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최영교_전쟁과 시장_10

醉月 2011. 5. 1. 08:22
<46> 시장에 대한 국가의 역할
위기의 자본주의, 국가여 할 일을 하라
근대화시대 산업개발의 주역은 군과 관이었다
수렁에 빠진 미 금융시장은 사실상 국유화 단계로 옮아가고 있다
산은 민영화에 매진하는 정부 세계의 흐름에 역행하려는가

    지난 9월15일 영국 런던의 한 근로자가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 사무실에서 짐을 챙겨 나오고 있다.

 

미국의 금융 시스템은 리먼브라더스의 부도 이후 전례없는 혼란을 겪고 있다.
"저희 모기지회사에서 집을 살 수 있도록 돈을 빌려드립니다. 1~2년은 이자가 2~3% 밖에 되지 않습니다." "처음은 아주 싸네요! 하지만 3년 후 7~8% 이상의 고이자가 되면 꼬박 꼬박 이자 넣는 게 힘이 들겠는데…." "아니, 고객께서는 우리에게 돈을 빌려 그 집에 아주 눌러 앉으시려고요?" "아, 요즘 집값이 오르고 있으니까. 싼 이자로 집을 사서 2년 이내에 빨리 매각을 하면 되겠네요." "바로 그것입니다."

미국 중산층은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모기지) 집을 장만했다. 그런데 2002년 전후로 모기지 대출업체들이 신용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도 돈을 빌려 주었다. 모기지 회사들은 집값을 올리면서 많은 고객을 확보했다. 위험에 대한 경고가 거듭 있었지만 그때마다 정치 논리에 밀렸다. 집값 폭등의 최대 수혜자가 서민들이었다.

모기지 업체들은 돈을 빌려준 채권(모기지)을 저당으로 잡힌 다음 이를 다시 별도의 증권으로 만들었다. 철수에게 1만 원을 빌려준 문서로 증권을 만들어 시장에 또다시 유통을 시킨 것이다. 빌려준 돈을 받기도 전에 또 돈을 굴린 셈이다(모기지저당증권·MBS). 돈을 받을 가능성이 떨어지는 불량채권을 저당 잡혀 만들어낸 증권은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불량채권을 우량채권에 끼워서 찌게를 만들었다. 위험도가 서로 다른 여러 채권을 섞어서 담보로 잡힌 뒤에 이걸 가지고 증권을 만들어 팔았다(부채담보증권·CDO). 위험은 분산된 것이 아니라 감염되었다. 결국은 증권 자체가 부실이 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2007년 7~8월).

금융기관들의 부실이 커지자 채권보증회사마저 수렁에 빠진다. 미국 2위의 채권보증업체 암박(Ambac)의 주가가 70%나 급락했다(2008년 1월). 안 떼인다고 보증을 받은 채권도 돌려받지 못 할 수 있게 됐다. 오로지 현금만을 믿으면서, 금융기관 사이에도 돈이 돌지 않는 '신용경색'이 시작되었다. 사태의 가장 핵심부에 자리한 것은 고위험, 고수익의 파생금융상품을 집중적으로 유통시키는 투자은행이었다. 천문학적인 파생상품을 주무르던 리먼의 파산 이후 글로벌 금융시장은 아무도 믿지 않는 불신의 시대로 돌입했다(2008년 9월 15일).


"내일은 또 누구의 차례인가?"

현재 미 정부는 7조 달러에 가까운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했다(11월 26일 CNN). 미국 GDP의 절반 규모다. 최근 미국 2위 씨티은행 그룹의 부도 위기까지 내몰렸고 자금을 수혈 받아야 했다. 문제는 이 위기의 끝을 아직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달러를 쏟아부어도 위기가 해소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절망감에 빠져있으며, 파산한 리먼브러더스나 국유화된 AIG그룹 등의 경영진들이 고액의 퇴직금을 받고 떠났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경영자의 지나친 탐욕이 불러온 위기를 국민들 세금으로 보완했다. "이윤은 사유화되고 손해는 사회화되었다!"

자본주의의 병폐에 대한 신랄한 지적이 있다. "자본주의 제도가 성숙함에 따라 진정한 기업가 정신은 영리추구에 현혹되어 타락하기에 이르렀다. 즉 기업지배계급의 불합리한 이윤 획득과 낭비가 심해졌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배당, 자사주가의 조작, 과대한 중역의 상여금, 과다한 주주배당금 등이 나타나고 있다." 비판의 주인공은 현재 사람이 아니다. 1929년 미국에서 일어난 대공황을 목도한 미야자키 마사요시였다.


    이시하라 간지 일본의 만주에 대한 계획경제

러시아에 두 번의 유학을 다녀온 미야자키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조사과의 러시아반의 조사원이었다. 러시아에서 혁명을 직접 경험한 그는 마르크스에 정통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 미야자키는 마르크스가 지적한 '경제에 대한 국가의 중요한 역할'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 미야자키는 뜻을 함께하는 소중한 동료, 이시하라 간지를 만났다. 그는 일본육사를 나온 엘리트로 1923년 1차대전의 상흔이 남아있는 독일에서 유학을 했다. 그 전쟁은 전투기와 탱크가 투입된 인류 최초의 전쟁이었다. 그는 전쟁을 결정하는 것이 공업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공업연료와 공작기계 등을 잠재적 적국인 미국으로 수입해야 했다.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1차 대전 후 서양의 문명 중심은 미국으로 옮겨간다. 결국 일본은 미국과 결전을 하게 될 것이 틀림이 없다. 이 전쟁은 공군에 의한 결전으로 틀림없이 인류 최후의 전쟁이 될 것이다." ('전쟁사 대관')

그는 미국과 장기전을 수행할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일본의 경제력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1928년 관동군 참모로 만주 땅을 밟았던 이시하라 역시 1년 후 미국이 공황과 경제 파탄을 보았다. 그 여파가 일본에까지 밀려와 심한 불경기를 앓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세계 경제 대공황의 고리에서 벗어나 일본을 강국으로 만드는 방법을 생각했다.

"우선 일본과 한국 만주를 하나로 묶는 내수시장을 만들어 자급자족을 해야 한다. 경제구조를 조선, 자동차, 철강 등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학 공업으로 개조해야 한다."('전쟁사 대관')

1931년 이시하라는 일본의 만주를 점령을 기획하고 주도했다. 10월 진저우를 폭격하고 만주 남부를 점령한 후 11월에는 치치하얼 점령하였으며, 동북3성 전역을 장악했다(만주사변). 병력과 군수품을 만주 전역에 운송한 만주철도회사가 일본 관동군의 유용한 발이 되었다면 점령한 만주를 일본 한국과 함께 경제블록화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브레인 역할을 한 것이 만철내의 조사과였다.

미야자키와 이시하라는 만주를 대대적인 중공업 군사기지로 만들어낼 계획을 입안했다. 만주의 철과 석탄을 활용하여 철강 산업을 일으키고 석탄 액화로 석유화학 공업을 발흥시킨 뒤, 소재산업을 기초로 해서 철도망과 도로망을 정비 확충하고 자동차와 기계 산업을 육성하며 나아가 항공기산업까지 키운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것을 추진하는 방법은 만철 조사과를 싱크탱크로 삼고 일본에서 파견된 관료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등을 손발로 삼아 관동군 참모부가 산업개발을 위한 통제의 전권을 쥐고 추진하는 하향식 방식이었다. 하지만 산업 전체를 통제한 것은 아니었다. 섬유나 잡화 등은 제외시켜 자유경쟁에 맡기는 등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 1937년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이 야심차게 실행되었다.

1940년 4월 박정희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관동군이 주도하는 만주의 경제정책을 목격했다. 그가 집권한 후 경제기획원을 만들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한국의 공업화에 숨결을 불어 넣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고바야시). 계획의 추진자가 군인이었다는 점도 만주와 유사하다. 만주에서는 관동군, 한국에서는 박정희 장군과 그 부하들에 의하여 산업개발이 추진되었다. 관료를 손발로 활용했다는 점과 중요한 결정은 군 수뇌부나 군 출신이 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이시하라의 실험국가 만주국을 이어받아 완성했고, 전후 일본 수상을 역임한 일본 정계의 거물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대통령의 친분은 누구보다 두터웠다. 기시는 그가 이루어낸 만주산업개발에 한없는 애착을 느꼈고, 26년 후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에 매진하는 박정희의 더없는 조언자이며 후원자였다.

현재 미국은 상상할 수 없는 달러를 투입하여 금융기관들을 국유화하고 있다. 앞서 러시아도 국내 중요 석유회사와 금융기관을 대대적으로 국유화 한바 있다. 우리는 반대로 가고 있다. 경제개발시대의 견인차였던 산업은행의 민영화를 추진하는 현 정부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중요한 역할을 포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州鐵道株式會社)= 이른바 만철(滿鐵)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철도 및 부속지를 기반으로 1906년에 설립되어,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중국 동북지방(만주)에 존재한 일본의 국책회사이다. 철도사업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광업 제조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사업을 전개한 복합기업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만주 식민화의 중핵기관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초기엔 다롄(大連), 이후 신징(新京) - 현재의 창춘(長春)에 본사를 두었다. 1945년에 소련에 의해 점령되어 실질적 기능을 상실하였고,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해서 해산되었다.

▶대공황(大恐慌)=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의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대폭락한 데서 시작된 세계공황이다. 공황은 일본·독일 ·영국·프랑스 등 유럽으로 파급되었다. 여파는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배후에는 만성적 과잉생산과 실업자의 항상적(恒常的)인 존재가 현재화(顯在化)되고 있었다. 1933년에는 그 수가 전 근로자의 약 30 %에 해당하는 1500만 명 이상에 달했고, 미국의 공업생산고는 공황발생 이전과 비교하여 44 % 하락하여 1908∼1909년의 수준으로 후퇴하였다. 공업과 농업부문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농산물 가격의 폭락, 체화의 격증을 초래했다. 1931년 오스트리아의 은행 도산을 계기로 유럽 제국에 금융공황이 발생해, 영국이 그해 9월 미국이 2년 후 금본위제를 정지했다.

 

<47> 일본을 부국으로 만든 조선의 기술
일본이 모셔간 조선 제련기술, 총칼이 돼 돌아왔다
정작 자국에선 하찮게 여긴 한 조선인의 은가공 기술이
日로 건너가 히데요시의 강병에 일조했다

    

 

12폭 병풍에 그려진 포르투갈 선박의 나가사키 입항도. 포르투갈은 중국에서 비단 향약 등을 들여와 일본에 팔고 그 대금으로 막대한 은을 받아갔다

"전투에 임하는 자는 개(犬)라고 불리어도 좋고, 축생(畜生)이라고 불리어진다고 해도 좋다.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조창종적화기'·朝倉宗滴話記). 인품의 여하를 막론하고 전투원으로서의 자질이 있는 무사가 제일이었다. 15~16세기 일본은 수많은 나라(國)들로 나뉘어 있었다. 영주, 다이묘(大名)들은 끝이 보이지 않은 전쟁을 계속했다.

장기적인 안목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오늘 당장 승리하지 않으면 내일이 없었다. 승리의 전제는 강병이었고, 강병의 전제는 부국(富國)이었다. 일본의 영주들은 부국강병의 기반이 되는 온갖 수단을 강구했다.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새로운 경작지를 개발했다. 일본 전역에 94만 정보이던 농토가 전국(戰國)시대 말기에 163만 정보까지 늘어났다. 영주들은 전쟁으로 영지를 늘인 다음 세금인 연공미(年貢米)를 팔아서 돈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연공미로 전쟁자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영주들은 은광개발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세계 최대 은광의 발견-이와미긴잔(石見銀山)

혼슈의 시마네현에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었다. 하카다(후쿠오카)의 상인 가미야 히사사다는 영주 오우치의 후원 아래 1526년 3월 긴푸산 허리에서 은을 채굴했다. 이와미긴잔(石見銀山)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영주 오우치가 규슈 공략에 눈을 돌린 1530년 지방의 소영주 오가사와라가 은광을 탈취하였다. 오우치 가문이 이 광산을 다시 찾는 데 3년이 걸렸다. 오우치는 광산주변을 요새화하였다.

하지만 광산에서 채굴되는 은광석에 다량의 납이 함유되어 있었다. 광석에서 은과 납을 분리하는 데 너무나 많은 노력과 돈이 들었다. 오우치 영주는 초조해졌다. "은을 함유하고 있는 광석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제련하는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 생산이 늘지 않아!" 그러던 가운데 조선과 교역을 해왔던 규슈의 하카다(후쿠오카) 상인들이 조선에서 은과 납의 분리법이 이미 개발되었다는 정보를 가지고 왔다.

"조선에 김감불이라는 사람과 그 노비 검동이 소나무재를 이용한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란 것을 개발해냈다고 합니다."(1503년 연산군 9년). 기술은 1533년 하카다의 거상 가미야가 조선반도로부터 초청한 경수와 종단이란 연금술사에 의해 이와미 은 광산으로 들어왔다. 스페인령 멕시코에서는 수은을 이용한 아말감법이 사용되면서 은의 생산량이 급증한 것처럼 조선의 기술은 일본의 은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이와미 1개 광산의 은 생산량이 당시 전 세계의 1/3을 차지하였다. 17세기 초 일본 전체의 은 해외 수출량은 연 200t에 달했다('고바타').


    오다 노부나가.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렇게 평가했다. "노부나가는 명예욕이 강하고 과감한 행동가였다. 전쟁은 썩 잘 하지만, 제멋대로 행동하고 횡포가 심하다. 신불(神佛)은 물론 그 밖의 우상도 모두 경멸하는 자다."
오다 노부나가의 용병

현재 도요타자동차 공장이 집중되어 있는 나고야의 '오와리' 지방에 440년 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라는 영주가 있었다. 그는 '돈으로 움직이는 병사'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영지가 없는 자들도 용병대장으로서 수백을 지휘할 수 있었다. 영주가 농민병을 움직이려면 직위가 높은 신하들이 주변에 포진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합의제가 형성되어 오히려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농민병은 농번기에 들어서면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 씨를 뿌리거나 수확해야 한다. 노부나가 방식의 용병은 씨를 뿌리거나 수확을 하는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된다. 용병은 우범자나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는 행상으로 충원되기 때문에 수가 줄어들어도 얼마든지 보충이 가능하다. 문제는 돈이었다.


 

 

자유시장-낙시낙좌(樂市樂座)

노부나가는 자신이 점령한 지역 시장에 개혁정책을 폈다. 낙시낙좌(樂市樂座)의 자유시장을 개설했다. 은 생산이 늘면서 일본의 상품 유통이 많아지고 넓은 범위에 걸쳐 물자의 흐름이 생겨났다. 하지만 정상적인 유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사원과 공가(천황의 신하) 등의 구세력에게 독점적인 판매권을 부여받은 상인조합(座)에 속하는 상인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 좌석(座席)을 갖지 못하면 시장에서 상행위가 불가능했다. 낙시낙좌는 시장의 좌석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일정의 자릿세만 내면 자유롭게 영업을 할 수 있는 시장이었다. 구시대의 권위가 부정되었다.

자유시장에는 많은 사람이 모였다. 노부나가의 주위에는 혼돈스럽지만 에너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들은 또 엄청난 정보원이었다. 노부나가는 정보가 전국 난세를 평정하는 데 중요한 무기라는 것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의 부하 히데요시(秀吉)는 부랑자 행상 출신이었다.

이후 노부나가는 최후의 거성 아즈치(安土)의 성 아래를 시작으로 오미(近江) 미노(美濃) 이세(伊勢) 호오료쿠(北陸)등에 차례로 자유시장을 열었다. 이어 사카이(界)와 오쓰(大津)의 상업도시를 제압하고 새로운 상업정책을 실시해 막대한 자금원을 창출해냈다. 나아가 그는 사카이, 쿠사츠(草津), 이쿠노(生野)에 있는 은광을 차지하여 부를 쌓았다.

당시 노부나가 소유의 사카이는 일본 최대의 철포 생산지이자 화약의 연료인 초석(硝石)의 수입 항구였다. 초석은 일본에서 생산이 안 되고 중국이나 인도에서 수입했다. 노부나가가 철포대를 투입하여 강력한 다케다(武田)의 기병을 타도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부나가가 소유한 철포병은 사격 후 재장전까지의 시간은 10초 내외였다. 완전 수동인 철포를 탄창 단발 화기에 가까울 정도로 훈련을 시켰다. 최대의 숙적 다케다 군과의 전투에서 철포병의 운용은 획기적인 면을 보여 주었다. 3000명을 1000명씩 3줄을 만들어 기마병의 진군 속도에 맞추어 1대가 사격 후 뒤로 빠지고 그 다음 후속대가 사격을 하는 식으로 재장전의 타이밍을 최소화하여 다케다의 1만의 기마부대를 괴멸시켰다(1575년). 이로써 노부나가는 전국시대 일본 통일의 길을 열었다.

일본에서 노부나가가 오와리의 영주자리를 놓고 혈육들과 내전을 치를 무렵 조선에서는 미래의 왕이 될 사람(선조)이 태어났다(1552년). 노부나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떠돌이 장사꾼들을 자신의 수하로 고용하여 거대한 호수(비파호)를 가진 미노국(美農國·오오미)을 점령했을 무렵 그는 왕위에 등극했다(1567년). 노부나가가 돈에 밝은 장사꾼 무리와 무사들을 좋아했다면 선조는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과거에 합격한 독서인(사대부)들을 대거 등용했다.


기술을 경시한 조선

선조가 즉위한 후 사림이 조선의 중앙 정계를 장악했다. 말 많은 지식들은 당(黨)을 만들었고, 조정은 분열되었다. 1590년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통신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은 서로 다른 동향보고를 했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당을 우선시 했지 국가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노부나가의 부하로 그 뒤를 이은 히데요시는 일본의 은광산과 시장을 모두 장악했고, 1592년 4월 조선에 쳐들어왔다. 20만이란 거대한 병력을 동원한 전쟁비용 대부분은 광산에서 나왔다('프로이스'). 조선에서 들어간 기술이 일본을 세계 최대의 은 생산 국가로 만들었고, 조선침략의 먼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조선은 자국에서 개발된 소중한 기술에 관심이 없었다.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조선에선 이미 그 기술을 잊어버린 듯하다. '하찮은' 상놈과 노비가 만들었던 기술이라 전승이 되지 않은 것일까?

올해 황우석 박사가 중국의 희귀종 사자견을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개 복제에 있어 세계 최고의 권위자인 그는 앞서 줄기세포 사건 후 은둔하고 있다. 현재 당국은 그의 줄기세포연구를 불허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여러 나라에서 그에게 계속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다이묘(大名·대명) = 일본의 막부(幕府)정권 시대에 1만 석 이상의 독립된 영지를 소유한 영주(領主).이들 다이묘는 막부와의 친소에 따라 신판(親藩) 후다이(譜代) 도자마(外樣) 3부류로 나누었다. 그들은 막부가 제정한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엄격하게 준수하여야 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성의 신·증축의 금지, 다이묘끼리의 허가 없는 혼인 금지, 500석 이상의 적재선박 건조 금지, 기독교 엄금 등의 조항이 있었다. 1871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폐지되었다.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 납과 은을 분리하는 기술이다. 용로(鎔爐) 밑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열화(烈火)를 쌓고, 납 조각을 넣은 다음 은 광석을 그 위에 깔고 불을 피운다. 그 위에 소나무를 덮어 불을 붙이면 납이 먼저 녹아 아래로 내려가고 은 광석은 녹다가 갑자기 표면이 갈라져 은(銀)은 위에 모이고 납 찌꺼기(鉛滓)는 재에 스며든다('조선왕조실록' 연산49권 연산군 9년 5월 18일 조).

 


<48> 일본이 전해준 철포(鐵砲·텟뽀-조총)
돈 없이 전쟁 할 수 없는 군비경쟁의 시대를 연 '조총'
새로운 무기와 이를 취득할 경제력의 차이는 전투력의 차이를 극명하게 벌려놓았다
조선의 왕과 문인 관료들은 그 효용을 과소평가해 가공할 무기를 창고에 처박아버렸다

 

  정체 불명의 선박 한 척이 1543년 8월 25일 일본 규슈 남단에 위치한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했다. 남중국 광동을 출항한 그 배는 길이가 45m에 달하는 대형선이었다. 돛줄이 끊어지고, 노가 부러지고, 선창도 크게 손상을 입어 수리하자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승선자 108명은 항만 인근 시온지(慈遠寺)에 출항 때까지 기거하게 됐다. 여기에는 포르투갈인 2명(제이모트와 몬카)이 있었다.

준수한 모습의 소년 토키타카가 시온지에 나타났다. 소년은 다네가시마의 도주(島主)였다. 토키타카는 포르투갈인과 매일 만났다. 어느 날 그는 포르투갈인이 가지고 있던 철봉이 무엇인지 물었다. 포르투갈인은 위력을 보이겠다고 했다. 토키타카는 시온지 뒤편 언덕에 올라갔다. 말뚝을 세우고 그 위에 큼직한 조개껍데기 하나를 올려놓았다. 철봉에다 검은 가루와 둥근 구슬을 집어넣은 다음, 불끈을 끼웠다. 철봉과 조개껍데기의 거리는 50보였다. 불이 철봉의 끝에서 뿜어져 나오고 조개껍데기가 산산이 부서졌다. 토키타카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철포, 상품으로 출시

토키타카는 철포(조총)를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기능과 조작법을 열심히 배웠다. 12일째인 1543년 9월 9일, 토키타카는 철포 시사(試射)를 자원했다. 조준을 했고, 발사와 동시에 표적은 두 개로 갈라져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토키타카는 그동안 궁술을 연마해 왔지만 아직은 미숙한 상태였다. 그런데 철포는 달랐다. 단 한방에 깊은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기서 철포가 가진 전술적 가치를 간파했다.

토키타카는 포르투갈인에게 철포 양도를 요청했다. 총 2자루 값으로 2000냥(현재 가치 1억 엔가량)을 지불했다. 그 돈을 포르투갈인들이 섬에서 가지고 나갈 수는 없으리라. 배 수리비와 시온지에서의 숙박 비용은 무료라고 볼 수 없었다.

다네가시마에서는 철포의 국산화를 위해 섬의 모든 기능이 집중되었다. 일본도를 만들어 온 경험, 감(感), 솜씨는 소용이 없었다. 제1의 난관은 80㎝ 길이의 총열 제작이었다. 결국 짧은 통(筒)을 깎고, 그것을 용접해 하나로 붙였다. 제2의 난관은 총신의 통저(筒底)를 수나사와 암나사로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암나사 깎는 법을 알지 못해 총열의 뒤 마개를 그냥 붙였다. 화약 찌꺼기의 제거가 곤란했다. 도화공(導火孔)이 잘 막혔고, 연사(連射)할 때는 화약재가 타다 남아 불발되거나 폭발의 위험까지 있었다. 결국 포르투갈인에게 아름다운 신부(若狹)를 주고 나사의 구조와 제조방법을 알아냈다.

1544년말 다네가시마에서 약 50정의 철포를 만들어 규슈에 수출을 한다. 최강 사쓰마번의 시마즈(島津)는 화력시범을 한다. 시마즈는 또 이를 쇼군 아시카가(足利)에게 바친다. 토키타카는 샘플을 먼저 돌려 구매력을 확보해놓은 셈이다.

돈 없이 전쟁할 수 없는 시대

  1545년 다네가시마에 체류하고 있던 사카이의 상인이 철포의 구조와 제조법 등을 습득한 후 돌아갔다. 원래 사카이에는 주물사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어 철포의 양산 체제를 만들 수 있었다. 겨우 2~3년 사이의 일이었다.

철포는 돈 없이 전쟁을 할 수 없는 군비 경쟁의 시대를 만들었다. 이전에야 조그만 영주들도 '깡'으로 버틸 수 있었겠지만 이후에는 엄청난 가격의 철포로 무장한 부대를 갖출 만큼의 경제력을 가진 부자 영주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새로운 무기와 이를 취득할 수 있는 경제력의 차이는 전투력의 차이를 극명히 벌려놓았다. 철포는 고가였다. 그 대량생산의 기술과 시스템이 완성된 도요토미(豊臣)의 시대조차 철포는 쌀 9석의 가치였다. 오다 노부나가가 젊었던 시기에는 그 3~4배의 가격이었을 것이다.

1590년 3월 한양. 대마도의 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가 조선 조정에 나타났다. 선조에게 철포를 진상했다. 조선과의 교역에 사활을 걸고 살았던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이 이익이 될 리가 없었다. 철포를 가지고 온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무텟뽀(無鐵砲)의 조선

하지만 조선의 왕과 문인 관료들은 그 효용을 전혀 몰랐다. 철포를 시험 발사한 그들의 평은 이렇다. "발사음이 크고 탄환이 200m쯤 날아갔지만, 50m의 지근거리가 아니면 치명상을 가하지 못한다. 더욱이 비 오는 날이나 습도가 높으면 화약의 조합이 어렵고, 발사까지에 시간이 너무 소요된다는 약점이 있다. 반면 조선의 활은 200m 상거한 적의 가슴을 꿰뚫을 수 있으며 20~30발의 화살을 계속 날릴 수 있다. 철포보다는 연사가 가능하고 숙달된 조선의 활이 더 우수하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요시토시가 선조에게 진상한 철포는 그 후 군기사(軍器司) 창고에 처박혀 버렸다고 한다. 조선의 왕과 관료들은 일본의 철포를 과소평가했다. 일본인들이 철포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보유한 것은 병사들의 훈련시간이 짧았기 때문이며 철포의 보급으로 인해 단기간에 대병력의 양성이 가능했다. 기존의 활은 숙달된 기예를 가지기 위해서는 수년 이상의 기간이 걸린다.

높은 적중도 유지에는 더 긴 세월이 필요하다. 빨리 병력을 보충하고 전투에 배치해야 할 군사 지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철포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기존의 '활+백병전'에서 급속도로 집단 화력전으로 이행됐다. 일본에서 5할이 철포부대였다. 물론 당시 일본의 철포는 세계에서 가장 명중률이 높은 병기가 돼 있었다. 전래 50년 만에 유럽 수준을 능가하는 철포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요시토시는 거듭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다는 정보를 전했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고 수군을 정비한 것도 이러한 정보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왕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무고와 선조의 과대망상이 만들어낸 정여립의 난으로 1000여 명 이상을 학살하는 대참극을 연출한다. 당시 선조는 요시토시가 무려 9개월간이나 서울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침략을 받고서 도입된 철포

요시토시는 조선의 왕과 중앙의 관료들이 일본의 침공을 실감하지 않자 1592년 초 마지막으로 경상도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낸다. "일본군의 조선 침략이 임박했습니다." 그해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이던 어느 왜장이 휘하의 철포부대 500명과 함께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했다(4월 20일). 사야가(沙也可·김충선)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철포와 화약 제조법을 조선군에 전수했다.

"소장이 화포와 철포 만드는 법을 알고 있으니 이 기술을 군중에 널리 가르쳐 전투에 쓴다면 어떤 싸움엔들 이기지 못하리까?" 귀화를 선언한 직후 사야가 김충선이 절도사에게 보낸 서신이다. 다음은 이순신 장군이 보낸 서신에 대한 김충선의 답신이다. "하문한 조총과 화포와 화약 만드는 법은 전번에 조정에서 내린 공문에 의해 벌써 각 진에 가르치고 있는 중이옵니다. 총과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적병을 전멸시키기를 밤낮으로 축원하옵니다."

병리적 이념과 시장의 상극

임진왜란이 끝나고 11년 후 광해군은 일본과 외교를 재개했다. 조선과 교역에 목을 매는 대마도주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그것은 급변한 국제정세 때문이었다. 만주에서 누루하치가 후금(청)을 건국하고 명나라에 압력을 가했다. 임진왜란을 직접 지휘한 광해군은 현실주의자였다. 일본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고, 철포부대 1만 명을 양성했다. 이때가 조선 화력의 최절정기였다.

하지만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밀려나고 조선에 비현실적인 정권이 들어섰다. 그들은 임진왜란 당시 축적된 소중한 전쟁 경험을 모두 사장시켰다. 유능한 자들을 숙청하고 말 잘 듣는 무능한자들을 등용했다. 노골적인 반청숭명(反淸崇明)의 구호를 외쳤다.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도하한 청군이 16일 만에 인조가 숨어있는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20만의 병력이었다. 이듬해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500명과 함께 성문을 나와 삼전도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를 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끌려갔다.

철포는 분열된 일본을 통일시키고(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안정된 나라를 만들어냈다(도쿠가와 막부). 하지만 조선은 임진왜란을 경험하고 또 다시 능욕(병자호란)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명나라를 숭상하는 병리적인 유학자들이 계속 조선을 지배했다. 무인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신무기는 변화를 가져오지만 유학자들의 조선에서는 임란 이후 320년 동안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유학적 이념과 시장은 상극이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 북한은 어떠한가.


▶정여립(鄭汝立·1546~1589)

전주에서 태어났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83년(선조 16)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에 속하였으나, 이이가 죽은 뒤 동인에 가담하여 이이를 비롯하여 서인의 영수인 박순·성혼을 비판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진안군의 죽도에 서실을 세워 활쏘기 모임을 여는 등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했다. 1587년(선조 20)에는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1589년(선조 22) 황해도 관찰사 한준 등이 정여립 일당이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도망했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했다. 동인인 이발 이호 백유양 등이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었다(기축옥사). 그가 대동계를 조직해 무력을 기른 것은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호응하였기 때문이었다.


▶다네가시마(種子島)

일본 규슈(九州) 남단 오스미(大隅) 반도 동남쪽 바다에 떠 있는 섬이다. 동서는 4~10㎞에 불과하지만 남북은 72㎞이나 된다. 면적은 475㎢. 제주도보다는 작지만 거제도보다 큰 섬이다. 현재의 인구는 약 3만5000명.

 

<49> 장사꾼 히데요시와 정치꾼 선조
전쟁의 개념을 바꾼 히데요시
칼과 창이 지배하던 일본 전쟁을 시장장악전, 토목공사로 바꿔놓았다
전쟁에 관한한 히데요시는 능력자였다
왜에 맞선 의병장을 제거하고 이순신을 파직한 선조와 비교되는 이유다

    오사카성의 천수각

 

"이제 칼 잘 쓰고 창을 잘 휘두르는 놈들만 가지고 전쟁을 할 수 없어! 그놈들은 아무생각 없이 연장질만 하려고 드니까. 싸우지 않아도 될 싸움을 하게 되지. 이제는 머리를 쓰는 놈이 필요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 아래에서 영주가 된 이후에 자주하던 말이다. 그는 칼과 창을 잘 사용하지 못했다. 그걸 배워야 할 어린 나이에 계부의 눈칫밥을 먹고 살았고, 집을 나와 시장에서 바늘장사를 했다. 그 시절 일본은 세계적인 은(銀) 광산들이 터졌고, 넘치는 은은 전쟁터를 뚫고 다니는 장사꾼들을 낳았다. 어떠한 위험한 지역이라도 이익이 되는 곳은 찾아 갔다.


장사꾼에서 군인으로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가 개설한 자유시장(樂市樂座)에 자주 갔다. 기존의 자리 세는 없었다. 노부나가에게 일정 세금만 내면 무엇이든 팔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히데요시는 시장을 지배하는 노부나가가 천하를 통일할 인물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히데요시가 16세에 오와리(尾張國)의 다이묘 '오다 노부나가'의 당번병이 되었던 것에는 자신의 의지도 있었다. 그는 미노국(美農國)공격에 유항(誘降)전략(적의 포섭) 구사에 재능을 보였다. 히데요시가 미노국의 이나바(稻葉)산성을 급습했던 때는 그 영주인 도산도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명성(名城)이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앞서 노부나가는 미노국의 배후인 오오미(近江)의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에게 여동생 오이치(お市-요도기미의 어머니)를 시집보내 동맹을 맺었다. 동맹은 1570년 아사이에 의해 파기되었다. 가네가사키에서 노부나가는 아사이의 공격으로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 퇴각 전에서 히데요시는 '신가리'(뒤에 남는 희생부대) 부대장으로 남는다. 동료들은 희생을 각오한 히데요시에게 숙연해진다. 히데요시는 수많은 부하들의 죽음 속에서 추격해 들어오는 아사이 나가마사군을 저지한다.

1573년 히데요시는 아사이·아사쿠라 공격에서 아사이의 가신들과 오오미의 토호들을 배반시켜 오다니(小谷)성을 함락시켰고, 에치젠의 아사쿠라의 부장들도 히데요시의 계략에 내응해 아사쿠라 요시카케(朝倉義景)는 일족에게 공격당해 자멸했다.

    젊은 시절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영국인으로서 최초로 일본에서 생활했던 애덤스는 전국시대 일본을 이렇게 묘사했다. "여기 세상의 끝 동쪽에, 매혹적이지만 우울한 나라가 있다. 일본의 영주들과 그들이 거느린 군대들은 유럽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규모의 전쟁을 벌였다. 수많은 무사들이 전장에 참가했고, 패배한 병사들은 굴욕적인 항복보다는 할복자살을 택했다."

히데요시가 1581년 우리나라의 동해안을 마주보고 있는 돗토리성(鳥取城)을 공략하려고 했을 때였다. 그는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자기 부하들의 엄청난 희생이 따를 것을 직감했다. "내 부하들을 거의 희생시키지 않고 승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식량 매점매석으로 함락시킨 돗토리성

작전에 앞서 수개월 전에 상인들을 불러 공작을 시작했다. "자네들 말이지 돗토리 주변 지역의 곡물을 비싸게 사들이게. 돈은 내가 얼마든지 줌세." "예, 나리" "시가의 몇 배에 달하는 비싼 값에 곡물을 매입하면 사람들이 팔지 않을 수 없을 것이야." 히데요시의 예측은 적중했다. 사람들은 얼씨구나 하고 곡물을 팔았다. 나중에 가서 곡물가격을 더 올렸다. 그러자 돗토리 성 안에 있는 비축 병량이 히데요시가 고용한 상인의 손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小和田哲男).

  히데요시는 병력을 이끌고 돗토리로 향했다. 진군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농민들에게 가혹행위를 해서 공포를 심어주었다. 농민들은 겁을 먹고 돗토리 성으로 몰려갔다. 히데요시는 그걸 보면서 즐거워 했다. "주변의 농민들을 한 명이라도 더 성안으로 밀어 넣어라! 그들이 돗토리성의 병량을 더 빠르게 축낼 자들이다." 성안의 인구는 4000명이 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돗토리성 주변에 작은 성과 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자신의 병사들에게 탄약과 철포, 군량미를 보급하였다. 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부하들에게 성벽을 오르게 하지도 않았고, 적과 직접 단병접전을 벌이게 하지도 않았다. 그의 목적은 성으로 어떠한 보급품이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었다. 장기전으로 가서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굶겨죽일 작정이었다.

포위된 100일 동안 성내부에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먹지 못한 군마와 소가 먼저 죽었고, 사람들이 그것을 먹었다. 이제 사람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 광경이 펼쳐졌다. 많은 사람이 아사했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는 영양실조로 장님이 된 사람도 많았다.


전쟁은 토목공사

이렇게 히데요시는 막대한 전비를 쏟아 부었지만 그것은 수백 배 남는 장사였다. 돗토리성은 당시 모리(毛利) 씨 수중에 있는 시마네현의 이와미 은광산(石見銀山)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모리 씨는 돗토리의 함락을 막기 위해 해상과 육로로 거듭 보급을 시도했지만 히데요시의 치밀한 방어망에 걸려 모두 실패했다.

이듬해 히데요시는 모리 씨의 명장 시미즈(淸水)가 지키고 있는 비쥬(備中)의 다카마쓰성(高松城) 공략에 들어갔다. 성안에는 5000의 병력이 농성을 하고 있었고, 히데요시의 병력 3만이었다. 6배의 인력을 가지고 있던 히데요시는 거대한 토목공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시기는 장마기였다.

누구도 상상치도 못한 대토목공사가 벌어졌다. 철야작업을 하여 높이 10.8m 폭 36m의 제방 12㎞를 쌓았다(1582년 5월 8일). 제방을 쌓기 위해 구축한 작은 성이 15개소, 동원 인원은 10여만 명이었다. 히데요시는 토표(土表) 1표에 약 전(錢) 100문, 쌀 1승(升)이란 고액의 보수를 주었다. 총경비는 전(錢) 63만 5040관문, 쌀 6만 3504석이었다.

둑이 완성되고 아시모리강의 물길이 바뀌었다. 3면이 늪으로 둘러싸여 있는 다카마쓰성은 주변이 물바다가 되고 고립되었다. 모리 씨가 성을 구하기 위해 왔지만 물에 갇힌 그 요새에 접근도 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전쟁의 개념을 전투에서 시장 장악과 토목공사로 바꾸어 놓았다.

1592년 냉혹하고 능률적인 그의 군대가 조선에 나타났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조선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으며, 얼마 후 평양을 점령하고 함경도까지 치고 올라갔다. 선봉장인 코시니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눈부신 활략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보다 더 많은 공을 세운 자가 있었다.


능력위주가 아닌 게 운명이라

조선의 왕 선조는 임진왜란 기간에 히데요시가 최고의 훈장을 주어야 할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을 위해 일본군과 싸운 의병장 김덕령을 죽였고, 곽재우를 초야에 매장했다. 최대의 이적행위는 이순신의 파직이다. 그 결과 무적의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총공격을 받아 한산의 패전을 당했다. 전투에서 1만 명이 넘는 수병과 140척 이상의 판옥선을 상실한 조선수군은 사실상 궤멸상태였다.

뿐만 아니다. 우세한 전력의 일본군에 맞서 조국을 위해 분연히 무기를 들고 일어나 목숨을 바친 조선군과 의병들의 전공을 전부 명(明)군의 것으로 돌려버린 것도 선조였다. 부하 장수들과 의병장들이 능력을 발휘할수록 선조 자신은 낮아졌다. 그들은 생각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무능한 왕은 적군 10만과 같은 위력이 있다!"

하지만 운명은 능력위주가 아니었다. 선조는 전쟁이 끝난 후 손녀와 같은 여자에게 새장가를 들어 아들을 두었고,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너무나 유능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어린 아들에 대한 한없는 걱정 속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인생은 꿈 속에 꿈"이라는 말을 남겼다. 자신의 사후에 염려했던 일들은 모두 현실로 나타났다. 그의 아들에게 충성을 바치던 영주들과 군사들이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멸당했고, 그로부터 15년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을 공격하여 히데요시의 아들(히데요리)과 애첩 요도기미를 자살하게 만들었다(1615년). 그러나 선조와 그의 자손들은 그 후 320년 동안 조선을 더 지배했다.


▶선조(宣祖·1552~1608) =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사림들의 중앙정계 진출의 문을 열었다.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 많은 인재들이 등용되기도 했다. 사림의 중앙 정계 진출과 함께 당(黨)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갈등이 기폭제가 되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당됨에 따라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데 많은 혼선을 가져왔다.

1590년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부사 김성일(金誠一)의 서로 다른 동향보고에 의해 정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그는 일본의 침략에 의해 도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하였으며, 도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분조(分朝)하고,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원군이 파견되었다.

  ▶요도기미(淀君·1569~1615)=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일한 아들 히데요리를 낳았다(1593). 아버지는 오우미(近江) 오타니(小谷)의 성주 아사이 나가마사이다. 7살께 오타니 성은 함락되어 버렸다(1573년). 공격의 주체는 엄마의 오빠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녀는 엄마인 오이치, 동생들과 함께 노부나가의 진영에 넘겨진다. 차차 일행은 그 후 외삼촌인 노부나가의 성에서 지내게 되는데, 약 10년 후 노부나가가 교토의 혼노지에서 살해됐다(1582년). 오이치는 요도기미 자매를 이끌고 노보나가의 유력 부하였던, 에치젠 기타소의 성주 시바타 가츠이에와 재혼했다. 하지만 직후 가츠이에는 히데요시의 공격을 받고 어머니 오이치와 자살한다(1583). 요도기미 자매 3명 만이 히데요시에게 건네졌다. 우여곡절 끝에 오차차는 히데요시의 첩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