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직격탄을 맞았다. 밤거리는 동굴처럼 어두워졌다. 서둘러 귀가를 해야 하고 소등도 빨리 했다. 경제는 뿌리까지 흔들렸다. 1975년이 되자 기업들은 외채 상환능력을 상실했고, 부도 직전까지 몰렸다. 현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채를 얻어와 울산조선소에 투자했는데, 선주가 배를 가져가지 않아 나올 돈이 없었다.
하지만 산유국들은 넘치는 오일달러를 항만과 도로 등에 쏟아붓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거대 입찰이 있었다. 페르시아만 주베일에 50만t 유조선 4척을 접안할 수 있는 항만공사였다. 총 금액은 9억3000만 달러, 당시 한국 예산의 절반이었다. 정 회장은 중동이란 정원에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무르익은 과일을 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세계굴지의 서방건설 회사들이 벌써 진을 치고 있었다. 살 냄새를 맡고 몰려온 맹수들처럼 경쟁은 치열했다. 일본의 최대 건설회사인 다이세이(大成)도 못 낄 정도였다. 불과 1000만~2000만 달러짜리 공사를 해오던 현대였다. 내부에서 반대의 소리도 컸다. 그래도 정 회장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폭우와 밀림, 독충과 포탄이 있는 곳에서도 우리는 일을 하지 않았는가?"
공사 총 금액은 12억 달러이지만 최하의 가격을 써낸 회사에게 낙찰된다. 경쟁회사들마다 머리를 싸매고 가격 인하를 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손해를 보고 공사를 할 수는 없었다. 밑지지 않으면서, 가장 싼 가격을 써내야 했다. 현대는 어떠한 회사도 제시하지 못한 가격으로 공사를 따냈다(1975년 2월 16일). 9억 3114만 달러였다. 사우디는 44개월의 공사기간을 8개월 단축시키겠다는 정회장의 제의에 감명을 받았다. 일주일 후 거액의 선금이 입금되었다(7억 리알). 대한민국에 '외환'의 폭우가 내렸다.
공사기간은 36개월이었다. 건설장비는 탈락한 서방의 업체로부터 거의 공짜 가격으로 받았다. 공사 자재의 양은 엄청나게 많았다. 콘크리트가 5t 트럭 20만 대, 철강재가 1만t 선박으로 12척 분량이었다. 어려운 점은 유조선 정박에 필요한 10층 건물 크기의 구조물 89개의 제작과 운반이었다. 가로 18m, 세로 20m, 높이 36m, 무게가 550t이었다. 울산에서 만들어 바지선에 싣고 1만2000km를 항해하여 주베일로 와야 했다. 35일의 뱃길을 19번 왕복했다. 태풍이 발생하는 동남아 해상을 통과해야 했다. 사고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 비정상이었다. 선박과 충돌하기도 했고, 태풍에 떠내려가기도 했다. 그래도 그것이 공사 기일을 늦추지는 못했다. 세기의 대토목 공사가 끝이 났다. 사우디 측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현대의 성취는 한국 건설업 전체에 해택을 주었다. 이후 건설 수주액은 폭증했다. 1976년 24억, 1977년 34억, 1978년 80억, 1979년 60억, 1980년 78억, 1981년 126억, 1982년 113억, 1983년 90억, 1984년 59억 달러였다. 석유 파동을 중동 건설시장에서 벌어들인 외화로 극복했으며, 그 돈은 한국의 발전에 기여했다.
재벌 총수와 고대의 군주는 공통점이 있다. 총수는 다른 기업들과 시장을 놓고 경쟁을 해야 하며, 군주는 유통망을 독점하기 위해 이웃나라와 전쟁을 해야 했다.
광개토왕이 지배하던 고구려였다. 395년 북중국의 강국이었던 후연(선비족 모용씨)이 내몽고에서 북위에게 참패했다. 이를 기점으로 수세에 몰린 후연은 북중국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북위의 왕 탁발규(386~409)의 성공적인 팽창은 후연을 잠식하는 과정이었다. 후연이 결정타를 맞았다는 소문은 요하를 넘어 삽시간에 만주와 한반도 전체에 퍼졌다. 고구려의 가장 큰 라이벌이 정통으로 맞아 다운되어 링 위에 올라오지도 못하게 되었다.
냉철한 광개토왕은 위기와 기회가 한꺼번에 왔다고 판단했다. 잠재적인 강적 북위가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곰이 지방을 축적하듯이 북위가 후연을 멸망시키기 전에 고구려는 덩치를 키워야 했다. 앞서 391년부터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임진강 이남까지 영토를 넓힌 상태였다. 이제 한강 중·상류와 경기만을 점령해야 한다는 목표가 설정되었다. 한강 상류는 백제의 산삼 서식지였다. 백제삼은 고구려의 그것보다 중국시장에서 고가였다.
총수가 기업의 발전을 위해 경쟁을 하듯이 왕도 왕국의 번영을 위해 전쟁을 했다. 발전을 멈추면 망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이 비용 마련이 문제였다. 앞서 왕은 낙랑상인으로부터 전비를 빌린 바 있다. 낙랑지역에 '진'이라는 그의 측근이 살았다('덕흥리벽화묵서'). 왕은 중국인인 그의 중개로 낙랑상인들로부터 전비를 투자받았다. 진은 상인들이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 왜에 중복된 세금을 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왕이 한강 중·상류를 차지하여 속국 신라의 낙동강으로 가는 물길을 뚫고, 인천을 차지하여 서해안을 장악해야 중복된 세금을 1회로 줄일 수 있다고 설득했다. 왕이 남쪽의 맹주 백제를 눌러야 상인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여 자본 회전율을 높이고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인들의 투자금은 왕이 4년 동안 백제전에 쏟아 부어 모두 소모되었다.
전비가 문제였다. 군사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심만을 강요할 수 없었다.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전쟁이 아니라 적의 시장을 차지하려는 싸움이었다. 장기전은 충성심과 무관하다. 돈이 없으면 경쟁국보다 더 좋은 무기도 생산할 수 없고, 무장시키지도, 먹이지도 못한다. 전쟁을 멈추게 되면 빚을 갚을 방법도 없었다.
광개토왕은 생각했다. "호기를 놓칠 수 없다. 약탈이라도 해야 한다." 초겨울에 거란족 패려부가 내몽골 시라무렌의 소금호수(鹽水)에 집결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거란족이 살을 찌운 가축을 데리고 남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그 호수에서 소금을 채취합니다. 낙타에 싣고 겨울 목초지로 이동합니다. 소금을 용성(조양)으로 가지고 가 곡물과 교환하여 겨울을 날 것입니다."
문제가 있었다. 탁 트인 초원에서 대규모 군대가 움직이면 거란족 척후에게 발각될 것이 확실하고, 그들은 흩어져 달아날 것이다. 방법은 단 하나 있다. 길을 돌아 험한 산을 넘는 것이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혹한에 거대한 산을 2개나 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이다.
광개토왕은 강행했다. 395년 초겨울 신성에서 출발한 그의 기병은 광대한 만주의 벌판을 정서(正西)로 가로질렀다. 파란 하늘과 눈 내린 하얀 땅이 붙어 있었다. 산이 점점 그 모습을 나타냈다. 울창한 의무려산(富山) 이었다. 행군 방향을 북쪽으로 꺾어 힘들게 산을 넘었다.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넘어야할 산은 또 있었다. 거대한 노노루산(負山)이었다('광개토왕비문'395년).
정상에 올라 군대를 멈추었다. 아래에 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거란인들이 염수에 있다는 척후의 보고가 들어왔다. 3개 부락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모두 600~700개 영(營)들이 있었다('비문'395년).
각각의 영에는 '파오'라는 수십 개의 이동식 천막이 있었다. 고구려군이 오자 거란족은 당황했다. 남쪽에서 산을 넘어오리라 상상치도 못했다. 작살로 하나씩 잡는다면 그들이 가축을 이끌고 도망을 갈 수 있는 시간을 주게 된다. 고구려군은 그물에 물고기를 가두듯이 아주 넓게 포위하였다.
거란족을 약탈한 결과 엄청난 가축 떼가 고구려로 몰려왔다('비문'395년). 온 천지에 소 말 양떼의 울음이 혼합되어 가축시장을 연상케 했다. 양의 노린내와 마소의 똥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렀다. 백제를 칠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이 준비되었다. 이듬해 북중국에서 후연의 창업자 모용수가 죽자 북위가 병든 후연을 침공했다. 고구려 주력을 백제에 투입할 수 있었다.
기병은 철원에서 춘천~홍천~원주~충주·제천으로 이어지는 유사구조곡을 이용했고, 병력과 보급품을 잔뜩 실은 배가 평양에서 인천으로 향했다('비문'396년). 성공적인 전쟁으로 광개토왕은 강원도와 충북 일대를 완전히 손에 넣었고, 인천을 장악하고 한성(송파)으로 진격하여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한강과 낙동강의 물길을 이었고, 경기만을 장악했다. 고구려의 유통망 장악으로 왕의 상인들은 원활한 활동을 했고, 거액의 세금을 왕에게 지속적으로 납부했다.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 일본열도의 시장을 지배하는 초석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정 회장은 사우디 항만공사를 수행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달러를 벌어 자동차 중공업 반도체에 투자해 현대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시켰다. 광개토왕도 거란작전 성공으로 전비 부족의 위기를 넘기고, 백제의 항복을 받아내 안전한 유통망을 확보했다. 여기서 나온 수익은 더 강한 군대를 양성할 수 있는 재원이 되었고, 고구려를 북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만들었다. 18세에서 39세까지 내몽골에서 낙동강까지 오가면서 전쟁을 수행한 결과였다. 그는 사력을 다했고 과로로 죽었다.
두 사람에게 갈 길은 항상 멀어 보였다. 시장을 계속 확보하고 넓히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다고 여겼다. 매번 "지는 것이 무섭다"고 자신에게 말했으리라.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운명을 걸머진 자는 강하지만 때론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