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는 해동되지 않은 빙판 위를 달렸다. 포가 발사되고 포탑의 동축 기관총에서 불을 뿜었다. 중국의 군대는 말 그대로 거지였다. 유일하게 반격할 수 있는 무기는 휴대용 대전차 로켓포 RPG-7이었다. 그것도 소련제를 카피한 짝퉁이었다. 소련 전차에게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중국군대는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전사자1300명).
하지만 소도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는다. 소련군 전차 한 대가 중국산 로켓포에 맞아 무한궤도가 끊어졌다. 전차의 기동이 마비되었고, 전차병들은 일단 밖으로 나와 대피했다. 러시아군은 빙판 위에 탱크를 뒤로하고 물러갔다(소련군 80명 사망).
중국을 떠나간 러시아의 기술자들
다음 날부터 전투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러시아 측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중국 놈들, 우리 전차에 침을 흘리고 있어! 저놈들이 전차를 가져가면 또 복제해서 짝퉁을 만들 것이야." 중국군이 대거 밀려왔다. 소련군은 빙판위로 포격을 했다. 수많은 중국군들이 죽었고, 빙판은 결국 깨어져 전차는 수장되고 말았다.
직후 두 나라는 4380㎞에 이르는 국경선에 각각 81만4000명과 65만8000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그해(1969년) 7월 8일에 헤이룽강의 바차섬에서 두 나라의 군대가 충돌했고, 8월 13일에는 중앙아시아의 신장자치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소련과 관계 악화는 중국군대의 전력에 치명적인 장애를 주었다.
직전 소련은 기술자를 보내 중국의 전투기 생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종사하게 했다. 그들이 모두 중국을 떠났다. 이후 중국은 소련산 미그 19를 모델로 삼아 짝퉁 전투기 J-6과 미그 21의 짝퉁 J-7 등을 마구 생산했다. 하지만 성능이 수준 이하였다.
1977년 소련은 고성능 전투기 수호이 27 등 전투기 생산에 성공했고, 1980년대에는 양산에 들어갔다. 중국은 소련과 공군전력 차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이 중국을 공격한다면 속수무책이었다. 중국은 어떻게든 수호이 27에 필적하는 자국산 전투기를 생산해야 했다. J-10이라는 전투기의 생산계획은 이렇게 잡혔다. 중국은 소련과 사이가 나쁜 미국과 서방의 제국에 손을 벌렸다.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러시아 무간도(無間道)
중국은 미국의 소개로 이스라엘 항공기 공업(IAI)에 접근했다. IAI는 미국의 압력에 의해서 신세대 전투기 '라비'의 양산을 중지한 상태였다. 중국은 이스라엘 라비의 도면과 개발 기술자를 불러와 J-10의 개발에 참가시켰다(1987년).
1989년 중국은 자국의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무참히 진압했다(천안문 사건). 중국의 민주화 탄압은 미국과 서방제국의 반발을 불러 무기 수출을 규제하게 되었다. 중국은 전투기의 심장과 두뇌라고도 말해야 할 엔진과 심장 부분을 잃어 버렸다.
하지만 중국과 구소련의 맹주였던 러시아와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원래 구소련의 신예 전투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개발이 시작된 J-10에 있어서는 짓궂은 일이지만, 돈이 급한 러시아가 AL-31 F터보 팬·엔진과 아비오닉스를 제공하기로 했다.
J-10은 서쪽 장비를 전제로 해서 개발되고 있었다. 러시아제 장비를 탑재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다른 설계가 필요했다. 시제기가 나오는 데 10년이 소요되었다. J-10은 1998년에 첫 비행을 했다. 하지만 1999년에 시제 2호기가 추락해 시험 파일럿과 함께 사라졌다. 2002년 50대가 양산되었다. 물론 러시아의 엔진과 레이다를 달았다. 2005년 7월에 다시 이차원 추진력 편향형 엔진 AL-31 FN를 러시아에 주문했고, 100기는 이미 중국에 들어왔다고 한다.
중국은 J-10의 성능이 미국의 F16보다 월등하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곧 들통이 났다. 공대공 능력이 현격히 떨어져 전폭기로 개조 중이라고 한다. 중국공군도 애초부터 자국산 J-10의 성능을 믿지 못했다. 이미 중국은 1991년 이후 러시아의 수호이-27을 76기나 도입했고, 1996년 이후 수호이-27 196기를 중국내 면허생산 했으며, 1999년 이후 수호이-30 100기를 구매했다.
당나라와 티베트의 실크로드 전쟁
중국이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당나라시대였다. 당은 부와 힘의 원천을 제공해주는 실크로드를 놓고 티베트(토번)과 경쟁을 했다. 현재 티베트는 중국에 속해있다. 하지만 7세기 말의 티베트 제국의 영토는 동쪽으로 청해호에서 북쪽으로 실크로드의 북부 간다라계 도시국가 쿠차, 서쪽으로 파미르 고원의 와한왕국과 소발률 왕국에 걸쳐 있었다. 그 광대한 지역에서 징집한 병력인 만큼 티베트군은 대군이었다.
730년 당나라와 티베트가 맺은 평화조약이 737년 당의 침략으로 깨졌다. 청해호에서 동쪽으로 40㎞ 떨어진 고지에 전략적 요충지가 있었다. 청해호 부근의 비옥한 초원으로 접근로에 위치한 쇠날요새(石堡城)는 장안과 라싸를 잇는 간선도로를 관장하고 있었다. 741년 티베트군이 이 요새를 차지했다. 격분한 중국황제 현종은 당장 반격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당군 사령관은 항명했다. "폐하! 수만 명의 전사자를 내지 않고는 쇠날요새를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그는 불복종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가서한(哥舒翰)이라는 젊은 장수의 개입으로 죽음을 모면했다. 황제가 가서한에게 '쇠날요새' 공격을 명했을 때 그는 거부 못했다.
기병전과 수성전, 동전의 양면
맑고 화창한 날, 북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티베트 병사들 뒤로는 '쇠날요새'가 솟아 있었다. 전투는 요새의 아래의 있는 평원에서 벌어졌다. 여느 때처럼 기병전이 벌어졌다. 양군의 기병들은 서로를 향해 활을 쏘며 돌격했다. 전투는 고원의 찬란한 햇빛 속에서 수일 동안 계속되었다. 키 자란 잡풀들은 수만 마리의 말에 짓밟혔고, 대기는 흙먼지와 죽음의 냄새로 자욱했다.
티베트군이 완강히 버티자 가서한은 부하장수들 막사로 불렀다. "4일 이내에 티베트군의 방어선을 뚫고 요새를 함락시키지 못하면 당신들 모두 처형하겠소!" 최후통첩이었다. 중국인 병사들은 티베트군의 화살공격을 받고 줄줄이 쓰러졌지만 티베트군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만큼 강력해졌다.
티베트군은 요새 안으로 퇴각했다. 외부의 지원은 강력한 중국기병의 방해로 끊겼다. 포위된 요새의 함락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요새를 두고 싸우지만 그 앞 평지에서의 기병 전력의 우위에서 모든 것이 판가름 났다. 요새를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성을 포위해야 하고 외부의 지원을 단절해야 한다. 역으로 외부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수성전에서도 기병전력 필요하다.
당시 당 국내에서는 말이 생산되지 않았다. 설사 생산한다고 하더라도 중국에서 농민들이 의무적으로 키운 말은 소와 같이 힘만 있지 빠르지도 않으며, 멍청했다. 북방 유목민 회흘족의 목동이 키우고 훈련시킨 전마를 대량으로 수입해야 했다.
공룡 필사(必死)
당나라의 황제는 회흘의 칸에게 자신의 딸을 주고 동맹을 강화하여 매년 수만 마리의 말을 구입하기로 했다(758년). 말 한 마리 가격은 비단 40필이었다. 당 조정의 창고가 비어 대신들이 봉록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당은 외상으로 말을 구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빚이 늘어나 양국관계가 험악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티베트는 지속적으로 팽창했고, 실크로드를 지키기 위해 당은 회흘과의 동맹관계를 굴욕적으로 유지해야 했다. 당은 회흘이 멸망하는 9세기 중반까지 비단을 주고 말을 사왔다.
현재 우리는 중화제국의 급성장에 겁을 먹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중요한 무기를 북방으로부터 도입하지 않으면 전력을 유지할 수 없는 허약한 체질을 가졌다. 짝퉁 부품이 난무하는 중국에서 자국산 최첨단 무기개발은 요원하다. 만일 성공했다면 러시아와 서방에 대한 부품의존 비율이 급격히 상승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심지어 중국은 러시아의 GPS서비스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가 단절한다면 그들의 유도무기는 상당한 기능을 상실할 것이다. 죽을 때까지 자라는 공룡, 중화제국은 환경 변화에 치명적이다.
▶가서한(哥舒翰·?~756)=투르크족 투르기시(突騎施) 가서(哥舒) 부족의 후예이다.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의 아들로서 하서(河西) 절도사인 왕충사의 막하 무장으로 티베트의 침입을 격파하였다. 나중에 현종 임금의 총애를 받아 농우절도부대사에 임명되어 다시 티베트를 토벌하는 공을 세워 서평군왕에 봉해졌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동관(潼關)을 지켜 분전하였으나 패하여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