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를 탄압말고 국가경제 건설의 첨병으로 삼으십시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혁명이 성공했다. 그가 만든 국가최고재건회의가 국가를 장악하고 주요 기업인들을 부정 축재혐의로 구속시켰다. 이병철 회장은 일본 도쿄로 출장을 가 있는 중이었다. 여름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칠흑 같은 밤에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6월 26일). 이병철은 정부에서 보낸 지프에 올랐고, 명동의 어느 호텔에 감금상태로 지냈다. 이틀 후 어디론가 이동했다. 100여 평이 되는 넓은 방으로 갔다. 선글라스를 낀 작은 남자가 들어왔다. "고생은 되지 않았습니까?" 이병철과 박정희의 첫 대면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부정 축재자라로 몰아붙여 구금한 기업인 11명의 처벌에 대하여 물었다. 이병철로서는 곤란한 질문이었다. 자신이 그 1호가 아닌가. "기탄없이 말해 주시오." "기업을 경영하는 처지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업인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들은 탈세라는 죄목으로 부정축재자로 지목 되었습니다. 전시비상사태하에 만들어진 현행 세법대로 납부했다가는 기업이 모두 도산했을 것입니다. 기업인을 처벌한다면 경제가 위축되고 당장 세수가 줄어 국가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경제인들을 국가건설의 주도자로 삼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됩니다."
박정희는 여기서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경제를 모르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으며, 기업인들을 경제개발의 견인차로 이용하는 것이 빈곤을 몰아내는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1961년 한국은 현재 인도보다 더 가난했다. 농촌에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아이가 없었고, 세 끼 밥을 먹는 사람은 10명 중 한 명 이었다.
이병철은 한국경제인협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이 되었다. 부회장단은 전문적인 식견이 있는 경제인들로 구성하였다. 이병철은 자신이 먼저 경제 발전방향과 전략을 만들어 군사정부에 제시했다. 그는 매주 한 번 부회장단들과 함께 박정희와 만나 '기간산업 건설기획안'을 브리핑했다. 박정희는 내심 감탄했다. 계획에 타당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실천이 된다면 경제건설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외국에 투자를 받아야 한국경제가 회생할 수 있었다. 이병철은 외자유치에 나섰고, 정부는 지급을 보증해주기로 했다. 적어도 13억 달러는 외자로 충당해야 한다. 기업인들이 유럽 미국으로 출발했다(1961년 11월). 독일에서 금성사가 420만 달러, 한일시멘트가 581만 달러, 쌍용이 695만 달러, 상공부가 3750만 달러의 차관을 들여왔다. 미국의 투자협상단이 한국의 울산공업 예정지역을 시찰했고, 이병철 회장과 밴프리 단장의 투자공동성명서 발표가 있었다. 이병철은 한국의 기간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오늘날 자동차 중공업 석유화학 전자산업의 시작은 이러했다. 박정희는 이병철을 통해 한국 경제개발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고, 기업인들의 힘을 모아 오늘날 한국을 만들어냈다.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신라왕이 어느 상인을 불러들여 나라의 앞날에 대하여 논의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828년 4월 '삼국사기'). 당시 중국의 동해안에는 중국정부로부터 거의 독립적인 '번진'이라는 지방정권들이 산재해 있었다. 중국으로 건너간 완도의 소년 장보고는 서주의 무녕군에 용병이 되었고, 많은 공을 세워 고급 장교가 되었다. 제대를 한 후 재중국 신라상인들의 상업망을 조직하여 중국시장은 물론 일본과 교역하여 부유한 상인이 되었다. 그는 해적이 들끓는 해상에서 무장교역을 했다. 무력이 없이는 장사도 할 수 없는 시대였다. 신라의 해안도 마찬가지였다.
흥덕왕(826~836)이 말했다. "지금 우리 서남해안에는 해적들이 창궐하고 있소, 그들은 백성들을 잡아가 중국의 노예시장에서 판매하고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장보고가 대답했다. "저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신라노(新羅奴)라 하여 노예시장에서 비싼 가격으로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백성들이 유출이 되면 국가의 세수에 큰 타격을 주게 되지요."
"하지만 해적들을 근절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소. 지금 우리 신라 경제의 근간인 진골귀족 39개 가문은 파산 직전이 있어요. 국왕인 나도 자금이 없어 해적을 소탕할 수 있는 군대를 양성할 수가 없소."
"상인들이 해상교역을 하다가 돈이 되지 않자 해적이 되어 거부를 모았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해적들이란 국적이 없는 집단이며, 상인과 구별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약탈은 신라 당나라 일본 배를 가리지 않으며, 장물을 시장에 보란 듯이 내다 팔고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신라 서남해안에 있는 군소 해상업자들이 해적들과 손을 잡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흉년에 유랑하는 백성들을 중국으로 보내주겠다 하고 배에 태워 노예시장에 넘기고 있습니다. 해답은 한 가지입니다. 저에게 완도에 해군기지와 상업기지를 세울 수 있게 허가를 내주셔야 합니다."
"해적을 소탕할 병권과 무역권을 주십시오 왕에겐 세금을 나라엔 번영을 안기겠습니다"
흥덕왕의 입에 엷은 미소가 번져나갔다. 장보고의 건의가 현실적으로 타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적을 근절할 수 있는 길이 보였고, 자신에게 별도의 수익이 발생한다는데 흥미를 가졌다.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한 흥덕왕은 도덕적 비난에 시달렸고, 그의 재위시절 신라의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근친왕족들의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흥덕왕의 왕위가 위태로웠다.
신라가 백제를 통합한 후 구 백제지역은 39개 진골귀족의 각 가문에 분할 분배되었다. 진골귀족들은 충청도나 전라도 지역에 있는 그들의 영지에서 생산되는 수익을 강과 바다를 통해 배로 울산에 집결시켜 왕경으로 운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적이 창궐하자 진골귀족들의 수익이 왕경으로 들어오는 길이 막혔다. 유통이 마비되자 진골귀족 각 가문이 거주하는 왕경은 극심한 불경기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진골귀족 회의체인 화백은 장보고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완도에 해군기지(청해진)를 설치할 수 있는 공식 인가가 떨어진 것이다. 장보고는 해안의 사정에 밝은 완도와 그 주변의 섬사람들을 징발해 군사 훈련을 시켰고, 전함이 건조되었다. 해군력으로만 부족했다. 해적들을 바다로 끌어내는데 배후에서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기동력이 필요했다. 서남해안의 섬에는 말을 키우는 진골귀족들의 목장이 많았다. 말을 키우던 목동들을 차출하여 기병을 만들었다. 장보고도 어린 시절 완도에서 목동생활을 했고, 용병시절 창기병을 통솔한 경험이 있다. 중국 서주에서 말을 타고 창을 사용하는데 장보고를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번천문집').
장보고는 노예무역의 주범인 서남해안 일대의 군소 해상세력가들을 일소했다. 중국 측 기록에 "태화(太和) 연간(827~835)으로부터는 해상에서 신라인들을 잡아가는 자가 없게 되었다"라고 돼 있다('신당서').
해상의 안전은 진골귀족들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익의 운반을 보장했다. 신라왕국은 호황에 접어들었다. 장보고의 무역선단도 바빠졌다. 원산지가 타슈겐트 지방 아랄해 동안인 슬슬(瑟瑟), 페르시아의 양탄자, 캄보디아산 비취모(翡翠毛), 보르네오·자바산 대모(玳瑁), 자바·수마트라산 자단(紫檀), 캄파가 주산지인 침향 등 외래 사치품이 신라 귀족사회를 휩쓸었다.
장보고가 군대를 유지하는데 있어 말(馬)과 곡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말의 구입처는 완도 앞의 다도해에 있는 진골귀족들의 목장이었고, 곡물의 구입처는 충청도 전라도에 산재한 진골귀족 영지였다. 울산으로 향하던 진골귀족들의 배에는 곡물이 실려 있었고, 완도(청해진)에서 외래사치품과 교환되었다. 교역에 시동이 걸리자 막대한 이윤이 창출되었고, 장보고는 군대를 스스로 부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병철은 빈곤을 퇴치할 수 있는 길을 박정희에게 알려주었고, 한국의 산업화를 이끄는 견인차가 되었다. 장보고는 해적을 퇴치하여 익사상태에 있던 신라 유통경제를 회생시켰다. 이병철이 박정희의 지원 아래 기업가들을 결집하고, 외국자본을 투자받아 기간산업을 세웠다면 장보고는 서남해안에 질서를 보장하는 군대를 재중국 신라인들의 투자를 받아 만들어 냈다.
두 사람은 오늘날 우리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축소 재생산의 길을 걸었던 국가의 경제를 확대재생산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병철은 기업가를 부정축재자로 몰아 처벌하려고 했던 박정희를 설득했다. 나아가 기업가들 조직화하여 국가산업을 일으키고 경영하는 주체로 만들어 놓았다. 오늘날 한국경제의 근간이 되는 대기업은 이때에 자리를 잡았다. 외자를 유치하여 만들어낸 기업들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이익을 내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거액의 세금을 납부하여 교육 도로항만시설 국방 정부운영을 뒷받침했다.
대외무역의 길을 확대시킨 장보고는 재중국 신라상인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진골귀족들을 생산의 주체로 변신시켰다. 유통이 보장되어야 시장이 확대되고 생산이 증대한다. 진골귀족들은 장보고가 중국에서 수입해온 외래사치품의 최대소비자였지만 동시에 장보고가 일본에 수출하는 물품의 생산자이기도 했다. 진골귀족의 39개 각 가문은 거대한 가정기관을 가지고 있었다. 왕실에 비견되는 수공업공장인 공방(工房)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막대한 생산품은 장보고 상단에 의해 일본시장에 수출되었다. 신라상품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본산 비단 솜과 실이 신라에 대거 유입되었다. 장보고 진골귀족 백성들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다. 왕경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으며, 민간에서도 기와로 지붕을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 신라의 번영은('삼국사기') 이로써 구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