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최무선과 화약무기 시대의 개막

醉月 2010. 3. 1. 11:12

[우리 민족의 전통무기] 최무선과 화약무기 시대의 개막


최근에 개봉된 영화들 중에서 <아바타>라는 공상과학 소설류 영화가 대히트를 치고 있다. 판도라라는 행성에서 주변 자연환경과 교감하며 평화롭게 원시적으로 살고 있던 나비족을 탐욕에 물든 인간들이 강제로 쫓아내려고 하자 아바타인 주인공이 나비족과 함께 침입자들을 몰아내고 자연과 평화를 되찾는다는 줄거리이다. 그런데 바로 이 영화에서 각종 첨단화약무기로 무장한 인간들에 대해 나비족은 활과 창같은 원시무기로 대응하고 있다. 물론 영화에서는 근력무기를 사용하는 나비족이 이기는 것으로 결말이 나지만, 이는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일 뿐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가 없다. 즉, 인간 근육의 힘을 이용한 재래식 무기는 도저히 화약(火藥)이라는 화학물질의 폭발력을 이용한 무기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화약무기에 대한 고찰 이전에 화약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만일 화약이 없다면 화약무기는 단순한 고철덩어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화약은 최초로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8년도 베이징 올림픽 개막공연에서 중국인들은 인류 문명의 4대 발명품인 종이, 나침반, 인쇄술, 그리고 화약을 자신들 것으로 전 세계에 자랑한 바 있다. 원래 화약은 진시황제가 불사약을 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기에 ‘약(藥)’자를 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기록상으로는 1044년에 발간된 『무경총요』에 그 제조법이 처음으로 소개되고 있다. 19세기에 무연화약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흑색화약이 화약을 대표하였다. 이는 초석(75%), 황(10%), 그리고 목탄(15%)을 혼합한 것으로 그 색깔이 검은 색이고 폭발 시 시꺼먼 연기가 났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처음에 중국인들은 화약을 무기가 아니라 불꽃놀이용 재료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전쟁무기로서 이의 유용성을 깨닫게 된 그들은 화약제조법을 국가 기밀로 정하고 이의 유출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따라서 고려를 비롯한 중국 주변국들은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화약을 구입하여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고려는 마냥 앉아만 있지 않았다. 고려 말에 자체적으로 화약을 제조할 수가 있게 되었고, 바로 그 중심에 우리나라 ‘화약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최무선(崔戊宣, 1328-1395)이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는 온갖 노력 끝에 1380년경에 화약제조법을 알아내어 화약의 국산화에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 각종 화기를 제작하여 우리나라 화포발달사에 일획을 긋게 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먼저 최무선이 어떠한 인물인가를 살펴보고, 이어서 그가 화약제조법을 알아낸 과정을 고찰하겠다. 마지막으로 ‘화통도감’이라는 정부기구를 이끌며 그가 개발한 각종 화약무기와 이의 실전에의 적용 사례를 알아볼 것이다.


최무선의 생애와 화약제조법 개발
최무선은 어떠한 인물이었는가? 오늘날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는 우리 역사상 유명한 인물들 중에 한 명으로 꼽히고 있지만, 실제로 그의 출생과 행적에 대한 기록은 극히 드물다. 그의 이름은 『고려사』와 조선초기의 『조선왕조실록』 등에 극히 드물게 등장할 뿐 그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기록은 없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1328년에 오늘날 경북 영천시 부근에서 고려 말에 관리들의 봉급 지불을 관장한 광흥창 책임자였던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하지만 당시 고려 말의 역사적 상황을 통해서 그가 청소년기에 어떻게 화약을 접하고 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는가를 유추해 볼 수가 있다.


그가 활동한 1330년대에서 1380년대의 시기는 일종의 역사적 격동기였다. 오랫동안 원나라의 예속 하에 놓여 있던 고려는 왕실이 안정을 찾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고, 당시에 원의 영향력이 약화됨과 비례하여 고려사회의 혼란은 더욱 심각해졌다. 중앙정부가 이렇다보니 해안에는 왜구들이 출몰하여 극성을 부리는 통에 일반백성들의 삶은 피폐될 대로 피폐되어 있었다. 이때 부친 덕분에 개경에서 생활한 최무선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당시에 우리나라 해안지대에 출몰하여 약탈을 일삼던 왜구들의 잔학상과 이들이 끼친 피해에 대해 뼈저리게 느끼게 있었다. 부친의 직업이 전국에서 개경으로 올라오는 세수미를 관리하는 직책이었기에 그의 아들이었던 최무선도 젊은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왜구 토벌에 대해 강한 집념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구를 어떻게 격퇴할 수가 있을까? 이에 대해 고민하던 최무선에게 해답을 준 것이 바로 화약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그가 화약을 무(無)로부터 만든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에서는 이미 송나라 초기인 10세기 무렵부터 화약을 제조하고 이를 이용한 화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제조기술은 극비에 부쳐졌기 때문에 이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한 연유로 화약은 14세기 전반인 공민왕 대에 이르러서야 고려에 전해지게 되었다. 당시에 왜구의 극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고려 왕실은 화약의 필요성을 느끼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화약 공급을 요청하였고, 마침내 공민왕 21년(1372년) 경에 중국으로부터 염초와 유황 등 화약제조에 필요한 원료를 얻어낼 수가 있었다. 이는 최무선이 화약을 제조하기 이전에 이미 화약의 구성물질에 대한 기초지식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화약의 주원료 중 하나인 염초를 추출하는 방법과 염초, 유황, 그리고 목탄을 혼합하는 비율을 최무선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바로 최무선이 이를 알아내 화약의 국산화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염초는 오래된 절간이나 부뚜막, 또는 온돌바닥의 흙을 모아서 물에 탄 뒤 이를 솥에 넣어 끊이는 방식으로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내는 과정이 만만치가 않았다. 화약제조의 꿈을 갖고서 노심초사하던 최무선은 곧 염초 제조라는 암초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던 중에 당시 예성강 포구에서 상거래 차 고려에 왔던 이원(李元)이란 중국 상인(그는 원래 염초 제조 기술자였음)을 만나게 되었고, 그를 극진히 대접하여 드디어 염초 만드는 비법과 화약 원료의 혼합비율을 알아내게 되었다. 마침내 화약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는 첫발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이제는 이를 실전에서 활용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화약무기 제작과 실전 활용
화약제조법을 알아낸 최무선에게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떻게 이를 활용하여 왜구 토벌에 활용할 것인가 였다. 이는 의외로 수월하게 해결되었다. 화약 제조에 성공했다는 그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마침내 고려 왕실에서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1377년 10월에 개경에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그 책임을 최무선에게 맡겼다. 이에 대해서는 개략적 내용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왕실의 재정적 지원 하에 이곳에서 최무선은 화약을 제조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곧 바로 이를 사용할 수 있는 각종 화기들을 제작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그는 화통도감에서 매우 다양한 종류의 화약무기들 - 대장군포·이장군포·삼장군포·육화석포·화포·신포·화통·화전·철령전 등 - 을 만들어 내었다.


그가 제작한 화약무기를 현대어로 풀이한다면, 발사기, 발사물, 폭탄, 그리고 로케트형 화기 등에 해당하였다. 물론 그가 제작한 이러한 무기들이 당대의 무기체계를 확연하게 바꿀 정도로 엄청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 고려 군대가 주로 의존하고 있던 활이나 창과 같은 근력무기에 비한다면, 그 위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더구나 당시에 고려는 빈번한 왜구의 노략질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터 였기에 최무선의 화약제조와 이를 활용한 화약무기의 사용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이 되었다.


이제 남은 마지막 문제는 이렇게 온갖 난관을 거쳐서 제작한 화약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화약무기가 고려 수군에 미친 영향이 컸다. 왜냐하면 수군은 화약무기의 사용으로 전술상으로 커다란 진전을 이룰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고려 수군이 보유하고 있던 재래식 무기와 이에 기반한 당파전술만으로는 기습적으로 해안가에 상륙하여 약탈한 후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왜구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화약무기가 도입되면서 고려 수군은 전함에 장착된 화포를 이용하여 원거리에서 함포사격을 가할 수가 있게 되었다. 기동성을 중시하였던 왜선은 주로 얇은 널빤지로 건조되었기에 함포의 공격에 취약하였다.


이처럼 고려 수군이 보유한 함포의 놀라운 위력이 입증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1380년(우왕 6년) 8월에 벌어진 진포(금강 입구 해당) 해전에서 전선 500여 척을 이끌고 침략하여 육지에서 노략질을 벌이고 있던 왜구에 화포를 이용하여 고려군이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당시에 최무선이 이끈 고려 수군의 전력은 전선 100여 척에 불과하였지만, 화포로 무장하고 있었기에 완승을 거둘 수가 있었다. 수적 우세를 과신하고 공격해 오던 왜구의 선단은 고려 수군이 가한 함포사격으로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고, 승선하고 있던 왜구는 거의 모두가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시체가 바다를 덮었고 피의 물결이 굽이칠” 정도였다는 『고려사』의 묘사를 통해 당시 고려군이 거둔 압승 광경을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실제로 500여 척에 달했던 왜선은 거의 모두 불탔고, 배에 타고 있던 2만여 명의 왜구들도 거의 죽음을 면치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무선에 의해 개발된 화약과 화약무기의 위력은 계속하여 그 위력을 떨치게 되었다. 예컨대, 1383년에는 정지 장군의 지휘를 받은 고려 수군이 전선 140여 척을 이끌고 남해 현에 침략한 왜군을 관음포 앞바다에서 일거에 소탕하였다. 당시에 고려 전함에 접근해 오던 왜선은 고려군이 발사한 화포에 명중하여 불이 붙고 침몰하였다. 수년 뒤에는 아예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원정하여 왜구의 침략을 근절시키려고 했던 바, 이러한 과감한 작전의 이면에 바로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무기가 있었던 것이다.


화약을 제조하고 화약무기를 개발하여 왜구의 침탈로부터 백성을 지키는데 기여한 최무선은 1395년 4월에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기록에 의하면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조선 초기 태종 및 세종 대에 화약무기의 전성시대를 연 최해산(崔海山, 1380-1443)이었다. 부친 사망 시 겨우 15살에 불과했던 최해산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화약 전문가로 성장하였고, 마침내 조선왕조 초기인 1401년(태종 1)에 군기사에 특채되어 이후 화포 개발을 주도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최무선은 개인적 노력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제조에 성공하여 화약 국산화라는 불멸의 업적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그의 역할이 여기에서 그쳤다면 그의 업적은 반쪽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고려 왕실을 설득하여 ‘화통도감’이라는 정부의 전담기구를 만들고 여기에서 화약 생산은 물론이고 다양한 화약무기를 개발하였고, 이를 실전에 적용한 진포, 관음포 등 해전에서 완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고려 왕실은 1350년 이래로 해안지방을 불안에 떨게 하였던 왜구의 준동을 막아 낼 수가 있었다.


더구나 자신의 아들 최해산에게 화약제조 비법을 전승시켜서 세종 대에 화약무기 르네상스를 이룩하는 기초를 제공하였다. 우리 역사상 드물게 부자(父子)가 국방에 크게 기여한 경우였다. 당시에 화약의 전술적 가치를 이해하고 이를 꾸준한 관찰과 집요한 추적을 통해 자체 제조에 성공하였던 최무선의 창의적인 태도와 이를 무기 제작으로 연결하여 실전에 사용하였던 실용적인 자세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생에 걸쳐서 화약과 동거동락한 그의 노력의 이면에는 애국(愛國)과 애민(愛民) 정신이 놓여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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