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물은 민수(岷水)의 것이라야 제격(水則岷方之注, 彼淸流), 그릇은 가리고 가려 월주(越州)의 사발을 쓰네(器擇陶揀, 出自東隅)." 진대(晉代) 두육(杜毓)은 '천부'에서 찻일에 쓸 물과 도자기를 이렇게 읊었다.
차인에게 있어서 물 가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에 못잖게 중요한 일이 바로 그릇을 가리는 일이다. 육우(陸羽)는 다기(茶器)를 24식(式)으로 열거하고 제대로 된 찻자리에서는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다도(茶道)는 폐(廢)한다"고 하였지만, 실은 그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관이나 사발이다. 다관이나 사발은 차(茶葉)와 물이 서로 섞이어 처음으로 차(茶湯)가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차와 물이 만나 최초로 차탕이 이루어지는 것을 일러 '점다(點茶)'라고 한다. '점'(點)이란 생물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듯이 차와 물이 만나 차탕이 되는 바로 그 순간을 말한다. 이 점의 순간이야 말로 찻자리에서 가장 엄숙한 순간이다. 그 점다가 이루어지는 자궁과 같은 곳이 다관과 사발이다.
요즈음에는 '점차'라는 용어가 당대(唐代)의 자차(煮茶), 명대(明代)의 포차(泡茶)와 구별되는 송대(宋代)의 가루차 다법(茶法)을 이르는 말로만 국한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점차법 만이 아니라 자차나 포차의 다법에서도 모두 이 점다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자는 같이 써도 우리말로서는 각 시대의 다법을 구별할 때에는 '점차'로, 차탕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은 '점다'로 구별하여 쓰고 있다.
차(茶) 자를 어떤 때는 '차'로 읽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다'로 읽기도 하는데 원래 이것은 차가 중국에서 다른 나라로 전파되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 대개 육로로 전파된 나라에서는 '차'로 발음하는 경향이 있고, 해로로 전달된 나라에서는 대부분 '다'로 발음한다. 예를 들면 육상 루트를 이용한 이란은 'CHA', 아라비아는 'CHAI', 러시아도 'CHAI', 터키는 'CHAY'라 발음하고, 해상 루트인 영국은 'TEA', 프랑스는 'THE', 독일은 'TEE', 스페인은 'TE', 이탈리아도 'TE', 네델란드는 'THEE', 말레이시아는 'TEH'로 발음한다.
나 자신은 이러한 루트와는 관계없이 둘 다 사용하고 있다. 나는 물질적인 차 자체를 말할 때는 '차', 정신적, 문화적 개념으로 사용할 때는 '다'로 사용하고 있다. 이외에 일상용어로 굳어진 용어들은 나 자신의 법칙을 적용하지 않고 바깥의 용례에 따르고 있다. 이 기회에 밝혀 두고자 한다.
어떻든 이 점다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곳이 다관이나 사발이기 때문에 차인들이 이들을 중요시 하는 것은 당연하다. 차인들이 다기를 바라보는 눈은 조금 과장하면 거의 신성시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차인들이 한갓 그릇을 우러러 보는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그것들이 비어있기 때문이다. 그릇은 속이 비어있다. 그릇은 그 빔으로써 쓰임으로 삼기 때문이다.
노자는 "이 세계는 마치 풀무나 피리와도 같다. 텅 비어 있지만 결코 궁하지 않다. 비어있기 때문에 움직일수록 더욱 더 많이 나온다"고 했다. 육우는 솥을 설명하는 말에서 "그 배꼽을 깊게 한 까닭은 가운데를 지키기 위함"(長其臍, 以守中也)이라 했는데 여기서도 '가운데'(中)란 곧 '빔'(沖)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무릇 작용은 빔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좋아하는데 그것이 많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도량이 크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많이 비어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차례 더 구르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이 비우려면 역시 그릇 자체를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기공(氣功)을 하는 사람들은 잘 안다. 행공(行功)을 크게 하려면 기 그릇을 먼저 키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정말 큰 그릇이란 어떤 그릇일까? 그것은 바로 안과 밖이 없는 것이다. 호흡을 해 보면 안다. 숨을 들이쉴 때에 공기는 우리 내부의 세계로 들어온다. 숨을 내 쉴 때에 공기는 외부의 세계로 나간다. 내부의 세계는 무한하다. 그리고 외부의 세계 역시 무한하다. 우리가 내부의 세계 혹은 외부의 세계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전체적인 세계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차인들은 "그릇에 도를 담는다(器以載道)"고 하지, "그릇에 차를 담는다"고 하지 않는다.
차와 그릇
차와 물이 처음 만나는 茶器를 가리는 일이 가장 중요
차인들은 다기를 신성시 "그릇을 비우고 거기에 담는 것은 茶가 아니라 道"
흙과 불의 관계·조형성은 그 다음
자국의 농산물을 강조하는 말로 쓰이는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이 있다. 그런데 이는 도자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대표적인 것이 옹기이다. 우리 김치 맛은 우리 흙으로 만든 옹기에 담갔을 때 제대로 난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 김치를 훔쳐가려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이 바로 우리 흙으로 만든 옹기를 쓰지 않아서이다. 예전에 대만에서 공부할 때의 경험인데, 김치가 먹고 싶어 여러 군데를 다녀 보았으나 어느 곳엘 가도 제대로 된 우리 김치 맛은 만날 수가 없었다. 한국 음식점에 가 보아도 불고기나 삼계탕 같은 것은 그런대로 먹을 만했지만 김치 맛은 아니었다. 서울 미아리에서 20년간 중국식당을 하다 왔다던 화교 식당에서도 사정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욱 심한 것은 연세가 많은 모 한국인 교수 댁에서 사모님이 차려주시는 밥상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교수는 당시 '쩡따'(대만 정치대학)에 교환교수로 와 계셨는데 그 집에는 젊은 학자들이 많이 드나들었었다.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식사 때 사모님이 차려 주시는 한국 음식 때문에 더 자주 드나들지 않았었나 생각된다. 두 분 모두 안동 분으로서 사모님은 전통적인 우리 음식을 잘 만들어주셨다. 그런데 다른 음식은 몰라도 김치 맛에서만은 솜씨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당시에는 그것이 배추나 고춧가루가 우리 것이 아니라서 그런 줄 알았다. 사모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다른 나물이나 전 같은 것에서는 한국에서와 별반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는데 왜 하필이면 유독 김치만이 그렇겠는가 말이다. 역시 김치를 담는 그릇 탓인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우리 전통 옹기는 굽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가마에 연기를 아주 많이 발생시켜 옹기의 살 속에 연기가 파고들도록 만든다. 이것을 옹기장들은 '연을 먹인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표면에 부착된 그을음은 물이 새는 것을 막아주고 항균 작용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공기는 통한다. 김치 동이에 옹기가 좋은 이유는 바로 이 통기성과 항균성에 있다. 무엇보다도 옹기의 태토가 우리 흙이다. 일본에도 옹기가 있고 중국에도 옹기가 있다. 그러나 일본 흙이나 중국 흙으로 만든 그릇으로는 우리 김치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 근자에 옹기에 재유(灰釉)를 바르는 과정에서 광명단(光明丹)을 많이 섞어 썼었다. 사람들이 모르고 반지르르하고 태깔 좋은 옹기를 찾다 보니 옹기장들도 그런 물건을 만들었던 것이다. 옹기에 산화납 성분이 들어있는 광명단을 발라 구우면 더 낮은 온도에서 소성되므로 연료비도 절감되고 표면도 깨끗해져서 옹기장들은 일거양득인 셈이다. 그러나 광명단 속에 들어 있는 납 성분은 옹기의 표면을 막아버려 통기가 되지 않게 하고 김치에 들어있는 산에 계속 녹아나므로 우리 김치를 그야말로 죽음의 음식으로 만들어버리게 된다. 요즘 와서 옹기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고, 또 광명단을 써서는 안 된다는 소비자들의 인식이 보편화되어 감에 따라 옹기장들도 재유로만 시유한 물건들을 내놓는 경향으로 바뀌어가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런 문제는 비단 옹기에서만이 아니라 도자기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도자기를 굽는 사기장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태토에 관한 연구이다. 즉 우리 흙의 성질에 대한 연구이다. 그리고 그 흙과 불과의 관계를 제대로 알아내야 한다. 그 다음이 조형성이다. 우리 흙에 대한 연구가 투철하지 않은 상태에서 과거 명품의 모양이나 색깔을 그럴듯하게 뽑아내는 데에만 골몰해서는 안 된다. 그런 물건들로 명장 소리를 듣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 차인들은 그런 그릇들에 차를 마셔보면 바로 안다. '신토불이'. 많이 들어서 다소는 식상한 감도 있지만 흙의 중요함을 드러내는 데에 이만한 표현도 드물 것이다. '주역'에 흙을 찬양하는 말이 있다. "지극하도다, 흙의 근원이여. 만물이 모두 이에 몸 받아 태어나나니 곧 하늘의 명을 순하게 잇는 바로다(至哉坤元, 萬物資生, 乃順承天)." 흙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사기장은 어머니의 살을 만지는 사람들이다. 그가 하는 일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
빛깔이 매우 검은 차탕은 비취색의 청자에 잘 어울려
다기로 쓰는 도자기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청자와 백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르를 이루는 것이 분청이다. 청자는 기술적인 면에서 인류의 도자사에서 획기적인 발명품이다. 인류는 대략 기원 전후하여 토기를 1000도 이상에서 구워 경질의 토기를 만들 수 있었다. 경질토기는 이전의 연질토기에 비해 단단하여 잘 깨지지 않고 수분을 함유하고 있는 내용물을 담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단단하기에서 완벽을 기하였다고는 볼 수 없었고 또 음식물에 흙냄새가 배는 것도 면할 수 없었다. 1300도 이상에서 구워지는 청자는 토기가 안고 있는 이런 점들을 말끔히 일소할 수가 있었으며, 아울러 색채나 형태면에서도 새로운 도자 예술의 경지를 개척해 냈다. 특히 시원스레 푸른 비취빛은 당시의 동양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옥빛이어서 더욱 아낌을 받았다. 중국의 당대나 우리나라의 신라대는 대체로 자차법(煮茶法)의 다법을 구사하고 있었는데, 차 가루를 끓는 솥에 넣고 죽처럼 끓여낸 차탕은 그 빛깔이 매우 검어서 흰색의 백자보다는 비취색의 청자에 훨씬 어울렸다. 기원 9세기의 중국에서는 월주(越州)에서 초기 청자를 생산했고 형주(邢州)에서는 백자를 생산했다. 당시 일반인들은 백자에 더 경도되어 있었던지 육우는 '다경'에서 차에는 백자 보다 청자가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강력히 변론하고 있다. 중국의 청자는 송대에 이르러 완정(完整)해졌다. 송대의 청자는 형태면에서 완벽하다. 이때의 완벽이란 말이 어떤 개념으로 이해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딱히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늘 송대 청자의 모습에서 완전무장을 하고 버티고 앉은 무장(武將)의 모습을 연상한다. 엄격하고 비장하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盛裝)을 한 왕비와 같이 아름다우나 위엄이 서린 모습이거나, 아니면 그의 앞에 조아리고 있는 궁인(宮人)의 엄숙함을 본다. 아래 위의 비례나 좌우 대칭형의 형태가 나무랄 데 없기는 하나 숨이 막힌다. 고려의 청자는 이에 비해 훨씬 부드럽다. 전체적인 자태에 균형이 잡혀있으면서도 뭔가 모를 일탈이 있다. 그래서 고려청자의 앞에 서면 숨쉬기가 훨씬 쉬워진다. 송 청자가 정태적이라면 고려청자는 동태적이다. 송 청자는 가만히 앉아서 2등이라도 하려고 하는 정치력을 감추고 있다면 고려청자는 실없이 말을 걸어오기도 하고 스스로 망가지기도 하는 칠뜨기 같은 푼수다. 그래서 인간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까닭없이 좋은지도 모른다. 고려의 도공들은 중국으로부터 기술은 가져왔으나 예술성은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색채도 초기에는 흙빛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해 탁했으나 나중에는 고려의 하늘처럼 훨씬 맑았다. 뿐만 아니라 고려인들은 상감기법을 발명하여 기술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상감은 원래 목제나 철제의 그릇에 명문(銘文)할 때 쓰던 기법이었는데 이것을 도자기에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목재나 철제에 상감을 하는 것과는 완연히 다른 기술력을 요구하는 것이 도자기 상감이다. 왜냐하면 도자기에서의 상감은 도자기 몸체의 태토와 상감에 쓰이는 흙, 그리고 유약이라는 각기 다른 세 가지 무기물질이 1300도라는 고열 속에서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가에 대한 완벽한 이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고려의 도공들은 기술력과 예술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참으로 절묘하게 붙잡은 당시 세계 최고의 명인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감기법을 고안했던 고려 도공의 후예인 조선 도공들은 일본인들이 '미시마(三島)'라고 부르며 환호했던 빗살무늬 상감 기법의 사발을 만드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것이다. 고려의 도공들은 제 살을 파고 넣는 이 상감 기법에 다양한 아름다운 문양들을 새겨 넣었는데, 그 아름다움에 취한 1940년대의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는 그의 '청자부(靑磁賦)' 시의 첫 연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선(線)은 가냘픈 푸른 선은 아리따웁게 구을러 보살(菩薩)같이 아담하고 날씬한 어깨여 사월 훈풍(薰風)에 제비 한 마리 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 |
그 자체로 맑고 깊은 백자, 무엇인들 담아 좋지 않으리, 무한한 색이 함축된 흰빛 투박한 듯 둔하지 않은 두께
물리지 않는 그 깊음이 좋다
나는 가끔 가슴이 허하면 박물관에 간다. 주로 백자를 보기 위해서다. 나는 딱딱한(?) 철학 책을 읽다가 감성이 무디어지면 과감하게 책장을 덮고 흙의 나체를 보러 간다. 젊을 때는 문학책을 봤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과 감정이입이 되어 울고 웃다가 본래의 따뜻함을 되찾게 되면 다시금 철학책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요즘엔 박물관으로 가서 옛 그릇들을 본다. 한없이 보아도 물리지 않는다. 특히 백자의 은은한 유백(乳白)의 빛깔과 고즈넉한 자태를 보면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물아무간(物我無間), 이럴 때 그릇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도 없다. 조선 초기의 사대부 화가 강희안(姜希顔)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를 보면 한 노인이 시냇가 언저리에 엎드려 흘러가는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무념으로 물을 관(觀)하는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정(靜)'의 영역이 얼마나 깊은 곳인가를 느낄 수 있다. 나는 박물관에 가서 그렇게 백자를 본다. 그림 속의 노인과 비교할 수야 없겠지만 백자를 보는 동안에는 나도 정(靜)의 세계에 가있다. 그런데 문제는 다리가 너무 아프다는 것. 박물관을 다녀온 날에는 어김없이 발을 뜨거운 물에 담근다. 그럴 때마다 내가 작정하는 것이 하나 있다. 다음에 박물관에 갈 때는 꼭 휠체어를 하나 준비해야겠다는 것이다. 휠체어에 앉아서 보면 다리도 아프지 않을 것이고 눈높이도 그릇을 바라보기에 딱 알맞은 위치에 있게 될텐데, 그런데도 이 일만은 아직 실천에 옮기지를 못하고 있다. 백자는 이론적으로 볼 때 가장 완전한 도자기이다. 여러 종류의 도자기 중에서 가장 순수한 카올린으로 번조(燔造)된 것이기 때문이다. 백자는 깨끗하다. 이 깨끗함을 극대화하고 싶은 요량에서인지 근자에 일본 사람들이 순수 카올린을 정제하여 1600도에서 구워낸 슈퍼 세라믹 백자를 내놓고 있는데 살빛이 너무 창백하여 그윽한 맛이 하나도 없다. '불 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흙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초정(艸丁) 김상옥(金相沃)은 '백자부(白瓷賦)'에서 이렇게 읊었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백자를 '얼음같다'고 표현한 데에는 그것이 아무리 시어라 하더라도 나로서는 수긍할 수 없다. 조선백자의 색은 쌀뜨물 같은 색이다. 흰빛이긴 하지만 아무런 색이 없는 흰빛이 아니라 무한한 색이 함축된 흰빛이다. 이런 색을 어떤 말로 나타내야 할지 막연하지만 현백(玄白), 혹은 현소(玄素)쯤으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하고도 생각한다. 현(玄)이란 원래 검은 빛을 일컫는 말이긴 하지만 실상은 표면의 색이 검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푸른 하늘이나 깊은 연못처럼 맑음이 쌓이고 쌓이면 저절로 생기게 되는 깊음을 의미하는 색이다. 조선백자의 색도 바로 그런 깊음의 흰빛이기 때문이다. 조선백자는 형태면에서 대개는 어딘지 모르게 약간은 파형적(破形的)인데 그 모습 그대로 정말 순박하다. 더구나 약간은 탁한 흰빛이어서 더욱 그러한지도 모른다. 거기에다가 둔탁한 붓끝으로 청화(靑華)나 철화(鐵華)를 가한 그 어둔한 필치 하곤…. 그런데 정작 내가 조선백자에서 눈여겨보는 부분은 그릇 두께이다. 나는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은 그 두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나는 조형성이나 색택은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의 용(用), 두께는 체(體)라고 보는 것이다. 조선백자는 다른 나라의 백자들에 비해 조금 두꺼운 듯하다. 맵시도 날렵하지 않다. 그런데도 절대로 바보스럽게 둔하지는 않다. 나는 백자의 날렵하지 않으면서도 둔하지 않은 바로 그 두꺼움을 사랑한다. 나는 백자를 보는 동안에는 항상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지배당한다. 예전에 나는 '논어'의 '안연편'을 읽으며 울었던 적이 있다. '맹자'의 '우산지목장(牛山之木章)'을 읽으며 가슴이 억하여 심금을 놓았던 적도 있다. 모두 옛날에 살다 돌아간 못된 영감들 때문이다. 그분들의 육신은 지금은 티끌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천년도 더되는 세월을 건너 오늘 살아 있는 나의 가슴에 이렇게 불을 지피는 이치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참으로 마음이란 물건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다. 요즘은 나는 박물관에 가서 울고 온다. 이번에는 백자 때문이다 |
'왕후의 청자'와 '선비의 백자' 사이엔 '민초의 분청사기'가, 자유분방하고 투박한 멋 다양한 뉘앙스 풍겨내
어떤 차를 담아도 어울려
차를 마시다가도 분청사기를 대하면 나는 마음이 매우 복잡해진다. 나는 오늘날 우리의 차 문화를 애호하는 사람들은 이 분청사기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청사기는 청자의 시대에서 백자의 시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산물이다. 대략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치는 시기이다. 말기의 고려조는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 했고 초기의 조선 또한 체제나 문물을 아직 명료하게 확립하지 못한 어수선한 시기였다. 고려의 청자 관요(官窯)는 문을 닫으려 했고, 조선의 백자 관요는 아직 문을 열지 못했다. 이때 민요들이 독자적으로 만든 것이 분청이다. 분청사기는 대략 14~15세기에 청자의 태토 위에 백토니(白土泥)를 상감하거나 분장(粉粧)하여 흰색의 그릇을 만들어내면서 시작됐다. 나중에 백자가 자리를 잡게 되자 초기의 분청은 소멸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기의 도공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이 시기 분청 도공들은 청자나 백자를 모방한 짝퉁 관요 물건을 생산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 짧은 기간 동안 분청을 만든 도공들은 초기에는 상감(象嵌), 인화(印花) 등의 기법을 썼고, 조금 지나서는 조화(彫花) 박지(剝地) 등과 같은 표면을 입체적으로 가공하는 기법들을 개발했으며, 나중에는 철화 귀얄 덤벙 같은 기운생동(氣韻生動)하는 채회의 기법들을 다양하게 구사했다. 적어도 이들은 진짜 예술가들이었다. 이들은 당대에는 물론 이후로도 영영 중국이나 일본에서 만들지 않은 진정한 우리식 도자기를 만들어냈다. 분청은 청자·백자와는 달리 단색의 도자기가 줄 수 없는 깊고 다양한 뉘앙스가 가져다주는 회화성에서 더 한층 독특한 예술성을 드러낸다. 또한 청자·백자와 같은 관요 물건들이 비교적 전아하고 절제된 형태미를 지니는 데에 비해서 분청은 민요(民窯) 자기로서의 자유분방함과 투박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뒤에 백자가 대종을 이루자 분청은 사라졌지만 현대에 와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이것은 분청의 독특한 미감이 현대인들의 감각에 오히려 부합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분청사기는 서민들의 그릇이라고 분류한다. 청자가 왕후(王侯)의 그릇, 백자가 선비의 그릇이라면 분청은 민초의 그릇이다. 청자에는 짙은 색차가 어울리고 백자에는 연하게 우려낸 녹차가 제격이라면 분청에는 어떤 차를 담아도 어울린다. 연회색이 주조가 되어 아련하게 여러 가지 빛깔이 서리는 분청사기의 느낌은 정말 따뜻하다. 나는 갓난아기의 강보나 침구 등을 핑크나 노랑 등의 서양식 색상이 아닌 우리 분청사기의 바탕색이나 문양 등으로 장식하면 어떨까 하고도 생각한다. 오리는 알에서 부화되어 나와서 맨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믿는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이라고 해서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분청의 아름다움을 우리 민족의 보편적 정서로 삼고 싶은 것이다. 분청은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일본 차인(茶人) 사가라 토시아키 선생을 만나 차 한 잔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는 현재 한국에 와서 일본 무사류 다법을 제대로 소개하고 있다. 나는 이런저런 얘기 끝에 다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얘기를 했다. "일본의 도자 문화는 500년을 이어왔으나 한국의 도자 문화는 한때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하다가 근자에 와서 가까스로 다시 불씨를 지피는 수준이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현대의 도자기는 일본 것이 당연히 나아야 할텐데도 일본의 아리타(有田)나 하기(萩) 등의 여러 가마들을 다녀본 결과 내가 보기로는 도자기는 역시 한국 도자기였다. 이것은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가지는 편견인가?" 사가라 선생은 고수이므로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하는 것이 더 진심이 통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한국인의 피에는 도자기를 잘 만드는 디엔에이가 들어 있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따를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도자기를 잘 사용하는 디엔에이는 일본인들이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역시 고수였다. 도자기를 만드는 사기장은 한국의 사기장이 우수하지만, 그것을 다기로 사용하는 문화적 안목은 일본의 차인들이 한 수 위라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부아가 치밀었다. 우리나라 차인들이 생각해야 할 것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말도 탈도 많았던 '이도 찻사발' 비밀은 아직도 베일속, 일본 초기 차인들 각별한 사랑
한국인 스스로가 진가 외면…원래용도·이름유래 설왕설래
우리 도자사에서 가장 주목을 많이 받았고, 또 억측과 비판도 가장 많이 낳았던 그릇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이도(井戶) 찻사발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황토로 빚은 비파색의 연한 표면색,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구워진 한 없이 연한 느낌의 이도 찻사발은 그 이름부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베일에 가려있다. 이도가 처음 만들어진 것도 분청과 비슷한 시기인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민요에서라는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어느 지방에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진주·사천·하동 쪽이 유력시되고 있고 진해 쪽에서도 의견을 내고 있는 정도이다. 이도 사발은 일본의 초기 차인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물건이다. 16세기경 일본의 최고 통치자들은 전국을 통일한 후 정치적인 화해를 도모할 목적으로 대규모 차회를 곧잘 열었었다. 그러나 차회의 목적 자체가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회장(會場)의 분위기 또한 호화로운 장식이나 금옥(金玉)의 기물들로 조성했고 사용된 차 그릇도 색상이 진하고 화려했다. 이때 각광을 받았던 그릇은 송나라의 흑유(黑釉) 찻사발들이었다. 검은색의 표면에 별이 반짝이는 듯한 찬란한 요변(窯變)의 빛깔을 자랑하는 천목(天目) 찻사발은 단연 이 자리에서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초기 차인의 한사람이었고 진정한 일본 다도의 개조(開祖)로까지 불리는 센리큐(千利休)는 이런 찻자리는 진정한 다도의 정신이 깃든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조용하고도 적조한 분위기의 '와비'의 차를 권고했고, 이런 분위기에는 조선의 이도 찻사발이 적격이라는 것을 표방했다. 번쩍이는 흑유 찻사발에 일으킨 연록색의 말차의 빛깔은 그 자체 강렬한 대비를 이루어 화려한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한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움은 다도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이도 찻사발에 말차를 이루어보면 같은 연록색의 차라도 이도의 은은한 비파색과 어울려 한없이 부드럽고도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천목과 이도는 단순히 하나의 찻사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일단 이들 찻사발이 찻자리의 중심에 자리를 잡으면 기타의 기물들이 이 찻사발의 캐릭터에 맞추어진다. 다음으로 그 찻자리에 참석하는 주인과 손님의 입는 의복이나 손에 쥐는 물건들의 종류와 성질이 맞추어진다. 다음으로 차실(茶室)과 주변경관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와 같이 천목과 이도는 단순히 하나의 그릇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들은 각기 다른 다도의 세계를 대변하는 기물이요, 각기 다른 미학의 체계를 의미하는 상징물인 것이다. 같은 동양 문화라고 하지만 여기에서 중국 문화와 한국 문화의 특징이 어떻게 다른지가 현저하게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나는 이도를 일본 다도의 중심 자리에 놓은 센리큐의 안목을 존중한다. 센리큐는 일본인이면서 한국의 사발을 일본 다도의 중심에 놓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이 부분을 한국 차문화가 세계화한 첫 번째 계단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우리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약삭빠른 일본인들만이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한국인 스스로도 자신들이 만든 그릇의 진가를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볼 줄 아는 눈을 갖추기만 하면 우리 그릇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도 찻사발의 원래 용도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논의도 설왕설래다. 그것이 원래는 밥사발이었다느니, 제기(祭器)였다느니, 원래부터 찻사발이었다느니 등등. 일본의 차인들은 이도를 잡기(雜器), 혹은 막사발이었다고 강변한다. 한국인들은 그것을 막사발로 만들었지만 그 그릇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찻그릇으로 쓴 것은 자기네이기 때문에 이 그릇들은 자기네 그릇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인이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의 재능을 알아 본 이는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 아이를 일본 아이라고 우기는 식이다. 나는 이도의 처음 용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그 정도의 안목이 없었다면 그 정도의 그릇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도의 원래 용도 역시 찻사발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설령 이도의 원래 용도가 혹 찻사발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사발을 만든 사람의 눈이 어디로 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물건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안목만큼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서 나는 일본 차인들의 생각과는 견해를 달리한다. |
이름까지 붙여 인격체로 존중했던 일본인의 유별난 찻잔 사랑, 조선 찻사발 '기자에몽' 국보로 그들의 약탈행위는 용서 못하나
사물 대하는 자세는 존경할 만
일본의 차인들이 조선 찻사발을 얼마나 애지중지했던가 하는 것은 사발들에 이름을 붙여 불렀던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하나의 사발에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는 것, 이것은 사발을 인격체로 존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발을 보는 행위를 배견(拜見)이라 한다. 조아려 알현한다는 뜻이다. 꿇어앉아 무릎 높이로 사발을 경건하게 들고 마치 절을 하듯이 한껏 몸을 낮추어 대하는 모습은 그 자체 겸양과 공순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자세로서 아름다운 마음의 발로로 보이기까지 한다. 美가 그릇 자체에 있느냐 보는 사람에 달렸냐를 두고 日서 논쟁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보면 '길들인다'는 표현이 있다. 어린 왕자와 여우가 만나는 장면에서인데, 이 세상에는 수많은 여우가 있고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서로 길을 들이면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발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사발 가운데에서 '길들인' 나의 사발을 하나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차 생활에 또 다른 차원의 경계를 펼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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