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최영교_전쟁과 시장_03

醉月 2011. 3. 16. 03:45
<11> 장보고와 이병철
한국과 신라는 어떻게 확대재생산의 길로 들어섰나

    故 이병철 회장-삼성 창업주 이병철은 박정희를 설득했다

 

"기업가를 탄압말고 국가경제 건설의 첨병으로 삼으십시오"
"오늘날 대한민국이 혼란한 근본적인 원인은 국민의 빈곤에 있으며, 경제인을 처벌하여 경제가 위축된다면 빈곤을 추방할 수 없습니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일본에서 5·16 군사정권에게 보낸 메시지였다(1961년 6월 11일).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혁명이 성공했다. 그가 만든 국가최고재건회의가 국가를 장악하고 주요 기업인들을 부정 축재혐의로 구속시켰다. 이병철 회장은 일본 도쿄로 출장을 가 있는 중이었다. 여름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칠흑 같은 밤에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6월 26일). 이병철은 정부에서 보낸 지프에 올랐고, 명동의 어느 호텔에 감금상태로 지냈다. 이틀 후 어디론가 이동했다. 100여 평이 되는 넓은 방으로 갔다. 선글라스를 낀 작은 남자가 들어왔다. "고생은 되지 않았습니까?" 이병철과 박정희의 첫 대면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부정 축재자라로 몰아붙여 구금한 기업인 11명의 처벌에 대하여 물었다. 이병철로서는 곤란한 질문이었다. 자신이 그 1호가 아닌가. "기탄없이 말해 주시오." "기업을 경영하는 처지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업인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들은 탈세라는 죄목으로 부정축재자로 지목 되었습니다. 전시비상사태하에 만들어진 현행 세법대로 납부했다가는 기업이 모두 도산했을 것입니다. 기업인을 처벌한다면 경제가 위축되고 당장 세수가 줄어 국가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경제인들을 국가건설의 주도자로 삼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됩니다."

박정희는 여기서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경제를 모르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으며, 기업인들을 경제개발의 견인차로 이용하는 것이 빈곤을 몰아내는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1961년 한국은 현재 인도보다 더 가난했다. 농촌에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아이가 없었고, 세 끼 밥을 먹는 사람은 10명 중 한 명 이었다.

이병철은 한국경제인협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이 되었다. 부회장단은 전문적인 식견이 있는 경제인들로 구성하였다. 이병철은 자신이 먼저 경제 발전방향과 전략을 만들어 군사정부에 제시했다. 그는 매주 한 번 부회장단들과 함께 박정희와 만나 '기간산업 건설기획안'을 브리핑했다. 박정희는 내심 감탄했다. 계획에 타당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실천이 된다면 경제건설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외국에 투자를 받아야 한국경제가 회생할 수 있었다. 이병철은 외자유치에 나섰고, 정부는 지급을 보증해주기로 했다. 적어도 13억 달러는 외자로 충당해야 한다. 기업인들이 유럽 미국으로 출발했다(1961년 11월). 독일에서 금성사가 420만 달러, 한일시멘트가 581만 달러, 쌍용이 695만 달러, 상공부가 3750만 달러의 차관을 들여왔다. 미국의 투자협상단이 한국의 울산공업 예정지역을 시찰했고, 이병철 회장과 밴프리 단장의 투자공동성명서 발표가 있었다. 이병철은 한국의 기간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오늘날 자동차 중공업 석유화학 전자산업의 시작은 이러했다. 박정희는 이병철을 통해 한국 경제개발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고, 기업인들의 힘을 모아 오늘날 한국을 만들어냈다.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신라왕이 어느 상인을 불러들여 나라의 앞날에 대하여 논의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828년 4월 '삼국사기'). 당시 중국의 동해안에는 중국정부로부터 거의 독립적인 '번진'이라는 지방정권들이 산재해 있었다. 중국으로 건너간 완도의 소년 장보고는 서주의 무녕군에 용병이 되었고, 많은 공을 세워 고급 장교가 되었다. 제대를 한 후 재중국 신라상인들의 상업망을 조직하여 중국시장은 물론 일본과 교역하여 부유한 상인이 되었다. 그는 해적이 들끓는 해상에서 무장교역을 했다. 무력이 없이는 장사도 할 수 없는 시대였다. 신라의 해안도 마찬가지였다.

흥덕왕(826~836)이 말했다. "지금 우리 서남해안에는 해적들이 창궐하고 있소, 그들은 백성들을 잡아가 중국의 노예시장에서 판매하고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장보고가 대답했다. "저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신라노(新羅奴)라 하여 노예시장에서 비싼 가격으로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백성들이 유출이 되면 국가의 세수에 큰 타격을 주게 되지요."

"하지만 해적들을 근절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소. 지금 우리 신라 경제의 근간인 진골귀족 39개 가문은 파산 직전이 있어요. 국왕인 나도 자금이 없어 해적을 소탕할 수 있는 군대를 양성할 수가 없소."

"상인들이 해상교역을 하다가 돈이 되지 않자 해적이 되어 거부를 모았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해적들이란 국적이 없는 집단이며, 상인과 구별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약탈은 신라 당나라 일본 배를 가리지 않으며, 장물을 시장에 보란 듯이 내다 팔고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신라 서남해안에 있는 군소 해상업자들이 해적들과 손을 잡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흉년에 유랑하는 백성들을 중국으로 보내주겠다 하고 배에 태워 노예시장에 넘기고 있습니다. 해답은 한 가지입니다. 저에게 완도에 해군기지와 상업기지를 세울 수 있게 허가를 내주셔야 합니다."

    장보고 초상화-해상왕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말했다

 

"해적을 소탕할 병권과 무역권을 주십시오 왕에겐 세금을 나라엔 번영을 안기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국왕인 내가 결정할 수 없소. 진골귀족회의 화백에 승인을 얻어야 하오. 그렇게 한들 어떻게 일개 개인의 자금으로 병력을 부양하고 전함을 건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장보고 자네가 부자이기는 하지만 그만한 자금은 없지 않은가?" "해적을 소탕하는 작업은 진골귀족들의 이익에 부합됩니다. 병력을 먹이고 전함을 건조할 자금은 재중국 신라상인들에게 투자를 받으면 됩니다. 그들은 신라와 일본 시장에 진출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현실화 하려면 신라에 해군기지이자 자유가 보장된 상업기지가 필요하고요." "장보고 당신이 원하는 조건은 뭐요?" "해적이 근절된 후 폐하께서는 대외무역의 창구를 저에게 일원화해주시면 됩니다. 물론 이익의 일부는 세금으로 폐하에게 상납하겠습니다."

흥덕왕의 입에 엷은 미소가 번져나갔다. 장보고의 건의가 현실적으로 타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적을 근절할 수 있는 길이 보였고, 자신에게 별도의 수익이 발생한다는데 흥미를 가졌다.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한 흥덕왕은 도덕적 비난에 시달렸고, 그의 재위시절 신라의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근친왕족들의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흥덕왕의 왕위가 위태로웠다.

신라가 백제를 통합한 후 구 백제지역은 39개 진골귀족의 각 가문에 분할 분배되었다. 진골귀족들은 충청도나 전라도 지역에 있는 그들의 영지에서 생산되는 수익을 강과 바다를 통해 배로 울산에 집결시켜 왕경으로 운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적이 창궐하자 진골귀족들의 수익이 왕경으로 들어오는 길이 막혔다. 유통이 마비되자 진골귀족 각 가문이 거주하는 왕경은 극심한 불경기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진골귀족 회의체인 화백은 장보고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완도에 해군기지(청해진)를 설치할 수 있는 공식 인가가 떨어진 것이다. 장보고는 해안의 사정에 밝은 완도와 그 주변의 섬사람들을 징발해 군사 훈련을 시켰고, 전함이 건조되었다. 해군력으로만 부족했다. 해적들을 바다로 끌어내는데 배후에서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기동력이 필요했다. 서남해안의 섬에는 말을 키우는 진골귀족들의 목장이 많았다. 말을 키우던 목동들을 차출하여 기병을 만들었다. 장보고도 어린 시절 완도에서 목동생활을 했고, 용병시절 창기병을 통솔한 경험이 있다. 중국 서주에서 말을 타고 창을 사용하는데 장보고를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번천문집').

장보고는 노예무역의 주범인 서남해안 일대의 군소 해상세력가들을 일소했다. 중국 측 기록에 "태화(太和) 연간(827~835)으로부터는 해상에서 신라인들을 잡아가는 자가 없게 되었다"라고 돼 있다('신당서').

해상의 안전은 진골귀족들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익의 운반을 보장했다. 신라왕국은 호황에 접어들었다. 장보고의 무역선단도 바빠졌다. 원산지가 타슈겐트 지방 아랄해 동안인 슬슬(瑟瑟), 페르시아의 양탄자, 캄보디아산 비취모(翡翠毛), 보르네오·자바산 대모(玳瑁), 자바·수마트라산 자단(紫檀), 캄파가 주산지인 침향 등 외래 사치품이 신라 귀족사회를 휩쓸었다.

장보고가 군대를 유지하는데 있어 말(馬)과 곡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말의 구입처는 완도 앞의 다도해에 있는 진골귀족들의 목장이었고, 곡물의 구입처는 충청도 전라도에 산재한 진골귀족 영지였다. 울산으로 향하던 진골귀족들의 배에는 곡물이 실려 있었고, 완도(청해진)에서 외래사치품과 교환되었다. 교역에 시동이 걸리자 막대한 이윤이 창출되었고, 장보고는 군대를 스스로 부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병철은 빈곤을 퇴치할 수 있는 길을 박정희에게 알려주었고, 한국의 산업화를 이끄는 견인차가 되었다. 장보고는 해적을 퇴치하여 익사상태에 있던 신라 유통경제를 회생시켰다. 이병철이 박정희의 지원 아래 기업가들을 결집하고, 외국자본을 투자받아 기간산업을 세웠다면 장보고는 서남해안에 질서를 보장하는 군대를 재중국 신라인들의 투자를 받아 만들어 냈다.

두 사람은 오늘날 우리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축소 재생산의 길을 걸었던 국가의 경제를 확대재생산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병철은 기업가를 부정축재자로 몰아 처벌하려고 했던 박정희를 설득했다. 나아가 기업가들 조직화하여 국가산업을 일으키고 경영하는 주체로 만들어 놓았다. 오늘날 한국경제의 근간이 되는 대기업은 이때에 자리를 잡았다. 외자를 유치하여 만들어낸 기업들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이익을 내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거액의 세금을 납부하여 교육 도로항만시설 국방 정부운영을 뒷받침했다.

대외무역의 길을 확대시킨 장보고는 재중국 신라상인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진골귀족들을 생산의 주체로 변신시켰다. 유통이 보장되어야 시장이 확대되고 생산이 증대한다. 진골귀족들은 장보고가 중국에서 수입해온 외래사치품의 최대소비자였지만 동시에 장보고가 일본에 수출하는 물품의 생산자이기도 했다. 진골귀족의 39개 각 가문은 거대한 가정기관을 가지고 있었다. 왕실에 비견되는 수공업공장인 공방(工房)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막대한 생산품은 장보고 상단에 의해 일본시장에 수출되었다. 신라상품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본산 비단 솜과 실이 신라에 대거 유입되었다. 장보고 진골귀족 백성들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다. 왕경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으며, 민간에서도 기와로 지붕을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 신라의 번영은('삼국사기') 이로써 구가되었다.

 

<12> 멈추지 않는 역사의 수레바퀴
한국과 티베트, 중국의 양끝에서 수천년 시소타기

    

 

지난 14일 티베트 라싸에서 티베트인들이 중국에서 분리·독립할 것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날 티베트인들은 중국 한족과 한족들의 사업장을 공격하며 폭력적인 시위를 벌였다. 최근의 티베트 사태는 실크로드를 사이에 두고 티베트와 중국이 벌여온 오랜 싸움의 증거이기도 하다. 연합뉴스

공산주의 정치와 자본주의 경제로 21세기 강대국을 지향해온 중국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종교의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는 티베트 승려들의 평화시위는 지난 15일 격렬하게 폭발했다. 중국군이 발포를 했고, 유혈사태로 번졌다.

49년 전 티베트의 독립봉기에서도 수만 명이 살해되었고,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몸을 피했다. 최근 10여 년간 중국은 티베트인들에게 인도에 망명해 있는 달라이 라마를 부정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중국은 최근 학생과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사상교육에 돌입했다. 무리한 정책은 수십 년간 억눌린 티베트인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속세를 떠난 승려들까지도 거리로 나왔다.

지난 18일 티베트의 수도 라싸의 주민들이 인터넷을 통해 전했다. "티베트는 비상계엄 상황입니다. 장갑차와 사병들이 탑승한 군용차들이 시내 주요 도로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시위대가 대피한 시내 주요 사원에 대해서는 병력이 이중 삼중으로 포위하고 있으며 주변 도로 곳곳에 검문소가 설치돼 무장경찰이 신분증과 여행허가증을 검사하고 있습니다. 중국군 1만 여명이 라싸 시내에 진입했으며 완전 무장한 시위 진압경찰 1000 여명이 장갑차의 지원을 받으며 가택수색을 벌이고 있습니다."


티베트군의 중국 수도 점령

신라 김유신 장군의 자손인 김암은 현 티베트 사태와 정반대의 상황을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목격했다(763년). 신라사절단과 함께 김암이 장안에 도착한 시기는 그해 4월이었다. 안사(安史)의 반란군이 한때 점령했던 장안은 화려함을 잃었다. 755년에서 763년에 이르기까지 약 8년 동안 중국 당(唐)나라를 뿌리까지 뒤흔든 반란은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 등이 주동이 되었다.

유학생 김암에게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여건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해 가을 티베트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토번의 군대가 수도 장안으로 진격을 해오고 있는데도 당의 북서부 사령관 복고회은은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는 안사의 반란을 진압한 뒤 가장 강력한 군사적 역량을 보유한 인물로 남아 있었다. 이점을 우려한 당 조정은 보안 예방책을 구실 삼아 복고회은을 하동절도사로 임명하지 않았다. 김암이 목격한 세계제국 당의 모습은 너무나 무력했고, 그동안 가졌던 환상은 깨졌다.

그해 11월 황제가 소수의 신료들과 함께 장안 동쪽으로 달아났다. 티베트군이 장안에 임박했다는 신호였다. 이윽고 티베트군이 질서정연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장안에 입성했다. 불충하고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당나라군대'와 확연히 비교가 되었다. 토번군은 복종적이고 질서정연하며 군기가 있었다. 김암은 군인다운 군인을 보았다. "저들이 세계 최강의 티베트군이야!"

토번군의 점령하에서 장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토번군을 피해 장안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움직임도 거의 없었다. 그들은 심리적으로 재앙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데 익숙했다. 수도가 여러 번 점령되는 내란을 겪으면서 그들은 변해 있었다. 티베트는 당나라의 새 황제를 옹립했다. 즉위식이 있었고 중국인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이 사건은 이제 막 극심한 내란을 극복한 당제국의 위신을 추락시켰다. 이후 서역에 대한 티베트군의 지속적인 공격은 안사의 잔당들이 중국의 동해안에 독립적인 '번진'들을 세울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당나라의 국가 구조가 여기서 일그러졌다.


전사국가 티베트의 성장과 고구려

최근 벌어진 티베트 유혈사태와 관련해, 달라이라마 망명정부의 동아시아 대표가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 17일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예방한 그는 "이번 사태는 2500년 티베트 역사 중 가장 암흑기이자 중요한 시기"라며 "한국 불교의 관심을 부탁한다"고 했다.

한국과 티베트와의 인연은 1359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직접적인 만남은 없었다. 하지만 티베트의 국왕은 요동과 한반도의 사정에 대하여 매우 관심이 많았다. 당·고구려전쟁의 결과에 티베트의 운명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641년 당태종은 자신의 딸을 티베트 국왕에게 시집보냈다. 동쪽에서 고구려와 전쟁을 하려면 서쪽의 안정이 필요했다. 티베트의 국왕 승()깐포도 당태종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항상 고구려와 당의 전쟁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라싸(Lahsa)의 궁전에 있던 그가 고구려에서 돌아온 당태종에게 서신과 근사한 선물을 보낼 정도였다('구당서'토번전).

태종의 딸 문성공주와 함께 당의 발달된 문물과 과학기술이 티베트에 유입되고 있었고, 국가 시스템이 고도화 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믿지 못하는 티베트 국왕은 고민이 많았다. "동방의 강국 고구려가 당에 당장 굴복하면 우리의 장래가 어두워지는 것이 확실해! 당은 원조를 당장 끊을 거고, 칼끝을 우리에게 겨눌 것이야. 고구려 다음은 우리야!"

이듬해인 646년 당에서 귀국한 사자를 만나고 그는 마음을 놓았다. "고구려에서 패한 당태종은 이동 중 가마에서 심하게 앓았다고 합니다. 살인적인 스트레스 때문이었습니다. 당태종은 병이 들었고, 황태자(고종)가 아버지 머리맡에서 자식의 도리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태종은 고구려 정복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 역시 고구려는 만만한 나라가 아니야." "승() 깐포 폐하! 당태종의 후유증이 심각합니다.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가 된 그는 더욱 성마르고 의심 많은 사람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뭐라! 이거 천하의 당태종도 고구려에 패하더니 완전히 맛이 갔어."

당태종의 회한은 끝없이 깊어갔다. 그리고는 결국 세상을 등졌다. 고구려와의 전쟁은 대를 물려가면서 치러졌다. 당태종의 아들 고종은 막대한 전비와 희생이 따르는 그 전쟁에 매달렸다. 결국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660년). 나당연합군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그 국왕과 귀족들을 잡아갔다(668년).


실크로드 전쟁과 나당전쟁

고구려는 멸망했다. 하지만 23년간의 이 전쟁은 서쪽에서 티베트가 국력을 다지고 팽창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티베트 고원을 완전히 통일한 티베트는 660년부터 실크로드와 인접한 토욕혼을 잠식했다. 고구려와 전쟁에 발이 묶인 당은 뻔히 알면서 이를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669년 9월 이윽고 티베트는 실크로드(천산남로)를 급습하여 점령한다. 당나라는 실크로드 경영권 상당부분을 상실했다.

670년 고구려 주둔 사령관이었던 설인귀가 이끄는 병력 10만이 티베트군을 몰아내기 위해 출동했다. 양군은 청해호로 흐르는 대비천 부근의 푸른 평원에서 만났다(청해성). 준비된 티베트군은 너무나 강했다. 당군 10만이 전멸하고 설인귀는 목숨만 건졌다. 당과 티베트가 실크로드 경영권을 놓고 시작한 150년 전쟁의 서막은 이러했다.

대비천에서 당군의 전멸은 우리 한국 민족형성의 산고인 통일전쟁의 방향을 바꾸었다. 당의 입장에서 한반도보다 실크로드가 경제적으로 훨씬 중요했다. 앞으로 한반도에 많은 군대를 주둔시킬 수 없었다. 신라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다. 당군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신라까지 지배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을 응시하던 신라인들은 서역 상공에 폭풍이 떠 있고 티베트는 그 눈이 되리란 것을 직감했다. 당에 순종적인 신라는 단숨에 태도를 돌변하여 사정없이 덤벼들었다(670년). 신라군은 압록강을 넘어 만주까지 진군했다(나당전쟁 670~676년). 서역에 발이 묶인 당군은 동쪽 신라에 힘을 집중할 수 없었다. 대신 말갈인 용병을 고용하여 신라군과 싸우게 했다.

675년 티베트에서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티베트가 내분에 휩싸이자 당고종은 실크로드에서 전세를 역전시킬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대규모 병력이 필요했다. 그해 임진강 중하류의 매초성에서 신라군과 대치하고 있던 말갈군대를 호출했고, 이듬해 그들은 실크로드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로서 당군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국제적 상황이 낳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실크로드 전쟁은 신라가 한반도에서 당의 세력을 축출하는 여건을 제공했다. 우리 민족의 모체는 이때 만들어졌다.

이로부터 1280년 후 다른 상황이 연출되었다. 한국에서 전쟁(1950~1953년)이 발발했다. 중국군대는 한반도와 티베트 고원으로 진군했다. 아편전쟁 이후 100년 만에 힘을 회복한 중국은 한반도에서 미군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티베트 수도 라싸를 점령했다. 한반도는 중국에게 미국의 한기(寒氣)를 막는 입술이었고, 티베트 고원은 인도와의 완충지대였다.


거침없이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

티베트 군대에 겁을 먹은 당황제는 장안에서 도망을 쳤다(763년). 티베트가 당나라 수도를 접수하고 도주한 그를 대신하여 새로운 황제를 옹립했다. 최강국 당이 이제 무력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이벤트였다. 소문은 실크로드를 통해 이슬람과 유럽의 기독교 세계에까지 퍼졌다. 실크로드를 지나는 상인들은 이제 티베트에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부터 약 1200년 후 중국은 달라이라마를 티베트에서 몰아냈고(1959년), 라마교의 제2인자 치에키 니마를 연금하고 로느부라는 소년을 그 자리에 앉혔다 (1995년). 현 중국의 통치자 후진타오는 1988~1989년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저항을 강력히 진압한 공으로 출세의 사다리를 탔다. 하지만 세계의 이목이 중국에 집중된 올해 티베트인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베이징올림픽을 경제발전의 선전장으로 삼으려고 했던 중국의 얼굴에 핏줄이 섰다. 마지막 기회인 것을 알고 있는 티베트인들도 희생을 각오했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그것이 중국의 야만성을 증명할 것이다." 중국에 수치를 주기 위한 티베트인들의 장렬한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그들의 희생은 국제사회에서 미국과 유럽이 중국을 압박하는 강력한 지렛대가 된다. 강경 진압은 중국이 향후 세계시장에서 상당한 이익을 양보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3> 이라크 유전과 가야의 철
대의를 위한 전쟁은 없다
신라를 도와 왜군을 격퇴한 고구려의 목적은 가야의 철이었다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이 그 유전을 노렸듯이

    

 

이라크 사마라 지역을 통과하는 송유관이 무장세력의 공격을 받아 불타고 있는 가운데 이라크 병사가 그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2005년 10월 19일). 이라크가 보유한 막대한 원유는 부를 보장하는 신의 축복이자 전쟁을 유발시키는 저주이기도 하다. 연합뉴스

"쿠르드 지방정부와 한국 기업들이 맺은 원유 관련 계약은 불법입니다. 파기하지 않으면 석유공급을 중단하겠습니다."(2008년 1월). 이라크 중앙정부의 한국에 대한 항의는 이러했다. SK에너지에 대한 이라크의 원유 수출이 중단되었다.

한국석유공사는 지난 2월 14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쿠르드 지방정부 대표단과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번에 확보된 유전은 최소 15억 배럴에서 최대 20억 배럴로 추산된다. 하지만 이라크 중앙정부가 인정하지 않은 이번 사업이 제대로 진행될지는 미지수이다. 그동안 쿠르드 지방정부는 자치권 획득의 핵심인 석유 자원을 손에 넣으려고 중앙정부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외국 기업들과 독자적인 유전개발 계약을 연이어 맺어왔다. 쿠르드 유전 개발에 뛰어든 영국 BP와 오스트리아 OMV도 이라크 중앙정부의 경고를 받았다.


이라크 유전 개발 놓고 강대국 각축전

세계 석유업계는 이라크에서 '유전개발 대전(大戰)'을 준비하고 있다. 경쟁은 벌써부터 시작됐다. 세계 굴지의 70여개 석유업체가 지난 2월 18일 마감한 유전 개발 사업에 참여하겠다는 투자 제안서를 이라크 중앙정부에 접수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기업들은 이라크 정부와 쿠르드 지방정부 간의 대립으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세계의 석유 기업들은 '눈앞의 이익이냐 아니면 미래를 볼 것이냐'를 놓고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고구려 무용총 사냥도.

 

고구려인들은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움직이는 짐승을 활로 쏘아 맞출 수 있었다. 사냥을 자주했던 그들에게 기사(騎射) 실력은 훈련이라기보다 생활 속에서 배양된 것이다.
이라크 중앙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은 쿠르드의 독자 행동이 못마땅하다는 입장이다. 미국 국무부는 지난해 9월 세계 메이저 석유회사에 이라크 중앙정부의 허락 없이 쿠르드와 별도 계약을 하지 말라는 지침을 통보하기도 했다.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부시 행정부에게 이라크 유전은 '전리품'이다.

이라크는 석유라는 바다에 둥둥 떠다니고 있다. 확인된 원유 매장량은 1150억 배럴(10.5%)로 사우디아라비아(2627억 배럴)와 이란(1360억 배럴)에 이어 세계 3위이다. 하지만 이라크의 원유 매장 추정치는 2150억~4320억 배럴이나 된다. 더욱 매력적인 것은 원유를 퍼 올릴 수 있는 가채연수가 115년으로 세계 최장이며, 원유가 지표면으로부터 낮게 묻혀 있어 개발 비용이 적게 들고 질도 좋다. 1달러면 원유 1배럴을 생산할 수 있다. 유엔의 이라크 위임 기간이 올해 말로 만료된다. 미국은 이후에도 계속 이라크에 자국의 군대가 주둔할 수 있도록 중앙정부와 협정을 맺을 계획이다.

문제는 중국이 석유를 대량 소비하면서 시작되었다. 세계의 석유 공급량이 점차 빠듯해지자 미국은 그동안 잠가두었던 이라크의 석유꼭지를 다시 열어야 했다. 사담 후세인이 권좌에 있는 상황에서 이라크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를 해제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후세인이 막대한 부를 거머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9·11 사태가 터지자 전쟁을 벌일 빌미를 잡았다. 미국은 이라크를 점령하고 사담 후세인을 처형했다. 중국은 전근대 시대에 세계 최대부국의 자리를 지켜왔다. 중국의 정세 변화는 주변나라에 곧바로 파급되었다. 기원후 3세기 초 후한이 붕괴되면서 황건적의 반란이 일어났다. 한나라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그 와중에 철 산업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철의 품귀현상은 한반도에 중국인들이 건설해 놓은 낙랑군에 파급되었다. 본국으로부터 철이 들어오지 않자. 낙랑인들은 철광산을 찾기 위해 한반도 전역을 탐사했고, 낙동강 중·하류에서 철광산이 터졌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김해 가야에 철이 집산되었고, 시장에서 철 덩어리가 화폐로 활용되었다. 가야 여러 나라의 철은 일본열도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과 한반도 남부의 삼한지역 나아가 낙랑과 대방으로 수출되었다('삼국지').


고구려에 쫓긴 백제는 왜에 도움 요청

397년 광개토왕의 등장 이후 고구려에 밀려 많은 영토를 상실한 백제왕이 왜에 자신의 아들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우리가 가야지역에 가지고 있던 이권을 양도할 터이니 일단 고구려에 붙어있는 신라를 치시오." 2년 후 신라의 해안이었다. 바다를 뭔가 새까만 것들이 뒤덮었다. 왜군의 선단이었다. 노도처럼 난입한 왜군은 순식간에 양산일대를 제압했다. 전령이 신라 내물왕에게 보고했다. "우리의 거점들은 모두 적들의 마구간으로 변했습니다. 주민들은 포로가 되고, 반항하는 자는 살해되었습니다." 내물왕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평양에 도착하여 광개토왕을 만났다. "구원을 요청합니다."

왕이 사신에게 말했다. "과인은 왜의 군대가 우리 고구려처럼 일괄된 통제에 따르는 것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사신이 대답했다. "예 , 그러합니다. 일본열도에 있는 여러 나라들에서 각기 차출된 군대입니다." "일괄적인 통제가 되지 않은 다수 군대가 무슨 이유로 한꺼번에 가야지역에 상륙하여 신라를 친 것이요?" "가야지역에서 생산되는 철 때문입니다. 철은 일본에서 아직 생산되지 않아 그곳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광개토왕이 그의 참모에게 말했다. "시장에서 철이 지금 모자라고 있다고 하는데 왜 그러한가?" "예. 신라는 지금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힘을 키웠습니다. 그들은 수백 년 전부터 규슈에 있는 왜의 여러 나라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고, 질기게 버티더니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신라의 힘은 철산지인 가야의 소국들에게까지 뻗쳤고, 신라가 철을 많이 소비하게 되자 시장가격이 상승했습니다. 철을 구입해야 하는 일본열도의 수많은 호족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되었지요."

낙동강으로 병력 파병이 결정된 후 남부지배의 거점인 충주의 국원성에 병력과 물자가 집중되기 시작했다. 고구려군대는 현지에서 생산이 불가능한 보급품을 주로 챙겼다. 소백산맥을 넘은 5만의 고구려군대 가운데 기병이 먼저 신라의 왕경을 향했다(400년). 고구려의 기병은 중간 중간 촌락에 들러 보급을 받았다. 남거성(男居城)에서 잠시 쉬었다. 왕경에서 파견된 관리가 현지 사람들을 부려서 고구려군의 수발을 들게 했다. "우리의 왕경이 언제 함락될지 모르니 이분들이 빨리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해."

고구려기병들이 신라의 왕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이 벌써 왜군의 귀에 들어갔다. 약탈에 정신이 팔려있었던 그들은 당황했다. 백제의 패배를 통해 고구려군대가 얼마나 야수성이 있고 거칠며, 규율이 잘 잡혀 있는지 절감하고 있었다. 약탈한 물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다.

왜군의 부대들이 하나둘씩 신라의 왕경부근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대열이 전혀 정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무질서하게 낙동강을 향했다. 고구려기병이 도착하자 그들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고향 일본에서도 기병을 보았지만 말위에서 활을 쏘거나 창을 사용할 수 있는 기예가 없었다. 말은 '택시'였고, 기수는 전장에 도착해 말에서 내려 싸우는 '말 탄 보병'이었다. 북방의 기병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왜군은 싸우기도 전에 무너졌다. 도주하던 왜군들 가운데 뒤처지는 자들이 먼저 당했다. 바람처럼 달려와 활을 쏘는 고구려기병 앞에서 왜군은 마치 혼란에 빠진 짐승무리와 같았다. 난쟁이 왜인 사냥이 시작되었다. 우선 흩어진 왜군들을 몰아 다루기 쉬운 곳으로 갈라 넣어 측면으로 돌아서 뒤로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그 우두머리를 고립시키고, 선택한 일부를 먼저 죽여 왜군의 무리가 한꺼번에 반항을 못하게 했다. 추격 중인 고구려군대가 김해가야의 종벌성(從拔城)에 도착하자 성문이 열렸다('광개토왕비문'). 이로써 왜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소되었고, 낙동강에서 바다로 나가는 출구인 김해가 고구려의 손에 떨어졌다. 한편 고구려군대는 진주의 남강에서 가까운 바다인 사천만을 점령했고(곤양군), 만의 입구에 있는 창선도를 장악했다('고려사', '동국여지승람'). 고구려는 가야의 철이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두개 수로의 출구(김해·사천)를 봉쇄했다. 가야의 철시장이 고구려 손에 들어갔다.


이라크 반군 기승에 국제 유가 앙등

석유가격 급등의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이 이라크 반군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을 비롯한 러시아 브라질 인도 동유럽에서의 석유소비가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이라크 내 치안 불안으로 석유 증산이 불투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치안이 점점 좋아지자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1월 원유 수출량은 하루 평균 200만 배럴에 육박했다. 2003년 전쟁 발발 이래 최고치였다. 올 연말까지 하루 290만, 5년 후에는 600만 배럴으로 확대할 계획이며, 2020년까지 800만 배럴 생산을 최종 목적으로 잡고 있다. 엑슨과 칼텍스를 비롯한 미국 석유회사들은 미국이 이라크를 완전히 장악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부시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부추겼을 바로 그들이 최대의 수혜자가 될 수도 있다.

광개토왕도 신라와 가야에서 왜군을 일소하는 데 막대한 인력과 전비가 소요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야를 장악하고 철시장이 고구려 손에 들어오면, 가격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게 된다. 나아가 백제와 신라는 물론이고 일본 열도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의 목줄을 잡을 것이다. 교역에서 철을 무기화하여 그들에게 많은 요구를 할 수 있다.

전쟁에서 승리 후 예상 이익이 막대하다는 것을 절감한 그는 군대투입을 결정했다. 그해 (400년) 2월 요하 서쪽 후연의 공격을 받고 서북방의 영역을 상당히 상실했는데('삼국사기')도 그러했다. 대왕은 가야의 철 확보가 막대한 이익을 줄 것이고 향후 후연에 대한 반격을 하는데 재원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두 개의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 하나는 전쟁이 단순한 영토의 확장이라기보다 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시장 가격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석유가격의 폭등은 저항세력을 포함한 모든 이라크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최근 미국의 이라크 치안 안정화 작업이 일부 결실을 거두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천문학적 비용이 투입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이라크를 떠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하지만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이라크의 안정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치솟는 석유가격에 최대의 피해자는 우리 자신이다.

 


<14> 이라크의 미군 용병과 고구려의 유목민 용병
누가 군대를 국가주의의 화신이라 일컫는가
이라크전에 투입된 '블랙 워터'
고구려가 고용한 선비족 용병
이들이 충성하는 대상은 국가가 아니라 돈이다
이윤을 추구하기에 더 효율적이고 대의가 없기에 더 잔혹하다

    이라크에서 활동 중인 용병들.

 

그들의 역할은 날로 증대하고 있고, 용병시장은 끊임없이 팽창한다.
"우리는 위험을 퍼뜨리는 게 아니라 위험을 막는 기업입니다. 이라크로 가려는 한국인들은 위험(분쟁)지역 보험에 가입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지에서의 안전을 보장합니다." 스웨덴 용병회사 '다인섹(Dynsec)'의 한국지사장의 말은 이러했다.

다인섹이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에 사무실을 개소했다. 이라크 재건 사업에 참여할 한국 기업이 늘어날 것은 자명하다. 언제 납치될지도 모르는 그곳에서 미군에게 경호를 의뢰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군인을 데리고 갈 수도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현지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기 힘들다. 현지에서 영업하고 있는 용병회사에 경호를 의뢰해야 한다. 그것도 한국에 그 회사의 지사가 있다면 매우 편리할 것이다. 다인섹은 한국 기업인들의 이라크 경호 수요 증가를 간파했다. 서비스의 대가는 엄청나다. 바그다드를 방문한 어떤 일본인은 자동차로 30분 거리인 15㎞를 이동하면서 민간회사에 3000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


한국에 상륙한 스웨덴 용병회사

엄밀히 말해 다인섹이 한국 최초의 외국 용병회사 지사인 건 아니다. 서울 용산 미군기지에는 다인코프(DynCorp)사의 파견소가 있다. 그들은 주한미군에 대한 특수작전교육을 하고 있다. 다인코프는 미국 버지니아에 본사를 둔 회사로 아프가니스탄과 남미 쪽에 활동 중이다.

용병업체가 맡는 일은 경호 업무나 전쟁터에서의 전투 스파이 활동까지 광범위하다. 그들은 전투 경험이 있는 특수부대 출신 용병 수백~수천 명을 상시 대기상태로 관리하다 일거리가 생기면 즉각 배치하는 기동성을 과시하고 있다. 미 국방부에서도 긴박한 일이 생겼을 경우 복잡한 명령체계를 따라야 하는 정규군을 호출하기보다는 용병업체에 의뢰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용병들에게 '살인면허'도 발급해 주었다.

    미국 용병회사 블랙 워터의 용병들.

 

현재 이라크에서 용병들의 수입은 미군 병사의 10배를 넘는 게 보통이다. 한 달에 2만~3만 달러는 보통이고 맡은 임무에 따라 10만 달러를 웃돌기도 한다. 이라크에서 전투 중인 상당수의 미군들은 하루빨리 제대해 용병으로 취직하기를 원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이라크전 예산 20%정도가 용병업체로 흘러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블랙 워터' '트리플 캐노피' 영국의 '아모르' 등 쟁쟁한 용병기업들은 돈방석에 앉았다. 세계 용병회사의 전체 수입은 연간 10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미군 당국은 용병들을 선호하고 있다. 용병들은 전장에서 사망하더라도 공식적인 사망자 수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 정치적 부담감이 없다. 재정적인 이점도 있다. 경제학자들은 이라크 전쟁 부상병을 수십 년 동안 치료하는 비용이 2조5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았다. 미 국방부가 용역 계약을 한 민간용병에게는 이 비용이 지출되지 않는다.


너무나 오래된 역사의 비즈니스

기원전 401년에 페르시아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아우 키로스는 형에게 모반하는 군사를 일으켜 바빌론으로 쳐들어 가려고 그리스에서 용병을 모집했다. 소크라테스와 절친했던 크세노폰도 키로스가 고용한 1만의 그리스 용병 가운데 하나였다. 바빌론 근처 전투에서 키로스가 전사하자, 그는 그리스 용병대를 지휘하면서 눈이 쌓인 아르메니아로부터 흑해 연안을 지나 소아시아까지 온갖 고난을 겪은 뒤에 2년 만에 귀환하였다. 이때의 사정을 산문형식으로 쓴 수기가 '아나바시스(Anabasis)'이다.

    뒤로 돌아 활을 쏘는 유목민 기병.

 

그들은 말의 발이 공중에 떠 있을 때 쏜다. 진동이 없는 한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기사(騎射)란 움직이는 물체를 움직이는 와중에 사격을 하여 적중시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예이다.
고구려의 경우도 국초부터 전투에 능숙한 유목민들을 용병으로 활용했다. 기원후 49년 봄 고구려는 선비족 용병을 고용하여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 북중국을 약탈했다. 선비족들은 하북과 북경 주변의 현지사정에 밝았다. 고구려의 군사행동의 목적은 중국과 정기적인 불평등 교역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해 요동의 태수가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초대를 했다. 고구려에서 사신과 상단이 파견되었다. 고구려 사신은 형식적으로나마 중국에 복속한다는 의례적 절차를 치렀다. 고구려인들은 현실적으로 이익이 된다면 무엇이든 하는 사람들이었다. 고구려는 담비가죽으로 만든 외투와 말을 현도군에 증여했다. 그러자 중국은 그 두 배의 가치에 해당하는 대가를 주었다. 교역은 후한의 재정이 허락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후한으로서는 엄청난 손해였다. 변경에 군대를 계속 주둔시킨다면 약탈을 방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군대를 상주시켜야 하고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다. 군대의 주둔 비용보다 출혈교역이 적게 먹혔다('책부원귀').

후한에 물건을 강매하고 엄청난 대가를 받은 고구려는 용병들에게 충분한 급료를 줄 수 있었다. 그 후 선비족은 고구려가 부르면 언제든지 왔다. 후한이 출혈교역의 횟수를 줄이거나 약속을 이행하기 않을 시 언제든지 그랬다. 2세기 들어 약탈은 만성적인 것으로 변했다. 121년의 경우를 보자. 그해 여름 고구려가 요동에 거주하는 선비족 8000명을 데리고 요동군을 약탈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로 잡혀 갔다. 이듬해 고구려는 후한에 인질을 돌려주는 대가로 엄청난 비단을 받아냈다. 1명당 어른은 40필 아이는 그 반이었다('후한서').


용병이란 양날의 칼

미군은 이라크에서 2만 5000명의 용병을 고용하고 있다. 그들의 일을 정규군이 맡았을 때 5만 이상이 필요하다고 한다. 덕분에 미국은 2개 사단 이상의 정규 병력을 이라크에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용병들의 경우 무차별 살인을 해도 누구도 처벌할 수 없다. 그 잔악상이 드러나면서 세계는 경악했고, 미국의 이라크전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 놓았다.

고구려에게도 유목민 용병들은 양날의 칼이었다. 492년 경 입장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거란족이 북중국의 강국 북위 동북방의 마을을 급습했다. 약탈이 자행되었고 60여 명을 잡아서 돌아갔다. 그 지역의 북위정부 관리로 부임한 봉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진상을 조사한 결과 변경민을 잡아간 거란족은 고구려가 부리고 있는 용병들이었음이 밝혀졌다. 봉궤는 고구려 국왕에게 서신을 보냈다. 납치된 사람들의 송환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고구려는 당시 북위와 공무역에 막대한 이익이 걸려 있었다. 외교적 문제가 일어난다면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문자왕(492~518)은 거란족 용병에게 명령을 내려 북위인들과 재물을 모두 반환하게 했다('위서').

유목민들은 고구려 정규군에 들어와 병영에서 생활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구려의 세력권 내의 어느 초원에서 부락 조직을 온전히 유지한 상태로 살았다. 만일 그들을 병영에 묶어 놓는다면 유목민 고유의 기마능력이 감퇴되어 이용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그들의 본성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가운데 언제든지 전쟁에 동원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고구려에 적대적인 세력에게도 고용되기도 했다. 6세기말 어느 거란족 일파는 돌궐에서 이탈하여 고구려에 소속되어 있다가 중국(수나라)이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자 미련 없이 떠나갔다('수서'). 말갈인 대조영의 경우도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의 용병이 되었다. 회사가 망해 급료가 단절되자 이직을 한 것이다. 용병에게 '조국'이란 관념은 없다.


악마적인 매력-용병의 효율성

역사 이래로 숱한 나라들이 문제가 많은 용병을 고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효율성 때문이다. 1995년 아프리카의 소국 시에라리온에서 일어난 일이다. 반군(RUF) 4만~5만 명이 국토 전체를 장악하고 수도로 밀려오고 있었다. 정부는 남아공의 용병회사(Executive Outcomes)에 의뢰했다. EO는 1개월에 100만 달러의 현금과 보너스로 다이아몬드 광산의 채굴권을 요구했다. 반군이 수도 20㎞까지 육박하자 정부는 수락했다. 남아공에서 공격헬기와 탱크 장갑차로 무장한 용병 400명이 도착했다. 극소수의 용병들이 내전에 개입한 지 9일 만에 반군을 수도에서 120㎞ 떨어진 밀림으로 밀어붙였고,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반군의 자금줄인 다이아몬드 광산을 점령했다.

이라크 나자프에서의 전투 장면은 미국용병회사 블랙 워터의 전투력을 세계인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건물에 고립된 미 정규군 5명을 구출하기 위해 12명의 용병이 투입되었다. 군인들을 싣고 이동하는 과정은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소수의 용병들이 수천의 반군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고구려에 고용된 용병의 역할은 다양했다. 주요 외국인 납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한상(韓詳)이라는 영주지역의 호족이었다. 고구려 정부는 거란족에게 그와 그 일족을 잡아오라는 지령을 내렸다(525~528년). 거란 기병들이 요하를 넘었고, 영주의 용성현(현 朝陽)으로 들어갔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베테랑인 거란인들은 그와 가솔들 500 가구를 고구려로 무사히 데리고 왔다. 한상은 고구려에게 이용가치가 있는 인물이라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한기묘지명'). 그의 집안은 용성에 근거지를 둔 봉건세가였다. 대대로 부근의 유목민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북위조정과 그 사이에 입장을 조절했다. 그의 아들 한기도 수나라대에 가서 변경정책 전문가로서 종사했다. 고구려의 군사행동은 확실한 목표 아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한상을 이용해서 북위의 영향 아래에 있던 유목민들을 자신의 아래로 끌어들였고, 나아가 영주지역의 중국인들을 고구려에 더 많이 유치할 수 있었다.

지난 세기를 돌이켜볼 때 우리는 군대가 조국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용병은 언제나 존재했다. 국가가 무력을 독점해 온 지난 20세기가 오히려 특별한 시대였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분명한 적이 사라졌고 국가의 군대란 존재의미가 엷어졌다. 퇴역한 군인들이 늘어났고, 이념의 시대에서 이윤의 시대로 바뀐 것을 직감한 자들은 틈새시장을 발견했다. 20세기와 결별하고 민영화와 시장만능이라는 시대의 조류에서 전쟁을 대행해 주는 고도로 전문화되고 기업화된 전쟁자본이 출현한 것이다.

 


<15> 전쟁 기획자들
다이아몬드의 핏물은 빠지지 않는다, 수요가 있는 한
1500년전 동로마 전쟁도 불발된 2004년 남아공 쿠데타도
개인이 기획한 전쟁이었다
폭등한 비단·석유의 수요가 그 배경이 됐다

    

 

지난해 8월 11일 서부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 시민들이 대통령·국회의원 선거를 하기 위해 투표소 앞에 몰려 있다. 선거를 계기로 이 나라의 '다이아몬드 내전'이 종식될지 국제 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나라가 IMF(국제통화기금) 구제 금융을 받았던 시기였다. 당시 국민들이 모은 금과 다이아몬드가 해외에 매각되기도 했다. 현금이 모자랐던 탓도 있었지만 금·다이아몬드들 매각한 대가로 달러를 가져와 나라를 구해보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필자도 당시 집안에 있었던 금(10돈)과 다이아몬드(2개)를 팔았다. 서울 남대문의 어느 곳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1998년 2월). 거기서 다이아몬드 감정을 하는 레바논인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 태어나 성장했다고 했다. 그곳은 다이아몬드가 많이 생산되는데, 그것을 놓고 내전이 지속되었다고 했다. 반군(RUF)은 일반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라고 한다. "그들은 예사로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절단합니다. 정부군도 이를 제대로 막지 못합니다. 그들도 국민들을 괴롭힙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부군이 그렇다니?" "지금 시에라리온에는 쿠데타와 반쿠데타가 연이어 일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 수급이 달려 한국에까지 오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개인 이익이 국지전을 유발할 수도

1997년 5월 시에라리온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반군과 비밀리에 협조관계를 가졌던 정부군의 중간층 장교들이 카바흐 대통령의 민간정부를 전복시켰다. 카바흐가 불러들인 남아공의 용병회사(Executive Outcomes·EO)가 철수한 지 95일 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정부군과 반군이 가정집과 상점을 약탈하면서 수도인 프리타운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다시 대규모의 학살과 총체적인 혼란으로 빠져 들었다.

쫓겨난 전 대통령 카바흐에게 역쿠데타를 일으킬 자금을 밀어줄 자본가가 접근했다. 인도인으로 태국의 은행가였던 삭세나(Saxena)였다. 아프리카의 사업에 이권이 걸려 있었던 그는 카바흐에게 다이아몬드광산 채굴권을 보장받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1000만 달러가 용병기업 샌드라인 인터내셔널에 들어갔다.

샌드라인은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정권을 흔들기 위해 과거 EO가 했던 동일한 방법을 사용했다. 300t의 무기가 현지로 공수되었고, 자신들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카마조르(사냥꾼이란 뜻)라고 불리는 현지 부족 민병대를 훈련시키고 장비를 제공했다. 밀림을 속속들이 아는 사냥꾼들이었다. 작전이 시작되었고, 최종적으로 수도인 프리타운에서 쿠데타 세력과 RUF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나이지리아 평화유지군을 지휘했다. 샌드라인의 군사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결과적으로 삭세나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은 군사원조의 공여자가 반드시 국가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부유한 한 개인이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군대를 증강하거나 한 지역의 힘의 균형을 기울게 할 수 있다. 국가의 무력 독점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개인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555년 초원의 길을 지배한 유목제국 돌궐(투르크)이 고구려 신성으로 쳐들어 왔다. 완강하게 버티자 돌궐군은 기수를 백암성으로 돌렸다. 고구려 양원왕(545~559)이 1만 기병을 보냈다. 돌궐인들은 1000명의 전사자와 포로들을 남기고 물러났다('삼국사기'). 고구려는 몽골고원과 초원의 길의 주인이 유연에서 돌궐로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돌궐의 고구려 침공의 해답은 동로마의 역사학자 시모카타(Simocatta)의 저술에 기록돼 있다.

"유연 잔당들이 (북중국의) 북제로 도망을 쳤고 그곳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쫓겨 동쪽의 무쿠리(Moukri·貊句麗·고구려)로 도망쳤다. 무쿠리는 북제에 인접해 있다. 그들은 강인한 정신력과 매일의 신체단련으로 투지가 매우 높았다."

이 기록은 중국의 기록('북제서')과 비교해도 정황상 일치한다. 돌궐에 쫓겨 고구려로 망명한 유연의 잔당들에 대한 사실이 동로마제국의 기록에 남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568년 돌궐의 사신(소그드 상인)이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동로마 궁정에 나타났다. 그들은 동로마 황제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우리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킨 유연 족속들을 보호하고 있습니까."(룩 콴텐) 유연인들의 행방에 대한 이러한 항의는 깊은 인상을 주었고, 여기서 고구려로 들어간 일부 유연인들에 대한 기록이 남았다.

돌궐의 추격을 피해 동로마로 들어온 유연인들을 받아준 것은 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출신 군인황제 유스티니아누스(527~565)였다(562년). 이후 그들은 동로마 사람들에게 아바르족(Avar)이라고 불리었고, 용병으로서 동로마제국의 정예 기병이 되었다.


소그드 상인의 전쟁 기획

물론 돌궐사신이 이렇게 단순한 항의를 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돌궐 사신은 동로마와 돌궐 사이의 비단 직교역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그 사신은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탁월한 대상이었던 소그드인 마니악(Maniakh)이었다. 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는 비단상인 가운데 한명이었다. 이보다 앞서 그는 돌궐의 칸을 찾아갔다.

"칸께서도 아시겠지만 현재 비단은 북중국에서 주로 생산되고 그것은 몽골고원으로 대량으로 유입됩니다. 북중국은 북주와 북제로 분열되어있는 상태여서 북방초원의 돌궐 칸에서 서로 경쟁적으로 잘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칸께서 양자 가운데 어느 쪽을 원조하는가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좌우되는 형편입니다." "과인이 알기로도 우리는 북제와 북주로부터 지속적으로 비단을 받아낼 수 있소만…." "칸이시여. 하지만 현재 유통상 문제가 있습니다. 비단의 최대 소비시장은 서방의 부국 동로마제국입니다. 그곳에서 비단의 무게는 황금의 무게와 동일하게 교환되고 있습니다."

"과인도 동로마에서 우리가 그대들 소그드 상인에게 넘긴 가격보다 비싸게 판매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소만 그렇게 소비지역에서 가격이 급등한 줄은 몰랐소." "원인은 사산조 페르시아입니다. 그놈들이 칸께서 우리에게 판매하신 비단을 중앙아시아에서 모두 매입합니다. 그리고 막대한 이문을 붙여서 동로마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 중간 차액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면 대안이 있소? 그놈들과 전쟁을 하는 것은 부담스러운데." "그 비용은 저희가 상당부분 부담하겠습니다." "아니, 당신이 상당한 부자인 것은 알지만 그 막대한 비용을 어떻게 댄다는 말인가?" "동로마를 이 전쟁에 끌어들이면 됩니다. 칸께서는 저희에게 공식적인 돌궐사신의 자격을 주시고, 보낼 국서에 동로마와 비단의 직교역을 원한다고 쓰셔야 합니다." "그대들의 조건은 무엇이요?" "우리 소그드 상인에게 몽골에서 동로마로 이어지는 비단 유통의 독점권을 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매년 우리가 칸에게 바쳐왔던 세금의 몇 배를 바치겠습니다. 직교역만 이루어진다면 수익은 충분히 창출됩니다." 마니악은 영악한 세기의 거간꾼이었다.


    대처 전 영국 수상의 아들 마크 대처 경. 독자적 재정 찾는 게릴라 반군

최근 어느 거간꾼에게 국제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있다(AFP 통신 올해 3월 29일자). 전 영국수상의 아들인 마크 대처경은 아프리카 3대 산유국의 하나인 적도 기니에서 쿠데타를 획책했다. 2004년 3월 대처는 사이먼 만(영국 SAS장교출신)과 그의 남아공 용병들을 시켜 적도 기니의 철권 통치자 응구에마 대통령을 납치해 감금하고 망명한 재야 인사를 대통령으로 앉히려고 했다. 미국 영국 독일 스페인 등의 정부 관계자도 승인을 한 쿠데타 기도였다고 한다. 성공했다면 대처는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되었을 것이고, 드러난 자금줄 가운데 하나인 석유부호 엘리카딜도 막대한 유전을 확보했을 것이며, 서방의 석유회사들에게도 이권이 돌아갔을 것이다. 소그드 상인들이 전쟁을 일으켜 중간차액을 취하는 페르시아를 제거하고 막대한 이득을 챙겼듯 현대의 자본가들은 서방국가들의 비호·묵인 아래 아프리카 산유국 독재자의 석유를 빼앗아 잔치를 벌일 참이었다.

막대한 이익이 걸린 전쟁에 관한 브리핑을 들은 돌궐 칸은 마니악을 동로마제국으로 보냈다. 동로마 측은 강력한 기병을 보유한 돌궐이 사산조(sasan朝) 페르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보였다. 서로 우호적인 대화가 오고갔다. 마니악이 돌궐로 떠나갈 때 동로마제국의 사신 제마르코스(Zemarchos)가 동행했다. 칸은 동로마 사신을 실크로드의 천산북로에 있는 야영지에서 만났다. 공동의 적인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확고한 동맹이 이루어졌다. 때마침 그곳에 도착한 페르시아 사신은 추방됐다.

칸은 곧바로 사산조 페르시아에 선전포고했다. 실크로드 교역의 막대한 이익을 차지하기 위한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돌궐은 동로마와 접촉할 수 있는 지역까지 팽창해야 했고, 전쟁의 승리로 중국에서 1만 리나 떨어져 있는 카스피해까지 이르렀다. 동로마도 페르시아를 공격했다(572년). 동로마는 그 후 20년간 페르시아와 전쟁을 지속한다. 비단의 중간 차액을 먹는 사산조를 몰아내는 전쟁에 돌궐과 동로마의 동맹관계는 굳건했다. 양 측의 사신이 빈번하게 오고갔고, 엄청난 양의 비단 직교역도 있었다. 동로마와 돌궐 그리고 소그드상단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다. 상인이 1540년 전 전쟁을 기획한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이다.

시대를 초월한 공통점이 있다. 비단 다이아몬드 석유의 가격이 폭등했거나 상승하고 있을 때 일어난 전쟁이거나 쿠데타 기도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언급한 전쟁의 근본 원인을 찾아가보면 결국 자본가나 상인이 아니라 '시장'이 그것을 생산하고 있다. 가령 미국과 유럽 등 부유한 나라에 마약시장이 없어진다면 폭력을 일삼는 세계의 마약 생산 조직들도 사라질 것이다.

냉전이 종식된 지금 전쟁의 지향점은 전근대의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초강대국의 지원이 중단되자 캄보디아 앙골라 아프간 등 세계 각 지역의 게릴라 반군들은 독자적인 재정 자원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념을 내세웠던 그들이 '시장을 지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수익창출을 위한 전쟁을 지속해야 했다. 전쟁이 불합리한 사태가 아니라 '대안적인 이윤과 권력체계'로서 그 자체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었다. 시장이 존재하는 한 그들은 애초에 집단을 결성한 취지가 사라진 지금에도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폭력 활동을 지속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