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의 주인공인 허경주(許景周·1929~2020년) 선생이 글을 쓰기 시작한 때는 1999년, 나이 일흔 되어서다. “그해 현충일 특집 기사와 방송을 본 뒤 6·25 참전 용사의 한 사람으로 회고록을 쓴다”고 조카(許誠凡)에게 밝혔다고 한다.
스물한 살 청년이 겪은 이야기
기자는 숨이 막힐 듯한 8월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스물한 살 청년이 겪은 이야기와 마주했다.
육군 제1사단 15연대 2대대 6중대에 배치되어 평양 탈환 후 평북 순천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압록강가 만포진을 향해 진격하던 그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또렷했다.
그러나 다리를 크게 다쳐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각자도생으로 군용열차에 실려 부산역까지 내려갔다가 고향인 경남 진주까지 흘러든 사연은 눈물겨웠다.
허경주 선생은 유명 장군도 아니요, 격전지 전투부대를 지휘한 용감한 장교도, 노련한 부사관도 아니었다. 일선 전투소대의 경기관총 탄약수로 시작해 부사수와 사수로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용케 살아남은 이름 없는 병사일 뿐이다.
허경주는 1929년 5월 24일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이 지역에서 살아온 선비 가문이었다. 한날 한시 고향 동기들과 같이 국가의 부름을 받아 경남 마산시 소재 옛 일본군 막사에 입대한 날을 그는 1950년 7월 14일로 기억한다.
얼마 후 경남 김해 진영읍 소재 진영중학교에 머물렀다가 다시 행군해 김해국민학교, 부산 사상국민학교 등지로 이동한 후 다시 대구 임시 육군중앙훈련소(당시 대구 삼덕국민학교)에서 처음으로 각개전투와 제식훈련을 받았다.
전선으로 떠나기 위해 트럭에 옮겨 탔을 때 고향 친구들이 대성통곡하면서 “이제 헤어지면 언제 살아서 만나겠느냐”고 하던 절규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그 친구들은 거의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고 말았다.
그는 1950년 8월 초 경북 영천군 화산면 부근의 시골 장터에 집결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중환자를 보고 전쟁의 참혹함을 처음 깨닫게 되었다. 당시 총구가 나팔처럼 벌어진 M1 소총을 지급받았는데 노리쇠가 녹슬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화기소대 경기관총(LMG) 탄약수로 배치받아 첫 전투에 나섰다. 소련제 장총에 착검한 삼각형의 창을 휘두르는 인민군 병사와 육박전을 벌였다. 동이 튼 뒤에 보니 그가 쓴 총알에 죽었음직한 인민군이 7~8명은 되어 보였다.
대구 팔공산 주위 능선 등지에서 격전을 치렀는데 죽어 가는 병사와 부상당한 병사 등이 한결같이 “어머니!” 또는 “위생병!”을 부르는 절규와 울음소리가 산과 계곡을 가득 메우며 메아리쳤다.
선생은 부상이라도 당해 후방으로 이송되길 바라며 왼팔을 참호 밖에 내밀었지만 적탄(敵彈)이 용케도 피해 갔다. 그는 “여기저기서 (아군 병사들이) 쓰러져 가는 데 (나는 맞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절실히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북진 길에 발견한 100원권 지폐 더미
이런 일도 있었다. 연일 불면불휴(不眠不休·자지 못하고 쉬지 못함)의 고통을 참으며 행군하던 중 경북 상주 인근에서 저격수의 표적사격으로 몸에서 10cm 가까이 총알이 지나가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일이 있다. 또 덤불 속에서 중상을 입은 인민군을 발견했는데 단말마의 고통을 호소하고 애원하며 “총 한 발을 쏴 죽게 해달라”고 하던 외침이 수십년 동안 가슴을 후벼 판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인생을 포기하여 죽어야 하는가 싶었다”고 회고록에 썼다.
허경주 일병은 충북 어느 야산에서 인민군에게 생포되기도 했다. 그 인민군 병사는 담배와 불을 권할 정도로 인간적이었다. 그러나 그 인민군이 목이 말라 고인 논물을 먹으려고 할 때 총기를 탈취해 죽일 수밖에 없었다.
북진하는 길에 인민군 참호 앞에서 100원권 한국은행 지폐 100장 묶음을 근 1000다발 발견한 일도 있다. 군장(軍裝)도 무거운데 돈다발까지 가중되자 모두들 돈을 길에 버리고 말았다. 평양에 도착해 동평양내무서(경찰서)에 주둔했는데 수색 도중 한 식당에 가보니 밥은 다 되어 있었고 솥에 국이 끓고 있었다. 혹시라도 독을 넣지 않았을까 의심이 되었지만 배고픔이 그 의심을 한 순간에 눌렀고 차려놓은 저녁을 허겁지겁 다 먹었다.
계속 북진해 청천강에 이르렀는데 강변 모래밭에서 야포 바퀴에 오른쪽 발목이 깔려 완전 골절되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다리를 쓸 수 없는 부상은 중상이므로 평양 27야전병원으로 후송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군의관과 위생병들만 구급차에 나눠 타고 떠나 버렸다. 나머지 부상병들은 죽기살기로 각자도생하며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중환자들은 병원에서 대성통곡을 해댔다. 산전수전을 겪고 죽을 고생을 하며 동평양역부터 수차례 군용열차를 갈아타 가며 경북 김천, 대구를 거쳐 9일 만에 종착역인 부산에 도착했다. 고향에 가기 위해 다시 배를 타고 마산에 도착해 원대 복귀 대신 다친 발을 치료하기 위해 고향을 찾아가 부모와 조우했다.
알고 보니 고향에서 징집된 27명 중 6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전사했거나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는데 6명마저도 그를 제외하고 모두 중상을 입어 온전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허경주는 이후 고향에서 다친 다리를 치료한 후 다시 1사단 15연대로 원대 복귀해서 1954년 6월 29일 병장 으로 만기 제대했다.
“차마 못 듣겠더라구요”(아내 이대순)

선생은 럭키화학, 진영화학 등지에서 일했고 대동화학 공장장을 거쳐 플라스틱 제조업체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지난 2020년 3월 11일 향년 91세로 작고했다.
결혼 후 부산에 정착한 부인 이대순(88) 씨에 따르면 “남편은 학자풍이었다”고 한다. 인자하고 강직한 성품이었다는 것이다. 더러 6·25 당시 참전 경험을 말하곤 했단다.
“낙동강 다부동 전투, 1사단을 따라 평양에 갔던 이야기 등등을 종종 들려주었어요. (들을 때마다) 차마 못 듣겠더라구요. 후퇴할 때 시체 송장 밑에서 사흘을 숨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인민군이 장검으로 주검들을 찔렀는데 남편 곁을 지나쳤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욕을 보고 고향 집에 도착하니 부모들이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군복을 벗겨 도랑에 빠는데 피가 흥건하더랍니다.”
“최고의 극한 상황을 이겨 내며”
차남 성일 씨는 생전 아버지와 다부동 전적비, 대구와 영천의 전투 현장 등지를 둘러본 기억이 생생하다.
“선친의 회고록을 직접 읽어 보았고 그때의 일을 직접 여쭤보곤 하였죠. 아마도 집필을 결심하시게 된 동기는 모 신문사의 6·25 참전 수기 모집 공고를 보고 결심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사진은 유품 정리하면서 다 태웠던 걸로 기억합니다.”
허경주 선생의 손녀(성일 씨 딸) 태연(許太連·42) 씨는 할아버지의 회고록을 2014년 처음 보았다.
“할아버지 수기를 처음 봤을 때 소설 같은 이야기에 많이 놀랐습니다. 당신께서 생전에 워낙 과묵하셔서 참전 용사셨다는 말만 들었을 뿐 일절 당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저 무용담이 아니라 동족상잔의 비극을 몸소 체험하신 할아버지, 그리고 참전하신 모든 분들께 깊은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진주 고향에서 어린 시절 같이 살았던 허경주의 조카 허성범(78·전 소방직 고위 공직자) 씨는 다리를 치료하던 숙부의 모습이 아직도 떠오른다고 했다. “어린 시절, 사랑방 가마솥에는 인동초와 익모초를 달이던 냄새가 끊이질 않았다”고 회상한다.
“말로 이야기를 듣던 것과 글로 읽는 것은 전혀 다르더군요.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든 인간 최고의 극한 상황을 이겨 내며 살아남으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집안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물론 이 시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허경주 선생이 쓴 회고록은 조카 허성범 씨, 손녀 허태연 씨, 김해 허씨 문중 관계자 등이 문장을 고치고 다듬어 《월간조선》에 전달되었음을 밝혀 둔다. 지면 사정으로 생동감 있는 전문을 다 싣지 못했다.⊙
사선(死線)을 넘은 어느 병사의 귀향
허경주(1929~2020년)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지금의 경남 진주시 외곽에 자리 잡은 지수면 시골 마을 승산리다. 기억으로 남침이 시작된 지 3일 후인 6월 28일에야 전쟁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나이 스물한 살이었으나 전쟁의 진정한 의미도 잘 몰랐다.
7월 초순경, 면사무소 병사(兵事) 담당 직원이 우리 집 사립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더니 종이쪽지를 내게 건넸다. 징집영장이었다. “내일 당장 지수면사무소로 집합하라”는 것이었다.
쪼그리고 앉아 팔을 접고 그 위에 이마를 묻고는 살지 죽을지 모르는 내 운명을 생각하고 있자면 아버지는 연신 곰방대에 담배 잎을 더 넣어 독한 연기를 빨아들이면서 한숨만 내쉬었다. 어머니는 나를 잡고 “문수(나의 아명)야, 문수야, 이게 무슨 일이고”를 반복하면서 대성통곡하시고, 형수는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소매 끝으로 연신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다.
바로 밑의 여동생은 나이가 좀 들었다고 무얼 아는지 “오빠, 오빠” 하면서 울어 대고, 막내동생과 조카들은 침통한 분위기에 눌려 눈망울만 이리저리 굴려 대는데, 세 살배기 막내 조카는 영문도 모르는 채 이리저리 기어 다니며 해작질을 부렸다.
“문수야, 문수야, 이게 무슨 일이고”

이윽고 명색이 출정식이라 하여 면장을 비롯한 면 직원과 지서장 그리고 동네 유지라고 하는 사람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면장이 무운장도(武運壯途)를 비는 연설을 한 후, 참석자들의 박수갈채를 받고서는 그 길로 이십 리쯤에 있는 반성역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집결지인 진주로 가기 위해서였다.
‘내가 살던 외딴 초가집, 그 속에 사는 부모와 형제, 어린 조카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내가 가는 이 길을 다시 밟을 수 있을까? 잘 있거라 산천아, 정든 고향 하늘아! 부디 이 한 몸 살아 돌아오도록 보살펴 주기를’ 되뇌이며 우리 집이 보이지 않는 ‘허실’ 골짜기에 들어섰다.
한 시간 반가량을 걸어서 반성역에 이르니 인근 다섯 개 면에서 징집된 내 또래의 장정들이 진주행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짐작만 할 뿐 침묵이 흘렀으나 얼굴에는 불안만이 감돌았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진주에 도착하여 천전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했다. 모인 인원이 약 500명쯤 되었는데 시청 공무원이 나와서 일일이 호명하더니 그 길로 다시 내가 타고 왔던 반대 방향인 마산행 열차에 태워졌다.
마산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무렵이었고 우리는 곧바로 불과 5년 전까지 일본군이 사용하던 병참소에 집결했다. 여기서 며칠을 보내고 있던 중, 1950년 7월 14일 군번을 부여받아 군인이 된 것이다. 여기서 방위군 조교라는 기간(基幹)병사가 있었으나 우리에게 아무런 신병 교육도 시키지 않았고, 하는 일 없이 며칠을 보내고 있는데 외부에서 들리는 소식은 인민군들이 호남지방을 완전 점령하고 곧 섬진강을 건너 진주 쪽으로 진격해 올 것이라고 했다. 총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는 우리들로선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데 그날 저녁 갑자기 비상 집합을 시키고는 어디론가 행군을 명령했다. 도로를 따라 3~4시간가량 걸어서 도착한 곳이 지금의 김해시 진영읍 소재 진영중학교였다. 김해로 온 이틀 만에 다시 이동 행군을 했다. 역시 어디로 향한다는 말은 없었다. 마산을 잇는 국도를 따라 도착한 곳이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있는 김해국민학교였다. 거기서 3일 정도 할 일 없이 머물게 하더니 다시 부산 사상역 앞에 있는 사상국민학교로 이동하여 또 3일간을 보냈다.
진주, 마산, 김해, 부산 거쳐 대구로

그날 밤 전선으로 곧 출동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과연 소문대로 우리는 화물열차에 태워졌다. 다들 바로 전선으로 가는 줄로만 알았다. 화물열차 철판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잠을 청해 보았지만, 앞날에 대한 불안으로 잠은 오지 않았다.
한참을 가니 어느덧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멀찌감치 사람이 사는 곳이 보이는데 기차역도 아닌 곳에서 우리들을 내리라고 했다. 줄을 지어 얼마간 행군을 하며 도착한 곳이 대구 삼덕국민학교였는데 거기가 임시 육군중앙훈련소였다. 이곳에서 찌는 듯한 무더위를 견디며 일주일간 소총 분해 결합, 각개전투, 제식훈련 등 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러고 나니까 어느 정도 전투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 생각해도 그해는 유난히도 더웠다. 여름의 한복판인 8월 어느 날 아침 8시경, 나와 같이 훈련을 받았던 신병 일부를 제1진으로 하여 대기 중인 군용 트럭에 태워졌고, 드디어 전선으로 출동하려는데, 고향에서 한 날 소집되어 입대한 친구 허태구와 정현동이 위병소까지 나와 내가 탄 트럭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살아 만나겠나” 하는 말에 나도 북받치는 눈물을 참으며 “그래, 우리 부디 살아서 다시 만나자”고 대답했다. 그때의 이별 장면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훗날 들으니, 그들은 나보다 하루 뒤에 전선으로 나갔고 둘 다 불귀의 객이 되었는데 이 중 정현동의 최후는 내가 목격한 바다.
신병들이 도착한 곳은 경북 영천시 화산면 어느 시골 장터였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부상병들을 군용 구급차에서 내려놓는 광경이었다. 인솔자는 우리들을 집합시켜 놓고 인민군 포로 한 명을 앞에 세우더니 인민군의 복장은 이러하고 머리는 까까머리라는 식으로 인민군의 견본을 소개했다. 그러고는 개인별로 무기를 지급하는데 총구가 나팔처럼 벌어져 있고 노리쇠는 녹이 슬어 꼼짝도 하지 않는 M1 소총 한 자루와 실탄 한 탄띠 그리고 수류탄 두 발이 전부였다.
진지 내에서의 육박전
점심때가 되어도 밥을 주지 않더니 오후 2시경이 넘어서야 주먹밥 한 개가 나왔다. 그러고는 트럭에 태워져서 북으로, 북으로 가다가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산 중턱에 내려졌다.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아군의 존재를 알리는 표식인 대공포판(對空布板)이 눈에 띄었다. 조금 있으니 한 장교가 나타나더니 “제관(諸官)들은 제1사단 15연대 2대대 6중대에 배치되었다. 본관은 중대장이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더니 그간에 겪었던 실전 상황을 간단히 들려주고 “잘 싸워 주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기고 참호로 돌아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화기소대 경기관총(LMG) 탄약수로 배치받았다. 그러고 최전방 전쟁터로 배치된 곳이 경북 영천시 북방 소재 300m쯤 되는 고지였다. 금시라도 인민군이 불쑥 나타날 듯한 곳에 산병호(散兵壕)를 구축하고 경계근무를 하고 있었다. 저녁 8시경에 전달이 오기를, 우리보다 다소 높은 바로 앞의 고지에 적이 있어서 새벽녘에 야음(夜陰)을 이용하여 기습공격을 해올 것으로 예상되니 철저히 대비하라는 지시였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전방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조금만 흔들려도 간담이 서늘했고 머리끝은 주뼛거렸다. 그렇게 계속되는 긴장감으로 지친 탓인지 잠이 오기 시작했다. 적과 대치 중 자면 죽는다는 것은 굳이 교육을 받지 않아도 상식으로 능히 알 수 있는 일이었으나, 잠이 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나도 모르게 죽음의 길로 향했다. 참호 속에서 슬며시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갑자기 총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뒤범벅되어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선 순간 인민군 병사가 소련제 장총에 착검한 총창(銃槍)으로 나의 복부를 향해 찔러 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확 피하면서 M1 소총 개머리판으로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적의 창은 땅을 찔렀고, 그 순간 같은 참호 속의 전우가 그 적을 쏘아 그 자리에서 시체로 변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육박전이었다.
그다음부터 어둠 속에서 적군은 개미떼마냥 올라왔다. 무조건 집중사격을 가하면서 가지고 있던 두 개의 수류탄도 집어 던졌다. 기습공격을 당했지만 우리가 위치한 곳이 높아서 방어가 용이했다. 이때 적진에서 조명탄이 쏘아올려지더니 그 신호에 따라 적은 퇴각, 하산하는데 아군은 퇴각하는 적을 향해 계속적인 집중사격을 가했다. 죽어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조명탄 불빛을 통해 보고 있는데 입고 있는 군복 바지가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웬일일까 싶어 바지를 추스르며 허리띠를 조르니 힘없이 당겨졌다. 조금 전 적의 총검이 스칠 때 허리띠가 절단된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란 참으로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어둠 속 적이 내 배를 향해 총검으로 찔렀으나 약간 빗나가는 바람에 살아났고 적은 죽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적과의 첫 대전에서 육박전을 실감하게 되었다.
여름이라 일찍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산병호를 나와 기지개를 폈다. 내가 쏜 총알에 맞아 죽었음직한 인민군만 해도 족히 7~8명은 되어 보였고, 나의 배를 향해 총검으로 찔렀던 적군 병사의 시신을 보니 매우 어려 보이는 소년병이었다. 적이라 해도 죽어 있는 그의 모습이 가여웠다.
적의 사상자는 우리보다 3배 이상 많아 보였다. 포로로 잡은 적은 3명 중 둘만이 무장한 상태였고, 한 사람은 소위 의용군 명목으로 강제로 잡혀 온 남한 출신 청년으로, 배낭을 메고 미숫가루와 쌀, 보리를 볶아 만든 비상식량을 운반하던 사람이었다. 포로 중에 유난히 어려 보이는 자가 있어 나이와 고향을 물어보니 올해 17살이며 경기도 출신이라면서 강제로 잡혀왔다고 했다. 더 처참했던 것은 즐비한 시체들 모두가 하나같이 앳된 모습이라는 점이었다. 나도 이 순간 살아 있기에 망정이지 조금 전의 예리한 총검에 찔려 죽었더라면 저러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실로 무엇을 위하여 동족을 죽이고 동족에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무슨 원한이 맺혔기에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한단 말인가?
참혹한 대구 팔공산 전투
우리 중대는 서북방인 대구 팔공산으로 이동하여 거점을 확보했다. 당시 1사단장은 백선엽 장군이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대치 중인 적 4군단은 김무정(金武亭)이 지휘하는 인민군 주력 부대였다고 한다.
김무정이란 자는 중국공산당 휘하의 악명 높은 팔로군(八路軍) 출신으로 부하들의 목숨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무자비하게 공격을 감행하는 인물로 소문이 나있었다. 이 같은 김무정의 부대와 격전지로 널리 알려진 다부동 일대에 인접한 팔공산 자락의 7~8부 능선을 중심으로 매일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하다 보니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죽어 가는 부상자가 “어머니!” “위생병!” 하고 외치는 절규가 이 산 저 산에 메아리쳤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죽음이 두려웠다. 평생 불구가 되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제발 중상이라도 입어 목숨이라도 구하고 싶었던 것이 그들의 소망이었다.
많은 병사들이 한참 전투를 할라치면 참호 속에서 총탄이 비 오듯 날아오는 방향으로 오른팔은 사격하고, 왼팔은 맞아도 좋다는 심정으로 높이 치켜들기도 했다. 그래도 생각은 있어서 오른팔을 다치면 생활하기 불편할 것 같고 다리를 다치면 걸을 수 없을 것 같아, 왼팔이라도 다쳐 후송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죽고 다치는 것도 운명인지 여기저기서 전우들이 금세 쓰러져 가도 내 팔에는 총알 하나 박히지 않았다.
적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것은 너무도 빤한 이치였다. 내 눈동자는 이미 살기(殺氣)로 가득 차 있었다. 전우들은 계속 죽어 나갔고 신병들이 보충되어 왔다. 그중에는 서른이 넘은 사람도 있었다. 모두들 잔뜩 겁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거리에서 바로 끌려온 사람들로 훈련도 받지 못하고 곧바로 진지로 배치되어 소총 실탄 장전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들이 홀치기 당해 왔다고 해서 ‘홀치기’라고 불렀다. 나는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틈을 타서 이들에게 총 쏘는 교육을 시키고 그간의 전쟁 경험담을 들려주곤 했다.
팔공산은 낙동강과 대구의 방어선이었다. 8월 중순 어느 날부터 적의 주력 부대가 대규모로 총공격을 감행해 왔다. 우리 부대는 미군 보병부대와 합동작전에 들어갔다. 때가 때인지라 무덥기도 했고 장마도 길어서 비도 많이 왔다. 팔공산 정상에는 햇볕이 따갑게 쬐는가 하면 어느 날 오후부터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관총 진지 참호 속에서 밤새 비를 맞으며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데 물이 가슴까지 가득 차올랐다. 그래도 움직임이 적에게 감지될까 봐 움직일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렇지만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아 조금씩 움직여 보려 했다. 역시 느낀 대로 하체가 아무런 감각도 없이 마비되었다.
이때 적이 나를 공격했다면 앉은 채로 죽고 말았을 것이다. 과연 살 사람은 살게 되어 있는지 이때만은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다. 날이 밝아 오고 아침 햇살이 비추기 시작하니 다행히도 하체가 조금씩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3시쯤일까, 적은 우리가 방어 중인 고지를 완전히 포위했다. 불과 100m 앞까지 접근해 와있었다. 피아(彼我)가 너무 근접해 있어 후방의 야포(野砲) 지원사격도 할 수 없었다. 전투기의 기총소사와 폭격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적은 총공세를 가해 왔고, 우리는 고지 사수를 위해 결사적으로 방어했다. 올라오는 적을 향해 필사적인 사격을 가했다. 뒷날 지휘관들로부터 들은 얘기지만 나중에는 미 공군과의 교신을 시도했지만 교신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화기소대는 경기관총 2정을 좌우로 나누어 사격을 하는데 나는 좌측 진지에 설치한 기관총으로 벌떼처럼 올라오는 적을 향해 연발사격을 가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군이 나의 총구 앞에서 쓰러져 갔다. 그 다급한 그 순간에 기관총에 이상이 생겼다. 장시간 연발사격으로 총구가 과열되어 약실에 탄피가 박혀 사격이 중단되었다. 그때 뒤에서 우리를 지휘하고 있던 중대 부관이 권총으로 공포를 쏘아 대면서 “기관총은 뭣 해! 이 새끼, 즉결처분이다!”라고 악을 써댔다. 적에게 죽거나 상사에게 죽거나 이래저래 죽을 판이었다. 탄피를 제거하려면 총구 청소용 긴 쇠막대기인 ‘꽂을대’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겐 그것이 없었다. 꽂을대를 구하려면 우측 기관총 진지까지 가야 하는데 50m쯤의 거리였다.
사수의 명령에 따라 부사수인 내가 참호 간의 통로를 따라 반은 기어가며 뛰었다. 말이 50m이지 그 상황에서 50리쯤으로 여겨졌다. 적탄이 비 오듯 해 일단 중간에 있는 소총수 참호에 잠시 몸을 숨겼다. 이때 아래쪽을 살펴보니 소나무 덤불 속에서 사람의 머리 부분 같은 물체 두 개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옆에 있는 소총수에게 “저게 뭐냐”고 물었더니 “적군이 다가오는 것”이라고 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폭음과 함께 적들의 몸이 산산조각 나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다시 뛰어가 우측 기관총 진지에 도착해서 꽂을대를 얻어 가지고 좌측 내 진지로 돌아왔다.
전쟁의 참상 중 가장 뚜렷하게 각인된 사건
급히 꽂을대를 기관총 총구에 집어넣고 밀어 올리자 약실에 박혔던 탄피가 빠져나오고 기관총은 다시 불을 뿜기 시작하였다. 많은 적군이 기관총 총구 앞에 꼬꾸라지면서도 후속 병력이 연이어 공격해 왔다. 하지만 우리의 저항이 워낙 거세다 보니 이제는 적진에서 박격포를 쏘아 대기 시작했다.
참호 속에서 죽은 듯이 바싹 엎드려 있었다. 날아온 흙더미가 온몸을 덮고 있는데 피비린내가 심하게 났다. 혹시 내 몸에서 피가 나는 것 아닌가 해서 몸을 더듬어 보았으나 괜찮은 것 같았다. 옆을 쳐다보니 전우 한 명이 파편에 목이 관통하여 즉사하였고 조금 전까지 권총으로 나를 죽이겠다고 위협하던 중대 부관은 복부에 파편을 맞아 겨우 숨만 붙어 있다가 곧바로 숨이 끊어졌다. 적들도 지칠 대로 지쳤는지 공격은 주춤해졌고 오후 4~5시경 적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오래전의 이 장면은 내 머릿속 전쟁의 참상 중에서도 가장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나는 중대 부관의 시신을 어깨에 둘러메고 중대 전투지휘소(CP)로 갔다. 흐르는 피로 인해 내 몸도 피범벅이 되었다. 중대장은 부관의 시신을 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처절한 광경을 묵묵히 쳐다만 보았다. 워낙 생사를 넘나드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감정 같은 것은 이미 메말라 버렸다. 한참을 통곡하다 일어난 중대장이 나를 보고는 “너는 어찌 살았느냐”면서 나의 온몸을 훑어보고는 “너 참 명당 집 자손이구나”라고 했다.
그렇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집 우물가에서 정한수 떠놓고 둘째 아들의 무사귀환을 빌고 계실 어머니, 일평생 가난과 모진 인고의 세월을 보내시며 살다 가신 할머니의 영혼이 나를 보살피고 계실 것이라는 상념이 머리를 스쳤다.
일로북진(一路北進), 또 북진
이때부터 우리 부대는 북으로 향하는 행군을 시작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강행군이었는데, 체중만큼이나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땀을 흘리며 자갈길을 걷고 개울을 건너다 보니 발바닥이 불어 터져 피가 흐르고 썩어 갔다. 행군 중 5분간씩 주어지는 휴식 시간에 신을 벗어 바람을 쏘이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잠을 못 자는 것이었다. 주야로 행군에 시달리며 잠을 못 자니 제 아무리 체력이 강한 사람도 배길 장사가 없었다. 두 다리는 걷고 있지만 머리로는 잠을 잤다. 걷다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잠을 깨는 자, 자면서 가다가 언덕에서 떨어지는 자가 있는가 하면 도로 한복판으로 지나가는 미군 탱크 바퀴(캐터필러)에 걸려 오징어처럼 납작하게 짓눌려 죽어 가는 병사도 생기는 등 참으로 별별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찌는 듯한 여름인지라 목이 말라 죽을 것만 같았다. 독약이 든 물이라도 우선 먹어야 했다. 인민군들의 썩은 시체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논바닥이나 계곡 어디서 물만 보이면 뱃속에서 꿀렁꿀렁 소리가 날 때까지 입으로 양껏 빨아 마셨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마시고도 누구 하나 배탈이 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북진 중 간헐적인 교전은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상주 근처에 도달해 적이 파놓았던 참호 설치 지역에 잠시 머무르고 있었다. 이때 바로 옆 야산 정상에서 소수의 적군이 우리를 향하여 표적사격을 가해 왔다. 장총 소리가 한 번 ‘딱콩’ 하면 아군 한 사람씩 쓰러지는데도 적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중에도 겁 없이 참호에서 일어나 총을 손질하고 있는데 실탄 한 발이 나의 오른발 앞쪽 10cm 거리에 떨어지는가 했더니 바로 또 한 발의 실탄이 머리 위로 날아가는 듯했다. 아마 적 두 명이 조준하고 쏜 것 같았다. 참으로 인명은 재천(在天)이라더니 운수대통으로 총알이 나를 피해 갔고, 나도 이 정도에는 놀라지 않는 제법 백전노장이 되어 가는 성싶었다.
연일 제대로 자지도 쉬지도 못하는 고통을 안고 행군을 계속하던 중 어느 날 길옆 덤불 속에서 인기척이 나는 듯하여 살펴보니 중상을 입은 적병 한 명이 “총 한 발만 쏘아 주고 가라”고 애원했다. 그는 고통을 못 이겨 죽고 싶었던 것이다. 비록 적이긴 해도 그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웠다.
얼마를 갔을까. 코에 악취가 나기에 살펴보니 미군 시체 한 구가 길가 풀섶에 누워 있었다. 순간 내 눈에 번개같이 비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신고 있는 군화였다. 군화를 벗기기 위해 끈을 풀고 잡아당기자 발목이 군화에 담긴 채로 끊어졌다. 군화 속에 담긴 끊어진 발을 들어내고 풀을 뜯어 군화 속을 대충 닦아 내고 신어 보니 단단하고 안정감이 그만이었다. 그때 아군의 군화래야 고작 광목에 고무를 붙여 만든 조잡한 것이었고 군복 또한 무명천을 국방색으로 염색한 것이었다. 이런 실정이고 보니 처음 신어 본 가죽으로 만든 미군 군화는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런 보물을 상급자들이 그냥 보아 넘길 리가 없었다. 결국 군화를 신어 보자마자 그 길로 상급자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포로로 잡히다
벼가 누렇게 익어 가는 늦여름 어느 날 충북 어느 곳으로 기억되는 나지막한 야산에 임시진지를 구축하고 야영을 하게 되었다. 햇살이 작열하는 오후 2시경, 앞을 바라보니 대략 1km 정도 거리에 30여 호쯤의 민가가 보이는데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상급자인 소대 ‘김 중사’(이름 미상)가 나더러 마을로 같이 가자고 했다. 아마도 술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마을로 접어드니 역시 멀리서 짐작한 대로 모두들 피난 가고 온 동네는 비어 있었다. 그중 한 초가집에 들어가니 술 냄새가 났다. 냄새 나는 곳을 따라가니 마당 모퉁이의 거름더미 속이었다. 거름을 헤치니 술독이 드러났고 뚜껑을 여니까 이건 술이 아니라 아예 식초였다. 그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코를 찔렀다. 그래도 김 중사는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 바가지를 들고 나와 술 아닌 술을 퍼 꿀꺽꿀꺽 마셨다. 나는 식초 술을 마시는 김 중사의 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귓전에 인기척을 느끼고 울타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인민군들이 우리 주변을 에워쌌는데 그들은 따발총에 착검을 하고 “손 들어!”라고 했다. 머리끝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고 하늘색이 진짜 노랗게 보였다. 영락없이 죽는 신세였다.
그러는 순간 열려 있는 사립문으로 인민군 5명이 총을 겨누며 들어오더니 그중 한 명이 “총 버려!”라고 했다. 나는 총을 던졌다. 김 중사도 어깨띠 모양으로 뒤로 걸치고 있던 M1 소총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날은 밝아 왔고, 김 중사와 나는 각자 상자 하나에 주먹밥 30개를 담아서 짊어지고 기관총 실탄 2통을 한 손에 한 통씩 들고 인민군의 안내에 따라 걸었다.
우리를 감시하던 인민군 감시병은 건장한 체격으로 뒤에서 소련제 따발총을 우리의 등을 향해 겨누었다. 어딘지 모르는 곳을 향해 계속 걸어가던 중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대화가 오갔다. 그는 함경북도 길주가 고향이라고 하면서 가족관계, 고향의 정취를 소상하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전쟁 중이라 그렇지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탈출
두어 시간을 걸었을까. 김 중사가 먼저 땀도 흐르고 목도 마르니 잠시 쉬어 가자고 하자, 그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러자고 하면서 우리에게 담배도 주고 불도 붙여 주었다.
우리가 쉬고 있는 자리는 계곡 속의 천수답(天水畓)이 계단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물을 먹지 못했어도 살아날 일이 꿈만 같아 갈증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인민군 병사는 몹시도 목이 타는지 농로 옆을 끼고 조그마한 수로가 있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그 수로의 물은 말라 있었다. 다만 낮은 곳에 자작하게 물이 고인 곳이 있었는데 거기를 손으로 흙을 파내었다. 한 사람이 먹을 만큼의 흙탕물이 고였다. 잠시동안 기다리자 흙이 가라앉아 물이 맑아져서 그런 대로 먹을 만한 물이 되었다.
그는 총을 땅바닥에 내려놓더니 한 손으로 멜빵 끈을 잡고 무릎을 꿇고서 물에다 입을 대고 빨아 마셨다. 그 순간 김 중사가 잽싸게 그의 총을 빼앗았다. 인민군 병사도 발악적인 반항을 했다. 김 중사는 끝내 그 총을 빼앗아 그를 사살하고 시체를 풀숲에 밀어 넣고 주변의 풀을 거두어 덮어 숨겼다. 나는 상의를 벗어 주먹밥 몇 덩어리를 싸고서는 밥 상자와 실탄통을 벼가 누렇게 익은 논에 던져 버리고 산허리를 따라 재빠르게 도망쳤다.
산속에서 잠을 청하려 해도 모기가 물어뜯어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새워 해 뜨는 것을 보고서야 겨우 동서남북의 방향감각이 잡혔다. 이때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차량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군용 트럭임을 알 수 있었다. 보닛 위에는 대공표시판이 붙어 있었으며 무전기 안테나도 눈에 들어왔다. 색깔을 보니 미군 차량이었다.
우리는 사단 헌병대에서 간단한 조사를 받고 2박 3일간 머물다가 원대 복귀하였다. 그때서야 그 지역이 충북 보은군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우리는 중대장으로부터 무단으로 부대 이탈한 잘못으로 크게 혼이 났다. 평시 같으면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도 받았겠지만, 전쟁 중이라 실전 경험을 갖춘 병사 한 명이 아쉬운 터이므로 그만 하고 넘어간 것 같았다.
부역자 처형

잠시라도 서울 거리에 내려 보았으면 했으나 그대로 달렸다. 의정부와 동두천을 거쳐 연천군 맨 왼쪽에 있는 임진강 상류 고랑포에 와서야 차에서 내렸다. 거기가 바로 ‘38선’이라고 나무 판자에 페인트를 칠한 표시판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우리는 고랑포국민학교에 주둔해서 하룻밤을 보냈다.
날이 밝자 임진강 백사장에서 총살형이 있다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호기심이 일어 전우들과 구경을 갔다. 처음에는 우리와 같은 처지의 병사들 중 도망치는 자를 잡아 일벌백계로 총살시키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앞에 보이는 처형 대상자는 20세도 못 된 앳된 처녀 여섯 명이었다. 사연인즉 이들은 서울 소재 여고 상급반 학생들로 인민군이 후퇴할 때 같이 월북하다가 낙오되었다고 한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지 석 달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얼마나 사상교육을 철저히 받았는지 흉측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우리 측의 총살 집행관이 지금이라도 잘못을 시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설득하는데도 들은 척은커녕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과 함께 “인민공화국 만세” “김일성 수령 만세”를 외쳐 댔다. 할 수 없이 총살이 집행되었다. 도대체 사상이 무엇이기에 저 젊디젊은 여학생들이 목숨을 버리는가! 참으로 참혹한 광경을 보고 나니 한동안 정신이 멍해졌다.
구경을 마치고 조금 돌아서 오는데 버드나무 숲속 쪽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시체 썩는 냄새라는 것을 직감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남녀노소 불문하고 수십 구의 시체가 이리저리 흩어져서 쌓여 있었다.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소위 반동분자들을 처형한 것이다. 과연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이 어떠한 것인가를 처절하게 목격했다. 이런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나는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돈다발 보기를 돌같이 하다
우리는 고랑포국민학교에서 하루를 더 머물다가 38선을 넘어 북진 행군을 시작했다. 부대가 황해도 신계 지역을 통과하는 도중 산비탈에 있는 밭에서 낙엽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흩어져 있었다. 바람이 부니 그것이 이리저리 날렸다. 궁금증이 생겨 짧은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산비탈에 가보았다. 대체 그것이 무언가 했더니 돈뭉치였다. 인민군 보급로였을 것 같은 참호 주위에 그때 통용되던 100원권 한국은행 지폐를 100장씩 묶어 놓은 돈다발이 줄잡아도 일천여만원은 되어 보였고 흩어진 지폐들도 있었다. 지금 돈 가치로 정확히 환산하기는 어려우나 족히 수십억원대에 이르는 거금이었다. 모두들 넋을 잃은 사람 마냥 쳐다만 보고 있는데, 어느 한 병사가 “돈이다!” 하고 주워 마구 주머니에 집어넣으니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수십만원씩 호주머니가 터지도록 집어넣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신세들인데도 돈을 보니 본능적으로 욕심이 발동한 것이었다. 사실 돈이 있어 봤자 쓸데도 없었다. 오히려 짐이 될 뿐이었다. 무기, 실탄, 배낭 속의 식량, 피복 등만 해도 무거워 죽을 지경인데 설상가상으로 돈다발까지 몸에 지니면 애물단지가 될 것은 뻔했다. 참으로 돈, 돈, 돈 하지만 돈이 이리도 가치 없이 보였던 것은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 거추장스러운 돈을 행군 중에 길에도 버리고 물에도 던져 버렸다. 휴식 시간에 전우들에게 나눠 주려고 해도 아무도 받으려 하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은 두어 묶음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리고 말았다. 끝내 안 버리고 평양 입성 때까지 많이 지녔던 사람은 인심 좋게 잘 써먹은 사람도 있었다. 후일에 안 사실이지만 그 돈은 위폐가 아니라 인민군이 서울 조폐공사에 침입하여 강제로 지폐를 만들어 북으로 운반해 가다가 버린 것이라는 것이다.
마침내 평양 입성

그런데 그때 인민군 병사 두 명이 동정을 살피러 방공호 밖으로 나왔다가 우리들을 보더니 급히 방공호 속으로 몸을 숨겼다. 나는 방공호 입구에 서서 손 들고 나오라고 소리쳤다. 그들이 손을 들고 나오기에 생포했다. 나보다 훨씬 앳된 얼굴들이었다. 신원을 물으니 나이는 열일곱이고 며칠 전에 입대한 훈련병이라고 하면서 몸을 사시나무 떨듯 했다. 너희 부대는 어찌 되고 너희들만 남았느냐고 재차 물으니 모두 분산되어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그들은 곧 들이닥친 헌병들이 인수하여 데리고 갔다.
모란봉에서 대동강을 내려다보니 적은 지리멸렬 상태로 강물을 헤엄쳐 능라도로 도망치고 있었다. 하지만 능라도는 이미 미군 기갑부대가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적은 그야말로 독 안의 쥐였다.
이때 상부에서 도망가는 적을 사살하지 말고 생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적의 등 뒤를 향해 총을 쏘지 않았다. 특히 내가 포로로 잡혔을 때 나를 감시하던 마음씨 좋은 적군 병사 덕분에 살아나고 그가 대신 죽은 일이 생각나 총 쏘기를 극히 자제했다.
모란봉에는 소련제 5연발 고사기관총이 숲을 이룰 정도로 많이 설치되어 있었고 주변에는 미제 자동차 타이어로 성을 쌓아 놓고 있었다. 물론 기관총의 총구는 남쪽으로 향해 있었다.
우리는 모란봉의 능선을 따라 진격을 계속하고 있는데 사단장 백선엽 장군이 손수 지프차를 운전하면서 “전방에 적은 없다. 빨리 진격하라”면서 연신 권총을 공중으로 발사하며 독전(督戰)했다.
부대는 모란봉 부벽루 부근에 집결했다. 화기를 집결시키더니 앞의 명령과는 달리 도망가는 적을 향해 사격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나는 소총소대 화기분대 경기관총 부사수였다가 그때는 사수 책임을 맡고 있었다. 도망가는 적을 향해 집중사격이 벌어졌다. 그래도 되도록이면 기관총탄이 적의 등에 맞지 않게 약간 비켜 가는 사격을 가했다.
쫓기는 적의 뒷모습은 처참하면서도 가관이었다. 소련제 트럭을 타고 달아나는 인민군과 내무서원(경찰)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군 대전차용 3.5인치 로켓포의 공격을 받아 산산조각으로 찢어지거나,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장면들이 속속 연출되고 있었다.
이리하여 적 패잔병과의 시가전은 끝나고 평양은 완전히 아군들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청사에 우리의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그 시각이 1950년 10월 19일 오후 3시 30분이라는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만 국경 만포진을 향하여

우리가 평북 순천을 거치는 동안에도 적의 저항은 없었다. 진격하는 데 장애를 사전 차단하기 위해 미군 포병부대의 지원사격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패잔병들의 저항이 없었던 것 같았다. 자칫 저항을 하다가는 위치가 노출될 우려도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어서 영변으로 향했다. 이때쯤 고향에서 함께 입영한 정현동이라는 친구가 미군 포병이 잘못 쏜 포격의 파편에 맞아 후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현동은 군번이 나와 끝자리 수가 앞뒤 번으로 대구에서 내가 먼저 전선으로 배치될 때, 타고 있던 트럭을 붙잡고 “언제 살아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며 울부짖던 고향 친구가 아닌가! 공교롭게도 그는 나보다 하루 늦게 같은 대대에 배치되어 역시 같은 중대, 같은 소대에 함께 있었는데 소대장의 연락병을 맡고 있었다. 전시 중이라 같은 소대원이면서도 자주 만나지는 못했으나 인연이 깊어 고향에서 이 머나먼 낯선 곳까지 같이 와 생사를 함께하는 친구다. 나는 설움에 북받쳐 울었다. 그 당시 미군의 오폭(誤爆)으로 인한 아군의 피해가 매우 많았다. 통역관이 있었으나 그들과의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통신 체계도 허술한 것이 원인이었다.
중공군 참전

그날 저녁 자정을 지나 새벽녘이 되자 북, 징, 꽹과리 치는 소리들이 울려퍼지더니 중간 중간에 여자의 음성으로 중국 의용군의 한국전 개입을 알리면서 귀순을 권고하는 선전을 해댔다. 모두들 긴장했다. 그러나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만포진이었기에 거기까지 무조건 밀어붙이라는 명령이었다.
여기서 큰 장애물은 청천강이었다. 청천강은 글자 그대로 물이 매우 맑았다. 도하작전에서 발바닥은 피가 흘러나왔고 몸은 매우 지쳐 있었다. 그래서 좀 편하게 강을 건너고 싶었던 차에 때마침 사단 105mm 야포를 트럭에 달고 포병들이 탑승한 채 강을 건너려 하고 있었다.
발목 골절과 후송
나는 이때다 하고 그 트럭에 오르려 하는데 순간 트럭이 급히 전진하는 바람에 나하고 다른 한 전우가 강변 모래밭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내 오른쪽 발목이 트럭 뒤에 견인되어 있는 야포 바퀴에 깔렸다.
발목을 보니 피 한 방울 나지 않았으나 눈에 보일 정도로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모래밭이기에 망정이지 보통 땅 위에서 이런 사고를 당했다면 발이 으스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위생병이 가위로 바짓자락을 자르고 군화도 잘랐다. 완전 골절되었다는 것이다. 전쟁에서는 다리 부상은 중상자였다. 팔은 하나가 없어도 걸을 수 있고 아픔만 참으면 움직일 수도 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역시 진격 중의 부상이었기에 망정이지 후퇴 중에 부상을 입었다면 틀림없이 낙오가 되어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내가 명이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공산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일부러 부상을 입어 후송되도록 하기 위해 팔을 참호 밖으로 내밀고 총에 맞아 주기를 바랐어도 뜻대로 되지 않더니 다리를 다치는 부상을 입은 것이다.
아군 구호소는 부상자로 가득했다. 그런 속에서 부상 정도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기 십상이었다. 다리를 쓸 수 없는 부상은 중상이므로 구호소에서 야전병원으로 후송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잠시 후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쓰다 남은 도요타 트럭에 태워 후송이 시작되었다. 어찌나 후송 부상자들이 많은지 트럭에 이중으로 포개져서 짐짝처럼 실린 것 같았다. 트럭은 공병들이 작전용으로 닦아 놓은 길을 따라 평양을 향해 속력을 내서 달렸다. 도로 노면은 큰 돌멩이들이 군데군데 깔려 있어서 차가 요동을 쳤고 전속력을 내며 달려 봤자 시속 50km 정도여서 3시간이 걸려서야 평양까지 갈 수 있는 속도였다. 아무런 응급처치도 없이 후송되고 있는 동안의 고통은 도저히 표현할 말이 없었다.
고향 친구의 죽음
우리가 평양에 도착한 것은 그날 밤 자정 무렵이었다. 동평양에 있는 평양도립병원에 중상자들을 하차시키는데 이건 부상자 취급이 아니라 물건 취급이었다. 그냥 밀어 버리고, 던지고, 밟는데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세상에 인정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구나’ 하고 혀를 찰 정도였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다른 중상자는 병실로 보내면서도 다리 부상자는 부상자 취급도 하지 않고 그냥 막대기처럼 한쪽 다리에 의지하고 서있거나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게 했다. 한참 지난 후에야 병실 배치가 되었는데 두어 평 남짓한 곳에 십여 명의 부상병들을 집어넣어서 환자의 머리에 다른 환자의 발이 닿는 등 겹겹이 포개 놓은 상태로 처박혔다. 물론 치료 같은 것도 없었다. 아픔을 참고 견디며 주위를 살펴보니 나 같은 환자는 정말 환자도 아니었다. 다리와 팔이 절단되어 살이 썩어 들어가는 사람, 배가 갈라져 창자가 훤히 보이는 사람,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어디를 다쳤는지도 모르는 사람…. 지옥도 이보다 더한 지옥은 없을 성싶었다.
그중에서 눈을 의심할 정도로 내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고향 친구 정현동이었다. 같은 병실에서 만난 것이다. 참으로 ‘저놈하고는 인연이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나를 알아보는 듯했으나 이미 혀가 굳어져 말을 하지 못했다. 다친 상처를 보니 배꼽 아래에 파편을 맞아 창자가 보이는 것이 살아나기란 어려워 보였다. 나는 반갑게 그의 손을 잡아 주며 “우리 꼭 살아서 고향 가자”고 했다. 그 말에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가 입원한 평양도립병원은 일반진료 기능은 이미 없었고 육군 제27야전병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입원 기간중 치료래야 2~3일에 한 번 정도이다 보니 나의 발목 상처는 나아지지 않았다. 물론 생명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었으나 다른 입원 부상자들은 하룻밤만 자고 나면 여기저기서 죽어 있는 시체가 즐비했고 이들은 들것에 실려 나갔다. 정현동도 내가 입원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싸늘하게 죽은 시체로 변하여 있었다.
이 야전병원에는 1000여 명의 환자가 입원해 있었는데 중공군과 싸우다가 수류탄 파편을 맞은 부상자들이 많았다. 이런 부상자들에게 식사 제공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침은 점심때에, 점심은 저녁때에 주니 하루 두 끼 식사였고 때로는 하루 한 끼에다 그것도 멀건 보리누룽지가 보통이었다. 연일연시로 죽어 가는 환자는 속출하였고 숨을 거둘 때는 하나같이 “물, 물, 물 좀 줘” 하면서 이 세상을 하직했다.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 앞에서 고귀한 젊은 목숨은 초개(草芥)와 같았다. 이제 스물을 갓 넘은 귀한 아들들, 지어미와 핏덩이 자식을 둔 청춘들은 고향집 뒤뜰에다 정한수 바쳐 놓고 부디부디 살아 와달라고 빌고 있을 어머니와 아내를 뒤로한 채 죽어 갔다.
평양을 탈출하다
1950년 12월 2일 아침 10시경, 스스로 기동할 수 있는 환자는 기어서라도 병원 뜰에 집결하라는 전달이 왔다. 나는 한쪽 목발을 짚고 걸어 나갔다. 겨를이 없어서인지 인원 파악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군의관 한 사람이 연단에 올라서더니 평양이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군의관 1명과 위생병 2명이 환자 50명씩을 인솔하여 포위망을 뚫고 사리원까지 가야 한다는 말 몇 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잠시 후 군의관과 위생병들만 앰뷸런스에 나눠 타더니 어디로 사라졌다. 환자들을 버려둔 채 자기들끼리 도망간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우리들은 그 즉시 분산되었다. 중환자들은 병원에서 대성통곡을 해댔다. 그들의 생사는 지금까지도 알 길이 없다.
다리 부상이 없는 전상자 중 상태가 비교적 나은 사람들은 식량 창고로 달려가 문을 부수고 비상용으로 비축해 놓은 건빵과 사과 등을 들고 나와 우선 배가 고프니 먹어 가면서 흩어져 도망쳤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나는 병실을 같이 쓰던 동료 두 사람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결의하고 남쪽으로 향했다.
그리운 고향과 부모형제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서니 눈앞에 고향 집이 나타났다. 설레는 마음으로 사립문을 열고 마당에서 “오메, 문수(나의 아명) 왔소” 하니까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쳐나와 나를 붙잡고 “니가 참말로 살아 왔나” 하시며 통곡하셨다. 온 가족이 반가움에 겨워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 감격은 내 생애 최고의 극적인 장면으로 머릿속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다. 고향에서 함께 징집된 27명 중 6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는데, 6명마저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상을 입어 온전한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이고 보면 나는 큰 행운을 얻은 셈이었다.
고향에서 한참 휴식을 취해 다리 부상이 완치되자 자진해서 다시 1사단 15연대로 원대 복귀했다. 전시라 군무 이탈에 대한 문책은 없었다. 그 후 3년 3개월 정도를 더 복무해 총 3년 11개월 15일간의 걸친 고달픈 군 생활을 마감하고 1954년 5월 제대하여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