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미국의 딜레마와 수제국의 참패
시장, 전쟁을 도발하거나 억지하거나석유 때문에 이라크를 친 미국은 또한 석유 때문에 이란 침공을 주저하고 있다황폐해진 자국 시장을 외면하고 고구려와의 전쟁을 지속한 수는 결국 멸망의 길을 걸었다
| | | 미국 부시 대통령(오른쪽)은 유가 상승을 막기위해 이라크 전쟁을 벌였지만 갈수록 실패감만 맛보고 있는 반면 이란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유가 앙등으로 미국 이라크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챙기고 있다. 국제신문 DB | | "고유가로 중동국가의 석유화학 관련시설 건설 발주가 폭증하고 있습니다." 최근 대림산업 대표가 말했다. 대림산업은 중동서 71억 달러짜리 프로젝트를 따냈다. 지난해의 경우 대림산업이 수주한 규모의 해외플랜트 물량 중 90% 이상이 사우디와 이란 두 국가에 집중돼 있다고 한다. 미국이 이라크전에 개입한 지 5년이 지났다. 석유 확보를 위해 치러진 이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석유가격을 폭등시켰다. 산유국에 오일달러가 넘치게 되었고 건설 붐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수혜를 누리게 된 나라가 시아파의 종주국인 이란이다. 처음 전쟁은 너무나 쉬워 보였다. 이라크 군대가 싸움을 포기했다. 미군들은 이라크인들이 1945년 패전 이후의 독일인들이나 일본인들처럼 행동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것은 오산이었다. 부시와 토니 블레어는 "우리가 떠나면 이라크는 무정부 상태가 될 것"이라며 점령을 정당화하면서 이라크에 머물렀다. 그런데도 이라크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미국, 이라크를 이란에 헌납 미국이 석유자원 장악이라는 실리를 챙길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이란에 지원을 받는 시아파 게릴라들이 유전을 위협하고 있다. 이란은 미국의 전쟁비용을 지속적으로 상승시켰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투입한 돈이 3조 달러라고 한다. 미국은 테러집단 알 카에다도 근절하지 못했다. 그들은 미국이 이라크에 몰두하는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조직을 재건하고 세력을 확대하는 성과를 거뒀다. 또 고조된 반미 감정 덕분에 이라크 등 세계 각지로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미국은 이란의 강적 사담 후세인(수니파)을 몰락시켰다. 이란을 추종하는 시아파 메흐디 민병대가 바그다드의 75%를 장악했으며, 요르단과 시리아로 탈출한 인구는 220만 명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수니파였다. 선거는 인구의 과반인 시아파가 권력을 장악하게 했고, 합법적으로 정당화시켰다.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해 이란을 견제하겠다는 지정학적 목적도 시아파가 이라크 정부를 장악함으로써 물거품이 됐다. 미국은 이라크를 이란에 헌납했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지난 3월 2일 역사적인 이라크 방문에서 미국을 마음껏 조롱했다. "독재자(사담 후세인)가 없는 이라크를 방문하니 진심으로 기쁘다." "이라크의 진정한 파트너는 이란이며 미국은 이라크 내에서 절름발이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다." "6년 전 이곳엔 테러리스트가 없었는데 이방인(미국)이 오자마자 그들이 생겨났다." 미국에 거침없이 모욕을 주는 발언이었다. 작년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군대 16만 명이 주둔하는 이라크에 '밤도둑'처럼 왔다 갔다. 하지만 아마디네자드는 이라크 방문일정과 동선을 예고하고 의장대 사열까지 받았다. 이란의 이라크에 대한 영향력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미국이 이란과 지난해 3차례나 접촉한 것은 미국이 이라크 저항세력을 누르고 이라크를 안정화시키는 데 이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부시 자신이 '악의 축'으로 몰았던 이란에 고개를 숙여야 할 상황이다. 돌궐 궁정에서 만난 수 황제와 고구려 사신 612년 수나라의 황제는 고구려를 '악의 축'으로 몰고 선전포고를 했다. "고구려는 일찍이 나의 관대함을 무시하고 오히려 '악'을 쌓았다. 거란(용병)의 무리들과 함께 바다의 수나라 경계병들을 죽이고, 말갈(용병)을 이끌고 요서를 침범하였다." 고구려로 향하는 황제의 군대 숫자는 상상을 초월했다. "모두 113만 3800명이었는데 200만 명이라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자가 (전투 병력보다) 두 배 많았다."('삼국사기'). 이야기는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07년 8월 초원에 가을이 왔다. 수 양제는 선물을 갖고 돌궐 계민칸의 천막 궁정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적국 고구려 사신이 거기에 먼저 도착해 있는 것이 아닌가. 수 양제는 자신의 후궁을 침범한 사내를 보듯 고구려 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양에서 직선거리로 1200㎞ 떨어진 이곳에 고구려 사신이 자신보다 먼저 와서 신임하던 계민칸과 사사로이 통하려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전부터 감히 수나라의 영토(요서)를 유린하기 시작했고, 지금 자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던 이 북방초원에까지 촉수를 뻗치고 있는 고구려는 양제에게 치욕감을 주는 존재였다. 후한 이후 근 400년간의 분열을 통일한 수제국을 감히 유린하고도 무사히 존재하는 나라는 이 세상에 고구려밖에 없었다. 9년 전(598) 아버지 수 문제가 고구려를 치려다 턱없이 실패한 바 있기 때문에 그의 심사는 더욱 불편했다. 중국의 황제에게도 적발될 정도로 북방초원으로의 고구려의 사절과 상단의 왕래 횟수는 많았다. 609년 수 양제에게 충성을 하던 계민칸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러 갔다가 낙양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 시필(始畢) 칸이 즉위했다. 고구려는 사절과 상단을 시필 칸에게 보냈다. 그리고 수나라의 돌궐 분열정책을 충분히 상기시켜 주었다. "수나라가 시필 칸 당신의 동생을 또 다른 칸으로 세워 당신과 경쟁시키려고 합니다. 지금 돌궐이 수나라의 공작에 의해 얼마나 분열되어 있습니까." 돌궐이 수나라로부터 받아온 물질적 수혜를 고구려가 상당부분 감당하겠다고 설득했다. 605년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북방 돌궐제국과 지속적인 대규모 교역을 한 증거가 포착된다. 상단은 수만에 이르는 규모였다. 고구려는 돌궐인들이 원하는 곡물과 철 생필품 등을 주고, 말을 포함한 가축을 받았다('수서'). 이 때문에 돌궐의 칸은 고구려를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계민칸은 자신의 궁정에 수양제가 행차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마침 찾아온 고구려 사신을 결코 홀대하지 않았다. 수 양제는 빠르고 기동성이 있으며, 보급을 자급자족하는 동돌궐의 유목민 기병을 고구려 침공에 동원하려고 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공작으로 무산되었다. 이는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수는 엄청난 보급품을 소비하는 농민들을 동원해야 했다. 수양제는 고민에 잠겼다. 수양제의 고민 | | | 수나라 2대 황제 수양제. | | "농민 대부분은 식량만 소비할뿐 싸움에는 능하지 않아. 그들을 먹이기 위해서 식량을 운반하는데 엄청난 사람과 짐승들이 동원돼야 해. 보급부대와 짐승들도 엄청난 식량을 소비하지. 보급이 보급을 낳는 악순환이 벌어질 터인데 이거 어떻게 하지. 무엇보다 돌궐기병 없이 농민을 데리고 전쟁을 한다는 소문이 나면 시장에서 식량가격은 폭등할 것이 확실해. 그러면 전쟁비용은 몇 곱절로 늘어날 게야. 이거 어쩐다." 수 양제의 변경 정책가인 배구가 말했다. "폐하. 하지만 고구려는 우리에게 최대의 위협입니다. 고구려는 이미 동돌궐을 우리의 영향하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그놈들은 요서에 있는 거란족들에 대해서도 공작하고 있습니다." "짐도 알고 있소. 유목민들은 곡물 없이 겨울을 넘기기 힘들어요. 그러니 초원에 곡물을 정기적으로 판매하는 고구려 놈들의 영향력이 증대하는 거지요." "폐하. 우리 수의 모체는 서북 장안 중심의 북주입니다. 우리는 동북의 북제를 무너뜨리고 통일을 달성했지요. 고구려와 인접한 동북지역에는 북제 왕조 초기로까지 소급되는 분리주의의 감정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고구려는 이러한 우리의 내부사정을 십분 활용하고 있습니다. 동북지역에서 암약하는 많은 고구려 간첩들이 정보를 수집해갈 뿐 아니라 민심을 흩트리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무기(弩) 제조기술자를 수나라에서 빼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하북 지방에 대해 고구려가 끼칠지도 모를 영향력을 수양제는 두려워했다. 전쟁 초기 미국은 핵 개발 문제를 본격 거론하며 자국에 적대적인 이란을 겨냥한 압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란은 핵 주권을 굳건히 내세웠다. 나아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개입해 아랍권의 이익을 대변하고,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레바논의 시아파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다. 아랍권 민중들은 미국을 향해 할 말을 하면서 행동으로 보여 주는 이란에 열광하고 있다. 고구려의 도발과 공작으로 불안이 가중될수록 전쟁의 가능성은 높아졌고, 중국의 곡물가격이 상승했다. 상대적으로 상당한 곡물을 보유한 고구려가 동북방의 유목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에 유리해졌다. 전 세계 원유 매장량의 10%를 넘게 보유한 이란은 얄궂게도 미국이 중동 지역에서 안보 불안을 가중시킨 데 따른 혜택을 보고 있다. 이라크 사태가 악화하고 이란의 핵 위기가 고조할 때마다 국제유가는 출렁거렸고, 한번 오른 유가는 잘 내려가지 않았다. 이란은 원유를 팔아 매일 약 3억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다(연 1000억 달러 추산). 시장의 전쟁 억지력 현재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시설을 폭격하자고 미국에게 떼를 쓰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자제하고 있다. 이미 전쟁으로 경제가 침체된 미국이 이스라엘의 말을 듣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미 결판이 난 과거의 사실은 해답을 준다. 수나라의 양제도 돌궐이 이탈하자 고구려와의 전쟁을 3년 이상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사상 초유의 자금과 병력을 동원한 전쟁을 했고, 30만 명이 고구려 땅에 그들의 무덤을 남겼다. 이런 참사는 수나라의 경제를 망쳐놓았다. 수 양제는 여기서 멈추어야 했다. 하지만 시장을 무시한 고구려와의 전쟁을 계속했고, 그것은 수나라를 끝이 보이지 않은 내란으로 몰고 갔다. 그렇게 해서 당시 세계 최대의 부국 수나라는 망했다. 미국이 이란과 충돌한다면 유가폭등을 더욱 가속시킬 것이다. 미국은 이미 인상된 유가로 인해 매년 8000억 달러를 더 지불해야 한다. 5년 전 시장에서 유가 상승을 예상한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시장이 미국의 도발을 유혹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장은 미국의 이란 침공을 가로막고 있다. |
<17> 자본가의 국제정치 자본은 정치를 움직인다 이권은 반란을 획책한다 이란의 민족주의 혁명 실패 뒤엔 미국 석유회사의 압력이 당의 안시성 전투 패배 뒤엔 고구려의 쿠데타 공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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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궁정동에서 총성이 울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었다(1979년10월26일). 그의 죽음에는 유가의 국제정치가 반영되어 있다. 그해 이란은 회교 혁명으로 팔레비 독재정권이 무너졌고 원유 수출을 중단했다. 유가가 치솟았다. 제2차 오일쇼크였다. 한국은 직격탄을 맞았다. 물가가 상승했고, 경상수지가 악화되었다. 경제적 불안은 정치적 불만과 결합했고, 부산과 마산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저격자 김재규는 여기서 용기를 얻었다. 그해 12월 12월 쿠데타가 일어나 신군부가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다. 이란사태는 신군부에게도 행운이었다. 미국은 이란에 자국의 인질이 잡혀 있어 한국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이란인들은 미국을 석유도둑으로 알았고, 그 도둑이국왕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증오는 57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이란 수상 라즈마라가 저격으로 사망했다. 그는 이란석유의 국유화가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했었다. 국왕 팔레비는 당시 이란의 석유를 독점한 영국의 허수아비였다. | | | 이란 국왕 팔레비의 서구화 세속화에 반대하면서 이란 혁명을 주도해 지금도 최고 지도자로 숭배받고 있는 호메이니. 그는 석유 민족자본주의를 내세우면서 반미주의 노선을 걸었다. 호메이니가 이끈 이란혁명 기념행사 사진. | | 이란의 민족주의자 모사데크 오랜 세월의 영국의 지배를 받은 이란에는 한 사람의 선동가가 있었다. 민족전선을 이끌고 있던 모사데크는 의회 석유위원회 의장이었다. 석유만 국유화되면 이란이 짊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그의 주장은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1951년 4월 의회에서 석유 국유화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2년 후 국왕이 서명했다. 동시에 모사데크가 수상에 임명되었다. "석유도둑 영국(앵글로 이라니언)을 몰아내자." 하지만 석유시장에서 유통권은 엑슨모빌, 텍사코, 쉘 등 주요 메이저 회사들이 가지고 있었다. 서로 경쟁적인 그들도 단합을 했다. "석유는 피보다 진하다. 이란산 석유는 사지도 팔지도 말자!" 이란의 석유는 시장에서 거래가 중지되었다. 모사데크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국고가 바닥을 드러냈고, 실업과 인플레이션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이란은 무질서에 빠졌다. 메이저 석유회사들은 쯔데당(공산당)이 정부를 탈취하고 이란이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되면 중동 전체가 위험해진다. 그들은 미국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미국의 CIA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란에 잠입한 요원들이 공작을 시작했다. 이란의 국왕 팔레비에 접근한 CIA 요원 슈파츠코프는 모사데크의 파면을 선언하게 했다. 새로운 수상으로 자헤디 장군을 임명했다. 하지만 모사데크의 반격은 만만치 않았다. 라디오를 통해 반 팔레비 운동을 선언했다. 하루 밤 사이에 반 팔레비 구호를 부르짖는 군중들로 테헤란 거리는 가득 찼다(1953년 8월). CIA의 쿠데타와 석유재벌들 팔레비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로마로 피신을 했다. CIA는 2단계 '아작스'작전에 들어갔다. 군대와 경찰 조직 내 인맥을 끌어 모았고, 사람을 시켜 이슬람 성직자 집을 폭파시켜, 그 일을 모사데크가 했다고 누명을 씌었다. 그리고 테헤란 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막대한 돈을 살포했다. 친 국왕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간 군중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 넘쳤다. 모사데크는 군과 경찰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은 CIA의 조정을 받고 있었다. 군부의 탱크가 모사데크와 그를 따르던 자들을 포위했다. 미국이 획책한 쿠데타가 성공했다. 귀국한 팔레비는 영국의 허수아비에서 미국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석유의 이권은 엑슨, 걸프 등 미국의 5대 메이저와 영국(BP), 네덜란드(쉘), 프랑스(CEP) 등에게 분할되었고(1954년 7월), 이란에 공작을 지휘한 CIA 요원 루즈벨트는 걸프의 부사장이 되었다. 최대의 수혜자는 미국 석유회사들이었다. 이후 그들은 이란뿐만 아니라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의 대유전지대에 손을 뻗치게 되었다. CIA가 획책한 쿠데타는 외세의 개입 사실을 부각시켰고, 이란 국민들에게 반미국적인 정서가 자리잡게 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왕은 정적들을 처단하고 완벽한 경찰국가를 만들었다. 안시성의 은광산 645년 8월 안시성 앞 평원에 당군 10만과 고구려군 15만이 대진했다. 그 넓은 곳이 좁아 보였다. 고구려군의 고수들이 북을 치기 시작했다. 양군의 선두대열이 가까워질수록 북소리는 점점 커졌다. 고구려군의 뒤로 안시성이 솟아 있었지만 전투는 잡풀이 무성한 들판에서 벌어질 참이었다. 전투는 만주평원의 찬란한 햇빛 속에서 며칠 동안 계속됐다. 높이 자란 풀들은 금세 수십만 명의 인간과 말의 발에 짓밟혔고, 대기는 흙먼지와 죽음의 냄새로 자욱했다. 한 병사가 쓰러지면 다른 병사가 그 자리를 메웠다. 당군 장창보병 1만이 창을 세웠다. 동시에 당 기병이 고구려군을 도발했다. 기병이 충격을 주는 망치라면 장창보병은 모루였다. 순식간에 고구려군은 대열이 흩어졌고, 많은 고구려 병사가 죽어갔다. 당군은 고구려군이 대열을 추스를 시간을 주지 않았다. 결국 고구려 장군(고연수·고혜진)들은 항복했다. 안시성을 구원하러 갔던 군대는 궤멸했다. 당태종은 이미 고구려의 요동성과 비사성 등 여러 성을 함락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안시성을 두고 고구려 심장부로 진격할 마음이 없었다. 안시성 부근에는 은(銀)을 막대하게 생산하는 은광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641년 고구려를 방문했던 당의 정보부장(병부 직방랑중) 진대덕이 남긴 보고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은산(銀山)은 안시(安市)의 동북 100여 리에 있다. 수백 가구가 그것을 채집해 국용(國用)으로 공급하였다."('한원'). 고구려는 은을 채굴해 화폐로 사용했다. 은 덩어리는 고구려 국가 제정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안시성 패배 후 연개소문에게 선택의 여지는 크게 줄었다. 당시의 전세로 보아 시간이 흐르면서 요동에 있는 여러 성이 당군에게 차례로 함락될 것이 분명했다. 안시성마저 장담할 수 없었다. | | | 연개소문 | | 연개소문의 쿠데타 사주 극적인 반전이 필요했다. 당의 유일한 적수인 설연타를 움직이는 길밖에 없다. 연개소문은 사절(말갈인 상인들)을 파견했다(645년 6월). 그들은 고구려와 몽골고원 간 교역에 종사했다. 고구려가 사라지면 그들의 부와 조직도 모두 붕괴될 상황이었다. 도박이란 마지막 판까지 거금의 돈을 건 사람에게만 기회를 준다. 연개소문의 의도대로 상황이 돌아갈지 여부는 불확실했다. 그런 만큼 설연타에 파견된 사신에게 준 공작금은 막대한 규모였다. 고구려에서 온 사절이 설연타에 도착했을 때 칸은 병석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곡물의 절대량을 고구려에서 수입해 먹는 설연타의 칸은 고구려사절을 만나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절이 말했다. "지금 당태종의 군대는 고구려에 있습니다. 칸께서 군대를 일으켜 당의 수도 장안을 접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당태종 그 놈에게 몇 년 전 우리 설연타가 패하여 짐의 체면이 말이 아니오." 고구려 사절은 칸이 당태종에게 깊은 공포감을 느끼고 있으며, 그의 생명의 불도 꺼져간다는 것을 직감했다.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섰다가는 그들은 모든 것을 잃을 판이었다. "칸 자리를 이어 받을 아들을 상대해야해! 하지만 아들이 두 명 있는데 누구에게 줄을 서는 것이 효과적이지?" | | | 당태종 | | 말갈상인의 공작 칸의 적자 발작을 찍었다. 그리고 거금의 공작금을 들고 그를 찾아갔다. " 8년 전 당태종은 아버님이신 진주칸의 서자인 예망을 돌리실칸으로, 적자인 발작 당신을 사엽호칸으로 책봉했습니다(637년)." "그렇소. 중국놈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와 배 다른 형제 사이에 소비적인 혈투를 바라고 있소. 이대로 가다간 나는 이복형제와 내분에 들어갈 것이 확실하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민망하지만 이복형제분을 죽여야 합니다." "의심 많은 그놈을 어떻게 여기로 끌어들인다 말이오." "기회는 한번뿐입니다. 당신의 아버님이신 진주칸께서 돌아가면 예망도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희가 자금을 댈 터이니 사람들을 모으시지요." "알았소." "발작님이 거사에 성공을 한 후 해야 할 조치가 있습니다. 내란을 방지하고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당과 전쟁을 해야 합니다. 지금 당의 주력은 우리 고구려에 와 있으니 그 심장부는 비어 있습니다." 그해 9월 진주칸이 죽고 장례식이 있었다. 상주인 발작이 예망을 불렀다. 예망은 음모를 꾸밀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불안에 떨던 예망은 장례가 끝나자 서둘러 자신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그것을 예측이라도 한 듯이 발작은 예망을 추격해 습살했다. 고구려의 획책으로 쿠데타가 일어나고 설연타는 하나로 통일되었다. 초원에서 반당적인 설연타의 새 가한이 즉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태종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나타났다. 645년 9월에 정권을 장악한 설연타의 발작은 기마군단 10만을 이끌고 하주(夏州·오르도스)를 공격했다. 당의 수도권과 인접한 곳이었다. 설연타의 공격에 태종은 안시성에서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645년 9월). 당태종은 그해 12월 군을 독려하기 위해 오르도스와 인접한 령주에 도착했다. 설연타와 싸우는 당군을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이동 중의 가마에서 당태종은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그것은 살인적인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646년 3월 전쟁터에서 돌아오던 태종을 마중나간 황태자(당 고종)가 본 것은 영웅이 아니라 병든 노인이었다. 그의 회한은 끝없이 깊어갔다. 그리고는 결국 세상을 등졌다. 석유재벌들은 이란의 위기를 이용해 영국이 독점한 석유를 나누어 가졌다. 말갈상인들은 고구려의 곡물에 의존적인 설연타의 왕위계승에 개입해 자신의 말을 듣는 자를 등극시켜 당을 공격하게 했고, 이권을 지켜냈다. 양자는 시공간의 차이만큼 입장이 달랐다. 하지만 공통점도 있다. 시장을 장악한 현대 자본가들과 고대 상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제정치에 개입하거나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이 그것이다. 석유재벌들은 중동의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의회와 행정부에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했고, CIA를 움직였다. 몽골고원과 고구려 사이의 교역에 거대한 이권이 걸린 말갈 상인들도 연개소문이 사주한 이상의 것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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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중국의 비단과 미국 달러 비단의 탐욕에 수는 멸망했고, 흔들리는 '달러'에 미국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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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 노동자들이 지난달 23일 오후 여의도에서 자사의 해외매각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산업은행이 대우조선 매각 주간사로 선정한 골드만삭스는 초국적 자본이다. 이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숙주처럼 기생하며 고도 금융기법과 무분별한 투기를 통해 카지노 자본주의를 실현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자유시장이 부와 번영으로 이르는 길임을 확신합니다." 1990년대 미국은 자유시장 개혁, 사유화, 달러 민주화라는 '복음'으로 무장하고 자본 이동의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배후에는 월스트리트의 금융기업들이 있었다. 비판자들은 그것을 제국이라 불렀고, 미국은 자유와 인권의 확대라고 주장했다. 확실한 것은 여기서 자유란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자본의 자유였고, 그 자본은 달러였다는 점이다. 1980년대 말 소련의 위협이 사라지자 자본주의 동맹국들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도 약화될 터였다. 일본과 한국 등 동아시아와 유럽연합이 미국의 지배권에 대한 경제적 주요 경쟁자가 되었다. 미 행정부는 '글로벌화'란 덫을 개발했다. 눈치를 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해외 단기 자본의 유입 일본은행들이 자국의 증권 및 부동산 시장 폭락에 맞서 고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1993년 APEC (아·태 경제협력체)정상회담에서 미국은 동아시아 경제권에 대해 금융시장을 개방하라고 요구했다. 그 동안 동아시아 나라들은 제조업에 대한 투자를 제외하고는 외국자본에 대한 의존을 피해왔다. 한국에도 해외 투자가 자유롭게 들어오고 나가도록 허용되었다. 한국의 고금리에 현혹된 외국 투자가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해외에서 6~7%의 저금리로 자금을 빌려 원화로 환전하여 12~13%의 고금리로 운용했다. 재미를 본 그들은 우리의 주가가 저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많은 주식을 매입하였다. 외국인 증권투자가 610억 달러까지 늘어났다(1991~1996년). 해외자본 유입에 따른 통화 증발과 인플레 압력을 상쇄하기 위하여 정부와 한국은행은 유입된 외화를 외국으로 다시 내보내는 정책을 시도하였다(불태화(不胎化)정책). 해외여행자들의 환전 한도를 1만 달러로 상향 조정하는가 하면, 외환 보유고 일부를 은행을 통해 종금사에 예탁하여 그들이 해외 증권에 투자하는 길을 텄다. 만성적 국제수지 적자에도 불구하고(1996년 적자 237억 달러) 단기 자본 유입으로 환율이 안정되었다. 분명히 왜곡된 현상이었지만 세계화 시대에는 국제수지 적자의 의미가 달라진다고 착각했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도 달러의 유입에 휩쓸리고 있었다. 호화 부동산, 주식 등에 투기적인 거품이 일어났다. IMF, 자본흐름의 홈 대패질 국제은행들로부터 받은 비밀 여신한도로 무장한 투기꾼들은 가장 취약한 태국을 골랐다. 1997년 4월 태국 바트화에 대한 투기공격이 감행되었다. 6월 태국은 달러화에 대한 바트화의 고정 환율을 폐기했고,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요청을 했다. 헤지펀드와 은행들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를 강타했고, 곧바로 한국에 상륙했다. 동남아 여러 나라들이 외환위기에 봉착하고 일본에서도 잇따른 은행 파탄이 일어났다. 서방의 투자가들은 과연 한국이 예외가 될 수 있느냐고 의심했고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였다. 주식을 투매하자 주가가 폭락하고, 일시에 자금을 회수하니 환율이 폭등했다. 외환 보유고가 바닥이 났다. 1997년 12월 3일, 한국정부는 IMF로부터 구제금융 580억 달러를 차입하는 약정서에 서명하였다. 경제운영은 IMF체제로 넘어 갔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IMF는 고환율, 고금리 정책을 썼다. 이듬해 5월 1만 5000개 이상의 기업이 부도를 냈고, 정상기업의 조업률도 60%이하로 떨어졌다. 구제금융과 외환사정 호전의 대가로서는 너무나 가혹했다. 고금리는 기업들에게 노동자의 임금삭감, 정리해고 등을 강요했다. 많은 사람들이 빈곤으로 빠져들었고, 한국의 알짜배기 기업과 부동산이 헐값에 매각되었다. 서방의 투기꾼들과 금융자본들은 천문학적 이익을 챙겼다. IMF는 아시아에서 자본의 흐름에 걸리는 울퉁불퉁한 홈들을 매끈하게 대패질했다. 1998~1999년 국제결제은행(BIS)이 870억 달러, 2002년에 2000억 달러로 흑자의 정점을 기록하는 동안 아시아 국가들은 천문학적 적자를 기록했다. 흑자의 대부분은 미 재무부 채권을 구입하는 형태로 미국으로 흘러갔다. 미국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고, 유일 강대국의 지위를 지탱하는 구조는 그러했다. 전쟁에서 패한 북제의 황제가 북주 수도인 장안의 승전 개선식에 개처럼 끌려왔다(577년). 높은 단위에 그를 꿇어 앉혔다. 형리가 칼에 물을 적시고 칼날이 번뜩했다. 사람들은 땅에 떨어진 머리를 보면서 북제가 멸망한 것을 실감했다. 그동안 돌궐은 분열된 북중국의 정세를 이용하여 양자로부터 엄청난 비단을 착취해 왔다. 북중국이 하나가 되면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다. 북주의 남쪽 양자강남에 진(陳)이라는 나라가 있었지만 약체였다. 세계는 돌궐과 북주 양극 체제로 굳어졌다. 외척이었던 양견(수문제)이 북주의 실권을 잡았다. 그는 돌궐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이란의 페르시아에서 만주의 고구려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공작을 개시했다. "당신들이 돌궐을 격파하는 데 일조를 한다면 비단교역에 대한 독점권을 주겠소." 페르시아는 서방에서, 고구려는 동방에서 비단교역의 중간차액을 가질 터였다. 양견이 왕위를 찬탈하고 수나라를 세웠다(582년). 돌궐은 침공의 빌미를 잡았다. 이쉬바라칸을 비롯한 5명의 칸은 40만의 기병을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었다. 10월에 가서 전황은 불리해졌다. 동에서 고보령이 북경을 위협하고, 서에서는 타르두칸이 공격해왔다. 12월 홍화에서 방어하던 수군이 패하고 난주가 함락되었다. 수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수도권인 관중지역까지 위협받는 심각한 사태에 이르렀다. | | |
| 비단을 교역 무기로 사용했던 수나라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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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대외공작 대대적 성공
그런데 서돌궐의 주력을 이룬 타르두칸이 본거지로 철수했고, 동돌궐의 이쉬바라칸 역시 사막 이북으로 귀환했다. 그 까닭은 이란의 사산조 페르시아가 서돌궐의 본거지를 공격해 왔고, 동방의 고구려가 동돌궐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휘하에 말갈 기병단이 언덕의 초원인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을 넘었다. 고구려는 이번 기회에 거란과 말갈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려고 했다. 돌궐은 초원에서 고구려의 구역을 끊임없이 잠식해왔다. 고구려가 동돌궐 이계찰의 기병을 격파했다('수서').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상대로 한 수의 방대한 대외공작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돌궐을 공격한 나라들의 공통점이 있었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돌궐이 동로마제국과 비단을 직교역하면서 중간 이익을 상실하고 재정이 바닥을 쳤다. 고구려는 돌궐이 중국의 비단을 거의 독식하면서 교역에서 거의 제외되었다.
583년 돌궐이 약화되자 복속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초원에 기근이 겹쳤다. 수는 돌궐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4월에 백도천에서 이쉬바라칸을 크게 무찌르고, 나아가 585년에 돌궐칸들의 내분에 개입했다. 북방의 문제를 해결한 수문제는 남조 진(陳)을 성공적으로 병합해 통일을 이뤘다(589년). 수는 후한 말 이후 근 400년간 지속된 분열을 종식시켰다. 수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한 강대국이 되었다.
수는 비단의 흐름을 방해하는 주변 나라들에 대한 정리에 들어갔다. 실크로드의 요충지를 지배하던 토욕혼이 수군에 의해 정복되었고, 타림분지가 그 수중으로 들어갔다. 아들 수양제가 서역의 왕들을 장안에 초대했다(610년). 1개월에 걸친 축제가 있었다. 밤늦도록 불을 환하게 밝히는 가운데 풍악이 울렸고, 성대한 볼거리가 제공되었다. 중국의 풍부함을 과시하게 위해 많은 가로수에 비단을 휘감았다('자치통감'). 더 많은 서역상인들을 유치하기 위한 홍보는 성공했다.
더 풍부한 서역의 물산이 중국으로 유입되었고, 수 왕실의 재정은 풍요해지고 있었다. 역대 중국의 어느 왕조 보다 수나라는 부유했다. 중국 비단은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현재 달러화 같은 역할을 했다. 비단에 대한 수요가 지속되는 한 수나라의 영화는 지속될 것 같았다.
석유거래를 오로지 달러화로만 결제하도록 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 석유수입에 의존하는 나라들이 달러화를 필요로 하는 한 미국의 무역 위상이 약화되는 것을 막아 준다. 적자를 달러화 발행으로 보충해온 미국에게 후세인이 도전했다. 그는 "앞으로 이라크 원유 결제통화를 달러화에서 유로화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2000년). 이란과 인도네시아 등이 동조할 움직임을 보였다. 2003년 3월 이라크를 침공,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미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석유수출 결제대금의 달러화 환원이었다.
비단과 달러에 대한 반란
수가 예전의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고구려가 도전했다. 비단의 최대 산지인 하북평원과 인접한 요서에 군사적인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그 지역은 과거 북제지역으로 북주를 계승한 수에 반감이 많은 곳이라 이런 위협은 무척 민감한 사안이었다. 수왕조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지만 정작 비단을 생산하는 하북평원의 사람들은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고구려에 고용된 말갈기병들의 습격이 지속되었고, 고구려 간첩들이 암약하면서 유언비어를 퍼트렸다('수서').
나아가 고구려는 수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돌궐에 접근하여 곡물을 주고 전마를 받아갔다. 만주의 곡물은 돌궐을 부흥시킬 가능성을 높이고, 몽골 말은 고구려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 터였다. 612년 수가 고구려를 침공했다. 하지만 결과는 재앙이었다. 30만이 전사했고, 고구려는 그들의 뼈를 모아 승전 기념탑을 만들었다('삼국사기'). 살아 돌아온 극소수의 병사들이 수나라 전역에 공포의 씨앗을 뿌렸다. 수의 무능이 만천하에 증명되었고, 고구려 침공에 가장 많은 물자와 노역을 부담한 하북에 반란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달러화에 대한 반란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란이 석유 수출대금을 유로화로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2007년). 시리아가 그 뒤를 이었고, 베네수엘라도 호응하고 있다. 중국·러시아도 자국 통화로 달러를 대체하려고 한다. 달러화 약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의 중앙은행들이 유로화 매입에 적극 나섰다. 돈놀이꾼 미국의 깡패 주먹이 약해진 것을 직감한 것이다. 미국은 순조롭게 이라크를 접수했지만 게릴라들의 저항으로 전쟁은 끝없는 늪에 빠졌다. 미국의 군사력이 한계를 드러냈고, 부동산 시장에 위기가 닥쳐와 미국 금융기업에 치명타를 날렸다.
중국의 비단과 미국의 달러는 성격이 다르다. 비단은 사용가치가 있지만 달러는 교환의 종이증서일 뿐이다. 하지만 유통과 그 가치에 있어 유사한 점도 있다. 중국비단의 원활한 유통은 실크로드를 장악할 수 있는 수나라의 무력을 필요로 했고, 1971년 금본위제가 종식된 후 달러화의 가치란 아브람스 탱크, F16 전투기와 핵무기에 뒷받침 되었다. 유로를 통한 원유 거래가 늘어나면 달러는 폭락할 것이고 미국의 지배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다. 그 변화가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 두렵다.
<19> 곡물전쟁 탐욕으로 왜곡된 시장, 기아와 폭동의 원흉이다 전근대의 굶주림은 식량의 절대부족과 지배층의 수탈때문이었다 먹을것이 넘쳐나는 지금 기아의 원인은 곡물회사의 매점매석이다 이들의 욕심은 지난 8년간 1200만명을 아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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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5일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 빈민가 주민들이 구호물품 배급 도중 유엔 소속 군인과 거친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국제신문DB | | "식량 가격이 춤출 때 곡물관련 금융상품 투자자들은 돈을 벌어 싱글벙글 웃습니다. 하지만 최빈국의 하층민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어느 중남미 전문가의 지적이다. 날개를 단 식량 가격이 더욱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보리값은 3월까지 무려 130%나 올랐다. 쌀은 74%, 옥수수는 31%, 콩은 87%나 값이 뛰었다. 곡물 가격 급등은 시장경제 원리인 수요·공급의 법칙으로는 해석하기 어렵다. 한해 사이에 쌀·밀 등의 가격이 두 배 가까이 치솟을 정도로 식량 생산이 감소하거나 인구가 급증하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전 세계 식량 수급에 불균형이 발생하고는 있다. 하지만 단기간에 전 세계를 식량전쟁으로 몰아넣는 것은 세계 곡물메이저들의 매점매석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카길, 아처 대니얼 미들랜드, 프랑스의 루이 드레퓌스, 브라질의 벙기, 스위스의 가낙 등 5대사들이 세계 곡물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다. 지난 4월 초 한주 동안 아이티에서는 식량 폭동으로 유엔군 장교 한 명을 포함해 7명이 숨졌다. 치안유지군으로 아이티에 파견된 나이지리아 출신의 장교는 성난 군중들에 의해 차에서 끌려나와 살해됐다. 배고픔에 지친 아이티인들은 대통령궁을 에워싸는 등 주요 도시의 거리로 몰려 나와 시위를 벌여, 폭동 확산을 막는 9000명의 유엔군과 충돌이 잇따르고 있는 실정이다. 실업난과 식량 수입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는 금방 해결될 수 없다. 소요는 계속될 것이며, 폭동은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다. 올 2월 카메룬에서 폭동으로 40명이 사망한 데 이어 이집트에서도 식료품 폭동으로 4명이 숨졌다. 필리핀 모리타니아 소말리아 모잠비크 세네갈 예멘 인도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에서도 치솟는 식료품 값에 항의하는 주민들의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주요 식량의 세계적 가격 폭등은 극빈국가의 소비자에게 재앙이 되고 있다. 아프리카의 경우 인구 거의 모두에게 식량 구입비는 전체 가계 예산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한다. 식량 생산자인 농민에게 굶주림은 언제나 있었던 것이었고, 그것이 폭동으로 번지는 것은 역사상 흔한 일이었다. 가혹한 세금 포탈에 농민들 적개심 신라의 상주(사벌주)에서 원종과 애노가 조세를 독촉하던 촌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889년). 둘이 이끄는 농민반란군과 촌주 우련과 그 수하들이 들판에서 대치했다. 농민반란군들은 훈련을 받은 자들이 아니었으며, 무장이 잘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살기가 있었다. 그들을 가혹하게 수탈해오던 촌주 우련과 그들의 수하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올랐다. 거의 바닥이 난 식량으로 세금을 내고 굶어서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촌주 측의 진영에 중앙정부에서 파견되어온 영기라는 자가 있었다. 무관이라고 하지만 군대를 지휘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왕경 귀족들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와 예절에 대한 섬세한 교양을 겸비했을 뿐이었다. 그는 농민군이 세운 보루를 보고 기세에 눌려 감히 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촌주 우련이 그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용감하게 돌격했다. 상전을 몰라보는 괘씸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은 증오에 찬 기세로 달려드는 농민들의 손에 걸려 최후를 맞이했다. 그날 농민들은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당시 촌주계층들은 지역사람들을 조직적으로 빨아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였다. 농민들은 국가에는 현물을 납부했고, 촌주 층에게는 노동으로 세금을 대신했다. 농민들은 의무적으로 촌주와 그의 수하들의 개인 땅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그들은 아무런 식사도 제공받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다. 형편이 나은 자들은 약간의 먹을 것을 싸가지고 올 수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그것도 어려웠다. 촌주의 집에 특별한 행사가 있으면 약간의 식사를 대접받을 수도 있었지만 들판에 몰아치는 차가운 바람과 어깨를 찔러대는 무거운 쟁기의 고통을 보상해 주지 못했다. 농민들은 의무노동시간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나는 수확철에는 따가운 햇빛 아래 10시간 이상의 일을 해야 했다. 일이 끝나면 농민들은 어둑어둑한 황혼 속에서 귀가했다. 집에 도착하면 한밤중이었다. 초가집 좁은 방에서 식구들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쓰러져 잠이 들었다. 예고된 죽음이 항상 농민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는 아버지의 절뚝거리는 다리에도 어머니의 기형이 된 등에도, 나이 서른이 되어 삭아버린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도 깃들여 있었다. 대부분 농민들은 뼈 빠지게 일하다가 대개 사십 이전에 죽었다. 그것은 매일 아침 신라의 아늑한 하늘에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확실한 일이었다. 신라에서 거듭된 흉작이 수년 동안 이어지는 가운데 신라의 모든 농민들은 희망을 잃었다. 반란이 일어난 원인이 흉작 하나만은 아니었다. 기근은 1000년 신라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정부가 힘이 있다면 농민들의 반란은 쉽게 진압되었고, 멀리 확산될 수도 없었다. 당시 농민들은 중앙정부가 힘을 잃고 있다는 점을 직감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식량난에 무너지는 정부 836년에서 839년까지 지속된 왕족사이의 유혈투쟁은 지방세력의 성장을 가져왔다. 통일기에 만들어 놓은 지방통제 시스템은 붕괴되었고, 중앙정부는 지방 촌주세력을 적극적으로 견제할 수 없었다. 촌주들은 지방 농민들을 수탈하여 일부를 중앙에 바치고 나머지를 차지하는 중간 착취자였다. 중앙정부는 이를 알면서도 그들과 공존했다. 당시 신라정부는 촌주들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있었다. 만성적인 식량난에 빠져 있는 북한도 지방에 대한 통제를 어느 정도 포기하고 있다. 군 또는 면 단위의 협동농장이나 공장 등이 자급자족적 체제를 갖추었다. "중앙의 보급에 기대지 말자"라는 선전 선동구호가 등장했다. 당과 보위부 등 권력기관의 비호 아래 그들은 식량 암거래를 하고 있으며, 그 규모도 확대되고 있다. 체제를 지탱해온 군대도 식량난으로 규율이 무너지고 있다. 군인들이 민가나 그 논밭 수확물을 도둑질하고, 심지어 약탈까지 자행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공직사회에서 이권개입, 횡령, 뇌물수수가 만연하고 있다. 영기라는 자는 싸우지도 않고 도망을 쳤다. 진성여왕과 중앙정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직무를 유기한 영기를 참수하는 일밖에 없었다. 농민반란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파국에 이르자 최치원은 시무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감이 없는 한 먹물의 부르짖음에 불과했다. 원종과 애노는 이제 무서울 것이 없어졌다. 상주의 관하와 촌주창고의 식량이 약탈되었고, 농민들은 그것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바닥이 났다. 약탈의 맛을 본 농민들은 귀농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이제 할 수가 없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식량을 얻는 수단은 약탈이었다. 원종과 애노 등이 이끄는 집단은 상주와 가까운 지역을 약탈해 식량을 확보했다. 약탈을 당한 지역의 사람들도 유민이 되었고, 그들도 다른 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졌다. 습격하고 습격당하는 악순환이 거듭 되었다. 그럴수록 유민의 숫자는 불어갔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해도 다른 유민들의 약탈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냥 앉아서 굶어죽거나 유민이 되어 약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최치원의 글이 '동문선'에 실려있다. "흉년이 들어 도둑이 사방에서 일어나 늑대와 이리의 탐욕을 부리고 있습니다. 성을 파괴하고, 고을을 노략질하니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군과 읍이 모두 도적 떼의 소굴이 되었고, 산천이 모두 전쟁터입니다." "농민반란군이 당을 이루어 광기를 뿜고 있습니다. 관할하는 전국(구주 백군)이 모두 노략질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사람 죽이기를 마(麻)를 베는 것처럼 하고 내던져진 해골은 숲처럼 쌓였습니다. 만행의 불꽃은 바람같이 거세어 신라는 병든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기록은 무정부 상태의 일상생활의 세세한 광경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버려진 시골의 농가에는 바람에 삐거덕거리는 문소리, 가뭄에 농가의 초가지붕이 햇빛에 메말라 바람에 흩어지는 소리, 삽으로 굶어죽은 자식의 무덤을 팔 때 철퍼덕 떨어지는 흙 소리, 부모를 잃은 고아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울음소리, 부인들이 남편의 방에서 납치되고, 심지어 여승들과 어린아이들이 능욕을 당할 때 절규하는 소리는 언급하지 않았다. 농민들 패거리는 서로를 죽이고 약탈했다. 그들은 절도범, 강도, 깡패들이 벌이는 하수구 싸움을 했다. 심장부인 왕경에서도 사람들은 강도를 당하거나 죽음을 당했으며, 모든 죄악이 제멋대로 횡행했다. 단 한 가지 법칙만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바로 칼의 법칙이었다. 무정부상태의 두려움은 인간관계를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두려움 때문에 서로 적이 되고 고립되었다. 식량이 반란군의 지도자를 만들어냈고, 그 식량을 확보할 능력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용서라는 것을 몰랐다. 그들 스스로 치켜세웠던 사람을 사정없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버렸다. 원종과 애노도 자신의 굶주린 부하들의 손에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근대의 생산 능력은 보잘 것 없었다. 곡물은 항상 부족했고, 자연적 재앙과 기아는 구분이 없었다. 정부의 힘이 약화되면 기근은 무정부상태를 부르기도 했다. 현재 세계의 곡물 생산능력은 전 세계 인구 두 배인 120억 명이 먹고 남을 정도로 풍족하다. 하지만 가격의 벽에 부딪쳐 곡물시장을 이용하기 힘든 나라의 사람들(8억 5000명)이 기아선상에 있고, 2000년 이후 굶어죽은 사람이 1200만 명이다. 곡물메이저 회사들에게 더 많은 굶주림은 더 막대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이다. 향후 곡물자본의 농간으로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한다면 무정부 상태가 도래할 나라들이 생기지 않는다고 보장 할 수 없다. 곡물메이저에게 장악된 시장이 치명적인 독을 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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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거란이 만든 1000년 전 WTO 곡물메이저들 UR협상 등 개입 국제 농산물값 떡 주무르듯 조작 세 치 혀로 거란 막았던 서희 장군 실상은 그들의 책략에 말려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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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12일 중국 랴오둥 반도 남단도시 다롄(大連)에서 열린 WTO(세계무역기구) 비공식 장관급 회의. 농산품, 무역 서비스 자유무역에 관한 핵심 사안들이 심도있게 논의됐다. 그러나 실제 세계시장은 곡물 메이저같은 '보이지 않는 손'에 좌우될 때가 더 많다. 연합뉴스 | |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그 이듬해(1980년)였다. 시원한 여름을 보냈다. 하늘은 흐렸고, 비가 간간이 내렸다. 추석께 시골에 갔을 때 보았던, 논에 풀어놓았던 소가 기억이 난다. "행님아. 와 소가 논에서 벼이삭을 먹도록 놔 두노?" "저 벼는 쭉대기라 타작할 필요도 업는기라." 그해의 냉해로 벼농사가 대흉작을 기록했다. 우리 측은 미국 정부를 찾아가 최대한 쌀을 공급해 줄 것을 간청했다. 결국 1981년 한해에 도입한 쌀은 224만5000t(1559만 석)으로 당시 우리나라 쌀 생산량의 3분의1을 넘어섰다. 1979년 t당 240달러였던 쌀값이 두 배가 넘는 550달러까지 치솟았다. 세계적인 흉작이 든 1972년에는 이보다 더 심했다. 곡물메이저는 한국에 t당 200달러 하는 쌀을 661달러에 팔았다. 곡물메이저가 담합해 곡물 값 폭등을 조장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1972년 세계 곡물생산량이 약 3% 감소하자 쌀과 밀의 국제가격은 3배 이상 급등했다. 당시 미국의 곡물창고에 쌓여 있던 밀 재고분의 56%는 이미 곡물메이저들이 점유한 상태였다. 1973년 닉슨 정부가 100일 동안 콩 수출 중단조치를 내렸을 때도 국제가격이 4.6배나 뛰어올랐다. 그들은 창고에 콩 재고분의 91%를 쌓아두고 있었다. 1970년대의 식량파동을 경험한 세계 각국은 증산에 나섰고, 1980년대에 들어서 상당부분 식량자급을 달성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통일벼의 개발로 쌀을 자급하는 수준에 이미 도달했다. 국제 농산물 가격이 하락했다. 이러한 상황은 곡물메이저에게 위협이었다. 세계 식량 시장을 뒤흔드는 곡물 마피아 | | | 곡물메이저들은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당시부터 WTO(세계무역기구) 체제하 국제농산물 자유무역에 깊숙이 개입했다. 1993년 12월에 타결된 UR 협상을 통해 이뤄진 농산물의 무역자유화를 뒤에서 조정한 것이 바로 이들이다. 예컨대, 1986년 미국이 내놓은 농산물 자유무역안을 실질적으로 작성한 사람은 카길(CARGILL)사의 부회장인 대니얼 암스테드였다. 그를 실무책임자로 한 국제농산물 교역질서 개편 기도는 UR 협상이 타결되기 10여 년 전인 1983년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농업협상에서는 아예 카길이 미국측 의견서를 작성했다. 곡물메이저는 미국 정부뿐 아니라 세계 농업정책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세계 곡물시장이 WTO 협정 등 국제사회의 규범과 질서보다는 곡물메이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문제는 1990년대 들어 곡물 수입국들 사이에 민영화 바람이 불면서 수요자는 분산되고 있는 반면, 곡물메이저들은 오히려 인수와 합병 등을 통해 몸집을 키우면서 시장지배력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농산물의 무역자유화를 더욱 확대해 제3세계 국가의 농업을 서서히 말살하고, 세계 곡물시장을 독점하려는 것이다. 이들은 '곡물 마피아'라 불릴 만큼 그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다. 특정국가에 요란하게 진입하지 않으며 진입해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자국 정부의 고차원적 곡물수출정책에 기생하거나 편승해서 독점적 폭리를 취하고, 국내외에 거미줄 같은 정보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공위성을 통해 밀 옥수수 쌀 등 세계 주요 농작물의 국가별 작황까지 수시로 파악하고 있다. 한국 내의 작황도 그들이 먼저 알고 있다. 거란군을 내려앉힌 귀주대첩 1000년 전 귀주성 앞 벌판에서 고려군과 거란군이 대진을 했다(1019년 2월 2일). 강감찬과 그의 병사들의 각오는 비장했다. 북소리가 빨라지면서 서로를 향해 돌격했다. 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유혈이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피를 뒤집어쓰고 싸우는 병사들의 광기어린 눈에는 생존에 대한 갈망밖에 없었다. 백중세 가운데 행운의 여신은 고려의 손을 들어주었다. 장군 김종현이 이끄는 1만의 고려원군이 나타났던 것이다. 거란군들은 당황했고 고려군은 환호했다. 바람마저 거란군을 향해 불었다. 흙먼지가 거란군의 눈에 들어갔다. 고려병사들에게 하늘은 자신들의 편이라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순식간에 거란군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려 기병은 추격을 했다. 거란군이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 광활한 평지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들이 산악 고려에서는 일어나고 있었다. 달아나는 거란군의 방향이 뻔했다. 거란의 장군 해리 고청명 아과달 작고 등이 여기서 전사했다. 고려를 오랜 세월(24년) 동안 괴롭혀 왔던 거란황제 친위부대는 이렇게 패배했다(귀주대첩-3차 거란전쟁). 처음 전쟁은 치열하지는 않았다. 담판으로 끝나기도 했다. 993년 청천강의 부근의 천막에서였다. 거기에 고려의 서희와 거란의 장군 소손영이 앉아있었다. 정막이 흘렀다. 서희가 의례적인 인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소손영이 말했다. "당신들 말이요. 송나라와 교역량이 거대하다고 들었소. 그런데 우리와는 왜 교역에 그렇게 인색하시오?" 서희가 대답했다.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 아니오. 사실 우리 고려는 당신들에게 사올 것이 없어요. 유목민인 당신들이 생산하는 가축들이 있지만 그것은 동북만주에 있는 여진인들에게 구입하면 되고, 비단과 자기는 송에서 가져오면 되지요. 소장군! 그러지 말고 이야기의 핵심을 말하시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나도 짐작하고 있소이다." "음, 서 장군. 지금 우리가 송나라와 전쟁 중이라는 것 아시지요?" "예. 나는 송에 직접 가서 황제를 만난 적도 있소." "그러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아시겠군요. 여진은 지금 말의 최대 수출국이오. 우리도 매년 말 1만 필을 여진에서 들여오고 있지요. 그런데 여진놈들이 우리에게만 말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오. 송에 매년 대량의 말을 수출하고 있어요. 그 말들은 송나라 기병 육성에 핵심이 되고 있어요." "잘 알고 있습니다. 여진 말은 압록강 입구를 통해서 산동의 등주로 수출되고 있지요. 그러니까 소 장군께서는 우리 고려가 압록강 입구까지 북진하여 이 부근에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기를 원하시는군요." "맞소. 압록강 이남의 땅은 고려의 것으로 인정해 주지요." 앞서 991년 거란은 압록강 부근에 위구 진화 내원 3개 성을 축조하였다. 특히 내원성의 축조는 전략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내원성은 압록강 건너편 평안북도 의주에 있었다. 의주 앞의 강가는 유속이 느려 토사가 퇴적하여 광범위한 범람원과 하중도가 형성되었다. 여러 개의 하중도들이 일종의 징검다리 구실을 하므로 물살은 더욱 느려지고, 수심은 얕아진다. 갈수기엔 도보로 건널 수도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은 여진의 대송 말무역의 최적의 도로였다. 거란의 책략에 넘어간 서희 소손영은 군사를 돌이켰다. 직후 거란황제의 허락을 받아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의 땅을 차지하는 데 동의하는 서신을 보내왔다. 서희는 994년부터 3년간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낸 뒤 흥화진, ·용주·통주·철주·구주·곽주 등의 강동6주에 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로 편입했다. 서희의 담판으로 거란군이 물러나고 고려는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이는 우리 국사교과서에도 서희의 성공적인 외교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거란의 전술가들의 책략에 넘어간 것이었다. 강화 체결 후, 거란은 의주(내원성)를 확실하게 확보하게 되었고, 고려·송 사이의 공무역을 단절시켰다. 이로써 말이 송나라로 들어가는 모든 길이 막혔고, 송의 기병전력에 치명상을 주었다. 이제 거란은 송에게 두려운 강적이었다. 화북평야 중앙, 송의 수도 개봉과 거란의 국경 사이에는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란 평야뿐이며 거란의 기병을 방어할 수 있는 자연장애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1004년 거란군이 하북성을 남하해 송이 건설한 소택지의 방어시설을 깨고 황하의 북안에 도달했다. 송 조정은 거란기병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수도를 현 개봉에서 양자강남으로 옮기자는 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재상 구준의 의견에 따라 사기를 고무시키고자 송군은 황하를 건넜다. 저항의 의지를 보이면서 사절을 거란군 진영에 보냈다. 협상이 성립돼 송이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량을 거란에 증여하는 조건으로 거란군이 물러갔다. 매년 막대한 돈이 거란으로 들어갔고, 그것은 거란의 경제발전과 군비증강의 자양분이 되었다. 송이 증여한 돈을 받은 거란은 그것을 고려침공의 비용으로 사용했다. 전쟁의 목적은 송과 고려의 교섭을 완전히 근절하는 것이었다. 1010년 거란의 성종은 40만 대군으로 통주부근에서 고려의 주력을 대파했고, 수도 개경까지 쳐들어가 철저히 유린했다(2차 거란전쟁). 그것은 송과의 무역을 단절하고 거란을 통해 송의 물품을 구입해 가라는 강력한 경고였다. 무역전쟁이었다. 거란은 고려·송·여진 삼국의 교역로를 거란의 초원교역로에 편입시켜, 중계무역 차익을 얻어내고자 했다. 자본의 지배는 영원하다 거란에 무력으로 눌린 송은 웅주·패주·안숙군·광신군의 하북 4곳에 시장을 개방했고, 거란은 신성·역주·삭주 3곳에 시장을 설치했다. 송나라 상인들은 고려행의 공빙(公憑)을 받아 중간에 거란으로 방향을 돌리는 불법을 감행하면서까지 거란무역에 열을 올렸다. 매년 송에서 거란으로 들어오는 거액의 비단과 돈은 상인들을 유혹했다(20만 냥, 비단 30만 필로 증가됨). 현재 식량 원유 원자재와 같은 자원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곡물메이저들이 맹활약할 수 있는 무대가 제공되는 근본적 배경에는 WTO 체제가 있다. 거기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세계 각국이 처한 현실이다. 자유무역에 기반을 둔 수출산업이 수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는데, 만약 WTO의 규정을 어기면 그 나라의 수출산업이 파괴될 것이 뻔하다. 1000년 전 세 번째 전쟁에 승리했지만 고려는 거란의 돈과 비단에 굴복했고, 결국 그 교역권에 편입되었다. '요사'식화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남쪽 송과 서북의 초원에서 모든 부가 모였다. 동북의 고려 여진 철리에서 재화와 금 비단 베 꿀 밀랍과 모든 약재가 포함됐다. 말갈의 궐등부가 진주와 청설모 담비 아교를 가져와 소 양 낙타 말 털로 짠 그물과 바꾸어 갔다. 모든 도로가 요(거란)를 중심으로 끈처럼 엮여 있었다." 기존의 무역체계를 무너뜨린 거란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무역체계를 만들어냈다. 130여 년 전 칼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본의 세계 지배는 영원할 수도 있다. 자본은 끊임없이 진화할 것이고, 영향력을 행사하여 유리한 환경을 창출할 것이다. 1000년 전 거란이 만들어낸 무역체계는 그 나라가 망한 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게 계승되었고, 무력으로 고려에서 유럽까지 이어지는 교역망을 확보한 칭기즈칸과 그의 후손들이 세운 원제국에 의해 완성되었다. 원이 사라지자 고려도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