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의 어둠 위에 그린 그림 제주에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관이 등장한다. 세계적인 조명 예술가들이 빛으로 그려낸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야간 관광명소가 문을 여는 것이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의 차밭 ‘다희연’의 9만9174㎡(3만여 평) 부지에 오는 27일 그랜드 오픈하는 ‘제주 라프(LAF·라이트아트페스타)’ 얘기다. 제주 라프는 빛과 어둠으로 빚어낸 예술품을 전시하는 축제의 이름이기도 하고, 축제 개최 이후 작품이 전시되는 상설 전시공간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는 설치미술과 미디어아트 작가 6명이 빛과 어둠을 질료로 삼아 만든 기상천외한 조명 예술품 14점이 전시된다. 제주에는 박물관이며 전시장 등 사설 관광지가 자그마치 140여 개가 넘는다. 말 그대로 ‘별의별 박물관’이 다 있다. 제주 라프 얘기를 듣고 ‘그렇고 그런 위락시설 하나가 더 문을 여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제주 라프는 기존의 사설 관광지와는 아예 격이 다르다. 착시 미술관이나 체험 공예 전시장 등 놀이시설에 가까운 공간과 감히 같은 반열에 놓을 수 없다는 얘기다. 제주 라프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협업으로 이룬 프로젝트 공간이다. 미술계 인사들은 제주 라프에 작품을 전시하는 작가의 이름만 듣고도 경탄했다. 제주도립미술관 학예팀장도 전시작가의 면면을 살피고는 몇 번이나 ‘놀랍다’고 했다. 제주 라프가 사설 관광지임에도 드러내놓고 소개하는 게 별 거리낌이 없었던 건, 전문가들로부터 받은 조언 때문이었다. 이들은 “제주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려면, 이런 수준 높은 예술적 시도를 지원해 줘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제주관광공사가 팔을 걷어붙이고 제주 라프 지원에 나선 것도 같은 이유다. 제주 라프는 앞으로 해마다 축제를 개최할 예정이다. 세계적인 명성의 작가를 축제 때마다 초대해서 제주에서의 작업을 돕고, 그들의 작품을 전시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축제를 세계적인 예술 이벤트의 반열에 올려놓겠다는 게 제주 라프의 포부다. 축제 때마다 출품되는 작품들로 야외 전시공간을 채워나가는 건 물론이다.
# 빛으로 그린 그림…제주 오름 제주 라프를 놓고 미술전문가들은 ‘지원’에 대해 먼저 말했다. 지원 얘기부터 꺼내놓는 건, 이 일이 ‘돈 안 되는’ 일이라는 실토와 다름없다. 관람객들이 몰리고, 돈이 된다면 굳이 지원을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었다. 과연 그런가. 제주 라프에 전시된 작품들은 ‘빛으로 그린 세계적인 예술작품’이라지 않았는가. 세계적인 작품으로도 돈벌이가 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른바 ‘예술적 공간’은 지원 없이는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일까. 개막을 앞두고 제주 라프를 찾아간 건 그래서다. 과연 생소한 조명예술이 제주를 찾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인가. 제주 라프는 거문오름과 함덕해수욕장에서 가까운 차밭 ‘다희연’ 부지 안에 있다. 차밭에다 동굴카페, 집라인, 족욕체험장 등의 시설을 들여 운영해온 다희연은 최근 레저시설 운영을 외부에 맡기고, 차밭 농사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다희연의 레저시설 운영을 맡은 곳이 바로 제주 라프다. 제주 라프는 조명 작품 전시공간을 찾다가 다희연을 알게 됐고, 전시 공간을 빌리는 한편 레포츠 프로그램 운영도 도맡기로 한 것이었다. 조명예술작품은 차밭 구역의 맞은편에 있었다. 불이 켜지기 전의 전시공간은 황량했다. 차밭 구릉 너머로 저 멀리 함덕 앞바다에 갈치잡이 배들의 집어등이 환하게 밝혀질 무렵, 조명작품에 하나둘 불이 들어왔다. 가장 기대됐던 건 ‘빛의 풍경화가’라고 불리는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조명예술가 브루스 먼로의 작품. 제목이 ‘오름’이라고 했다. 먼로는 제주 라프의 대표작가이고, 그가 선보인 ‘오름’은 대표 작품이다. 전원을 올리자 1만9800㎡(6000여 평)의 면적에다 설치해둔 2만1500개의 발광다이오드(LED)에 일제히 불이 밝혀졌다. 전구와 연결한 치렁치렁한 광섬유 전선 다발이 갖가지 색깔로 물들면서 역동적인 땅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전체적인 모양과 배치는 먼로가 2015년 호주 노던주 남서쪽의 거대한 바위 울루루에 설치해 화제가 된 ‘필드 오브 라이트’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흡사했다. 그렇다면 호주의 지형이나 느낌에 맞춰 제작한 작품을 제주에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닐까. 제주 라프의 한 관계자는 “그게 아니라 호주 울루루에 설치한 작품이 제주를 방문했을 때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울루루에 설치한 작품은 제주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며, 그걸 제주에 설치하면서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는 얘기다. # 유리로 만든 집, 그리고 외계생명체 작품 오름의 아래쪽에는 먼로의 대표작 중 하나인 ‘워터 타워’가 있다. 먼로가 스물한 살 때 읽은 라이얼 왓슨의 저서 ‘인도네시아 명상 기행’에서 받은 영감을 30년이 넘은 뒤에 구현한 작품이란다. 링거병을 닮은 물통을 쌓아 올려 39개의 기둥을 만들어 놓았는데, 조명을 켜면 물통으로 쌓은 기둥에서 은은한 빛과 음악이 흘러나온다. 어둠 속에서 물통으로 쌓은 기둥이 빛나는 모습이 그로테스크한 데다, 명상 음악도 낯선 느낌이어서 생경한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일행 중에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하다’는 이들도 있었다. 이밖에 다원 곳곳에 빛으로 빚어낸 다양한 작품이 있다. 숲속에 불을 밝힌 벌집 같은 형태의 조형물을 설치했는가 하면, 연못에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지은 듯한 집을 띄워놓기도 했다. 가장 독특했던 것은 동굴 안에다 설치해 놓은 프랑스 작가 장 피고치의 작품 ‘리모랜드’와 이병찬 작가의 ‘어반 크리처’. 리모랜드는 동굴 안에 만든 제주 풍경에 반해 눌러앉은 외계인 리모 수백 마리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작품. ‘어반 크리처’는 동굴 위에 매달린 기괴한 모양의 생명체를 형상화했다. 비닐로 만든 생명체는 모터로 공기를 불어 넣거나 빼서 빛을 발광하도록 만들어 마치 살아서 숨을 쉬는 듯했다. 제주 라프를 둘러본 감상은 신선하고 독특하다는 것. 기대만큼 자극은 강렬하지 않았다. 수백 발의 폭죽을 한꺼번에 공중에 쏘아 올린 불꽃놀이처럼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차분하게 어둠 속에서 빛의 색과 질감을 느끼는 경험은 새로운 것이었다. 조명예술이라고 했지만, 빛이 절반이었고, 나머지 절반의 주인공은 어둠이었다. 화려한 위락시설에 익숙해진 관광객들은 이런 ‘저자극’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더 궁금했던 것은 제주 라프 스태프들이 나무를 전구로 감거나 색 전구를 켜서 일대를 더 화려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을 과연 참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 이중섭의 가장 비싼 그림 한 점 기왕 조명 예술의 공간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했으니, 남은 제주여행의 여정을 미술로 이어보자. 제주에는 미술관이 적잖다. 시설이나 크기로 본다면 전혀 동의할 수 없겠지만, 규모 대비 관람객 숫자로 꼽는다면 제주 최고의 미술관은 단연 이중섭미술관이다. 고작 초등학교 교실 크기만 한 전시장을 찾는 관광객이 한 해 30만 명이 넘는다. 원화 한 점 없이 ‘기념관’으로 시작한 이중섭미술관은 지금 보유하고 있는 원화만 42점에 이른다. 이중섭미술관에서는 지금 이중섭의 그림 중에서 가장 비싼 1955년 작 ‘소’가 걸려 있다. 지난 3월 경매시장에 8년 만에 나와 이중섭의 그림 중 최고금액인 47억 원에 낙찰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지금 이중섭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경매를 진행한 서울옥션이 낙찰자를 설득했기 때문. 이 작품은 오는 10월 7일까지 이중섭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낙찰자가 앞으로 공개를 하지 않는다면, 이번이 이 작품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 모른다. 지금 제주를 간다면 제주도립미술관은 꼭 가볼 일이다. 도립미술관에서는 오는 10월 3일까지 가나아트 컬렉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작가 리스트만 봐도 탄성이 나온다. 김환기, 박수근, 오윤, 이인성, 오지호, 나혜석, 장욱진, 천경자…. 전시에서는 한국 근현대미술 역사 전반을 반추하는 이들 거장의 작품 110점을 볼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볼 수 없지만 꼭 봐야 할 건 김환기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산월(山月)’. 청색의 색감으로 산과 달을 그려 넣은 이 작품은 그가 1945년부터 1963년까지 그린 ‘산월 연작’ 중의 하나다. 제주에는 또 ‘물방울’ 연작으로 이름난 김창열 작가의 미술관도 있고, 제주의 자연 풍광과 일상의 희로애락을 해학과 정감 어린 색채로 표현해온 이왈종 작가의 왈종미술관도 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경찰학교 졸업 후 제주에 파견돼 1년 6개월가량을 머물렀던 인연으로 저지예술인마을에 조성된 김창열미술관은 작가가 기증한 작품 220점을 보유하고 있는데, 작가가 그린 첫 물방울 그림이라는 1972년 작 ‘밤에 일어난 일’ 앞에서는 누구나 발길이 오래 머문다.
# 보는 것만으로 유쾌하다…왈종미술관 제주의 이름난 관광지인 정방폭포 주차장을 끼고 있는 왈종미술관은 미술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도 누구나 재미있게 그림을 보고 나올 수 있는 곳이다. 장르를 초월한 데다 민화풍의 화려한 색감, 현대적인 주제 등이 한데 어우러져 일찍이 경험해본 적 없는 유쾌한 미감을 주기 때문이다. 미술작품의 미감이 사람의 기분을 얼마나 좌우하는지를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 특히 화려한 색감으로 밝게 그려진 대표작 ‘제주생활의 중도(中道)와 연기(緣起)’ 연작 등을 둘러보다 보면 마음까지 다 환해지는 기분이다. 제주의 풍경을 그린 게 아니라, 제주로 여행 온 이들의 달뜬 마음을 화폭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미술관 3층 테라스 공간에서 보는 범섬 일대의 풍경도 빼놓을 수 없다. 미술관 아래 주차장이 테라스 난간으로 가리는 자리에다 의자를 놓았는데, 거기 앉으면 번잡함은 일순 사라지고 마치 마술처럼 자연으로 둘러싸인 제주의 바다가 보인다.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시립으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기당미술관도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제주가 고향인 재일교포 사업가가 건립해 서귀포에 기증한 미술관은 1987년 문을 열었다. 미술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제주 출신 화가 변시지가 그린 ‘바람’으로 가득 차있는 상설 전시실. ‘폭풍의 화가’로 알려진 변시지가 묘사한 제주는 왈종미술관에서 본 그림 속의 제주와는 가장 반대쪽에 있다. 그는 제주를 아름다움의 공간이 아니라 거친 삶과 소외의 공간으로 그려냈다. 풍경까지 휘어버릴 듯한 거친 바람과 그 바람 속에 위태롭게 서 있는 초가집, 그리고 그 곁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사내와 말 한 마리가 등장한다. 온통 바람의 노란색으로 칠해진 그림 속의 제주는 나른하기도 하고, 때로는 쓸쓸하기도 하고, 비장하기도 하다. # 들뜬 휴가 대신 차분한 휴식 제주 여행을 들뜬 휴가가 아니라, 책을 읽거나 그림을 감상하며 차분하고 고요한 휴식으로 보내고 싶다면 숙소도 그에 맞출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면 일단 서귀포보다 제주시의 숙소를 권한다. 시내 접근성도 좋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가격 경쟁력도 뛰어나다. 그렇게 가려 뽑은 호텔이 메종글래드 제주다. 특1급 호텔이지만, 놀랍게도 서귀포 일대의 특급호텔 요금의 절반 수준이다. 그렇다고 객실 컨디션이나 부대시설이 빠지는 것도 아니다. 차분한 분위기가 오히려 더 만족스럽다. 메종글래드 제주 호텔은 제주시 중심인 연동에 있다. 호텔 인근의 교차로 이름이 ‘그랜드호텔 사거리’다. 그랜드호텔은 메종글래드 제주 호텔의 과거 이름. 2015년 리브랜딩을 통해 ‘메종글래드 제주’로 이름을 바꿨지만, 호텔 앞 사거리에 붙은 지명은 그대로다. 1978년 문을 연 그랜드호텔의 이름이 여태 더 친숙하기 때문이다. 메종글래드 호텔은 제주 사람들에게는 각별하다. 그랜드호텔 시절에 여기서 돌잔치를 하고 졸업식 후 가족식사를 했으며, 결혼식 피로연을 했다. 그랜드호텔이 제주에서 거의 유일한 특급호텔이던 시절이었다. 곽지해수욕장의 호텔 프라이빗 비치하우스에서 근무하는 한 젊은 직원도 “부모님이 신혼여행 첫날밤을 그랜드호텔에서 보냈다”고 했다. 제주 사람이 제주로 신혼여행을 떠난 것이 무슨 여행일까 싶은데, 직원은 “부모님들이 지금도 그랜드호텔에서의 하룻밤을 잊지 못하신다”고 했다. 메종글래드 호텔에는 지금도 제주 주민들의 발길이 잦다. 단연 인기인 곳이 뷔페레스토랑 ‘삼다정’이다. 숙박패키지를 이용해 투숙하는 제주 고객도 적잖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면, 여행자 입장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다. 부대시설도 훌륭하다. 호텔 뒤편에는 도심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공간이 숨겨져 있다. 솔숲에 글램핑 바비큐장도 있고, 잔디 정원과 인피니티 풀도 있다. 바다를 끼고 있지는 않지만 곽지 해변에 프라이빗 비치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로비 한쪽에는 잘 만들어 아이들이 열광하는 규모 있는 키즈카페도 있다. 다시 제주의 미술 얘기로 되돌아가자. 제주는 자연경관이 워낙 빼어나서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제주에 도착했다면 그때부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남은 숙제는 제주를 보는 방식, 즉 ‘어떻게 보는가’다. 예술가의 감성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제주에서 미술을 만날 수도 있고, 미술 속에서 제주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러자면 지금보다 더 좋은 때가 없다. 더구나 지금은 폭염의 한가운데가 아닌가. ■ 미술관 더 보고싶다면… 여행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제주의 미술관이라면 성산읍 삼달리에 있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첫손으로 꼽을 수 있다. 루게릭 병으로 2005년 세상을 뜬 사진작가 김영갑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아름다운 제주 오름의 곡선을 담은 사진이 더 감동적인 건 투병 중에도 밥값을 아껴 필름을 사고, 대신 밭에 버려진 당근을 주워 허기를 달랬던 그의 삶이 대비되기 때문이다. 한경면 저지리의 제주현대미술관에서는 김준권 작가의 ‘제주 자연 2018’전과 박광진 작가의 ‘특별기획 자연의 소리’전이 열리고 있다. 두 전시 모두 제주의 아름다움을 화폭으로 옮긴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다. 제주의 미술관에서는 제주의 자연을 담은 작품 전시가 자주 열린다. 제주 현대미술관이 있는 저지예술인마을에는 ‘노리’ 등 작은 갤러리가 몇 곳 있다. 갤러리 ‘노리’는 오스트리아의 아트레지던스에 머물며 활동 중인 이명복 작가가 지난 2009년 제주에 이주해 문을 연 갤러리다. 전시장 중앙에 있는 제주 곶자왈의 겨울 풍경을 담은 작가의 작품이 인상적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애월읍 하귀리 해안도로에는 원로 조각작가 최기원의 작품을 전시하는 초계미술관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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