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 들고 음미하고 싶은 고즈넉한 빈 자리가 마음을 끈다. 제공=사진가 이경순 | |
차 달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그릇을 씻고, 물을 준비하고, 불을 피우고, 그리고 단정히 앉아 천천히 차를 달인다. 차를 달이는 일은 매우 간단한 일이고, 필경에는 소소한 물일에 불과한데도 이 일이 그렇게 즐거운 까닭은 무엇일까? 차를 마시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다니까 그런 보건 기능을 생각하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져서일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다.
고려 말의 포은(圃隱) 정몽주는 '돌솥에 차 달이며'(石鼎煎茶)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 시를 보면 그도 얼마나 차 달이는 일을 즐겼던 가를 알 수 있다.
'나라에 보답할 공도 없는 늙은 서생/ 차 마시는 버릇만 들어 세상 물정 모르고/ 구석진 방에 홀로 누워 눈보라 치는 밤/ 즐겨 듣노니 돌솥의 솔바람 소리(報國無效老書生 喫茶成癖無世情 幽齋獨臥風雪夜 愛聽石鼎松風聲)'.
포은이 왜 나라에 공이 없는가. 그는 고려 왕조의 마지막 한 시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왕조와 자신의 명운을 함께 했던 이가 아닌가. 그러한 대재상 정몽주도 집에 들어서는 혼자 차 달이는 일을 즐겼던 모양이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구석진 방에서 눈 오는 밤 홀로 돌솥에 물을 끓여 차를 달이는 모습, 이것이 바로 정몽주라는 인간의 가장 사적인 면모가 아닐까. 차가(茶家)에 "차는 홀로 마시면 신령스럽고, 손님이 둘이면 뛰어나고, 서너 사람이면 아취가 있고, 대여섯 사람이면 범범하고, 일고여덟 사람이면 그저 베푸는 일쯤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에 비추어 본다면 정몽주는 차를 제대로 마실 줄 아는 양반이다.
차를 달이면 사물의 진면목에 다가가게 된다. 차를 달여 보면 물이 그냥 물이 아니고, 불이 그냥 불이 아니다. 사물에는 깊은 내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차의 맛을 어떻게 하면 잘 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많이 달이다 보면 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차의 맛이란 것이 달거나 쓰거나 하는 어떤 특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담담한 맛일 뿐이다. 이러한 담미(淡味)에서 제대로 된 맛을 알아 볼 수 있으려면 역시 드러나지 않은 맛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온갖 맛이 다 갈무리 되어 있는 담담한 맛 이것이 바로 진짜 맛이다.
중국 남송대(南宋代) 나대경(羅大經)의 '약탕시'에는 "주위 사람 모두 잠들기를 기다려, 한 사발 끓인 춘설차는 제호(醍醐)보다 낫다(待得聲聞俱寂後 一 春雪勝醍醐)'는 표현이 있다. 고작 맑고 담담한 춘설차(春雪茶) 한 잔을 우유로 가공한 요구르트나 치즈 보다 맛이 진하다고 한 나대경의 감식안 또한 범상하지 않다.
일본의 전국시대에는 전쟁이 잦았다. 무사들은 전투가 있는 날 아침 어전에서 작전회의를 마치고 말차 한 잔씩을 했다. 전투에 임하면 살아서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그 한 잔의 차에는 아마도 생명을 확인하는 의미가 들어있었을지도 모른다.
당대(唐代)의 노동(盧仝)은 차를 한 잔 두 잔 하다 일곱 째 잔쯤에 이르면 겨드랑이에서 바람이 솔솔 일어난다고 한다. 저절로 날개가 돋아 상천계로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청대(淸代) 양주(楊州) 팔괴(八怪)의 한 사람 정섭(鄭燮)은 "강물 길어 햇차를 달이고, 청산을 병풍으로 삼았네"(汲來江水烹新茗, 買盡靑山當畵屛)라 하고, 조선말의 차승(茶僧) 초의(草衣)는 "오직 흰 구름과 밝은 달만을 두 손님으로 허락한다(惟許白雲明月爲二客)"고 했다. 유자(儒者) 추사(秋史)도 "명선(茗禪)"이라는 말을 썼다. 모두 차 달이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제대로 본 양반들이다.
아무리 도시의 아파트 숲속에 마련한 작은 찻자리일지라도 차를 달이는 그때만은 "청산녹수가 나의 집"(靑山綠水是我家)이 된다. 이 세상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치는 차를 달여 보면 저절로 터득하게 된다. 다도(茶道)는 심도(心道)이다. 차 달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