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최영교_전쟁과 시장_05

醉月 2011. 3. 23. 08:32
<21> 고기와 곡물
사료값 폭등·쇠고기 개방 이중고
해외식량기지가 또다른 대안이다
백제를 쳐 곡물기지 확보하고
거란 공격해 유목민 되찾은 광개토왕이 해답을 준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소녀의 눈망울이 처연하다.

 

국내 쇠고기 시장 개방은 우리 축산업을 벼랑으로 몰아가는 창(槍)이 될 수 있다.

 

연합뉴스

 

어느 시골 어린이가 할아버지와 함께 외양간에 있는 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기 소 잡으면 우리 식구와 온 동네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텐데. 우리 저거 한 마리 잡는 것이 어때요?" "얘야. 저건 네 삼촌 등록금으로 쓸 송아지를 낳을 놈이야."

'우리 집에 소가 있는데 왜 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일까'. 소년은 자주 이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소년이 고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앞서 1979년 돼지값 파동 때 그 맛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초겨울 우리나라에는 우스운 속담 하나가 나돌았다. '돼지값은 칠푼이요, 나무값은 서돈이라'. 이는 돼지값보다 돼지를 몰아내는 데 쓰인 나무값이 훨씬 더 비싸다는 의미로 돼지 가격이 크게 폭락한 시대상황을 잘 표현한 말이다.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1근이 120원선에서 거래됐다. 1979년 12월 초 농수산부는 돼지값 안정을 위해 긴급 도살령을 내렸다. 그리고 범국민적으로 '돼지고기 먹기 운동'을 벌였다.

외양간의 소는 삼촌의 등록금을 마련해주지 못했다. 1985년 이른바 소값 파동이 터진 것이다. 사태는 정부 당국이 융자까지 해주며 소 사육을 권장해 놓고는 미국으로부터 소와 쇠고기를 대량으로 수입해 소값을 떨어뜨렸다. 소 사육농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개도 한 마리 10만원 이상을 받았는데 송아지는 10만 원이 되지 않았다. 소값이 개값만 못했다. 등록금을 내지 못한 그 소년의 삼촌은 다니던 대학을 쉴 수밖에 없었고, 결국 군대를 가야했다. 소값에 밀린 입대였다. 우리나라의 가축시장의 역사는 이렇게 파란만장했다.

 

 


 

축산농가의 위기

현재 세계곡물 파동은 사료의 95%를 수입하는 한국을 강타하고 있다. 사료값은 2006년 11월부터 상승하기 시작해 지난 1월까지 5차례에 걸쳐 35%나 올랐는데도 올해도 20% 이상 더 인상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양돈농가의 폐업이 늘어나고 있다. 사료값이 오른다고 돼지값을 쉽게 인상하지 못한다. 수입고기와 경쟁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돼지고기를 전년보다 16.2% 늘어난 9억 385만 달러어치나 수입했다. 쇠고기 협상 타결로 미국산 쇠고기가 대량으로 국내로 유입될 것이고 소를 키우는 농가도 압박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사료값 상승과 고기의 대량수입이란 2중 공격으로부터 우리의 축산업이 붕괴되고 있다. 문제는 사육기반의 붕괴는 수입고기 값의 폭등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데 있다.

고대에는 짐승들에게 곡물을 거의 먹이지 않았다. 가축은 수초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오히려 가축을 키우는 것을 전업으로 하는 유목민들에게 곡물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었다. 유라시아 초원의 대부분은 온대에 위치해 있다. 그것은 유목민의 이동 루트의 성격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몽골인의 경우를 보면 이동은 대체적으로 정기적이며, 직선의 남북방향이었다. 이동로는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고, 계절 변화에 상응하는 목초지 이용도 분명했다. 여름에는 식수가 가장 중요했고, 겨울에는 수초의 존재여부가 문제였다.

유목민들은 여름이 되면 서서히 북쪽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그들이 이동하는 와중에도 북쪽을 따라 풀들이 충분히 성장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계 방목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풍부한 양의 풀이 기다리고 있다. 양 한 마리당 1㏊의 목초지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수초는 8월이 되면 북쪽부터 영양분이 빠지고 말라가기 시작한다. 겨울에는 수초에 함유되어 있는 영양분이 여름의 그것에 반도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거란족들은 가축들을 이끌고 수백 ㎞ 남쪽으로 이동을 해야 했다. 그 동안 이동경로에 있는 아직 마르지 않은 풀들을 먹인다(하자노프).

20세기 초 몽고인의 칼로리 섭취를 분석한 결과 우유 버터 치즈류가 55.31%, 곡류가 24.38%, 육류는 고작 20.31%였다. 여름에는 유류(乳類)를 지배적으로 소비하였고, 겨울이 되면 육류의 소비가 올라간다. 하지만 육류는 곡물과 함께 먹어야 한다. 유목민에게 가장 가혹한 처벌은 겨울철에 곡물시장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이다.

거란족이 150㎞를 남하하여 고구려와 인접한 겨울 방목지에 당도했을 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곡물을 고구려인들과 교역에서 구해야했다. 고구려에서 흉년이 들면 문제가 발생했다. 유목민들은 약탈자로 돌변했다.


절망하는 소수림왕

377년 겨울, 고구려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봄이 찾아오자 가뭄이 들었다. 전염병이 고구려를 휩쓸었고, 기근이 찾아왔다. 굶주림은 무서운 것이었다. 백성들이 짐승처럼 서로 잡아먹게 됐다. 거란이 어려움을 간파하고 달려들었다. 북쪽 변경을 침범해 8개 부락을 함락시키고 많은 사람을 잡아갔다. 잡혀간 이들은 고구려의 북쪽 초지에 살던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고구려에 전마와 가축, 육류를 공급하고 기병 전력까지 제공하던 사람들이었다. 대가로 생필품과 곡물을 정기적으로 공급받았다. 지속된 가뭄과 흉년은 고구려의 경제력을 고갈시켰다. 유목민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유의지를 가진 자들이었다. 고구려에 기대할 것이 없던 그들은 거란이 다가오자 미련 없이 이탈했다. 고구려는 어떠한 손도 쓸 수 없었다. 소수림왕은 절망에 빠졌다. 남쪽에서 백제와 전쟁을 하고 있는데 말과 기병 전력을 제공해줄 많은 유목민이 사라졌다. 종교적 열의도 소수림왕으로 하여금 현실의 책임감에 귀 먹고 눈 멀게 할 수는 없었다.

나쁜 일은 겹치는 법이다. 383년 전진 부견의 비수의 전투에서 대패했고, 전진은 급속한 멸망의 길을 걸었다. 이듬해 전연 모용씨의 일족인 모용수는 흩어진 선비족들을 규합해 20만 명이라는 큰 세력을 형성했다. 고구려를 그토록 괴롭혀왔던 선비족 연나라가 기적적으로 부활했다. 우방을 잃고 강력한 적을 맞게 된 소수림왕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고난의 삶에 지쳤고 왕 노릇에 신물이 나 있었다. 절망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384년 11월).

동생 이련이 고국양왕(광개토왕의 아버지)으로 즉위해 무거운 짐을 지게 됐다. 385년 고구려가 일시에 차지했던 요동지역이 반격으로 다시 후연에게 넘어갔다. 이듬해 모용수가 후연의 황제로 즉위했다. 백제와의 소모적인 싸움은 계속됐다. 분쟁이 끊이지 않은 백제와의 접경지역이 고구려에서 곡물을 생산하기 가장 좋은 지역이었다. 비참한 시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거기서 태어난 자는 어디까지나 그 속에서 살아야 한다. 담덕(광개토왕)도 그 가운데 한사람 이었다.


유목민을 송환받은 광개토왕

391년 9월 요하의 상류 시라무렌강이 흐르는 초원에는 이미 겨울이었다. 눈이 내려 천지가 백색 결정체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햇빛이 내리쬘 때는 실눈을 떠야했고, 바람이 불면 앞이 보이지 않았다. 광활한 평지였다. 가도 가도 지형이 변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았다. 말이 행군이지 그것은 파란 하늘과 붙은 하얀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광개토왕의 작전 목적은 아주 명확했다. 377년 거란이 데리고 간 1만 명의 유목민을 송환받은 것이었다.('삼국사기'). 고구려 군대가 겨울 방목지에 들이닥치자 거란인들은 놀랐다. 정찰을 하던 거란의 기병들과 전투가 있었다. 하지만 단번에 제압되었다. 거란인들이 가축과 천막을 다 싸들고 이동하기에는 시간이 늦어버렸다. 옮긴다고 하더라도 다른 유목민들과 겨울 방목지를 놓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대왕은 사람을 보내 거란의 족장들에게 알렸다.

"필요 없는 인명 피해는 원치 않는다. 14년 전 당신 거란인들이 끌고 간 우리 고구려 휘하의 유목민들과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가축만 돌려주면 된다. 다만 조건이 있다. 다시 우리 북변을 침공하여 우리의 사람들을 잡아 가는 일이 없도록 약속해주기를 바란다. 약속의 징표로 족장급 사람들은 자신의 혈육을 인질로 내 놓아야 한다. 모두 500명이면 족하다." 거란의 족장급들의 회동이 있었고, 고구려 왕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결정이 났다.

광개토왕은 끌려갔던 고구려의 유목민들을 한자리에 끌어 모았다. 그리고 연설이 있었다('삼국사기'). "너희들이 거란으로 간 이유를 다 안다. 377년 당시 고구려는 너희들을 외침으로부터 보호해줄 여력도 지급해줄 식량도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올해 7월에 백제를 공격하여 임진강 이북을 확보하고 백제의 수도 한성이 지척인 한강 이북까지 영토를 넓혔다. 남쪽에 땅이 확보되었으니 향후 식량은 안정적으로 공급될 것이다. 너희들의 겨울 방목지는 고구려에 준비되어 있다. 우리만 따르면 된다."

연설이 끝나고 그 유목민들은 자신의 천막을 꾸리고 가축들을 몰아 열을 세웠다. 고구려 기병이 호위하는 가운데 평원에서 긴 행렬이 펼쳐졌다. 기병들이 행열의 좌우에 띄엄띄엄 가고 있고, 그 가운데 유목민들의 천막과 가재도구 아이들을 실은 수레가 열을 지었고, 바로 그 뒤로 유목민들이 각자 그들의 가축을 몰고 있었다. 사람보다 가축이 10배 이상 많았고, 가축들이 풀을 뜯으며 가다보니 행군의 속도도 완만했다.

현재 한국의 고기시장이 전면 개방과 사료 값 폭등이라는 두 개의 창으로 우리 축산업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육류소비는 꾸준히 증가했고, 사료의 수입량도 늘었다. 지속적인 수요는 외국의 농산물 기업들로 하여금 우리 시장을 개방하게 했다. 향후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는 고구려인들이 이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고구려는 곡물생산을 끊임없이 늘려야 했다. 농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그 시대에는 영토를 확장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것도 곡물생산에 적합한 한반도 남쪽 영토에 대한 수요가 컸다. 영토 확장과 곡물 생산의 확대는 북방의 가축사육업자 유목민들을 고구려 안에 잡아 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현 정부가 몽골 하르힐에 대규모 땅을 임대받아 식량기지를 건설한다는 소식이 있다. 앞으로 동남아나 연해주지역으로 식량기지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계획에 머물지 않고 추진력있게 진행해야 할 과업이다.

 

<22> 해외식량기지 - 할흐골과 지두우
고구려 장수왕의 몽골개척이 식량무기시대의 해법이다
479년 할흐골은 고구려 땅 북위 내분 이용해 영토 넓혀
협상과 힘으로 식량기지 개척 교훈

    몽골 대초원을 내닫는 유목민. 이런 대초목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식량을 확보하는 과제에 한 국가의 명운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유나 광물자원뿐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식량자원 확보도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미국과 일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면 해외 식량기지 확보 방안을 마련토록 하겠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얼마 전 미국으로 향하는 특별기 내 기자간담회장에서 발표한 내용은 이러했다.

대통령은 계획을 실행하는 중이다. "해외 용지 확보 같은 것은 정부가 앞장서서 하고 경영은 민간이 나서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제 식량가격 폭등이 대북 식량 지원에 문제가 될 수 있다며, 그 대안으로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에 땅을 장기 임대하고 북한의 노동력을 이용하며 생산된 곡물을 직접 북한으로 운반하는 방안도 있다고 했다. 이미 연해주에선 한국 영농기업들이 제주도 넓이의 3배에 이르는 총 51만2000㏊ 규모의 50개 농장을 확보(32개)했거나 협상중(18개)이다. 사료의 안정적인 수급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모작이나 삼모작이 가능한 동남아에 곡물기지를 건설하여 현지 생산된 곡물을 사료 등을 만들어 올 수도 있다." 2000년부터 훈센 총리의 경제고문을 맡았던 이 대통령은 캄보디아로부터 방문을 공식 요청받은 상태이다. 또 대통령은 5월 26일 아프리카 수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후 "수단에 해외 식량기지 차원의 농업용지를 개발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미 해외 식량기지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에 들어갔다. 정부 모 부처에 따르면 한국과 몽골 양국은 곧 최종 실무협의를 갖고 할흐골 지역 '농촌 마스터 플랜 지원사업' 규모와 구체적 내용을 확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업을 주관하는 국제협력단(K한ICA)은 올해부터 2010년까지 200만 달러를 몽골에 무상원조하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무상원조로 농촌개발 사업을 지원하는 대신 공기업이나 민간기업이 개발된 농지를 장기 임대받아 식량기지로 건설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KOICA는 최종협의가 끝나는 대로 공개입찰을 통해 국내시행사업자를 선정할 계획이다.

할흐골 지역은 인근에 바이르 호수와 할흐강이 있고 연간 강수량이 270㎜에 이르러 밀 옥수수 감자 고구마 등의 재배가 가능하다. 현재 밀을 기준으로 볼 때 1㏊당 1.2t의 수확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농산물 관계 전문가들은 관개시설이 확충될 시 수확량을 1.7 t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농지 임차료는 ㏊당 76센트에 불과하고, 임차기간은 50년(추가 50년 연장 가능)에 이른다. 〈지도 참조〉


몽골로 향하는 장수왕의 사절

우리 식량기지가 들어설 할흐골 지역은 몽골수도 울란바트로에서 동쪽으로 1000㎞나 떨어졌다. 면적은 여의도의 1000배에 이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529년 전 고구려 장수왕이 점유한 지역이다(479년). 몽골에 있던 유목제국 유연과 어떠한 형태의 협약을 맺었다는 점에서도 너무나 비슷하다.

478년 장수왕의 사절이 평양을 출발하여 몽골고원을 향했다. 사절 한 사람당 3마리 이상의 말을 데리고 갔다. 말이 지치면 갈아타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행보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따뜻한 봄의 기운이 올라가는 것과 속도를 같이 했다. 늦은 봄이라 평양에서는 벌써 풀이 새싹을 내밀었다. 사절은 중간 중간에 그 풀을 먹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신의 말이 내닫는 북쪽에서도 풀이 생겨났다.

사절들은 완만한 초원으로 이루어진 대흥안령산맥을 넘었다. 그 곳부터는 '지두우'라는 유목민들이 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평온하고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장수왕의 밀명을 받은 고구려 사절단장은 그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저들의 평화도 얼마 남지 않았어!" 밀명의 내용을 모르는 사절단의 서기는 그들의 배치상황을 정신없이 기록하고 있었다. 그는 사절단의 업무 수행일지를 빈틈없이 작성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일지는 귀국 후 고구려의 대외정보부에 들어갈 것이고, 보고서로 작성되어 장수왕에게 보고될 터이다.

사절단장과 그 일행은 몽고고원의 중심부에 들어섰다. 오르콘 강 상류였다. 세계 최대의 대초원이 펼쳐졌다. 초원에서 수많은 말과 양 그리고 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역시 유목제국의 '요람'의 땅이라 부를 만하다. 과거 흉노·동호·선비·유연 등 이름을 남긴 유목제국은 대부분은 여기서 태어났어. 이곳을 장악하지 못하면 대형의 유목국가로 발전할 수 없을 것이 확실해!"

유연 칸의 천막궁정에 도착한 사절단은 모든 의례적 절차를 마치고 칸을 독대했다. 장수왕이 국서를 전했다. 칸은 놀라는 표정이었다. 장수왕의 제안은 위험하고 파격적인 것이었다. "거련(장수왕) 이 사람 보통이 아니야." "자네 왕께서 우리 유연과 함께 여기서 동쪽으로 1000㎞ 떨어진 지두족의 땅과 사람들을 분할하자고 제안을 했어. 그 지역은 지금 탁발선비 북위의 발상지 알선동과 아주 인접한 지역이야." "예, 그렇습니다. 지금도 북위조정에서는 조상이 태어난 곳이라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고구려가 지두우 지역을 분할한다면 북위가 가만히 있을까."

칸의 우려는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1980년 여름 치치하르 북쪽의 오르촌족 자치기의 아라하지 서북 알선동의 거대한 동굴. 443년 북위에서 파견한 중서시랑 이창 등이 탁발 선비족인 북위 왕실의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며 벽에 새겨 놓은 축문(祝文) 200여 자가 발견됐다. 알선동에 제사를 지내게 한 북위의 태무제(탁발도)는 유연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지휘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살육한 장본인이다. 그는 425년 기병을 이끌고 유연을 습격했고, 443년과 449년에도 유연에 대한 인간 사냥대를 조직하여 고비사막을 넘었다.


북위의 내분을 이용한 영토확장

북위는 너무나 강력한 국가였다. 공격적인 북위의 통치자들은 몽골 오르콘강 유역에 중심지를 둔 유목제국 유연을 공격하기 위해 고비사막을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유연의 칸들은 북위가 언제든지 자신들을 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로 인식하고 있었다.

"칸 폐하! 지금 북위의 정치상황은 기만(欺瞞) 위의 누각(樓閣)입니다. 앞서 북위조정에서는 상황 헌문제의 황제당과 풍태후의 태후당 사이의 치열한 암투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2년 전(476년 6월) 풍태후가 황제를 독살하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닙니다. 비정상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풍태후는 외정에 신경을 쓸 수 없었습니다. 지금 황제인 효문제는 풍태후에 치마폭에 있는 어린아이입니다. 혹시 다른 황족이 외정에 성공한다면 그는 명망을 얻을 것이고 북위의 군대를 장악할 수도 있습니다." "외정의 성공과 영웅의 탄생은 풍태후 정권에 위협이 된다는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우리 거련(장수왕) 폐하께서는 이러한 약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지두우족을 분할하자는 제안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초원에 가을이 빨리 찾아왔다. 유연의 칸도 겨울을 보기 위해 궁정을 남쪽으로 옮기려고 하고 있었다. 고구려 사절단장은 칸이 군대를 이끌고 언제 어디서 지두우를 공격할 것인지 기록한 문서를 품고 귀국길에 올랐다. 고구려사절은 풀이 마르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했다.

479년 장수왕은 고구려 기병을 북방초원으로 보냈다. 그는 지두우와 거란의 땅만 탐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력과 가축도 원했다. 지두우족에 대한 고구려의 무자비한 약탈과 납치가 행해졌다. 거란족도 무사하지 못했다. 공포에 질린 일부 거란족 1만 명이 3000 대의 수레를 끌고 북위에 투항했다. 그들 가축의 상당수는 고구려의 손에 넘어갔다.

북위는 자국의 북쪽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소극적인 대응이었다. 고구려와 유연이 지두우족을 분할함에 따라 북위 조상의 발상지와 북위 사이가 차단됐다. 그래도 풍태후는 자신의 정권 유지에만 신경을 썼다. 북위 조상의 발원지가 고구려에 넘어가든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다.


유연 이용해 초원영역 확장

지두우 지역 분할은 고구려가 몽골의 유연에 먼저 제안했고 곧바로 실천에 옮겨졌다. 반면 현재 할흐골 지역 개발 사업은 몽골이 2006년에 먼저 제안했다. 우리 정부가 늑장을 부려 2년 가까이 추진되지 못했다. 그러다 곡물가격이 폭등하고 중국 일본 등이 할흐골 지역 농업 개발에 관심을 보이자 정부가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적극적이지 못한 대응이었다.

장수왕은 북위의 내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유연을 이용하여 초원의 영역을 확장했다. 그는 당시 세계질서의 주도자였다. 고구려는 군사강국 북위와 적대 관계에 있는 나라들(유연·송)과 연결을 도모해 이를 포위·견제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북위와 대립 관계를 지속하면서 유연과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양자강 이남의 송과 사막 이북의 유연을 중개해주기도 했다. 공동의 이해가 걸린 군사작전을 통해 유연과 고구려는 더욱 긴밀해졌다. 양국의 말과 곡물 교역이 원활해졌다. 

 

무용총 접객도. 무용총은 장수왕 재위 시에 만들어졌다. 그림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있는 고구려인들이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거칠었지만타인에 대한 정치에도 능했다.   


    

 


■ 세계는 지금 식량기지 경쟁

- 동몽골 비옥한 토질 개간 없이도 경작 동남아보다 경제적

463년 '송서' 고구려전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고구려왕 낙랑공 연(장수왕)은 대2대로 충성스럽게 우리 송을 섬기면서 바다 밖의 번병(藩屛)이 됐다. 우리 송의 조정에 충성을 다해 포악하고 잔악한 무리(북위)를 없애는 데 뜻을 두었고, 사막의 나라(유연)에 통역해 짐(송 황제)의 뜻을 잘 펼쳤다."

중국인의 허풍이 그대로 나타나지만 진실이 반영되어 있다. 송은 북중국에 있는 기병강국 북위에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의 말이 필요 했다. 유연에 곡물을 수출하고 말을 수입한 고구려는 그 말을 송에 수출하고 아열대지역 송에서 생산된 풍부한 곡물을 수입했다. 그 차액은 엄청난 이익을 보장했다.

현재 중국과 중동 일대 산유국들이 식량 안보를 위해 해외 농지 매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 곡물가격 상승에 압박을 받는 지금 해외 식량기지 건설이 쉽지만은 않다. 몽골의 유목제국 유연과 양자강남의 송을 적극 활용했던 고구려의 세계경영을 오늘날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적의 적은 우리의 아군이다. 고구려 장수왕대에 몽골고원의 사람들은 북중국과 적대적이었고, 현재 몽골은 러시아와 중국을 경계하고 있다.

박진호 주몽골 대사는 "동몽골 지역은 토질이 비옥해 바로 씨를 뿌릴 수 있다"며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삼림지역 개간에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동남아에 비해 경제적으로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23> 백제의 부활과 일본
일본과의 직교역 '동아시아 최강국 백제'의 서막이었다
왜와의 직교로 백제는 교역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지금 충남에선 백제와 일본의 찬란했던
교역문화를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일본 나라현 동대사. 백제인 행기스님이 일본 전국에서 자금을 모아 건립되었다고 한다. 일본 자본으로 건립되는 백제역사재현단지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렇게 많은 배가 한꺼번에 금강을 거슬러 올라간 적은 없었다. 소정방의 당나라군(12만 명)이 백제의 수도 부여성 부근에 상륙했다(660년). 황산벌에서 계백장군의 5000결사대를 힘겹게 제압한 김유신의 신라군대(5만 명)도 합류했다. 부여성이 함락되고 백제 의자왕을 비롯한 귀족 신료와 그 가족 1만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소정방은 이들을 모두 당나라로 압송해 갔다.

미래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왕족과 귀족들을 일소해야 그 나라는 다시 회복하지 못한다. 백제를 부흥하기 위한 무력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핵심 지배층이 없어진 상태에서 부흥운동 주체들 사이에는 심각한 분열이 따랐다. 왜국(일본)의 전폭적인 병참과 병력 지원도 백제인들의 분열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백제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백제왕궁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불탄 지 1348년 만에 다시 세워지고 있다. 조성 중인 백제왕궁은 맨 앞의 성문을 지나 중앙으로 왕이 집무를 봤던 중궁이 자리 잡고 좌우로 동궁과 서궁이 들어섰다. 오른쪽엔 왕실 사찰의 모습을 재현한 능사가 보인다. 능사에는 9층 건물 높이 38m의 5층 목탑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왕궁은 충남도가 부여군 규암면 일대에 3771억 원을 들여 100만 평 규모로 조성 중인 백제역사재현단지의 하나이다. 단지는 1998년 4월 착공, 2010년 완공되며 현재 공정률은 70%이다. 부여에 건설되는 백제역사 재현단지 모습은 이러하다. 주요 시설은 크게 역사재현촌(83만 평)과 연구교육촌(17만 평) 등이다. 역사재현촌에는 백제건국 초기생활을 볼 수 있는 개국촌, 왕궁, 전통민속촌, 군사통신시설(봉수대 등), 장제묘지촌, 백제역사문화관, 산업교역촌, 풍속종교촌, 능사 등이 있다. 연구교육촌은 부여전통문화학교(2000년 개교)와 사비백제의 집(호텔 등 숙박시설) 등으로 구분된다. 백제 문화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일본 '아스카 문화촌'도 생긴다.


백제 옛 뱃길 크루즈 사업 눈길

"2007년 6월 제의했던 2010년 대(大)백제전과 일본 나라현의 평성경 천도 1300년 기념사업 협력에 아라이 쇼고 나라현 지사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올해 교류협정 체결을 계기로 두 지역 문화교류가 옛 백제와 아스카 시대 명성에 걸맞게 활발해 질 것입니다." 이번 달 일본 나라현과 문화관광 교류협정을 체결한 이완구 충남도지사의 설명이다. 협정서 주요 내용에는 옛 백제의 해상항로인 일본 나라현과 제주도~충남 당진~중국 상해를 연결하는 크루즈 운항이 포함되어 있다.

2010년에는 대백제전과 함께 일본의 평성천도 1300년, 상해 엑스포가 동시에 열린다. 한·중·일을 연결하는 크루즈 운항구간은 옛 백제의 해상항로로 무역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충남도와 나라현은 백제문화제, 평성천도 1300년 기념사업을 함께 홍보하고 교류도 강화할 방침이다.

지금으로부터 1652년 앞서 백제가 왜국과 교류협정을 맺은 역사적 사실을 연상케 하는 사건이 있었다. 경상도 낙동강 서쪽 지역에 가야연맹은 느슨한 지역 공동체였다. 그 가운데 하나인 탁순국(卓淳國)은 지금의 의령에 중심을 둔 나라였다(이희준). 낙동강 본류와 지류인 남강이 그곳에서 만난다. 탁순국은 남강에서 진주-사천만으로 이어지는 수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사천만을 장악한 탁순국은 313년 중국의 군현(낙랑군과 대방군)이 사라진 후 왜국과의 무역중심지가 되었다. 왜국에서 오는 물자가 여기에 집산되었고, 수로를 통해 집산된 한반도의 물자가 왜국으로 들어갔다.


백제, 왜국과 직교역 시도

364년 백제 근초고왕은 탁순국에 사신을 보냈다. 백제 사신 막고(莫古), 미주류, 구지 등이 탁순국왕 한기말금(旱岐末錦)의 궁정에 도착했다. 막고가 말을 꺼냈다. "저희 근초고왕께서는 왜국과 교역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을 여기에 보낸 것입니다. 탁순국왕께서는 왜국과 선이 닿아 있다고 들었습니다. 만일 왕께서 왜국과 통하는 길을 알려준다면 우리 근초고왕께서 크게 후사하겠다고 하셨습니다."('일본서기')

막고는 백제 태자 근구수의 최측근 장군이었다. 371년 황해도로 출동한 고구려 고국원왕의 군대 2만 명을 근구수와 함께 격파했다. 이때 포로가 된 고구려군들은 노비가 되어 백제군에게 분배되었다. 이어 '반걸양'에서 전투가 있었다. 근구수는 막고와 함께 붉은 깃발 아래에 모인 고구려 정예부대에 집중 공격을 했다. 그것이 격파되니 다른 부대는 달아나기 바빴다. 황해도 백천에서 신계에 이르기까지 고구려군의 시신이 널려있었다. 태자 근구수는 막고의 건의로 신계에서 추격을 멈추었다. 같은 해 겨울 10월 백제의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와 함께 병력 3만 명을 동원하여 평양성을 포위했다. 백제군의 맹공을 막아내던 고구려 고국원왕은 화살에 맞았고, 세상을 떴다('삼국사기').

백제의 막후실력자 '막고'라는 인물, 그 존재가 탁순국왕에게 부담이었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생각에 잠겼다. "백제 이놈들. 이제 우리 탁순국을 제치고 왜국과 직접적인 교역을 시도하려고 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나? 그렇게 된다면 그동안 우리가 누려왔던 중개이익은 사라질 수도 있어! 하지만 백제는 북쪽의 고구려도 부담을 느끼는 강국이 아닌가. 어떻게 하지 내가 딱 잘라 거절을 하면 거친 백제 근초고왕이 우리 탁순국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야."

침묵이 흐른 후 탁순국왕은 대답을 했다. "왜국이란 큰 나라가 있다고 들었지만 아직 왕래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 길도 알지 못합니다. 바다가 멀고 파도가 심해 큰 배를 타야 겨우 갈 수 있으니 길을 안다고 하더라도 도달하기 쉽지 않습니다. 지금 가지고 온 백제의 배로는 어림도 없어요!"

막고 등 백제 사신들은 탁순국왕의 고민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렇다면 지금 왜국으로 갈 수는 없겠습니다. 돌아가 큰 배를 만들어 다시 와야 하겠습니다. 만일 왜국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우리 백제에 통보해 주셔야 합니다."('일본서기')

은근한 협박이었다. 왜국 사신이 다녀간 사실을 통보하지 않는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메시지였다. 3년 후 왜국 사신이 탁순국 영내인 사천만에 도착했다. 탁순국왕은 그 사실을 백제에 통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는 왜국 사신을 초청했다.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 조성되는 백제역사재현단지내 5층 높이 38m의 5층 능사 목탑. 백제의 세일즈 외교

백제에 도착한 왜국 사신은 선물을 받았다. 5색의 비단과 뿔로 만든 활(弓) 그리고 철 덩어리 40개였다. 그것은 샘플이었다. 근초고왕이 왜국의 사자에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진귀한 보물이 많아요. 귀국과 교역을 하려고 하였으나 길을 몰라 마음만 있었을 뿐이오. 하지만 이제 알게 되었으니 기쁘오, 돌아가시거든 우리가 귀국과 교역을 원하고 있다고 전해주시오."('일본서기')

그리고 중국산 사치품을 모아 놓은 창고의 문을 열었다. 왜국 사신이 감탄했다. "이렇게 질좋고 화려한 물품을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50년 전 낙랑이 멸망하고 나서 그 물량이 급격히 줄었지요. 고구려의 휘하에 있는 낙랑상인들이 김해가야를 통해 가지고 오기는 하지만 너무 가격이 비싸요. 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백제와 직접교역을 한다면 우리로서도 환영입니다." "우리 백제는 화려한 남조의 물품을 얼마든지 가지고 올 수 있습니다."

371년 백제 근초고왕은 황해도와 평양에서 고구려군대를 대파했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여기서 전사했다. 소문은 순식간에 중국과 한반도를 지나 일본열도까지 퍼졌다. 백제가 동아시아 최강국이 되었고, 대외교역의 중심지로 부상했음이 확실해졌다. 백제의 헤게모니 장악은 교역의 안전을 보장했다. 일본열도에 있는 수없이 많은 나라들이 백제와 직교역을 원했다. 과거 백제인들도 가만히 앉아서 왜국과의 교역을 성사시킨 것이 아니다. 가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교역을 틀 수 있는 길을 모색했고, 모든 준비를 갖추고 왜국의 사신을 초대했다. 창고에 쌓인 물품을 보여주며 교역에 대한 욕구를 자극했다. 나아가 고구려와의 전쟁에 승리하여 교역의 주도권을 잡았다.


# 백제-일본 1600년전 교류뱃길 재현된다

2010년 백제의 옛 뱃길을 복원하는 크루즈 사업이 시행된다면 충남은 중국 상해와 일본의 나라현을 이어주는 중심이 될 것이다. 백제문화를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일본과 세계 각국으로부터 오고, 국내 관광시장에 활력을 불어 넣을 것이 확실하다.

현재 충남도 행보와 백제 역사에서 우린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모두 일본과의 교류와 교역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고대 일본 열도는 비단재료(실·솜)의 생산량이 중국 다음 가는 곳이었고, 현재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기 때문.

통일기 신라귀족들은 일본산 비단재료를 구하기 위해 교역에 열을 올렸고, 신라말 장보고가 그 뒤를 이었다. 이보다 앞서 백제가 왜국에 선진문화를 전해준 것도 교역의 이권 때문이었다. 663년 나당연합군과 벌어진 백촌강 전투에 투입된 2만5000명의 왜인 병력은 백제와의 교역에 사활이 걸린 왜국 내 호족들이 파병한 연합군이었다(NHK 대화개신). 고대의 일본을 폄하할수록 한국의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된다.

현재 충남도는 어느 재일동포 사업가로부터 백제역사재현단지에 대한 총 3000억 원에 달하는 투자를 받았다. 나라현과 충남도의 문화교류도 일본 내 영향력이 있는 그의 입김이 작용했고, 엔화의 강세는 일본으로부터 투자금액의 흐름에 탄력을 줄 것이 확실하다. 고대의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재현된 느낌이다.

 

<24> 장보고와 신격호
해외서 구축한 재력 기반으로 모국서도 '小왕국' 건설
황태자 약혼 국민적 관심 활용 신격호, 일본에서 롯데껌 석권
장보고, 해군기지로 해적 제압 한·중·일 상업 교류 기반 닦아

"그 밀가루집 딸이 황태자와 혼인을 한대요." 50년 전 현 일본천황 아키히토의 약혼 발표가 있었고(1958년 11월 27일), 국민의 귀와 눈이 갑자기 신데렐라가 된 황태자비(미지꼬)에 쏠렸다. 천왕과 그 가족의 일상사가 대중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듬 해 봄 황궁에서 거행될 결혼식이 TV 생중계되기로 결정되었다. 일본의 컬러 TV 보급률이 90%까지 치솟았다.

재벌이 되어 돌아온 '가출 소년'

'미지꼬 붐'이 자신의 회사를 알리는 최대의 기회라고 직감한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재일 한국인 신격호였다. 즉각 TV 가요 프로그램을 모두 샀다. '롯데껌은 입속에 여인'이라는 문구가 유행되었다. '그린껌'이 일본시장을 석권했다. 상전(商戰)에 승리하여 거액을 돈을 번 그는 도쿄 변두리의 땅을 지속적으로 매입했고, 부동산 가격이 치솟자 세계 4위의 거부가 되었다(1980년대 중·후반). 한국에서도 롯데가(家)의 주식은 4조2847억 원 어치로 '재벌 1위'를 차지했다(2007년 6월).

신격호는 본래 문학 지망생이었다. 1948년 6월에 출현한 주식회사 '롯데'의 상호는 그가 젊었을 때 감명 깊게 읽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따온 것이다.

일본정부는 전쟁에 패색이 짙어지면서 징병을 강화했다. 신 회장은 대학을 진학하는 데 문학부로 갈 수 없었다. 공학도들은 군대에 끌려가지 않았다. 일본은 기술자를 보호하는 일관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는 와세다대 화학과에 입학했다. 본의가 아니지만 화학을 공부한 것이 사업가로의 그의 변신에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그가 화장품 사업에 이어 껌사업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현재 일본 제과업계의 제1위요, 한국 유통·관광업계 제1위 회사, 롯데의 오너인 그는 아버지 몰래 일본으로 간 '가출 소년'이었다. 그의 첫 직업은 본래 양산 통도사 부근의 경남도립 종축장(種畜場)에서 소를 돌보고, 돼지를 사육하며, 양털을 깎던 기수보(技手補)였다.


    장보고가 중국 산동 적산에 세운 절 법화원. 당시 장보고가 이곳에 끼친 영향력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당나라로 간 신라 목동

신라 말 가축을 돌보던 청년이 중국으로 건너가 거부의 상인이 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 신라의 서남해안의 다도해는 진골귀족들의 목장으로 사용되었다. 완도가 고향인 장보고는 말을 타고 가축들을 돌보는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겼다. 그런 장보고의 기마 솜씨에 주목한 진골귀족이 있었다. 목장의 주인인 김우징은 헌덕왕의 조카로 근친왕족이었다.

818년 7월이었다. 김우징의 시종이 장보고를 불렀다. "이보게. 우리 주인의 말씀을 전하러 왔네." "예. 그 귀한 분께서 비천한 저를 어떻게 아시고." "이리 와보라니까." "예. 알겠습니다." "지금 당나라에서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켰다네. 양자 강남에서 장안으로 향하는 운하를 차단했다지 뭔가. 지금 당의 수도에는 곡물가격이 치솟고 있어. 당의 황제가 우리 신라에게 병력지원을 요청했네('삼국사기')." "예?" "국왕께서 병력 모집을 도와 달라고 김우징님에게 부탁을 하셨다네. 자네는 말위에서 창과 활을 사용하는데 명인이 아닌가?('번천문집')" "나리. 제가 당나라 파병에 합류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이렇게 장보고는 당나라로 건너갔다(818년 가을). 그는 당의 무녕군 창기병 부대에 배치되었다. 전투에서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그와 싸우려는 자는 무사하지 못했다. 말을 타고 창을 사용하는데 아무도 그를 상대할 자가 없었다. 무공에 대한 소문이 군대 내에 퍼져 나갔다. 30세의 나이에 그는 외국인으로서 1000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군중소장(기병 여단장)으로 진급했다(주강(朱江)-중국 양주대(揚州大)).

관군이 압박을 가하자 이사도 군벌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사도는 그의 부하의 손에 참수되어 머리가 황제에게 바쳐졌다(819년 2월).

전쟁 중 장보고는 산동과 회하 부근에 있는 신라인 사회와 선이 닿아 있었다. 이씨 군벌 아래에 살았던 신라인들이 장보고에게 군사정보를 주었다(이기동). 전쟁 후 출세한 군인으로 그 지역 군인·관리들과 친분이 있었던 그는 재당 신라인 사회의 이익을 대변해 주었고, 자연스럽게 그 사회의 수장으로 부상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당시 해상에 해적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라인들은 장보고와 그의 무장집단의 호위 속에서 장사를 해야 했다. 무력이 없이는 영업이 불가능했다. 장보고가 군에서 제대한 후(821년) 산동반도에서 회하를 거처 양자강에 이르는 신라인 사회의 상업 네트워크가 완성되었다.


동의 가치 상승과 귀국

무력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었다. 당나라는 동(銅) 본위제 사회였다. 전쟁 후 경기가 달아올랐고, 결제대금인 동전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다. 장보고와 신라인 사회에서도 동이 항상 모자랐다.

장보고 시대의 당나라 학자 두우(杜佑·735~812) 그의 저서 '통전'에서 동전의 유용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금·은의 경우는 용기나 장식품을 만들어내는 데 한정되어 있고, 곡물과 비단의 경우 운반하기 곤란하고 파손이 생기는 결점이 있다. 오직 동전(銅錢)만이 끊이지 않고 교역에 사용할 수 있다."

"섬사람들은 수입품을 유난히 좋아하지!" 초창기 장보고는 일본과의 교역에 뛰어들었다. 동을 지불하고 양자강에 집산된 중동·동남아산 서역·남해품을 구입하여 일본에 판매했다. 적지 않은 이익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동의 가격이 치솟았고, 이익은 하강 곡선을 그렸다.

장보고는 828년에 신라로 귀국하여 그가 일했던 목장의 주인인 김우징을 만났다. 당시 김우징은 당숙인 흥덕왕 아래에서 집사부 시중(재상)의 자리에 있었다. "아! 당신이 옛적에 내가 봤던 그 청년이었던가? "예." "고개를 들게. 어떻게 나를 찾아왔나?" "외람되지만 아뢰겠습니다. 신라산 동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네. 우리 신라의 다도해 해안이 동아시아 해적들의 소굴이 된 지 오래야! 그들 때문에 세곡의 운반도 어렵다네." "익히 알고 있습니다." "국왕과의 만남을 주선해 줄 터이니 해적을 어떻게 소탕해야 할 것인지 궁리해보게."


고국이 안겨준 활황

828년 장보고는 신라국왕을 알현했다. 당면한 문제에 대한 깊은 대화가 오고갔다. 얼마 후 신라귀족회의에서 해적 소탕을 위한 청해진 건설 인가가 떨어졌다. 장보고는 완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고, 그 주변의 목동 1만 명을 자신의 병력으로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청해진이 설치된 이후 해적은 완전히 퇴치되었고, 장보고는 신라로부터 충분한 동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서역·남해산 사치품을 지급했다. 그 양은 엄청났다. 834년에 흥덕왕이 서역·남해산 사치품을 일반백성까지 선호한다고 하여 '사치 금령'을 포고할 정도였다('삼국사기').

장보고의 한·중·일 삼각무역은 활황이었다. 그는 신라에서 고순도의 숙동(熟銅)을 낮은 가격으로 대량 구입하여 당으로 가져갔고('책부원구'), 그곳에서 서역·남해산 사치품을 구입하여 일본에 판매하고 대량의 비단재료(실과 솜)를 신라로 가져왔다('속일본기'). 장보고 선단의 도착과 출발 시기는 너무나 정확했다. 그 정기성이 주는 신용도는 상품 구입가격을 낮추었고, 자본의 회전율을 극대화 시켰다. 일본 측 상인들은 장보고에게 선금(비단재료)을 주고 물건을 구입할 정도였다.


■ 장보고와 신격호의 공통점

- 해외 거점 소유따른 환차익 누려
- 현지 권력자와 두터운 인맥 구축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에게 힘을 실어준 전 일본 수상 기시 누부스케. 해외에서 쌓은 기반을 바탕으로 모국에 돌아와 대성한 신격호 회장과 장보고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정순태). 양자는 다국적 기업·상업 거점을 소유함으로써 환차액에 따른 이익을 보았다. 장보고는 서역·남해산 사치품을 신라에 고가에 판매하고, 대금으로 받은 신라의 막대한 동을 당으로 가져와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당에서 동의 가치는 신라보다 높았다. 신 회장도 원화에 비해 엔화가 상승하자 부여에 건설 중인 백제문화재현단지에 30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올해 5월). 고율의 엔화가 원화로 교환되어 한국으로 유입될 것이다. 치솟는 석유 값은 원화 가치의 상승을 장기적으로 억제할 가능성이 높다.

둘은 당과 신라, 한국과 일본에서 유력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이 있었다. 장보고는 고국에서 정계의 거물인 김우징과 인연이 있었고, 나중에 그를 신무왕으로 옹립하기까지 했다(839년). 나아가 그는 중국해안 지방에 있는 절도사들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치정절도사는 836년 6월 장보고가 신라에서 가져오는 동을 합법적으로 수입할 수 있도록 황제에게 허락을 구하기도 했다('책부원구'). 신 회장도 일본의 정계 거물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수상을 역임한 기시(岸信介)와의 인연으로 보수정치인들과 인맥이 형성되어 자민당 장기 집권시절에 그는 더운밥을 먹었다.

요즘 밝혀졌지만 신 회장은 노태우 대통령 당시 김영삼을 설득하여 3당 합당(민자당)을 이끌어낸 장본인이었다. 김영삼 정부시절 막후 실력자 차남 김현철은 소공동 롯데호텔에 사무실을 두었고, 이명박 대통령도 당선자 시절에 그곳에 사무실을 차렸다. 미국산 쇠고기도 롯데의 유통망을 이용하여 첫 판매될 전망이라는 말도 있다.

 

 

 

<25> 김우중과 의자왕
과도한 해외투자·영토확장 예측불허 변수에 무너지다
당나라 산동파와 김유신 간과한 백제부흥 의자왕, 망국의 불꽃되고
세계화 경영 외치던 김우중 서방 투기자본과 IM F에 발목잡혀

인천공항, 병색이 만연한 백발노인이 걸어 나왔다. 정처 없이 유랑하다 돌아온 황혼 귀가였다(2005년 6월 14일). 그를 맞이한 것은 거품을 물고 덤비는 200여 명의 데모대였다. 과거 재벌총수의 귀국은 이렇게 서글프고 초라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은 과거 수출 제일주의 시대가 낳은 영웅이었다. 그가 해외를 다녀오면 경제기자들이 취재경쟁을 벌인 것이 상례였다. 그의 세일즈 성과가 바로 경제면의 기사가 되었다. 1967년 직원 단 5명의 직물회사로 시작한 그는 대우를 사원 25만 명에 300개 이상의 해외지사, 연매출액 100억 달러의 기업으로 키웠다. 추정된 고용효과는 하청업체까지 250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닥치자 사정이 달라졌다. 환란으로 국가신용등급이 갑자기 여섯 단계나 떨어지자 전 세계에 가장 많은 공장을 갖고 있던 대우는 해외 채권자들로부터 극심한 상환 압력을 받게 됐다. 그가 외자를 도입하여 세계 각국에 투자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요인은 국내 시장의 협소성 때문이었다. 앞서 나간 '세계화'가 발목을 잡았다. 환율까지 폭등해 외화부채가 유난히 많았던 대우는 1997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8조 5000억 원의 환차손을 입게 됐다. 비운이었다.

대우는 IMF 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1997년까지 나름대로 탄탄한 기업구조를 갖고 있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1995~1997년 3년 동안 현대 대우 삼성 LG 등 4대 그룹의 수익성 및 재무자료를 분석한 결과 대우의 유형고정자산 증가율은 연평균 30%대, 매출 증가율은 35%대로 평균 20~25% 선이던 다른 그룹을 압도하고 있었다. 매출액 영업 이익률도 현대(5.45%)보다는 높았다. 총자본 경상이익률은 0.52%로 가장 우수했다. 부채비율은 473.8%로 371.2%의 삼성보다는 높았지만 현대(579.1%), LG(510.8%)보다는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1999년 10월 그는 중국으로 향했다. 옌타이 자동차 부품공장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수많은 고뇌를 했고, 결국 잠적하고 말았다. 1349년 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 영원히 잠이 든 백제의 왕이 있었다.


승전기념식, 나무창살 속의 백제왕

    백제 의자왕이 일본 황실에 선물한 바둑알 그릇. 하늘이 높고 푸른 낙양의 겨울이었다(660년 11월 1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 있었던 적은 없었다. 천막이 세워졌고 꼬치를 굽는 냄새가 피어났다. 술을 퍼내는 소리가 요란했다. 발을 붙일 틈이 없었다. 몰려온 거지떼들의 얼굴에도 기쁨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왕과 귀족들을 사로잡아왔대요." 이윽고 소정방장군의 행렬이 나타났다. 군인들의 옷은 땀으로 더러워져 있었고, 너들너들 했지만 위풍당당했다. 행렬 가운데 포박된 백제왕과 왕자, 귀족들을 실은 수레 50여 대가 보였다. 일국의 왕이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저 자가 백제 의자왕이야!"

그는 나무 창살 안에서 수모를 견디며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왜 내가 여기에 있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생각을 과거로 돌렸다. '처음부터 모든 일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소정방 저 사람이 백제로 군대를 이끌고 올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했다. 신라왕 김춘추가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추진하고 있었고, 당태종과 구두로 동맹관계가 성사된 것도 들었다. 하지만 실행에 옮겨지기는 쉽지 않았다'. 649년 나당동맹을 약속한 당태종이 죽었다. 서돌궐이 당에 반기를 들었다. 657년 서역 천산산맥 북쪽 이식쿨 호수 부근에서 소정방의 당군과 서돌궐군대가 만났다. 서돌궐군이 우세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결코 질 수 없었던 서돌궐군이 패배했다. '서돌궐과의 전쟁이 장기화되거나 패배했다면 소정방의 당군은 결코 우리 백제로 올 수가 없었다. 27년 만에 복직된 소정방은 과연 명장이었어'.


산동파의 꽃 측천무후

659년 10월 백제 파병을 놓고 관롱파가 주장했다. "지금 티베트 고원에서 토번이 팽창하고 있습니다. 토번은 실크로드의 요충지인 토욕혼을 점령했고, 그 기병 전력도 흡수했습니다. 실크로드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아주 타당한 주장이었다. 당 조정은 한반도보다 실크로드 경영에 재정 의존도가 높았다. 산동파의 거두 측천무후가 권력을 잡은 당 조정은 상식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당장 뭔가를 보여주어야 할 그녀는 백제침공을 결정했다.

당 조정은 양분되어 있었다. 서북지방 출신들로 구성된 관롱파는 실크로드의 교역에, 하북평원과 산동일대 출신들인 산동파는 만주·한반도의 교역에 이권이 걸려 있었다. 측천무후의 산동파는 655년경 권력투쟁에서 권력을 잡았다. 심약한 당고종을 측천무후가 주물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소정방이 다시 기용된 것도 산동파의 후원 때문이었다.

백제군 수뇌부들이 바빠졌다. "의자왕 폐하! 소정방의 13만 군대가 인천의 서쪽 덕물도에 중간 기지를 차렸다고 합니다(660년). 또 6월 18일 신라군 수뇌부와 병력이 경기도 이천에 집결을 했다고 합니다. 3일 후 신라태자 김법민이 덕물도에 가서 소정방과 회합을 가졌다고 합니다('삼국사기')." "놈들 우리 백제를 협공할 날짜를 잡았어."


전쟁은 속이는 것

    대우 본사 빌딩 당군이 백제 북쪽 항구인 당진을 공격할 기세였고, 신라군이 경기도 이천에서 목천 방면으로 남하했으며, 신라왕 김춘추는 청주(사라지정)에 거점을 차렸다(김영관). 의자왕과 그의 수뇌부는 나당연합군이 북쪽에서 남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백제는 금강 이북에 모든 병력을 집중시켰고, 진지 보강작업에 들어갔다. 좌평 의직이 말했다. "폐하.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합쳐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면 신라군과 당군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공격해야 하오?" "피로에 지친 당군을 쳐야합니다." 달솔 상영 등이 말했다. "아닙니다. 당군은 속전속결을 바라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를 두려워하는 신라군을 쳐야 합니다('삼국사기')." 이야기가 길어지자 의자왕은 전남 장흥에 유배된 흥수에게 사람을 보냈다. "왕께서 당신의 견해를 듣기 원합니다."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들어오고 당나라군은 백강을 타고 왕도 부여로 올라 올 것입니다('삼국사기')."

흥수의 건의에 백제수뇌부는 냉담했다. "흥수 그 영감 지금 신라의 주력이 이천에서 진천으로 이어지는 선에 집중되어 있고, 당군은 덕물도에 거점을 마련했다는 정보도 모르고, 완전히 동문서답을 하고 있어." "그래! 금산에서 논산으로 이어지는 탄현 계곡은 개 한 마리 정도 다닐 수 있는 길고 좁은 길이야. 어느 한 곳에서 막혀도 꼼짝도 할 수 없는 곳이지."

전쟁은 속이는 것이다. 신라군은 밤에 이천·진천 방면에서 남쪽 금산으로 강행군을 하기 시작했다(6월 19일). 무방비이던 탄현을 넘어선 7월 6일에 백제조정에 소식이 들어갔다. 허를 찔린 것이다. 이미 때가 늦었다. 북쪽에 배치된 백제군을 남쪽으로 돌리려면 20일이 소요되는데 그것은 불가능했다.

의자왕은 계백에게 명령을 내렸다. "5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막으시오. 우리 백제군 주력이 남하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버시오." 하지만 계백의 결사항전도 5만 명의 신라군에게 중과부적이었다. 전투는 7월 8일 아침에 시작되어 그날 오전에 끝이 났다. 신라군은 부여성을 향했다. 금강을 올라온 당군과 그 앞에서 만났다. 당황한 의자왕은 북쪽 변경으로 향했다. 백제군 주력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부하의 배신으로 그는 포로가 되었다(7월 18일). 소문이 백제군의 모든 진영에 퍼졌다.


용기 있는 자의 도전과 좌절

대우그룹 해체의 전주곡이 울려 퍼졌다(1998년10월29일). 노무라증권에서 '대우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라는 보고서가 나왔다. 대우그룹이 해체된다는 것이다. 대우의 과도한 해외투자가 외환위기를 만나 폭풍을 일으켰다. 시장의 신뢰를 잃어가던 대우에 대한 국내외 금융권의 자금회수가 가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대우 본사에서 지급보증을 서면 해외법인은 얼마든지 달러 자금을 빌려 쓸 수 있었다. 김우중은 자본을 차입에 의존해도 사업이 정상화되면 상장을 통해 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대우는 1997년 말까지 중국 인도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우즈베키스탄 등에 총 14개의 해외 합작공장을 건설하거나 인수했다. 대부분 초기 자금 수요가 큰 자동차 공장이었다.

의자왕도 의욕적으로 영토팽창을 감행한 영민한 군주였다. 그는 앞서 신라의 합천 대야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키고 경상도 낙동강 서쪽의 대부분의 땅을 확보했고, 고령까지 장악하여 신라 왕경을 위협했다(642년).

대야성은 낙동강 서쪽을 총괄하는 신라의 사령부였다. 백제는 그 성을 점령하고 성주와 그 처인 김춘추의 딸을 처형하고 머리를 가져갔다. 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당과의 외교에 매진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신라는 패전의 책임 소재를 놓고 내분에 들어갔다. 귀족들이 여왕을 폐위하자 김유신이 백제군을 방어하기 위해 경산에 배치해 놓은 병력을 신라의 왕경으로 돌렸다. 시가전이 벌어졌다(647년). 의자왕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 듯 했다. 하지만 예상외의 결과가 나왔다. 내분은 너무나 빨리 수습되었고, 김유신이 신라의 군부를 장악했다. 의자왕이 백제 멸망 작전을 기획하고 실행한 군사적 천재 김유신을 신라군 총수자리에 올려놓은 셈이다.

김우중과 의자왕이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다. 공격적인 팽창은 예측불허의 변수에 치명적이라는 점이다. 의자왕은 당조정 내부에 만주와 한반도에 이권이 걸린 산동파가 권력을 장악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김우중은 서방 투기자본이 외환위기를 가져올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의자왕은 자신이 점령한 대야성이 김춘추·김유신의 유능한 독재정권을 잉태하는 자궁이 될지 몰랐고, 김우중은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전설을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