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최영교_전쟁과 시장_01

醉月 2011. 3. 9. 08:59
<1> 신라왕자의 사기 사건
首長을 녹인 감언이설 국가기만 희대의 사기극
佛미테랑 보물반환 약속에 순진한 YS, 덜컥 고속철 계약
신라상인 김태렴, 왕자로 속여 日천황에 접근… 교역권 따내
말은 아무런 효력도 없고 서류만의 냉엄함 알아야

 
  일본 나라시의 동대사. 753년 신라의 상인 김태렴 일행이 방문했던 곳이다. 공식 방문 목적은 동대사의 대불 개안식 참석이었지만 실제로는 장사를 위한 것이었다.


역사 속 전쟁들은 왜 일어났고 어떻게 귀결되었는가.

내막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전쟁들은 시장 쟁탈전이었다고 한다.

땅과 재화를 빼앗아 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과정이 전쟁이라는 것이다.

최근 '고구려, 전쟁의 나라'를 펴낸 역사학자 서영교(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씨가 '전쟁과 시장'이란 주제로 매주 새로운 역사 기행을 시작한다.

1991년에서 1994년까지 일본, 독일, 프랑스 3국 사이에 한국고속철도 공사수주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일본의 신간센이 1차로 탈락하고, 독일의 ICE와 프랑스의 TGV가 경합했다. 본선에 오른 프랑스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1993년 9월에 방한한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손에는 '휘경원 원소도감의궤'(徽慶園 園所都監儀軌)가 들려 있었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그것이 첫 선물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그는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 중인 조선왕실의궤 191종 297책을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은 구한말 프랑스가 약탈해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였다.

1866년(병인년) 초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신부 9명과 조선인 천주교도 8000명을 처형했다. 당시 동아시아 3국은 밀려오는 서양 세력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서양의 신 물결은 너무나 거셌다. 영국과 프랑스가 중국의 수도를 철저히 약탈했고, 일본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서양 각국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도쿠가와 막부정권이 전복되었다. 두만강까지 진출해온 러시아가 조선을 넘보고 있었으며, 병인년 10월 프랑스가 자국의 선교사 살해의 책임을 물어 강화성을 공격하여 외규장각을 약탈했다.

127년이 지난 후 프랑스는 자국의 물건(TGV)을 팔아먹기 위해 훔쳐간 보물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우리 정부는 순진하게 그들의 말을 믿었고,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TGV를 선택했다. 수 만장에 달하는 계약서가 만들어졌고 대통령이 최종 서명을 했다. 그러나 말은 정말 말뿐이었다. 프랑스는 아직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사기를 당한 것이다.


상대방 마음을 꿰뚫고 접근

고대 한국과 일본 사이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 때에는 당한 쪽이 일본이었다는 점이다. 752년 윤3월, 일본 후쿠오카의 내륙 대제부(大宰付)에 신라사절단이 도착했다. 700인에 달하는 대규모였으며 대표는 신라의 왕자 김태렴이었다. 약 3개월 후(752년 6월) 신라사절단은 일본의 수도로 가서 천황을 알현했다. 김태렴과 일본 천황의 대화가 '속일본기'에 전해진다. 김태렴이 천황에게 코가 땅에 닿을 듯 큰 절을 하고 신라 국왕(경덕왕)이 전하는 말을 그대로 올린다고 말했다.

"일본의 천황에게 삼가 아룁니다. 신라국은 예로부터 대대로 일본을 받들어 왔습니다. 이번에 제가(경덕왕) 몸소 가서 조공하고 인사를 드리려고 하였으나, 생각해 보니 하루라도 국왕이 없으면 국정이 해이해지고 문란해질까 염려되어, 저를 대신하여 아들(김태렴)을 보내어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일본 천황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펌프질에 들뜬 일본 천황이 답변했다.

"신라국이 끊임없이 일본을 받들어 온 것은 사실이다. 이제 신라 국왕이 왕자 김태렴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니 그 정성에 짐(朕)은 기쁠 뿐이다. 앞으로 영원히 그대의 나라를 보살피리라."

김태렴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하늘 아래 모든 땅은 일본 천황의 땅이요,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일본 천황의 신하입니다. 신 김태렴은 다행히 성세(聖世)를 만나 천황의 조정에 와서 이렇게 받들 수 있으니 기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제가 몸소 가지고온 신라의 미미한 물건을 삼가 바칩니다."

비록 한 다리 건너서 들은 말이지만 모든 중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중국 천황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은 일본 천황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김태렴은 일본 천황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효겸천황은 왕위 계승 과정에서의 분란과 그 여파로 인한 갈등으로 지쳐 있었다. 천황의 권력도 불안정했다. 후지와라에 대영지를 가진 귀족 나카마로가 서서히 일본 군부의 실권자로서 부상하고 있었다. 힘이 없을수록 대외적인 체면이 더욱 중요해지는 법이다. 이는 1993년 한국 군부세력의 청산이란 구호를 내걸고 등장한 김영삼 정권의 불안한 마음을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이 정확히 간파한 것과 다르지 않다. 김태렴과 미테랑의 공통점은 모두 장삿속으로 상대에게 접근했다는 데 있었다.

사실 김태렴은 신라의 왕자가 아니었다. 그의 일행은 사절단으로 위장한 귀족 상인집단이었다. 당시 신라의 귀족들은 조선 선비들과는 달리 탐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이익에 밝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철저히 준비해서 완벽하게 팔려고 일본에 건너왔다. 그들의 짐은 일부 진상하기 위한 물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장에 내다팔 정식 상품들이었다.

오래 전부터 김태렴 상단은 중국을 통해 서역·남해 산 향약(香藥)을 대량으로 구입해 이문을 남기고 일본에 팔아 왔다. 일본에 있는 수천 개의 사찰이 그 향약을 소비했다. 불경에 부처를 공양하기 위해서는 25종의 향약이 필요하다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신앙이 교역을 낳고 거대한 경제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장사꾼의 마인드가 없는 신라 국왕이 귀족들의 이러한 대외교역의 발목을 잡았다. 현대 사회에서 정부의 규제가 대기업의 발목을 잡듯이 말이다.


    국내에 비싼 대가를 치르고 들여온 프랑스의 고속철도 TGV. '립서비스'는 돈이 들지 않는다

나당전쟁이 종료된 676년부터 신라와 일본 사이에 막대한 교역의 문이 열렸다. 당시 신라는 당의 재침에 대한 우려로 노이로제가 걸려 있었다. 전후에도 신라의 군비는 축소되지 않았고, 몇 배 이상 증가되었다('삼국사기' 무관조). 당과 대치 상태에 있던 신라에게 일본은 불안의 근원이었다. 당과 일본이 손을 잡고 신라를 동서에서 함께 공격한다면 신라는 망할 것이다. 신라 자신이 당과 손을 잡고 백제를 협격하여 멸망시킨 경험이 있지 않은가. 신라정부는 일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세계 최강의 당 제국 앞에서 약자인 신라의 선택의 여지는 좁았다. 신라는 일본에 막대한 물량공세를 취했다. 물론 일본을 우대한다는 것은 신라 왕들에게 속이 뒤틀리는 일이었다.

종전 60년이 흐른 735년 국제정치의 순풍이 신라에 불어왔다. 당이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의 소유로 공식 인정해준 것이다. 안보를 위해 일본에 저자세를 취했던 왕들은 이제 머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었다. 당과의 불화를 공식적으로 청산한 그 해부터 신라 국왕들이 일본에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양국 간의 교역에 적지 않은 문제가 생겼고, 일본을 상대로 교역에 매달리던 신라의 귀족상인들이 힘들어졌다. 일본과의 교역의 규모는 해마다 늘어나는데 신라 국왕이 일본의 천황에게 '자네'에 가까운 호칭을 사용해서 외교문서를 보내는 바람에 장사를 한두 번 그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신라의 상인단은 사절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일본으로 들어갔고, 때문에 신라국왕의 외교문서가 필요했다.

김태렴 일행은 일본 천황을 중국의 천자와 동급으로 존중해줬다. 그들은 돈이 들어가지 않는 립서비스는 언제든지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프로 장사꾼다운 면모였다. 체면이 선 천황은 신라사절에게 관대한 조치를 내렸다. 김태렴과 그의 일행이 신라에서 가져온 배 7척 분량의 물품들을 모두 매각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거래내역은 '매신라물해'라는 고문서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각고의 노력으로 신라인들은 그렇게 고대하던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다. 일본을 떠나기 전에 상당량의 포와 비단 등을 덤으로 받았고 술과 안주가 곁들여진 만찬회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일본 천황의 마지막 당부가 있었다.

"오늘 이후로 신라국왕이 직접 일본 조정을 방문하도록 하라,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사람을 보내어 반드시 외교문서를 가지고 오도록 하라."

천황은 김태렴이 신라왕의 국서 없이 말로만 모든 것을 처리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신라 왕은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조급해진 일본 천황은 이듬해인 753년 2월 신라에 사절을 파견했다. 아무래도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김태렴의 말을 믿고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753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오만무례하므로 왕이 접견하지 않고 추방했다."

경덕왕은 일본 사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물론 김태렴이 경덕왕의 아들이 아니었다는 것도 이를 통해 천황이 알게 됐다. 일본 천황은 분개했지만, 사기를 당했다고 말하고 다닐 수도 없었다.


시장수요의 흐름은 막을 수 없어

선진국 프랑스 대통령의 친절한 약속에 김영삼 대통령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약속을 순진하게 믿었고, 고속철도 계약서에 그 조항을 따로 넣지 않았다. 하지만 현대 국제사회에서 말은 아무런 효력이 없었고, 서류는 냉엄했다. 프랑스는 한국의 금융위기로 고속철도 사업이 늦어지자 문서상의 계약을 가혹하게 이행했다. 선로가 완성되지 않았는데 열차들이 벌써 프랑스에서 들어오는 등의 해프닝이 그것이다. 고속철도공사는 잘 모르고 체결한 계약으로 엄청난 금액의 위자료만 알스톰사(TGV 제작회사)에 지불하고 그 부채를 늘렸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그의 임기 후반에 자신을 속인 프랑스와 또 다시 대규모 수주계약을 체결한다. 프랑스산 단거리 미사일 미스트랄의 구입 규모는 우리나라의 전 군대를 무장시킬 만큼 거대했다. 신라 가짜 왕자의 일본천황 사기사건도 일본의 신라물품 수입을 막을 수 없었다. 이후 일본은 신라 상단을 통해 계속 중국과 서역의 물자를 구입했다.

현대의 김 대통령과 고대의 일본천황이 바보라서 사기를 친 그 국가에 다시 대규모 구매를 한 것일까. 그것은 결코 아니다. 1250년이란 시차가 있지만 위의 사실들은 최근 대선 과정의 BBK 사건과 관련하여 어떤 메시지를 전해준다. 강력한 시장 수요의 우월성이 그것이다. 아무리 불미스러운 사건이라도 그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2> 낙랑 PX와 미군 PX
낙랑 통해 신문물 흡수한 고구려의 실용정신을 배우자
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낙랑과 미군부대는 닮은 꼴
앞선 지식과 외국의 인재를
편견없이 수용한 지혜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가난했던 시절, 미군 PX는 한국인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풍요의 대명사였다. 사진은 부산의 미군 주둔지인 하얄리아 부대.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부대찌개'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다. 속칭 '부대고기'라고 한다. 정확히 말해 미군이 먹다가 버린 각종 햄 소시지 치즈에다 김치를 넣고 찌개를 만들었다. 그것은 외국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다. 미군의 음식물 쓰레기를 재활용한 것에서 출발했지만 어디까지나 우리 고유의 음식이다.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서 미군부대는 그야말로 풍요의 섬이었다. 6·25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 갔지만 더 많은 새로운 것도 가지고 왔다. 미군이 들어왔고, 그 부대 주변에는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었다. 미군PX에서 흘러나오는 물품은 담배, 껌에서부터 하다못해 쓰레기까지 모두 돈이 됐다. 없어서 못 팔았다.

당시 국내에선 거의 아무것도 생산되는 게 없었다. 자연스레 PX를 중심으로 서울 회현동, 남대문 시장 근처는 'PX 경기'로 달아올랐다. PX 뒤는 싸구려 먹자골목 이었다. 양공주 양아치 달러아줌마 PX아가씨 지게꾼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돈 셈을 하기도 하고 새로운 거래를 트기도 했다. 모두들 미군이나 미제(美製) 물건에다 밥줄을 걸고 사는 한통속이었다.

늦둥이인 필자는 엄마 젖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도 덩치와 키가 크다. 형들은 늘 말했다. "임마 니는 아 일때 PX에서 나온 우유를 먹고 크게 자란기라! 니가 그걸 먹을 때 우리 집이 우유의 향으로 꽉 찼던기라! 그걸 묵은 니 하고 못 먹은 우리하고 덩치 차이가 얼마나 나노?" 영양실조 상태에서 후각이 예민해지고, 결핍은 그 미제 우유에 대한 굳은 신앙을 키웠다. 미군 PX라는 말만 들어도 모두 사족을 못 썼다. 그것이 바로 서구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일제시대 동경제국대 발굴단이 낙랑고분을 발굴하고 있다.

 

고대 한국인들에게도 중원문화에 대한 너무나 확고한 신앙이 있었다.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원의 통일국가 한(漢)나라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기원전 108년에 그 수도 지역에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했다(313년 소멸). 그야말로 고대 중국의 식민지가 평양부근에 건설되었던 것이다. 전성기에 인구는 6만 2812호(戶), 40만 6748명이나 되었다(한서지리지). 고대 치고는 엄청난 인구밀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낙랑군의 주민은 주로 산동의 낭야에서 온 중국인이 많았다. 고향에서 올 때 그들의 손에는 산동산 누에가 들려있었다. 그들은 그 벌레를 지금의 남한지역(삼한)과 일본열도에 무상으로 뿌렸고, 누에 치는 기술도 가르쳐 주었다. 남한과 일본열도에서 많은 누에고치가 났고, 비단실과 비단솜 생산으로 이어졌다. 배를 탄 낙랑상인들이 정기적으로 그것을 수집하러 갔기 때문에 생산만 하면 수익이 되었다. 그 생사는 낙랑군의 수공업장에서 비단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낙랑비단'이란 상표를 달고 중원에 비싼 값으로 수출되었다. 비단수출로 거액의 돈을 번 낙랑인들이 생겨났고, 중국 본토에서 사치품을 파는 상인들이 그곳으로 몰려왔다. 낙랑은 중원에서도 최고의 상품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실로 한국 고대인들에게 한군현의 중심지인 낙랑군의 문화적 경제적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낙랑군은 한반도에 중국의 제품을 공급하는 PX 역할을 했다.

낙랑군의 상류층 중국인들은 중국본토의 가구와 장신구 등을 사용하였다. 칠기장 가운데는 멀리 사천성의 국영공장에서 제작한 것도 있었다. 0.5t이 넘는 거대한 목관도 본토에서 실어와 사용한 탓에 폐퇴관리라는 악명까지 듣는 사람도 있었다. 중국의 화려한 비단과 쌀, 밀가루, 식용돼지, 거대한 서역산 군마가 들어왔다. 그들의 생활은 고구려인이나 삼한(三韓, 진한 변한 마한)인들에게 무한한 경이와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낙랑을 통해서 처음으로 금은을 보고 유리구슬을 만져 보았다.

어린 시절 나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부산진구 하얄리아부대에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군속이었던 동네 아저씨의 손을 잡고 그곳을 구경했다. 보이는 차는 모두 커다란 외제차였고, 보이는 사람들도 우리와는 다르게 생긴 키가 큰 사람이었다. 아저씨와 PX 안으로 들어가 큰 박스를 보고는 뭔지 물어봤다.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바로 에어컨이었다. 당시 집 1채 가격이고, 전기가 모자랐던 그 때 우리에게는 무용한 물건이라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곳은 맥주 초콜릿 주스 등을 비롯하여 양주 담배 화장품 과자류 그리고 청바지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는 만물상이었다. 아무리 어렸지만 문화적 충격을 받은 터라 기억이 생생하다.

다시 고대로 돌아가자.'삼국지'위서 동이전을 보면 삼한인들이 제멋대로 사절을 자칭하며 낙랑군으로 몰려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명의 맛을 본 사람들은 그것에 취했다. 그들은 낙랑이란 외국시장에 보따리 장수를 하러 왔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오기도 했다. 그러한 사절들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당시 삼한은 100개 정도의 소국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낙랑은 한반도에 많은 선물을 주기도 했다. 보다 발달된 벼 재배 기술, 금은 광산의 개발·제련 기술, 탄탄하고 깔끔한 회도토기 제조 기술이 들어와 생활에 큰 변화를 주었다.

후한 말 황건적의 반란으로 중원이 끝없는 무정부 상태에 들어서자 기존 철 생산이 마비되었다. 위·촉·오의 만성적인 전쟁이 지속되던 삼국 시대가 되자 철의 수요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것은 한반도로 바로 파급되었다. 철산을 찾아 한반도를 다니는 중국인들이 늘어났고, 드디어 김해지방에 철산이 터졌다. 중원의 무한한 철의 수요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철산지로 변모시켰다. 김해에서 대방군과 왜국으로 철이 수출되었고, 철덩어리는 화폐가 되었다. 여기에 낙랑의 채광·제철기술이 크게 기여했다. 한국 고대의 본격적인 철기 사용은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낙랑의 문화는 고구려의 묘제에도 큰 변화를 주었다. 낙랑이 병합된 이후 고구려에 거대한 봉토분이 생기기 시작했고, 무덤의 거대한 방을 벽화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구려 고분벽화가 여기서 탄생했다. 낙랑인들은 단검이 아니라 장검을 사용하였다. 고구려와 삼한인들은 처음에 청동단검을 알고 있었을 뿐 철제 장검은 몰랐다. 단검은 상대방에 가까이 다가가서 찔러야 하지만 장검은 그보다 떨어져서도 큰 상처를 줄 수 있었다. 여기서 전투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 실로 낙랑군은 문화적 경제적으로 막대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고대 한국에 주었다. 금과 철 그리고 쌀의 본격적인 생산은 한국 고대가 실질적인 왕국으로 발전하는 초석이 되었다.

300년대에 들어가면서 중원은 다섯 종족의 북방 유목민들이 세운 16개의 나라가 쉴새없이 생겨나고 사라졌다. 중원이란 어항에는 먹이사슬이란 생존의 순환 고리가 없었다. 모두 육식성 물고기였기 때문이다. 하나가 살아 남을 때까지 싸웠다. 영원이 빠져나올 수 없는 무간도(無間道)로 보였다. 중원과 교류를 통해 그 명맥을 이어오던 낙랑군 본연의 역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다 발전된 중국의 문화가 들어오지 않았고, 그 와중에 많은 낙랑의 유민들이 고구려 백제 등으로 흡수되었다. 313년 최후의 날이 올 시점에 낙랑군은 전혀 이용가치가 없는 그러한 곳이 되었다. 고구려가 낙랑을 합병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낙랑군은 한반도에서 404년간 존재했다. 만일 그것이 부정적인 역할만 했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존재했을까. 우리의 국사교과서는 낙랑군을 몰아내야할 외세의 식민지로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색안경을 끼고 한국 고대사를 볼 때 오는 착시현상이다. 낙랑군을 접수한 고구려인들은 결코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현대인들보다 더욱 현대적인 사람들이었다.

고구려 미천왕 시절 낙랑군은 사라졌지만 많은 중국인들이 남았다. 중국문명을 체화한 그들은 고구려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고구려는 그들을 차별한 흔적이 없으며, 오히려 우대한 느낌이 강하다. 낙랑인들은 고구려의 해외 상업과 외교 나아가 정교한 가공을 필요로 하는 수공업에 종사했다. 세계에 존재하는 벽화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안악 3호분의 벽화의 주인공은 중국인 관리 출신이었으며, 357년에 그것을 그린 사람도 낙랑계 장인이었다.

아직 우리나라 주요도시와 전략거점에는 빠짐없이 미군부대가 있다. 북한이 힘을 잃은 지금 그들의 존재가치는 과거보다 떨어졌다. 보다 정확히 말해 생활수준이 올라간 지금의 우리는 그곳에 대한 관심이 멀어져 있다. 일부에서는 미군의 철수를 부르짖고 있고, 현 대통령도 한때 그러한 암시를 한 적도 있다. 지금 미군은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르는 전쟁을 하고 있다. 병력이 모자라 북극권인 알래스카 주둔 미군도 무더운 사막의 땅으로 보내지고 있는 지경이다. 현재 병력 부족에 시달리는 미군은 언제든지 떠나야 될 형편이다. 물론 한국인이 원한다면 그것은 앞당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미군이 떠난다면 우리에게 오게 될 손해가 너무나 막대하다. 미군의 철수는 국제 신용등급 하락을 가져올 것이 틀림이 없고, 한국의 주가 폭락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하다. 우리가 아니라 외국투자가들이 안보에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원화의 가치하락으로 이어질 것이고, 힘들게 축적해놓은 우리의 부는 증발해버린다. 여기서 고구려인들의 사례는 오늘날 우리에게 소중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중국 혼란이 장기간 지속되자 비교적 안정된 고구려로의 인구 유입이 늘어났다. 낙랑의 사례를 보고 배운 고구려는 기회만 있으면 중국인들을 유치하려고 애를 썼다. 중국에서 명망이 있는 인사나 관리들이 망명을 하면 어김없이 관직을 주었으며, 그들이 중국 본토와 교류하는 것을 결코 방해하지 않았다. 중국의 명망가들은 대부분 가솔과 아래에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왔고, 고구려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모국의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고구려는 외국인 거류지역인 평양부근의 지방에 더 많은 자유를 준 것이 확실하며, 거의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고구려는 고대에 인구 500만 명의 내수시장을 만들어 냈다.

도대체 어떤 외국인이 정부가 간섭하고 개입하는데 그곳에 사업을 하거나 살기 위해 오겠는가. 사실 우리 역사에서도 사업가들을 피곤하게 했던 시대는 조선과 대한민국밖에 없었다.

 


<3> 전쟁 수요와 이민자 입대
조국이 꿈을 주지 못하는데 떠나는 젊은이를 원망하랴
미국 시민권 얻으려다 이라크서 전사한 한국 젊은이
당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신라인 설계두
타국의 전쟁에 뛰어들면서까지 이들이 얻으려 했던 것은
광활한 시장의 무한한 기회였다

    

 

① 2007년 11월 27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비치 알링턴 묘지. 이라크전 전사자가 묻히는 곳이다. 한국인 유학생으로 이라크전에 참전 중 사망한 김정진 씨도 여기 묻혔다.

최근 미국은 만성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북극 부근에 위치한 알래스카 주방위군을 사막의 햇살이 내리쬐는 이라크에 배치했다. 군 입대를 통해 시민권을 취득한 불법 이민자의 수도 증가했다. 미군 당국은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영어 적성검사 통과 기준을 크게 낮춘 바 있다. 2002년 부시 대통령이 시민권 취득을 용이하게 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하면서 불법 이민자의 군대 지원율은 4배 이상 증가했다.

나아가 미 국방부는 미군에 지원할 경우 시민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해외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모병 사무소가 가장 먼저 개설되는 지역으로는 인도 델리가 거론되고 있다. 미 국방부가 이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최근 미국인 입대 지원자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식은 취업이 어려운 우리 한국의 젊은이들을 들뜨게 했고, 불법체류가 많은 한인사회를 들썩이게 했다. 모병소에 하루에 몇 천 통씩 문의전화가 쇄도했고, 모병소 업무가 마비될 상황까지 이르렀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2005년 1월 현재 미군 내 6만9300명의 이민자가 복무하고 있으며 이중 한인 미군의 비율은 2.8%에 달한다고 한다. 비시민권자 신병들은 주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전장에 배치되며, 위험한 보직을 맡게 된다. 그들 가운데 전사자도 적지 않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획득하고, 직장을 가지기 위해 미군에 입대한 한국인 유학생 부부가 있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간 김정진(23) 씨는 하와이 퍼시픽대학(HPU)에 다니다 부인 김영아 씨를 만나 2001년 8월 결혼했다. 그는 2004년 4월 미군에 입대했다. 하와이 호놀룰루 경찰을 꿈꿨던 그의 입대 동기는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미국 시민권을 얻는 것이었다.

    ② 526~536년 무렵 남조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 사절을 그리고 해설한 '양직공도'.중국 남경(南京) 박물관 소장.

 

당나라 하급 장교였던 설계두의 모습이 서서히 그려진다.
'부부 군인은 같은 지역에 배치될 수 있다'는 말에 김영아 씨도 남편을 따라 입대했다. 이들은 동두천에서 잠시 함께 생활했으나 남편이 이라크로 파견되자 이별을 해야 했다. 부인은 첫아이를 가진 만삭의 몸이었다. 김 이병은 2004년 10월 6일 현지 작전 도중 저항세력의 총격을 받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들이 태어난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2004년 12월 미국정부는 전사한 고(故) 김정진 이병에게 '사후 시민권'을 수여했다. 그의 죽음은 당나라로 건너가 입대하여 전사한 어느 고대 한국인의 슬픈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645년 6월 안시성 앞 주필산, 고구려군과 당나라군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다. 양군을 합쳐 10만 이상의 병사들이 뒤엉켰다. 그 넓은 지역이 좁아보였다. 군마와 인간이 일으키는 먼지가 땅과 하늘에 자욱했다.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죽은 자들의 시신이 땅에 밟혔고, 살아남은 병사와 군마들은 모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 날 당군의 진영에서 영웅이 되기로 결심했던 두 사나이가 있었다. 설인귀와 설계두였다. 설인귀는 주필산 전망대에서 지켜보는 황제의 눈에 띄기 위하여 아예 전신에 흰옷을 입었다. 그는 맹활약을 하여 황제의 주의를 끌었다. 당태종은 전투 중에 그의 이름을 알아오게 했다. 신라인 설계두도 고구려군 진영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는 황제의 눈에 띄지는 못했지만 함께 싸웠던 모든 병사들이 그의 활약을 보았다. 전투가 끝난 후 병사들은 그를 그 날의 최고 공로자로 뽑았다.

신라인 설계두는 태종 앞으로 불리어갔다. 설계두가 진실로 바라던 바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걸어서 간 것이 아니라 들것에 실려 갔다. 활에 맞고 창에 찔려 피가 낭자한 상태였다. 그는 고구려군의 진중에 너무 깊이 들어갔다가 빠져 나오지 못하고 그 곳에서 전사했다. 태종은 설계두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의 소원이 장군이 되어 황제를 보좌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듣고는 어의를 벗어 덮어 주고 장군으로 추존했다. 설계두는 죽어서 꿈에 그리던 장군의 자리를 얻었다.

설계두가 청소년시절을 보냈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양국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에 희생되고 있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쟁에서 무용을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신분이 야망에 발목을 잡고 있었다. 설계두의 집안은 신라에서 6두품 신분의 귀족이었다. 왕족인 진골이 아니었다. 신라에서 모든 장관직과 장군직은 진골귀족이 독점했다. 그는 이 전쟁에서 진골귀족들을 위해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카스트적 골품제는 피를 따지기 때문에 현대에 학벌을 중시하는 것보다 훨씬 엄격했다.

    故 김정진 씨

 

신라는 주변국에 비해 왕족 숭배의 경향이 강한 사회였다. 사람들은 고귀한 출신성분에 대해 종교적 숭배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왕과 진골귀족을 조상을 받들 듯 존경하였고, 하늘이 내려준 그 지위를 감히 넘보려 하지 않았다.

평생 진골귀족의 그늘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621년에 설계두는 아무도 몰래 당으로 향하는 배를 탔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초기의 당은 너무나 미약한 나라였고, 북방 유목민인 동돌궐에 대하여 굴욕을 감수해야 했던 당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당고종은 물론이고 천하의 영웅 당태종도 동돌궐 칸에게 코를 땅에 대고 절을 해야 했다. 그때 동돌궐의 세력 범위는 동쪽으로 만주 일대까지, 서쪽은 지금의 청해성과 신강성 동부에까지 펼쳐져 있었다. 설계두는 이 기간 당에서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초원의 돌궐인들 사이에서 내전의 불길이 맹렬하게 타고 있는 가운데, 630년 당태종은 초원으로 침입하여 힐리칸을 생포했다. 동돌궐의 체제 몰락과 당의 패권장악은 설계두에게 기회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운명의 여신은 창녀인가? 그녀는 누추해진 그를 향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630년 이후 당에 항복한 돌궐인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10만 명으로 추산되는 유목민들이 당에 대거 들어왔던 것이다. 그들은 아주 훌륭한 기마전사 집단이었다. 당은 이들을 동원하여 주변의 토욕혼, 실크로드의 고창국 등을 멸망시키고 사천지방을 침공한 토번을 격퇴한다. 산이 많은 신라에서 자라난 설계두의 기병 전투능력은 돌궐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넓은 평야나 초원지역에서 일어난 이 14년 동안(630~644)의 전쟁에서 설계두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냥 세월만 흘러갔다. 그렇다고 해서 희망이 전혀 없는 신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640년 당이 실크로드에 위치한 고창국을 멸망시킨 후 고구려 침공에 대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설계두가 20세에 신라에 건너왔다면 40세가 된 시기였다. 당시로 볼 때 중년을 지나 노년기에 접어든 나이었다. 마지막 희망이 보였다. 644년 당의 고구려 침공이 공식 결정되었고, 병사들을 모집하는 공고가 전국에 나붙었다.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왔다. 하지만 이미 40대 중반, 당시론 노년이 된 설계두였다. 모집하는 측에서 나이를 문제로 삼았다. 하지만 설계두는 자신이 신라인이라 산성의 나라 고구려의 전투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자신의 역량을 밝혔다. 과의(果毅)라는 관직을 받았다. 전투에서 가장 앞장을 서는 하급 장교직이었다.

645년 봄 당의 모든 병력은 북경에 집결했고, 요하강을 향해 출발했다. 그 하구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강이 가로 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100리에 달하는 광활한 늪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한대지방이지만 갈대가 아주 무성하고 키가 컸다. 기름진 곳이었다. 그 넓은 지역에 발에 밟히는 것이 온통 사람의 뼈였다. 과거 수대 고구려를 침공하다 전사한 중국인 병사들의 그것이었다. 설계두와 병사들은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밤이면 갈대 사이로 인을 뿜는 해골의 광채가 보였고, 얕은 물 속에서도 걸레 같은 시신들이 홍수에 떠내려 온 나무토막처럼 쌓여 있었다.

요하강의 소택지를 건넌 당군은 요동성 백암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에 다가섰다. 설계두가 속한 부대도 여기에 있었다. 북부 욕살 고연수 등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왔다. 15만의 규모였다. 고구려군은 이세적의 군대만을 보고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장손무기와 당 태종이 고구려군의 후면과 측면에 협공을 가했다. 이때 후퇴하던 이세적의 장창보졸(長槍步卒) 1만이 갑자기 등을 돌려 고구려군을 향해 다가갔다. 밀집된 장창을 세운 보병대열은 고슴도치와 같았다. 장손무기 휘하의 우진달이 이끄는 돌궐기병이 고구려군에 충격을 주는 망치라고 한다면 중국인으로 구성된 이세적의 장창보병은 모루였다. 당은 안시성 앞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중국인 보병과 유목민 기병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전력의 효율성을 극대화시켰다.

설계두는 이 전투의 초반에 전사했다. 그가 속한 이적의 부대는 고구려군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로 던져졌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처음에 고구려군의 진중에 깊이 들어가 싸우다가 밀려 퇴각하는 연기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해야 할 몫이었다. 고구려군을 당군의 포위망에 들어오게 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던 것이다. 초반에 투입된 설계두는 자신의 공명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당태종은 자신의 옷을 벗어 설계두의 시신 위에 덮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못 다한 꿈을 두고 죽어간 이국인이 정말 불쌍해서였을까. 어떻든 그는 자신의 일처럼 마음 아파했다. 태종은 설계두의 마음을 깊이 이해한 것이 분명하다. 태종은 마음 속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법도 하다. '이제 자네는 자유야! 저 세상에는 골품제란 신분제는 없거든'.

신라인 설계두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당나라로 갔다. 그는 진골귀족 다음 가는 6두품 귀족으로서 신라에서 관직을 가질 수 있었고 이럭저럭 먹고 살 수도 있었다. 능력에 따라 고위직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참을 수 없었다. 여기에 비해 김정진 씨는 현대 미국 사회에의 일원으로 경찰 공무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는 출세가 아니라 안정된 삶을 원했을 뿐이다. 하지만 공통점도 있다. 절망의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것이다. 병역 기피자인 설계두에게는 고향 땅에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었고, 유학생인 김 씨에게는 미래의 부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래서 둘은 체류지인 타국의 전쟁 인력 수요가 극대화된 시점에, 죽음으로 가는 문턱일지라도 희망이 있는 군대를 선택했다. 비극은 다양성이 인정 되지 않은 조국의 좁은 시장에서 배태되었다. 그러한 곳에서는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1360년의 시차가 나지만 양자는 기회가 널려있는 당제국과 미제국의 광활한 시장 속에 살아가기를 원했다.

 


<4> 愛國했지만 죄인이 된 자 -로버트 김과 신라인 우로
대한민국이여! 조국 사랑한 죄를 묻지 않게 하소서
고국 걱정에 美정보 넘겨주다 스파이로 몰려 복역한 로버트 김
왜로부터 신라 지킨 우로 위선적 귀족들 탓에 처참한 최후
힘없는 나라의 권력은 비굴 애국자 안위조차 못지켜

    미국에서 국가기밀 유출혐의로 수감됐다 풀려난 로버트 김(오른쪽)이 2005년 11월 입국하며 미 해군정보국 근무시절 기밀을 넘겨준 백동일 예비역 대령과 포옹을 하고 있다. 국제신문 자료사진

 

강릉 앞바다에서 북한 잠수함이 좌초했다(1996년 9월 18일). 잠수함에서 내린 북한 특수 요원들은 태백산맥으로 올라갔고, 한국군과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무관으로 근무하던 백동일 대령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무관은 정보의 세계에서는 '화이트(White)'로 불리는 공개된 스파이다. 미국은 여러 곳을 전전하며 첩보를 수집하는 백 대령을 'Inquisitive officer(캐묻는 장교)'라 불렀다.

한국은 대외정보의 90% 이상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북한 핵문제로 양국은 상당히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북핵으로 최대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정작 한국이었지만 북미 간의 회담내용이나 북한의 정보에 대해 무지했다. 백 대령의 머릿속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길을 걷던 조국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백 대령은 로버트 김이란 사람을 만났다. 그는 당시 미 해군정보국(ONI)에서 19년 동안 근무해왔던 재미 한국인이었다. onI는 세계 각처에서 수집한 첩보를 취합, 분석하는 곳이다. 로버트 김 또한 조국의 현실을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이 북한에 대한 올바른 정보도 없이 대처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의도하지 않은 돌발적인 파국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만남이 있은 후 로버트 김은 자료를 우편으로 보내주기 시작했다. 전달한 정보들은 휴전선 부근의 북한군 배치 실태나 무기 수출입 현황, 해군의 동향 등이었다. FBI는 로버트 김이 미 해군의 기밀문서 30여건 이상을 넘겨주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1996년 9월 24일, 로버트 김은 북한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신라의 전쟁 영웅 우로가 최후를 맞이한 동해안 '유촌'과 멀지 않은 현재의 포항시 북구에서 발견된 영일냉수리신라비.

 

로버트 김은 법정에서 자신이 미국 시민이면서 법과 정보요원의 규율을 어기고 정보를 누설한데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그 죄를 기꺼이 받겠다고 했다. 1997년 7월 '국방기밀취득음모죄'로 징역 9년과 보호관찰 3년을 선고받았다. 그에게 더 가혹한 시련을 준 곳은 그가 사랑하던 '조국'이었다. 로버트 김이 체포되자 당시 한국정부는 "우리와는 관계도 없고, 우리는 관심도 없다. 미 사법당국에 넘어간 이상 미국 법 집행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등의 방관적인 입장을 취했다. 우리 정부는 무책임한 '죄악'을 선택했다. 백 대령도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그는 로버트 김에 대한 미안함을 안은 채 미국에서 추방되었고, 2001년 1월 말 군복을 벗었다. 고대 신라에도 이러한 일이 있었다.

3세기 초반의 어두컴컴한 어느 날, 영웅 우로(于老)는 신라왕궁인 반월성에서 석 씨 나해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두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가난한 나라 신라였다. 계속된 전쟁이 모든 힘을 빼 놓았다. 언제나 거듭된 왜인들의 약탈과 방화 때문에 사람들은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웠다. 반월성의 성채는 흙과 목책으로 이루어진 토성에 불과했다. 빈곤은 왕이 정치적 힘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종기였다.

230년 아버지 나해왕이 사망한 후 왕위는 사촌형인 조분에게 돌아갔다. 신라귀족들은 진정한 왕이 되고자 하는 왕을 보기 싫은 경쟁자로 여겼다. 석 씨, 박 씨, 김 씨족들은 서로 왕을 배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투었다. 왕들은 언제나 외부의 적과 나라 안의 귀족들과 싸웠으며, 그들 안팎에는 언제나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평화는 없었다. 가장 충성스러워야 할 자들이 가장 불충한 짓을 했다. '음흉하고 강력하고 거칠고 제어할 수 없고 탐욕스러운' 귀족들이었다.

232년 동해안에 왜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적들은 거침없이 진격하여 신라의 왕경으로 들이닥치자 사람들과 군인들은 왕성(반월성)에 모두 들어가 피신했다. 이윽고 왜군이 그 주위를 포위했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왕과 귀족들은 왜군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왜군이 물러갔다. 하지만 그들은 이듬해(233) 5월에 다시 동해안 지역에 나타났다. 두 달 뒤인 7월에 가서야 우로가 병력을 이끌고 출동했다. 늑장을 부렸다기보다 병력 출동을 결정하는데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병력은 각각 귀족의 휘하에 있었고, 왕은 그들을 설득하여 병력을 모아야 했다. 그 동안에 해안가의 백성들이 죽어나갔다. 지금도 우리 정부의 늑장 대응으로 피해를 보는 국민들이 얼마나 많은가.

싸움터는 사도(沙道, 현재 영일)라는 곳이었다.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난 내리막 모래사장에 왜군의 배가 머리를 박아놓고 있었다. 배와 배 사이에 천막을 걸쳐서 막사를 만들었다. 우로의 군대가 다가오자 왜군은 그것을 막아내기 위해 막사 앞에서 밀집대열을 가다듬었다. 저녁이라 육풍이 불 때였다. 높은 쪽에 있었던 신라군은 공처럼 생긴 큰 불덩어리를 내리막으로 굴렸다. 불덩어리가 왜군을 덮쳤고 그들이 타고 온 뱃머리와 그 사이에 있는 막사가 화염에 휩싸였다. 몸에 불이 붙은 왜군들은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244년 우로는 왜군을 격퇴한 영웅으로 대우를 받게 되었고, 어느 듯 카리스마 소유자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실수는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사촌인 조분왕이 죽고 첨해왕(247~261)이 왕위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왜국의 사신의 접대를 맡은 우로는 "조만간에 너희(倭)왕을 소금을 만드는 노예(鹽奴)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婢)로 삼겠다" 라며 그를 희롱했다. 분개한 왜 사신은 그 사실을 신라왕에게 거세게 항의 했으며, 그 말을 전해들은 왜왕은 군대를 일으켜 신라로 쳐들어왔다.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였다. 신라 조정의 분열상을 잘 알고 있었던 왜왕은 전쟁영웅인 우로를 이번 기회에 제거하고 싶었다.

왜군의 침공 소식을 접한 첨해왕은 군대를 소집하기 위해 귀족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회의석상에 침묵만 흘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우로와 함께 자신이 속한 씨족의 병력만 이끌고 왜군이 있는 동해안으로 갔다. 겨울에 병든 개처럼 사기라곤 없었다. 우로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 왕과 우리 씨족원들이 함께하고 있지만, 그들도 나를 위해 싸울 마음은 없다. 싸운다고 해도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패배할 것이 뻔하고, 우리 씨족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동해안가 유촌(柚村)에 이르자 우로가 첨해왕에게 말을 했다. "지금 이 환난은 제가 자초한 것이니 스스로 책임지겠습니다." 그리고는 단신으로 왜군의 진영으로 갔다.

우로가 자청했다고 하지만 홀로 왜군의 진영에 가도록 허락한 것은 그야말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이었다. 우로는 투기장에 내던져진 사형수였다. 우로가 오자 왜인들은 그를 포박하여 바닷가로 끌고 갔다. 그리고 치죄를 하기 시작했다. 우로가 대답했다. "나는 그저 술자리에서 농담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비명이 들렸다. 왜인들은 우로의 다리를 포박하고 무릎 뼈를 빼냈다. 그리고 그를 넓적한 돌 위에 기어가게 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잠시 후 우로의 머리가 모래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암매장되었다.

왕과 귀족들은 우로를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위험 속에 그대로 버려두었다. 그들은 왜군의 손에서 전왕의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알고서도 방관했다. 우로의 죽음은 신라 상층사회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분열되어 있으며, 위선적이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공범인 그들은 너무나 조용했다. 이는 조국을 위해서 일했던 로버트 김이 창살에 갇혀 연금을 박탈당하고 변호사비용으로 남은 가산을 다 잃어버렸는데도 철저히 외면 했던 우리 정부의 처사와 다르지 않다.

우로의 아내(妻)는 남편의 시신을 찾으려고 처절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우로의 영혼이 겪게 될 기나긴 고통을 생각하면서 괴로워했다. 당시 사람들은 죽는 것 보다 매장되지 않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우로가 그의 조상들의 묘원에 묻히기 전에는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남편이 어디에 암매장되었는지 알고 있는 어떤 왜인에게 접근했다. 그는 신라조정에 남겨진 왜왕의 연락책이었다.

우로의 처가 그 왜인에게 말했다. "우로의 시신이 묻혀있는 곳을 그대가 말해준다면 나는 그대의 첩이 되겠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살인자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던 그녀는 남편의 시신을 찾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증오를 감추는 법을 배웠다. 거만하던 왜인은 그녀에게 만큼은 관대하고 부드러워졌다. 그는 그녀에게 우로의 시신이 묻혀있는 곳을 불었다. 그러자 일격이 가해졌다. 그녀는 사람을 시켜 바로 그 왜인을 죽였다. 그리고 남편의 시신을 찾아 매장을 했는데, 그 왜인을 우로의 관 아래에 묻었다('삼국사기' '일본서기').

우로의 죽음과 그 처의 복수에 대한 기록이 한국과 일본에 동시에 남아있다. 당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우로의 비극이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로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로의 처의 복수는 곧장 왜에 전해졌고, 왜왕이 다시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침략했다. 바다 위에 왜선이 가득한 것을 본 신라왕과 귀족들은 겁이 났다. 그러자 그들은 회의를 열었다. 올바른 해결책을 내놓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책임을 분산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왕과 귀족들은 우로의 처를 불렀다. 그들은 왜군의 침공을 그녀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그 조국을 위해 싸웠던 자의 여인이 남편을 사랑했다는 죄로 처형되었다. 신라의 왕과 귀족들은 그 가냘픈 여인의 시신을 왜왕에게 조아리며 바쳤고, 왜군은 물러갔다.

로버트 김의 사건으로 가장 피해를 본 사람 가운데 하나는 백 전 대령이었다. 로버트 김이 수감되어 있는 7년 반 동안 그의 마음도 창살 안에 있었고, 조국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죄목으로 철저히 외면당했다. 정작 한국의 위험을 나 몰라라 하던 미국 정부는 한국 국방부에 백 씨를 진급시키지 말 것을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청으로 그 유능한 백 전 대령을 장군으로 진급하지 않고 전역시키는 비굴함을 보여주었다. 우로의 죽음과 로버트 김 사건은 1750년이란 장구한 시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두 사건은 우리에게 조국에 대한 어떤 강력한 의구심과 바람을 동시에 전해주고 있다. "조국 당신을 사랑해도 됩니까? 우리는 조국을 사랑한 죄를 묻지 않은 강한 나라에 살고 싶습니다."

 


<5> 고구려와 현대재벌
시장의 붕괴는 '분열 왕조'의 몰락을 재촉했다
'왕자의 난'으로 쇠락한 고구려와 현대가문은
교역침체·환란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했다

    

 

2003년 8월 8일 서울아산병원 잔디광장에서 열린 고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영결식에 정몽준(왼쪽) 의원과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조문객을 맞고 있다.주가 폭락으로 상속 분쟁에서 밀린 정몽헌은 결국 자살로 모든 것을 내던져 버렸다. 국제신문 DB

"저의 후계자는 '몽헌'입니다"라고 정주영 왕회장이 선언했다.

한국 재계 1위인 현대가문의 상속을 놓고 일어난 분쟁에서 승자가 결정되는 순간 이었다. 2000년 3월 27일 당시 현대는 자산 88조 6490억 원을 보유한 국내 최대의 기업집단이었다. 삼성(67조 원)과는 20조 원 이상 격차를 두고 있었다. 동생 몽헌이 형 몽구를 누르고 현대그룹의 회장이 되었다. 세간에서는 현대그룹 '왕자의 난'이라고 불렀다.

결정권자 왕회장은 두 아들을 경쟁시켰다. 숙제를 던져놓고 누가 잘하나 그때마다 평가를 내렸다. 1974년 현대자동차서비스를 처음 맡은 형은 이후 정공 강관 인천제철 등을 자신의 몫으로 가져갔고, 현대정공 등을 우수 기업 대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는 초창기 대북사업과 제철사업의 실패로 아버지에게 점수를 잃었다.

이에 비해 동생은 승승장구했다. 현대전자를 설립하고 반도체산업에 뛰어들면서 경영자의 길로 들어섰다(1984년). 반도체 호경기에 힘입어 그는 아버지로부터 수완을 인정받았다. 형이 관장하던 현대종합상사를 자신에게로 가져오기도 했다(1997년). 그 직전에 형은 아버지에게 큰 선물을 받았다. 현대자동차였다(1996년 1월).

둘은 1998년 공동회장으로 취임했다. 서로 아버지의 최종 낙점을 받으려고 싸움에 들어갔다. 동생은 금강산사업, LG반도체와의 빅딜 등을 모두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면서 아버지의 신임을 더욱 받았다. 동생이 외국출장을 간 사이에 형이 현대증권을 장악하려고 시도했다(1999년 말). 돈줄 없이는 거대한 제조업을 운영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귀국한 동생이 아버지를 찾아가 형의 부당함을 알렸고, 나아가 형을 방출하는 데 성공했다.

왕회장은 현대자동차 주식을 사들여 총 9%의 최대 개인 대주주가 되었다(2000년 5월 25일). 여기에 동생 측이 보유한 지분 2.8%까지 합친다면 총 11.8%에 달했다. 그것은 동생이 현대자동차 인수를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형은 결사 항전에 나섰고, 중립을 지키던 또 다른 동생 몽준(현대중공업 오너)이 여기에 가세했다. 몽헌 소유의 현대건설과 현대상선이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19.5%)가 되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이들의 저항에 힘을 실어준 것은 시장이었다.

현대재벌의 지배권을 장악한 듯 보였지만 동생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4월 현대투신 부실, 5월 현대건설 유동성 위기로 이어지는 일련의 '현대쇼크'에서 시장은 거부 메시지를 발신했다. 1차 현대쇼크 때 증시는 이틀간 45.13포인트 폭락했다(4월 26~27일). 2차 현대쇼크 때는 5월 26일 단 하루에 무려 42.87포인트가 빠지는 대폭락을 연출했다. 시장에서 30조 원(주식 시가총액기준)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30조 원'은 다름 아닌 시장(주주와 투자자)의 무언의 시위였다. 정치가 아니라 시장의 힘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고, 그것은 세계적인 추세였다.

현대의 상속분쟁은 치명적이 독이 되었다. 그것도 적통인 동생에게 유난히 가혹했다. 2003년에 가서 동생은 자금사정 악화로 계열사 중 하나도 직접 지배하지 못했다. 현대건설과 하이닉스의 기존 지분은 모두 포기 또는 소각됐고, 현대종합상사 지분도 이사회의 감자(減資) 결의에 따라 소각되었다.

제대로 흑자를 내는 '알토란' 같은 계열회사가 없었다. 현대엘리베이터와 현대상선, 현대증권은 천문학적인 적자를 기록했고, 대북(對北)사업을 주도해온 현대아산은 1999년 출범 이후 여섯 차례 증자를 통해 4500억 원의 자본금을 충당했지만 모두 잠식돼 사실상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동생의 현대그룹은 재계 서열 20위권 밖의 중견 소(小)그룹으로 축소돼 내리막길을 걸었다.

현대아산도 재기는 불가능했다. 금강산 관광사업의 부진, 북한 핵문제로 인한 남북 냉각기류가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 정권이 바뀌자 정치권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150억 원 대북비자금 조성 의혹사건과 관련, 검찰에 불려가 출퇴근 조사를 받는 등 10여 차례의 검찰과 법원에 출두를 해야 했다. 12시간이 넘는 강도 높은 취조도 있었다. 직후 2003년 8월 4일 새벽에 과거 10만 명의 직원을 거느렸던 기업집단의 총수는 자살했다.

검사와 수사관들이 번갈아 돌아가며 이른바 '돌림빵 추궁'을 했고, 전화번호부와 같은 두꺼운 책자로 정 회장의 머리를 내리치면서 협박과 모욕을 했다는 말도 나왔다. 대북문제에 그를 적극 끌어 들인 정치인은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그 후임자들은 검찰을 시켜 그에게 수치를 안겨주게 했다. 정몽헌 회장의 죽음은 세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독일에서 그를 연상케 하는 오페라가 초연되었다.

충격적인 사건은 어떠한 형태를 통해서건 기억되는 것인가. 국왕이 외국사신에게 폭행을 당한 기록이 '북사' 고구려전에 남아있다. 552년 9월 고구려의 왕경 평양에 북제(북중국)의 황제 고양(高洋)이 보낸 사자가 도착했다. 그는 최유(崔柳)라는 사람이었다. 17세였던 양원왕은 그가 왜 고구려에 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왕은 북제 사신 최유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최유의 눈에 핏줄이 섰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왕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것도 모자라 주먹을 불끈 쥐고 거리낌 없이 왕에게 다가갔다.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왕이 그 자리에서 떨어졌다.

더욱 기이한 장면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왕이 최유의 주먹에 맞아 용상에서 떨어졌는데도 누구하나 그 불경한 사신을 제지하지 않았다. 대전에 있던 모든 고구려의 신하들이 숨소리를 죽이고 감히 꼼짝하지도 못한 채 사죄를 한 것이다. 왕이 외국사신에게 폭행을 당해 쓰러졌는데도 누구하나 분노하는 사람이 없었다. 도리어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사과를 했다. 그리고 사신이 요구한 대로 과거 북위(북중국)에서 넘어온 유민 5000 호를 되돌려 주었다. 고구려사에서 이렇게 국왕이 수모를 당한 적은 없었다. 북제 사신의 노골적이고 극단적인 표출에는 이유가 있다. 당시 고구려는 내분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531년 고구려 안장왕이 신하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리고 안원왕이 즉위했다. 그에게는 3명의 왕비가 있었다. 모두 세력을 가지고 있던 집안의 딸들이었다. 불행하게도 정부인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러니 왕위를 이을 왕자는 중부인과 소부인의 소생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중부인이 먼저 왕자를 생산했고, 이어 소부인도 왕자를 낳았다. 중부인의 왕자가 일단 왕위를 이을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소부인 측에서도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안원왕이 임종의 침상에 눕자 왕위 계승을 놓고 분쟁이 터졌다. 546년 1월 중부인과 소부인의 친정 집안사람들이 각기 병력을 거느리고 궁문에 도착했다.

평양성의 궁궐 앞 정문에서 중부인의 군대(추군)와 소부인이 군대(세군)가 대진했다. 왕궁을 선점하는 것이 전략적 목표였다. 병력의 규모는 수천 명이었다. 서로 자신들이 세운 왕자가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이 오고 갔다. 이때는 큰 방패를 든 병사들이 전열의 앞에서 서 있었고, 화살이 오고갔다. 전투는 3일 밤낮 지속되었다.

궁궐의 문 앞에서 벌어진 시가전은 야전에서 벌어진 전투와 양상이 다르다. 그만큼 장소가 협소하기 때문에 단병접전이 벌어진다. 이때는 긴 창보다 짧은 검이나 도끼가 주로 사용된다. 그러니 전투는 그야 말로 피를 튀기는 백병전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고, 단시간에 많은 희생자가 나온다. 3일간 벌어진 전투는 짧다고 볼 수도 있지만 직접 싸우는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긴 시간이다. 먹을 수도 쉴 수도 없이, 용변을 볼 시간도 없이 밤낮으로 싸운다고 생각해 보라.

추군이 승리했다. 그리고 세군 측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보복이 행해졌다. 소부인 친정집안 사람들이 색출돼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2000명이 살해됐다. 재산이 몰수되었고, 왕경에서 터전을 잃고 추방된 자들도 있었다. 나아가 지방의 장관들이나 성주들 가운데 세군 측과 연계된 사람들도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피해의 범위는 귀족과 그 예속민, 백성들에까지 미쳤다.

백제에게 고구려의 불행은 행복이었고, 잃어버린 한강유역을 수복할 수 있는 기회였다. 백제는 신라에 적극적으로 접근했다. 함께 북진하여 고구려의 남쪽 땅을 점령할 것을 제안했다. 551년 백제는 승리를 거두고 한강하류를 탈환했다. 꿈에 그리던 구토의 회복이었다. 신라도 죽령이북의 고구려 10개군을 차지했다.

현실은 냉혹하다. 553년 한강하류에 신라가 공격을 가했다. 백제군은 그곳을 포기하고 철수를 했고, 신라의 장군 김무력이 접수했다. 한강유역과 함경도까지 힘을 뻗친 신라의 급격한 성장은 고구려의 방어체계에 엄청난 하중으로 작용했다. 고구려는 내전으로 남쪽에 눈을 돌릴 수가 없었고, 이것이 신라의 팽창 요인이 되었다. 앞서 북방의 정세 변화도 여기에 한몫을 했다. 530년 초원의 유목제국 유연이 내분에 들어가 망하고 고구려에 적대적인 신흥 돌궐제국이 등장했다.

현대재벌의 내분은 임종을 앞둔 왕회장의 후계자 낙점과정에서 비롯되었다. 고구려의 내분도 한 여자(正妃)의 출산문제에서 불거졌다. 하지만 양자의 '비극'은 시장의 파괴와 혼란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

고구려의 최대 교역대상국이던 북중국의 북위는 523년 끝이 보이지 않은 내란으로 치달았다. 북위황제의 국제적 권력이 북중국의 작업장과 도시로부터 주변국가로 흘러들어가는 물자통제에서 나왔다면 고구려 국왕의 국내 지위는 북위에서 들어온 교역 물자를 귀족들에게 꾸준히 공급하고 분배하는 능력에 달려 있었다. 장수왕 집권(412년)이후 100여 년간의 기록 가운데 북위와 공무역에 관한 것이 거의 절반이 된다('삼국사기'). 대한민국의 경우 국제금융시장의 혼란 여파로 건국이후 최대의 위기를 겪었다. IMF의 구제차관을 받을 정도로 대한민국은 살인적인 독감을 앓았다.

시장이 파괴된 이후 일어난 고구려의 내분은 외부로부터 전쟁을 불렀고, IMF 환난 이후 현대 재벌의 내분은 주식폭락이라는 시장의 공격을 받았다. 고구려는 패전으로 상당한 국토를 상실했고, 현대 재벌은 주가폭락으로 그 적통이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사무실 좁은 창문틈 사이로 몸을 던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