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최영교_전쟁과 시장_09

醉月 2011. 4. 25. 08:26
<41> 중화제국의 허약체질
기술종속·짝퉁부품…'공룡' 중국의 치명적 약점
전쟁에 필요한 말 생산 못해 당나라 9세기 중반까지 회흘에서 구입
굴욕 외교관계 참아내야 했듯 거대 중화제국 자체 한계 못벗어나
잊을 수 없는 일들

    중국이 러시아 전투기 기술을 어설프게 흉내내 만든 J-10기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를 드러내 제 구실을 못하고 퇴출됐다.

 

만주의 북쪽 끝 우리강(Ussuri River)에서 소련군과 중국군대 간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1969년 3월 2일). 양쪽이 서로 자기네 영토라 주장했던 땅이 있었다. 0.74㎢ 정도에 지나지 않는 강 한가운데 있는 전바오섬(珍寶島)은 전쟁터가 되었다. 13일 뒤 소련군이 최신 T-62 전차를 투입했다.

전차는 해동되지 않은 빙판 위를 달렸다. 포가 발사되고 포탑의 동축 기관총에서 불을 뿜었다. 중국의 군대는 말 그대로 거지였다. 유일하게 반격할 수 있는 무기는 휴대용 대전차 로켓포 RPG-7이었다. 그것도 소련제를 카피한 짝퉁이었다. 소련 전차에게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중국군대는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전사자1300명).

하지만 소도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는다. 소련군 전차 한 대가 중국산 로켓포에 맞아 무한궤도가 끊어졌다. 전차의 기동이 마비되었고, 전차병들은 일단 밖으로 나와 대피했다. 러시아군은 빙판 위에 탱크를 뒤로하고 물러갔다(소련군 80명 사망).


중국을 떠나간 러시아의 기술자들

다음 날부터 전투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러시아 측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중국 놈들, 우리 전차에 침을 흘리고 있어! 저놈들이 전차를 가져가면 또 복제해서 짝퉁을 만들 것이야." 중국군이 대거 밀려왔다. 소련군은 빙판위로 포격을 했다. 수많은 중국군들이 죽었고, 빙판은 결국 깨어져 전차는 수장되고 말았다.

직후 두 나라는 4380㎞에 이르는 국경선에 각각 81만4000명과 65만8000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그해(1969년) 7월 8일에 헤이룽강의 바차섬에서 두 나라의 군대가 충돌했고, 8월 13일에는 중앙아시아의 신장자치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소련과 관계 악화는 중국군대의 전력에 치명적인 장애를 주었다.

직전 소련은 기술자를 보내 중국의 전투기 생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종사하게 했다. 그들이 모두 중국을 떠났다. 이후 중국은 소련산 미그 19를 모델로 삼아 짝퉁 전투기 J-6과 미그 21의 짝퉁 J-7 등을 마구 생산했다. 하지만 성능이 수준 이하였다.

1977년 소련은 고성능 전투기 수호이 27 등 전투기 생산에 성공했고, 1980년대에는 양산에 들어갔다. 중국은 소련과 공군전력 차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이 중국을 공격한다면 속수무책이었다. 중국은 어떻게든 수호이 27에 필적하는 자국산 전투기를 생산해야 했다. J-10이라는 전투기의 생산계획은 이렇게 잡혔다. 중국은 소련과 사이가 나쁜 미국과 서방의 제국에 손을 벌렸다.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러시아 무간도(無間道)

중국은 미국의 소개로 이스라엘 항공기 공업(IAI)에 접근했다. IAI는 미국의 압력에 의해서 신세대 전투기 '라비'의 양산을 중지한 상태였다. 중국은 이스라엘 라비의 도면과 개발 기술자를 불러와 J-10의 개발에 참가시켰다(1987년).

1989년 중국은 자국의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무참히 진압했다(천안문 사건). 중국의 민주화 탄압은 미국과 서방제국의 반발을 불러 무기 수출을 규제하게 되었다. 중국은 전투기의 심장과 두뇌라고도 말해야 할 엔진과 심장 부분을 잃어 버렸다.

하지만 중국과 구소련의 맹주였던 러시아와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원래 구소련의 신예 전투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개발이 시작된 J-10에 있어서는 짓궂은 일이지만, 돈이 급한 러시아가 AL-31 F터보 팬·엔진과 아비오닉스를 제공하기로 했다.

J-10은 서쪽 장비를 전제로 해서 개발되고 있었다. 러시아제 장비를 탑재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다른 설계가 필요했다. 시제기가 나오는 데 10년이 소요되었다. J-10은 1998년에 첫 비행을 했다. 하지만 1999년에 시제 2호기가 추락해 시험 파일럿과 함께 사라졌다. 2002년 50대가 양산되었다. 물론 러시아의 엔진과 레이다를 달았다. 2005년 7월에 다시 이차원 추진력 편향형 엔진 AL-31 FN를 러시아에 주문했고, 100기는 이미 중국에 들어왔다고 한다.

중국은 J-10의 성능이 미국의 F16보다 월등하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곧 들통이 났다. 공대공 능력이 현격히 떨어져 전폭기로 개조 중이라고 한다. 중국공군도 애초부터 자국산 J-10의 성능을 믿지 못했다. 이미 중국은 1991년 이후 러시아의 수호이-27을 76기나 도입했고, 1996년 이후 수호이-27 196기를 중국내 면허생산 했으며, 1999년 이후 수호이-30 100기를 구매했다.


당나라와 티베트의 실크로드 전쟁

중국이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당나라시대였다. 당은 부와 힘의 원천을 제공해주는 실크로드를 놓고 티베트(토번)과 경쟁을 했다. 현재 티베트는 중국에 속해있다. 하지만 7세기 말의 티베트 제국의 영토는 동쪽으로 청해호에서 북쪽으로 실크로드의 북부 간다라계 도시국가 쿠차, 서쪽으로 파미르 고원의 와한왕국과 소발률 왕국에 걸쳐 있었다. 그 광대한 지역에서 징집한 병력인 만큼 티베트군은 대군이었다.

730년 당나라와 티베트가 맺은 평화조약이 737년 당의 침략으로 깨졌다. 청해호에서 동쪽으로 40㎞ 떨어진 고지에 전략적 요충지가 있었다. 청해호 부근의 비옥한 초원으로 접근로에 위치한 쇠날요새(石堡城)는 장안과 라싸를 잇는 간선도로를 관장하고 있었다. 741년 티베트군이 이 요새를 차지했다. 격분한 중국황제 현종은 당장 반격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당군 사령관은 항명했다. "폐하! 수만 명의 전사자를 내지 않고는 쇠날요새를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그는 불복종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가서한(哥舒翰)이라는 젊은 장수의 개입으로 죽음을 모면했다. 황제가 가서한에게 '쇠날요새' 공격을 명했을 때 그는 거부 못했다.


기병전과 수성전, 동전의 양면

맑고 화창한 날, 북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티베트 병사들 뒤로는 '쇠날요새'가 솟아 있었다. 전투는 요새의 아래의 있는 평원에서 벌어졌다. 여느 때처럼 기병전이 벌어졌다. 양군의 기병들은 서로를 향해 활을 쏘며 돌격했다. 전투는 고원의 찬란한 햇빛 속에서 수일 동안 계속되었다. 키 자란 잡풀들은 수만 마리의 말에 짓밟혔고, 대기는 흙먼지와 죽음의 냄새로 자욱했다.

티베트군이 완강히 버티자 가서한은 부하장수들 막사로 불렀다. "4일 이내에 티베트군의 방어선을 뚫고 요새를 함락시키지 못하면 당신들 모두 처형하겠소!" 최후통첩이었다. 중국인 병사들은 티베트군의 화살공격을 받고 줄줄이 쓰러졌지만 티베트군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만큼 강력해졌다.

티베트군은 요새 안으로 퇴각했다. 외부의 지원은 강력한 중국기병의 방해로 끊겼다. 포위된 요새의 함락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요새를 두고 싸우지만 그 앞 평지에서의 기병 전력의 우위에서 모든 것이 판가름 났다. 요새를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성을 포위해야 하고 외부의 지원을 단절해야 한다. 역으로 외부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수성전에서도 기병전력 필요하다.

당시 당 국내에서는 말이 생산되지 않았다. 설사 생산한다고 하더라도 중국에서 농민들이 의무적으로 키운 말은 소와 같이 힘만 있지 빠르지도 않으며, 멍청했다. 북방 유목민 회흘족의 목동이 키우고 훈련시킨 전마를 대량으로 수입해야 했다.

공룡 필사(必死)

당나라의 황제는 회흘의 칸에게 자신의 딸을 주고 동맹을 강화하여 매년 수만 마리의 말을 구입하기로 했다(758년). 말 한 마리 가격은 비단 40필이었다. 당 조정의 창고가 비어 대신들이 봉록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당은 외상으로 말을 구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빚이 늘어나 양국관계가 험악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티베트는 지속적으로 팽창했고, 실크로드를 지키기 위해 당은 회흘과의 동맹관계를 굴욕적으로 유지해야 했다. 당은 회흘이 멸망하는 9세기 중반까지 비단을 주고 말을 사왔다.

현재 우리는 중화제국의 급성장에 겁을 먹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중요한 무기를 북방으로부터 도입하지 않으면 전력을 유지할 수 없는 허약한 체질을 가졌다. 짝퉁 부품이 난무하는 중국에서 자국산 최첨단 무기개발은 요원하다. 만일 성공했다면 러시아와 서방에 대한 부품의존 비율이 급격히 상승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심지어 중국은 러시아의 GPS서비스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가 단절한다면 그들의 유도무기는 상당한 기능을 상실할 것이다. 죽을 때까지 자라는 공룡, 중화제국은 환경 변화에 치명적이다.


  ▶수호이-27=1960년대 후반 미국이 F-15 이글 중량 전투기를 개발하자 소련은 수호이(Su)-27(사진) 전투기를 새로 제작해 맞섰다. 률카(Lyulka)설계국에서 새로 개발한 AL-31F 엔진 2기를 장착했고, 1977년 5월 20일 처음으로 비행했다. 주익은 전형적인 후퇴익이며 AA-10 Alamo AA-11 Archer 공대공 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다. 사격관제 레이더는 240㎞ 내의 전투기를 탐색할 수 있고 표적 10개를 동시에 추적하고, 2개의 표적을 향해 동시에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 항속거리는 4000㎞에 달한다.

▶가서한(哥舒翰·?~756)=투르크족 투르기시(突騎施) 가서(哥舒) 부족의 후예이다.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의 아들로서 하서(河西) 절도사인 왕충사의 막하 무장으로 티베트의 침입을 격파하였다. 나중에 현종 임금의 총애를 받아 농우절도부대사에 임명되어 다시 티베트를 토벌하는 공을 세워 서평군왕에 봉해졌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동관(潼關)을 지켜 분전하였으나 패하여 살해되었다.

 

 

<43> 中제국과 日제국의 전쟁터
中·日 헤게모니 싸움에 갈가리 찢긴 '샌드위치 한반도'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에서 두번 싸웠다
임진왜란에선 일본이 청일전쟁에선 중국이 패했다
두 차례의 전쟁에서한반도는 초토화됐다
전운은 또다시 감돌고 있다

    임진왜란에서 처음으로 왜구와 조선군이 맞부딪친 동래읍성 전투를 묘사한 그림.

 

명나라는 모든 세금을 은으로 받았다. 농민들은 곡물을 주고 은을 사서 국가에 납입해야 했다. 상업도 은을 매개로 발달했다. 명나라는 세계 최대의 본위제 사회였다. 북방에 몽골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엄청난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고, 병사들에게 봉급으로 은이 지급되었다. 북방의 긴장이 고조되면 더 많은 은이 북방으로 흘러갔고, 명나라 국내에는 은 품귀현상이 재현되었다.

은의 수요가 상승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밀무역에 나서는 모험자들의 이익도 증가한다. 이리하여 북방 변경에도 동남 연안에서도 폭력적인 항쟁과 상업적 이익을 표리로 한 활발한 시장이 확장된다. 중국인이나 북방의 몽골족 남방의 왜구 등 민족을 불문하고 이익에 끌린 사람들이 거기에 흘러들어간다.


명나라, 은(銀)의 블랙홀

약탈행위는 일본인들만의 행위가 아니었다. 중국연안의 사람들로 왜구를 가장한 자들이 전체의 7~8할을 차지하였다. 배후에는 중국의 상인·자본가·토호·지주들이 있었다. 심지어 포르투갈인들도 관계되어 있었다. 명나라 조정이 사적인 해외무역을 금지하는 한 이러한 행위는 근절되지 않았다. 1567년 드디어 명 조정은 해상활동을 제한하는 해금(海禁)정책을 폐기했다.

이후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은의 양은 급속히 증대됐다. 1557년부터 마카오 거주가 허락된 포르투갈인들이, 1571년 이후 스페인은 필리핀에 마닐라를 건설하고 태평양을 통해 다량의 멕시코 은을 가지고 왔다. 일본산 은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합친 것 보다 많았다. 16세기 후반 중국으로 유입된 은의 양은 총 2300t이 되고 그 중에서 히데요시의 은광에서 생산된 일본의 은이 1300t이었다(17세기 5000t이 중국에 유입, 그중 일본에서 수출된 것이 2400t-'미야지마 히로시'). 명나라는 세계의 은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고, 일본은 당시 세계 최대의 은 생산국이자 수출국이었다.


    조선을 먹잇감으로 노리고 있는 청·일 두 강대국의 야욕을 빗댄 당시 삽화. 불공정무역 타개책, 임진왜란

로마 교황청에 들어가는 보고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을 통일한 왜구들의 왕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 조정의 해금 조치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보게 미쓰나리(三成). 경제무역의 발달과 해적행위가 명나라 조정의 정책을 바꾸게 했다. 이로써 중국인들은 해외에 나아갈 수 있게 됐고 사적인 무역이 허용됐지만 그것은 중국인들만의 잔치야!" "예, 전하. 명나라 조정은 조공무역 체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해금폐기로 자유로워진 것은 중국인들뿐입니다. 우리 일본은 중국의 조공정책의 끈에 결박되어 있었습니다." "맞아! 내가 일본을 통일한 이 마당에 결단을 내려야겠어." "예! 그렇다면 명나라조정의 조공체제를 무력으로라도 철회시키겠다는 것입니까?"

1592년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을 침공했다. 임진왜란은 명나라의 불공정무역에 대한 일본의 극단적인 대응의 한 형태였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1달이 되지 않아 서울을 점령했고, 조선의 국왕 선조는 그해 명나라가 압록강 넘어 보이는 의주까지 도망을 갔다. 수도 북경이 가까운 평양까지 일본군이 밀려오자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했다. 일본군과 평양 싸움에서 명나라군대는 참패를 당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명나라군대가 다시 반격을 했고, 일본군대는 서울까지 상실하고 남쪽 해안으로 내려갔다. 이순신장군이 해상보급로를 단절했기 때문이다. 프로이스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조선의 배는 크고 튼튼했다. 일본수군에 대해 우위를 차지했다. 조선수군은 아주 발달된 대포로 일본군을 제압했다. 어떤 일본군 장수는 사로잡히기 전에 할복했다. 해전에서 일본군은 항상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나라에 대한 조공 무역을 거부하고 명나라를 치기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병든 돼지의 식욕

명나라에 대한 조공무역을 부정하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에 사망했다.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했고, 이로써 중국에 대한 불공정무역을 타개해 보려던 일본의 시도는 유산되었다. 300년이 흐른 후 일본은 다시 조선에서 중국군대와 전쟁을 치른다. 1882년 청나라가 조선의 핵심을 장악했다. 조선의 실권자 대원군을 납치하고 민비정권을 압박하여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 그것은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으로 만든 조약이었다. 조선 국왕은 청의 북양대신과 대등하며, 청나라 상인이 조선 내지에서 자유롭게 상행위를 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청나라는 자존심이 많이 상해 있었다. 1840년과 1856년 영국과 아편전쟁에서 참패하여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거금의 배상금까지 지불했다. 영국은 프랑스와 손잡고 1860년 청나라를 압박하여 거대한 이권을 따냈으며, 러시아와 미국이 그 뒤를 이었다. 중국이란 힘없고 비대한 돼지는 날렵한 서구열강 독수리들에게 찢겨 먹히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만만한 조선에게 그들이 당했던 짓을 그대로 했다.


일본의 불황과 청일전쟁

일본 육군의 수장(陸軍卿)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청나라의 조선시장 장악을 우려했다. "만약 한반도가 다른 강대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 일본은 '머리 위의 칼'을 뒤집어쓰는 것이야! 대륙으로부터 일본을 향해 쑥 튀어나온 건널목과 같은 한반도를 우리가 차지하지 않는다면 일본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어. 무엇보다 우리 일본산 경공업 제품이 조선 시장에 크게 진출한 상태인데 청나라 놈들이 조선시장을 독식하려고 하고 있어."

일본은 1890년부터 경제공황 상태였다. 값싼 노동력의 국내시장 발전제약과 섬유공업·군수공업 등에 대한 수년간의 투자확장이 공황의 원인이었다. 1889년의 흉작으로 인한 쌀 생산의 감소도 공황을 더욱 촉진시켰다. 결국 1890년 일본경제는 심한 수입초과를 나타냈으며 일본은 무역불균형을 타개해야 했다. 의회에서 일본 지배층 내부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농민·노동자들의 경제상태가 악화되어 불만이 증대했다. 청나라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1894년 일본은 서울과 부산간 전선(電線)을 가설하여 통신망을 확보했고, 병력을 동원하여 서울의 왕궁과 4대문을 장악하고, 조선과 청나라의 통상무역장정을 폐기했다. 그리고 아산만에 주둔중인 청군을 공격하고, 그 앞바다의 풍도(豊島)에서는 청함정을 습격하여 1200여 명을 익사시켰다. 성환(成歡)에서도 평양에서도 압록강 어귀에서도 청군이 패했다. 이어 일본은 요동과 산동의 여순 위해를 점령하고 유공도(劉公島)에서 청의 북양함대(北洋艦隊)를 최종적으로 전멸시켰다. 나아가 북경을 위협하여 청국 전체를 정복할 기세였다. 당시 어느 기자의 표현대로 중국은 잠자는 '거인'이 아니라 '돼지'였다.


강대국의 길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은 승전 대가로 3억 6400만 엔(청나라 1년 예산의 2.5배)의 배상금과 중국의 영토인 타이완, 펑후섬을 할양받았다. 돈은 일본군의 군비증강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300년 전 조선에서 물러났지만 서구화에 성공한 일본은 더욱 강해졌고, 중국의 조공체제를 폐기하고 조선을 사실상 장악했다. 300년 전 히데요시의 꿈이 실현되었다.

1592년과 1894년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했다. 각각 1승 1패였다. 1592년 조선은 중국에 편에 섰고, 일본군을 몰아내고 조공국으로서 만족을 했다. 그것은 조선의 발전에 치명적이었다. 1894년 조선은 자신의 의사를 결정하지 못할 만큼 약해졌고, 일본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북한이 현저히 약해진 지금 역사는 되풀이될 수도 있다. 압록강에 주둔한 중국군대가 여차하면 강을 건너 올 태세다. 북한에서 망명한 황장엽은 김정일 사후 북한은 중국의 영향하에 들어갈 것이라 점을 쳤다. 일본과 그 배후의 미국은 그것을 우려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처럼 양자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인가. 제3의 길은 없는가.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4강이 아니라 5강체제로 가야한다.


▶아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1838~1922)

조슈번의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요시다 쇼인의 정보수집꾼으로 교토 정세를 살피면서 존양파(尊攘派) 인물들과 안면을 넓혔다. 1863년 다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기병대에 입대해 군감(軍監·제2인자)이 되어 1866년의 사경(四境)전쟁의 소창구(小倉口)전투에서 싸웠고, 막부군을 추토하는 무진(戊辰)전쟁에서 공을 세웠다. 1868년에 유럽 각국을 시찰하고, 귀국 후 국방차관(兵部大輔)이 되어 군제개혁에 착수했다. 1873년에는 초대 육군경(陸軍卿)에 취임해 징병령을 실시했다. 서남전쟁(1876년) 때 징병령에 의해 육성된 군대가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무라이군을 격파했다. 그 후 그는 어떤 직책을 맡든 현역 원수와 조슈군벌의 수장으로서 일본 육군을 지배했다.

 


<44> 정치권력과 조폭의 결합(權暴癒着·권폭유착), 중화제
중국 관리들에게 폭력과 연결된 부패는 유서깊은 문화일뿐
명 왕조대 밀무역 왜구와 결탁한 관료들 銀 대량 축재…민생 도탄
낮의 총통 장개석 밤의 황제 삼합회 두월생 부적절한 공생
워싱턴포스트 "중국 관리들의 조폭 이용한 착취와 치부는 현재진행형"

  부패관리로 희생양이 된 정샤오위 전 중국 국가식품약품감독관리국 국장이 2007년 7월 사형 집행 직전 최고인민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멕시코에서 태평양을 통해 필리핀으로 옮긴 은(銀) 가운데 중국으로 들어간 것은 50만 페소에 달합니다." "멕시코에서 스페인으로 반입된 은은 영국인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및 포르투갈인의 손에 옮겨가고, 그들에게 이익을 준 후 동인도로 수송됩니다. 인도에서 네덜란드인 페르시아인 아라비아인 무갈인 등의 손으로 건네지고 마지막 집중지인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버립니다."

17세기 어느 스페인인 서기가 필리핀에서 본국에 보낸 보고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당시 은은 서로 돌든 동으로 돌든 최종 종착지는 중국이었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까지 외부에서 중국으로 유입된 은(銀)은 7300t 정도였다.

이러한 은의 대량 유입은 중국의 은 부족을 해결하였을까. 하지만 많은 16세기말 중국의 지식인들은 은 부족을 개탄하고 있다. "지금 천하는 흉년이 계속되는데도 곡물 가격은 점점 더 내려가고 민은 갈수록 굶주리고 있다. 그 이유는 곡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은이 부족해서이다. 은이 부족하면 곡물을 싸게 팔아서 마련할 수밖에 없다. 곡물을 싸게 팔면 남은 곡물이 적어지고 민의 생활은 어려워질 뿐이다."(전곡의·錢穀議)

신대륙에서 생산된 은이 16세기 유럽에서 물가 폭등을 일으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세계 은의 종점인 중국에서 물가가 상승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물가는 하락했고, 은의 부족은 만성적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조폭과 결탁한 상인과 부패한 관료들이 놀라울 정도로 은을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당량의 은이 지속적으로 그들의 금고에 잠겨 빛을 보지 못했다.

당시 명나라는 은에 대한 수요가 절박했지만 외부로부터 은의 유입을 불법으로 간주했다. 은의 흐름은 명 왕조가 만든 댐에 제도적으로 막혀 있었다. 하지만 은의 기압 차이는 바람을 일으켰다. 이 댐을 무너뜨리려는 세찬 바람이 무장 밀무역 집단인 왜구였다.


왜구의 중국인 두목 왕직(王直)

절강 연안의 쌍서(雙嶼), 복건 남부의 장주 월항(月港)이 밀무역의 거점이었다. 여기서 유명한 왜구의 중국인 두목들이 말레카의 포르투갈인이나 일본 후쿠오카 상인들을 끌어들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그 중에서도 대 왜구시대를 이끈 거물은 왕직(王直)이었다. 휘주의 흠연 사람인 그는 호탕하고 그릇이 컸다. 당시 중국해안의 밀수 조직 두목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중국의 법령은 엄격하여 자칫하면 금법에 걸린다. 차라리 해외에서 마음껏 날개를 펴는 것이 낫지 않은가."

왕직은 광동에서 아주 큰 배를 건조하여 유황이나 비단생사 등 금지된 물품을 싣고 일본에서 태국·동남아 서부 제국까지 이르는 무역을 한 지 6년 만에 거금을 모았다. 자금력은 그 휘하에 유명한 중국인 협객들을 모여들게 했고, 왜구의 우두머리들도 따르게 했다. 가도다로(門多郞) 지로(次郞) 요쓰게(四助) 시로(四郞) 등이 수하 집단이 되었다. 그는 일본 열도 남쪽의 고도(五島)에 본거지를 차렸다. 여기에는 수백 척의 배가 드나들며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등과 일본의 은이 교역되었다. 왕직은 휘왕(徽王)이라 칭하면서 그 무역을 좌지우지했다. 중국연안의 밀수업자들과 관리들이 그와 동업을 했다.

많은 관리들은 관의 배를 이용하여 업자들의 물건을 운반해주었고, 관의 정보에 대해 다 알려주었다. 사실 업자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민들의 소장을 접수하여 특정 사람을 마음대로 고문을 하고 제멋대로 고시(告示)를 내어 관을 업신여겼다. 1547년 왜구 박멸을 명받은 주환은 단속을 엄격히 하려 하였으나 밀수업자들과 연루된 다른 관리들의 방해로 모두 무산되었다.

업자들은 중앙 관료들에게도 거금의 돈을 정기적으로 상납했다. 주환의 단속으로 업자들로부터 들어오는 용돈을 받지 못하게 될까 우려한 중앙관료들은 모략을 꾸몄고, 그를 실각시켰다. 3년 후 실의에 빠진 주환은 "왜구와 결탁한 자들이 관을 능가하는 실력을 휘두른다"라고 한탄하며 자살했다.


밤의 황제 두월생(杜月笙)

손문에게 국민당 정권을 물려받은 장개석도 범죄 조직과 공생했다. 1926년 7월, 국민당군이 북벌을 시작할 때 장개석은 총사령관을 역임하였다. 국민당군은 북양군벌(北洋軍閥)을 정벌하고, 호남성 호북성 강서성 복건성을 수복한 다음, 하남성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으로 진군해 갔다. 1927년 장개석은 상해를 점령했다.

그는 상해에 있는 공산당원과 당내의 반대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범죄조직 삼합회의 두목 두월생과 협약을 체결했다. 장개석은 두월생에게 별 둘을 달아주고 '무임소 장군' 대우를 하면서 수만에 가까운 두월생의 세력을 사병화하는 데 성공했다. 국민당에서 삼합회 폭력조직에 엄청난 자금이 흘러들어갔고, 장개석은 두월생의 부하를 국민당 비밀경찰 '남의사(籃衣社)'로 대거 영입하여 남녀 5000명 이상을 살해했다(4·12정변).

중화민국에서 장개석이 '낮의 총통'이었다면 삼합회 두목 두월생은 '밤의 황제'였다. 이후 노동조합은 완전히 두월생과 그의 부하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들은 조합의 간부로서 쟁의나 파업 때에는 독립행동을 했고, 언제나 직공 전체의 노임을 공장주로부터 받아 일부를 갈취했다. 공장주에게선 보조금을 받고 노동자에겐 아편을 강제로 팔았으며, 노동자의 자녀를 노예로 구입하여 따로 돈벌이를 시켜먹었다.

장개석과 두월생 사이에 아편 유통에 대한 밀약도 맺어졌다. 삼합회는 국민당 정부로부터 아편 전매권을 따냈다. 중국 전역에 아편이 유통되었고, 그 이익금의 상당 부분이 장개석과 국민당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 부패한 돈은 정권을 유지하는 원동력인 동시에 치명적인 독이었다. 그것은 장개석에게 쫓기던 모택동을 기사회생케 하는 토양이 되었다. 국민당이 뿜는 악취에 중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이 돌아섰고 민폐를 끼치지 않는 공산당에 희망을 걸었다.

어느 순간 모택동이 역공을 펼치기 시작했고 대륙 곳곳에서 국민당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내려지고 공산당의 오성홍기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1947년 국민당의 패배가 분명해졌고, 2년 후 장개석과 그 잔당은 대만으로 쫓겨났다. 상해가 공산당에 함락되던 1949년 4월 두월생은 모택동에게 "상해를 중립 지역으로 하자"고 제의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의 공산화는 곧 우익 테러 세력에 대한 사형 선고임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32년 후 삼합회는 공산당의 중국에서 부활했다.


중화제국 역사의 원죄

1981년 등소평이 중국을 개방한 이후 홍콩과 대만의 삼합회가 대규모의 자본을 중국으로 유입시키고 중국 권부 내의 실력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삼합회는 중국 내의 급속한 산업화로 이농 현상이 진행되자 이들을 조직원으로 포섭하여 세력을 키웠다.

1992년 중국의 공안 부장인 도사구가 "삼합회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이익을 위해 국경도 이념도 영역도 구분하지 않는 삼합회는 중국공산당 핵심구성원들에게 막대한 돈을 뿌렸고, 그들에게 '애국자'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중국경찰의 바지선에 실려 각지로 팔려나가고 있는 홍콩의 도난 고급승용차들은 그들의 유착관계를 말해준다. 이보다 수백년 앞서 어느 명나라 관리는 말했다. "장주와 천주 관리들의 배는 바로 밀수업자들의 날개였다."(벽여잡집)

관과 범죄조직의 결탁은 유구한 중국역사의 전통이요, 신 왕조가 들어설 때의 원죄였다. 한나라의 고조 유방은 논두렁 깡패의 두목이었으며, 명태조 주원장도 종교결사 출신이었다. 신 왕조는 항상 비합법 조직의 도움을 받고 일어섰다. 청나라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던 19세기 초, 중국에는 수없이 많은 비밀 결사체가 협객을 자처하며 활동했다. '홍문'과 '청방' 등이 멸만흥한(滅滿興漢)의 기치를 내걸고 세력권을 넓혀갔다. 중화민국 건국의 아버지 손문은 홍방에 소속된 비밀 결사원이었다. 손문은 각각의 협객 조직을 규합해 거대조직인 '동맹회'를 결성한 후 신해혁명을 일으켜 청나라를 전복하고 중화민국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건국(1912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협객들은 국민당 정부의 막강한 후원을 받게 되었고, 장군이라는 직책과 함께 아편장사와 매춘업을 공식적으로 보장받았다. 중국 관리들에게 부패는 부끄러운 범죄가 아니라 유서 깊은 문화일 뿐이다. 현재도 중국 관리들은 폭력조직을 동원하여 농민들의 땅을 빼앗아 개발업자들에게 팔고 있다고 한다(워싱턴 포스트).


  ▶삼합회(三合會)

삼합회의 기원은 1760년대에 복건(福建)의 장저우에서 창립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18세기 후반 이후 대만(臺灣)을 포함한 화남(華南) 각지 및 동남아시아 화교(華僑) 간의 민간비밀결사인 천지회(天地會)와 동일단체라는 설도 있다. 삼점회(三點會)·첨제회(添弟會)·소도회(小刀會) 등과 함께 홍문(洪門)으로 총칭되었으며, 통일된 조직이 아니고 지방마다 많은 조직이 있었다. 특히 광동성(廣東省)을 중심으로 한 화난지방에서 세력이 강하였다. 주로 교통·운송에 종사하는 노동자, 광산 노동자, 각종 수공업의 직공, 영세상인, 실업자 등 도시의 하층 민중으로 구성되었으며, 재야 지식인과 농민도 끼여 있었다.


▶중화민국(中華民國)

1912년 중국 (中國)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 국가로 성립하여, 1928년 이후로는 중국의 거의 전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의 중화민국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하여 1949년 중국 대륙의 영토를 상실하고 타이완 섬 (대만)으로 후퇴, 철수하였다. 타이완 섬으로 후퇴한 이후로도 중화민국(대만)은 '중국의 정통 정부'를 자칭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중화민국(대만)은 세계적으로 중국의 정통 정부로 승인되지 않는 미승인 국가이다.

 


<45> 정지룡과 누르하치
중국 권력교체의 핵심, 변경의 거상들
정지룡과 이성량등 중국의 변방과 해상을 지배했던 무역상인은
막강한 군벌로 성장해 중앙권력에 도전하거나 권력을 전복시켰다

  마카오 시내 전경.

 

포르투갈은 평화로운 교역으로 명나라의 신임을 얻어 1557년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한 후 일본 나가사키항까지 확보해 해상 무역의 황금기를 열었다.
명나라가 해금(海禁)의 빗장을 풀었다(1570년). '한 조각의 판자라도 바다에 띄워놓는 것을 불허한' 해금령이었다. 왜구에 대한 좋지 못한 기억을 가진 명 왕조는 중국인이 일본에 내항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틈을 타고 거대한 이익을 올린 것이 포르투갈이다.

1542년 포르투갈이 일본 연해에까지 진출하면서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에서 나오는 이득이 동인도의 향료를 서유럽으로 운송해서 얻는 이득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홍해를 봉쇄하여 경쟁자 베네치아의 향료무역을 막고 동남아에서 산출되는 향료를 유럽에 독점판매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연해 해적과 달리 평화롭게 교역활동을 하면서 중국 관리들의 신임을 얻었다. 공을 들인 대가로 1557년에 명나라 정부로부터 광동의 마카오 정착이 허용됐다. 마카오는 광동성의 거대한 비단 시장을 끼고 있었다. 1570년 일본 규슈(九州)의 기독교인 다이묘(大名) 오무라(大村)가 자신의 영내에 있는 나가사키항을 포르투갈인들에게 항구적으로 허용했다. 일본에 생사, 비단, 약재 등을 판매한 무역의 이익은 500%에서 1000%가 됐다. 마카오-나가사키 노선을 확보한 포르투갈 무역의 황금기였다.

포르투갈의 독주는 오래가지 못했다. 17세기가 시작될 무렵 경쟁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등장했다. 그들은 향료의 산지인 인도네시아와 몰루카제도를 장악하여 포르투갈 베네치아 터키 페르시아의 향료무역 자체를 붕괴시켰다. 칼 마르크스는 야수와 같은 네덜란드인들의 등장을 '자본론 1권'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말레카를 손에 넣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 총독을 매수하였다. 총독은 네덜란드인들이 시내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황급히 총독의 집을 향했고, 가차 없이 그를 죽였다. 약속한 매수금액 2만1875파운드를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중국 내 거점을 가지지 못한 네덜란드는 무역을 위한 거점으로 대만에 주목했다. 1624년 중국 본토의 풍부한 상품을 확보하기 위해 섬의 남쪽 대남(臺南)에 제란디아성을 구축했다.


    정성공 동남 연안의 미니국가

당시 중국의 동남 연안에는 많은 해상집단이 때로는 명 관헌에 저항하고 때로는 손을 잡아 라이벌 집단을 토벌하면서 무역의 이익을 둘러싸고 경쟁하고 있었다. 명 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가의 지배를 거스르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지방 지배를 보면 미니국가라고 할 만한 다양한 기구의 싹이 보인다. 광동성 조양현 사람 임대춘은 16세기 연안해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배의 왕래에 통행허가증을 발급해서 상인의 화물로부터 하나하나 정해진 비율의 세를 취한다. …남의 곡물을 탈취하는 관리의 돈을 빼앗아 빈민을 구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빈민은 기꺼이 앞 다투어 해구(海寇)의 세력하에 들어간다. …또 사방의 망명자를 모아 조금은 문장을 쓸 수 있는 자를 참군(參軍)으로 하고 해구의 두목은 큰 배에서 거주하면서 왕과 같은 생활을 하며, 종자들을 끌고 읍내에 출입한다."('해구론')

명 조정의 입장에서 무법지대였지만 거친 해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구는 불완전하나마 지역에 질서를 가져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존재로 비쳤다. 그들은 명왕조의 지배를 파먹어 들어갔다. 그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정지룡이다. 그는 다른 해상집단을 습격하여 세력 확대를 했고, 명 관헌이나 네덜란드 선단과도 격렬한 해전을 벌였고, 1000척이나 되는 선단을 이끌고 중국연안을 지배했다. 그러자 네덜란드도 그와 손을 잡고 중국 상품의 입수를 꾀하였고, 1628년 명 조정은 그를 제독에 임명했다. 관군이 된 정지룡 세력은 중국연안을 완전히 장악했다.


양날의 칼 -북방군벌

당시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독립왕국처럼 세력을 쌓아 가던 군벌이 명나라 북방에 있었다. 여진인의 피를 받은 이성량의 집안은 요동에서 무관을 세습했다. 1570년 그는 9만 명을 지휘하는 요동총병관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무력의 기초는 자신의 가정(家丁·사병)이었다. 가정은 투항해온 여진족을 장군의 집안에서 부양하는 병사들이다. 그들은 장군을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이성량은 몽골, 여진에 관한 모든 것을 훤히 알고 있었고, 그의 사병들은 목숨을 걸고 오랑캐와 싸웠다. 그가 요동지방을 지키는 것은 그의 집안을 지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성량의 집안이 있는 한 요동은 평화를 보장받았다. 이 씨의 강대함은 요동에 토착해서 혈연적 준혈연적인 끈으로 지탱된 그 기반의 안정성에 있다. 그의 일족이나 가정들은 요동의 각급 무관에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 총수로 파견된 사람이 이성량의 장남 이여송이었다.

이 씨 집안의 토착성은 명 조정에게 양날의 칼이었다. 맡겨두면 평안한 대신 그가 요동에서 독립왕국처럼 세력을 떨치는 것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실제로 명나라 조정이 요동에 투입한 경상군비 은(銀) 수십 만량의 절반을 횡령하고 또 시장에서 거래되는 말 가격이나 소금세, 상세 등으로 사복을 채우고 모든 요동 상민의 이익을 모두 자기의 농 속에 넣었다('명사' 이성량전). 이 씨는 이러한 수입으로 화려한 생활을 즐겼고, 돈의 일부는 북경의 고관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 씨의 전공은 조정에서 부풀려지기 일쑤였다.


변경시장에 움튼 신흥국가의 싹

요동에 대한 명 조정의 거대한 군비의 투입은 전쟁특수라고도 해야 할 변경호황을 가져왔다. 요동에서 당시 최대의 상품은 담비모피와 인삼이었다. 모피는 조선북부와 북경에서 겨울에 귀가리개로 대량 수요가 있었다. 한편 인삼은 백두산 부근의 산악지대에 자생했고, 그것을 채취하기 위해 여름 2, 3개월 동안 산중에서 맹수를 막아가며 집단생활을 할 필요가 있었다.

인삼은 중국에서 은의 중량과 필적하는 가치를 가졌다. 여진인이 수집한 인삼은 그 수장에게 공급돼 권력의 기반이 되었다. 청태조 누르하치(1559~1626)는 북만주에서 요동으로 이어지는 특산품 루트를 장악하여 상업적 이익을 취했다.

군벌 이성량은 요동의 시장을 지배해서 누르하치의 상업활동을 보호하고 이익의 일부를 가졌다. 이성량은 누르하치의 후원자이며, 양자는 공생관계였다. 누르하치와 여진인들이 수렵과 채집을 주로 하는 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그들은 소박한 자급자족적 경제가 아니라 국제교역을 위한 특산품을 얻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변경의 시장에서 단련된 상업자본가였다.

1644년 5월 누르하치의 손자 순치제가 청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점령했다. 순치제는 자금성에서 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청 왕조는 명 왕조를 이은 중국의 정통왕조라는 것을 새삼 공표했다. 변경의 인삼과 모피 장사에서 출발한 누르하치의 손자가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여기에 정 씨가 반발했다. 명나라의 부활이라는 슬로건 아래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은 동남의 중국해 교역에서 얻은 풍부한 자금을 기반으로 무장선단을 조직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남경을 위협했고, 해전에 익숙하지 않은 청의 여진군대를 괴롭혔다. 나아가 5차례에 걸쳐 도쿠가와 막부에 사람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시장파괴의 위력

그렇다면 정 씨 세력을 명나라를 부흥하려는 충성스러운 세력, 만주인들의 침략에 대항하는 한족(漢族) 민족주의자들로 볼 수 있을까. 그들은 동남연안에서 명나라의 공권력을 파먹던 자들로, 필요하다면 어제의 적과 손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 정 씨도 청 왕조도 16세기 이래 활기 넘치고 항쟁으로 가득 찬 변경사회에서 단련되고 지위가 올라간 집단인 것이다. 그러한 신흥국가의 싹이 명 왕조의 지배를 파먹어 들어간 것이 16~17세기였고, 1660~1680년대는 두 신흥세력의 결승전 시기였다.

정 씨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청 왕조가 취한 조치는 무식했다. 무역이 바로 정 씨라는 물고기가 노는 물이라는 것을 간파한 청은 발해와 복건, 광동을 중심으로 하는 연해 주민을 20㎞ 이상의 내지로 강제 이주시키고 무인지대로 만들었다(1656년). 철저한 초토화는 정 씨 일가를 파멸로 몰아갔고, 동아시아에 장사를 하러 온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을 물러가게 했다. 현재 미국 금융시장의 붕괴는 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르하치(奴爾哈赤·1559~1626)

만주의 무순 동쪽 건주여진의 추장이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할 때까지 철저하게 명나라에 복종했으며 1583년 처음으로 독립을 위한 군사를 일으켜 수년 사이에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1587년 소자하 상류에 흥경로성을 구축하였다. 명에 대해서는 계속 공손한 태도를 취하여 1589년 명으로부터 도독첨사로 임명되었으며, 1595년 용호장군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조선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가 조선을 원병하는 기회를 이용해 1599년에 해서여진의 합달을 멸망시키고, 이어 1607년에는 휘발, 1613년에는 오랍 등을 병합하여 여진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1618년부터 명과 전쟁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동인도회사

1602년에 결성된 이 회사는 정부로부터 동양무역의 독점권이 부여된 이외에도 동양 여러 나라와의 조약 체결, 성새(城塞) 축조, 군대 편성, 문관(文官) 임명 등의 권한을 받아 이른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국가 권력의 대행기관이 되었다. 몰루카섬의 향료를 독점한 네덜란드는 희망봉에서 대만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거점을 확보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회사는 자바섬의 바타비아(자카르타)에 근거지를 만들어 포르투갈의 세력을 내쫓는 한편 영국 세력을 누르면서 향료무역과 식민지 경영에 성공, 네덜란드가 동양무역의 황금시대를 맞이하는데 한몫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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