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신인호_K-9자주포 개발 비화

醉月 2009. 12. 18. 09:07

 

“K- 9자주포는 정말 탐나더라고요. K-9하고 딱 몇 년만 군 생활을 더했으면 좋겠습니다. 팀스피리트 한미연합 야외기동훈련을 하면서 미군의 화포나 정비체계를 많이 부러워해 왔는데 우리 군도 성큼성큼 발전하고 있으니 정말 뿌듯합니다.”

33년을 8인치 자주포와 함께 더불어 생활하고 2009년 1월 면역하게 되는 육군 제1포병여단 윤종환 원사는 전방 각 군단의 주력 화포로 자리 잡은 K-9자주포에 대해 뿌듯한 자부심을 내보였다. 그가 1975년 임관했을 시기부터 운용해 온 화포는 높은 명중률과 뛰어난 파괴력을 자랑하며 전방 군단의 강력한 화력지원무기체계로 자리 잡았던 8인치 자주포였다.‘내 사랑 8인치’라며 한창 야전을 뛰어다녔던 그도 그와 가까운 포병대대에 새롭게 배치된 K-9을 보고는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보고 알아온 화포

가운데 최고의 화포였다.“ 면역을 미뤄주기만 한다면 그 녀석(K-9)과 정말 몇 년 더 살아보고 싶다.”라는 그의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군문을 떠나는 일이 아쉽기는 하지만 군의 발전을 확인시켜준 K-9 덕분에 그의 마음과 발길은 든든하고 가볍다.


 

자신할 수 있는 세계적 명품

K-9! 155㎜ 자주포인 K-9은 1990년대에 국방과학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국방과학기술이 혼신을 다해 개발한 대표적 무기체계로서 세계에 자신 있게 자랑할 수 있는 명품(名品) 중의 명품이다. 물론 K-9자주포와 유사한 성능을 가진 155㎜ 자주포 몇 종이 나와 있고 부분적으로 우월한 성능을 지닌 것도 있어‘세계 최고’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운용성까지 포함한 종합적인 면에서 K-9보다 확실히 훌륭하다고 지칭할 수 있는 자주포 또한 아직 없다 할것이다.

47톤(전투중량)의 무게에 포신을 포함한 길이 12m로서 첫 눈에도 육중한 위압감을 주는 K-9은 2000년대 전장이 요구하는 조건인 화력과 기동력, 생존성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K-9을 말할 때 가장 큰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것이‘최대 사거리가 40㎞’, 즉 구경 155㎜, 52구경장으로 길이 8m에 달하는 포신이 쏘아대는 포탄은 무려 40㎞를 날아간다. 사격명령을 접수한지 30초 이내에 초탄을 발사하고, 15초 이내에 최대 3발을 쏠 수 있다. 1분당 3발씩 3분 동안 연속 18발을 사격할수도 있다. 자동화된 사격통제장비, 자동화된 포탄 이송 장전장비를 갖추고 있는 덕분이다. K-9은 생존성을 더하고 있다. 최대 1,000마력의 힘은 우수한 주행 가속성, 용이한 방향전환을 가능케 해준다.

이를 바탕으로 사격 후 즉각적인 진지이동, 즉 ‘사격후 신속한 진지변환’(shoot&scoot)의 전술 운용을 보장한다. 또 국내에서 개발한 고강도강(鋼)으로 차체를 장갑화하여 적의 화기와 포탄 파편으로부터 전투요원을 보호할 수 있다.

이 같은 K-9자주포를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진 155㎜자주포와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미군의 주력인 155㎜ 자주포 M109A6 ‘팔라딘’보다 사거리와 발사속도, 생존성, 탄약 적재량, 기동성 등 모든 부분에서 우위를보이며 영국의 AS90보다는 사거리와 반응성, 기동성면에서 앞선다.‘세계 최고’라는 독일의 PzH2000에는 탄약적재량(60발)과 발사속도(1분에 8발)에서 조금못 미칠 뿐 사거리와 반응성에서 대등하며, 기동성을 나타내는 최대주행속도와 가속성능, 그리고 등판능력과톤(t)당 마력 면에서 오히려 우수하다. 또한 유기압 현수장치가 장착되어 있어 승차감이 좋아 지속적인전투를 계속 수행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방위산업 사상 최대 규모인 10억 달러에 달하는 물량을 오는 2011년까지 터키로 수출하는 쾌거를 올림으로써 그 성능을 확실히 인정받았다. 그동안 스페인, 이집트,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국가에서 K-9자주포를 시승하거나 훈련과정을 참관하는 등 관심 이상의 부러움과 함께‘방산협력’을 모색한 바 있다. 한마디로 K-9은 모든 면에서 세계 정상 수준의 자주포임을 알 수 있다.

의지와 축적된 기술이 성공 요소

그런데 이렇듯 자랑스러운 위용을 지닌 K-9이 개발초기부터‘세계 최고’를 향한 기대와 개발을 위한 지지를 폭넓게 얻은 것은 아니었다. 1990년 봄에 작성된 작전요구능력(ROC: Requirment Operational Capability)은 우리 국방과학기술과 방위산업 역량 수준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당시 미국이 개발 중이던 M109A6보다 요구수준이 높았을 뿐 아니라 독일이 개발 중이던 PzH2000 자주포에 맞먹는 성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미국도 아직 개발하지 못한 장비를 우리가 먼저개발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 또는 의혹의 눈빛이 한동안 국방과학연구소의 연구진 주위를 맴돌았다. 21세기 전장 환경을 내다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능 자체의 필요성에 대한 의구심도 그치질 않았다. K-9 개발을 위한 사업 승인이 난 후에도 개발가능성을 사시(斜視)로 바라보는 눈길은 여전했고 10여 년간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사업이 좌초될 수 있는 위기도 수차례 맞기도 했다.

지금의 시점에서 K-9의 개발과 전력화가 성공한 요소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K-9의 성공 요소를 꼽는다면 굳건한 개발의지, 그리고 축적된 고급 인력과 기술, 상호 협력 등을 들 수 있다. 어떤‘성공’의 사례를 찾을 때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히딩크 감독을 거론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모두가 히딩크 감독의 안목과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던 2002년 6월 22일.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역임한 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과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낸 서정욱(徐廷旭) 박사는 무역협회가 주최한‘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프로젝트’토론회에 참석, 당시 화두로 꼽히던 히딩크의 성공사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일침(一針)을 가한다.

“히딩크의 성공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대표팀의 역대 감독들이 한 역할이 히딩크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우리 팀이 보여준 놀라운 체력도 국력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강한 국력을 만들어 낸 기성세대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체력과 선전이 가능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인 없는 결과 또한 없는 것이고 보면 오늘 우리가 성공 또는 업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에는 이에 상응한 근원 내지는 바탕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우리의 국방과학 기술이 10여 년에 걸쳐 빚어낸 주요 업적 중 하나인 K-9자주포 역시 마찬가지 범주에서 바라볼 수 있다.
K-9 개발에는 당시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진의 역할이 중심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K-9의 연구를 가능케 한 밑바탕에는 1970년대 초, 총포류 등 기본 병기를 우리 손으로 개발하자는‘번개사업’부터 쌓아온 경험과 기술이 깔려 있다. 또 100여 개의 시제(試製)·협력업체,그리고 대학 등의 연구소 인력이 K-9 개발을 위해 힘을 모았다.

105㎜ 곡사포 백령도 운용 중 철수
돌이켜볼 때 우리나라 무기체계 역사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것으로‘화포’를 빼놓을 수 없다. 고려 말 최무선이 흑색화약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고 1377년에는 국가 공인 화약·화기 제조기구로 화통도감을 설치함으로써 화포시대를 열었다. 특히 1555년에는 구경 130㎜, 무게 300㎏의 천자총통을 제조하는 등 오랜 화포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에 와
서는 1970년대까지 우리 손으로 제대로 만들어 낸 총포류는 하나도 없었다. 창군 이후 우리 군은 105㎜ 곡사포 M3를 시작으로 1970년대 중반까지 155㎜ 곡사포와 평사포, 8인치 자주 및 견인곡사포, 175㎜ 무포탑형 자주곡사포 등으로 무장해 전투종심을 증가시킬수 있는 포병화력을 구비했으나 대부분 미국의 군사원조 또는 베트남전 참전 대가로 인수한 것들이었다.
국산 화포가 등장한 것은, 국방과학연구소가 창설된 이후부터이다. 국방과학연구소가 창설되었다고는 하지만 과학기술과 산업기반이 미약했던 시기였고, 또 기술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닌 만큼 원하는 무기체계를 곧바로 개발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국내 독자기술로 개발한다는 것은 꿈속에서도 실현이 불가능한 시기였다. 따라서 1971년 11월
9일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의해 추진된 ‘번개사업’ 에 의해 국산화된 60㎜박격포 등은 동종의 미군장비의 도면을 구하거나 장비를 분해해 역설계하는 방식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개발됐다. 이어 1972년 4월 을지연습 때, 후방 사단의 화력장비를 보강하기 위해 개발이 지시된 4.2인치 박격포나 105㎜ 견인곡사포의 경우는 어려움이 더 컸다.
당시 105㎜ 곡사포의 경우 포가(砲架) 부분의 도면은 경북 왜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부대에서 획득했으나 그 외 부품의 도면은 구할 수 없었다. 견본 장비를 획득한 후 포신, 주퇴복좌기를 포함한 600여 종에 달하는 부품을 역설계하거나 기술자료(TDP)를 미국으로부터 도입해 도면을 설계했다. 어렵게 개발한 105㎜ 곡사포는 1973년 6월 경기도 다락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참관하는 가운데 사거리 2㎞ 내외의 시험사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105㎜곡사포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제한이 많았다. 이 곡사포의 기술적 문제는 그해 12월 백령도에 최초 배치, 운용시험을 갖게 되면서 발생했다. 105㎜ 견인곡사포가 백령도 쪽으로 배치된 까닭은 이즈음에 백령도와 연평도 등 서해 5도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됐기 때문이다. 1974년은 김일성이 회갑을 맞는 해로서,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서해 5도를 바치겠다고 공언하던 때였던 것이다. 백령도 상공
에는 북한의 미그기가 공공연히 나타나 아군을 위협하는 실전상황이 전개되곤 했다. 이런 가운데 곡사포를 운용한 결과, 주퇴복좌기가 파손되거나 탄피의 추출이 곤란해지는 현상 등 치명적인 결함이 발생했다.

이에 곡사포는 백령도에서 철수하고 보완작업이 시작됐다. 화포개발은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뼈아픈 실패 속에 기술 기반 닦아 1976년 1월 19일 미국의 조병 기술자를 초청했다. 5명의 미국 기술자들은 2월 말까지 국내 화포개발 능력과
여건을 조사한 결과, 아주 간단한 견해를 내놓았다. “현 상태로는 안 된다.”이 때만 해도 미 정부의 기술지원은 전폭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기술자들이 다녀간 이후 미국에서 제작도면, 치공구 도면, 품질보증 절차서 등이 제공되었다. 우리 정부는 화포제작업체에 특별융자를 내주었다. 당시 포신을 맡은 대한중기에 70억 원, 포가와 체계조립을 담당한 기아에 41억 5천만 원, 주퇴복좌기를 생산하는 대동에 40억 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것이다. 이때 대한중기는 경남 창원공단으로 입주하는 최초의 업체가 된다.

이렇게 생산시설을 현대화하면서 1년여의 노력 끝에 모범생산사업은 완료됐다. 군사원조로 도입된 포와 동등 또는 그 이상의 성능이 확인됐다. 뼈아픈 실패와 극복의 과정 속에서‘독자적으로 무기체계를 개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KH178과 KH179 개발사업에 착수함으로써 국산 화포 개발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미“155㎜ 사거리 연장하자.”제의 거절
KH179 155㎜ 곡사포의 개발 과정을 살펴보자. 1976년을 기준해 보면 당시 서유럽 각국은 사정거리 30㎞의 155㎜ 곡사포 개발을 완료하는 단계에 있었다. 이에 비해 우리 군은 북한에 비해 현저히 열세에 놓여 있던 포병 능력을 보강하고자 사거리 20~30㎞ 급의 화포를 갈망하는 정도였다. 당시 우리 군의 화포 중 20㎞이상을 쏠 수 있는 화포는 군사원조에 의해 들어온175㎜ 자주평사포뿐이었다. 북한의 비해 수적인 면에서 100대 2 정도, 아군 포병 90%가 적 사정권 안에 들어가는 절대 열세였다.
105㎜ 곡사포를 국내 생산하는 가운데 국방과학연구소는 사거리 연장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1975년에 155㎜ 견인곡사포 M114A2의 성능개량을 위해 미국에 자문을 구했으나 불가 통보를 받았다. 미국은 내심 M198의 직구매를 희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어 1976년 6월에는 영국에서 새로 개발한 L118 105㎜ 곡사포 2문과 탄약을 도입해 국내에서 시
험평가를 실시했다. 그 후 서독에서 기존 105㎜ 곡사포를 성능개량한 FHL 105㎜ 기술 자료를 입수해 국내 기술진만으로 시제를 제작하고 시험 평가하는 등 국내개발 가능성을 검토했다.
그런데 1975년에 구형 화포의 성능향상이 불가하다고 했던 미국이 1977년 말 M114A2의 사거리를 30㎞로 늘리는 사거리연장사업을 갖자고 제의해왔다. 마침 육군은 105㎜ 곡사포를 국내 기술력으로 개발하는 사업이 추진되는 등 화포 생산기반의 토착화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구형 화포의 성능향상을 위한 기술적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에 육군은 1978년
3월 미국 M114A2 155㎜ 곡사포의 성능 개선사업을 소요제기했고, 이러한 소요제기는 그해 12월 한·미 공동 개발을 전제로 한 개발 과제로 확정됐다. 그러나 1979년 6월, 미국의 제안을 접수·검토한 국내 연구진은 이 공동 개발안을 거부했다. 1975년 국방과학연구소에 입소한 후 1998년 8월까지 화포 개발의 외길을 걸으며‘한국 화포 개발의 대부’로 불린 (주)풍산의 문
상규(文相奎)고문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240만 달러라는 기술료가 지나치게 많았고 개발에 따른 전반적인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됐어요. 무엇보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시제 제작과 시험평가를 미국에서 해야 한다는 요구였습니다. 지적소유권에 대한 분쟁의 우려도 있었고요.”

155㎜ 곡사포 독자 개발 나서
국방과학연구소가 공동개발을 거부함에 따라 155㎜ 곡사포를 확보하는 사업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었다. 개발기간 연장과 함께 국내 독자 개발로 그 수행 방법이 변경됐다. 이것이 현재 우리 포병의 주력 견인포인 155㎜ KH179가 태어나게 된 배경이다. 독자 개발로 변경되자 기술진에도 어려움이 닥쳤다. 사실을 말하자면, 국내 기술수준은 이제 막 화포의 설계 개념을
이해한 정도였다. 한번도 독자적으로 화포를 설계하거나 제작해 본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부담이었다. 특히 사격 시 발생하는 각종 압력과 가속도 등 설계 변수를 어떻게 결정하고, 제작 후에는 어떤 시험평가 방법을 통해 성능과 신뢰성을 입증하느냐가 문제였다.

“국산화한 M101A1의 일부 문제점을 보완, 개발할 때 미국에서 기술지원한 자료 가운데 155㎜ 곡사포 M198의 포신 도면이 있었는데 이를 참고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습니다.”(문상규 기술고문)

연구기술진은 포미환·폐쇄기·주퇴복좌기 등의 설계개념을 정립하면서 개발에 박차를 가해 나갔다. 미국의 M114 곡사포의 포신 길이를 두 배 가까이 긴 38구경장 포신으로 채택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동일 구경에서는 포신 길이가 길수록 정확도가 높아지고 사거리가 늘어난다. M114의 포신 길이는 3.62m지만 연구진이 정립한 곡사포는 7.08m(전장
10.3m)에 달한다.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은 시험평가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에서 화포 개발 시적용하는 장비시험절차서를 철저히 분석했다. 또 학계를 포함한 국내 관련 기술진의 두뇌를 모두 끌어모았다. 사격 시 발생하는 각종 압력·응력·속도·가속도·힘(force)·온도 및 탄의 비행특성 등을 계측하여 설계치와 비교 평가하면서 설계가 타당한가를 입증했다. 시제를 제작한 후에는 악조건 상태에서의 안정성 확인과 신뢰성 보장을 위해 실사격 외에 시뮬레이터를 통한 반복시험을 수없이 실시했다.

문 고문은 악조건 상태 중 하나인 저온에서의 시험평가 사례 한 가지를 들려주었다.
“당시 안흥 종합시험장에는 극저온 시험시설이 있었지만 4.2인치 박격포 사격에도 설비가 깨져나갈 정도여서 155㎜ 화포시험에는부적절했어요. 추운 겨울(1982년 1월) 할 수 없이 다락대로 달려가 갖은 방법을 동원해 봤습니다.”

먼저 화포를 방렬한 상태에서 베니어판과 절연제로 집을 지었다. 실내에 드라이아이스와 알코올을 잔뜩 넣고 10개의 선풍기로 공기를 순환시키며 실내온도를 영하 44도로 끌어내리면서 화포를 냉각시켰다. 이렇게 20시간이 지난 뒤 포구와 포미 쪽 벽만 허물고 최대 장약의 115% 압력으로 5발을 사격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때 사용된 드라이아이스는 2.5톤 트럭으로 3대, 알코올은 1대분이 소요되었다.

“포신의 수명평가 또한 중요합니다. 실사격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많은 예산이 소요되고 단기간 내에 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래서 100발 이상 사격한 포강 내에 히트크랙(Heat Crack)이 발생한 포신 자체를 시편으로 만들고, 이를 유압으로 59,000psi 즉 4,015기압에 해당하는 약실압력을 반복해 넣었지요. 포신 3개를 파괴될 때까지 시험했습니다.”(문 고문)

이때 연구진은 사거리 연장(RAP)탄 개발도 동시에 진행하여 155㎜ 곡사포의 사거리를 14.6㎞에서 30㎞로 연장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이 사업을 통해 최초 외국에서 수입했던 고강도 포신 소재와 주강품인 제퇴기 소재 등의 국산화도 이룩했다.

화포 개발의 독립 선언
이렇듯 갖은 노력으로 개발한 38구경장 155㎜ 곡사포는 포신의 길이가 길어졌음에도 경량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총중량 6,855㎏선을 유지함으로써 CH-47 헬기로 공수가 가능하고 C-130 수송기에도 적재할 수 있었다. 사거리 30㎞로써 미국이 1977년 개발을 완료한 후 1978년 주한미군에 배치한 M198, 그리고 영국·독일·이탈리아의 FH70, 스웨덴의 FH77 등 사거리 30㎞의 155㎜ 곡사포와 동등한 수준이다. 전력화 시기는 이들 선진국보다 다소 늦지만 견인포와 관련한 기술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이 포에는 KH179라는 명칭이 부여됐다. KH는 한국형(Korea) 곡사포(Howitzer), 1은 최초 또는 시작이라는 뜻이며 79는 1979년 미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독자적 개발에 착수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역시
같은 의미로 이름 지어진 105㎜ 곡사포 KH178과 함께 화포 개발의 독립선언을 한 것이다.

문 고문은“KH179의 개발을 통해 쌓은 기술력, 연구개발진이 보여준 용기와 의지가 우리의 화포 개발 능력을 오늘날 세계적 수준으로 나아가게 하는 확실한 기반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포병 신뢰 한 몸에 받은 KH179
그러나 KH179는 1983년 전력화한 이후 예상치 못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1984년 봄, 한마디로 잘 나가던 KH179에 성능시비가 일어난 것이다. 발사시험 중 포구 쪽의 제퇴기가 세 번 연속으로 부분 파손된 것이었다. 이 일은“KH179의 포신이 깨졌다.”로 확대돼 삽시간에 번져나갔고, 급기야 당시 윤성민 국방부장관에게도 보고됐다.
여기에 KH179에 대한 미국 측의 견제까지 곁들여졌다. 미8군 지휘부 측에서도 KH179의 성능을 의심할 만한 증거가 있다고 거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KH179가 헬기에 의한 공중수송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자신들의 주력 화포인 M198의 기술을 도용해 제작했다며 우리 군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포신 파손’으로 번진 문제는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단지 포탄과 포신 사이에 위치한 인터페이스 상의 문제였다. 기술적으로 간단히 해결되는 사항이었지만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심각성을 더해 갔다.
마침내 상급기관으로부터 KH179의 안정성과 운용성등을 증명하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방법은 악조건 시험과 공중수송 테스트를 다시 수행하는 것이었다. 먼저 포신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시험이 실시됐다. 육군 소장이 지휘하는 검열반이 구성되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KH179 6문으로 포탄을 무려 230발 이상이나 쏘는 가혹시험이 진행됐다. 그러나 KH179는
아무런 이상을 보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개발단계에서 포신의 수명을 평가하기 위해 이보다 더 가혹한 평가를 실시했던 것이다. 즉, 100여발을 사격한 후 포강 내부에 히트크랙이 발생한 포신자체를 시편으로 만들고, 여기에 실사격과 같은 압력을 주는 시험을 파괴 시까지 반복했던 것인데 이는 2만 발의 실사격과 버금가는 것이었다.

공중수송 검증을 위한 훈련도 서부전선에서 실시됐다. CH-47 헬기 12대가 병력 및 탄약을 실은 가운데 KH179를 매달아 작전지역으로 수송했다. 미군의 M198도 1문 포함됐다. 그런데 수송 후 KH179곡사포는 사격이 가능한 상태로 안정되게 착지해서 정상적으로 사격이 이뤄진 반면 M198곡사포는 그렇지 못했다. 헬기와 화포를 연결한 슬링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격조차 할 수 없었다. 내심 화포성능의 차이를 보여주겠다는 의도를 지녔던 미국 측이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들은 훈련 후 비로소“한국군은 매우 우수한 화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남겼고 성능과 기술도용의 문제도 일시에 해소됐다. 동시에 KH179와 국방과학연구소의 연구개발 능력에 대한 포병의 신뢰는 높아만 갔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미니 해설▶▶▶
소요란 무엇인가?
소요(requirements)는 넓은 의미에서 `승인된 군사목표, 임무 또는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적절한 자원 배분을 합법화하는 확실한 필요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특정 시기 또는 특정 기간에 인원·장비·보급·자원·시설 또는 근무지원이 특정량만큼 필요하다는 것을 표시하는 계획’을 소요라고 말한다.

소요제기는 ▲ 적의 전투력이 증가해 피아 간 균형이 상실돼 그 차이를 해소시켜야 할 때 ▲ 적의 현존 위협에 대비한 아군의 전략개념이 변경돼 이를 지원하기 위한 무기체계가 필요할 때 ▲ 현재 보유 중인무기체계가 기술적으로 진부해 새로 충당할 필요가 있거나 고장이 잦아 유지비용이 많이 드는 등 수리 한계(repair limit)에 도달했을 때 ▲ 새로운 무기체계 도입이 적의 능력을 분산·배치하도록 강요할 수 있을 때 주로 이루어진다.

작전요구능력(ROC)이란?
군사전략 목표 달성을 위해 획득이 요구되는 무기체계의 운용 개념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성능 수준과 능력을 제시한 것이 작전요구능력(또는 작전운용성능〔Required Operational Capability:ROC〕)이다. 무기체계를 획득할 필요가 있을 때 전력소요제기서라는 문서를 작성하는 데 여기에는 해당 무기체계의 ROC와 함께 필요성, 편성 및 운영 개념, 전력화 시기 및 소요량, 전력화 지원요소, 부대 기획 등을 기술하게 된다. ROC는 최초‘전투중량 55~60톤’과 같이 개략적으로 제시되고 이에 근거해 연구개발에 돌입하게 된다. 탐색개발 결과와 시제품에 대한 운용평가시험 결과에 따라 수정·보완하는 구체화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확정된다.

용어 해설▶▶▶
■ 포열=탄두를 목표지점까지 비행토록 발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후미에는 탄약이 삽입되는 약실을 가지고 있다.
■ 포미장치=격발 또는 사격 때 발생하는 사격력의 지지 및 뇌관 탄피 추출 등의 기능을 한다.
■ 제퇴기=탄이 포구를 이탈하면서 함께 방출되는 고압 사격가스 일부를 후방으로 방출시켜 사격에 따른 포신의 주퇴 운동량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 제연기=사격 후 포강 내에 남아 있는 연소가스를 포구쪽으로 배출시킨다.
■ 구경장=포열의 길이를 나타내는 말. 52구경장이란 구경의 52배 길이로서 155㎜/52구경장은 155㎜의 52배, 즉 8m라는 뜻이다.

ARMY 상식▶▶▶
포신수명은?
포신도 수명이 있다. 포탄을 발사할 때마다 포강 내부에서 발생하는 물리적·화학적 작용에 의해 포신의 수명은 점차 줄어든다. 포신의 수명은 추진장약 연소 때 발생하는 고압이 포신에 반복적으로 작용함에 따른 피로 수명과 고온·고압의 가스 및 연소 잔재물과 포탄의 고속운용 등으로 포신벽이 깎이는 침식에 의한 마모 수명으로 구별된다.
155㎜ 화포의 경우 약실 입구로부터 41.75인치 위치에서 특정한 포강 내경이 0.1인치 이상 마모되면 포신을 교체해야 한다. 또 발사탄수에 의해서도 산정할 수 있는데, 탄종과 장약에 따라 마모량이 다르므로 이때는‘화포별 최대장약 1발에 해당하는 발사탄 수’를 기준으로 삼는다.


K-9 자주포 개발의 씨앗을 뿌리다!

 

육군이 KH179 155㎜ 곡사포를 전력화할 무렵, 화력 증강을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155㎜ 자주포 획득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1970년대 초부터 우리 포병은 175㎜ 자주평사포와 8인치 자주곡사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포는 무포탑 자주포이자 견인포를 차량에 올려놓은 형태로서 괘도 차량에 의해 기동이 가능하다는 점 이외에는 화포 운용 개념적인 측면에서 볼 때 견인곡사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육군은 이러한 175㎜ 자주평사포와 8인치 자주곡사포 대신 많은 탄약을 탑재하고 포병들이 탑승한 상태에서도 사격이 가능하며 또 생존성 높은 현대식 자주포를 필요로 했다. 당시 이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M109A2 155㎜ 자주포였다. 25톤의 전투중량에 전장 9.12m, 전폭 3.15m, 전고 3.18m의 제원을 지녔다. 최대 사거리는 24㎞로서 차장·포수·조종수 등 6명의 승무원이 탑승하며 알루미늄 합금의 용접구조로 되어 있어서 방호력이 우수하다.


 M109A2 155㎜ 자주포는 미국이 1979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하여 32개국에서 운용하고 있는 냉전 시기 자유 우방국가의 대표적인 화포로 꼽힌다. 이 자주포는 최초 M109로 시작하였고, 개량작업을 통해 M109A2를 거쳐 1990년에는 사거리를 30㎞ 로 연장한 M109A5로 발전했다. 1992년에는 반응성과 생존성을 대폭 향상시킨 M109A6 자주포를 선보였다.


 M109A6 자주포는 서로마제국의 유명한 용사 이름을 따‘팔라딘’(Paladin)으로 명명됐다. 국방부는 1983년 12월, 이러한 M109 계열의 자주포 가운데 2번째 성능개량의 산물인 M109A2를 한국에서 미국과 공동으로 생산키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포신과 포탑구조물은 미제를 수입하고 차체 ‘사격통제장치’유압장치는 국내에서 생산하면서 체계를 조립하는 형태였다.


 이 자주포는 한국에서 생산한다는 의미에서‘K’자를 붙여‘KM109A2’로 명명됐다. 이는 M109A2 모델을 국내에서 생산한 무기체계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현재 야전에서는 이 자주포가 K-55로 불리고 있다. 당시 삼성항공(현 삼성테크윈) 측에서 체계조립과 생산 작업을 했는데, 작업 간에 보안유지를 위해 익명으로 부르던 명칭이 K-55였다. 이러한 K-55가 야전에 그대로 전파되어 K-55 자주포로 불리게 된 것이다.


 본래 K가 제식명칭에 단독으로 붙으려면 국내에서 연구 개발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조건에서 어긋나 있지만, 어떻든 KM109A2 자주포의 국내 생산은 훗날 독자적으로 자주포를 생산할 수 있는 산업적 기반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사거리 30~40㎞의 선진국형 자주포 개발 추진

 

국방과학연구소 화포체계실 연구진은 1982년 말KH179 155㎜ 곡사포의 개발 성공과 함께 이후 야전에서의 전력화를 지원하는 등의 후속조치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KH179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1983년부터 세계 화포발전추세에 발맞추는 기초연구에 착수한 것이다. 당시 문상규 화포체계실장을 비롯한 홍석균 박사와 안충호 책임연구원 등의 연구진이 참여한‘화포 최적 설계 조건의 연구’라는 이름의 이 연구는 화포분야의 핵심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겠다는 주목할 만한 연구활동으로서 국내 최초의 화포분야 핵심기술개발연구이자,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K-9 자주포 개발의 씨앗’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연구진은 이때 외국의 수많은 최신 연구논문과 보고서 등을 수집해 종합·분석하면서 미래 전장환경에 따른 화포의 발전추세를 전망했다. 즉 30~40㎞에 이르는 사거리 연장과 함께 작전개시 초기 급속사격(Burst Fire) 능력을 갖는 화포로서 10~15초 이내에 3발의 화력을 집중할 수 있고, 또한 신속히 진지를 변환하는 ‘Shoot & Scoot’개념을 구현시킬 수 있는 자주포가 요구된다고 내다봤던 것이다.

 

특히 홍석균 박사는 1984년부터 15초 이내에 3발을 투발할 수 있도록 하는 탄과 장약의 자동장전 실험모델을 개발해 발사속도 증대 방안을 연구했다. 안충호 책임연구원은 화포자동방열의 기본이 되는 수포(수평기의 물방울 Level Vial)를 전기적 센서로 대체하는 실험모델을 개발하는 등 화포 자동화체계 방안을 연구했다.

 

“이 당시 연구를 통해 나온 연구 실험모델들은 애초 지금의 K-9 자주포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던 만큼 기구와 형상 면에서 많이 다르긴 합니다만 훗날 K-9개발의 개념과 방향, 목표만은 그대로 적중됐어요. 새로운 화포개발을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홍석균 박사)

 

그런데 화포 자동화 연구는 연구 승인이 나질 않아 중단케 되었다. 하지만 그 1986년과 1987년 사이에 연구진은 우리 화포개발의 지향 방향을 분명히 결정할 수 있었다. 선진국들이 우리의 국방과학연구소(ADD) 연구진이 전망했던 바와 거의 일치하는 개념을 지닌 자주포를 앞다투어 개발하고자 상황을 본 것이다.

 

영국은 독일·이탈리아와 공동으로 추진했던 SP70자주포가 실패하자 AS90 자주포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고, 독일은 PzH2000 자주포 개발을 추진 중이었다. 미국 역시 자주포 성능향상계획(Howitzer Improvement Program)을 수립해 M109A2 자주포를 현재의 사거리 30㎞급 M109A6팔라딘으로 개량하는 사업과 더불어 45㎞급의 새롭고 획기적인 크루세이더 자주포 개발사업을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ADD 연구진도 그동안의 연구 성과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1987년, 육군에 K-55 자주포의 성능을 향상시키자는 방안을제안했다. 한국적 여건에 적합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미국의 자주포 성능향상계획을 모델로 삼아 마련한 이 향상 방안은 30㎞용 포신과 45㎞용 포신을 동시에 개발해 사단용과 군단용으로 각각 운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안은 1988년 말 육군본부의 전투발전심의회의에서 사실상 ‘불채택’이나 다름없는 ‘유보’판정을 받았다. K-55가 1985년부터 생산돼 야전에서 운용되고 있는 시점에서 자주포의 성능향상 사업은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결과는 다소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낙담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연구진으로 하여금 한걸음 더 나아가는 새로운 방향의 목표를 갖게 했다. 새로운 개념의 신형 155㎜ 자주포를 개발하겠다는 의지를 갖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의 결과로 볼 때 당시의 유보 결정은 잘된일이었습니다. 연구진은‘그렇다면 신·자·포(신형 155㎜ 자주포)로 가겠다.’며 개발의지를 불태웠으니까요.”(안충호 책임연구원)

 

완전히 새로운 자주포를 독자개발하자

 

국방과학연구소 화포체계실은 1989년 새해가 밝자 자주포 체계팀(팀장 안충호 책임연구원)과 자주포 무장팀(팀장 홍석균 박사)을 편성하고 새로운 자주포, 즉 신형 155㎜ 자주곡사포(일명‘신자포’: 이 명칭은 1998년까지 연구개발 사업이름으로 계속 사용되었음) 에 대한 개념 형성 연구에 돌입했다. 이른바 K-9 자주포를 개발하기 위한 개념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우선‘신형 155㎜ 자주포 개념형성 기초 연구’라는 제목으로 1989년부터 1992년까지 4개년의 체계개념 연구계획서를 작성했다. 현재는 소요가 제기되고국방중장기계획에 수록되어야 연구가 가능한데 이 당시엔 소요제기가 없는 상태에서도 육군이 개발가능성 검토를 요구한 것만 가지고도 연구의 필요성이 인정됐다. 연구 착수 여건은 지금보다 수월했던 것이다.

 

자주포 체계팀이 이때 세계적인 발전 추세와 러시아·중국·일본·북한 등 주변국의 자주포 및 한국 포병의 현황을 분석해 설정한 신형 자주포의 개발 방향을 보자.

 

155㎜에 52구경장의 포신 채택, 사거리 40㎞, 최대발사속도 분당 6발 달성, 관성항법장치 적용, 사격통제의 자동화를 통한 30초 내 초탄 발사, 톤당 20마력 이상의 기동성과 생존성 향상, 국내 독자개발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같은 40㎞급의 신형 자주포가 필요한 이유는 여러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북한과 비교해 보면 화포의 경우 북한은 아군에 비해 수적으로 5,000여 문이나 더 많고 그중 50%가 자주화 및 차량탑재용이어서 기동화가 용이했다. 아군으로서는 양적인 열세를 질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시급했다.

 

전술적인 운용 면에서 볼 때 육군은 1988년 기본(Air-Land)전투개념을 우리의 전장 환경과 장차전의 양상등 관련 영향요소를 고려하여 공세적 전(全)전장 동시전투개념으로 정립했다. 특히 적지종심(20~40㎞)작전은 적 군단 제2제대급의 증원 역량을 무력화해 근접작전의 확실한 승리를 보장하는 데 주안을 두었다. 포병은 이를 구현하기 위해 대(對)화력전투에서 적 중심지역을 타격하거나 적 2제대의 증원을 차단할 수 있는 사거리, 화생방전에서도 지속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생존성, 기동군단의 공세작전을 지원할수 있는 기동력을 갖춘 무기체계를 필요로 했다.

 

실제로 팀스피리트 한·미 연합 야외기동훈련 등을 통해 야전포병 지휘관들은 포병의 6대 목표인 포탄을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보다 멀리 많게 쏘아 보낼 수 있고, 보다 생존성이 높으면서도 빠르게 기동함으로써 사격 후에는 신속한 진지변환이 가능한 자주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면 신자포의 핵심이 될 155㎜와 52구경장의 포신을 채택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는 국제간 탄약 호환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독일 및 이탈리아는 1987년 9월 탄도협정을 체결하면서 사거리 40㎞급의 자주포를 개발함에 있어 향후 10년간 155㎜/52구경장을 적용키로 결정했다. 따라서 신자포는 개발 초기부터 세계 정상 수준을 목표로 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 탄도협정을 적용함으로써 해외수출이 가능토록 고려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방산무기의 해외수출은 국내 독자개발이 전제된다. 선진 각국은 한국이 KH179 곡사포를 독자개발하는 데 성공하고 수출까지 하게 되자 경쟁대상으로 인식하여 자국의 방위산업 육성과 보호 차원에서 기술 이전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 사례 중 하나가 1981년에 발표된 미국의‘Stratton Amendment’법안이다. 이는 미국의 대구경 포신 전문 생산창인 Watervliet Arsenal이 소재하고 있는 뉴욕 주 출신의 Statton 하원의원이 지역주민의 민원을 받아들여 입안, 발효시킨 것이다. 미국과 경쟁관계에 있는 국가에는 설계·생산·시험평가와관련한 제반 기술협력을 원칙적으로 제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법안은 한국과 미국 간의 기술 협력이 날로 어렵게 될 것이란 것을 예고해주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전차포와 야포 등 각종 포신의 국내 개발계획과 관련하여 미국 측의 압력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연구진은 당시 국내에서 K-55가 한·미 간 공동으로 생산 중이었기 때문에 신자포는 개발 이후 기술 도용 등의 지적소유권 주장에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K-55보다 월등히 우수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자주포를 국내에서 독자 개발함으로써 국내 획득과 수출 시에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도록 해야 했던 것이다.

 

훨씬 어려운 신자포를 개발할 수 있나?

 

무기체계의 연구개발을 본격화하기 위해서는 육군본부·합참·국방부를 거치면서 무기체계의 필요성과 성능, 소요량과 개발 시기 등을 종합적이고 세밀하게 검토하는 절차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소요가 제기된 이후에는 연구개발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연구개발에 있어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다. 이러한 난관을 헤치고 육군이 신자포의 소요를 정식으로 제기하기까지는 많은 포병 관계자의 노력이 있었다.

 

1989년 봄, 연구진은 신자포의 개발계획안을 바탕으로 육군교육사령부 관계관에게 소요를 제기해 줄 것을 제안했다. 당시 교육사의 포병무기체계 소요제기 담당관은 나이 예순이 가까운 박영철 연구관(예비역중령)이었다. 그는 계획안을 유심히 읽더니“바로 이겁니다.”하면서 무릎을 탁 쳤다. ADD의 연구개발 능력에도 상당히 신뢰를 보여 왔던 그는“내 근무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포병 발전의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추진해 봅시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신자포에 대한 육군교육사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교육사는 40㎞를 야포로 투발할 수 있다면“이는 군단화력으로서는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투발 수단이 될 것”이라며 심의를 거쳐 소요제안서를 육군본부에 제출했다.

 

이때 육본에서는 육군포병학교장을 역임한 안경선(安炅善, 육사24기) 예비역 소장과 육군무기체계개발관리단장(전 전력개발관리단장)을 지낸 강대만(姜大滿, 육사30기, 현 삼성탈레스 고문) 예비역 소장이다. 당시 각각 대령과 중령이었다. 1989년 봄, 강대만 중령은 육군본부 무기체계과의 실무장교로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다. 그는 포병대대장을 지내면서 느낀 기존 화포의 사거리와 기동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던 차에 육군교육사로부터신자포 소요 제안을 받았다.

 

“신자포가 우리 실정으로 볼 때 획기적이면서 또한 포병에 꼭 필요한 무기체계라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특히 40㎞에 달하는 사거리와 분당 6발의 발사속도 등은 2000년대 우리군의 전장환경에 부응하는 성능으로서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강대만 예비역 소장)

 

강 중령은 신자포의 작전요구성능(ROC)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화포와 포탄을 함께 개발할 것을 강조하는 등 연구개발을 위한 소요 제기가 되도록 행정절차를 적극 지원했다. 그러나 당시 육군본부 무기체계과에서 다룬 획득관련 무기체계사업은 20종이 넘었고 육본 입장에서 보면 신자포는 그중 하나였을 뿐이다. 신자포가‘획기적’이라는 것은 개발 위험성도 그만큼 높다는 것으로“세계적 수준의 자주포를 국방과학연구소가 과연 개발할 수 있겠느냐.”는 등의 부정적인 견해가 만만치 않게 대두되었다.

 

강 중령은“국방과학연구소에서는 군이 소요제기만 해주면 개발할 수 있다.”는 평범한 말로는 소요 제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신자포가 필요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무장하고 동료와 상급자, 그리고 심의 담당관들을 찾아가 맨투맨으로 설득해 나갔다. 그의 설득 노력은 집요하다 싶은 면도 없지 않아 담당관들은 강 중령과 마주치는 일 자체를 피할 정도였고 대화를 나눈다 해도“신자포는 빼고 말하자.”고 선수를 치곤 했다. 강 중령은 이에 지지 않고 “육군군단화력의 취약점을 해소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임을 거듭 강조하곤 했다.

 

1989년 11월 초순, 마침내 신자포는 육본 소요 제기실무과장 토의회의에 정식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그러나 이날 회의에서는 신자포 안건이 나오자마자 국내 개발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회의를 주재하던 모 장군이“KH179도 실패했는데 그보다 훨씬 어려운 신자포를 개발할 수 있는가.”라고 강한 톤으로 반문한 것이다.

 

강 중령의 노력에 힘입어 신자포에 대해 긍정적일 것이라고 예상됐던 회의장은 일순 긴장의 침묵이 흘렀다. 장군의 한마디(一言)는 어떻게 보면 신자포에 대해 완전히 부정적인 견해를 내보인 것이었고, 어떻게 보면 과연 포병이 ADD와 함께 신자포를 끝까지 개발할 수 있겠느냐는 의지를 확인코자 하는 뜻도 담고 있는 듯했다. 여기서 명답이 나오지 않는 한 신자포는 포기해야 했다.“ KH179 사업은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침묵을 깬 것은 당시 육본 포병과장 안경선 대령이었다. 그는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KH179는 한반도 전쟁 억제력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장비입니다. 다만 후속적으로 조치해야 할 몇 가지 미흡한 사항이 있어 조치 중에 있습니다. 이 사항은 별도 보고 드리겠습니다. 신자포는 육군이 군단화력으로 꼭 확보해야 할 무기체계입니다.”(안경선 예비역 소장) 장군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육본에서 포병을 대표하는 포병과장이 이런 의지를 가지고 필요하다고 하니 검토해 봅시다.”라며 토의에 올렸고, 아무런 이견이 없이 소요 제기안으로 통과되었다. 회의후 안대령의 겁(?)없는 반론에 과장들은미소를 담아 이렇게 농담조의 말을 건넸다.

 

“소신도 좋지만 진급심사를 앞둔 대령이 그렇게 대들 듯 말해도 되나?”

신자포 사업은 이후 전투발전심의회를 거쳐 1990년5월 육군정책심의회에서 육군 무기체계 소요안으로 결정되었다. 안충호 체계개발팀장은 당시 이와 같은 소요제기 과정에서 연구개발에 대한 불신과 지지, 찬성과 반대가 오가는 토의과정을 지켜보면서 기필코 개발에 성공해야 한다는 각오를 더욱 굳게 다졌다.


 1998년 말 개발완료 목표

 

이렇게 본 궤도에 오르게 된 신자포의 개발 완료 시기는 최초 2000년으로 잡혀 있었다. 그러나 1989년 개념연구 단계부터 보면, 전력화하기까지 12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이 기간이 다소 길다고 지적되었다. 이에 따라 1989년 10월에 탐색개발 및 실용개발 기간을 각각 1년씩 단축하여 완료 시기를 1998년 말로 조정했다.

 

이를 연구개발 단계별로 보면, 1989년부터 1991년까지가 선행연구로서 개념연구단계이다. 체계개발 개념을 정립하고 체계개념을 설계하는 시기이다. 이어 1992년 1년간 탐색개발에 들어가 주요 구성품의 체계적합성과 최대 사거리(40㎞) 도달 가능성 등의 작전요구능력(ROC)에 대한 개발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시제(試製)를 제작해 시험평가를 갖는 선행개발은 1993년 10월부터 1996년 9월까지 3년에 걸쳐 수행되는데 군의 작전요구성능(ROC)의 도달 여부를 확인하고 이를 수정, 보완하게 된다.

 

1996년 10월부터 1998년 말까지 2년간은 실용개발단계. 앞서 선행개발단계에서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등 ROC에 부합하는 실용시제를 제작, 야전운용 적합성을 시험평가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이 기간 중에는 또 종합군수지원(ILS, Integrated Logistics Support) 요소를 개발하고 국방규격화 작업을 마무리, 최종적으로 양산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현재는 선행개발과 실용개발이‘체계개발’이라는 하나의 과정으로 통합돼 있다.)

 

이 계획과 일정은 1992년 하반기에 탐색개발기간이 계획보다 9개월 늘어나는 등 약간의 조정을 거치긴 했지만 전력화 예정시기만큼은 변동이 없었고, 연구진은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전력화 약속을 지켜내는 저력을 보였다. 세부적인 개발과정은 다음 호에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용어 해설▶▶▶

■ 종합군수지원(ILS, Integrated Logistics Support)

무기체계의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군수 지원을 보장하기 위해 소요 제기에서 설계, 개발, 운영, 그리고 폐기할 때까지의 전 과정에 걸쳐 제반 군수지원 요소를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활동.

 

1990년 5월 육군정책심의회에서 신형 155mm 자주포(신자포) 개발사업이 육군 무기체계 소요안으로 결정되자 국방과학연구소는 신자포의 연구개발 분야를 기존의 체계종합·무장·포탑·위치확인 등 4개 분야에 사격통제·탄도·탄약·차량분야를 새로 추가했다.

 

이는 자주포 개발에 필요한 기술적 영역을 모두 망라한 것과 같았다. 그런데 이즈음 국방과학연구소가 신자포를 개발하기 위해 확보하고 있던 기술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안충호 책임연구원이 이끄는 체계팀이 1990년 말을 기준으로 개발에 필요한 기술을 7개 분야로 나누어 분석한 결과 그 수치는 사실 그리 낙관적이지 못했다.

 
국산화율 목표 가격 기준 70%로 설정


신자포 개발과 제작에 필요한 기술은 모두 235종. 적용 가능한 기술 수준을 100으로 보았을 때 이에 도달한 기술은 이 가운데 107종으로 전체 45.5%에 불과했다. 앞으로 연구를 통해 확보해야 할 기술이 더 많은 상황인 것이다. 체계종합팀은 향후 3년 이내에 확보 가능한 기술을 95종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항법 자이로시스템 등 33종의 기술은 5년 이상 연구해도 확보가 거의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체계팀은 분석결과에 난감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체계개발에 적용될 모든 기술을 100% 국내 개발할 수는 없는 문제고, 사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석된 기술수준은 의외로 낮았어요. 육군이 요구하는 전력화시기를 늦추고 미확보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기간을 연장할 것인가. 위험을 감수하고 개발을 강행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논의를 가졌습니다.” (안충호 체계팀장)


하지만 도전의식과 긍정적 사고가 없으면 과학자가 될 수 없는 것인지, 체계팀 소속 4명의 연구원들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축구를 좋아하는 임종광(현 사통개발연구실)박사는“골키퍼 있다고 공이 안 들어 갑니까? 장애물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니 계획대로 추진합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밤낮으로 문제 풀기를 즐겨 올빼미로 불린 성락훈(현 대천대 교수)박사는“문제는 풀라고 있는 것이고 문제를 문제로 알고 있으면 문제는 풀린다.”며 임 박사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 주(현 한양대 교수)박사도“어렵게 생각하면 한 없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쉬운 것이라며 어려운 일 임에는 틀림없지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신념으로 추진하자.”고 말했다. 연구진은 신자포의 핵심이 되는 분야에 해당하는 체계·무장·탄약·사통·포탑 구동장치·탄장전 이송장치 및 구조물은 국내개발을 추진하되 개발기간과 경제성을 고려, 항법장치·엔진·변속기·레이스링은 해외에서 도입 후 국산화율을 높이고 유기압 현수장치는 기술도입방식으로 생산한다는 계획을수립했다. 또한 개발기간 중 국산화율 목표는 가격기준 70%로 설정했다.

 
현재 8m 포신 가공할 수 있나


신형 155㎜ 자주포의 개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거리 40㎞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탄을 발사(투발 수단)시키는 무장을 비롯하여, 탄에 추진력을 제공하는 추진제, 탄의 비행안정성 및 탄 뒷면의 항력을 감소시키기 위한 항력감소와 관련하여 탄두, 탄의 비행을 확인하는 탄도 등 다양한 연구 분야가 복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무장이란 포열·포미장치·제연기·제퇴기로 구성된 포열과 주퇴복좌기로 대별되는데, 사거리 관련 연구는 이 발사기구인 무장이 개발돼 있어야 진행이 가능하므로 무장분야(팀장 홍석균 박사)부터먼저 연구에 착수했다.


그런데 당시 연구 형편은 연구진의 개발 의지를 뒷받침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설계 자료를 비롯한 정보와 장비·예산, 그리고 개발기간까지 모든 것이 충분치 못했다. 연구진이 실제 그 당시 획득할 수 있는 설계 자료는 미국·영국·독일·이탈리아등이 탄도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해 체결한 4개국 탄도 협정(QBA ; Quadralateral Ballistic Agreement-프랑스도 가입한 후 PBA로 바뀜) 내용뿐이었다. 즉 ‘3,556㎤ 의 약실체적에 나토 표준탄(L15A1)으로 초속 945m의 포구(砲口)속도를 내는 52구경장의 포신을채택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신자포를 반대하는 측에서 황당하게 봤던 것도 사실입니다. 3,556㎤ 라는 약실 체적만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연구자인 저 자신도 이 체적을 어떤 직경에, 기울기는 어떻게 해야 최적설계가 되는가. 아니, 최소한 안전 설계라도 되는가 하고 막연했으니까요.”(차기업선임연구원)


무장 설계는 다른 부품과 달리 설계에 착오가 있을 경우 불의의 사고가 인명 손실로 직결되는 분야이기도 한다. 당시엔 초속 945m의 포구속도를 낼 수 있는 추진 장약이 개발되지 않은 상태여서 어려움은 더욱 컸다. 몇 번이나 반복 계산하고 또 계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같으면 컴퓨터의 성능도 뛰어나고 CAD프로그램이나 분석 프로그램이 있어 간편하게 설계를 검토할 수 있겠지만 1989년의 연구 형편은 그렇지 못했다. IBM-XT라는 PC가 연구원 8명에게 한 대꼴로 처음 보급돼 보물 다루듯 했던 시절이었다.


연구진은 39구경장 155mm 견인포인 KH179에 쓰는 장약 중 가장 큰 M203A1 8호 장약(26lb)의 추진제(M30A1)를 사용, 신자포용 포강 내 탄도해석을 수행해 보기로 했다. 이 M30A1 추진제를 33lb 사용할 경우 초속 950m 정도의 포구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 33lb의 이 추진제가 발생시키는 강내 압력을 기준 삼아 포열과 폐쇄기 등에 대한 강도설계를 수행한 것이다. 그런데 실사격 결과는 연구진에 기대보다 실망을 안겨주었다. 강내 압력이 예상치를 훨씬 웃돌았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최초 체계개념 형성 연구를 할 때 포신만을설계대상으로 고려했으나 이제는 이 강내 압력 기준에 따라 포미장치, 주퇴복좌기 및 장전장치 등 무장 전체도 새로 설계해야 하는 상황이 돼 버렸다.


어렵게 포신 설계도면을 완성할 즈음 문제점에 또 직면하게 됐다. 제작과 관련, 한정된 예산·시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것이었다. 신자포의 포신 길이는 KH179에 비해 2m 가량 더 길다. 따라서 소재의 단조처리 시설, 열처리로 등 제작업체의 시설 보강이 선행돼야 했다. 포신용 소재를 생산하는 업체는 한 번에 3개의 포신을 제작할 수 있는 양의 소재를 만들어 내는데, 연구진에 할당된 예산은 한 개의 포신 재료비만 인정되었다. 더욱이 업체 시설 보강을 위해서는 약 15억 원이 필요했다. 포신 가공 또한 ‘말하기 어려운’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업체가 제작 가능한 포신 최대치는 KH179용 6m 포신이다. 따라서 기존 시설로 8m짜리 포신 가공이 가능한가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다.“ 가공해 보면 될 것 아닌가.”이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8m 포신가공이 불가능하다면 설비를 서둘러야 했다. 연구진은 가공설비를 국내 업체에 공급한 해외 업체를 방문, 자문을 구했다. 해결책은 뜻밖에도 쉽게 구해졌다. 설계 엔지니어의 설명은“약간만 보완하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연구진의 마음과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곳곳에서 아직 몸을 감춘 채 도사리고있는 복병이 무수히 많을 것임을 실감하면서 각오를 더욱 다져야 했다.

 
한번 화포맨은 영원한 화포맨


1990년 늦가을, 신자포 연구진은 화포 관련 방산업체의 관계자들과 자리를 함께하는 연석회의를 열었다. 연구개발 예산이 부족했던 탓에 무장 개발과 관련된 계획을 설명하고 설비 보강에 먼저 투자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이윤을 추구하는 업체에 개발 가능성만 가지고 선(先) 투자를 부탁하기란 대단히 난감한 것이었지만, 참석자 대부분이 KH179곡사포를 개발할 당시에 참여했던 이들이라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10여 년이 지나 각 업체의 이사 또는 부장이 된 그들은 연구진의 계획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날 저녁 만찬장에서의 화제는 단연 KH179곡사포였다. 당시 열처리 조건을 잡기 위해 밤을 새운 이야기며, KH179의 운명을 좌우했던 운영용 시험 이야기 등 화제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누군가 건배를 제의하며 이렇게 외쳤다.“ 한번 화포맨은 영원한 화포맨이다.”


아직 열악한 환경 속에 연구진과 업체의 도전의지는 그렇게 투합됐다. 업체의 지원으로 포신 제작이 궤도에 오르면서 연구진은 기술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우선 포신을 거치할 시험장치대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포신의 최대 외경이 KH179와 동일하기 때문에 KH179의 가신을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사거리 40㎞를 확인하기 위한 사격 충격력을 견디는 거치대는 못되었다. 연구원들은 저마다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포신을 큰 콘크리트 더미에 묶어 사격하는 방안이 가장 현실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더 이상 바랄 것없는 해결책이 우연히 찾아왔다. 안흥종합시험장 손원호 실장이 문상규 부장에게“앞날을 위해 자체적으로 개발해 놓은 다목적 시험기가 있다.”고 말해준 것이었다.

 


“8인치 포가를 이용해 포신외경에 상관없이 기술시험이 가능토록 한 시험기였어요. 그것도 설계 단계가 아닌 제작이 완료된 상태로 즉시 기술시험이 가능했습니다. 하늘이 돕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지요.”(홍석균 무장팀장)


최초의 기술시험은 1992 1월 안흥종합시험장 3사격장에서 실시되었다. 다목적 시험기에 장착된 포신은 차가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더욱 당당하고 늠름해 보였다. 사격시험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됐고 적어도 이 때만은 마음이 넉넉했다. 하지만 시험이란 것이 어디 뜻대로 되는 것이던가. 개발 중에는 많은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연구개발 기간은 특히 그렇다.

 

곳곳에 위험요소 도사린 무장 연구


엄동설한에 두려움과 기대를 안고 드디어 최초 무장 연구 시제품에 대한 사격시험을 가졌다. 아니나 다를까. 이때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져 나왔다. 높은 사격 압력으로 뇌관이 삽입링에 고착돼 빠지지 않는 예가 가장 먼저 발생했다.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드라이버와 펜치 등 온갖 공구를 다 동원해 무리하게 빼려다보니 손바닥 껍질이 다 벗겨져 나갈 정도였다. 자동장전장치를 사용해 55도 고각에서 M549A1탄을 장전했는데 약실에 박혀야 할 탄이 잘 올라가더니 그만‘뚝’떨어지는 일도 벌어졌다. 그곳에 서 있던 추증호연구원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게로 제대로(?) 떨어졌더라면 발등·발가락은 그냥으스러졌을 겁니다. ”훗날 탐색개발이 거의 끝나갈 즈음이던 1993년 여름, 장사정탄 및 추진장약에 대한 기술시험을 지원하던 중 생긴 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례 중 하나이다. 이날 연구원들은 포 뒤로 20m쯤 떨어져 귀를 막은 채 사격을 지켜보았다. 몇 발은 무리 없이 잘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고막을 찢는 듯한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무엇인가 이영현 연구원 머리 바로 위로 ‘휙’지나갔다. 사수 요원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서 달려가 보니 그 두꺼운포열이 확장돼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주퇴복좌기에 걸쳐져 있었다. 서로가 어이없어 하는 가운데 이 연구원은 문득 머리 위로 날아간 물체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조사를 해보니 공이 뭉치가 온 데 간 데 없었다.


“순간 몸이 경직돼 버렸어요. 키가 조금만 컸더라면 이 자리는커녕 K-9 구경도 못하고 이름 석 자만 작은 비석에 남아 있었겠지요.”(이영현 연구원)


누군가는 이 같은 사례의 원인이 안전불감증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다만 사격시험 최일선에 서는 무장팀 연구원에게는 그 많은 위험들이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숙명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편 연구진은 안흥종합시험장에서 탐색개발 기간까지 250발의 사격시험을 가졌다. 시험 결과 초속 929m의 포구속도를 얻음으로써 최대사거리 40㎞ 도달 가능성을 확인했다.

 
자주포가 자동화 포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자주포라고 하면 운용·발사체계가 자동화돼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기존 자주포는 일단 기동이 가능한 차체에 포를 탑재한 것만 말할 뿐 자동화와는 관계없다. K-55만해도 모든 사격준비 절차를 인력에 의존하고 있다. 다만 자체 동력(유압)을 이용해 포신을 돌리고 올리는 수고로움을 덜어줄 뿐이다. K-9 자주포에 신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기존 견인포·자주포와 달리 화포의 완전 자동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화포 자동화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기존 견인포·자주포의 운용·발사체계를 살펴보자. 이 화포들은 사격을 위해 먼저 사격하고자 하는 장소를 측지한 뒤 화포를 그곳으로 이동시키고 땅을 파 가신(架身·스페이드)을 고정시킨다. 사격 제원이 하달되면 화포로부터 50m 이상 떨어진 위치에 나침반이 들어 있는 방향틀을 설치, 수포(수평기의 물방울·level vial)·웜 기어가 있는 방향포경과 상호 정렬을 한 뒤 사격방위각을 장입하고 방향 손잡이를 돌려 포신을 사격 방향으로 구동시킨다. 그리고겨냥틀·겨눔대를 화포 밖에 설치, 사격 방향을 고정한다.

 

이어 고저상한의에 사격고각을 장입하고 포신을 사격할 고각으로 들어올린다. 그 다음 포신의 폐쇄기를 열고 포탄과 추진장약을 장전, 폐쇄기를 닫고 뇌관을 삽입한 뒤 사격하게 된다. 사격 뒤에는 탄이 발사되면서 발생하는 충격으로 화포가 밀려나게 되고, 재차 사격하기 위해서는 다시 화포의 방향과 고각을 사격 위치로 보정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절차는 수동으로 이뤄짐으로써 초탄 발사에 2∼11분의 시간이 소요되고 최대 발사속도도 분당 4발 이상은 곤란하다. 그러므로 화포 자동화가 이루어지면 적은 포반원의 인원으로 사격 임무를 신속히(초탄 발사 소요시간 30초 이내) 진행시키고 대량 화력을 투발(급속사격 15초 동안 3발과 최대발사속도 분당 6발)한 뒤 신속히 진지를 변환해 다음 사격을준비하는 슛 앤 스쿠트(shoot & scoot) 작전이 가능케 되는 것이다.


국방과학연구소의 화포 자동화는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1980년대 초부터 안충호 체계팀장에 의해 연구 되기 시작했다. 사격 방향과 고각을 바로잡는 수포의 역할을 대신할 전기적 센서, 이동 중 또는 정지상태에서도 신속히 포·포탑을 자동으로 정렬할 수 있는 구동 시스템 등을 연구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당시 안팀장은 우선 포의 자세를 알 수 있는 수포의 역할을 전기적 센서로 대체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안 팀장은 센서를 확보하기 위해 수소문하던 중 유도무기조종장치 연구실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천마 대공도무기체계 개발팀을 이끌고 있던 박양배(전 부소장) 박사는 안 팀장의 연구내용을 듣고는 센서 2개를 흔쾌히 빌려주었다.


“기대에 부풀었지만 실험장치 제작을 협의한 업체마다 고개를 저었습니다. 거절당한 거죠. 그래서 몇 번 만난 적 있는 삼성정밀 1연구소(현 삼성탈레스)의 권구빈 실장을 찾아가 부탁했습니다. 겨우 계약을 하고 실험 시제품을 꾸밀 수 있었습니다.”(안충호 팀장)


링 레이저 자이로 핵심 구성품으로 채택 그런데 연구는 오래 가지 못했다. 1년을 더 연구한 후 연구과제로서 승인받지 못해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안팀장은 장차 신개념의 자주포 개발을 염두에 두고 자료 수집과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해외 군사전문지에서 화포의 사격 충격력을 견딜 수 있는 링 레이저 자이로 시스템이 미국 허니웰사(社)가 개발했다는 기사를 읽게 됐어요. 너무도 반갑고 흥분되는 뉴스였습니다. 지금 K-9 자주포의 핵심 장치 중 하나입니다.”(안충호 팀장)


링 레이저 자이로 시스템은 도대체 무엇일까. 위치확인 장치로 이해되는 이 장치는 지구 회전 각속도의 1만분의 1까지 감지 가능한 링 레이저 자이로, 지구 중력 가속도의 10만분의 1까지 감지할 수 있는 가속도계, 그리고 이들 센서가 감지한 관성정보를 이용해 항법계산을 수행하는 항법 컴퓨터와 함께 한 몸을 구성한다. 이 위치확인 장치는 주행하는 자주포의 위치,화포의 진북(眞北)에 대한 방위각 및 지구 수평면에 대한 고각·경사각을 자체적으로 계산해준다. 계산된 항법정보·자세정보는 사격 통제장치에 제공되는데10m 이내의 위치 정확도와 0.7밀(mil) 이내의 방위각 정확도, 0.35밀 이내의 고각·경사각 정확도를 갖는다. 이 장치가 자주포에 적용되면 포의 위치·상태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수동으로 이뤄지던 일련의 사격절차를 생략할 수 있다.


일반 화포처럼 사격을 위해 사전에 측지한 위치로 이동하지 않아도 되고 방향·고각을 잡기 위해 방향틀·겨냥틀·겨눔대 등의 부수 장비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화포 자동화, 궁극적으로는 신형 자주포의 핵심 장비가될 수 있는 것이다. 안 팀장은 신자주포 개발사업이 정식으로 시작되면서 즉각 이 링 레이저 자이로 시스템의 신자주포 적용을 결정했다. 연구·개발하자면 이 시스템과 유사한 기능을 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 못할 것도 없겠지만 소요될 개발기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국방과학연구소가 이 시스템을 독자 개발한 것은 2000년대 중반의 일이다.

 
“저도 한 오기가 있는지라…”

정확한 사격을 위해서는 사격목표 방향과 높이로 포·포탑을 정밀하게 구동, 정렬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여기서 정밀이란 1밀(mil) 이내의 정확도를 말한다. 1밀은 360도를 6400으로 나눈 값, 또는 기준점에서 1㎞ 떨어진 곳의 수직 1m 지점까지의 각도로서 0.05625도이다. 다시 말해 급속사격을 위해 포탑을 회전시켜 목표방향으로 향하게 할 때 포는 이 1밀의 각도 내에 위치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포·포탑을 정밀하게 구동할 수 있는 기술을 시스템적으로 구성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기술적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차대에 설치되는 포탑이라는 구조물은 그 크기가 크고 무겁지만 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구동시켜야 하는 것이고 둘째, 구동할 때 52구경장의 무장(포)으로 인해 발생하는 큰 불균형 모멘트(포신 구동에 따른 하중 변화량)를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소형인 포지지 구조물로 보상하는 메커니즘을 구성해야 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셋째로는 대형 구조물의 위치를 제어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충격하중을 최소화 해 구성품에 무리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최신기술은 당시 영국 빅커스사(社)가 개발, AS-90 자주포에적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포탑실 김동현 박사는 부분적으로 기술협력을 위해 1990년 9월 영국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는 빅커스사의 부사장으로부터 자주포 전체를 사라는 말만 듣고 문을 나서야 했다.

 


김 박사는 이번에는 2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마르코니사를 방문했다. 이 회사는 엄청난 기술 이전료를 요구했다. 공장 설비 소개도 하지 않으면서 단지 도면만 보여주고 200만 달러를 주면 시뮬레이터를 개발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치 않은 태도지요. 물론 우리 기술이 취약하니까 감수할 수밖에 없긴 한데… 차를 내주겠다는 말을 뿌리치고 그 길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죠. 저도 한 오기하는지라 죽는 한이 있어도 이 구동시스템을 만들겠다고 마음 먹었지요.”(김동현 박사)


안태영 박사를 비롯한 포탑실은 개발회의를 통해 전차의 포·포탑 구동장치를 개발했던 경험을 살려 전기·유압방식의 구동시스템을 독자 개발키로 하고 유웅재 박사 등으로 특별개발팀을 구성했다. 모두가 독한 마음을 먹은 것인데, 이것은 큰 모험이었다. 실패할 경우 개발사업 전체가 입는 영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개발팀은 곧 구동장치의 실험모델(시뮬레이터) 제작 준비에 들어갔다.


신형 자주포의 형상과 운용조건이 아직 구체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포·포탑의 중량과 관성량을 계산해 이를 기준으로 구동속도와 정밀도 규격을 산출해야 했다. 그리고 각종 기술자료를 수집하는 등 설계 데이터를 작성, 이를 토대로 1991년 구동 시뮬레이터를 제작했다. 이 시뮬레이터는 실제 자주포에 적용될 모델과 크기가 같은 1대 1 크기의 실험장치로서 국내 독자기술로 개발할 포·포탑 구동장치를 신형자주포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디지털제어기술로 1밀 이내 정밀도 구현 1992년부터 본격적인 시험에 들어간 연구진은 곧 난관에 봉착했다. 52구경장의 무장이 갖는 불균형 모멘트가 K-55 무장의 2배에 달했던 것이다. 기존 유압평 형기의 용량을 증대시킨 평형기는 무장의 위치 변화에 따른 불균형 모멘트 값을 충분히 보상하지 못했고 구동하는 각도에 따라 구동력도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이 문제는 당시 한창 개발 중이던 독일의 PzH2000 자주포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안 박사의 제안에 따라 서울공대의 이교일 교수와 공동연구를 통해 평형기·실린더·포로 조합한 메커니즘의 정확한 이론 모델을 산출하고 이를 모사실험에 이용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큰 설계 변경 없이 평형기에 대한 효과적인 유압 설정으로 시스템 구성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포·포탑의 구동, 탄 장전 및 이송에 긴요한 유압에너지를 만들어 주는 유압발생장치에서 생기는 소음도 문제였다.

 

외국에서 기술이전에 난색을 표명했던 분야로서 최소한의 용적률로 고효율의 유압 에너지를 탑재하는 형태의유압발생장치였으나 난청의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소음이 컸다. 이대옥·김동현 박사, 그리고 동명중공업 안동문 부장과 엔지니어 등은 며칠 밤을 새워 그 원인이 유압의 과도한 출렁거림(맥동현상)에서 오는 것임을 밝혀냈다.


“자동차 머플러에 쓰이는 헬름홀츠 감쇠기의 원리를 이용해 실험장치를 만들었어요. 소음을 줄이기 위한 감쇠기 조건을 변경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시끄럽던 장비가 갑자기 조용해지고 유압 맥동현상도 확연히 줄어든 겁니다. 이후 발명특허 및 실용신안으로 등록했는데, 내내 자랑거리로 남아 있습니다.”(김동현 박사)


또한 사격 명중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포·포탑 정밀제어를 위해서는 보다 발달한 제어 방법이 요구됐다. 고정호 박사와 최준성 선임연구원이 이때 디지털 제어기술로 개발한 마찰보상 제어방식은 국내에서는 선구자적인 것으로 선진국 기술과 비교해 손색이 없었다. 이렇듯 순수 국내 기술만으로 수많은 반복실험과 실험데이터를 분석하며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포·포탑 구동장치는 신형 자주포의 주요 핵심기술로서 구동 정밀도가 기준오차 범위를 충족하는‘1밀 이하’라는 탁월한 성능을 지니고 있다.

 
삼성테크윈, 궤도차량 가능할까


‘국가를 방위하는 기본 병기를 제 손으로 만들지 못하는 국가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1990년대 초 자주포체계 전문업체인 삼성테크윈(당시 삼성항공) 창원공장에는 이같은 슬로건이 공장 내에서 가장 높고 규모가 큰 초대형 크레인에 쓰여 있었다. 당시 삼성테크윈의 방산사업 총괄을 맡고 있던 노석호 특수사업본부장은 직원들과 함께 그 슬로건을 보면서 삼성이 K-55자주포를 생산, 국가 방위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1991년 겨울, 신형 자주포의 체계개념 연구가 마무리될 즈음 삼성테크윈은 국방과학연구소 화포체계팀으로부터 전혀 뜻밖의 통고를 받고 깜짝 놀라게 된다. 한삼수 전 특수연구소장을 비롯한 삼성테크윈 기술진이 참석한 신자포 개발 관련 업무협의에서‘신자포의 차량분야는 개발 경험과 기술력이 있는 업체가 담당하고 삼성테크윈은 체계조립을 맡는다.’는 개발방향이 나왔던 것이다.


국과연 체계팀의 이같은 방향은 삼성테크윈이 비록 미국과 자주포를 공동생산하면서 자주포를 국내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데는 기여했지만 차량을 직접 개발한 경험이 없었다는 점, 따라서 국내 다른 궤도차량 전문업체에 비해 기술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지적된 것이었다. 국과연 체계팀은 이 자리에서 탐색개발 계획에는 기동실험차량(MTR : Mobility Test Rig) 개발계획이 없다는 내용도 알려주었다. 이것은 삼성테크윈 기술진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심장이 멈추고 눈앞이 아득해졌을 정도였다.”(한삼수소장)


당시 삼성테크윈은 K-55 자주포용 탄약운반차 사업을 두고 다른 기동장비업체와 첨예하게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은 더욱 크게 와 닿았다. 한 소장에게는 이것이 삼성테크윈의 방산부문에대한 국과연의 기술평가 의미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소장은 곧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삼성은 중장비·조선사업도 하고 있어 차량 관련 시스템기술과 용접기술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고, 삼성중공업 기계전자연구소·삼성종합기술원의 지원을 받으면 궤도차량 또한 개발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K-55의 공동생산 경험밖에 없는 기술수준이었기 때문에 국과연 체계팀의 판단이 옳다고 여겼지만 한편으로는 자주포 체계 전문업체로서 차량분야를 내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차량을 기본으로 포병과 관련된 탄약운반차량·사격지휘차량 등의 계열장비를 개발, 계속 생산할 계획이었으니까요.”(한 소장)


노석호 본부장은 한 소장 등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곧 MTR 개발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기술진은 내심 개발비용이 많이 소요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 본부장은 특수연구소의 연구인력을 대폭 증원할 것과 MTR 개발에 투자할 것을 주저없이 결심하고 있었다. 그것은 삼성테크윈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고 그의 판단은 옳았다.
 

미니 해설▶▶▶
왜 신자포이고 K-9인가
개발 초기 155㎜ 자주곡사포 K-9을 부를 때 차기세대 자주포라 하지 않고 신형자주포라고 호칭했다. 차기세대 자주포라면 기존의 자주포와 비교해 세계적으로 기술적·운용적인 면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즉 탄 추진 방식이 다른 액체추진포·전자열포를 장착, 개발했다면 차기세대 자주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액체추진포·전자열포등은 세계적으로 아직 체계로 개발, 전력화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K-9은 육군의 신규 전력 소요 제기에 따라 기존에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독자 모델을 개발한 것으로 사거리 증대 및 자동화를 달성했으므로 신형자주포라고 지칭했다. 이는‘개량’과는 다르다. 기존 자주포의 일부만 변경해 성능을 향상시킬 경우 이를 개량이라고 한다. 사업명은 ‘KSAM 천마’, ‘ 30㎜자주대공포비호’ 에서 보듯이 무기체계의 별칭이 된다. 신형자주포 개발사업도 사업을 공모했다.‘ 코뿔소’,‘ 자주’, ‘선더파이어(thunder fire)’등 여러 제안 가운데‘광무(廣武)’가 유력해 보였다.

통일 이후에도 대비하고광개토대왕의 무훈(武勳) 또는 무덕(武德)을 기린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업명을 이중화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에 따라 최초 정했던‘신형 155㎜ 자주곡사포개발 사업’을 그대로 확정했다. 그리고 양산(量産)을 고려해 모델 이름(흔히 제식명칭이라고 하는)도 정했다. 당시 국방과학연구소가 연구·개발하는 화력 무기체계에 붙이는 모델 번호 중 비어 있었던 7과 9 중 9를 선정해 XK-9이 신자포의 개발 모델명이 됐다.


X는 시제(Experimental), K는 한국(Korea)을 뜻한다. 9는 순번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1990년대에 기필코 전력화하겠다는 연구진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K-9에 따라붙는‘천둥’은 전력화 후 육군에서 공식적으로 명명한 별칭이며, 수출을 위한 영문 표기는 ‘Thunder’이다.


1992년 새해가 밝아오면서 신형 자주포에 대한 탐색개발(Exploratory Development) 사업이 국방부로부터 승인됐다. 자주포를 구성하는 주요 분야별로 연구개발을 본격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계획된 기간은 1년. 참으로 짧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작전요구성능(ROC)을 충족할 수 있도록 개발이 가능한지 여부를 검토하면서 체계개발동의서(Letter Of Agreement)를 작성하고, 자주포 체계 전체를 개발하는 계획도 수립해야 하는 만큼 충분한 시간은 못됐다.


그런데 이즈음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변화의 물결이 휘몰아친 시기이기도 했다. 구소련의 붕괴로 인해 신(新) 국제질서가 구축되는 가운데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한반도 비핵화 선언, 그리고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남북 합의서가 타결되었다. 국방과학연구소(이하 국과연)도 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미국이 이라크와 벌인 걸프전이 무기체계 분야에 던진 교훈도 깊게 고려해야 했다.


국과연은 변화를 모색했다.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미, 즉 질 위주의 자동화한 고도의 전략 정밀 무기체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인식 아래 재래식 병기 또는 체계 위주 개발보다 핵심기술 연구가 강조되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92년 2월 들어 국과연은 기술연구본부를 발족시켰다. 하지만 반대로 신형자주포와 같은 화포개발사업은 위기를 겪어야 했다.


신형 자주포가 첨단 자동화 화기임에도 재래식 병기로 분류하게 됐다. 이는 신형 자주포는 국과연이 연구개발할 것이 아니라 전문화된 방산업체가 해야 할 사업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연구소 내부에서 대두되었다. 더욱이 국방부에서도 이런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국과연은 이런 무기를 개발해야 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이대로라면 체계개발(Full Scale Development)을 지속할 수가 없게 된다.’사업 책임자 문상규 실장과 함께 신형 자주포 개발을 주도해온 안충호 체계팀장은 위기를 느꼈다. 향후 체계개발을 지양하고 핵심기술 위주로 나아간다는 국과연 내부분위기도 그랬거니와 탐색개발 예산과 인력이 턱없이부족했다. 탐색개발에 할당된 예산은‘우리 자주포를 우리가 개발한다.’는 의지를 가진 당시 방산업체의 투자에 힘입어 겨우 해결해 나갈 수 있었지만 체계팀이 7명에 불과하는 등 부족한 연구인력은 위기의식을 증폭시켰다.연구원 대부분이 기숙사에서 기거하면서 밤낮으로 연구에 매달리는 가운데 한 신입 연구원이 과로로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안 팀장에게 마침 비상구가 하나 열렸다. 당시 김학옥(金學玉, 육사16기, 예비역 육군중장) 연구소장에게 신형 자주포 개발과 관련해 보고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안 팀장은 이를 전환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 성능과 개발계획 등 통상적인 내용에 대한 브리핑은 접어두었다. 대신 크리미아 전쟁 이후 화포로 인해 기병대가 사라진 이야기를 시작으로 근대 화포 개발사와 발달과정, 그리고 선진국들의 자주포 개발 추세를 보고했다.


“신형 자주포가 1998년 전력화되면 이 자주포는 세계적 수준으로 우리 화포 개발 역사는 물론 세계 화포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될 것입니다.”안 팀장은 자신있게 보고를 이어갔으나“연구원들은 신명(身命)을 바칠 각오로 연구하고 있다.”는 마지막 다짐은 차라리 읍소(泣訴)에 가까웠다.


안 팀장은 김학옥 연구소장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귀가 활짝 열리는 것을 느꼈다. 김 연구소장은 배석한 주요 간부들에게“국과연은 바로 이런 신형자주포를 개발해야 합니다. 이런 세계 수준의 무기체계를 개발하여 한국의 위상을 드높여야 합니다. 장병들은 세계 제일의 무기체계로 국토를 방위함으로써 조국에 무한한 긍지를 갖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신형 자주포 개발사업이 탄력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체계개발사업 계획도 수립하고 조직도 강화했다. 자주포부로 구성되면서 기존 팀은 실(室)로 확대되었다.

 
미국,“ 우리와 공동 생산하자”제의

1992년 4월, 안충호 팀장 등 일부 연구진은 팰러딘(Paladin)으로 불리는 미국의 M109A6 자주포 출고식에 초청받아 참석했다. 이때 팰러딘을 생산하는 BMY사(현재 UDLP) 연구진은 국과연의 신형 자주포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고 미국의 자주포를 한국에 소개하고 싶다고 제의해왔다. 안 팀장에게서 국제전화로 보고를 받은 문 부장은 KH179 155mm 곡사포 개발 후 미국 측이 난데없이 지적소유권을 주장하는 통에 홍역을 치렀던 터라 미국 측의 방문을 허락했다. 이는 신형 자주포 개발이 완료될 즈음에 그들이 K-55(M109A2를 국산화한 자주포)의공동생산을 빌미로 우리가 신형 자주포에 그 기술을 도용했다는 주장을 내세울 것을 우려하여 이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다음달, 우리 기술력으로는 신형 자주포를 개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BMY사와 체계공학(System Engineering) 전문업체인 탈레다인 브라운(Taledyne Brown)사가 국과연을 방문했다. BMY사는 팰러딘 자주포와 함께 52구경장의 포신을 장착한 자주포(P-52)를 소개했다. 국과연의 신형 자주포를 K-55처럼 공동개발하자고 제의했다. 체계공학이 쉽지 않다는 것과 많은 노하우를 가진 자신들의 협력을 받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국과연도 준비된 반격을 가했다. 신형 자주포의 핵심인 52구경장 포신의 사격장면과 자동방렬 실험장치의 구동 장면을 비디오로 보여주었다. 신형 자주포를 우리의 계획에 의해 우리가 개발하고 있다고 말하고 앞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그때 협의하겠다며 사실상 그들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날 저녁 만찬에 미국 측한 인사가 연구진에“오늘 비디오로 보여준 그 52구경장 포신을 어느 나라에서 구입했느냐?”고 물었다. 연구원은 빙긋 웃으며 설계·포신소재·가공·제작 등 모든 것을 독자 개발했다고 대답해 주었다.그러나 질문한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뜻인지, 놀랍다는 뜻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 후 국과연은 미국측과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기술자료교환협정(Data Exchange Agreement) 회의를 통해 신형 자주포의 연구개발 내용을 발표해 주었다. 이는 우리의 신형 자주포 독자 개발을 미국이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고, 훗날 신형 자주포의 국내 생산 및 실전 배치, 그리고 해외 수출에 있어 미국은 어떠한 지적소유권 주장도 할 수 없게 되었다.

 


‘ 10초 이내 3발 발사’를 선택 안 한 이유

1992년 6월, 육군은 신형 자주포가 최초 소요제기될 때 제시됐던 ROC에 대해 검토에 들어갔다. 탐색개발이 끝나고 시제품을 개발하는 선행 개발 단계로 진입하기에 앞서 갖는 작전요구능력의 재검토 과정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과잉 성능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는지, 부족하지는 않는지, 기술적 타당성은 있는지, 그리고 군에서 추가로 요구하는 성능의 가능성 등을 꼼꼼히 따져보는 중요한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쳐 재정립된 ROC는 연구진에 개발목표가 될 뿐만 아니라 군입장에서는 전력화될 경우에 획득예산과도 연관됨으로 그 중요성과실무자의 책임은 막중했다.


이 실무를 맡은 이는 당시 중령으로서 육군본부 포병 무기체계 담당 실무장교로 있던 변충헌 예비역 대령이다. 그 역시 여느 포병장교와 마찬가지로 표적획득수단과 병행한 야포의 사거리 증가를 비롯하여 실시간(實時間Real Time) 타격체계 구성, 화력량과 정확도의 증가, 전투피로도 해소, 생존성을 위한 방호력 보강 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K-55로는 이 모든 갈증을 해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국과연 신형자주포 체계실로부터 신형 155㎜ 자주포 탐색개발 연구결과 보고서를 접수한 후 그는 신형 자주포에 자신도 모르게매료돼 가고 있었다.


“업무 파악을 마칠 즈음이었고, 1993년도에 체계개발이 착수될 수 있도록 10월 중에 검토, 보고를 마쳐야 했는데 시간적으로 촉박하다는 부담감이 적지 않았어요. 더욱이 그때까지도 신형 자주포 개발에 부정적 시각을 보였던 분들에게 개발 타당성을 입증해보여야 했습니다.”


변 대령은 국과연 연구개발진의 안충호 체계팀장과 김동수(대령 예편, 육사32기, 현재 국과연 5기술연구본부장)박사를 처음 만난 뒤 이틀에 한번 꼴로 반나절씩 분야별 연구원들과 많은 토의를 벌였다. 40여 항목의 작전요구 능력을 검토하면서 변 대령은 누구 못지않게 업무에 매진했다. 한편으로 그는 연구진의 헌신적인 노력과 열성에 놀랐다. 마치 자신이 연구진에 떠밀려 일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같은 생각은 연구진에도 마찬가지로 결국 사용자측인 군과 연구개발진이 자연스럽게 일체감을 이룰 수 있었다.


변 대령은 신형 자주포의 필요성부터 검토했다. ① 화력 수단 중 야포체계가 가장 저렴 ② 북한 대비 포병화력의 수적 열세를 질적으로 대응 ③ 군단작전지원 수단 확보 ④ 야포 사거리 연장에 따른 적의 추가적 대책강요 ⑤ 통일 후 주변국 군사력에 상응하는 전력 보유등이 신자포의 필요 이유가 되었다. 이는 일부 관계관들의 부정적 인식을 전환시켰다. 특히 표적획득 수단이 병행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과 관련해 대포병레이더·정찰용 무인항공기 등을 신자포의 전력화시기에 맞춰 확보, 충족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경제성을고려한 합리적인 ROC 설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자포의 급속발사속도를 15초 이내 3발로 결정한 것은 좋은 사례가 된다.

 

변 대령은 탄의 위력을 고려할 때 초탄이 떨어진 후 적의 인원·장비가 15초 이내에 살상범위를 벗어나기는 어렵고, 사격시간은 훈련수준에 따라 단축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10초 이내 3발’을 채택하지 않았다. 만약 10초 이내 3발의 발사속도를 계속 요구했다면 그것은 거의 로봇 수준으로 개발 비용의 엄청난 증가는 물론 연구진에게 부담감을 넘어 고통을 주었을 것이다. 자동항법장치 탑재부분에서 그는 적잖은 반대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이유는 비용이 많이 들어‘호화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투피로도 해소는 물론 자동사격통제체계의 주요기능요소로서 자동화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임을 강조했다. 소요예산과 무기효율로 볼 때, 단 1회로도 소요예산 이상의 효과를 달성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발칸 탑재 요구논의에 대해서도 변 대령은 개발완료, 전력화하는 단계에 이르면 방공체계가 전반적으로 보완되므로 대공화기로서 발칸을 탑재하기보다는 자체 방어용 부무장을 주장했다.
변 대령은 넉 달여의 검토 끝에 글자 하나하나에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며 60여 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 계획편제처장(홍한수 예비역 준장, 육사24기)에 대한 최종보고는 신자포가 갖는 중요성 때문에 10월29일부터 이틀간에 걸쳐 진행됐다. 부분수정 몇 가지 외에는 특별한 지적을 받지 않았다. 안 팀장은“홍 장군이 변 대령에게 직접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관계관들에게 매우 훌륭하고 완벽한 보고였다고 말했다는 것을 훗날 전해 들었다.”고 귀띔했다.

 
업체 주도로 개발할 수는 없는가?

한편 육군에서는 ROC에 대한 검토가 순조롭게 진행된 반면 합참에서는 육군에 대해 LOA 작성 지시를 보류하고 있었다. 연구진이 수차례 합참을 방문, 연구개발이 중단되지 않도록 방안을 협의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즉 훈령에 따라 탐색개발이 끝난 후에 그 결과를 확인하고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이러했다. 당시 지상군 무기체계를 대표하는 K-1전차의 성능개량사업(K1A1을 뜻함)과 30㎜ 자주대공포 비호의 주무장·탄약이 해외 기술도입으로 추진되던 터라 선진국에서 아직 개발되지 않은 사거리 40㎞ 급의 포신과 탄약을어떻게 국내에서 독자 개발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구진에게는 연초부터 가졌던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국방부가 신형 자주포 체계개발사업의 개발 형태를 정부 주도, 즉 국과연 주도에서 업체 주도로 전환 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에 대해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에 따라 자주포 전문업체인 삼성테크윈(전 삼성항공)은 자체적으로 이를 검토하게 됐다. 삼성테크윈은 장갑차량과 종합군수지원요소는 업체 주도 개발이 가능하지만 신형 자주포의 성능 상 핵심이 되는 무장·탄약·탄도·포탑·사격통제 분야는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육군이 제시한 ROC를 충족하는 자주포는 세계 어느 국가도 개발하지 않아 삼성테크윈으로서는 기술도입 생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국과연 주도의 개발 방향이 다시금 결정됐다.

 
삼성테크윈 MTR 제작에 박차를 가하다


신형 자주포 연구 개발을 둘러싼 몇몇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연구진은 수차례 한숨을 내쉬기는 했어도 이에 실망하지 않고 각기 분야별 연구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사거리 분야 연구진은 무장, 사격 고정거치대, 항력 감소 장치를 갖는 탄두, 소진탄피로 외형을 쌓은 추진장약과 탄도를 개발해 40㎞의 최대 사거리 도달 가능성을 확인하는 사격시험을 성공리에 실시했다. 발사속도·반응성 분야의 연구진도 자동방렬, 위치 확인, 사격통제, 탄의 적재·이송·장전장치의 실험 모델을 만들어 15초 이내 3발의 급속사격가능성과 30초 이내의 초탄 발사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리고 신형 자주포‘1대1 모형(mock up)’을 제작해 형상을 구체화하면서 구성품 간 인터페이스상의 문제점을 확인하고 그 대책을 세워 나갔다. 승무원이 탑승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데 불편한 점은 없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자주포 내부를 인간공학적인 측면에서 확인했다. 또 정비를 위해 각 부품을 붙이고 떼어내는 일이 원활하게 될 수 있는지 등을 점검했다. 이 과정에서 보완해야 할 분야들은 다음 단계인 선행체계 개발 때 개선할 수 있도록 챙겼다.


신형 자주포 탐색개발 계획에서 개발예산 부족으로 빠져 있던 차량 분야의 연구는 삼성테크윈(전 삼성항공)이 노석호 전 특수사업본부장의 지시에 따라 과감히 투자하여 기동실험 차량(MTR:Mobility Test Rig)을 제작하고 있었다. MTR는 ROC 중 기동성능과 관련된 차량의 구성체계(동력전달장치·현수장치·구조물 등) 설계요소를 확보하기 위해 제작되는 것이다.


삼성테크윈은 국방과학연구소 기동체계실의 지도를 받는 가운데 부족한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현수장치 분야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곽병만 교수팀, 엔진 변속기 선정을 포함한 기동특성 분석은 이정무 서울대 교수·조동우 포항공대 교수팀과 각각 산·학 공동연구를 통해 이론적 기초를 다졌다. 삼성테크윈은 또 삼성종합기술원의 도움을 받으면서 차체 구조물의 최적화를 연구했으며 당시 애로 기술이었던 800마력 이상의 동력장치는 미국의 전문업체인 AAI사와 공동으로 개발했다. 이때 삼성테크윈의조남규 박사를 비롯한 4명의 연구기술진이 AAI사에 상주하면서 개발기술·설계기술을 확보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MTR 조립을 마쳤습니다. 공장 내 기동시험로에서 먼저 예비 주행시험을 가졌는데, 처음으로 개발했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이 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문제점이 별로 없었어요. 정성들여 다듬은 조각품, 그렇게 여겨졌습니다.” (임근묵 당시 삼성테크윈 기동팀장)


삼성테크윈 연구기술진은 이제 제대로 된 기동시험을 해보기로 했다. 당시는 아직 국방과학연구소의 기동시험장(현재 창원 소재)이 건설되기 이전이어서 군의협조를 받아 부산에 있는 수영비행장에서 기동시험을 가졌다. 그날따라 수영비행장에 세찬 바람이 불었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가운데 장비를 옮기고 시험준비를 하는 연구기술진은 꽤 싸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행히도 연구기술진의 마음을 아는지 활주로를 씩씩하게 왕복했어요. 비로소 전투장비다운 모습으로 마음에 와 닿더니 이내 가슴이 뿌듯해졌습니다.”(이상명 당시 삼성테크윈 체계팀장)


이날 저녁 연구기술진은 그동안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면서 축배의 잔을 높이 들었다. MTR는 이후 400km를 시험주행하면서 신형 자주포의 차량 설계에 필요한 수많은 자료를 쏟아 놓았다. 기술 개발 면에서 신형 자주포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육군이 ROC에 대한 검토를 마친 뒤인 1992년 11월 국과연 연구진은 삼성테크윈 창원공장에서 탐색개발 단계에서의 연구 개발 성과를 종합, 발표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는 1대1 모형 품평회도 함께 진행됐다. 연구진은 물론 육군·합참·국방부 관계관, 관련 방산업체 기술진 모두가 앞으로 선행개발과 실용개발 과정(현재는 이 두 단계를 하나의 과정으로 묶어‘체계개발’이라고 한다)을 통해 신형 자주포의 체계개발이 가능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모두 강한 도전의식과 새로운 비전을 갖고 체계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새로운 화포 역사의 주인공이 되자고 다짐했다.


이 행사를 계기로 LOA 작성 지시를 미뤄오던 합참의 시각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합참 관계관은 신형 자주포 포신과 탄약의 사격시험을 담은 비디오 영상 자료를 몇 번이고 시청했다.“ 독자적으로 신형 자주포를 개발할 수 있다면 이는 획기적인 일”이라며 연구진의 개발 역량과 노력에 대해 신뢰를 보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장성인사, 윤장군이 사인 않고 임지로 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


본래 계획대로라면 1993년 1월부터 자주포 시제(試製)를 1차 개발하는 선행개발 단계에 진입했어야 했는 데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가 연구 능력이나 기술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구진의 심정은 답답하기만 했다. 선행개발 사업 승인까지 몇 단계를 더 거쳐야 하므로 선행개발 착수시기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육군이 제출한 ROC 보완 결과를 연말부터 검토하던 합참은 3월에 벌컨 탑재 및 잠수도하 능력 구비가 가능한지 기술 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각각 대공 능력을 강화하고 하천 장애물 극복을 위해 필요하다는 뜻이다.연구진은 관련 장치가 차체에 차지하는 공간에 따른 이유, 예산과 기술적 문제 등을 들어‘적용불가’로 보고했다.


이에 합참이 이해를 같이하면서 합참의 체계개발동의서 작성 지시는 그런대로 풀리는 듯했다. 그런데 정권 교체기라는 점이 변수가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후 국방부장관으로 권영해(육사15기 예비역 육군소장) 전 국방부차관이 발탁됐다. 그리고 불과 며칠 뒤인 3월 초 육군참모총장이 김진영(육사17기) 대장에서 김동진(육사17기 전 국방부장관) 대장으로 교체되는 전격 인사가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단행됐다.


이를 계기로 군 지휘부에 대한 추가인사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더니 급기야 4월 5일 권영해 국방부장관은 6월에 실시되던 정기인사를 앞당겨 수일 내로 육군 4성 장군 2, 3명을 교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소식에 누구보다 놀란 것은 연구진이었다. 이제 LOA 작성 지시를 내리는 결재 과정이 남아있는 상태인데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결재권자인 합참 전략기획본부장 윤용남(尹龍男예비역 대장, 전합참의장) 중장의 진급 가능성은 대단히 높았기 때문이다. 육사19기로 늘 선두를 달려온 윤장군이 아니던가.


윤 장군의 진급이 결정되더라도 임지로 떠나기 전에 LOA 작성 지시를 해주어야 했다. 만약 결재가 다음 본부장에게 넘어간다면 또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알수 없게 된다. 이윽고 4월 8일 예상대로 윤 장군의 대장 진급과 3군사령관 보임이 발표됐다. 윤 장군에게는 9일 국무회의 의결과 대통령에 대한 진급 신고, 12일 군사령관 취임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구진은 한숨을 절로 내쉬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뛰어가 결재를 조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9일 체계팀의 김동수(金東洙, 육사32기, 현 국과연 5연구본부장)박사가 전화기를 무겁게 들었다. 상대방은 뜻밖에도 윤장군의 보좌관인 노정수 중령(육사34기,예편)이었다. 김 박사는 육사 후배이자 생도 시절 축구부 활동을 함께 했던 노 중령에게 간절한‘어떤’부탁을 하고는 침묵을 지켰다. 고민은 그날 윤 장군이 청와대 신고를 끝내고 즉시 임지로 향할지, 본부장실에 다시 들를지 보좌관도 알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천우신조라면너무 거창한 표현일까. 윤 장군은 합참에 모습을 나타냈다. 임지로 부임하기 앞서 부하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보좌관은 얼른 결재 서류를 챙겨“본부장님, 신형 자주포 LOA 결재 건입니다. 마지막 결재입니다.”라며 내밀었다. 입안이 바짝 마르는 듯했다.


“아, 그거! 이리 줘.”윤 장군은 흔쾌히 서명하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한때 연구소 내에‘체계개발사업은 외줄타기’라고비유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 아슬아슬함과 긴장이란 실제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지요. 신형 자주포 개발사업은 그렇게 외줄을 타는 듯이 아슬아슬하게 진행되는 면이 적지않았습니다.”(김동수 박사)

 


또 하나의 변수‘ 창정비 요소 개발하라’


이제 LOA 작성은 연말부터 육군이 사전 준비해 쉽게 완성되는 듯 싶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또 튀어나왔다. 육군 교육사·국방과학연구소가 LOA에 서명을 남겨 놓고 있을 때 군수분야에서 창정비(Depot Level Maintenance) 요소개발을 체계개발 기간 중에 완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가뜩이나 사업관리 진행이 더딘 데 착잡하기만 했다. 창정비 요소개발은 예산·기간이 막대하게 소요된다. 군수분야의 요구를 다 수용한다면, 전력화가 예정보다 4~5년 늦춰지고 예산도 재편성해야만 한다.


창정비는 전력화 후 보통 10년이 지나야 수행되므로 관련 설비를 일찍 갖추면 실제 창정비 도래 때 설비의 가동 여부가 문제될 수도 있다. 연구진은 이런 이유를 들어 설득했지만 군수분야에서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결국 체계개발 기간 중 창정비 요소개발 계획을 작성키로 하고 8월 사용군(軍)·연구개발자 간 체계개발동의서가 작성되었다. 1년 2개월! ROC 보완과 LOA 확정까지 소요된 기간이다. 참으로 아까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새로운 힘‘ 추진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체계개발동의서를 확정하자 국방부는 9월 중순 국과연이 제출한‘선행체계개발계획서’를 전력증강위원회에서 의결하고 10월 초순 대통령 재가를 받아 사업집행을 승인했다. 이제 기본설계와 골격공사를 마친 것과 같은 상황인 셈이다. 사업책임자 문상규부장과 안충호 체계팀장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쉴 수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문 부장과 안 팀장은 신형 자주포에 또 다른 새로운 힘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자주포 체계 전체를 시험적으로 제작하는 선행개발에 박차를 가해 나가기 위해서는 사업관리 측면에서 새로운 추진력이더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빠듯하게 계획된 체계개발 기간(선행개발 3년, 실용개발 2년) 내에 자주포를 개발 완료해 예정된 전력화시기를 맞추기 위해 더욱 그러했다.


문 부장과 안 팀장의 이같은 내심은 국과연 지휘부의 뜻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주포를 전담할 조직도 확대해야 했다. 지휘부는 사업책임자로 미국에서 사업관리자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김호권(육사23기, 예비역 대령, 국과연 부소장 역임)박사를 임명했다. 더불어 1994년 1월 자주포체계팀을 자주포체계부로 조직을 확대, 체계관리팀장·체계종합팀장에 홍석균~김동수 박사를 각각 선임하는 등 전열을 가다듬고 본격적인 선행개발에 돌입했다.

 


용어 해설▶▶▶


■ 탐색개발(Exploratory Development)
개념 연구단계에서 도출된 체계개념에 대하여 부체계 또는 주요 구성품에 대한 위험분석, 기술 및 공학적 해석, 시뮬레이션을 실시하며, 핵심요소 기술연구와 필요시 1:1 모형을 제작하여 비교검토한 후 체계개발단계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는 단계를 말한다.


■ 체계개발(Full Scale Development)
설계 및 시제품을 제작하여 기술시험평가와 운용시험평가를 거쳐 양산예정인 무기체계를 개발하는 개발단계를 말한다. K-9자주포 개발 당시에는 선행개발과 실용개발로 그 단계가 나뉘어져 있었으나 현재는 체계개발로 단일화되어 있다.


■ 체계개발동의서(Letter of Agreement : LOA)
무기체계 연구개발사업에 대하여 체계개발 착수에 소요군과 국과 연 및 주계약업체가 운영개념·요구제원·성능·소요시기·기술적 접근방법·개발 일정계획 및 전력화 지원요소와 비용분석 등에 대해 합의하여 공동 작성하는 문서로서 체계개발계획서 작성을 위한 근거가 된다.


■ 기술시험평가(Development Test : DT)
체계개발 단계에서 제작된 시제품에 대해 신뢰도·유지성·적합성·호환성·내환경성·안정성 등을 포함한 기술상의 성능을 측정하고 설계상의 중요한 문제점이 해결되었는가를 확인 평가한다. 무기체계 획득과정에서 기술적 개발목표가 충족되었는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수행되는 시험평가이다.


■ 운용시험평가(Operationl Test : OT)
소요군이 시제품에 대해 각종 작전환경 또는 이와 동등한 조건에서 작전운용성능(ROC) 충족여부를 확인하고, 교리·편성·교육훈련·종합군수 지원요소 등에 대한 적합성을 시험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 운용시험평가 결과에 따라 개발 무기체계가 전투용으로 사용 가능한지의 여부, 즉 무기체계 개발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게된다.


■ 창정비(廠整備·Depot Level Maintenance)
최상위의 정비 단계 개념이다. 하위 정비 단계의 능력을 초과하는 정비에 대해 완전 복구 재생하는 정비가 바로 창정비다. 부품을 낱낱이 분해해 상태를 판단한 후 수리·개조·재생 혹은 신품이나 재생품으로 교환하는 과정을 통해 장비를‘신품’처럼 사용 가능한 상태로 복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장비의 수명을 연장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주로 군의 정비창에서 실시하나 일부 장비의 경우 지정된 민영 방산업체가 담당하기도 한다.

 


‘3년 내 선행개발을 마친다?
신형 자주포 연구진은 1994년 1월부터 사업책임자 김호권 박사(前부소장)를 비롯해 체계관리팀장 홍석균 박사·체계종합팀장 김동수 박사 라인으로 새롭게 진용을 갖추고 선행체계개발 단계에 돌입했다. 김호권 박사는‘준비된 사업책임자’라고 불릴 만큼 1983년 국방과학연구소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다방면에서 사업관리 능력을 발휘해왔다. 1980년대 K-1 전차의 국내 시제 초도생산을 담당한 전차체계실을 맡아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주미 무관·국과연기술부장·국방부장관 과학보좌관을 지내면서 세계적인 연구 개발 흐름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미국에서 사업관리과정(PMC)도 이수하여 세계적 수준의 신자포를 개발하는 사업책임자로서 적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선행체계개발을 3년 내에 완료하겠다는 계획과 일정을 제시했다. 선행체계개발이란 소요 제기된 신자포의 시제품을 제작하는 일뿐만 아니라 이 시제품이 기술·운용시험을 통해 작전요구 성능(ROC)을 충족하는지를 확인, ROC를 보완한 후 실용체계개발을 위한 계획도 수립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그런데 신자포가 구비할 성능·수준을 감안할 때 3년 내 선행개발을 마치겠다는 계획은 당시 형편으로 보아 아직은 무리한 일정으로 보였다는 사실이다. 신자포에 직접 참여 중인 연구진 일부는 물론 국과연 내의 타 개발팀, 방산업체의 주요 관계자 대부분이 사업기간이 지나치게 짧다는 점을 지적했다. 공식회의 석상 에서“신형 155㎜ 자주포 선행개발을 3년 내에 완료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호언(?)까지 나올 정도였다. 김 박사가 단지‘국과연은 군이 필요로 하는 무기를 적시에 공급해야 한다.’는 대전제 하에 소요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선행개발 기간을 3년으로 설정한 것이었을까. 그렇지만은 않았다. 김호권 박사를 비롯한 주요 연구진은 확신이 있었다. 김호권 박사와 연구진은 체계종합팀과 부체계를 맡은 각 전문연구실이 개념연구·탐색개발을 통해 다져놓은 연구 기반이 튼튼하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주요 구성품의 설계· 제작 18개월, 체계조립 4개월, 실내 기술시험 4개월,시험평가 8개월, 그리고 실용개발 계획 수립 및 확정에 필요한 2개월을 포함해 3년이면 가능하다고 보았 던 것이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다 보면, 바닥에서 가운데까지는 폭이 점점 넓어져 처음에는 채우는 속도가 늦는 듯 하지만 이 포인트를 지나면 항아리의 물은 눈에 뜨일 만 큼 빠르게 채워집니다. 체계개발이 완료되기까지의 기술개발 과정을 이렇게 보면 되는데, 개념연구·탐색 개발에서 항아리에 채운 물의 양(기술개발 및 축적)이 충분해 선행개발 중 가속도를 붙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김동수 박사)


연구진은 곧 사업수행 지침을 마련했다. 부품 단위로 기술적 개발상황을 점검하면서 기술시험과 군 운용시 험 중 많은 항목을 통합 수행해 계획상의 시험평가 기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추진했다. 또한 방산업체가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모든 업무, 즉 상세설계·품질보증·시험지원 업무 등을 과감히 업체로 전환하는 등의 각종 업무와 역할을 재조정했다. 동시에 김호권 박사는 인화(人和)를 특히 강조했다. 서로 밀고 당겨 주며 협력하면 어떤 어려움도 능히 타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그에게 인화는 사업관리의 핵심요소. 연구 인력의 충원도 쉽지 않고 사업일정마저 충분하지 않은 때, 그리고 신자포의 체계팀과 각 전문개발 실 연구팀 간, 국과연과 방산업체 간, 군과의 입장·이해가 각기 다른 상황에서 연구·기술진의 분발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도 인화의 강조는 지나침이 없었다.


‘7C3S’는 이때 나왔다.‘7C’는 마음자세로서 창조(creation)·협동(cooperativeness)·조정(coordination)· 결합(combination)·집중(concentration)·확증(confirmation)·자기신뢰(confidence)이며,‘ 3S’는 행동화로서 단순화(simple)·신속(speed)·목표지향(shoot)을 뜻한다. 즉 7C의 마음자세를 3S라는 행동으로 나타내 연구개발의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김동수 박사는 여기에 신바람이 나는 연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2002년 월드컵 등에서 경험했듯이 한국인의 내면에 있는 에너지를 솟구치게 하는 요소가 바로 신바람. 인화의 연구 환경 속에 연구원들의 신바람은 체계개발 중 크고 작은 연구 성과와 연결돼 간간이 부닥치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활력으로 작용했다.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연구진이 성공적으로 시제품을 개발한 데에는 육군포병학교와의 협조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조동성 연구관(작고·전투발전 및 교리담당)과 교관들은 신자포 개발 초기부터 연구원들이 잘 알지 못하는 포병의 운용 실태 및 경험 등 실질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연구진은 체계설계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수시로 협의를 가지며 운용적인 측면에서 요구사항들을 구체적으로 체계에 반영해 나갔다. 특히 기존 포병이 운용하는 사격방향과 관련, 포진지 중심의 편각 운용 체계를 신자포 중심의 방위각 운용체계로 전환하는 데 의견을 모음으로써 신자포의 특성을 살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 강철 장갑판재로 방호력 강화 자주포는 전차와 외형적으로 일부 유사하지만 구조적인 면에서 전차와는 달리 엔진이 차량 앞쪽에 위치하고 승무원이 승·하차하거나 사격 때 포탄이 공급될 수 있도록 뒤쪽에 큰 문이 설치돼 있다. 또 전차는 전차와의 전투에서, 대전차 화기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차체의 전면·측면·후면이 두꺼운 장갑판재로 제작된다. 이에 비해 자주포는 적 포병과의 전투가 우선적인 까닭에 적 포탄이 공중에서 폭발할 때 생기는 파편으로부터 안전하도록 차량 윗부분의 방호력이 강조되는 점이 각각의 특징이자 차이점이다.


자주포는 구조물 장갑판재로 1950년대 설계개념에 의해 알루미늄합금을 사용해 왔지만 21세기형으로는 PzH2000(독일)·AS-90(영국)·2S-19(러시아)·크루세이더(미국) 등에서 보듯 전차와 같이 강철 장갑판재를 적용했다. 이는 자주포가 사격과 기동 때 발생하는 충격에 구조물이 견딜 수 있는 강도(强度)와 적의 공격으로부터 승무원·탑재장비를 보호할 수 있는 방호구조를 갖춰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알루미늄 합금 소재가 기관총 방호수준이라면, 강철 장갑판재는 기관포 방호수준인 것이다. 신자포에 있어서도 승무원의 생존성 확보와 탄 취급, 사통장치 및 구동장치 자동화에 따른 공간 확보를 위해 장갑소재로 강철 장갑판재가 적용돼야 했다. 마침 1993년에 접어들면서 국과연 소재개발부의 장갑소재 개발팀(김영우 책임연구원 및 팀장, 심인옥·백두현·김홍규 박사가 주축)이 포항제철기술연구소와 함께 국내 최초로 독자개발 중이던 강철장갑판재의 개발성과도 긍정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연구진은 이 강철 장갑 판재를 신자포 선행체계의 구조물 장갑소재로 쓸 것 을 결정했다.


자주포의 포탑구조물은 사격 때 발생하는 충격을 직접 흡수하게 되므로 기술적 위험요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더욱이 국내 개발 강철장갑판재가 최초로 적용되기 때문에 연구진은 위험도를 감안, 수입 소재와 국내 소재를 각각 사용한 시제를 제작하고 이를 비교·분석하기로 했다. 포탑 내구도 시험용 구조물과차량 방호시험용 구조물도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결정에 체계종합업체인 삼성테크윈은 다소 난감해했다. 공장의 설비와 인력이 K-55에 적용되는 알루미늄합금 장갑판재로 제작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삼성테크윈은 설비와 인력구조 변경에 많은 투자비가 필요하다며 재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안충호 체계팀장은 여기서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군이 제시한 작전요구성능(ROC)의 방호력과 21세기 자주포의 선두주자가 되려면 당연히 강철 장갑판재를 신자포에 적용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삼성테크윈도 국방과학연구소와 의견을 같이해야 했고 또 그렇게 되었다. 송정원 당시 생산이사(후에 공장장 역임)를 중심으로 자주포 조립설비와 인력을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수백억 원을 투입한 생산설비를 갖췄다. 자주포 생산규모로 봐서는 상대적으로 작지만 짜임새 있는 설비였다. 그 가운데 특히 신경 쓴 부분은 용접 공정이었다. 송정원 전 생산이사는“강철 장갑판재를 용접하는 용접사를 별도로 선발해 특별교육을 실시했다.”며“공정에서 발생하는 연기·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공기정화장치, 항온·항습장치를 설치하는 등 용접사가 쾌적한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고 우수한 품질을 유지하도록 노력했다.”고 밝혔다. 삼성테크윈의 이런 각별한 노력은 국가기술자격의 최고 수준인‘용접기능장’을 15명이나 배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들 기능장 등이 용접한 시편은 미국의 ATC(Aberdeen Test Center)의 평가에서 전량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합격함으로써 그 기술을 공인받는 결실로 나타났다. 삼성테크윈측은 미국 시험관이“십여 년의 시험을 담당했지만 이렇게 양호한 용접부는 처음”이라고 격찬하기도 했다고 귀뜸해 주기도 했다.


한편 국과연의 포탑구조물팀과 삼성테크윈의 기술진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첫 번째 포탑 구조물은 한국기계연구원에서 내구도 시험을 가졌다. 구조물 곳곳에 300여 개의 계측센서를 부착하고 사격하중과 같은 유압으로 작동하는 해머에 15톤에서 130톤까지 하중을 증가시켜가며 포탑구조물을 때렸다.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설계목표상 구조적인 처짐량은 6㎜ 이하였어요. 그런데 시험에서 확인된 처짐량은 38㎜였습니다. 이런 포탑으로 사격해봤자 탄착점이 흩어져 쓸 수가 없습니다. 컴퓨터로 구조해석을 반복하면서 취약부위와 개선점을 찾는 데 밤낮으로 매달렸지요. 휴가는 꿈도 못 꿨습니다.”(조성훈 책임연구원)개선한 포탑은 훌륭했다. 테스트 결과 처짐량이 5㎜ 였다. 성공의 계단에 올라선 것이다. 연구진은 이 포탑구조물로 사격량 5만 발에 해당하는 유압충격 시험을 수행했다. 사격충격량 3배의 하중으로 시험하기도 했다. 또한 방호구조 분야는 국과연의 성완 방호구조팀장을 중심으로 최창·이창현 박사, 박지우 선임연구원이 수행했다. 다양한 방호구조 시편을 제작해 실사격을 실시, 방탄조건을 찾아 설계했다. 이렇게 개발된 구조물은 체계개발 기간 중 모든 사격·기동시험에서 너끈히 견뎌냈다. 특히 국내 개발된 장갑판재가 수입한 소재보다 여러 특성 면에서 우수성을 나타내며 일부 우려를 불식함으로써 연구진이 그동안 흘린 땀을 시원하게 씻어주었다.


승차감을 더 좋게 할 수 없을까?
포병들은 화포를 포진지로 이동시킨 후 땅을 파고 스페이드(발톱)를 땅에 고정시키는 일을 가장 먼저 한다. 자주포는 전차에 비해 사격 충격량이 약 2배에 달 하기 때문에 그 충격을 지탱하며 정확히 사격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스페이드를 땅에 고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한겨울에 얼어붙은 땅을 곡괭이로 파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고통에 가깝다. 국방과학연구소 화포 연구진은 1984년 겨울 국내에 처음 도입된 K-55 자주포를 성능시험하면서 스페이드를 땅에 고정시키는 일을 직접 해봤다. 이때의 경험이 연구진으로 하여금 스페이드 없이 사격할 수는 없을까, 보다 더 승차감이 좋게 주행할 수는 없을까를 두고두고 고민케 했다. 그 해답은 신형자주포사업을 구상할 즈음인 1987년에 찾을 수 있었다.


안충호 체계팀장은 당시 영국이 개발 중이던 AS-90 자주포가 유기압 현수장치(Hydropneumatic Suspension
Unit : HSU)를 적용, 스페이드 고정 없이 360도 전 방향사격이 가능하다는 것과 승차감도 좋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HSU를 적용하면 땅을 파는 일도 없고 승차감이 좋아 지속적으로 전투임무를 수행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동 중에도 사격명령을 받으면 1분 이내에 초탄 발사가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궤도차량의 현수장치는 자동차 바퀴부분에 해당하며 궤도와 스프링으로 구성된다. 궤도는 모래밭과 진흙
위에서도 주행할 수 있고, 장애물(수직·참호) 통과도 가능하므로 모든 지형에서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전
차·장갑차·자주포에 주로 적용된다.


또 스프링은 진동 흡수와 충격 완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기존의 자주포는 스프링으로 토션바(Torsion
bar)를 적용, 기동 중 발생하는 진동·충격을 흡수하지만 사격 때의 충격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스페이드를
필요로 했다. 신자포에 적용될 HSU는 기동 또는 사격 중 발생하는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당시 첨단 제품으로 자동차의 쇼크 애브소버 역할을 한다. 자주포체계팀은 신자포에 적용할 스프링으로 HSU를 결정했다. 그러나 당시 국제적으로도 HSU는 내구수명이 검증되지 않은 채 일부 장비에서 문제를 야기해 논란이 없지 않았다. 국내기술 수준도 부족해 영국에서 AS-90에 적용하고 있는 에어로그(Air-Log)사 제품을 기술도입하여 국산화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연구진은 MTR와 선행 시제품에는 도입품을 적용키로 하고 선행개발 기간 중 국산화 10%, 실용개발 중 70%를 국산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전문업체로는 구동장치 분야가 전문인 동명중공업(현 두산모트롤)을 지정했다. 기술개발은 국과연 현수연구팀의 김종수·이윤복 선임연구원과 동명중공업의 정태휘 차장·오현재 과장이 중심이 돼 에어로그사의 기술지원을 받으며 국내생산 기반을 갖춰 나갔다.


선행 시제품을 완성하고 1만㎞ 내구도 주행시험을 하면서 동시에 한국기계연구원에서 실내 내구도시험을 수행했다. 그러나 믿었던 HSU에 문제점이 발생했다. AS-90에 비해 5톤이 무거운 47톤의 신자포 중량을 HSU가 견뎌 내지를 못한 것이다. 내구도 시험차량에 쓰인 12개의 HSU 중 8개를 교체해야 했다. 실내 내구도 시험 중에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이제 연구진 스스로 신자포용 HSU로 많은 부분을 개량 개발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실용개발 중이던 1997년 5월부터 꼬박 1년간 국과연·동명중공업 연구진은 밤낮 없는 씨름을 계속해야 했다. 결함이 발생하여 설계변경을 했지만 다음 시험에서도 예상치 못한 문제점이 또 발생되곤 했다. 그렇게 설계변경이 5번, 실내 내구도시험이 11번이나 수행됐다.


하지만 땀으로 맺은 열매는 더없이 달다. 시험과정에서 질소가스 체적 증가, 콘로드 재질 개선, 주피스톤 강도 보강, 실링 메커니즘 보완 등 우수한 국산화가 이뤄졌다. 그 결과 50만 사이클(1사이클 동안 5~15톤의 하중을 몇 단계로 임의 변화시키며 실험)을 수행하는 내구도 평가시험을 거뜬히 통과했다. 이는 1만㎞ 주행과 50만 발의 사격 충격력을 견뎌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연구진이 개량 개발한 K-9의 현수장치는 당시 수입된 HSU는 물론 그 어떤 HSU보다 뛰어난 성능을 갖는다. 이는 원천기술을 제공했던 영국도 인정하고 있다. 이후 동명중공업이 현수장치 부품을 영국으로 역수출하고 있는 쾌거가 그 사실을 말해준다.


손잡이만 당기면 탄 장전
자주포에 쓰이는 포탄은 길이 70~100㎝에 무게가 45~50㎏ 가량 된다. K-55자주포만 해도 승무원들은 이 포탄들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려 장전장치(rammer) 위에 올린 후 유압식 피스톤으로 포강 안에 밀어 넣으며 장전한다. 반면 K-9은 포탑에 포탄을 보관하는 적치대, 포이축(砲耳軸:포신 구동축)을 중심으로 이동하는 이송기, 포신에 붙어 있는 장전기와 이들을 제어하는 제어장치 등으로 탄 이송시스템을 구성되어 있으며 탄 이송 및 장전과정을 자동화하고 있다.


그 과정을 보자. 탄약운반장갑차에서 포탑 뒤쪽의 문으로 들어온 포탄은 자동으로 적치대에 구르며 적재된다. 사격제원이 결정되면 적치대의 포탄이 굴러 적치대 중앙에 있는 트레이 위에 놓이고 이때 승무원이 트레이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포탄은 미끄러지면서 이송기로 들어간다. 이송기가 사격고각으로 내려가 있는 장전기 위치까지 이동해 포탄을 넘겨주면 장전기는 바로 포탄을 포강 내로‘던져’넣고, 그러면 포탄의 회전탄대가 강선에 박히면서 포탄은 강선에 안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같이 자동화한 포탄 이송시스템에서 승무원은 직접 포탄을 힘들게 들어 올리는 과정 없이 단지 포탄을 장전할 때 트레이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것으로 장전임무를 마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K-9의 장점인 15초 내 3발의 급속사격과 분당 6발의 최대발사속도, 지속적인 사격능력을 구현해 준다.


포탄 이송시스템은 엄격히 말하면 승무원이 트레이 손잡이를 당기는 과정이 있으므로 완전 자동식은 아닌 반자동식이다. 그 이유는 승무원이 최종적으로 장전되는 탄의 종류를 육안으로 직접 확인하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152㎜ S-19, 프랑스의 155㎜ GCT-155, 독일의 PzH2000, 그리고 영국의 AS-90 등이 이 자동 탄 이송시스템을 채택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는 아직 적용되지 않고 있다. 신자포의 자동화 탄 이송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적치대와 이송기는 정상철 책임연구원과 이태경 선임연구원, 삼성테크윈 이강일 부장, 두원중공업 장봉진 부장 등으로 편성된 연구팀이 개발했다. 또 장전기는 양경승·김진성·추증호 선임연구원이 (주)위아의 함석우 과장과 팀을 이뤄 개발했다.


최초 영국의 관련 업체에 기술협력을 제안했을 당시에는 터무니없이 높은 기술료를 요구해 와 연구진을 곤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도입해야 하는 핵심기술을 제외하고는 전부 국내개발로 추진해 신자포가 실질적인 국산장비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사업책임자의 의지, 그리고 도전해볼 만한 기술이라는 개발팀의 투지가 뭉쳐, 독자개발에 나섰다. 연구진은 우선 K-55자주포를 운용하는 포병대대를 수 차례 방문했다. 포탄의 취급과정과 장전과정에서 문제점과 개선점이 무엇인가를 알아내 개발을 위한 기본개념을 발전시켰다. 이송기의 경우에는 탄종마다 중량·길이·무게중심·회전탄대의 형상이 모두 다르다는 문제에 봉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어려운 것이 최대 사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연구 중인 탄의 형상이 바뀌는 데 따른 문제였다.

 

포탄은 미리 개발해 놓는 것이 아니고 포와 동시에 개발이 추진되는 것. 따라서 개발을 하다보면 탄의 형상이 바뀌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탄 이송시스템은 지금까지 개발된 탄약을 기초로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탄의 형상을 변경하는 일은 경우에 따라 개발팀에 치명적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 포탄이 잘 되면 저 포탄이 안 되고, 포탑 천장에 로봇 팔을 설치해 탄을 이송해보는 등 갖은 방법을 다 써봤습니다. 특히 이송시스템이 탄을‘굴리는’방식 이었기 때문에 당시 날개(너브)가 있도록 개발 중인 신형탄은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포탄이 굴러가는 도중 날개 때문에 걸릴 수 있는 거죠. 장전장치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탄 개발팀에서 이 신형탄을 최대사거리 확보가 가능하면서도 날개 없는 형상으로 개발키로 함으로써 이송시스템 개발이 수월해졌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뭐 한마디로 아찔한 거죠.”(정상철 책임연구원)


이송·장전시스템에서는 안전성도 특별히 요구된다.
포탄을 장전했을 때 이 포탄이 강선에 박혀야지, 그렇지 않고 빠져 나오는 경우가 없도록 해야 하는 점이 중요하다. 높은 사격고각으로 장전한 포탄이 강선에서 빠져나와 차체 바닥으로 떨어지면 심각한 상황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이에 대비, 안전장치를 만들어 포미환에 붙였다. 그리고 포신을 끼운 시험장치를 꾸며 실제 장전장치로 포탄을 장전해 강선에다 안착시키는 실험을 가졌다. 그런데 이것이 만만한 과정이 아니었다.


“포탄을 강선에 안착시킨 후 다시 실험하기 위해서는 10여 명이 길고 무거운 장대로 포탄을 빼내야 했는데 이게 중노동이었습니다. 1시간에 겨우 세네 번, 하루 열 번 실시하기도 어려웠지요. 결국 중량물을 자유 낙하시키는 충격력을 이용하는 아이디어로 전용 시험기를 개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양경승 선임연구원)


K-9은 기동하더라도 포탄의 움직임 없이 안전하게 보관된다. 구동모터와 연계된 간헐식 치차기구로 적치대 내부에서 탄이 고정되고, 나아가 적치대 전방부에 탄두 고정장치가 있어 안전성은 더욱 높다. 통신오류가 발생하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판단, 장전기 위치로 찾아가는 이송기의 2단계 제어개념도 뛰어난 선진기술이다. 이 같은 적치대와 이송기는 이우민 선임연구원이 수만 발의 사격에 해당하는 내구도 시험을 수행하며 높은 신뢰성을 확보했다.


“장병들이 포탄 취급 임무를 더 빠르고 편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개발자의 한 사람으로서 크게 만족합니다.”(정상철 책임연구원) 말썽 파워팩… 하루하루가 고통 “이제 엔진을 교체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국방과학연구소 기동분야 분할과제책임자인 최창곤 박사(현 방위사업청 방산진흥국장)와 엔진 문제를 상의하던 신형 자주포의 동력장치 팀장인 김영덕 박사는“더 이상 시간을 소비할 수 없다.”며 엔진교체 입장을 밝혔다. 선행체계개발에 들어선 후 신자포 탑재 엔진은 국과연과 체계종합업체인 삼성테크윈 연구·기술진에‘고통’에 가까운 문제를 일으킨 상태였다. 국내에서도 일부 엔진·변속기 개발기술이 산학기관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지만 양산 수량의 제한 성과 이에 따른 개발비 보상효과 미흡, 그리고 기간 내의 개발신뢰성 등을 고려할 때 해외도입이 불가피 했다.


최초 선정된 엔진은 외국의 유사 기동장비에 탑재된 바 있고, 냉각장치를 작게 설계함으로써 유리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 DDC사의 850마력급 8V92TIA LHR 엔진과 ATD사의 X1100 자동변속기였다. 탐색개발 당시 삼성테크윈이 개발한 MTR에 적용, 만족스러운 결과를 나타냈다. 문제가 야기된 것은 선행체계 차량조립을 끝내고 차량성능 시험을 한창 진행하던 시기였다. 이즈음이면 엔진은 그 강력한 힘을 충분히 발휘해야 하는 때인데 실린더 헤드 파손·엔진 커넥팅로드 절손 등 갖가지 고장을 일으켰다동력장치 연구팀들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 고장원인은? ’‘대책은?’ 일주일이 멀다하고 대책회의가 지속되고 대처 방안을 강구하느라 동분서주했다. 수리하고 재장착하고, 심지어 다시 제작해 재시험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고장은 줄지 않고 계속됐다. 수차 제작회사에 성능보완을 요구했지만 회답은 신통치 못했다.


마침내 동력장치 팀장인 김 박사의 의견에 따라 엔진 교체를 위한 광범위한 자료조사가 시작됐다.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업체는 영국의 퍼킨스(Perkins)사였다. 독일의 MTU사도 1995년 8월께 쌍용중공업(현 STX) 손계욱 상무를 통해 참여의사를 밝혔다. 12월 초, 김 박사와 삼성테크윈 조규남 박사가 퍼킨스사와 MTU사를 직접 방문했다. 먼저 방문한 퍼킨스사는 챌린저 전차에 탑재된 1,200마력급 CV12 콘도르 엔진을 출력 저하시켜 1.000마력으로 조정한 엔진을 제시했다. 가격은 DDC 엔진보다 약간 비쌌지만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12기통이라는 점, 냉각장치에 대한 기술적인 미흡 등이 걸렸다.


MTU사에서 김 박사와 조 박사 등을 맞은 것은 8기통의 아담한 엔진이었다. 독일에서도 PzH2000자주포에 적용, 독일 및 캐나다에서 실차시험을 진행 중이었다. 냉각장치의 설계 또한 최신의 유로팩(Euro Pack)에 적용한 시스템을 채택, 첨단에 가까운 설계 내용을 제시했다. 그러나 MTU사는 이러한 엔진·변속기를 냉각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비용으로 300만 마르크 를 요구했다. 김박사 등은 MTU 사의 영업이사에게“우리는 MTU 엔진이 작고 성능이 우수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비용을 들여 대안 엔진을 찾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이보다 싼 엔진으로도 우리의 동력장치를 개발할 수 있다.”고 말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 때문인지 이튿날 MTU 사는 훨씬 좋은 조건의 제안을 해왔다.


연구진은 귀국 후 해외 출장에서 얻은 자료를 중심으로 좀 더 구체적인 탑재 가능성, 성능 예측, 설계변경 부위에 대한 검토를 거쳐 선정과정에 들어갔다. 퍼킨스 사의 엔진은 예상한대로 12기통이라는 크기가 문제였다. 변속기와 엔진을 연결해주는 변속기 입력부위를 설계 변경하더라도 종감속기와 연결부위의 공간이 마련되지 못했다. 차체 폭을 키우는 대폭적인 설계 변경 없이는 불가능했다. 결국 MTU 사의 1,000마력급이 선정됐다. 이 과정에서 연구진은 MTU엔진의 단가 상승을 막기 위해 DDC사와 기술적인 부분에 관련한 연락을 계속 했다. 미국은 보통 정치·외교적으로까지 자국 회사의 제품을 수출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 엔진만큼은 국과연 연구진이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분석하고 경고, 대처했기 때문에 이후 어떤 항의와 이의 제기도 없었다.


MTU 사의 엔진은 국과연의 최창곤 박사를 주축으로 삼성테크윈의 기술진이 공동 개발한 신자포의 내구도 시험차량(ATR:Automotive Test Rig)에 적용됐다. 이 ATR은 1997년 9월부터 1년 동안 국과연 기동시험장에서 12개 항목의 기본성능 시험과 내구도 9600㎞ 주행, 내구도 시험 후 다시 12개 항목의 기본성능 시험 등을 모두 통과했다. 이로써 신형 자주포 K-9은 독일의 PzH2000 자주포의 성능(외기온도 46도에서 평탄도로 최고 주행속도 (60kph)보다 훨씬 우수한 기동성(최고속도 67kph)과 냉각성능(외기온도 50도 이상)을 확보한 세계 최고의 기동력을 자랑하는 자주포로 태어나게 됐다. 동력장치는 매우 놀라운 기술발전을 이뤄 2001년 당시 국산화율이 55% 수준을 보인 이후에도 꾸준히 국산화율을 높여가고 있다.

 

신형 자주포 K-9은 사격에 대해 어느 정도 안전할까.
화포는 추진장약이 급속히 연소하면서 발생하는 가스팽창력으로 포탄을 포구 밖으로 밀어내는데 이때 폭
음(爆音)과 함께 반동력이 발생하면서 포신을 뒤로 주퇴시킨다. 폭음과 주퇴력은 각각 승무원과 장비의 안
전에 영향을 주게 된다.


선행체계개발 기간 무장연구팀(문갑태 팀장)의 이영현・강국정 선임연구원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개발
한 신자포용 제퇴기와 주퇴복좌기는 신자포의 사격 충격량이 K-55에 비해 2배, KH-179보다 1.4배가 큼에도
불구하고 승무원과 장비를 안전하게 보호해주고 있다.


외관상으로 보아도 타 화포의 그것과 확연히 구별되는 신자포의 제퇴기는 ‘다공형’으로서 여러 개의 격실
을 갖는 점이 특징이다. 최초에는 KH-179의 제퇴기와 동일한 형상인 단공형이었다. 그러나 시험 결과 음압
이 높고, 섬광이 많아 인간공학 측면이나 적에게 식별될 위험이 우려됐다. 이 문제는 선행개발 중간 시기쯤
에 발견돼 실용개발 착수 이전에 기술적인 분석과 이론적인 모델링 등을 거쳐 전혀 새로운 제퇴기를 개발
했다.


다공형 제퇴기는 방출가스를 각 격실의 가스 방출구를 통해 순차적으로 확산하기 때문에 폭음이 낮다. 뿐
만 아니라 각각의 격실에 가공된 가스 충돌판은 높은 주퇴 제동 성능을 갖는다. 특히 이러한 구조는 화염의
양을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에 야간사격 시에도 빛에 의한 노출을 현저히 감소시켜준다.


신자포 주퇴복좌기에는 기존의 화포에서는 필수적인, 사격 고각에 따라 포신의 주퇴 거리를 조절하는
장치가 없다는 점 그리고 속도를 조절하거나 완충해주는 장치가 눈에 뜨이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해보자.
이는 연구진이 자동장전장치의 부착을 위해 포탑 바닥면으로부터 포신 중심선까지의 높이를 상당히 높

게 설계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연구진은 최대장약 사격 시 어떠한 사격 고각에서도 포신이 820~860mm
정도의 주퇴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최적화하고, 나아가 포신이 사격위치로 되돌아올 때 복귀속도를 제어
하는 완충장치도 주퇴 실린더 내에 조립시켰다.


결과적으로 주퇴복좌기의 구조를 상당히 단순화했을 뿐만 아니라 포 구조물에 전달되는 사격하중을 큰
폭으로 감소시키면서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성능은 김봉수 선임연구원이 개발한 주퇴장치 모
의 시험기를 통한 4,500발의 사격 시험과 실용 시제품에서의 모든 사격 시험 등을 견뎌내면서 충분히 확인
되었다.

 

안전 위협하는 차압, 어떻게 해결하나


“엇! 저게 뭐야?” 1992년 봄 안흥종합시험장. 국내 개발 추진장약의 첫 실사격시험을 지켜보던 연구진은 비명
을 지르듯 외쳤다. ‘쾅’하는 굉음과 함께 후방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수십 미터를 날아가는 흰 물체를 본 것이
다. 모두 방호벽 뒤에서 일제히 달려 나왔다. 시험사격용포의 격발기가 파손된 상태였다. 누군가 10여 미터 떨
어진 곳에서 종이뭉치를 가져왔다. 흰 물체는 장비를 닦기 위해 포 근처에 놓아둔 두루마리 화장지였음이
확인됐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추진장약은 약실 안에서 연소하며 가스를 발생시켜 그 팽창력으로 포탄을 날려 보내는 역할을 한다. 기존

155mm 곡사포용 추진장약은 그동안 미국의 것을 모방 개발, 사용해왔다. 약포형으로 종류도 약포 색깔에
따라 다양하다. 백색장약 5호로 사격할 경우 6, 7호는 버려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국제적 호환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굳이 독자 개발할 필요는 없다.

 

1989년 신형자주포 개발계획 수립 당시 전혀 새로운 체계의 신자포용 추진장약을 필요로 한 자주포체계팀
은 (주)한화가 박격포용이지만 소진(燒盡) 탄피 제작기술을 확보한 사실을 확인하고 기존의 복잡한 약포
장약체계 단순화, 잔여장약의 재사용은 물론 발사속도 증대에도 유리한 단위장약을 독자 개발, 적용키로
했다.


이를 위해 단위장약개발팀이 팀장 김형식 박사를 비롯해 장대성 책임연구원, 이정환 박사, 이홍석 선임연
구원, (주)한화 여수공장의 기술진 등으로 구성됐다. 1992년 봄에 가진 첫 시험에서 격발기 파손은 그동안
성능이 입증된 모방개발 장약만을 시험평가해 온 시험장에서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원인은 사격 때 생긴 5만psi(1만psi는 1cm²에 703kg이 작용하는 힘)의 차압(差壓). 생소한 현상이었다. 안
흥종합시험장 한충원 책임연구원은 “차압은 자동차 엔진의 노킹 현상과 같은 것으로 압력이 포탄을 밀어내
는 방향으로 발생하지 않고 반대방향으로 높아진 현상”이라며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요인이 된
다고 설명했다. 실례로 미국의 155mm 자주포로 수행된 이스라엘의 단위장약 시험에서는 이 같은 차압으로
인해 승무원 2명이 희생된 바 있다.


안전도가 확보되는 적정 차압은 3,000psi 수준. 개발팀은 강내 탄도 코드로 추진제 형상을 설계하고 밀폐
폭파시험(closed bomb test)으로 성능을 확인하였으며 화포 시뮬레이터를 제작, 연소과정을 고속카메라로
촬영・분석하는 등 이론적으로 연소 특성을 해석했다.


실사격 시험 중에는 차압으로 격발장치가 수없이 손상됐다. 격발장치를 마냥 손상시킬 수 없어 화약연구
실 김성호 책임연구원의 도움을 받아 원격 격발 장치를 개발하는 등 갖은 방법을 다 기울였다.
1996년 말 차압이 최소화된 6호 단위장약이 일단 개발됐다. 그러나 포구속도의 약실 압력이 무장설계치인
5만 3,000psi보다 5,000psi가 높다는 사실이 연구원들을 괴롭혔다. 추진제 형상을 바꿔 약실 압력을 조절키
로 했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추진제의 작은 알갱이들은 마치 연탄과 유사한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 구멍의
수와 모양을 바꾸는 것이다.


“미국의 추진제가 보통 7공 형상인데 비해 독일의 것은 19공입니다. 사진으로 확인했지만 설계 제원은 알
수 없었지요. 7공 형태에서 개선을 시도하다가 1997년에 19공으로 방향을 틀었지요. 수많은 시험을 거쳐
1998년 실용 개발단계에 들어서야 5만 3,000psi 이하에서 40km 의 사거리 달성이 가능한 포구속도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김형식 박사)

 

이것으로 개발이 완료됐을까. 또 하나의 시련이 잠재해 있었고 그것은 훗날 운용시험 중에 큰 아픔으로 나
타나게 된다.

 
항력감소장치 개발에 35만 달러?
최대 사거리 확보에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탄(彈)이다. 기존 RAP탄은 로켓 노즐을 갖추고 그 안에서 추
진제를 태워 사거리를 늘린다. 이에 비해 신자포의 사거리 연장탄은 항력 감소장치(Base Bleed)가 달린, 즉
탄 비행 때 탄체 밑 부분에 생기는 공기저항을 항력 감소 추진제 연소를 통해 감소시키는 탄이다.


포탄연구팀(개념연구 이성호, 탐색개발 최병두, 체계개발 홍종태 팀장)은 유병도, 정명지 책임연구원, 이종
철, 윤상용(이상 포탄체계) 선임연구원, 황준식, 김창기(이상 항력 감소장치) 박사, 조용찬 선임연구원(탄체)
으로 구성됐다.


황박사는 먼저 항력 감소장치 분야 전문가인 미국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쿠오 박사를 찾아가 공동연
구를 제안했다. 그러나 쿠오 박사가 35만 달러의 연구비를 요구하는 데다 미국도 40km용은 개발이 안 된
상태여서 공동연구보다 국내 독자 개발의 길을 택했다.


황・김박사는 탄저부 항력 감소장치 작동 개념 및 연소현상을 파악하는 등 개발에 나섰지만 곧 난제에 부
닥쳤다. “포탄 비행시간에 맞춰 30초 이상의 연소시간을 확보해야 했는데, 포탄의 회전이 없는 지상실험에서
는 성공했지만 분당 수만 번을 회전하는 비행 중에는 연소시간이 13초에 불과했어요. 그렇게 급격히 연소
시간이 짧아지는 원인 규명이 잘 안 돼 고전했습니다.” (황준식 박사)


연구진은 최초 에어모터에 의한 회전시험 장비를 제작했으나 진동이 심하고 회전도 2,000rpm 정도밖에
오르지 않아 전기모터로 구동하는 회전시험 장비를 개발, 1만5,000rpm까지 회전시키며 연소시험을 실시
했다. 그 결과 알루미늄 분말이 연소 속도를 증대시킨다는 사실을 파악, 문제 해결과 함께 사거리 연장기술
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최대 사거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35% 이상의 사거리 연장효과
를 실현할 수 있도록 연소속도(시간), 압력지수, 산화제함량 등의 주요 설계변수를 최적화할 수 있는 탄저부
항력 감소장치 소프트웨어 개발이 필요했는데 김박사가 이를 개발, 설계변수를 최적화해 항력 감소장치를
개발했다.


신자포의 장사정용 포탄은 선행개발 당시 탄두형상이 완전한 유선형으로 설계되고, 강내에서 운동 안정
성을 유지하기 위해 작은 날개(너브) 4개를 달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선행개발 운용시험에서 매우 중요한 문
제가 대두됐다. 탄 날개가 자동 이송장치에도 장애가 되고 발사 때 포열 강선을 파손시키며, 날개의 제작과
부착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1996년 3월부터 홍종태 박사는 날개를 없애면서 공기저항을 최소로 받도록 탄체를 유선형으로 바꿨다.
그 결과 최대 사거리 40km를 상회했으나 40km에서 낙하 때 탄 분산도가 기존탄보다 2~3배가 넘었다. 탄
체 하부의 회전탄대(포열의 강선을 타고 탄을 회전시키는 역할)를 수정하면 해결되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산 넘어 산. 이번에는 탄체 일부가 깨지며 날아가는 현상이 발생했다. 초속 925m로 포구를 이탈하
는 탄에서 깨져 나가는 물질을 촬영, 확인하는 자체가 어려웠다. 거듭된 시험 속에 탄체 뒷부분이 파손돼 항
력감소 추진제도 깨진다는 결론을 얻었다. 최종적으로 조용찬 선임연구원이 ‘보조탄대’를 부착하는 아이디어
를 창출해 개발함으로써 탄 분산도를 최소화하는 효과를 거뒀다. 이로써 K-9용 포탄의 독자 개발에 성공
할 수 있었다.

 

화포 독자개발의 절정 ‘탄도’


“신형 자주포 K-9에 이르러 명실상부하게 화포의 독자개발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안충호 책임연
구원이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탄도분야까지 독자적으로 개발했기 때문이다. KM114A2는 1970년대 미국의
기술자료를 이용해 모방 개발한 것이고, 1980년대 초 KH-179 155mm 견인포는 우리 손으로 개발했지만 미
국의 M198, M109A2의 탄도를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완벽하게 독자개발했다고 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상태
였던 것이다.


탄도(彈道)란 포탄이 중력(重力), 항력(抗力), 양력(揚力) 등의 영향을 받으며 날아가는 궤적이다. 탄약이 포
신 내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다루는 강내(腔內)탄도,포구(砲口)에서 표적까지 포탄이 비행하는 과정을 다
루는 강외(腔外)탄도로 구분된다.


강내탄도 연구는 탄도연구팀장인 이원백 책임연구원이 맡았다. 사격 시 탄의 이동 속도와 압력을 계산하
는 전산 프로그램을 개발, 강내탄도 해석(simulation)에 활용했다. 하지만 영향을 주는 요소가 많은 만큼
불확실성 또한 크지 않을 수 없는 분야이다. 해석 결과가 실험 결과와 잘 맞지 않아 애로가 컸다.


강외탄도 연구는 포구를 떠난 포탄의 이동 궤적을 추적해 포병이 화포의 사격제원을 산출하는 자료(사
표・탄도 프로그램)를 개발하는 것이다. 실내 실험자료와 경험적 요소를 반영해 이론적 방정식을 만들고 실
사격 시험에서 얻은 결과로 방정식을 보완한다. 이런 보완과정을 수없이 반복해 사표와 탄도프로그램을 만
드는데, 계산량이 많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탄도연구팀은 초기 이 강외탄도분야를 1988년 미국이 항력감소장치포탄 M864를 전력화하면서 개발한
강외 탄도 프로그램을 구입해 보완하려고 미국 측 탄도연구실과 사전 접촉을 가졌다.

“미국 측은 이때 ‘미국의 탄과 사격지휘 체계를 도입하면 지원할 수 있다.’고 당연하면서도 냉정한 반응을
보였어요. 그즈음 강태형 책임연구원이 미국 탄도연구실에서 연수중이었는데, 장차 항력감소장치 관련 프로
그램을 개발해야 하니까 미리 관심을 갖고 파악했으면 좋겠다고 주문했었지요.” (이원백 팀장)


1년 6개월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강 책임연구원이 밤낮없이 프로그램 개발에 매달리는 가운데 실내시험
자료의 대표적인 공력설계・해석은 안성호 박사가 맡았다. 자료는 주로 풍동실험(인위적인 바람으로 탄 주
위의 공기 흐름과 저항 등을 측정)으로 얻어진다. 대부분 국방과학연구소 내에서 실험했지만 포탄이 수만 번
회전하면서 생기는 매그너스(Magnus : 투수가 회전시켜 던진 볼이 커브를 일으키는 현상이 한 예) 특성은
설비 부족으로 미국에서 실험했다.


이렇게 사거리 예측이 가능하고 각종 제원을 산출해낼 수 있는 한국형 강외탄도 프로그램이 개발되자 실
사격에서 나타난 실제 값과 기상자료를 입력, 방대한 자료(사표 및 제원 산출 입력용)를 구축했다.
김재호 박사도 제원 산출 입력용 곡사포탄 탄도방정식을 이용해 실시간 정확한 계산이 가능한 소프트웨
어를 개발했다. 사표를 사용하는 약식의 탄도기상통보는 물론 고도별 기상 측정값이 그대로 반영된 ‘계산기
기상통보’라는 기상정보를 사용, 보다 더 정확하게 사격제원을 산출할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K-9은 수동식(기계광학식)과 자동식(전자식) 사격통제장치(Automatic Fire Control System) 사격통제 장
치로 구성돼 있다. 수동식은 기존 자주포의 것을 거의 그대로 적용한 반면 자동사격통제 장치는 1991년부터
이상국(팀장)박사를 비롯하여 12명으로 구성된 사통 연구팀이 국내 독자개발했다.

 

개발 결과부터 설명하면 AFCS는 크게 시스템 통제기, 전시기, 탄도 프로그램이 내장된 사격제어기, 통신
처리기 및 전원조절기로 구성돼 있으며 운용병과 K-9 간의 인터페이스(연동 Man-Machine Interface) 역할
을 한다. 즉 위치확인장치, 포・포탑구동장치, 탄 이송장치, 격발장치, 포신온도센서, 무전기 등 각종 전자제
어장치를 상호 연동시켜 자동화를 달성함으로써 운용병들에게 사격과 관련한 정보를 보여주고 사수가 지시
한 명령을 관련 장치에 전달,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AFCS는 탄도 프로그램과 포구초속측정기를 이용해 자체적으로 사격제원 계
산은 물론 BTCS(포병사격지휘체계 Battalion Tactical Command System)와 연계해 데이터 및 음성통신으
로 사격명령을 수신하고 포반의 상황을 보고한다. 또한 위치확인 장치와 연동해 화포의 위치 및 자세한 정보

를 획득하며, 포를 자동방렬하는 구동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포신 잠금장치, 탄 이송장치, 장전장치
및 포신온도센서와 연동해 운용상태를 자동 인지함으로써 사격준비 완료 및 사격안전 여부를 알려주고 격
발장치와 연동해 사수에 의한 자동격발이 가능케 한다.


이 같은 AFCS에 힘입어 K-9은 현재 어떠한 운용상황 하에서도 외부 장치의 도움 없이 30초 이내(정지
때) 초탄 발사, 3발의 탄을 표적에 동시에 탄착시키는 단독 TOT(Time on Target)사격, 포대(자주포 6문)가
한 개 이상의 표적을 분할해 사격할 수 있는 ‘포대 다중임무’ 수행능력 등 특유의 성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여타 분야도 그러했듯 AFCS 개발 노정 역시 결코 순탄치 않았다. M109A6, PzH2000, AS-90 등 당
시 배치 또는 개발 중이던 자주포의 자동사격통제장치를 다각도로 탐구하는 것으로 연구를 시작했으나
자국의 방위기술 보호를 위해 기술 유출을 극히 꺼리는 상태에서 연구진은 성능기준서(fact sheets)와 단편
적인 팸플릿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만 연구진에는 30mm 자주대공포 비호체계의 개발을 통해 축적한 기술이 있다는 것이 위안 아닌 위안
이었다. 여기에 과학자적인 도전의식을 더해 연구의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기존의 포술 교리와 향후 포술 발
전 방향을 신자포에 적용하기 위해 포병학교 교관 및 야전부대의 운용관들과 수 차례 토론을 가졌다.
이렇게 사통설계를 구체화하면서 연구진은 AFCS의 각 구성품은 가능한 한 동일한 하드웨어 모듈을 사용
하는 공통 모듈 개념을 도입했다. 또 신뢰성 향상을 위해 주요 부품과 통신 채널들을 2중화했으며 소프트웨
어도 기억장치를 교체하는 방법이 아닌 외부 포트를 통해 다운로드하는 새로운 방식을 적용했다.
선행 시제품 첫 시험평가에 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이 속담은 무기체계 개발에 있어 체계종합을 하는 체계팀의 역할을 잘 표현한 말이다. 체계종합은 바로 그 구슬을

꿰는 작업이자 또 하나의 핵심기술이다. 체계종합은 김동수박사(현 5기술본부장)를 중심으로 신민재 박사(체계분석), 이진영 책임연구원(체계결합), 송기천 선임연구원(형상관리) 등 12명이 수행했다.


하드웨어 측면에서 보면 무장, 포탑, 사격통제장치 등 무기체계의 주요 구성품들을 연구개발하는 각 전문팀
은 체계(종합)팀의 요구사양에 따라 구성품, 즉 ‘구슬’ 을 만든다. 체계팀은 전문팀에서 만들어 온 구성품을

꿰어 완성체계, 즉 ‘보배’로 만드는 것이다. 구슬을 꿰는 작업과정을 살펴보면 설계 단계에서는 구성품 간
인터페이스 조정・통제, 시제 제작단계에서는 체계조립 절차서를 작성해 구성품 간 인터페이스 시험, 가(假)조
립 연동시험, 체계조립, 실내기술시험 및 최종 수락시험을 통해 체계종합이 완성된다.


최종 수락시험은 삼성테크윈 창원공장에서 수행됐다.
낮에는 기계가 돌아가는 진동 등으로 인해 수포와 추선이 미세하게 흔들려 공장가동이 모두 끝난 심야에
작업을 해야 했다. 작업 위치 또한 0.1밀(mil)이라는 정확도를 갖는 정밀 측량 장비로 측정했다. 이곳에서 정
렬한 후 그 오차를 확인・보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체계조립이 끝나면 크기, 중량, 무게 중심점 등 자주
포의 일반 제원을 측정하고 사격 및 기동기능 등과 관련된 성능을 점검한다. 선행 시제품은 이같은 과정을
거쳐 시험평가를 받을 준비를 갖췄다.


1995년 9월 5일 오후. 안흥종합시험장은 그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장감이 휘돌았다. 선행 시제
품으로 완성된 신형자주포가 처음으로 시험평가를 받는 날이었던 것이다. 신자포는 웅장하면서 당당한 모
습으로 다섯 번째 사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100m 가량 떨어진 방호벽 뒤에서는 국방과학연구소, 관련 방
산업체 연구, 기술진 수백 명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어느 틈에 숨죽인 채 신자포만 응시할 뿐이
었다.


이윽고 짧지 않은 거리임에도 연구・기술진의 귀에 다섯 번째 포탄이 덜컹하고 장전되는 소리와 폐쇄기가
철컥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2사격장 5번탄 사격 10초 전, 열! 아홉!…”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모
두의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이 순간이 이날 시험의 하이라이트. 마지막 사격이기 때문이 아니다. 다섯
번째 사격에 적용된 포탄 장약이 보통 사격 때 쓰이는 최고장약보다 15% 약실압력이 크게 발생하도록 만든
장약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장비에 손상을 줄 위험이 가장 높았던 것이다.


시험사격을 지휘하는 김현배 자주포체계관리팀장은 신경이 곤두서 머리카락이 쭈뼛 선 듯한 느낌마저 들
었다. “그 사격 장비에 손상이 없어야 본격적인 시험평가에 안심하고 들어갈 수 있고, 만약 장비에 손상이
발생하면 다시 개발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사업 전체의 분수령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었지요.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그때 연구진에는 큰 압박감과 함께 두려움, 초조함, 그리고 긴장감이 팽
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둘! 하나! 발사!” 연구・기술진은 폭음에 순간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신자포 주위에는 포연과 함께 흙먼
지가 자욱했다. 그리고 이내 사격 전 그 늠름한 모습 그대로의 신자포가 눈에 들어왔다.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며 굳은 악수로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이로써 선행개발 시제품에 대한 시험평가가 계속될 수 있
었다.


선행시험 평가는 개발장비의 기술적 도달 수준과 사용 군(軍)이 제시한 작전요구능력(ROC) 충족여부를
확인, 전투용 장비로 계속 개발할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평가하는 과정이다.

자주포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일반성능, 화력성능, 기동성능과 승무원의 임무 수행이 가능한지를 확인하
는 인체공학적합성, 자주포가 극한적인 환경에서도 운용이 가능한지를 확인하는 환경시험, 내구 및 신뢰성
시험 등을 시험계획서에 의해 검증하게 된다. 여기서 기술적 측면의 평가인 기술시험은 국방과학연구소가,
ROC 충족 여부 및 전술적 운용 측면의 평가인 운용 시험은 사용 군이 각각 주관한다.


사업책임자 김종규 박사를 비롯한 시험평가단은 96년 4월까지 국방과학연구소의 안흥종합시험장과 창원
기동시험장, 전방 포병부대 등을 수없이 오가며 시험평가를 진행했다.
시험평가 기간 단축과 효율성을 위해 많은 항목을 동시 또는 통합해 실시하기도 했다. 이 기간 중 어려운
부분은 장약이 자연 발화하는 온도까지 분당 2발씩 지속사격을 하는 것이었다.
포탄은 뇌관을 연소시켜 발사된다. 그러나 지속사격을 하다 보면 발사 때마다 포신에 전달되는 열이 계속
증가하기 때문에 어느 온도에 이르면 장약이 뇌관에 의하지 않고도 발사될 수 있다. 이때 사거리에 변화가
생겨 대단히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때문에 장약의 자연 발화가 일어날 수 있는 온도까지의 지속발
사속도시험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1차, 2차 지속사격시험은 시험 중 무장에 고장이 발생해 중단됐다. 1996년 4월10일 실시한 3차는 장비를
철저히 점검, 성공적으로 실시했다. 사격을 끝낸 시험요원들이 안전을 위해 입었던 방탄복을 벗었다. 옷이
흥건하게 젖은 그들의 모습에 모든 사람은 일제히 환호를 보냈다. “안흥종합시험장에서 화포사격을 담당하
면서 수만 발을 쏘았을 것”이라는 이응남 기술원은 “이렇게 센 장약(6호)으로 1시간도 안 돼 78발까지 사격
해보기는 처음”이라며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시험평가, 그 치열한 전투
연구개발, 시험평가는 일종의 치열한 전투다. 땡볕을 피할 그늘도 없는 사격장에서, 영하 20도가 넘는 전방
고지에서 개발장비의 운용성과 개선점들을 찾는 모습은 실전, 바로 그것과 다름 아니었다. 그곳에 안락한
연구조건이 있을 리 없지만 더 좋은 장비를 개발하려는 연구진은 그같은 악조건을 마다하지 않았다.
신형자주포가 극한적 환경에서 정상적으로 운용 가능한지 시험하기 위해 선행개발 기간 중 전용시험설비
를 건설했다. 신자포를 시험설비에 넣고 16곳에 온도계와 난방장치를 설치해 영상 50도까지 높였다. 39시
간이나 걸렸다. 신자포 전체가 이 온도로 올라가도록 29시간 동안 유지시켰다. 이어 시동을 걸어 시험설비
밖으로 나간 뒤 5발의 사격을 실시했다.


이번에는 질소가스가 팽창하며 기화열로 주위 온도를 내리는 원리를 적용해 온도를 영하 32도까지 내렸
다. 35시간이 걸렸고 22시간을 유지시켰다. 승무원들은 질소가스로 인한 호흡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산소
호흡기를 쓴 후 자주포를 몰고 나와 5발을 사격했다.


성에가 하얗게 자주포 전체에 엉켜 붙었지만 사격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신자포는 사격통제장치, 포・포탑구동장치, 위치확인 장치, 무전기 등과 같은 다양한 전자장치가 서로 연결
되어 작동된다. 전자장치가 작동할 때는 전자파가 방출되어 다른 전자장비에 오작동을 유발할 수 있다. 설

계부터 전자파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반대로 외부에서 전자파가 들어오더라도 오작동하지 않아야
한다.


전자파 대책연구팀은 창원에 위치한 전자파 시험장에서 체계전자파와 관련한 기술 및 운용시험을 통합,
실시했다. 신자포에서 발생하는 전자파 방사량 측정 결과 합격이고, 자주포 내부 전자장비 간 상호 간섭현상 시험
결과도 양호했다. 외부에서 자주포를 향해 전자파를 쏜 후 정상작동 여부를 확인하는 시험 역시 합격이었
다. 이와 함께 창원의 기동시험장에서는 환경 적응시험으로 2시간 동안 240mm에 달하는 강우량에 노출시
킨 후 정상작동 여부를 확인한 것을 비롯해 기동성능으로 60% 경사로 등판, 장애물 극복 능력(도섭 및 수
직장애물, 참호 통과), 항속거리, 주행속도, 조향능력,제동성능 등이 시험되었으며 또한 내구도 주행시험이
실시됐다.


야전에서의 운용시험은 국방과학연구소와 업체 지원을 받아 군이 주도적으로 시험했다. 화포방렬, 사격통
제, 자주포 조종수를 비롯한 승무원별 조작 편의성 등을 평가했다. 기존 무기체계와의 상호 운용 적합성은
전술적 사격, 직접조준사격, 영거리사격, 정밀기록사격등으로 확인했다. 전력화 때 필요한 교리 발전, 포반원
의 편성, 교육훈련분야도 점검됐다.


연구진은 이 같은 시험평가 기간 중 겪은 고충을 해소하기 위해 전혀 의도하지 않은 장비도 개발했다. 많
은 연구개발진이 경험했듯, 사격 후 8m나 되는 포신을 청소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어서 훗날 자동 포구 청
소기를 개발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또 좀 더 완벽한 자주포로 개발하기 위해 개선 요구사항을 많이 도출해야 했다. 장비를 운용하는 병사들
과 많은 대화를 가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체계종합팀장 김동수 박사는 개선 요구 사항을 제안하는 병사에
게 1건당 통닭 한 마리의 상품을 걸기도 했다. 처음에 병사들은 이런 연구진의 제안에 의아해했지만 적극 참
여했다. 그 결과 직접사격 및 영거리 사격용 사거리 카드 부착과 같은 연구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반
영될 수 있었다.


8개월에 걸친 선행시험평가 결과 54개 항목 중 기준충족 36개였고 기준 미충족과 일부 미흡은 각각 7개
~11개 항목으로 나타났다. 이중 작전요구능력(ROC) 보완 및 수정은 5개 항목으로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고장이 웬말


선행시험평가를 끝내고 실용체계개발계획을 세우면서 국과연은 시범사격 계획안을 수립했다. 온갖 가혹
한 시험을 거친 선행시제품으로 공개 시범사격을 한다는 것은 시체말로 ‘잘해 봐야 본전’이다. 거기에 전례
가 드물고 또 신뢰성 면에서 무리일 수도 있다는 반대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선행시험평가 후 작전요구
성능을 대부분 충족시킨 상태, 이제는 개발 성공 확률이 높아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우세했고 그
것은 곧 연구진의 자신감이었다.


1996년 6월 11일 안흥종합시험장. 오후 들어 해무가 다소 가시기는 했으나 시계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양호 국방부장관과 김동진 합참의장, 윤용남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고위 장성과 언론사 기자 및 방산
업체 관계자들이 자리를 함께한 가운데 공개 시범사격이 실시됐다.


사업추진 현황 보고에 이어 시범사격이 진행됐다. 정지 상태에서 30초 이내에, 기동시 60초 이내에 각각 초
탄이 발사됐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최대사거리 40km 시범이 이어지고 다시 1분 이내에 6발의
사격이 끝나자 박수 소리는 더 길게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15초 이내에 3발을 발사하는 급속사격이 준비되
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카운트다운이 끝나도 발사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 대기시킨 시
제2호가 사격위치에 등장했다. 다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연구진의 심장은 쿵쾅거리는데, 웬일인지 또
발사되지 않았다. “장비 고장으로 시범사격을 종료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통제실의 방송이 나왔다. 연
구진은 리허설 때는 이상 없이 작동하던 자주포가 하필 결정적 순간에, 그것도 2대가 동시에 고장났을까
하며 원망과 당혹감으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서둘러 원인을 분석해보니 시제1회는 장전제어기의 제어박스(box)의 CD롬이 전기접촉 불량상태였고, 시
제2호는 유압조작 판넬 중 전력차단기의 고정나사가 그동안 누적된 충격으로 이완돼 고장이 발생된 것이었
다. 각 부품과 체계 상태의 이중 체크와 충격 누적이 주는 영향에 대한 고려 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대가치고는 다소 값이 비쌌다.


후덕한 성품의 이양호 장관은 다과회장에서 “선행개 발품을 가지고 이 정도의 우수한 성능과 화력시범을
보인 연구개발진의 노력을 치하한다.”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으며 머쓱해 하는 연구개발진에 새로운 용기
를 불어넣어 주었다.이날 시범사격을 지켜본 국내 언론매체도 따뜻한 시 선을 보내주었다.

신자포의 개발 내용과 성능상의 우수성을 비중 있게 다룸으로써 국내외의 관련자는 물론 해외 전문가들,

특히 수출 예상국가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1991년 10월 해군사관학교 순항훈련분대는 한국해군 사상 처음으로 인도양, 홍해, 수에즈운하를 거쳐 지
중해로 들어서 유럽대륙에 발을 디뎠다. 그 유럽 첫 기항지가 바로 터키 이스탄불이었다.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들어설 때에는 한국해군을 환영하는 예포가 울려 퍼졌었다. 폭 너른 해협의 한 가
운데 함정을 투묘한 채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선착장에 상륙했을 때 해사생도들은 귀를 의심했다.
터키인 누군가 발음은 부정확하지만 우리의 민요 ‘아리랑’을 애절하게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조그만 도시에서 택시기사를 하는 그 터키인은 TV를 통해 한국해군이 방문한다는 뉴스를 듣고 무려
500km가 넘는 거리를 달려 왔다고 했다. 그는 6・25전쟁 참전용사였다. 살아 있는 동안 한국 해군함정의 터
키 방문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을 했다. 비단 그만이 아니라 터
키의 6・25전쟁 참전용사들은 자신들이 피로써 지킨 대한민국이 경제강국으로 부상한 데에 대단한 자부심
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1999년. 터키인들은 한국에 우정과 보은의 정을 피부로 느꼈다. 엄청난 규모의 지진이 터키의 한 도
시를 강타했을 때 먼 형제의 나라 한국에서 따스한 위문의 손길이 전해온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이 독자개발
한 155mm 자주포 K-9이 터키에 좋은 조건으로 수출되자 터키인들은 이 또한 그들에 대한 한국의 보답으
로 여겼다.


지리적으로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지중해변의 교통・전략 요충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터키는 14세기
부터 20세기 초반까지 600여 년 동안 중동지역과 동유럽을 지배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후예들로서 자
존심이 강한 민족이다. 언어는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하며, 산악지형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국가라는 점 등이 우리와 유사하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보병여단 병력 5,068명(연인원 14,936명)이 참전하여 3,216명이 전사하거나 부상하는
등 한국의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피를 흘린 진정한 혈맹이다. 또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한국과
관련된 것은 언제나 우리 편이 되어준 우리의 진정한 우방국이기도 하다.


이 터키에 K-9자주포체계가 우리나라 방위산업 사상 단일 품목으로 최대 규모인 10억 달러의 규모로 수
출 계약이 체결되기까지 일련의 과정은 국방부, 육군, 국방과학연구소, 삼성테크윈이 공동으로 이룩한 또 하
나의 작품이자 드라마였다. 무기체계의 수출이란 성능과 가격뿐만 아니라 정치・외교 등 여러 면에서 고려되
는 요소가 맞아떨어져야 가능하기 때문에 K-9 연구개발진으로서는 초기에 사실 큰 기대를 갖지 못했던 것
이 사실이다.

 


 

혈맹 터키에 K-9 수출작전 시작되다
K-9의 대(對)터키 수출이 최초 제기된 것은 국내 전력화 생산계약이 체결된 직후인 1999년 3월 19일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개최된 제3차 ‘한국-터키 방산협력 공동위원회’에 참석한 당시 문일섭 국방부 획득실장에
의해서였다.


회의에서 터키 측에 기술이전 공동생산을 제의한 문실장은 곧바로 주(駐)터키 국방무관 고현수(高賢秀,
준장 예편)대령에게 4월 중 K-9에 대한 대(對)터키 설명회를 성사시킬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삼
성테크윈 측에도 설명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


고현수대령은 우리 군 장교로는 최초로 1985년 터키지휘참모대학에서 2년 동안 수학하면서 터키의 군사학
과 언어, 그리고 문화를 익히며 터키와는 두터운 휴먼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었다.


당시 그와 함께 수학한 동기생들이 대령에서 소장에 이르는 고급 장교층을 형성하고 있고 교관들은 대부
분 터키군의 영향력 있는 장군들로 포진되어 있었다.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었을 때 터키 지원
반장으로 활동했고, 한국을 방문하는 터키 주요 인사들의 통역을 도맡아 담당하는 등 터키의 언어와 문화
에 정통한 능력을 발휘했었다. 문 실장의 지시를 받은 고 대령은 이후 K-9의 ‘대터키 수출작전’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게 된다.

 

 


“일이 되려면 거기에는 꼭 적합한 인재가 있기 마련인데 바로 그 인재가 고현수대령”이라는 국방과학연구
소 안충호 책임연구원의 말처럼 그는 K-9자주포의 터키 수출작전에 있어서 중요한 교두보(橋頭堡)였던 것
이다.


고 대령에게 떨어진 첫 번째 과제 K-9설명회였다. 이는 정상적인 절차와 경로로 개최하려면 3개월 이상이
소요되는 일이다. 이미 외국방산업체들의 설명회가 6월까지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 대령은 지휘참모대
학 동기생들과 교관 등 인맥의 도움을 받아 설명회가 4월 중에 개최되도록 주선했다.


4월 29일, 삼성테크윈의 오창석 전무를 주축으로 한 해외영업팀이 터키 국방부를 방문해 K9 자주포 설명
회를 가졌다. 이때 참석한 터키 측 관계자 20여 명 중 샬리 방산차관보를 비롯한 기술국장, 대외협력국장 등
고위급의 참석은 이례적이었고, 이들의 K-9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그러나 후속적인 조치들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당시 터키 지상군사령부 주관으로 독일과 PzH2000
자주포의 기술이전 공동생산을 추진 중이었으므로 우리의 협력사업 추진은 불투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
다.


그런 와중에서 터키는 1999년 8월 17일 이즈미트 지역에 지진에 의한 국가적인 참사를 당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김동신(金東信 전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총장은 이때(8월 27일) 터키를 방문, 외국군 장성으로
는 처음으로 지진현장을 찾았다. 김 총장은 참혹한 현장에서 우리 군 장병들이 정성껏 모은 성금에 개인여
비까지 보태 터키 지상군사령관(우리 군의 육군참모총장 격) 아틸라 아테쉬대장에게 전달했다.


이 모습은 터키 언론매체를 통해 터키 전역에 생방송으로 보도됐다. ‘혈맹’ 한국의 우정이 터키 국민들의
심금을 적셨다. 김 총장은 아테쉬 대장과 가진 공식 회담에서 우리 K-9자주포의 우수성과 함께 터키와의 공
동생산 가능성을 설명해 주었다.


우리 국방부도 지진사태와 관련하여 터키를 돕기로 결정하고 군과 방산업체에서 성금을 모아 전달했다. 당
시 국방부는 K-9의 해외 수출하기 위해 장관 이하 관계자들이 군사외교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결과
한국에 대한 터키의 분위기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고현수 대령은 1999년 10월 4일 아테쉬 대장을 면담했
다. 무관으로서 지상군사령관을 면담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은 터라 지상군사령관을 역임했던 쾌살 장군
의 도움을 받았다.


아테쉬 대장은 주(駐) 독일무관을 4년간 역임하고 동기생 중 1차 진급을 계속해온 존재로서 독일대부라고
일컬어질 만큼 터키에서도 알아주는 독일통이었다. 고대령은 한국에서 보내온 K-9 설명자료를 일주일 동안
밤을 새다시피 하며 터키어로 번역, 아테쉬 대장에게 제시했다.


고 대령은 K-9 자주포에 대한 실사팀을 한국에 보내 그 결과를 보고 받은 후 한국과 방산협력 여부를 판단
하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다. “면담시간은 원래 20분이 계획돼 있었는데 질문이 많아 50분이 걸렸습니다.
주로 독일의 MTU 엔진 도입 가능성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문제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분은
이미 어려운 문제의 핵심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조성태 국방부장관의 터키 방문일정을 물은 뒤 그
때 보자고 말씀했을 때, 무엇이 훤히 트이는 느낌을 받았고, 그때의 성취감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한 쾌감입
니다.”(고현수 대령)

 

터키, 국내 실사 후 이스라엘 방문 취소
독일과 터키 지상군사령부 사이에 진행되던 독일의 PzH2000 자주포 공동생산 계획이 독일의 국내 문제
로 중단되는 상황이 1999년 하반기에 벌어졌다. 국방부는 K-9의 터키수출에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하고 군사외교 역량을 더욱 강화했다.


조성태 국방부장관의 터키 방문은 11월 17일 이뤄졌다. 19일까지의 방문 중 터키 군부 고위층이 배석한 가
운데 열린 양국 국방장관회담에서 조 장관은 군사협력 및 교육협력에 관한 협정과 함께 방산협력 및 방산품
품질보증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 양국 간 방산협력의 토대를 다졌다. 참석자들이 K-9 자주
포를 소개하는 비디오를 시청하는 가운데, 조 장관은 K-9 자주포의 공동생산이 진행될 경우 한국 국방부의
공식적인 보증을 약속했다.


이러한 노력이 지속되던 1999년 12월 1일 고현수대령은 터키 지상군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K-9자주포를 파악할 실사단을 파견할 의향이 있다며 급히 협조를 부탁해온 것이다. 고 대령은 즉
시 국방부 국제협력과 김응천(金應天 해사34기)해병 중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중령은 12월 12일부터 18
일까지 터키 지상군사령부 기술기획부장 아크차이육군준장을 단장으로 한 성능 실사단이 내한하는 데 지
장이 없도록 빠르고 완벽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아크차이장군 등 터키 실사단은 사실 그때까지도 한국의 K-9 자주포 개발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주일간에 걸친 토의와 국방과학연구소(ADD) 종합시험장에서의 K-9 사격시범과 삼성테크
윈, 삼성탈레스, 위아, 풍산 등의 생산시설 견학을 마친 후에는 성능신뢰는 물론 우리의 기술력과 방산 기
반에 놀라고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특히 K-9 사격시범 관람 후 상호 인사 및 소개하는 자리에서 아크차이 준장은 ADD 연구진에게 연신 “한
국이 세계적 성능의 자주포 개발을 축하한다.”며 K-9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간접적으로 표시하였다. 실사단
은 터키로 돌아가 터키지상군사령부에 한국과 기술협력할 것을 건의했다. 이로 인해 당시 터키 실사단은 그
들의 자주포 사업과 관련, 이스라엘을 방문키로 했던 계획을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터키는 2000년 2월 K-9의 기술이전 공동생산추진과 관련해 기술평가단을 파견해줄 것을 한국 측에 요청
했으며, 이에 국방부는 국방과학연구소 자주포체계팀장을 단장으로 국방부와 업체 등 11명의 기술평가단
을 구성, 2월 19일 파견했다.


기술평가단은 터키의 1010창(한국의 종합정비창에 해당하지만 정비뿐만 아니라 개발도 맡는다)을 시작으
로 MKEK(터키의 국영 방산 그룹), ASELSAN(전자 회사)등을 방문해 자주포 관련 터키의 방산 수준을 조
사하고 양국의 관심사항 및 터키형 자주포 공동개발에 대한 기본방안을 협의했다.


하지만 향후 계획 수립을 위한 일정과 협력방법 등 협의는 난항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실사단은 터키
자주포 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나 양해각서 체결이 합의되어야 공식적인 수출협력이 가능하기 때문에 회의
록에 양해각서 초안을 첨부할 것을 협의하는 등 험난한 협상을 벌였다.


2월 16일 회의록에 서명을 마친 기술평가단은 이튿날 이스탄불을 문화탐방하면서 과거 보스포러스 해협
을 지키던 오스만터키의 토푸카푸성에 올랐다. 그곳엔 마침 당시 사용하던 대포가 놓여 있었는데, 토푸카푸
란 대포와 문이라는 터키어의 합성어였다.


김동수 박사는 “우리는 토푸카푸 회원이다. 우리가 희생과 협조로 노력하면 K-9 수출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앞으로 인사할 때는 ‘토푸’하고, ‘카푸’로 받자.”고 제안했다.

 

평가단은 사업진행 중 힘든 문제가 발생하면 전화를 걸어 해결하곤 했는데, 약속대로 토푸와 카푸로 인사
를 나눴다. 기술평가단이 귀국 후 작성한 보고서를 토대로 국방부는 한국 측의 양해각서 안을 작성해 터키에

보내고 터키측은 수정안을 작성, 보내오는 등 국방부와 터키지상군사령부는 3차에 걸친 협상을 가진 뒤 5월 양해
각서(MOU) 체결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런데 4월 28일 예기치 못한 돌출 문제가 튀어 나왔다. 일찍이 아테쉬장군이 복선을 깔듯이 고현수 대
령에게 집중적으로 질문한 그것으로서, 바로 MTU엔진에 관한 것이었다. 터키는 양해각서 서명 전에 한국정
부의 MTU엔진 공급에 대한 보증서를 고 대령을 통해 요구해왔던 것이다.


고 대령은 김응천 중령에게 즉각 연락하고 지상군사령부로 달려가 아크차이 장군을 만났다. MOU체결이
며칠 내로 임박한 상황에서 보증서를 요구하는 것은 MOU체결을 불가능케 하고, 아테쉬 장군의 방한 자체
를 연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기 때문에 외교관례상 대단한 결례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결과는 한국 측의 요청대로 일단 MOU를 먼저 체결하고 나중에 엔진공급에 따른 보증서를 받겠다고 아
크차이장군이 한 발 물러선 것이다. 마침내 5월 4일. 터키 지상군사령관 아테쉬 대장은 한국을 방문하여 터키

자주포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5월 8일)하였다. 주요내용은 한국이 K-9 자주포 구성품을 국방부가 지정

하는 주계약업체(삼성테크윈)를 통하여 터키에 공급하고 정부 기술자료를 무상 지원하는 조건으로 터키 측으로부터 2011년까지 350문 이상의 물량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MTU엔진이 수출에 장애될 뻔
그런데 바로 그 날, 독일 정부는 K-9 자주포용 독일의 MTU엔진에 대한 대 터키 수출을 승인할 수 없다
고 우리 측에 통보해왔다. 한국・터키 양해각서가 체결되기 전 독일의 MTU사(社)는 터키 수출용으로 한국
삼성테크윈에 엔진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MTU사로서도 독일정부의 수출 불승인에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은 독자개발 자주포를 최초로 수출하려는 우리의 희망에 찬 물을 끼얹는 격이 되고 있었다.
K-9수출은 이제 엔진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당면과제를 안게 됐다. 국방부는 MTU 엔진의 수출허가 획
득을 위해 청와대를 비롯하여 지원 가능한 모든 기관과 부서의 협조를 강구했다. 방산업체는 업체대로 최
대한의 방법을 동원했다.


2000년 말까지 터키자주포 시제1문을 성공적으로 개발하고, 독일 MTU엔진의 대 터키 수출허가를 받아
야 하는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K-9의 수출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여기서 ADD와 삼성테크윈의 연구개
발진은 기술적 자신감 속에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MTU엔진을 대체키로 하고 실용개발 시 검토했던 영국 퍼킨스사(社)의 엔진을 적용할 것을 결심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독일정부를 상대로 한 정부차원의 노력이 계속되었다. 2000년 5월 29일 독일의 뮬러 경제부
장관의 방한 때에는 외교통상부와 산업자원부에서 MTU엔진의 한국 수출 거부 문제를 현안 의제로 다
뤘다. 국방부는 이때 마지막 남은 히든카드를 독일 측에 제시했다. 독일 국방부에 터키 자주포용으로 쓰일
MTU 엔진의 한국수출을 금지할 경우, 타 엔진을 사용할 것임은 물론 한국과 독일과 진행할 각종 협력사업
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을 내용으로 한 최후통첩을 보낸 것이다.


정부차원에서 독일과 교섭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터키는 2000년 6월 20일 한국과 시제 1문용으로 K-9의
구성품을 도입하는 계약(335만 달러)을 체결했다. 이어 터키 기술연수생 10여 명이 삼성테크윈에서 기술연
수를 받기 시작했다. 7~8월에 한국에서 터키에 공급할 구성품들이 터키로 보내졌고 한국에서 교육을 받
은 연수생들이 터키로 돌아가 조립하기 시작되었다.


ADD와 삼성테크윈의 연구개발진들도 터키에 파견되어 터키자주포 시제품제작과 조립을 지원했다.
한편 8월, 터키에서는 K-9 방산협력사업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아테쉬 장군의 전역을 맞게 되었다. 그는 전
역 전에 전 장성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과 협력 중인 터키형 자주포 사업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속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역 후에도 이 사업만큼은 끝까지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공언했다. 터키 지상군사령
관은 평시 막강한 자리지만 일단 전역하면 일체 군무(軍務)에 간섭치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공언은 파격이
었다.


하지만 엔진 문제가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그렇게 문제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던 12월 15일, 드
디어 독일로부터 수출허가가 떨어졌다. 국방부를 비롯한 정부차원의 노력으로 주효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
은, 무기체계 연구개발에 있어서 구성품을 해외 도입할 때는 항상 대안을 수립해야 한다는 좋은 교훈이 되기
도 했다.

 
10억 달러 수출 ‘신기원’ 이룩하다
2000년 12월 30일 한국과 시제품 계약을 체결한 후 6개월 만에 터키형 자주포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터
키는 터키형 자주포를 ‘폭풍(Storm)’이란 뜻의 터키어 ‘Firtina’로 명명했다. ADD는 K-9 자주포의 시험평가기
준과 절차서를 영문화하여 터키에 제공했다. 한국 측의 기술지원을 받아 터키포병학교가 주관하여 동계시
험, 사격시험, 하계시험이 계획되었다. 1월 말부터 2월 초순까지 동계시험이 추진되었다.


동계시험장소인 사르카므쉬는 터키 동부 산악지역. 해발 약 2,100m나 되고 한겨울에는 영하 40도 이하까
지 떨어지고 눈이 많아 겨우내 눈으로 덮이는 곳이다. 터키 측에서는 눈 위에서 기동시험을 가장 중요하고
어렵게 생각했지만 이미 스키장에서 시험을 거쳤기 때문에 시제품의 기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시험기간 중에 터키군 총사령관인 크브르크올루 장군(육군대장)이 방문했다. 총사령관은 1km떨어진 곳
에 드럼통을 세워놓고 사격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의도가 의아스러웠지만 드럼통을 자주포탄에 그대로
관통되었다. 총사령관은 대단히 만족스러워하며 지상군사령관에게 터키형 자주포를 포함, 지상화력장비를
모두 동원해 국민들에게 화력시범을 보이라고 지시했다.


총사령관이 든든한 후원자가 된 셈이었지만, 시제품으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화력시범을 보이라니, 이것
은 청천벽력 같은 것이다. 혹시라도 실수가 나온다면 사업은 어쩌면 ‘끝’을 고할지도 모를 일. 하지만 화력시
범에서 제외시킬 수는 없었다.


2001년 2월 터키에는 IMF경제위기가 왔었고, 터키군부는 군사비 감축 여론에 직면해 있었다. 터키 군부
는 무엇인가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것이 바로 화력시범이었고, 내심 K-9의 터키형으로 국민들에게 신선
한 충격을 주어 여론을 반전시키려 했던 것이다. 터키 중남부 카라프나르 사격시험장에서 2001년 3월 10~
23일까지 사격시험, 4월과 5월초에 섭씨 30도가 올라가는 디야로바카르지역에서 하계시험을 실시한 데 이
어 5월 12일 화력시범이 실시되었다.


터키 대통령을 비롯한 국회의장과 장관, 국회의원 등 3,000여 명이 참석했다. 특이한 점은 이때 나눠준 모
자 정면에는 바로 K-9터키형이 로고로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메모지도 그랬다. 이 때문에 우리 측 관계자 모
두가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웠고, 이 수출사업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긍지를 느꼈다.


화력시범은 터키 전역에 TV로 생중계되었다. 터키군이 보유하고 있는 전 지상화기가 차례차례 화력시범을
보였다. 이윽고 이날의 하이라이트로 K9 터키형 자주포가 등장했다. 날렵한 기동시범에 이어 급속사격, 최
대발사속도 및 최대사거리 사격까지 완벽하게 사격을 마쳤다.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인사들이 기립해서 성
공적인 화력시범에 참가한 장병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고현수대령은 화력시범 결과를 애타게 기다리는 국방부로 이 낭보를 전했다.
화력시범과 시험평가가 성공리에 끝나자 2001년 7월 터키 지상군사령부와 삼성테크윈이 터키 자주포 1차
양산 24문에 대한 공급계약을 6,500만 달러에 체결했다. 우리 방위산업 사상 최대의 쾌거가 성사된 것이다.
2011년까지 350문 이상 10억 달러(1조 3,000억 원)이상의 수출이 예상되었다.

 


우리 시대의 명품 K-9
이제 ‘국방의 초석’ 국방과학연구소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신형 155mm 자주곡사포 K-9 연구개발을
돌아보는 연재를 마칠 때가 되었다. 생각해보는 것이, K-9 연구팀이 연구개발 전 과정에서 여러 차례 연구
개발 사업을 계속 진행할 수 있을까 하는 위기를 맞는 가운데 이를 제때 극복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만약이라는 가정이 때로는 무용하기도 하지만 K-9의 경우는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다. 1998년 10월에 K-9
의 개발이 성공리에 마치지 못했다면 아마도 K-9의 전력화가 한참 뒤로 미뤄졌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
다. 이해 말에 불어닥친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태풍과도 같았던 위기 속에 고가 장비인 K-9의 전력화를 위한 양산 결정이 계획대로 이뤄졌을까. 어려웠
을 것이다.


또 이때 완료되지 못했다면 연평해전 등 서해에서의 군사적 긴장을 극복하는 데 기여하지 못함은 물론 대
화력전을 위한 K-9의 실효성과 우수성을 증명하기 하는데 더 많은 노력이 들어갔을 것이다. 특히나 터키 수
출은 실제로 불가능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독일의 기술 지원을 받아 자국의 자주포 개발을 추진하던 터키 육
군에 개발상 문제가 생긴 시점이 바로 1998년 말이었다. 따라서 터키가 독일 외 제3국의 파트너를 찾을 때
한국의 우선순위는 훨씬 떨어졌을 것이다.


필자가 이 K-9 개발스토리를 국방일보에 연재하면서 ‘명품’임을 말할 때, 누군가 무기체계에서 명품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를 물어왔다. 세계에 내보일 수 있는 성능이 우선조건일 수도 있지만 기술력, 전력기여
도, 국가경제 기여도 등도 따져봐야 한다. K-9는 이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세계 최고 성능의 자주포는
아니지만 ‘세계 정상급’으로서 손색없는 우리 시대의 자랑스러운 명품 자주포이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발 완료 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국산 무기체계 중 명품
첫번째로 K-9을 손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가 외국의 유혹이나 의존도를 떨쳐버리고 독자 개발한 무기
체계로서 전력기여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세계 정상급이라고 당당히 내세울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무엇
보다도 해외 수출 면에서 신기원을 이룩하는 모범을 보였다는 점이 두드러기 때문이다. 마침 올해 ADD가
자체적으로 펴낸 ‘명품무기 10선’ 첫 페이지는 ‘미래전장 환경을 고려한 인간과 기계의 조화’라는 설명과 함
께 K-9으로 장식하고 있다. 장기간 연재를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리며 마침표를 찍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