외출이나 개인행동은 생각할 수도 없고 그 결과는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가끔 월남전을 다룬 소설에서 사병들이 외출도 자유롭게 즐기고 월남아가씨들과 로맨스를 벌이기도 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사람들은 소수의 특수한 보직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당시 참전 지휘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미군과 달리 우리는 소규모의 방어적 전투를 주로 치뤘기 때문에 미군처럼 대규모 포로가 발생할 소지는 없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면서 '미군 실종자 수와 우리 실종자 수의 지나친 차이를 거론하는 것은 월남전의 특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인 것 같다' 고 설명했지만 나는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미군에 비해서 한국군은 완벽하게 통제된 생활을 하는 것도 중요한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군의 철수로 전황이 급격히 변해 전혀 예상치 못하게 베트콩이 아닌 월남 정규군이 남침하여 극소수 피해를 입은 일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한국군 중대 단위 전술기지는 베트콩이 접근 할 수 없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박격포 공격을 당하는 경우는 하늘에서 번개 맞을 확률일 정도로 안전했었다.
1970년 Phouc Binh에 있던 미군 막사 내부, TV와 선풍기가 보인다
1970년 미군의 Tan Nhut Airbase. 크리스마스를 맞아 밴드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대부분의 병사들에게 월남 생활은 거의 끝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작전지에 투입되려면 헬리콥터를 기다려야 했고, 매복을 하면 쥐 죽은 듯이 숨어서 베트콩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중대 기지와 가까운 거리는 도보로 수색 정찰을 할 수 있지만 조금 먼 거리로 이동하려면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헬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어서 참전군인들 가운데는 1년간 월남에서 복무했지만 월남 마을이나 월남 사람을 본 일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에서 수송선을 타고 월남에 도착하여 하선 하자마자 트럭과 헬기를 타고 중대로 가서 기지 생활을 했던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0 만 파월 장병 중 절대 다수인 소총수들은 월남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 미군의 월남전 참전 영화를 볼 때가 있는데 한국군이 그 영화에 나오는 미군 병사들처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면 아마 월남에 말뚝 박고 싶었을 사람도 많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실을 말하자면 정찰, 수색 외에 대부분의 한국군의 생활은 한국에서와 똑같이 부대 밖으로 나가볼 수조차 없었다.
수색 정찰을 나가 베트콩을 발견하면 앞에 가는 첨병은 그대로 보내버리고 그 뒤에 오는 본대를 노렸다. 하지만 베트콩은 전술적인 승리보다 심리전, 선전전 차원에서 전투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첨병을 노렸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공격을 당하는 이는 맨 앞에 가는 첨병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첨병은 가장 경험이 많은 병사로 세우되 한 사람에게 3 개월 이상 시키지 않았다. 때문에 첨병생활을 끝내면 월남생활의 3분의 2는 무사히 넘겼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1971년 호지명 루트 케산(Khe Sanh) 작전 중 수색 정찰에 나섰던 해병대원의 사진
가장 괴로운 일은 매복 작전이었다.
매복은 적이 나타날만한 지점에 나가 며칠이고 진을 치고 기다리는 것이다. 3, 40 Kg의 무거운 군장을 짊어지고 매복 지점에 도착하면 우선 전방에 실 같은 구리줄로 된 인계철선과 45도 방향으로 크레모아를 설치한다. 인계철선에 조명탄을 매달아 무엇인가가 인계철선을 건드리면 저절로 조명탄이 터지게 된다. 조명탄이 터져서 전방이 대낮같이 밝아지면 격발기를 눌러서 크레모아를 터트리게 되어 있었다. 크레모아 안에 900 개의 구슬이 있어서 격발기를 누르면 구슬이 터지는데, 위력이 엄청나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하염없이 오지 않는 임을 기다리는 것이 매복의 기본이다.
매복에 나가 좌표지점에 자리를 잡으면 철수를 할 때까지 일체의 소리도 빛도 냄새도 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보다 훨씬 현지 실정에 민감한 베트콩에게 포착이 되면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도리어 우리가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남에서는 밤 말은 베트콩이 듣고 낮 말은 새가 듣는다는 말이 있었다. 수도원에 침묵 수도라는 것이 있다고 하지만 이보다 더 철저할 수 있을까 싶다. 작전 중 소리를 내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매복을 하다가 기다리던 적을 발견하면 타격을 줄 수 있지만 반대로 적에게 우리의 존재가 발각되면 우리가 당하는 것이 마치 숨바꼭질과도 같았다. 물론 병사 개인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적이 오지도 않고, 자신이 들키지도 않아서 무사히 부대로 돌아오는 일이다. 내 경우에는 다행히도 매복을 나갈 때 마다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1971년 호지명 루트 케산(Khe Sanh) 작전에 참가했던 해병대원의 매복지 사진
정글 속에서 엎드려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엎드려 있으면 정글 속의 각종 곤충들이 친하게 지내자고 다가온다. 어찌하다 벌레가 전투복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이건 베트콩이 문제가 아니다. 작전지에서는 전투복을 마음대로 받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옷을 입은 채로 손을 넣어 잡아야 하는데 이게 마음대로 안 되니 참으로 사람 환장할 지경이었다.
오줌을 서서 누면 소리가 커서 무릎을 꿇고 누어야 하는 판에 함부로 부스럭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거기다 비까지 오면 정말 곤란하다. 비가 많이 오면 그대로 물구덩이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데 발이 군화 속에서 퉁퉁 붓도록 서 있어야 한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은 비가 오면 웬만한 소리는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피부에 모기약을 바르면 모기를 물리칠 수 있지만 약 냄새가 날 수 있어 바를 수가 없었다. 모기를 피하기 위해서 밤만 되면 모포를 뒤집어 써야 하는데 월남 모기는 모포도 뚫는다.
밤에 교대로 잠을 자지 않고 전방을 주시해야 하는데 이 때 코를 고는 전우가 있으면 정말 문제가 크다. 옆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마치 탱크가 굴러 오는 소리처럼 들려서 코를 골 때마다 가슴이 벌렁벌렁 해졌다. ‘드르렁’ 소리가 나기 전에 코를 틀어막아야지, 전방을 주시해야지, 그야말로 신경이 곤두서는 밤을 보내야 한다. 그것도 나보다 신참이 코를 골면 발로 한 번씩 차기라도 하지만 선임이 코를 골면 애인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장기간 버텨야 하기 때문에 식수를 목숨 보다 귀하게 여겨야 하지만 한 번은 예정보다 훨씬 빨리 철수 명령이 떨어져 너무 덥고, 온 몸이 끈적끈적하고, 소금기가 버석버석해서 군장도 줄일 겸 3개 수통의 물을 손수건에 적셔서 목욕을 했다. 그것은 내 생애 최고의 목욕이었다.
운 보다 센 빽
전쟁 막판이었기 때문에 전투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지루함과 무의미함 때문에 맥이 빠져 있을 때 느닷없이 사단으로 전출 명령이 떨어졌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연대에서 사단으로 가는 보급 트럭 적재함에 올라탔다. 월남의 1번 국도를 타고 올라가는 보급용 트럭을 타고 사단까지 4시간이나 걸리는 전출 길에서야 비로소 여유로운 눈으로 월남 땅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월남의 산악지대는 우리나라 산처럼 아기자기한 모습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고, 한마디로 징그럽게 나무와 넝쿨들이 엉겨 붙어 있었다. 그러나 해안선을 따라 남북을 관통하는 1번 도로변 전체는 해수욕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추수를 한 벼를 말리기 위해서 아스팔트 도로 위에 그대로 벼를 널어놓고 그 위로 차가 달리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월남에서 근무하는 동안 가장 이상했던 모습은 우리가 베트콩과 전투를 하는 동안 동네 사람들, 특히 꼬마들이 밭둑에 엎드려서 교전하는 장면을 구경하거나 월남 사람들이 다리 밑에서 한가로이 낚시를 하는 것이었다. 전쟁을 하도 오래 하다 보니 그들에게는 전쟁이 하나의 생활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내가 사단으로 전출 명령이 나게 되었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단에 도착한 날 밤에 내 이름을 부르기에 밖으로 나가보니 이상하게도 사복을 입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복을 보자 순간적으로 혹시 '대학 때의 활동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스쳤다. 그 때까지 내가 군대에서 사복을 입은 사람을 본 것은 보안대원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사복 입은 남자는 부드러운 태도로 차에 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번에는 차를 보고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고급 세단이었기 때문이다. 월남에도 이런 차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매끈한 그 차는 알고 보니 사단장 공관의 차였다. 한국에서 주한 미군의 장성들이 승용차를 이용하듯이 월남에서도 한국 장성들은 승용차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옆에 트여 있는 지프차는 에어컨도 안 될 터이니 더운 열대 지방에서 귀하신 분들이 탈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단 직할 부대와 29 연대 포병 사령부까지 함께 모여 있는 사단 사령부는 거의 서울의 남산 정도의 크기였다. 승용차를 타고 어디론가 한참 가더니 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 건물은 사단장 숙소였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사단장 전속부관인 한 대위였다. 사복을 입은 한 대위의 첫 질문은 '박희도 대령과 어떤 사이냐?' 였다.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사정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남들이 군대를 이미 다녀온 25살의 늦은 나이에 입대를 하자마자 기회만 있으면 월남으로 가려고 했다. 그래서 정희의 사돈의 8촌이 되는 당시 미8군 연락장교단장으로 있던 박희도 대령에게 월남으로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었고 박 대령은 비교적 안전한 사이공에 있는 주월 사령부에 자리가 있나 알아볼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파리에서 미국, 월맹, 베트콩의 3자 평화회담이 진행되고 있어서 언제 전쟁이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했는데 마침 월남 차출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때는 이 때다’ 하고 지원을 했던 것이다.
내가 떠난 후 정희가 박 대령에게 알렸고 박 대령은 자기가 육사 생도대장 시절의 제자였던 한 대위에게 나를 찾아보라고 부탁을 한 것이었다. 자신도 월남전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했던 박 대령은 나중에 '경거망동 하지 말고 은인자중해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라' 고 손수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한 없이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박희도 대령은 하나회 출신으로 후에 1공수여단장으로 육군본부를 쳐들어간 12.12 반란 5적 중의 한 사람으로 나중에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낸 이었다. 하여간에 그렇게 되어서 빽과 돈, 혹은 학벌이나 특별한 주특기가 없이 정글에서 싸우다가 죽은 5,000여명의 전우들 보기에 부끄럽게 나는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가 있어 덕분에 80 년대에 곱빼기로 군사 독재에 저항하는 투쟁을 할 수 있었다.
사단에서는 낮에 행정을 보고 밤에 보초를 섰다.
사단 본부는 예하 부대와 29 연대 본부 포병 사령부까지 다 같이 한 울타리 안에 있어서 웬만한 도시만한 크기였다. 이러한 사단 전체의 경계에 50미터 마다 늘어선 초소 안에 들어가 보초를 섰다. 초소 앞에는 '이곳은 내가 살 곳이요, 죽을 곳이다' 라는 심각한 팻말이 전혀 심각하지 않게 세워져 있었다.
오후 6시부터 보초를 서는데 9시부터는 1시간씩만 서지만 첫 번째 보초는 9시까지 3시간을 서야 한다. 시간이 길어서 모두들 싫어했지만 나는 언제나 자원해서 첫 번째 보초를 섰다. 복잡한 내무반 대신 혼자 조용히 있고 싶기도 했지만 책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초를 서면서 책을 읽는 것은, 더욱이 적에게 아군의 위치가 알려질 수 있도록 초소에 불을 켜는 일은 걸리면 영창 깜인 일이었다. 초소의 위치가 실제로는 적이 접근 할 수 없는 곳이기는 하지만 군대 논리상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모를 두른 고무줄에 충전된 배터리를 달고 앞에는 큰 널빤지로 가려서 전방에서 빛이 보이지 않도록 하고 밤마다 책을 읽었다. 그러니까 보초를 서는 것이 아니라 저녁마다 3시간씩 독서를 하는 셈이었다. 문제는 책이 없어서 어떻게 내 손에 들어왔는지 모를 무슨 '철학적 소고'인가 하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전투 틈틈이 독서를 즐겼다던 체게바라가 문득 생각나서.
중대에 있을 때 매복과 정찰을 나갔었지만 직접 적과 마주쳐 전투에 참여해 본 경험이 없는 나에게 심리적으로 가장 부담이 되었던 것은 베트콩이 아니라 사단에 와서 겪게 된 영어였다.
입대할 때 뭔가 좀 있어 보이려고 인사기록카드에 대학 때 VUNC(지금은 없어진 용산 미군기지 내에 있던 UN군 사령부 방송)에서 견습을 한 것을 근거로 'VUNC 아나운서'라고 과장 기록을 한 것이 문제였다. 사실은 유엔군사령부 방송국이었지만 대북 전문 방송이기 때문에 직원 전체가 한국 사람이었고 나는 남한의 대학생활을 소개하는 프로를 만들고 있었다. 아마 그 기록을 본 부관부 인사과장은 내가 유엔군 사령부에 근무했다고 생각해서 영어를 잘하는 것으로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때까지 내 영어는 그 시절 모두가 그렇듯이 한 번도 실전에서 사용해보지 못한 교과서 영어였다.
미군 헬기 중대에 헬기 통역병으로 파견 나가 있는 병장이 2 주간 한국으로 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내가 영어를 잘하는 것으로 잘못(?) 판단해서 대신 자리를 메우게 된 것이다. 당시 월남에서 한국군은 헬기가 없고 헬기 수송은 미군이 맡아서 했기 때문에 엠브런스에 해당하는 환자수송 헬기도 전적으로 미군에 의존해야 했었다.
긴박한 전투현장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헬기로 수송을 해야 하는 일은 부상당한 병사뿐만 아니라 미군 조종사와 미군 의무요원들의 목숨까지 달린 극도로 위험한 임무였다. 휴가를 떠나는 병장이 인수인계를 하면서 정작 필요한 영어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차피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요란한 헬기 소리 속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하는 것이니 너무 걱정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상황이 발생해서 혹시라도 통역을 잘못 할까봐 두려워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만을 기도하면서 하루 종일 분주히 뜨고 내리는 헬기 소리 속에서도 혹시나 출동하기 위해서 나를 부르지는 않나 하는 긴장 상태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있는 동안 한 번도 출동할 일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미군들 사이에서 지내려니 내 영어 때문에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영어로 쓰여 있는 것을 보면 기억이 아니라 아예 머리 속에 인쇄가 되어버렸다.
이 글을 쓰려고 당시 미군들 사이에서 더스토프라고 불렀던 호송헬기를 찾아보았더니 그런 말은 없고 메드백 (MEDVAC-Medical Evacuation)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상하다. 당시 모두 더스토프라고 했는데..' 하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찾아보니 'Dust Off' 였고 먼지(Dust)가 땅(Ground)에 붙어(On)있다가 떨어지면(Off) ‘먼지가 날린다’ 는 뜻이었다. 즉 우리 식으로 하자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뛴다. 혹은 눈썹이 휘날리도록 뛴다’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젊어서 영어 때문에 고생하던 팔자가 늙어서도 변하지 않아 내가 제일 잘할 뿐만 아니라 남보다도 더 잘할 수 있는 한국말을 쓰지 못하고 지금도 이국에서 영어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다.
처음 본 바나나
한 때 대중들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던 허경영은 나에게 바나나와 같이 떠오르는 인물이다.
사단 본부에 갇혀만 있다가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군수 물자 수송 트럭의 경계병으로 차출 되어 트럭을 타고 부대 밖으로 나가 보게 되었다. 난생 처음 보는 월남의 시골 풍경을 신기하게 관찰하면서 이동을 하는데 트럭이 어느 마을 근처에 섰다. 트럭들이 서자 동네 아낙들이 잡다한 물건들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트럭들 주위로 다가왔다.
그 순간 내 눈에 띈 것은 그 때까지 별로 먹어 볼 기회가 없었던 바나나였다. 사실 40년 전 내가 군대에 가기 전 까지만 해도 바나나는 보통 사람들이 감히 먹을 수 없는, 책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과일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한국 생각을 하고 1불을 주고 아낙이 들고 있는 바구니에서 바나나를 두 갠가 뜯었다. 그래도 그 아낙은 바구니를 쳐들고 더 가져가라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내가 바나나 한 다발을 집었는데도 그냥 서 있는 것이었다. 그 때 옆에 있던 고참이 “야! 저 바구니에 있는 거 다 해도 1불이 안 돼.” 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한국과 현지 물가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많은 바나나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간 망설였지만 아낙의 눈길 보는 순간 그 바구니를 통째로 트럭에 실었다. 물론 잔돈을 거슬러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잔돈을 거슬러 주고 싶어 하지 않고 바나나를 모두 팔고 싶어 하는 아낙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많은 바나나를 내가 다 먹을 수도 없고 보관을 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바나나를 트럭에 타고 있던 전우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 다음부터 나는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어느 군인의 사진
그 때 그 트럭에 허경영도 타고 있었다. 모두들 야자나무 아래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갑자기 경영이가 배낭을 주 섬 주섬 뒤지더니 구겨진 양복을 꺼내서 군복을 벗고 갈아입기 시작했다. 경계 근무하러 나가는 놈이 배낭에 사복, 그것도 양복을 넣고 다니는 것은 기상천외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럴 경우 다른 사람이면 영창 감이지만 평소에 워낙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하는 경영이라 인솔 하사관도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더욱 웃기는 일은 주머니에서 스카치 테이프를 꺼내더니 귀를 올려붙이는 것이었다. 경영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늘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미리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하겠다고 철저하게 계획을 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야자수를 배경으로 마치 관광객처럼 유유하게 폼을 잡고 서서 가지고 온 사진기를 내밀고 다른 전우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당시 나는 전입한 지 얼마 안 되는 신병이고 경영이는 선임 급에 속했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저래도 되나?'하고 어리둥절하기만 했었는데 다른 병사들은 경영이의 특이한 행동에 이력이 났었는지 낄낄거리면서 웃기만 했다. 몇몇 고참들이 야유를 하자 경영이는 "내가 니들에게 무슨 피해주나? 상관 하지 마라" 고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내 기억으로 허경영은 특별히 타인이나 단체를 생각하는 공익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될 수 있으면 자기에게 유리하게,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이 안 되는 억지를 부리기도 하는 타입이었다. 뭐 모두 미성숙한 20 대 초반이 일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경영은 사단 법무참모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함께 근무하고 있던 김녹규(내 기억으로) 병장 -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왔다는- 과는 대조적으로 워낙 엉뚱한 행동과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저 웃기는 놈’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나는 경영과 다른 내무반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내무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석식 후 초번 보초를 나가기 위한 집합 시간에 매일 만나야 했다. 집합 시간에 가끔 요즘 말로 개개서 주번사관한테 핀잔을 한 번씩 듣거나 간단한 기압을 받는 그런 타입이었다.
그런가하면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경영과는 전혀 반대 이미지로 남아 있는 인물이 있다.
당시 정훈자료로 많이 등장했던 김화복 병장이다. 김 병장은 군대에서 특과라고 할 수 있는 야전병원 원장(대령)의 당번병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계속해서 병원으로 후송되어 오는 병사들을 보고서 후방에서 편히 근무하는 것에 대하여 자책감을 느꼈다. 병원장에게 자신을 전투부대로 보내달라고 하자 병원장은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김 병장이 계속 청원을 하자 병원장은 이 사건을 주월 사령관에게 보고하고 사령관은 이를 가상히 여겨 김 병장을 전투 부대로 보낸다. 사령관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김 병장은 사단에서 연대로 대대로 중대를 거쳐 말단 소총소대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입장이 난처해 것은 막상 김 병장을 맡은 중대장이었다. 만약에 주월 한국군 전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김 병장, 정훈자료로 쓰이고 있는 김 병장이 죽거나 다치면 자신이 골치 아파지는 것이다. 공연히 이상한 놈 하나가 자기 부대에 떨어져 관심이 집중되니 엄청 부담이 생긴 것이다. 혹시 김 병장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다른 사병과는 전혀 다르게 추궁이 심할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김 병장이 살아야 정훈 효과가 있는 법이고 만약에 죽는다고 해도 시시하게 죽으면 안 되고 장렬 하게 전사를 해야만 그럴듯하게 정훈 자료가 될 것이 아닌가?
김 병장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중대장은 "저 새끼 취사반에 쳐 넣어!"하고서 전투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이렇게 되자 김 병장은 자기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막상 전투현장에 와서 총 한 번 만져 보지 못하고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파서 전투에 못나가게 된 소대원 대신에 출전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그 뒤에는 김 병장이 나가는 전투마다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무적의 불사신이 되었다나 말았다나 하는 개 같은 스토리다.
김화복 병장의 사진을 짤로 소환하기 위해 검찰이 카카오톡 들여다보듯 구글과 네이년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신입 기레기의 하찮은 능력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김화복 병장에 대해 아시거나 자료를 가지고 계신 분은 딴지 메일로 제보 또는 본 글에 덧글을 달아주시어 신입의 무능력함을 거침없이 나무라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참고로 보내주신 자료 중 '서울중앙교회 김화복'은 아니니 유효로 치지 않겠습니다. 편집자 드림.
나에게 허경영과 김화복은 전쟁터의 코미디와 허구적인 선전의 상징이었다.
허경영은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피에로였고 순진무구한 김화복 병장은 군대라는 조직이 만든 피에로이었다. 그런데 허경영과의 인연은 월남전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번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담당 작가실에서 보낸 쪽지를 받았다. 허경영의 정체를 폭로하는 1차분을 방영하고 2차를 준비하기 위하여 자료 수집을 하던 차에 온라인 서핑을 하다가 내 블로그에 있는 허경영 관련 내용을 읽고 협조를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SBS 측과 이메일과 통화를 주고 받았는데 나를 인터뷰하기 위해서 호주로 올 수도 있단다. 허경영에 대하여 별스런 정보도 없는 나로서는 그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매우 부담이 되는 일이라 사양을 했더니 일단 자료를 보고 판단을 해달라고 했다.
다음은 SBS 측에서 보내온 ‘그것이 알고 싶다’ 1회 방영분의 대본이었다.
P D : 본인이 고 박대통령의 비밀보좌관이었다는 부분을 강조하다가 월남 얘기를 꺼냈었는데요,
허경영 : 내 군대생활 기록부 봤습니까? 군대생활 기록부 보세요. 청와대로 돼 있어요.
P D : 월남전 가셨다고.
허경영 : 그러니까 청와대에서. 월남에는 심부름 갔지.
대통령이 보내서 간 거고 월남 휴전 때, 월남에 있는 금괴.. 금괴를 월남의 대통령이
박대통령한테 아 이걸 좀 한국으로 옮겨 달라, 인천으로.
근데 그걸 LST로 가져가서 청룡부대 가서 그 금괴를 싣고 오라는데
대통령이 거기 응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일단 내가 월남에 갔죠.
가서 전반적인 걸 봤는데, 사태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노, 그래서 그 사람하고 그냥 헬리콥터로 도망갔죠. 그러고 말았는데.
이상이었다. 세상에나? 저나 나나 무슨 고급 장교도 아니고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징집된 일개 사병에 불과한 처지에 도저히 만화에서도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데 제 멋대로 지어내다니?
빽이 좋았던지 운이 좋았던지 편한 곳에서 근무한 덕분에 5천여 명이 전사한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으면 감사하게 여기고 살아야지 월남전을 소재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멋대로 지어내는 것은 파병 전우들을 모독하는 행위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허경영이 무슨 헛소리를 하든지 내가 알 바가 아니지만 그는 분명히 1973년 2월 4일 미군 수송용 민간 항공기를 타고 나와 함께 귀국했는데 헬리콥터는 무슨 공중에 날아가다 추락할 소리는 하고 있는지...
전우들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전쟁 상황을 자신의 인기몰이를 위해서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전체 국민을 속이는 일은 도저히 묵과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한국에 파월 전우회, 걸핏하면 가스통 들고 나오는 고엽제 피해자 단체 등이 있던데 허경영이 혀를 교묘하게 경영을 해서 월남전을 팔아먹는데 왜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다.
허경영에 대하여 별다른 감정이 없었던 나는 분노의 오르가슴이 느껴져서 즉시 작업에 착수하기로 했다. (물론 제작비는 받고) 이제 문제는 어떻게 빨리 찍어서 보내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10 년 전에 한국서 온 KBS PD들과 ‘추적 60분’을 제작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시드니에서 현지 제작을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시드니에서 제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접촉을 해서 30도의 찜통더위 속에서 에어컨도 없는 내 서재에서 뒷마당의 시끄러운 새소리 때문에 (우리집 큰 나무에 피어 있는 꽃 때문에 온 동네 새들이 모여서 잔치를 벌인다) 창문을 닫고서 뜨거운 조명을 켜 놓고 촬영 기사, 오디오 기사와 땀을 뻘뻘 흘리며 1 시간 이상 작업을 해서 10 분짜리 필름을 만들어 보냈다.
그런데 ‘그것이 알고 싶다’ 2 차분에서 정작 내가 녹화해서 보낸 부분은 방영이 되지 않았다. 약한 사람들에게서 돈을 갈취하는 허경영의 파렴치성을 폭로하는 기획의도에 비해 너무 무거워서 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까 80년대 후반에 을지로의 인쇄 골목에 있는 국도극장 앞에서 우연히 그를 만나 차 한잔 할 기회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서로 뭐하냐고 근황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그는 개인사업 한다고 했고 나는 빈민 운동을 한다고 했다.
내가 왜 그때 일을 지금도 기억 하는가 하면 그의 반응이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내 상황은 흔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 내 이야기를 들으면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좋은 일 하고 있다고 긍정을 하든지 아니면 위험하게 왜 그런 일을 왜 하느냐는 반응이 그것이다. 그런데 허경영은 마치 아이처럼 신기하다는 듯이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나서 끝까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런 반응은 흔히 경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억이 나는 것이다. 그는 난생 처음 듣는 생소한 이야기를 듣고서 무엇인가 표현을 해야 하는 입장인데도 마치 자기가 생각하는 세계 밖의 세계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 실제로는 무능력한 사람이 지나치게 성취욕구가 강해서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며 허구의 세계를 꾸며내고 계속 거짓말을 반복하다 마침내 그것이 정말로 실제 자신이라고 믿어버리게 되는 정신질환을 말한다. 허경영은 바로 그런 증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실패한 탈출 계획
당시 월남을 다녀오면 무조건 병장이었다. 왜냐하면 파월 장병들은 군대 생활을 할 만큼 하기도 했지만 봉급을 미군이 주기 때문에 시간이 되면 무조건 진급을 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나는 일병으로 갔다가 일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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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월남에서 유일하게 찍힌 사진.
군수물자 호송 차량을 타고 한 명은 앞을 보고 한 명은 뒤를 보면서
마을을 통과할 때 바싹 가물어 있던 당시 필자의 모습
실패한 탈출 계획
당시 월남을 다녀오면 무조건 병장이었다. 왜냐하면 파월 장병들은 군대 생활을 할 만큼 하기도 했지만 봉급을 미군이 주기 때문에 시간이 되면 무조건 진급을 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나는 일병으로 갔다가 일병으로 돌아왔다.
일병의 기회조차 허락받지 못한 불운한 군 통수권자
사연은 이렇다.
하루는 본부 중대 서무계가 나를 부르더니 다음 달에 진급을 하게 되는데 상병 진급을 하면 한 달치 봉급을 부관부 사병계를 주어야 한다고 충고(?)를 했다. 한 편에서는 총 맞아 죽는 사람도 있는데 당연히 하게되는 진급을 가지고 행정병들이 그런 부정을 저지른다는 사실에 분노해서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 했다. 서무계가 "너 그러면 끝까지 진급 못해." 라고 했다. 나는 설마 그럴 수 있을까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어떤 때는 분을 참을 수가 없어서 부관부 사무실로 들어가 모두 쏴죽여 버리고 자살을 할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아까워 포기 했었다. 아니 사실은 더 큰 계획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루는 정훈교육이 있으니 각 참모부의 필수 요원만 남기고 전원이 사단 백마극장으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좀처럼 참모부 병력을 동원하는 일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본국에서 유신헌법이 통과되었다면서 유신헌법의 정당성에 대한 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사단 극장에서 정훈대장이 장교, 하사관, 사병의 3개 그룹으로 나누어 연속적으로 교육을 했다. 유인물로 나누어준 헌법 개정안을 본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훑어 보아도 대통령의 임기제한 규정이 없는 것이었다. 무슨 세상에 뭐 이런 헌법이 다 있나 싶었다. 순간 입대하기 전 제6대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씨가 이번 선거가 국민의 손으로 뽑는 마지막 선거가 될 것이고 이번 선거에 실패하면 총통제가 될 것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제 영원히 끝났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같이 고생하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야 군대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들은 앞으로 한국에서 어떻게 살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돌아갈 다리가 끊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더욱이 일개 사병으로서 무슨 길이 있겠나?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않아 철수를 해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터인데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가 없는 상황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당시에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나중에 빈민운동 동지가 되었던 고 제정구 선생은 감옥으로, 재야 생활의 동지이었던 고 김근태 형은 지하로 잠적해 있었다. 이역만리 월남땅, 그것도 군대에서 누구와 터놓고 이야기 할 수도 없는 참으로 답답한 시간이 무겁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PX에서 항상 외톨이로 맥주를 홀짝 홀짝 마시고 있는 두꺼비 같이 생긴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 사단 사령부 병력은 대부분이 행정병이라서 비교적 차림이 깨끗한 법인데 이 녀석은 군복도 꾀죄죄하고 어벙벙한 것이 한 눈에 척 봐도 고문관처럼 보였다. 내가 접근해서 말을 붙여도 귀찮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나는 그런 모습이 더 재미가 있어서 자꾸 말을 시켜 보았다.
그러다가 내가 정말 놀란 것은 도수가 많이 나가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이 대학물은 먹었을 것 같아 보이기에 장난삼아 심드렁하게 “어느 학교 다니다 왔냐?” 라고 물으니까 퉁명스럽게 “서울 상대” 라고 하면서 우습다는 듯이 나를 흘겨보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의 처지가 이해가 되었다.
‘군대는 보직’이라는데 서울 상대씩이나 다니던 녀석이 공병대 작업병으로 근무하자니 영 조합이 안 맞았던 것이다. 더욱이 신 상병은 사교적 (집 사람은 사기꾼적이라고 비웃지만)인 나에 비하면 엄청 비사교적인 타입이었다. 그러니 스스로 왕따를 자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멋대가리 없던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가 슬슬 보따리를 풀기 시작하니 3년 굶은 과부가 꼭 홀아비 만난 꼴이었다.
이런 꼴?
그런데 얼마 있다가 그런 신 상병이 신수가 훤해져서 나타났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했더니 뒤늦게나마 가방끈을 인정받아 사단 내에 건물수리 용역을 맡고 있던 빈넬이라는 필리핀 회사(당시에는 필리핀이 우리 보다 형편이 나아서 부대 내 용역을 필리핀 회사에서 맡았었다.)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자리는 사단에서 단 두 명밖에 갈 수 없는 자리였다. 가방끈이 확실한데다가 마침 공병대에 근무하다 보니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월남에 있던 한국군 중에서 사고를 내고 간혹 캄보디아로 도망을 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캄보디아는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일단 그 곳을 가면 제3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는 어느 부대의 경리 장교가 부대의 월급을 수령해 오다가 운전병과 경계병을 살해하고 캄보디아로 튀었다는 소문을 듣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작심을 하고 신 상병이 판단력이 흐려질 정도로 술을 먹인 다음에 나는 앞으로 기회를 보아 캄보디아로 도망갈 생각이라는 것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만일에 신 상병의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술기운에 했던 이야기로 돌릴 셈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신 상병은 대단히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자기는 용기가 없어서 같이 가지는 못하겠지만 적극적으로 도와는 주겠다고 했다. 사실 제대를 해 보았자 불안만 기다리고 있을 뿐인 나와는 달리 경남고에 서울상대 출신인 신 상병이야 한국을 등질 필요가 없었다.
일단 동지가 생겼으니 일이 빨리 진행되었다. 우리 같은 사병들이 캄보디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헬기로 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나는 내 개인 공간이 전혀 없는 내무반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 회사로 파견을 나가 있어 나 보다 행동이 자유롭고 물건을 보관할 공간이 있는 신 상병이 당분간 정글에서 생활할 수 있는 물품들을 준비하기 시작 했다. 물론 부대에서 돈 안내고 구할(훔칠) 수 있는 물건은 최대한으로 구해서.
문제는 헬기를 어떻게 타느냐 하는 것인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꿍꿍이가 있어서 뜸을 들여 놓은 건이 있었다.
한국군은 헬기가 없었고 사단에 미군 헬기 중대가 파견 나와서 사단의 운송을 책임지고 있었다. 백마 사단 사령부는 모든 직할대가 함께 있기 때문에 남산만큼 넓었다. 피터슨이라는 미군 헬기 조종사가 저녁 마다 조깅을 하다가 사단 교회가 있는 언덕에서 돌아갔다. 교회에 자주 갔던 나는 그 동안 그와 친해졌고. 전략적으로 나 보다는 영어가 더 자유로운 신상병과 그의 막사에 자주 놀러 갔다. 전략 적으로 피터슨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신 상병이 제대 후 곧 미국 유학을 갈 계획이라고 꾸며댔다.
팬티 바람으로 조깅 하다가 만났을 때 이름이 피터슨이라기에 나는 처음부터 이름을 불렀지만 신상병은 군복을 입고 막사에서 만났으니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말끝마다 "sir" 를 붙였더니. 피터슨은 그러지 말고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우리 편에서 생각할 때 상대는 미군 중위고 우리는 미군의 눈으로 볼 때는 보 잘 것 없는 한국군 사병들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먼저 해 본 나라인데다 미군은 업무를 떠나서는 계급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문화의 영향이었던지 피터슨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대해 주었다
나는 피터슨의 비위를 잘 맞춰서 헬기를 태워 달라고 해 일단 뜨기만 하면 사정을 해 보고, 안 되면 할 수없이 총으로 위협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가능한 한 미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한국의 정치적 상항이 급변해 나는 아무래도 귀국하면 감옥에 갈지 모르겠다고 연막을 폈다. 신 사병이 옆에서 정말로 크게 걱정하는 척하는 연기를 했더니 처음에는 무관심하던 피터슨이 슬슬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피터슨이 나트랑에 나가고 싶으면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사병인 내 처지가 행동이 자유스럽지 못했지만 다른 군인이 타지 않고 피터슨이 단독 비행 하는 기회를 노려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떨어지나 일주일 정도는 버텨야 하기 때문에 더블백 안에는 레이션을 쑤셔 넣을 수 있을 만큼 많이 쑤셔 넣었다. 혹시 피터슨이 물건이 가득 든 더블백을 보고 물으면 인도 상점에 내다팔 레이션이라고 하기로 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레이션
드디어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피터슨이 2 주 후에 한국군 업무가 아니고 미군의 업무로 나트랑 공항에 단독으로 갈 일이 있단다. 나트랑까지는 헬기로 30분밖에 안 걸린다. 30분 안에 결판이 나야 한다. 국경 너머 아무 마을에 나 내려달라고 사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시끄러운 헬기 안에서 영어로 피터슨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 하는 생각을 자면서도 하고 잤다. 최악의 경우 피터슨을 총으로 위협해야만 할 경우는 상상하기도 괴롭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신 상병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모레 원대복귀 하란다. 부대가 곧 철수할 모양이다."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신 상병이 원대복귀 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탈출 작전은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든 물건을 신 상병이 가지고 있는데 신 상병이 사라진다니 나는 기가 막혀 있는데 신 상병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도 안 쓰고
“그런데 큰일 났어. 나 총을 잃어버렸어.”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내 문제 때문에 멍하고 있다가 그 소리에 정신이 들어
“뭐야? 야! 이 씹 새끼야! 너 군인 맞아?”
“글쎄 이 회사에서 총을 쓸 일이 없으니까 어디다 처박아 두었는데 도저히 몬 찾겠다.”
“뭐 이런 정신없는 새끼가 있나?
할 수 없다.
나트랑에 나가면 살 수야 있겠지만
하루 밖에 시간이 없는데 나갈 수도 없고 피터슨에게 부탁해 보자.”
우리는 허겁지검 피터슨에게로 달려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최대한으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부탁을 했다. 멍청한 우방 군인 국군이 총을 구해달라니 피터슨도 난감해 했지만 '한미우호 방위조약'의 정신에 입각하여(?) “Stupid!"를 연발 하면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디서 M16 소총 한 정을 구해왔다. 역시 미군은 부자여서 그까짓 총 한 정 정도 가지고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피터슨에게 감사에 또 감사하면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총을 얻어 들고 돌아온 신 상병으로서는 지옥 문 앞에서 되돌아온 기분이었겠지만 나로선 정말로 기분이 씁쓸했다. 완전히 '원님 지나가려고 길 닦아 놓았더니 거지가 먼저 지나간다.' 는 속담 꼴이었다. 하여간에 캄보디아를 가기 위해 헬기를 얻어 타려고 그 동안 피터슨에게 온갖 정성을 기울였는데 결과적으로 신 상병의 목숨을 건진 셈이다.
이분은 당연히 피터슨이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히 무모하고 서툰 계획이었다. 만일에 내 계획대로 헬기를 탔더라도 피터슨이 국경을 넘었다며 월남 땅 아무 곳에나 내려놓으면 나는 도로 잡혀 올 수밖에 없었다. 보이는 국경이 없기 때문에 항공 지리를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마 계획했던 대로 되었다면 지금쯤 캄보디아 어느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까무잡잡한 아이들 주렁주렁 낳고. 10월 유신 덕분에...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실제로 참전 군인을 캄보디아로 이민 정착 시키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다. 프놈펜에 주재한 한국대사관의 모 인사를 통하여 비공식적이긴 하나 당시 프놈펜 정부의 진심이 담긴 지원요청이 있었다. 주 월남한국군에서 현지에서 제대하는 군인들 중 캄보디아에서 살아보고 싶은 인원들을 모아 편성 장비시켜 약 1개 사단 규모를 캄보디아로 파병시켜 주면 땅은 필요한 만큼 마음대로 줄 터이니 농기구를 가지고 들어와 개발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한국군이 점령한 지역의 소유권을 인정하겠으나 단 한국여자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붙었다. 이 웃지 못 할 요청인지 제안인지는 청와대까지 보고 되었지만 미군과 한국군이 모두 철군하는 상황에서 당연히 불가능한 결정으로 종결되었다.
사실 철수 계획이야 오래 전에 잡혀 있었겠지만 나 같은 사병이 군사비밀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단 철수 명령이 떨어지니까 부대가 갑자기 정신없이 돌아갔다. 신 상병은 공병대로 원대 복귀가 되고 나는 밤낮 없이 부대 철수를 위해서 짐 싸는 작업에 동원 되어 우리는 그 후 만나보지도 못했다. 갱상도 사나이답게 무뚝뚝했던 신 상병!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들은 몇 개월 동안 각 참모부의 필수요원만 남기고 전체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반은 호 속에 들어가서 경계근무를 서고 반은 컨테이너에 짐을 채웠다. 하루 종일 짐을 싸다가 교대시간이 되어 호 속으로 들어가서 근무를 서면 그대로 총을 든 채 잠이 든 적도 있었다. 모든 짐을 다 싼 다음에 이미 트럭도 모두 보내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단독 군장을 한 채 월남 정부가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나트랑 공항으로 향했다.
나트랑 비행장에는 처음 보는 민간 항공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군을 수송하는 용역 비행기이었다. 탑승 교육 시간에 인솔 장교는 바로 앞 비행기에서 한 병사가 승강구를 올라가면서 승강구 입구에서 서 있는 스튜어디스의 미니스커트 속을 쳐다보다가 철모가 벗겨지는 바람에 역시 뒤에서 입을 벌리고 미니스커트를 쳐다보던 전우의 앞니가 부러졌다는, 지어냈을 것이 틀림이 없는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철모 끈을 단단히 매고 역시 처음 보는 미국 여자 스튜어디스의 친절한 미소에 넋을 빼앗기며 차례로 승강구를 올라탔다. 갈 때는 배로 1 주일이 걸렸는데 비행기로 4 시간 만에 돌아오는 것이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돌아올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진 않았겠지만 이런 분위기 일까.
실제로 베트남 민간항공사 비엣젯에서 비키니쇼를 했다가 벌금을 냈다고... ㅎㄷㄷ
이렇게 해서 결국 나는 끝까지 일병으로 있었던, 일병으로 갔다가 일병으로 귀국한, 30만 파병군인 중에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내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귀국을 하고 육군본부 중앙경리단에 월급을 수령하러 갔을 때였다. 담당자가 내 계급을 보더니 “뭐야? 일병? 이 자식! 천연기념물이네!”라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는 월남전에서의 내 개인적인 경험이었으나 이후부터는 월남전에 대한 일반적인 비전투상황에 대한 기록이 될 것이다. 월남전의 전투상황은 사관학교 교육과정에서 전략 전술에 대한 학습을 위해서는 필요할지 모르겠으나 역사적으로는 부끄러운 전쟁, 더욱이 지고 온 전쟁에 대하여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다. 물론 전투에 참가한 개인들의 삶에는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지만.
화까지는 월남전에서의 내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했다. 5화부터는 월남전의 일반적인 비전투상황에 대한 기록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월남전 전투는 장교 교육과정 내 전술학 교과서에 수록할만한 가치가 있겠지만 역사적으로는 부끄러운 전쟁, 더욱이 지고 온 전쟁에 대하여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물론 전투에 참가한 개인들의 삶에는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지만.
베트콩도 양민이다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이미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1971년 6월13일 뉴욕타임스가 '펜타곤 페이퍼'란 기밀서류를 입수해 기사화함으로써 미국내에서 조차 '잘못된 전쟁'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 서류에는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의 구실이었던 '통킹만 사건'이 북베트남의 도발이 아니라 미국의 조작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1964년 8월 북베트남 어뢰정이 공해상에서 미국 구축함 매독스호를 선제공격해 미군이 베트남전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는 '데소토'라는 정보수집 함정이었으며,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군 함정을 공격했다는 증거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히피 머리에 나팔바지를 입은 청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반전' 데모를 벌였다. 불행히도 당시 한국안에서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 탓에 그런 정보를 접할 수 없어 알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월남전 다큐를 만들기 위해서 초대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 생전에 오랜 시간 인터뷰를 했었고 2 대 사령관인 이세호 장군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비서실장이었던 H 장군 (당시 대령)과도 오랫 동안 이야기를 했었다. 그들을 통해서 일개 병사가 접할 수없는 고급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월남전이 이길 수없는 전쟁인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롬멜 장군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쟁을 수행했듯이 비극적이지만 지는 전쟁도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 군인의 역할인 것이다. 더 치사한 것은 이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철수를 하면서도 지휘관의 공명심 때문에 애꿎게 부하 장병들이 수 없이 죽어나갔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맹호부대는 철수를 앞 둔 1972년 4 월 안캐 패스 작전 때 지휘관들의 공명심 때문에 단 3일 동안 75명이 전사했고, 104명이 부상을 당했다. 전쟁터에서 말단 사병은 자기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언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오직 주어진 명령에 따르기 때문이다. 훈련에서부터 실전까지 그저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을 뿐이다.
지금은 춘천에서 터널이 뚫려 단숨에 통과 할 수 있지만 당시 파월 교육대를 가려면 새카맣게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가 아찔한 배후령 고개의 꼬불꼬불한 비포장도로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서 오음리로 들어가야했다. 교육대에서부터 나는 전혀 모르는 길을 가야했다. 월남에 도착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주변에는 둥근 철조망이 5중으로 설치돼 있고, 밖에서 기어 들어올지도 모를 베트콩을 감시하기 위해 밤새도록 전등불이 촘촘히 밝힌 기지로 갔다. 작전을 나가서 잔뜩 긴장한채 1미터 앞도 알 수없는 정글 속을 한 발 한 발 옮겨야 했던 길도 내가 모르는 길이었다.
나무 뒤에, 바위틈에, 숲 속에, 나무 위에, 베트콩이 숨어 있다가 따다닥 쏘지나 않을까? 보이지 않는 부비트랩 선이 나무 사이에 연결돼 있지는 않을까? 그 무섭다는 독창이 바늘처럼 솟아있는 함정이 위장돼 있지나 않을까? 몰라서 불안한 것뿐이었다. 어디를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헬리콥터를 타고 작전지에 가서는 지루하게 기다리다가 찰나 같은 순간 동안 총질을 하고서 헬기를 기다리다 다시 올라타서 기지로 돌아왔다. 월남전은 전선도 없고, 누가 적인지 우리 편인지도 알 수 없고, 진군도 없고 승리도 없는 전쟁이었다.
'한국군의 월남 참전 민간인 학살'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와서 참전 군인들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나라 안의 ‘군 의문사 사건' 조차도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데 50년 가까운 세월 전에 타국에서 벌어진 전쟁통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진실을 한국군 측에서 인정하고 사실을 밝히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부대와 작전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한국인 작전 지역에 민간인이 들어가 살 수도 없거니와 영농지역이 있으면 주간에 농사일을 하기 위해서 한국군의 검문 검색을 받는다. 물론 그런 지역 민간인들 대부분이 항상 베트콩과 연관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 비록 그렇더라도 한국군과 전혀 관계가 없는 지역이 아니라 한국군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는 전술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지만 한국군 편에서 보면 양민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한국군은 양민학살을 했다는 오해를 받는 것은 베트콩과과 양민을 구별할 수 없었던 전쟁의 성격 때문이다.
대단히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가 요즘 벌어지고 있다. 대다수의 선량한 월남참전 할배들 가운데 가끔 시도 때도 없이 여기 저기 출몰하는 개스통 할배들이 있다. 일반국민들의 눈으로는 선량한 할배들 가운데 섞여 있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일부 고엽제 피해자 난동꾼들을 구분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월남참전 할배 하면 무조건 개스통 할배라는 오해를 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40 여 년전 월남의 현실은 어떠했던가?
1968년 7월15일 비둘기 부대 소속 소대장 김종수 소위는 소대원들을 이끌고 야간에 예정된 매복지점이 아닌(국방부 보고서)곳에 매복하고 있다가 자정이 넘은 새벽 1시경, 그곳을 통과하는 베트남인 7명을 검거, 체포했다.
이 와중에 갑자기 한 명이 도주했다. 김 소위는 즉각 소대원을 시켜 추격, 사살하게 했다. 나머지 6 명을 끌고 이동하는 중에 이번에는 두 명이 도망쳤다. 그 둘은 그만 놓쳐버렸다. 나머지 4명도 거세게 반항하며 도망치려 하자 다급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사살할 것을 명령했다. 그 다음날 도주한 두 명이 그 지역 군수에게 사건 내용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보고했다. 즉 학살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선동에 편승한 그 지역 베트남 주민들이 한국군 부대 앞에 몰려와 대대적으로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낭패가 된 사령부 지휘부는 부랴부랴 사건 수습책 마련에 부심하게 됐다. 김종수 소위는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15 년형을 살았으니 그는 주월한국군 참전 역사 가운데 최악의 희생양이라 할 수 있다.
1970년 11월 27일, 백마 29연대 2중대 3소대장이 매복을 나갔다가 민간인 5명을 베트콩으로 오인하여 오인사격을 하고 귀를 잘라다 전과보고를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 마침 갓 부임한 전두환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보고를 하고 이세호 사령관은 고민 끝에 대통령께 죄송하다는 편지를 보내고 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은 친필로 쓴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이세호 장군,
12월 21일자 귀하의 편지는 오늘 23일 접수하여 내용을 자세히 읽었습니다. 요즘 월남 국내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한국군에 의한 양민살해사건에 관하여서는 합참의 한무협 장군에게도 상세한 보고를 이미 받고 있습니다.
소녀살해사건은 불행한 일이기는 하나 작전상 만부득이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백마부대 29연대에서 발생한 양민살해사건에 관하여서는 각급 지휘관은 물론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 같은 불상사가 재발하지 않게끔 각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전과를 조작 보고하기 위하여 양민을 살해하고 하물며 죽은 자의 귀를 절단하는 비인도적 행위는 국군의 명예와 지금까지 수많은 전우들의 피의 대가로서 쌓아올린 국군의 공적을 하루아침에 완전히 무너뜨리는 (무효화 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통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국군이 월남에 간 기본 목적과 정신을 다시 한 번 전 장병이 상기하고 재인식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세호 사령관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는 박정희 전 태통령 (1970년)
나는 귀국 해서 명예롭지 못한 일로 2 주간 국방부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국방부 호텔은 법무부 호텔과 존재 목적이 달라서 숙박 시설이 아니라 교육시설이다. 즉 병신이 되지 않는 선에서 수감자에게 단기간에 최대의 고통을 주는 것이다. 그래야 영창을 나간 다음 영창에 대한 좋은(?) 소문이 많이 나서 다른 병사들이 경각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쯤 하면 그 방법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지내야 하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도 빽이 통해서 군대 나이로는 경로당에 갈 나이에 입대했던 나는 고참 헌병인 후배 덕분에 틈틈이 영창에서 나와 창고에서 월남전에서 기록했던 헌병대 문서를 정리하는 사역을 했었다. 문서를 정리하다가 한국군이 월남에 있는 동안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범죄 기록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물론 내 임무는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소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대부분이 강간 사건이었고 살인 피해 배상은 물소 두 마리인가 세 마리 값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 월남에서는 물소가 우리나라 시골의 황소만큼 값이 나가기는 했지만 사람값이 그렇게 저렴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병력이 이동하다가 잠깐 쉬곤했던 국도변에 공중변소처럼 담요로 칸막이를 쳐놓고 남편은 손님을 부르고 아내는 손님을 받는 매춘 업소도 있었다. 그러면 병사들이 군화를 신은 채 바지만 내리고 일을 보는 것이다. 전쟁터란 인간이 보통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곳이다.
국방부 기록에 의하면 베트남에 참전한 주월 한국군 가운데 561명의 장사병(將士兵)이 범죄에 연루되어 전범(戰犯)으로 구속, 처벌되었다. 범죄 내용은 항명(抗命), 명령위반, 상관구타 및 살해, 무단이탈, 탈영 등 주로 하극상이 최다로 우리 한국군 자체 내부의 문제에 연류 된 사건이어서 현지 베트남인들과는 무관한 것이다. 베트남인들과 연계된 사건가운데 소위 민간인 즉 양민학살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받은 숫자는 우리 군(軍) 내부의 기강해이로 발생한 사건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어로는 ‘부수적 피해’라고 번역이 될 수 있는 Collateral Damage는 군사용어가 있다. 전쟁을 하는 당사자들은 전쟁 중 일어나는 민간인의 죽음과 사회 기관 시설 파괴를 ‘부수적’이라고 표현하지만 당한 사람들에게는 천추의 한이 맺힐 일이다. 그러나 솔직히 생사가 한 순간에 갈라지는 전투에 참전했던 병사들에게는 월남인들의 안전은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밥을 먹다가 길을 가다가 아니면 휴식 중에 앉아있는 돌멩이에도 부비트랩이 매설되어 있으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정하고 사과하고 보상을 해야 할 때이다. 그것마저 부인한다면 일본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한국군이 양민을 학살 했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하여 베트남 정부는 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일까?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우리가 이긴 전쟁이므로 사과는 필요 없고, 전쟁으로 인해 정 문제가 있으면 직접적인 전쟁 당사자인 미국과 협상을 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1992년 베트남과 수교 당시 과거사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서로 동의한 데는 승전국으로써의 자존심도 있겠지만, 한국군과 교전이 거의 없었던 북베트남이 현 베트남 정부의 실세인 탓도 있다. 한국군과 주로 싸운 세력은 남베트남 공산당 소속 베트콩이었고 북베트남 정규군은 물자제공과 훈련 등을 돕긴 했지만 직접 한국군과 맞붙어 싸운 적은 드물었다. 거기다 한국군과 주로 싸운, 남베트남 공산당인 베트콩의 지도층은 구정 공세 당시 괴멸 당했다. 북베트남에다가 죽어라고 폭격을 한 장본인도 미국군이지 한국군이 아니기도 하고. 따라서 불필요한 마찰 없이 이러한 반응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북베트남 입장에서도 이런 문제가 공론화되면 피곤할 수 있는 게, 자기들 역시 구린 구석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베트콩이 자리 잡던 1960년대 초반 남부 촌락지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라인지 집단인지 깽단인지 정체를 모를 IS라는 것이 나타나서 세계를 공포를 몰아넣는 깽판을 치고 있는 것을 보라!
베트콩 역시 공포심으로 자신들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수하게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참고로 이건 미군이 전면 개입하기 전의 일로 당시 서방 각국의 통신사 종군 기자들이 남베트남 지역에서 촬영한 자료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월맹은 파리 평화 회담 이후 미군이 철수하자 남베트남을 기습남침해 점령하는것으로 전쟁을 끝내버렸다. 전쟁은 일단 이기고 봐야 하는 거지만 할 말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당시 대한민국의 이대용 공사같은 사람을 면책 특권을 가진 외교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붙잡아서 몇 년이나 투옥하고 북한으로 보내려고 공작하기도 했다. 즉 피장 파장인 셈이다.
이대용 전 베트남 공사(왼쪽)와 즈엉 징 특주한 베트남 대사 (2002년)
땡 잡는 전쟁
남의 돈으로 치루는 전쟁이다 보니 병력과 물자를 아낄 필요가 전혀 없었다. 물자는 물론이고 월급을 미군한테서 받다 보니 인원도 채울 대로 채워졌다. 그래서 필요 없는 인원도 파병을 해서 머리 수를 꽉 꽉 채웠다.
위로는 소장 사단장 밑에 행정, 작전 부사단장도 각기 준장이어서 사단에 별이 3이나 되었고(덕분에 나는 행정 부사단장이 탁구 칠 때 공을 열심히 주워야 했다) 아래로는 사단 본부에 인원이 2 명밖에 없는 참모부에도 상사 급의 선임하사가 있었다. 내가 생각할 때 제일 어색한 일은 한국에서는 연대급에서도 제일 할 일이 없는(파월 전에 연대 정훈과에 있어 본 내 경험으로) 정훈장교가 대대급까지 배치되었던 일이었다. 그것도 한국처럼 대대 병력이 한 곳에 주둔하지 않고 중대가 몇 Km 씩 떨어져 있고 헬기로나 이동이 가능해서 일반 병사들을 만날 수도 없는 곳에서 말이다. 그런 사정이니 정훈장교가 할 일이 없었고, 실제로 나중에 내가 만난 대대 정훈장교 출신에 의하면 파월 기간 1년 내내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죽이기가 너무 고되었다고 했다.
나는 미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산처럼 쌓여 있는 군수물자들을 보고 미국의 군수물자 조달 능력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어느 책에서 보니 한국전쟁 당시 소모한 총알 대비 죽은 병사의 숫자를 보면 병사 한 명당 총알 한 가마니 정도를 소모한 셈이라고 하던데 아마도 월남전에서는 베트콩 한 명 사살 하는데 한 트럭분의 총알은 소모되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생겨난 새로운 군사용어가 ‘초토화 작전’이었다면 베트남전에서는 ‘융단폭격’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융단을 깔듯이 폭격을 했다는 의미인데 사실상 비용은 많이 들고 효율은 낮았다. 위험요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융단폭격을 한 것은 분명 고의적인 학살인 것이다.
미국이 월남에서 1965년부터 사용한 폭탄 양은 제 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사용한 총 폭탄 양을 합한 것의 1.5배에 달했다. 이런 식으로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7,200억 달러(당시 한국의 1년 예산은 10억 달러 정도) 라는 천문학적인 전비를 뿌려댔다.
월남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남는 장사를 한 것은 아니다. 전쟁배상금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베트남은 거인 미국을 이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즉 미국의 자존심을 마구 구긴 대가로 이때부터 베트남은 27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철저하게 경제적 보복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천문학적인 돈을 낭비한 미국 역시 1971년 달러를 평가절하하고 그때까지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던 금태환 중지 조치를 취함으로써 국제통화체계가 크게 동요하고 국제 금융 혼란이 닥쳤으며, 세계질서를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월남전의 피해는 월남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이웃에 있는 캄보디아에게도 혹독했다. 우리가 흔히 '킬링필드'로 알고있는 캄보디아에서의 학살은 69 년~73년간 벌어진 미국에 의한 폭격으로 인한 제 1 학살과 크메르 루주 집권기간인 75년~79년까지 벌어진 제 2학살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실제로 한국국방연구원의 세계 분쟁 데이터베이스에는 캄보디아 땅에 단지 베트콩이 지나간다는 이유로 4 년간 미군의 폭격으로인한 사망자가 60 만 명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도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자신이 불리할 때면 미국의 학살책임을 거론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미국을 전범으로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강조하고 있다.
베트남전에 참전해 캄보디아 폭격을 거부하다 군사법정에 기소됐던 도널드 도슨(당시 공군 대위·B-52 부조종사)은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목표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라고 증언을 한 바 있다.
미국은 B-52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캄보디아에 무려 53 만 9129t 에 이르는 각종 폭탄을 투하한 사실이 드러났다. 제 2 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총량 16 만 t의 3 배나 웃도는 엄청난 양이었고, 파괴력은 히로시마 핵폭탄 25 배를 웃도는 것이었다. 그렇게 캄보디아에 퍼부은 폭탄은 불바다를 만드는 네이팜탄이었고, 고엽제로 자손 대대 치명상을 입히는 에이전트 오렌지였고, 수백 개 새끼탄을 까며 시민들을 살해한 클러스터밤(CBU)이었다. (출처 :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네트워크 팀장이 쓴 '킬링필드의 진실')
클러스트 밤
궁핍한 처지에서 정신력 하나로 버틴 베트콩 쪽에서는 힘든 전쟁이었겠지만 미군 쪽에서는 남아도는 전쟁 물자를 때려 붓는 전쟁이었고 그 편에 붙었던 한국군은 덕분에 호강 할 수 있었다. 모든 무기와 보급품을 미국에서 지원 받았었기 때문에 고국의 가난한 군대 사정과는 수준이 완전히 달랐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물건이 남아돌아 낭비하는 것은 기본이고 가능한 한 하나라도 더 빼돌려서 한국으로 가져가는 것이 애국이었다.
극단적인 예로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월남에서 수송 업무를 맡고 있었던 한진에서는 대규모 작전이 없어 수송물동량이 줄어들자 수송능력이 남아돈다며 물동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안을 주월 사령관에게 부탁했었다. 그런데 사령관이 지시한 방법이란 것이 기가 막혔다. 전방부대에 야간 요란사격을 최대로 많이 하라는 지시를 내려 포탄의 수송량과 탄피의 반송량을 증가시켜 수송물동량을 증가시켰던 것이었다. 한 마디로 미군과 수송용역을 맡은 한진이 더 많은 달러를 벌 수 있도록 포탄을 많이 쏘아 없애는 방법이었다.
일반적으로 파병된 한국군 장병들이 귀국할 때 사방 1m 되는 나무상자에 자기가 사용하던 사물이나 구입한 물품을 담아 갈 수 있는 귀국 Box을 가지고 들어왔다. 월남에서 보내온 귀국박스는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율화 이전에 한국인들이 단체로 외국의 문물과 대중소비문화를 받아들인 예로 의미가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사병들은 월급이 적고 PX에서 구입할 수 있는 물품도 한정되다 보니 사실상 자기에게 할당된 Box에 물건을 채워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 몫의 박스를 월급을 많이 받는 장교나 하사관들에게 주기도 하고 수단 좋은 사병들은 휴대식량으로 나오는 C-Ration이나 하다못해 한국에 가서 고물로 팔 수 있는 신주로 된 포탄의 탄피를 넣어 오기도 했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와서 살아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사 해야지 물건에 욕심을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나 같은 소수의 결벽증환자들을 제외하고 월남전에 참전한 모든 군인들은 장교 사병 할 것 없이 하나라도 더 챙겨가려는 정신무장 하나는 투철했었다.
그러나 사실은 베트콩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말단 소총중대의 경우에는 중대장이라도 돈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사병들이 귀국 박스에 담아 올 수 있는 건 탄피와 맥주 캔뿐이었다. 그러나 적과 싸우러 다니는 일반사병의 경우에는 탄피를 줍거나 만들 시간도 없었으며 탄피 모은다고 할 일없이 실탄사격을 할 수도 없었다. 손으로 실탄을 분해해서 화약을 쏟아버리고 탄피를 모으기도 했으나 뇌관을 처리 못해 귀국선이 항해할 때 파도에 흔들려 귀국 박스 속의 탄피 뇌관이 터지는 일이 생기곤 해서 나중에는 탄피를 귀국선에 싣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탄피 말고 일반 병사들이 모을 수 있는 건 알루미늄 맥주 캔이었다. 병사들은 부대내외 심지어 그 나라 1번 국도변에 도로정찰을 나가서도 사람들이 마시고 버린 맥주 캔을 줍기도 했었으니 본질적으로 보면 요즘 독거노인들이 폐박스나 헌 병을 주워 모으는 모습이나 다름이 없다. 다른 것은 노인들이 폐품 줍는 것은 개인들의 고단한 삶을 말해 주는 것이지만 전쟁하러 온 군인들이 폐품을 줍는 것은 나라의 가난 때문이었다.
월남전은 하나의 세계였다. 월남전은 군대라는 바퀴와 함께 파월 기술자라는 또 다른 바퀴가 함께 굴러가는 수레와도 같았다.
당시에는 월남에서 제대 한 후 현지 회사에 취직을 해서 눌러 앉은 사병들도 있었다.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일자리를 찾기 힘든 때였기에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만 몇 달씩 제대를 연기하면서까지 취직을 하기 위해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도 말단 중대에 있는 사병들은 정보가 없기 때문에 그런 기회가 있을 수 없었고, 보직이 좋은 사병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물론 기술자들이나 현지 취업을 한 사병들이나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지만 보직에 따라서는 단순히 월급만 받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미군과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에 융통성이 많았다. 왜냐하면 총알을 쏘는 것이 아니라 달러를 갖다 붓는 것이 미국이 월남전을 수행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군수물자를 빼돌려서 재미를 보던 사람이 처음에는 현지 실정을 잘 몰라서 엉뚱한 물건을 잔뜩 빼돌렸다가 낭패를 본 적도 있었다. 전쟁통이기 때문에 생활용품이 필요한 것인데 당장 필요가 없는 고가품을 빼 돌렸다가 처분을 못해서 낭패를 본 것이다. 보급품에는 책걸상을 비롯하여 침대, 이불, 담요, 식기 등 식품과 소모품들을 제외한 온갖 잡다한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중이었기에 언제 어디로 피난을 떠나야 할지 알 수 없는 월남인들에게 주로 필요했던 품목은 1인용 모기장, 모기약, 홑이불로 쓸 수 있는 침대 시트 등 어떻게 보면 시시한 것들이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 보급품 중 하나인 방충제
다음은 한 파월기술자(이하 A)가 경험한 일이다.
보급창에서 짐을 싣는 동안 기다리는데 옆에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어서 그 곳을 관리하는 미군에게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왜? 좀 실어 줄까? 재봉틀인데."
했다. 박스 하나를 뜯어보았더니 '싱거'표 재봉틀이 여러 대씩 들어있었지만 월남에서는 인기가 없으리란 걸 짐작했다. 피난 다닐 때 그 무거운 재봉기를 들고 다닐 리 없었다. 그렇지만 한국에 가져가면 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만 실어 줄래?"
A가 부탁하자마자 미군은 그걸 처분하지 못해 안달이라도 났었던 사람처럼 여러 상자를 차에다 올려 주었다. 보급창을 빠져나온 나는 곧바로 부두로 향했다. 부두에 한국 LST가 정박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걸 실어드릴 테니까 가져가서 알아서 처분하시고 돈이 되면 그중 얼마를 나눠주쇼."
A는 함장을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찔러 보았다. 처음에는 딴 사람한테 부탁하라고 고개를 가로젓다가 한 번만 해 보라고 강권하자 마지못해 응낙을 했다.A는 트럭에 실려 있는 박스를 배에다 부려 놓았다.
석 달 정도 지나자 그 함정이 다시 돌아왔다. 한국까지 다녀오려면 그 정도 걸린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어 A는 때를 기다렸다가 부두로 찾아갔다. 배에 오르자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 석 달 전에 실었던 재봉틀이 틀림없었다.
"아니, 왜 도로 가져왔습니까?"
"부산에 가보니까 상륙할 방법이 있어야지요.
아무 서류가 없으니까 세관원도 어쩔 수 없더라고요.
돈도 돈이지만 재봉틀 한 대가 아쉬운 게 우리 나라 실정 아닙니까.
공업용이니까 마산 공단에 갖다 주면 그걸로 엄청난 외화를 벌수도 있는데...
그래서 사정을 해 보았는데 끝까지 안 된다는 거예요."
선장은 돈벌이보다는 애국심 때문에 더 재봉틀이 아까운 모양이었다.
"그냥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당신이 날 의심할 테니 할 수 없이 다시 싣고 왔지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다시 싣고 갈 수도 없고."
매우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A는 선장을 괜히 부대물건 도둑질에 끌어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장에게 미안했다. 재봉틀을 한국에서 못 내린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장과 A는 머리를 맞대고 재봉틀 처리 방법을 찾았다. 보급창으로 되돌려 줄 수도 없었다. 그들은 궁리 끝에 바다 속에 처넣기로 했다. 그 날 저녁 선장과 A는 땀을 흘려 가며 재봉틀 수십 대를 캄란만 바닷물 속에다 밀어 넣었다.
한 번은 자동차 타이어가 많이 쌓여 있어서 싣고 나온 적이 있었는데 월남에서는 '천하에 쓸모 없는 물건‘이어서 남몰래 숲 속에다 버리느라고 애만 먹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언젠가 인근 지역을 지나다 보니 돼지우리 앞에 타이어를 서로 묶어서 담을 쌓아 놓고 그 속에 돼지를 기르고 있었다.
월남전 당시 흔히 신었던 타이어로 만든 신발
1971년 이후 한 때 월남엔 한국군이 미군보다 더 많이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은 잘 모르지만 내 짧은 생각으로는 한국군이 미군 보다 철수가 늦었던 것은 아마도 돈이 필요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어려운 국가의 처지에서는 월남에 하루라도 더 있는 것이 돈을 버는 셈인 것이었다. 실제로 73년 3월에 철수 하는데 72년 9월까지 새로운 병력이 충원되었다.
1973년 1월 27일 자정(현지시간 1월 28일 08시)을 기해 휴전이 공표되었다.
전쟁터에서는 후퇴 할 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이 상식을 무시했다가 피해를 보는 일이 월남전에서도 역시 벌어졌었다. 1맹호사단에서는 19 번 도로 안케 패스 전투의 치욕을 들 수 있고, 백마사단은 1번 도로 붕로만 사고를 빼놓을 수 없다.
붕로만 고개에 대한 경계책임은 제29연대 제1대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휴전을 하루 앞둔 1973년 1 월 27일 밤 23시경 붕로만 고개의 목교가 베트콩에 의해 폭파되고 베트콩기가 초소에 걸렸다. 베트콩은 '현상 동결의 휴전협정'에 따라 그들의 지배지역을 증명하기 위하여 베트콩기를 휴전 전날 밤 전국적으로 게양하라는 월맹의 비밀지령에 의해 휴전 발효와 함께 베트콩기를 게양한 것이다.
사단장과 연대장의 질책을 받은 제1대대장 유재문 중령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날이 밝아지자 자신이 직접 현장 상황을 확인하기 위하여 3중대에서 1개 분대를 차출하여 함께 장갑차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 도착시간은 휴전 발효 불과 1시간 5분을 남겨놓은 06시 55분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대대장 일행은 베트콩을 우습게 알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장갑차에서 내려서 "웃기는 놈들..." 하고 코웃음을 치며 교량에 다가갔다. 맨 앞에서 심재철 중사가 문제의 베트콩기를 뽑아가지고 장갑차로 돌아가려고 할 때 부근에 잠복하고 있던 베트콩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며 B-30적탄통을 발사했다. 순식간에 대대장 유재문 중령과 심재철 중사 등 6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6명이 부상했다.
배원식 연대장은 보고를 받고 사태의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 일대에 포병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베트콩은 암석지대의 천연동굴에 몸을 숨겨 아군의 포병화력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제 연대가 당면한 문제는 적의 제압이 아니라 숨진 시체의 회수에 있었다. 특공조까지 투입하며 시체 회수 작전에 돌입했으나 적의 저항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이세호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소탕작전을 명령했지만 막상 저녁 무렵 작전을 개시하고자 하는 시점에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사연은 이세호 사령관이 흥분해서 휴전이 발효된 것을 깜박 잊고 있고 작전을 승인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휴전이 발효된 것을 깨닫고 취소시킨 것이다. 한 마디로 최고 사령관부터 일선 지휘관까지 갈팡지팡이었다.
연대장은 닌호와 군청에 파견했던 연락장교 이형관 대위에게 확성기가 달린 장갑차를 빌려오도록 하여 백기를 달고 현장에 보냈다. 그리고 확성기를 통해 적측에 방송을 했다.
"우리는 휴전협정을 지켜 공격하지 않겠다.
그러나 우리는 숨진 장병의 시체를 찾아야 되고 그래야만 철수를 할 수 있다.
시체를 돌려 달라."
고 애걸복걸하였다. 아마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저자세로 베트콩에게 사정사정한 예는 이 경우가 유일할 것이다. 이렇게 확성기를 통해 2일간에 걸쳐 그들을 설득시켜 겨우 시체를 회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굴욕적인 과정을 겪어가며 백마 사단 제29연대는 1번 도로를 사용하지 못하고 미군 수송기를 이용하여 도망치듯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제29연대는 2월 3일부터 6일 사이에 3.900명의 병력을 39회, 화물 3,080톤을 77회 C-130송기로 나르며 냐짱 공항을 통해 철수를 완료하였다.
나중에 영현을 수습할 때 대대장의 손목에 있어야할 롤렉스 손목시계가 대대장을 경호해야할 중사의 손목에 있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마 전사한 중사는 자기가 전사할 줄 모르고 대대장보다는 명품을 사수(?)해야 할 사명감을 더욱 강하게 느꼈던 같다.
당연히 한국은 미군이 제공했던 장비를 최대한 보유한 상태에서 철군을 원했지만 미국의 계획은 남베트남에게 이양하려는 것이었다. 미국이 한국군에게 제공했던 장비의 소유권과 철수비용, 국내에서의 운용방안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군은 71년 12월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1973년 2월 6일 십자성 부대 산하 수송부대는 물건 하나도 베트콩에게 넘어 가지 못하도록 땅에 묻을 것은 묻고, 태울 것은 태우라는 지시와 함께 모든 차량의 부속품을 신품으로 갈아서 완전히 새 차를 만들어서 고국으로 보냈다. 정 병장은 철수 차량 대열의 마지막 후미 5 톤 견인 트럭을 탔다. 냐짱으로 향하는 다리를 이미 베트콩이 파괴를 하는 바람에 월남군이 엉성하게 설치한 부교 위를 차량이 한 대씩 조심해서 건너갔다. 마지막으로 견인트럭이 통과하려고 하자 월남군 공병 장교가 다가오더니 견인차가 지나가면 다리가 무너질 우려가 있으니 자기들이 제공하는 지프차를 타고 견인차는 놓고 가라고 했다. 이미 선두의 모든 차량들은 다리를 건너가 버렸고 무전기도 없어서 누구에게 보고를 하거나 지시를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월맹군 장교의 말대로 견인차를 두고 가거나 끌고 가거나 독자적으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때 운전병이 정 병장에게 "야! 공포 쏴!"라고 해서 M16으로 월남군 장교의 발밑에 발사를 하자 월남군 장교가 놀라서 뒤로 물러선 틈에 전진을 해서 월남군 장교의 말대로 금방이라도 걸고 부서질 듯 흔들거리는 다리를 숨도 못 쉬고 건너서 무사히 견인차를 한국으로 가져 올 수 있었다. 견인차를 탐내는 월남군의 속셈을 알고 있으면서 자기들의 안전만을 위해서 지프차로 갈아 탈 수는 없는 일이고 차 한 대라도 고국으로 가져가려는 마음에 생명을 걸고 감행한 것이었다. 정 병장 일행뿐만 아니라 당시 파월 장병 모두는 가난한 나라 살림 때문에 이렇게 해야만 했었다.
월남에서 철수 할 때 우리는 가난한 나라 군대답게 가지고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간다는 원칙으로 짐을 꾸렸다. 심지어는 베갯속은 버리고 베갯잇까지, 깔판으로 쓴다고 탄약상자를 분해해서 챙길 정도였다.
귀국박스쌀때 저런식으로 비닐을 넣어 방수처리를 했다고.
50 년 전 한국군에게 월남전은 새로운 세계였다. 한국보다 더 가난하고 후진적인 월남과 물자가 풍부하고 선진적인 미국 사이에서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많았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월남에는 적과 동지가 있었고, 한국군의 물주인 미국한테는 감시와 후원을 받아야 했다. 월남과 미국 사이에서 비록 병력 5만 정도의 군단 수준이었지만 넓고 큰 세계가 있어서 사령관이라고 해도 전체를 알 수 없고,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이 아니면 전혀 알 수가 없는 일들이 무수하게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참전의 경험이 있는 이들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해도 서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할 정도로 놀랄만한 일들이 많았던 것이다. 전반적으로 한국군으로서는 믿을 수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는 월남과의 사이에서 보다는 미국과의 사이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80 년대 젊은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던 <전환시대의 논리>의 저자 이영희 교수는 최초로 월남전에 관한 흑과 백의 이분법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비로소 베트남전을 '이성의 눈'으로 살펴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정권에 의해 금서가 된 이 책에서는 베트남전 개입은 공식적으로는 월남 정부의 요청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먼저 미국에 ‘월남전 카드’ 를 제시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민주주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소장은 쿠데타 승인을 받기 위해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해서 미국에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먼저 밝혔다. 그러나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전면 철수, 두 가지 방안을 놓고 고민하는 중이었던 케네디는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결국 케네디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댈러스에서 암살되고 만다.
그러나 후임 존슨 정부는 1964년 봄부터 베트남 전쟁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최대 54만 명까지 병력을 늘리는 한계에 도달하자 한국 등 25개 우방국에게 베트남 파병을 요청했다. 여기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나라는 한국과 태국, 호주, 필리핀, 뉴질랜드에 불과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적극적으로 한국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1965년 5월 16일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어 다시 미국을 방문 하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사정이 달라졌다.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수행원들은 존슨 미국 대통령이 보낸 대통령 전용기 보잉 707에 몸을 실었다. 그 당시 가난한 한국은 대통령 전용기가 없었지만, 미국 대통령이 자기가 타고 다니는 전용기를 이 작은 나라에 보낸 것은 매우 드문 사례였다. 그만큼 당시 베트남 전쟁이라는 개펄에 빠진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다음날 워싱톤에 도착한 박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영접한 존슨 대통령은 큰 리무진에 동승해 영빈관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13만 명의 시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앞차에는 양국 정상이, 뒤차에는 양국 영부인이 타고 21대의 모터사이클이 선도하는 행렬이었다. 이날 오후 5시 백악관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열렸다.
이틀 후 뉴욕에 도착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시내로 들어가면서 또다시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번화가인 브로드웨이를 지나가는 동안 고층 건물에서 오색종이들이 눈처럼 쏟아졌다. 한국 대통령에 대한 이 같은 융숭한 대접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해외나들이 매니아이신 따님 생각이 절로 난다능...
그러나 월남은 힘을 가진 놈들끼리 서로 정권을 강탈하는 곳이었다. 대통령부터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도둑놈 투성이었기 때문에 그 탓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죄 없는 민중들뿐이었다.
미국은 월남전을 핑계로 군수산업이라도 일으켰지만,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어 아쉬울 일이 없는 한국군이 하는 일은 도둑질뿐이었다. 군대 안에서 상납을 하는 풍토가 고질화된 것도 월남전 참전 이후부터라고 하니 월남전이 한국군을 얼마나 병들게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내가 겪은 것처럼 때가 되면 일등병이 상병으로 자동적으로 진급이 되는 것 -월급은 어차피 미군이 주는 것인데도- 에서도 진급한 첫 달 월급은 사병계에 상납을 해야 되는 판이니 다른 일을 말해 무엇을 하겠는가?
잘못된 전쟁답게 전투에서 죽는 사람은 죽고, 조금이라도 힘을 이용하여 08 (헌병 주특기가 80으로 시작되는 것에서 연유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다는 군대 은어, 즉 헌병은 '도둑'이라는 의미) 을 쳤다. 국가는 국가대로 미국을 상대로 08을 쳐서 막대한 군사 장비를 한국으로 빼돌렸다.
장교 사병할 것 없이 돈을 만질 일이 전혀 없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전투원들을 빼놓고는 조그마한 특권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최대한대로 이용해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긁거나 뜯어서 한 살림 장만하기에 급급했다. 차만큼 흔해빠진 헬리콥터 한 번 타보지 못하고 주야로 높은 사람들의 구두나 닦고, 아침이면 치약까지 짜서 바치며 입맛 없는 장교를 위하여 땀을 흘리며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고 팬티까지 다림질을 해서 줄을 세우던 딱까리 (당번병) 들의 머릿속에도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 갈까?" 하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투원들은 귀국할 때가 되어서야 겨우 본국의 은행에 송금한 몇 백 달러짜리 저금통장을 손에 쥐거나, 눈치껏 모은 일본제 전자제품 몇 점을 베니어로 짠 귀국 상자에 넣어서 배에 싣고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철수 병력인 우리들은 더블백만 짊어지고 돌아왔다.
월남에서 물자와 함께 들어온 것이 바로 ‘짜웅’ 문화이다.
베트남에서는, 할아버지나 손윗사람인 남자에게 인사를 할 때, Chao (안녕하세요) ong (할아버지) 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 ‘짜오 옹’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이것이 한국인에게 좀 더 발음하기 편한 한국화(?)된 베트남어로 변해서 ‘짜웅’이 된 것이다.
미군은 막대한 예산을 써가면서 대민 사업을 진행하였지만 소수 부정부패한 권력층에게만 혜택이 집중적으로 돌아갔다. 한국군도 대민사업을 했지만 가난한 사정을 알기에 주로 초등학교 설립, 교량/배수구 공사, 도로건설, 의료사업 등 주로 지역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유익이 가는 것으로 위주로 대민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아무렇게 해도 이러한 대민사업에서 '떨어지는' 각종 콩고물(?)을 챙겨보고자, 몇몇 베트남 관료나 지방 유지들은 끊임없이 한국군 요새를 드나들었다. 콩고물을 챙겨먹기 위해서라도 이들 베트남 인들은 한국군에게 무조건 잘 보일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요새에 드나드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한국 병사들에게 나이와 계급을 불문하고 계속 "Chao ong!"이라는 인사를 던졌다.
대민사업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담당자에게라면 그렇다 치더라도, 나이 지긋한 아버지뻘 되는 베트남 사람이 20대 초반 한국 병사들에게 굽실거리며 인사를 하고 기분을 맞추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좋게 보이지만은 않아서 병사들은 "저 쌔기 또 짜웅하러 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각종 아첨, 부패, 비리, 뇌물의 상징어인 '짜웅'이란 말은 월남에서 돈을 만지다 돌아온 한국 군대에 급속하게 퍼진 부패와 함께 '공용어(?)'로 확산이 된 것이다.
미군과 한국군의 아사무리한 관계
모든 전쟁에서와 같이 월남전에서도 처음에는 무공훈장은 적 사살자의 수를 기준으로 삼았었다. 그랬더니 베트콩으로 확인되지 않은 양민의 희생이 늘어났다. 이러한 부작용이 심해지자 훈장 수여 기준에 무기의 노획 수를 적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군수품을 팔아 그 돈으로 월남군이나 민병대로부터 소총 등 각종무기를 구입해서 노획무기라고 전투상황을 꾸며 보고하는 또 다른 병폐가 생겨났다. 전쟁터에서 지휘관들의 공명심에 사로잡힌 지나친 경쟁이 가져온 허위전과보고는 사령부를 골치 아프게 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골치가 아픈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한국군이 전사했을 경우이다. 전공에 따른 훈장이야 한국 정부가 주는 것이지만 한국군이 전사하면 보상은 미국에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돈으로 싸우는 기묘한 전쟁에서는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72년 4월에 벌어진 악명 높은 안캐패스 전투는 과거와 달리 월맹 정규군과의 전투였기 때문에 포격을 당하여 아군의 피해가 심했다. 이전의 전투처럼 총알이나 적이 설치한 지뢰 때문에 전사를 해도 비교적 신체가 온전히 보존된 채로 전사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이 조각이 나서 전사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한국군이 전사자 숫자를 부풀릴 우려가 있다고 보고 훼손 되지 않은 시신을 요구했다. 그 결과 지옥 같은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전우들이 전사자들의 시신을 조립하기 위해서 멀리 날아 가버린 팔 다리, 목을 찾을 수가 없어서 주변에 흩어져 있던 월남군의 시신을 야전삽으로 찍어서 숫자를 맞추는 곱빼기 지옥의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었다. 생사가 갈리는 것 이상 의미가 있을 수 없는 것이 전쟁터이지만 한국군의 월남전은 훈장과 전상보상금이 걸린 이상한 전쟁이었다.
1970년 주 월남미군사령부가 돌연 군표개혁, 즉 군대 내에서 화폐개혁을 단행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로 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군표가 미군이 한국군에게 할당한 군표의 액수보다 엄청나게 많은 액수를 보유했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기업과 기술자들이 보유한 군표액수도 엄청났고 또한 미 군표를 이용하여 미국 본토 달러와 교환하는 돈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꽤 되었으니 그 액수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연히 우리정부의 지시는 어떻게 해서든지 미군과 협상하여 군은 물론 민간인이 가지고 있는 군표까지도 전액을 교환하라는 것이었다. 주월사령부 부사령관이 협상대표로 나서서 앞으로 한국군은 미 군표를 사용할 때 주 월남한국군이 발행하는 쿠폰을 같이 사용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한국인이 보유한 막대한 미 군표를 전액 교환하여 휴지조각이 될 번한 한국인의 돈을 살려내는데 성공하였다.
주 월남미군사령부로부터 퀴논지역에서 담배가 가득히 적재되어 있는 미군 PX 대형 컨테이너 1대가 실종되었는데 컨테이너가 한국군 부대의 영내로 들어갔으니 조사하여 주기를 바란다는 요청이 정식으로 들어왔다. 우리 사령부에서 현지부대에 나가 조사할 때는 이미 컨테이너 자체를 통째로 땅에 파묻어버린 후였다. 이 사건은 고급지휘관까지 인지된 사건이었기에 사령부의 입장에서는 문책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 미군 측에는 사실무근이라고 통보한 것은 물론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972년 여름의 어느 날 주 월남미군 항만사령부는 귀국 Box를 실고 퀴논 항을 출항하여 항해중인 수송선을 돌연 귀항시켰다. 그 이유는 수송화물의 적재 착오로 재점검을 실시하기 위해서라는 핑계였다. 그리고 한국군의 귀국 Box를 다시 하역하면서 기중기로 Box를 들어 옮기다가 실수인 것처럼 3개를 떨어트리자 Box가 깨지며 물건들을 쏟아졌는데 특히 탄피들이 우루루 쏟아졌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미군측은 한국군이 주 월남한국군에게 지급한 미군의 최신무기와 장비를 귀국 Box속에 담아서 한국으로 운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공작이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미군은 한국군을 어떻게 평가했던가?
스탠리 로버트, 제임스 라우톤 콜린스 공저의 <베트남 참전 동맹국(Allied Participation in Vietnam)>에서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여러 동맹국의 참전배경 및 주요 전투성과를 설명하고 있다.
참전 초반에는 한국군 지휘부가 지나치게 신중하게 준비하는 모습에 미군 수뇌부는 '한국군이 적극성이 결여되어 있고 사상자를 내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오해를 하였으나 1966년 1월 '플라잉 타이거'작전에서 11명의 한국군이 192명의 베트콩을 사살한 전과를 보자 단숨에 뒤집어졌다. 그러나 초반의 이런 긍정적인 평가와 달리 파병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미군의 평가가 점차적으로 나빠졌다.
70년부터 71년까지 제1야전군 사령관이었던 콜린 중장은
"한국군은 헬기를 비롯한 각종 지원을 과도하게 요구하고 있으며
한 번의 작전 종결 후 다음 작전까지 너무 소극적이다."
"한국군 2개 사단의 성과는 미군 1개 여단정도에 불과하다."
"이전과 달리 한국군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자
오히려 소극적이 되었으며 덜 주는 쪽이 오히려 더 낫다."
라고 혹평했다.
콜린의 후임인 브라운 중장 역시
"한국군은 융통성과 창의성이 없으며 자기 책임구역에 대해서만 치중하고 있다."
"한국군은 자기 책임구역에 대해서는
베트콩에 대해서 매우 훌륭한 성과를 냈고 안전을 확보했으나
남베트남군과의 협력이나 지역 주민과의 관계에서는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고 평가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군을 필요로 할 때에는 매우 효율적인 군대라고 높이 추어올리다 한국군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여야 할 필요가 생길 때에는 한국군이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평가했다.
남의 나라 신세지는 한국 참전군인
지난 2010년부터 미국에 살고 있는 참전 전우들이 '월남참전 한국군 공로 결의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켜자며 행동에 나섰다. 그 결과 '한인 베트남 참전용사들은 미국 군인들과 동등하게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이들의 희생을 기려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이 워싱톤주를 시작으로 괌, 하와이, 뉴저지, 버지니아, 메릴랜드, 오리건.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에서 통과되어 드디어 2013년 7월 연방의회에 상정되었다. 비록 결의안이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인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공로를 연방의회 차원에서 최초로 공식 발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아무런 실익도 없는 이 결의안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월남전에서의 한국군의 역할'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의 군인들이 미국의 우방으로 참전했다는 사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그들은 월남전을 미국인들이 월남에서 월맹공산군과 싸운 전쟁으로 이해한다. 미국인이 말하는 월남전의 사상자는 월남에서 죽은 58,000여명의 미국인 남자와 여자들이다. 어쩌다 한 번씩 이야기되는 그룹은 그 전쟁에서 죽은 수십만 명의 월남인들이다. 미국인에게는 5,099명이나 전사한 한국인들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안정효의 소설 <하얀 전쟁>에서는 국적이 어디인가에 따라 생시에나 사후에나 다르게 대접받았음을 보여준다. 미군이 죽으면 그들의 시체는 깁거나, 얼려서 관에 넣어 성조기로 감싸 본국으로 보내고, 한국군의 시체는 단순히 화장하거나 묻는 것에 반해, 월남인의 시체는 땅에 묻지도 않고 들판에 던져졌음을 알 수 있다. 즉 미국인, 한국인, 월남인은 종종 일등, 이등, 삼등 시민으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존슨 행정부에게 ROK(the Republic of Korea 대한민국) 병사를 고용하는 것은 미국의 '피와 재화의 상당량'을 절약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미군병사 한 명을 파월할 때마다 일년에 13,000달러를 써야했지만 한국군으로 대신할 경우에는 1인당 5,000~7,800달러만 지불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 같이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호주는 어떠했을까?
호주에서는 고맙게도 '연합군 연금'이라는 것이 있어서 호주가 참전한 전쟁에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국가의 군인이 이민을 오면 호주의 재향군인과 똑같이 대우해서 연금을 지급한다. 그것도 인심 좋게 부인까지 함께. 따라서 호주가 참전했던 한국전과 월남전(호주인 521명의 전사, 약 3천명 부상)에 참가한 한국인들도 해당이 되는 것이다. 얼마나 받느냐고? 자세한 것은 호주의 국가안보에 관한 사항(?)이기에 밝히기 곤란하나 '너만 알고있어' 식으로 밝히자면 모든 저소득 노인이 65세부터 받는 연금과 같은 액수의 금액을 60세부터 받을 수 있다. 덕분에 젊은 시절 월남에서 피 한 방울 흘려 보지 않고 대신 땀 몇 방울 흘린 것 밖에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멋모르고 호주로 온 덕에 호강하게 된 것이다. 젊은 시절 고생해서 돈은 한국에다 벌어주고 늙어서 혜택은 호주에서 받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호주의 국군의 날이라고 할 수 있는 'Anzac Day' 행사에는 반드시 참여한다. 최소한 밥값은 하기 위해서.
행사에 참석한 호주, 한국군의 6.25, 월남전 참전군인들
부천에 살 때 내 팔자가 젊어서는 고생을 해도 늙어서는 좀 편해질 거라고 했던 우리 집 옆집의 무면허 무당 아줌마의 영력이 국제적으로 미치는 줄은 정말 몰랐다. 하여간에 나로서는 젊어서 월남전에 참전하지 않았으면 큰 일 날 뻔 했고 호주에 오지 않았어도 역시 큰일 날 뻔한 셈이다.
우선 호주는 200 여년의 짧은 역사 동안에 자기 나라 일로는 한 번도 전쟁을 해 본 적이 없다. 제2차 대전 때 일본이 호주 북쪽 끝에 있는 다윈이라는 시골 동네에 연습 삼아 폭격을 한 번 하기는 했지만. 호주 사람들은 일본의 잠수함이 시드니 항까지 침입한 것을 보고 기겁을 해서 항 입구의 남쪽에서 북쪽까지 약 4 Km에 이르는 지역에 쇠로 된 그물을 쳤단다. 전쟁은 참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하게 만든다. 갑자기 박통 때 서울근교 북쪽 전체에 인민군 탱크 못 들어오게 한다고 논바닥에 흉물스럽게 철근 콘크리트 장애물 설치해 놓은 것이 생각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는 하나의 국가로 독립한 1901년 이후 지구상에서 벌어진 거의 모든 전쟁에 빠지지 않고 꼽사리를 꼈다. 세계에서 제일 전쟁을 많이 한 나라이자 맹주이기도 한 영국의 영향권에 있기 때문에 부득이한 점이 없진 않겠지만 자기 나라에서 전쟁 할 일이 없으니 훈련을 하기 위해서라도 그러는 것 같다. 밤낮으로 침략만 당하고 살던 우리 입장에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사실 군대가 실지 전투를 치르는 것보다 더 좋은 훈련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호주는 군대에 갔다 온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 만큼 대우를 해준다. 특히 전쟁에 참가한 것은.
제1차 대전 때 터키군과 싸울 때는 터키의 갈리폴리라는 해안에 상륙작전을 하다가 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 10,000 명 정도가 사망했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그 날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서 AUSTRALIA와 NEWZEALAND의 머리글자를 따서 우리로 말하면 '충무공 정신' 정도 되는 ‘ANZAC 정신’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다.
자기 나라도 아닌 남의 나라 전투에 차출되어가서 이긴 것도 아니고 몰살 당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가 짧은 나라라서 내세울 정신적 가치가 없다보니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해 줘야지 어떻게 하겠나? 여기에는 자기들이 유럽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정신적 유대감이 크게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Anzac Day'의 행진은 현역 군인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퇴역 군인들이 가슴에 훈장과 기장을 주렁주렁 달고 늙은 몸을 이끌고 참여한다. 수만 명의 늙은 군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혹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대열을 이루어 행진을 하는 것은 관광객들에게도 큰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보통 아침 9시부터 오후1시까지 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 행진이 벌어지는데 실제 개인의 행진 시간은 30분 정도 밖에 안 된다. 즉, 부대 마다 정해진 시내 집결 장소에 군데군데 모여 있다가 짜인 시간표에 따라 출발지점으로 와서 행진을 하고서 해산지점에서 자연스럽게 해산을 하는 것이다.
퇴역 참전용사들이 각기 자기가 참전 했던 전투의 부대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 하는 것을 보면 마치 현대사를 주제로 한 영화를 보는 것 같다. TV는 오전 내내 행진을 생중계하고 도로 연변에서는 시민들이 환호를 보낸다.
최연소자가 60대 후반의 나이인 파월 한국군 참전부대는 그래도 그 중에 영계에 속하는 편이다. 호주인들은 대강 줄만 맞추어서 발은 맞추지도 않고 완전 자유민주주의식으로 행진을 하지만 오랜 동안 군사독재 시절을 겪은 한국인들은 줄은 물론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발까지 맞추어보려고 애를 많이 쓴다.
원래 국가의 통제가 강한 나라일수록 군인들의 행진이 절도 있는 법이다. 호주 영감들에 비해서 그래도 비교적 싱싱한 한국인들이 보무당당하게 행진을 하는 것을 보고 연도(沿道)의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북쪽에 계신 이분들 만큼 각 잡힌 것 아니겠지만서도.
2006년, 시드니에 있는 월남참전 전우회원들은 오랜 숙원 사업, 즉 옛 상관이자 전 주월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을 'Anzac Day' 행사에 초청하기로 했다. 나는 이 기회를 계기로 영화 쪽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의 도움을 받아 <노병들의 재회>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기획했다.
월남전 종전 후 월남에서 일하던 기술자들과 현지에서 제대를 해서 일을 하던 한국인 150 여명이 호주로 왔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월남전 종전 후 공산정권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경험도 있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안되어 나라가 경제적으로 불안한 때였기에 호주를 택한 이들은 낮선 땅에 도착해서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들 대부분은 정식으로 영주권을 받아서 이민 생활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여행 비자로 호주 생활을 시작했다. 대부분이 미혼이었던 그들은 그 후 고국에서 여자들을 데려와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은 키워서 오늘날 한인사회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이미 월남에서 월남 여자들과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룬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여정은 특히 험난했다. 왜냐하면 당시 월남인들은 보트가 아니고서는 월남을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트 피플
이렇게 호주로 온 노병들이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살면서, 전쟁 참여 시기와 관계없이 모두의 상관이었던 노장군을 초청해서 만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 영화에서 한국계 호주인 2세, 3세들에게 아버지로서, 할아버지로서, 그리고 이웃으로서 그들이 전쟁터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호주에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영화는 행사 2 주 전에 한국에서 먼저 채 장군과 인터뷰를 끝내고, 채 장군 일행이 인천 공항에서 출발하는 모습과 시드니 공항에서 환영 나온 전우들에게 경례를 받는 감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하려 했다. 아들에게 시드니 공항 출구를 나올 때엔 밖에서 촬영 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중구난방으로 나오지 말고 채 장군을 선두로 해서 질서 있게 나오도록 주문을 해놓았다. 촬영을 위해 군대도 갔다 오지 않은 아들에게 채 장군 일행의 군기를 단단히 잡으라고(?)를 강력하게 당부를 했는데 불행히도 채 장군이 출국 직전에 갑작스럽게 복막염 수술을 하게 되어 오지 못하는 바람에 월남전에 참전했던 다른 예비역 장성 몇 명이 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행사에서 너무도 한국스러운 관경이 연출되었다. 행사 중에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지만 호주 예비역 장성들은 묵묵히 비를 맞고 있는데 한국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제히 거의 무의식적으로 우산을 꺼내서 예비역 장군들을 가려주었다. 나는 그 모습이 호주인들 눈에 얼마나 이상하게 비쳐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전역을 하면 평범한 민주시민으로 돌아오는데 한국인들은 결코 민주적인 사고방식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 같다.
MB의 우산 굴욕, 지못미...
갑작스러운 신병으로 오지 못한 채 장군은 다음 해에 호주에 오게 되었고 드디어 한국과 호주의 베트남 참전 용사 친선모임에서 자랑스럽게 채 장군을 호주 예비역들과 내외 귀빈들에게 소개할 수 있었다. 소개를 받은 채 사령관이 강단에 섰을 때 나는 전우들에게 이렇게 주문했다.
“경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집총 시에는 '받들어 총!' 맨손 일 때는 '거수 경례!'
비록 지금 우리들 손에는 총이 없지만
40년 전 월남 전장에서 ‘받들어 총!’을 하던 마음으로 경례를 하겠습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영원한 사령관으로 남아 있는
채명신 장군께 우리 생애 마지막 경례를 드리겠습니다.
절도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전우회 회장의 우렁찬 "사령관님께 경례!"구령에 이어 시드니 필하모니 단원인 군악대 출신 맹종섭 전우가 이날 행사를 위해서 특별히 영국 왕실에서 쓰는 곡으로 편곡을 해서 평소 보다 길게 부는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 경례를 주고받는 전우들과 사령관의 마음에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감정이 교차했다.
경례를 하고 있는 몇 분 동안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터로 가려고 했던 것, 살아 돌아온 것, 지금은 조국을 등지고 이국땅에서 고독과 서러움을 숨기며 나이를 먹어가는 입장에서 옛 사령관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면서 경례를 하는 마음을 누가 이해 할 수 있겠는가? 몇몇 전우들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 순간은 내 생애 몇 번 되지 않는 감동의 순간으로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마음속에서 감동이 밀려온다. 그날 행사에서 한국 전우들이 기립하는 바람에 분위기에 휩쓸려 영문도 모르고 함께 일어선 호주 전우들과 내빈들은 이런 기분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채 장군은 2013년 11월에 사망하여 유언대로 동작동 현충원에 장군 묘역이 아닌 사병 묘역에 묻혔다.
이야기가 옆으로 잠깐 새는 감이 있지만 노무현이 왜 병장이 아니고 상병 제대를 했는지 아는가? 아니 월남전과 관계가 있으니 전혀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당시에는 월남에서 돌아오면 무조건 병장이었기 때문에 병장이 너무 많아져서 할 수 없이 TO를 맞추기 위해 병장 진급을 못하고 상병만기제대를 하기도 했다. 군 생활도 시절을 잘못 만나 3년 6개월을 꼬박 근무를 하고도 상병으로 제대한 노무현이 월남을 갔다 오고도 상병으로 제대한 나를 여러 번 울렸다. 노무현 때문에 마지막으로 운 것은 딴지들도 다 마찬가지겠으나 첫 번째 운 것은 다를 것이다.
시드니에서 택시 운전을 하던 내게 2002년 12월 19일 밤은 특별한 날이었다. 밤 10시 쯤 BBC 방송의 뉴스에서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이 되었다는 뉴스가 간단하게 흘러 나왔다. 순간 '욱'하고 속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더니 다음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눈물 때문에 운전을 할 수가 없어서 손님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차를 세웠다.
안경을 낀 상태였기 때문에 운전하면서는 눈물을 닦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년의 남자 손님은 이런 내 모습에 놀라 근심스럽게 "왜 그러느냐?" 고 물었다. "한국에서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이 되어서 기뻐서 그런다" 고 했더니 "그 사람이 내 친구냐?" 고 물었다. "아니" 라고 했더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나를 미친놈으로 생각하고 불안해할까 나는 신통치 못한 영어로 주섬주섬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외국인들에게 전혀 심각해 보이지 않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내 개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재야 운동이라고 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 한국에서 레지스탕스 같은 일을 하던 사람인데 한국에서 청춘을 받쳐 온갖 고생을 했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이민을 왔으나 내가 못 얻은 것을 노무현 씨가 모두 이루었기 때문에 감격했다고 말했다.
아마 그날 그는 집에 돌아가서 "오늘 정말 미친 놈 보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우는 놈 보았다."고 했을 것이다.
7년이 지난 후 나는 노무현 대통령 시드니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했고
추도사 모습
8년 후에는 봉하 마을의 부엉이 바위에 올라서 아내와 둘이서 손을 잡고 눈물을 삼키며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눈물 나는 전우애
이야기가 너무 비장하게 흘렀으니 명랑하게 가보자.
택시 운전을 할 때 한 번은 늙수그레한 신사가 탔길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당신도 Anzac Day 행진에 참여하겠구나." 하니까 자기는 한 번도 참여해 본적이 없단다. 왜 그랬냐니까 소대장으로 참전 했는데 자기 소대에서 6명이 죽었단다. 그는 철저한 반전인사가 되어 모든 것이 재향군인회 중심으로 짜여 있는 호주사회를 완전히 등지고 살고 있었다. 역시 호주 사회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황석영의 소설 제목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다.
또 한 번은 어떤 영감이 술에 취해서 택시에 올라탔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는 질문에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자기 아버지가 한국전에 참전했었다고 자랑을 하길래 예의상 고맙다고 했다. 그랬더니 신이 나서 직업군인이었던 자기 아버지가 참전한 전쟁을 줄줄이 사탕으로 늘어놓았다.
술 먹고 웅얼웅얼 거리는 소리에 운전에 집중하느라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저 "응. 응" 하고 형식적으로 적당히 대꾸를 하는데 자기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직업군인이 되어 1966년도에 월남에 갔다 왔단다. 그래서 나도 월남에 갔다 왔다고 했더니 무척 반가워했다.
재호 월남참전전우회에서 월남 참전 호주 전우들을 초청해서 대형 파티를 한 일이 있어서 그 파티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도 그 파티에 참석했단다. 그날 행사에서 내가 사회를 보았다고 했더니 "아 그랬냐? 너 참 사회 재미있게 보더라."면서 반색을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행선지를 바꾸더니 이상한 곳으로 가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좀 수상한 곳에 세우라고 하더니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다. 내가 못 알아듣겠다고 하니까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친절하게 다시 설명을 되풀이 해주는데도 뭔 소리를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없었지만 은근하게 이야기하는 폼을 보니 '여기가 여자들이 있는 집인데 들어가서 같이 놀다가 끝나고 자기를 집으로 데려다 달라.'는 뜻이었다. 갑자기 전우애가 흘러넘쳐서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 된 것이다.
그가 매춘업소를 지칭하며 내가 알고 있는 ‘brothel'이라는 단어 대신 ’knocking shop'이란 슬랭을 쓰는 바람에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 단어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집에 와서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그 말이 그 말이었다.
눈물나도록 고마웠지만 나는 돈을 벌러 나왔다고 했더니 "걱정마라. 내가 다 변상해 줄 테니." 하는 것이 아닌가? 참, 호주에도 이렇게 기분파가 있다니 확실히 술이란 신비한 것이었다. 세상에! 하나님인들 이렇게 사람을 갑자기 너그럽게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나까지 책임지고, 내가 일 못하는 시간의 임금까지 물어주려면 당신 감당 못 할 거야. "
"아냐, 책임 질 수 있어. 날 믿어!"
그것은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지만 택시운전사가 신성한 승객 수송 임무를 저버리고 업무 중에 딴 짓을 한다는 것은 직업윤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나는 웃으며 "장군님! 잘 놀다 오십쇼."라고 거수 경례를 했다. 그제야 영감은 몹시 서운해 하는 표정으로 택시에서 내려서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진정한 연합군(?)이었던 것이다.
호주의 월남전 참전 예비역에게 그런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건전한 일도 있다. 한 번은 이민자와 서민층이 주로 사는 시드니 변두리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열린 Anzac Day 행사에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원래는 1차 대전 중 터키의 갈리폴리 해변에서 죽은 1 만 명의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을 추모하는 의미의 행사였지만 1. 2차 대전의 생존자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전과 월남전 참전자가 초청을 받아 참석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학생이 700 명이나 되는, 호주 기준으로 큰 학교인 이 학교에서 해마다 진행하는 연례행사는 모두 학생들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계획이나 준비는 모두 교사들이 해 주었겠지만 순서 자체는 교사들의 개입이 전혀 없이 십여 명의 학생들이 순서를 하나씩 맡아 진행했다. 특이하게도 자기 의자를 들고 나올 수 없는 유치원과 1학년 학생들은 텐트천이 깔린 앞자리에 주저앉았고, 2학년 부터는 교실에서 자기 의자를 가지고 나와서 전원이 앉은 상태에서 행사를 진행했다.
인디언(미국 인디언이 아닌)들이 가장 많고 학생들 대부분이 이민자 자녀들인 이 학교 학생들이 100년 전에 죽은 백인들을 추모 한다는 것이 조금은 이상하게 보였지만 학생들에게 국가의 의미를 알려 주기에는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시안 혹은 인디언 피부를 가진 학생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100 년 전 죽은 백인들의 제사를 지내는 모습에서 국가라는 장치의 섬세한 장난을 보는 것 같았다. 통합적인 일체감이 있을 리가 없는, 이민으로 구성된 나라의 어린이들에게 국가관을 심어주는데 늙은 퇴역 군인 만큼 훌륭한 시청각 자료감이 어디있겠는가? 하기야 시청각 자료로서 자극적인 것이 한국의 가스통 부대만 한 것이 있겠는가? 어렸을 적부터 군대를 징그럽게 여기게 만드는 것으로는 그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의 전쟁에 대한 인식이나 정치·사회적 입장은 미국과 한국에서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미국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은 '선한 전쟁'으로 평가되는 반면, 베트남전쟁은 '부당한 전쟁'으로 평가된다. 1975년 갤럽(Gallup)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참전군인의 51%만이 베트남전쟁이 정당한 전쟁이었다고 응답했으며, 49%는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개입이 정당하지 못한 것이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또한 베트남전쟁 당시 이미 '전쟁에 반대하는 베트남 참전군인회(Vietnam Veterans Against the War)'가 결성되었고 현재에도 많은 참전군인 단체가 베트남과의 화해와 반전·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상황은 미국과는 전혀 달라서 참전군인은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전·평화운동과는 거리가 멀고 보수 이데올로기와 강력한 연대를 과시하지 못해 몸살을 앓고 있다. 또한 고엽제 단체는 고엽제 후유증 문제 집회나 시위보다는 베트남 참전을 비판적으로 다룬 매체에 대한 시위와 폭력 행사, 혹은 냉전·안보주의를 표방한 수구·보수단체의 집회나 행사의 행동대원의 모습으로 굳어졌다.
그렇다면 월남전의 보조 선수들이 주전 선수들 보다 더 냉정하지 못하고 열을 내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처음 파병을 할 때는 ‘자유의 십자군’ 어쩌구하는 국민학교 반공 교과서 스토리를 녹음기 틀듯이 들려주었지만 교차 병력이 들어가는 1966년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군은 파월을 독려하기 위해 병사들의 경제적 이익을 강조했다. 부대 내에는 "월남에 가면 월급 얼마 준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고, 가지 않으려는 병사들에게는 막걸리를 사 먹이면서 "월남에 가면 돈 번다."라면서 독려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군 당국에 의해 위로부터 조장된 파월 유인책이 효과를 발휘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베트남에서 무사히 귀환한 파월 군인과 그들이 들려주던 이국의 풍경, 병사 개인의 경제적 필요와 당시 사회적으로 조성되었던 '월남 붐'은 전장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고 있었던 것이다.
1967년을 넘어서 1968년경이 되면, 군에서도 오히려 지원병이 늘어 '대한민국에 공짜가 어디 있어, 월남 갈려면 공짜로 못 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고, 베트남에 가기 위해 상납이 이루어졌을 정도로 '군내의 월남 붐'이 일었다. 전장은 더 이상 사지가 아닌, 아직 해외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의 유일한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다. 당시에는 파월장병이 인기이어서 전국에서 위문품이 쇄도하고, 쏟아지는 위문편지와 펜팔이 장병들을 신나게 했다.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보여주는 '대한뉴스'의 앞머리는 거의 파월장병의 활동에 관한 것들이었다.
군대에 꼭 가고 싶다는 박카스 선전이 떠오르는 상황
그러나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하면서 전쟁의 기억은 잊혀졌고, 그와 더불어 참전군인도 대중에게 사라졌다. 참전군인 단체를 결성하려는 노력은 1966년경부터 있었으나, 이는 소규모의 친목단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집단적인 응집력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런데 1980년 12월 신군부가 재향군인회 산하 38개의 임의단체를 해체하면서 그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월남참전전우회도 해체되었다.
그 자신이 월남 참전자였으나 파월 전우들에게는 평생 도움이 되는 일이 없었던 두환이 형님에 대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9사단장이자 이후 특전사의 2대 사령관이 된 조천성이 사병들은 마실 물도 마땅치 않은데 전두환은 뜨거운 물로 샤워한다고 연대장직에서 해임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를 한 것이 유명하다. 베트남전 파병 이후 복귀한 연대장급 이상은 모두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전두환의 경우는 직속상관인 9사단장 조천성, 그리고 주월사령관 이세호까지 전두환에 대한 훈장 수여에 반대했다는 일화가 있다.
전두환이 연대장으로 부임한 이후에 지나치게 잦은 과시적인 행사, 빈번한 민간인과의 접촉, 작전 지휘권을 참모 이하에게 인수인계, 부족한 전투수행능력에 더해 파티까지 너무 많으니 '이건 뭐 전쟁을 하러간 것이냐 놀러간 것이냐' 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직속상관 2명이 모두 반대했지만, 결국은 훈장을 받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회를 키워야 했던 속사정이기도 하다.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민주화 바람이 불어온 1987년 12월 2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참전군인 350여 명이 모여 '따이한 클럽'의 창립 발기인 대회를 열었으며, 1988년 문화공보부 제415호로 '따이한'이 등록됨으로써 베트남 참전군인 단체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따이한'이 창립하자 대한해외참전전우회 (1991년 10월 창립),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1992년부터 활동, 1997년 12월 사단법인화),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2004년 8월 창립) 등 다수의 베트남 참전군인 단체가 만들어졌다. 각 조직은 조직 목표나 방향의 명확한 차이보다는 조직 대표나 내부의 이해관계 등에 따라 이합집산했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이 단체들은 공통적으로 보수 세력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남이가?' 하는 강력한 동질감을 가지고 있으니 어쩐 일일까? 이들에게 어떤 증세가 있고 그 발병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디벼 보도록 하겠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
군대에서는 병사도 '자원'으로 관리된다. 여기서 병사는 '계급 구분 없이 모든 군인'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사 문서에는 인원을 '파견' 또는 '충원' 한다고 하지 않고 '보충' 한다고 적는다. 군대란 어느 나라나 다 그런 거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공군에서는 전사(戰死) 대신 전출(轉出)이라는 말을 썼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유머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갔다'는 종교적 의미였다고 한다.
월남전 당시 '영현(英顯) 중대' 라는 부대가 있었다. 전사자를 처리(?)해서 전사자의 유해가 고국으로 안치되기까지 봉안 업무를 맡은 부대이다. 영현중대는 나짱에 있는 주월 한국군의 군수부대인 십자성부대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십자성부대에서 근무하던 전우들에 의하면 맨살 드러낸 황토 흙바닥에 음침한 건물이 서 있었고 높이 솟은 굴뚝에서는 가끔씩 검은 연기가 뿜어 나오곤 했다고 한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도, 우기철이 되어 살갗이 아프도록 내리꽂는 빗줄기 속에서도 주검을 한 줌의 재로 만들기 위해 헬기들이 분주히 오르내렸다고 한다
미군 유해보관소의 냉동/냉장 시설은 지금의 종합병원 시설보다 더 훌륭했다. 미군들은 전사자의 시신을 깨끗이 원상복구해서 (심지어 이발까지 시켜) 방부처리하여 알루미늄관에 넣고 성조기로 관을 덮은 후 본국 알링톤 국군묘지로 보냈다. 그러나 한국군은 영현중대에서 화장해서 유골함에 넣어 십자성부대 불광사에 얼마간 안치하였다가 사이공(현 호치민시) 탄소누트공항에서 본국으로 향하는 휴가자 비행기에 실어서 오산비행장을 거쳐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영현을 고국으로 봉송하는 일은 전공이 뛰어난 장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예우이며 보상이었다.
전사자들의 유골을 안치하였던 불광사
지금은 사라지고, 월맹군 묘지와 기념탑이 들어섰다고 한다.(편집자 주)
아래는 해병대 사령관 출신 전도봉 장군의 회고록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영현중대에서 화장을 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본국으로 주검 자체를 봉송하는 일도 있었다. 이때는 미군들처럼 영현 위에 태극기를 덮고 정중하게 장병들이 도열하여 거수경례로 그들을 환송했다. 그런데 김포공항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국립묘지에서 환영 나온 장교들의 안내를 받아 곧장 비행기의 화물 하역장으로 갔다. 호송할 헌병들과 영현을 봉송할 차량들이 줄을 서 있었다. 경건하고 정중하게 영현들이 옮겨졌다. 그런데 태극기를 덮은 영현들은 내가 처음 퀴논비행장에서 인계 받은 것 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이상하다. 자꾸만 태극기를 덮은 영혼들이 줄을 이어 옮겨졌다. 나는 묵묵히 지켜봤다. 그리고 동작동 국립묘지 영현안치소로 향했다. 차량들이 헌병의 호송을 받으며 불을 번쩍이며 줄지어 이동해 갔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동작동에 도착한 차량대열은 두 갈래로 나누어져 들어갔다. 태극기를 덮은 것이 모두 영현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안내장교에게 저 쪽 차량에 실은 영현들은 왜 이 곳에 함께 오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몹시 당황해 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다른 짐이라고만 짧게 말하고 자리를 피했다. 나는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되었다.
전우들의 고귀한 죽음을 이용해서 부정한 돈벌이를 하는 일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일들이 사병들이나 영관장교의 힘으로 가능하겠는가? 군 수뇌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해하자! 전쟁통이 아닌가?
신체 처리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파월 당시 전쟁터에서 죽어서라도 효도하는 길로 여겨졌던 보상 문제는 어떻게 되었던가? 전사자에게는 36 개월치 봉급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정상적인 전투가 아니라 사고나 사건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나 불필요한 희생도 발생하는 법이다. 그럴 경우 민간인과 일반 공무원은 보상금도 받고 국가에 대해 손해배상도 따로 청구할 수 있었으나 죽을 가능성이 더 많은 군인, 군무원과 경찰은 할 수 없었다. 바로 '이중보상금지' 제도 때문이다.
'이중배상금지'란 군인, 군무원과 경찰공무원이 직무 중 죽거나 다쳐도 국가에 손해배상을 할 수 없고 법정보상금만 받는 제도이다. 이 제도가 생겨난 원인이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이 제도는 2004년 군인연금법, 경찰연금법 개정 이전까지 존속되었다.
국가배상법
제2조 (배상책임) ①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공무원 또는 공무를 위탁받은 사인(이하 "공무원"이라 한다)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에 따라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을 때에는 이 법에 따라 그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다만,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 또는 향토예비군대원이 전투·훈련 등 직무 집행과 관련하여 전사(戰死)·순직(殉職)하거나 공상(公傷)을 입은 경우에 본인이나 그 유족이 다른 법령에 따라 재해보상금·유족연금·상이연금 등의 보상을 지급받을 수 있을 때에는 이 법 및 「민법」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개정 2009.10.21.>
② 제1항 본문의 경우에 공무원에게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으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그 공무원에게 구상(求償)할 수 있다.
[전문개정 2008.3.14.]
대한민국헌법
제29조 ①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손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이 경우 공무원 자신의 책임은 면제되지 아니한다.
②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 기타 법률이 정하는 자가 전투·훈련등 직무집행과 관련하여 받은 손해에 대하여는 법률이 정하는 보상외에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한 배상은 청구할 수 없다.
1968년 월남전에서 순직한 상이군인의 유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1,2심에서 패소한 피고인 국가는 '현역 군인으로서 직무 수행 중의 순직이었으므로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에 따라 국가에서 배상하는 것 이외에 별도로 민사소송을 낼 수 없다'며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에 대법원은 이중배상금지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렸다.(대판 1971.6.22. 70다1010) 그러나 법관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누구였던가? 박정희 대통령은 7차 개헌 당시 대법관에 대한 재임용을 하지 않고, 위헌 결정이 난 국가배상법을 헌법유보(헌법이 직접 명시적으로 기본권을 제한함_편집자 주) 조치하는 세계 민주주의 헌정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사법 유린극을 벌였다. 이 사건은 1차 사법파동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예 유신헌법 제29조 2항에 이중배상금지를 못 박아버렸다. 그 이전엔 전사 장병 유가족이나 부상 장병들은 법이 정하는 보상금을 받고, 지휘관의 잘못된 지시 등에 대해 국가에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할 수 있었다.
남북한의 군사충돌인 2차 연평해전에서 군인 여러 명이 전사한 일을 계기로 보상금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으나 헌법상 문제로 이중배상금지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다. 정부는 2차 연평해전 전사자 유족들에게 국민성금으로 우회적으로 보상했고 2002년 연금법 개정 법안을 발의하여 2004년 1월에야 통과시켰다. 참여정부는 군인연금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적과의 교전과정에서 전사한 군 장병의 유족들이 최고 2억 원의 사망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연금 대상자인 부사관 이상 간부에 대해서는 보상금을 높였다. 이런 헌법 때문에 연평해전이나 천안함 같이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 아니면 현재도 작전 수행 중 사망할 경우 보상도 제대로 못 받고 그냥 죽고 끝이었다.
2012년 아프간에 파견된 호주 병사 3명이 훈련시키고 있던 아프간 병사의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아프간 정부군으로 위장 취업한 탈레반에 의해서 병영 안에서 사살된 것이다. 희생자들의 부모는 호주 정부를 대상으로 피할 수 있었던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소를 했다. 전투가 아닌 관리 소홀에서 빚어진 사고이기 때문에 보상이 아니라 배상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공영방송 ABC는 이 사건을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도했다. 한국에서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편집부 주
군인연금법과 공무원연금법은 법으로 마련되어있으나 경찰연금법은 없다. 국가공무원법 및 지방공무원법에 의해 경찰이 받는 연금은 공무원연금법의 적용을 받는다. (공무원연금법에서 제외되는 이는 군인과 선거에 의하여 취임하는 공무원이다.)
'이중배상금지'는 대한민국헌법과 국가배상법에 의해 2014년 12월 현재까지도 유지되고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대법원 판결에 의해(당시에는 헌법재판소가 없어서 위헌법률심판을 대법원이 했다) 위헌으로 판결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헌법에 집어넣은 조항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헌법개정을 하면 된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골치 아픈 헌법개정 대신 연금법 개정이라는 손쉬운 방법을 찾았다. 즉, 이중배상금지는 그대로 두되 지급가능한 보상금 액수를 높여버린것이다.
2002년 발의하고 2004년 시행된 군인연금법은 군인의 사망을 '공무로 사망한 경우'와 '공무 외 사유로 사망한 경우'로 나누었다. '공무로 사망한 경우'는 '전사한 경우'와 '전사 외 공무로 사망'으로 세분화했다. 전사는 '국내에서 전사한 경우'와 '외국에서 전사한 경우' 로 구분하였다. 전사자의 경우에는 최고 2억에 상당하는 금액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2002년에 발생한 연평해전은 법 개정 이전에 발생했기 때문에 군에서 일시금으로 지급한 금액은 1인당 약 3천~8천만원, 그리고 국민성금으로 모인 금액을 1인당 약 4억원 가량 지급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법 개정 이후에 발생한 2010년 천안함 침몰사건은 전사자가 간부의 경우 1인당 약 3억 400만~3억 5800만원, 사병은 보상금 2억원을 지급했다고 알려졌다.(출처_세계일보)
단순히 보상금을 얼마 받았냐 만으로 따져버리면 군인들의 고귀한 희생 그 자체는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희생에 대한 예우와 적절한 보상은 분리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위헌으로 판결났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시대의 유령이 여전히 살아남아 지금의 우리들에게 효력을 미친다는 사실만은 꼭 기억하자.
그들은 어떻게 가스통 부대가 되었나?
최근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월남전 참전 피해자 단체인 '고엽제 전우회'가 각종 정치 현안 관련 집회를 주최하며 회원들을 동원한 정황이 내부 공문을 통해 드러났다. 국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고엽제 전우회는 관련법에 따라 정치 활동이 금지돼 있다. 하지만 이들은 '세월호 맞불 홍보', '교육감 직선제 폐지 운동' 등에 수시로 동원되는가 하면 '육영수 여사 40주기 추모식' 등의 행사에도 지시를 받고 참석했다. 고엽제 전우회 서울 지부는 또 '종북세력 척결' 등을 이유로 시국사건 집회를 수시로 열며, '7월28일 오후 1시 서울중앙지법 앞. 지회장 포함 20명. 복장은 행사복' 등 지회별로 동원해야 할 인원수와 옷차림까지 명시해서 내려 보냈다. 이들은 과거에도 종종 각종 집회에 가스통을 들고 나서서 국민들로 부터 '가스통 부대'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나는 이들의 모습에서 1950년대 한국 전쟁 직후 다리나 팔이 없는 몸에 계급 없는 군복을 입고 목발을 집고서 상점 마다 다니면서 물건을 강매하거나 행패를 부리던 상이군인들이 떠올랐다. 한국 전쟁 전상자들이었던 상이군인처럼 정도가 심하지는 않지만 고엽제 단체 회원들은 정부에서 보조를 받거나 각종 수익 사업에 관여하는 이익단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전략적으로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스통을 들고 서 있을 위치 선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고엽제 문제는 1970년대부터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던 미군과 호주 뉴질랜드 참전군인들이 1978년 미국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엽제 소송은 미국 의회 청문회가 열리고 전 주월 미군 총사령관 웨스트 모어랜드 육군대장이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할 만큼 큰 문제가 되었던 다국적 초대형 소송이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이길 수 없는 재판이었다. 왜냐하면 '정부조달계약자 항변원칙'(Government Contractor Defense)이라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정부조달물품 제조사는 제조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엽제 제조사들은 법정화해를 한다. 재판이 시간을 끌면 끌수록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 재판으로 인해, 엄청난 재판비용과 판결보다 더 무서운 기업 이미지 추락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1984년 미군과 호주(7,000명 참전) 뉴질랜드(600명 참전) 참전 고엽제 환자들은 2억 4,000만 달러를 피해 보상금으로 받는다. 호주에서 살기 때문에 외국 언론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있었던 고 최영환 전우에 의해서 이 사실이 중앙일보에 보도 되었으나 전두환 정부는 제보 기자를 해고시키고 타 언론이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여 국민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결국 8년 8개월 동안 미군 다음으로 많은 장병이 참전했기 때문에 당연히 미군 다음으로 많은 고엽제 환자가 발생한 대한민국은 단 돈 1달러도 받지 못했다. 한국은 철저한 보도통제 때문에 재판이 열리는 사실조차 몰라서 소송의 일원으로 참여하지도 못했다. 유신시대는 말할 것도 없었고 전두환 정권은 베트남전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미국을 '겨우' 고엽제 문제 따위로 또다시 심기를 어지럽게 해드리는 불경죄를 저지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후 고엽제 피해 전우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고엽제 제조 회사에서 돈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에서 보상을 받게 되었다. 고엽제 피해 단체가 '대한민국 고엽제 후유증 환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 에 의하여 비로소 공법단체가 된 것은 연대장, 대대장으로 월남전을 다녀왔던 훈장을 탄 전두환이나 노태우 때가 아니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7년 12월 21일이었다.
지난 10월 5일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워싱턴을 공식 방문한 팜 빈 민 베트남 외무장관에게 베트남 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군무기 베트남 수출 금지 조치'를 철회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이미 2014년 9월 마틴 뎀프시 미국 육군참모총장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하며 미국과 베트남의 군사 협력 개선에 돌파구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베트남이 중국에 대항하여 군사협력을 하는 이 시대에 미국이 '우리는 자유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월남전에 참전했었다.'고 주장하겠는가? 전쟁을 벌인 미국에서도 하지 않는 생각을 지금 한국 참전용사들이 하고 있다는 것은 비록 몸은 늙었어도 뇌는 늙지 않아 주름이 없는 탓이 아니겠는가?
도대체 월남 참전 전우들이 참전의 권리를 요구해야 할 상대는 누구인가? 당연히 국가이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정부 여당이다. 파월 전우들은 어떤 정당이 집권을 하던 정부 여당을 상대해서 권리를 찾기 위해서 압박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야당을 비난할 일이 아니라 연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항상 보수 세력의 편을 들어 각종 어용 집회에 동원되는 들러리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순진이 사람 잡는 경우인 것이다.
참전 한국군은 양민학살을 했다는 오해를 피할 수 없는 것은 베트콩과 양민을 구별할 수 없었던 전쟁의 성격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참전 군인들이 그런 처지에 놓여 있다. 평범한 참전군인 가운데 섞여 있는, 일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맹활약을 하는 자칭 고엽제 피해자 난동꾼들 때문에 참전군인 전체가 가스통 할배들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힘을 가진 자에게 아부해서 푼돈이나 구걸하는 앵벌이 집단일 뿐인데...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시절 자신이 당선되면 월남참전군인들을 6.25 참전 군인들처럼 국가유공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물론 월남전 참전군인들은 이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앞장서서 '묻지 마!'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던가? 그야말로 이명박답게 명찰만 ‘국가유공자’로 달아주셨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세상에 돈이 없지 뜻이 없나? 어떤 정부가 피를 흘려 한국의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던 월남 참전 군인들에게 혜택을 주고 싶지 않겠나? 문제는 예산일 뿐이지. 언제나 모자라는 예산 집행의 우선순위는 급한 것, 요구가 강한 것부터 하게 되어있다. 예산을 따내기 위해서는 권력에 호소하거나 비위를 맞추어서 될 일이 아니고 국민적 공감대를 얻은 투쟁만이 효과가 있는 것이다.
나는 장군이 싫다
40대 때 고교동창들이 모여서 룸살롱을 갔었는데 육군 대령이었던 동창생이 물 찬 제비 같이 허슬을 잘 추었다. 내가 “야! 너는 군인이 무슨 춤을 그렇게 잘 추냐?”고 했더니 친구는 계속 춤을 추면서 “이런 걸 잘해야 출세를 하는 거야.”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그 친구는 장군이 되어 소장까지 지내고 예편을 했다. 아마 춤 실력이 그 정도 밖에 안됐는가 보다.
장군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인 내가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역사에 기록 될 만한 두 사람의 주월 사령관에 대하여 평가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줍잖은 일이다. 그러나 이런 주제로 글을 쓴 사람은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고 아마도 한국 역사상 내가 최초인 것 같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2013년 작고했고, 아직은 역사적 평가를 하기에 이르다는 우려 때문인 듯 하다. 그러나 절대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고, 현 시점에서 분명히 평가해야 할 부분이 있는 까닭에 아무도 나서지 않아 고발을 하는 마음으로 내가 감히 나섰다.
국군의 8년여의 월남 참전 기간 동안 전반기에 채명신, 후반기에 이세호 두 사람의 사령관이 재임했었다. 나는 이세호 장군이 주월남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시기에 파병이 되었기에 초대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후반기에 파병되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에도 사령관이 이세호가 아닌 채명신으로 남아 있었다. 왜 그럴까? 나는 검증의 차원에서 이 글을 먼저 월남참전용사 사이트에 올리면서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 같은 사병이야 높고 높은 사령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있을 리가 없지만 장교들 사이에서 이세호 장군의 별명이 '돈세호' 라는 것이다. 별명이라는 것이 그냥 붙여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아마도 이 장군은 돈을 무척 아끼고 애지중지 하셨던 모양이다. 하기사 그렇게 돈을 사랑하는 분이야말로 한 푼이라도 더 챙겨와야 했을 철수 부대 지휘관으로서 적임자가 아니었을까? 이쯤에서 나는 박통의 용병설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월남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일 때문에 채 장군과 장시간 인터뷰를 하기도 했고 시드니 방문 때는 며칠간 수행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때 이미 출판되었던 그의 자서전 <베트남전쟁과 나>라는 책을 일부러 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누가 나에게 주었던 책마저 버렸다. 이유는 우리나라 군 출신들이 쓰는 뻔한 자기 자랑의 책을 귀중한 내 서가에 꽂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는 어느 퇴역 장군의 자서전을 대필해 준 적이 있는데 비교적 흠 잡을 데가 없는 인격과 소양을 갖춘 사람이었지만 군인 특유의, 자기 성찰이라고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기술 방식에 질려 버렸다. 그런데 그 후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채 장군의 자서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읽지 않은 전우들이 여러 명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에 온라인에서 만난 한 전우는 2006년 서점가에서 채 장군이 미소를 지으며 지휘봉을 들고 있는 책 표지를 보고서 "이 양반이 정말 전쟁을 지휘한 장군인가? 내가 이런 사람의 작전 지휘를 받고 정글 속에서 고생을 했다는 말인가?"하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 책을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전우는 참전전우회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내 글을 접한 후 다시 채 장군의 책을 주문해서 읽은 다음에야 비로소 표지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과는 다르게 나름 고뇌하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천으로 만든 실내 모자에 지휘봉을 들고 웃는 모습을 볼 때 심장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왕이면 전쟁터에 나간 장군답게 철모를 쓰고 방탄 조끼를 입은 무장 모습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백 년 후 우리의 자손들이 월남 전쟁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의 모습을 보고 월남전을 어떻게 평가할까?
선조들의 전쟁 모습을 겪지 않은 후손들이 갑옷에 큰 칼 옆에 차고 의연히 서 있는 장군의 동상을 대할 때 우리들이 느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6.25 전쟁 중 미국 맥아더 장군에 인천 상륙 작전 중 망원경을 들고 전운을 살피고 있는 모습과 비교를 해보자. 월남전 당시 찍은 사진이 수없이 많을 터인데 월남전을 상징하는 사진이 그것 밖에 없었을까? 열 마디 글보다 단 한 장의 사진이 주는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데..."
그 전우는 이렇게 뼈가 아플만한 지적을 했다.
나는 처음 그 책을 보았을 때 그 전우만큼 깊이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닌데 별 셋 달린 중장 모자에 30대 청년 같은 채 장군의 얼굴이 전혀 전쟁터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정도의 생각 밖에 하지 못했다. 자서전을 채 장군이 직접 기획했을 리는 만무한 일이기에 "어떤 놈이 기획을 했는지 전쟁의 ㅈ자도 모르는 놈이 책 기획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나중에 채 장군을 만났을 때 책에 대한 내 소감을 이야기 했더니 출판에 대해서 잘 몰라서 누구한테 맡겼더니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연재를 하기 위해서 채 장군의 책을 꼼꼼이 읽어 보았지만 처음 내가 가졌던 선입관에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새롭게 알려질 만한 비사도 없고 역사에 기록으로 남을 만한 귀중한 증언도 없는, 그저 국방부 전사 보관소에나 보관하면 적당할 만한 평범한 책이었다. 서두에 베트남전과 관련된 국제정세의 변화 등에 대해 상당히 길게 언급해 놓았지만 여전히 객관적이지 못한 점은 매우 아쉬웠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군인들의 전쟁회고록은 당사자들의 얘기이기 때문에 사실적이고 흥미진진한 법이다. 물론 자서전은 자기 자신을 항변하거나 자신이 했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하려는 가능성이 농후한 법이다. 그러나 훌륭한 책은 자신이 이루어 놓은 잘 알려진 업적을 자랑하기 보다는 어떻게 큰 실수를 저지를 뻔하고 또한 저질렀으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왔는가 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자신들의 회고록인 만큼 오히려 더 냉철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 반성하고 비판하며 '그 때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했어야 했다.' 라는 내용이어야 후손들에게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책은 한낱 홍보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채 장군의 책은 자신의 생각은 원래 이러해서 그 뜻을 그렇게 관철시켰으며 난 그렇게 생각했지만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변명조의 내용들이 간간히 섞여 있고,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나 잘못된 판단과 결정, 간과했던 사항들은 거의 없었다. 한 마디로 자신에 대하여 너무 관대했다. 회고록 안에 펼쳐진 인간 채명신은 너무 완벽해 보여서 왠지 믿음이 덜 갔다.
그런 면에서 <롬멜전사록>의 경우와는 매우 비교가 된다. 그 책도 물론 롬멜이 직접 쓰지는 않았고 롬멜의 아들이나 부관, 참모들이 그 상황에서의 주석을 달아 놓은 책이다. 그러나 그의 책에는 앞서 말한 그런 기록들 때문에 오히려 더 믿음이 간다.
월남전으로 국민영웅이 되었던 채명신 장군은 사령관직에서 물러난 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철저히 견제를 당했고 생을 마칠 때까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면서 살아야 했다. 후임 이세호 장군은 개인적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친구 사이이기도 했지만 박 대통령 치하에서 4년 7개월 최장수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이후 자신의 옛 부하였던 전두환한테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흥미 있는 일은 두 장군들의 개인적인 인격의 차이에 대한 평가와는 전혀 상관없이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할 일이 우연하게 발생한 것이다.
그 사건은 2012년 4월 18일 오전 7시 30분부터 9시까지 약 2시간 동안 서초동 전자랜드 12층에서 벌어졌다. 이세호 장군은 자신의 전력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통일교의 2대 교주 문국진(문선명 아들)의 안보 강연에 축사를 하는 들러리 자리에서 엄청난 이야기를 했다. 즉 월남전에서 한국군 병사 1인당 봉급을 매월 500달러(당시 US 달러)를 미국한테 받았으나 그 돈의 50달러만(병장 기준) 지급하고 나머지 450달러는 국고에 귀속시켜 버렸다는 역사의 비밀을 누설해버린 것이다. 정부는 그 돈을 가지고 경부고속도로 건설, 새마을사업, 국가 기간산업에 투자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 발언을 하고 1년 후에 사망했다.
채 장군은 파월 전우들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수십 년간 논란이 되고 있는, 국가가 삥땅 친 일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있는 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채 장군이 은인자중 신중한 처세의 보신주의로 일관하다가 밝혀야 할 것을 밝히지 않고 비밀을 무덤속까지 가지고 간 것은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채명신 장군과 달리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어쩌다가, 얼떨결에, 우연히, 공교롭게, 나도 모르게, 부지중에, 무심코, 아무 생각 없이 중요한 말을 흘리게 되어 있다. 그날 아침이 이세호 장군에게는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그날 행사의 정황상 이세호 장군의 폭탄 발언은 본인이 사전에 계획했던 것이 아니고, 당일 행사에 참전군인들이 많이 참석한 분위기에서 불식간에 나온 즉행적 발언이라고 본다. 그가 그렇게 중대한 발언을 하려고 했다면 통일교 집회 같은 음성적인 모임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선명이 직접 등장하는 자리를 비롯해서 통일교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취재를 목적으로 몇 번 참석을 했던 내 경험으로 볼 때 통일교 행사란 주로 주류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인사들을 돈을 듬뿍 주고 초청하거나 그럴듯한 명분을 걸어놓고 둘러치기 식으로 행사를 치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가 진심으로 국가가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엄청난 숙제에 대하여 사실을 밝히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보다 더 공식적인 자리에서 명분을 가지고 했을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
비록 세상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비록 실수로라도 진실을 알게 만든 이 장군의 업적은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의 실언으로 역사적 진실의 한 부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경위야 어떠하든 사실이 확인되었으니 이제 국가로부터 삥땅 뜯긴 돈을 받아내야 하는 것이야 말로 가스통 부대가 해야 할 일이겠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그들이 무엇을 하겠나?
이제 드디어, 어떤 이에게는 무척 길었던 글을 마무리할 때이다.
비록 잉여가 과잉인 입장이기 하지만 지금까지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월남에서 보낸 시간 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세대가 50년 전의 월남전의 실상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라 하겠다.
혹시 수능 시험이나 공무원 시험에 나올 것을 대비해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첫째, 박정희의 월남 파병 결단은 논란이 있으나 결과적으로 유익한 판단이었다.
둘째, 월남 참전 병사들은 국가로부터 삥땅 뜯겼다.
셋째, 이제 먹고 살만해 졌으니 국가는 삥당 친 돈 이자는 그만두고라도 원금만이라도 돌리도!
돈 이야기로 끝나니 좀 거시기 하다마는 월남참전은 처음부터 돈 때문에 시작된 것이니만큼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현재 참전자들에게 주는 돈은 명예수당이라는 이름으로 월 17만원씩 지급하고 매년 1만 원가량 올라가고 있다.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11만 명에게 지급되는 돈이 연간 2,400억 정도이니 그것도 적지 않은 액수일 것이다. 그러나 원래 돈이라는 것이 영수증 없이 주고받으면 받는 사람 계산과 주는 사람 계산이 다른 법이지만 월남전 효과가 당시 시가로 10억불 수준이라던데 이건 좀 너무 적다는 계산이다.
이 글을 읽는 젊은 세대들은 가끔 출몰하는 가스통 부대들을 보면 손가락질 보다는 불쌍히 여기기를 바란다. 어떡하겠나? 그들 대부분이 요즘 세상처럼 자료가 풍부한 시대에 살지 못했던 세대여서 정보가 뒤떨어진 탓이니. 혹시 길 가다가 가스통 부대를 만나거든 노인들이 애를 쓰는데 그냥 지나치지 말고 무거운 가스통(아마도 속은 비었겠지만)을 대신 짊어주고. 왜 있잖은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어준 젊은이가 나중에 복을 많이 받았다는 전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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