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 천책 → 다산’ 세월을 뛰어넘은 답사기
잡풀 헤치고 찾아낸 ‘백운동 정원’… 다산의 감동을 다시 느끼다
고려 高僧 천책이 남긴 ‘호산록’에 매료된 다산
매년 ‘용굴’로 소풍 다니다 유배 풀린 뒤 다시 폐허로
다산 연구자 정민 교수가 200년 만에 찾아내
백운동 원림 12景에 반해 시화집 ‘백운첩’ 남기자
기와 솟을대문 올리고 계곡 물길 끌어들여 복원
전남 강진에는 다들 아시다시피 다산 정약용이 있습니다. 이른바 ‘남도답사 일번지’라는 이름값의 팔 할, 아니 구 할쯤은 다산의 몫일 겁니다. 그만큼 다산이 드리운 그늘이 깊고 넓은 것이지요. 강진을 여행하는 이들은 대개 다산초당부터 백련사, 사의재를 돌며 다산의 자취를 더듬습니다만, 과연 다산은 강진에서 어떤 곳을 가장 좋아했을까요. 유배 중이던 다산이 한눈에 반했던 강진의 명소가 두 곳 있습니다. 이제 막 세상에 드러난 강진 덕룡산 자락의 기이한 형상의 용혈(龍穴), 그리고 어둑한 동백숲과 마당으로 끌어들인 계곡의 정취가 일품인 월출산 자락의 백운동 원림입니다. 두 곳 모두 다산이 찬탄해 마지않았던 장소이니 그곳을 찾아가는 건, 다산의 권유와 안내에 답하는 일과 다름없습니다. 다산의 추천과 안내로 떠나는 강진여행.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 강진의 바위산에 용굴이 있다
시대를 건너가는 기록의 힘과 한 인물이 드리운 그늘의 깊이. ‘용혈(龍穴)’을 찾아가는 길에 줄곧 떠오른 생각이었다. ‘용 용(龍)’에 ‘구멍 혈(穴)’자를 쓰니, 우리말로는 ‘용굴’이다. 용혈은 전남 강진의 덕룡산에 있다. 덕룡산은 온통 바위로 이뤄져 ‘남도의 공룡능선’이라고 불리는 험준한 산. 그 산의 4분쯤의 능선 바위벼랑에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용혈이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은, 신우대 울창한 원시림의 저 깊은 숲속에 용혈이 있다.
강진의 용혈 이야기를 하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이동하듯 시계의 태엽을 감았다 풀었다를 반복해야 한다. 이야기의 출발은, 강진의 내로라하는 명소들이 그렇듯 ‘다산 정약용’이다. 강진에는 다산에 의해 호흡이 불어 넣어진 명소가 곳곳에 있다. 다산이 스스로 새긴 자취나 흔적도 있지만, 다산이 발견하고 꼼꼼하게 기록함으로써 생명력을 얻은 공간도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것이 많지만, 발견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부러운 점은 강진 땅이 다산의 전 생애에 걸친 ‘지리적 현장성’을 독점하다시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강진에 다산은 축복과 다름없다.
먼저 시곗바늘을 200여 년 전, 그러니까 다산의 강진 유배 당시로 되돌린다. 다산이 유배 중 가장 깊이 교유해온 이가 백련사의 혜장 선사다. 유배 내내 다산은 혜장과 사제의 정을 나누며 유교와 불교를 뛰어넘어 교류했다.
어느 날 혜장이 다산에게 책 한 권을 건네줬다. 고려 때 최고 고승에게만 내리는 국사(國師·나라의 스승) 칭호를 받았던 백련사의 승려 천책이 지은 ‘호산록’이었다. 다산은 천책의 문장에 매료되고 만다. 천책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 승려. 승려를 대상으로 하는 승과(僧科) 대신 일반 과거에 급제한 뒤 고급 관리 대신 승려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다. 행정고시에 수석 합격할 정도의 글솜씨를 갖고 출가해 절에 들어가 참선과 수행을 거듭한 셈이니 천책의 문장이 남다를 수밖에….
호산록에는 강진의 용혈, 그러니까 용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천책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한 뒤 백련사에서 나와 덕룡산 자락의 용혈 아래 용혈암에 머물며 여생을 보냈다. 천책이 용굴에 은거하자, 고려의 고위 관리들이 개경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 앞다퉈 강진까지 내려왔다. 이들이 타고 온 말과 마차가 용굴 앞에 줄을 설 정도였다. 한 번 만나보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을 정도로 천책은 추앙을 받았다. 이건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 전 고려 때의 얘기다.
강진 월출산 아래에는 백운동 원림이 있다.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간 다산이 화첩을 만들었을 정도로 매료됐던 공간이다. 다산은 원림 주변의 경관을 골라서 ‘백운동 12경’을 정했는데, 그중 ‘제1경’이 기기묘묘한 바위로 솟은 월출산의 봉우리 ‘옥판봉’이다. 백운동 원림의 담장 밖 언덕에 세운 정자 정선대에서 올려다본 옥판봉의 모습. |
# 800년의 시간을 건너온 기록의 힘
천책의 글솜씨에 경탄을 금치 못하던 다산은 제자와 마침 강진에 내려와 있던 둘째 아들까지 이끌고 천책이 말년을 보낸 용혈로 소풍을 갔다. 천책의 향기라도 맡을 수 있을까 해서 떠난 소풍이었다.
때는 1808년 음력 5월 11일. 만춘의 봄날이었다. 유배 이후 거처를 전전하던 다산이 만덕산의 다산초당으로 막 거처를 옮겼을 때니 괴로웠던 시절을 건너 유배생활이 몸에 익었을 무렵이었다. 마침 유배 후 8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둘째 아들까지 초당에 내려와 있었다. 봄날 용혈로의 소풍은 다산에게는 괴로웠던 유배 중 그나마 행복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한때 내로라하는 고승들이 입적한 고려 불교의 성지였다가 쇠락하면서 잊혀 500년 넘게 덤불에 묻힌 용혈은 이렇게 다산의 소풍으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 속의 800여 년 전 고승의 자취가 남은 유적이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가 500여 년이 더 지난 뒤 천책이 남긴 시문에 매료된 다산에 의해 꺼내진 셈이다.
다산은 소풍을 떠났던 당일의 행적을 ‘용혈행’이란 제목의 글로 남겼다. 다산이 문장으로 그려놓은 소풍의 기록이 어찌나 상세한지 한 장면 한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다. 지역의 토호이자 후원자가 다산과 제자의 소풍에 협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다산은 이들이 용혈 앞에 차려놓은 성대한 밥상과 술상의 상차림까지 세세하게 적었다.
먼저 갈증을 풀기 위해 잘 익은 앵두를 내왔고 이어 농어 국과 전복회, 파강회와 미나리 무침이 차려졌다. 한바탕 술자리가 벌어졌을 것이고, 시문을 짓거나 읊기도 했을 것이다. 그날의 소풍이 즐거웠는지 다산은 이후 해마다 봄이 되면 제자들을 앞세워 용혈로 소풍을 다녀왔다.
다산이 유배를 끝내고 강진을 떠나면서 용혈은 다시 발길이 끊겼다. 숲길은 나무뿌리가 휘감았고, 입구는 덤불로 뒤덮였다. 그렇게 다시 시간의 어둠 속으로 잠긴 용혈은, 다산과 연암, 이덕무 등 조선 시대 인물에 천착해온 고전학자 정민 한양대 교수에 의해 200여 년 만에 다시 꺼내졌다. 정 교수는 최근 다산과 제자가 쓴 용혈과 관련된 문헌을 뒤지고, 용혈을 답사해 책 ‘다산과 강진 용혈’을 펴냈다.
정 교수는 5년 전에도 다산의 화첩과 기록을 뒤져 강진의 월출산 아래 백운동 정원(원림)을 조명했다. 그의 연구로 덤불에 뒤덮여 잊혀가던 백운동 원림이 그윽한 문향의 관광지로 단장돼 사람들의 발걸음을 받아내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용혈도 그 기이한 형상과 깃든 이야기로 이내 매력적인 명소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백운동 원림 얘기는 뒤에서 다시.
800여 년 전 고려 때의 고승 천책에게서, 200여 년 전 유배객 다산으로, 그리고 다시 정 교수로…. 고려 불교의 수도처가 허물어졌으되 잊히지 않고 다시 빛을 보게 된 바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기록의 힘’, 그리고 또 하나는 ‘인물의 힘’이다.
천책의 글을 다산이 봤고, 다산이 적은 글을 정 교수가 봤다. 수백 년의 시간쯤은 가뿐하게 뛰어넘는 기록의 무서움이다. 기록의 힘에 앞서는 건 ‘사람’이다. 다산이 천책을 흠모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정 교수가 다산을 흠모하지 않았다면, 기록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기록과 사람의 힘으로, 용굴은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계곡을 끼고 있는 백운동 원림의 긴 흙담. 원림은 앞으로는 짙은 동백숲을, 뒤로는 대숲을 두르고 있다. 월출산과 백운동 원림 사이에는 또 구릉을 넘어가는 거대한 차밭이 펼쳐져 있다. |
# 용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렇다면 용굴은 대체 어떤 모습의 공간일까. 다산은 용혈암 터를 이렇게 묘사했다. “바위산 조각한 듯 기괴하기 짝이 없고/무멍한 종유 동굴 허공에 걸렸구나/그 옛날의 선원(禪院)이 지금은 파묻혀서/층층 누대 가파른 섬돌 모두 다 무너졌다.” 지금 가 봐도 용굴은 다산의 글 속 풍경과 하나 다를 게 없다.
용굴을 찾아가는 건 일반적인 여행과는 좀 다르다. 보통의 여행과는 다른 색다른 즐거움이 있다는 얘기다. ‘대체 어떤 곳이길래’라는 궁금함도 있고, 보물찾기를 하는 듯한 두근거림도 있다. 조금 과장한다면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과 유사하다. 고생스럽다는 뜻은 아니고, 은밀하면서도 모험심을 자극한다는 말이다.
초행에 용굴을 찾아가기란 쉽잖다. 정 교수의 답사를 안내하며 용굴을 드나들었던 신영호 강진향토사연구회장이 앞장섰다. 용굴, 그러니까 용혈의 들머리는 덕룡산 아래 규사광산인 만덕광업 정문 바로 옆에 있다. 덕룡산을 오르는 등산로인데 신우대 빽빽한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은 좁긴 하지만 뚜렷하다. 길을 짚어서 20분쯤 오르면 길 오른쪽으로 쓰러진 안내판이 나온다. 2015년에 끝난 용혈암 발굴조사 안내판이다. 안내판 쪽으로 발을 디디면 덤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덤불 안은 용혈암이란 암자 건물이 서 있던 자리다. 발굴의 흔적까지 남아 있어 마치 사라진 대륙의 고대 유적지로 들어선 듯한 분위기다. 이곳에서는 고려 때의 청자 불상 파편이 여러 점 나왔다.
덤불 숲을 헤치고 더 들어가면 굴이 있다. 이 굴이 두 개의 용굴 중 아래 굴이다. 터널처럼 깊고 길게 뚫린 동굴은 아니고, 입구는 좁되 안쪽이 넓은, 마치 아이스크림 스쿱으로 떠낸 듯한 동굴이다.
진짜 용굴, 그러니까 용혈은 위쪽에 있는 동굴이다. 등산로를 따라 10분쯤 더 올랐을까. 바위벽 옆으로 희미하게 계단의 흔적이 있다. 이게 용혈로 이어지는 길이다. 여기서 열댓 걸음만 오르면 동굴이 입을 딱 벌리고 있다. 동굴 구멍은 두 개인데 안쪽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져 있다.
동굴 한쪽 끝에서 고개를 들면 하늘이 보이는 구멍이 있다. 하늘과 통한다는 이른바 통천문(通天門)이다.
기이한 동굴의 경관이 제법 볼 만하지만, 용혈에서는 눈보다 마음이다. 800여 년 전 고려 때 세 명의 국사가 이곳에 은거하며 수행을 하거나 생을 다하고 입적했다. 그리고 200여 년 전 다산이 천책의 향기를 맡고자 해마다 제자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이들의 발걸음을 따라나선 길이 지금 여기까지 왔다.
거기 무슨 훌륭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관광지로 다듬어진 곳도 아니며, 쉽게 찾아갈 수도 없지만 용혈을 권하는 건 그곳에서 다른 여행지에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로 꽉 차있는 공간이 잊히고 버려져 헐거워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기분. 비유하자면 비워져 있음으로써 더 충만한 느낌을 주는 오래된 폐사지에서의 경험과 비슷하다.
# 다산이 추천하고 안내하는 여행
▲ 덕룡산의 용혈 아래 용혈암 터에서 나온 청자 인물상 조각. 강진의 고려청자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눈을 감고 있는 나한상에서 고려인의 얼굴이 보인다. |
유배 중이던 다산은 여기 백운동을 두 번 다녀갔다. 그중 제자들과 월출산 등반을 마치고 백운동에서 하루를 묵었던 1812년 가을, 두 번째 방문에서 원림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다산은 원림에서 딱 하룻밤 묵고 나서 주변의 빼어난 풍경 12곳을 정해 ‘백운동 12경(景)’을 정하고, 초의 선사에게는 백운동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뒤 자신의 친필 시를 한데 묶어 ‘백운첩’으로 남겼다. 다녀간 뒤에도 자주 이곳을 그리워하면서 그림을 꺼내 봤을 만큼 다산은 백운동 원림의 경관을 잊지 못했다.
백운동 원림의 복원은 화첩 속 다산의 시와 초의의 그림을 토대로 이뤄졌다. 다산의 감동이 없었다면, 그래서 글과 그림으로 남기지 않았다면, 여기 이렇게 빼어난 정원이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복원과정에서 제멋대로 육중한 기와 솟을대문을 올리는 등의 부실한 복원의 문제가 있긴 했지만, 계곡의 물길을 끌어들여 복원해낸 백운동 원림의 정취는 그야말로 기가 막히다.
▲ 덕룡산의 용혈 아래 용혈암 터에서 나온 청자 인물상 조각. 강진의 고려청자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눈을 감고 있는 나한상에서 고려인의 얼굴이 보인다. |
“내 예전 영산(월출산)에 놀러 와서는/옷깃 떨쳐 절정까지 오르려 했지/힘 빠져 능히 내려오지 못하고/해 지자 입은 옷이 너무 추웠네/ …/이제야 알겠네 예전에 오를 때/거칠게 기운만 부려댄 줄을/산인은 산 위로 오르지 않고/가만 앉아 마음이 고요하네.”
유배 중인 다산이 정상에 오르지 못해 좌절했던 시절의 부질없던 욕망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음을, 그래서 마음이 고요해지는 그런 순간에 당도했음을 이 시는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다산이 진솔한 마음을 꺼내 투영했을 정도로 백운동의 풍경에 감화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강진에서 백운동 원림과 용혈은 함께 여행하면 훌륭한 짝이다. 다산의 발길이 거쳐 간 이 두 곳은, 다산이 강진에서 찾아낸 그윽하고 맑은 곳이다. 백운동은 이미 갖춰진 명소이고, 용혈은 이제 막 드러난 곳이다. 두 곳 모두 다산이 소풍을 가거나 등산을 하면서 묵었으며 다녀오고 나서 찬탄을 금치 못했던 강진의 명소다. 그러니 말하자면 이곳을 찾아가는 건, 다산의 권유와 안내에 답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산을 가이드 삼은 강진여행’이라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 고려청자 빚고 농가 민박하고… ‘일주일의 강진 추억’
12월20일까지 체험 프로그램
강진에는 농촌민박과 체험을 결합한 ‘푸소’(FUSO) 프로그램이 있다. 푸소란 필링 업(Feeling Up), 스트레스 오프(Stress Off)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기도 하고, 기분을 ‘풀라’는 남도 사투리이기도 하다. 강진에는 100여 곳의 푸소 농가가 있는데 이들 중 상위 평가를 받은 26곳 농가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일주일 살기 프로그램의 최대 강점은 다른 숙박상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하다’는 것. 6박 7일 일정에 2인 1실 기준 1인 요금이 15만 원이다. 이 요금에 숙박비와 함께 매일 아침·저녁 식사, 즉 12끼의 식사 제공이 포함돼 있다. 총비용을 7일로 나누면 1인이 하루 2만1500원을 내고 두 끼 식사와 숙박을 해결하는 셈이다. 투숙 당일 대중교통 이용 시 무료 픽업서비스를 제공하고 투숙 기간 중 5일 동안 전기자전거를 무료로 대여해 탈 수 있다. 일주일 살기 고객에게는 카드가 발급되는데 이 카드를 제시하면 고려청자박물관과 다산박물관 등이 무료다. 이렇게 비용이 저렴한 건 국비 사업인 데다, 일정 부분은 군비까지 투입하고 있기 때문. 2인 이상 신청 가능. 1농가 6박 7일 숙박 기준이지만, 두 농가를 ‘3박 4일+3박 4일’로 이용할 수도 있다. 푸소 인터넷 사이트(http://fuso.kr)로 예약할 수 있다. 국비 예산이 소진되면 프로그램은 종료된다.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돼 벌써 300여 건의 예약이 이뤄졌으니 서둘러야 한다. 문의 061-434-7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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