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박재광_재미있는 권총 이야기

醉月 2009. 12. 22. 09:23

 

인류의 발생과 성장에는 전쟁이 있어왔고, 전쟁에서의 무기의 역할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바로 이 점이 인간과 동물의 중대한 차이점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직립(直立)에 따른 손의 해방으로 무기를 다룰 수 있었고, 이와 함께 두뇌의 발달과 기술의 진보는 연약한 인간들을 일약 지구상의 제왕으로 끌어 올렸으며, 사나운 맹수들이나 인간의 천적들을 정복하며 인류 문명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부족이나 국가가형성되면서 무기는 더욱 체계화, 조직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무기 중에서 인류의 역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발명품이라 한다면 단연 총(銃)을 들 수 있다. 육체적 힘과 원시적 기구를 활용한 재래식 무기는 개인 간의 훈련된 기술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총이 등장하면서 전투 방식도 획기적으로 변화했고, 전쟁의 중심에서 흐름을 주도하면서 오늘날까지 발달해왔다.


특히 권총은 한 손으로 조작이 가능한 총으로 다른 총에 비해 가장 가까이 있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최후에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호신용으로 사용되었다. 원시적인 화기라 할 수 있는 ‘총통(銃筒)’ 또는 ‘핸드건(handgun)’을 소형화 하여 말 위에서 사용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 시초라 할 수 있는데, 이후 크기나 형태, 격발장치 등을 개량하여 권총 사용의 편리성과 살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달되었다.


한편 권총은 인류 역사의 기로에 서 있던 여러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울러 서부 개척시대를 비롯한 근대에 있어서는 여러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결투에서 주요한 무기로 사용되기도 했다.


오늘날 권총은 전 세계 경찰들의 주무기로 자리 잡고 있으며, 여러모로 중요도도 높아지고 있다. 개인 경호용 무기나 경기를 위한 레저 스포츠용까지 다양한 권총들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전쟁기념관에서는 권총이 최초 개발된 이후 나타난 다양한 권총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특별기획전을 준비했다.

조선시대의 권총에서부터 세계사와 한국사에 등장해 역사를 바꾼 권총과 영화속의 권총, 국산 권총, 희귀 권총 등 136점과 관련 영상을 한자리에서 볼 수있는 전시회로 오는 9월 15일까지 기념관 2층 전시실 회랑에서 열린다. 우리나라 최초의 권총이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 세총통을 비롯하여 14세기초기 권총에서부터 화승식 권총, 수석식 권총, 뇌관식 권총 등 근대 권총과 콜트, 베레타, 브라우닝 등 현대식 권총, K-5 국산 권총, 희귀 권총 등 권총이 총망라되어 권총의 발달사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권총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권총, 세총통
권총의 역사는 14세기 초~중반 사이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하여 발사체를 날려 보내는 초기의 원시적 화기라 할 수 있는 ‘총통(銃筒)’ 또는 ‘핸드건(handgun)’을 소형화 하여 말 위에서 사>용이 가능하도록 하면서 탄생했다. 이들 초기의 권총은 단총(短銃)이라고도 불리웠는데, 구리로 만든 총신(총통:銃筒)에 화약심지(화승:火繩) 구멍을 뚫고, 총신 안에 화약과 탄환을 장전한 후 점화구의 화약심지에 직접 불을 붙임으로써 발화시키는 방식이었다. 이들 화기는 군사적으로 사용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는데, 장전이 불편하여 명중률도 낮았고, 무게 때문에 이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기는 전투에서의 활용성이 날로 높아지게 되었기 때문에 지속적이고 비약적인 발달을 거듭하였다.


따라서 초기의 권총은 지화식(指火式) 총통의 크기를 축소해 소지가 용이하고 말 위에서 사용이 가능하도록 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세총통, 사전총통, 팔전총통 등이 이에 속한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세총통이다. 세총통은 전체 길이가 14cm, 구경이 0.9cm에 불과해 조선시대에 제작된 화기 중에서 가장 작은 형태이다.


세총통은 소형의 총통을 철흠자(鐵欠子)라고 하는 집개를 이용하여 잡고 사용하는 것으로 들고 있는 모습이 흡사 권총처럼 보여진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발된 권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총통은 기병들이 말 위에서 사용하거나 첩자들이 품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사용하였다. 이 총통이 주목되는 이유는

크기도 매우 작을 뿐만 아니라 이런 형태는 동서양에 유래 없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소형 화기의 구조는 총신 부분과 화약이 들어가는 약실부분, 그리고 총신의 끝부분에 달려 있는 모병(冒柄:자루를 끼우는 곳)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모병에 나무자루나 창대를 끼운 후 총신 끝에 붙은 자루를 오른팔의 겨드랑이 밑에 끼우고 오른손으로 총신을 단단히 붙잡은 상태에서 조준하고, 왼손에 불심지를 잡고 점화구에 갖다 대어 점화하는 것이다. 아니면 자루를 오른팔 겨드랑이
에 끼고 왼손으로 붙잡은 채 오른손으로 점화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세총통을 제외한 모든 소형 화기는 총통 뒤의 모병에 나무자루를 끼워서 사용한다.


그런데 세총통은 이러한 화기들과는 달리 모병이 없이 약실 끝부분에서 마감되었다. 자루를 끼우는 모병이 없다면 총신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을까? 바로 쇠 집게와 같은 철흠자가 별도로 있어 이를 가지고 총신을 잡고 사용했던 것이다. 결국 세총통은 크기가 너무 작아 사격할 때는 손으로 직접 잡지 못하고 철흠자를 이용하여 사격하는 것이다. 자칫 번거로울 수 있는 철흠자를 왜 사용했을까? 여기서 당시 화기 제조기술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다.


화기의 개인 휴대를 간편히 하기 위해서는 일단 크기가 작고 가벼워야 한다. 그런데 당시에 사용된 소형화기의 경우에 꽤 무거워 사용하는 데 많은 애로가 있었다. 〈태종실록〉에 당시 화기는 힘이 센 사람만 쏠 수 있고, 설사 쏜다 해도 2~3발 쏘면 팔이 아파서 더 이상 쏘지 못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결국 크기를 줄이고 무게를 가볍게 개량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성과로 나타난 것이 세총통이라 하겠다.


화기의 주조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앞서 언급한 서구의 방식과는 달리 주조방식으로 제작하였기에 화기의 크기, 무게를 줄이는 데 많은 애로가 있었다. 따라서 세총통의 개발은 주조 시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는 정교한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세총통처럼 극소형으로 제작하다 보니 총신이 너무 가늘게 형성되어 모병에 나무자루를 만들어 끼운다고 하더라도 가늘어 자루가 발사 시 폭발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루 대용으로 탄성이 강한 주철로 만든 철흠자를 고안하여 이를 통해서 총통을 잡고 쏘도록 했던 것이다.


이처럼 세총통에는 우리나라 국방과학 기술의 우수성과 선현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세총통을 쏘는 모습을 상상해보노라면 마치 권총을 쏘는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에 우리나라 권총의 효시라고도 말 할 수도 있겠다.


이 세총통은 조선 초기 세종대왕 재위 시절에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개발한 화약무기 중의 하나이다.
당초 개발 초기에는 적진에 침투하는 정찰병들이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는 무기로 고안되었으나 이후 기병들에게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세종이 1437년 6월 27일에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에 대한 정벌계획을 수립하면서 평안도 절제사에게 내린 다음과 같은 훈령에서 잘 알 수 있다.


“지난 번 경이 보고하길, ‘정찰병에게 긴급 호신용으로 총통을 휴대시켜 왔으나, 그 총통은 아무리 몸집이 작아도 급박한 상황에 부닥치면 신속히 발사할 수 없으므로, 더 이상 만들어 지급할 필요가 없습니다.’고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군기감(軍器監)에서 새로 고안한 세총통(細銃筒)을 시험해 보았더니, 휴대하기도 가볍고 간편하며 사격방법 또한 편리하였다. 정찰병 호신용으로는 부적당할지라도, 적과 마주쳐 싸울 때 기마병이 안장에 여러 자루 넣어 두고 하나씩 꺼내 쏘기에는 매우 편리하고 유익하고, 위급할 때는 어린이와 아녀자라도 쓸 수 있을 만큼 조작이 간편하기 때문에, 이제 세총통 150개와 피령전(皮翎箭) 1,000개, 철전(鐵箭) 1,500개를 보내니 적절히 나눠 쓰게 하고, 피령전은 현지에서 견본대로 모방하여 만드는 것이 좋겠다.”
결국 기병이 장전되어 있는 여러 개의 세총통을 안장에 넣고 다니다가 유사시에 꺼내 사용하기에 매우 편리하다는 점에서 기병의 휴대무기로 긴요하게 사용됐던 것이다. 특히 여자나 어린이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간편한 무기라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당시 사용된 세총통·철흠자의 설계도와 제원은 1474년(성종 5년) 만들어진 책인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병기도설(兵器圖說)〉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당시에 제작된 유물이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유물은 1965년 한 수집가가 기증한 것으로 유일하게 전해오고 있는데, 보물 854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승식 권총에서 치륜식 권총까지
서양에서의 권총을 뜻하는 피스톨(Pistol)의 어원은, ①처음에 피스톨을 만든 곳이 이탈리아의 피스톨라시(Pistola 市)였고, ②초기 피스톨은 구경이 옛 화폐인 피스톨(피아스톨)의 크기였고, ③권총을 말안장 앞 끝에 두었기 때문에 피스타로(안장 앞부분의 명칭)가 되었다는 등의 여러 설이 있다.


14세기에 개발된 초기 권총은 발화 방식이 불편하여 기병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었다. 이후 새로운 발화 방식의 화기가 등장하면서 점차 활용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때 개발된 권총이 바로 화승식(火繩式) 권총이다. 15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초반까지 사용된 화승총(火繩銃:우리나라의 조총)의 규격을 축소하여 기병용으로 작게 제작되었다. 그러나 화승식 권총의 격발장치도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사용하는데 문제가 생겨 불편한 점이 있었다. 또한 권총은 좁은 공간이나 근거리에서 사용되는 무기이므로 필요할때 위급 시 사용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화승식 권총은 발사를 위해 연기가 나는 화승을 늘 휴대해야 했기 때문에 권총을 숨길 수 없었다. 따라서 소지하고 다니다가 즉시 사용하기에는 다소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점은 16세기 중반에 톱니바퀴식 발화장치(齒輪式:Wheel lock)와 17세기에 부싯돌식 발화장치(燧石式:Flint lock)가 개발되면서 보완되었다. 작은 쇠바퀴와 부싯돌의 마찰로 발화시키는 치륜식(齒輪式)권총과 부싯돌을 전면의 쇠에 부딪쳐 발화시키는 방식으로 수석식(燧石式) 권총은 권총의 사용을 더욱 간편하게 함으로써 쓰임새가 증가하였다.


톱니 바퀴식 발화장치(齒輪式:Wheel lock)는 권총의 발화장치로서 최초로 만들어진 실용적인 총기 발화방식으로 이후 권총의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발화장치를 장착한 권총의 경우 기존의 화승식 권총에 비해 즉시 사용이 가능하도록 장전된 상태로 품안에 감추고 다닐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톱니바퀴식 발화장치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08년스케치한 두 가지의 바퀴식 발화장치와 1517년 뉘른베르크의 요한 키푸스가 만든 바퀴식 발화장치도 포함되어 있다.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대략 1520년대 유럽에서 새로운 방식의 총기 발화장치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화승총과 달리 곧바로 사격이 가능하고 장전 후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격 경기나 권총에 적합한 근거리 사격용으로 사용되었다.


톱니바퀴식 발화장치는 오늘날의 일회용 라이터와 비슷한 원리로 작동한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톱니바퀴 모양의 부시쇠가 방아틀 뭉치에 자리 잡고 있는데, 공이치기 역할을 하는 금속제 부리를 뒤쪽으로 돌려 부싯돌을 금속 톱니바퀴에 닿도록 하여 그 마찰에 의해 불꽃이 튀김으로써 발화되는 방식이다. 발사 준비가 끝난 권총은 무게 1.02kg, 길이 15.5인치였는데 별다른 조준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명중률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총신이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선이 파여 있지 않아 발사 직후 총알의 속도는 초속 122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탄환은 Ball 형태로 지름이 1cm 내외였는데 15m 이내의 근거리에서는 살상력이 높지만 그 이상의 거리에서는 높은 명중률을 기대할 수 없었지만 기존의 권총에 비하면 대단한 발전이었다.


1554년 프랑스군 병사들은 렌티(Renty)전투에서 독일군과 맞섰다. 당시 독일 기병대는 대대 단위로 길게 늘어선 채 보병을 공격하고, 전열 몇 걸음 앞에 멈추어 서서 일렬씩 치륜식 권총을 발사하고 나서 말머리를 돌리는 형태로 전투를 벌였다. 독일 기병대의 무기와 기동작전 양쪽 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새로운 것이었다. 독일 기병대는 각기 적절하게 간격을 둔 채 두 번째와 세 번째 열의 지원을 받으면서 정렬한 채 공격했다. 조금 뒤에 프랑스인들은 독일인으로부터 그들의 무기, 즉 권총을 도입했다.


이들 치륜식 권총은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한손으로 총을 다루고 다른 손으로 말을 다뤄야 하는 기병들에게 처음으로 유용한 화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후 프랑스 기병을 비롯하여 지중해, 대서양을 누비고 다녔던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등 여러 나라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이처럼 톱니바퀴식 발화장치는 총기에 적용하는 데 만족할 만한 성능을 보였지만 단점도 있다. 습한 날씨에는 발화가 잘 일어나지 않거나 장전 후 금속 바퀴를 감은 채 시간이 경과하면 스프링의 탄성이 떨어져 발화에 실패하는 일도 있었다. 또 이 치륜식 권총은 제작비용이 많이 들어 대중화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권총은 당시 매우 고가의 제품이었기 때문에 귀족계급의 신분을 상징하는 증표로 자리잡게 되어 금, 은,상아, 뿔 등을 이용하여 고급스런 상감무늬를 총에 넣기도 하였다.


한편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범죄에 사용되는 일이 많아져 유럽의 많은 정부와 귀족들은 16세기와 17세기에 권총의 민간 소유를 금지하기도 했다. 무기가 발달하면서 무장강도는 전 사회적인 골칫거리라 할 수 있다. 노상강도는 쉽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획득하기위해 적절한 무기가 필요로 했다. 이전에는 칼이나 화승식 권총을 사용했지만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러나 16세기에 치륜식 권총이 개발되면서 말탄 강도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치륜식 권총은 휴대가 가능하고 쉽게 숨길 수 있으며 한손으로 말을 몰고 다른 한 손으로는 총을 재장전하여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선 이 권총을 이용한 노상강도와 각종 범죄가 나타나자 통제에 나서, 1537년 헨리 8세는 0.75m 이하의 무기 소지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후 엘리자베스여왕도 권총 범죄가 증가하자 1575년부터 1600년 까지 무기 소지 금지법을 시행하기도 했다.


이후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에 이르면 수석식 격발장치와 같은 부싯돌을 이용한 새롭고 보다 발전된 형태의 총기 격발장치들이 등장하면서 권총 시장은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특히 플린트록은 총기 제작비용을 절감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는데, 18세기에 이르면 민간과 군에 권총이 널리 퍼지게 된다.

15세기부터 기병용으로 사용된 권총은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당시 유럽의 모든 군대는 기병의 주무기로 권총(피스톨)을 채택했다. 최고의 피스톨 병은 ‘라이터(reiter:기병)’로 알려진 독일 기병이었다. 이들 병사는 검은 갑옷을 입고, 여러 개의 총집에 3자루의 피스톨을 소지하고 다녔는데, 적절한 공격 전술을 통해서 권총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16세기 후반에 새로운 격발장치가 개발되면서 기병용으로서 활용이 더욱 늘어났고, 권총시장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는데, 그 격발장치는 부싯돌식 격발장치(燧石式:Flint lock)이다. 부싯돌식 발화장치는 부싯돌을 이용하여 발화시키는 방식으로 권총의 사용을 더욱 간편하게 하였다.

 


 

17세기 이후 200여 년간 사용된 수석식(燧石式) 권총
수석식 권총은 17세기 부싯돌식 격발장치(燧石式:Flint lock)가 개발되면서 사용되었다. 부싯돌식 격발장치는 17세기 전반 스내펀스 격발장치(Snaphance lock)가 발전하여 19세기 뇌관식 격발장치가 등장할때까지 200여 년간 총기 격발방식의 대표로 자리 잡는다.


부싯돌식 격발장치의 시초는 1580년 경 스페인에서 등장한 미클렛 발화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스내펀스 격발장치는 총기 발달사에 한 획을 그은 획기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었다. 기존의 화승식 격발장치(Matchlock)는 점화약의 발화에 실패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며, 바퀴식 방아틀 격발장치(Wheel lock)는 제조단가가 지나치게 높아 대량생산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내펀스 격발장치는 부싯돌을 부시쇠에 부딪쳐 일어난 불꽃으로 점화약의 발화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불을 피우거나 담뱃불을 붙이는 등 일상생활에서 쓰이던 기술을 총기에 응용한 것이다. 이 스내펀스 격발장치는 이후 부싯돌식 격발장치의 기초를 마련했다.


스내펀스 격발장치가 총기를 발사하기 전에 화문(화약접시)에 달린 화문개(화약접시 뚜껑)를 한쪽으로 젖혀 점화약이 발화될 수 있도록 한 데 반해, 미클렛에서는 화문과 화개가 일체화되어 미리 젖혀진 공이치기가 아래를 내려칠 때의 힘으로 화개가 열리도록 개량한 것이다. 부싯돌식 격발장치의 개발자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 리지외(Lisieux) 출신의 총기 기술자 마린르 부르주아(Marin le Bourgeoys)로 알려져 있다. 이 장치를 이용한 총기는 17세기 초반 프랑스 왕실에서 처음 소개된 이후 점차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수석식 권총의 작동원리는 다음과 같다. 먼저 공이치기가 뒤로 젖히면 공이치기 하단부의 원통형 받침대가 반쯤 회전하며 안쪽에 장착된 납작한 판형 스프링의 길게 뻗은 부분을 위로 올려 스프링을 압축하게 된다.
이때 단발자의 앞쪽 끝이 공이치기 하단 기부의 홈에 걸려 공이치기를 젖혀진 상태로 고정하게 된다. 공이치기의 아래쪽 받침대 홈은 2개로 반작동 홈과 완전작동 홈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아쇠를 당기면 공이치기 아래쪽 받침대 홈에서 단발자가 풀리면서 공이치기가 앞으로 회전하며 아래쪽을 내려치게 된다. 이때 공이치기에 장착된 부싯돌이 부시쇠를 치면서 불꽃을 만들고, 거의 동시에 화문개가 위로 열리면서 화문에 놓인 점화 화약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그 후 화구를 통해서 총열 뒤쪽의 약실에 장전된 발사약에 점화하여 총알이 날아가게 되는 것이다.


부싯돌식 발화장치는 이후 총기 제작비용을 절감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는데, 18세기에 이르면 민간과 군에 이러한 권총이 널리 퍼지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수석식 권총은 단발이라는 성능의 한계와 전투 중에는 재장전이 불가능하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인 큰 변화 없이도 200여 년간 사용되었다는 점은 이 총기의 우수성을 입증한다고 하겠다. 수석 발화식 총기를 제조하는 데 있어서 기술자들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은 공이치기 아래쪽 받침대에 장착된 판형 스프링과 공이치기가 내려치는 각도였다. 이 때문에 총기 기술자의 기술 정도에 따라 총기의 신뢰성이 달라지곤 했다.

 
뇌관식 권총
수석식 권총은 오랜 기간 동안 실전에 사용되었지만 혁명적으로 발전된 전장 환경에서는 한계가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재장전이 느리고, 습기에 약하며, 부싯돌의 경우 자주 교체해야 하는 일이 생겼고, 재료로 쓰>이는 강철은 담금질이 필요했으며 방아쇠를 당긴 후주 장약이 폭발하여 탄환이 나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지연되어 명중률이 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권총의 한계는 19세기에 뇌관식 권총, 총탄과 화약이 일체화된 약협(藥莢)의 등장으로 혁신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새로운 격발장치의 개발은 18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프랑스 과학자인 콩트 베르톨레(Count ClaudeLouis Berthollet)가 폭발력이 강한 뇌산염(雷酸鹽)을 이용하여 수차례의 실험에서 시작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성직자였던 존 포사이스 박사(Reverend Alexander John Forsythe)의 뇌산염 과 수은을 이용하여 여러차례 실험을 하였고 이를 토대로 1820년경 뇌관식 격발장치(雷管式 : Percussionlock)를 발명함으로써 권총의 성능은 더욱 발달되고 활용성도 커졌다.


이 격발장치는 소량의 뇌산염을 얇은 금속관에 넣은 후 이것을 화구에 올려놓은 뒤 공이치기로 충격을 가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이후의 충격식 뇌관과는 다르지만 무기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9세기 초에 현대식 소화기의 진보에 중요한 역할을 한 충격식 뇌관이 개발되게 된다. 충격식 뇌관은 영국인 조슈아 쇼(Joshua Shaw)가 1814년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격식 뇌관은 작은 황동 그릇에 수은과 뇌산염을 같이 넣고 총의 공이치기 아래쪽에 있는 화구 꼭지에 올려놓는다. 방아쇠를 당겨 공이치기가 이 황동 그릇을 뭉개면 충격화약이 발화하고, 화구 꼭지 내에 있는 화염구를 통해 일시적인 불꽃을 전달해 약실에 있는 주 장약을 태운다. 뇌관식 방식은 수석식 총에 비해 많은 장점을 지녔는데 악천후에도 사용이 가능했으며, 격발에서 탄환이 총구를 떠나기까지의 준비과정에 걸리는 시간이 매우 짧아져 권총의 정확도가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격발 장치의 크기가 작아져 권총의 크기가 눈에 띠게 줄어 들었기 때문에 코트 주머니에 숨겨 다닐 수 있는 정도의 권총도 제작되었다. 이는 권총의 호신용 무기로서의 효용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충격식 뇌관을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권총들이 개발되어 사용되었고, 인기도 높았다. 이러한 뇌관식 권총은 회전식 탄창을 가진 리볼버에 이르러 권총은 더욱 작아지고 늘씬해지며 위력적인 성능을 가지게 된다.
19세기 초에는 뇌관식 격발장치(Percussion lock)가 개발되어 권총의 성능은 더욱 발달되고 활용성도 커졌다. 수은과 뇌산염을 이용한 충격식 뇌관장치가 장착된 뇌관식 권총은 기존의 수석식 총보다 간편하고, 크기도 크게 줄어 효용성이 높아져 전 세계로 보급되었다.

 


 

연발식 권총의 등장
19세기 초반에 처음 등장한 초기 형태의 리볼버는 여러 개의 총열이 원통형으로 결합되어 몸통에 부착된것으로 발사할 때마다 이 총열 뭉치를 돌려주어야 했다. 조악하기는 하지만 최초의 수동식 연발 사격장치이다. 이후 회전식 탄창에 탄환과 화약을 하나로 묶은 탄약포를 장전, 탄창을 회전시키면서 사격하는 근대적인 형태의 연발식 권총이 개발하면서 이런 불편은 사라지게 되었다. 1835년 새뮤얼 콜트(Samuel Colt)는 격철(擊鐵)을 세우면 회전탄창이 회전되는 싱글액션 장치(회전식 탄창)을 개발하였다.


콜트는 1814년 7월 19일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크리스토퍼 콜트가 운영하는 직물공장에서 일하던 콜트는 16세에 선원이 되어 인도로 항해하던 중에 회전식 연발 권총을 설계해 귀국 뒤에 특허를 얻었다. 콜트는 이어 본격적으로 총포 사업에 뛰어들었다. 1836년 뇌관식 회전권총인 패터슨 모델을 고안해 특허를 얻은 그는 이것을 기반으로 뉴저지주에 콜트 특허 무기 제조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콜트사의 6연발 권총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미지근했고, 1842년에 회사는 문을 닫았다. 그러나 콜트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1847년에 구경 0.44인치 6연발 워커권총을 개발했고, 그 뒤 드러군(1847), 네이비(1857),아미(1860) 등 각종 권총과 회전 탄창 라이플을 개발했다.

 

이들 권총은 군대와 민간에 호평을 받으며 북아메리카와 유럽에 회전탄창식 리볼버가 퍼지는 데 기여했다. 한편 19세기말에 이르러 긴 시간과 손이 많이 갔던 리볼버의 장전 방식은 총탄과 화약이 금속제 또는 종이 재료로 만들어진 탄피와 일체화된 현대적 의미의 약협의 등장으로 바뀌게 된다. 약협은 1812년 스위스의 발명가 사무엘 요하네스 파울리(Samuel Johannes Pauly)가 처음 만들었다. 1850년대에 이르면 스미스 앤웨슨(Smith & Wesson)에 의해 약협을 사용하는 리볼버가 최초로 등장하고 Smith & Wesson의 특허기간 만료 후 콜트도 이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새로운 장전방식의 권총은 초기의 핀파이어(Pin-fire, 탄피 바닥에 있는 중앙부분의 뇌관을 건드려야 발사되는 방식) 격발방식에서 림파이어(Rim-fire, 탄피 바닥의 측면부분이 뇌관이므로 이곳을 건드려야 발사되는 방식)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센터 파이어(center-fire, 탄피 바닥의 중간부분에 있는 뇌관을 건드려야 되는 방식) 격발방식으로 발전하는데, 이후의 리볼버는 제작기법과 조준기구 및 기계적 구조의 변화에 발전방향이 맞춰졌으며, 기본적인 작동 원리는 지금까지도 큰 변화가 없다.


이후 권총의 수요는 미국 남북전쟁과 서부 개척시기를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또한 성능 개량도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19세기 미국의 서부지대는 무법상태였다. 1850년대까지 텍사스주에는 성인 남자 수만 큼 권총이 흔하게 돌아다녔다. 1850년부터 1890년까지 2만 명 이상이 거리에서 일대일 결투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 명성을 날린 총잡이로 와이엇 어프(Wyatt Earp), 팻 개릿(Pat Garrett) 등이 있다. 이런 이유에서 서부시대의 거리 결투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에게 가장 인기 높은 주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콜트사에서 개발한 SAA(Colt 1873 single action army)는 ‘서부를 정복한 권총’이라 불리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이 총이 최초 제작된 것은 1873년이다. 그 뒤에 개량을 거듭하여 100년 이상 판매되어 오고 있는데, 당시 미군의 제식권총이기도 했다. 연발식 권총이 인기를 얻은 것은 휴대가 간편하고, 손쉽게 연속 사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19세기 이전에도 연발총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했었다. 다만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쉽게 개발할 수 없었다. 이후 권총은 회전식 권총(리볼버)과 자동식 권총(피스톨)의 두 유형으로 크고 작은 변화들을 가지고 오늘날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발달하였다.

 

연발식 권총의 원조, 삼안총(三眼銃)
우리나라에도 연발총 개념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화기가 있는데 바로 삼안총이다. 삼안총은 기본적으로 불씨를 손으로 점화해서 탄환을 발사하는 지화식(指火式) 화기의 일종이지만, 하나의 총신에 세 개의 총구멍 또는 세 개의 총신이 하나의 손잡이(柄部)에 묶여져 있는 독특한 형식의 화기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특징 때문에 ‘삼안총(三眼銃)’, ‘삼혈총(三穴銃)’이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다. 보통 인마(人馬) 살상을 주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전투・훈련 시에는 소리를 이용한 신호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삼안총은 원래 중국에서 사용해 온 화기로 임진왜란중에 중국으로부터 도입되어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을 이용한 보병전술에 맥없이 무너졌다. 초기 전투의 경험을 토대로 피아(彼我) 화기의 성능상의 우열과 전술상의 차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한 조선은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명나라의 선진화기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명나라 군은 대장군(大將軍),불랑기(佛狼機), 멸로포(滅虜砲), 호준포(虎蹲砲), 백자총(百子銃), 삼안총(三眼銃), 쾌창(快槍), 조총(鳥銃)등 다양한 화기를 장비하고 있었고, 명나라 군은 이들 화기를 활용하여 평양성 탈환전투에서 승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명나라 군으로 부터 삼안총, 호준포, 백자총통, 불랑기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전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삼안총은 이후 구한말까지 널리 제작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1808년에 발간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기록된 각 군영의 무기 재고상태를 보면 훈련도감에 153점, 어영청에 60점의 삼안총이 장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삼안총은 일반 총들과는 다른 연발총 개념이 적용된 화기로서 다음과 같은 구조적인 특징을 지녔다. 먼저 삼안총은 기존의 총들과는 다른 다관식(多管式) 화기이다. 기존의 총(총통)들은 모두 하나의 총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화약과 발사물(화살 내지는 탄환)을 총구 쪽에서 장전한 다음 심지에 불을 직접 점화하여 발사하게 되는데 재장전 후의 발사과정도 이러한 과정을 반복해야 하였다. 총(화기)을 한 번 발사한후 두 번째로 발사할 때까지는 몇 분의 시간이 소요되어 사격 속도가 극히 느릴 뿐만 아니라 일단 발사한후 재장전하는 동안 병사가 적의 공격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는 취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한 번에 다량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 세종 때에 ‘일발다전법(一發多箭法)’ 기술의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후 발사물이 화살에서 탄환으로 대체되면서>이러한 기술적 노력은 기존의 총신 세 개를 병렬로 연결함으로써 더욱 효과를 높이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삼안총이다.


삼안총이 지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총신이 매우 짧고 가벼워 기병용(騎兵用)으로 사용하기에 편리하다는 점이다. 1605년, 순변사 이시언(李時彦)이 선조에게 “삼안총이 말 위에서 쓰기에 아주 좋으며 적을 두렵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기병은 상대적으로 화기 사용에 있어서 많은 제약 요소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매번 장전한 후 발사하는 방식의 화기 보다는 한꺼번에 세 개의 총신에 장전한 후 세 차례에 걸쳐 연속 사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삼안총은 기병 전술운용에 있어서 매우 유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무예교범서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마상재(馬上才)’에도 바로 삼안총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마상재는 기병들이 말 위에서 무기 사용과 몸동작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기 위해 고안된 무예였다.


이렇듯 삼안총은 총열이 짧고 가늠쇠가 없기 때문에 사거리가 짧고 정확도도 떨어지는 단점도 있으나 제작이 비교적 쉽고 말 위에서도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기병용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백병전을 펼칠 때 화약이 떨어지게 되면 타살무기로도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구한말까지 사용되었다.

 

회전 탄창식 권총, 리볼버
현대권총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충격식 뇌관’과 ‘일체형 탄약’을 사용하여 쉬운 장전으로 신속한 사격이 가능한 20세기의 권총을 말한다. 격발장치에서 방아쇠를 당기면 공이치기가 공이에 충격을 가하고, 공이는 충격식 뇌관을 발화시키고, 연쇄작용으로 주장약을 폭발시켜 탄환이 발사되게 된다.


현대권총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자동 장전식 권총’인 피스톨이고 또 한 가지는 ‘회전 탄창식 권총’인 리볼버이다. 이 둘 중 역사가 훨씬 깊은 것은 바로 리볼버다. 우리나라에서는 ‘매그넘’이라고 잘못 알려진(매그넘은 총의 종류가 아니라 탄약의 종류에 쓰이는 명칭) 리볼버는 앞서 언급했듯이 18세기 후반에 이미 기본적인 원리가 고안됐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상품화되기 시작한 것은 1836년 미국의 발명가 겸 사업가 새뮤얼 콜트(Samuel Colt)에 의해서였다. 그가 창립한 ‘콜트’사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미군용 소총의 주요 납품업체로 활동하고 있으나 흥미롭게도 리볼버 분야에서는 콜트사보다 20년쯤 뒤에 나타난 스미스&웨슨(Smith&Wesson)사에 밀려난 상태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리볼버의 대부분은 S&W사가 제작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 경찰과 군이 사용하는 리볼버도 이 회사에서 제작한 권총이다. 가장 대표적인 리볼버는 S&W사의 모델 구경38 리볼버이다.


리볼버(revolver), 즉 ‘회전식 권총’은 이름 그대로 약실을 겸하는 탄창이 회전해 연속 사격이 이뤄진다. 현재의 일반적인 리볼버는 방아쇠를 당기면 탄창이 한 칸 회전하며 동시에 공이치기가 작동해 격발이 이뤄진다. 따라서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연속 발사가 이뤄지지만, 여기에 필요한 힘은 결국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에서 나오므로 수동식으로 분류된다. 리볼버의 최대 장점은 단순하고 고장이 없다는 데 있다. 자동식 권총과 달리 움직이는 부품이 적으며, 작동이 손의 힘에 의해 이뤄지므로 자동 권총처럼 탄약 불량에 의한 오발이나 작동 불량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게다가 피스톨과 달리 탄약과 작동 사이에 직접적 관계가 없으므로 총 자체만 튼튼하면 이론상 아무리 강력한 탄약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현재의 일반적인 리볼버조차 기본구조가 완성된 것이 19세기 말 무렵일 정도로 오래된 만큼 리볼버는 한계도 많다. 가장 큰 문제는 장전되는 탄약의 수와 재장전이다.


현대의 피스톨이 12~17발의 대용량 탄창을 사용하는 반면 리볼버는 대부분이 5~6발, 많아야 8발이 장전된다. 더군다나 탄창 자체를 교체해 재장전이 이뤄지는 피스톨과 달리 탄창을 바꿀 수 없는 리볼버는 탄창에서 탄피를 꺼내고 새 실탄을 넣는 재장전 과정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번거롭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리볼버는 권총시장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나 이런 이유들로 20세기 중반부터 군용 및 경찰용 권총의 대부분은 자동 권총이 지배하고 있다. 특히 과거와 달리 자동 권총의 작동 신뢰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탄약 품질 향상으로 불발 확률도 극단적으로 줄어들면서 리볼버를 선택해야 할 이유는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총기 범죄가 상대적으로 적은 우리나라와 같은 나라들은 여전히 리볼버를 경찰용 권총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해외에서는 군 특수부대들 중 일부가 강한 위력을 가진 리볼버를 사용하고 있다. 또 고장 가능성이 거의 없는 리볼버의 특성을 살려 소형 리볼버를 호신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여전히 드물지 않다.

 


자동 장전식 권총, 피스톨의 진화

피스톨은 미국 콜트사의 모델 M1911과 이탈리아 베레타사의 모델 92가 대표적이다.
콜트사의 M1911은 M1900을 개량한 모델로 콜트 45구경이라고도 한다. 이 권총의 초기 모델이라 할 수 있는 M1900은 존 브라우닝(John Moses Browning)이 설계하고 미국의 콜트사가 개발한 권총으로, 벨기에 파브리크 나시오날 드 헤르스탈사의 M1900과는 다른 권총이다. 존 브라우닝은 콜트와 FN사 양쪽에 자신의 설계도를 팔았던 관계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이름의 권총이 몇 종류 있다.


1890년대 말에 설계되어 새로운 군용 제식 권총을 찾고 있던 미군에 제안된 권총 중 하나였다. 그러나 미국 해군이 200정을 구입하는 데 그치고, 전체 생산량 콜트사의 M1911도 2000여 정에 불과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권총은 아니었지만 콜트권총의 시발점이라는 의미는 있다.


M1911은 191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군의 제식 권총으로 사용되면서 제1~2차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분쟁・전쟁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미국에서 공여 받은 한국군도 1980년대 국산 K-5로 교체할 때까지 제식 권총으로 장비하였다.


1900년대 초 미 육군은 미국-스페인전쟁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1892년 제식 채용한 38구경 리볼버 권총의 위력이 약하다고 판단하고 강력한 탄환과 권총을 개발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미 육군병기창은 콜트, 루거, 새비지, 스미스&웨슨 등의 총기 회사들이 참여케하여 1906년부터 새로운 권총에 대한 개발과 성능 시험을 시작하였다. 1907년까지 진행된 1차 시험 결과 콜트사와 새비지사가 선정되고, 1911년 3월 3일부터 여러 가지 가혹한 환경에서 최종 성능시험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브라우닝이 설계하고 콜트사가 제작한 45구경 자동권총이 시험을 통과하여 1911년 3월 29일, 미 육군의 제식 권총 M1911로 채용되었다. 뒤에 미국 해군과 정부기관 등도 채용하였기 때문에 거버먼트 모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M1911은 콜트사를 중심으로 스프링필드병기창, 레밍턴사, 새비지사 등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100만 정을 생산하였다. 미국과 같은 연합국이었던 영국과 영연방이었던 캐나다, 심지어는 러시아까지도 M1911을 수입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권총이었다. 영국은 전쟁 전인 1912년부터 1917년까지 17,500정 정도를 수입했고, 캐나다는 5천 정, 러시아는 무려 51,000정이나 수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존 브라우닝은 M1911의 몇 가지 부분을 개량해 1924년에 M1911A1을 내놓았다. 이 권총은 1985년 베레타사의 M9(M92FS)로 교체될 때까지 50년 동안 미군의 제식 권총으로 사용되었다. 또 최초 제작된 이후 오늘날까지 가장 많이 쓰인 45구경 콜트 권총이기도 한다. 콜트의 45구경 권총이 이렇게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크기가 작아 취급하기 쉽고, 구조가 튼튼하고 재장전이 편해 신뢰성이 높으며, 명중률이 높고 강력한 살상력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이 M1911의 기본구조는 M1911A1 뿐만 아니라 지금의 권총들과 비교해도 다른 점이 없기 때문에 콜트는 현대 권총의 선구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권총은 진화를 거듭하면서 권총 설계의 역사를 변화시켰다. 그러나 이후에 나오는 거의 모든 권총들이 콜트의 기본 구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한편 미 육군은 1985년 표준 권총으로 콜트 M1911에서 베레타 모델 92로 교체하였다. 가장 최근 베레타에서 생산한 권총은 모델 9000S로 양손잡이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인체공학적 디자인을 적용했고, 무게를 줄이기 위해 고분자 플라스틱과 유리섬유를 사용하여 더욱 신속한 사격과 정확도를 높이려 노력했다.

 
사라예보사건과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브라우닝 권총

 

 

1914년 6월 28일,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가장 맑게 갠 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조피가 ‘젊은 보스니아’라는 민족주의 조직에 속한 18세의 청년이자 대학생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린치프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으로 전 남슬라브인들의 통일, 구체적으로는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독립하여 독립국인 세르비아와 합칠 것을 원하였다(남슬라브 운동).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군사연습을 보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프린치프와 네디엘코 카브리노비치 및 4명의 혁명가 학생들이 음모를 준비했다.


황태자 부부가 탄 차는 일차적으로 카브리노비치가 던진 폭탄을 맞아 테러를 당했으나, 혈기왕성한 황태자는 폭탄을 주워 테러범에게 도로 던져 위기를 면했다. 밤이 되어 차를 타고 가던 중 황태자는 아까 자신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쳤을 것이라며 걱정하였고, 폭발 사고로 부상당한 관리를 방문하기 위해 병원으로 차를 몰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운전사는 길을 잃었고, 이 틈을 타서 저격범 프린치프가 차 앞으로 뛰어들어 총을 쏴 먼저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하고 다시 총을 쏴 부인 조피를 암살했다. 그때 프린치프는 조피가 아니라 보스니아군 사령관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장군을 겨냥했다고 한다. 이때 세르>비아의 청년이 사용한 권총은 ‘브라우닝 권총’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후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 빠지게 되었다. 세르비아가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은근히 부추기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을 구실로 세르비아와 전쟁을 결심했다.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 동맹국 독일의 협조를 요청했고, 여기서 외교사 최대 실수로 평가되는 ‘백지 수표’를 빌헬름 2세가 약속한다. 오스트리아를 무조건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1878년에 체결된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래 이 동맹은 독일이 주도하고 오스트리아가 따르는 구조였음에도,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합병 때부터 오스트리아가 주도하고 독일이 따라가는 것으로 전도되어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일찍이 이것은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독일이 건네준 백지 수표를 믿고 7월 23일 세르비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낸다. 답변 시한은 48시간이었다. “모든 반(反) 오스트리아 단체를 해산할 것. 암살에 관련된 모든 자를 처벌할 것. 반(反)오스트리아 단체에 관련된 모든 관리를 파면할 것. 여기에 관련된 당사자를 조사하는데 오스트리아 관리가 세르비아로 들어가 도울 것을 허용할 것” 등이다. 이 조항들을 내민 오스트리아의 속셈은 세르비아가 최후통첩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각 조항들이 세르비아의 주권과 자존심을 짓밟는 항목들이었고, 그 목적은 전쟁이었다.


이런 오스트리아의 속셈을 세르비아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은 피하고 싶었던 세르비아는 1,2, 3항까지는 굴욕을 참고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4항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 조건이었고, 결국 세르비아는 이 최후통첩을 거부한다.


오스트리아는 바라던 바를 이루었기 때문에 7월 28일,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고, 러시아가 7월 29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러시아와 프랑스에 동시에 최후통첩을 발했다. 러시아에 대한 최후통첩은 “총동원령을 해제하라. 안 그러면, 전쟁 상태로 간주한다. 12시간 내 답변하라.”였는데, 러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에는 “만일 독일이 러시아와 전쟁 상태로 들어가면 프랑스는 어떤 행동을 취할것인가. 18시간 내 답변하라.”라고 발했다. 프랑스는 프랑스의 국가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고 답변했다.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후 각국은 서로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전쟁은 7월 28일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후 연합군(프랑스,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 미국) 300만여 명과 동맹군(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터키) 230만여 명은 4년간에 걸쳐 싸웠으며, 이 전쟁은 동맹군의 패배로 끝났다.

 
권총 개발을 촉진시킨 제2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의 연장선상에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권총의 개발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향은 추축국[Axis-Powers/Achsenm chte/Potenze dell’Asse, 樞軸國])인 독일·이탈리아·일본과 연합국인 프랑스·영국·미국·소련·중국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전쟁 기간 중 추축국과 연합국 사이에는 권총의 개발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독일군은 1939년부터 2, 3가지의 주력 권총을 사용했다.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 초기 13종류의 권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각각 다른 탄환을 사용했다.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권총은 군수산업의 발전을 저해하였고, 생산량도 분산되었다. 이들 권총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든다면 루거 P-08와 마우저 C-96이다. 이 두 권총은 모두 장총열 변형이 되어 탈착식 개머리판을 부착하여 반자동 카빈으로 변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박격포나 기관총 진지에 가벼운 방어용 무기로 활용되었다. 이 총들은 전장에서의 효용성은 높았지만 참호전을 시행하면서 먼지로 인해 고장이 잦고, 생산단가가 높다는 약점이 있었다.


이후 독일은 이러한 권총을 한 단계 발전시켜 그 유명한 발터 P-38을 개발하였다. 이 권총은 생산이 용이하였고, 잔 고장이 없어 전장 환경에서도 높은 신뢰성을 보여 독일군의 표준 권총으로 정착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연합군 병사들에게 인기 있는 전리품이 되었고, 현재에도 사용되는 모델이다.


한편 미군이 사용한 권총은 콜트 M1911A1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콜트사는 제식 기관총과 BAR등의 생산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M1911A1의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되어 다른 회사에서도 M1911A1을 생산할 수 있는 라이센스 권한을 허락했다. 그래서 다른 업체에서도 생산을 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콜트사에서 40만 정, 레밍턴사에서는 90만 정, 이사카사에서는 40만 정, Union Switch & Signal사에서 5만 정이 생산되는 등 M1911A1은 그 생산량은 무려 198만 정에 달했다.


또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형편없는 권총을 사용했다는 불명예를 얻었다. 일본에서는 1914년부터 1945년까지 5개의 모델이 만들어졌는데, 메이지 26 리볼버, 다이쇼 04, 다이쇼 14, 남부 94식 권총 등이다. 이들 권총들은 서구 무기를 복제하는 과정에서 정교함이 떨어져 권총으로서의 품질을 보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지정학적 역사의 분수령으로서, 소련의 세력이 동유럽 여러 나라까지 뻗치는 결과를 낳았고, 중국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세계의 지배력이 서유럽 국가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000만~5,000만명의 사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인 동시에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다.

 
국산 권총의 시초, K-5
우리 군이 초창기에 사용하던 권총은 대부분 6・25전쟁 때 미군으로부터 공여된 것이다. 이중 가장 널리쓰인 것이 M1911A1 콜트 거버먼트 권총이다. 미국이 개발한 이 총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베트남전에 이르기까지 꽤 오랫동안 사용됐고 우리 군도 6・25전쟁 당시 미군으로부터 공여된 이래 아직까지 일부가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군이 독자 개발한 최초의 권총은 육군이 1984년 소요를 제기해 총기 개발업체인 대우정밀 주도로 탄생한 K-5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자체 제작한 우리 군이 6・25전쟁 때부터 사용한 콜트 45 권총의 시초라 할 수 있다. K-5는 대우정밀의 주도로 1984년부터 개발에 착수하여 1988년 5월까지 진행되었으며, 1989년부터 정식으로 양산 보급되었다.

 


K-5는 군용 총기답게 특별히 튀는 디자인이나 다양한 기능보다는 다른 나라의 군용 권총들처럼 평범하게 있을 것은 있고, 없을 것은 없다. 예를 들어 탄은 9mm 파라블럼탄을 사용하고, 탄창은 13연발이며, 안전장치는 좌우대칭에, 더블액션, 싱글액션 사격이 가능하고 프레임은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든 것 등이다.
그래도 K-5만의 ‘독창성’을 찾는다면 당시까지 생산되는 다른 권총에서는 채택하지 않은 ‘패스트 액션(FA:Fast Action)’이라는 독특한 격발방식을 과감히 채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패스트 액션’이라 함은 가벼운 방아쇠와 정확성을 가진 싱글 액션과 연발 사격과 안정성을 가진 더블 액션을 혼합한 방식으로 싱글액션과 더블액션을 적절히 조화해서 초탄을 신속히 발사할 수 있으면서도 명중률을 높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 방식은 1970년대 벨기에에서 개발되긴 했는데, 오발사고의 위험이 높다는 이유로 실용화되지 못했던 것을, 대우정밀에서 이를 개량하여 안전하고 실용적인 FA방식의 총으로 ‘세계 최초’로 개발하였다.


특히 K-5 권총은 K시리즈 중 한국인의 체형에 가장 알맞게 만들어졌다고 봐도 될 정도로 일반적인 한국인의 손에 꼭 들어가며, 쥐는 감도 좋다. 권총의 모양이나 작동원리는 콜트사의 45구경 권총과 유사하지만 한국인의 체형에 맞게 무게를 경량화하였고, 초탄 발사의 신속성이나 정확한 명중률에서 세계의 어느 유명한 권총과 비교해도 그 성능이 떨어지지 않는 강점이있다.


K-5 권총은 1990년대부터 우리 군의 주력 권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현재 영관급 장교(장성급 장교는 38구경이 지급됨)와 기갑병과 전 병력에게 주로 보급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경찰의 표준 제식 화기이다. 또한 미국과 유럽에서는 DP-51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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