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계획을 실행하는 중이다. "해외 용지 확보 같은 것은 정부가 앞장서서 하고 경영은 민간이 나서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제 식량가격 폭등이 대북 식량 지원에 문제가 될 수 있다며, 그 대안으로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에 땅을 장기 임대하고 북한의 노동력을 이용하며 생산된 곡물을 직접 북한으로 운반하는 방안도 있다고 했다. 이미 연해주에선 한국 영농기업들이 제주도 넓이의 3배에 이르는 총 51만2000㏊ 규모의 50개 농장을 확보(32개)했거나 협상중(18개)이다. 사료의 안정적인 수급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모작이나 삼모작이 가능한 동남아에 곡물기지를 건설하여 현지 생산된 곡물을 사료 등을 만들어 올 수도 있다." 2000년부터 훈센 총리의 경제고문을 맡았던 이 대통령은 캄보디아로부터 방문을 공식 요청받은 상태이다. 또 대통령은 5월 26일 아프리카 수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후 "수단에 해외 식량기지 차원의 농업용지를 개발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할흐골 지역은 인근에 바이르 호수와 할흐강이 있고 연간 강수량이 270㎜에 이르러 밀 옥수수 감자 고구마 등의 재배가 가능하다. 현재 밀을 기준으로 볼 때 1㏊당 1.2t의 수확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농산물 관계 전문가들은 관개시설이 확충될 시 수확량을 1.7 t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농지 임차료는 ㏊당 76센트에 불과하고, 임차기간은 50년(추가 50년 연장 가능)에 이른다. 〈지도 참조〉
몽골로 향하는 장수왕의 사절
우리 식량기지가 들어설 할흐골 지역은 몽골수도 울란바트로에서 동쪽으로 1000㎞나 떨어졌다. 면적은 여의도의 1000배에 이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529년 전 고구려 장수왕이 점유한 지역이다(479년). 몽골에 있던 유목제국 유연과 어떠한 형태의 협약을 맺었다는 점에서도 너무나 비슷하다.
478년 장수왕의 사절이 평양을 출발하여 몽골고원을 향했다. 사절 한 사람당 3마리 이상의 말을 데리고 갔다. 말이 지치면 갈아타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행보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따뜻한 봄의 기운이 올라가는 것과 속도를 같이 했다. 늦은 봄이라 평양에서는 벌써 풀이 새싹을 내밀었다. 사절은 중간 중간에 그 풀을 먹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신의 말이 내닫는 북쪽에서도 풀이 생겨났다.
사절들은 완만한 초원으로 이루어진 대흥안령산맥을 넘었다. 그 곳부터는 '지두우'라는 유목민들이 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평온하고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장수왕의 밀명을 받은 고구려 사절단장은 그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저들의 평화도 얼마 남지 않았어!" 밀명의 내용을 모르는 사절단의 서기는 그들의 배치상황을 정신없이 기록하고 있었다. 그는 사절단의 업무 수행일지를 빈틈없이 작성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일지는 귀국 후 고구려의 대외정보부에 들어갈 것이고, 보고서로 작성되어 장수왕에게 보고될 터이다.
사절단장과 그 일행은 몽고고원의 중심부에 들어섰다. 오르콘 강 상류였다. 세계 최대의 대초원이 펼쳐졌다. 초원에서 수많은 말과 양 그리고 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역시 유목제국의 '요람'의 땅이라 부를 만하다. 과거 흉노·동호·선비·유연 등 이름을 남긴 유목제국은 대부분은 여기서 태어났어. 이곳을 장악하지 못하면 대형의 유목국가로 발전할 수 없을 것이 확실해!"
유연 칸의 천막궁정에 도착한 사절단은 모든 의례적 절차를 마치고 칸을 독대했다. 장수왕이 국서를 전했다. 칸은 놀라는 표정이었다. 장수왕의 제안은 위험하고 파격적인 것이었다. "거련(장수왕) 이 사람 보통이 아니야." "자네 왕께서 우리 유연과 함께 여기서 동쪽으로 1000㎞ 떨어진 지두족의 땅과 사람들을 분할하자고 제안을 했어. 그 지역은 지금 탁발선비 북위의 발상지 알선동과 아주 인접한 지역이야." "예, 그렇습니다. 지금도 북위조정에서는 조상이 태어난 곳이라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고구려가 지두우 지역을 분할한다면 북위가 가만히 있을까."
칸의 우려는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1980년 여름 치치하르 북쪽의 오르촌족 자치기의 아라하지 서북 알선동의 거대한 동굴. 443년 북위에서 파견한 중서시랑 이창 등이 탁발 선비족인 북위 왕실의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며 벽에 새겨 놓은 축문(祝文) 200여 자가 발견됐다. 알선동에 제사를 지내게 한 북위의 태무제(탁발도)는 유연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지휘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살육한 장본인이다. 그는 425년 기병을 이끌고 유연을 습격했고, 443년과 449년에도 유연에 대한 인간 사냥대를 조직하여 고비사막을 넘었다.
북위의 내분을 이용한 영토확장
북위는 너무나 강력한 국가였다. 공격적인 북위의 통치자들은 몽골 오르콘강 유역에 중심지를 둔 유목제국 유연을 공격하기 위해 고비사막을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유연의 칸들은 북위가 언제든지 자신들을 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로 인식하고 있었다.
"칸 폐하! 지금 북위의 정치상황은 기만(欺瞞) 위의 누각(樓閣)입니다. 앞서 북위조정에서는 상황 헌문제의 황제당과 풍태후의 태후당 사이의 치열한 암투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2년 전(476년 6월) 풍태후가 황제를 독살하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닙니다. 비정상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풍태후는 외정에 신경을 쓸 수 없었습니다. 지금 황제인 효문제는 풍태후에 치마폭에 있는 어린아이입니다. 혹시 다른 황족이 외정에 성공한다면 그는 명망을 얻을 것이고 북위의 군대를 장악할 수도 있습니다." "외정의 성공과 영웅의 탄생은 풍태후 정권에 위협이 된다는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우리 거련(장수왕) 폐하께서는 이러한 약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지두우족을 분할하자는 제안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초원에 가을이 빨리 찾아왔다. 유연의 칸도 겨울을 보기 위해 궁정을 남쪽으로 옮기려고 하고 있었다. 고구려 사절단장은 칸이 군대를 이끌고 언제 어디서 지두우를 공격할 것인지 기록한 문서를 품고 귀국길에 올랐다. 고구려사절은 풀이 마르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했다.
479년 장수왕은 고구려 기병을 북방초원으로 보냈다. 그는 지두우와 거란의 땅만 탐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력과 가축도 원했다. 지두우족에 대한 고구려의 무자비한 약탈과 납치가 행해졌다. 거란족도 무사하지 못했다. 공포에 질린 일부 거란족 1만 명이 3000 대의 수레를 끌고 북위에 투항했다. 그들 가축의 상당수는 고구려의 손에 넘어갔다.
북위는 자국의 북쪽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소극적인 대응이었다. 고구려와 유연이 지두우족을 분할함에 따라 북위 조상의 발상지와 북위 사이가 차단됐다. 그래도 풍태후는 자신의 정권 유지에만 신경을 썼다. 북위 조상의 발원지가 고구려에 넘어가든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다.
유연 이용해 초원영역 확장
지두우 지역 분할은 고구려가 몽골의 유연에 먼저 제안했고 곧바로 실천에 옮겨졌다. 반면 현재 할흐골 지역 개발 사업은 몽골이 2006년에 먼저 제안했다. 우리 정부가 늑장을 부려 2년 가까이 추진되지 못했다. 그러다 곡물가격이 폭등하고 중국 일본 등이 할흐골 지역 농업 개발에 관심을 보이자 정부가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적극적이지 못한 대응이었다.
장수왕은 북위의 내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유연을 이용하여 초원의 영역을 확장했다. 그는 당시 세계질서의 주도자였다. 고구려는 군사강국 북위와 적대 관계에 있는 나라들(유연·송)과 연결을 도모해 이를 포위·견제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북위와 대립 관계를 지속하면서 유연과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양자강 이남의 송과 사막 이북의 유연을 중개해주기도 했다. 공동의 이해가 걸린 군사작전을 통해 유연과 고구려는 더욱 긴밀해졌다. 양국의 말과 곡물 교역이 원활해졌다.
무용총 접객도. 무용총은 장수왕 재위 시에 만들어졌다. 그림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있는 고구려인들이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거칠었지만타인에 대한 정치에도 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