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홀아비가 아미(蛾眉)를 꿈꾸고
… 도적놈이 장물(臟物)을 꿈꾼다
신라 중엽의 일이다.
강원도 명주의 내리군(奈李郡)이라는 곳에 세달사가 직영하는 커다란 농장이 있었다. 세달사는 신라 말 도선대사가 우거하면서 견훤과
궁예에게 선도와 무술을 가르친 곳이다. 궁예가 훗날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반기를 들면서 흥교사(興敎寺)라 이름하게 되었다.
견훤도 이곳에서 후백제 건국의 꿈을 키우면서 선도와 무예를 배웠고, 궁예도 마찬가지로 후고구려의 야망을 키우던 곳이니,
세달사야말로 한대국 역사에서 상당히 의미가 깊은 사찰이라 할 것이다.
신라 조정의 살해 음모를 피하여 경기도 개풍군의 큰 절 세달사까지 도망간 궁예는 그곳에서 진공선사(眞空禪師)를 사부로 모시며
궂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엔 궁예말고도 이미 여러 명의 상좌승이 있었다. 그 중에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그러나 항상 말이 없는 한 머슴애가 궁예의 눈을 끌었다. 그의 눈빛은 남달랐으며 종종 먼 하늘을 쳐다보며 상념에 자주 잠기곤 하였다.
다른 아이들은 그를 지렁이라고 놀렸다. 정말 그는 지렁이인 양 아이들이 아무리 놀려도 꿈틀도 하지 않고 자기 일만 했다.
그 점이 궁예는 기분 나쁠 정도로 두려웠다.
이 놈은 나처럼 무엇인가 비밀이 있는 녀석이다 라고 생각하며 궁예는 그 녀석을 주목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엔가 자다가 잠이 깬 궁예가 살펴보니 지렁이가 없어진 것이다.
뒷간에 갔으려니 하고 다시 잠을 청하는데 그날 따라 한번 깬 잠이 당최 들질 않았다. 뒤척뒤척하며 꼬박 세우는데, 지렁이는 새벽 닭이
울 무렵에야 들어와서 눕는 것이었다. 어딜 다녀 온 것일까? 의혹이 생긴 궁예는 담날 밤엔 아예 자지 않고 있으면서 실눈을 뜨고 지렁이를
감시하였다.
그랬더니 삼경 무렵 쯤해서 지렁이가 살며시 일어나서 옷을 입더니 나가는 것이다.
어딜 가는 걸까? 뒷간에 가는 거라면 옷을 입을 필요가 없을 텐데 여기는 비구들만 있으니 벌거벗고 흔들어도 볼 년도 없는데.
의혹이 나서 궁예는 얼른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지렁일 쫓아갔다.
개울을 건너고 몇 고개를 넘더니 어떤 커다란 고목 앞에 가서 꿇어앉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고목 위에서 지렁이 왔느냐 소리가 들리면서 노인 한 분이 내려오는 것이다. 그가 지렁이에게 무술을 가르치는데
궁예가 한 눈으로 봐도 현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황홀하여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궁예의 골통을 무엇인가가 강타하고…
얼이 빠진 궁예 앞에 나타난 노인의 일갈.
이놈아 천하를 컨닝해서 훔칠 꺼여? 당장 나와서 따라하지 못해!!
거기서 궁예도 지렁이와 함께 그 노인의 제자가 된 바, 그 노인이 바로 도선대사였다.
매일 밤 궁예와 지렁이(후에 견훤)는 도선대사에게 가서 무술을 익히고 그리고 선도를 배웠다.
해포를 배우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게 되었을 때, 도선대사는 말하였다.
지렁이 너는 난폭한 성미를 고쳐야 하고 궁예 너는 자만심을 고쳐야 하리로다 너희 둘이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하면 능히 천하를 얻을
것이나, 만약 다투고 싸우면 함께 망하리라. 특히나 둘은 용족(龍族)을 조심할 것이라.
세달사의 주 수입원인 내리군 농장에 조신(調信)이 지장(知莊=농장 관리인, 즉 농장장)으로 내려왔다.
그러니까 조신은 불법에 정진하는 이판승(理判僧)이라기 보다는 사무를 보는 사판승(社判僧)이었던 것이다.
조신은 염불에는 별로 신경 안 쓰고 젯밥에만 주로 마음을 썼는데, 암튼 그의 탁월한 재정 운영능력으로 사찰의 재산과 재물은 부쩍부쩍
늘어만 갔다. 그러다가 암자로 자주 불공을 드리러 오는 명주군의 태수 김흔공(金昕公)의 딸 지연랑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이는 십칠팔세나 되었을까?
옥같은 살결 영채있는 눈, 삼단같은 머리채가 잘 조화되어 완연히 월궁항아(月宮姮娥)가 하강한 것 같았다.
아! 저토록 아름다운 처녀가 있다니, 내 아내로 삼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신은 늘 이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혼자의 생각일 뿐이지 김흔공은 떡 줄 생각도 안 했고 더욱이 지연랑은
건포도 하나도 줄 생각을 않았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그 놈의 착각도 연일 혼자 하자니 너무 힘들었다.
아끼바레 십분도 쌀도 공연히 밥맛이 없어지고 손에는 맥이 풀리면서 젓가락 들 힘도 없었다.
내가 왜 중 중 까까중이 되어서 이 고생을 하나?
중만 아니었더라도 당장 청혼을 해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으련만, 내가 워낙 마당발이니까 부조도 엄청 들어올틴디…
아아, 좋은 수가 없을까?
갖은 궁리를 하다가 조신은 문득 무릎을 치며, 옳다. 이 방법이다! 왜 진작 이 생각을 왜 못 했을까!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그 길로 낙산사로 달려갔다. 영험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낙산사 관음보살에게 발원을 드려 보기로 하였다.
낙산사 관음보살, 일명 낙산대비(洛山大悲).
영검하기로 소문난 낙산사 사찰이 세워진 데에는 다음의 3가지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대당 유학을 가던 의상과 원효가 요동에서 뜻을 달리하여 헤어진 후 의상은 그대로 당나라로 가고 원효는 신라 본국으로 돌아왔다.
여러 해 동안 당에서 불법을 구한 의상이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오다 다시 낙산에 들렀는데,
대비진신(大悲眞身)이 해변 굴 안에 산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의상은 그 해변의 이름을 서역에 있다는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의
이름을 따서 낙산이라 명명하였다. 의상이 목욕재계한 지 7일만에 좌구(座具)를 새벽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시종(龍天八部侍從)이
나타나 의상대사를 굴 속으로 인도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참례하니 신룡이 나타나 수정염주 한 꾸리를 주었다.
의상이 이를 받아 가지고 물러나니, 동해룡이 또한 나타나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치었다. 법사가 받들고 나와 다시 목욕재계하며
진신을 뵈옵기를 염원하기 7일만에 진신이 현신하였다. 진신께서 일러 말씀하시기를
좌산산정(座山山頂)에 쌍죽이 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가하리라. 하였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을 나오니 과연 대가 솟아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소상을 모시니 그 원만하고 고운 형상이 천생(天生)한 것과 같았다.
절 이름을 낙산사라 명하고 법사가 신룡들로부터 받은 두 염주를 성전에 두고 떠났다.
그 후 원효대사가 소문을 듣고 첨례코자 찾아왔다.
원효가 남교(南郊)에 이르렀을 때 물논 한가운데서 한 백의의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웬 간호사가 농촌 일손 돕기를 하나 하고 장난스러운 생각에 희롱하는 마음으로 수작을 걸었다.
보게나, 저 물논에서 홀로
곡식 거두며 제 흥에 겨워 노래 부르는
저 외로운 백의의 아가씨여
잠시 이리로 오시거나 이야기라도 나누십세
홀로 이삭 자르고 다발 묶으며
애잔한 노래 부르는 아가씨여
추수할 것 많으면 내게도 한 단 주시구레
여인도 미남 중 원효가 수작하는 것이 싫지 않았는지 또한 희롱하는 맘으로 답하는 것이었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습니다
나는 그대가 두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게지요
벼는 흉작이라 내 묵을 것도 부족하네요
수작을 마치고 원효가 거기서 또 가다가 시냇가에 이르니 미모의 젊은 여자가 개울가에서 월수백(月水帛)을 빨고 있었다.
개짐 서답 등으로 불리우는 것. 아녀자가 장성하여 임신할 나이가 되면 그 증거로 한달에 한번씩 손님이 찾아오고
이 손님을 처리하기 위하여 착용해야 하는 것.
원효가 문득 갈증을 느끼고 그녀에게 물 한 바가지를 청하였다. 여자는 원효를 쳐다보더니 간을 녹일 듯한 추파를 보내며 바가지에 물을
떠서 주는데… 아이구야! 개짐을 빨아 벌건 피가 둥둥 뜨는 물을 하필 떠서 건네는 게 아닌가.
물을 받아든 원효가 안을 들여다보니 뻘건 피와 함께 요상한 허연 액체… 순간 북받치는 구역질.
원효는 물을 확 엎질러버리고 새로 물을 떠서 마시었다. 여자는 깔깔거리면서 남정네도 입덧을 다하네.
그때 들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 꼭대기에 청조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휴초호화상아 휴초호화상아 하고 부르더니 홀연히 날아가 버렸다.
원효가 놀라서 바라보니 새는 날아가는 곳도 모르면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노래하는 의미도 모른 채 부른 휴초호화상(休醋蝴和尙)이라는 구절만이 귓전을 맴돌았다. 휴초호화상이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대사님! 가지 마세요란 뜻이었다. 의아하여 소나무를 바라보니 밑둥에 조선나이키 왼짝이 떨어져 있었다.
오늘은 탈도 많고 이상한 일도 많다 일진이 안 좋은가 중얼거리며 절에 이르러 관음좌하전에 예불하려고 보니
그곳에 조선나이키 오른짝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서야 원효는 머리통이 꽝 하면서 앞서 만났던 두 여인이 관음보살의 현신임을 깨달았다.
처음 여인의 볏단과 두번째 여인의 짚신. 원효는 자신의 도력이 아직 너무나 형편없는 단계(벼가 흉작이다라는 관음보살의 지적)임을
자각하고 더욱 각골반성하여 불도에 용맹정진한 바, 해동 최고의 고승 반열에 올랐다.
그후 사람들은 청조가 울었다는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원효가 성굴(聖堀)에 들어가 다시 진용(眞容)을 보고자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원효는 다시 한번 자신의 수도를 한탄하며 배알을 포기하고 그곳을 떠나갔다.
굴산조사(堀山祖師) 범일(梵日)이 태화(太和- 흥덕왕대) 연중에 당에 건너가서 명주 개국사에 이르러 염관대사(鹽官大師)의 설법을 들었
다. 그때 범일의 옆에 왼쪽 귀가 떨어진 짝귀승 하나가 앉아 있다가 말을 건넸다.
나도 향인(鄕人-신라인)인데 집은 명주 근처 익령현(翼嶺縣-양양)의 덕기방(德耆坊)에 있소이다. 법사가 후일 본국에 돌아가거든 모름
지기 내 집을 지어 주시오. 그럽지요.
조사가 총석(叢席)을 편유하고 염관에게 법을 얻어 회창 7년(신라 문성왕 9년) 정묘에 고향으로 돌아와 먼저 굴산사를 세워 교를 전하였
다. 그러저러 약속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는데 헌안왕 2년(서기 858년) 무인 2월 15일 밤 꿈을 꾸었는데 전에 보던 짝귀승이 창문 아래에 오
더니, 그대가 전에 명주 개국사에서 나와 언약하기를 내 집을 지어주기로 하였는데 여직 개기고 있으니 어이된 연유인고? 하였다.
조사가 깜짝 놀라 깬 후 수십 명의 사람을 거느리고 익령으로 가서 수소문하였다. 덕기방을 찾을 수가 없어서 하룻날을 뺑뺑이 돌며 헤매
던 중, 주막에 이르러 저녁을 먹고 있는데 한 여인이 지나가며 덕기야 덕기야. 하고 아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범일은 갑자기 머릿
속이 휑뎅그레 밝아지면서 번쩍하는 것을 느꼈다.
여보시오, 여인네. 지금 부르는 이름은 누구를 찾는 것이오?
예, 대사님! 제 아들녀석입니다. 이름이 덕기입지요. 저녁 때가 돼도 노는데 미쳐서 집에 들어올 줄을 모릅니다.
얘가 빵씰이를 너무 좋아해서 탈입니다. (참고:빵-만화방, 씰-오락실. 빵씰이와 방실이는 전혀 상관이 있음.)
범일은 여인과 함께 덕기라는 아이를 찾았다. 개울가 쪽에서 아이는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는 어머니와 범일을 비롯한 사람들의 무리를 보
더니 눈이 둥그레져서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 범일은 겁에 질린 아이를 불러 엿을 먹였다.
덕기야! 엿 먹어라. 그래 어디서 놀다오는 길이니?
개울에서요..
누구하고 놀다오는 거니?
금동이요.
금동이가 누구지?
금동이는요, 아버지가 불암(佛岩)인데요.
덕기의 설명에 의하면 마을 남쪽 돌다리 밑 개울가에 몸에서 금빛이 나는 친구가 있는데 아버지가 불암(佛岩)이라고 한댄다.
그 아이하고 맨날 물고기 잡기를 하며 논단다. 그 아인 얼마나 물고기를 잘 잡는지 조선나이키를 벗어서 물에 담그고 있다가 건지면
줄도 없는데 물고기들이 줄줄이 알사탕으로 따라 올라오는데 번호 붙이며 올라온다는 것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물고기들이 파닥거리는 걸 보고 금동이가 부루수(附壘手)하고 소리치면 두 마리가 파닥거리고 탱고(撑古)하면 한 놈이
꼬리지느러미를 탁탁 치고 투위수투(投位手投)하면 몸통을 펄떡거리고 고고(高高)하면 껑충거리고 지수구(地手邱)하면 몸통을 좌우로 흔
들고 짜가춤하면 모가질 흔들고 부래이구(否來二舊)하면 거꾸로 뱅뱅 돌고 경부선춤하면 동찍 서찍 남찍 북찍하면서 네 군데 땅바닥을 찍고
래개(來開)하면 한 놈은 흔들고 네 놈은 꼬리지느러밀 휘젓고 희합(喜合)하면 눕다 일났다 하고 그외에도 엉거주춤 우선멈춤 차춤차춤 뚜버
기춤 회오리춤 사라춤…
그런데 그렇게 재미있게 놀다가도 굴산사 저녁 종소리만 나면 동생들이 찾는다며 사라지는데 곰방 없어져서 어디로 가는지 나도 몰라요.
범일은 마음에 짚이는 게 있어서 아이를 데리고 개울로 갔다. 물 가운데를 보니 아아, 누런 돌부처 하나가 누워 있었다. 꺼내어 보니 왼쪽
귀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큰절을 올리고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정취보살(正趣菩薩)의 상이었다.
간자(簡子)를 만들어 절을 지을 곳을 점쳤더니 낙산 위가 길하다는 점괘가 나오매 그곳에 불전 3간을 짓고 그 상을 모시었다.
이 후에도 낙산사와 대비진신에 나타난 영험한 이적은 이루 셀 수가 없는 바 모두 생략하노니
이상의 내용이 낙산사 창건에 따른 배경설화인 것이로다.
이토록 영험하다고 소문난 낙산대비에게 가서 김처녀와의 혼사를 빌어 보리라 하고 조신은 달려 갔는데…
… 바야흐로 괴로운 인생이 한 꿈 사이이며
… 모름지기 즐거운 영화가 두 꿈 사이더라
낙산사가 창건된 후 백여 년 뒤에 원인 모를 들불이 일어나 온 산에 번졌으나 오직 이 두 성전만은 화재를 면하였고,
나머지는 전소되었다. 몽고의 대병이 훗날 침입하였을 때 계축 갑인년에 진신의 진용과 두 보주를 양주성(양양)에 옮기었는데 몽고병의 내공이 매우 급하여 성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주지 아행선사(阿行禪師)가 은합에다 두 구슬을 담아가지고 도망코자 하였는데 사노(寺奴) 걸승(乞升)이 탈취하여 땅에 깊이 묻고 맹
세하기를, 내가 만일 이 병화에 죽음을 면하지 못하면 두 보주는 마침내 인간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하여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요, 내가 만일 죽잖으면 마땅히 이보(二寶)를 받들어 나라에 바치겠다. 하였다.
갑인 10월 22일 성이 함락되어 아행은 죽음을 면치 못했으나 걸승은 살아 남았다. 병화가 물러간 뒤 보주를 파내어 명주도 감창사(監倉使)
에게 바쳤다. 그때 낭중(郎中) 이녹유가 감창사였는데, 받아서 감창고에 간직하여 교대할 때마다 이어 받았다. 고종 45년(서기 1258년) 10월
에 이르러 기림사 주지 각유 대선사가 아뢰기를,
낙산 3주는 국가의 신보입니다. 양주성 함락 때에 사노 걸승이 성중에 묻었다가 적병이 물러간 뒤에 파내서 감창사에게 바쳐 명주 영고
(營庫)에 간직하여 왔습니다. 지금 명주성이 위태하여 지키지 못하겠으니 마땅히 어부(御府)로 옮기어 안치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윤허하시고 야별초 10인을 보내어 걸승을 데리고 명주성에서 가져다 내부에 봉안하였다. 그때 사개(使介=使者) 10인에게 각기 은
1근과 쌀 5석씩을 주었다.
조신은 낙산사 관음보살에게 자신의 소원을 빌 작정으로 낙산사로 달려갔다. 관음보살에게 지성으로 빌면 자기의 괴로운 마음을 풀 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시에 무진의보살이 즉종좌기하야 편단우견하고
합장향불하사 이작시언하사대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을 이하인연으로 명관세음이닛고
불고무진의보살하사대 선남자야 약유무량백천만억중생이
수제고뇌호대 문시관세음보살하고 일심칭명하면
관세음보살이 즉시에 관기음성하야 개득해탈케하나니라
약유지시관세음보살명자하면 설입대화라도 화불능소하나니
유시보살의 위신력고며 약위대수소표라도 칭기명호하면
즉득천처하며 약유백천만억중생이 위구금은유리와
자거마노와 산호호박과 진주등보하야 입어대해할새
가사흑풍이 취기선방하야 표타나찰귀국커든
기중에에 약유내지일인이라도 칭관세음보살명자면
시제인등이 개득해탈나찰지난하리니 이시인연으로 명관세음이니라…
대자대비하신 관음보살님! 부디 제 소원을 들어 주시옵소서.
저는 이곳 태수의 딸을 본 후로는 잠시도 그녀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그녀와 소승의 인연이 맺어져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대자대비하신 관음보살님께 발이 손이 되도록 비옵니다.
조신은 매일같이 이렇게 빌었다. 그러나 보살님은 언제나 미소만 빙긋이 지을 뿐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조신은 보살의 말없는 미소가
더욱 불안스럽게 느껴졌다. 어느 날은 눈웃음으로 또 어느 날은 코웃음으로 또 어느 날은 입웃음으로 침묵하였는데 그 중에서 조신을 가장
몸살나게 한 것은 볼웃음이었더라.
보살의 볼웃음.
모든 보살 중에서 가장 여성스러운 보살이 관음보살이다.
보살의 볼웃음을 볼 때마다 김처녀의 복스럽게 생긴 볼이 생각나서 조신은 더욱 미치고 환장할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조신의 안
타까운 발원에도 불구하고 그만 태수의 딸은 혼처가 생겨서 시집을 가버렸다.
김처녀 지연랑의 혼례식을 지켜보고 초야 치르는 것을 멀찌기서 지켜보던 조신은 호롱불이 꺼지고 신부의 옷벗는 소리가 들릴 때, 찢어
지는 마음을 안고 절로 돌아왔다. 못 먹는 술을 한 말이나 들이키고 꼭지까지 오른 조신은 노래를 슬프게 웅얼거렸다.
지금 나는 환장해…
왜냐고 묻지는 말어
아직도 나는 환장해…
그대 신방보고 온 후로
오늘 밤 나는 보았네…
그녀의 불꺼진 신방을
희미한 두 사람의 그림잘
오늘 밤 나는 보았네…
누군지 행복하겠지
무척이나 행복할거야…
그녀를 품은 그 사내가
한없이 나는 부럽네…
불꺼진 그녀 신방 앞에서
오늘 밤 나는 서성거렸네…
서성대는 내 모습이 서러워
죽치고 돌아서 왔네…
오 나의 질라일라(膣羅一裸)
그대 내 여인…
오 나의 질라일라
왜 날 버리는가…
복수에 불타는 마음만 가득 찼네…
절에 돌아온 조신은 관음보살전에 가서 대성통곡 방성대곡 실성호곡 하였다.
관음보살님! 어찌하여 소승의 소원을 이리도 매정하게 들어 주시지 않사옵니까? 소승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 하옵니다. 엉
엉 흑흑 꺼이꺼이 찔찔짤짤… 그러다 조신은 울다 지쳐서 가슴에 빨갛게 멍이 든 채로 잠이 들었다.
그런데 문이 스스로 열리더니 지연랑이 조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조신은 놀랐다. 그녀의 얼굴빛은 수줍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
안이 벙벙하여 할 말을 잊고 있는 조신에게 그녀가 말하였다.
스님! 저는 일찍이 스님을 뵈었을 때 그날부터 홀로 스님을 사모하여 왔더랬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스님을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발표력이 없어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서당교육이 주입식 암기 위주의 교육에서 개인별 발표 중심의 교육으로 개선되어야 한
다고 생각해요. 그랬는데 어느 날 부모님의 명에 못 이겨 억지로 시집을 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안 그람 전 맞아 죽거나 깝데기 벗겨 쫓겨 나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다 큰 처녀가 홀랑 벗겨져 쫓겨난다는 사실을요! 어거지로 시집을 갔지만 도저히 스님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꿈속에서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전… 매일 스님의 품에 안기는 꿈만 꾸었답니다.
오! 그대는 나의 사랑(Oh! My Darling), 나의 태양이예요(Oh! My sunshine). 하오니 제 비록 초야를 치루어서 오리지날 처녀는 아니지만
소녀를 부정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지금부터라도 스님과 부부가 되어 평생토록 함께 살았으면 하옵니다. 이 한 목숨 다 바쳐, 이 한 생
명 다 바쳐서 스님만을 사랑합니다. 스님, 소녀를 버리지 마시고 제발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오!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밤낮으로 관음보살전에 빌었습니다. 그까짓것 딱 한번 그런 건데 어때요. 뭐 뚜렷하게 표나는 것도 아니고
그거야 목욕 깨끗이 하면 뒷탈은 없겠지요. 처녀! 아니, 처녀가 아니랬지… 모라 부르나? 에라 모르겠다. 여보! 이리 가까이 오오…
꿈에 그리던 지연랑을 가슴에 품은 조신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지연랑은 조신의 가슴으로 세차게 파고 들었다.
옷이 벗겨지는지 흘러내리는지 분간이 안 갔다.
어느 순간 우두둑 소리가 들렸다. 누구의 갈빗대가 부러지는지 따질 겨를이 없었다. 한참 껴안고 씨근거리고 있자니 드디어 연소가 되기
시작하였다. 뜨거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이여. 뜨거움이여. 둘은 속옷까지 훌훌 벗어버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서로 밀착
되었다. 그리고, 뜨거웁게, 황홀하게 타올랐다. 오랫동안 서로를 갈구했던 두 남녀는 그 참아왔던 시간만큼이나 길고 오래 타올랐다. 그 열기
가 얼마나 뜨거웠던지 동네 사람들은 그날 밤 낙산사에 화재가 난 줄 알았다고 훗날 말했다. 둘은 그날 밤 조신의 고향으로 야반도주하였다.
행복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눈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그들 부부에게는 다섯 자녀가 생겼다. 조신은 잠시라도 아내의
곁을 떠나려 하잖았다. 조신에게 있어서 인생 최고의 기쁨은 아내와 방사하는 시간이었다. 아내의 살은 언제 먹어도 싱싱하고 감미로왔다.
특히 그녀의 조갯살은 항상 물오른 피조개처럼 짭짤하면서도 착착 감기는 맛이 대단했다.
하루에도 서너번씩 조신은 아내와 사랑을 나누었다. 자연 벌이에 등한해지고 게을러졌다. 조신의 게으름에다 벌이가 시원찮아 늘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들의 집은 간신히 울타리만 둘러쳐진 오막살이였고 끼니도 제대로 때울 수가 없었다.
그들 일가족은 마침내 걸식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온 식구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걸한 음식으로 겨우 풀칠을 했다. 이렇
게 10여년 동안 거지 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니다 보니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몸뚱이조차 가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대흉년이 닥쳤다. 소말리아(蘇末里亞) 흉년 못잖은 기근으로 처처에 굶어죽는 사람들로 시산혈해를 이룰 지경이었
다. 심지어 시신을 삶아 먹는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동냥을 하며 명주 땅 해현령을 지날 때 열 다섯 살인 맏아들이 굶어 죽고 말았다.
앙상한 갈비에서 바람 새어나가는 소리만이 쓸쓸히 들려 왔다.
부모를 잘못 만나 어린 나이에 이렇게 굶어 죽게 하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조신 부부는 통곡을 하며 땅을 쳤다. 그런다고 죽은 아들이 살아날 리 없었다. 정말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요 죽은 마누라 젖통 빨기였다.
조신은 미친 듯이 우는 아내를 달래어 죽은 아들을 길가에 묻고 다시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우곡현이라는 곳에 이르러 움막을 짓고 나머지
네 자녀와 비바람을 피하였다. 이제 그들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늙고 병든 데다가 오랫동안 굶었기에 하체가 떨리고 어지럼증이 났다.
가운뎃다리는 언제나 축 늘어져서 일어서는 걸 잊은지 오래 되었다. 고개 숙인 남자가 된지 오래였다.
이젠 아내가 밤에 해보자고 할까 봐 겁이 날 지경이었다. 늙고 병들고 기운없으니 방사고 뭐고 다 귀찮았다.
아내의 살맛도 예전같지 않았고 조개살에서는 이젠 썩은 내가 나는 듯도 하였다.
도수없이 열 살난 계집아이를 시켜 밥빌이를 하게 했다. 그러나 동냥 나간 계집에는 밥을 얻어 오기는커녕 개에게 물려 큰 상처만 입고
돌아와 공수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밤낮을 구분 못하고 으르렁거리다 깽깽대다 물을 보면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는 어린 딸을 보고
조신 부부는 또 다시 흐느껴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슬피 울던조신의 아내가 큰 결심을 한 듯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여보! 눈물을 닦아요. 그리고 날 봐요.
우는 마음 아프지만 내 마음도 슬프다오…
부인! 못난 애비 때매 아이들이 고생이 막심하구려!
당신도 마찬가지고…
여보! 내가 50년전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몸매도 끝내 줬었지요?
그랬지, 당신은 선녀와도 같았어…
당신의 쪽 뻗은 흰 다리만 보아도 내 가운뎃다리가 쪽쪽 섰다니까.
입은 의복도 깨끗했고 또 사는 것도 여유가 있었어요.
……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당신과 나누어 먹었고 가지고 있던 옷감으로는 당신과 함께 옷을 지어 입었지요.
그러는 동안 우리는 한 몸뚱이처럼 뗄래야 뗄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지요…
그래,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빚과 이자처럼, 빗과 여자처럼…
그래서 우리에게 인연을 맺어 준 부처님께 매일같이 감사를 드렸었지.
그런데 이제는 해마다 병이 더 심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를 모면할 길이 없게 되었어요.
당신 말이 맞아.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걸식하는 부끄러움은 마치 큰 산더미를 진 것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니까…
사지가 멀쩡한게 동냥을 하려니 쪽팔려서 더 이상 그짓도 못하겠어요.
조신의 아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계속 얘기를 이어 나갔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시달리는 아이들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처지에 무슨 염치로 부부의 정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좋던 얼굴과 어여쁜 웃음도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져 버렸고, 평생토록 변하지말자던 약속도 이제는 물거품처럼 꺼져 버렸어요.
……
당신은 나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나도 당신 때문에 근심이 되는 것이 지금의 우리 처지여요.
당신과 내가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어디서 잘못 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뭇새가 함께 굶어 죽느니보다는 짝 잃은 난새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짝을 찾는 경우가 더 나을 것 같아요.
하기야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서로 버리고 편안한 생활을 할 때만 서로 친하려는 것은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못 되지요.
그러나 어찌하겠어요? 우리는 지금 서로 헤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어요.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다 운명이니 우리 그렇게 알고 서로 헤어집시다.
여보! 그래도 우리가 부부지연을 맺어 반백년이나 살을 맞대고 정을 통하고 살아왔는데, 하루 아침에 헤어져야 한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소. 고생이 되더라도 조금만 더 버티어 봅시다.
서방님!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통수는 얼마나 아름답냐고 옛 시인 중에 이형기 시인은 가운서당 2년차 서책
에서 말했습니다.
반백년 동안 격정을 아낌없이 불살라 온 우리의 사랑은 이제 지고 있는 것입니다. 분분히 떨어지는 가을날의 저 낙화를 보며 결별이 이
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우리가 헤어질 때입니다. 이별을 거부하지 마시어요. 닭의 모가질 비틀어도 새벽은 오는 것이고 이불을 아무리
뒤집어써도 아침은 오고 마는 것이지요.
여보! 당신은 나의 꿈이었고(You are my dream.), 나의 모든 것이었소(You mean everything to me).
지난 50년 동안 당신과 같이 살면서 나는 내 인생의 모든 보람을 느꼈소. 이제 당신과 헤어진다면 나는 내 생의 의의를 상실한 거와 같소!
서방님! 여름에 무성한 녹음도 머잖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꽃답게 죽는답니다. 이것이 우주의 원리이며 무릇 생명 가진 모든 것들
의 피할 수 없는 생멸의 법칙이겠지요! 정말 아쉽겠지만 헤어집시다.
나의 사랑 나의 서방님! 저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사옵니다. 그러나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으로 서방님의 뜨거웠
던, 진실로 소첩의 몸과 맘을 활활 녹여주던 사랑의 진실을 우러르며, 작별의 손을 내어밉니다. 거부하지 말아 주셔요!
흐흐흑, 여보! 기어이 가신다면 헤어집시다…
가슴에 맺히는 그말 한 마디 사내답게 말하리다…
뜨거운 안녕이라고…
조신과 그의 아내는 네 명의 자녀를 둘씩 나누어 맡았다.
저는 고향으로 가겠어요. 아버지가 태수벼슬을 했으니 거기 가서 개겨 보겠어요. 당신은 어디로 가실 거예요?
당신은 친정으로 가고 애들은 외가로 가고, 나는 처가로 가면 좋겠지만 그러면 결국 다시 만나는 거니까 배부른 남쪽 나라로 가겠소.
조신은 가뭇없이 사라지는 아내와 두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얀 손을 흔들며 입가에는 예쁜 미소지었지만 커다란 눈동자에 가득 고
이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남은 건 속절없는 헤어짐이란 말인가. 세상만사가 허망하였다.
다시 세상은 쓸쓸해지고
강물 건너오는
나뭇잎 하나
젊은 날은 잠시
허공에 펄럭이는 그림자고
바람의 잇자욱이고
수없이 和解하는
묘비 끝 머리칼 달빛이지만
나는 머리 숙이고
쉬임없이 헤어지는 하늘 보며
내 뼈를 깊이
체온에 묻을 뿐
차가운 손의 저녁이 긴 그림자로 와서
서늘한 보자기로
마지막
내 이마를 덮을 때까지
다시 세상은 쓸쓸해지고
쓸쓸해지는 만큼
가슴은 비어서
세상을 따스하게 통과할 뿐
- 이언빈, <다시 세상은 쓸쓸해지고>
조신은 견딜 수 없는 허무함에 그만 어어엉, 흐흐흑 하고 서럽게 오열을 터뜨리다가 그만 잠이 깨었다.
방 안에는 켜 놓은 호롱불이 꺼질 듯 가물거리고 밖에는 날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아, 다행히도 꿈이었구나.
조신은 꿈 속에서 모진 고생을 했던 일을 생각하고 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신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관음보살님께 갔다.
심한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보살은 역시 볼웃음만 빙그레 웃고 있었다.
관음보살님! 빙그레 웃지 마세요, 저는 가슴이 이글이글(이글스) 탑니다. (빙그레 이글스의 어원이 여기서 생겼다 함.)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렸던 일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나무관세음보살…
기도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세수를 하려고 시냇물에 얼굴을 비추어 보니 수염과 머리칼이 온통 하얗게 세어 있었
으며 얼굴은 수척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꿈속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한 평생을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살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조신은 꿈속에서 맏아들을 묻었던 해현령으로 가 그곳을 파 보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곳에서 돌부처가 나왔다. 조신은 그것을 물로 깨끗하게 씻어서 근처의 절에다 모셨다.
그리고 서라벌로 돌아가서 지금까지 맡아왔던 명주 땅의 세달사 농장관리인직을 사임하였다.
닭벼슬만도 못한 중벼슬에 내가 연연할 때가 아니다.
그 후 조신은 자기의 전재산을 다 털어 정토사(淨土寺)를 세웠다. 그리고 세상 부귀 영화와 재물에 전혀 뜻을 두잖고 착한 일, 불우 노인
끼니 먹이기 어린 고아 돌보기 등에 힘썼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꿈속에서 자신과 자녀가 당한 쓰라림에서 더욱 그리했을 거라고 한다.
조신이 언제 어디서 하세(下世)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러는 보살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신선이 되어 승천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정확한 것은 다만 보칠산 김신선만이 알거라 한다.
천고의 세월 후, 후인 김신선은 이에 시 한 수를 지어 경계하고자한다.
잠시 즐거울 땐 한가롭더니
어느덧 조심 속에 늙어졌구나
좁쌀밥이 다 되기도 전에
인생이란 한낱 꿈인 줄을 깨달았구나
몸을 닦음에 성실함이 있어야 하는데
홀아비는 미인을 도적은 창고를 꿈꾼다
어찌 가을의 청야몽(淸夜夢)만으로
때때로 눈만 감아 청량에 이르랴
대사님! 대사님의 이야기는 정말 감동 그 자체입니다.
아니 감동이 아니라 소생에겐 하나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하하하, 신진사! 신선이 들려 주는 이야기니까, 신선한 거 아닐까요?
하하, 정말 소생이 대사님과 같으신 분을 뫼시고 아들에게 학문을 닦도록 하게 된 것은 오로지 조상님의 음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명당에 선친을 모신 덕분에 유고치로와 같은 총명한 아들을 낳고 또 이렇듯 거부가 되신 것 아니겠습니까?
자고로 조상의 신명을 박대하고 잘 되는 자손이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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