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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경제권을 지배해 왔던 미국 달러화는 EU제국의 유로화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사진은 유로화(위)와 달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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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로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달러 가치가 지금 하락하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서 고스란히 손해를 보라는 말씀입니까. 유로화로 주세요." 세계 최고의 모델 지젤 번천이 신규 계약을 체결하면서 유로화를 달라고 요구했다(2007년 말). 어떻게 달러화가 이처럼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을까.
과거 달러화는 부의 상징이었다. 세계 2차대전 후 달러가 세계의 기본적 기축통화가 되고 미국은 세계통화의 발권국의 지위를 획득했다. 전쟁으로 독일과 일본의 산업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영국은 전비 지출로 도산했다. 미국은 세계의 모든 부를 거머쥐고 있었다.
석유와 달러의 결합
1971년까지, 미화 1달러는 고정된 양의 금(金)과 동일한 가치를 지녔다. 외국 은행들은 보유한 달러를 금으로 교환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끝이 보이지 않은 수렁에 빠졌고,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 1971년 닉슨은 달러화의 금 교환 의무를 해제했다. 대신 미국은 OPEC(석유수출국기구)에 접근해 제안했다. "앞으로 미국이 자국생산 석유만을 소비하지 않고 OPEC회원국으로부터 석유를 수입하겠소. 달러화만을 결제대금으로 받으시오." "좋소." 달러가 석유와 결합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1971년부터 석유를 필요로 하는 나라들은 엔 마르크 프랑 등을 내고 달러를 사야했다. OPEC 가입국은 이 달러화를 미국에서 쓸 수도 있지만 전 세계 다른 나라에서도 쓸 수 있다. 석유 수입국들은 앞으로도 계속 석유를 필요로 하고, 따라서 달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달러화는 미국 바깥에서 지속적으로 순환한다.
달러화의 수요가 폭발했고, 미국은 더 많은 달러화를 찍어내야 했다. 자연스러운 방법 중 하나가 미국의 무역적자였다. 외국에서 물건을 사오고 달러화를 주면, 이 달러화는 석유수입국들과 OPEC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순환하고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므로, 미국은 아무런 대가도 줄 필요가 없다. 따라서 미국의 쇼핑은 공짜가 된다. 지속적인 달러 수요는 그 도둑질을 만성화시켰다. 석유의 가격과 수입량은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무역량도 팽창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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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이후 미국의 무역수지는 한 번도 개선된 적이 없고, 개선 의도도 보이지 않았다. 2004년 단 한 해 동안 미국의 무역적자가 무려 6500억 달러에 이른다. 지나친 지출은 그 나라의 화폐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화폐의 수요는 줄어들고 환율은 떨어진다. 하지만 이 법칙은 미국에 대해서만은 예외이다. 전 세계가 석유를 수입하기 위해 달러를 필요로 하는 한, 언제나 달러화 수요는 존재한다고 전문가는 말한다.
반란과 미숙한 응징
반란이 일어났다. 바그다드의 후세인은 2000년 11월 6일, 석유대금을 유로화로 받겠다고 선언했다. 달러화 가치는 급락했고, 2002년 7월 IMF(국제통화기금)는 달러화가 붕괴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미국은 2003년 3월 19일 이라크를 침공하였고, 같은 해 6월 5일 이라크의 석유무역 통화를 다시 달러화로 전환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은 시아파 이슬람의 종주국인 이란의 강적이자 수니파의 첨병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다. 이란의 조정을 받는 이라크 내 시아파가 이라크의 70%를 장악했다. 가만히 앉아 코를 푼 이란은 석유대금을 유로화로 받겠다고 선언했다(2003년). 나아가 석유거래소를 설립해 달러화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려고 했다. 2006년 초의 팽팽한 긴장은 이 때문이었다. 직후 푸틴이 러시아에 석유거래소를 열었고, 2006년 6월 8일 남아도는 달러화를 다른 중앙은행에 판매함으로써 달러화 환율에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세계 달러화 수요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몽골 달러, 지폐 보초
이보다 800년 전 몽골이 발행한 지폐 사용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이란-이라크 지역에서 있었다. 바그다드를 포함한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고 있던 몽골의 일칸국(1259~1336)은 원나라에서 사용되는 지폐제도를 도입하려다 실패했다. 지역 상인들이 지폐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인들의 불만은 폭동으로 번질 것 같았다. 당국은 이 반란의 성공적인 진압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일칸국에서 지폐제도가 철회되었고, 금과 은이 본래의 역할을 수행했다.
중국을 지배하던 몽골의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제국 전역의 교역 속도를 높이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지폐의 사용을 급격하게 확대시켰다. 1260년 '중통보초'라 불리는 지폐 7만3352정(錠)을 발행했다. 직후 금은의 사매매를 금지했고, 쿠빌라이는 태환준비금을 은으로 확보했다. 지폐는 태환준비금 없이는 발행되지 않았고, 신용도가 높았다. 물론 세금도 그것으로 받았다. 원나라 정부의 징세가 지속되는 한 지폐는 누구나 필요했고, 금은을 주고 지폐를 사야했다.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 도착했을 때 이미 지폐가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폐는 다양한 크기의 사각형으로 잘라 그 가치를 기록하고 주홍색 도장을 찍었다. 원나라에서 지폐를 거부하면 사형을 당했다. 사람들은 지폐를 반겼다. 그것으로 진주 보석 금 은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
1276년에 지폐의 발행량이 100만 정(錠)을 돌파했다. 고려의 마산에서 출정한 2차에 걸친 일본침공(1274, 1281년)과 그해 남송을 병합하면서 치러야 했던 전비가 막대했기 때문이다. 원나라는 1281년 일본으로 파병될 고려병사들에게 급료로 모두 3000정, 은으로 환산하면 7만 5000 양(兩)을 주었고, 고려가 동원한 말 값으로 800정(은 2만양) 전함 건조비용으로 3000정(은 7만5000양)을 지불했다('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에 엄청난 원나라 지폐가 흘러들어왔다. 베트남전에 군대를 파병한 한국에 달러가 유입한 상황을 연상케 한다. 1287년에 원나라 정부는 '지원보초'라는 고액권 화폐를 발행했다. 은과 지원보초의 교환비율은 중통보초의 발행 때와 마찬가지로 1대 2였으며, 중통보초의 가치는 지원보초의 1/5로 절하됐고, 발행은 중지됐다. 엄청난 통화의 팽창이었다. 원세조 쿠빌라이는 화폐의 가치를 떠받쳐 줄 실질적인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한 상태였다. 그는 세계 최대의 생산지이자 인구 밀집지대인 남송(남중국)을 무력으로 점령했기 때문이다.
원나라에 세금을 납부해야할 남송 사람들은 지폐인 보초를 사기 위해 정부에 금과 은을 지불해야 한다. 가구를 구입한 뒤 가구 대신 영수증을 받고, 그 영수증을 들고 창고에 가서 가구와 교환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폐는 기본적으로 금과 은을 빨아들이는 영수증이다.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어떠한 경제활동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원나라 정부가 발행한 지폐를 필요로 한다. 지폐에 대한 지속적 수요가 있는 한 원나라는 재정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은이 중동으로 유출되고 있었다. 중동지역에서 은의 가격은 상당히 높았다. 세금으로 막대한 은을 거둬들인 원은 오르독이라는 이슬람 상인들을 시켜 중동지역에서 엄청난 물건들 구입했고, 그것을 중국과 고려 등에 유통시켜 이익을 챙겼다. 그 이익은 은을 태환하기 위한 준비금으로 예치되지 않았고, 왕족과 귀족들의 유흥과 사치에 들어갔다. 1294년에 태환준비금으로 비축된 93만6950양(兩)의 은 가운데 19만2450양 만이 목적대로 사용됐다. 지폐의 가치는 서서히 하락했다. 원제국은 빚더미 위에 서 있었다.
달러, 녹색 암세포 위의 한국경제
현재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해외부채를 무한히 늘리고 있고, 더 이상 이 채무를 갚을 능력이 없다. 달러화 환율은 중국 일본 대만 한국의 중앙은행이 보유한 달러 보유고에 의해 인공적으로 떠받쳐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 달러 보유량이 줄면 원화의 환율이 하락한다. 환율 방어에 천문학적 돈이 들고 달러화 약세에 따라 외환보유액의 환차손도 눈덩이처럼 불어나 국민 전체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이렇게 미국에 세금을 내고 있다.
달러 위에 만들어진 우리 경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원나라 지폐위에 만들어진 고려의 경제가 교훈을 준다. 공민왕대에 국고에서 원나라 지폐의 보유량이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다. 국왕의 연회비와 사찰 조영에도 지폐가 사용될 정도였다. 귀족과 관리 그리고 사찰의 지폐 보유량도 엄청났다. 심지어 민간에서도 지폐는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었다. 하지만 원이 쇠퇴하고 있었다(1356년). 중국의 남쪽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원이 몽골고원으로 쫓겨나자 지폐는 휴지조각이 되었다(1368년). 고려의 왕실과 귀족, 대상인들은 도산했다. 남쪽에서 왜구가 몰려와도 파산한 고려는 이를 막지 못했고, 북방의 이성계 군벌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388년 위화도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섰다. 조선이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으로 일관하게 된 것도 부도난 지폐에 대한 기억 때문은 아닐까.
▶유로화(EURO貨)
EU(유럽연합)가 사용하는 단일화폐의 명칭. 1995년 12월 15일 에스파냐 마드리드에서 열린 EU 정상회의에서 15개 회원국들은 1999년 1월 경제통화동맹(EMU)을 출범시키고 단일통화 명칭을 '유로'로 하는 데 합의하였다. 유로는 7종의 지폐와 8종의 동전으로 구성되며 제작·발행은 각 나라가 독자적으로 한다. 2002년 1월 유로 시행에 참가한 국가는 벨기에·프랑스·독일·이탈리아·룩셈부르크·네덜란드·아일랜드·그리스·포르투갈·에스파냐·핀란드·오스트리아였으며, 영국·덴마크·스웨덴은 불참했다.
▶남송(南宋·1127∼1279)
여진(女眞)족이 세운 금(金)이 요(遼)를 쳐서 멸망시킨 여세로, 1126년 송나라 수도 카이펑(開封)을 점령하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포로로 잡아갔다(북송 멸망). 난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한 흠종의 동생 고종(高宗·1127∼1162)이 남중국의 임안(현재 抗州)에 도읍하여 남송을 재건하였다. 금(金)과 화의하고 중국의 남부지역을 영유하였으나, 1234년 몽골에 의하여 금(金)나라가 멸망하자 몽골의 압박이 점점 심해져갔다. 1276년 마침내 몽골군에 의해 임안이 함락되어 실질적으로 멸망하였다.
<30> 美 제국과 당 제국 제국의 번영은 '물고 물리는'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미국은 자신이 키운 후세인이 반항하자 토사구팽했고 당 현종은 사냥개로 키운 안록산에 물렸다 그 과정에서 두 제국은 내부붕괴 위기에 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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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당 현종 | | | | | 10대 사담 후세인. | | "알라는 위대하시다! 성전을 위해 싸우는 이라크 전사 만세!" 사담 후세인이 처형되기 적전에 남긴 말이다.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하여 점령하고(2003년), 그 대통령을 체포하여 사형시켰다(2006년). 후세인은 본래 미국이 키워낸 사람이었다. 1937년 4월28일 티그리스 강변의 평화롭게만 보이는 농촌에 한 아이가 유복자로 태어났다. 운명을 예견하듯 '충돌하는 자' 라는 뜻의 '사담'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이 아이는 가난과 계부의 구박 속에 자랐다. 주변에는 운동을 벌이던 친척들이 있었다. 투사로 자라난 그는 투옥과 도주를 반복하는 험한 인생을 살았다. 1958년 이라크에서는 카심이 이끄는 '자유장교'의 군사 쿠데타로 친 서방 왕정이 붕괴된다. 당시 가장 영향력이 큰 집단은 공산당이었다. 미국은 중동에서 안정적인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해 친미적인 정치 세력이 필요했고, 이라크 바트당을 앞세워 카심 정부를 무너뜨리려 했다. 바트당은 노동계급이 행위 주체가 되는 것을 배격했다. 미국이 키운 후세인 | | |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자신의 고향인 북부 티크리크 외곽의 한 농가 지하에 땅굴을 파고 숨어 있다가 2003년 12월 14일 미군에 의해 생포돼 끌려 나오고 있다. 미국이 후세인을 토사구팽하는 과정 중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 | 바트당원이 된 후세인이 명성을 얻은 것은 1959년 카심 암살에 가담해 실패하고 체포되었을 때였다. 1963년 2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바트당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미국 CIA는 바트당에게 공산당원들의 명단과 주소를 알려 주었고, 수천 명이 살해되었다. 1963년 11월 알-살람 아리프의 친위 쿠데타로 바트당은 정권을 상실했고, 후세인은 체포되어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바트당은 1968년 7월 다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재집권에 성공했다. 후세인은 혁명평의회 부의장이 되었다. 후세인이 1979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해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 미국의 꼭두각시 팔레비 왕정이 타도됐다. 다급해진 미국은 후세인에게 원조를 제공하는 대가로 이란 혁명을 봉쇄하는 임무를 맡겼다. 미국은 무기와 기술뿐 아니라 이란군의 이동 정보까지 제공했고, 화학 무기의 원료를 팔았다. 이란-이라크전에서 미국의 목표는 석유가 나는 두 나라를 모두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말했다. "나는 그들이 서로를 죽이기를 바란다." 전후 궁핍해진 후세인은 경제 사절단을 바그다드에 초청했다(1989년 6월). 기대를 품고 있던 그에게 미국 측이 말했다. "투자에 앞서 조건이 있습니다." "예!" "이라크 정부가 가지고 있는 대외 채무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뭐?" "조건은 이라크 국영 석유산업을 우리 미국의 석유회사들에게 넘기는 것이오." "내 정권의 돈줄인 석유산업을 포기하라니." "그렇지 않으면 투자를 할 수 없어요." "나의 외채는 미국의 적인 이란과 전쟁을 하느라 짊어진 것이다. 내가 사기를 당했어! 미국은 내가 약해지기를 기다려 석유를 탈취하려고 했던 것이야." 협상은 무산되었다. 미국이 약속했던 23억 달러의 차관제공도 동결됐다. 후세인은 국제 금융계에서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었다. 8년 전쟁 동안 이라크에 막대한 전비를 지원했던 쿠웨이트도 돌변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값 폭락을 막기 위해 마련된 수출량 제한 원칙을 깼고, 이라크 국경부근에 석유를 시추했다. 1990년 7월에는 원유 값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후세인은 빚을 갚을 수 있기는커녕 식량 수입마저 어렵게 됐고, 8월 2일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1989년 소련의 붕괴는 미제국주의에 2차 대전 이후 최대의 승리를 안겨주었고, 1991년 이라크에 대한 전쟁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1차 걸프전). 미국의 10년 이상에 걸친 봉쇄로 이라크는 황폐화됐다. 현재 고유가에도 불구하고 산유국들은 3년간 30%나 떨어진 미국 달러 가치하락으로 실질적 이득은 많지 않다고 한다(2007년 기준). 석유를 달러로만 구입하게 하는 석유-달러본위제 때문이다. 달러의 인플레이션이 무르익었다. 석유대금은 싼 달러로 받고, 상품수입대금은 비싼 유로화로 지급해야하는 게 산유국들의 입장이었다. 2000년 9월24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원유대금으로 달러는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이라크 원유판매를 관장하던 유엔이 후세인의 손을 들어줬다. 미제국의 근간인 석유-달러 본위제를 위기에 몰아넣은 대반란이었다. 이보다 1245년 전 당 제국을 뿌리 째 흔든 반란이 있었다. 755년 11월 28일 안록산에게 운명을 결정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날 아침 그의 친위 기병대 8000명을 중심으로 중국인 병사와 유목민 병사를 합해 20만 대군이 오늘날 북경 부근에서 일제히 남하하기 시작했다. 장안으로 향하는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사방에 모래 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북소리는 천지를 진동했다('자치통감'). 안록산은 당이 키워낸 이민족 무장이었다. 당 제국이 키워낸 지능적인 전쟁기계 안록산은 아버지가 이란계 소그드인이다. 안록산이란 이름은 알렉산더(Alexander)를 한자로 부른 것이었다. 아버지는 돌궐의 칸을 위해 일을 하던 상인이었다. 돌궐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정권이 바뀌었고, 10대 중반의 소년 안록산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중국의 북경지방으로 도피했다. 당시 북경지역은 거란과 해 등 유목민이 날뛰고 있었고, 이를 막아내기 위한 당나라의 군대가 있었다. 당은 기마에 능숙한 이 소년을 환대했다. 당나라는 북방의 유목민을 그 군대로 편성하여 유목민의 공격을 막아냈다. 군내 유목민의 비율은 점점 상승했다. 안록산은 그렇게 중국의 국경수비대의 일원으로 유목민과의 사투를 벌이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733년 북경(범양)에 절도사로 부임한 장규수가 북경으로 왔다. 그는 거란족을 연이어 격파했고, 교묘한 책략으로 내부분열을 유도하여 그 족장의 머리를 현종황제에게 바쳤다. 그가 공을 세운 배경에는 안록산의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장규수를 통해 안록산은 궁정에 알려졌다. 그러나 사고가 터졌다. 그가 거란 토벌전에서 대패한 것이다. 투옥되어 죽는 날만 기다렸다. 1년의 시간이 지났고, 결국 현종의 사면으로 풀려났다. 관직이 박탈된 그는 백의종군을 원했다. 포승줄에 묶인 채 1년 동안이나 생사의 기로를 헤맨 것이 뼈에 사무쳐서인지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것이 현종의 귀에 들어갔고, 세상에 이름을 냈다. 742년 안록산은 북경에 본부를 둔 평로군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휘하의 병력은 3만7500명 이었다. 이듬해 정월 안록산은 장안에 갔다. 황제의 측근에게 뇌물을 충분히 뿌려 놓았기 때문에 현종의 신임도 두터웠다. 연회에서 현종을 만났고, 744년 3월에 9만1000명의 병력을 통솔하는 범양절도사를 겸하게 되었다. 현종은 이민족은 무예에 뛰어나고 정치에 해독을 끼칠 우려가 적다고 생각했다. 안록산은 전쟁의 기운이 약화되면 일부러 거란족과 해족을 자극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조장했다. 평화가 지속되면 무인의 존재는 잊혀지게 마련이다. 황제나 그 측근들이 좋아하는 전리품과 포로를 끊임없이 보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750년 안록산은 하동절도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로써 평로·범양·하동 절도사가 되어 휘하의 총병력은 18만 명으로 늘어났다. 당 전체의 병력 1/3이었다. 하북의 세력가가 된 그는 소그드 상인을 대거 유치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영내의 활발한 유통을 위해 동전주조권을 황제로부터 받아냈다. 벌어들인 돈은 다시 황제의 측근들에게 흘러들어갔다. 안록산은 정계의 부패와 관료제의 약점을 날카롭게 꿰뚫어보고 교묘하게 이용했다. 753년 정적이었던 양국충이 운남(南詔)에 파병한 당나라군대 10만 명이 전멸했다.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안록산은 사사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군대는 755년 12월 12일에 낙양을 함락시켰고, 이듬해 6월 8일 동관을 돌파한 10일 후 장안을 점령했다. 하지만 안록산의 죽음은 너무나 허망했다. 자신의 아들 안경서의 칼에 죽었다. 안록산의 동료들은 전쟁을 계속했고, 763년에 가서야 진압되었다. 반란 진압과 제국의 내부 붕괴 후세인이 그를 키워준 미국에 토사구팽 당했다면, 안록산은 그의 주인을 물었고, 자신이 키운 자식에게 죽음을 당했다. 당제국은 반란 평정에 8년이 걸렸다. 반면 미제국은 반란을 일으킨 이라크를 간단하게 점령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 보면 내용이 다르다. 이라크에 들어선 시아파 정부는 이란의 조정을 받고 있고, 미국의 영향력은 약하다. 그마저 군대 주둔비로 매주 20억 달러 이상을 투입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석유-달러 본위제의 기둥인 사우디 왕정도 언제 전복될지 모른다.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이 키워낸 빈 라덴을 포함한 사우디 이슬람 투사들이 왕정이란 폭탄의 뇌관이다. CIA는 폭발 시기를 21세기 초반으로 보고 있다. 당제국의 반란 평정이란 어감은 좋다. 당은 안록산의 부하들을 절도사로 임명하여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을 합법적인 통치구역으로 인정해주고 반란군의 붕괴를 유도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단지 안록산 군벌을 여럿으로 분할한 것일 뿐 당왕조는 군벌(번진)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에 어떠한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다. 이후 당정부가 세금을 거둘 수 있는 호구는 1/3로 줄었고, 반란 진압에 기병을 원조한 위구르에 매년 막대한 사례를 해야 했다. 제국이 번영을 누리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안에서부터 붕괴가 시작된다. 2007년 말 미국의 가계부채는 13.8조 달러로 GDP의 99.9%에 달한다. 미제국의 가장 큰 적은 거액의 전비와 재정·무역적자로 허약해진 체질이다. ▶양국충(楊國忠·?~756) 학식은 없었으나 계산에 밝았다. 양귀비의 친척으로 등용되어 재정적 수완을 발휘함으로써 현종에게 중용되었다. 752년 실권자가 되었고, 중앙정계를 그의 일파가 장악했다. 또 남조(南詔) 원정에 실패하였으면서도 이를 황제에게 숨겼고, 안록산(安祿山)과의 반목으로 '안사의 난'을 자초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