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라시의 동대사. 753년 신라의 상인 김태렴 일행이 방문했던 곳이다. 공식 방문 목적은 동대사의 대불 개안식 참석이었지만 실제로는 장사를 위한 것이었다. | |
역사 속 전쟁들은 왜 일어났고 어떻게 귀결되었는가.
내막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전쟁들은 시장 쟁탈전이었다고 한다.
땅과 재화를 빼앗아 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과정이 전쟁이라는 것이다.
최근 '고구려, 전쟁의 나라'를 펴낸 역사학자 서영교(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씨가 '전쟁과 시장'이란 주제로 매주 새로운 역사 기행을 시작한다.
1991년에서 1994년까지 일본, 독일, 프랑스 3국 사이에 한국고속철도 공사수주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일본의 신간센이 1차로 탈락하고, 독일의 ICE와 프랑스의 TGV가 경합했다. 본선에 오른 프랑스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1993년 9월에 방한한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손에는 '휘경원 원소도감의궤'(徽慶園 園所都監儀軌)가 들려 있었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그것이 첫 선물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그는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 중인 조선왕실의궤 191종 297책을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은 구한말 프랑스가 약탈해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였다.
1866년(병인년) 초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신부 9명과 조선인 천주교도 8000명을 처형했다. 당시 동아시아 3국은 밀려오는 서양 세력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서양의 신 물결은 너무나 거셌다. 영국과 프랑스가 중국의 수도를 철저히 약탈했고, 일본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서양 각국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도쿠가와 막부정권이 전복되었다. 두만강까지 진출해온 러시아가 조선을 넘보고 있었으며, 병인년 10월 프랑스가 자국의 선교사 살해의 책임을 물어 강화성을 공격하여 외규장각을 약탈했다.
127년이 지난 후 프랑스는 자국의 물건(TGV)을 팔아먹기 위해 훔쳐간 보물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우리 정부는 순진하게 그들의 말을 믿었고,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TGV를 선택했다. 수 만장에 달하는 계약서가 만들어졌고 대통령이 최종 서명을 했다. 그러나 말은 정말 말뿐이었다. 프랑스는 아직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사기를 당한 것이다.
상대방 마음을 꿰뚫고 접근
고대 한국과 일본 사이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 때에는 당한 쪽이 일본이었다는 점이다. 752년 윤3월, 일본 후쿠오카의 내륙 대제부(大宰付)에 신라사절단이 도착했다. 700인에 달하는 대규모였으며 대표는 신라의 왕자 김태렴이었다. 약 3개월 후(752년 6월) 신라사절단은 일본의 수도로 가서 천황을 알현했다. 김태렴과 일본 천황의 대화가 '속일본기'에 전해진다. 김태렴이 천황에게 코가 땅에 닿을 듯 큰 절을 하고 신라 국왕(경덕왕)이 전하는 말을 그대로 올린다고 말했다.
"일본의 천황에게 삼가 아룁니다. 신라국은 예로부터 대대로 일본을 받들어 왔습니다. 이번에 제가(경덕왕) 몸소 가서 조공하고 인사를 드리려고 하였으나, 생각해 보니 하루라도 국왕이 없으면 국정이 해이해지고 문란해질까 염려되어, 저를 대신하여 아들(김태렴)을 보내어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일본 천황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펌프질에 들뜬 일본 천황이 답변했다.
"신라국이 끊임없이 일본을 받들어 온 것은 사실이다. 이제 신라 국왕이 왕자 김태렴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니 그 정성에 짐(朕)은 기쁠 뿐이다. 앞으로 영원히 그대의 나라를 보살피리라."
김태렴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하늘 아래 모든 땅은 일본 천황의 땅이요,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일본 천황의 신하입니다. 신 김태렴은 다행히 성세(聖世)를 만나 천황의 조정에 와서 이렇게 받들 수 있으니 기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제가 몸소 가지고온 신라의 미미한 물건을 삼가 바칩니다."
비록 한 다리 건너서 들은 말이지만 모든 중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중국 천황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은 일본 천황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김태렴은 일본 천황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효겸천황은 왕위 계승 과정에서의 분란과 그 여파로 인한 갈등으로 지쳐 있었다. 천황의 권력도 불안정했다. 후지와라에 대영지를 가진 귀족 나카마로가 서서히 일본 군부의 실권자로서 부상하고 있었다. 힘이 없을수록 대외적인 체면이 더욱 중요해지는 법이다. 이는 1993년 한국 군부세력의 청산이란 구호를 내걸고 등장한 김영삼 정권의 불안한 마음을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이 정확히 간파한 것과 다르지 않다. 김태렴과 미테랑의 공통점은 모두 장삿속으로 상대에게 접근했다는 데 있었다.
사실 김태렴은 신라의 왕자가 아니었다. 그의 일행은 사절단으로 위장한 귀족 상인집단이었다. 당시 신라의 귀족들은 조선 선비들과는 달리 탐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이익에 밝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철저히 준비해서 완벽하게 팔려고 일본에 건너왔다. 그들의 짐은 일부 진상하기 위한 물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장에 내다팔 정식 상품들이었다.
오래 전부터 김태렴 상단은 중국을 통해 서역·남해 산 향약(香藥)을 대량으로 구입해 이문을 남기고 일본에 팔아 왔다. 일본에 있는 수천 개의 사찰이 그 향약을 소비했다. 불경에 부처를 공양하기 위해서는 25종의 향약이 필요하다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신앙이 교역을 낳고 거대한 경제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장사꾼의 마인드가 없는 신라 국왕이 귀족들의 이러한 대외교역의 발목을 잡았다. 현대 사회에서 정부의 규제가 대기업의 발목을 잡듯이 말이다.
나당전쟁이 종료된 676년부터 신라와 일본 사이에 막대한 교역의 문이 열렸다. 당시 신라는 당의 재침에 대한 우려로 노이로제가 걸려 있었다. 전후에도 신라의 군비는 축소되지 않았고, 몇 배 이상 증가되었다('삼국사기' 무관조). 당과 대치 상태에 있던 신라에게 일본은 불안의 근원이었다. 당과 일본이 손을 잡고 신라를 동서에서 함께 공격한다면 신라는 망할 것이다. 신라 자신이 당과 손을 잡고 백제를 협격하여 멸망시킨 경험이 있지 않은가. 신라정부는 일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세계 최강의 당 제국 앞에서 약자인 신라의 선택의 여지는 좁았다. 신라는 일본에 막대한 물량공세를 취했다. 물론 일본을 우대한다는 것은 신라 왕들에게 속이 뒤틀리는 일이었다.
종전 60년이 흐른 735년 국제정치의 순풍이 신라에 불어왔다. 당이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의 소유로 공식 인정해준 것이다. 안보를 위해 일본에 저자세를 취했던 왕들은 이제 머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었다. 당과의 불화를 공식적으로 청산한 그 해부터 신라 국왕들이 일본에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양국 간의 교역에 적지 않은 문제가 생겼고, 일본을 상대로 교역에 매달리던 신라의 귀족상인들이 힘들어졌다. 일본과의 교역의 규모는 해마다 늘어나는데 신라 국왕이 일본의 천황에게 '자네'에 가까운 호칭을 사용해서 외교문서를 보내는 바람에 장사를 한두 번 그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신라의 상인단은 사절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일본으로 들어갔고, 때문에 신라국왕의 외교문서가 필요했다.
김태렴 일행은 일본 천황을 중국의 천자와 동급으로 존중해줬다. 그들은 돈이 들어가지 않는 립서비스는 언제든지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프로 장사꾼다운 면모였다. 체면이 선 천황은 신라사절에게 관대한 조치를 내렸다. 김태렴과 그의 일행이 신라에서 가져온 배 7척 분량의 물품들을 모두 매각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거래내역은 '매신라물해'라는 고문서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각고의 노력으로 신라인들은 그렇게 고대하던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다. 일본을 떠나기 전에 상당량의 포와 비단 등을 덤으로 받았고 술과 안주가 곁들여진 만찬회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일본 천황의 마지막 당부가 있었다.
"오늘 이후로 신라국왕이 직접 일본 조정을 방문하도록 하라,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사람을 보내어 반드시 외교문서를 가지고 오도록 하라."
천황은 김태렴이 신라왕의 국서 없이 말로만 모든 것을 처리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신라 왕은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조급해진 일본 천황은 이듬해인 753년 2월 신라에 사절을 파견했다. 아무래도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김태렴의 말을 믿고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753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오만무례하므로 왕이 접견하지 않고 추방했다."
경덕왕은 일본 사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물론 김태렴이 경덕왕의 아들이 아니었다는 것도 이를 통해 천황이 알게 됐다. 일본 천황은 분개했지만, 사기를 당했다고 말하고 다닐 수도 없었다.
시장수요의 흐름은 막을 수 없어
선진국 프랑스 대통령의 친절한 약속에 김영삼 대통령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약속을 순진하게 믿었고, 고속철도 계약서에 그 조항을 따로 넣지 않았다. 하지만 현대 국제사회에서 말은 아무런 효력이 없었고, 서류는 냉엄했다. 프랑스는 한국의 금융위기로 고속철도 사업이 늦어지자 문서상의 계약을 가혹하게 이행했다. 선로가 완성되지 않았는데 열차들이 벌써 프랑스에서 들어오는 등의 해프닝이 그것이다. 고속철도공사는 잘 모르고 체결한 계약으로 엄청난 금액의 위자료만 알스톰사(TGV 제작회사)에 지불하고 그 부채를 늘렸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그의 임기 후반에 자신을 속인 프랑스와 또 다시 대규모 수주계약을 체결한다. 프랑스산 단거리 미사일 미스트랄의 구입 규모는 우리나라의 전 군대를 무장시킬 만큼 거대했다. 신라 가짜 왕자의 일본천황 사기사건도 일본의 신라물품 수입을 막을 수 없었다. 이후 일본은 신라 상단을 통해 계속 중국과 서역의 물자를 구입했다.
현대의 김 대통령과 고대의 일본천황이 바보라서 사기를 친 그 국가에 다시 대규모 구매를 한 것일까. 그것은 결코 아니다. 1250년이란 시차가 있지만 위의 사실들은 최근 대선 과정의 BBK 사건과 관련하여 어떤 메시지를 전해준다. 강력한 시장 수요의 우월성이 그것이다. 아무리 불미스러운 사건이라도 그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