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금융 시스템은 리먼브라더스의 부도 이후 전례없는 혼란을 겪고 있다.
미국 중산층은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모기지) 집을 장만했다. 그런데 2002년 전후로 모기지 대출업체들이 신용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도 돈을 빌려 주었다. 모기지 회사들은 집값을 올리면서 많은 고객을 확보했다. 위험에 대한 경고가 거듭 있었지만 그때마다 정치 논리에 밀렸다. 집값 폭등의 최대 수혜자가 서민들이었다.
모기지 업체들은 돈을 빌려준 채권(모기지)을 저당으로 잡힌 다음 이를 다시 별도의 증권으로 만들었다. 철수에게 1만 원을 빌려준 문서로 증권을 만들어 시장에 또다시 유통을 시킨 것이다. 빌려준 돈을 받기도 전에 또 돈을 굴린 셈이다(모기지저당증권·MBS). 돈을 받을 가능성이 떨어지는 불량채권을 저당 잡혀 만들어낸 증권은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불량채권을 우량채권에 끼워서 찌게를 만들었다. 위험도가 서로 다른 여러 채권을 섞어서 담보로 잡힌 뒤에 이걸 가지고 증권을 만들어 팔았다(부채담보증권·CDO). 위험은 분산된 것이 아니라 감염되었다. 결국은 증권 자체가 부실이 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2007년 7~8월).
금융기관들의 부실이 커지자 채권보증회사마저 수렁에 빠진다. 미국 2위의 채권보증업체 암박(Ambac)의 주가가 70%나 급락했다(2008년 1월). 안 떼인다고 보증을 받은 채권도 돌려받지 못 할 수 있게 됐다. 오로지 현금만을 믿으면서, 금융기관 사이에도 돈이 돌지 않는 '신용경색'이 시작되었다. 사태의 가장 핵심부에 자리한 것은 고위험, 고수익의 파생금융상품을 집중적으로 유통시키는 투자은행이었다. 천문학적인 파생상품을 주무르던 리먼의 파산 이후 글로벌 금융시장은 아무도 믿지 않는 불신의 시대로 돌입했다(2008년 9월 15일).
"내일은 또 누구의 차례인가?"
현재 미 정부는 7조 달러에 가까운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했다(11월 26일 CNN). 미국 GDP의 절반 규모다. 최근 미국 2위 씨티은행 그룹의 부도 위기까지 내몰렸고 자금을 수혈 받아야 했다. 문제는 이 위기의 끝을 아직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달러를 쏟아부어도 위기가 해소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절망감에 빠져있으며, 파산한 리먼브러더스나 국유화된 AIG그룹 등의 경영진들이 고액의 퇴직금을 받고 떠났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경영자의 지나친 탐욕이 불러온 위기를 국민들 세금으로 보완했다. "이윤은 사유화되고 손해는 사회화되었다!"
자본주의의 병폐에 대한 신랄한 지적이 있다. "자본주의 제도가 성숙함에 따라 진정한 기업가 정신은 영리추구에 현혹되어 타락하기에 이르렀다. 즉 기업지배계급의 불합리한 이윤 획득과 낭비가 심해졌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배당, 자사주가의 조작, 과대한 중역의 상여금, 과다한 주주배당금 등이 나타나고 있다." 비판의 주인공은 현재 사람이 아니다. 1929년 미국에서 일어난 대공황을 목도한 미야자키 마사요시였다.
러시아에 두 번의 유학을 다녀온 미야자키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조사과의 러시아반의 조사원이었다. 러시아에서 혁명을 직접 경험한 그는 마르크스에 정통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 미야자키는 마르크스가 지적한 '경제에 대한 국가의 중요한 역할'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 미야자키는 뜻을 함께하는 소중한 동료, 이시하라 간지를 만났다. 그는 일본육사를 나온 엘리트로 1923년 1차대전의 상흔이 남아있는 독일에서 유학을 했다. 그 전쟁은 전투기와 탱크가 투입된 인류 최초의 전쟁이었다. 그는 전쟁을 결정하는 것이 공업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공업연료와 공작기계 등을 잠재적 적국인 미국으로 수입해야 했다.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1차 대전 후 서양의 문명 중심은 미국으로 옮겨간다. 결국 일본은 미국과 결전을 하게 될 것이 틀림이 없다. 이 전쟁은 공군에 의한 결전으로 틀림없이 인류 최후의 전쟁이 될 것이다." ('전쟁사 대관')
그는 미국과 장기전을 수행할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일본의 경제력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1928년 관동군 참모로 만주 땅을 밟았던 이시하라 역시 1년 후 미국이 공황과 경제 파탄을 보았다. 그 여파가 일본에까지 밀려와 심한 불경기를 앓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세계 경제 대공황의 고리에서 벗어나 일본을 강국으로 만드는 방법을 생각했다.
"우선 일본과 한국 만주를 하나로 묶는 내수시장을 만들어 자급자족을 해야 한다. 경제구조를 조선, 자동차, 철강 등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학 공업으로 개조해야 한다."('전쟁사 대관')
1931년 이시하라는 일본의 만주를 점령을 기획하고 주도했다. 10월 진저우를 폭격하고 만주 남부를 점령한 후 11월에는 치치하얼 점령하였으며, 동북3성 전역을 장악했다(만주사변). 병력과 군수품을 만주 전역에 운송한 만주철도회사가 일본 관동군의 유용한 발이 되었다면 점령한 만주를 일본 한국과 함께 경제블록화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브레인 역할을 한 것이 만철내의 조사과였다.
미야자키와 이시하라는 만주를 대대적인 중공업 군사기지로 만들어낼 계획을 입안했다. 만주의 철과 석탄을 활용하여 철강 산업을 일으키고 석탄 액화로 석유화학 공업을 발흥시킨 뒤, 소재산업을 기초로 해서 철도망과 도로망을 정비 확충하고 자동차와 기계 산업을 육성하며 나아가 항공기산업까지 키운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것을 추진하는 방법은 만철 조사과를 싱크탱크로 삼고 일본에서 파견된 관료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등을 손발로 삼아 관동군 참모부가 산업개발을 위한 통제의 전권을 쥐고 추진하는 하향식 방식이었다. 하지만 산업 전체를 통제한 것은 아니었다. 섬유나 잡화 등은 제외시켜 자유경쟁에 맡기는 등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 1937년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이 야심차게 실행되었다.
1940년 4월 박정희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관동군이 주도하는 만주의 경제정책을 목격했다. 그가 집권한 후 경제기획원을 만들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한국의 공업화에 숨결을 불어 넣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고바야시). 계획의 추진자가 군인이었다는 점도 만주와 유사하다. 만주에서는 관동군, 한국에서는 박정희 장군과 그 부하들에 의하여 산업개발이 추진되었다. 관료를 손발로 활용했다는 점과 중요한 결정은 군 수뇌부나 군 출신이 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이시하라의 실험국가 만주국을 이어받아 완성했고, 전후 일본 수상을 역임한 일본 정계의 거물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대통령의 친분은 누구보다 두터웠다. 기시는 그가 이루어낸 만주산업개발에 한없는 애착을 느꼈고, 26년 후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에 매진하는 박정희의 더없는 조언자이며 후원자였다.
현재 미국은 상상할 수 없는 달러를 투입하여 금융기관들을 국유화하고 있다. 앞서 러시아도 국내 중요 석유회사와 금융기관을 대대적으로 국유화 한바 있다. 우리는 반대로 가고 있다. 경제개발시대의 견인차였던 산업은행의 민영화를 추진하는 현 정부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중요한 역할을 포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州鐵道株式會社)= 이른바 만철(滿鐵)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철도 및 부속지를 기반으로 1906년에 설립되어,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중국 동북지방(만주)에 존재한 일본의 국책회사이다. 철도사업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광업 제조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사업을 전개한 복합기업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만주 식민화의 중핵기관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초기엔 다롄(大連), 이후 신징(新京) - 현재의 창춘(長春)에 본사를 두었다. 1945년에 소련에 의해 점령되어 실질적 기능을 상실하였고,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해서 해산되었다.
▶대공황(大恐慌)=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의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대폭락한 데서 시작된 세계공황이다. 공황은 일본·독일 ·영국·프랑스 등 유럽으로 파급되었다. 여파는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배후에는 만성적 과잉생산과 실업자의 항상적(恒常的)인 존재가 현재화(顯在化)되고 있었다. 1933년에는 그 수가 전 근로자의 약 30 %에 해당하는 1500만 명 이상에 달했고, 미국의 공업생산고는 공황발생 이전과 비교하여 44 % 하락하여 1908∼1909년의 수준으로 후퇴하였다. 공업과 농업부문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농산물 가격의 폭락, 체화의 격증을 초래했다. 1931년 오스트리아의 은행 도산을 계기로 유럽 제국에 금융공황이 발생해, 영국이 그해 9월 미국이 2년 후 금본위제를 정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