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주역의 대가인 김일부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인물이 바로 也山 李達이다.
두 사람의 특징을 굳이 구분한다면 김일부가 후천개벽에 초점을 둔 巨視的 周易에 능통하였다면,
상대적으로 이야산은 일상사에 주역의 원리를 적용하는 微視的 周易에 능통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경제학에도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이 있듯,
주역에도 微視周易과 巨視周易이 성립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는데,
미시주역의 전범을 보여준 인물이 야산 이달이다.
김일부를 보면 웅혼한 우주사의 변천이 느껴지는 반면
이야산을 보면 시계바늘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은 정밀함이 감지된다.
우리가 보통 역술(易術)이라고 말할 때,
그 범주에는 ‘주역’과 ‘사주명리학’이 모두 포함된다.
역술의 대가라고 하면 이 양쪽에 모두 조예가 깊은 사람을 일컫는다.
주역만 알고 명리를 몰라도 안되고,
명리만 알고 주역을 몰라도 깊이가 없다.
양쪽을 모두 알아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이 양자는 다르다.
주역은 팔괘(八卦)를 조합한 육십사괘(六十四卦)로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고 예측한다면,
사주명리학은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를 기본으로 한 육십갑자로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방법이다.
양자의 공통점은 예측(predict) 하기 위한 방법론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점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주역은 음양에서 출발하여 사상(四象),
사상에서 팔괘, 팔괘에서 육십사괘로 뻗어 나가는 방식이다.
이를 수(數)로 표시하면 그 뻗어나가는 방식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즉 2(음양)-4(사상)-8(팔괘)-64(육십사괘)의 방식이다.
반면 사주명리학은 숫자로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하다.
육십갑자 모두를 음양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오행으로 곱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첨가되는 부분이 생년, 월, 일, 시라는 네 기둥이다.
그래서 사주 보기가 훨씬 복잡하다. 주역으로 어떤 사람의 점을 쳐 볼 때는 ‘지금 당장’(now and here)만 필요하지만,
사주로 볼 때는 그 사람이 타고난 년, 월, 일, 시가 모두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주역은 점치는 순간 시(時)를 중시하지만,
사주는 시뿐만 아니라 연(年)도 필요하고 월(月)과 일(日)도 알아야 한다.
주역이 OX 방식이라고 한다면,
사주는 사지선다형이라고나 할까.
주역이 디지털 시계라면 사주는 아날로그 시계이다.
주역이 시(詩)라면 사주는 산문(散文)이다.
주역이 압축적인 결론을 내리는 데 장기가 있다면,
사주는 서사적인 전망을 하는데 유리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지금 1억원을 투자하여 사업을 시작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알기 위하여
주역으로 점을 치면 ‘예스’ 아니면 ‘노’가 나온다.
둘 중 하나로 결판나는 것이다.
반면 사주로 보면 지금은 사업하기 좋지 않지만 3년후 가을쯤이면 때가 온다,
사업을 할 때도 부동산쪽보다 물장사가 좋다는 식으로 나온다.
좀더 구체적인 설명체계다.
유의할 대목은 주역과 사주 모두 술(術)이라고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역술이라고 한다.
술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정의하면 방법론이다.
강물을 건너가는 뗏목이고,
지붕 위에 올라가게 해주는 사다리와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술이다.
좋은 의미다. 뗏목이 없으면 어떻게 강을 건너고,
사다리가 없으면 어떻게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겠는가.
아무리 강 건너에 피안이 있고,
지붕 위에 천당이 있다 할지라도 건너갈 수 없고,
올라갈 수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이야기이다.
당위만 아무리 강조해 보아야 소용없다는 말이다.
달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로켓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그 방법이 바로 술이고,
그 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바로 술사(術士)다.
말하자면 해결사라고나 할까.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술사는 부정적인 표현으로 인식되었다.
원래는 좋은 개념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인플레가 진행되면 출발할 때의 오리지널리티가 희석되게 마련이다.
역사를 보면 이런 경우가 많다.
마치 노자·공자·맹자를 지칭하는 ‘자’(子)라는 존칭이
영자·미자·춘자 하는 식으로 여자들 이름으로 희석되고,
(이건 순전히 섬나라 사람때문이데 그사람들이 이런사실들을 알까)
복희씨·신농씨의 ‘씨’(氏)라는 존칭이 아무에게나 ‘--씨’라고 호칭되는 것처럼.
요즘에는 ‘사모님’과 ‘선생’이라는 호칭이 그렇다.
아무 남자나 보고 선생이라고 하는가 하면 아무 여자나 보고 사모님이라고 부른다.
고준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술사라는 표현도 시대가 흐르면서 이렇게 타락하고 말았다.
요즘 술사라고 하면 사기꾼 비슷한 사람을 일컫는 표현이다.
미신이라는 콘텐츠를 가지고 혹세무민하는 사람이 술사다.
술사를 우리나라 직업분류표의 방식대로 표현한다면 ‘미신종사업자’이다.
역술을 연구하는 사람도 광의의 개념에서 보자면 미신종사업자에 포함된다.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물에 풍덩 뛰어들어 발을 적셔야 하는 것이다.
물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 바닥의 모양을 파악하기 힘들다.
세계적인 여성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 Mead·1901~78)가 본국에 남편을 두고도
뉴기니 섬 원주민들의 풍속을 연구하기 위해 원주민 추장의 아들과 결혼했던 것처럼 말이다.
미신종사업자의 단점이 지독한 천대를 받는다는 점이라고 한다면,
장점은 명예퇴직이 없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정년퇴직도 없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무한 종사할 수 있는 직업이 미신종사업이다.
역사도 무지 무지 깊다.
적어도 B.C 3000년 전부터 존재하던 직업이니 5,000년 역사를 자랑한다.
앞으로도 없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른 직장은 40대 중반만 돼도 자리 보전을 걱정해야 하지만,
이 분야는 나이가 들고 흰머리가 늘수록 오히려 신뢰도와 권위가 올라간다.
흰머리와 복채는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젊어서부터 일찌감치 흰머리를 확보하기 위한 비책으로 숙지황을 먹고 무를 먹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가끔 든다.
누구는 30대 중반의 새파란 나이에 전남 도지사로 발령받고 나서
머리 허연 하급직원들을 제압하기 위한 방법으로 숙지황과 무를 먹었지만,
역술가는 복채를 많이 받기 위해 이를 먹는 수도 있다.
어찌됐든 문제는 확률과 정확도다.
이것이 떨어지면 진짜 사기꾼으로 전락한다.
명리학은 10세기 무렵에 그 체계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주역은 적어도 기원전 5세기 이전부터 완성된 형태로 존재했다.
그 역사를 놓고 보면 주역이 사주보다 대략 1,500년 이상 앞선다.
그러므로 주역이야말로 동양 역술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주역사(周易史)를 대강 훑어보면 주역에 대한 입장은 3가지 분야로 분류가 가능하다.
첫째는 점서(占書)로써 주역을 대하는 입장이다.
그야말로 점을 치기 위해 주역을 보았다.
이 노선을 보통 상수학(象數學)이라고 부른다.
주역의 팔괘와 육십사괘는 일차적으로 형상(象)으로 나타나고,
이 형상은 숫자로 환산된다.
예를 들어 건괘(乾卦)는 1이고,
태괘(兌卦)는 2이고, 리괘(離卦)는 3,
진괘(震卦)는 4로 표현하는 식이다.
점을 치기 위해서는 상(象)과 수(數)에 골몰해야 한다.
주역의 원래 목적은 점을 치는데 있었다.
상수학적 입장이 가장 원조다.
주역 연구의 세 분야
송대(宋代)의 소강절(邵康節·1011~77)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저서인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는 상수학적 입장에서 우주의 변화를 설명한 명저다.
그러나 정이천(程伊川)을 비롯한 송대의 신유학자들은 소강절의 패러다임을 전적으로 납득하지 못한 감이 있다.
너무나 거창하고 복잡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신유학자들의 어록을 모아 놓은 ‘근사록’(近思錄)을 보면 유독 소강절의 어록만 빠져 있다.
괴상하다고 여기고 빼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흥미로운 대목은 19세기 한국의 민족종교 지도자들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운 ‘후천개벽’이라는 ‘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의 연원은 소강절로부터 유래하였다는 점이다.
후천개벽설은 발생지인 중국에서는 별로 빛을 보지 못했고,
일본에서도 주목받지 못한 우주론이다.
유달리 조선에서만 각광받고 유행하였다.
조선에서의 계보를 살펴보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이 소강절의 노선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서경덕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 이토정(李土亭·1517~78)이고,
토정 다음에는 전라감사로 유명한 이서구(李書九·1754~1825),
그리고 계룡산의 김일부(金一夫)로 계승되었다.
김일부의 영향을 받아 후천개벽을 주장한 민족종교 지도자들을 보면 동학의 최수운(崔水雲),
모악산의 강증산(姜甑山),
원불교의 박중빈(朴重彬)을 예로 들 수 있다.
19세기 서세동점의 전환기에 한국에서만 유달리 후천개벽설이 민중들에게 파고들었던 것이다.
이 부분이 중국이나 일본과는 구별되는 대목이다.
그 이유는 한국사람들이 그만큼 변혁에 대한 갈망이 강했음을 의미한다.
두번째는 도덕적 입장이다. 점을 쳐 미래의 길흉을 예측하는 것은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보고
여기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 이 노선이다.
괘를 보고 스스로 마음을 수양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자기수양의 차원에서 주역을 보고자 한 것이다.
송대의 정이천이 대표적 인물이다.
정이천은 기존의 상수학적인 주역에서 벗어나 의리적인 관점에서 주역을 해석한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주역은 내면의 수양을 위한 지침서였다.
조선 중기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1539~1601) 같은 경우가 바로 이같은 사례다.
겸암은 임진왜란을 치른 명재상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친형이기도 하다.
그의 호인 겸암은 주역 겸괘(謙卦)에서 유래하였다. 겸손하라는 의미다.
유운룡은 29세때 안동 하회마을 건너편의 산자락에 수양을 하기 위한 정자를 하나 지을 때도 겸괘의 의미를 담았다.
그 정자의 이름은 겸암정(謙菴亭)이다.
겸암정이라 정한 이유는 스승인 퇴계가 제자인 유운룡에게 겸암이라는 호를 주었기 때문이다.
겸(謙)은 주역의 64괘 가운데 15번째에 해당되는 괘로서,
위에는 땅을 상징하는 곤괘(坤卦)가 있고 아래에는 산을 상징하는 간괘(艮卦)가 배치되어 있다.
줄여서 ‘지산겸’(地山謙)이라고 부른다.
지산겸은 산이 땅 위에 있지 않고 땅 밑에 있는 형상으로 겸손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퇴계가 64괘 가운데 하필 겸괘를 제자에게 준 배경에는 유운룡의 평소 스타일이 겸양과는 거리가 있는 성격이었음을 암시한다.
즉, 과격하고 독선적인 성격을 다스려 겸손해지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때부터 겸암은 평생 겸괘를 의식하고 살았던 것 같다.
현재 남아 있는 겸암정의 위치부터 겸양한 자리다.
하회마을을 휘감아 도는 물길 건너편에는 ‘부용대’라고 불리는 바위절벽이 솟아 있다.
보통사람 같으면 부용대 위에 정자를 지었을 것이다.
하회마을 전체를 내려다보는 탁 트인 전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터도 평평해서 정자 짓기에는 안성맞춤의 자리다.
也山 선생이 만든 태극도.
음양의 二氣가 태극의 一元에서 생성했다는 주역의 원리를 표현한 그림이다.
겸암 유운룡, 의리적 관점의 주역 연구
그러나 겸암정은 부용대에서 한참 왼쪽으로 내려온 중간지점의 어슴프레한 위치에 자리잡았다. 하회마을에서 건너다보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범상한 지점이다. 눈에 확 들어오는 정상이 아니고 약간 들어가는 중간 지점을 택해 정자를 지었다는 것은 정자 이름 그대로 겸양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징표다.
겸암정이 자리잡은 형국 자체도 지산 겸괘가 상징하는 것처럼 산의 정상이 아니고 중턱이라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부용대 오른쪽 밑에 겸암을 모신 서원인 화천서원(花川書院)이 있는데, 화천서원의 입구에 걸려 있는 현판 글씨도 다름아닌 ‘지산루’(地山樓)로 되어 있다.
지산루라는 이름은 지산 겸괘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작명이다. 겸암은 의리적인 주역뿐만 아니라 상수학적인 주역에도 또한 깊은 조예를 지녔다고 전한다. 겸암에 관한 신이(神異)한 이야기는 경상도는 물론 전라도에까지 내려오고 있다. 세번째는 도교의 내단적(內丹的) 입장이다. 내단은 외단(外丹)의 반대말이다. 외단이 수은과 유황 등을 제련하여 만든 불사약을 지칭한다면, 내단은 외부의 약물이 아닌 인체 내에서 단을 찾았다. 인체내의 하단전에 기를 모으는 방법이 진짜 신선이 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단전호흡을 중시하는 단학(丹學)의 입장에서 주역을 본 것이다.
주역 계사전에 등장하는 ‘근취제신 원취제물’(近取諸身 遠取諸物)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가깝게는 자기 몸에서 진리를 찾고, 멀리는 각각의 사물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인체를 소우주로 보고, 소우주를 알면 대우주를 알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언급이다. 굳이 바깥의 대우주까지 갈 필요가 있겠는가. 소우주를 알면 대우주를 알 수 있는 것이지.
64괘는 대우주뿐만 아니라 소우주인 인체의 변화도 설명할 수 있는 기제다. 내단에서 말하는 인체변화의 핵심은 감리교구(坎離交?)에 있다. 감괘(坎卦)와 이괘(離卦)가 서로 만나는 것이 감리교구다. 감은 신장의 수 기운을, 리는 심장의 불 기운을 상징하기도 한다. 오장육부 가운데 신장과 심장이 만나야 하고, 혼(魂·火)이 백(魄·水) 가운데로 들어가고, 호랑이와 용이 만나고, 물과 불이 만나야만 내단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동양 신비주의의 정수인 ‘황금꽃의 비밀’(secret of golden flower)이다. 반복하자면 내단의 핵심은 감리교구에 있고, 이 내면의 연금술(Inner alchemy)을 설명하는 방식이 바로 주역이었다. 그 내면의 연금술을 주역적으로 설명한 책이 바로 도사 위백양(魏伯陽)이 저술한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이다. ‘주역참동계’는 오늘날까지 단학의 바이블로 존중받을 만큼 심오한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한자문화권 정신사의 최고봉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서양 학자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이기도 하다.
조선은 주역의 나라였다. 식자층이라고 하면 모두 주역에 골몰하였다. 공자만 가죽끈이 세번 끊어지도록 주역을 공부한 것이 아니다. 조선의 공부깨나 한다는 선비들도 평생 주역을 끼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문묘에 배향된 대학자들은 모두 주역 전문가이기도 하다. 사서삼경을 두고 보자. 사서라 하면 ‘대학’ ‘중용’ ‘논어’ ‘맹자’다.
주역, 변혁을 꿈꾸는 자들의 바이블
사서는 도덕적 실천에 관한 문제가 중요하다. 논어를 두고 보더라도 얼마나 군자답게 사는가. 어떻게 처세하며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주를 이룬다. 한마디로 도덕 교과서다. 우주와 인간의 심오한 비밀을 탐구하는 내용은 아니다. 대학이나 중용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이러한 책들은 몇번 읽어보면 이해가 가는 책들이다. 문제는 실천이 잘 안돼서 그렇지 지적으로 파악이 불가능한 내용들은 아니라는 말이다. 삼경 가운데 시경이나 서경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러나 주역만큼은 차원이 다르다. 요즘 식으로 표현한다면 주역을 제외한 나머지 경전들이 문과(文科)에 관한 책들이라면, 주역은 이과(理科)에 관한 책이다. 사서는 암기하면 되지만, 주역은 응용과 분석을 요한다. 더 들어가면 이과이면서도 다시 문과로 되돌아 온다.
주역을 이해하려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그리고 팔괘와 육십사괘의 수많은 조합을 파악해야 한다. 나아가 이를 실전에 적용하기까지에는 대단히 많은 시간과 정력을 투자해야 한다. 설령 투자한다고 해도 쉽게 파악되지도 않는다. 한 고개 넘었는가 싶으면 또 한 고개 나오고, 또 나오고 하는 식이다.
주역 고수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한 30년 정도 여기에만 골몰해야 무엇이 좀 보인다고 한다. 타고난 자질이라도 있어야 30년 동안이나 골몰하지, 그렇지 못한 범부는 중도탈락이 대부분이다. 골치아프니 적당히 하다 중도에 그만두는 것이다. 주역을 했다는 사람은 많아도 이를 실전에 적용하는 사람은 매우 희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 중기를 지나 후기로 갈수록 포부가 있고 머리가 있는 선비들은 주역을 파고들었다고 보인다.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의 최종 테스트는 주역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따라 구분되었다. 실력의 차이는 주역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부패한 현실정치에 절망한 재야의 뜻있는 선비들은 주역으로 시대의 변화를 미리 예측하고, 변화에 미리 대비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주역은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바이블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민족종교에 투신하였던 주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부분 주역 전문가들이었다. 평생 주역만 한 사람들이라고 할 만큼 이 분야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지나치리만큼 주역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정감록’과 함께 ‘주역’은 19세기 변혁을 꿈꾸는 재야 선비들의 전공필수 과목이었다. 그런가 하면 ‘주역’은 ‘당시’(唐詩),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함께 한자문화권 식자층의 3대 공부 과목이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역은 철학이고, 사기는 역사이며, 당시는 문학이다. 소위 문·사·철(文史哲) 삼박자를 대표한다. 이 삼박자 섭렵 없이는 식자층 노릇을 하기 힘들었다. 아직도 이 3과목은 전통적 교양으로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데, 어떻게 안 씹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맛들이면 골치아프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야산(也山) 이 달(李達·1889~ 1958)은 근세 한국주역사(韓國周易史)에서 특출한 존재다. 주역이란 무엇인가, 주역을 공부하면 어떤 능력을 갖게 되는가에 대한 대답을 주고 간 분이다. 아울러 주역이란 과연 공부할 만한 학문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간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러한 위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일반인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서구화,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이 분야는 지하 단칸방에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화려한 고층 빌딩에는 결코 나와본 적이 없다. 비록 지하 단칸방에 파묻혀 있었지만 필자는 야산(也山) 만한 인물은 그리 흔하게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也山, 정밀한 생활주역의 세계
근대 주역의 대가인 김일부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인물이 바로 야산이다. 양자의 경향성을 굳이 구분하여 본다면 김일부가 후천개벽에 초점을 둔 거시적 주역에 능통하였다면, 상대적으로 야산은 일상사에서 주역의 원리를 적용하는 미시적 주역에 능통하였다고 보인다.
경제학에도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이 있듯 주역에도 미시주역(微視周易)과 거시주역(巨視周易)이 성립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는데, 미시주역의 전범을 보여준 인물이 야산 이달이다. 김일부를 쳐다보면 웅혼한 우주사의 변천이 느껴지고, 이야산을 바라보면 시계바늘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은 정밀함이 감지된다.
일부는 망원경 주역이고, 야산은 현미경 주역이다. 물론 음양중(陰中陽)이고 양중음(陽中陰)이듯, 망원경 속에 현미경이 포함되어 있고, 현미경 속에 망원경도 있는 법이다.
야산도 민족의 진로와 같은 거시적 전망에 탁월한 안목을 보여주었지만,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사에 주역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일반대중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인물은 일부보다 야산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야산이라는 인물에 대한 최초의 정보를 입수한 시기는 5년 전쯤이다. 중국의 선종(禪宗) 사찰들을 답사하면서 건국대 이 준 교수와 동행한 적이 있었다. 자연과학을 전공한 이 준 교수와 중국 장시(江西)성의 시골 허름한 여관방에 같이 묵으면서 뜻밖에도 불교의 고승들과 도교의 도사들에 대한 해박한 이야기들을 귀동냥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가 야산이 남긴 일화였다. 해방되던 해인 1945년 4월 무렵부터 야산은 ‘대한독립만세’를 중얼거리고 다녔다. 영낙 없이 미친 사람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중얼거리고 다닌 야산은 일본 경찰에 의해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유치장에서도 횡설수설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흥얼거리니 일본 경찰은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 판정하고 방면하였다. 유치장 문을 나가면서도 야산은 경찰관을 향해 ‘대한독립만세여!’하고 중얼거리며 나갔다고 한다.
8월13일 경남 청도의 화계리(花溪里) 오씨(吳氏) 집에 머무르던 야산은 따르던 제자들에게 갑자기 “경사스러운 일을 들으러 가자!”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나서 서둘러 14일 경북 문경군(聞慶郡) 문경면(聞慶面) 문경리(聞慶里)로 십수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갔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간 제자들에게 야산은 잔치를 벌이라고 하였다. 문경리의 촌로들을 모아놓고 닭고기와 술을 대접하는 잔치판을 벌인 것이다. 야산은 “오늘같이 기쁜날 내가 닭춤을 한번 추겠다”하면서 잔치마당에서 덩실 덩실 춤을 추는 것 아닌가. 속을 모르는 제자들은 “우리 선생이 요즘 정신이 약간 이상한 것 같더니 정말 돌았는지 모르겠다”면서 걱정스럽게 야산의 닭춤을 구경하였다.
8월14일 저녁 가져간 돈으로 문경리의 촌로들에게 술과 닭고기를 대접하면서 흥겹게 논 다음날, 15일이 되었다. 제자들은 그날 36년간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야 제자들은 광인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스승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야산은 민족의 해방이라는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기 위하여 장소도 비상한 곳을 물색하였던 것이다. ‘비상시’에는 ‘비상한 장소’에서 ‘비상한 인물’이 ‘비상한 일’을 한다고 했던가. 비상한 장소, 그게 바로 문경(聞慶)이었다.
‘경사스러운 일을 듣는다’는 뜻 아닌가. 문경군 문경읍 문경리는 그 경사스러움이 트리플로 겹치는 곳이다. 해방 하루 전인 14일 잔치판을 벌여 놓고 닭고기를 먹으면서 닭춤을 추었으니 절묘한 무대연출 아닌가. 닭은 바로 새벽이 왔음을 알리는 메신저(messenger) 아니던가. 1980년대 암울한 시절 누가 그랬던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지금 생각해보니 이보다 더한 퍼포먼스가 어디에 있겠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也山과 안면도 피난 이야기
이 준 교수로부터 들은 또 하나의 이야기는 서해안의 안면도와 관련된 이야기다. 6·25가 나던 해인 1950년 3월 무렵 야산은 제자들에게 다짜고짜 통고하였다.
“자네들 집에 있는 재산 가운데 10만원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전부 나에게 가져와.”
말하자면 비상금 정도 남겨 놓고 나에게 재산을 다 바치라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는 밝히지 않은 채.
평소 스승의 남다른 선견지명을 여러번 경험한 바 있는 제자들은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하며 시키는 대로 하였다고 한다. 제자들은 당시 금액으로 집에 10만원만 남겨놓고 가산을 정리하여 현금으로 가져왔다. 그때 야산을 충실히 따르던 핵심 제자가 10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야산은 이 가운데 2명의 제자가 가져온 돈을 마당에 내던졌다고 한다.
“너희 둘은 제자가 아니다.’
2명의 제자는 재산 가운데 일부만 정리하여 가져왔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부끄럽게 여긴 이 두 사람은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 제대로 재산을 정리하여 나머지 돈을 모두 가지고 왔다. 제자들은 왜 우리 선생이 재산을 가져오라고 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감히 아무 질문도 할 수 없었다.
10명의 제자들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갈취한(?) 야산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남길 뿐이었다.
“음력 6월 초에 서산 포구에서 다시 만나자!”
약속한 그 날짜에 서산 포구에 제자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도착해 보니 배가 2척 마련되어 있었다.
“모두 이 배에 타거라.”
“배를 타고 어디로 가는데요?”
“안면도(安眠島)로 간다.”
지금은 안면도에 다리를 놓아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당시에는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섬이었다. 배를 타고 가던 도중 야산은 제자들에게 한마디 했다.
“앞으로는 안면도의 면(眠)자에서 눈을 떼어야 할 것이다.”
눈이라 하면 눈 목(目)자를 의미한다. ‘眠’에서 ‘目’을 떼어내면 민(民)자만 남는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안면도는 백성을 편하게 해주는 곳이다. 즉 안면도에 가야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안면도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이미 야산이 집을 빌려 놓은 상태였다. 쌀로는 부족해 보리를 특히 많이 장만해 놓았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 상황을 목격하고서야 비로소 스승이 왜 터무니 없이 돈을 가져오라고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야산이 미리 안배해 놓은 덕택에 제자들과 그 가족들은 안면도에서 무사히 6·25를 넘길 수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야산의 그 선견지명에 크게 놀랐다. 어떻게 그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철저하게 대비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어떤 경우에는 미리 알 수 있어도 보안이 새어나가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는 수도 많다. 하지만 야산은 확실하게 대안을 마련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 혼자만이 아닌 주변 사람들까지 난리를 피하게 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난세에는 자기 한몸 가누기도 힘든 법인데,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까지 건사 할 수 있었을까.
비상계엄령 선포 직감
나는 이 준 교수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야산이란 인물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더듬어보고 싶었다. 이 준 교수에게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 들었느냐고 물어보았다. 1977년 무렵 야산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산(亞山) 김병호(金炳浩·1920~82)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김병호는 경남 고령 사람이었다. 점필재 김종직의 14대 후손으로 주역을 비롯한 도학을 평생 연구하다 야인으로 일생을 마친 사람이다.
뼈대 있는 선비 집안의 후손이 나라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주역을 공부해서 언제 광명이 올 것인가 예측하는 일뿐이었다. 아산 김병호는 후자의 길을 택한 사람이었다. 주역에 심취했던 선비가 해방후 할 수 있는 일은 사업을 하거나 회사에 다니는 일이 아니었다.
여기 저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뜻있는 사람들을 만나 주역을 강의해 주는 ‘마지널맨’(marginal man)의 삶이었다. 1977년 경에는 서울에 자주 들러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주역을 강의하였는데, 그가 남산의 여관에서 머물고 있을 때 자주 찾아간 이교수에게 해준 이야기가 바로 문경과 안면도 이야기였다. 한번은 아산이 이교수에게 밑도 끝도 없이 “다음주에는 서울에 못 올라올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내뱉었다.
“그러면 언제나 오십니까?”
“다음주에 못오면 아마 2주나 있다 오게 될 걸세.”하고는 사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 직후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비상계엄령 하에서는 모든 집회가 금지되었다. 당연히 주역 강의나 모임도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아산이 수도하던 장소 중 하나가 계룡산 국사봉(國師峯) 밑의 구룡정사(龜龍精舍)라는 곳이라고 했다. 답사해 보니 터가 암벽으로 짜여 있어 영기가 있는 곳이었다. 일부 선생이 거처하던 토굴에서 10분 더 내려와 위치해 있다.
계룡산 국사봉은 특별한 곳이다. 이름 그대로 국운을 염려하던 국사(國師)급 인물들이 자주 찾던 봉우리다.
장래 희망이 국사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들도 계룡산 국사봉을 반드시 찾았다. 국사봉 앞으로는 교과서에 나오는 토체(土體) 안산(案山)이 가로놓여 있어 이곳이 범상치 않은 곳임을 알려준다.
필자가 그동안 구경해본 토체 안산 가운데 국사봉 앞의 안산이 단연 최고다. 김병호는 구룡정사에서 주역을 공부하려는 제자들에게 면벽(面壁)을 시키곤 하였다. 면벽은 정신집중 훈련이다. 면벽의 과정 없이 주역의 64괘만 달달 외운다고 대가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야산의 행적에 대한 자료를 추적하던 중 만난 사람이 대전에 사는 이응국(李應國·43)·응문(應文·42) 형제다. 야산의 손자들이다. 야산에게는 5남1녀가 있었다. 장남은 진화(震和), 차남은 감화(坎和), 3남은 간화(艮和), 4남은 이화(離和), 5남은 태화(兌和), 그리고 딸은 손화(巽和)다. 이름에 사용된 진·감·간·리·태·손은 모두 주역의 팔괘에서 따온 것이다. 4남 이화가 바로 순 토종 역사학자로 유명한 이이화(李離和) 선생이다. 3남 간화의 아들이 이응국·응문이다. 이응국은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근무하는 일상적인 봉급쟁이의 삶을 살다 어느 순간 ‘이렇게 살 것이 아니라, 가학(家學)을 잇는 일이 더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과감하게 직장을 그만두고 월급도 없는 주역인의 길을 택하였다고 한다.
동생 이응문은 형보다 한 술 더 떠 대학 재학 시절부터 주역에 심취해 대학 3학년때 학교를 그만두고 주역 전문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아웃사이더의 인생을 감수한 것이다. 형인 응국이 주역의 의리적 해석에 밝다면, 동생인 응문은 상수적 해석에 능하다. 형은 주로 전라도 쪽, 동생은 경상도 지역의 주역 강의를 담당하고 있다. 이들 형제를 보면서 느낀 소감은 ‘혈통은 무시하지 못하겠구나!’였다. 올초 대전에 사는 이응국씨를 만나 안면도 사건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주역적 배경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야산이 제자들을 데리고 안면도에 들어간 시기는 6·25 전쟁 발생 며칠 후였다.정확하게는 인민군이 예산·홍성에 진입하기 하루 전이었다고 한다. 이때 야산을 따라 안면도로 건너간 인원은 제자 몇명만이 아니라 약 300가구에 이르렀다고 한다. 300가구의 인원이라면 한 가구에 3명만 치더라도 약 1,000명에 가까운 대규모 인원이다.
也山 선생의 4남 역사학자 李離和씨.
안면도 300가구 피난의 비밀
야산을 따르던 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안면도 일대로 피난했다. 안면도 일대라 하면 충남 광천·서산·홍성 일대까지 포함하는 지역이다. 야산은 이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던 재산을 다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그 돈으로 곡식을 사서 광천·서산 등지의 주민들에게 공짜로 나누어주었음은 물론이다. 얼떨결에 공짜로 쌀과 보리를 받은 광천 사람들은 야산과 그 추종자들에게 고맙게 생각했음은 불문가지다.
이 적선으로 말미암아 안면도 일대로 피난했던 야산 일행은 6·25때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하게 넘길 수 있었던 것 같다. 6·25라는 것도 깊이 들어가 보면 좌.우 이데올로기를 빙자한 개인감정의 청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명분인 경우가 많다. 원래 난리가 나면 평소 원한 있는 사람부터 손보게 마련이다.
6·25때 안면도에는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왜 야산이 안면도의 잠잘 면자에서 눈 목자를 떼라고 했는가.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사연이 있었다. 첫째, 피난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하라.
둘째, 원래 이름이 안민도(安民島)인데,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우민화 정책을 쓰면서 눈 목자를 일부러 붙여 놓았던 것이다. 이제 해방되었으니 눈 목자를 떼어야 한다.
셋째는 안면도의 또 다른 이름을 개락금(開洛金)이라고 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락(洛)은 하도(河圖)·낙서(洛書)의 낙서를 의미한다. 하도는 선천이요, 낙서는 후천세계를 상징한다. 금(金)은 오행 가운데 후천세계로 변하더라도 살아남는 강한 기운이다. 그러므로 안면도는 후천세계를 여는 중요한 시금석이라는 뜻이 된다. 최근 들어 안면도는 육지로 연결되면서 장엄한 서해 일몰과 함께 아름다운 꽃축제로 유명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두고 볼 일이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 왜 피난할 때 하필 300가구였는가 하는 대목이다. 주역의 괘를 들여다보아야 해명된다. 여기에 해당하는 괘는 천수송(天水訟) 이다. 위가 건괘이고, 아래는 감괘로 형성된 괘가 천수송 괘다. 이 괘의 뜻은 송(訟)이다. 분쟁한다는 뜻이다. 서로가 자신을 믿으므로 송사가 쉽게 끝나지 않고 잘잘못도 판별되지 않는 상태이니, 꼭 송사에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두려운 괘라고 설명되어 있다.
야산은 6·25가 발발하기 전에 이 괘를 뽑아보고 사태를 미리 예견했던 것 같다. 6·25라는 전쟁은 천하의 큰 송사(訟事)가 아니었던가.
결과적으로 어느 한쪽이 완전히 이긴 것도 아니니 잘잘못도 판별되지 않은 셈이다. 천수송 괘에서 음미할 부분은 ‘구이(九二)는 불극송(不克訟)이니 귀이포(歸而逋)하야 기읍인(其邑人)이 3백호(三百戶)면 무(無) 하리라’는 구절이다. ‘구이는 송사를 이기지 못하니, 돌아가 도망하여 읍 사람이 300호면 재앙이 없으리라’로 해석한다.(‘大山周易講解’上,143쪽) ‘읍 사람이 300호’라는 대목에서 300가구가 연유하였다. 천수송 괘를 뽑았을 때 그 송사를 피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은 300가구를 데리고 어디론가 피하는 것이었고, 야산이 볼 때 그 피난하는 장소는 백성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뜻을 지닌 안면도였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이 상황을 재검토해 보면 이렇다. 야산이 6·25 전에 천수송 괘를 뽑은 것은 순전히 영감이었고, 직관의 영역이었다.
也山이 석천암에서 공부한 자신의 제자들에게 수여한 일종의 수료증. ‘右修學完了'라는 글자가 선명히 보인다
네 글자 안에 포함된 주역과 오행의 신비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기도 하였다. 64괘 중 다른 괘를 선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필 천수송 괘를 선택하였는냐 하는 문제는 야산 본인의 직관적인 판단이라는 말이다. 그 다음 의문은 300가구다. 100가구, 아니면 400가구, 또는 다른 규모의 인원이 아니고 왜 유독 300가구로 정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주역이라는 경전에 나와 있는 구절을 참고한 것이다. 경전에 나와 있으니 이를 보고 참고한 셈이다.
바꾸어 말하면 직감과 학문이 종합된 판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직감만 있고 천수송 괘의 구절을 몰랐다면 100가구를 데리고 갔을 수도 있다. 반대로 주역의 구절만 알고 직감이 없었으면 현실에서 무력할 뿐이다. 거울 같이 비추는 직감과 박식한 학문을 아울러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그래야만 쌍권총을 차는 셈이다. ‘OK목장’에서 결투할 때는 쌍권총을 차야만 승산이 있는 것 아닌가. 학문만 있고 직관의 세계를 모르면 초월을 모르니 속되고, 직관만 중시하고 학문을 모르면 부황해질 수 있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8·15와 6·25에 대한 야산의 예언을 추적하다 보면 이 보다 더 기막힌 이야기가 나온다.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던 194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 도쿄(東京)제대를 졸업한 인텔리였던 김병윤(金炳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세상이 뒤숭숭해지자 김병윤은 주역의 대가라고 소문났던 야산을 찾아와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되겠읍니까?”하고 물었다. 야산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거두절미하고 ‘위성황련’(胃醒黃連)이라는 네 글자를 묵묵히 써 주었다. 이는 한약의 처방전이다. 위성(胃醒)이란 위장에 문제가 발생하였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소화불량·식욕감퇴·구토와 같은 증상을 말하기도 한다. 이때 사용하는 약재가 황련(黃連)이다.
‘한국본초도감’(韓國本草圖鑑)을 찾아 보니 황련은 매자나무과의 여러해살이풀인 깽깽이풀의 뿌리라고 되어 있다. 열을 내리고 독을 다스리며, 위를 튼튼히 하고 설사를 멈추게 하는 효능이 있다. 주로 위장에 이상이 생겼을 때 사용하는 약재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난데없이 ‘위성황련’이라는 처방을 써주었으니 받는 사람 측에서는 어리벙벙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보면 자네 위에 열이 차서 답답한 상태이니 황련을 쓰라는 뜻도 내재되어 있었다.
야산은 자기를 찾아온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고 위에 이상이 있음을 한눈에 간파했던 것이다. 짐작컨대 야산은 ‘본초강목’(本草綱目)이나 ‘방약합편’(方藥合編)과 같은 의서(醫書)에도 일가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사 묻기 전에 먼저 네 몸부터 돌보라는 뜻도 내재해 있다. 한약재와 처방에 관한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김병윤이 무슨 뜻인지 좀더 풀어 이야기해달라고 하자 다시 써준 문구가 ‘계명월성전 전중공거지’(鷄鳴月星田 田中共車之)였다. 이는 위성황련이라는 글자를 파자(破字), 즉 인수분해한 문구였다. 위성을 인수분해하면 계명월성전(鷄鳴月星田)이 된다. 한문이 지닌 은유와 상징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단백 압축 사례이기도 하다.
먼저 성(醒)자를 뜯어보면 왼쪽에 유(酉)자가 나온다. 유는 닭을 가리킨다. 그 다음에 위성이라는 두 글자를 합해 놓고 거기에서 유를 빼면 월성전만 남는다. 위는 월과 전이고, 나머지는 성이다. 가운데에 성을 배합해 넣으면 월성전이 된다. 무슨 뜻인가? 월성전은 달과 별의 밭이라는 뜻이다. 하늘의 은하수를 지칭한다. 계명월성전은 닭이 하늘의 은하수에서 운다는 뜻이 된다. 이 시기는 음력으로 7월7일을 가리킨다. 칠월 칠석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라서 은하수가 장관을 이룬다.
음과 양이 합하고, 산택(山澤)이 통기(通氣)되는 날이기도 하다. 종합하면 이는 1945년 음력 7월7일을 가리킨다. 1945년은 을유(乙酉)년이다. 닭의 해다. 닭이 운다는 것은 1945년에 해당하고, 월성전은 7월7일이다. 음력 7월7일은 양력으로 8월14일이다. 그러니까 ‘월성’ 두 글자에는 1945년 양력 8월14일에 해방된다(닭이 운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일본의 항복 선언은 15일이었지만, 실제적으로 항복선언문은 14일 완성되었다고 본다.
‘황련’을 인수분해 하면 ‘전중공차지’(田中共車之)가 된다. 황(黃)자의 중간에는 전(田)자가 있다. ‘전중’은 황자 중간에 전자가 자리잡고 있음을 뜻한다. 황에서 가운데의 전을 빼면 공(共)이 된다. 그 다음에 련(連)을 분해하면 차(車)와 지(之)이다. 책받침( )은 갈 지로 보았다. 그래서 공차지가 나온다. 다시 전중을 보자. 전중은 밭의 가운데다. 고대에 정전법(井田法)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토지를 우물 정자로 9등분하여, 가운데 중심은 공전(公田)이고, 나머지 8군데는 사전(私田)이었다. 즉 사전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은 자기 것이지만, 가운데 밭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은 국가에 바쳐야 하는 세금이었다. 가운데는 국가와 공중(公衆)의 것이었다. 전중은 정전법의 가운데 부분을 상징한다. 사유가 아닌 공유, 나아가 오행으로 중앙 위치의 토(土)를 가리킨다. 토가 가리키는 숫자는 5(五)와 10(十)이다. 그러므로 전중은 5월10일로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음력이다.
그 다음 공차지를 보자. 공이란 공산당(共産黨) 또는 공산군(共産軍)을 의미한다. 지는 ‘간다’는 뜻이다. 조합해 보면 5월10일에 ‘공산군의 수레가 지나간다’는 의미가 도출된다. 음력 5월10일은 양력으로 6월25일이다. 6·25에 대한 예언을 이런 식으로 하였다. ‘위성황련’ 네 글자에는 1945년 8월15일 해방과 그 다음의 6·25가 예언되어 있었다. 이 얼마나 절묘한가! 한약재 처방전에서 시작하여 주역과 오행을 거쳐 8·15와 6·25까지 꿰뚫었다. 단 네 글자로 말이다. 이 예언 내용을 미리 예측하기도 어렵거니와, 그 예측을 이렇게 고준하면서도 압축된 표현으로 정제해낼 수 있는 야산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야산은 왜 대둔산을 주목했나
누가 한국 땅에 인물이 없다고 그랬는가! 모르는 소리다. 찾아보면 기막힌 인물이 정말 많았다. ‘위성황련’이라는 글씨를 받은 김병윤은 93세의 고령이지만 경북 봉화에 생존해 있다고 들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번 봉화에 가서 만나 뵈어야겠다. 봉화·풍기라는 지역은 구한말과 6·25의 난리를 겪으면서 ‘비결 따라 삼천리를 유랑한’ 한국의 비결파(秘訣派)들이 선호했던 땅이다. 지금도 비결파와 그 후예들이 더러 남아 있는 낭만적인 곳이기도 하다.
충남의 대둔산(大屯山)으로 가 보자. 논산과 대전 사이에 있는 대둔산은 험악한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통 화강암인데, 한마디로 악산(惡山)이다. 계룡산이 쇠주먹에 가죽장갑을 끼고 있는 기운과 같다면, 대둔산은 창검과 같은 기세다. 중국의 오악(五嶽) 가운데 서악(西嶽)으로 불리는 화산(華山)과 비슷한 기세를 지녔다. 화산도 온통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이라서 강렬한 에너지를 내품고 있다.
무협지에 나오는 화산파(華山派)의 무공은 단단한 화강암에서 나온 것이다. 대둔산은 화산보다 규모는 작지만 쭉쭉 직선으로 뻗어 있는 바위 봉우리 산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흡사한 형국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무인들이나 장군들이 많이 수도하였던 산이기도 하고, 신라와 백제가 결전을 벌이던 산이기도 하다. 동학 때에도 일본군에 마지막까지 저항한 동학군들이 결사항전을 벌인 곳도 대둔산의 험한 바위 봉우리들이었다.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대둔산 여러 봉우리 중에서 고급 기운이 뭉쳐 있는 봉우리는 독수리봉이다. 정신세계에 들어가 보면 독수리 형상의 바위산에는 독수리의 기운이 뭉쳐 있는 법이다. 신기하다. 이 봉우리 앞에는 태고사(太古寺)가 자리잡고 있다. 태고사는 옛날부터 호남의 3대 수도처(대둔산 태고사, 변산 월명암, 백양사 운문암) 가운데 하나로 손꼽혀 왔던 곳인만큼 영험한 곳이다.
에너지가 강해 기가 약한 스님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는 곳으로도 소문나 있다. 독수리봉 뒤로는 석천암(石泉庵)이 있다. 해발 600m 높이의 고지대다. 뒤로는 깎아지른 바위절벽이 버티고 있는 강렬한 느낌의 절경인데, 바위 속에서 솟아 나오는 샘물의 맛이 일품이다. 도 닦는 장소는 물이 좋아야 한다. 매일 먹는 물은 인체에 중요한 작용을 하므로, 도 닦는 데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석천암은 역대 대둔산에서 수도하던 도인들이 특히 선호하던 곳으로, 해방 후에는 야산이 제자들을 데리고 주역을 공부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야산의 학통을 이은 제자인 대산(大山) 김석진(金碩鎭·1928~)이 스승을 처음 만나 공부를 시작한 곳도 바로 대둔산 석천암이다. 당시 108명의 제자들과 공부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김석진 선생이 험난했던 자신의 주역 공부 과정을 밝힌 책 ‘스승의 길 주역의 길’(한길사, 2001)을 보면 당시 석천암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주역을 좋아했던 사람들의 관심사와 담론을 엿볼 수 있다. 당시 미국에서 들어오는 신학문을 택하지 않고 재래의 전통 한학을 고집하던 ‘도꾼’들의 내면세계와, 무엇을 위해 그 고생스러운 길을 자진해서 택하였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야산이 대둔산을 주목한 시기는 1945년이다. 그해 음력 2월 대둔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해방 되기 전에 대둔산으로 가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이전까지는 솜리(裡里)의 묵동(墨洞)에서 숨어 살았다. ‘솜리’라는 지명에는 ‘숨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일제 치하에서 숨어 살기에는 적당한 곳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둔산으로 거처를 옮긴 배경에도 역시 주역이 작용하였다.
대둔산이라는 이름에는 둔(屯)자가 들어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둔은 괘 이름이기도 하다. 수뢰둔(水雷屯)이 바로 그것이다. 위에는 감괘(坎卦가 있고, 아래에는 진괘(震卦)가 배합된 괘다. 위에는 물이 있고, 아래에는 우뢰가 있다. 물속에 우뢰가 들어 있는 상이다. 둔괘의 의미는 건곤이 서로 사귀어 만물이 시작한다는 뜻이다.
해방되기 전에 서둘러 대둔산으로 거처를 옮겼던 이유는, 해방이 되면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므로 새로 시작하는 시대에 인재를 키우고 기초공사를 하는 데는 둔의 이름을 가진 대둔산이 최적지라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야산은 이처럼 거처를 택할 때도 그 지명이 지닌 상징에 주목하고, 그 상징이 주역의 괘상과 부합되는 곳을 특히 선호하였다.
둔괘가 지닌 상징처럼 야산이 자신의 학문과 포부를 세상에 공식적으로 공개한 곳은 대둔산이었다. 이전까지는 기인 또는 광인으로 행세하였지만, 대둔산 시절 이후부터는 주역 학자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마터면 끊길 뻔했던 주역의 맥이 대둔산에서 결집되었고, 거기에서 시작된 맥 하나가 대산을 통해 오늘날까지 세상에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1950년대 중반의 일화를 하나 살펴보자. 당시 신소천(申素天) 거사라는 분이 있었다. 평생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서 한 경지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던 도인이었다. ‘금강경’은 선불교(禪佛敎)에서 애호하는 경전이다. 상(相·집착과 분별심)을 없애는 데 특효가 있다는 경전이기도 하다.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만약 모든 사물의 형상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면 그 즉시 부처가 된다)라는 구절은 한국의 선승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금강경 내용이다.
대전시 동구 비룡산 정상 바위에 새겨진 也山의 초서체 글씨. ‘號神發’이란 ‘신이 부르면 발(반응)한다'는 뜻이다.
신소천 거사와 야산의 일화
신소천은 바로 이러한 비상(非相)의 경지를 맛본 도인으로 소문나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서울 조계사에서 시작한 금강경 강의는 도학에 관심이 많은 식자층들의 화제에 오르곤 하였다. 그 신소천 거사가 한번은 야산과 만나게 되었다. 신소천 거사 쪽에서 먼저 야산에게 한번 만나자고 초대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 편지 겉봉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거이탈삼취무공이차기여우국성’(去二脫三吹無孔 以此寄與憂國聖).
신소천이 써 보낸 편지 겉봉의 글씨는 난해하였다. 편지를 전하던 야산의 제자가 무슨 뜻인지 해독을 못하고 스승에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다. 야산은 이 글귀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고 전한다. 과연 신소천 답다. ‘거이탈삼’(去二脫三)은 둘을 보내고 셋을 벗긴다는 뜻이다. 이는 신(申)자에 대한 인수분해다. 신자의 양쪽 변의 세로로 된 작대기 두 개를 떼어내고, 다시 가로로 된 작대기 세 개를 벗기면 무엇이 남는가. 기둥(申) 하나만 남는다. 이 기둥은 ‘구멍 없는 피리’(吹無孔)를 상징한다. 이것을 나라 걱정하는 성인에게 보낸다(以此寄與憂國聖)는 내용이다.
신소천은 신씨다. 그러니까 신소천의 마음 속에 간직한 진심을 나라 걱정하는 도인인 야산에게 보낸다. 그러니 한번 만나자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금강경’과 ‘주역’대가의 만남이었다. 두 사람의 장문인이 만났으니 당연히 스파크가 튀었을 것이다. 먼저 신소천 거사가 야산에게 질문을 던졌다.
“주역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점술(占術)에 있습니다.”
“점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라는 신 거사의 재차 질문에 야산은,
“건괘(乾卦) 구오(九五)에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매우 짤막한 두 사람의 문답이었지만 그야말로 핵심은 다 들어 있는 대화였다. 주역 64괘 중에서 제일 비중 있는 괘는 역시 첫번째 괘인 중천건(重天乾) 괘다. 위 아래가 모두 건괘로 이루어졌다. 그 건괘의 하이라이트는 구오다. ‘구오는 비룡재천(飛龍在天)이니 이견대인(利見大人)이라’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용이 하늘에서 여의주를 굴리며 신묘한 변화를 나타낸다는 내용이 구오에 담겨 있다. 야산은 바로 이 구오를 주역의 핵심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야산이 신소천 거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금강경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있습니다.”
야산이 재차 물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신소천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그 자리에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파상(破相:상을 깨트린다)입니다.”
과연 고수다운 문답이었다. 고수들일수록 문답이 짧으면서도 영양가는 높다. 하수들일수록 이야기가 늘어지면서 영양가는 없다. 고수들 문답은 들을수록 압축된 인생의 향기가 느껴진다.
이러한 인생을 살다 간 야산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가? 야산의 생년, 월, 일, 시를 손자인 이응국 씨에게 물어 보았다. 1889년 음력 9월16일 진시. 만세력에서 육십갑자를 뽑아 보니 을축(己丑)년 갑술(甲戌)월 기미(己未)일 무진(戊辰)시가 나온다. 소위 말하는 무진축미(辰戌丑未) 사주다. 흔히 제왕 격의 사주라고 한다. 야산의 사주를 감정한 당대의 술사들은 ‘후토성군’(後土聖君)의 사주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지지에 이처럼 토가 많이 있는 사주는 정치 쪽으로 가지 않더라도 대체적으로 종교나 도학과 인연이 깊다. 야산과 혼사를 맺은 사돈들도 모두 당대의 기라성 같은 도인들이었다. 야산의 셋째아들인 양화(艮和)의 장인은 송을규(宋乙奎)였는데 그는 지리산 문도사(文道士)의 제자였다. 송을규의 별호는 성성주인옹(惺惺主人翁)이었다고 할 만큼 한가락 하는 인물이었다. 송을규의 스승이었던 지리산 문도사는 구한말 조선의 4대 기인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도꾼들이 꼽았던 4대 기인은 김일부·강증산·박만수(경상도에서 활동함)·문도사였다고 한다. 문도사는 지리산 청학동으로 내려오는 선맥(仙脈)을 계승한 인물이라는 것이 손자인 이응국씨의 설명이다. 지리산파의 비중 있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아쉽게도 문도사에 대한 별다른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야산의 생애와 일화를 대충 더듬다 보니 불현듯 산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산신령이 나를 부른다.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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