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최영교_전쟁과 시장_06

醉月 2011. 4. 2. 07:41
<26> 최충헌과 수하르토
절대권력, 세계화 앞에 무력했다
서영교 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IMF체제에 저항한 인도네시아 철권통치자 수하르토도,
팍스 몽골리아를 거부한 최씨정권도,
거대자본 앞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칭기즈칸                                                                                                                                          수하르토 말년 모습.

 

"기아 자동차가 인도네시아 합작공장을 설립하기로 했으며 인도네시아 측에서 6억 9000만 달러를 투자한다고 합니다." 1996년 기아가 인도네시아 '국민차' 사업에 참여한다는 뉴스의 내용은 이러했다. 기아의 세피아를 기본모델로 하는 국민차 사업은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하르토의 3남 토미가 주도했다. 기아는 인도네시아 권력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아버지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를 1965년부터 이끌어온 철권 통치자였다. 그는 30년 동안 자본주의 국가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 1997년 5월 인도네시아 민주당을 이끌고 있던 메가와티를 총선에 나가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했다. 반면에 차남 차녀 며느리 조카 이복동생 등 일족 30여 명을 총선에 출마시켰다. 수하르토는 슬하의 자녀 모두(3남 3녀)를 인도네시아의 재벌로 만들었고, 자신 역시 자선재단을 통해 엄청난 규모의 재산을 은닉했다. 자금은 군부를 거머쥐는 원천이었다.

정치권력을 장악한 가문이 그 나라의 경제를 주무르는 것은 언제나 있어왔던 일이었다. 고려 무신집권 시기였다. 1197년(고려 명종 26년) 여름 4월 장군 최충헌(崔忠獻)이 무인 집권자 이의민(李義旼)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사건의 발단은 한 마리의 비둘기에서 시작되었다.


인간 백정을 죽인 최충헌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가 분노했다.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李至榮)이 우리 집 비둘기를 빼앗아 갔다구?" 최충수가 이지영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 있느냐?" 종이 문을 열고 나왔다."이놈 네가 우리 집 비둘기를 잡아 갔지?" 종이 거만하게 말했다. "누구이신지 이름을 밝히시지요." 소란하자 이지영이 직접 나왔다. "이놈! 왜 이렇게 소란을 떨고 있어." "어, 대장군 아니시오." "저놈을 묶어라." 집안의 종들이 몰려왔고, 최충수를 결박하려 했다. "이 장군. 장군이 손수 저를 결박한다면 그것을 받겠습니다." 이지영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자신을 높여주는 말로 들렸다. "기개는 있구만, 저놈을 놔두어라."

최충수는 분했다. "형님! 사람 잡는 백정 놈의 아들이 설치고 있어요." 최충헌이 대답했다. "그래도 참아야지. 그놈의 아비 이의민은 지금 고려의 최고 권력자이지 않느냐?" "경주의 깡패였다가 벼락출세한 놈, 의종대왕의 허리를 꺾어 죽인 망나니예요." "그래서?" "이의민과 아들 이지영, 이지광, 이지순은 실로 국가의 적입니다. 가만히 둘 수 없습니다." 최충헌이 난색을 표했다. "형님. 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그래 좋다."('고려사')

명종이 보제사(普濟寺)로 행차한 날이었다. 최충수가 형을 찾아갔다. "형님. 이의민은 병을 칭해 보제사로 가지 않고 미타산의 별장으로 갔다고 합니다." "기회가 왔다. 이의민 그놈의 아들들과 그 병력이 국왕의 행차를 호위하러 갔으니까." "예. 형님." "박진재와 노석숭을 불러!"

최충헌 등 4명이 미타산의 별장으로 잠입했다. 소매에 칼을 감춰 별장 문 밖에 이르러 기다렸다. 이의민이 귀가하려 하고 있었다. 문 앞에서 말을 타려 할 때에 최충수가 돌입했다. 고함을 지르며 칼을 내리쳤다. 민첩한 이의민이 피했다. 그러나 후속타가 날아왔다. 최충헌이 뒤에서 이의민의 머리를 쳤다. 너무나 신속했다. 이의민의 경호원들은 당황했고 도망을 쳤다.

피가 떨어지는 이의민의 머리를 쥔 최충헌이 노석숭을 불렀다. "가져가서 개경 시장바닥에 내걸게." 사람들이 창에 꽂힌 이의민의 머리를 보고 놀랐다. 소문은 고려 전체에 퍼졌다. 최충헌 형제는 장군 백존유를 찾아갔다. "장군. 이의민을 처단했습니다. 어서 병력을 모아 주시오. 이제 목표는 이의민의 아들들입니다." 이지순 형제가 이끄는 병력과 시장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최충헌을 돕겠다는 병력이 계속 도착했다. 불리해지고 있음을 직감한 이지영 형제는 도주했다.('고려사')


최충헌의 사병양성과 시장 장악

하지만 그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최충헌이 고려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1196년). 권력은 칼에서 나온다. 최충헌은 자신의 사병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규모는 상당했고, 훈련이 잘 된 날렵한 병사들이었다.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최충헌이 가병을 사열했다. 왕경의 좌경리에서 우경리까지 군사들이 열을 지었다. 그 길이는 3리(1.5㎞)에 달했다. 병사들의 창자루에 은병을 달아매고 왕경 사람들에게 위용을 자랑했다." 수만에 달하는 규모였다(旗田巍). 최충헌은 자신 이외에는 사병을 키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반기를 드는 자에게는 죽음을 선사했다. 동생 최충수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1197년).

최충헌의 집권 후 안정이 오고 경기가 상승하고 있었다. 당시 개경은 10만호에 이르는 대도시였다('고려사'). 물자가 집산되었고 재분배되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사치품이 일본으로 재수출되기도 했다. 개경에서는 돈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병력을 부양하기 위해 시장을 장악했다. 당시 고려의 토지는 최씨 정권을 비롯하여 귀족관인들과 사찰이 분점하고 있었다. 그들의 농장규모는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로 거대했다. 최충헌도 진주시와 남해군에 이르는 거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여기서 생산된 수만 수십 만 석의 소출이 개경 시장에서 처분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충헌은 개경의 시장 행랑에 1008개의 가게를 개축했다(1208년). 시장 남쪽에 민가 100채를 구입하여 허물고 사방 1㎞에 달하는 자신의 화려한 저택을 지었다. 궁궐과 비슷한 규모였다. 사저에서 시장 북쪽으로 길이 십자로 교차되는 지점에 십자각이라는 별채를 지었다. 여기서 그는 시장의 상인들에게 조직적으로 임대료와 세금을 거두었다. 물론 시장을 운영하는데 있어 고위귀족과 사찰, 대상인의 투자도 받았다.


외부에서 온 위기

수하르토의 가족들도 자원개발·자동차·석유화학·은행 등 국가 기간산업을 장악하고 인도네시아 경제를 주물렀다. 2억 3000만 인도네시아 인구 중 3%가 넘는 660만 명의 화교들은 수하르토의 충실한 협력자들이었다. 상권을 장악한 그들은 정기적인 상납금을 지불하고 재산을 축적했다.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주식회사였다. 그와 가족들의 정권은 지속될 것 같았다. 하지만 1997년 아시아의 금융사태가 일격을 가했다.

최씨 정권에게도 위기가 외부로부터 닥쳐왔다. 1219년 최충헌이 죽고 아들 최우가 권력을 이었을 때였다. 몽고가 세계적으로 팽창하고 있었다. 고려에 사신을 보내 종이 10만 장을 요구했다(1221년).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제국을 침공한 칭기즈칸이 선전 전단에 사용하기 위해서였다(웨더포드). 고려의 종이는 세계 최고의 질을 자랑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남중국과 이슬람 사이의 비단길을 통제하고 있었다. 소비가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한 물자가 몽골로 들어왔고, 칭기즈칸은 이를 교역하고자 했다. 그 후 고려 시장 개방에 대한 몽골의 압박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최우는 고민에 빠졌다. "몽골에 시장을 개방하면 고려를 대표하는 국왕에게 힘이 쏠릴 것이 확실해! 그러면 나는 모든 것을 잃는다." 최우는 시장 개방을 단호히 거부하고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몽골에 대한 결사 항전을 고수했다(1232년). 이후 몽골군은 1258년까지 6차례나 고려를 침입하였다.

최씨 정권은 근 30년을 버티었다. 하지만 수하르토는 1년을 버티지 못했다. 1997년 몰아친 금융위기는 수하르토를 IMF(국제통화기금)와의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게 했다. IMF가 제시한 구조 조정을 그는 인정하지 못했다. 수하르토는 그의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들 토미가 기아그룹과 합작으로 추진 중이었던 국민차 사업에 대한 특별 관세 혜택도 고수하려했다. 관리들도 예스맨으로 교체하여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그러자 IMF는 430억 달러의 구제금융 지원을 중단했다.

금융위기가 가속화됐다. 생필품 가격은 치솟았고,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다. 발포가 있었고 사망자가 나오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경제적 시위는 정권 퇴진 시위로 발전했다. 결국 인도네시아 군부와 미국마저 등을 돌리자 수하르토는 1998년 5월 21일 대통령직을 내놓았다.

최씨 정권과 수하르토는 '세계화'라는 물결 속에서 몰락했다. 세계화란 재력과 무력을 거머쥔 강자의 구호이며, 약자의 세계를 갈아엎고 강자의 구조 속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그렇다고 세계화를 거부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 팍스 몽골리아를 거부한 고려의 역사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30년에 걸친 최강 몽골군의 침공으로 고려의 전 국토는 철저히 황폐화되었고, 백성들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적과 기아에 처절히 맞서야 했다. 하지만 결국 고려는 항복을 했고 몽골의 세계시장에 편입 되었다.


    1965년 역쿠데타로 집권한 뒤 1967년 국민협의회에서 연설 중인 수하르토.

 

▶수하르토(1921~2008)

네덜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0년 네덜란드의 식민 군대에 하사관으로 입대했다. 1942년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자 일본군에 입대해 소대장으로 복무했으며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인도네시아 국군의 전신인 인민보안대의 부대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인도네시아를 재식민지화하려는 네덜란드에 맞서 뛰어난 전공을 세워 군내에서 승승장구했다. 1963년에 육군 전략 예비부대를 지휘하는 중책을 맡았다. 1965년 9월 30일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군부 인사 6명을 살해하면서 일으킨 쿠데타를 그가 진압했다. 당시 반공적 색채가 짙었던 군부는 점점 자본주의 진영과 멀어지던 수카르노 대통령과 대립하던 때였고, 마침 수하르토가 이를 진압하면서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최씨 무신정권(1196~1258)

1196년(명종 26) 4월에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출범했다. 최충헌은 1205년(희종 원년)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된다. 정치의 요직인 문하시중은 인사권 병권 감찰권을 가지고 있었다. 1209년(희종 5)의 암살 시도를 겪은 직후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1인 독재체제를 확립했으며 권력도 세습했다. 최충헌이 1219년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 최우가 권력을 이었다. 최우는 삼별초를 조직하여 무력기반을 크게 확충했다. 그의 집권시 몽골군의 침입이 개시되는 어려움을 겪지만 사망하는 1249년(고종36)까지 30년간 집권했다. 이후 권력은 그의 아들 최항(崔沆)이 세습했다. 그도 기존의 정치를 답습하였지만 불과 8년 만에 병사하고 다시 최항의 아들 최의가 4대 집정이 되었다. 하지만 몽고의 침공이 계속되었고, 실정으로 결국 자신의 가노(家奴) 김인준(金仁俊)에 의해 1258년에 살해되었다. 이로써 최씨 무신정권은 막을 내렸다.

 

 

<27> 박정희와 고려 원종의 파병
참전, 참혹한 상처의 대가로 경제 도약을 얻다
베트남전 파병 대가는 수많은 사상자와 고엽제 환자, 그리고 막대한 외자와 원조였다
원을 도와 일본을 친 고려에도 병사의 죽음과 세계시장의 판로가 주어졌다

    한국은 의무·공병부대에 이어 1965년부터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했다. 사진은 1966년 7월22일 맹호-청룡 부대의 교체 환송식. "형! 이 납작한 사각 깡통이 도대체 뭐예요?" "어, 그거 땅콩잼이란다." "땅콩은 아는데 그걸 잼으로 만들다니요?" "자, 한번 먹어보렴" 베트남에서 돌아온 동네 형이 배낭에 그 무거운 미제 깡통들을 싸가지고 왔다(1973년). 동네 잔치가 벌어졌다. 모두 처음 보는 미제였다. 형의 아버지는 아들이 깡통을 동네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바람에 인기가 올라갔다. 동네 꼬마도 형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나왔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다.

지지리도 가난했다. 1960년대 초까지도 한국은 아프리카의 가나와 비교되는 나라였다. 필리핀·태국·인도네시아는 대한민국이 한없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선진국이었다.


고뇌하는 통치자

미국 존슨 대통령이 1965년 여름 한국에 월남파병을 요청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고민에 빠졌다. 독사가 우글거리고, 적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정글에서 우리 젊은이들의 피를 흘리게 한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결심하는 며칠 동안 육영수 여사는 하루에 몇 번씩 담배꽁초가 수북한 재떨이를 비웠다.

몽골이 세계를 지배하던 때였다. 고려의 원종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로부터 일본침공을 위한 파병요청을 받았다(1269년). 그는 고민에 빠졌다. "이거 큰일 났어. 재정관 들어오게나." "예,폐하." "얼마나 들겠어?" "계산이 되지 않습니다." "배는?" "300척을 건조해야 합니다. "그 외에는?" "서남해안에 있는 뱃사람들을 모아야 합니다." "이거 큰일났네! 지금 서남해안의 연안지대는 삼별초 아이들이 설치고 있지 않나?" "예,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에게 녹을 받던 사병이었지요. 최 씨가 몰락하고 나서 그들은 실업자들이 되었지요." 사실 그랬다. 삼별초는 당시 몽고에 대항하여 고려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투사인지, 아니면 연안을 약탈하고 다니는 해적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몽골에서 파병을 독촉하는 사신(黑的)이 고려에 왔다(1269년). "폐하. 결정을 하셔야 합니다." "짐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그게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니고…. " "우리 몽골도 전비를 부담하겠소." 원종은 못미더운 표정을 지었다. "폐하. 과거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그건 죽어도 싫소! 100년 전 무신 놈들이 문신 수백 명을 하루저녁에 죽이고 정권을 잡았지요(1170), 의종께서는 이의민이란 깡패 개백정 놈에게 허리를 꺾여 척추골을 쏟고 돌아가셨지요." "몽골도 그렇게 하지는 않는데."

"그렇소. 최충헌 그놈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는 왕들을 자기 비서 갈아 치우듯 했소. 명종을 (1197년) 유폐시키고, 1204년 이어 즉위한 신종을 폐하고, 희종을 옹립했으며, 희종을 폐하고 강종을 즉위시켰소(1212년). 1213년에 최충헌이 무서워 노이로제에 걸린 강종이 승하하자 저의 아버지이신 고종대왕을 세웠지요." "한 신하가 5명의 임금을…." "선대왕들은 정말 불쌍했어요. 왕은 왕이 아니었어요. 선친 고종께서도 눈치를 보고 살았어요. 그걸 보고 자란 저는 왕손으로 태어난 것이 저주였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렇다. 원종은 신하인 무신들에게 시달리다가 이제 세계 최강국 몽골의 독촉을 받고 있다. 자신의 결정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중세(重稅)에 허리가 휘청거리겠는가. 독촉을 하러온 몽골사신은 동정어린 눈으로 원종을 보았다.

"우리 쿠빌라이 칸께서 폐하와 사돈을 맺고 싶은 의향이 있습니다." 피해의식이 있던 원종은 걱정부터 했다. "이거 큰일 난 거 아닌가. 며느리 몽골공주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다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럼?" "이제 결혼 당사자이신 세자께서는 몽골제국 내에서도 발언권을 가지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오." "새로운 황제를 뽑는 왕족회의(쿠릴타이)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공주의 남편도 참여합니다." "뭐-라?" "투표권을 가진 고려왕을 누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파격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양자 강남에 남송이 버티고 있었고, 일본이 몽골에 대립각을 세웠다. 삼별초가 일본과 남송과 연결하여 조직적으로 몽골에 저항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남송을 고립시키자면 그와 최대의 교역국인 일본을 쳐야 했다. 결혼이 거의 결정된 1270년 고려와 몽골은 전쟁준비를 본격화했다.

낙동강과 섬진강을 통해서 내륙의 곡물이 마산에 집결됐고, 300척의 배를 건조하느라 마산만 주변의 모든 산들은 헐벗었다. 몽골인과 북중국인 2만5000명이 왔고, 고려인 장정 8000명과 뱃사공 6700 명이 모집되었다(1270~1274년). 1274년 10월 3일 병사들을 실은 배가 일본으로 향했다. 방심할 수 없는 176㎞의 바닷길이었다. 대마도와 이키섬을 접수하고 하카다만(후쿠오카)에 상륙했다. 사무라이들이 몰려와 일대일 전투를 벌이려고 했다. 고려군과 몽골군은 대오를 유지했다. 폭탄을 발사하고 화살을 퍼부었다. 적지 않은 사무라이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해안지대를 떠나 내륙의 요새로 물러났다. 해가 떨어지자 고려군과 몽골군은 배로 돌아갔다. 무시무시한 태풍(神風)이 바다를 가로질렀다. 바람은 바다를 휘젓더니 배들을 암초와 해안에 내던져 부수어버렸다. 침공군 1만3000명이 익사했다. 태풍에 의한 참사는 2차 침공 때에도 이어졌다(1281년).

월남전에서도 우리의 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다. 참전 연인원 32만5517명 중 사망자 5099명, 부상자 1만1232명에 이르렀다(1965~1973년). 아직도 고엽제 후유증 등에 시달리는 참전 용사들이 수만 명 이상 존재하고 있다.


전쟁이 가져온 기회

그러나 희생은 헛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은 월남전 파병을 계기로 급속한 군사 현대화 및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1966년 파월 장병이 국내로 송금한 직접 수입액은 1억7830만 달러였다. 월남파병으로 인해 베트남에 수출과 군납, 용역 및 건설로 민간 파월 기술자가 국내로 송금한 수입액은 6억 9420만 달러였다. 당시 국내 총 외화 획득에 80%가 되는 큰돈이었다. 총체적으로 한국군이 월남특수로부터 거둬들인 경제적 이득은 무려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대일 청구권 6억 달러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돈이다. 세계 그 어느 나라도 돈을 빌려주지 않던 한국에 서방 11개 국가가 서로 돈을 빌려 주겠다고 나섰다. 1973년까지 총 33억 달러의 차관이 산업에 투자되었다. 대미 수출액은 1964년에 3600만 달러이던 것이 1973년도에는 무려 10억 2120달러로 28.3배나 늘어났다.

몽골도 상호의존적인 파트너 고려의 재정 파탄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몽골은 일본을 침공하는데 있어 고려가 부담한 물자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다. 소(農牛)를 징발한 대가로 고려에 명주 1만 2350필을 주었다(1274년 3월). 같은 해 4월 군량에 대한 대가로 명주 3만 3145필을 고려에 지불했다. 1280년에 명주 2만 필을 보내어 군량을 보충하게 하였고, 몽골이 고려의 역참에 있는 소를 징발한 보상으로 초 1000정을 주었다. 무상원조도 했다. 고려가 기근이 들자 1291년 양자 강남에서 생산된 쌀(安南米) 10만 석을 90척의 배편으로 보내주었다('고려사').

1274년 11월 몽골의 제국대장 공주와 원종의 아들인 충열왕의 결혼식이 있었다. 공주는 고려에 혼자 오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의 상단을 데리고 왔다. 대표자는 당흑시라는 자였다. 그들은 향후 고려에 종신토록 살면서 왕의 무역담당관 역할을 훌륭히 해낸다. 공주는 몽골이 남송을 점령하여 세계 최대시장을 확보하자(1279년) 그의 상단을 시켜 고려의 인삼을 대량 수집해 남중국에 비싸게 팔았다(고려사). 몽골 정부의 돈을 빌려 장사하는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고려로 몰려왔다. 몽골의 관리가 직접 고려에 파견되어 상인들에게 상세를 부과 징수할 정도였다. 몽고의 상세와 상법이 고려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고려의 인삼, 모시, 종이 등이 중국과 러시아 중동으로 팔려나갔다. 그 규모는 거대했다. 세계시장으로 판로가 열리자 고려의 생산은 크게 증대되었다.


무신정권의 종말과 시작

원종대 고려는 무신정권이 종말을 고했고, 박정희 시절 한국에는 군사정권이 탄생했다. 너무나 대조적이다. 차이는 또 있다. 문민정부를 전복하고 집권한 박 대통령은 절망과 기아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를 재건하여 군사혁명을 정당화하고 싶었고, 베트남 전쟁에서 그 출구를 찾았다. 여기에 반해 고려의 원종은 지긋지긋한 신하(무신)들의 100년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어 몽골의 일본파병 제안을 받아들였다. 공통점도 있다. 전쟁은 피폐함을 낳지만 반대로 경제 팽창의 길로 나가는 결과를 빚었다. 고려에서 유럽까지 길을 연 몽골은 고려에 더 넓은 시장과 기회를 주었고, 미국은 한국을 향해 세계시장의 문을 더욱 크게 열었고, 양보를 아끼지 않았다. 700년의 시차가 있지만 몽골과 미국은 뚜렷한 적이 있을 때 고려와 한국을 파트너로서 받아들였다.


▶원 세조 쿠빌라이(忽必烈·1215~1294)

  칭기즈칸의 손자이다. 1251년 형 몽케가 제4대 칸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중국 방면의 대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는 중국 운남성에 있던 대리국을 멸망시켰으며, 티베트와 베트남까지도 공격하였다. 1259년 남송을 몸소 무찌르던 형 몽케칸이 병사하였다. 쿠빌라이는 선수를 썼다. 국도(國都) 카라코룸을 지키고 있는 막내 아우 아리크부카를 제치고 이듬해 중국의 개평부에서 대칸(大汗)의 자리에 올랐다. 쿠빌라이는 도읍을 북경으로 옮겨 대도(大都)라 일컫고, 이어 1271년 역경(易經)》에 입각해 나라 이름을 원이라 하였다. 원이 남송을 멸망시키고, 이민족으로서 최초의 중국 통일을 이룬 것은 1279년의 일이다.

▶고려 원종(元宗, 1219~1274)

고종의 맏아들. 1235년(고종 22) 태자에 책봉되고, 1259년 강화를 청하기 위하여 몽골에 갔다. 고종이 죽자 1260년 귀국, 즉위했다. 개경으로 환도하려다가, 1269년 임연(林衍)에 의해 폐위됐고 몽골의 힘으로 복위됐다. 몽골의 일본 정벌을 위한 파병요청을 받았다. 1270년 그가 개경 환도를 선언하자 배중손을 중심으로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으며, 1273년 여원(麗元) 연합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28> 고려 충혜왕과 사우디 왕자들
방탕한 왕자들, 뇌물을 좇아 세계시장을 누비다
사치를 위해부패를 일삼고 또 그것의 유지를 위해 뒷돈을 먹였다

    2007년 사우디가 영국 BAE로부터 구매하기로 결정한 유로파이터 전투기. "BAE(유럽 무기제조회사)의 로비 비자금에 대한 조사가 이뤄진다면 막대한 국익을 해치게 됩니다. 사우디와 유로파이터 전투기 판매 계약이 파기되면 수많은 영국인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하워스 의원 등을 중심으로 한 진상규명 요구에 대한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의 대답은 이러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방부는 지난해 시작된 영국 정부와 협상 결과, 신형 전투기 '유로파이터' 72대를 BAE으로부터 구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2007년 9월 17일). 90억 달러 규모의 계약이다. 하지만 전투기에 부착하는 무기, 장기간 유지 보수 등을 감안하면 전투기 구매 비용을 포함, 400억 달러(40조 원)규모이다. 이로써 영국이 세계최대 무기수출국 자리에 올랐다.

BAE는 전 사우디 주미대사 반다르 빈 술탄 왕자에게 10년 동안 20억 달러의 뒷돈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마가렛 대처 수상시절(1985년 이후) 사우디의 반다르 왕자는 영국으로부터 토네이도 전투기 72대와 호크 전투기 30대 공군기지 한 곳 건설 등을 내용으로 하는 770억 달러 상당의 초대형 계약을 맺었다.

BAE는 사우디 왕족 및 측근들에게 5성급 호텔, 전세기, 고급 리무진, 개인 경호 및 낭만적 휴가 등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또한 사우디 인사들의 도박 비용을 해결하고 매춘도 알선했다.


고객을 위한 가을 연회

거래를 놓고 뒷돈과 향응은 언제나 있어왔던 일이었다. 1332년 몽골제국 원나라의 수도 대도(북경), 원 조정의 전 승상 '연첩목아' 아들의 저택이었다. 높고 푸른 북경의 가을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연첩목아의 아들 형제의 초대를 받은 고려의 충혜왕이 화가 나 있었다. "이거 더러워서 못해 먹겠어!" "폐하. 일단 한잔 받으시죠." "그래." 술을 먹은 충혜왕은 테이블 위에 있는 고깃덩어리를 잘라 끓는 국물에 담갔다.

"자네. 태보 '백안(伯顔)' 그놈 알고 있지?" "예." "놈이 나를 죽이려고 황제에게 자꾸 고자질을 하고 있어." "그렇습니다. 백안 그놈은 돌아가신 저의 아버님이신 연첩목아님을 시기했습니다. 아버님은 조정의 실세였고, 더구나 당시 세자로 우리 조정에 와 계셨던 폐하를 총애하셨지요." "승상은 나를 친아들로 여기셨지. 내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 분의 덕이었어!"

"백안 그놈은 옛날에도 폐하를 예의 있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지금은 아예 나를 공개적으로 박대하고 있어." "예?" "고려에서 2년 동안 왕을 하다가 그놈의 농간으로 폐위되어 이렇게 되었지 뭔가." 당시 원나라 황제가 충혜왕의 아버지 충숙왕을 다시 고려왕으로 임명한 상태였다.

"민망합니다." "이거 큰일 났네. 내가 왕위에 있을 때에는 자네에게 고려산 인삼과 모시, 종이 등을 중국시장과 중동시장에 거의 독점판매 하도록 했는데…." "저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를 꼭 복위시키겠습니다."

고려 충혜왕은 몽골제국 내에서 큰손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고려에 수없이 많은 물류 창고(의성고 덕천고 보흥고 등)를 가지고 있고, 개경시장에 거대한 점포와 창고, 수공업 작업장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건립한 궁에는 곡식과 비단으로 가득 찬 창고가 100개가 있었고, 행랑에는 천을 짜는 수많은 여공(女工)을 두고 있었다. 연첩목아 집안은 그와 상업상 이해를 같이 하고 있었다.

고려산 물건들은 북경 남경 상해는 물론이고 타슈켄트와 사마르칸드, 바그다드 시장에서 인기가 높았다. 충혜왕과 가까운 연첩목아의 집안에 많은 아랍 상단들이 목을 매고 있었다. 칭기즈칸의 가혹한 군사적 공격을 받은 아랍지역의 제조업은 거의 절멸된 상태였다. 수공업 작업장은 파괴되었고, 기술자들은 모두 끌려갔다. 이 때문에 중국과 고려의 제조업 생산에 상당히 의존적이었다(워트포드).

연첩목아의 아들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늘씬한 아랍인 여자가 나왔다. 천하의 난봉꾼 충혜왕은 얼이 빠졌다. "이 여인은 백인이 아닌가. 실크로드의 향이 물씬 나는군!" "폐하. 이 여인은 중앙아시아의 상단들이 특별히 비싸게 주고 사왔다고 합니다." "그래!" "그 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폐하의 복위를 위해 지금 은밀한 로비에 들어갔습니다."

미래의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하지만 여자에 눈이 먼 충혜왕의 말이 자꾸만 짧아졌다. "그래 알았다니까." 모든 사람들이 물러나고 둘만 남았다. '고려사'는 이렇게 전한다. "충혜왕이 연첩목아의 자제들과 회골족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농을 하며 유흥하다가 그만 회골여자 한사람을 사랑하여 원나라 조정에 자주 결근하였다. 이로써 백안이 충혜왕을 더욱 미워하였다."


방탕한 왕자들의 돈벌이

연첩목아의 아들들과 그 휘하의 상인들은 충혜왕이 여자라면 사족을 못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힘이 남아 돌아 100명 이상의 후궁을 두고 있었고, 아버지 충숙왕이 죽자 그의 여자들도 그냥 두지 않았다. 충혜왕에게 향응을 제공하지 않고는 어떤 일이든 성사되지 않았다.

현재 사우디의 왕자들도 충혜왕에 뒤지지 않는다고 한다. BAE는 사우디 왕자들과 그 수행원들에게 런던의 일류 콜걸들을 불러 주고 20년 이상 매번 거액의 용돈을 찔러주었다. 사우디 왕자들은 10명 이상의 부인을 두고 있다. 하지만 지중해 연안에는 매춘부와 놀아나기 위한 그들의 왕궁이 즐비하다. 왕자 처지에 독신자용 아파트에서 땀을 흘릴 수 없는 노릇이다.

인구 1700만 명인 나라에 왕족이 3만 명이다. 왕자들은 모두 한 달에 최하 1만9000달러에서 최고 27만 달러까지 왕족 수당을 받는다. 사치에 중독된 왕자들은 이것도 부족하다는 듯이 뇌물과 무기거래, 커미션을 찾아 헤매고 있다. 평민들의 재산을 빼앗고 심지어 비자 술 마약거래에까지 손을 댄다(전 CIA요원 로버트 베어).

충혜왕이 자본주로서 대리인을 내세워 장사에 뛰어들었던 것도 유흥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남궁신 임희 윤장 임신 등 특허상인이 그의 세계무역을 담당했다. 충혜왕은 고려에 장사를 하러온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에게도 자본을 대여해주었다('고려사'). 세계 각국 상인들이 고려로 몰려왔다. 그들은 고려산 인삼과 모시, 종이를 매입하여 중국과 아랍세계에 유통시켰고, 충혜왕은 고리의 이자를 받았다.


오일달러의 재활용

이렇게 벌어들인 돈의 일부는 북경의 거물 정치가들에게 들어갔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계무역을 지속할 수도 없었고 왕위도 위태했다. '고려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왕은 재산과 상업적 이익에 아주 밝은 사람이었다. 털끝만큼도 손해를 보려 하지 않았다." "왕은 금은을 가지고 원나라에 가서 세력 있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었다." 충혜왕이 계모인 몽골왕실 공주를 강간하고도 그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사라짐으로 해서 용돈을 받지 못하게 될 몽골제국 세력가들의 변호 때문이었다. 충혜왕을 미워하던 백안이 실각한 것에도 그들의 힘이 작용했다.

사우디 왕실은 언제나 석유로 벌어들인 돈 가운데 상당액을 워싱턴에 송금해왔다. 큰 덩어리는 백악관의 은밀한 프로젝트로 간다. 일부는 부패와 테러범의 온상인 사우디왕국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관료나 정치꾼들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사우디 왕실은 미국에 가장 큰 돈줄이다. 워싱턴의 정치가들은 이걸 '오일달러의 재활용'이라고 부르길 좋아한다.

사우디의 왕족들이 석유에서 나오는 달러를 풀어 자신의 왕국을 지키고 있다면, 충혜왕은 거대한 상업자본을 운영하여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려고 했다. 양자는 비슷한 환경 속에 있었다. 충혜왕에게는 칭기즈칸이 칼로 건설한 세계시장이 있었고, 사우디 왕실에게는 미국과 영국이 2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만들어낸 석유시장이 있었다.

올해 초 매일 두려운 눈으로 그 석유시장을 바라만 보고 있던 우리에게 오일머니의 큰손, 아랍에메레이트연합 왕세자가 찾아왔다. 한국우주항공(KAI)이 개발한 고등연습기 T-50을 60대 구매하기 위해서였다(25억 달러). 하지만 KAI는 거래를 성사시키지 못했다. KAI가 왕세자와 너무 투명하게 거래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BAE(British Aerospace Systems)

유럽 최대의 무기제조회사이다. 1960년 잉글리시일렉트릭 40%, 비커스 40%, 브리스틀하이에어플레인 20%의 출자로 산하의 항공기 및 유도 무기부문을 통합하여 British Aerospace를 설립하였고 후에 헌팅하이에어크라프트도 참가하였다. 과거에는 재규어 전투기와 콩코드 여객기를, 현재는 전투기 유로파이터 등을 생산하고 있다. 1999년 세계 5위 군수업체인 미국 Marconi Electronic Systems 부문을 인수하여 유럽 제1의 방산·항공업체가 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본사는 런던에 있다. 매출액은 131억 3800만 파운드이다(2001년).

    영국으로부터 유로파이터 도입을 추진한 반다르 빈 술탄(위) 사우디 왕자와 한국역사상 최고의 방탕아인 고려 충혜왕(상상도). ▶충혜왕(忠惠王·1315~1344)

충숙왕의 아들. 어머니는 명덕태후. 비는 원나라 관서왕의 딸 덕녕공주. 1328년(충숙왕 15년) 세자로 원나라에 볼모로 가 있다가 이듬해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를 원하여, 원나라 문종(文宗)이 왕으로 책봉하여 1330년에 귀국하여 즉위했다. 본성이 방탕하여 주색과 사냥을 일삼다가, 원나라에 국새를 빼앗기고 부왕 충숙왕에게 양위한 뒤, 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복위하였으나 방탕함은 여전하여 계모인 몽골인 경화공주(慶華公主)와 수비 권씨를 욕보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형부(刑部)에 투옥되어 경화공주의 사건을 조사받았다. 하지만 그를 미워하던 백안의 실각으로 석방되어 귀국했다. 그러나 여전히 횡포가 심하여 이운 등의 상소로 1343년 원나라 사신들이 그를 귀양 보내 이듬해 죽었다.

 

 

<29> 화폐폭탄, 달러
패권화폐 그 허망한 영광을 경계하라
석유로 흥한 미국 달러는 석유의 반란에 가치가 급락하고 있다
그 나라와 운명을 함께했던 몽골대제국의 화폐처럼

    세계 경제권을 지배해 왔던 미국 달러화는 EU제국의 유로화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사진은 유로화(위)와 달러. "달러로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달러 가치가 지금 하락하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서 고스란히 손해를 보라는 말씀입니까. 유로화로 주세요." 세계 최고의 모델 지젤 번천이 신규 계약을 체결하면서 유로화를 달라고 요구했다(2007년 말). 어떻게 달러화가 이처럼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을까.

과거 달러화는 부의 상징이었다. 세계 2차대전 후 달러가 세계의 기본적 기축통화가 되고 미국은 세계통화의 발권국의 지위를 획득했다. 전쟁으로 독일과 일본의 산업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영국은 전비 지출로 도산했다. 미국은 세계의 모든 부를 거머쥐고 있었다.


석유와 달러의 결합

1971년까지, 미화 1달러는 고정된 양의 금(金)과 동일한 가치를 지녔다. 외국 은행들은 보유한 달러를 금으로 교환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끝이 보이지 않은 수렁에 빠졌고,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 1971년 닉슨은 달러화의 금 교환 의무를 해제했다. 대신 미국은 OPEC(석유수출국기구)에 접근해 제안했다. "앞으로 미국이 자국생산 석유만을 소비하지 않고 OPEC회원국으로부터 석유를 수입하겠소. 달러화만을 결제대금으로 받으시오." "좋소." 달러가 석유와 결합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1971년부터 석유를 필요로 하는 나라들은 엔 마르크 프랑 등을 내고 달러를 사야했다. OPEC 가입국은 이 달러화를 미국에서 쓸 수도 있지만 전 세계 다른 나라에서도 쓸 수 있다. 석유 수입국들은 앞으로도 계속 석유를 필요로 하고, 따라서 달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달러화는 미국 바깥에서 지속적으로 순환한다.

달러화의 수요가 폭발했고, 미국은 더 많은 달러화를 찍어내야 했다. 자연스러운 방법 중 하나가 미국의 무역적자였다. 외국에서 물건을 사오고 달러화를 주면, 이 달러화는 석유수입국들과 OPEC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순환하고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므로, 미국은 아무런 대가도 줄 필요가 없다. 따라서 미국의 쇼핑은 공짜가 된다. 지속적인 달러 수요는 그 도둑질을 만성화시켰다. 석유의 가격과 수입량은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무역량도 팽창했기 때문이다.

  1973년 이후 미국의 무역수지는 한 번도 개선된 적이 없고, 개선 의도도 보이지 않았다. 2004년 단 한 해 동안 미국의 무역적자가 무려 6500억 달러에 이른다. 지나친 지출은 그 나라의 화폐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화폐의 수요는 줄어들고 환율은 떨어진다. 하지만 이 법칙은 미국에 대해서만은 예외이다. 전 세계가 석유를 수입하기 위해 달러를 필요로 하는 한, 언제나 달러화 수요는 존재한다고 전문가는 말한다.


반란과 미숙한 응징

반란이 일어났다. 바그다드의 후세인은 2000년 11월 6일, 석유대금을 유로화로 받겠다고 선언했다. 달러화 가치는 급락했고, 2002년 7월 IMF(국제통화기금)는 달러화가 붕괴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미국은 2003년 3월 19일 이라크를 침공하였고, 같은 해 6월 5일 이라크의 석유무역 통화를 다시 달러화로 전환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은 시아파 이슬람의 종주국인 이란의 강적이자 수니파의 첨병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다. 이란의 조정을 받는 이라크 내 시아파가 이라크의 70%를 장악했다. 가만히 앉아 코를 푼 이란은 석유대금을 유로화로 받겠다고 선언했다(2003년). 나아가 석유거래소를 설립해 달러화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려고 했다. 2006년 초의 팽팽한 긴장은 이 때문이었다. 직후 푸틴이 러시아에 석유거래소를 열었고, 2006년 6월 8일 남아도는 달러화를 다른 중앙은행에 판매함으로써 달러화 환율에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세계 달러화 수요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몽골 달러, 지폐 보초

이보다 800년 전 몽골이 발행한 지폐 사용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이란-이라크 지역에서 있었다. 바그다드를 포함한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고 있던 몽골의 일칸국(1259~1336)은 원나라에서 사용되는 지폐제도를 도입하려다 실패했다. 지역 상인들이 지폐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인들의 불만은 폭동으로 번질 것 같았다. 당국은 이 반란의 성공적인 진압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일칸국에서 지폐제도가 철회되었고, 금과 은이 본래의 역할을 수행했다.

중국을 지배하던 몽골의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제국 전역의 교역 속도를 높이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지폐의 사용을 급격하게 확대시켰다. 1260년 '중통보초'라 불리는 지폐 7만3352정(錠)을 발행했다. 직후 금은의 사매매를 금지했고, 쿠빌라이는 태환준비금을 은으로 확보했다. 지폐는 태환준비금 없이는 발행되지 않았고, 신용도가 높았다. 물론 세금도 그것으로 받았다. 원나라 정부의 징세가 지속되는 한 지폐는 누구나 필요했고, 금은을 주고 지폐를 사야했다.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 도착했을 때 이미 지폐가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폐는 다양한 크기의 사각형으로 잘라 그 가치를 기록하고 주홍색 도장을 찍었다. 원나라에서 지폐를 거부하면 사형을 당했다. 사람들은 지폐를 반겼다. 그것으로 진주 보석 금 은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

1276년에 지폐의 발행량이 100만 정(錠)을 돌파했다. 고려의 마산에서 출정한 2차에 걸친 일본침공(1274, 1281년)과 그해 남송을 병합하면서 치러야 했던 전비가 막대했기 때문이다. 원나라는 1281년 일본으로 파병될 고려병사들에게 급료로 모두 3000정, 은으로 환산하면 7만 5000 양(兩)을 주었고, 고려가 동원한 말 값으로 800정(은 2만양) 전함 건조비용으로 3000정(은 7만5000양)을 지불했다('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에 엄청난 원나라 지폐가 흘러들어왔다. 베트남전에 군대를 파병한 한국에 달러가 유입한 상황을 연상케 한다. 1287년에 원나라 정부는 '지원보초'라는 고액권 화폐를 발행했다. 은과 지원보초의 교환비율은 중통보초의 발행 때와 마찬가지로 1대 2였으며, 중통보초의 가치는 지원보초의 1/5로 절하됐고, 발행은 중지됐다. 엄청난 통화의 팽창이었다. 원세조 쿠빌라이는 화폐의 가치를 떠받쳐 줄 실질적인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한 상태였다. 그는 세계 최대의 생산지이자 인구 밀집지대인 남송(남중국)을 무력으로 점령했기 때문이다.

원나라에 세금을 납부해야할 남송 사람들은 지폐인 보초를 사기 위해 정부에 금과 은을 지불해야 한다. 가구를 구입한 뒤 가구 대신 영수증을 받고, 그 영수증을 들고 창고에 가서 가구와 교환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폐는 기본적으로 금과 은을 빨아들이는 영수증이다.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어떠한 경제활동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원나라 정부가 발행한 지폐를 필요로 한다. 지폐에 대한 지속적 수요가 있는 한 원나라는 재정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은이 중동으로 유출되고 있었다. 중동지역에서 은의 가격은 상당히 높았다. 세금으로 막대한 은을 거둬들인 원은 오르독이라는 이슬람 상인들을 시켜 중동지역에서 엄청난 물건들 구입했고, 그것을 중국과 고려 등에 유통시켜 이익을 챙겼다. 그 이익은 은을 태환하기 위한 준비금으로 예치되지 않았고, 왕족과 귀족들의 유흥과 사치에 들어갔다. 1294년에 태환준비금으로 비축된 93만6950양(兩)의 은 가운데 19만2450양 만이 목적대로 사용됐다. 지폐의 가치는 서서히 하락했다. 원제국은 빚더미 위에 서 있었다.


달러, 녹색 암세포 위의 한국경제

현재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해외부채를 무한히 늘리고 있고, 더 이상 이 채무를 갚을 능력이 없다. 달러화 환율은 중국 일본 대만 한국의 중앙은행이 보유한 달러 보유고에 의해 인공적으로 떠받쳐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 달러 보유량이 줄면 원화의 환율이 하락한다. 환율 방어에 천문학적 돈이 들고 달러화 약세에 따라 외환보유액의 환차손도 눈덩이처럼 불어나 국민 전체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이렇게 미국에 세금을 내고 있다.

달러 위에 만들어진 우리 경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원나라 지폐위에 만들어진 고려의 경제가 교훈을 준다. 공민왕대에 국고에서 원나라 지폐의 보유량이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다. 국왕의 연회비와 사찰 조영에도 지폐가 사용될 정도였다. 귀족과 관리 그리고 사찰의 지폐 보유량도 엄청났다. 심지어 민간에서도 지폐는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었다. 하지만 원이 쇠퇴하고 있었다(1356년). 중국의 남쪽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원이 몽골고원으로 쫓겨나자 지폐는 휴지조각이 되었다(1368년). 고려의 왕실과 귀족, 대상인들은 도산했다. 남쪽에서 왜구가 몰려와도 파산한 고려는 이를 막지 못했고, 북방의 이성계 군벌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388년 위화도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섰다. 조선이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으로 일관하게 된 것도 부도난 지폐에 대한 기억 때문은 아닐까.


▶유로화(EURO貨)

EU(유럽연합)가 사용하는 단일화폐의 명칭. 1995년 12월 15일 에스파냐 마드리드에서 열린 EU 정상회의에서 15개 회원국들은 1999년 1월 경제통화동맹(EMU)을 출범시키고 단일통화 명칭을 '유로'로 하는 데 합의하였다. 유로는 7종의 지폐와 8종의 동전으로 구성되며 제작·발행은 각 나라가 독자적으로 한다. 2002년 1월 유로 시행에 참가한 국가는 벨기에·프랑스·독일·이탈리아·룩셈부르크·네덜란드·아일랜드·그리스·포르투갈·에스파냐·핀란드·오스트리아였으며, 영국·덴마크·스웨덴은 불참했다.

▶남송(南宋·1127∼1279)

 

여진(女眞)족이 세운 금(金)이 요(遼)를 쳐서 멸망시킨 여세로, 1126년 송나라 수도 카이펑(開封)을 점령하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포로로 잡아갔다(북송 멸망). 난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한 흠종의 동생 고종(高宗·1127∼1162)이 남중국의 임안(현재 抗州)에 도읍하여 남송을 재건하였다. 금(金)과 화의하고 중국의 남부지역을 영유하였으나, 1234년 몽골에 의하여 금(金)나라가 멸망하자 몽골의 압박이 점점 심해져갔다. 1276년 마침내 몽골군에 의해 임안이 함락되어 실질적으로 멸망하였다.


<30> 美 제국과 당 제국
제국의 번영은 '물고 물리는'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미국은 자신이 키운 후세인이 반항하자 토사구팽했고
당 현종은 사냥개로 키운 안록산에 물렸다
그 과정에서 두 제국은 내부붕괴 위기에 직면

    당 현종     10대 사담 후세인. "알라는 위대하시다! 성전을 위해 싸우는 이라크 전사 만세!" 사담 후세인이 처형되기 적전에 남긴 말이다.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하여 점령하고(2003년), 그 대통령을 체포하여 사형시켰다(2006년). 후세인은 본래 미국이 키워낸 사람이었다.

1937년 4월28일 티그리스 강변의 평화롭게만 보이는 농촌에 한 아이가 유복자로 태어났다. 운명을 예견하듯 '충돌하는 자' 라는 뜻의 '사담'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이 아이는 가난과 계부의 구박 속에 자랐다. 주변에는 운동을 벌이던 친척들이 있었다. 투사로 자라난 그는 투옥과 도주를 반복하는 험한 인생을 살았다.

1958년 이라크에서는 카심이 이끄는 '자유장교'의 군사 쿠데타로 친 서방 왕정이 붕괴된다. 당시 가장 영향력이 큰 집단은 공산당이었다. 미국은 중동에서 안정적인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해 친미적인 정치 세력이 필요했고, 이라크 바트당을 앞세워 카심 정부를 무너뜨리려 했다. 바트당은 노동계급이 행위 주체가 되는 것을 배격했다.


미국이 키운 후세인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자신의 고향인 북부 티크리크 외곽의 한 농가 지하에 땅굴을 파고 숨어 있다가 2003년 12월 14일 미군에 의해 생포돼 끌려 나오고 있다. 미국이 후세인을 토사구팽하는 과정 중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바트당원이 된 후세인이 명성을 얻은 것은 1959년 카심 암살에 가담해 실패하고 체포되었을 때였다. 1963년 2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바트당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미국 CIA는 바트당에게 공산당원들의 명단과 주소를 알려 주었고, 수천 명이 살해되었다. 1963년 11월 알-살람 아리프의 친위 쿠데타로 바트당은 정권을 상실했고, 후세인은 체포되어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바트당은 1968년 7월 다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재집권에 성공했다. 후세인은 혁명평의회 부의장이 되었다.

후세인이 1979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해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 미국의 꼭두각시 팔레비 왕정이 타도됐다. 다급해진 미국은 후세인에게 원조를 제공하는 대가로 이란 혁명을 봉쇄하는 임무를 맡겼다. 미국은 무기와 기술뿐 아니라 이란군의 이동 정보까지 제공했고, 화학 무기의 원료를 팔았다. 이란-이라크전에서 미국의 목표는 석유가 나는 두 나라를 모두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말했다. "나는 그들이 서로를 죽이기를 바란다."

전후 궁핍해진 후세인은 경제 사절단을 바그다드에 초청했다(1989년 6월). 기대를 품고 있던 그에게 미국 측이 말했다. "투자에 앞서 조건이 있습니다." "예!" "이라크 정부가 가지고 있는 대외 채무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뭐?" "조건은 이라크 국영 석유산업을 우리 미국의 석유회사들에게 넘기는 것이오." "내 정권의 돈줄인 석유산업을 포기하라니." "그렇지 않으면 투자를 할 수 없어요." "나의 외채는 미국의 적인 이란과 전쟁을 하느라 짊어진 것이다. 내가 사기를 당했어! 미국은 내가 약해지기를 기다려 석유를 탈취하려고 했던 것이야."

협상은 무산되었다. 미국이 약속했던 23억 달러의 차관제공도 동결됐다. 후세인은 국제 금융계에서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었다. 8년 전쟁 동안 이라크에 막대한 전비를 지원했던 쿠웨이트도 돌변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값 폭락을 막기 위해 마련된 수출량 제한 원칙을 깼고, 이라크 국경부근에 석유를 시추했다. 1990년 7월에는 원유 값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후세인은 빚을 갚을 수 있기는커녕 식량 수입마저 어렵게 됐고, 8월 2일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1989년 소련의 붕괴는 미제국주의에 2차 대전 이후 최대의 승리를 안겨주었고, 1991년 이라크에 대한 전쟁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1차 걸프전). 미국의 10년 이상에 걸친 봉쇄로 이라크는 황폐화됐다. 현재 고유가에도 불구하고 산유국들은 3년간 30%나 떨어진 미국 달러 가치하락으로 실질적 이득은 많지 않다고 한다(2007년 기준). 석유를 달러로만 구입하게 하는 석유-달러본위제 때문이다.

달러의 인플레이션이 무르익었다. 석유대금은 싼 달러로 받고, 상품수입대금은 비싼 유로화로 지급해야하는 게 산유국들의 입장이었다. 2000년 9월24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원유대금으로 달러는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이라크 원유판매를 관장하던 유엔이 후세인의 손을 들어줬다. 미제국의 근간인 석유-달러 본위제를 위기에 몰아넣은 대반란이었다.

이보다 1245년 전 당 제국을 뿌리 째 흔든 반란이 있었다. 755년 11월 28일 안록산에게 운명을 결정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날 아침 그의 친위 기병대 8000명을 중심으로 중국인 병사와 유목민 병사를 합해 20만 대군이 오늘날 북경 부근에서 일제히 남하하기 시작했다. 장안으로 향하는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사방에 모래 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북소리는 천지를 진동했다('자치통감'). 안록산은 당이 키워낸 이민족 무장이었다.


당 제국이 키워낸 지능적인 전쟁기계

안록산은 아버지가 이란계 소그드인이다. 안록산이란 이름은 알렉산더(Alexander)를 한자로 부른 것이었다. 아버지는 돌궐의 칸을 위해 일을 하던 상인이었다. 돌궐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정권이 바뀌었고, 10대 중반의 소년 안록산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중국의 북경지방으로 도피했다.

당시 북경지역은 거란과 해 등 유목민이 날뛰고 있었고, 이를 막아내기 위한 당나라의 군대가 있었다. 당은 기마에 능숙한 이 소년을 환대했다. 당나라는 북방의 유목민을 그 군대로 편성하여 유목민의 공격을 막아냈다. 군내 유목민의 비율은 점점 상승했다. 안록산은 그렇게 중국의 국경수비대의 일원으로 유목민과의 사투를 벌이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733년 북경(범양)에 절도사로 부임한 장규수가 북경으로 왔다. 그는 거란족을 연이어 격파했고, 교묘한 책략으로 내부분열을 유도하여 그 족장의 머리를 현종황제에게 바쳤다. 그가 공을 세운 배경에는 안록산의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장규수를 통해 안록산은 궁정에 알려졌다.

그러나 사고가 터졌다. 그가 거란 토벌전에서 대패한 것이다. 투옥되어 죽는 날만 기다렸다. 1년의 시간이 지났고, 결국 현종의 사면으로 풀려났다. 관직이 박탈된 그는 백의종군을 원했다. 포승줄에 묶인 채 1년 동안이나 생사의 기로를 헤맨 것이 뼈에 사무쳐서인지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것이 현종의 귀에 들어갔고, 세상에 이름을 냈다. 742년 안록산은 북경에 본부를 둔 평로군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휘하의 병력은 3만7500명 이었다.

이듬해 정월 안록산은 장안에 갔다. 황제의 측근에게 뇌물을 충분히 뿌려 놓았기 때문에 현종의 신임도 두터웠다. 연회에서 현종을 만났고, 744년 3월에 9만1000명의 병력을 통솔하는 범양절도사를 겸하게 되었다. 현종은 이민족은 무예에 뛰어나고 정치에 해독을 끼칠 우려가 적다고 생각했다. 안록산은 전쟁의 기운이 약화되면 일부러 거란족과 해족을 자극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조장했다. 평화가 지속되면 무인의 존재는 잊혀지게 마련이다. 황제나 그 측근들이 좋아하는 전리품과 포로를 끊임없이 보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750년 안록산은 하동절도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로써 평로·범양·하동 절도사가 되어 휘하의 총병력은 18만 명으로 늘어났다. 당 전체의 병력 1/3이었다.

하북의 세력가가 된 그는 소그드 상인을 대거 유치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영내의 활발한 유통을 위해 동전주조권을 황제로부터 받아냈다. 벌어들인 돈은 다시 황제의 측근들에게 흘러들어갔다. 안록산은 정계의 부패와 관료제의 약점을 날카롭게 꿰뚫어보고 교묘하게 이용했다.

753년 정적이었던 양국충이 운남(南詔)에 파병한 당나라군대 10만 명이 전멸했다.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안록산은 사사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군대는 755년 12월 12일에 낙양을 함락시켰고, 이듬해 6월 8일 동관을 돌파한 10일 후 장안을 점령했다. 하지만 안록산의 죽음은 너무나 허망했다. 자신의 아들 안경서의 칼에 죽었다. 안록산의 동료들은 전쟁을 계속했고, 763년에 가서야 진압되었다.


반란 진압과 제국의 내부 붕괴

후세인이 그를 키워준 미국에 토사구팽 당했다면, 안록산은 그의 주인을 물었고, 자신이 키운 자식에게 죽음을 당했다. 당제국은 반란 평정에 8년이 걸렸다. 반면 미제국은 반란을 일으킨 이라크를 간단하게 점령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 보면 내용이 다르다. 이라크에 들어선 시아파 정부는 이란의 조정을 받고 있고, 미국의 영향력은 약하다. 그마저 군대 주둔비로 매주 20억 달러 이상을 투입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석유-달러 본위제의 기둥인 사우디 왕정도 언제 전복될지 모른다.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이 키워낸 빈 라덴을 포함한 사우디 이슬람 투사들이 왕정이란 폭탄의 뇌관이다. CIA는 폭발 시기를 21세기 초반으로 보고 있다.

당제국의 반란 평정이란 어감은 좋다. 당은 안록산의 부하들을 절도사로 임명하여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을 합법적인 통치구역으로 인정해주고 반란군의 붕괴를 유도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단지 안록산 군벌을 여럿으로 분할한 것일 뿐 당왕조는 군벌(번진)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에 어떠한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다. 이후 당정부가 세금을 거둘 수 있는 호구는 1/3로 줄었고, 반란 진압에 기병을 원조한 위구르에 매년 막대한 사례를 해야 했다.

제국이 번영을 누리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안에서부터 붕괴가 시작된다. 2007년 말 미국의 가계부채는 13.8조 달러로 GDP의 99.9%에 달한다. 미제국의 가장 큰 적은 거액의 전비와 재정·무역적자로 허약해진 체질이다.


▶양국충(楊國忠·?~756)

학식은 없었으나 계산에 밝았다. 양귀비의 친척으로 등용되어 재정적 수완을 발휘함으로써 현종에게 중용되었다. 752년 실권자가 되었고, 중앙정계를 그의 일파가 장악했다. 또 남조(南詔) 원정에 실패하였으면서도 이를 황제에게 숨겼고, 안록산(安祿山)과의 반목으로 '안사의 난'을 자초하였다.
▶사사명(史思明·?~761)

만주 조양 출신 돌궐인이었다. 안록산과 마찬가지로, 6가지 언어를 이해하였고, 장수규를 섬겨 전공을 세웠다.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행동을 같이했다. 757년 안록산이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되자 당나라로 귀순하였으나, 758년 숙종이 그를 살해하려고 꾀하자, 이듬해 다시 반기를 들었다. 안경서를 죽이고 스스로 반란군의 총수가 되었다. 그도 아들 사조의에 의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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