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우리나라 전통주의 형성과 흐름

醉月 2008. 9. 9. 15:06


  오늘날 술의 기원이 인류사회에서 민족의 형성과 더불어 원시시대이래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하였던 음료의  일종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삼국사기'에서 밝혀지고 있는 바와 같이 고구려를 세운 주몽 또는 동명성왕의

건국신화  가운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웅심연가에서  하백의 딸 세 자매를  취하려 할 때, 미리  술을 마련해 놓고 이것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수궁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세 처녀 중에서 큰딸 유화와 인연을 맺어 주몽을 낳게 하였다는 설이 있고  보면,

우리 나라의 술의 기원 또한 신화 속에서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삼국  형성기에 이미 전래곡주가 그 바탕을  이루어

예, 부여, 진한, 마한 사회를 비롯하여 고구려에서 제천, 영고, 제귀신, 동맹 등  제행사에서 주야음주가무한 바  있다.

특히 고구려에서는 건국 초기(28년)에 지주를 만들어 한나라의 요동태수를 물리치는 등  주조기술이 뛰어나  중국인들  사이에
자청선장양하는 나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때에  이미 우리나라는  주국과 맥아로  술빚는 방법을  익히고 있었고,  이 주국을 이용한  곡주 빚는 기술을  일본 응신  천황 때 백제의  인번 등을 통해 일본에  전수하여, 후세에  주신으로  추앙을  받은 사례가  일본의  고사기에서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후기에는  백제의 주조기술이 중국과 대등할 정도로 발전하여 '주서'에는 주 예문화(감주문화)가 중국과 대등하였다고 전하며,

주국을 이용하여 청주, 탁주가 빚어지고  또 맥아 또는 주국을 이용한 감주가  빚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시기에는 신라  청주를  비롯하여 고구려  청주가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의 곡하주를 낳았고,

당대의 문사들 사이에서 애상되었다.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오면  곡주류의  여러  주품들이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상류사회에서는 청주류가  성행되었으며 술은 장(간장), 시(된장),  해(젓갈) 등과 함께 기본  폐백음식으로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그밖에 고등발효식품들과 함께 양념으로도 사용되었다.
  고려시대로 내려오면  전래의 곡주류 양조법은 그  정착차원을 넘어서 전기에 청주유,  탁주류, 중양주류,  재주류(막걸리), 감주류  등의

전통적인  양조기술을 더욱 심화되었다. 또 과실류 등을 혼양하는  혼양주조법이 새로 개발됨과 동시에 약재를  혼양한 

약용혼양주조법도  아울러  자리를  잡고  있었고,  재제주류에 속하는  자주류 양조기술  또한 정착을  보고 있다. 

주국의 종류도  다양화되고 전래의 소맥국 위주에서 미국을 이용한 특별한 술로 이화주가 정착되고 있었다.


  곡주  양조법을  바탕으로 하는  양조기술이  고급화됨에 따라 주조 역사상 주목할 일은 조선조까지  전해지고  있었던 

유명주품의  명칭이  고려조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고급 청주류로 황금주, 벽향주, 삼해주, 유화주, 춘주, 녹파주,  구하주 등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청주의 대표로  알려져  왔던

방문주(일명  백하주)가 이때에   이미  자리잡았고,   조정에서  특급   청주류인  청법주와   선온주가 보편화되었다.
  또한  삼중양조법을  바탕으로  한  삼해주,  춘주  등의  개방은  양조기술의 고도화에 따른 소산물이었다.


  탁주류 가운데서도  혼탁주류에 속하는  부의주, 녹의주 또한  고려조에서부터 그  맥이  이어진 것이었다. 

약용혼양주로  이름난  계주, 두주,  초주,  초백주, 창포주,  애주  등이 또한  이때에  자리잡은  술들이고 과실  및  화엽입주법을
바탕으로  한 혼양주로는  국화주, 죽엽주,  백자주, 송주,  오가피주를 비롯하여 포도주가 있었다. 

그 밖에도 중탕법을  새로 도입하여 재제주류인  자주류 또한 고려조에서 비롯된 것 중의 하나이다.
  고려시대가  마침  곡주양주문화의  성숙기를  맞이하였던  것은  국내적으론 양조기술의 축적의  결과라 할 두  있겠지만,

또 하나의  중요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는 것은  국내적으로 안정세가  유지되고 있었던 반면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대외적인 교섭이 활발해진 것도 그 원인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고려시대  전기중에 유입된 외래주만 보더라도 북방계 민족으로부터는  중산주를  비롯한  행인자법주,  계향어주  등 

유명  청주  및 약용자주가 유입되었고,  멀리 남만사회로부터는 화주란  과실주문화가 흘러오고 있었다.
  이와 같이 대외주의 접촉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고려조 후기로 접어들면 이와 같은  움직임은 더욱  확산되어  갔다. 

몽고와의 접촉을  통하여  마유주문화를 접수하였고,  중국 원나라를  거쳐  멀리 서역사회의  포도주문화를  수용하기에 이르렀으며,

중국으로부터는 계속 특급 청주류인 상존주, 백주 등이 유입되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 속에서 우리  나라 주류 사상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증류주문화가 유입되었다는 사실이다.


  고려말엽에 유입된 증류주문화의  유입경로를 보면 아라길주문화가 몽고 또는 대식상인을  통하여 충렬왕  초기중에  유입되었고,

뒤이어  원나라와의  교섭이 활발해지는 동안 중국에서 창시된 소주문화가 흘러들어 왔다.
  이들 증류주문화가  유입되자마자 곧바로  이 땅에 증류주문화가  개화되었고, 증류주문화는 정착과  동시에 급속도로 발전하여 증류법을  바탕으로 한 노주가 탄생, 이 증류법을 바탕으로 한 재제주류 또한 속속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개발된  것 중 일차증류주로는 노주와  함께 홍로가  있었고 고차증류주로는 감홍로 등이 있었다.
  마침내  고려사회에서는   전래의  양조곡주문화에   증류주문화를  추가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고려사회는  양대주류문화권을 완성함으로써 우리나라 전래 주품들의 틀이 이때에 이루어져

그 틀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내려와서도  전기중에는 양조기술면에서  점차 고급화하는 경향이 뚜렷하여,  상류사회에서는  중양주법을  존중하는  한편 

양조원료에  있어서도 갱미위주에서 점미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우량주로  손꼽던  주품으로는  삼해주를  비롯하여  백하주, 이화주, 백자주, 호도주, 하향주, 청감주, 자주, 국화주 등이 있었다.
  특히 고려시대 말엽에 와서 정착되었던 증류주는 조선조에 들어서서 급속도로 파급되기 시작한다. 

세종대를 중심으로 일본, 중국  등으로 소주의 수출과 함께 기술이전이 이루어져 노주문화는 점차 국제화 단계로 발전하였다.
  조선조 후기로  접어들면서는 지방주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비전되고 있었던 지방주품들이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이때의  유명주 대열에  등록되어  있었던 주품 중에는  호산춘, 약산춘(서울), 노산춘(충청), 벽향주(평안)  등을 손꼽을 수 있다.


  특히 증류주는 고급양조주의  술덧까지 소주로 전용되는 기현상을  빚어, 서울 공덕동에 자리잡고  있었던 삼해주 술도가에서는

이들  삼해주를 모조리 소주로 고아  내는 술덧으로  이용하였다 하니  증류주에  대한 기호적  변화를 짐작할 만하다.
  이와같이  조선조 후기에  증류법을 이용한  주류 개발의  전성기를 맞이함에 따라  우리나라 주류의  구성도  크게  변화되었고,

이때의  주품들을  종류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순일차증류소주 : 점미로주, 갱미로주, 소맥소주, 대맥소주, 교맥소주, 감자소주, 면말소주 등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환소주류라 하여 고차증류한 술로 감홍로(평양), 계당주(평양)가 유명하다.
      1. 각색소주류  : 착색물료를  곁들여 고아닌  소주류인데 홍로(홍소주),  황로, 갈로류들이 또한 유명주 대열에 끼어 있었다.
      2.  자주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곡주양조류에 채소 등을 넣고 중탕하던 방법이 이때에 이르러 그 바탕이 소주로  전환되었고,

           이름난  것만  추려도 죽력고, 이강고(전라,황해) 등이 있었다.
      3.  재제주류 :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곡주양조에 혼용하였던  사례가 이때에 와서는  노주로 뒤바뀌었다. 

           그 가운데  알려졌던 주품으로는 장미로, 매화로, 감귤로, 이로, 박하로, 감국로, 생강로, 산사로, 인삼로 등이 있었으며 

           각색 각향이 어우러진 주품들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선조에는 우리나라  유명 풍미물료가  총동원되는, 이를테면 서구사회의 재제주류를  무색케 하는 지혜를

우리  선조들은 간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합주 또는 혼용주류라  하여 양조용수 대신 소주를 이용하였던 주품 가운데는  과하주와 송순주가  유명하였으며, 

특히 과하주의  고장으로  서울이 알려져 있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조  후기까지 발전을  보았던 증류주를  바탕으로한 주품들이 오늘날에는 어찌되었는지 궁금하거니와

증류주의 음용이 성행되었던 조선조에서는 이를 뒷받침하듯 색다른 일화도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고춧가루를  타서 마시는  버릇 때문에  죽거나 병을 앓게  된 사람도상당히 있었다는 사실도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대응방법으로 본초학  분야에서는 소주독을  다루는 처방과 함께  취하지  않는 방법, 

또한  술을  빨리 깨게  하는  처방들이  나타났음은 물론이거니와 음용법이 등장하게 되었다.
  소주를 한  잔 마시고 냉수를  한 잔 마시는  방법, 또 소주에  얼음을 넣거나 꿀을 타서 마시는  등

오늘날의 서구사회의 칵테일  방식을 무색케 하는 처방이 가사서에서 속출하였다.
  그뿐 아니라  정다산같은 사람은 전국의 소주고리를  모조리 거두어 들이기를 조정에 청하였고,

이익  같은 분은 큰 소주도가에서 소비하는 양곡만도  이 년의 비용이 수천  두에 달하는에 

이것은 가난한  집 10년의 양식에  해당한다 하여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황해의 이강고와 같은  자주류는 고종 19년  2월에 있었던 한미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대표한 전권대사(슈펠트)와  청국사신이 합석한 만찬의 자리에 우리나라  쪽에서 내놓은 음식이다.

전복, 백자, 구기자차, 약반, 조악,  정과, 원소병,  다식 등과  함께 내놓았는데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음식물에 매혹당했던  일들은

이강고와 같은  전통주가 있었고, 또한  자랑할 줄 아는 주체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한다.
  이와  같이  증류주류가  성행되는 가운데서도  한말까지  증류주류와  함께 양조곡주류의 뿌리는 계속 이어졌고  

서민사회에서는  상대이래  전승을 거듭하였던 속성  재주(막걸리)가 보편화되고  있었지만, 한말에  이르러 개항과 함께 

강대국과의  통상협정이  체결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새로운  외래주의 물결이 물밀 듯이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유입된  외래주를  간추려  보아도 

중국계로는  홍여주를  비롯하여 재제주류에 속하는 매혼로, 사국공, 오가피, 이화백, 죽엽청, 포도춘 등이  있었고,
독일계로는 적포도주, 앵주, 서반아계의 셰리, 프랑스계로는 샴페인 등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한말에는 다국적주가  공존하기  시작하는  때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화 변화  속에서도 전래주는  그 맥을  이어왔지만, 주조기술의 국제화를  예견하였던지

조선조  말기  서유구, 이유경,  최한기  등은 유명주를 집중적으로 분석,  주국의 개선, 양조기술의 개량  등

우리나라 전통주의 나아갈 바를 암시적으로 제시하는 등 끊임없는 노력이 한말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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