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최영교_전쟁과 시장_02

醉月 2011. 3. 12. 10:14
<6> 광개토왕과 정주영 회장
재벌도 제국도 생존방법은 하나 시장 창출로 '戰費'를 마련하라
거란족 침탈로 얻은 자금으로 백제를 쳐 안정된 유통망 장악
사우디 9억불 항만공사를 따내 제1차 석유파동의 한파를 극복

    덕흥리고분벽화의 묘주 진(鎭)의 초상화.

 

"큰 물에 나가야 큰 고기를 잡는다. 중동으로 가자!" 현대 고(故) 정주영 회장이 선언했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1달러75센트 하던 유가가 2년도 되지 않아 10달러가 되었다. 세계 경제는 극도로 악화되었고, 베트남전에서 지친 미국은 전쟁을 포기해야 했다.

한국도 직격탄을 맞았다. 밤거리는 동굴처럼 어두워졌다. 서둘러 귀가를 해야 하고 소등도 빨리 했다. 경제는 뿌리까지 흔들렸다. 1975년이 되자 기업들은 외채 상환능력을 상실했고, 부도 직전까지 몰렸다. 현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채를 얻어와 울산조선소에 투자했는데, 선주가 배를 가져가지 않아 나올 돈이 없었다.

하지만 산유국들은 넘치는 오일달러를 항만과 도로 등에 쏟아붓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거대 입찰이 있었다. 페르시아만 주베일에 50만t 유조선 4척을 접안할 수 있는 항만공사였다. 총 금액은 9억3000만 달러, 당시 한국 예산의 절반이었다. 정 회장은 중동이란 정원에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무르익은 과일을 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세계굴지의 서방건설 회사들이 벌써 진을 치고 있었다. 살 냄새를 맡고 몰려온 맹수들처럼 경쟁은 치열했다. 일본의 최대 건설회사인 다이세이(大成)도 못 낄 정도였다. 불과 1000만~2000만 달러짜리 공사를 해오던 현대였다. 내부에서 반대의 소리도 컸다. 그래도 정 회장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폭우와 밀림, 독충과 포탄이 있는 곳에서도 우리는 일을 하지 않았는가?"

    광개토왕릉비는 414년(장수왕 3년)에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구화리 대비가(大碑街)에 있다. 사우디는 공사에 입찰할 10개 시공사 선정을 영국의 기술용역회사에 의뢰한 상태였다. 현대는 이 윌리엄 하로크사를 끈질기게 설득해 일단 진입했다. 2000만 달러의 입찰 보증금도 눈물나는 노력으로 바레인 국립은행으로부터 받았다. 그동안 입찰서류를 작성하는 데도 밤을 지샜다. 밥은 배달시켜 먹었고, 목욕도 세수도 하지 않았다. 방에 악취가 진동했다. 부정이라도 탈까 봐 그렇게 했다. 두꺼운 견적서가 만들어졌다. 정 회장부터 차례로 그 위를 밟고 지나갔고, 엉덩이로 비비기까지 했다. 족보도 없는 '노가다'판의 미신에 의존했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전쟁에 나가는 병사들처럼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공사 총 금액은 12억 달러이지만 최하의 가격을 써낸 회사에게 낙찰된다. 경쟁회사들마다 머리를 싸매고 가격 인하를 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손해를 보고 공사를 할 수는 없었다. 밑지지 않으면서, 가장 싼 가격을 써내야 했다. 현대는 어떠한 회사도 제시하지 못한 가격으로 공사를 따냈다(1975년 2월 16일). 9억 3114만 달러였다. 사우디는 44개월의 공사기간을 8개월 단축시키겠다는 정회장의 제의에 감명을 받았다. 일주일 후 거액의 선금이 입금되었다(7억 리알). 대한민국에 '외환'의 폭우가 내렸다.

공사기간은 36개월이었다. 건설장비는 탈락한 서방의 업체로부터 거의 공짜 가격으로 받았다. 공사 자재의 양은 엄청나게 많았다. 콘크리트가 5t 트럭 20만 대, 철강재가 1만t 선박으로 12척 분량이었다. 어려운 점은 유조선 정박에 필요한 10층 건물 크기의 구조물 89개의 제작과 운반이었다. 가로 18m, 세로 20m, 높이 36m, 무게가 550t이었다. 울산에서 만들어 바지선에 싣고 1만2000km를 항해하여 주베일로 와야 했다. 35일의 뱃길을 19번 왕복했다. 태풍이 발생하는 동남아 해상을 통과해야 했다. 사고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 비정상이었다. 선박과 충돌하기도 했고, 태풍에 떠내려가기도 했다. 그래도 그것이 공사 기일을 늦추지는 못했다. 세기의 대토목 공사가 끝이 났다. 사우디 측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현대의 성취는 한국 건설업 전체에 해택을 주었다. 이후 건설 수주액은 폭증했다. 1976년 24억, 1977년 34억, 1978년 80억, 1979년 60억, 1980년 78억, 1981년 126억, 1982년 113억, 1983년 90억, 1984년 59억 달러였다. 석유 파동을 중동 건설시장에서 벌어들인 외화로 극복했으며, 그 돈은 한국의 발전에 기여했다.

재벌 총수와 고대의 군주는 공통점이 있다. 총수는 다른 기업들과 시장을 놓고 경쟁을 해야 하며, 군주는 유통망을 독점하기 위해 이웃나라와 전쟁을 해야 했다.

광개토왕이 지배하던 고구려였다. 395년 북중국의 강국이었던 후연(선비족 모용씨)이 내몽고에서 북위에게 참패했다. 이를 기점으로 수세에 몰린 후연은 북중국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북위의 왕 탁발규(386~409)의 성공적인 팽창은 후연을 잠식하는 과정이었다. 후연이 결정타를 맞았다는 소문은 요하를 넘어 삽시간에 만주와 한반도 전체에 퍼졌다. 고구려의 가장 큰 라이벌이 정통으로 맞아 다운되어 링 위에 올라오지도 못하게 되었다.

냉철한 광개토왕은 위기와 기회가 한꺼번에 왔다고 판단했다. 잠재적인 강적 북위가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곰이 지방을 축적하듯이 북위가 후연을 멸망시키기 전에 고구려는 덩치를 키워야 했다. 앞서 391년부터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임진강 이남까지 영토를 넓힌 상태였다. 이제 한강 중·상류와 경기만을 점령해야 한다는 목표가 설정되었다. 한강 상류는 백제의 산삼 서식지였다. 백제삼은 고구려의 그것보다 중국시장에서 고가였다.

총수가 기업의 발전을 위해 경쟁을 하듯이 왕도 왕국의 번영을 위해 전쟁을 했다. 발전을 멈추면 망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이 비용 마련이 문제였다. 앞서 왕은 낙랑상인으로부터 전비를 빌린 바 있다. 낙랑지역에 '진'이라는 그의 측근이 살았다('덕흥리벽화묵서'). 왕은 중국인인 그의 중개로 낙랑상인들로부터 전비를 투자받았다. 진은 상인들이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 왜에 중복된 세금을 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왕이 한강 중·상류를 차지하여 속국 신라의 낙동강으로 가는 물길을 뚫고, 인천을 차지하여 서해안을 장악해야 중복된 세금을 1회로 줄일 수 있다고 설득했다. 왕이 남쪽의 맹주 백제를 눌러야 상인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여 자본 회전율을 높이고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인들의 투자금은 왕이 4년 동안 백제전에 쏟아 부어 모두 소모되었다.

전비가 문제였다. 군사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심만을 강요할 수 없었다.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전쟁이 아니라 적의 시장을 차지하려는 싸움이었다. 장기전은 충성심과 무관하다. 돈이 없으면 경쟁국보다 더 좋은 무기도 생산할 수 없고, 무장시키지도, 먹이지도 못한다. 전쟁을 멈추게 되면 빚을 갚을 방법도 없었다.

광개토왕은 생각했다. "호기를 놓칠 수 없다. 약탈이라도 해야 한다." 초겨울에 거란족 패려부가 내몽골 시라무렌의 소금호수(鹽水)에 집결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거란족이 살을 찌운 가축을 데리고 남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그 호수에서 소금을 채취합니다. 낙타에 싣고 겨울 목초지로 이동합니다. 소금을 용성(조양)으로 가지고 가 곡물과 교환하여 겨울을 날 것입니다."

문제가 있었다. 탁 트인 초원에서 대규모 군대가 움직이면 거란족 척후에게 발각될 것이 확실하고, 그들은 흩어져 달아날 것이다. 방법은 단 하나 있다. 길을 돌아 험한 산을 넘는 것이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혹한에 거대한 산을 2개나 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이다.

광개토왕은 강행했다. 395년 초겨울 신성에서 출발한 그의 기병은 광대한 만주의 벌판을 정서(正西)로 가로질렀다. 파란 하늘과 눈 내린 하얀 땅이 붙어 있었다. 산이 점점 그 모습을 나타냈다. 울창한 의무려산(富山) 이었다. 행군 방향을 북쪽으로 꺾어 힘들게 산을 넘었다.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넘어야할 산은 또 있었다. 거대한 노노루산(負山)이었다('광개토왕비문'395년).

정상에 올라 군대를 멈추었다. 아래에 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거란인들이 염수에 있다는 척후의 보고가 들어왔다. 3개 부락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모두 600~700개 영(營)들이 있었다('비문'395년).

각각의 영에는 '파오'라는 수십 개의 이동식 천막이 있었다. 고구려군이 오자 거란족은 당황했다. 남쪽에서 산을 넘어오리라 상상치도 못했다. 작살로 하나씩 잡는다면 그들이 가축을 이끌고 도망을 갈 수 있는 시간을 주게 된다. 고구려군은 그물에 물고기를 가두듯이 아주 넓게 포위하였다.

거란족을 약탈한 결과 엄청난 가축 떼가 고구려로 몰려왔다('비문'395년). 온 천지에 소 말 양떼의 울음이 혼합되어 가축시장을 연상케 했다. 양의 노린내와 마소의 똥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렀다. 백제를 칠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이 준비되었다. 이듬해 북중국에서 후연의 창업자 모용수가 죽자 북위가 병든 후연을 침공했다. 고구려 주력을 백제에 투입할 수 있었다.

기병은 철원에서 춘천~홍천~원주~충주·제천으로 이어지는 유사구조곡을 이용했고, 병력과 보급품을 잔뜩 실은 배가 평양에서 인천으로 향했다('비문'396년). 성공적인 전쟁으로 광개토왕은 강원도와 충북 일대를 완전히 손에 넣었고, 인천을 장악하고 한성(송파)으로 진격하여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한강과 낙동강의 물길을 이었고, 경기만을 장악했다. 고구려의 유통망 장악으로 왕의 상인들은 원활한 활동을 했고, 거액의 세금을 왕에게 지속적으로 납부했다.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 일본열도의 시장을 지배하는 초석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정 회장은 사우디 항만공사를 수행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달러를 벌어 자동차 중공업 반도체에 투자해 현대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시켰다. 광개토왕도 거란작전 성공으로 전비 부족의 위기를 넘기고, 백제의 항복을 받아내 안전한 유통망을 확보했다. 여기서 나온 수익은 더 강한 군대를 양성할 수 있는 재원이 되었고, 고구려를 북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만들었다. 18세에서 39세까지 내몽골에서 낙동강까지 오가면서 전쟁을 수행한 결과였다. 그는 사력을 다했고 과로로 죽었다.

두 사람에게 갈 길은 항상 멀어 보였다. 시장을 계속 확보하고 넓히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다고 여겼다. 매번 "지는 것이 무섭다"고 자신에게 말했으리라.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운명을 걸머진 자는 강하지만 때론 슬프다.

 

<7> 고구려 장수왕과 이건희 회장
판단은 빨랐고 결정은 냉혹했다
실리는 언제나 도덕에 우선했다
따르는 자들에겐 대가를 안겼다

    이건희(가운데)

 

삼성회장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합리성과 현실적 유용성이라는 잣대만으로 행동할 수 있는 냉혹함을 소유했다는 점에서 고구려 장수왕과 닮은 데가 있다. 국제신문 자료 사진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삼성 광고가 사라졌습니다." 미국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 거리의 한 빌딩 소유주가 컬럼비아 영화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했던 말이다(2002년 4월). 영화사가 타임스퀘어 한복판에 있는 빌딩에 걸린 삼성전자 광고판을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USA투데이' 광고로 교묘히 바꿔치기한 사실이 드러났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벌어진 송사에 당황한 컬럼비아사는 즉각 항복했다. 삼성전자 광고판은 원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그해 세계주식시장에서 삼성이 일본의 상징인 소니의 시가 총액을 앞질렀다. 소니는 자존심이 상했고, 그러한 묵시적인 지시를 자신이 소유한 영화사에 내렸던 것이다. 현재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169억 달러로 소니를 훨씬 앞지르고 있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이 발행하는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일본 전자기업의 위기'라는 특집기사에서 "창업 2세인 이건희 회장이 이끄는 삼성의 연간 순이익은 1조 엔을 돌파해 일본 7대 전자기업의 총순익보다 배나 많다"면서 "이는 삼성의 반도체와 휴대전화, LCD 등에 대한 집중투자와 젊은 인재 등용, 세계 각지 연구·기술 인력의 대량 스카우트 등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삼성은 우수한 인적 자원이 미래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인식하에 우수인력 유치와 글로벌 인재 양성에 주력해 왔다. 삼성그룹 CEO는 직접 핵심인력 면접을 진행할 뿐 아니라 1년에도 몇 차례씩 핵심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출국하는 등 우수 인재 확보를 위해 국적 불문의 인재 채용에 나서고 있다.

고대에도 인재는 필요했다. 물론 연봉을 제시하고 기간을 정해 계약하는 특별한 인재는 아니었다. 삼 채취에 능한 심마니, 싸움을 잘하는 사냥꾼, 말을 잘 타는 유목민, 요새를 정교하게 만들어내는 기술자와 장인, 싸움에 지친 병사들을 달래 줄 수 있는 악사와 무희, 건조하고 추운 지역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부 그리고 물자를 적시에 조달하고 관리하는 계산능력을 가진 상인 등이 모두 필요했다.

한국 역사상 최대의 외부 인력 유입은 436년에 있었다. 장수왕이 다스리던 고구려였다. 한때 북중국의 맹주였던 후연이란 나라를 그대로 이어받은 북연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435년). "저희 북연의 황제(풍홍)께서 고구려로 망명을 원하고 있습니다."('삼국사기') 당시 북연은 북위의 공격으로 나라가 언제 망할지도 모르는 시점이었다.

장수왕은 북위와 전쟁을 불사하지 않으면 고구려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북연은 북중국의 최강국 북위와 고구려 사이에 위치해 양국 간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주던 곳이었다. 북위의 북연 점령은 고구려에게 엄청난 환경의 변화였다. 장수왕은 북연에 군대를 파견했다. 가라앉는 배 북연을 구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북연의 영토 물자와 인력이 고스란히 북위로 넘어갈 상황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 장수왕이 의도한 대로 상황이 돌아가고, 좋은 결과가 나올지의 여부는 불확실했다.

436년 5월, 북연의 수도인 화룡성(和龍城,조양)을 사이에 두고 북위군과 고구려군이 대치했다. 양군이 동시에 몰려오자 북연의 수도 화룡성 안에서는 친고구려파와 친북위파 간에 내분이 일어났다. 친고구려파와 친북위파가 성 밖에 주둔하고 있는 자기편의 군대를 서로 먼저 끌어들이려 했다.

친북위파가 먼저 선수를 쳐 성문을 열어 북위군을 영입하려 했다. 그러나 의심 많은 북위군은 주저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 틈을 타 고구려군이 돌입해 성을 장악했다. 먼저 고구려군은 북연의 무기고로 향했다. 고구려에서 입고 온 옷을 다 벗고, 북연의 A급 갑옷으로 바꾸어 입었으며, 무기도 정교한 새것으로 교체했다. 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북위군과 전투를 염두에 둔 조치였다 ('삼국사기').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석릉인 장군총.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 군대는 맹수로 변하여 북연의 왕궁을 향해 나아갔다. 과연 여자와 사치를 좋아하던 후연의 모용희는 북연에게 화려한 왕궁을 물려주었다. 약탈이 허락되었다.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었다. "원하는 대로 가져라." 화룡성의 화려한 궁정과 중원에서 살다가 온 귀족들의 대저택이 병사들의 사냥감으로 변했다. 장군 장교 병졸할 것 없이 광란의 잔치에 뛰어들었다('삼국사기').

약탈이 끝나고 약탈의 대상이 된 화룡성의 사람들을 집합시켰다. 그들 가운데는 중원의 고급 기술을 지닌 인력들이 많았다. 남녀 모두 군복을 입히고 30㎞의 거대한 대열을 만들었다. 북연의 황제 풍홍을 포함하여 그 휘하의 모든 사람을 데리고 고구려로 향하려는 참이었다. 성 밖에 북위군이 버티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북연인들을 고구려로 데리고 가지 않으면 이번 작전의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대담한 시도였다. 고구려 기병은 대열의 외부에 있고, 북연인들은 행렬의 가운데 서게 했다. 장군 갈로맹광이 이끄는 고구려 기병이 대열의 후면을 맡았고, 수레로 움직이는 벽을 만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북위군은 고구려 기병의 행렬을 끝내 공격하지 못했다. 당시 북위는 세계 최강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던 유목민이었는데도 그러했다.

북위군이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하고 물러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가운데 고구려군 배후에 성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요하 서쪽의 숙군성(광령,廣寧)은 화룡성과 지척의 거리였다. 401년 숙군성을 차지한 고구려 군대는 그곳을 서방의 중요한 전진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장수왕은 충분한 식량과 마초, 병력과 전마를 비축해 두었다. 고구려군대의 장대한 행렬도 일단 숙군성을 향했다. 전투가 벌어진다면 고구려는 숙군성에 있는 병력의 지원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다.

북위군에게도 배후에 금방 점령한 화룡성이 있었다. 하지만 화룡성은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약탈로 텅 비어있었고,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고구려는 철수할 당시 화룡성에 불을 질러 그곳을 철저히 황폐화시켰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군이 떠난 후 화룡성이 10일 동안 불길이 꺼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위군은 고구려군 행렬을 추격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돌아갔다. 이 사건의 결과로 북연의 수도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고위 계층과 군인·호구들이 고구려에 이입됐다. 북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북연왕과 그 백성, 병력의 송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장수왕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위서'는 장수왕대 고구려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성의 수는 조조의 위나라(前魏)대 보다 3배가 많았다." 북위는 고구려의 국력을 남중국의 남제와 같은 수준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만일 삼성이 반도체에 과감한 투자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반도체 산업은 초기투자만 50억 달러가 필요하고, 메모리 반도체 1개 라인 건설에 1조 원가량이 든다. 투자는 엄청난데 한발 늦게 개발된 제품은 곧장 쓰레기장으로 가버린다. 사업이 아니라 도박이라는 소리를 듣는 업종이다. 이건희 회장은 1970년대 초·중반에 반도체 사업투자를 아버지 고 이병철 회장에게 끈질기게 건의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임마야! 그 돈이라 카먼 TV 몇 백만 대나 더 만들 수 있다 아이가. 그 쥐 부랄 만한 것 만들어 무에 쓰겠노?"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포기 하지 않았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1983년에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게 했다.

436년 고구려가 북연에 군대를 파병하는데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고구려의 핵심전력을 거의 모두 동원해야 할 이 싸움에는 너무나 비용이 많이 든다. 무엇보다 북위와 전쟁을 하는 것은 정말 위험했다. 북위는 강력한 나라였다. 공격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북위의 통치자들은 유목제국 유연을 공격하기 위해 인간 사냥대를 이끌고 고비사막을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북위 군대와 싸우면 군대의 핵심을 모두 잃고, 고구려가 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과감하게 도박을 했고, 성공을 했다. 그가 다스리던 고구려는 부강해졌고, 고급 인력으로 넘치는 번영된 왕국이 되었다. 당시로는 중국의 남북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대한 내수시장을 만들어냈다.

종신토록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고, 왕태자 교육을 받았으며, 중요한 결단을 놓고 한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고독감을 느꼈다는 점에서 장수왕과 이건희 회장은 닮은 면이 있다. 장수왕은 아버지가 넓혀 놓은 영토를 물려받아 그것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번영된 나라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이건희 회장도 한국 최고의 기업을 고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이어받았고,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다.

양자는 공통적으로 넓은 영토를 원하지 않고 작지만 강한 강소국을 원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장수왕은 북연의 수도 화룡성을 점령했지만 그곳을 차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과감하게 북연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사람과 재물만 이끌고 고구려로 돌아갔다. 그 화려한 화룡성은 북위군의 배후기지가 될 가능성이 있어 불태워 버렸다. 부동산에 집착하다가는 적과 끝이 보이지 않는 소모전이 시작될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소위 돈 되는 사업에 경영 역량을 집중했다. 수익을 내지 못하는 사업, 장기 비전이 없는 사업은 언제든지 도려냈다. 심지어 자신의 사재를 털어 인수한 회사도 매각했다(한국반도체).

무엇보다 양자는 양심이나 도덕·윤리에서 자유롭고 자기목적을 수행하는 데서는 합리성과 현실적 유용성에 대한 판단만으로 행동할 수 있는 냉혹함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북연을 두고 북위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철저하게 실리를 취한 고구려 장수왕은 이용가치가 없어진 북연의 황제 풍홍에게 대우를 해주지 않았고, 풍홍이 말썽을 일으키자 죽여 버렸다. 그의 모든 아이들도 함께 했다. 이건희 회장도 아들의 후계구도를 굳히는데 어떠한 이목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탈세 수준의 세금을 내고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 왕의 백성이 되기를 원했고, 삼성에 입사를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 양자는 자기 아래 사람들의 복리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노력에 대한 대가를 철저히 인정했고, 더 많은 기회를 주었다. 오히려 명분을 앞세우는 군주의 백성들은 비참했다. 조선의 어떤 군주는 백성들을 굶기고 왜군이 쳐들어 왔을 때 그대로 방치했으며, 국가를 위해 싸웠던 장군과 의병장을 사지로 몰고 갔다. 장군과 의병장의 탁월함은 자신의 무능함을 폭로하기 때문이었다. 윤리와 도덕을 표방했지만 백성의 복지보다 자신의 자리 보존에 연연했다. 비극의 근원은 무능한데 정치적 두뇌를 소유한 데 있었다. 그는 무능하기 때문에 깊은 생각을 했고, 더욱 더 사악했다.

 


<8> 홍콩과 낙랑의 자유경제
철저한 '정복'을 위해 철저한 '자유'를 허용했다

    

 

휘황찬란한 홍콩 야경. 우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997년 중국의 품 안으로 돌아간 홍콩은 전보다 더한 번영을 누리고 있다. 세계의 공장 중국에 투자되는 외국의 금융자본은 홍콩을 경유해야 한다. 중국의 발전이 홍콩 번영의 견인차이다. 국제신문 DB

" 1997년 이후에 어떻게 되는 거죠?" "어!" 밝게 웃던 홍콩 여인 '밍'이 갑자기 말문을 닫았다. 그리곤 고개를 숙이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의 영혼을 억누르고 있었다.

1991년 8월의 어느 날 네덜란드 서북쪽 도시인 암스테르담 교외의 풍차마을을 둘러보다가 홍콩에서 온 밍 일행을 만났다. 필자는 그녀와 그림과 같은 풍경을 배경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손에는 하이네켄 맥주와 고린내 나는 치즈가 들려있었다. 저녁 9시가 되어도 해는 하늘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웃음이 만발하던 자리는 홍콩을 반환해야 하는 해를 의미하는 '1997'이란 숫자 때문에 급속도로 썰렁해졌다. 이 일로 동행한 동료에게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그녀에게 공포감을 안겨준 1997년의 근원에는 1989년 4월 북경 천안문에서 발생한 학살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중국 정치지도자 호요방의 죽음을 추도하기 위해 모인 학생들은 민주화를 요구했다. 학생 대표가 요구 사항을 담은 문서를 천안문에 나타난 리펑 부총리에게 무릎을 꿇고 전달하려 하였으나 무시됐다. 곧이어 학생들의 단식 죽음…. 중국 정부는 결국 총 칼 탱크로 시위를 무력 진압했다. 2000여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세계인들에게 그것은 톱뉴스 였지만, 8년 후에 중국정부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게 될 홍콩인들은 여기서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

홍콩인들의 공포는 그들이 만든 영화에 리얼하게 스며들었다. 영웅본색(英雄本色)이라는 영화에서 검은 선글라스, 검은 코트, 검은 바지에 검은 총을 갖고 있던 주윤발의 모습은 반환을 앞둔 홍콩인들의 미래에 대한 고민, 회의주의를 상징한다. 목적 없는 사람들, 난사되는 총알에 파리처럼 죽어가는 모습들.

    1931년 일본 학자인 고이즈미 아키오가 조사한 평양 남정리 116호 낙랑고분의 발굴 현장.

 

홍콩은 서양인들의 약탈적 근대 자본주의가 만든 도시였다. 1842년 8월 영국과 아편전쟁에서 청이 참패하자 '난징(南京)조약'에 의해 홍콩섬이 영국에 할양됐다. 이후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와 치열한 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毛澤東)이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두려움을 느낀 자본가와 전문인력 175만여 명이 홍콩으로 이주를 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홍콩은 번영을 이루게 된다.

홍콩은 155년간 영국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영국적 문화를 꽃피웠고, 종주국보다 잘 사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도시로 도약하였다. 홍콩인의 의식도 어느새 서양적 요소,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주민 스스로도 자신을 단순한 중국인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단지 '홍콩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1984년 영국은 1997년까지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 5년 후 천안문사태가 터지자 불안감을 느낀 많은 홍콩인들, 특히 지식인과 부유층들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의 영연방 국가와 미국 등지로 대거 이민을 갔다. '엑소더스'를 연상케 했다. 주윤발 이연걸 등의 스타는 물론이고 오우삼 서극 같은 감독들이 홍콩을 떠났다. 별이 없는 홍콩은 초라하게 시들어 가는 듯했다.

313년 한반도의 서북부 낙랑군(평양)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압록강의 입구인 서안평을 차지해 낙랑군과 중국 본토 사이의 통로를 완전히 차단한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낙랑군을 공격했다. 10월에는 사람 2000명을 잡아갔다. 중국 문물을 향유하며 중국복식을 입고 시서(詩書)를 암송했던 낙랑인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홍콩인들은 그들이 이주해 갈 영연방의 나라가 건재해 있었고, 시간적인 여유도 충분했다. 하지만 낙랑인들은 사정이 달랐다. 중국의 본토가 끝이 보이지 않은 전란에 휩싸여 있었다. 마침 요동과 요서에 근거지를 둔 모용 선비(전연)는 사람을 보내 낙랑인들을 회유했다. "약탈에 눈이 먼 고구려인들이 당신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낙랑인들의 대대적인 탈출이 이어졌다. 유민 1000여 호가 배편으로 전연의 영토인 요서로 떠났다. 400년의 역사를 가진 낙랑이 사라지는 듯했다.

기원전 111년 한나라의 무제는 고조선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수도에 낙랑군을 세웠다. 중국의 식민지인 낙랑군은 본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이주민을 받아들였고,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기원전 45년 낙랑군의 관리들은 인구조사를 했다. 군내 호구 현황을 파악해 통계 수치를 나무판(목간)에 적어 넣는 작업이었다. 인구는 28만 명, 호수는 4만5000여 세대였다. 47년이 흐른 뒤(기원후 2년) 낙랑군 인구는 40여 만명으로 늘었다('한서지리지'). 세계 최고의 인구 밀집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315년 2월에 미천왕은 현도군을 함락시켰다. 많은 사람이 죽고 포로로 잡혀 고구려로 끌려왔다. 이로써 한반도에 400년 동안 존재했던 중국의 군현들은 완전히 소멸됐다. 하지만 이를 한반도에서 중국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독립투쟁으로 봐서는 안 된다. 고구려의 낙랑점령은 유통망을 운영하는 노하우를 가진 사람들과 동아시아 세계 각국과 바다로 연결된 항만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먹고 살기 위한 전쟁이었다.

고구려의 군주 미천왕은 어린 시절 먹고살기 위해 소금 장사를 했다. 배에 곡물을 싣고 바다로 나가 소금과 교환했다. 그리고 소금을 배에 싣고 압록강으로 들어와 중상류의 지류 구석구석까지 유통시켰다('삼국사기'). 그는 시장에 정통했으며, 상업이 주는 이익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1세기 앞서 비전을 제시해 준 나라가 있었다. 후한말 군웅할거 시대에 공권력이 무너지자 공손도(公孫度)라는 자가 요동에서 세력을 얻어 한반도 북부 황해안의 중국인 식민지 낙랑군을 장악하고, 204년 경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은 그 남쪽에 새로이 대방군을 세웠다. 그 결과 한반도에서 중국의 식민지는 황해도까지 확산되었다.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公孫淵)의 시대가 되자 강남의 손씨 오나라와도 융성한 무역을 이루었다. 이것은 공손씨의 세력이 남쪽으로 뻗어 한반도 남단의 마한을 누른 결과이다. 강남에서 중국의 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항로는 위험했지만, 직접 동중국해를 횡단해 한반도의 서남쪽으로 향하는 길이 오히려 안전했다.

홍콩이 세계 4대 금융센터, 5대 외환시장, 아시아 2대 주식시장이었고 세계 460개 항구를 연결하는 자유 무역항이었다면 낙랑군은 발해 황해 남해연안을 따라 삼한과 일본열도와 남중국 그리고 북중국을 하나의 무역 네트워크로 묶어서 장거리 무역의 중개지였다.

우려와는 달리 고구려는 낙랑인들을 우대했다. 중국문명을 체화한 그들은 소중한 존재였다. 낙랑군이 멸망한(313년) 후 8000호 이상의 사람들이 남았다. 그들은 고구려의 해외 상업과 외교 나아가 정교한 가공을 필요로 하는 수공업에 종사했다. 세계에 존재하는 벽화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안악 3호분 벽화의 주인공 '동수'는 전연의 관리 출신이었으며, 358년에 그것을 그린 사람들도 낙랑계 장인이었다.

낙랑인들이 고구려에 명령을 받고 수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전란의 장이었고 교역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지독한 불경기가 계속됐다. 하지만 중원에 군수수요가 지대하다는 것을 간파한 낙랑인들은 수출 상품을 개발했다. 품목은 소모품인 화살이었다. 칼과 창은 수리만 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시위를 떠난 화살은 회수가 불가능했다. 중국내부에서도 화살을 생산하고 있지만 소모를 따라가지 못했다. 낙랑상인들은 만주의 산림지대에 지천으로 널린 싸리나무를 수집하게 했고, 화살촉은 그곳에서 많이 나는 청석이란 날카로운 돌을 대체품으로 선택했다. 금속보다 싸고 생산속도가 빠르기 때문이었다. 330년부터 후조에 화살이 수출되었다('삼국사기'). 후조가 전연과 전쟁을 시작하자 수출량은 더욱 증가되었고, 선금까지 지불할 정도가 되었다. 338년 겨울, 압록강으로 30만 곡(斛)의 곡물을 실은 배 300척이 들어왔다('자치통감'). 그 곡물은 후조(後趙)의 왕 석호(石虎)가 고구려에 보낸 화살에 대한 대금이었다. 그 배가 돌아갈 때 고구려의 화살이 선적되었다.

반환 후 홍콩도 그다지 암울하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중국의 후광으로 홍콩은 예전보다 더 큰 번영을 누렸다.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한 이후 홍콩은 대외무역 창구인 동시에 자금 조달처로서 중국의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낙랑과 홍콩은 호전적인 고구려와 경직된 중국의 아래로 들어갔는데도 자신을 역할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었다. 그 비밀의 열쇠는 무엇일까. '경제활동의 자유보장'이었다.

고구려의 왕들은 낙랑에 철저한 자치를 허용했다. 고구려 국왕과는 별개로 남중국의 동진이나 북중국의 여러 나라와 교역을 했으며, 그들은 외교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단지 고구려가 바라던 것은 낙랑인들이 대외상업에서 벌어들인 이익에서 일부를 떼어 납부하면 되었다. 무역이 원활할수록 고구려에 이익이 되었다.

세계의 자본이 홍콩을 선호하게 만드는 원인도 중국 정부의 간섭이 거의 없다는 것에 있다. 인민해방군이 주둔하는 곳에서 200~3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센트럴 선착장에서는 아직도 반중국적인 파룬궁 지지자들이 시위를 할 정도다. 2008년 미국 헤리티지재단은 홍콩을 경제자유지수 세계 1위의 지역으로 올렸다. 홍콩은 정부규제 최소화, 낮은 조세부담률, 사유재산권 보장 등을 유지해 세계 금융 및 비즈니스 센터로서 기반을 구축했다. 세계 40개국의 400여 은행과 321개의 증권사가 진출해 있다. 외국으로 이주를 했던 많은 홍콩인들도 돌아왔다.

고구려의 낙랑에 대한 철저한 자치의 보장은 이후 중국에서 적지 않은 유력인사들을 낙랑으로 불러들었다. 중국 어양군 출신 장무이라는 사람이 낙랑으로 와서 고구려로부터 황해도 지역을 다스리는 대방태수의 자리를 받았다('장무이명문전'). 동리라는 전연 사람도 역시 그러했다. 그도 한(韓)태수라는 자리를 얻었다('동리명문전'). 그들은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집안과 아래 사람들을 많이 데려왔다. 동리와 친척인 동수라는 사람은 낙랑 전체를 책임지는 자치장관(낙랑상)이었다('안악3호분묵서'). 그는 전연에 납치된 고국원왕의 어머니를 송환해 오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바 있다(355년).

고대의 원거리 항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재화의 안전한 교환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면 그 시장으로 올 리가 없다. 정치적 중립, 공급 보증, 이방인의 재산 및 생명 보호는 교역이 시작되기 전에 보장되어야 했다(리베르). 오늘날에도 유효한 지적이다.

 


<9> 무기산업의 악마적인 매력
무기를 팔때는 분쟁국의 요구에 맞춰라
소모품을 교체해주며 번영을 누릴테니

    

 

아랍 에미리트와 수출협상이 진행중인 초음속 고등 훈련기 T-50.

엄청나게 처벌하게 안하면 우리가 계속 대우 인터내셔널을 엄청나게 처벌할 수 있도록, 미얀마 민중에게 사죄할 수 있도록 우리는 (시위를) 계속하겠습니다."

미얀마 민족민주동맹의 대표 한 사람이 어설픈 한국말로 분노를 토로했다. 미얀마에서 민중항쟁이 진압된 직후라 그의 분노는 대단했다. 서울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앞 미얀마민족민주동맹 등 10개 시민단체 회원 10여 명은 미얀마에 불법으로 무기 수출을 한 7개 방위산업체의 결심공판을 앞두고 항의 집회를 가졌다(2007년 10월 23일). 이들은 대우인터내셔널의 이태용 전 사장과 6개 업체가 2001년 초 미얀마 정부에 연간 수만 발의 포탄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 설비와 기계류, 기술자료 등을 1억3380만 달러를 받고 불법 수출한 것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촉구했다. 대우인터내셔널 등은 105㎜ 곡사포용 대전차 고폭탄 등 6종의 포탄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미얀마에 지어주었다. 당시 환율로 1600억 원짜리 사업이었다.

한국이 치열한 국제 무기판매시장에 뛰어들었음을 실감케 하는 사건이었다. 한국은 1975년에 47만 달러 규모의 방산수출을 시작했다. 경공업 수준이었다. 32년 후인 현재(2007년), 2만여 명을 고용하는 국내 방산업체 수는 거의 90개, 연간 수출액은 약 11억 달러에 달한다. 5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이 수출한 방산물자 중 탄약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2007년 1월 기준의 통계에 의하면 현재 순위는 항공(23.8%), 함정(23.8%), 탄약(21.1%) 등이다. 세계의 무기수출국가들 중에 17위를 차지한 한국은 곧 10위권에 진입할 것이다. 미국 방위산업 전문지인 '디펜스포스'는 한국을 '세계 정상급 무기를 생산하는 글로벌 파워'로 인정했다.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의 무기를 원했다. 현재 우리 군이 접촉 중인 국가는 이집트와 알제리 모로코 등 주로 아프리카 북부에 위치한 나라들이다. 노 전 대통령 순방 당시 알제리 정부 관계자들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 시절 사용하던 군수품과 러시아 등지에서 공급된 재래식 무기 전반을 교체할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알제리가 원하고 있는 무기는 통신·야간투시 장비, 함정, 항공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실무자들의 협상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집트와는 K-9 자주포 수출 협의가 진행 중이다. 이미 지난해 9월 이집트 군 관계자들이 육군 모 포병여단을 방문, K-9 자주포 운용 시범사격을 참관하는 등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알제리와 경쟁관계에 있는 모로코와는 막후 접촉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나이지리아는 이미 5만 정 이상의 K-2소총을 구입해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 총은 싸고 가벼운 데다 적중도가 높아 소년병들을 무장시키는 데 안성맞춤이라 한다. 한국 무기에 대한 국제적 평가는 이렇다. "독일제와 성능이 비슷한데 가격이 훨씬 싸지?"

    한국산 K-9 자주포,

 

세계 최강의 무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주군도 이 자주포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무기가 세계에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01년 터키에 K-9 자주포를 판매하면서부터였다. 10억 달러의 무기 수주였다. 미국도 신형 자주포 사업에 실패했을 정도로 자주포 제작은 어렵다. 여기서 미국의 실패란 고성능의 자주포를 생산했지만 가격이 높아 구입할 수 없음을 말한다. 산업공학적인 면에서 실패했던 것이다. 지금 K-9 자주포와 비슷한 성능을 가진 것은 독일의 자주포 PZh2000밖에 없다. 하지만 가격이 K-9보다 두 배정도 비싸다.

초등연습기 KT-1(웅비)도 인도네시아에 이어 작년에 터키에 55대를 판매했다(5억 달러). 특히 산악이 많은 나라에서 이 비행기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최근 한국의 최신형 전차 XK-2가 터키에 팔리게 됐다(15억 달러 이상). 프랑스의 최신 전차 르끌레르를 치열한 경합 끝에 제쳤다. 한국형 단거리 지대공(地對空)미사일인 '천마(天馬)' 100여 대도 터키에 수출하는 일을 추진 중이다. 수출액은 약 25억 달러(약 2조3000억 원)로 추산되며, 이것이 성사되면 방위산업 수출 사상 최대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천마는 궤도 장갑차량에 유도미사일 8발, 탐지 및 추적 장치, 사격통제장치를 장착하고 있다. 터키군은 한국의 최대 고객이다.

현재 터키군대에서 차지하는 한국산 무기의 비중은 앞으로 더욱 더 확대될 것이 확실하다. 몽골고원에 살았던 5세기의 고대 터키인들도 고구려의 중요한 거래 파트너였다. 고구려는 몽골지역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말을 가져왔고, 대금으로 곡물과 생필품을 주었다. 당시 터키인들은 유연이란 지배씨족의 아래에 있었다.

유목제국 유연은 고비사막 남쪽 북중국에 북위란 강력한 나라와 군사적으로 치열한 대결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이 겨울을 날 때 필요한 곡물의 상당부분을 고구려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자강남의 유송도 북위와 전쟁과 휴전을 반복하고 있었다. 북위가 양자강남의 유송을 침공하면 언제나 사막 북쪽의 유연이 북위를 공격했고, 북위가 유연을 침공하면 유송이 북위를 공격했다. 해서, 북위는 남과 북에 있는 두 나라를 상대로 확실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유연과 유송 두 나라는 지리상 완전히 격리되어 있지만 중간에서 고구려가 군사적 동맹관계를 이어 주고 있었다.

439년(800필) 이후 양자 강남에 있는 유송의 황제는 고구려에게 끊임없이 전마를 요구했다. 전투용 말은 당시 최고의 무기였다. 그때마다 고구려는 바빠졌다. 하지만 대금으로 막대한 곡물을 실은 배가 평양으로 들어왔다. 실로 언제나 거절을 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을 보냈다. 고구려는 잘 훈련된 전마를 보유하고 있었다.

말은 언제나 몽골고원 유연에서 고구려로 들어왔다. 고구려의 국영목장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말들의 수입 경로를 따라 배치되었다. 말을 양육하고 조련하는 것은 고구려에 복속된 유목민 거란족이었다. 말들은 분류되었다. 훈련을 시켜도 가망성이 없는 말은 먹이를 축내기 전에 그 자리에서 도살돼 고기가 되었다. 가능성이 있는 말은 고구려의 국영목장으로 보내졌다. 최대 국영목장의 하나가 백두산에 있었다. 해발 고도가 2000m 이상이 되면 나무가 없고 광활한 초원지대를 이룬다. 그러니까 천지분화구를 중심으로 주변에 광활한 초원이 펼쳐지며 그곳이 바로 중국의 기록 '한원'에서 말하는 마다산(馬多山) 목장이다.

전마는 여러 단계의 훈련과정을 거쳤다. 다양한 상황에서 말의 갤럽(말이 걸음마다 네 발을 모두 땅에서 떼고 뛰는 일), 속보에서 갤럽으로, 갤럽에서 속주로 넘어가기와 갤럽에서 발 순서 바꾸기이며, 양 방향 및 1/4원 반원 전원으로 급격하게 방향 바꾸기이다. 말에게 매일 정해진 숙제를 부여하고, 반드시 휴식시간을 주었다. 훈련은 매일 변화를 주었고, 끊임없이 반복학습을 시켰다. 풍부한 생리학적 전문지식을 가진 거란인들은 훈련에서 최고의 성과를 올렸다. 조련사는 말과의 심리적인 교감 능력을 갖추었고, 일정한 정식 커리큘럼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백두산에서 훈련을 받은 전마를 바로 양자 강남으로 가는 배에 실으면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죽어 버린다. 말은 소와 다르게 예민한 동물이다. 적응훈련은 상식이었다. 내몽골 부근의 대동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옮긴 북위도 융마의 최대 목축지역인 하서목장(오르도스)에서 키운 말을 바로 낙양으로 가져 오지 않았다. 중계지인 병주목장(산서성 태원)으로 일단 이동시킨 후 점차로 남쪽으로 옮겨 수토(水土)에 익숙해지게 했다. 그 후 하양목장(하남성 황하연변)으로 옮겨서 전마로 사용했다('위서' 식화지).

남쪽으로 향하는 여러 고구려 국영목장을 거쳐 한강 유역까지 내려온 전마들은 그곳에서 적응기간을 마친 후 배에 실려 제주도를 향했다. 장수왕대 제주도는 고구려의 지배아래에 있었다('위서'). 화산지대인 제주도는 1년 내내 풀이 마르지 않은 푸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주도에 하역된 말들은 그곳에서 다시 적응 기간을 보냈다. 제주도에서 덥고 습한 여름을 넘긴 말들은 양자강남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곳은 아열대지역으로 가는 말들의 마지막 졸업관문이었다. 전마를 판매하고 유송으로부터 받아낸 막대한 곡물은 고구려 사회를 풍요하게 하는 원천이었다. 그 때문에 장수왕은 백성들을 굶기지 않을 수 있었다. 나아가 그 곡물은 고구려가 유연에 말과 육류를 구입하는 미천이 되었다.

장수왕대 곡물이 많이 나는 양자강남지역이 전마의 주요 판매지였다면 지금 우리의 무기 주요 판매지역은 오일머니가 넘치는 곳이다. 한국 산업기술의 총집결체인 고등훈련기(T-50)의 수출 가능성이 점쳐지는 아랍에미리트(UAE)는 작년말 한국 영국 이탈리아 3개 후보 기종에서 T-50(한국)과 M-346(이탈리아) 두 개 기종으로 압축했고, 올 3월에 최종 결정을 앞두고 있다. UAE 측은 "속도·경공격기로의 전환 가능성 등을 볼 때 여러 기능 면에서는 T-50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T-50이 채택될 경우 수출 규모만 1조3000억 원 안팎에 달하며 그리스와 싱가포르 역시 그것을 수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군용 항공기가 30년을 유지하는 데 필요로 하는 부품의 가격은 기체 가격의 20배 이상이 될 수도 있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T-50(50대)의 UAE 수출은 26조 원 이상의 가치가 된다. 기체가격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다. '죽음을 파는 무기산업'의 '악마적인 매력'은 여기에 있다. 전차와 자주포에 들어가는 부품도 수만 개 이상을 상회하며 정기적으로 교체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전마도 철저한 소모품이었다. 전쟁터에서 말은 1년 이상 생존하기 힘들다. 많은 말들이 소모되었고, 고구려로부터 끊임없이 말을 가져와야 했다. 몽골의 유연, 북중국의 북위, 남중국의 유송 등 3개의 대국이 경쟁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한 고구려는 호황을 누렸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북중국에 강력한 북위라는 나라의 존재 때문에 그러했다.

현재 한국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주요 나라들이 염두에 두는 것도 강력한 이란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이라크에서 미군의 철수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라크의 절반 정도가 이란의 영향에 들어갈 것이며, 터키와 적대적인 쿠르드족이 이라크 북부에 나라를 세우게 된다. 향후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더욱 강경하게 나올 것이 뻔하다. 터키가 한국의 무기를 대량 구입하고, UAE와 이집트가 한국산 무기를 구입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국제환경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고구려는 남쪽의 끝 제주도에 목장을 개발하여 몽골산 말이 아열대인 양자강남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 주었다. 한국의 무기업체들도 현지에서 무기를 완벽하게 만들도록 해주었다. 유럽 미국 소련과 같이 무기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터키에 K-9자주포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지어 주고 기술을 무제한 이전해 주었다. 이러한 철저한 계약이행은 터키 주변의 중동국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세계 각국이 한국으로부터 무기도입을 선호하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무기업체에 대한 신용도는 서초동 법원 앞에서 미얀마 청년이 내지른 처절한 절규와 비례한다.

 


<10> CEO 출신 국왕과 대통령
"시장에 대한 권력의 개입은 毒입니다"
노점상이었던 대통령과 소금장수였던 고구려왕은 권력자들을 설득했다
"자유를 주고 세금을 걷는 것이 직접 통치보다 이득이 큽니다"

    

 

중국 집안(국내성)부근에 위치한 서대총. 파헤쳐진 미천왕릉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능 앞으로 미천왕이 배를 타고 소금장사를 했던 압록강이 흐르고 있다.

목부의 아내인 어머니는 스기나무(杉木)로 짠 요람 위에 아이를 눕혔다. 그리고 찬송가를 불렀다. 노랫소리는 연기가 피어나는 목장 오두막의 아늑한 하늘 아래로 퍼져나갔다. 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 근교에서 현 대한민국 대통령이 탄생할 때의 모습은 이러했으리라. 가난이 그에게 유산이었지만 어머니는 무엇에 굴하지 않은 신앙도 물려주었다.

조국의 해방과 함께 4살의 아이는 귀향길에 올랐다(1945년 11월). 배는 대마도 부근에서 난파된다. 시커먼 겨울바다에서 목숨은 건졌다. 9살 때 새 터전인 포항은 6·25 전쟁에 휘말려 가족의 둥지는 박살이 났고, 동생과 누이를 잃었다. 끝없는 궁핍은 아이를 시장으로 내몰았다.

전선이 북상한 이후 아버지를 따라 장터를 돌았고, 군부대 철조망에서 김밥을 팔았다. 밀가루로 떡을 만들어 팔다 헌병에게 걸려 매를 맞기도 했다. 소년기에 어머니로부터 독립해 과일장사도 했다. 극장 앞에서 승용차가 후진을 하다 소년의 수레를 받아 과일들이 길바닥으로 쏟아졌다. "이 길 너희들 장사하라고 내놓은 줄 알아?" 소년은 자가용 주인의 위세에 눌렸다. 어머니에게도 하나 드려보지 못한 귀한 과일들이었다. 소년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당해야 하는 억울함보다 가진 자의 횡포 앞에서 기가 꺾였던 자신을 혐오스러워했다. 그는 어린 시절 시장에서 인간 감정의 전 영역을 샅샅이 목격했다. CEO 출신으로서 대통령이 된 이명박의 어린 시절은 이러했다.

소금 장사를 하던 소년이 고구려의 왕이 된 이야기가 있다. 300년 9월 고구려 왕실 사냥터의 어느 갈대밭이었다. 국상(國相) 창조리 이하 고위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나와 생각이 같은 자는 따라하시오"하고 창조리는 갈댓잎을 그의 관모에 꽂았다. 모두가 따라했다. 폭군 봉상왕을 폐위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치한다는 것이 확인됐다. 봉상왕은 짐승처럼 포획되어 감금된 후 처자와 함께 자결했다. 을불이 미천왕(300~331)으로 즉위했다.

을불은 봉상왕의 동생 돌고의 아들이다. 돌고가 편집적인 봉상왕에게 죽임을 당한 후 을불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변장을 하고 도망쳤다. 귀하게 자랐던 왕실의 자손은 험악한 세상으로 스스로 걸어 나갔다. 그가 숨은 곳은 압록강 하류의 수실촌이란 곳이었다.

'음모'라는 사람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을불은 밤낮으로 일을 해야 했다. 낮에는 땔감을 모으기 위해 산야를 누벼야 했고, 밤에는 개구리 우는 소리에 잠 못 이루는 주인을 위해 연못에 돌을 던져야 했다. 돌을 던지면 개구리들이 울음을 멈추었지만 잠시 후면 다시 울었다. 그때마다 돌을 던져야 하니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밤낮없이 일을 해야 하는 고된 생활이 1년 동안 지속됐다. 숨어살아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음모의 집을 나와 독립하기로 했다. 동촌(東村) 사람 '재모'를 만나 소금장사를 시작했다. 을불은 재모의 배를 타고 압록강 하구를 나와 바닷가에 있는 염전에서 곡물을 주고 소금을 구입했다. 소금을 가득 실은 배는 압록강 입구에 도착하여 밀물 때 강을 타고 올라왔다. 나루마다 큰 배를 댈 수 있는 압록강을 고구려인들은 하늘이 내려준 호수라고 불렀다. 하구에서 국왕인 큰아버지가 있는 국내성 부근까지, 지류인 비류수(혼하)와 충만강을 통해 내륙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지류에는 많은 마을들이 있었다. 을불은 배를 강가에 접안하여 소금을 내려놓고 등짐을 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녔다.

을불은 압록강의 동쪽 사수촌에서 자취를 했다. 집에는 음흉하고 욕심이 많은 할멈이 살았다. 할멈이 소금을 청하자 을불은 한 말을 주었다. 그 뒤 할멈은 다시 청했다. 염치가 없는 할멈이라고 생각한 을불은 거절했다. 그러자 할멈은 자신의 신발을 을불의 소금자루에 몰래 넣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을불은 소금자루를 메고 장사하러 떠났다.

길을 가고 있는데 할멈이 불렀다. "이봐, 소금총각 내 신발이 없어졌어! 당신이 가져 간 것 아니야?" 할멈은 소금자루를 뒤져 신발을 찾았고, 을불을 절도범으로 몰아 관가에 고발했다. 그는 체포돼 그 지역을 관할하던 수령 압록재(鴨綠宰) 앞으로 끌려갔다. 물증이 너무나 확실했다. 압록재의 판결대로 소금으로 신발값을 변상하고 형틀에 묶여 볼기를 맞았다. 누명을 쓰고 처벌을 받은 그는 방면됐지만 몸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야위어갔고 옷은 너덜너덜했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 소금장사는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봉상왕을 폐위할 마음을 먹은 국상 창조리는 조불과 소우 등을 시켜 을불을 찾기 시작했다. 소금배가 압록강에서 지류인 비류수를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배를 바라보니 그 위에는 돌고의 아들 을불 또래의 사람이 타고 있었다. 둘은 그가 을불이라고 직감하고 다가갔다. 당시 수배범이던 을불은 떨면서 말했다. "저는 야인이지 왕손이 아닙니다. 다시 찾아보시지요." 하지만 을불은 연행되어갔다. 왕경 부근의 안전가옥이었다. 얼마 후 그는 왕궁으로 옮겨져 왕좌에 앉혀졌다.

즉위 후 낙랑군의 힘이 극도로 약해지고 있었다. 본국인 사마씨의 진(晋)나라가 내란상태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귀족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전부터 낙랑군은 가난한 숲속의 고구려인들에게 중국의 물질문명의 혜택을 맛보게 했다. 좋은 약탈 대상이었다. 그럴 때마다 중국인들은 책구루라는 공간을 만들어 비단 등 값이 나가는 물건들을 증여했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삼국지'는 고구려에서 일하지 않고 앉아서 먹는 좌식자(전사) 1만여 명의 존재에 대해 특기하고 있다. 전투가 없는 기간에 그들은 사냥하면서 지냈다. 그들에게 전쟁은 부담이 아니고 부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였다.

302년 9월 고구려는 현도군을 공격했다. 군민 8000명을 잡아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311년 선비족 모용외의 본거지인 요동으로 쳐들어가서 대대적인 약탈을 감행했고, 압록강의 입구인 서안평을 차지해 낙랑군과 중국 본토 사이의 통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313년 10월에는 낙랑군 사람 2000명을 잡아왔다. 고구려 귀족들이 낙랑인들을 노예로 만들어 나눠가지려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공포에 떨던 낙랑인(1000가)들이 배를 타고 요서로 탈출했다. 귀족들에게 옹립된 미천왕은 그들의 약탈 본성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맹수들이 배를 채울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정열을 발산하고 흥분이 가라앉은 귀족들에게 그는 말했다. 이익에 밝은 자들이라 인간적인 설득은 무의미했다. 그들에게 어떠한 것이 진정 이익이 되는지 말하면 그만이었다. 구조적인 이익창출에 대해서였다. 어린 시절 압록강의 수로가 닿는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장사를 했던 미천왕은 당시 유통시장에 대하여 숙지하고 있었고, 압록강 밖 바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활기찬 국제무역에 대해서도 알았다.

"약탈 전쟁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위험성은 높아갑니다. 60년 전 우리 고구려는 조조의 위나라군의 공격을 받고 망할 뻔한 적이 있습니다(246년). 낙랑군에는 7000여 가의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을 농민처럼 착취·관리하는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움직임에서 부를 창출하는 상인들이라 안정과 자유를 보장해야 합니다. 그들은 항해능력도, 각국의 언어에도 능통합니다. 낙랑(평양)지역을 자유항구로 개방하고 일절 간섭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의 상업 회전율이 높아지면 그들에게 거두어 들일 수 있는 담세율도 올라갑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CEO시절 현대그룹의 대표로 신군부를 상대한 적이 있었다. 하루저녁(1979년 12월12일)에 나라를 도둑질할 만큼 야수성이 있고 기민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분위기를 쇄신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머리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변화'라는 정치적 슬로건에 눈이 먼 그들은 중화학공업의 중복투자를 한국경제의 큰 장애물로 규정한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신진 경제학자들의 궤변을 그대로 믿었다. 자동차 공장도 하나로, 발전설비 공장도 하나로 합쳐야 국가경제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현대그룹에게 자동차산업을 포기하라는 압박이 가해졌다. 이명박 사장은 답변했다. "독점기업을 육성해야 자본주의가 성공한다는 이론은 어떤 경제학 교과서에도 없습니다. 인도의 경우를 보세요. 자동차회사가 국영기업 하나밖에 없는데 기술은 낙후되고 만년 적자입니다." 군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명박의 손을 들어주었고 자동차 산업의 통폐합은 백지화되었다.

이익에 밝은 고구려 귀족들도 계산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세계 최대의 부가 몰려있는 동아시아는 바다를 통한 물자의 흐름이 많았고, 더구나 낙랑(평양)은 해류나 지형상 동아시아 최고의 허브 항구가 아닌가. 고구려 귀족들은 약탈의 단발적 이익을 버리고, 교역의 영구적인 이익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소금장사 미천왕의 방향 제시에 영감을 받았던 귀족들은 낙랑(평양)지역을 자유무역지대로 개방했다.

신화적인 성과를 낸 CEO의 확신에 찬 말은 막 피어나려던 한국의 자동차산업을 익사시키는 것을 막았다. 신군부집권 시절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986년에 처녀 수출을 한 현대는 포니 16만여 대를 판매해 미국의 소형 외제차 총 수입대수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다. 올림픽 직전 한국 경제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라 마이카 바람이 불었고 내수도 비약적으로 늘었다. 현재 자동차 산업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절대적이다. 수출 432억 달러, 무역흑자 373억 달러로 반도체 수출 370억 달러, 무역흑자 87억 달러를 훨씬 상회한다(2006년). 자동차는 부품이 2만 개 이상 들어가는 제품이라 하청중소기업이 많고 고용 효과는 절대적이다. 일본의 경우 외화수익의 절반이 자동차에서 발생한다고 한다(동경대 경영연구소 마사토모).

이명박은 서슬 퍼런 신군부의 칼날 앞에서 미래 자동차 시장의 진실을 밝혔고, 미천왕은 자신을 왕의 자리에 앉힌 거친 귀족들에게 고구려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북중국을 점령한 칭기즈칸은 중국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농토를 초원으로 바꿔 양을 치려고 했다. 야율초재라는 거란인이 만류했다. 인도주의적인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칸께서는 농민들에게 세금을 받는 것이 양을 치는 것보다 더 이익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라고 했을 뿐이다.

여기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공통점이 있다. '경제활동의 자유'이다. CEO들은 권력자들에게 말했다. "그냥 두세요(Let it be)! 당신들의 눈앞의 이익에 맞게 인위적 변형을 하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軍史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영교_전쟁과 시장_04  (0) 2011.03.20
최영교_전쟁과 시장_03  (0) 2011.03.16
최영교_전쟁과 시장_01  (0) 2011.03.09
베트남전쟁 파병의 역사적 의의  (0) 2011.03.05
미국과 중국의 해군력 비교  (0) 2011.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