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최영교_전쟁과 시장_08

醉月 2011. 4. 14. 08:45
<36> 대영·일본제국의 출현
외채와 노략질 제국 탄생의 밑거름
영국은 해적질을 부추겨서
일본은 국공채를 내다팔아서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했다

    러-일 전쟁 당시 여순의 러시아 진지를 향해 포격하고 있는 일본 포병대.

 

"이 나라에 재앙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여왕 폐하께서는 전혀 대비를 하고 있지 않아." 1587년 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신 월싱엄은 개탄했다. 당시 영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사뭇 위협적이었다. 교황은 영국의 국교회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네덜란드에서 영국군대는 스페인군대와 싸워 연일 패배하고 있었다.

 

프랑스에는 친스페인 정권이 들어설 수도, 아일랜드에는 스페인이 사주한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스페인이 영국을 침공한다는 결정적인 정보가 로마교황청에서 흘러나왔다.

"펠리페가 침공한다고!" "예. 여왕폐하." "스페인이 세계최대 부국이기는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야." "그 사람은 가톨릭 광신도라…." "영국을 장악하려면 10만의 병력이 필요하고, 함선 500척을 동원해야 해. 적어도 여기에는 100만 파운드의 비용이 들어갈 것이야." "여왕폐하. 로마의 교황(식스투스 5세)이 전비로 25만 파운드를 펠리페 왕에게 보조하기로 약속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고민에 빠졌다. '네덜란드 전쟁은 돈만 들고 성과는 없다. 이제 스페인의 무적함대(아르마다)와 일전을 겨루어야 하는데 돈이 얼마나 들겠는가. 스페인 놈들이 오기 전에 우리는 파산할 것이야!'


여왕의 해결사 해적두목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드레이크를 불렀다. 그는 본래 상인이었으나, 수지가 맞지 않아 해적으로 변신한 사람이었다. "자네가 스페인의 해안을 성공적으로 약탈하면 펠리페도 전쟁을 1년 쯤 연기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야. 스페인의 선박과 군수물자가 될 만한 모든 것을 소각시켜!" "예. 폐하." "그리고 스페인 보물선도 약탈해!" 드레이크와 그의 일당은 신이 났다.

 

여왕도 자신의 전함 6척과 돈을 지원했다. 1587년 4월 드레이크는 스페인 카티스항과 그 주변을 공격하여 100여척의 배들을 파괴했다. 5월 아조레스제도에서 스페인의 금은보화가 선적된 보물선을 나포했다. 화물의 가격은 11만 5000 파운드에 달했다. 드레이크가 파괴한 스페인 배들의 3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여왕은 그 가운데 4만 파운드를 자신의 투자분에 대한 이득으로 챙겼고, 드레이크에게 1만7000 파운드를 주었다. 그 밖에 투자한 런던의 상인과 선원들에게 이익이 분배되었다.

1588년 7월 21일 영국함대가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만났다. 영국 선원들은 무적함대의 위용에 전율했다. 거대한 초승달 모양의 대열이었다. 마치 바다 전체가 무적함대의 무게에 깔려 신음하는 것 같았다. 스페인 해군은 선박과 선박을 붙여놓고 병사들이 적선으로 넘어가서 격전을 벌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영국인들이 거리를 두고 피하는 바람에 한 번도 전투를 못했다.

스페인함대는 둔했다. 7월 28일 스페인 무적함대는 흩어진 대오를 갖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영국이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다. 바퀴가 장착되어 있는 영국의 대포가 더 빨리 발사됐다.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발사를 했고, 스페인함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총 34척을 잃고 스페인 함대가 패퇴했다. 96척의 배는 북해를 북상하여 스코틀랜드를 돌아 아일랜드 방향으로 남하하다가 폭풍을 만나 26척이 침몰했고, 7000명이 죽었다. 최종 귀환한 배는 130척 가운데 70척이었고, 병력은 3만 가운데 1만이었다.


    스페인왕 펠리페. 파산모면 위한 군비삭감과 해적질

임박한 위험이 물러나자 엘리자베스는 군대의 지출을 줄였다. 시기상조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대부분의 육군과 해군을 해산했다. 재무장관은 갈채를 보냈다. 전쟁 중 돈이 모자라 그녀는 1588년 1월 부유한 시민들에게 강제로 7만 5000 파운드를, 또 3월에 런던의 상인들에게 10%로의 이자로 3만 파운드를 빌려야 했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10만 파운드를 지출해야 했다. 여름이 되자 그 돈도 다 소진되어 런던의 상인들에게 2만 6000 파운드를 빌려야 했다. 심각한 자금부족으로 정부는 무적함대와 싸운 선원들에게 보상을 해주기 어려운 처지였다. 1590년에 가서 그녀는 12만 5000 파운드어치의 왕실 토지를 팔아야 했다.

여왕은 다시 드레이크에게 사주했다. 1592년 그는 인도에서 오는 마드레테디오스호를 나포했다. 화물은 도자기 비단 보석 금 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총 가치는 무려 50만 파운드에 달했다. 그러나 돌아온 배에는 14만 파운드어치뿐이었다. 여왕이 진노했다. "나머지 36만 파운드의 물건은 어디로 증발했다는 말인가?" "폐하의 선원들이 대량으로 빼돌렸습니다." "가장 좋은 물건은 그들이 다 차지하고 이게 뭐야." "하지만 그것은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폐하를 위해 무적함대와 싸웠던 병사들이기도 합니다." "빨리 관리를 보내 도난당한 전리품을 되찾아 오시오."

하지만 전리품 대부분은 런던의 상인들에게 넘겨진 상태였다. 급해진 여왕은 자신도 남은 물품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파산에 직면한 여왕에게 체면이라고는 없었다. 여왕에게 돌아올 것은 14만 파운드의 20%였지만 50%를 챙겼다. 귀족 투자자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

 

해적사업은 매우 이익이 컸다. 영국이 전쟁으로 입은 무역의 손실을 보충하고도 남았다. 그러자 스페인의 펠리페왕은 보물선의 항해를 금지해버렸다. 하지만 남미에서 매년 유입되던 은이 끊김으로써 스페인은 경제에 심한 타격을 입었고, 영국과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런던금융시장에 전비를 꾸러온 일본 대장상

이로부터 313년 후 일본의 대장성 장관 다카하시가 전쟁자금을 구하기 위해 런던에 나타났다(1904년).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니? 이거 누가 돈을 빌려주겠습니까?"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을 놓고 돈을 벌기 위해 세계의 자본가들이 몰렸다. 당시 동양의 작은 섬나라 일본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은 자국의 공채를 런던 시장에 상장했다. 별 반응이 없었다. 반면 파리에서 러시아의 공채는 불티나게 팔렸다.

다카하시는 포기하지 않았다. 첨단무기를 영국에서 도입해야 하는데 그 비용을 구하지 못하면 일본이 패배할 판이었다. 예기치 않은 구원의 손길이 왔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유태인이 탄압을 받고 있었다. 화가 난 미국의 유태인들이 500만 파운드를 빌려 주었다. 유럽의 은행가들과 500만 파운드의 외채 가계약을 체결했다. 기한 7년, 이자 6부에 일본의 관세수입을 저당 잡히는 조건이었다.

그해 7월 압록강 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하였다. 뉴스가 전해지자 일본의 공채는 런던에서 신청 발행액의 10배 이상이 상승하였다. 이후 다카하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총 1억 2000만 파운드의 외채를 더 빌릴 수 있었다. 담보로 일본의 담배전매이익과 철도수익까지 잡혔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요동반도의 여순과 대련에서 일본 육군이 승리하고 동해에서 해군이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했다.


전쟁은 돈 싸움

일본의 경제적 능력을 훨씬 상회했던 러일전쟁은 전비의 82%를 공채로 충당하였고, 공채의 반을 외채에 의존해야 했다. 따라서 외채 모집 여부에 따라 전쟁이 판가름 날 수 있을 정도로 빚으로 지탱된 전쟁이었다. 승리를 위해 산업혁명이후 선진국들이 개발한 모든 무기들을 다 수입해야 했다. 더 전쟁을 지속했다가는 나라가 파산할 지경이었다. 일본에 돈을 빌려준 미국과 영국의 거대 자본가들이 그것을 원치 않았고, 미국의 알선으로 일본은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1905년).

스페인에 승리한 영국은 세계제국이 되었고, 러시아에 승리한 일본은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판 중심으로 역사를 보았을 때 느끼는 지금 우리 시각이다. 당시 두 나라의 재정은 파산에 이르렀고, 그 국민들은 등골이 휘어 있었다. 승리에 대한 기쁨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투입된 전쟁비용만 되돌려 받는다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영국 여왕은 재정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해적질을 해야 했고, 일본천황은 한반도를 점유하고 수탈을 자행해야 했다. 우리는 여기서 폭력 자체가 하나의 경제적 잠재력이라고 하는 칼 마르크스의 지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하면 폭력은 기존 사회가 새로운 사회를 잉태하고 있을 때에는 언제나 그 산파가 된다고 한다('자본론Ⅰ').


▶러일전쟁 = 1904년 2월 8일에 일본함대가 여순의 러시아군함들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시작돼 1905년 9월 5일 러-일 강화가 체결돼 끝난 전쟁이다. 한국과 만주의 분할을 둘러싸고 싸운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영-일 동맹과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있었다. 러시아는 패배의 결과로 혁명운동이 진행되었고, 일본은 전승으로 한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만주로 진출했다.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 1533년 9월 7일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났다. 이복 언니 메리 1세가 죽자 뒤를 이어 25세에 즉위하였다. 전 국민에게 영국국교회의 의식과 기도서를 의무화하여 가톨릭을 억압했다. 의회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추밀원(樞密院) 중심의 정치를 폈다. 세실, 월싱엄 등을 중용했다. 금과 은의 가치를 일정하게 하여 화폐제도를 통일하고, 물가의 앙등을 억제했다. 유리·제당·제분·금속·광산 등 각종 공업 분야에 독점권을 부여해 보호육성을 도모하는 등 중상주의정책을 채용했다. 특히 역점을 둔 모직물공업의 발전은 상인들의 무역확대를 촉진하게 하였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상권을 잡았다(1588년).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설립(1600년)과,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기초가 확립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37> 늙은 대영제국과 젊은 일본제국
변화에 눈감은 오만한 제국, 미래는 없다
수세기동안 세계를 지배했던 대영제국의 거대 전함은
일본 전투기에 맥없이 무너졌다 오만의 대가였다

    세계 2차대전에서 맹위를 떨친 일본 제로기가 출격하고 있다.

 

향료무역을 하던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다(1606년 봄). "인도네시아의 반탐항에 해적이 들이닥쳐 우리 영국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배들을 약탈했습니다." " 그런 짓을 저지를 인간은 네덜란드나 포르투갈 놈들 밖에 없어!"

하지만 범인은 영국인 귀족 에드워드 미셸본 경이었다. 그는 런던상인들에게 왕따를 당해 동인도회사에서 쫓겨난 후 복수의 칼을 갈았고, 제임스왕에게 온갖 아첨을 해서 출항 허가를 받아냈다. 그의 배 타이거호는 240t에 불과한 소형선이었다. 상인들은 내심 그 배가 폭풍 속에 침몰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무사히 인도네시아 반탐 부근에 도착했다.

당시 향료가 나는 섬들은 네덜란드인들이 모두 장악한 상태였고, 영국 상인들은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화가 났다. "이거 장사도 못해 먹겠어. 그렇다고 빈 배로 돌아가면 파산을 할 수밖에 없어. 이렇게 된 바에야 약탈밖에 길이 없어." 파괴의 진혼곡이 시작됐다.

그는 수평선에 화물을 실은 배가 보이면 무엇이든 약탈했다. 국적을 구분하지 않았다.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 인도 배를 불문했다. 그의 해적질은 영국인들 전체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영국인들은 모두 도둑과 다름없다!"

잘나가던 그도 임자를 만났다. 배가 말레이 반도 연안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을 때 외침이 들렸다. "거대한 정크선 갑판 위에 80명의 남자들이 칼을 차고 있는데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난장이 체구에 무표정한 얼굴입니다."


영국해적과 일본해적의 승부

일본해적의 배였다. 중국은 물론 조선 동남아 연안 일대를 약탈하고 다니는 그들은 일본의 지독한 전국시대를 경험하고 임진왜란에 참전한 역전의 노장들이었다. 실직한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해적이 된 자들이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의 눈에는 약탈하기 쉬운 심약한 난장이들로 보였다.

에드워드가 "저 배를 약탈하면 돈이 되겠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왜구의 상륙선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해적이 해적을 노략질하는 싸움이 벌어졌다. 왜구 22명이 영국배에 올라와 번쩍이는 일본도를 휘둘렀다. 칼과 손이 얼마나 빠른지 보이지 않았다. 영국해적들의 시신이 수북하게 쌓여갔다. 영국해적들이 머스킷 총을 장전하기도 전에 난자당했다.

하지만 사태가 반전되었다. 에드워드가 컬벌린포에 산탄을 장전했고, 선상 위의 왜구들을 향해 발사했다. 그러자 귀가 먹을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올리고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파편과 판자가 여기저기 흩뿌려졌다.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들리더니 적막이 찾아왔다. 단 한 번의 포격으로 왜구들의 몸과 팔 다리가 처참히 토막 났다. 영국의 대포는 참으로 위력이 있었다.

    일본 제로기의 결정타를 맞고 침몰한 영국 전함 웨일스호.

 

타이거호 위의 왜구가 일소되자 에드워드는 일본정크선을 향해 빗발치듯 대포를 쏘아댔다. 정막이 흐를 때까지 그것은 지속됐다. 승리했지만 에드워드와 그의 선원들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입었고, 해적질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향료전쟁'). 그리고 335년 후 영국과 일본의 해전이 말레이 반도 부근에서 재개됐다.


팽창을 멈출 수 없는 일본

1930년 미국에서 일어난 경제대공황이 세계로 확산되자 어려움에 봉착한 일본에서 군부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이듬해 만주를 점령했다. 일본은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교외의 노구교(蘆溝橋)에서 일본군은 군사행동을 감행했고, 베이징·톈진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했다. 미국이 화가 났다.

더구나 그해 12월 일본은 난징 앞 양자강에 떠있던 미국의 군함 파라이호를 항공기로 격침시켰다. 그러자 미국은 일본에 대한 철강수출을 중단했다. 1941년 7월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다. 미국은 자국 내 일본재산을 동결시켰고, 일본에 대한 원유수출을 중단했다. 네덜란드와 영국이 이 조치를 따랐다. 베트남에서 중국 산서성에 이르는 10개 성과 주요 도시의 대부분을 점거한 일본은 곤경에 빠졌다. 일본에 18개월 사용할 수 있는 석유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일본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유전지역을 점령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판이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영국령 말레이와 싱가포르를 점령해야 하고 직전에 하와이에 있는 미국 태평양 함대를 괴멸해야 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하와이를 공습하여 정박해 있는 대부분의 미국 전함과 순양함 등을 격침시켰다. 동시에 일본은 영국의 동양함대와 격돌하게 된다.


영국의 자존심 웨일즈호의 침몰

프린스 오버 웨일스호가 싱가포르항을 빠져나왔다(12월 8일). 웨일스호 옆에는 순양전함 레펄스, 구축함 4대가 호위하고 있었다. 웨일스는 그해 취역한 영국의 최첨단 전함이었다. 14인치 쿼드포 2문, 14인치 2연장포 1문, 8연장 폼폼포 8문, 대공 기관총 다수와 정찰기 등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일본은 세계최강의 영국동양함대의 출전에 충격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일본의 잠수함은 영국함대의 위치가 탐지했다. 일본이 점령한 베트남 사이공 남방 650㎞ 지점이었다. 11일 오전 11시 일본의 폭격기 8대가 영국함대를 향해 날아왔다. 함대의 대공포가 하늘에 탄막을 형성했다. 폼폼포는 분당 6만 발을 쏟아냈다. 하지만 포탄 1발이 전함 레플스의 포탑에 명중했다.

20분 뒤 어뢰를 실은 일본의 뇌격기가 몰려왔다. 8대의 비행기는 웨일스호에 공격을 집중했다. 천하무적 웨일스호는 2발의 어뢰를 맞았고, 좌현으로 13도 기울었다. 1시간 뒤 다른 일본항공기 26대가 상공에 나타났다. 그 중 6대가 웨일스호에 달려들었고, 2대가 격추되었다. 하지만 웨일스호는 3발의 어뢰를 맞았다. 이어 나머지 20대가 좌우에서 레펄스호를 공격하였고, 5발의 어뢰를 명중시켰다. 레펄스는 격침되었고, 1시간 뒤 웨일즈호도 뒤를 이었다. 이로서 영국의 동양함대 주력이 궤멸되었다.


    오대양을 왕래하며 해적질을 했던 왜구의 정크선을 그린 그림. 오만은 패배를 부른다

"수상각하. 우리의 웨일스호와 레펄스호가 격침되었습니다. 일본군 항공기 공격에 의한 피해입니다." 처칠은 수화기를 놓았다. 그는 피눈물을 흘렸다. "동양의 난쟁이들에게 우리 대영제국의 해군이 궤멸되다니. 우리의 아시아의 요충지 싱가포르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고, 곧 인도네시아의 유전지대도 일본이 장악할 것이야. 우리 대영제국은 망했어!"

그에게 충격을 더 해준 것은 일본인들이 황인종이었다는데 있다. 1905년 일본이 백인 러시아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자 영국인들은 당황해했다. 영국이 일본에게 전함과 무기를 팔고 전비까지 빌려주었지만 그러했다. 당시 런던에 머물던 중국 혁명의 아버지 손문의 목격담은 이러하다. "뉴스를 접한 영국인들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백인의 패배는 유익한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생각의 발로였다."

16세기 말 대포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영국이었다. 대포를 신봉했고 거대한 함포가 달린 전함들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일본 항공기와 격돌하던 그때까지도 전함 거포주의를 숭상했다. 그들은 전함이 항공기에 필적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약자인 일본인들은 무엇이든 받아들였다. 그들은 전함에 대하여 항공기의 우위를 빨리 간파했고, 전투기 개발과 항공모함 건조에 전력을 쏟았다. 일본의 전투기 미쓰비시 제로기는 당시 세계 최고의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해군은 그것을 평가 절하했고, 비참한 패배를 불렀다. 대포로 흥한 대영제국은 거포를 실은 전함에 집착하다 망했다. 결국 세계 2차 대전에서 영국이 승전국이 되고 일본이 패전국이 되었다. 하지만 오만한 영국은 과거의 영광을 다시 회복할 수 없었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던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다시 부활했다.


▶반탐(Bantam)=인도네시아 자바섬 북서부 해안에 있는 도시. 반탐만 내만에 위치하며, 순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수마트라섬과 접하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자카르타보다 일찍이 발달하였고, 역사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6세기 후반에는 술탄왕국의 기지로 번영했으며, 특히 향신료무역이 성하여,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모여든 이주자로 붐볐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등이 인도네시아 지역으로 진출할 때에는 우선 이곳에 내항(來航)했었다.

▶동인도회사=17세기 초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이 동양에 대한 독점무역권을 부여받아 동인도에 설립한 여러 회사다. 각국의 동인도회사는 동인도의 특산품인 후추·커피·사탕·면직물 등의 무역독점권을 둘러싸고 경쟁했다.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을 정복한 뒤 특산품을 강제로 재배하게 해서 사들여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다. 그러나 1652년부터 영국-네덜란드전쟁이 계속됐고, 심한 타격을 입은 네덜란드는 영국과의 상업전쟁에서도 지게 된다. 또 18세기 이후 향신료무역이 부진하게 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식민지경영을 주로 했으며, 1799년에는 영토를 본국정부에 이양하고 해산했다.

 

 

<38> 영 제국과 러 제국, 그 사이의 조선
거문도의 중요성, 조선만 빼고 모두 알았다
러와 대적하던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청, 일본은 긴장했고 견제에 나섰다
그러나 정작 조선관리들은 섬의 위치조차 모르고 있었다

    거문도의 명소 신선바위에서 내려다본 바다.국제신문DB

 

"러시아의 욕심 많은 불곰 놈들. 음흉하기 짝이 없고 뻔뻔한 놈들." 흑해의 크림반도에서 벌어질 전쟁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1850년대 초). 영국군인들이 화가 났다.

"우리 영국과 싸울 러시아 놈들이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 런던시장에서 공채를 매각하려 하고 있어요." "너무나 구리고 비상식적인 행동입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영국의 은행과 금융회사들에게 있어요." "그럼 그 돈놀이꾼들이 러시아의 국채 상장을 묵인한다는겁니까." "그래요. 내각까지도 여기에 가세했다니까…."


전쟁당사국에 돈을 빌려 전쟁을 한 러시아

러시아는 런던시장에서 전비를 조달할 수 있었다. 영국은 당시 오늘날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시장지상주의'국가였다. 자본이동의 자유라는 철칙을 준수하고, 그 모습을 세계 만방에 보여주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자국의 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던 금 준비금이 해외로 빠져 나가는 것을 몹시도 두려워했다. 경쟁국보다 무리한 고금리정책을 실시해 가면서까지 금이 베를린이나 뉴욕 파리 모스코바에서 런던의 은행으로 유입되게 만들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 전제는 영국의 군사적 우월성이었다.

1588년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굴복시킨 후부터 유럽대륙에서 떨어진 섬이라는 위치를 이용해왔다. 대규모 상비 육군을 양성하지 않아도 됐다. 여유 돈을 해상권 장악에 마음껏 투자할 수 있었다. 해적질을 하거나 독점적인 무역으로 쟁취한 돈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 맞서는 동맹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힘 균형의 추 영국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영국의 대외정책은 동맹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계산된 이익을 개발하는데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로 인해 필요하다면 당장이라도 동맹관계나 우방을 바꿀 수 있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전쟁 당시 영국의 최대 동맹국이었다. 하지만 1853년 7월 러시아군이 오스만투르크의 영토인 흑해연안의 크림반도를 점령하자 영국은 태도를 바꾸었다. 영국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러시아가 흑해를 점령하고, 나아가 오스만투르크를 협박하여 지중해로 진출해올 터였다. 영국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 과거의 숙적이었던 오스만투르크와 동맹을 결성했고, 프랑스 사르데냐가 참가하였다.

흑해의 크림 반도에서 일어난 크림 전쟁은 1854년 3월 28일부터 1856년 3월 30일까지 지속되었다. 결국 러시아가 패했고, 1856년의 파리 조약으로 종전을 맞는다. 그 결과로 러시아 제국은 다뉴브 하구 및 흑해 인근에서의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이후 흑해는 모든 국가에 대해 군함 통과 및 무장이 제한되며 중립이 선언된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

흑해에서 패한 러시아는 진출 방향을 아시아 태평양으로 돌렸다. 1860년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강제로 차지했고, 청나라와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연해주를 합법적으로 영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는 겨울이 되면 얼어 붙는 항구였다. 그 남쪽 조선의 부동항에 러시아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84년 러시아는 영국과 아프카니스탄 문제를 놓고 긴장이 고조되었다. 러시아는 아프간에서 페르시아를 거쳐 아라비아해로 진출하고자 하였는데, 영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도 양국의 충돌이 예상되었다. 러시아의 조선 영흥만 점령 계획설이 나돌자 영국은 견제수단으로 조선의 거문도 점령을 추진하게 되었다.

천연의 요항인 거문도는 대한해협의 문호로서 한일양국의 해상통로는 물론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지의 요충지로도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1885년 2월 29일 영국 동양함대사령관 W. M 도웰 제독은 영국 동양함대 소속 군함 3척을 거느리고 일본 나가사키항을 출발, 다음날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다. 영국군은 자국기를 게양하고 섬 안에 포대를 구축하고, 병영을 건설했으며, 항내에 수뢰까지 설치했다. 거문도 주둔군은 700~800명으로 증가했고, 군함도 10척까지 늘었다.


거문도가 어디야?

3월 중순 조선 정부는 외신을 통해 점령사실을 알았다. 대책회의가 있었다.

"거문도가 영국군에 의해 점령됐다고 합니다." "예? 거문도가 어디지요?" 조선의 관리들 가운데 그 위치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병조판서 김윤식이 말했다. "거문도는…. 아마도 강화도 앞에 있는 섬인 '주문도'인 것 같아요."

다른 관리들은 아무도 의문을 제시하지 않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아 그렇군요."

거문도는 전남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한 섬이었다. 웃지도 못할 코미디였다. "영국 정부가 정식통고를 해줄 때까지 기다려봅시다." "예 그렇게 합시다."

고종대 문과에 급제한 김윤식은 한말의 석학이자 문장가로 '운양집' '천진담초' '음청사'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중국의 문헌에 정통하여 태산의 위치나 공자와 맹자의 고향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자국의 영토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했다. 이것이 당시 조선 최고의 엘리트들의 모습이었다. 조선의 미래는 너무나 암울했다.

조선정부의 무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영국은 철저히 무시했다. 거문도를 점령한 후 그 사실을 일본과 청나라에 먼저 통보했으나(1884년 3월3일), 정작 조선정부에는 4월 6일에 알려주었다. 거문도 문제도 청나라의 북양군벌 이홍장(李鴻章)이 해결했다.

점령 초 청나라는 러시아에 대한 방비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으려는 목적으로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은근히 인정했다. 영국은 당초 청나라와 교섭하여 거문도를 조차할 계획이었으므로, 3월 14일에 거문도 협정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북양대신 이홍장이 영국의 거문도 조차에 반대하면서 조선정부에 통고했다. 지금까지 애매한 태도로 있던 조선정부는 이홍장이 주선을 하자 거문도 현지의 실정을 탐사하기로 결정했다. 혼자서 무서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엄세영과 외교협판 묄렌도르프는 4월 3일 정여창과 함께 거문도에 도착하여 점령지 함대사령관에게 점령이유를 따졌다. 그리고 곧바로 나가사키로 가서 영국 측과 외교교섭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말뿐이었다.


러시아의 아프칸 철수와 영국의 거문도 철수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해야 했던 영국은 거문도에서 물러날 마음이 없었다. 여차하면 거문도에서 전함을 발진시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폭격할 태세였다. 거문도 문제는 국제적인 상황이 바뀌면서 해결의 단초가 열렸다.

1886년 4월말부터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관한 영국·러시아 간의 긴장이 완화되고, 8월 2일 아프가니스탄 협정이 조인되었다. 그리니까 러시아가 아프간을 침공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영국은 한반도 남단의 거문도를 점령했던 것이다. 러시아가 아프간에서 물러나자 영국군은 거문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1887년 2월 5일).

거문도 사건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다. 지식의 수요는 명확한 목적에서 잉태된다는 점이다. 거문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던 영국인들은 세계경영을 위해 고심하던 자들이었다. 자국의 해외시장을 위협할 수 있는 그 어느 나라도 용인하지 않았던 그들은 넓은 시야를 가져야 했다. 자신의 자리만을 지키는데 연연했던 조선의 관리들은 그 반대였다. 거문도의 위치에 대해 알 필요도 없었고, 영토주권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거문도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지?"

영국은 일찍이 대한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거문도의 전략적 위치에 주목했다. 1845년에 사람을 보내 탐사를 한 뒤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으로 명명했다. 1878년에 이곳을 다시 찾은 영국 실비아호 선장 존은 아예 "동북아의 군함과 무역선 중간기착지로서 최고의 조건을 가진 이곳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런던금융시장(London Money Market) = 영국 런던 동부의 시티오브런던(City of London·런던의 발상지로 금융중심가이었던 구시가), 특히 롬바드가(街) 일대에 밀접한 시중은행과 어음할인업자 등 각종 금융업자가 잉글랜드 은행을 정점으로 상호 밀접한 유대를 가지고 전개되는 금융영업(상품으로서의 자본의 매매, 즉 이자를 발생하는 자본의 대부관계)이 런던 금융시장을 구성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조직된 금융시장으로 알려져 있고 세계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며 각국 금융시장의 모델이 되어 왔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국제금융의 중심지였다가 뉴욕금융시장의 대두로 후퇴했지만 현재도 유러달러시장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묄렌도르프 (1848~1901)=조선 조정의 첫 서양인 고문으로 한·독간 최초의 조약이 체결되는데 활약했다. 당시 그는 독일편에서가 아니라 한국편에서 조약 체결에 관여했고, 1882년말부터 1885년말까지 당시 조선 조정에서 첫 서양인 고문으로 활동했다. 22세에 중국의 세관 근무를 할 당시 텐친에 머물면서 지방관이었던 리홍장을 알게 되었다. 조선이 리홍장에게 언어에 능통하고 국제적인 경험이 있는 전문가를 요청했을 때, 리홍장은 묄렌도르프를 적절한 인물로 천거했다. 그는조선 조정에서 외교협상과 관련한 자문과 세관업무 관련 지원을 맡았다.

 

 

<39> 상흔의 제국, 중화패권주의의 실상
일제의 과거만행이 中공산당의 현재를 지탱하다
끔찍했던 전쟁의 기억은 일본에 대한 뿌리깊은 공포를 중국 인민의 가슴에 심었다
이는 중화주의를 부르짖는 중국공산당에 비합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해왔다

    지난해 12월 중국의 남경대학살 70주년 기념식

 

몽골인들을 북방으로 몰아낸 중국인들의 영웅 주원장(명 태조)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1402년). 일본의 수도 교토에 도착한 중국황제의 사절단이 만난 것은 일본의 천황이 아니었다.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던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미츠였다. 명나라 황제가 보낸 국서를 받아본 요시미츠는 감격했다. 황제는 요시미츠를 일본의 국왕으로 인정을 해주었던 것이다. 자존심이 강했던 명 태조 주원장이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를 우대해준 이유가 있었다.

이전부터 일본의 해적들이 고려와 중국의 해안을 약탈하고 다녔다. 그들은 단순한 도적집단이 아니라 잘 조직된 전문 전사들이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명나라 황제의 정중한 부탁은 효과가 있었다. 요시미츠는 일본의 해적기지를 쳐서 그들을 소탕했고, 이후 해적활동이 뜸해졌다. 주원장의 아들 영락제에 가서 일본과 명나라의 공식적인 무역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사무역은 금지되었고, 일본의 아시카가 막부 정권은 명나라와 무역을 독점했다.


상인에서 해적으로

명이 일본에게 허용한 조공무역은 특권계급들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일본의 지방호족들이나 상인들은 무역의 혜택을 볼 수가 없었다. 명나라와 일본 상인들의 교역욕구는 지대했지만 그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밀무역이 성행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명나라와의 무역 거래량은 한정되어 있는 데 반해 일본상인들의 욕구는 넘침에 따라 해적 행위도 늘어났다.

더욱이 1467년 막부는 쇼군직 계승 문제를 놓고 싸움이 벌어졌다.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관령인 호소카와 손잡고 조카 아시카가 요시히사는 소사인 야마사와 제휴했다. 일본 전체의 내분으로 비화되었다. 각각 동군 24국 16만과 서군 20국 11만의 싸움이 벌어졌고, 일본의 수도 교토는 전투로 초토화되었다. 전쟁은 승패 없이 12년이나 끌었고, 막부의 힘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일본의 지방 실력자들이 중국을 상대로 한 밀무역과 해적질을 억제하고 있던 빗장이 열렸다. 해적과 상인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일본인 해적들은 중국인 상인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왜구는 야마구치, 분고, 오즈미, 사쯔마, 하카다, 쓰시마, 고또 섬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약탈행위를 계속하면 북경에 있는 명나라 지도층이 사무역을 허가하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앞서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리던 조선정부가 마산, 부산, 울산 등의 항구를 개방하였기 때문이다(1443년). 하지만 협상 상대가 질이 좋지 않았다. 명나라의 호종헌 총독은 공에 눈이 먼 사람이었다. 협상에 나온 일본인 해적대표자들의 머리를 베고 소금에 절여 북경에 보냈다. 믿을 수 없는 중국인들에게 왜구들은 분노했고, 야만적인 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왜구에 유린당한 명제국

호전적인 왜구들은 뛰어난 조직력을 과시하였다. 그들은 진압을 하러온 명나라 병사들과 대조적으로 유대감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왜구들은 전투나 숙영 중에도 엄격한 규율이 있었고, 일사불란한 전법을 구사했다. 명나라 군대는 왜구에게 지속적으로 패배했다.

왜구의 전투단위는 대개 30명 이하의 소부대였다. 멀리 떨어져 전투를 할 때도 호흡이 딱 맞아들었다. 그들의 막강함은 숙련된 무술과 부대 내의 긴밀한 협조에 기인했다. 보병 전술의 달인들이었다. 쌍검을 휘두르는 솜씨는 너무나 민첩해서 사람은 보이지 않고 번쩍이는 검만 보였다. 왜구 한 명은 18척에 달하는 넓은 지역을 감당했으며, 그들이 던지는 창은 너무나 빨라서 창이 날아가는 것을 볼 수도 없었다.

왜구들은 강을 오르내리는 선박을 빼앗아 기동성을 확보했다. 비단생산지역으로 들어가 산더미 같은 누에고치를 모아다가 마을 부녀들에게 비단을 짜게 할 만큼 대담한 행동을 자행했다. 왜구는 장기적이며 체계적인 약탈을 했다. 약탈품을 가지고 겨울을 났고, 일본으로 돌아갈 배를 건조하기도 했다. 봄이 되면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그들의 동료들이 도착했다.

양자강남에는 호수 강 시내가 많아 패주하는 명나라 병사들에게 불리했다. 겁먹은 명나라 군인들은 서둘러 도망을 치려고 했다. 한 사람이 돌아서면 우르르 몰려가다가 익사를 했다. 사적인 계산에 밝았던 호종헌 총독도 그렇게 죽었다.

왜구는 자신들이 사기가 높을 때만 부대를 움직였다. 그들은 투구에 여러 가지 색의 줄이나 금으로 만든 소뿔 모양의 장식을 달았는데 그 괴이한 모양에 명나라 군대는 겁을 먹었다. 왜구들은 창과 검을 햇빛을 받으면 번쩍거릴 정도로 갈고 광을 냈다. 명나라 병사들은 대기상태에서 그 창검의 위용에 기가 죽어버렸다. 명나라 병사들은 얼굴빛이 노래지고 입 안이 말라붙어서 그 동안 배웠던 모든 전법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남경대학살 현장. 일본제국의 남경대학살

왜구들의 잔인한 행위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곡식창고를 약탈하고 민가에 불을 질렀으며 백성들을 죽였다. 시체와 피가 산과 강을 이룰 정도였다. 어린 아이를 기중에 묶어놓고 끓는 물을 끼얹는 것을 놀이삼아 했으며, 임신부를 보면 뱃속에서 태아를 끄집어냈다." 왜구들은 중국인들의 뇌리에 잊을 수 없는 공포심을 심어 놓았고, 300~400년이 흐른 후 죽었던 왜구들이 다시 관 뚜껑을 열고 나왔다.

일본은 1895년까지 중국개혁주의자들에게 하나의 본보기로 여겨졌다. 그해 일본은 중국군대를 무찌르고 수십 년 전 서구 열강들과 똑같이 북경에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했다(청일전쟁). 이 사건은 일본을 야만적이고 열등하게 보았던 중국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1912년 손문은 혁명을 일으켰고, 만주인(청) 군주를 몰아냈다. 그는 낡은 질서를 일소했지만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데는 실패했다. 중국은 처절히 분열되었고, 혼란에 빠졌다. 이는 자원이 빈약한 일본이 자원이 풍부한 중국으로 뻗어나갈 기회를 주었다.

중국의 중앙정부가 붕괴된 지 15년이 지난 1931년에 일본은 내란을 틈타 만주를 점령하였다. 이어 1937년 북경과 상해를 점령하고 전면적인 침략에 돌입했다. 당시 중국의 수도 남경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격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중국군의 강렬한 저항의지를 꺾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해 12월 난징에 진입한 일본군은 7주 동안 무자비한 살인을 했다.


중화제국의 영혼을 억누르는 상처

백기를 든 군포로들은 물론이고 수천, 수만 명의 젊은이들을 총검술 훈련, 혹은 '목베기 시합'의 대상물로 삼아 무자비하게 희생시켰다. 뿐만 아니라 어린 소녀, 노파 할 것 없이 여자들은 무차별로 강간한 뒤 살해해 버렸고, 사람을 산채로 파묻었으며 배를 가르거나 사지를 자르는가 하면 연료를 쏟아 부은 뒤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 남경에서 매장한 유기시신만도 15만 5337구(그 중 어린이가 859구, 부녀자가 2127구)였고, 그 밖에 양쯔강에도 대량의 시신이 버려졌다(극동군사재판 자료). 중국인의 뇌리에 박힌 숫자는 30만 명이다.

중국은 희생자였고, 일본의 침략혐의는 분명 유죄이다. 하지만 70년이 지난 옛날 이야기가 되었고, 경제적 외교적으로 중국은 슈퍼파워에 근접했다. 갑자기 강자가 된 중국은 아주 오만해졌지만 자신들을 피해자처럼 생각하고 있다.

중국에서 공산주의는 쇠퇴했지만 무자비한 자본주의 경제정책에 성공한 공산당은 더욱 강해졌다. 중국이 세계소비품 시장을 절반 이상 장악했다. 현재 중국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문제가 있고, 그중에 대부분은 공산당이 자행한 것이다. 하지만 증오에 가득 찬 반일 민족주의가 중국인들을 결속시키고 스스로 중화민족주의를 자처하는 중국공산당정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일본에 대한 두려움은 중국인들이 공산당의 만행을 인내하는 이유가 된다. 중화제국과 일본의 관계는 과거보다 오히려 미래의 문제이다. 현재와 같이 중국과 일본이 동시에 강국으로 존재한 적은 과거에 없었다. 일본은 중국의 부상을 두려워하고 있고, 중국은 일본제국의 부활을 염려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들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의 물건을 대량 소비하고 있고, 양자의 균형 축이었던 미제국이 쇠퇴하고 있다.


▶주원장(朱元璋·1328~1398)= 중국 호주(濠州)의 빈농 출신으로, 17세에 고아가 되어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 홍건적(紅巾賊)의 부장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곽자흥의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원(元)나라 강남(江南)의 거점인 난징을 점령하였다. 이때 그의 병력은 2만 명에 달했고 자신을 오국공(吳國公)이라고 호칭했다. 1368년 남경에서 명나라를 세웠다. 동시에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를 몽골로 몰아내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아시카가가 교토에 본거지를 수립한 무가정권(武家政權)이다. 3대 쇼군(將軍) 요시미쓰(義滿)가 무로마치(室町)에 새로 궁전을 지었기 때문에 통상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라고 한다.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尊氏)가 정권을 장악한 후 1573년 쇼군 요시아키(義昭)가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에 멸망할 때까지 15대의 쇼군이 존속하였다.

 

<40> 중국의 '짝퉁' 병기
중국산 저질무기의 '위력' 대국의 군대를 좀먹다
자국산 조총으로 무장한 명의 군대는 왜구의 공격에 맥을 못췄다
지금 중국의 무기부품은 미군의 헬기를 추락시키는 등 악명을 떨치고 있다

    막강한 전투력을 갖췄다는 미군의 아파치 헬리콥터는 은밀하게 끼어든 중국산 불량 부품 즉, 짝통 부품 때문에 작전 수행 중 갑자기 추락하는 황당한 사고를 당하고 있다. 미군 아파치 헬기가 이라크의 어느 지역에서 격추되었다(2003년 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헬기는 소총에 맞았다고 했다. 그러나 아파치 헬기는 소총으로 격추시킬 수 없는 기종이다. 아래 부분이 장갑판으로 된 아파치 헬기를 지상화기로 잡으려면 최소 30㎜대공포, 휴대용 대공미사일,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 등이 있어야 한다.

추측이 난무했고, 최종 결론은 이렇게 났다. "원인은 사막의 폭풍으로 모래가 헬기의 흡입기로 들어가서 압축킷을 손상시킴으로 인해, 조종사는 긴급 착륙을 결정하게 되었고, 불안한 자세로 지상으로 내려왔다. 이때 이라크의 반군들이 헬기를 향해 소총을 사격했다. 헬기가 땅에 떨어졌을 때 불시착의 충격으로 조종사들은 대항할 힘을 잃은 상태였고 체포되었다."


중국 짝퉁 부품이 추락시킨 미군헬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적지 않은 미군 헬기들이 추락되고 있다. 휴대용 미사일에 명중하여 격추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원인불명의 추락사고가 적지 않다. 특히 탑승자 전원이 사망할 경우 그러하다.

최근 헬기 추락사고와 관련하여 미국의 비즈니스위크지에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다.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헬기 추락은 중국제 가짜 부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 미 국방성 펜타곤이 보관, 유지하고 있는 칩셋의 스페어 중 15%가 가짜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2008년 1월, 미 공군은 F-15전투기에 탑재되고 있는 칩셋 위조품을 발견했다. 중국의 벽지에서 생산된 것으로 구형 칩의 표시를 벗기고 그 위에 최신형의 표기를 넣은 너무나 단순한 위조였다. 그 외 과거 4년간 중국제 가짜 라우터가 400대 납입된 것도 밝혀졌다. 미군 장비에 위조 부품이 증가하는 이유는 있다. 미군이 민수품 사용 비율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제 가짜 제품이 미군의 붕괴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소문이 파다하다. 현행 체제로는 중국산 짝퉁 부품의 접근을 막을 수 없다.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은 누구도 물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물론 그것을 근절하기 위해서 미군이 부품을 모두 자체 생산하든지 아니면 미국 내 특정 청부업자에게 그 일을 맡겨야 한다. 그러면 엄청난 비용의 상승이 수반될 것이다.

명나라 병사의 고민

중국의 짝퉁들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16세기 중국의 절강성이었다. 왜구를 막아내기 위해 조직된 명나라 병사 2명이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총알이 조총 총신의 규격에 맞지가 않아." "맞아! 조총은 믿을 수가 없어. 왜구가 몰려오는 위급한 상황에서 사용하다가 큰일 나지." "우리 중국(명나라)의 보급품은 짝퉁이 많아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어." "뭐 항상 그런 것을 불평을 하면 뭐하냐?"

명나라 병사들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왜구가 아니라 자신들이 휴대한 짝퉁 무기였다. 조총의 품질이 아주 나빠 왜구를 정확히 저격하는데 집중할 수 없었다. 그들은 조총이 터져버릴까 더 신경을 써야 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뇌관이 점화되지 않을까 걱정을 해야 했다.


서류상의 군사강국 명나라

명나라의 장군들은 화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칼을 사용하는데 귀신인 왜구들과 직접 부딪쳐 싸우는 것은 여간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과 직접 대결했다가는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짝퉁 화기의 품질을 믿을 수 없어 전법을 보다 현대화시킬 수 없었다. 조총을 사용했다가는 부대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의 왜구들이 명나라 군대를 압도하고 있는 상황도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명나라가 일본을 침략하는 것이 더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은 명나라와 비교되지도 않을 만큼 좁고 작은 인구를 가진 국가였다. 더구나 16세기 일본은 근 100년 동안 무정부 상태였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부하가 상관을 배신하고 제거하는 하극상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중국, 짝퉁을 잉태하는 자궁

반면 고도로 통합된 관료집단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던 명나라는 광대한 영토, 구석진 곳에서도 황제의 명령이 이행될 정도로 중앙집권적 국가였다. 더구나 명나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필요한 때라면 언제라도 동원할 수 있는 군호(軍戶)가 200만에 달했다.

하지만 그것은 서류상에 존재할 뿐 실질적으로 10% 이하에 불과했고, 1~2%에 그친 지역도 있었다. 군수품 보급체계도 정상이 아니었다. 중개창고가 세워져서 물자를 수집하고 발송하는 경우는 결코 없었다. 물자는 부현(府縣)에서 부현으로 얼기설기 얽힌 짧은 공급로를 통해 운송되었다. 각현의 지현은 수십의 군사단위에 일정한 양의 물자를 지급해야할 의무가 있었고, 각 군사단위는 수십 개의 현으로부터 물자를 지급받았다.

이러한 체계 때문에 상위 군사단위는 상황변화에 따라 보급지점과 보급망을 선택할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어떤 현이 물자제공을 하지 못할 사정에 처할 경우 다른 현에서 그 부족분을 보충할 능력도 의무도 없었다. 이러한 보급체계가 200년 이상 운영되어 오면서 현실은 서면상의 규정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일원적인 통제기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수품의 제조기술도 정교화될 수 없었다. 군수품의 품질은 그것을 만드는 마을의 기술수준에 따라 차이가 났다. 황궁의 시위대는 황성장인들이 만드는 고품질의 갑옷과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야전부대가 착용하는 무기와 전투복은 종이로 속을 채워 누빈 목면 옷이었다. 명나라의 정규군은 일반 농민들과 구분하기도 힘든 거지와 같았다.

그 어떤 뛰어난 무관도 중국 명나라의 군수품 품질 향상을 이룰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 없었다. 여러 마을에서 조세의 일종으로 상납했던 군수품의 품질은 조악하고 규격도 제각기였다. 한마디로 짝퉁으로 무장한 군대의 군사력은 형편이 없는 수준이었다.


짝퉁 부품의 최대피해자, 중국군

현대의 중국 군대는 어떠할까? 중국은 그동안 대만 해협에서 대만과 무력 충돌할 경우 공군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를 개발해 왔다. 중국이 대만 해협을 24시간 감시하려면 AWACS기 8대가 필요했다.

하지만 중국의 조기경보기 구입과 개발은 미국의 집요한 방해를 받았다. 중국은 2000년 7월 이스라엘로부터 AWACS에 필요한 팰콘 타입 레이더 4대를 구입하는 10억 달러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미국은 "국가의 전략적 이해가 걸린 사안"이라면서 이스라엘이 판매를 취소하지 않는다면 재정지원을 중단하겠다고 경고했었다.

자존심이 상한 중국은 포기하지 않았다. 13명의 정예요원을 러시아로 보내 조기경보체제 운용에 대한 연수를 받았고, 러시아의 중형 수송기 일류신-76기를 40~50대 도입키로 계약했다. 수입한 레이더를 이 수송기의 지붕에 얻는 형태로 AWACS기를 개발했다('쿵징(空警,KJ)-2000'). 6년간 심혈을 기울인 사업이었다.

중국의 보안은 철저했다. 쿵징이 지상으로 보내는 신호를 미국이 낚아채 공중조기경보 통제기의 기술 수준을 알아챌 것을 우려했다. 전자공학 및 항공전자공학 기술자 35명을 항공기에 직접 태운 채 실험을 진행했다. 하지만 문제는 보안이 아니라 짝퉁 부품에서 터졌다.

중국산 짝퉁 부품이 들어간 그 비행기에 원인불명의 사고가 유령처럼 찾아왔다. 항공전자공학 전문가 35명이 몰살했고, 중국의 공중조기경보통제기 개발이 큰 타격을 입었다. 중국 공군 역사상 최악의 재난이었다(2006년 6월).

현재 중국의 짝퉁 부품은 미군의 전력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장비의 신뢰성을 좀먹고 있다. 하지만 자국의 짝퉁 부품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중국도 그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코브라의 독이 자신에게도 치명적이듯이 말이다. 작년 7월 그간 미국의 아파치 공격용 헬기에 접근하는 성능을 가진 것으로 중국이 호언해온 자국의 ZW-10 무장공격 헬기가 시험비행 도중 원인불명 사고로 추락했다.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이 헬기의 시제 1호는 개발 첫 해인 2003년에 공중에서 폭발했다. 그해 5월에도 중국의 북해함대 316잠수함이 침몰해 승무원 70명 전원이 사망했다.


  ▶아파치헬리콥터(Apache helicopter)=베트남전쟁에서 AH-1 코브라 공격용 헬기의 운용 경험을 바탕으로 1972년부터 개발이 시작돼 1984년 최초로 미국 육군에 지급, 전력화되었다. 유럽 전장 환경에서 바르샤바조약기구 전차를 저지하기 위하여 특별히 설계된 공격용 헬기다. 강력한 무장과 야간 전투능력을 갖추고 있다. 목표물 탐색 및 선정 시스템은 광학조준기와 적외선전방탐지장치, 고화질 텔레비전, 레이저 조준기, 레이저 및 텔레비전 추적장치로 구성돼 기수 앞부분에 탑재되어 있다.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Airborne Warning And Control System·사진)=처음 공중조기경보에서는 지상의 레이더 경계관제 유효권의 확대를 목적으로 항공기에 레이더를 적재하고, 지평선 끝에서부터 저공으로 진입하는 적기의 조기 탐지·경계를 담당하는 E2형기가 사용되었다. 여기에 방공 지휘관제 및 전자대공방위 기능을 부여한 E3형기가 개발됐는데 이를 AWACS(에이왁스)라고 한다. E3형기는 적재하는 전자기기에 의해서 공중의 항공기 동정뿐만 아니라 지상 및 수상을 이동하는 탱크·차량·함정 등의 동향이 수백 ㎞에 걸쳐 탐지가 가능하며, 기상(機上)에 부여된 지휘통제기능에 의하여 그 방면의 전술 작전지휘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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