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지난 7월 4일 아프간인 등 2명을 체포했다. 탈레반의 사주를 받은 그들은 헤로인과 폭약 원료물질인 '무수초산' 12t을 아프간으로 밀수출하려고 했다. 무수초산은 주로 헤로인 정제에 사용된다. 미국과 일본에서 생산된 무수초산이 한국을 통해 아프간으로 수없이 반입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한국인 화공도매상은 총 50t 분량의 무수초산을 아프간으로 밀수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탈레반의 손길이 우리 한국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6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한국군의 아프가니스탄 재파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월스트리트저널'). 부시는 지금 아프간 전쟁의 수렁에 빠져있다. 9·11사태 후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숨겨주고 있는 아프간을 공격했다. 알 카에다와 탈레반이 카불에서 쫓겨났고, 미군이 입성했다. 하지만 현재 미국이 세운 아프간정부는 수도 카불에서조차 완전한 통제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2006년 이후).
남중국의 남송은 75년 전인 1279년까지 몽골에 저항을 했다. 그곳은 중국 전체 인구의 82%가 살고 있는 곳이고, 생산력이 높고 풍부했다. 몽골인들은 그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유목민인 몽골인들은 강남의 토지와 백성을 자신들이 소유한 가축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가난은 강남이 으뜸이고 부유함은 북경에서 자랑했다는 말이 나왔다.
반란 진압과 출혈
몽골인들이 중동에서 데려온 전체 인구 3%의 아랍인들이 모든 분야에서 우위를 차지했고, 그들이 있는 곳에 몽골기병의 정예군단이 있었다. 압도적인 군사력이 있는 한 몽골제국 치하의 남중국인들은 꼼짝도 못했다. 하지만 1330년부터 몽골황실의 내분이 일어났다. 그 병력은 양분되어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고, 그 수가 반으로 줄었다.
몽골의 힘이 약해지자 남중국에서 산발적인 반란이 지속적으로 일어났고, 군대가 그것을 막기 위해 많은 예산이 들어갔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더욱 더 가혹한 경제적 수탈이 감행되었고, 그것이 또 다른 반란을 부르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산발적 반란은 더욱 더 조직화되어갔다.
공민왕대에 원제국은 남중국에서 세금을 거두기가 쉽지 않았고, 어려운 재정은 지폐 발행을 증가시켰다. 지폐의 가치는 거듭 하락했고, 생필품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현재 달러의 가치가 하락하고 금·석유와 원자재 가격이 치솟는 것도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간에 쏟아 붓는 전비가 하나의 원인이 되고있다. 실제 미국민 10명 가운데 7명 이상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CNN).
이슬람 세계에 대한 미국의 만행
9·11사태 직후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의 아프간 침공을 예상했고, 바로 그곳에서 미국과 전쟁을 벌이기를 원했다. 아프간 사람들은 치밀한 전략과 인내심, 종교에 기초한 불굴의 정신으로 이미 영국과 소련의 침공을 물리친 바 있었다. 이 전쟁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다. 빈 라덴은 미국에 대한 이슬람사람들의 분노 속에서 등장한 사람이다.
미국은 이슬람에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는 이스라엘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이란과 파키스탄의 핵보유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적극 도왔다. 이스라엘은 이슬람 사람들을 겨냥한 200개의 핵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체첸에서 이슬람인들을 학살하고 있는 러시아의 만행을 묵인했으며, 신장에서 이슬람 위그루인들을 탄압하는 중국을 지지했다.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부추겨 이란과의 8년 전쟁을 일으키게 했고(1980년), 미국은 양쪽에 모두 무기를 공급했다. 전후에 경제적으로 쇠약해진 이라크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 석유를 탈취하려고 했으며, 그것이 무산되자 쿠웨이트를 시켜 이라크에 채무이행을 강요하게 했다. 걸프전 이후 이라크에 대한 경제봉쇄를 단행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고통 받았다.
미국은 3만 명의 왕족들이 매년 국가재정의 40%를 소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부패한 사우디 왕정의 버팀목이며, 국민들을 탄압하는 파키스탄의 군부독재 정권의 대부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은 3번째 연임을 하기 위해 헌법을 정지시키고 국회를 해산했다(2007년 11월 3일).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진 가운데 그의 정적인 부토 전 총리가 귀국했고, 그녀는 암살되었다(2007년 12월 27일).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을 도운 무샤라프의 장기집권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친미적인 그에 대한 파키스탄 국민들의 분노는 탈레반이 부활하는 토양이 되었다. 이미 2006년 9월 탈레반은 아프간과 인접한 파키스탄의 와지리스탄을 접수하고 여세를 몰아 북쪽으로 도시를 하나씩 장악해갔다. 무샤라프가 국가 비상사태를 발표한 후 그들은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파키스탄 내 활동영역을 더욱 확대하고 있다. 세계 13억 이슬람교도들의 상당수가 미국의 가치관이 아니라 그 행위 때문에 미국을 증오하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달러신앙에 비수를 꽂은 빈 라덴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이 전쟁이 지속되기를 원하고 있는 측이 빈 라덴이라는 점이다. 다양한 인종의 미국인들을 결집시키는 힘은 '아메리카 드림'이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달러의 숭배다. 미국의 중심이 경제에 있다는 것을 간파한 빈 라덴은 그것에 결정타를 날리기로 작정했다. 그의 전쟁 목적은 미국경제의 출혈을 지속시키는 일이다. 미국은 전쟁에 언제나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붓는다.
빈 라덴은 미국 군산복합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미국 군인들은 부시 미 대통령이 이라크로 전쟁을 확대하는 어리석은 짓을 반대하지 않았다. 역효과를 내는 정책을 그들이 묵인하는 이유는 사적인 이기심 때문이다. 퇴직을 앞둔 그들이 하는 말이 있다. "이제부터 진짜 돈 좀 벌어 봐야지." 그들은 현직에 있는 동안 사사건건 반대만 했다는 오명 때문에 퇴직 후 정부의 일을 주로 하는 기업으로의 취업이 어려워질 것을 두려워한다.
퇴직과 동시에 군인들은 방위산업체에 들어가 동료들에게 군복에서 전투기까지 온갖 군수품을 팔거나, 이스라엘이나 사우디를 위해 일하는 로비스트 회사를 다니고, 펜타곤으로부터 컨설팅 계약을 따낸다. 군인들 가운데 이라크와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든 사람의 적이 된다.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일에 왜 반대해!"
2003년 미국이 이라크로 전쟁을 확대하자 동굴 속에서 오사마 빈라덴은 신에게 감사드렸다. 미 의회조사국(CRS)에 따르면 이라크 전쟁 비용으로 지금까지 무려 6480억 달러를 지출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2008년 수준으로 환산한 베트남전 비용 6860억 달러에 육박하며, 그 액수가 앞으로 얼마나 더 늘어날 지 알 수 없다. 어느 저명한 경제학자는 부상자의 장기치료비 등을 포함하여 3조 달러로 보기도 한다.
제국의 딜레마
몽골의 원제국도 끊임없이 대외 팽창을 시도해 세금을 낼 수 있는 인구와 자국의 지폐사용지역을 확대했다. 그 팽창은 어느 순간 멈췄지만 관성이 붙은 지폐 발행은 끊이지 않았다. 물가가 오르고 인플레이션은 지속되었고, 그것이 반란의 토양이 되었다. 인플레이션은 지폐를 소유한 모든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착취한다. 원제국이 고려에 파병을 요구했을 때는 나라 형편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몇 년 후 원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홍건적이 고려에 침입해 들어왔을 때 백성들은 이를 실감했다(1359년). 현재 한국의 아프간 파병을 원하고 있는 미국은 어떠한 상태에 봉착했을까.
막대한 마약 자금을 배경으로 탈레반은 병사들에게 적지 않은 급료를 주고 있다. 그들의 아편 생산량은 6100t으로 전 세계의 92%에 이르는 규모다(2005년). 아이러니하게도 미국과 유럽에 거대한 마약시장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은 미군과 전쟁을 지속할 수 있다. 미국이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지금 떠나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고, 떠나지 않으면 멈추지 않은 출혈 속에서 고사할 것이다.
▶탈레반(Taliban)
1994년 10월, 2만5000여 명의 학생들이 중심이 돼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에서 결성한 수니파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 1994년 아프가니스탄 국토의 80% 정도를 장악한 뒤 이듬해 수도 카불을 점령, 14년간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내전과 4년 동안의 모자헤딘 권력투쟁을 종식시켰다. 9·11 테러의 배후인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를 숨겨둔 채 미국에 인도하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침공을 받았다. 하지만 탈레반은 파키스탄과 접경지역으로 숨어들어 세력을 키웠고 아프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나아가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공민왕(恭愍王·1330~1374)
충숙왕의 둘째아들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원나라에 가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다.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이 폐위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원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린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했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하자 이인임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그러나 그 뒤 홍건적·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으로 국력이 소모되었고,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정치를 신돈에게 맡겨 정국이 문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