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최영교_전쟁과 시장_07

醉月 2011. 4. 7. 08:38
<31> 혈우병 환자 미국
빈 라덴이 원한 것, 美 경제를 수렁으로 끌어들일 전쟁
반란은 진압을 부르고 진압전쟁은 제국의 출혈을 가속화한다
남중국을 억압했던 몽골의 멸망과
아프간에서 허우적대는 미국의 모습이 겹쳐진다

    

 

복면을 한 탈레반 병사들이 아프카니스탄 변경에서 무리를 지어 경계를 서고 있다(위). 신출귀몰하는 알카에다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

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지난 7월 4일 아프간인 등 2명을 체포했다. 탈레반의 사주를 받은 그들은 헤로인과 폭약 원료물질인 '무수초산' 12t을 아프간으로 밀수출하려고 했다. 무수초산은 주로 헤로인 정제에 사용된다. 미국과 일본에서 생산된 무수초산이 한국을 통해 아프간으로 수없이 반입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한국인 화공도매상은 총 50t 분량의 무수초산을 아프간으로 밀수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탈레반의 손길이 우리 한국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6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한국군의 아프가니스탄 재파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월스트리트저널'). 부시는 지금 아프간 전쟁의 수렁에 빠져있다. 9·11사태 후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숨겨주고 있는 아프간을 공격했다. 알 카에다와 탈레반이 카불에서 쫓겨났고, 미군이 입성했다. 하지만 현재 미국이 세운 아프간정부는 수도 카불에서조차 완전한 통제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2006년 이후).

  650년 전 고려의 공민왕도 구조적인 난관에 봉착한 원제국의 파병요청을 받았다(1354년 6월). 고민에 쌓인 왕은 평강부원군 채하중을 불렀다. "지금 원나라는 어떠한 상황인가?" "남중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 불길이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현재 반란군은 통합 조직화되어 점차 강력한 반원 투쟁세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남중국의 남송은 75년 전인 1279년까지 몽골에 저항을 했다. 그곳은 중국 전체 인구의 82%가 살고 있는 곳이고, 생산력이 높고 풍부했다. 몽골인들은 그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유목민인 몽골인들은 강남의 토지와 백성을 자신들이 소유한 가축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가난은 강남이 으뜸이고 부유함은 북경에서 자랑했다는 말이 나왔다.


반란 진압과 출혈

몽골인들이 중동에서 데려온 전체 인구 3%의 아랍인들이 모든 분야에서 우위를 차지했고, 그들이 있는 곳에 몽골기병의 정예군단이 있었다. 압도적인 군사력이 있는 한 몽골제국 치하의 남중국인들은 꼼짝도 못했다. 하지만 1330년부터 몽골황실의 내분이 일어났다. 그 병력은 양분되어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고, 그 수가 반으로 줄었다.

몽골의 힘이 약해지자 남중국에서 산발적인 반란이 지속적으로 일어났고, 군대가 그것을 막기 위해 많은 예산이 들어갔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더욱 더 가혹한 경제적 수탈이 감행되었고, 그것이 또 다른 반란을 부르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산발적 반란은 더욱 더 조직화되어갔다.

공민왕대에 원제국은 남중국에서 세금을 거두기가 쉽지 않았고, 어려운 재정은 지폐 발행을 증가시켰다. 지폐의 가치는 거듭 하락했고, 생필품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현재 달러의 가치가 하락하고 금·석유와 원자재 가격이 치솟는 것도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간에 쏟아 붓는 전비가 하나의 원인이 되고있다. 실제 미국민 10명 가운데 7명 이상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CNN).


이슬람 세계에 대한 미국의 만행

9·11사태 직후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의 아프간 침공을 예상했고, 바로 그곳에서 미국과 전쟁을 벌이기를 원했다. 아프간 사람들은 치밀한 전략과 인내심, 종교에 기초한 불굴의 정신으로 이미 영국과 소련의 침공을 물리친 바 있었다. 이 전쟁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다. 빈 라덴은 미국에 대한 이슬람사람들의 분노 속에서 등장한 사람이다.

미국은 이슬람에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는 이스라엘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이란과 파키스탄의 핵보유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적극 도왔다. 이스라엘은 이슬람 사람들을 겨냥한 200개의 핵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체첸에서 이슬람인들을 학살하고 있는 러시아의 만행을 묵인했으며, 신장에서 이슬람 위그루인들을 탄압하는 중국을 지지했다.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부추겨 이란과의 8년 전쟁을 일으키게 했고(1980년), 미국은 양쪽에 모두 무기를 공급했다. 전후에 경제적으로 쇠약해진 이라크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 석유를 탈취하려고 했으며, 그것이 무산되자 쿠웨이트를 시켜 이라크에 채무이행을 강요하게 했다. 걸프전 이후 이라크에 대한 경제봉쇄를 단행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고통 받았다.

미국은 3만 명의 왕족들이 매년 국가재정의 40%를 소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부패한 사우디 왕정의 버팀목이며, 국민들을 탄압하는 파키스탄의 군부독재 정권의 대부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은 3번째 연임을 하기 위해 헌법을 정지시키고 국회를 해산했다(2007년 11월 3일).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진 가운데 그의 정적인 부토 전 총리가 귀국했고, 그녀는 암살되었다(2007년 12월 27일).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을 도운 무샤라프의 장기집권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친미적인 그에 대한 파키스탄 국민들의 분노는 탈레반이 부활하는 토양이 되었다. 이미 2006년 9월 탈레반은 아프간과 인접한 파키스탄의 와지리스탄을 접수하고 여세를 몰아 북쪽으로 도시를 하나씩 장악해갔다. 무샤라프가 국가 비상사태를 발표한 후 그들은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파키스탄 내 활동영역을 더욱 확대하고 있다. 세계 13억 이슬람교도들의 상당수가 미국의 가치관이 아니라 그 행위 때문에 미국을 증오하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달러신앙에 비수를 꽂은 빈 라덴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이 전쟁이 지속되기를 원하고 있는 측이 빈 라덴이라는 점이다. 다양한 인종의 미국인들을 결집시키는 힘은 '아메리카 드림'이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달러의 숭배다. 미국의 중심이 경제에 있다는 것을 간파한 빈 라덴은 그것에 결정타를 날리기로 작정했다. 그의 전쟁 목적은 미국경제의 출혈을 지속시키는 일이다. 미국은 전쟁에 언제나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붓는다.

빈 라덴은 미국 군산복합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미국 군인들은 부시 미 대통령이 이라크로 전쟁을 확대하는 어리석은 짓을 반대하지 않았다. 역효과를 내는 정책을 그들이 묵인하는 이유는 사적인 이기심 때문이다. 퇴직을 앞둔 그들이 하는 말이 있다. "이제부터 진짜 돈 좀 벌어 봐야지." 그들은 현직에 있는 동안 사사건건 반대만 했다는 오명 때문에 퇴직 후 정부의 일을 주로 하는 기업으로의 취업이 어려워질 것을 두려워한다.

퇴직과 동시에 군인들은 방위산업체에 들어가 동료들에게 군복에서 전투기까지 온갖 군수품을 팔거나, 이스라엘이나 사우디를 위해 일하는 로비스트 회사를 다니고, 펜타곤으로부터 컨설팅 계약을 따낸다. 군인들 가운데 이라크와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든 사람의 적이 된다.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일에 왜 반대해!"

2003년 미국이 이라크로 전쟁을 확대하자 동굴 속에서 오사마 빈라덴은 신에게 감사드렸다. 미 의회조사국(CRS)에 따르면 이라크 전쟁 비용으로 지금까지 무려 6480억 달러를 지출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2008년 수준으로 환산한 베트남전 비용 6860억 달러에 육박하며, 그 액수가 앞으로 얼마나 더 늘어날 지 알 수 없다. 어느 저명한 경제학자는 부상자의 장기치료비 등을 포함하여 3조 달러로 보기도 한다.


제국의 딜레마

몽골의 원제국도 끊임없이 대외 팽창을 시도해 세금을 낼 수 있는 인구와 자국의 지폐사용지역을 확대했다. 그 팽창은 어느 순간 멈췄지만 관성이 붙은 지폐 발행은 끊이지 않았다. 물가가 오르고 인플레이션은 지속되었고, 그것이 반란의 토양이 되었다. 인플레이션은 지폐를 소유한 모든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착취한다. 원제국이 고려에 파병을 요구했을 때는 나라 형편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몇 년 후 원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홍건적이 고려에 침입해 들어왔을 때 백성들은 이를 실감했다(1359년). 현재 한국의 아프간 파병을 원하고 있는 미국은 어떠한 상태에 봉착했을까.

막대한 마약 자금을 배경으로 탈레반은 병사들에게 적지 않은 급료를 주고 있다. 그들의 아편 생산량은 6100t으로 전 세계의 92%에 이르는 규모다(2005년). 아이러니하게도 미국과 유럽에 거대한 마약시장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은 미군과 전쟁을 지속할 수 있다. 미국이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지금 떠나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고, 떠나지 않으면 멈추지 않은 출혈 속에서 고사할 것이다.


▶탈레반(Taliban)

1994년 10월, 2만5000여 명의 학생들이 중심이 돼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에서 결성한 수니파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 1994년 아프가니스탄 국토의 80% 정도를 장악한 뒤 이듬해 수도 카불을 점령, 14년간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내전과 4년 동안의 모자헤딘 권력투쟁을 종식시켰다. 9·11 테러의 배후인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를 숨겨둔 채 미국에 인도하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침공을 받았다. 하지만 탈레반은 파키스탄과 접경지역으로 숨어들어 세력을 키웠고 아프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나아가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공민왕(恭愍王·1330~1374)

충숙왕의 둘째아들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원나라에 가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다.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이 폐위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원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린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했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하자 이인임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그러나 그 뒤 홍건적·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으로 국력이 소모되었고,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정치를 신돈에게 맡겨 정국이 문란해졌다.

 

<32> 日王과 신라 신문왕 결혼식
戰後 축제의 집단 최면 상처를 꿰매고 경기를 부양하다
왕실의 결혼은 전쟁 상흔과 파산한 경제를 잊게 하는데 이용됐다
축제가 끝나면 백성들은 다시 국가재건과 경제희생에 동원됐다

    1945년 9월 2일 미조리호 함상에서 진행된 일본 항복 조인식.

 

동경만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미조리에서 일본의 항복식이 거행됐다(1945년 9월 2일). 항복 조건은 단 하나, 천황과 황실의 생명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신으로 여겨졌던 천황도 자신이 인간임을 선언해야 했고, 그의 가족들도 신성한 황실의 벽을 허물고 밖으로 나와야 했다. 천왕과 그 가족의 일상사가 대중의 관심사가 되었다.


신데렐라가 된 밀가루집 딸

"그 밀가루집 딸이 가루이자와에서 열린 테니스 토너먼트 대회(1957년 8월)에서 황태자 아키히토를 처음 만났다고 해요." 현 일본천황 아키히토의 약혼 발표가 있었고(1958년 11월 27일), 국민의 귀와 눈이 갑자기 신데렐라가 된 황태자비에 쏠렸다. 매스컴의 불꽃 튀는 취재 경쟁이 벌어졌다. '황태자가 매일 밤 전화'. 황실에 대한 매스컴 보도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격화된 황실의 이미지는 '황태자비 미치코'를 통해 국민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듬 해 봄 혼인이 황궁에서 있었다. 결혼식은 NHK TV에 생중계되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그리고 의례집행자가 둘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둘은 세 번 술잔을 입에 대고 놓았다. 그리고 작은 다과를 안주로 먹었다. 조상신 앞에서 나누는 식사는 신랑과 신부 두 사람을 종교적으로 결합시켜준다. 이어 황궁에서 동궁으로 향하는 마차행렬이 있었다. 출동한 카메라가 96대, 방송사 직원이 700명이 동원되었다. 민간방송의 광고료는 3800만 엔이나 되었다. 거리에는 50만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 나와 발을 디딜 틈이 없었고, 전 일본 열도는 열광에 사로잡혔다.

왕실의 혼례라는 국가적 이벤트는 사람들을 들뜨게 만든다. 1300여 년 전 신라도 그러했다. 683년 2월 신문왕은 대신 문영과 삼광을 신부의 친정집에 보내 결혼 날짜를 정했다. 혼인의 의사를 전달한 후 예물을 보내 채택의 예를 행했다. 혼인을 청하는 의례(儀禮)이다. 엄청난 규모의 예물이 신부 집으로 옮겨졌다. "예물로 보내는 비단이 15수레,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젓갈이 135수레였으며, 조(租)가 150 수레였다."('삼국사기')

혼례는 같은 해 5월 7일로 잡혔다. 혼인 당일까지 3개월의 시간이 있다. 왕비로 간택된 신부의 교육에 왕실이 관심을 가지는 것 또한 지극히 당연하다. 그 시간은 결혼 전반을 준비하는 시간도 되겠지만 동시에 신부가 수업을 받는 기간이기도 하다. 결혼 당일의 의식도 문제가 되겠지만 국모가 되어 궁중에서 치러야할 복잡한 예법과 그 절차도 중요하다.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행하기 위해서는 궁중에서 파견된 노련한 상궁에게 집중적인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 4월 '2008 일본상' 시상식에 참석한 아키히토 일왕과 미치코 왕후. 신문왕의 재혼 발표

혼례 당일 오전 6~7시 신부집에 파진찬 대상 손문, 아찬 좌야 길숙 등의 각 아내와 양부(梁部) 및 사량부(沙梁部)의 여자 60명이 왕궁에서 신부집으로 파견되었다. 신부(신목황후)는 부인 책봉의식을 받았다. 앞서 그녀는 친정과의 연을 끊는 의식을 했다. 신부는 먼저 자신을 친정의 조상신으로부터 떼어놓지 않으면 남편의 조상신을 숭배하러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신부가 친정집밖을 나왔을 때 장엄하고 화려한 행렬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친정집에서의 자유로운 생활은 이제 끝이 나려 한다. 마지막 순간이었는데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 신랑이 될 국왕이 궁궐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허물이 될 것이다. 신부는 여자들의 부축을 받고 수레에 올라탔다. 결혼의식을 위해 왕실공방에서 제작된 수레는 화려했다. 그 좌우에서 시종하는 많은 관원들과 부녀자들의 옷도 사치스러웠다. 그것은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왕비가 수레에 앉아 왕궁으로 향하는 이 행렬을 보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군중들이 왕경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고위 귀족들과 그 부인들, 양부와 사량부에서 선발된 아름다운 여자들, 왕실의 악대와 의장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백성들은 중세(重稅)에 짓눌리고 있었으나 눈은 경외심에 가득 차 있었고, 신부를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마음은 새로운 국모(國母)를 맞이한다는 그 어떤 아련한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전쟁으로 축제분위기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신라인들에게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사회 질서는 결혼 축제에 의해 표면을 삭제해 버리고 말았고, 왕국은 화려한 예복을 입었다. 큰 도로는 결혼행진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로 떠들썩하게 채워졌다. 그리고 드디어 왕비를 태운 수레가 행차를 시작했다. 모였던 군중은 열광하여 자신을 잊었다. 고귀한 왕비가 행진하는 광경에 백성들은 현실에 대해 품었던 분노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배자의 논리에 다시 타협을 한다.


축제의 붐

행렬 의식이 끝나자 백성들에게도 왕실의 혼인을 기뻐할 수 있는 은혜가 베풀어졌다. 그야말로 신문왕은 그의 재혼식을 장엄한 형태로 행하고자 국가적 총력을 쏟아서 준비했다. 신문왕은 자신이 새로운 왕비를 맞이한다는 사실을 온 백성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내부적 반란을 완전히 청산하고 새 아내를 맞이하여 이전과 다른 세상을 열어보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전 왕비는 681년에 일어난 반란의 수괴 김흠돌의 딸이었다.

거대한 양의 음식 재료들이 백성들에게 분배되었다. 어둠이 내리자 집집마다 불을 밝혔고, 음식을 하기 위해 불을 때는 연기가 온 왕경을 뒤덮었다. 백성의 무리들이 밤늦게까지 왕경의 거리를 걸어 다녔고, 어디에서나 음악소리가 흥청거리고, 가는 곳마다 처녀 총각들이 어울려 즐겁게 웃고 있었다. 결혼축제는 분노로 들끓고 있었던 신라백성들의 마음을 희망으로 부풀어 오르게 했다.

황태자 아키히토가 제분회사 사장 딸을 사랑한다는 러브 스토리가 매스컴에 보도되자 온 국민이 열광했다. 그들은 자신의 꿈을 특권층을 빌려 표현하려고 했다. 이전에 드물었던 연애 결혼이 일본에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해 황태자의 로맨스를 통해 자신들의 연애에 대한 의미부여와 자리매김이 가능해졌다.

황태자의 아버지 천황 히로히토(1989년 사망)는 패전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사람이었다. 250만의 젊은이가 전쟁터에서 죽었으며, 미국의 공습으로 수백만의 국민이 폭사했다. 원자탄이란 초유의 불덩어리도 2개나 맞았다. 일본인들 가운데 전쟁의 상흔이 없는 사람이 드물었다. 움츠린 국민들의 가슴에 희망을 주어 산업현장으로 내몰아야 하고, 전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일반 국민들에게 축제를 베풀어 배설의 기회를 주어야 했다. 막대한 혼례자금이 국고에서 나왔다.

1958년 11일 27일 약혼발표에서, 그 다음해 4월 10일의 혼례까지 130일 간을 '미치의 붐'이라고 한다. 술집에서건 집에서건 사람들이 모이면 왕실혼례 얘기만 했다. 황실 결혼식을 볼 수 있다는 기대에 사람들은 흥분했고, 열기는 뜨거웠다. 후지은행이 10억 엔을 목표로 개발한 경축예금이 20억 엔을 돌파했고, 증권시장이 과열되었다.


    신라 신문왕의 신목왕후가 혼례 수례에서 내려 걸어들어 갔다는 반월성 입구. 필요한 탕진

신라 백성들도 100년간에 걸친 국가보위 전쟁과 삼국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미 다수 희생되었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몰락해 있었다. 국가의 가혹한 징병과 중세의 하중을 오랜 기간 떠받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통일기에 대규모의 전장(田莊)을 소유하고 있었던 귀족층은 무전(無田) 농민들에게 농지를 빌려주고 지대를 징수하는 경영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수입의 안전을 확보했다. 농민들은 자유민의 신분이면서도 귀족 지배 아래 들어가 생을 유지해 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고귀한 여자를 실은 행렬이 나오자 저택 처마 아래서 굶주림에 날갯짓하는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혼례의 화려한 그늘아래 정치적 파동과 경제의 파산, 사회의 모순과 민중생활의 비참함은 은폐되었다. 축제에서 배설을 한 백성들은 조용히 그들의 삶으로 돌아갔고, 통일 후 확대된 영토 경영에 다시 동원되었다.

현대 일본과 고대 신라의 결혼축제가 1300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다. 전쟁 후 축제에 허비되는 막대한 소비는 국가의 모순을 은폐할 만큼 효과가 있었다는 점이다. 의례란 생산적이지 못한 행위다. 냉정하게 계산한다면, 불합리한 탕진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배자 입장에서 보면 필요한 탕진이며, 사람들의 모순도 비참함도 초월하여 열광하여 도취하는 대상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시공을 초월하여 이러한 비합리를 계속 추구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2002년 월드컵 4강 축제는 아들의 비리로 코너에 몰려있던 김대중 대통령을 구했다.


▶신문왕(神文王·?~692)

신라 제31대 왕. 문무왕의 맏아들. 비는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의 딸. 665년(문무왕 5년) 태자에 책봉, 681년 문무왕에 이어 즉위한 후, 장인인 김흠돌이 모반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 김흠돌을 주살(誅殺)하고 비를 폐위시켰다. 682년 위화부령(位和府令) 2명을 두어 선거(選擧) 사무를 맡게 하고 국학을 창설하여 학문을 장려하였으며, 683년(신문왕 3년)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685년 9주를 정비하였고,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 689년에는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관리들에게 조(租)를 주기로 개정하였다. 당나라와 군사적 긴장이 지속되는 가운데 일본과의 외교에 노력을 기울였다.


▶아키히토(明仁·75)

일본 제125대 왕. 1952년 학습원(學習院) 고등과를 졸업하고, 이 해에 왕세자가 되었다. 1956년 학습원대학 정경학부를 수료하고, 1959년 쇼다 미치코(正田美智子)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가 있다. 1953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의 대관식 참석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을 순방하였다. 1989년 히로히토의 죽음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1990년 11월 즉위식을 가졌다.

 


<33> 중국 만리장성과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
만리장성은 몽골의 침략을 막지 못했다
부시의 MD도 그 효과는 미지수다
그러나 이 값비싼 '방패'로 인해 이익을 얻는 세력은 반드시 있었다

    수많은 희생과 막대한 자금이 투여돼 완성된 만리장성은 몽골 침략을 막는데 효과적이지 못했다.

 

역사상 그렇게 많은 군대가 중국에서 북방 초원을 향해 움직인 적은 없었다. 1449년 7월 명나라 황제 영종(정통제)은 무려 5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전했다. 원나라의 몽골족들이 중국에서 초원으로 쫓겨난 지 90년 만의 일이었다. 중국인의 몽골 본거지에 대한 일대 반격이었다. 군대의 기세는 당당했다. 하지만 메마른 그 넓은 평원은 군사들을 지치게 했다. 행군을 지속해도 지형은 바뀌지 않았고, 몽골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군대를 돌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나라 군대의 위용에 겁을 먹은 몽골인들은 다시 국경을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초원으로 돌아간 그들은 개가 이리가 되듯 야성을 회복했다. 황제의 군대가 토목보(하북성 회래현)에 도착했을 때였다(1449년 9월). 몽골기병이 갑자기 나타나 한 번의 공격으로 명의 50만 대군을 단숨에 흩어놓았다. 평원에서 명나라군 50만은 그야말로 공황상태에 빠진 무리와 같았고, 몽골 기병은 목양견과 같이 그들을 양떼처럼 몰고 다녔다. 몽골 기병은 요리하기 쉬운 공간으로 명군을 몰았고, 주력을 고립시켜 분쇄했다. 몽골인들은 적에게 어떻게 위협을 가해야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주도권을 장악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우두머리를 죽일 때에도 졸병들이 한꺼번에 반항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공포라는 자궁이 잉태한 프로젝트

명나라군이 전멸하고 명나라 황제 영종이 포로가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위기를 맞이한 명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주력의 군대가 전멸된 상황에서 몽골기병이 북경을 당장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조정에서는 양자강 남쪽의 남경으로 철수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예상대로 몽골기병이 북경으로 밀어 닥쳤다. 하지만 최악으로 가지는 않았고, 직후 황제도 무사히 돌아왔다. 하지만 이 사건은 몽골에 대한 뿌리 깊은 공포를 남겼다.

    SM3(함대공 미사일)를 탑재한 미국 CG67함이 일본 요코스카 미 해군기지에 정박해 있다.

 

명군이 초원으로 나아가 몽골과 싸운다는 적극적인 자세는 포기했고, 수세적인 입장으로 일관하게 된다. 영종의 아들 헌종 대부터 섬서·산서성 경계부터 서쪽으로 영하에 이르는 연장 1200㎞의 장성이 구축되었다. 정부의 연 예산 상당부분과 긴 세월, 엄청난 인력이 여기에 투입되었다. 잘 훈련된 건장한 장정이라고 하더라도 피로와 굶주림, 영양 실조까지는 이겨낼 수 없었다. 일꾼들은 매일 동료들을 공사현장에 매장해야 했다. 성벽은 수많은 죽음 앞에 놓인 묘비였다.

현재 미국은 하늘에 만리장성(미사일 방어체제·MD)을 쌓고 있다. 1945년 일본에 두 개의 핵폭탄이 떨어졌다. 한순간에 사상 초유의 죽음이 있었다. 핵시대가 도래했다. 미국과 군비 경쟁을 하던 스탈린은 원자탄을 실은 미국의 폭격기가 생사 여탈권을 쥔 상황을 묵과할 수 없었다. 1949년 소련이 원자탄을 개발했다. 원자폭탄을 더 이상 독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더 가공할 만한 무기의 개발을 추진했다. 핵융합 기술을 사용한 수소폭탄이었다(1952년 11월). 소련도 뒤질세라 9개월 뒤에 그것을 만들었다.

나아가 소련은 핵폭탄을 운반할 수 있는 로켓기술에서 미국을 앞질렀다. 1957년 10월 인공위성을 지구궤도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추진력을 가진 로켓을 완성했고, 더 큰 유효 탑재량을 가진 로켓을 계속 쏘아 올렸다. 소련이 지구 어디에나 핵탄두를 떨어뜨릴 수 있는 기술을 가진 것이 증명되었다. 미국의 도시들은 소련의 핵공격으로 절멸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미국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다. 로켓기술이 1960년 미대통령 선거에 주요 공약이 된 것도 놀란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듬해 출범한 케네디 정권이 미국의 로켓을 달에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1969년 그것은 실현되었다.

1970년 초 미소 양국은 상대방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힐 만큼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미사일 제작은 더 이상 무용한 일로 여겨질 정도였다. 1972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이 체결돼 핵무기 보유에 상한을 두었다. 역설적이게도 핵탄두를 사용할 수도 없고 핵탄두 없이 버틸 수도 없는 마술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상상을 초월하는 무력(無力)함으로 바꾸어버린 일이 벌어졌다(1979년 SALTⅡ조인).

하지만 핵 균형도 1983년 3월 레이건이 SDI계획을 발표하면서 흔들렸다. 그 계획의 핵심은 발사 장치를 우주 또는 지상에 배치, 발사된 직후의 핵탄두를 엔진 연소 중인 상승(Boost) 단계에 두는 것이다. 이는 1985년 3월 제네바에서 열렸던 미소 포괄군축협상에서 최대의 쟁점이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SDI를 내세워 핵 위협 종식을 약속했지만 의회의 반대, 기술 문제, 과도한 예산 소요 등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무력한 만리장성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 지친 소련이 1989년 붕괴되었다. 그러나 핵은 다시 태어난 러시아에 상당수 남아있었고, 이미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있었다.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남아공 이란 북한 등이 핵폭탄을 가지게 되었고, 북한의 발사체 로켓이 제3세계에 수출되었다.

부시는 2002년 6월 탄도미사일방어(ABM)협정에서 공식 탈퇴했고, MD체제 추진 구상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SDI의 부활). 부시의 계획은 3단계 MD체제를 구축해 적국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미국 본토를 지키고,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MD체제를 확산시킨다는 게 골자다. 미국은 특히 영국과 그린란드의 레이더기지를 MD체제의 조기 경보 능력 강화에 활용하려 하고 있고, 알래스카에 미사일 기지를 완성했다. 부시는 1000억 달러 이상의 비용을 쏟아 부었고, 핵폭탄을 맞은 경험이 있는 일본이 찬조금을 냈다.

천문학적 돈과 인력을 투자해 만들어 놓은 명나라의 만리장성은 별 소용이 없었다. 1520년 몽골기병은 하북과 산서지방 깊숙이 내려와 약탈을 자행했고, 1542년 1개월 여에 걸쳐 산서 전역을 약탈했다. 백성 20만 명을 죽이고, 8만 호의 가옥을 불태웠으며, 10만경의 토지를 황폐화시키고, 200만두의 가축을 탈취해 갔다. 그들에게 만리장성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1550년에 가서는 명제국의 수도인 북경을 수일간 포위하는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었고, 북경주변의 모든 민가들이 약탈당했다. 비효율적 방어체계에 들어가는 국가의 부담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520년대에 연 59만 냥의 은(銀)이 들어가던 것이 1539년에는 100만 냥, 1551년에 가서는 220만 냥으로 급증한 후 그 상태를 유지했다. 1569년 발해만과 북경 부근으로 이어지는 만리장성의 수리가 있었다. 성의 외면은 구은 벽돌로 쌓았다. 높이 약 9m, 너비는 윗부분이 약 4.5m 였다. 5년간 약 100m 간격으로 1300개의 망루(墩臺)가 설치되었고, 여기에 은 550t이 들어갔다.

미국의 MD체제 구축에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돈이 더 투입될지 알 수 없다. 매년 100억 달러의 돈이 투입되면서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경쟁국의 기술도 진화되고 있다. 러시아는 최근 모든 방어망을 통과할 수 있는 신형 미사일시스템을 개발했다(신화통신). 이 신형 탄두는 '갈 지 자(之)' 형태로 비행하도록 유도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푸틴은 "이 탄두는 예측 불가능한 궤도로 운행하기 때문에 대단히 막기 어렵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미국의 MD를 무력화하려 한다.


방패보다 개발비용이 극단적으로 저렴한 창

문제의 핵심은 앞으로 창과 방패의 개발 경쟁에서 방패(MD)를 제작하는 비용이 창(미사일)의 그것보다 극단적으로 많이 들 것이란 점이다. "지구의 모든 하늘을 방어하는 방패의 값이 얼마나 비쌀까? 새로운 창이 개발될 때마다 방패를 보강해야 하는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핵미사일처럼 몽골기병도 명의 북쪽 변경에 언제 들이닥칠지 몰랐다. 당연히 몽골족(창)의 군비보다 총 6000㎞인 만리장성(방패)을 구축하고 군대를 투입하여 지속적으로 경비한 명나라의 군비가 비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반면 몽골족의 성공적인 약탈과 국경시장 강제개방은 소요된 군비의 수십 배의 이익을 안겨다 주었다.

1947년에 공연된 막스 프리슈(Max Rudolf Frisch) '만리장성' 소극의 상황 설정은 현재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다. 2000년 전 세상을 모두 정복한 중국 황제가 만리장성을 수축하자 백성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 "독재자 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은 것은 외부로부터 적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윤을 위한 장삿속이야!"

지금 MD를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부시 대통령에게도 소문이 났다. "MD에 앞으로 2500억 달러가 더 투입될 것이야. 요격 탄두 센서를 제작하는 TRW사, 레이더 회사 레이시온(킬러 위성개발), MD 요격미사일체제 구축 사업을 총괄하는 보잉사, 종합 방산회사 록키드 마틴은 돈방석에 앉았어! 그 회사들의 거대주식을 보유한 사람들은 모두 부시와 친분이 깊은 사람들이야."


▶만리장성(萬里長城)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 유적이다. 중국 왕조들이 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세운 방어용 성벽이다. 지도상 연장 길이 2700㎞이며, 중간에 갈라져 나온 지선들까지 합치면 총 길이가 6000㎞에 이른다. 춘추시대(770~ 443년)부터 북쪽 변방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건축되었다.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한(221년) 후 북쪽의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이들 성벽을 연결하고 증축했다. 당시의 만리장성은 동쪽 요양에서 서쪽 감숙성까지로 지금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다. 만리장성이 현재 위치에 처음 축성된 것은 6세기 북제시대다. 이후 명나라 때 총 길이 2700㎞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와 모습을 갖추게 됐다. 북방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청 왕조에서는 군사적 가치가 없어 방치되어 있다가, 현재 관광 목적으로 보수되었다.

▶명나라(明·1368~1644년)

명은 중국 역대 왕조 중 하나로써 주원장이 원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한족(漢族)의 왕조이다. 멸망 후에는 청나라가 명나라의 재건을 목표로 한 남명(南明)정권을 제압하여 중국을 지배했다.

 

<34> 미국 재무부 채권과 남송의 세폐
아시아와 미국의 기이한 공생, 그 바닥엔 '공포'가 있다
승전국과의 전후 무역으로 급성장한 패전국
그들의 돈을 빌려 다시 소비하는 승전국
이 비합리를 유지하는 건 공멸에 대한 두려움이다

    

 

→일본 요코하마 부두에서 수출을 앞두고 대기 중인 일산 자동차들. 에너지 효율이 높은 일본 자동차는 세계 각국에 수출돼 이 나라의 대외 무역 흑자를 이루는데 큰 몫을 해왔다. 국제신문 DB

봄기운이 완연한 하북 평원의 자주(磁州). 파란 하늘과 시커먼 땅이 붙은 지평선 위에 금나라 여진족 기병 17명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1126년 음력 2월).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그들은 금나라 황제에게 전할 중요한 서신을 갖고 있었다. 금이 송나라 수도 개봉(開封)을 공격하고 송과 금 사이에 강화가 맺어진 직후였다. 송나라 장군 이간이 2000명의 보병으로 그들을 막았다. 기병들은 강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이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송나라 조정의 밀지를 받은 이간은 움직이지 않았다. 수적으로 근 120배나 많은 송나라 군대는 기세가 당당했다. 기병들은 뒤로 물러서 돌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공격을 위한 도움닫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달려오던 17명 기병은 좌(5) 중(7) 우(5) 3대로 분열했다. 쐐기 모양으로 돌진하면서 송나라 보병의 대열 한 곳에 화살을 퍼부었다. 수십 명이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놀란 송군 2000명은 동요하여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송군의 거의 반이 전사했다. 그러나 17명 기병은 단 1명도 죽지 않았다. 패전한 북송(北宋) 측의 기록이다('三朝北盟會編' 卷36, 靖康 원년 2월 조).

강화조건으로 금은 송에게 금 500만 냥, 은 5000만 냥의 지불과 중산(하북성 정현) 하간(하북성) 그리고 태원(산서성) 등 3진 20주를 요구하였다. 송나라 황제 흠종은 당면한 위기를 면하기 위해 이를 수락하였다. 금나라 군대가 북쪽으로 돌아간 뒤 송나라 황제는 약속을 무효화했고, 금나라 내부의 반란을 획책했다. 격노한 금나라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개봉을 포위하였다.


재앙은 입에서 나온다

말만 잘하는 문신들이 조정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불행이었다. 포위된 상태에서 주전론자와 화평론자 간의 논쟁이 있었고, 주전론자가 승리했다. 무모한 수도 사수가 결의되었다. 개봉은 단번에 함락 당했다. 금군은 황제와 그 아버지 황후 궁녀 등을 사로잡고, 성안의 보물을 약탈하여 북쪽으로 돌아갔다.

전 황제의 아들(고종)이 양자강 이남으로 도망하여 임안(항주)에 도읍하고 남송을 세웠다. 요동의 벽지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송환을 원했던 그는 금나라와의 화평교섭을 시작했다. 양국은 회수를 국경으로 확정하고 송은 매년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세폐(歲幣)로 금에게 증여한다는 조약이 맺어졌다. 죽은 아버지의 관과 어머니 위씨가 송환되고, 평화가 찾아왔다.

송나라 황제가 금나라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취해야 하는 치욕적인 강화였다. 하지만 평화는 남송에 경제적으로 번영을 가져왔다. 양자강 유역에 대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수리와 관개에 힘썼던 결과 쌀 차 등의 농업 생산이 급증하였고, 도자기를 비롯하여 비단 제지 목판인쇄업 등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수리의 발달과 조선기술의 혁신에 따르는 수상교통이 활발하여 화물을 원격지로 운반하는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대외무역은 북송시대를 훨씬 넘는 성황을 보였다. 차 비단 도자기 서적이 금나라와 고려 그리고 일본 동남아 각국에 수출되었고, 특히 도자기는 인도는 물론 이집트 소말리아에까지 판매되었다.


또 다른 전쟁이 가져다 준 패자의 번영

전쟁에 패배했지만 경제대국이 된 나라가 현재 우리 가까이 있다. 1945년 일본은 핵폭탄 2개를 맞고 나서야 미국에 항복을 했다. 군인 250만 이상이 죽었고, 폭격으로 민간인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일본은 미군의 군정 아래에 들어갔다.

미국은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재벌은 해체했고, 일본의 잔존 공업시설을 한국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에게 분배하려고 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한국 가까이에 있는 일본은 포탄, 군용트럭, 항공기용 기름탱크, 가시철망, 참호용 마대, 군용모포 등의 물자조달과 트럭, 전차, 함정의 수리 등 서비스 특수를 누렸다. 엄청난 수의 미군이 일본에서 소비를 하게 되면서 전쟁특수는 일본 전체에 파급되었다. 한국전쟁은 3년 동안 일본에게 28억달러(8000억엔)를 가져 주었다. 이로써 일본의 공업수준은 전쟁이전 상태로 회복되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10년간 일본의 국민총생산은 4배로 증가했고, 경제성장률은 10%대를 유지했다. 정부가 주도한 고속도로, 신칸센, 동경올림픽(1964년) 등 공공시설 건설이 지속되었고, 국민경제를 강하게 자극했다.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몰렸고, 1962년 도쿄인구는 1000만 명을 넘어섰다. 호경기로 완전고용시대를 맞이했고, 미국에 대한 무역수지가 흑자를 기록했다(1억 1300달러). 1964년 조선, 라디오, 모터사이클, 카메라 등의 생산은 이미 세계 1위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일본에게 또 하나의 기회였다. 1968년 국민총생산에서 독일과 프랑스를 추월한 일본은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가 되었고, 1970년에 전 세계 총생산의 6%에 이르렀다. 이듬해 미국은 무역수지 적자(28억 달러)로 돌아섰고, 일본의 무역수지는 79억달러의 흑자를 기록해 세계 1위가 되었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는 일본의 공업을 더욱 발달시켰다. 에너지를 적게 먹는 소형차와 전자제품이 개발되었고, 미국과 전 세계에 수출되었다.


달러의 미로에 빠진 동아시아

1983년 일본의 수출은 지나치게 증가하여 심한 견제를 받게 되었고, 자동차의 대미수출을 스스로 규제해야 했다. 1985년 나카소네 수상은 TV에 출연하여 "수입 확대를 위해 국민 한 사람이 100달러씩 외국제품을 사주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듬해 일본의 무역흑자는 1061억 달러, 대미 흑자는 전년보다 20.1%로 증가한 520억 달러로 사상 최고를 달성했다. 일본의 막대한 무역흑자 달러의 상당부분이 미국 재무부 채권, 국채, 부동산 등으로 흘러들어갔다. 일본이 미국의 강압에 의해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안전한 미국의 자본시장은 투자에 대한 이익을 보장했고 현금화가 가능한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미국 재무성이 발행한 채권은 무기명으로 24시간 내내 거래되며 그 규모는 하루에 무려 600억~700억 달러였다. 유동적인 2차 금융시장이 미국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 순환 메커니즘을 그대로 추종했던 국가가 한국과 대만이었고 현재 미국으로부터 매년 2000억 달러의 흑자를 보는 중국이 그것을 답습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미국은 강한 달러 정책을 효과적으로 운영함으로써 낮은 금융비용으로 막대한 해외자금을 조달했다.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간 자본이 미국의 경상적자를 보전해주었다. 미국은 유입된 해외자금으로 다시 해외투자를 단행하고 막대한 물자를 동아시아로부터 수입하여 세계경제의 성장을 견인했다. 미국 경제의 역동성이 떨어진 2000년대에도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 중앙은행들이 미국의 경상적자를 보전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2004년 1분기 이후 15개월 동안 일본의 통화당국은 35조 엔을 만들어냈다. 일본의 민간기업이 미국에 물건을 팔고 벌어들인 달러화를 일본통화당국이 사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일본의 통화는 상승했을 것이고 이는 미국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경쟁력을 약화시켰을 것이다. 나아가 일본인들이 그토록 많은 미국 재무부채권을 사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공포 위의 경제

약 900년 전부터 매년 금나라로 들어가던 남송의 돈(1208년 은 30만 냥 비단 30만 필로 증가)은 남송의 수공업과 상업을 크게 자극하는 예상치도 못한 결과를 낳았다. 남송의 상인들은 돈을 벌기위해 금나라와 무역에 경쟁적으로 뛰어 들었고, 수공업자들은 폭증하는 주문으로 바빴다.

현재 동아시아는 생산하고 미국은 동아시아의 돈을 빌려 소비한다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좋게 말해 미국은 세계의 '성장엔진' 노릇을 하고 아시아는 달러 가치를 지탱해준다는 암묵적 균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금나라가 남송에게 매년 돈을 빨아냈다면, 미국은 매년 돈을 빌린다. 900년의 시간을 넘어 이러한 2개의 메커니즘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공포'가 그것이다.

금나라군대가 쳐들어와 남송을 유린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침공에 대한 공포는 남송이 매년 막대한 은과 비단의 금나라로의 송금을 보장했다. 금나라 국경에 개설된 시장에 상인들이 몰려가 활황을 이루었고, 세계 최강국 금나라 사람들의 소비를 증가 시켰다. 특히 기호식품인 차는 생활필수품이 되어 금나라 측의 국제수지 적자를 가져 오게 하였다. 무역의 확대는 금나라 여진인들의 중국화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였다.

미국은 동아시아 각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돈을 빌릴 수 있고, 그 빚으로 소비를 지속하여 동아시아 각국으로부터 수입을 할 수 있다. 그 위험성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공멸의 두려움이 이 균형을 유지해준다. '금융공포의 균형'이 매년 동아시아에서 미국으로의 달러가 들어가는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달러체제가 무너지고 미국이 동아시아의 물건을 수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35> 황소와 알카포네
反시장적 금기법은 악을 잉태한다
당나라의 원가 37배 소금 전매제와
범죄예방 목적 美 금주법에
황소의 난 일어나고 마피아는 세력키워

    황소가 정부 용병에게 쫓기다 자결한 산동의 태산.

 

"길이 어디야. 빨리 안내하라! 그 놈에게 잡히면 나는 수모를 당하며 죽을 것이다." 881년 1월 8일 당나라의 황제 희종은 마음이 급했다. 황제는 장안의 서문인 금광문을 빠져나왔다. "허겁지겁 가는 저 자가 황제야?" 백성들이 바라보기에도 너무나 초라한 황제의 도주였다.

같은 시간 장안의 동문인 총명문에는 반란군의 수령 황소(黃巢)가 금수레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호위병이 있었고, 뒤로 대군이 따랐다. 장안의 백성들은 조수와 같이 길 양쪽으로 밀려들어 반란군을 환영했고, 궁전에서 갇혀 살던 수천의 궁녀들도 거리에 나와 황소를 보았다. "저 소금장수가 황제보다 멋있어!"


시작되면 멈출 수 없는 악세(惡稅)

소금장수가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물론 당시 일반인의 소금매매는 불법이었다. 122년 전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나 당나라 정부의 재정이 거덜났다. 급하게 황제는 소금의 정부 전매제를 실시했다(758년). 그 목적이 군사비를 충당함에 있었으므로 세율이 상당히 높았다. 최초에는 소금 1말(斗)에 10전(錢)이란 원가보다 10배가 되는 100전을 부과하여 110전으로 팔았다. 이것도 엄청난 고가(高價)인데 정부의 재정난이 가중됨에 따라 소금 값도 올라서 310전(錢), 또 370전(錢)이 되었다. 원가의 37배에 이르렀고, 정부의 재정 절반이 여기에서 충당되었다.

    1920년대의 금주법이 시행되자 이권을 좇아 숱한 범죄를 저지른 마피아의 대명사 알 카포네. 일반인들은 비싼 정부소금을 사먹기 힘들었다. 그러니 이보다 훨씬 싸게 파는 불법적인 상인들이 생겨났다. 황소의 가문도 산동성에서 대대로 소금 밀매업을 하여 재산을 축적했다('신당서'). 정부군의 단속을 막아내기 위해 행동대원들도 고용하고 있던 마피아 패밀리였다. 아버지는 황소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것을 원치 않았다. 불법적인 사업은 너무나 힘이 들었다. 관리도 매수해야 하고, 행동대원들도 먹여 살려야 했다. "이거 못해먹겠어! 너는 공부를 해. 과거에 나아가 급제하여 관리가 되어야 해." 하지만 황소는 번번이 시험에 낙방을 했고, 나이가 들어 가업을 이었다.

이윽고 체포망이 황소의 조직을 향해 좁혀왔고, 황소는 궁지에 몰렸다. 가만히 앉아 죽는 것은 억울했다. 차라리 거세게 반격을 하여 추격하는 관군들을 전멸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했다. 그는 소금밀매 조직망을 이용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병력을 모았다. 얼마 전 산동으로 이주해온 유목민인 회흘족을 휘하에 많이 두었다. 회흘족들은 농사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싸움에 능했다. 정보와 지리에 밝은 소금밀매조직의 보스에게 거친 기질을 가진 유목민들이 합세했다. 호랑이가 날개를 달았다. 그들을 괴롭히던 관원들이 절멸됐고, 관가는 점령 당했다. 이제 반란군이 된 그들의 무리는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황소는 무리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중국의 천하를 횡행했다. 그들은 황하를 두 번,양자강을 4번이나 건넜다.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황소는 한 곳에 정착하여 영역을 확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병력도 분산시키지 않고 집중시켰다. 부유한 도시를 점령하고는 그곳에 축적된 물자를 소비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반란을 일으켜 중국의 내지를 남북으로 약탈하고 다닌 지 6년째 장안을 점령했다.


윤리적 금주법이 배양한 범죄조직

대공황 시대 어느 마피아 보스가 미국의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인 시카고를 실질적으로 장악한 적이 있었다. 그는 황소처럼 수도를 장악하여 2년 이상 통치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능한 킬러를 거느린 그는 선거에 개입하여 자신의 말을 듣는 시장과 주지사, 시의원, 노조지도자들을 당선시키고 판사와 경찰들을 매수하여 주물렀다.

알카포네는 창문으로 이탈리아 음악이 흘러나오는 뉴욕 부르클린의 빈민가에서 성장했다. 10대에 학교를 뛰쳐나와 폭력을 배웠고, 20대에 시카고로 가서 1000여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연 1억 달러의 순이익을 벌어들이는 마피아 보스가 되었다(1925년).

1919년 1월 16일 미국 의회에서는 알코올의 양조·판매를 금지하는 헌법 18차 수정안이 비준되었다. 법안은 1년 후인 1920년 1월 9일 효력을 발생했다. 알코올 중독이나 범죄 행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음주를 막는다는 것은 멍청한 발상이었다. 알코올에 굶주린 사람들은 암시장에서 술을 찾았다.

알카포네는 상관이던 토리오에게 기회가 왔다고 말했다. 토리오의 삼촌이자 보스인 콜로시모의 매춘조직과 200개가 넘는 윤락가를 이용하여 황금알을 낳는 사업에 뛰어들자고 권했다. 하지만 배가 부른 삼촌은 모험을 원하지 않았다. 사업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토리오는 삼촌을 제거했다. 자객은 어린 시절 뉴욕에서 알카포네에게 폭력을 가르쳤던 프랭크 예일이었다.

아일랜드 갱, 유태계 갱, 폴란드 갱, 또 다른 이탈리아 갱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밀주사업은 한두 사람의 입을 적시고 말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거대했다. 토리오는 각 갱단의 보스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정말 시장이 크기 때문에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긴밀히 협조를 하면 모든 사람이 백만장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운 것이라고는 거짓말과 공갈 협박 폭력이었던 갱들이 신사협정을 지킬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밀주 판매시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매춘, 하우스도박, 경마도박, 고리대금업, 보호비 수금 등 수입을 남길 수 있는 사업의 종류는 많았다.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마피아 전쟁

아일랜드계 갱의 보스인 오베니온이 이탈리아계 토리오에게 사기를 쳤고, 토리오는 오베니온을 제거했다(1924년). 아일랜드 갱들의 복수가 이어졌다. 이듬해 1월 토리오는 가슴과 팔 그리고 복부 등 다섯 곳에 총격을 받았다. 병원으로 옮겨져 30명의 경호원에 둘러싸인 채 수주일의 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진 토리오는 병석에서 알카포네와 조직원들을 불렀다. "나는 은퇴한다. 이제 조직은 알카포네가 이끈다."

26세의 알카포네는 토리오가 탄탄히 기반을 다져놓은 사업제국을 더욱 확장하고 굳게 세우게 된다. 그의 조직은 6000개의 밀주판매점과 2000군데의 마권 판매소를 운영했으며, 매춘과 고리대금업 나아가 노조의 이권에도 개입했다. 1주에 순수익이 600만 달러나 되었다.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해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미 정부는 그를 살인 교사죄로 결코 체포할 수 없었다. 누구도 증인이 되기를 거부했으며, 설사 증언대에 섰다고 하더라도 기억을 상실했다. 1931년 그는 결국 체포되었다. 죄목은 탈세였다. 하지만 그가 없는 조직은 오히려 더 번창했고, 화려해지기까지 했다. 1933년 금주법이 파기되자 마피아들은 다른 사업을 찾아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이었다. 금주법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일개 불한당에 불과했던 갱들을 조직화시키고 거대 사업가로 만들었다.

황소의 반란은 10년 만에 진압되었지만(884년) 그의 동지들은 5대 10국이라는 분열의 시대에 소국의 주인이 되었다. 양자강 남쪽 일부를 점령한 오왕 서온(徐溫)과 사천성에서 전촉(前蜀)을 창건한 왕건(王建), 절강을 영유했던 전류 등이 모두 소금장사 출신이었다.

소금의 공정 거래가가 비싸면 비쌀수록 암거래는 성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단속이 엄하면 엄할수록 암거래의 이익은 커지고 암거래 조직도 많아진다. 단속하는 관헌을 더욱 늘려야 하고, 그럴수록 단속 비용이 늘어나 소금 가격은 오르게 된다. 악순환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면서 밀매조직을 더욱 광범위하고 정교하게 만든다. 소금 전매법과 금주법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다. '법(法)에서 악(惡)이 배태된다.' 금단의 사과에 대한 유혹이 원죄로 이어지듯 금기의 법은 언제나 범죄로 이어지는 것이다.


▶황소의 난(875∼884)

중국 하남성의 소금 밀매업자 왕선지가 난을 일으켰다. 직후 산동의 소금 밀매업자의 두령인 황소도 난을 일으키고 그와 합류하였다(875년). 둘은 하남성과 산동성 일대를 점령했다. 왕선지가 죽은 후 황소가 대장이 되었다. 강서·복건·광동·광서·호남·호북 등으로 이동하며 60만으로 불어난 황소의 군대는 낙양에 이어 장안을 점령했다(880년). 황소는 장안에 정권을 세우고 국호를 대제(大齊)라 부르고 항복한 관리도 기용했다. 그러나 정부가 기용한 사타족 기병에게 격파되어 황소는 4년 후 산동의 태산 부근에서 자결했다.

▶마피아(Mafia)

마피아는 원래 19세기의 시칠리아섬을 주름잡던 산적이었다. 그 일부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이나 시카고와 같은 대도시에서 범죄조직을 만들었으며, 1920년대의 금주법으로 자금원이 생기자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1930년대에 마피아 내부에도 질서가 생겼다. 합의제인 위원회가 조직 간의 이해를 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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