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우리나라의 주점

醉月 2008. 9. 11. 08:17

 고려 성종 때 최초의 주점 등장
  농경이 시작되기 이전 원시인들은 수렵, 채취가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다.

차츰 지혜가 발달하게 되어  불을 이용하기도 하고 야생  동물을 가축화 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농경생활이 도래하게 된다.
  본격적인  농경생활에  접어들면서부터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집단화하고 거기에서 공동체 의식도 싹트게 된다.

사람이  모일수록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것들을 해결할  중재자를 필요로 하게 되고 나름대로의 규율이
정해지면서 차츰 사회가 규모 있게 형성되어 갔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모이면  술을 즐겼다.  축제 때는  물론, 부족의 의장급들이 모여 정사를  논할 때도 술을 빠지지 않았다.

차츰 술을 마시다보니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것이  주점을 탄생시킨 동기가 아니었나 추측해 볼 수 있다.


  기록으로  나타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술집은  고려  성종  2년(983년)에개점한 개성의 술집이었다. 

성종은 술을 전문으로 파는 술집을 개성에  여러 곳 두었는데 그  이름들이 특이하다. 성례, 악빈,  연령, 옥장, 희빈 등의  아취 있는
이름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문인이나 선비들이 드나들던 고급주점으로 기녀를  두고 술을  마셨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주점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름이 화려한 것으로 보아 북송의 고급주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는데 고려와  많은 접촉이  있었던 북송의 

'동경몽화록'에서는 주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급주점은 대개 기루를 겸하고 있다. 기녀는 매춘부가 아니라 예능자로서 술 마시는  가운데  접대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삼는다. 

고급주점에는 조화나 색실로써 입구를  치레하고 밤이면  등불이 찬란하여 그  사이를 기녀가 오가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선경과 같다.

이런 고급주점이 개봉에는  72군데나 있고 하급인 각점이란  것이 수없이 많다.  또 주점에는 다전사,  주전사 등이 있어서 다주를  데운다. 또  객에게 주문도  하지  않은 과일이나  무를 내놓고  나중에 먹은만큼 돈을  거두는 사나이가  있는가 하면, 

시골손님에게 기녀를  주선하는 시파란  것도 있다. 

하급의 기녀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객에게 와서는  노래를 부르고 팁을 달라고 졸라댄다."


  숙종  7년에는 개성의  좌우 두  곳에 서민들을  위한 술집을  내어 이용하게 했으며 9년에는 각 고을에 주점을 열게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상거래를 하도록 하여 화폐 통용의 유익을 깨닫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랜  습관으로  여전히  곡물로  상거래를  하고  화폐를 이용하지 않게  되자 돈의  유통은 불과  몇 해  가지 못하고,

 인종초에는  돈의 사용이 중지되어 나라의 창고에 넣어두게 되었다.
  물자교류의  불편으로  화폐를 사용토록  하고  유통을  꾀하기  위해 주점도 내었으나  애초 계획은  허사로 돌아가고, 

서민들은 여전히  자기 집에서  술을 빚어 마셨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  집에서 술을 빚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가요 '쌍화점'에서  볼 수 있듯이 "술  파는 집에  술사러 갔더니

그  집 주인이 내  손목을 쥐더라"  하는 대목은 당시 서민을 위한 술집이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사원도 한때는 주점
  화폐의  유통이  중지된 후로  양반층은  여전히  집에서  술을  빚어 마셨고 일반대중은 절에서 빚은 술을  사먹게 되었다.

본래 사원에서는 음주는 물론 술, 누룩의  제조, 판매  등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의 판매는 물론이고

사채놀이까지 하여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당시 고려의 사원은 왕실귀족과  밀착되어 있어 전답과 노비를 가지고 있었고 면세,  면역의  특혜까지  입고  있었다. 

그들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어서 스님들의 행동을 금지 시켜 달라는 상소까지 있었다고 한다.
  '고려사지'에 의하면 "현종 원년에 중과  여승이 술을 빚는 것을 금하였다." 고 하니

이로  미루어 보아  사원에서의 주조업이 얼마만큼  성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스님들은 절을 여관과 같이 여겨  실제로 숙박업을 겸하고, 이것을 계기로 술도 만들어 팔게 되었던 것이다.
  현종 때  스님들에게 술  양조 금지령이 내리기도  하였으나 연등회나 팔관회 등의  행사로  절에는 술이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절에  대한 조주금지령은 유명무실하게 되고 산  속의 유명한 절일수록 언제나 술이 있었고 술맛 또한 일품이었다고 한다.
  고려  문종  때는 나라의  의식용  술을  빚는  양온서라는  직제를 처음으로 두었다. 후에 장례서, 

사온서로 이름이 바뀌어 조선시대에는 태조가 고려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사온서로 이름이 남게 되었다가 내자사로 합쳐졌다.


  문화, 역사가  자연스럽게 흘러 가듯이  주점의 형태도 차츰  특색있는 모습을 나타나기 시작해서

조선말에는 술을 판매하는 것이 정착화되어 있었다.
  술의 대부분은 각 가정에서  빚어지고 있었고 술을 판매하는 곳에서는 소량씩 빚어  일반인에게 판매하는데, 

빚는 사람에 따라 술의  질도 천차만별이었고 그만큼 좋은 술도 많았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내자사에서 누룩  만드는 일과  술 담글 때  쓰는 정제한 곡식, 좋은  물 등을  관장하여 서민의 술과는 

달리 양반들만을 위한  고급주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사실로 볼 때 당시의 반상격차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다양해진 주점형태
  영조 초기에  술파는 계집이 생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전까지는  주모가 있어 자기  집에서 술을  빚어  일반을 상대로 

방에서 술을  팔았는데  이러한 것을 매주가라고 하고 그후  손님과 주인이 내외하는 주점이  출현하였다.

내외술집은 겉으로  보아서는 보통의  가정집이지만  대문 옆에  '내외주가'라고  써서 술병 모양으로  테를 둘러  붙여두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례히  내외술집임을 알아 차렸다.
  내외술집은  그  시절에 행세하던  집  노과부가  생계에  쪼들려 건너방이나 뒷방을 치우고 넌지시 술을 파는 것을 말하는데

비록 술장사는 할지라도 예의는 지키면서 술을 팔았다.  술은 가양주에 안주로는 탕, 묵, 편육  등을 준비해 놓고 손님을 맞았다.


  특이한 것은 술을 잔 수로  계산하지 않고 주전자 수로 계산하는데 손님은 세 주전자 값을 지불한다.

이는 내외술집의 수지를  맞춰주려는 따뜻한 인정으로 한 주전자를 마셔도 꼭 세주전자 값을 지불했다 한다.
  또한 안주인 여자는  외간 남자와 서로 대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므로 안에서 술상만 차려 놓으면 그  집 종이 술 심부름을 했다.

술  심부름하는 아이가 없는 집에서는 마치  중간에 전하는  사람이 있는 듯이  남녀가 대화를 했다. 

그래서 내외술집이란 명칭도  내외의 분별을  하면서 술을 파는  집이란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 흔히 내외술집을 "팔뚝집"이라고도 부른다.
  대중이 모여드는 술집으로는 목로주점이  있는데 이는 큰 길가에서도 볼 수는 있으나 뒷골목이나 으슥한 곳에 더 많았다.
  목로주점의 발달은 시장이  발달하면서 부터인데 이러한 시장은 시골사람들의 술장을  벌여놓는  길고 좁은  목판  같은  탁자상으로 

큰  목로에서는 안주를 늘어놓고 손님을 끌곤 했다.
  목로주점에서는 술 한 잔에  반드시 안주가 딸려나와 안주값을 따로 지불하지 않는데 안주로 너비아니, 술국 등이 준비된다.
  목로주점에서는 앉는 의자가 일체  없기 때문에 누구든 서서 마시는게 상례로 흔히 선술집,  사발 막걸리집,  대포집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걸상에 걸터앉아 탁자에서   마시는  대중주점으로   변하게  되었다.  

70년전 서울의 유명한 목로주점은 동대문 밖 '흔코집' 종로의 '동양루' 안국동의 '곰탕집' 등이다.
  당시에는  약주를 도매하는  술집이  있었는데 이곳이  헌주가이다.  제조장의 규모도 비교적  컸으며 부업도 하였는데 

탁주와 백주가 그것이다.  헌주가의 술 대금은 선금이거나  현금으로, 선금의  100원 정도  걸어 놓고  일정 기간에  한 번씩 계산을 하곤 했다.
  이와 비슷한  규모를 가진  것이 소주가인데 소주의  제조, 판매를 주로  하던 곳으로 서울의 소주가는 공덕리에  50-60호로 규모가 작은 것들을 합치면 100호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 이남에서는 탁주가를 겸하는 일이 많았다.


  헌주가, 소주가가  도매를  주로 하는 술집이라면 병주가는  매를  하는 주점으로  병술집, 바침술집이라고  한다. 

병주가는 문간에 병을  그려 붙이고 중간에  바침술집이라고  표시하는데  이곳에서는 탁주,  백주,  과하주,  소주를
헌주가나  소주가에서  사와 소매를  하였으나  탁주만은  대개  집에서 만들어 판매하였다.
  우리나라는 길가의  30리 정도의  지점마다 장승을 세워  이정표 구실을 하게 하였는데  그곳마다 주막이  있어

도보여행자를  위한 휴식처를  제공하고 갈증 해소는 물론 숙박시설까지 겸하는 서민의 쉼터 역할을 하였다.
  주막은 어디나  술국자를 들고  술항아리에서 술을  떠주는 주파가  있었는데,

주파는 술양푼을 거냉하여 술장에 술을 부어 주는 것이 소임이다.
  주막에서는 외상장부가  퍽이나 인상적인데  벽에는 수많은  작대기가 그어져 있다. 소위 외상장부라 불리는 것이 주막의 벽이었다.

주파나 손님이나 피차간에 글을 모르므로 자기들만의 통용되는 문자가 작대기 표시였던 것이다.
  외상술  한  잔씩 할  때마다  흙벽에는  작대기가 하나씩  그어졌다.  주파도 꼬박꼬박  장부를 챙기지  않았고,

손님  또한 외상장부에  기입하지 않고  슬쩍 도망하는  일도 없었다  한다.

아마도  당시에는 서로  믿고 신뢰하는  상거래가 확실했었나 보다.
  술과 함께 항상 결부되는 것은 여자, 당시에도  젊은 여자가 술상에 나와 앉아 아양도 부리고 노래도 하며 술을 파는 집이 있었는데

이를 색주가라 불렀다.
  본디  서울의  주가에는 여자가  나와  접대하는  일이  없었으나 세종시대에 중국에 가는 사신들의 수행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홍제원에 집단으로 색주가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 뒤로 이를 본따서 서울 성안 여기저기에 색주가가 집단으로 생겼는데

이는 주막의 후신으로 매주에서 매색까지 겸하는 색주가로 변신한 것이다.
  색주가의 문앞에는 용수에 갓모를 씌운 장목을 꽂아 세우고 그 옆에 조그마한 등을 달아 놓아 다른 술집과 구별하게끔 하였다.
  그 외에 소규모이지만 술지게미에  물을 부어 길어낸 막걸리인 모주를 만들어 판매하는 모주가가 있었고,

여름철에는 광주리에 술을  담아 이고 다니면서 파는 광주리 장사도 있었다.
  그  후  일제시대, 해방,  6.25  등을  거치면서 침체되어있던  술집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60-70년대에는 경제발전이 되면서

새로운  주점 형태들이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싸구려 대포집은 낭만과 멋을  찾는 문인들의 자그마한 공간에 불과했는데

이도 오래가지 못하고 대부분 헐리게  되고, 서울 시내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곳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푸짐한  안주와  막걸리 한  사발에 우리의  소박한  정이 담겨 있었다. 

지금처럼 술외상  때문에 얼굴을  찌푸린 적도  없는 우리네의  순수한 마음은 술집에 있어서는 거의 사라져 가고 있는 듯하다.
  갖은 친절과  봉사는 상술에 불과하다.  술외상값 갚을 날짜가  하루만 밀려도 매몰차게 뒤돌아서는 몰인정이 오늘날의 술집 풍토가 되었다.
  마음의 안식을 주던  부담없는 공간과 주파의 손때묻은  막걸리 한 잔이 사뭇 아쉬운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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