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 실제 사진
거북선에 대한 여러가지 논란과 의문들
한국인에게 있어서 거북선 만큼 유명한 배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북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너무나 많은 정보 속에서 오히려 거북선의 실체를 잃고 헤메이고 있지는 않은가? 거북선에 대해서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면 대개는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고, 무적의 장갑함이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우리가 거북선의 모습을 볼수 있는 것은 실제 충무공 시대 기록에는 오직 난중일기와 장계에 짤막한 설명 뿐이며, 당연히 사진이나 그림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영조때 충무공 전서에 그림이 두장이 전해지는데, 그 모습이 현대적 시각으로 보기엔 어딘지 좀 모자라 보이고, 또 우리가 그동안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오던 무적 철갑전함의 모습으로는 좀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나오는 복원 모형들은 논란도 많고, 의문점도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왼쪽 그림은 세계각국의 해양박물관을 소개한 책(Marine Museum of the World) 속에 미국의 선원교회연구소(Seamen's Church Institute)에 보존되어 있는 거북선 사진이다. 본인이 이 사진을 처음 접한 것은 얼마전 일이었는데, 사실 이 배에 대해서는 아주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존경하는 선생님중 한분 이셨던 김재근 선생님의 오래된 "거북선의 신화"라는 소책자 서문에 바로 이 거북선 사진에 대해 짧게 논의된 바 있던 그 사진이 틀림 없었다. 우리는 한 십여년만 지나면 전 사람의 기록은 무시하고 자기가 새로 발견 했다고 떠드는 못된 망각이란 병이 있는데, 이 거북선 사진 역시 그런 셈이다. 1978년 초판 발행본 "거북선의 신화" 서문에는 이 배 사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그 꼴이 그로테스크하기 그지 없었다. 뱃머리에 용머리인양 만들어 붙인 그 면상은 귀신같이 험상 궂고, 쇠붙이로 만들어 늘어뜨린 닻은 배안에 들어갈 수도 없을만큼 크며, 선체를 공작한 솜씨 또한 ~중략~ 어떻게 그것이 뉴욕도 한복판인 25번가 선원교회연구소에 자리잡고 있는 그 박물관에... ~ 중략~
그런데 바로 이사진이 얼마전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나왔다. 바로 거북선 실물 가능성이 큰 사진 이라면서...기사에 따르면 이 사진은 목선의 부식이 진행될때의 모습과 흡사하며, 또 시기적으로 거북선실물이 버려져 페선이 되어 가고 있을때라는 점을 주장을 함변서 제시된 이 사진은 우리가 아는 거북선과는 너무나 많이 달라 괴기스럽기 조차 하다.
그럼 우리는 지금부터 이들 거북선에 대한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 보고 또 지금까지 제시된 수많은 가설들을 검토해가면서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풀어 보도록 하자
먼저 거북선에 대한 대한 의문점들을 종류별로 나눠 살펴 보자
아래 거북선 사진은 세계각국의 해양박물관을 소개한 책(Marine Museum of the World)속에 미국의 선원교회연구소(Seamen's Church Institute)에 보존되어 있는 거북선 사진이다.
미국 선원연구회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아,
한국에 미국선교사들이 와서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발견하고 사진에 담아 간듯하다.
흑백 거북선은 수년전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등 국내 일간지들이 대서 특필하며 올린 것인데
선교교회연구소에서 발행한 책에 담긴 원본 거북선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진을 이용하여 마치 자신들이 최초로 발견한 듯이
인터넷에 광고하며 자기 카페 회원모집 수단으로 써 먹는 자도 있다.
전라좌수영 거북선이다. 인천 갯벌에 정박중이다.
재미 기업인 윤원영씨가 공개한 300~350년 전의 고서화.
거북선으로 추정되는 군선 위의 장수, 병사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거북선은 3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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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에 대한 의문들
1. 거북선은 철갑선이었다 Vs 아니다 목조 장갑함이다
거북선에 대한 논란 중 가장 많은 것이 바로 거북선이 과연 철갑선인지에 대한 의문 일것이다. 우리는 교과서나 그동안 전해진 이야기에서나 모두 거북선은 당연히 쇠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래서 왜군의 조총을 막아낼 수 있어 적선을 모조리 격침 시킬 수 있었다고 배워 왔다. 그랬기 때문에 요즘들어 일부에서 주장 하듯이 거북이 철갑선이 아니라고 하면 우선 그래가지고야 포탄이 난무하는 적진에 어떻게 홀로 치고 들어갈 수 있냐? 그래서야 어디 방탄이 되겠는가? 하는 의문 부터 들고 나오고 또 감정까지 격해지곤 한다. 그런데 거북선은 과연 철갑선이 었을까? 지금으로선 알수 없으나 우선 거북선 철갑설의 진위 보다 먼저 과연 거북선이 언제 누구에 의해 철갑선이라고 전해지기 시작 했는지 알수 있다면 거북선 철갑설의 진위를 어느 정도 파악 할 수 있지 않을까?
먼저 거북선 철갑설은 일본측으로 부터 나왔다.
일본의 기록에 나오는 조선의 철갑선
임진왜란 해전의 패전으로 일본은 조선 수군에 대하여, 특히 이순신과 거북선 및 판옥선에 대한 과장 보고를 했다는 것이 우리 학계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우리 사학계에서 일본측 기록을 무시하는 것은 그들의 기록이 너무 허무 맹랑하고 과장된 점이 많아 도무지 사료라 하기 보다는 소설과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면 일본측 기록중 선조 25년 5월 당포에서 패전한 기록을 적은 일본측 기록을 보면 적 군선 수천척이 화포와 화전을 쏘아서 가메이(일본 수군장)의 배를 불태웠다라고 하고 있다. 당시 우리는 소형 보조선 까지 합쳐서 100척이 안되는 전력 이었고, 전함은 24척이었다. 또 칠천량 해전을 기록한 것을 살펴 보면 15일 아침 고려 병선이 빈틈없이 늘어서 대포와 화전을 쏘아대는 동안 폭음이 산해에 울려 퍼졌다.
적(조선) 군선의 모양은 일본배에 비할 바가 아니다. 배의 길이는 50~60간이나 되고, 3자~4자 사각 각재를 못을 쓰지 않고 통으로 맞물려 끼워맞춰 건조하였으며, 판자의 틈새는 챤을 부어 넣어 마치 구워만든 물건과도 같이 견고하였다. 2층 3층으로 두꺼운 판자를 깔고 길이 8~9간이나 되는 대노에 누꾼 8명이 앞뒤로 마주보고 밀고 당겨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좌우에는 대궁, 석화시, 봉화시를 수없이 걸어 놓고 있었다. 그 대궁의 길이는 4간쯤 되는데, 둘레가 3자나 되고, 누시라는 것을 4치 둘레로 꼬아 현에 걸쳐있다. 그 살(화살)은 2간이 넘는 나무를 8치 둘레로 깎고 4자쯤 되는 쇠날개 3개를 달고 3자쯤되는 철의 석부에 붙여서 쏘는 장치를 해놓고 2층 3층의 선루에서 5정 밖으로 쏘아댔다.
각각의 배에는 갑옷을 걸치고 병장을 잡고 있는 정병 2천 3천명씩이....와 같이 황당 무게 한 이야기 인지라 그동안 우리 사학계에서는 그들의 기록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다만 거북선의 철갑설만은 우리 사학계가 이들의 기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거북선이 철갑을 하지 않으면 포격으로 부터 안전 하지 못하고 따라서 전선에 대한 무패를 기록 할 수 없지 않겠느냐 하는 심정적인 동조인듯 하다.
일본 기록의 과장
일본측 기록을 현대식 도량형을 써 요약해 보면 조선 전함은 길이가 150~180 미터(1간=10자 :150~180m)이고 노의 길이가 24~27 미터이고 배의 양현에 장착된 큰활은 그 길이가 12미터 이고 거시서 길이 6미터나 되는 화살을 쏘았고 병사 2~3천명이 한배에 탈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게 말이 된다고 보는가?
길이 180 미터에 전투 요원 2천명이라면 세계최대 전함이라 일컬어지는 저 야마토나 무사시와 비슷한 숫자의 승무원에 그 크기도 워싱턴 조약 시대에 만들어져 2차대전중 쓰인 전함들과 비슷한 크기가 된다. 2차 대전때 유명한 독일 전함 그라프 슈페가 길이 608피트 였고, 진주만에서 일본의 공격을 받은 미국 전함 아리조나가 역시 길이 608 피트 였다.
또 쇠날개를 단 화살 길이 6미터라니...우리가 보유한 포로 발사하는 가장 큰 대장군전이 쇠날개를 달긴 했으나 그 길이는 1.8미터 정도 였으니 약 절반 정도 크기 였던 셈이 된다. 그런 이런 허무 맹랑한 이야기를 믿는 이유가 무엇일까?
또한 일본측 기록에는 유난히 철갑선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일본 해군 대좌의 저술에서도 임진란 14년전 규끼 (임진란에 참가)가 이미 오다노부나가의 명령으로 길이 13간, 폭 7칸, 탑승원 700명의 대형 철장갑 군함을 7척이나 만들었다고 하고 임진란때도 철로 장갑한 대전함을 건조 했으며, 칠천량때에도 2척의 철장갑함이 참전 했다고 했다.
또한 규끼는 임진 전쟁뒤 일본으로 돌아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판성을 공격할때 거북선을 참조하여 메꾸라부네(장님배:일본에선 거북선을 이렇게도 불렀다)를 만들어 물및을 잠행하여 대판성 해자를 넘어 불량기로 성벽을 부수었다라고도 했다. 무슨 영화 동방불패 2에 나오는 이야기 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들의 사료만을 가지고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측 기록에는 없지만, 바로 그 거북선에 당한 피해자라고 할만한 일본측에서 모두 철갑선이라고 하니 우리도 철갑선이라 하자 라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 기록
그러나 우리측 기록에는 그 어디에도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말이 없다. 오직 거북선의 뚜껑을 판자로 덮고 칼송곳을 꼿았다고만 되어 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의 보고서인 장계 에도 그렇게 설명 하고 있으며, 조카 이분공이 저술한 충무공 행장에도 그렇게 나와 있으며, 후대의 조선 정부가 저술한 이충무공 전서의 설계도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식견있는 학자 들은 이미 일찍부터 이러한 사료를 바탕으로 거북선은 장갑함 일뿐 철갑선은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저 단재 신채호역시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니고 장갑선이다]라고 한 것도 그 한 예이며, 해군사관학교 교수 이셨던 최영희선생님 역시 거북선은 문헌을 고찰 할때 철갑선이 아닐 것이라고 1957년 부터 주장 하고 있었다.
거북선에 대한 허영, 게다가 이미 조선 시대 부터 충무공의 거북선에 대해서는 자세히 연구되어 있었다. 충무공 사후 200년이 지난 정조때 왕명으로 당시의 모든 자료를 수집하여 이충무공 전서를 만들고 거기에 두종류의거북선 그림을 실었다. 그중 통제영 귀선이 실제 이순신 장군의 귀선에 가깝다고 분명히 명기 하고 있으나 우리는 왜그런지 전라좌수영 귀선을 더 좋아해서 그것을 기준으로 모형이나 그림을 그리곤 한다.
요즘 보기엔 좌수영 귀선이 더 멋지게 그려졌기 때문인듯 하다. 이같은 풍조가 허영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것은 거북선에 대한 쓸데 없는 우상화와 신격화 같은 것이 만들어 지고, 수수께끼인양 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적인 분석이 따르지 않은 신화화된 이야기는 세계인들의 웃음거리일뿐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실제로 세계인들은 철갑선의 시조를 남북전쟁 당시의 북군의 모니터호를 삼고 있지 거북선은 그저 고대 설화나 전설로 웃어 넘길 따름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거북선은 목제 장갑함이며, 통제영의 거북선을 임진왜란 당시의거북선 표준 으로 생각 해야 할 것이다. 또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당시 일본 해군의 주무기는 조총으로 구경 2Cm정도에사거리 50미터가 조금 넘었다는 것을 잘 생각해야 한다. 그런 빈약한 무기를 막는데는 우리 전함의 표준 두께 4치(약 12센치) 소나무를 뚤을 수 없고 또 거북선의 참나무 방패판을 도저히 뚤을 수 없었다,
또 왜군의 가장 큰 전함에도 겨우 750 그램의 탄환을 쏘는 오오쓰라는 포가 장치되었으나 그것도 배의 기둥에 묶어 놓은 것이라 발사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 배는 너무 약해서 포를 장착하지 못하고 가장 큰 전함에 포를 배의 주요 기둥에 묶어야만 했다) 따라서 이런 빈약한 적이 보기에 우리 전함의 천자총에서 발사 하는 길이 180 센치미터, 무게 30킬로그램이 넘는 대형 장군전은 그들의 배나 우리배는 크기면에선 비슷하다는 점을 생각하건데 아마도 대포로 쏘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그저 무지무지 큰 길이 12미터 짜리 활로 쏘았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옛날의 사료는 그 진위를 잘 파악 해야 한다. 글자를 글자로 파악하면 오해가 생긴다.
특히 임진란에 직접 참전 했던 일본 수군장들의 견문을 모아놓은 [지마군기(志摩軍記)]에는 조선 군선 중에서 세척의 장님배(거북선)가 철로 요해(중요한 부분을 감쌈)되어 있다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거북선 이며, 거북선의 중요 부분은 철로 보강되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또한 [등강량정문서(藤江良亭聞書)]라는 책에는 "조선에서 제 1전에 패군한 것은 첫째로 지리에 어둡기 때문 이었다. 특히 조선 배는 고래등 같은 모양으로 싸둘러 견고하게 만들어 쉽게 대적하기 힘들었다 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고래등 이라는 것은 거북선을 뜻하는 것 이다.
거북선의 진실한 모습
이제 결론을 내려 보자. 이 충무공의 조카 이분공의 저술한 충무공 행장을 보면 " 공(이순신)이 전라좌수사를 지낼 때 장차 왜적이 쳐들어오리라는 것을 알고 큰 전선을 창제했다. 배 위를 판자로 덮고 덮개 위에는 열십자로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창칼을 꽂았다. 뱃머리에는 용머리를 달고 꼬리에는 거북 꼬리를 달았다. 대포 구멍이 앞뒤와 좌우 모두 각각 6개씩 나 있고 큰 탄환을 쏜다. 적을 만나 싸울 때는 거적으로 거북 잔등을 덮어 창칼을 가리고 함대의 선봉이 돼 나아간다. 적군이 배에 오르거나 뛰어내리면 창칼에 찔려 죽게 되고 적선들이 엄습해오면 한꺼번에 포를 쏘아 가는 곳마다 휩쓸지 않는 곳이 없었다.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 거북선으로 공을 세운 것이 많으며 엎드려 있는 거북과 같으므로 이름을 거북선이라 했다. " 라는 설명이 나온다.
이는 우리에게 거북선의 특징을 아주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대로 거북선의 등에는 두꺼운 판자로 덮고 적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송곳을 깔았을 것이다. 또 철갑선이라면 뭣하러 적이 배에 기어 놀라오는 것을 막으려 송곳을 깔겠는가? 그리고 철갑으로 뚜껑을 덮는다면 너무 무거우 기동이 어렵고 윗쪽이 무거운 거북선은 복원력에도 문제가 생겨서 뒤집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여러 정황과 우리 기록을 볼때 거북선은 목조 장갑함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물론 부분 장식 겸, 방탄 성능 강화를 위해 철판 조각을 붙을 것이다. 아마도 좌수영 거북선 그림의 방패판에 그려진 꽃잎 무늬가 바로 이런 철판 장식이지 않을까? 이제는 허영을 벗어 버리고 과학적인 눈으로 우리 옛기록을 분석하자
2.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었다 Vs 아니다 명나라에도 철선이 있었다.
거북선에 대한 논란 중 가장 많은 것이 바로 거북선이 과연 철갑선인지에 대한 의문 일것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여거 기록과 자료를 검토해보며, 조선공학을 참조할때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당연히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는 것은 말이 안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세계 최초의 장갑 군함을 가진 것도 아니다. 이미 명나라에는 몽충이란 전함이 있었다. 물론 몽충은 생소가죽으로 배를 덮어 병사를 보호하고 화살로 무장한 구식 전함이긴 하지만, 어쨌든 적의 궁시로 부터 병사를 보호한 장갑함 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거북선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원시적이긴 했으나 당시 일반적인 군선들이 선현에 방패를 늘어뜨려 적의 궁시를 막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대단한 착상이라 할 수 있다.
고교 교과서에 나오는 명나라 철선
중국의 몽충
명나라의 병학가 모원의(茅元儀)가 쓴 무비지(武備指)에는 고래의 전함 32종이 실려 있는데, 그중 몽충(蒙衝)이라는 군함이 있다. 이 전함은 평전선 위에 상장을 꾸미고 그 위에 생 소가죽을 덮어서 전투원들을 적의 화살과 돌로 부터 보호 할 수 있게 만든 전함이다. 이 배는 전투원들을 적의 공격으로 부터 보호하는 장갑함의 시초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영조때 거북선을 설명 하기를 몽충과도 같은 배라고 한 기록이 있는등 동양권에서는 모든 문물의 기원을 중국으로 부터 찾으려 한 예가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거북선의 세계 최초 철갑선 설도 이에 해당 할 듯 하다. 이미 명나라는 그들의 해군에 철선을 이용하고 있었던 기록이 있다. 명나라는 잘 알다시피 임진왜란 직후 망했기 때문에 그 해군 역시 만약 철선을 사용 했다면 임진란 이전 또는 임진란 정도에는 철선을 사용 했을 수 있다. 우리 고교의 역사 교과서에도 명나라 철선은 그림과 함께 소개 되고 있다. 또 일본측 기록에도 이미 오다노부나가가 철선을 건조 했었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문헌상으로는 거북선이 최초의 철갑선이 될 수 없다.
소프트웨어
어려운 문제에 대했을때 우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 하는 수 가 있다. 거북선의 철갑선 설 역시 그것이 진정한 철갑선이었는지 아닌지는 다른 방식으로 풀 수 도 있다.
요즘 많이 쓰는 개인용 컴퓨터를 보면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이 의외로 간단 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는 보통 누가 가장 먼저 배에 철판을 덮어 장갑선으로 만들 생각을 했는지에 관심을 두고 문헌을 고찰 한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면 중국에 이미 기원전 부터 증기기관 있었다고 해서 증기기관을 중국이 발명 했다고 보지 않는 것이나 또 풀턴을 증기선의 아버지로 보는 것에는 도데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그것을 제대로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 증기선은 풀턴 보다 먼저 사이밍턴이란 사람이 템즈 강에서 짐배를 끄는 실험에 성공 했지만, 그는 그것을 실용화 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증기선의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
거북선의 철갑선 문제에서 우리는 중세에 과연 어느 나라가 배에 철판을 덮었는지 말았는지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해전은 1800년대 아편 전쟁 이전 까지 주로 50미터 이내에서 쇳덩이를 쏘는 포탄으로 근접 사격을 하고 그다음 적함에 뛰어들어 백병전을 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이런 전투는 두께 10Cm 의 철제 장갑함과 폭발형 포탄이 나타나기 시작 하는 1800년대 아편 전재 이후 부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이미 그보다 250년전에 중세기형 장갑함을 만들고 백병전 없는 순수 함포전을 도입 했다. 그것도 우연히 한번 어쩌다 해낸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내내 모든 전투를 그렇게 함포전으로 해치웠다. 또한 이 장갑함이 사용된 임진전쟁은 조그만 국지적 지역 분쟁이 아니고 당시 아시아 선진국 3국이 전면적 투쟁을 한 아시아권의 중세 세계대전 이었다.
거북선의 철갑설은 그 철갑을 실제로 둘렸는가 또는 그럴 기술이 있었는가 하는것 보다는 그 철갑선을 어떻게 활용했는지가 더 중요하다. 저 칠천량의 원균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소프트웨어를 잘못 활용하면 우리는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 이미 400여년전에 보았다.
결국 우리는 소프트웨어가 문제인 것이다
3. 거북선머리에서 대포를 쏘았다 Vs 아니다 유황연기를 토했다
거북선이 최초로 실전에 선 보인 당포해전의 보고서인 "당포파왜병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런데 신이 일찌기 왜적의 난리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특별히 거북선을 만들었사온대,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하고 그 입으로 대포를 쏘며, 등에는 쇠못을 꼿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으나..."
...別制龜船 前設龍頭 放大砲 背植鐵尖 內能...
이것은 임진왜란 당시에 사용된 거북선에 대한 최초의 증언이며, 또한 제작자가 밝히는 거북선의 모양과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충무공이 임금께 직접 보고한 거북선에 대한 최초의 문서 일부 인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거북선에는 용머리를 달고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만들었다 했다. 장계를 더 살펴보면 이 용머리에 설치한 대포로 과연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왜선은 판옥선 만큼 큰것이 9척, 중간배, 작은배가 12척 선창에 대어 있었는데, 그가운데 한 큰배에는 위에 누각이 높이 세워져 있어 높이는 서너 길이나 되고 붉은 비단 휘장을 쳤고, 사면에 황(黃)자 글자를 썼는데, 그안에 왜장이 앞에 붉은 일산(양산)을 세워두고 조금도 겁내지 않고 버티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에 거북선이 먼저 층루선 아래로 충돌해 들어가 용입으로 현자대포로 철환(포탄)을 위로 치쏘며, 또 천자, 지자, 대포로 대장군전을 쏘아 그배를 당파(부수고) 하고 여러 적선들에도 철환과 화살을 퍼부었습니다..."
...故先使龜船 直衝層樓船下 以龍口 仰放玄字鐵丸 又放天地字大將軍箭 撞破基船...
이글을 보면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분명히 선수에 용머리를 설치하고 그 입으로 대포를 쏘았다. 그러데 오늘날의 거북선 복원 모형들은 하나 같이 인도의 춤추는 코브라 처럼 머리를 치켜들고 있어 거기에서 현자포를 쏘기에는 적당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우리가 이충무공전서의 기록을 믿지 않고 엉뚱하게도 용머리는 유황연기를 토하는 좌수영 거북선에 애착을 가지게 만들어 이런 오류가 생긴 것이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알았다면 시정 해야 할것이다. 우리는 충무공 사후 200년뒤의 거북선과 임진란 당시의 거북선을 외형만 적당히 섞어서 국적없는 괴물을 만들고는 그것에 억지로 옛기록을 꾀어 맞추려 하고 있는 것이다. 거북선 연구 초기, 이충무공 전서의 그림 두장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중 유독 한장의 그림에 애착을 주고 말았고 거북선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현대적 잣대를 동원 하여 좀더 멋지게 그려진 좌수영 거북선을 기준으로 삼으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분명히 통제영 거북선이 충무공의 옛 거북선과 비슷하다는 설명이 있슴에도 그것을 무시하면서....
...지금의 통제영 거북선은 충무공의 구제(옛제도)에서 나온 것 이지만 역시 치수의 가감이 없지 않다. 충무공이 이배를 창제한 곳이 실로 전라 좌수영에 있을 적 이었는데, 지금의 좌수영 거북선은 통제영 거북선의 제도와 약간 다르기로 이하에 그 제식을 추가해 둔다....
今 統制營 龜船 蓋出於 忠武 舊制 而亦不無 從而損益者 公之創制船 ... ...
용머리 포대의 변화
임진왜란 당시 분명히 현자 총통을 쏘아 대던 용머리가 어느때인가 유황연기를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만드는 장치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는 해전의 변화를 보여준다. 임진왜란시 장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래 거북선은 돌격선이다. 그것도 보통 돌격이 아닌 왜장의 기함 밑으로 치고 들어가 높은 층루에 앉아 지휘하는 왜장을 저격하기 위한 돌격선으로 사용 되었다는 것을 충무공의 장계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향후 왜군은 조선수군의 실력을 알게 되어 도망가기 바쁘고 우리는 그 도망가는 왜적을 뒤쫓는 방식 으로 해전의 전술이 포격전 위주로 되어 돌격의 필요성이 적어지게 되자 유황 연기를 뿜어 적에게 두려움을 주는 시위 용도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조때 만들어진 거북선에서는 용머리는 저격용 대포가 아닌 시위용의 유황 연기 굴뚝으로 그 기능이 바뀌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충무공 당시의 거북선을 이야기 한다면 거북선의 용머리는 현자대포를 위한 포대라고 해야 옳게 되며, 이렇게 포대로 사용 할 경우 거북선의 머리는 지금의 복원 모형에서의 머리와는 달리 앞으로 길게 뻗어 나온 통제영 거북선 과 같은 모양이며, 그 크기 역시 그림 에서처럼 전폭의 약 1/3정도로 커야 할 것이다.
4. 거북선의 꼬리는 들어 올린 모양이 아니었다.
거북선꼬리의 비밀
거북선을 자세히 보면 배의 외측 현판이 뒤쪽으로 길게 연장 되어 있슴을 볼 수있다. 그런데 바로 이 꼬리가 무었 때문에 그렇게 길게 만들어져 있는지 궁금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꼬리는 순수한 장식용으로 적에게 위용을 보이기 위함 일까? 우리 나라 전함들의 구조를 그린 옛 기록인 각선도본을 보면 유독 거북선과 판옥선만이 이렇게 꼬리가 길게 뒤쪽을 향해 치켜 올려저 있어 아주 위풍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과연 적에게 우리 전함을 크고 높게 보이게 하여 위용을 보임이 목적일까? 또한 현대의 복원 모형에서는 하나 같이 이 거북선의 꼬리를 그져 길게 뒤쪽으로만 내 뻗고 위로 치켜 올리지 않고 있슴은 무슨 이유 일까?
먼저 꼬리의 기능은 단순한 장식 이었을까?
꼬리의 기능, 키판의 보호
거북선을 비롯한 한선의 경우 배의 조타를 맏고 있는 키가 단지 한 지점에 고정되어 파도에 매우 약한 구조 이다. 즉 그림에서 처럼 배의 선미판을 뚤고 수직으로 내려 꽃힌 타축은 파도에 의해 쉽게 부서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옛날 군선의 경우, 이 타축을 보다 튼튼한 재료로 만들기 위해서 산유자 나무와 같은 것을 어렵사리 구해서 사용 했던 기록이 있고, 또 일본을 왕래한 사신선의 경우 파도에 타축이 부러져 고생한 이야기도 등장 한다.
이것은 한선의 구조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북선이나 전함의 경우 이렇게 외판을 연장해서 파도로 부터 키를 보호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 거북선의 꼬리는 단순히 배의 키를 파도로 부터 보호 하기 위해서 어쩔수 없는 조치 였을까?
아니면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또다른 기능이 있는 것일까?
배의 속도 향상?
배가 물속에서 전진 하게 되면 배 주위에 물결이 소용돌이 처럼 배의 현측과 뒤쪽에 일게 되어 저하이 많이 발생하게 된다. 특히 거북선이나 판옥선 처럼 배의 앞머리 부분이 뾰족하지 못하여 사각 단면을 가지게 되면 그 조파 저항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이치 이다. 그런데 거북선 처럼 꼬리를 현측 외판을 뒤쪽으로 길게 늘어 뜨리게 되면 소용돌이가 배의 현측을 따라 부드럽게 유선형으로 흐르게 도와 주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배 주위의 물결이 유선형으로 부드럽게 흐르게 되면 배가 부드럽게 전진 할 수 있게 된다.
즉 거북선의 꼬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단순한 키를 보호하기 위해서 취해진 어쩔 수 없는 조치 일 뿐만 아니라 이것을 슬기롭게 발전 시켜 우리 전함의 가장 큰 단점인 조파저항을 줄일 수 있도록 한 훌륭한 발명이 된 것이다.
왼쪽의 그림에서 처럼 네모난 물체가 유체 속에서 움직이게 되면 그 주위에 소용돌이 모양의 저항이 발생한다. 거북선의 꼬리는 이것을 부드럽게 연장해서 저항을 줄여 유선형 선체를 만든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게 되는 것이다. 요즘 대형 화물트럭의 운전석 위쪽에 한장의 비스듬한 철판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이 철판이 바로 유체 역학적인 조치를 통해서 공기의 흐름을 부드럽게 유선형으로 만들어 자동차의 공기 저항을 줄이는 장치들 이다.
배의 위용 증대
거북선의 경우 그 본판의 길이가 68척이었다. 그런데 현측 외판 제일 윗쪽 7번째 판자의 길이는 113자 이다. 이것은 배 밑 바닥 전체 길이의 거의 두배가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확대된 배의꼬리는 옆에서 보면 엄청나게 큰 전함으로 보이게 만든다. 물론 당시 우리 전함들이 일본의 전함에 비해 일반적을 ㅗ훨씬 크고 화력도 엄청나게 강했기 때문에 적에게 주는 두려움은 더욱 큰 것이 된다.
거북선이나 판옥선의 힘차게 한껏 뻗은 꼬리는 적에게 위압감을 주고 전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심리적인 위압감을 주게 되었을 것이다.
5. 거북선등은 뚤려 있어 돛대를 눕힐 수 있었다?
거북선에 돛이 있었나?
지금 전해지는 가장 권위 있는 기록인 이충무공 행장에는 두가지 종류의 거북선이 등장 한다.
즉 통제영 거북선과 좌수영 거북선이 그것인데, 두 배는 이름과 함형에서 같은 배라고 하지만, 실제 그 그림만을 본다면 두배는 버젼의 차이라도 있는듯 하다. 즉 한쪽이 쿠페형이라면 한쪽은 세단형이라고 할 수 있는... 국내의 유명 자동차 회사 H나 K, D사 모두 같은 이름의 동급 승용차이면서 하나는 쿠페, 하나는 세단을 만드러 두가지 버전을 만들어 파는 것처럼 거북선도 좌수영형, 통제영형 이렇게 두가지 버전이 있었던 것 같다.
좌수영 형
우선 좌수영 형을 보면 우리가 자주 보아오던 거북선 모델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이 배는 우선 돛대가 없다. 그리고 등쪽은 완전히 둥그렇게 덮여 있고, 여기에 거북 등딱지 무늬를 그리고 칼 송곳을 꽂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특징은 뱃머리부분의 용머리가 똑바로 서 있다는 점이다. 이런 구조라면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 처럼 그 입으로 현자 대포를 쏘기에는 여러 모로 불편 하다. 요즘 처럼 자동 발사 장치가 있다면 모를까?
그 좁은 목에 병사가 들어가서 현자대포를 쏘려면 그 사람은 어린 아이 처럼 몸집이 작은 병사라 해도 전투 도중 내내 그 좁은 통속에서 꼼짝 못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런 용머리는 해군 관함식이라 할 삼도 수군 조련 전진도에서 처럼 유황연기를 뿜어 적을 혼미케 하는 것이 주목적으로 만들어진 거북선 일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의 출처인 층무공 전서에는 이배는 이순신 장군 당시에 쓰여진 거북선과는 차이가 있다고 했으며 오히려 통제영 거북선이 옛 제도와 비슷한 것이라 했다.
통제영 형
통제영 거북선의 특징은 우선 거북선의 등쪽이 길게 터져 있다는 점일 것이다. 좌수영 거북선에는 등쪽에 작은 창문이 두개 뚤려 있는데, 이것이 거북선 등에 돛대를 세우기 위해 병사가 드나드는 창문으로 쓰이면서 동시에 포격시 발생하는 포연을 밖으로 배출하는 구조 였다면 이는 매우 효율이 떨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충무공의 난중일기와 장계에 의하면 임진란 당시에 거북선의 등은 완전히 막혀 있었고 따라서 이렇게 등쪽에 긴 틈새를 만들어 낸것은 어쩌면 임진왜란 이후 거북선에 대해 이루어진 개량일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등쪽에 길게 트임이 있게 된다면 우선 배의 채광이 좋아지고, 공기의 유통이 좋아져서 포격후, 포연이 쉽게 빠져 나갈수 있다. 따라서 이렇게 하면 포를 쏠때 훨씬 더 정확히 조준 할 수 있고 더 많은 포를 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적이 이 터진 틈으로 공격해 들어 올 수 도 있으나 이쪽의 화력이 충분하고, 또 임진 왜란에서 처럼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돌격전을 감행해야 할 필요성도 줄어들고 또 해전의 방식도 이제는 적군도 접전 보다는 포격에 의지하게 된 때문이 아닐까 한다.
접전의 중요성이 줄어 들었다는 또다른 간접 증거는 통제영 거북선의 뱃머리 아래쪽에 귀신 머리가 없어진 점이다. 좌수영 거북선에 보이는 귀신 머리는 서양의 고대 그리스 갤리선이나 로마 군선 등에서 볼 수 잇는 램과 같이 일종의 충파 장치로 적함에 부딫혀 적함을 깨트리는 충파 장치였으리라 생가되는데 화포의 발달로 이제는 더이상 적함에 대한 충파 공격은 무의미 해졌다는 간접 증거 일것이다.
거북선의 추진
범노선
좌수영 거북선 도에는 돛대가 없으나, 임진왜란때의 거북선이나 통제영 거북선에는 모두 두개의 돛대가 있었다. 특히 거북선을 만드는데 사용된 기본 선체인 판옥전선의 경우 두개의 돛대가 있었던 점을 미루어 볼때, 좌수영 거북선 역시 두개의 돛대가 있을 것으로 생각 된다.
일본 배가 평범한 사각돛 하나를 장비한데 비해, 판옥선을 비롯한 우리나라 군함들의 경우 모두 두개의 돛대에 중국의 정크와 비슷한 부둥변 사각돛을 사용 했다. 부등변 사각형 돛은 순풍에서 뿐만 아니라 역풍에서 바람을 맞으면서 항해하는 성능이 뛰어난 장점이 있는데, 중국의 옛 기록을 보면 우리 전함들은 모두 역풍에서 성능이 뛰어나다는 기록이 읶다.
거북선의 노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옛 전함등은 기동력을 위해 수많은 노를 장치 하고 있었다. 보통 일반 배들은 두개 이상의 돛대에 여러장의 돛을 사용하는 다장범선으로 바람의 힘을 이용하여 배를 운용 했지만 군함의 경우에는 바람의 힘 만으로는 기동력을 발휘 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노를 함께 장비 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런 노는 돛의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고대 서양의 갤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데, 서양의 갤리가 노역을 위주하고 사각돛 하나로 순풍때에만 바람을 이용하는 것인데 비해나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부등변 사각돛은 마치 현대의 요트 처럼 역풍에서도 충분히 기능을 하는 번주 위주의 범노선 이라 할 수 있다.
6. 거북선의 등에도 판옥선 처럼 장루가 세워 졌는가?
거북선 등에도 판옥선처럼 장대가 있었다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여러 고문서나 그림들 중에서 지금 가장 권위있게 받아 들여지고 있는 것은 사실 충무공 사후 200여년이 지난 정조 대왕 시절에 왕명에 의해 만들어진 이 충무공전서에 나오는 기록일 것이다.
그것이 하도 권위 있게 우리에게 제시되다 보니 모든 거북선 관련 자료의 진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고 요즘에 와서는 이충무공 전서와 같거나 비슷하지 않는 자료들은 무조건 모두 잘못된 자료로 생각하는 경향 마저 생기게 된 듯하다.
따라서 우리가 알기에 거북선에는 장루가 없다. 그래서 적에게 우리 대장의 위치를 들키지 않고 마음껏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는 가정 까지 한다.
실제로 충무공전서에는 적은 안을 볼 수 없으나, 거북선에서는 쉽게 밖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적이 공격 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바로 함교(장루)가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왼쪽에 제시된 바와 같이 충무공 종가에 소장된 거북선 그림은 놀랍게도 우리가 상상하던 거북선과는 전혀 다른 거북선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림에서 보듯이 충무공 종가에 소장된 그림에는 거북선 등에 장루가 있다. 그리고 두개의 돛을 펴고 전진 하고 있는 그림은 우리가 그동안 보아오던 거북선과는 아주 다른 모양이다.
우선 이 그림속의 거북선에는 등에 판옥전선에 있는 것과 똑같은 장루가 있다. 따라서 이 거북선은 충무공 당대에 충무공의 설명과는 상치되는 점이 많다. 그럼 이 거북선 그림은 후대에 잘목 그린 것이었을까? 그런데 또한가지 이상 한 것은 이렇게 거북선 등위에 장루가 세워진 거북선 그림이 이 그림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해군 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삼도수군 조련전진도 병풍그림의 거북선 역시 등위에 이렇게 장루가 세워져 있고 지휘관이 탑승 하고 있는 것이다.
또다른 장루의 흔적
해사 박물관 소장 삼도 수군 조련 전진도에 나오는 거북선은 그림이 그려진 때가 대략 1741~1800년경에 해당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그림에 참여한 거북선은 총 40척인데 이는 정조때에 해당 하는 거북선 척수 이다. 배의 구조나 장식을 매우 자세히 그렸기 때문에 여러 조선시대 전함에 관한 문헌에 자주 인요되는 그림이다. 그런데 그림에서 유독 거북선만은 우리가 아는 거북선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금 더 뚱뚱하게(?) 보이긴 하지만 판옥전선은 우리가 많이 보아 오던 그런 모양새이지만 거북선은 그렇지가 않다.
이 그림에 나오는 거북선은 우선 등위에 장루가 있어 지휘관이 탑승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장루는 원래는 거북등 속에 있어서 밖에선 보이지 않지만 지휘관의 탑승을 알리기 위해 그린 것 같지는 않고 실제로 거북등 위에서 지휘관이 전황을 살피고 다른 전함들과 호응하여 연합 작전을 하려고 만들어진 원래 목적의 장루로 보인다. 그럼 우리가 알고 있었던 거북선은 잘못된 모양일까?
이 그림은 요즘식으로 말하면 해군 기록관이 그린 것으로 그림의 권위로 보면 우리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충무공 전서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면 도데체 이 그림은 무엇일까? 우리가 아는 거북선 말고 또다른 거북선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임진왜란 이후의 개조의 흔적?
임진왜란에도 참전했고, 충무공과 함께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나대용 장군은 훗날 신형 군선을 제작하게 되는데 이때 새로운 군선의 제작의도를 이렇게 증언 하였다
"거북선은 전쟁에 사용하기에 좋은 점도 있지만 활 쏘기가 불편하고 격군(전함의 노젓는 병사)이 많이 소용돼 판옥선과 거북선의 중간 형태의 신형군선인 창선을 만들게 되었다"
이미 임진왜란 당시에도 거북선은 전투원을 보호 하기 위하여 판옥선 위에 뚜껑을 씌운 형태가 되어 우리의 장기인 활을 쏘기가 불편한 치면적 단점이있었고, 갑판 전체가 개판 이라 불리우는 일종의 뚜껑이 덮혀 있기 때문에 요즘과 같은 레이더나 감시 카메라가 없는 상황에서는 전투의 상황이나 명령 전달등에 여러 가지 애로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직후 부터 이 거북선에 대한 개조 노력은 끊이지 않게 된 것이라 보여 진다. 따라서 그런 개조 노력의 흔적 중 하나가 바로 거북선의 등 딱지 위에 장루를 세워서 장교가 직접 전투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만들고 지휘부의 명령전달등을 용이 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런 장루가 달린 거북선이 아닐까?
이미 임진왜란을 통해서 그 위력이 실증된 거북선을 몇몇 불편 한점만으로 퇴역 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실전을 통해서 얻어진 문제점을 개량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했을 것이라는 전제아래 이런 장루가 달린 거북선은 임진 왜란 이후 지휘관의 전투 상황 파악을 위해서, 또는 함대 지휘부와의 보다 긴밀한 협조 체제 구축, 명령전달등을 위한 거북선 지휘부의 개방형 개량이라고 생각한다.
7. 거북선의 내부는 2충으로 되어 있다 Vs 아니다 부분 3층이다.
거북선 내부는 2층?
거북선의 내부를 알아 보기 위해서 먼저 이충무공 전서의 기록을 살펴 보자.
이충무공 전서의 내용을 살펴 보면 거북선의 현판 최고 높이는 7척 5촌이며, 그위에 방패판의 높이는 4척 3촌이다. 그런데 방패판은 신방위에 기둥을 세우고 세웠으며, 방패판의 위에도 역시 언방을 걸었는데, 신방으로 부터 언방까지의 높이가 방패판의 높이인 4척 3촌이다.
그리고 그 위에 거북선의 등에 해당 하는 개판은 통제영 거북선의 경우 모두 11쪽을 이어 붙어 좌우로 덮고, 그 가운데 1척 5촌의 틈을 내어 돛대를 세웠다 눕혔다 하기 쉽게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거북선의 선체 전체 높이는 기록에는 나오지 않고 다만 다른 것을 참조 할 수 있을 뿐이다. 위의 그림은 이원식씨의 한국의 배에 나오는 그림과 설명을 참조하여 재구성 한 것인데, 이원식씨의 경우 이 충무공전서의 거북선의 설명애서 그 치수를 그대로 인용 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이충무공 전서의 사료를 믿는다고 할때 이것이 우리가 믿을 만한 칫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칫수대로 할때 과연 거북선 내에서 노를 젖고, 포를 쏠 수 있는지가 의심 스럽다.
이충무공 전서에 의하면 거북선은 좌우 포판아래 방이 각각12칸(모두 24칸) 있는데, 이중 2칸에는 철물을 보관하고, 3칸은 무기고로 사용하고, 나머지 19칸은 병사들의 휴게실로 사용 한다고 하였다. 위의 그림으로 본다면 높이 7척 5촌 되는 부분이 바로 포판 아래 방에 해당 한다.
대략 2.25M에 해당 하므로 물건을 넣어두고, 병사들이 충분히 쉴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생긴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위에 있는 방패판의 높이가 문제가 된다. 방패판의 높이는 겨우 4자 3촌, 약 129센치미터 밖에 안된다. 이런 높이라면 보통 성인은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다. 그런비좁은 데서 어떻게 노를 젖고 전투를 한단 말인가? 게다가 거북선 복원 모형에 적용된 노는 서양식의 노(oar)가 아닌 한노 로 이것은 서서 저을 수 밖에 없는 노이다.
그런데 거북선 치수에서 빠진 언방과 신방은 그 높이가 얼마가 될까? 거북선은 현판을 세우고 그 위에 신방을 놓고서 여기에 발패판을 세운 구조이다. 따라서 2층 부분의 높이는 방패판 높이 + 신방 높이 + 언방 높이가 된다. 이렇게 계산 하면 언방과 신방이 모두 각각 30 센티미터 이상이 되므로 2층의 높이는 대략 189 센티미터 이상으로 추산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키가 좀 큰 병사라면 조금 불편 하겠지만 그럭 저럭 전투에 임할 수는 있을 만한 높이는 될 것으로 보인다.
복원도에서 또다른 의문은 그럼 과연 3층은 무었을 했을까? 하는 것이다. 1층은 창고와 휴게실로 사용 했고, 2층에서는 전투와 노를 젖는 일을 한 것으로 복원 되었는데, 3층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물론 그림의 3층은 그 높이가 너무 낮아 어떤 일을 하기에는 부족한 모양이다. 아마 복원자 역시 그렇게 생각 해서 아무런 설명없이 빈 공간으로 둔 것인듯 하다.
거북선은 3층 구조!
그런데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에서 저자 정광수씨는 거북선은 3층 구조 였다고 주장 하고 있다. 조금은 생소한 구조를 제시한 정광수씨의 모델은 오른쪽 그림처럼 거북선은 부분 3층 구조로 되어 있었다
우선 1층과 3층은 배의 중앙 부분에 발판과 같이 설치 되어 있으며, 배의 외판에 연결 되지 않는다. 특히 1층의 경우 2층의 가운데 파여진 부분으로 노젖는 병사들이 상체를 내밀수 있게 되어 있으며, 또 3층의 경우 2층 천정 부분이 끝에서 약간 틈새가 있어서 여기로 대포를 세우게 되면 포탄을 장전 한다는 아이디어 이다. 매우 효율적으로 보이지만...과연 당시에 산업공학적 고찰을 했는지는 의심이 간다.
이 모델은 언더우드씨의 모델과 같은 서양식 노를 사용하는 특징이 있다. 정광수씨의 주장으로는 서양식 노 라야만 접전에서 적함을 밀쳐낼 수 있기 때문에 아마 서양식 노 를 썼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모델에서 문제점은 이충무공 전서의 기록 내용을 무시하는데 있다. 정광수씨는 현대적 기준으로 거북선은 최강 전함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거북선 복원을 시도 하였고 따라서 거북선이 최강이 되기 위해서 포탄을 빠르게 장전 하고, 또 노를 젖는격군과 전투원 들이 서로 자기 부서에서 서로에게 방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 했다. 따라서 2층 포판의 가운데를 뚤고 그 아래 1층 공간에 발판을 만들어 노꾼을 배치 했다.
이렇게 되면 거북선의 뚜껑을 벗겨내고 위에서 보면 오른쪽 그림과 같이 된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배의 갑판을 가운데만 뚤어 1층에 노꾼들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을 만들고 거기에 노꾼을 배치 해도 별 문제가 없겠으나 한선의 구조상 이것은 불가능 하다.
왜냐 하면 한선은 늑골이 없고 배의 외측 현판을 가룡(장쇠)이라고 불리우는 부재가 양쪽을 완전히 꿰뚤고 배를 고정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룡을 잘라내는 것은 배를 지탱하는 늑골을 잘라내는 것과 같다.
이 가룡과 똑같은 위치의 맨 위에 장치된 것이 멍애이고 멍애 위에 신방을 올린 것이기 때문에 배의 강도를 유지하는 가룡을 잘라낸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문제가 된다.
언더우드의 거북선 내부
따라서 거북선 내부가 부분 3층이라는 정광수씨 생각을 받아 들이기는 어렵다.
거북선 내부 구조에 대한 또다른 연구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최초의 과학적 연구라고 할 만한 것이 언더우드씨의 복원 이다.
1933년 Korean Bots and Ships라는 저술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을 복원했는데, 언더우드씨에 의하면 거북선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노를 젖는 격군은 포판 아래 1층에서 서양식dml 노(oar) 를 젖도록 하고있다.
특이한 것은 언더우드씨의 모델은 요즘 현대 우리나라의 복원 모델 보다는 오히려 삼도 수군 조련전진도등의 그림에 나오는 거북선과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 거북선 중앙의 돛대를 세우는 홈이 그것이며, 또 거북선의 잔등이 배의 현판과 같은 너비로 되어 있다. 현대 우리나라에서의 연구가 거북선은 판옥선에서 나온 것이므로 배의 몸체보다 포판 위의 상장이 더큰 것에 비하면 매우 특이한 모델 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외형적인 유사점 이외에는 그 구조적인문제에 있어서 언더우드씨의 모델 역시 정광수씨 모델과 같이 우리나라 전통 선박의 구조에 부합 되지 않는 점이 있다. 그러나 외국인으로 또한 국내 최초로 거북선에 대한 과학적 복원 시도는 매우 훌륭 하다고 생각 한다. 또 어쩌면 이떄는 아주 늙은 병사라면 혹시 거북선을 실제로 본사람이 있을 지도 모를 일이 이고 보면 이모델은 어쩌면 실제 거북선을 탑승했던 병사나 조선공의 증언을 듣고 복원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도 있다.
한강 거북선의 내부
왼쪽 그림과 같은 거북선은 요즘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는 복원 모델로 한강이나, 독립기념관드에 복원 전시 되는 모델로, 서울의 한강 거북선 나루에 있는 거북선은 2층 구조로 내부가 상당히 덟다는 느낌이 들고 시원 하였다. 또 직접 타보니 그 내부가 그렇게 어둡거나 복잡 하지 않았고 노를 저으며 충분히 전투 행위를 할 만해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충무공 전서의 거북선 내부 설명을 충실히 재현 하려다 보니 포판 아래 선체를 가운데 복도를 두고 양쪽으로 나눠 방 24개를 배치 한 점이다. 거북선의 구조 페이지에서 보았듯이 우리 전통 조선 기법으로는 배를 가로지르는 가룡을 잘라내고 복도를 설치할 수 없고 그런식의 방 배치는 배의 강도를 약하게 만들기 때문에 적함을 충파 공격하는 전함에서는 금물이기 때문이다. 또 포판 위에 방 2개를 좌우에 만들어 1개는 선장실로 또 하나는 사관실로 사용 하고 있는데 그 위치가 배의 맨 뒤에 있어 지휘관이 지휘 하기에는 불편 한 점이 있어 보였다.
8. 거북선은 한노를 사용한다?
거북선의 노는 한노?
거북선에는 돛이 있어 범선 이긴 하지만, 전통적으로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 일본등 아시아의 군함에는 반드시 노를 보조적으로 가지고 접전시 기동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과연 거북선에는 어떤 방식의 노를 사용 했을까? 아쉽게도 정확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우리는 거북선의 노역을 다른 것에 비교하여 추론 할 수 밖에 없는 아쉬움이 있다. 보통 거북선의 노에 대한 주장들은 크게 두가지 방식으로 나눠 지는데, 거북선에는 한국식 노를 사용 했다
거북선의 노는 서양식 오르(oar)와 같은 노였다
이 두가지 주장은 요즘 현대의 복원 모형들에도 그대로 나타나 아산 현충사의 복원 모형은 이런 서양식 노를 장착 하고 있다.
여기에 반해서 거북선 한국식 노 주장은 근래 들어 제기된 것이지만 요즘은 이 방식이 정설로 굳어 지고 있다. 독립기념관이나 전쟁 기념관의 거북선은 바로 한국식 노를 사용 한다.
위의 두가지 주장들은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 하고 있어 더욱 혼란을 가져 오고 있다. 과연 거북선에는 어떤 노를 장착 하고 있을까? 거북선의 노는 서양식 인지 순 한국식인지와 함께 노를 젖는 장소 문제 역시 논란이 되고 있었다. 요즘에는거의 노를 젖는 장소가 포판의 위, 즉 2층에서 노를 젖는 구조라는 것으로 굳어지고 있으나 예전에는 1층에서 젖는 방식을 고려하고있었다.
그럼 먼저 한국식 노를 사용 하는 것에 대해 살펴 보자.
노의 종류
보통 우리가 노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우리는 이들을 구별 하지 않고 모두 노 라고 부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사물에 대한 용어를 정확히 하지 않는 버릇이 있는데, 그 기능에 따라 도(刀)와 검(劍)을 확연히 구별하는 중국에 비해 우리는 그냥 모든 종류의 칼을 그냥 뭉뚱그려서 칼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예 중 하나이다. 영어에서도 knife(刀)와 sword(劍)을 구분 한다.
배를 젓는 노도 마찬가지 여서 우리가 사람의 힘으로 배를 젓는 모든 것을 노라고 하지만 이 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드러나 한자에는 노를 뜻하는 글자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 우리가 보통 서양식 노라고 하는 요(橈)와 동양식 노라고 하는 로로(櫓)를 비롯하여 장(漿:상앗대,짧은 노), 도(棹:삿대) 등 여러 가지가 있었슴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요즘 유원지에서 타볼 수있는 보우트에 달려 있는 노는 오어(Oar)또는 한자로 요(橈:노요)라는 것으로 이것은 보통 배의 진행방향과 반대로 앉아서 당기는 형식으로 배의 옆에 달려 있게 된다. 이것은 요즘 조정 경기를 생각하면 아주 쉽다. 조정은 배의 진행방향과 반대로 앉아서 배의 좌우에 설치된 노를 자기 앞으로 당겨 나아가는 것으로 노의 움직이는 방향과 배의 추진 방향이 같은데, 바로 이것이 서양식 노의 대표격인 요 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배의 뒷쪽에서 옆으로 밀고 당기는 형식의 노가 있다. 한자로는 로(櫓:노로)라고 쓰는데 재래식 거룻배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큰 배에는 단순히 뒷쪽에 한두개의 로를 설치 할 경우 배를 추진 하기에 역부족인 면이 있어서 큰 배의 경우에는 이 로를 배의 좌우 양쪽 현에 여러개를 달아서 사용 하게 되었다.
옛 중국의 전함 그림에 이런 노의 사용을 아주 잘 나타 내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3명의 병사가 배의 현측에 서서 동양식 노, 즉 로를 젖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로는 우리 거룻배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로를 젖는 방식을 아주 잘 보여 준다.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로를 배의 현측에 설치 하여 젓는 것을 보여 주는 그림이 있는데, 해군 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 중인 삼도 수군 조련 전진도라는 그림에서 정자 각선의 노젓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림에는 여러척의 전함을 보여주고 있으나 모두 상장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고 오직 정자각선에서만 두개의 큰 동양식(한국식) 로를 설치 하고 노를 젖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이를 통해 우리 전함의 노젖는 모습을 유추 할 수 있다. 현재 우리 옛 기록 그림 중에 노를 젓는 모습이 담겨 있는 것은 이것 하나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거북선이나 다른 전함에도 일반적인 로를 사용 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하게 요는 서양에서, 로는 동양에서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전함의 노를 동양식의 로라고 단정 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왜냐하면 일찍부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도 이른바 서양식 '요'가 있었다는 점을 상기 한다면 왜 전함에는 동양식 노만을 사용했는가 라는 의문이 생길 수 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옛 전함들은 어떤 방식의 노를 사용 했을까?
특히 거북선에 있어서 노의 종류는 단순한 노의 종류 뿐만 아니라 그 노역의 위치에 대한 논란 까지 함께 제기되고 있는 중요한 문제중 하나 이다.
먼저 한국식노 또는 동양식 노를 사용하는 문제를 살펴보자
동양식을 사용 했을 것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위에 예를 든 정자각선 그림에서 동양식 노를 사용한점을 들 수 있다. 이 그림은 당시 해군의 기록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 권위가 인정된다 하겠으며, 김재근 선생님이나 이원식씨가 다같이 한국식 로를 사용 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계신다. 한국식 '로'를 사용한 증거를 요약 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및 우리나라의 전함들은 전통적으로 동양식 '로'를 사용 했다.
옛기록에 의하면 한자루의 노를 여럿이 마주 서서 젓는다는 기록이 동양식을 뜻한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의 삼도수군조련전진도속의 정자각선에 노젓는 모습이 동양식이다.
임진왜란 이후 철저하게 한국의 수군을 모방한 일본 전함들이 예전의 한사람이 젓는 서양식 '요'를 버리고 동양식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조선 수군을 모방한 것이다
판옥선과 거북선의 경우 상장이 하체보다 큰 것은 로를 내밀 수 있는 공간이다.
전통 한선에서 하체에 노역을 할 장소를 마련 할 수 없다.
그런데 거북선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연구라고 할 수 있는 언더우드(UbderWood)씨는 거북선의 노가 성야식 '요'라고 주장 한다. 이미 1930년에 유명한 Korean Boats and Ship에서 그런 형태의 복원을 시도 하여 초기 연구들은 대개 언더우드씨의 주장에 따라 거북선의 노가 서양식 이었던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 아마츄어 학도라 할 수 있는 정광수씨가 역시 거북선에는 '요'가 사용 되었을 것이란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정광수씨의 경우, 거북선을 무적 전함으로 만들기 위하여 억지로 맞춘듯한 느낌이 든다. 즉 거북선이 적함대로 돌진할때 적이 충돌을 해올경우 노를 들어 막아야 하체가 보호 된다는 식의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온힘을 다해 충돌해 들어오는 적함을 과연 몇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잇느냐 하는 문제도 있다고 생각한다. 즉 100톤은 됨직한 배가 가만히 서 있는것도 아닌데 그걸 노를 막는다는 것은 간단한 물리학 법칙조차 무시한 책상에서의 상상일 뿐이다.
그런데 서양식 '요'에 반론 역시 같은 이유로 거북선의 노는 동양식 '로'였다고 주장 한다. 즉 동양식 '로' 라야만 적함대속에서 종횡무진 움직일때 노를 부러뜨리지 않을 수 있기 떄문에 동양식 노를 사용 했을 것이란 설이다.
영화 '벤허'를 보면 로마의 갤리들이 해전 하는 장면이 잠깐 나오는데, 이때 적함에게 똑바로 밀고들어가면서 이쪽 노를 모두 들어 올리면 적의 노들이 이쪽 배의 몸체에 부딫혀 모조리 부러저 항해 불능 상태가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걸 방지 하려면 애초에 본체라 할 상장 아래에 노를 감춰 두면 된다는 뜻이다.
즉 우리 전함을 보면 하체의 넓이는 24~26척인데 비해 상장의 넓이는 30~32척쯤 된다. 따라서 상체라 할 수 있는 상장 부분이 6척이 더 넓게 된다. 바로 이 6척 공간 부분에 노를 수직으로 내려 노역을 하게 된다면, 위에서 보면 노는 보이지 않게 되고 결국 스쳐 지나가는 적함으로는 우리 전함의 노를 부러뜨릴 수 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노가 걸리적 거리지 않으므로 밀집해 있는 적함대 속에서도 그 활동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거북선은 노를 어디에서 젓는가?
1층에서 노를 젓는다
거북선의 노 종류와 관계한 또다른 의문은 "과연 거북선은 노를 어디에서 저었을까?"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거북선 모형을 보고 있노라면 배는 크게 3층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일 아래층에서 노를 젖고 그 위층에서는 전투를 하는 것이 아주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정광수씨의 경우, 부분 3층설을 주장 하게 되었다.
만약 거북선에 서양의 바이킹선에 쓰인 것과 같은 '요'를 설치 했다면, 그 노역 장소도 제일 아래층이 최적의 장소일지 모른다. 게다가 거북선은 당대 최고의 전함인데 어떻게 비좁은 2층에 노를 젓는 격군과 전추원이 한데 엉켜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거북선 1층 노역설의 주된 주장이다. 즉 노를 젓는 격군의 몸이 움직이게 되고 노자루가 움직이면 전투중에 아군의 노에 맞지 않으려고 포수들이 피신해 있어야 하고 이렇게 되면 전투 효율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충무공 전서에 의하면 제일 아래층은 창고와 휴게실로 사용 되었지 노역의 장소로 사용 했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가가장 믿을 만한 자료에서 거북선 노역은 층이 아니라고 하는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는 것이다.
2층에서 노를 젓는다
이것은 요즘 이충무공 전서라든가 충무공 행장등 우리 옛기록에 대한 신뢰가 생긴 이후 나타난 설이라고 볼 수 있다. 거북선은 일단 판옥선 처럼 상장내에 즉 포판에서 노를 젓고 그 사이 사이에 포를 배치 했다는 것이다. 요즘 생각에서는 그래서는 배가 전진 하면서 포를 쏘기에 매우 불편해 보일 것 같으나 실제로는 꼭 그렇지는 않다. 우선 거북선 내부가 우리가 머리속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넓고, 또 당시에는 그런 식으로 전툴르 하지 않았다. 일단 전진해서 진용을 갖추고 일제 삭겨을 하는 식 이었다. 오히려 조준장치가 빈약한 당시에 기동중에 원거리 포격을 한다는 것은 거의 맞지도 않기 때문에 귀한 화약만 낭비하는 꼴이 된다.
게다가 이충무공 전서에 의하면 거북선은 포판 아래 1층에 모두 24개의 방이 있는데, 이중 19칸을 병사 휴식용으로 사용 하고 3개는 창고로 쓴다고 했다. 이것은 가장 확실한 증거로 거북선도 다른 동양권의 전함과 마찬가지로 동양식 노를 달고 2층 포판 위에서 저었다는 뜻이 된다.
이때문에 요즘 나오는 복원 모형들은 모두 동양식의 '로'를 사용 하게 되었다.
9. 현충사 복원거북선은 잘못 만들었다 : 복원모형 유감
거북선 복원 모형 유감
왼쪽의 그림을 한번 보자. 아마 우리에게 낯익게 전해지고 있던 거북선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지금 까지 전해지고 있는 여러 고문서나 그림들 중에서 가장 권위있게 받아 들여지고 있는 이충무공 전서에 나오는 거북선 그림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충무공 전서의 문자 설명 부분중 유독 다음 부분만이 무시되는 것이다,
지금의 통제영 거북선은 충무공의 옛 방식에 의한 것인데, 실제로 공께서 거북선을 만든 곳이었던 좌수영의 거북선은 이와는 조금 다르기에 이곳에 그 규격을 밝힌다.
위에 인용한 것을 보면 거북선은 통제영의 거북선이 충무공이 만든 규격에 비슷하게 만들었으나 참고 삼아 충무공 근무지의 거북선에 대한 규격도 함께 부기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것을 무시 할까?
우리는 유독 좌수영 거북선 그림을 좋아 한다. 왜 그럴까?
나는 개인적으로 정광수씨의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라는 책을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
이글을 쓰기 위해 다시 한번 읽을때에도 역시 내눈엔 눈물이 그득 하였다. 아마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나와 같은 생각과 느낌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스스로 약소 민족이 되어 오는데 익숙해 있었다.
그런 서러움과 울분을 풀어준 것이 바로 거북선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 거북선이 제대로 대접받고 있는가? 우리와 아무런 공감대가 없는 세계인들도 과연 거북선을 그런 애정 어린 시각으로 봐줄까?
결코 아닐 것이다. 그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거북선은 그야 말로 황당 무개한 이야기 일뿐일 것이다. 단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무적 전함이기 위해서 우리는 거북선을 알게 모르게 각색해 왔다. 그리고 그렇게 각색해 온것에 스스로 속아 엉뚱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맹백한 기록을 제처두고 거북선 철갑설을 주장 하면서 오히려 철갑선이라야 적을 총탄을 막을 수 있으니, 당연히 철갑선이라는 둥, 일본의 황당한 문서를 가져다가 봐라 거북선이 철갑선 이라고 하잖는가? 하고 말한다면 결코 세계인을 감동 시키지 못한다. 그렇게 강력하고 불침 전함을 가지고 왜 칠천량에선 깡그리 수장 되었단 말인가?
현대의 거북선 모형들
거북선 복원 모형을 만드는데 참여하신 분들의 말씀에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거북선을 복원 하는데 이충무공 전서의 설명 부분중 특히 머리 부분이 수수께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충무공 전서에는 거북선 뱃머리에 용머리를 달았는데, 길이가 4척 3촌(약 1m 28Cm)이고 넓이는 3척(약 90Cm)인데, 그 속에서 유황과 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연기를 안개 같이 토하여 적을 혼미케 한다라는 내용이 바로 수수께끼의 진원 이다.
그런데 충무공의 전투 보고서인 장계에는 거북선 머리에서 현자총통을 발사하여 적장을 저격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렇게 되려면 거북선의 용머리는 대포를 쏘는 포좌의 역할을 해야 한다. 현자포를 쏘려면 화약을 재고, 격목이라는 것으로 막고, 탄환이나 화살탄을 넣은뒤 발사해야 한다. 따라서 전문적으로 화약과 탄환을 장전하는 화포장과 포를 발사하는 포수가 함께 한 조로 활동 한다. 따라서 용머리에는 적어도 두사람이 쪼그려 앉기라도 할 공간이 마련 되어야 한다. 그런데 길이 1.2미터에 폭 90센티미터의 작은 통안에 어떻게 두사람의 병사와 포를 장치할 것인가가 수수께끼의 첫번째 문제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하나의 수수께끼는 좌수영 그림처럼 멋진 그림을 표준 모델로 하자니, 그나마 용머리를 치켜들고 섰다. 그렇게 되면 이젠 도저히 사람이 들어가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복원에 참여한 많은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회의를 했고 그 결과 거북선의 용머리의 용도는 수수께끼 이므로 일단 접어두고 그 겉 모양을 좌수영 귀선의 그림처럼 용머리를 치켜 올리고 그 칫수는 통제영의 것을 따라 폭 90 센티미터로 하기로 하고 일단락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일단 뒤로 미룬 내용은 일반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마치 그것이 정확한 모델인야 발표를 하고 나중에 각자의 저작물에 "그때 본인은 ...이렇게 생각 했으나 시간의 촉박함때문에..."라는 식으로 조그마하게 발표를 하고 있으니 그걸 알아차리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이런 일들이 거북선에 대한 하나의 신화를 만들게 된다. 그래서 일반인 들은 그저 거북선은 불패 전함이고 멋진 전설만 만들어 내게 된다.
지금이라고 우리는 거북선의 과학적 복원을 시도해 보아야 한다. 어떤 선입관이나 바램을 갖지 않고 실제 그대로의 모습을...
여러가지 거북선 그림들
거북선 그림이 전해지고 있는 것은 일단 두가지 그림이 이충무공 전서에 제시되어 있다. 통제영거북선과 좌수영 거북선이 그것이다. 이 두 그림은 확연히 다르게 보여 년식의 차이로 보기보다는 차라리 모델의 변화로 보아야 할 만큼 다르다. 우선 거북선의 등 부분이 통제영 것은 완전히 덮혀 있지 않고 가운데 틈이 있다. 그리고 그아래 방패판 역시 통제영 것에는 문이 있다. 포혈 옆에 있는 문은 겨냥을 위한 것인지 또는 병사의 돌격용인지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조준을 잘 하기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좌수영에는 포혈옆에 문은 없다. 또 뱃머리에 용머리가 통제영 거북선은 수평으로 누워 있는데 비해 좌수영 거북선은 수직으로 세워져 있다.
이외에도 충무공 종가에 전해지는 거북선 그림에는 거북선 드에 장루가 세워져 지휘용 함교를 형성 하고 있다. 그리고 또다른 그림에는 아예 용머리가 없다. 이 용머리가 없는 거북선은 KBS의 역사 스패셜 주장으로는 용머리 포대가 이동식으로 설계되었다는 증거라고 하는 근거 그림이 되기도 하였다. 또 그림으로 전해지지는 않으나 거북선 용머리가 포탑 구실을 하던 것과, 과시용의 유황 연기 배출용 두가지 버전이잇었던 것 같다. 지금 충무공의 장계를 의심할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조건 용머리는 포탑이 아니라 유황연기를 내뿜었다고 주장 할 수는 없다. 또 정조대왕의 왕명에 의해 편찬된 이충무공 전서의 내용을 배제 할 수도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 시대의 변천이 200년이 된다는 것은 이름이 같으나 완전히 모델 변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러가지거북선
그림 설명 : 왼쪽 부터 이충무공 전서의 통제영 거북선, 좌수영 거북선, 머리없는 거북선, 수조도의 통영거북선, 충무공 종가 거북선, 역사스패셜 거북선
그런데 이렇게 여러가지 거북선들중어느 것이 가장 진짜에 가까운 것일까? 우리는 전부 아니면 없다는 식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 거북선은 임진왜란때 실전 배치 되어 그후 조선왕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실로 300여년을 사용한 주력 전함이다. 그런데 그 긴세월동안 단 하나의 변경이나 개량이 없다고 보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거북선은 충무공 이래 끊임없는 개량과 새 모델이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정조때 통제영 거북선은 채광성을 좋게 하고 돛대를 세웠다 눕히기 편하게 등에 틈을 낸 것이고, 이후 삼도 수군 조련전진도나 충무공 종가에 보존된 장루가 있는 거북선은 함대 내에서 연합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함교를 밖에 세운것이며, 이들은 각기 다른 버전, 다른 모델로 보아야 할 것이다.
10. 현존하는 여러가지 거북선 그림들
여러가지 거북선 그림들
거북선은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전함이고 임진왜란이라는 조국의 시련기에 너무나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기에 우리에게 잊혀지지 않고 오늘날 까지도 많은 고문서나 그림들이 전해저 오고 있다. 그중에서 지금 까지 가장 권위있게 받아 들여지고 있는 것은 사실 충무공 사후 200여년이 지난 정조 대왕 시절에 왕명에 의해 만들어진 이 충무공전서에 나오는 기록일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해지는 거북선 그림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거북선 300년 취역 역사와 함께 거북선의 개량과 조선 수군의 역량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도 생각 된다.
충무공 종가 소장 거북선
왼쪽 그림은 우리에게 별로 낮익은 거북선 그림은 아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이충무공 종가에 전해저 내려오는 거북선 그림인 바 충무공 후손들이 조선시대 해군 총사령관이라 할 삼도수군통제사를 줄줄이 배출한 명가의 종가에 소장된 거북선 그림이라는데 일단 관심이 간다.
그런데 이 그림은 그동안 우리가 많이 보아 오던 거북선과는 많이 다르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거북선은 해군사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삼도수군조련전진도등에도 나타나는 등 한사람의 상상이나 잘못이라 볼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또 이 그림이 1741~1800년경의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임진왜란 이후 여러가지 개량이 가해진 거북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이충무공 종가에 소장 되어 있는 이그림은 해사박물관의 병풍 그림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좀더 자세하게 그린 것 같다.
우선 두개의 돛대는 이미 임진왜란 당시에도 있었다고 전해 지는 것으로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으나, 등쪽 중앙부의 장루는 매우 특이하다. 이 장루 부분을 자세히 보면 이충무공 전서의 통제영 거북선과 같이 등쪽 부분이 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번으로 표시한 꼬리쪽을 보면, 이충무공 전서의 통제영 거북선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거북선의 용두 부분인 2번 부분 역시 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거북선처럼 가로로 등판의 터진 부분을 막고 있다. 등쪽의 개판은 세로방향으로 양쪽 현에서 포개어 드 부분을 가리고 있으나, 그림에서 보듯이 용머리 바로 뒷쪽은 이와는 직각방향으로 뒷쪽 장루까지 등부분의 터진 틈을 완전히 막고 있다.
이 그림은 이외에도 방패판에 설치된 포혈과 문에서도 이충무공 전서의 통제영 거북선과 비슷하다. 게다가 이충무공 종가가 역대 통제사를 여럿 배출한 가문이란 점을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이 그림은 조선 후기 거북선의 최종 개량형 버전으로 보인다.
해사 박물관 소장 병풍속의 거북선 그림
이 그림은 해군 사관 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병풍 그림중 의 발포진의 거북선 이다.
이 그림 역시 위의 충무공 종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거북선과 같이 등위에 장루가 있다. 이 그림의 거북선은 이제 더이상 리본이 무서워 하던 장님배는 아닌 것이다. 이제는 함교가 밖으로 나와 연합함대의 지휘를 받기에는 편리하지만 적진속으로 무차별 돌격을 감행 하기에는 불리해 보인다.
그러나 이제 해전의 양상이 원거리 포격전으로 변화되는 조선 후기라면 원거리의 적을 쉽게 찾고 추격하려면 거북선에도 함교가 보다 높은 곳에 있어 적을 감시 하기 쉬운 쪽을 선택 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해군의 실력을 알고 감히 공격에 나서지 못하는 일본수군이나 이후 왜구등으로 부터 해안 방어에 주력하거나 적을 추격하는 데 전념한 조선 수군이라면 적진속으로의 돌격 보다는 높은 곳에서 원거리 탐지능력을 갖추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Corea.org는 이런 형식의 거북선이 조선 후기 원거리의 적을 추격하고 왜구등 해적들의 탐색등을 위해 개량된 거북선이라고 본다.
☜ 거북선에서 유황 연기를 뿜는 모습
등위에 장루 위에도 이 거북선은 방패판이 없고 좌우 현판에서 바로 개판을 덮고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많이 보아온 거북선의 좌우 방패판 포혈은 아마도 이충무공 전서의 개판위의 총포혈과 같이 거북 등딱지(개판) 내에 있으나 그림에서는 검은 거북등 무늬때문에 잘 보이지 않고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은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좌수영거북선 처럼 머리를 치켜 들고 있으나, 포탑으로 사용 하는 것이 아니라 유황 연기를 내뿜어 적에게 겁을 주는 용도로 사용 했다는 것을 그림의 다른 거북선을 통해 알 수 있다.
용머리 없는 거북선 그림
이 그림은 여러 거북선그림중 가장 특이한 거북선 이다. 왜냐하면 이 그림에는 거북선의 상징 중 하나라고 할 용머리가 없기 때문이다. 충무공의 장게에서도 분명히 머리가 있었다고 했던 만큼 머리 없는 거북선은 사실 상상 하기 조차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에 머리가 없다는 그림이 미완성이 아니라면 분명 그것은 착오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 보다는 실제로 그런 형태의 또다른 거북선이 있었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삼척동자라도 거북선에는 용머리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을 그리지 않고 거북선이라고 주장 하려면 납득할 만한 다른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모르는 또다른 형태의 거북선 있어서 실제로 그것을 보고 그렸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거북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린 것이라는 두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KBS의 역사 스페셜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이것이 거북선의 머리가 진짜 거북머리 처럼 앞뒤로, 즉 거북선 선체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 그림으로 제시 한바 있다. 몇몇 기록을 볼때 거북선의 머리는 쇠뇌와 같은 장치로 들락 거릴 수 있어서, 용머리로 포를 쏠때는 배밖으로 내밀고, 근거리의 적과 충돌을 감행 할때에는 머리를 보호 하기 위해서 선체 내부로 집어 넣었다는 것이 거북선 용머리 없는 그림의 설명이다.
이러한 주장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것이려니와 여러 정황 증거로 볼때 용머리 없는(용머리를 선체내로 감춘) 거북선도 있었다고 본다. 실제로 이 배의 다른 부분은 이충무공 종가의 거북선 그림과 너무나 똑같은 모양이다. 노의 갯수와 방패판의 모양, 방패판에 배치된 문과 포혈등 거의 동일한 형태의 배라고 볼 수 있다.
전라 좌수영 거북선 그림
이 그림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그림이다. 이충무공 전서에 다른 한장의 그림과 함께 전해지고 있는 좌수영 거북선은 충무공이 좌수영에 근무 했기 때문에 좌수영 거북선이 충무공의 거북선과 같은 것으로 오해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통제영 거북선이 오히려 충무공이 사용한 거북선과 비슷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이 보기에 이 그림이 더 좋아 보이는 이유로 여러 문헌에서 다투어 이 그림만 제시 하고 각종 모형에도 이 그림이 원형이 되다 시피 하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그림이 전해지고 있는 이충무공 전서에도 분명히 이 좌수영 거북선 보다는 통제영 거북선이 충무공의 옛 제도에 가깝다고 명시 되어 잇으며, 조선시대 군선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하신 '김재근' 선생님도 통제영의 거북선이 충무공이 만드신 거북선과 비슷하다고 주장 하셨다.
이 거북선역시 조선 후기 정조대왕 때의 것이므로 임진 왜란 때보다는 포혈이 더 많은 화력 강화 형이라고 볼 수 있어 방패판 이외에도 등딱지에도 좌우 6개씩 12개의 총포혈이 있다. 그 외에도 현판의 꼬리쪽 끝이 힘차게 하늘로 치솟아 있는등 매우 용감하고 위용 있게 보인다. keons.com.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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