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베트남전쟁 파병의 역사적 의의

醉月 2011. 3. 5. 13:25
 

이 논문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에 대한 주요 이슈(issue)를 해명 정리한 글이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에 대해 일각에서 사실과 거리가 먼 곡해와 모략이 범람하고 있기에 그를 해명하여 진실을 밝힘으로써 역사에 사실만을 남긴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여기 기술한 내용에 대해서는 베트남전쟁 참전자인 필자가 모든 책임을 진다. 추호도 거짓이나 과장이 없음을 확인한다.
이 논문은 2010년 1월 30일. 육군본부 발행 군사연구 제 128집 7P~24p에 게재된 전문이다.

 

Ⅰ장. 긍정과 부정의 두 시각

올해 2010년은 배트남전에 전투부대를 파병한지 45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 육군은 맹호사단으로 호칭하는 수도보병사단의 제1연대와 기갑연대가 제1진으로 파병되었다.지금은 많은 세월이 흘러 베트남전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비롯하여 베트남전으로 인한 우리 국군의 발전은 물론 국가 경제에 크게 기여한 역할에 대해 소흘이 하고 있는 경향이 짙다.아마 망각하고 있을 지 모른다.그러므로 이 시기에 베트남전을 되돌아 보며 우리 국군이 기여한 업적을 평가하면서 우리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베트남전 파병에 관한 긍정과 부정의 두 시각은 오늘에 있어서 학계에서 더욱 예리하게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주의가 필요하다.

 

동국대학교 강정구,성공회대학교 한홍구 두 좌파 교수는 최근까지 베트남전 한국군 파병을 부정적으로 보는 대표적 장본인이다.그들의 주장은 파병 자체가 국익에 보탬이 되지 않을 뿐더러 미국의 청부전쟁 용병이며 한국군은 양민을 학살한 주범이라고 주장한다.이들의 이런 부정적인 시각이 상당히 먹혀들어 김영삼정부의 교육부 장관 김숙희는 공개 강론에서 국군의 미국 청부전쟁 용병설과 함께 한국군 파병을 역사에 누를 끼친 실책으로까지 비하했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군은 미국의 침략전쟁에 말려든 치욕의 군대로 비하하면서 '한겨레21' 통신원이라는 구수정 여인이 공산 베트남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직접 확인했다는 내용을 언론을 통해 발표하는가 하면 강정구 교수는 그 내용이 사실이라며 학술회의에서 발표하기까지 하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괴상망측한 한국군에 대한 비행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5년 12월 22일. 한국군 작전 병력 2개 대대가 빈딩성 퀴논시에 있는 몇개 마을에서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는 작전 아래 12세 어린이 22명,여성22명,임산부 3명,70세 이상 노인 6명, 즉 대부분의 노약자를 학살했다.

'랑'은 아이를 출산한지 이틀 만에 한국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그의 아이는 군화발에 짓이겨진 채 피가 낭자한 어머니의 가슴위에 던져져 있었다.

솔직히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부하장병에게 미안하다.이 사진은 내가 작전지휘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대대장 쯤 되면 부하장병 후방에서 이런 식으로 작전을 지휘한다.그런데도 무공훈장은 내가 제일 많이 수훈했다.

임신 8개월의 '축'은 총알이 관통되어 숨졌으며 자궁이 밖으로 들어내져 있었다.남한 병사는 한 살배기 어린이를 업고있던 '찬'도 총을 쏘아 죽였고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내동댕이쳐졌으며 남은 몸통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 먼지 구덩이에 버렸다.

 

그들은 또한 두살배기 아이의 목을 꺾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들어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불에 태웠다.그리고는 열두 살난 '융'의 다리를 쏘아 넘어뜨린 뒤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한국군들이 마을에 들어가 주민을 체포하면 남자와 여자로 나눴다.그리고는 남자는 총알받이로 데리고 나가고 여자는 군인들 노리개감으로 썼다.희롱하고 강간하는 것은 물론 여성들의 가장 신성한 부분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행위는 무차별 기관총 난사,대량 학살,임산부 난자살해,여자들에 대한 강간살해,가옥 등에 불지르기 등이었고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불에 던져 넣고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나올 때까지 군화발러 짓밟고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 속에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사 시키는 것이었다."

위 글은 천인공노할 만행이며 마치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이 중국 대륙에서 저질른 만행을 방불케 한다.또한 잔혹소설의 한 구절을 연상케 한다.더구나 우리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사 시켰다는 내용에 이르러서는 아연실색 할 수 밖에 없다.그러나 놀랍게도 현역 대학 교수 강정구가 학술회의 석상에서 인용 발표한 내용이다.

 

이런 맹랑한 내용은 베트남전 당시 베트콩이 사용한 심리전의 전단 내용과 흡사하다.이런 엉뚱한 모략 중상이 21세기 대낮에 학술회의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실태이다.이런 내용이 학술지에 게재되어 세월이 흐르면 진실이 되고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는다.

따라서 당사자가 생존하고 있을 때 이를 확실히 규명해서 명백한 반론을 남겨 한국군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

위 글에 제시된 1965년 12월 22일이라면 필자가 맹호사단 제1연대 재구대대장으로 재직중인 날자와 같다.또한 빈딩성 퀴논시 지역이라면 분명 제1연대 전술책임지역 (TAOR)이다.당시 사단장은 채명신 소장이고 제1연대장은 김정운 대령이다.

1965년 12월 22일 제1연대 가 퀴논지역에서 작전한 부대는 배정도 중령이 지휘하는 1대대와 이필조 중령이 지휘하는 2대대였다.이 중대한 사건에 접해 당사자 격인 사단장,연대장,대대장이 모여 대책을 강구했다.

 

그 결과 두 교수 강정구,한홍구에 통보 학술회의를 제의 했다.그 두 교수도 수용한다고 해서 우리측에서는 채명신,박경석,이선호,지만원 등이그 두 교수와 함께 학술회의를 열었다.

필자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군사평론가협회 주관,동아일보 후원으로 이루어졌다.필자가 기조연설을 하고 양측 발표자인 이선호,지만원,강정구,한홍구 네 주제 발표자가 발언을 했다.강정구와 한홍구 두 교수는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과 민간인 참상'이 주제였고 우리측 이선호 지만원 두 박사는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재조명'이 주제였다.

주제발표가 끝난 뒤 채명신 장군이 결론적인 연설로 끝맺었다.

 

그날 학술회의에서 강정구,한홍구는 구수정 여인이 만들었다는 문제의 이상한 글을 낭독 주장한 외에 단 하나의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이로써 한국군의 양민 학살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일단락이 되는듯 했다.

그러나 그후에도 2010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군의 용병설과 양민 학살설이 학술지에 발표되는가 하면 학위 논문에도 인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 밝히지 않을 수 없는 책임을 절감해 육군본부에서 발행하는 '군사연구지'에 기고하게 되었다.

주월 한국군의 가장 중시한 것은 양민의 희생을 방지하겠다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채명신 사령관의 가장 강력한 훈령은 '백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이다.

 

이 훈령에 따라 우리 한국군은 우리측 희생을 각오하면서까지 양민 보호에 나섰다.물론 전장에서의 양민의 희생을 100% 막을수는 없다.어느 전쟁에서나 군인의 희생보다 민간인의 희생이 많다.더구나 베트콩은 여자도 있고 어린이도 이용한다.그래서 우리는 어린이의 수류탄에 희생되는 비극도 겪었다.

지금 학계에서 인용되는 한국군의 양민학살 자료는 대부분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콩의 심리전에 이용되었던 허위사실임을 여기서 분명히 밝힌다.

 

베트남전 참전은 우리나라 경제에 기여해서 오늘날의 경제력의 바탕이되었고 한국군이 제1급 군대로 발돋움한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는 긍정적 시각이 더 우세한 것은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그러나 우리는 부정적 시각에도 철저히 대비해야 하는 경계심도 갖추어야 한다.참전 노병들은 매일 그런 간접침략을 분쇄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음을 현역 후배들에게 밝힌다.

우리 국군의 베트남전 파병은 우리 조국과 우리 국군에에게 내린 하늘의 은총이라고 필자는 늘 생각하고 있다. 만일 우리 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경제대국 대한민국과 제1급 선진 국군이 이룰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필자의 역사관이다.  

 

Ⅱ장.위대한 파병 결정

이미 우리 국군은 비전투부대인 이동외과병원과 비둘기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한바 있지만 미국이나 월남 당국은 한국군의 전투부대 파병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었다.1965년에 들어서자 베트남정세는 더욱 치열한 전쟁상황으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5년 2월 7일. 미해군기에 의하여 북부 베트남에 대한 폭격이 시작되고 3월 중에는 미지상군 6만여 명이 증파된데다가 호주군 보병대대가 베트남에 도착하는 등 우방군의 지원이 시작되면서 확전의 징후는 명확하게 나타났다.

 이무렵 우리나라에서는 비둘기부대를 보내놓고 온 국민이 베트남전쟁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언제 어디서나 화제의 중심은 베트남전쟁이었다.

 

 아직은 명확한 것은 아닐지라도 국민들 사이에는 한국군의 전투부대 파병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었다.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 육군의 젊은 진취적인 장교 사이에는 베트남전쟁 파병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물론이고 의욕적인 참여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인 1965년 6월 14일에 월남정부는 다음과 같은 공한을 우리 정부에 보내왔다.


 

 대한민국 국무총리 귀하.

 본인은 월남공화국과 월남공화국 국군을 대표하여 대한민국정부에 베트남의 대공산투쟁을 원조하기 위하여 1개 전투사단을 파견하여 주실것을 정식으로 정중하게 요청하는 바입니다.

 월남공화국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본국에 제공하여 주신 고귀한 원조에 대하여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귀하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합니다.

                                                                                                                      1965년 6월 14일

                                                                                                                      월남공화국 수상

                                                                                                                       Phan Hoy Quat


 

 이 공한을 받은 우리 정부는 전투부대 파병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을 세우고 관계 부서에서 활발한 준비를 서두르게 하였다.미국의 파병 요청도 중요하지만 국가간 당사국인 월남공화국의 파병 요청 또한 명분상 필수적인 과정의 하나였다.

 우리나라의 모든 신문은 일제히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여 보도하기 시작했으며 온 국민은 찬반 양론의 토론이 일기 시작하였다.이와같이 전투부대 파병을 위한 여러가지 조치가 준비되는 동안 월남정부는 재차 지원요청을 호소하는 공한을 보내왔는데 이는 월남정부에 정치적인 변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쿠데타가 일어나 공군준장인 구엔 카오 키 수상이 등장한 것이다.

 

 우리 정부나 정치인 심지어 국민들 사이에서도 전투부대 파병은 긍정하면서도 월남공화국의 정치적인 불안을 늘 염려하고 있었다.

 이무렵 미국의 파병 요청 또한 집요했다.심지어 한국군 파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휴전선에 배치한 미군 사단을 베트남전선에 전환 투입할 수 박에 없다는 은근한 압력까지 서슴지 않았다.

 

 우리 육군은 전투부대 파병을 기정 사실로 보고 실무진에서는 전투부대 파병을 위한 제반 준비를 은밀히 서두르고 있었다.

 육군본부에서 전투부대 파병을 적극 지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유에서였다.

 

베트남전 한국군의 최초 사단급 작전인 맹호5호작전에서 재구대대가 최고 수훈을 기록하자 맹호사단장이며 주월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이 재구대대 전 장병에게 치하를 하기위해 격전장을 방문하였다

첫째, 육군의 현대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중시하고 있었다. 우리 국가의 경제력으로는 당시 현대화능력이 없었다.우리 육군의 모든 장비는 2차세계대전시 장비 그대로였다.개인화기에 있어서도 미군은 자동소총인 M14에서 M16으로 발전해 장비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반자동인 M1소총이 고작이었고 공용화기 또한 모두 노후화되어 있었는가 하면 기동장비를 비롯한 지원장비 모두가 낙후될대로 낙후되어 있었다.심지어 보병 대대장의 지휘용 찝차도 고장나기 일쑤였다.

 

 둘째, 실전 경험을 통해 북한군보다 우위의 전투력을 구비하자는 것이었다.당시 휴전선에서는 소수의 북한군 또는 공비가 은밀히 침투하여 곳곳에서 교란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육군본부에서는 전투경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셋째, 만일 한국군 대신 미군 사단이 베트남전에 전환 투입된다면 한국방어에 차질이 생길수 있다는 위기의식도 작용하였다.

 넷째, 한국전쟁시 미군의 참전으로 공산군을 격퇴시켰는데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는 명분론도 상당히 강했다.

 끝으로 우리 육군을 세계에 과시 하여 한국군의 우수성을 만방에 떨치고 우리 젊은 장병들에게 진취성을 구비케 한다는 이상론도 작용하였다.

 

 그러나 정계를 중심으로 신중론도 만만치 않았다.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의 일각에서도 적지않게 신중론을 폈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나라가 베트남전에 깊숙히 관여한다면 비동맹국과 중립국은 물론이요 대유엔 외교에 있어서 호전적인 국가로 인정되어 국제정치사회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둘째, 한국과 월남은 미국과 한국 관계와는 달리 상호방위조약이나 집단안전보장조약을 맺은 것도 아니고 한국전쟁 때와 같이 유엔의 결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셋째, 휴전선을 경계로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현실에서 전투사단을 파병한다는 것은 국토방위가 약화된다.

 위와 같은 신중론은 사실상 찬성론 못지않게 논리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국군 수뇌부에서는 전투부대 파병을 기정사실로 해서 착착 준비에 임하고 있었다.그런 가운데 적극 반대하고 있던 야당에서도 파병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지도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야당의 거목인 김홍일 장군은 국군 파병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국위를 떨치고 전투경험을 축적하여 세계 일류 군대가 되는 유알한 길이고 국가 경제에 크게 기여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어서 박순천 여사 또한 지지 대열에 합류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역할은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었다.그는 처음부터 국가와 국군을 위해서는 파병이 불가피하다는 생가이었다.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는데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국군 현대화를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는 것이었다.

 

 역사라는 이름의 대하의 도도한 흐름은 마침내 파병 찬성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8월 13일에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일부 야당 의원이 퇴장하는 가운데 표결에 들어갔다.그 결과 찬성 101표,부결 1표,기권 2표의 절대 다수표로 전투부대 파병안이 가결되었다.드디어 역사적인 전투부대 파병이 결정된 것이다.

 

 이 결정은 대한민국 국군의 우렁찬 전진에의 시동이 되었으며 한민족이 세계무대로 도약하는 출발점에 다가서게 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발표를 통하여 국군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아시아를 불사를지도 모를 위험에 대해서 베트남을 불태우고 있는 하나의 불씨를 미연에 꺼버리는 데 협력하는 것은 안전을 위한 최상의 길이다.

 

 이제 우리는 남의 관여나 도움을 받던 피동적 위치에서 주요 국제문제에 대해 일단의 책임을 질 수 잇는 전진적인 자세를 취해야 될 때가 왔다.

 베트남의 자유투쟁에 참여하는 것은 적게는 우리의 국가안전과 적극적인 반공투쟁을 강화하는 것이며 크게는 자유 세계의 대공 방위전선을 정비 강화하고 자유에 봉사하여 평화에 기여하는 영예로운 길이다."

 

 이 담화의 내용은 명분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박정희 대통령의 의중에는 그 명분 보다 더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그 사정이란 바로 국군 현대화의 실현과 함께 경제개발에 대한 의지였고 새로운 세계 시장의 개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육군의 자랑스러운 수도보병사단의 베트남전쟁 참전이 결정되었다.

 

필자는 당시 진해 육군대학에서 대부대학 강의중 파병 제1진 보병대대장으로 선발되었다는 통보에 접하고 수강중인 학생장교와 함께 만세를 힘차게 불렀던 기억이 새롭다.군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그날이었는데 벌써 45년이 흘러 노병이되었다.

 지금도 맹호 재구대대 제1진 중대장과 대대참모들과 함께 분기마다 '재구회'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갖는다.모든 참석자는 예비역 장군이다.

그 모임에서 필자의 호칭은 장군도 아니오 회장도 아니다.오직 '대대장님'이다.그 호칭으로 불리워 질 때 가장 행복하다. 그것이 바로  군인의 꽃인 전우애가 아니겠는가.

 

Ⅲ장. 선진 육군시대의 서막

수도보병사단의 제1보병연대와 기갑연대의 베트남전 파병이 확정되자 육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 올랐다.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전투부대의 파병이 갖는 역사적 충격과 함께 3류 군대급의 육군의 전투장비를 1류급 군대의 장비로 현대화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더구나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현 상황하에서 전투경험을 통한 우위의 전투력 확보가 당면 과제였다.

 1965년 당시 우리 육군의 군제(       millitary system)는 미군의 군제를 따르고 있었지만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본군식의 리더십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였다.그 원인은 철저한 인사적체 때문이었다.

 

 그 한 예로서 육군의 지휘부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세계 군사상 유례없는 95% 이상의 장군 진급을 기록한 군 초창기 군사영어학교 출신 장군들은 장기간 계속해서 참모총장직을 독점하고 있었다.

 일반 군사학교의 1개 기수에 해당하는 군사영어학교 출신 이응준 준장이 초대 총장을 맡았고 2대 채병덕 준장에 이어지고 장장 20년간 18대 김계원 대장까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총장직을 독점하고 있었다.이들 모두 일본군 만주군 출신 장군들이었다.

 어디 그뿐인가.채병덕을 비롯한 정일권 백선엽 등은 각각 두번씩 총장직을 연임하였다.그러한 전근대적 인사 적체는 곳곳에서 하극상 사건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그 대표적인 사건은 육사 8기 김종필 중령이 주도한 하극상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제28사단장을 휘하 보병대대장이 권총으로 사살한 끔찍한 사건이었다.8기생의 하극상 사건은 인사 적체에 따른 불만 누적으로 발생한 사건이지만 제28사단장 사살 사건은 리더십에 관한 복잡한 문제가 얽히고 있었다.

 

 사단장은 일본군 출신으로 철저한 일본군 리더십을 고수하고 있었다.일본군 리더십의 특징은 절대 복종과 일방적 명령 이행의 강압에 있다.

부하는 무조건 상관의 명령을 복종해야 하고 건의와 의견 제시는 묵살되었다.

 대대장 정구헌 중령은 미국 육군보병학교 OBC과정을 이수한 엘리트 장교였다.일방적이고 폭행을 불사하는 사단장에게 그 울분을 참지 못하고 현장에서 권총으로 사살 한 것이다.이 사건에 있어서 추호도 정구헌 중령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다만 일본군식 리더십과 현대적 개념의 리다십의 상충에서 온 불행한 사건이므로 교훈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깊이 관조해야 한다.

 필자가 보는 당시의 육군은 장비면에서 뿐만 아니라 지휘체제나 리더십에 있어서도 선진국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군대였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누적된 폐단을 인식한 혁명정부는 먼저 군 인사법을 제정하여 정년제를 통한 인사 적체의 병폐를 없애는 준비를 서둘렀다.이러한 시기에 수도보병사단의 파병을 위한 재편성은 많은 장교들에게 관심을 갖게 했다.

 특히 새로 임명되는 사단장과 주요 지휘관 선발에 많은 이목이 쏠렸다.물론 이 과정에서 일본군 출신 장군도 사단장에 선발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재직중인 채명신 소장을 파병 수도보병사단장에 임명했다. 채명신 소장은 육사 5기생이며 미국 육군보병학교 OAC와 미국 지휘 및 참모대학을 졸업한 현대적 개념의 리더십을 소유한 탁월한 장군이다. 특히 한국전쟁시 적 후방에서 활약한 백골병단을 지휘했던 비정규전 전문가다.

 

 많은 장교들은 채명신 소장의 파병 책임자로 임명한데 대해 크게 환영했다.이어서 연대장,대대장 등 주요 지휘관의 선발과정에 들어갔다.기본 지침은 해당 지휘관의 직위를 성공적으로 역임한 경험자 가운데 육군대학 정규과정을 졸업한 한국전쟁 경험자로 정했다.이리하여 제1진주요 지휘관은 단 한 사람 예외 없이 그 기준에 적합한 지휘관으로 선발했다.

 최초 주요 지휘관 선발 기준에는  미국 군사학교 졸업자격이 없었는데도 공교롭게도 선발하다 보니 주요 지휘관 전원이 미국 지휘 및 참모대학이나 보병학교 졸업자였다. 

 

 제1진에 선발된 주요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제1보병연대장 김정운 대령. 제1대대장 배정도 중령. 제2대대장 이필조 중령. 제3대대장 박경석 중령(필자)
        기갑연대장 신현수 대령. 제1대대장 박한영 중령. 제2대대장 김용진 중령. 제3대대장 최병수 중령

 

 수도보병사단은 주요 지휘관은 물론이고 중대장, 소대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원 교체되어 재편성 되었다.편성이 완료되자 강원도 홍천 주둔지에서 채명신 장군이 창안한 비정규전 대비 훈련이 시작되었다.이무렵 모든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파병 사단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이때부터 수도보병사단은 맹호부대로 불리워지기 시작했으며 '맹호는 간다'의 국민 가요가 제정, 유행되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그 노래가 흐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훈련을 마친 맹호부대 장병은 국민들의 관심과 환호를 받으며 부산항을 통해 베트남 전지로 향했다.

 필자는 이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더욱이 베트남의 정글에서 전사할지도 모를 전지에 출진하면서도 감격과 환희의 밝은 장병들의 모습은 눈물없이 볼수 없는 행복의 순간이었다.우울하다거나 후회하는 단 한명의 장병이 없는 이 순수한 부하들을 지휘하며 전장으로 향하는 필자는 하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부산항을 떠나고 있었다.

 필자는 이 부산항 출항과 더불어 선진 육군의 서막이 오랐다고 회고하고 싶다.

 

Ⅳ장. 신화창조의 전장.

맹호사단장 채명신 소장이 주월한국군 사령관을 겸직하게 되었고 월남공화국 수도인 사이공에 주월한국군사령부를 개설하였다.이 내용은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으나 매우 깊은 의미가 숨어있다.

 

 애당초 미군 당국은  한국군 전투부대가 도착하면 주월 미군사령관이 직접 지휘하려고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한국군 독자적인사령부 개설은 미군 당국에서 바라지 않았다.만일 사령부를 개설하더라도 맹호사단이 있는 빈딩성 퀴논에 개설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그러나 채명신 소장은 미군의 작전지휘를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사이공에 설치하자 미군 당국은 당황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재구대대 CP (Command Post-지휘소)를 방문한 VIP. 오른쪽부터 주월한국군 부사령관 이훈섭 장군,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내무부장관 김일환.연대장 김정운 장군, 재구대대장인 나.
원래 연대장은 대령이지만 김정운 대령은 제1연대 작전 성공으로 현직에서 장군으로 진급 했다. 이후 귀국하고 그 후임으로 전성각 대령이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독립국가의 군대를 일방적으로 지휘하겠다고 강제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군이 한국군을 지휘하겠다고 나선데 대해서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파월 전 서울에서 한미 두 군 관계관이 회의를 개최한 자리에서 구두로나마 한국군이 베트남에 도착하면 미군 사령관이 지휘하는 것으로 양해되었었다.심지어 한국군 대표인 합참 작전국장 손희선 소장은 회의 석상에서 "한국군이 미군 사령관의 작전지휘를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까지 너스레를 떨었기 때문에 미군측에서는 한국군의 작전 배속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채명신 소장의 의중은 분명했다. 베트남에서의 전투는 미군과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한국군 독자적으로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었다.이미 서울에서 출발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라에서 채명신 소장은 휘하 부대를 직접 작전지휘하겠다는 결의를 다졌고 그 문제에관한 한 박정희 대통령은 채명신 소장에게 위임되었다.

 

 채명신 소장이 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지휘권을 가져야 되겠다는 이유는 매우 진취적이며 타당성이 인정되었다.

 

 첫째, 당시 한국의 일부 야당측에서나 공산권에서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은 미국의 청부전쟁에 말려든 달러벌이 용병이라고 모략 선전하고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의 자존을 위해서도 독자적 지휘권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둘째, 베트남전의 양상이 불확실하므로 미군의 작전지휘를 받는다면 우리 한국군이 미군들이 가지못하는 위험지역에만 투입될 수 있고 그렇게 됨으로써 걷잡을수 없는 많은 희생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한국군 독자적 교리를 창안하고 실험하면서 발전적인 전투 경험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끝으로 베트남전에서 당사국인 월남군이 미군 사령관의 작전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는데 같은 독립 국가의 군대인 한국군만이 미군 사령관 작전지휘하에 둔다면 공산권에서 주장하는 청부전쟁 용병임을 자처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었다.

 미군 당국자들에게 채명신 소장이 한국군 독자적 작전지휘권 화보의 당위성을 설파한 연설문은 유명하다. 그 연설을 경청한 웨스트모얼랜드주월미군사령관 이하 참석 장성들은 그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마침내 한국군 독자적 작전지휘권이 양해되었다.

 그 연설문의 요지는 한국의 처한 어려운 문제부터 시작하여 미국과 미군에 의한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성전이 자칫 한국군이 미국의 청부전쟁에 말려든 달러벌이 용병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제시했다.또한 공산권의 모략 중상을 기정사실화 할 수 있음도 지적하면서 미군과 한국군의전통적 우의와 긴밀한 협조로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작전 지휘권 문제가 일단락되자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되었다.채명신 소장은 한국군이 부여받은 전술책임지역(TAOR)내에서 미군과 월남군 방식과 전혀 다른 중대단위로 분산 각각 중대전술기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 중대전술기지 개념은 근본적으로 미군의 작전개념과 달랐다.미군의 작전개념은 일명 수색격멸전략(Search and Destroy Strategy)이라는기동작전이었다.주로 전투단 단위로 주둔하면서 적을 찾아 신속한 기동으로 적을 포착섬멸하는 정규전 방식이었다.

 채명신 소장의 중대전술개념은 전술책임지역 내에 중대별로 산개하여 중대전술기지를 구축하고 48시간 적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추고 지역 평정이 달성되면 전술책임지역을 확대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미군과 월남군 당국은 회의의 눈초리로 중대전술기지를 보고 있었다. 미군이나 월남군은 대부대도 기습을 당하여 많은 피해를 입고 있는데 중대쯤은 베트콩의 먹이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군이나 월남군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틀렸음이 입증되는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바로 멩호의 두코와 청룡의 짜빈동에서 두 전술기지의 중대가 각각 연대급 월맹군과 베트콩을 섬멸한 것이다.베트남은 물론 자유세계 주요 매스컴은 이 중대급 한국군의 대첩을 특집기사로 보도하면서 한국군의 이룬 기적에 대해 극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바로 이때부터 한국군은 세계 1급 군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이 대첩에 이어진 맹호의 야간침투작전의 성공으로 '맹호는 베트콩의 전유물인 밤을 되찾았다'고 세계 군사학계를 놀라게 하는 신화를 창조했다.

 이렇게 성과가 이어지자 미군당국의 한국군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이어서 전체 한국군에게 대망의 M16소총을 비롯한 공용화기 무전기 등 미군과 동등한 장비를 갖추게 되었다.

 

 필자는 이때부터 우리 육군이 명실상부한 세계 1급 군대로 도약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우리 육군의 변화가 베트남전에서만 성취된 것이 아니었다.바로 한국의 155마일 휴전선에서도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육군이 파병 전만하더라도 우리의 휴전선은 북한군의 훈련장이라고 빗댈 정도로 DMZ주도권을 북한군이 행사하고 있었다.그러다가 배트남전에서 귀국한 소대장 분대장들이 휴전선에 배치되기 시작하면서 DMZ에서의 양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1967년부터 그 효과가 극대화되기 시작하면서 공비의 지상침투가 완전히 봉쇄되어 침투하는 쪽쪽 우리 장병에게 사살되었다. 북한당국은 마침내 지상침투를 포기하고 해상 침투로 전환하는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베트남전은 우리 육군에게 현대전의 운영까지 터득하게 했다.1965년 11월부터 시작한 맹호사단의 모든 기동작전에서 미군측은 미군에 못지않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헬기 뿐만 아니었다. 근접항공지원은 물론 B52중폭격기에 이르기까지 보병대대장이 요청하면 요청지역 하늘에 나타나 폭탄을 퍼붓고 갔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군은 현대전 장비를 남용하지 않았다.바로 한국전에 필요한 전기전술을 개발하고 익히기 위해서였다.

 주로 야간침투작전,수색정찰,매복,유인전술 등 재래식 전기를 발전시켜 한국방어에 기여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그 결과 현대전 방식의 전술 적용시 보다 재래식 전술에서 베트콩과 월맹군을 압도하는기적과 같은 전과를 올렸다.

 지금은 그당시 신화창조의 주역인 전사들이 우리 육군을 떠나 모두 노병이 되었지만 한결같이 육군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노병들이 기대한 것보다 더 멋지고 씩씩힌 후배를 보는 눈은 지금도 젊은이 못지않게 영롱하다.

 필자는 다시 태어난다 해도 육군에 몸을 둘 것이다.

 

Ⅴ장. 역사의 장엄한 발자취

주월한국군이 베트남전을 통하여 세계 만방에 한국군의 용맹성을 과시하면서 국위를 떨친데 대해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특히 우리 육군은 베트남전에서 익힌 소부대 전술을 한국방어에 적용함으로써 얻은 역사적 전환점은 길이 교훈으로 빛낼만 하다.   한국군이 독자 개발하여 성공적인 성과를 올린 중대전술기지 개념과 야간침투작전은 세계 군사학계는 물론 일반 지식인 사이에서도 큰 화제였다.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이 재구대대를 방문, 직접 대대장인 나에게 충무무공훈장을 달아주며 전공을 치하하고 있다. 황송한 표정의 내 오른쪽 가슴에 충무무공훈장이 보인다.
채명신 장군과 내가 앉아있는 의자는 포탄상자로 만든 '야전용 인락의자'이다.채명신 장군은 사이공에 있는 주월한국군사령부에 위치해 있었지만 자주 방문하여 장병을 격려했다. 때로는 총탄이 날아오는 격전장까지와서 작전을 독려했다

이렇게 독자적인 전술로 한국군이 성공적인 베트남전을 수행하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일본과 자유 중국이었다.일본의 신문은 특히 맹호사단의 활약상을 크게 보도하며 월맹군과 베트콩이 무서워 하는 것은 오직 한국군 맹호 뿐이라는 기사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이무렵 자유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공한을 보내어 '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 개발한 독자적 전술전기를 전수해 줄것'을 요청해 왔다.아울러 한국군 교수단 초청 서한도 함께 보내왔다.박정희 대통령은 즉각 육군본부에 한국군 교수단 자유 중국 파견을 지시했다.

 

1968년 3월 육군본부는 자유 중국에 파견할 교수단을 구성. 맹호사단 초대 참모장을 역임한 최영구 준장을 단장으로 하여 투코 전투의 당시 대대장 최병수 대령과 야간침투작전의 당시 대대장 박경석 대령(필자)으로 정하고 자유 중국에 파견하였다.아마 한국군이 독자 개발한 전술을 외국군에게 전수한 경우는 건군 이후 최초라고 생각한다.

 

자유 중국에 도착한 교수단은 3군 대학을 비롯하여 전체 자유 중국군 영관급 및 장관급 장교에게 강의했다.수강 대상의 전체 고급장교들은 단한 사람도 결강하지 않았다고 당시 장경국 국방부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다.필자는 이때 얼마나 대한민국의 육군 장교임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는지 강의 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몰래 닦기도 하였다.

 

 이러한 영광의 빛 뒤에는 그림자도 있었다.베트남전 한국군 참전이 중반을 넘어서자 차츰 기강이 해이되면서 첫 전투부대 파병시의 당당한 기상은 빛바래기 시작하였다.더구나 미군이 곳곳에서 수세로 몰리는 현상이 생기면서 우리도 철수의 날만 손꼽고 있었다.더구나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중장이 귀국하고 새 사령관이 부임하자 모든 형태의 부대 운영과 리더십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무렴 맹호사단 기갑연대의 안캐패스(Ankhe Pass)전투는 치열한 전투로 확대되면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는 치욕을 맞았다.안케패스란 빈딩성의 성도인 퀴논에서 크메르 국경까지 관통하는 19번도로 중간지점에 있는 고개를 일컫는다.

 

이 일대의 주요지형은 안캐패스 정상인 638고지를 비롯하여 553고지 544고지 등의 높고 낮은 고지군을 형성했다.638고지는 안캐패스 일대를 환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요지로서 19번도로의 안전확보를 위해서는 절대적인 역할을 해왔다.

기갑연대 1중대는 중대전술기지를 이 고지에 설치하지 않고 그 하단부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대에 설치했다.이게 큰 화근을 불렀다.더구나 놀라운 것은 중대기지가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전 무려 1개월 전부터 중대전술기지 바로 눈앞 638고지 정상에 월맹군이 완강한 진지를 구축한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그동안 단 한번도 수색정찰을 하지않았다는 증거였다.

 

공격을 받자 연대와 사단에서는 증원 병력을 투입한다는 것이 건제를 무시하고 병력을 축차투입하면서 실패한 공격 축선상으로 재공격을 시도하는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실책을 저질렀다. 결과적으로 적을 격퇴하여 19번도로를 개통시켰지만 너무나 많은 희생을 당하여 결코전승을 뽐낼만한 작전이 아니었다.이 단일 전투에서 입은 맹호의 손실은 베트남  파병 전 기간을 통하여 가장 컸다.

백마사단에서도 철수를 앞두고 긴장이 해이한 틈을 탄 베트콩의 기습으로 봉로만 사고라는 치욕을 남겼다.  맹호와 백마가 남긴 이 치욕이 베트남 파병 전 기간 중 가장 부끄러웠더 사건임을 그림자로 남긴다.어느 나라 어느 군대나 전투에서 단 한번의 패배없이 전승을 기할수는 없다.그러나 실패를 교훈삼아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 대비가 현명한 리더십의 첩경이다.그런데 전쟁기념관 베트넘전 전시장에는 이 안캐패스전투를 자랑삼아 내놓고 있다.관계자의 무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베트남전에 대한 평가가 바르게 기록되고 후대에 자랑스러운 파병임을 각인시키기 의해서는 베트남전 파병에 대한 역사가 긍정적이며 정확하게 이해되도록 노력해야 한다.한편 학문적인 토대 또한 만들어 놓아야 한다.

베트남전에 파병된 한국군 32만여 명은  우리 육군을 세계 1급 군대를 성취시키는데데 기여한 영웅들이며 국위를 만방에 떨치고 경제발전의 초석이된 애국자임이 분명하다.미국의 청부전쟁에 말려든 용병도 아니며 결코 양민 학살의 주범도 아니다.

맨 처음 언급한 것처럼 강정구,한홍그 두 교수에게 천명한 필자의 기조연설로 일단은 파병에 대한 모독을 잠재웠지만 앞으로 다시 모함할 수 있는 세력은 살아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당시 발표한 기조연설의 핵심 부분을 여기에 게재함으로써 반론의 토대로 남기고자 한다.

 

학술회의시 발표한 기조연설문(요지)

  전쟁과 국제법은 불가분의 관계이다.그러므로 전쟁규칙과 전쟁에 관한 각종 제한을 규정하고 있는 국제법을 모르는 사람이 함부러 "침략전쟁이다" "청부전쟁 용병이다" "양민학살이다"를 정의 내리는 행위는 마치 돌파리 의사가 암 환자 수술을 하겠다고 덤비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각종 통계에 따르면 세계 여러 전쟁,특히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군이나 월남군에 비해 민간인 희생이 가장 적었다는 것이 연합군이 공유한 공식 통계라는 것을 참작하기 바란다.  

 세계대전을 비롯 6.25한국전쟁을 포함한 모든 전쟁에서 민간인의 희생이 전투 당사자인 군인의 희생보다 월등 많다.그러나 주월한국군은 그통계에서 예외적인 것으로 공인되었다.그 요인은 이자리에 참석하신 당시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훈령 "백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에 충실했던 휘하 장병의 인도주의 실천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지휘했던 제1진 맹호 재구대대도 수많은 전투를 겪는 동안 민간인 희생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포탄이나 총탄을 군인만 죽이도록 고안된 기발한 발명품이 나오지 않는 한 민간인 희생을 막을 방법이 없다.그 과정에서의 민간인 희생은 학살이 아니다.

   내가 분명히 말해두고싶은 것은 전쟁이란 응징과 보복의 연속이라는 사실이다.그 과정에서의 민간인 희생은 어쩔수 없다.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해 무고한 시민 수십만을 죽였다.그래서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인류의 오래 전부터의 숙원이 아닌가.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낸 일본이 양민학살이라고 미국에게 항의하지 않았던 그 이유와 배경을 살펴야 한다.그 희생된 수십만으로 하여 수백만이 더 희생될지 모를 전쟁을 종식시킬수 있었다는 데 의미와 명분을 둔 것이다.

 

  베트남전에서의 적은 월맹군과 배트콩이었는데 베트콩은 그들이 주장하는 양민이다.노인도 있고 여자도 있고 어린이도 있다.전장에서 상대가 적대행위를 할 경우 그 상대를 사살하는 행위는 정당방위이며 합법적이다.베트남전쟁과 같은 게릴라전에서 더욱이 피눈물을 흘려가며 양민보호에 임했던 나와 내 전우들을 양민학살의 주범으로 모는 행위는 분명 이적행위이다.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강정구,한홍구 두 교수는 각성하기 비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