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는 친스페인 정권이 들어설 수도, 아일랜드에는 스페인이 사주한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스페인이 영국을 침공한다는 결정적인 정보가 로마교황청에서 흘러나왔다.
"펠리페가 침공한다고!" "예. 여왕폐하." "스페인이 세계최대 부국이기는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야." "그 사람은 가톨릭 광신도라…." "영국을 장악하려면 10만의 병력이 필요하고, 함선 500척을 동원해야 해. 적어도 여기에는 100만 파운드의 비용이 들어갈 것이야." "여왕폐하. 로마의 교황(식스투스 5세)이 전비로 25만 파운드를 펠리페 왕에게 보조하기로 약속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고민에 빠졌다. '네덜란드 전쟁은 돈만 들고 성과는 없다. 이제 스페인의 무적함대(아르마다)와 일전을 겨루어야 하는데 돈이 얼마나 들겠는가. 스페인 놈들이 오기 전에 우리는 파산할 것이야!'
여왕의 해결사 해적두목
여왕도 자신의 전함 6척과 돈을 지원했다. 1587년 4월 드레이크는 스페인 카티스항과 그 주변을 공격하여 100여척의 배들을 파괴했다. 5월 아조레스제도에서 스페인의 금은보화가 선적된 보물선을 나포했다. 화물의 가격은 11만 5000 파운드에 달했다. 드레이크가 파괴한 스페인 배들의 3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여왕은 그 가운데 4만 파운드를 자신의 투자분에 대한 이득으로 챙겼고, 드레이크에게 1만7000 파운드를 주었다. 그 밖에 투자한 런던의 상인과 선원들에게 이익이 분배되었다.
1588년 7월 21일 영국함대가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만났다. 영국 선원들은 무적함대의 위용에 전율했다. 거대한 초승달 모양의 대열이었다. 마치 바다 전체가 무적함대의 무게에 깔려 신음하는 것 같았다. 스페인 해군은 선박과 선박을 붙여놓고 병사들이 적선으로 넘어가서 격전을 벌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영국인들이 거리를 두고 피하는 바람에 한 번도 전투를 못했다.
스페인함대는 둔했다. 7월 28일 스페인 무적함대는 흩어진 대오를 갖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영국이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다. 바퀴가 장착되어 있는 영국의 대포가 더 빨리 발사됐다.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발사를 했고, 스페인함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총 34척을 잃고 스페인 함대가 패퇴했다. 96척의 배는 북해를 북상하여 스코틀랜드를 돌아 아일랜드 방향으로 남하하다가 폭풍을 만나 26척이 침몰했고, 7000명이 죽었다. 최종 귀환한 배는 130척 가운데 70척이었고, 병력은 3만 가운데 1만이었다.
임박한 위험이 물러나자 엘리자베스는 군대의 지출을 줄였다. 시기상조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대부분의 육군과 해군을 해산했다. 재무장관은 갈채를 보냈다. 전쟁 중 돈이 모자라 그녀는 1588년 1월 부유한 시민들에게 강제로 7만 5000 파운드를, 또 3월에 런던의 상인들에게 10%로의 이자로 3만 파운드를 빌려야 했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10만 파운드를 지출해야 했다. 여름이 되자 그 돈도 다 소진되어 런던의 상인들에게 2만 6000 파운드를 빌려야 했다. 심각한 자금부족으로 정부는 무적함대와 싸운 선원들에게 보상을 해주기 어려운 처지였다. 1590년에 가서 그녀는 12만 5000 파운드어치의 왕실 토지를 팔아야 했다.
여왕은 다시 드레이크에게 사주했다. 1592년 그는 인도에서 오는 마드레테디오스호를 나포했다. 화물은 도자기 비단 보석 금 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총 가치는 무려 50만 파운드에 달했다. 그러나 돌아온 배에는 14만 파운드어치뿐이었다. 여왕이 진노했다. "나머지 36만 파운드의 물건은 어디로 증발했다는 말인가?" "폐하의 선원들이 대량으로 빼돌렸습니다." "가장 좋은 물건은 그들이 다 차지하고 이게 뭐야." "하지만 그것은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폐하를 위해 무적함대와 싸웠던 병사들이기도 합니다." "빨리 관리를 보내 도난당한 전리품을 되찾아 오시오."
하지만 전리품 대부분은 런던의 상인들에게 넘겨진 상태였다. 급해진 여왕은 자신도 남은 물품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파산에 직면한 여왕에게 체면이라고는 없었다. 여왕에게 돌아올 것은 14만 파운드의 20%였지만 50%를 챙겼다. 귀족 투자자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런던금융시장에 전비를 꾸러온 일본 대장상
이로부터 313년 후 일본의 대장성 장관 다카하시가 전쟁자금을 구하기 위해 런던에 나타났다(1904년).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니? 이거 누가 돈을 빌려주겠습니까?"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을 놓고 돈을 벌기 위해 세계의 자본가들이 몰렸다. 당시 동양의 작은 섬나라 일본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은 자국의 공채를 런던 시장에 상장했다. 별 반응이 없었다. 반면 파리에서 러시아의 공채는 불티나게 팔렸다.
다카하시는 포기하지 않았다. 첨단무기를 영국에서 도입해야 하는데 그 비용을 구하지 못하면 일본이 패배할 판이었다. 예기치 않은 구원의 손길이 왔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유태인이 탄압을 받고 있었다. 화가 난 미국의 유태인들이 500만 파운드를 빌려 주었다. 유럽의 은행가들과 500만 파운드의 외채 가계약을 체결했다. 기한 7년, 이자 6부에 일본의 관세수입을 저당 잡히는 조건이었다.
그해 7월 압록강 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하였다. 뉴스가 전해지자 일본의 공채는 런던에서 신청 발행액의 10배 이상이 상승하였다. 이후 다카하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총 1억 2000만 파운드의 외채를 더 빌릴 수 있었다. 담보로 일본의 담배전매이익과 철도수익까지 잡혔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요동반도의 여순과 대련에서 일본 육군이 승리하고 동해에서 해군이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했다.
전쟁은 돈 싸움
일본의 경제적 능력을 훨씬 상회했던 러일전쟁은 전비의 82%를 공채로 충당하였고, 공채의 반을 외채에 의존해야 했다. 따라서 외채 모집 여부에 따라 전쟁이 판가름 날 수 있을 정도로 빚으로 지탱된 전쟁이었다. 승리를 위해 산업혁명이후 선진국들이 개발한 모든 무기들을 다 수입해야 했다. 더 전쟁을 지속했다가는 나라가 파산할 지경이었다. 일본에 돈을 빌려준 미국과 영국의 거대 자본가들이 그것을 원치 않았고, 미국의 알선으로 일본은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1905년).
스페인에 승리한 영국은 세계제국이 되었고, 러시아에 승리한 일본은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판 중심으로 역사를 보았을 때 느끼는 지금 우리 시각이다. 당시 두 나라의 재정은 파산에 이르렀고, 그 국민들은 등골이 휘어 있었다. 승리에 대한 기쁨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투입된 전쟁비용만 되돌려 받는다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영국 여왕은 재정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해적질을 해야 했고, 일본천황은 한반도를 점유하고 수탈을 자행해야 했다. 우리는 여기서 폭력 자체가 하나의 경제적 잠재력이라고 하는 칼 마르크스의 지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하면 폭력은 기존 사회가 새로운 사회를 잉태하고 있을 때에는 언제나 그 산파가 된다고 한다('자본론Ⅰ').
▶러일전쟁 = 1904년 2월 8일에 일본함대가 여순의 러시아군함들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시작돼 1905년 9월 5일 러-일 강화가 체결돼 끝난 전쟁이다. 한국과 만주의 분할을 둘러싸고 싸운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영-일 동맹과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있었다. 러시아는 패배의 결과로 혁명운동이 진행되었고, 일본은 전승으로 한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만주로 진출했다.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 1533년 9월 7일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났다. 이복 언니 메리 1세가 죽자 뒤를 이어 25세에 즉위하였다. 전 국민에게 영국국교회의 의식과 기도서를 의무화하여 가톨릭을 억압했다. 의회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추밀원(樞密院) 중심의 정치를 폈다. 세실, 월싱엄 등을 중용했다. 금과 은의 가치를 일정하게 하여 화폐제도를 통일하고, 물가의 앙등을 억제했다. 유리·제당·제분·금속·광산 등 각종 공업 분야에 독점권을 부여해 보호육성을 도모하는 등 중상주의정책을 채용했다. 특히 역점을 둔 모직물공업의 발전은 상인들의 무역확대를 촉진하게 하였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상권을 잡았다(1588년).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설립(1600년)과,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기초가 확립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