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싸움과 다툼, 그리고 단순한 경쟁으로부터 한발 더 나아가 벌어지는 전쟁의 집합이자 축적이다. 사소한 다툼이 크게 벌어져 생사를 걸고 벌이는 큰 싸움이 전쟁이다. 그러나 전쟁은 한 번 벌어지면 웬만해서는 멈출 수 없는 확장성의 본질도 지닌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하다. 그래서 전쟁은 막아야 한다. 그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자체를 잘 아는 데 있다. 전쟁 자체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전쟁을 사전에 막을 수 있고, 싸움의 얼개를 잡아가는 전략의 이해가 있어야 적의 직접적인 위협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다.
우리는 과거의 전쟁을 연구하고 그 속에서 실재화(實在化)했던 싸움의 방법들을 곰곰이 되새기면서 여러 가지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동서고금의 전쟁 자체와 전략을 연구하는 것은 평시에도 중요하다.
손자(孫子)는 중국 춘추(春秋)시대 말기까지의 수많은 전쟁 현장에 섰던 사람이다. 그가 집필한 손자병법은 동서양의 다른 어느 병법서보다 현실적이다. 서양 군사전략의 교범이랄 수 있는 클라우제비츠의 전략론은 관념적이어서 실제 적용 때 해석상의 어려움을 보인다. 프랑스 조미니의 전술론은 자로 잰 듯한 기하학적 분석이어서 기준을 채우지 못하면 역시 실제 적용이 힘들다. 영국 리델 하트는 아예 손자의 병법 개념 ‘간접 접근’을 자신의 근간으로 삼은 손자의 철저한 매니어다. 손자는 그런 점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의 병법가다.
손자병법 하면 우선 “오래된 고전이다” “고리타분하다”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 지금부터 고정관념에 묶여 있는 손자병법을 확 뒤집어 놓는 얘기를 하려 한다. 그렇다고 해서 원문의 본뜻과 전혀 동떨어진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손자병법에서 가장 중요한 어귀를 골라서 원문의 뜻을 가장 쉽고 명쾌하게 전할 것이다. 그리고 동서고금의 중요한 전쟁과 결부시켜 그 뜻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원 뜻을 최대한 응용해서 우리 생활과 가장 밀접한 상황과 연결해보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손자병법이 어떤 성격의 책인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잘 모르면 아무리 손자병법을 많이 읽어도 본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세상의 모든 리더를 겨냥하다
손자병법은 기본적으로 리더, 즉 당시의 왕과 장수를 겨냥한 책이다. 이들이 어떤 결심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나라와 군대 조직은 흥하고 망했다. 백성이나 병사들은 그저 왕과 장수의 결정에 따라서 움직일 뿐이다. 왕과 장수가 잘못 결심하고, 잘못 행동하면 필연적으로 하부 조직은 와르르 무너진다. 그래서 손자병법은 리더를 위한 지침서라 말할 수 있다. 시계(始計) 제1편은 왕과 장수가 결심을 할 때 도와주는 여러 지침들을 기록했다. 작전(作戰) 제2편은 이들이 전쟁을 어떤 식으로 벌여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모공(謀攻) 제3편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이런 형태로 손자병법 전편 13편이 펼쳐진다. 그래서 손자병법은 세상의 리더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책이다.
다음 특징은 공격적이고 도전적이라는 것이다. 그저 방어에만 급급한 소극적인 병법이 아니라 ‘도전(挑戰) 지침서’다. 손자가 살던 중국 춘추시대 말기는 수많은 제후국들이 몰락한 주(周) 왕실을 대신하기 위해 패권 다툼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었다. 제후들은 수동적으로 적을 기다리는 방식이 아니라, 기회가 오면 이웃을 공격하는 이른바 ‘땅 따먹기’에 혈안이었다. 당시에 공자(孔子)를 비롯한 제자백가들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면서 유세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후들은 책상에 앉아 생각을 키운 이들에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29세밖에 안 되는 젊은 친구가 ‘짠’ 하고 나타났다. 손무(孫武)라는 이름의 사나이, 즉 손자였다. 그를 누가 알아 봤느냐? 오자서(伍子胥)였다. 초(楚)나라에서 도망해 오(吳)나라 합려(闔閭) 밑에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던 터다. 오자서는 손무를 합려에게 천거했다. 합려는 손무를 신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거절했다.
그러다 손자의 병법이 적힌 죽간(竹簡)을 본 뒤에 그만 눈이 ‘팍’ 하고 커졌다. 그 안의 내용이 지금까지 전래된 수많은 병서와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공격적이었다. 도전적이었다. ‘내가 찾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당시 도포 자락을 질질 끌며 이 땅 저 땅을 배회하면서 ‘사람다움’을 강조했던 공자와 너무도 다르다. 솔직히 합려의 머릿속은 ‘사람다움’보다는 어떻게 하면 옆 나라의 땅을 빼앗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당시 제후들의 속셈이었다.
합려가 드디어 그 병법을 찾은 것이다. 그는 수십 년간 질질 끌었던 초나라와의 전쟁을 한 방에 끝내버리고 만다. 바로 이것이 손자병법의 위력이다. 이렇게 손자병법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삶의 태도가 아닌, 아주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삶을 사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신중하고 현명하게 경쟁하라
손자병법은 다른 한편으로 매우 신중한 처세를 논하는 병법이다. 자칫 전쟁을 잘못해서 힘을 소진하면 곧바로 옆에 있는 제후들이 공격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자병법은 결정적인 적을 상대하되 언제나 새로운 적들이 공격해 올 수 있음을 염두에 둔, 복잡한 경쟁구도를 조절해 나가는 절묘한 병법이다. 이런 손자병법을 잘 연구하면 험한 경쟁구도 속에서 성공을 거둬야 하는 리더나 가장들은 큰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경쟁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다. 싸움은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데 피할 수 없다면 해야 한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긴 후의 상황이다. 후환이 없어야 한다. 더 큰 피해가 뒤따르지 않아야 한다. 이겨놓고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승리가 아니다. 그런 차원에서 손자병법은 매우 현명하게 싸우고, 매우 현명하게 경쟁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정말 이런 것을 제대로 배울 수만 있다면 이 땅의 리더들은 이제 안심해도 좋다. 더 이상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손자병법이 이 지면을 빌려 여러분을 찾아가는 것이다. 중앙SUNDAY 독자를 위한 무한 서비스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이제부터 마음껏 여러 영역에 응용하기를 바란다.
공자는 문성, 손자는 무성으로 추앙
왜 오늘날에도 손자병법인가? 올바른 선택을 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선상에 있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는 부단히 선택을 강요받는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작게는 자신이나 가정, 크게는 몸 담고 있는 조직이나 나라를 망칠 수 있다. 그만큼 선택이 중요하다. 손자는 바로 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명백하게 그 기준을 제공해준다.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택만 정확하다면 다음 수순은 자연스럽게 풀려나간다. 문제는 선택인 것이다.
중국에서 공자는 문성(文聖), 손자는 무성(武聖)으로 추앙 받는다.
모두 13편으로 구성된 손자병법은 전쟁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무한경쟁 속에서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선택하고, 경제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가를 날카롭게 가르쳐 준다. 그래서 이 책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2500여 년 전의 해묵은 고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펄펄 뛰는 생명체인 것이다. 그래서 조조(曹操)가 손자병법을 줄줄 외고 다녔던 것처럼, 상승장군 나폴레옹이 좌우(座右)의 서(書)로 여겼던 것처럼, 마오쩌둥(毛澤東)이 죽을 때까지 침대 머리맡에 두고 읽었던 것처럼, 빌 게이츠가 “오늘날 나를 만든 것은 손자의 병법”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이 손자병법을 늘 곁에 두고 읽으며 상고(詳考)할 필요가 있다. “손자천독달통신(孫子千讀達通神)”이라고 했다. 손자를 1000번 읽으면 신의 경지와 통한다는 말이다. 본격적인 얘기는 다음 회부터 깊이 나누기로 하자. 물론 기대해도 좋다.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2> 세상은 전쟁터, 어떻게 싸울 것인가 (상)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독립기념일의 이벤트로서 무명의 복서에게 도전권을 준 것이다. 챔피언의 핵주먹에 15회를 버텨내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고 청년은 방심한 챔피언을 먼저 다운시키는 등 선전을 하면서 결국에는 15회를 견딘다.
비록 판정패를 했지만, 인간승리의 주인공인 그에게 마이크가 집중되고 그는 “애드리언!”을 외친다. 아마도 50, 60대 장년들은 이 영화를 잘 기억할 것이다. 무슨 영화일까? 1976년에 개봉된 ‘록키(Rocky)’다. 암울했던 70년대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에 빗대 이 영화를 보면서 열광했다.
영화 ‘록키4’에서 실베스터 스탤론이 열연하고 있다. 영화 ‘록키’의 실제 모델은 헤비급 세계 챔피언 알리와 경기를 한 척 웨프너로 알려져 있다. [중앙포토]
‘록키’는 손자의 눈으로 보면 한심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도 어쩌면 록키의 극적인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와!”하고 박수를 쳤을 것이다. 손자가 영화를 봤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어이구, 한심한 친구….” 아마 이랬을 것이다. 왜냐고? 록키는 손자가 가장 싫어하는 형태의 싸움을 했기 때문이다. 여섯 편의 록키 영화를 보면 하나 같은 공통점이 있다. 마지막 장면이다. 록키가 경기에서 이기든 지든 관계없이 링에 선 그의 눈은 시퍼렇게 멍들고 입은 퉁퉁 부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이다. 손자가 대단히 싫어하는 싸움이다. 이러한 싸움은 가장 피해야 할 싸움이다.
영화 록키의 실제 주인공, 즉 ‘리얼 록키’(Real Rocky)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그가 바로 미국의 복싱선수였던 척 웨프너(Charles Wepner·1939년 출생)라고 한다. 60~70년대 헤비급 선수로 활약했던 선수로서 실제로 당시 헤비급 세계 챔피언 알리와 경기를 했었는데, 15회까지 버티다가 마지막 19초를 남기고 TKO패를 당했다.
이때 그의 코뼈는 부러져 있었고, 두 눈에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이 장면을 감명 깊게 본 무명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이 3일 만에 후다닥 시나리오를 썼고 이로써 그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어쨌든 이렇게 피가 터지는 싸움이 영화나 스포츠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 가운데도 엇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다.
초등학교에서 반장 선거를 치르는 것부터 전쟁이다. 교정 안팎에서 부는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얼마나 거센가. 저 멀리 섬마을의 이장선거로부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판까지 모두 전쟁 일색이다. 학력 위조니, 위장전입이니 하는 등등의 흑색선전도 난무한다.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는 공룡처럼 거대한 대형마트와 전쟁을 벌인다. 대기업일지라도 국내외의 특허전쟁, 판매전쟁을 해야 한다. 불법다단계로 청년들이 무너진다. 불법대출, 부실운영으로 졸지에 은행이 도산한다.
그러고 보니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마치 지뢰밭을 걷는 것과 같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날지, 언제 뭐가 터질지 모른다. 눈을 뜨면 뉴스에 뭔가 뻥뻥 터져 있다. 과연 세상은 전쟁터다. 우리는 이 전쟁터를 피할 수 있는가? 심산유곡에 파묻혀 살지 않는 한 전쟁에서 자유롭기란 불가능하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면 달리 도리가 없다. 경쟁과 다툼의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그저 소극적으로 싸움을 피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싸움을 할 것인가’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적극적인 관점에서 싸움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다. 여기서 꼭 명심할 것이 있다. 이긴 후에도 후회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록키의 승리처럼 상처뿐인 영광은 곤란하다.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는 게 있다. 비록 이겼지만 승리 그 자체가 오히려 재앙인 경우다. 피로스(Pyrrhos)는 기원전(BC) 3세기께 북부 그리스 지방에 있는 에페이로스의 왕이었다.
역사가들은 그를 알렉산더 대왕에 비교할 만한 인물로 다룬다. 기원전 279년 피로스는 2만5000명의 군인과 20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해 헤라클레아와 아스쿨룸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는 군대의 3분의 1 이상을 잃었다. 그는 승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슬프다. 이런 승리를 한 번 더 거두었다간 우리는 망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피로스의 승리다. 상처뿐인 승리라는 뜻으로, 1885년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처음 사용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피로스의 군대는 비록 이겼으나 그 피해가 너무 커서 예전의 상태로 재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로마인들은 그런 허점을 노리고 즉시 후속 군대를 파병했다. 계속 이어지는 전쟁으로 피로에 지친 피로스의 군대는 하나씩 무너져 갔다. 결국 피로스는 기원전 272년 스파르타를 점령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다 아르고스 시(市)에서 전사했다.
이순신은 완승·전승의 유일한 사례
다시 주목하자. 이겼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현명하게 싸우는 게 바람직하다. 우리가 오늘날 무한 경쟁의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싸움인가?
손자병법 전체를 통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지금부터 다룬다. 이것을 놓치면 앞으로의 손자병법 공부가 허사가 될지도 모른다. 손자병법 13편을 필자가 하나하나 그 자수를 세보니 정확히 6109자로 이뤄져 있다. 물론 판본에 따라 조금씩 글자 수는 차이가 있다.
6109자 글자에서 딱 한 글자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다 지워버리라고 한다면 그 한 글자는 바로 ‘전(全)’이다. 그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자보이전승(自保而全勝)’이다. 군형(軍形) 제4편에 나오는 이 말은 ‘나를 보존하고 온전한 승리를 거둔다’는 의미다.
여기 나오는 전승(全勝)에서 전(全)의 의미를 정확히 새길 필요가 있는데, 이때 전의 의미는 ‘완전(完全)’이라기보다는 ‘온전(穩全)’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완전’이라는 의미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갖춰져 있다는 것이지만, ‘온전’이라는 의미는 그 형태가 처음과 같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는 것이다. ‘완전’과 ‘온전’의 미세한 차이다.
그래서 ‘자보이전승’은 ‘나를 보존하고 온전한 승리를 거둔다’고 풀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모든 리더는 ‘자보이전승’을 지상목표로 해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승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히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론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는 쉽지 않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을 보여준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은 7년간의 전쟁을 통해 23번 혹은 26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했다. 그런데 전부 다 이겼다. 이것은 ‘완전’한 승리를 뜻한다. 빠짐없이 모두 이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바로 단 한 척의 전선도 적에게 분멸되지 않았다고 하는 ‘온전’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계사년(1593년) 4월 6일자 이순신의 장계에 보면, 웅포해전에서 개펄을 빠져 나오다가 부딪쳐 통선 한 척이 전복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장면을 본 이순신은 “거적을 깔고 엎드려 벌을 기다립니다”고 적었다. 배 한 척이 전복된 것조차 죄스럽다고 하는 말이다.
이순신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어쨌든 이것이 7년 전쟁 전체를 통해 이순신 장군 휘하의 배가 손상당한 유일한 기록이다. 이것이 ‘온전한 승리’, 즉 ‘전승’이다. 심지어 13척으로 133척을 상대했던 명량대첩에서조차 단 한 척의 전선도 적에 의해 격침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이순신은 완전한 승리, 온전한 승리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이다.
이순신은 손자병법에 정통했고 그의 ‘완전’과 ‘온전’의 승리전법은 손자병법의 원리에서 나왔으며, 때에 따라서는 그 수준과 경지를 넘어섰다. 이런 장군은 세계 역사를 통틀어도 찾기 어렵다. 칭기즈칸은 20번의 싸움에서 2번을 패했고, 나폴레옹은 23번의 싸움에서 4번을 패했으며, 한니발은 5번의 싸움 중 자마전투에서 한 번을 패해 전멸했다. 이들은 모두 뛰어난 리더임에는 틀림없지만 이순신과 같이 ‘완승’과 ‘전승’을 동시에 이루지는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모두가 이순신보다 한 수 아래다.
러일전쟁 당시 발틱함대를 깨뜨려 일본 사람으로부터 성장(聖將)으로 추앙받고 있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이런 이순신을 평(評)하면서 “넬슨은 군신(軍神)이 될 수 없다. 군신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순신밖에 없다”고 했다. 제대로 본 것이다.
‘전(全)’의 사상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다음 시간에 계속 얘기를 나누기로 하자.
부전승은 공짜 아니다 … 그 뒤엔 보이지 않는 ‘힘’ 있다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3> 세상은 전쟁터, 어떻게 싸울 것인가(중)
고구려 유민이었던 고선지 장군은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토번을 공략하며 부전승의 성공 사례를 만들었다. 사진은 KBS가 지난해 방영한 ‘다큐멘터리 고선지 루트’의 한 장면. [KBS 제공] |
모공(謀攻) 제3편의 첫머리는 이렇다. ‘용병지법 전국위상 파국차지 전군위상 파군차지(用兵之法 全國爲上 破國次之 全軍爲上 破軍次之)’. ‘용병의 법은, 나라를 온전하게 함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고, 나라를 파괴하는 것을 그 다음으로 여기며, 군(1만2500명 규모)을 온전하게 함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고, 군을 파괴하는 것을 그 다음으로 여긴다’. 여기서 잘 보면 ‘전(全)’과 ‘파(破)’가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다. 온전한 상태로 목적을 이루면 가장 좋은 것이고, 깨어진 상태로 목적을 이루면 좋지 않다는 말이다. 비록 이겼다 하더라도 깨진 상태로 이기면 소용없다. 말 그대로 하책(下策)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어귀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우리가 외우고 있을 정도다. ‘시고백전백승 비선지선자야 부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야(是故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그러므로 백번 싸워서 백번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백번 싸워서 비록 백번 다 이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좋지 않다는 얘기다. 백번 싸우는 과정에서 상대방도 깨어지지만 나도 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전(全)’의 파괴다. 그래서 좋지 않다. 여기서 그 유명한 ‘부전승’(不戰勝)이란 말이 나왔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원래 부전승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고? 정확하게 부전승이라고 연결된 말은 없고 단지 위 어귀 뒷부분 ‘부전이굴인지병’(不戰而屈人之兵)에서의 ‘부전’(不戰)과 앞 어귀 ‘백전백승’(百戰百勝)에서의 ‘승’(勝)을 조합해 신조어인 ‘부전승’(不戰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부전승은 오늘날 중국어 사전에는 ‘부전이승’(不戰而勝)이라고 명시돼 있다. 영어로는 ‘walkover’라고 표현된다. 우리말 백과사전에는 ‘추첨이나 상대편의 기권 따위로 경기를 치르지 아니하고 이기는 일’로 설명하고 있다. 단편적으로 표현된 사전적인 이 의미로는 부전승의 의미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역사상 부전승을 잘했던 사람이 적지 않다. 우선 한나라의 유방을 도와 천하를 도모했던 한신(韓信) 장군이다. 한신은 초나라와 위나라를 차례로 격파한 후 20만 대군의 조나라와 맞붙었는데, 이때 불과 1만 명으로 그 유명한 배수진(背水陣) 전략을 구사해 이들마저 격파했다. 그리고 다음 목표로 연나라와 제나라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때 한신은 조나라의 패장(敗將)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를 극진히 대우하면서 그에게 다음 전쟁에 대해 한 수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좌거는 “패장은 병법을 논하지 않는 법”(敗軍之將不語兵)이라고 말하며 사양했다.
거듭된 간청을 못 이긴 이좌거는 한신에게 한마디 했다. “옛말에 ‘슬기로운 사람도 천 번의 생각에 한 번의 실수가 있을 수 있고(千慮一失),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의 생각에서 하나는 얻을 수 있다고 했다(愚者千慮必有一得)’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치광이 말일지라도 성인은 가려서 듣는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이좌거가 한 말의 핵심은 이렇다. 전쟁을 즉시 중단하는 대신 조나라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배불리 먹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신의 은덕이 사방에 소문이 날 것인데, 바로 그즈음에 말 잘하는 사람을 뽑아 연과 제에 보내 군대의 무용을 자랑해 겁을 먹게 하라는 것이다. 한신은 이좌거의 말대로 행했는데 과연 연나라가 지레 겁을 먹고 손을 들었다. 이것이 바로 싸우지 않고도 목적을 달성한 부전승이다.
다음 목표는 제(齊)나라였다. 그런데 제나라는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병법의 시조라 일컫는 강태공이 봉읍을 받아 세운 나라였고, 자연조건이 좋은 굉장히 부유한 나라였다. 삼국지에 나오는 원소의 근거지였고, 칭기즈칸이 호라즘을 공략하기 위해 가장 중요시할 만큼 군사적 요충지이자 식량 창고였다. 무엇보다도 제나라는 70개의 강력한 성을 갖추고 있었다. 무력으로 공격하면 많은 피해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강한 제나라를 공략하는 대목에선 한신이 아니라 유방(劉邦)이 한발 더 앞서갔다. 말 잘하는 사신 한 명을 보내 세 치의 혀로 싸움 없이 고스란히 70개의 성을 접수해 버린 것이다. 어찌 된 일인가? 이미 한신의 소문은 제나라에도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한신보다도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유방은 이것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사신을 보내어 공갈을 치고 엄포를 놓았다. “내 부하 한신이 곧 당신의 제나라를 정복하러 올 것이니 미리 항복하라. 그러면 당신의 나라는 그대로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이고, 항복이요!” 바로 부전승이다. 한신을 잘 이용한 유방의 한 차원 높은 부전승이다.
부전승을 멋지게 보여준 또 한 사람의 장군이 있다. 바로 당나라에서 활약했던 고구려 유민 고선지(高仙芝) 장군이다. 그는 727년 파미르 고원을 넘어 토번(吐蕃)을 정복할 때 회유와 설득을 통해 72개의 크고 작은 소국들을 싸움 없이 접수했다. 부전승의 극치다.
적의 꾀 베는 게 싸움의 첫 단계
여기서 분명히 정리해야 할 것이 있다. 많은 사람이 부전승을 지독하게 오해하고 있어서다. 부전승이라고 해서 ‘싸움’을 아예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 부전승의 진정한 의미를 몰라서 빚는 오해다. 부전승도 역시 ‘싸움의 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부지런히 부전승을 시도하되 부전승에 실패할 때는 곧바로 싸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제부터 논하는 싸움의 네 단계를 주의 깊게 읽기 바란다. 부전승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바로 이 싸움의 네 단계를 잘 이해해야만 한다. 모공(謀攻) 제3편에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상병벌모 기차벌교 기차벌병 기하공성(上兵伐謀 其次伐交 其次伐兵 其下攻城)’. ‘가장 좋은 병법은 적의 꾀를 치는 것이며, 그 다음은 적의 동맹관계를 치는 것이며, 그 다음은 적의 병력을 치는 것이며, 가장 하책은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벌모(伐謀), 벌교(伐交), 벌병(伐兵), 공성(攻城)이 차례로 나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싸움의 네 단계다.
여기서 가장 좋은 것은 벌모(伐謀)를 달성하는 것이다. 벌모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풀면 ‘적의 꾀를 베어버린다’는 것이다. 상대로 하여금 내 말에 절대 순종해 나를 거역하려는 마음조차 먹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먹음직한 떡을 손에 든 친구 녀석이 있다고 하자. 배고픈 차에 잘됐다. “떡 내놔!” 이 한마디에 녀석이 순순히 떡을 내놓는다면? 바로 벌모를 달성한 것이다. 싸우지 않고 깨짐이 없이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가장 바람직한 단계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이런 벌모가 가능할 것인가?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힘(power)에 의한 벌모다. 힘은 여러 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상대에게 겁을 주는 물리적인 힘뿐만 아니라 권력(權力)이나 금력(金力)도 힘이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이런 힘 앞에 약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힘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일생을 보내는 것이다.
둘째는 이익(profit)에 의한 벌모다. 사람은 결국 ‘이익’을 좇아 움직인다는 것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기 전에 진(秦)나라 왕이었을 때 “이 사람과 교유(交遊)하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말하곤 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법가 철학의 대부인 한비자(韓非子)다. 그는 사람을 움직이는 동인(動因)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이익(利益), 권위(權威)와 이상(理想), 즉 비전(vision)이다. 여기서 한비자는 ‘이익’에 무게중심을 더 두었고 ‘이익’이야말로 사람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이라고 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도, 심지어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결국 ‘이익’으로 엮인 관계라고 말할 정도다.
셋째는 ‘감동’(感動)에 의한 벌모다. 사람의 가장 깊은 곳을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을 저절로 움직이게 하는 데 감동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출중한 인격에 의한 감동, 훌륭한 서비스에 의한 감동 등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다. 그런데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속성으로 인해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벌모(伐謀)는 가장 바람직한 단계지만 그것을 실천하기란 참 어렵다. 조직을 이끄는 세상의 모든 리더는 ‘무엇이 사람을 저절로 움직이게 만드느냐’ 하는 벌모 차원에서 ‘힘’ ‘이익’ ‘감동’에 대해 깊이 사유(思惟)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음 회에는 나머지 세 단계인 벌교(伐交), 벌병(伐兵), 공성(攻城)을 살펴보면서 부전승의 진정한 의미를 깨쳐 보기로 하자.
비스마르크 통독 비결, 원대하고 치밀한 벌교전략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4> 세상은 전쟁터, 어떻게 싸울 것인가(하)
공성전(攻城戰)은 승리를 하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이다. 사진은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예루살렘을 둘러싼 공성전 장면이다. |
이들을 향해 성 안의 병사들은 뜨거운 물과 기름을 쏟아붓는다. 성벽에 걸쳐진 사다리를 걷어찬다. 수많은 병사들이 성벽을 타고 오르다가 개미처럼 떨어진다. 온몸에 불이 붙어 이리저리 뒹굴며 비명을 지른다. 검붉은 화염(火焰)과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뒤덮는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이 따로 없다.
자, 이러한 장면은 어디에서 볼 수 있는가? 그렇다. 공성전(攻城戰)에서 볼 수 있다. 2005년 제작된 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에는 공성전 장면이 아주 잘 묘사돼 있다. 영화는 1187년 제2차 십자군전쟁 당시 무슬림 세계의 맹주 살라딘(Saladin)의 공격을 받아 끝까지 저항하는 예루살렘 성의 숨 막히는 공방전을 그렸다.
2011년에 나온 한국 영화 ‘평양성’은 나당(羅唐)연합군이 고구려를 삼키기 위해 마지막 남은 보루 평양성을 공격하는 내용을 담았다. 제목이 평양성인 만큼 그럴듯한 공성 장면을 많이 넣었다. ‘킹덤 오브 헤븐’이나 ‘평양성’에서 느끼게 되는 건 공성전은 참 어렵고 승패와 관계없이 피아가 많은 피해를 본다는 사실이다.
서희 ‘강동 6주’ 담판, 伐交 성공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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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서 살펴본 최악의 싸움인 공성은 마지막 단계다. 가장 나쁜 선택인 공성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그 앞 단계인 벌교와 벌병에 대해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벌교(伐交)는 상대방의 교우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상대방을 감싸고 있는 동맹관계를 끊어버려 고립시키는 것이다. 떡을 들고 있는 녀석에게 “떡 내놔!”라고 점잖게 말을 했는데도 녀석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다. 순순히 말을 들을 태도가 아니다. 뭔가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친구들을 믿고 있는 것이다. 비록 녀석은 약할지라도 녀석의 친구들 중에 힘깨나 쓰는 동네 애들이 많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주변 친구들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벌교다. 벌교에는 대체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위협(威脅)’이다. 주변 친구들에게 위협을 주어 그 녀석과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 녀석과 같이 놀면 나중에 엄청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위협과 공갈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 방법으로 떨어져 나간다. 두 번째는 ‘회유(懷柔)’와 ‘설득(說得)’이다. 이 방법을 시도하려면 어쩌면 떡 한 조각보다도 더 많은 돈이 들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비용 면에서 볼 때 공성보다는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보다 현명한 방법이 있다면 주변 애들을 떨어져 나가게 하는 동시에 가능하다면 그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진(秦)의 전국 통일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합종연횡(合從連橫)이나 세 치의 혀로 거란의 80만 대군을 상대했던 서희(徐熙)의 담판(談判)은 벌교의 대표적인 예다.
사회주의와도 손잡은 철혈재상
여기서 우리는 눈을 서방으로 돌려 철혈재상(鐵血宰相)이라 불린 비스마르크(Bismarck)의 외교술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비스마르크는 오늘날 독일 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이른바 ‘외교의 달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연방만이 유일하게 독일의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 통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되면 아무리 정적(政敵)일지라도 자기 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사회주의자를 혐오하면서도 1863년 독일 최초의 사회당인 독일노동자연맹을 창설한 페르디난트 라살과도 친분을 쌓았다.
독일 통일을 이루기 위해 프로이센이 상대해야만 하는 주변국은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였다. 그는 먼저 오스트리아를 겨냥했다. 당시 헝가리를 통치하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에 항거하는 헝가리 혁명주의자들과도 깊숙이 접촉해 오스트리아에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러시아와는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외교술을 발휘했는데, 1863년 1월 폴란드에서 항거가 발생하자 비스마르크는 재빨리 러시아 편을 들어 지지했다. 훗날 독일 통일의 든든한 후원자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프랑스 역시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외교술을 발휘했다. 1865년 프랑스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함으로써 우의를 다졌고, 나폴레옹 3세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강력한 이웃인 러시아와 프랑스에게서 내정불간섭을 보장받자 드디어 비스마르크는 1866년 6월 17일 선전포고를 하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보오전쟁(普墺戰爭)이다.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했다. 이때 프로이센의 군부는 오스트리아를 계속 공격해 전멸시킬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 경우 다른 나라의 개입이 있을 것을 우려한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마무리했다.
이제 비스마르크의 유일한 걸림돌은 프랑스였다. 1870년 공석 중인 스페인 왕위 계승문제가 발생하자 비스마르크는 의도적으로 프랑스가 꺼리는 인물을 지지하고, 7월 14일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한다. 보불전쟁(普佛戰爭)이다. 비스마르크의 외교적 수완으로 프로이센의 우군이 된 남부독일국가들이 즉각 전쟁에 가담했고 결국 프랑스는 무릎을 꿇었다. 1871년 1월 18일 포성이 아직도 그치지 않은 가운데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빌헬름 1세를 황제로 한 독일 통일이 선포되었다. 독일의 통일은 외교의 달인 비스마르크에 의한 치밀하고도 원대한 벌교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아니!” 주변의 친구들을 모조리 제거했는데도 녀석이 버티고 있다. 이제 말로 하는 단계는 지난 것 같다. 그래서 이어지는 수순이 세 번째 단계인 벌병(伐兵)이다. ‘병력을 베어버린다’는 의미다. 군사를 보내 한판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이 단계에 접어들면 개인적으로는 싸움(duel)이 되겠지만 국가적으로는 전쟁(war)이 된다. 이때부터는 눈에 보이는 직접 피해가 따른다. 녀석이 움켜쥐고 있는 떡에도 피가 묻는다. 내가 빼앗더라도 피가 묻고 흙이 묻은 떡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현명한 리더, 굴복보다 심복 모색
이렇게 벌병을 했는데도 피멍이 들고 코피가 터진 녀석이 끝까지 버티고 있다. 그것도 잘 준비된 곳에 들어가서 마지막까지 항전하기 위해 버티고 있다. 지독한 녀석이다. 뭔가 단단히 각오하고 있는 게다. 그래서 이제 어쩔 수 없이 최악의 단계로 가게 된다. 바로 마지막 단계인 공성(攻城)이다. 공성까지 갈 경우 대부분 자존심 싸움이 많다. 이쯤 되면 돈이 문제가 아니다. 돈이 더 들어가더라도 끝까지 법정소송까지 가는 사람들은 바로 이 공성의 단계에 갔을 때다. 갈 데까지 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과 맞붙어 싸운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요행히 이겼다 하더라도 이런 승리는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와 같다. 상처뿐인 승리, 상처뿐인 영광이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이것만은 피하는 게 현명한 싸움의 방식이다. 손자도 모공(謀攻) 제3편에서 말하기를 공성은 최후의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을 때 하라고 호소하고 있다. 세상에 어리석은 사람은 공성까지 가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다.
두 번째 단계인 벌교까지만 잘해도 ‘깨어짐’ 즉 ‘파(破)’를 피할 수 있는 ‘전(全)’을 달성할 수 있다. 그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인 벌모와 벌교까지가 진정한 의미에서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부전승(不戰勝)’의 단계라 할 수 있다. 전략가는 벌모·벌교 단계에서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이것을 잘하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략가라 할 수 있다. 전략가도 급이 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벌모·벌교를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벌병 그리고 최후의 선택인 공성까지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부전승도 싸움의 연속선에 있는 것이다.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현명하게 싸우는 방법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이 있다. 굴복(屈服)과 심복(心服)에 대한 것이다.
현명한 리더는 굴복보다는 심복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굴복은 힘이 약할 때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특히 회사나 조직에 속한 사람들은 입이 포도청이라 대체로 굴복의 자세로 살아가기 쉽다. 따라서 힘이 강해지거나 상황이 바뀌면 언제라도 다시 고개를 쳐들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항복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심복은 다르다. 심복은 심열성복(心悅誠服)의 준말로서 충심(衷心)으로 기뻐하며 성심(誠心)을 다하여 순종(順從)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항복을 거둘 때 진정한 승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비스마르크가 보오전쟁에서 이기고도 오스트리아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굴욕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심복의 의미를 잘 알았던 비스마르크다운 행동이다. 나라의 정치를 책임지고 있는 위정자들이나, 나라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기업가들이나, 사회를 이끌고 있는 각계각층의 리더들은 이런 심복의 승리를 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리더들이 항상 떨치지 못하는 고민일 것이다. 손자가 말한다. 싸우지 마라.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된다면 반드시 이겨라. 이기면 해적도 영웅이 되고 해적선도 전설이 된다. 굴복보다는 심복을 얻어라. 그러나 명심하라. 때에 따라서는 지는 것이, 아니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역설적(逆說的)인 사실을.
지휘관의 오만이 ‘토이토부르거 숲 참패’ 불렀다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5> 리더의 다섯가지 성격 결함
서기9년 토이토부르거 숲에서 벌어진 바루스 전투의 상상화. 게르만족의 장수 아르미니우스가 로마군을 짓밟고 있다. [칼크리제 바루스전투 박물관]
“세상에 이럴 수가! 우리가 미개한 민족에게 당하다니!” 로마인들이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끔찍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서기 9년, 로마의 정예 3개 군단이 게르만 민족의 한 종족인 헤루스케르족에게 전멸당했다.
토이토부르거(Teutoburger)라는 울창한 숲 속에서 벌어졌다고 해서 토이토부르거 숲 전투라고 불리는 전투에서의 참패였다. 이 전투는 칸나에 전투(The Battle of Cannae)에서 한니발에 의한 로마군단의 전멸, 카레 전투(The Battle of Carrhae)에서 파르티아군에 의한 크라수스 로마군단의 전멸에 이어 로마의 3대 참패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서기 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퀸틸리우스 바루스(Publius Quinctilius Varus)를 게르마니아 총독에 임명했다. 바루스는 성격적인 결함이 있었다. 오만하고 조급했다. 그리하여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식민지인 게르만족을 얕잡아 봤다. 서기 9년, 10월 초 라인강 유역에 있는 게르만족이 폭동을 일으켰다. 바루스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직접 17·18·19군단, 약 2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했다. 그런데 그들 앞에는 토이토부르거의 울창한 숲이 가로막고 있었다. 여기서 바루스는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감시정찰대를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적정이 불확실할 때는 미리 감시정찰대를 보내어 자세히 살피는 것은 군사 상식이다.
그런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전 부대를 숲 속으로 밀어넣었다. 왜 그랬을까? 상대를 너무 얕잡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빨리 폭동을 진압해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동안 로마군단은 넓은 지역에서 기동성을 최대한 이용하는 전투대형으로 전투를 해왔는데 울창한 숲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게르만족은 숲 속에서 단단히 잠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동조차 어려운 로마군단을 향해 창을 던지고 활을 쏘며 짧은 시간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숲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뒤죽박죽이 된 로마군은 결국에는 그 숲을 벗어나지 못하고 전멸하다시피 했다. 바루스와 고위급 장교들은 살아남았지만, 잔인한 적에게 포로가 되는 것이 두려워 모두 자신의 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당시 역사가인 벨레이우스는 “거의 마지막 병사까지 마치 가축을 도살하는 것처럼 잔인하게 적에게 전멸을 당했다”고 기록했다. 이 서늘한 참패 소식을 들은 아우구스투스는 여러 달 동안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았고 머리를 문설주에 몇 번이고 쥐어박으면서 이렇게 절규했다고 한다. “바루스여! 바루스여! 내 군단을 돌려다오!” 이 전투 결과 로마는 엘베강 서쪽의 게르마니아 공략을 단념했고, 로마의 대(對)게르만 정책은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단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 잘못된 성격 때문에 자신은 물론 부대 전체가 몰락의 길로 갔을 뿐 아니라 역사의 흐름까지도 바뀐 것이다. 리더의 성격은 이렇게도 중요한 것이다.
제 성질 못 참아 죽임 당한 여포·장비
손자병법 구변(九變) 제8편에 보면 리더가 가질 수 있는 다섯 가지의 위험한 성격(將有五危)에 대해 나온다. 리더가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되면 그 자신은 물론 그가 책임을 맡고 있는 조직도 함께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에 혹시 내게도 이런 위험한 성격이 없는지 조심스럽게 살펴 볼 일이다.
첫 번째 성격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성격이다(必死可殺). 이른바 저돌형(<8C6C>突型)이다. 이런 성격의 사람은 그로 인해 실제로 죽을 수도 있는 위험성이다. 삼국지의 여포(呂布) 같은 리더가 바로 이런 유형이다. 여포는 은빛 갑옷에 활을 메고 적토마를 탄 모습이 가히 ‘장수 중에는 여포’ ‘날아다니는 장수(飛將)’라 불릴 만큼 용맹한 장수였다.
그러나 여포는 용맹하기만 했지 지모가 없었다(勇而無謀). 198년에 있었던 하비 전투(下<90B3>戰鬪)에서 여포는 조조와 유비의 군대를 맞아 잘도 버텼다. 그러나 금주령(禁酒令)을 어긴 부하들을 매질하며 호되게 꾸짖다가 결국 그 부하들에 의해 밧줄에 묶여 조조에게 끌려가 처형을 당하게 된다. 무모(無謀)하게 용맹하거나, 죽으려고 환장(換腸)을 한 사람은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라.
두 번째 성격은, 위기를 맞게 되면 살아남기 위해 눈치를 살피며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성격이다(必生可虜). 이른바 보신형(保身型)이다. 이런 성격의 사람은 실제로 상대방이 의도적으로 파놓은 함정에 빠지기 쉽다. 삼국지의 위연(魏延)과 같은 유형이다. 후세에 위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자신의 이익에 따라 주인을 여러 차례 바꾼 사실은 그의 성격적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위연은 처음엔 형주목 유표(劉表) 휘하에 있었고, 유표 사후 형주를 물려받은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려 하자 이에 반발해 장사태수 한현(韓玄)에게 갔다. 유비와의 전투에서 돌아온 황충(黃忠)에 대해 ‘관우(關羽)를 살려주었다’는 이유로 한현이 역모 혐의를 씌워 황충을 죽이려 하자 이에 분노한 위연은 한현을 벤 다음 유비에게 귀순했다. 이때 제갈량은 유비에게 “위연은 반골(反骨)의 상입니다. 게다가 자신이 모시던 군주를 죽이고 왔으니 중용하지 마십시오”라고 진언했다. 하지만 유비는 위연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유비와 제갈량이 죽자 결국 배반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마대(馬岱)에 의해 참수되었다. 역사적으로 배반자의 최후는 언제나 비참하다.
세 번째 성격은, 급하게 화를 내는 성격이다(忿速可侮). 이른바 다혈질형(多血質型)이다. 이런 유형은 성격 때문에 모멸을 당할 수 있다. 2011년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리더의 위험한 성격 다섯 가지(將有五危)를 바탕으로 ‘리더로서 조직에 해가 되는 요소는 무엇인가’라는 설문조사를 했다. 그랬더니 1위가 급하게 화를 내는 성격(忿速可侮)으로 나왔다. 그만큼 직장인들이 화를 잘 참지 못한다는 얘기다. 스트레스가 많다고 하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습관적으로 화를 내고 있는 측면도 있다.
화를 내면 여러 가지로 나쁜 일이 생긴다.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張飛)는 장판교에서 조조의 대군을 호령(號令)으로써 물리친 용감한 장수였다. 그러나 221년에 유비를 좇아 오(吳)나라를 공격하려 출발할 즈음, 부하 장수의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참 허무하다. 장비는 범강과 장달에게 죽은 관우를 애도하기 위해 사흘 안에 흰색 깃발과 10만 벌의 흰 갑옷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부하들이 그 지시가 너무 촉박하다고 반발하자 화를 버럭 내면서 이들을 나무에 묶어 50대씩 때린 것이다. 결국 앙심을 품은 이들은 장비가 자는 틈을 타서 죽여 버렸다. 우리 속담에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얘기다. 울분을 참지 못해 차마 못할 짓을 저지르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사람의 감정이 극도로 상하게 되면 극단적인 행동도 나올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화는 중독성이 있다. 화를 내면 낼수록 점점 잦아진다. 세상의 모든 리더들이여, 혹시 당신은 습관적으로 화를 내고 있지는 않은가? 화를 내면 상대방도 상하지만 나도 상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라.
네 번째 성격은, 지나칠 정도로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는 성격이다(廉潔可辱). 이른바 결벽형(潔癖型)이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놀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런 성격은 가히 욕을 당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청렴결백(淸廉潔白)하게 사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결벽증(潔癖症)에 가까울 정도로 처신하게 되면 정작 사람이 필요할 때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다섯 번째 성격은, 아랫사람에 대한 사랑에 분별이 없는 성격이다(愛民可煩). 이른바 유약형(柔弱型)이다. 잘못한 줄 뻔히 알면서도 자식에게 따끔한 소리 한 번 못하고, 부하에게 쓴소리 한마디 못 하는 성격이다. 이런 성격으로 인해 걱정거리가 생기고 번거로울 수 있다. 자식이 잘못할 때는 따끔하게 혼을 내 줄 수 있어야 한다. 부하가 잘못할 때는 지혜롭게 훈계를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나중에 더 큰 잘못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사랑은 결국 사람을 망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사람의 성격, 어떤 것보다 직업에 의존”
지금까지 리더를 망치는 다섯 가지 성격에 대해 알아봤다. 잘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다섯 가지 성격 중에 한두 가지는 갖고 있다. 아니, 서로 조금씩 섞여 있기도 하다. 문제는 극단에 치우치는 경우를 경계하는 것이다. 논어 선진편(先進篇)에서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로 이를 지적하고 있다.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말이다. 존 러스킨은 “사람의 성격은 어떤 것보다도 그 사람의 직업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고 갈파했다. 참 일리가 있는 말이다.
손자는 말했다. 이 다섯 가지 성격은 리더에게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조직에 재앙이 되며, 결국에는 그로 인해 조직이 무너지고 리더가 죽게 되는 결정적인 결함이 되기 때문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했다. 이 다섯 가지 성격 외에도 리더가 조심해야 하는 성격이 많다. 교만한 성격, 과욕을 부리는 성격, 질투하는 성격, 매사에 부정적인 성격 등이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내면(內面)의 소리를 듣자. 혹시 아는가, 당신의 그 잘난 ‘성질’ 때문에 어디선가 피눈물 삼키는 소리가 나오고 있을지를.
줄루족 ‘이산들와나 전투’의 압승 비결, 전투력+전술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6> 창으로 총을 이기는 奇正전략의 비밀
제임스 매코널이 1973년에 그린 ‘이산들와나 전투’의 상상화. 1879년 1월 줄루족은 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신식 무기로 무장한 영국군 1800명을 쫓아냈다. [노병천 제공]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창이 총을 이겼다!” 영국 사람들은 이 믿기지 않는 사실에 귀를 의심했다.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 날아온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1879년 1월 21일 오전 9시 아프리카 남부 이산들와나(Isandlwana) 평원을 가득 메운 4만 명의 줄루(Zulu)족 전사들이 1800명의 영국군을 덮쳤다. 이산들와나 전투였다. 엄청난 병력 차이에도 영국군은 오히려 반겼다. ‘짧고 비용이 덜 드는 승리의 기회’로 여겼다. 신식 무기로 한꺼번에 다 해치우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후 2시쯤 끝난 전투의 결과는 상식을 뒤엎었다. 줄루족의 압승이었다. 영국군은 1329명(원주민 기병대 471명 포함)의 전사자를 내고 쫓겨났다. 도리깨ㆍ방패로 무장한 ‘미개한 흑인 군대에 대영제국이 패배했다’는 사실에 영국은 물론 유럽 대륙이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전투의 중심에는 한 명의 탁월한 리더가 존재했다. 바로 ‘검은 나폴레옹’이라고 불리는 샤카(Shaka)였다. 이산들와나 전투는 샤카가 죽은 지 50년이 지난 후에 줄루족의 마지막 왕이 되는 케츠와요(Cetewayo)에 의해 치러졌지만 승리의 뿌리는 샤카에게 있었다. 그가 모든 기반을 닦아 놓은 덕택이었다.
샤카는 무슨 준비를 했는가? 먼저 그는 개인의 전투력을 향상시켰다. 이를 위해 모든 전사들의 발바닥을 단련시켰다. 전사들이 땅의 형태와 관계없이 어디를 가든 맨발로 다니며 발바닥을 단련하게 했다. 나중에 그는 부하들에게 하루에 80㎞까지 맨발로 달리게 하고, 가시가 깔린 땅에서 훈련을 실시했다. 둘째, 줄루족의 기본 무기인 창을 개량했다. 샤카 이전의 창은 던지는 용도로만 사용했다. 한 번 던져버리면 다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샤카는 손잡이가 더 무겁고, 길이는 더 짧고, 날이 평평하면서 날카롭고, 적을 찌르기에 아주 좋은 창을 개발한 것이다. 셋째, 나무와 쇠가죽으로 된 방패를 개량했다. 전투 때 들고 다니기 쉽게 크기를 줄인 것이다.
빼앗은 영국군 무기 못 써 5개월 뒤 패배
샤카는 개인의 기초전력을 잘 다진 뒤에 집단이 잘 싸울 수 있는 체제를 개발했다. 집단 통제력을 높이기 위해 나이에 따라 연대조직을 편성했다. 그리고 독특한 표준 전술을 개발했는데 임폰도 잔코모(impondo zankomo)라고 불리는 ‘황소의 뿔’ 전술이다. 개인 기술과 조직 기술에 이어 시스템적 기술 우위를 창안한 것이다. 황소의 뿔 전술은 주력부대가 위치하는 황소의 가슴, 바로 그 뒤에 위치하는 예비대 개념의 황소의 옆구리, 그리고 최정예 부대로 적의 측면이나 후방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황소의 뿔로 구성된다. 샤카의 전사(戰士) 훈련 프로그램을 보면 먼저 개인의 역량을 높인 뒤 집단의 힘을 최대한 높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방식은 경영일선의 모든 리더가 응용할 수 있는 좋은 방식이라 평가할 만하다. 먼저 개인역량을 최대로 높이려는 사내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 개인역량을 높이는 방식은 정(正)의 영역에 속한다. 기본을 튼튼히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개인역량을 바탕으로 집단의 전술을 창안한 것은 기(奇)의 영역에 속한다. 결국 샤카는 기정(奇正)의 전략을 통해 창으로 총을 이긴 것이다.
한 명의 천재가 종족을 살렸다. 전투 이후 줄루족은 영국군과 비교해 손색없는 장비를 갖췄지만 이후 5개월 후 전력을 증강시킨 영국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노획한 소총과 대포를 제대로 쓰지 못해서다. 줄루족은 결국 13개 소국가로 분할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것을 보며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그렇다. 아무리 기(奇)가 많아도 전체적으로 정(正)의 힘이 약하면 승리하기 어렵다는 교훈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기정(奇正)에 대해 논의해 보자.
손자병법 병세(兵勢) 제5편에 보면 “정(正)으로 대치하고 기(奇)로써 승리를 거둔다(以正合 以奇勝)”라는 말이 나온다. 경쟁을 하거나 싸움을 할 때는 정(正)을 기반으로 하되, 기(奇)로써 이겨나간다는 말이다. 정(正)이란 방패로 막고 기(奇)란 창으로 찌르는 것이다.
여기서 정은 무엇인가? 두 가지로 크게 말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유형전력(有形戰力)과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전력(無形戰力)이다. 유형전력으로서의 정(正)은 힘의 실체를 말한다. 예를 들면 전쟁을 하기 위해 준비한 전차, 전투기, 대포, 미사일, 구축함, 잠수함, 어뢰, 지뢰, 통신장비, 요새 등을 포함한다. 전쟁을 하기 위한 기초자산이다. 기업경영 측면에서 본다면 자본력, 공장, 기계, 설비, CEO, 숙련된 인력, 종업원, 기술자, 연구원 등 인적·물적 자산을 말한다.
무형전력에서의 정은 무엇인가? 정도(正道), 원칙(原則)을 말한다. 기업 세계에선 상도(商道)를 가리킨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인 인력 훈련 수준, 숙련도, 기술력, 지적 노하우 등도 이에 해당된다. 경쟁을 할 때는 우선적으로 이런 유·무형 전력인 정(正)을 잘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 싸움을 위한 기초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한 기본바탕이다. 이것이 약하면 오래가지 못하고 언젠가는 무너진다.
1970년 와우 아파트가 무너지고, 94년 성수대교, 95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사건을 떠올려 보자. 기초가 부실하면 이렇게 무너진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층 건물은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칼리파(Buri Khalifa)다. 2010년 1월 4일 개장했는데 162층에 높이가 828m다. 여의도의 63빌딩(249m)이나 남산(262m)의 세 배쯤 되는 높이다. 그런데 이보다 170m나 더 높은 건물이 사우디아라비아 제다(Jeddah)에 세워진다고 한다. 무려 1001m 높이의 킹덤 타워(Kingdom Tower)다. 5년 후에는 아마 하늘을 찌르는 현대판 바벨탑을 보게 될 것이다. 부실공사나 편법이 아닌 정(正)으로 제대로 건축한다면 1001m가 아니라 2000m도 가능할 것이다.
기업경영에서 奇는 창조적 아이디어·발상
기(奇)는 무엇을 말하는가? 잘 준비된 정(正)을 바탕으로 다양한 상황에 맞춰 승리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戰略·strategy)을 말한다. 새로운 아이디어, 창조적 발상을 말한다. 아무도 생각하지도 못한 돌출기법을 말한다. 적과 마주할 때는 정력(正力)으로 한다. 그리고 적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적의 측방이나 후방으로 특공대나 기병을 보낸다. 바로 이들이 결정적으로 승리를 엮어내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기의 역할이다. 이를 두고 ‘기로써 승리한다(以奇勝)’고 한다.
기는 주로 전술(戰術) 영역에서 자주 사용되지만 멀리, 넓게, 깊게 보는 전략적 차원도 동시에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기는 전적으로 창의력에 달려 있다. 손자는 이렇게 말한다. “기를 잘 쓰는 자는 그 끝없음이 천지와 같고, 마르지 않음이 강과 바다와 같다(善出奇者 無窮如天地 不竭如江海).”
정과 기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정의 힘이 약하면 기가 발휘되는 영역은 제한된다. 한비자(韓非子)에 보면 ‘초명(<9E6A>明)의 날개를 단 비둘기’라는 우화가 있다. 초명은 크고 강한 날개를 가지고 있는 전설적인 새다. 해설서인 집해(集解)에 “초명은 봉황과 비슷하다(<9E6A>明似鳳)”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봉황과 비슷한 새로 보인다. 만약에 이 초명의 깃털을 뽑아 비둘기에게 붙여 준다고 하자. 비둘기는 그 깃털 때문에 무거워서 제대로 운신도 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기초체력이나 감당할 능력, 즉 정이 갖춰지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얘기다. 샤카가 개인역량(正)을 우선적으로 잘 갖추었기 때문에 황소의 뿔 전술(奇)을 사용할 수 있었다.
정과 기는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정의 힘이 많고 단단해야 기는 그것을 바탕으로 더 멀리, 더 과감하게 뻗어나갈 수 있다. 정의 힘이 약한데도 무리하게 기를 펼치려고 하면 처음에는 먹힐지 몰라도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 그리고 기를 잘 발휘해야 정이 깨어지지 않고 보존이 가능하다. 기가 잘못 사용되면 정에게도 영향을 미쳐 손상을 주게 된다. 손상을 무릅쓴 채 어떤 일을 강행한다면 온전함(全)이 파괴돼 좋지 않다. 정과 기는 서로가 서로를 낳는다. 조금 더 철학적인 개념으로 이 의미를 확장시키면 정은 곧 기가 되고, 기는 곧 정이 된다. 경쟁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것이 정인지 어느 것이 기인지 분별조차 어렵다. 기정(奇正)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돌고 돌며 그 힘을 확장시켜 나간다.
그래서 이 둘의 시너지 효과(Synergy Effect)는 승부의 세계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손자는 말한다. “본래 소리와 색깔은 다섯 가지이지만 서로 섞으면 그 변화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기정(奇正)도 두 가지에 불과하지만 기정의 변화를 다 알 수 없다(奇正之變不可勝窮).”
한 명의 천재가 수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세상이다. 기(奇)의 달인 스티브 잡스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잡스(Jobs)라는 이름을 뜯어보면 일자리(Jobs)를 제공해주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으니 그 이름에 참 걸맞은 일을 했다. 어디 잡스 한 사람뿐이겠는가. 또 다른 잡스, 또 다른 샤카가 그들의 영역에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을 먹여살리고 있다. 정(正)을 바탕으로 기(奇)를 창출하는 기정전략(奇正戰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에서도 기정전략을 바탕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 있는 기막힌 해법이 나오길 바란다.
승전에 취했던 나폴레옹 ‘전쟁 끝내는 법’ 몰라 실패했다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7> 졸속의 의미를 찾아서
전쟁을 벌여 계속 이기다 보면 승리에 도취되거나, 이왕이면 더 큰 성과를 얻기 위해서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멈출 줄 모르고 질주하는 경우가 있다. ‘승자 효과(Winner’s Effect)’라는 것이다. 남성들은 혈액 1L당 0.1g의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을 가지고 있는데 승리를 거둘 때마다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더욱 왕성해진다고 한다. 공격적 행동을 유발하는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아질수록 전투력도 향상되기 때문에 한번 이기면 승승장구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승자 효과다. 하지만 현명한 리더는 바로 승자 효과를 잘 이용하되 멈춰야 할 때는 멈출 줄 알아야 한다.
1805년 12월 2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9시간에 걸친 힘든 싸움 끝에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지휘하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결정적으로 격퇴했다. 이것이 유명한 아우스터리츠 전투(Battle of Austerlitz)다. 이 전투는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의 배경이 된다. 이 전투는 블렌하임 전투(Battle of Blenheim), 칸나에 전투(Battle of Cannae)와 마찬가지로 전술상의 걸작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때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에 4만 프랑의 배상금을 물게 했다.
아우스터리츠(현 지명은 체코의 슬라프코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나폴레옹은 독일 서남부 영토를 보호국으로 삼아 ‘라인 동맹’을 만들고 20만 명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프로이센의 빌헬름 3세는 1806년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나폴레옹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10월 14일에 벌어진 예나 전투(Battle of Jena)에서 나폴레옹에게 패하고 말았다. 프로이센군을 격파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본토까지 일거에 달렸고, 10월 25일에는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다. 빌헬름 3세는 쾨니히스베르크로 달아나 러시아에 구원을 요청했다. 러시아는 10만 명의 병력을 지원해 나폴레옹에게 대항했지만 역시 패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나폴레옹의 거침없는 승리였다.
名외교관 탈레랑의 유화론 건의도 묵살
1807년 2월 러시아 국경의 칼리닌그라드 주에 있는 네만 강 위에 띄운 뗏목에서 나폴레옹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회동했고, 6월에는 네만 강 왼편의 도시 틸지트에서 프로이센의 빌헬름 3세와 회동을 했다. 6월 25일에 체결된 틸지트 조약(Treaties of Tilsit)은 프랑스와 프로이센과 러시아 간의 강화 조약이다.
프로이센은 틸지트 조약으로 1억2000만 프랑의 배상금과 함께 엘베 강 서부 영토의 할양, 군대 규모 축소(4만 명 이하) 등을 강요받았다. 특히 당시 프로이센령인 서폴란드를 분할해서 프랑스의 괴뢰국인 바르샤바 대공국을 세우는 조치를 강요받았다. 프로이센 편에 선 러시아에는 영국의 목을 죄기 위한 대륙봉쇄를 강요해 이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이런 조건들은 프로이센이나 러시아 입장에선 매우 굴욕적이고 가혹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에게는 명(名)외교관이 한 명 있었다. 외무장관 탈레랑(Talleyrand)이다. 그는 나폴레옹을 정계에 데뷔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탈레랑은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에 대한 무리한 요구들을 철회하라고 나폴레옹에게 요청했다. 그런데 연이은 승리에 과다 분비된 테스토스테론은 나폴레옹을 그 자리에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탈레랑의 건의를 묵살해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탈레랑의 우려대로 이후 오스트리아는 끊임없이 프랑스를 괴롭혔다.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을 무시했다. 이로 인해 나폴레옹으로선 러시아 진격이라는 최악의 카드를 사용하게 됐다. 만약 나폴레옹이 네만 강에서 멈췄더라면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멈출 수 없는 자의 비극이다.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에서 나폴레옹에게 패배의 잔을 안겨준 웰링턴은 “정복자는 포탄과 같다”는 말을 했다. 잘 날아가다가 결국에는 포탄처럼 폭발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말이다. ‘시작하기에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빠르다’는 말처럼, ‘그만두기엔 이르다고 생각될 때가 적당한 때’라는 말도 명심해야 한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졸속(拙速)’이라는 용어가 부쩍 많이 등장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졸속 처리, 쇠고기 협상 졸속 처리, 지방자치단체들의 졸속 행정 등이다. 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졸속은 대체로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사전에선 졸속의 의미를 ‘서투르지만 빠르다는 뜻으로, 지나치게 서둘러 함으로써 그 결과(結果)나 성과(成果)가 바람직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로 풀이한다. 역시 부정적 의미다.
졸속의 출처는 『손자병법』이다. 그런데 손자는 졸속을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졸속이 포함된 작전(作戰) 제2편의 원문을 보면 이렇다. “전쟁에 있어 그 솜씨가 매끄럽지 못하더라도 빨리 끝내야 함은 들었어도, 솜씨 있게 하면서 오래 끌어야 함은 보지 못했다. 무릇 전쟁을 오래 끌어서 나라에 이로운 것은 없다(兵聞拙速 未睹巧之久也 夫兵久而國利者 未之有也).”
손자가 말하고 있는 졸속은 무엇인가? 그렇다. 빨리 끝내라는 것이다. 뭔가 제대로 해보겠다고 질질 끄는 것보다 적당한 선에서 빨리 끝내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훨씬 좋다는 얘기다.
인류 역사에서 오래 끈 전쟁들을 몇 가지 살펴보자. 먼저 7년 전쟁(Seven Years’ War)이 있다. 프랑스혁명 이전에 벌어졌던 마지막 주요 전쟁으로 유럽 열강들이 모두 참전했다. 1756년 시작돼 1763년에야 끝났다. 이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모두를 잃게 된다. 동양에서 이와 기간이 비슷한 7년 전쟁은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明)나라 사이에 있었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다. 1592년 시작돼 1598년에 끝이 났다.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어 170만 결이나 되던 경지 면적이 전쟁 직후 54만 결로 급감했다. 중국에선 명나라가 오랜 전쟁에 지쳐 만주 여진족이 흥기했다. 결국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 오래 끌어 나라에 이로운 것은 없다”
세대를 건너뛰는 장기전도 적지 않다. 30년 전쟁(Thirty Years’ War)의 경우 1618년부터 1648년까지 계속됐다. 이 파괴적인 전쟁은 유럽 대륙 거의 전역에서 벌어졌으며 전쟁이 끝났을 무렵 유럽의 지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변모했다. 심지어 80년 전쟁(Eighty Years’ War)도 있다.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다. 1568년부터 1648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으로 네덜란드는 북부 네덜란드와 남부 네덜란드로 분리되고 네덜란드 공화국(Dutch Republic)이 성립되었다. 역사상 가장 오래 끈 전쟁은 백년 전쟁(Hundred Years’ War)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벌인 전쟁인데 문서로 볼 때 이 전쟁은 1337년에 시작돼 1453년에 끝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슬러 올라가면 12세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니 백년이 더 넘는 전쟁이다.
왜 이렇게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는 것일까? 바로 인간의 채울 수 없는 욕심(慾心) 때문이다. 아니 욕심을 넘어선 과욕(過慾) 때문이다. 적당한 어느 선에서 끝을 내야 하는 데 과욕이 생겨 끝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장기전으로 치닫게 되고 그로 인해 패자도 승자도 많은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뒤에 일본 군부가 자체적으로 패인을 분석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손자병법』이 말하고 있는 졸속의 정신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철학자 칸트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행동은 자유로울 수 없다며, 욕망에 기반을 둔 모든 행동을 가언적 명령(hypothetical imperative)이라고 명명했다. 가언적 명령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내리는 조건부 명령으로서 그 목적을 승인하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보편타당성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스스로에게 타당성을 부여하는 명령일 뿐이다. 그래서 자신의 비정상적인 행동까지 정당화하며 끝을 향해 치닫게 되는 것이다.
1947년에 처음 공연된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명한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욕망을 따라가는 인간의 행위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욕망이라는 전차에 한번 타면 내리지 못하고 절벽에서 떨어질 때까지 달리게 되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전차에서 과감하게 뛰어내리려면 손자가 말한 ‘졸속’이라는 제동장치가 필요하다. 주식투자에서 망하는 사람을 보면 대체로 졸속의 정신이 부족해서다. 잘 달리고 있다고 해서 뛰어내릴 시기를 놓치는 것이다. 부부싸움에도 졸속의 정신이 필요하다. 극한의 감정대립으로 갈 데까지 갈 수 있는 것이 또한 부부간의 싸움이다. 대체로 부부싸움은 거창한 것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세계평화를 운운하다가 부부가 싸우는 일을 봤는가? 손자의 표현대로 한다면 부부싸움을 오래 끌어서 가정에 도움이 됐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손자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비록 못마땅하지만 적당한 선에서 끝내라. 아니 가능한 한 빨리 끝내라.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게 나중에 돌아보면 후회하지 않는 길이다. 졸속을 잘하기 위해서는 영어 단어 ‘STOP’을 떠올리면 도움이 된다. 이 단어의 철자 S를 Stop, T를 Think, O를 Observe(주변을 둘러본다), P를 Plan(계획한다)으로 기억해 보길 권한다. 멈추고, 생각하고, 둘러보고, 그리고 다음 행동을 계획하는 것이다. 현명한 리더는 어디서 멈추고 언제 떠나야 할 것인가를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리더들이여,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언제라도 뛰어내릴 준비를 하라. 그래야 나폴레옹처럼 실패하지 않는다. 끝이 아름다워야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日 침략의도 간파, 전라좌수사 되자마자 전쟁 준비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9> 이순신과 위기관리 리더십
세상에 어리석은 질문이 있다. 노처녀에게 “시집 언제 가느냐”고 묻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질문이 있다. 바로 “전쟁이 나겠느냐”고 묻는 질문이다.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꼭 이런 질문이 나온다. 지난해 터진 천안함 폭침 사건 때도 그랬고, 연평도 포격 사건 당시에도 그러했다. 그리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하자 어김없이 이런 질문이 있었다.
이럴 때면 이른바 ‘국방 전문가’라고 하는 인사들이 언론매체에 등장해 나름대로 자기 주장을 피력한다. 이들은 대체로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는지 모르겠다.
군사전략적으로 ‘위협’(威脅)을 평가하는 요소는 세 가지다. 의도(意圖), 능력(能力), 환경(環境)·조건(條件)이다. 첫째는 상대국이 전쟁을 하려는 의도가 있느냐는 것이다. 둘째는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뒷받침되느냐는 것이다. 셋째는 전쟁을 일으킬 만한 국내외적 환경이나 조건이 성숙돼 있느냐는 것이다.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적 ‘능력’이다. 의도와 환경·조건은 수시로 바뀔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보다 덜 중요한 요소다. 능력은 위협의 주체다. 능력만 확실하게 갖춰져 있다면 언제든지 전쟁은 가능하다는 얘기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보라. 전쟁을 하느니 마느니 일본 군부와 정치권에서는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결국에는 전쟁을 일으켰다. 왜 전쟁이 가능했는가? 의도와 환경보다 전쟁을 수행할 ‘능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터진 6·25전쟁을 보라.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전쟁 준비를 다 끝냈다. 그리고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의도를 타진해 동의를 얻었고(의도 충족), 남한에 혼란이 조성되자(환경과 조건 충족)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북한군은 사단급 부대의 훈련까지 마친 19만8380명의 병력과 소련제 T-34전차 242대, 그리고 고성능 전투기 YAK-9를 비롯한 210대의 항공기가 있었다.
반면 국군은 대대급 훈련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10만5752명의 병력이 전부였다. 전차는 물론 대전차 무기조차 제대로 없었다. 김일성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상태라면 전쟁을 할 만했을 것이다. ‘능력’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우리가 북한을 바라볼 때 의도나 조건보다는 그들의 실제적 ‘전쟁능력’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이것을 놓치면 그 어떤 예측이나 전략도 헛다리를 짚는 게 되고 만다.
전쟁 의도·환경보다 중요한 건 전쟁 능력
손자병법 구변(九變) 제8편에 보면 이와 관련된 중요한 어구가 나온다. 손자병법 전체를 통해 방어 태세를 강조한 어구는 오직 이 하나뿐이다. “적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지 말고, 나에게 적이 올 것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음을 믿어야 하며, 적이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바람을 믿지 말고, 나에게 적이 감히 공격하지 못하게 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無恃其不來 恃吾有以待也 無恃其不攻 恃吾有所不可攻也)”
그야말로 금언(金言)이 아닐 수 없다. 적의 의도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공격해 올 것인지, 공격해 오지 않을지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다. 오직 적에게 달려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적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게 적이 감히 공격하지 못할 ‘능력’ 즉 ‘준비태세’를 갖추는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과연 감탄할 만한 무성(武聖)의 통찰력이다. ‘능력’이 뒷받침되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은 그래서 중요하다.
『서경(書經)』의 ‘열명편(說命篇)’에 나오는 이 말은 ‘미리 준비해 두면 근심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중국의 병법서인 사마법(司馬法)에는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라는 구절이 있다. ‘천하가 비록 편안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해진다’는 뜻이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할 당시 조선은 정신을 놓고 있었다. 200여 년의 태평세월에 길들여진 조선의 지도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노골적 침략 의도를 애써 모른 척했다. 마치 쫓기던 꿩이 땅에 머리를 꼬라박고 잠시 포수의 총구를 잊으려 하는 것과 같았다. 일본에 다녀온 조선통신사의 정사 황윤길(黃允吉)이 일본의 전쟁 의도를 알아차려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선조는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부사 김성일(金誠一)의 말에 손을 들어주었다.
당파 싸움을 중심으로 한 그 내막은 여기서 논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것이다. 이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1년 전인 1591년 3월 중순이었다. 이때부터라도 정신을 차려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전쟁을 준비했더라면 그렇게 참혹한 전란(戰亂)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도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은 돌았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수군폐지론(水軍廢址論)이 논의되고 있었는데 일본군은 해전에는 능하지만 육지에 오르면 민활하지 못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수군폐지론은 당시 조정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신립(申砬) 장군까지 합세해 그 기세가 대단했다. 자칫 수군이 없어질 판이었다. 바로 이때 이순신 장군이 혜성(彗星)같이 등장했다.
임진왜란 발발 1년2개월 전에 일개 정읍현감에서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즉 전라좌수사로 전격 발탁된 이순신 장군이 이를 강력히 반대하는 장계를 올린 것이다. “해적을 막는 데는 해전이 제일이므로 수군을 절대로 폐해서는 안 됩니다.”(선묘중흥지)
유비무환! 백 마디의 말이 소용없다. 실제로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위기 때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이순신은 그동안 소문으로 나돌던 일본의 침략을 그저 소문으로만 듣지 않았다. 전국시대를 마감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반드시 조선을 침략할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순신의 탁월한 선견지명이다. 전라좌수사로 임명돼 여수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적의 의도가 어떻든지 확실한 ‘능력’을 키우려 한 것이다. 예하 5관(官) 5포(浦)에 대한 초도 순시를 시작으로 전투 준비태세를 점검했다. 무너진 성곽을 보수하고 무기체계를 정비했다.
이순신, 활쏘기 명중률 84% 기록
임진년 정월 16일자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이 이때 얼마나 전투준비에 신경을 곤두세웠는지를 알 수 있다. “……방답(防踏)의 병선(兵船)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곤장을 쳤다. 우후(虞候·절도사에게 속한 무관)와 가수(假守·임시직 관리)도 역시 단속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해괴하기 짝이 없다.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날이 짐작할 만하다. 성 밑에 사는 토병(土兵) 박몽세는 석수랍시고 선생원(先生院)에서 쇠사슬 박을 돌 뜨는 곳에 갔다가 이웃집 개에게까지 피해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쳤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전투 준비를 소홀히 한 책임자는 용서 없이 처벌했다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민폐를 끼친 자도 반드시 처벌을 했다는 것이다.
2월 25일자 일기에도 “여러 가지 전쟁 준비에 결함이 많아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3월 4일자 일기에도 “서문 밖에 해자 구덩이와 성벽을 더 올려 쌓는 곳을 점검했다. 승군들이 돌 줍는 일에 불성실했기에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속세를 떠난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전쟁준비에 소홀히 하면 가차 없었다.
이순신의 관심은 온통 전쟁준비였다. 그 외의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부대 전체의 전쟁준비에 만전을 기했지만 그 자신도 활쏘기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난중일기 전체에서 이순신이 활쏘기를 한 기록은 대략 270여 회나 나온다. 병중(病中)이거나 제사 또는 나라의 특별한 일 외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활을 쐈다는 얘기다. 특히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의 일기를 보면 집중적으로 활을 쏘는 기록이 나온다. 심지어 술자리를 하면서도 활쏘기를 멈추지 않았다.
3월 16일자 일기를 보면 이렇다. “순천부사가 환선정(喚仙亭)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겸하여 활도 쏘았다.” 과연 프로답다. 참고로 이순신의 활 솜씨를 잠시 엿보자. 3월 28일자 일기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활 10순(巡)을 쏘았는데, 다섯 순은 연달아 맞고, 2순은 네 번 맞고, 3순은 세 번 맞았다(十巡卽 五巡連中 二巡四中 三巡三中).”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풀어보자. 1순은 5발(矢)이다.
처음 다섯 순은 모두 맞혔으니 25발 명중이다. 이를 몰기(沒技)라 부른다. 2순은 각각 4발을 맞혔으니 총 8발 명중이다. 3순은 각각 3발을 맞혔으니 총 9발 명중이다. 이를 합하면 25+8+9=42가 된다. 즉 50발 중 42발이 명중된 것이니 84%의 명중률이다. 이 정도의 실력이면 현재 대한궁도협회에서 정한 8단의 기준인 82%를 넘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이순신의 전쟁 준비 가운데 압권(壓卷)은 거북선의 건조다. 물론 거북선은 이순신의 창작품은 아니다. 이미 170년 전의 태종실록에 거북선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태종 당시의 ‘위협용 거북선’을 개량해 총포를 최대한 장착한 ‘전투용 거북선’으로 새롭게 건조했다. 4월 12일자 일기를 보자. “식사 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포(地字砲), 현자포(玄字砲)를 쏘았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만8700명의 일본군을 동원해 조선 땅을 침략했다.
손자는 말한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쓸데없이 전쟁이 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탁상공론하지 말라. 그 대신 적이 감히 쳐들어오지 못할 확실한 준비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나라가 어수선할수록 본질에 충실하도록 하라. 기업인은 품질 좋은 상품을 개발하는 데 목숨을 걸어라. 정치인은 주변국을 돌아보고 미래지향적 전략 마인드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민이 잘살게 하는 길에 목숨을 걸어라. 군인은 적이 감히 넘보지 못할 위협적이고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는 데 목숨을 걸어라.
2012년 새해가 밝았다. 공교롭게도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임진년(壬辰年)이다. 이순신 장군이 행동으로 보여준 유비무환, 구국의 정신을 한 번쯤 생각해보는 새해 첫날이 되면 좋겠다.
한민족의 치욕 ‘쌍령전투’ 패인은 낙하산 인사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12> 조직 성공 좌우하는 리더의 선택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 군대는 기병을 주축으로 했다. 영화 ‘최종 병기 활’은 청나라 기병의 속도전 위력을 잘 묘사하고 있다.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 있다면 ‘제대로’ 된 사람을 ‘제대로’ 뽑는 것이다. 제대로 된 사람을 제대로 뽑았다면 일의 절반은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사람을 제대로 뽑기란 참으로 어렵다. 피상적인 관찰이나 공식 프로필만으로 그 사람의 자질과 능력을 제대로 검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을 잘못 뽑으면 그가 지닌 직책의 고하에 따라 많은 사람이 고통받게 되고, 조직과 나라의 근간마저 흔들릴 수도 있다.
제대로 된 리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에 사무치게 보여주는 전례가 있다. 바로 쌍령(雙嶺)전투다. 병자호란 때 일어난 쌍령전투는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 민족사에서 어쩌면 가장 치욕스러운 전투라 하겠다. 인조 14년(1636년) 12월 청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2차로 조선을 침공했다. 기병을 보유한 적의 빠른 진격 속도에 미처 달아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혀 구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4만 명에 달하는 조선군이 북상했다. 지휘관은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6810>)이었다. 조선군은 임진왜란 당시보다 훨씬 개량된 조총 1정씩을 보유하고 있었다. 1637년 1월 3일,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 일대에서 이들은 청나라군과 마주쳤다.
그런데 청나라군은 불과 기병 300여 기였다. 4만 명의 조총수와 300여 기의 기병. 언뜻 보기에 승패는 뻔한 듯했다.
“허완, 늙고 겁에 질려 눈물 흘리는 장수”
조선군은 2만씩 나누어 민영은 오른편 산등성이에, 허완은 왼편 낮은 곳에 진을 치고 목책으로 둘렀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조선 후기의 역사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이때 조선군에 지급된 화약은 2냥이라고 되어 있다. 2냥이면 대략 10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다. 아직 조총에 대한 훈련이 제대로 되지 못한 군사들에게 많은 양의 화약을 지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군이 진을 친 뒤엔 오히려 청군이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가진 조선군에 먼저 공격을 가했다. 연려실기술에선 “청군 선봉 33명이 목 방패를 들고 남산 상봉에서부터 물고기를 꿴 것처럼 줄줄이 공격해 왔다”고 묘사했다.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있었던 청군이 낮은 곳에 있던 조선군을 내리 덮쳤던 것이다.
조선군은 몹시 당황하고 놀랐다. 조총을 제대로 쏘기 위해서는 사거리를 감안해 적들을 충분히 근접시킨 뒤에 사격을 해야 했다. 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적을 보자마자 마구 쏘아댔다. 설상가상으로 장수들 역시 경험이 없어 화약 배분을 잘하지 못해 금방 화약이 동이 나고 말았다. 선봉 33명에 의해 조선군의 화약이 모두 떨어진 것이다. 화약이 떨어져 막대기 같은 조총을 들고 우왕좌왕하는 조선 병사들 머리 위로 나머지 청나라 기병들이 뛰어올랐다.
대혼란에 빠진 조선군들은 서로 도망치기 바빴다. 이 와중에 4만 병사 중 절반이 넘는 병사가 청나라 기병들의 칼에 맞아 죽은 게 아니라 먼저 도망치려는 아군에 깔리고 밟혀 죽었다. 병자남한일기(丙子南漢日記)에 보면 “도망가다 계곡에 사람이 쓰러져서 쌓이면서 깔려 죽었는데 시체가 구릉처럼 쌓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상 초유의 압사사건(壓死事件)이다. 이 과정에서 경상좌병사 허완도 깔려 죽었다.
남급이 쓴 병자일기(丙子日記)에선 더 나아가서 “흩어진 병사들이 목책에 도달했으나 목책을 넘지 못하고 넘어지면 그 뒤로 계속 시체가 쌓였고, 목책을 넘은 병사는 목책 밖이 험준해 추락해서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오른편 산등성이에 있던 경상우병군은 화약을 나눠주는 과정에서 불똥이 떨어져 대폭발이 일어났는데 장수 2명이 죽고 진영이 크게 동요되었다. 호기를 만난 청나라 기병들이 덮쳤고 이 과정에서 경상우병사 민영이 전사했다.
결과적으로 청나라 기병 300 대 조선군 4만, 즉 청나라 기병 한 명이 133명의 조선군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조선군의 패인은 단지 화약이 떨어졌다는 것만이 아니다. 쌍령의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지 못하고 밀접 대형으로 배치하는 등 전략적 안목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패닉(panic), 즉 공황(恐惶)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큰 그림을 보지 못한 총체적 리더십 부재의 결과다. 허완이나 민영은 그동안 특별한 능력이 없어 변방을 돌다가 인조반정에 편승해 이른바 낙하산으로 진급한 사람들이었다. 연려실기술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허완은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무능한 인물이 중책에 임명되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쌍령전투다.
조직이 성공하려면 모름지기 사람을 잘 뽑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뽑아야 하는가?
손자는 시계(始計) 제1편에서 리더가 가져야 할 덕목으로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지(智), 신(信), 인(仁), 용(勇), 엄(嚴)이 그것이다. 이를 오덕(五德)이라 부른다.
제일 먼저 지(智)가 나왔다. 지는 ‘사물의 실상(實相)을 관조(觀照)해 미혹을 끊고 정각(正覺)을 얻는 힘’으로 풀 수 있다. 지는 배의 키와 같다. 나아갈 방향을 정해주는 것이다. 만약에 리더에게서 지가 부족하다면 그가 이끄는 조직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며, 자칫 암초에 걸리거나 낭떠러지에 떨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지는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앞에 위치하고 있다. 지는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를 잘 알고, 일의 변화 방향을 내다본다(達人之情 見事之微)’는 의미를 가졌다.
지(智)는 앎(知)과 말씀(曰)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지(智)는 무엇보다도 앎(知)을 전제로 한다. 많이 알아야 지가 발휘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이 보고,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딱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지를 기르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되 동시에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논어 위정(爲政)편에 보면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는 말이 나온다. 지를 얻는 단초(端初)다.
리더는 智·信·仁·勇·嚴 5대 덕목 갖춰야
첫째로 리더의 솔선수범(率先垂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 미 육군에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언제 리더에 대해 신뢰가 생겼는가’라는 질문에 75%의 병사가 ‘솔선수범’을 들었다. 삼국지 권51 오서(吳書) 종실전(宗室傳)에 보면 ‘신선사졸(身先士卒)’이라는 말이 나온다. 장수가 몸소 병사들의 앞에 선다는 뜻이다. 솔선수범이야말로 신을 이루는 중요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리더를 가리기 위해서는 조직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둘째로 리더의 언행일치(言行一致)다. 신(信)은 사람(人)과 말(言)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이 한 말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다. 말로는 온갖 공약을 다 해놓고 실제로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신의 실패다. 셋째로 신상필벌(信賞必罰)이다. 리더는 상벌의 원칙을 잘 지켜야 한다. 친하다고 해서 상을 주면 안 되고, 귀하다고 해서 벌을 생략하지 않아야 한다(賞不私親 罰不避貴). 강태공의 육도(六韜)에 보면 형벌은 높은 사람에게, 상은 낮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했다(殺貴大 上貴小). 우리 사회를 보면 가끔 이와는 반대의 경우가 벌어지곤 해서 안타깝다.
손자가 말하는 리더의 세 번째 자질은 인(仁)이다. 인은 자비로움이다. 부하를 아끼는 마음이다. 아랫사람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알고 그들과 노고를 같이하는 것이다(知人飢渴同人勞苦). 중국 전국시대 오기(吳起)라는 장수는 자기 부하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연저지인(<542E>疽之仁)의 고사를 남겼다. 사기(史記)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나오는 이 유명한 얘기는 리더의 부하 사랑이 어느 정도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된다.
손자가 말하고 있는 리더의 네 번째 자질은 용(勇)이다. 용은 용기를 말한다. 기회를 보면 즉시 행하고, 적을 만나면 두려움 없이 즉시 싸우는 것이다(見機卽發 遇敵卽鬪). 프러시아의 군사학 대가 클라우제비츠는 이러한 용기를 두 가지로 나눠 설명했다. 개인적 위험에 대한 용기와 책임을 지는 용기다. 그가 말하기를 진정한 용기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 물러서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손자가 말하고 있는 리더의 다섯 번째 자질은 엄(嚴)이다. 엄은 엄격함을 말한다. 군을 다스림에 있어 정돈돼 있고, 호령이 일사불란해 하나같이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軍政整齊 號令如一). 리더가 왜 엄격해야 하는가? 성과를 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명백히 정리했다. “유능한 리더는 사랑받고 칭찬받는 사람이 아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올바른 일을 하도록 하는 사람이다. 인기는 리더십이 아니다. 리더십은 성과다.” 의미 있는 지적이다. 울료자(尉<7E5A>子) 병법에 보면 “자기 장수를 업신여기면 패한다(見侮者敗)”는 말이 있다. 어느 조직이든 자신의 리더를 가볍게 여기면 패한다. 그래서 “자기의 장수를 두려워하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승리한다”고 한다. 성공적인 성과 달성을 위해 리더가 엄해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손자가 말한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스스로를 점검해 보라. 지, 신, 인, 용, 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정치권의 경우에는 총선과 대선이 기다리고 있다. 기업 안팎에선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어느 조직이든 아직 늦지 않다. 지금부터라도 손자가 말한 5덕의 기준으로 철저히 검증한 다음 허완이나 민영과 같은 인간이 선택되지 않도록 단단히 살펴볼 일이다.
한국전 흐름 바꾼 ‘우직지계’의 승리, 인천상륙작전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13> 때로는 돌아서 가라
인천상륙작전을 주도한 맥아더 장군은 정면 공격 위주의 패러다임을 간접접근 전략으로 바꿔 세계 전쟁사에 남는 승리를 거뒀다. [중앙포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는데 앞으로 전쟁이 발발한다면 어디입니까?”
“네, 한반도입니다.”
1946년 영국 로이터 통신 기자의 질문에 주저 없이 답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예견한 대로 정확히 4년 후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터졌다. 그는 리델 하트(Liddell Hart)였다. 그는 훗날 6·25전쟁을 분석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북한군이 8월 하순에 급하게 편성해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던 제16, 제17기갑여단을 사전에 편성해 2차대전 당시 독일군 기갑부대가 했던 것처럼 경부 축선 등 어느 한 방향에 집중 투입해 종심 깊은 돌파와 전과 확대, 그리고 신속한 추격을 실시했더라면 아마도 미군이 한반도에 투입되기도 전에 부산까지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리델 하트는 누구인가?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보였던 기계화 전투 방식을 주창해 유명해진 영국의 군사전략가다. 그의 이론은 독일군이 대륙을 휩쓸게 된 전격전(電擊戰)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승리의 비결로 간접접근 전략(Indirect Approach Strategy)을 주창했다. 그 이론을 담은 책이 『전략론(戰略論)』인데 고대 페르시아 전쟁에서 제1차 중동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는 30개 전쟁, 280개 전역을 분석해 280개 전역 중 6개 전역만이 직접접근(Direct Approach)을 통해 승리했고 나머지 274개 전역은 모두 간접접근(Indirect Approach)에 의해 승리를 달성했다고 결론짓고 있다.
리델 하트는 손자병법에 흠뻑 빠진 매니어였다. 그리피스 장군의 박사학위 논문 ‘손자병법’을 애독했으며 그의 책에 손자병법의 명구를 대거 인용했다. 그가 주창한 간접접근 전략은 바로 손자병법 군쟁(軍爭) 제7편에 나오는 ‘돌아감으로써 직행으로 삼는 계략’인 우직지계(迂直之計)에서 나왔다. 간접접근의 개념을 정리하면 이렇다. 직접적으로 힘을 적에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적이 예기치 않은 불의의 방향으로 접근해 적을 동요시켜 균형을 잃게 한 후에 최소의 저항, 최소의 피해로 승리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리델 하트, 간접접근 전략의 힘 일깨워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은 간접접근 전략의 교과서 같은 작전이다. 인천 상륙 계획에 결정적으로 장애가 되는 것은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된 북한군 제1, 2군단의 주력이다. 만약에 이들이 낌새를 알아채고 인천 방면으로 부대를 돌린다면 작전은 허사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이들을 낙동강변에 묶어두기 위해 국군과 미군은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쏟으며 결전했다. 간접접근 전략에 사용되는 용어로 표현하면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견제를 한 것이다. 견제라는 말은 경쟁 대상이 지나치게 세력을 가지거나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상륙군 주력은 북한군의 배치가 가장 미약하고 저항이 적을 것으로 판단되는 서해안의 해상 기동로를 따라 인천으로 접근했다.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을 택해 적의 배후를 지향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손자병법 시계(始計) 제1편에 나오는 ‘적이 준비되지 않은 곳을 치고, 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나아가는 것’(攻其無備 出其不意)이다. 인천 상륙 뒤엔 서울을 목표로 군대를 기동함으로써 적의 퇴로와 병참선을 차단해 적을 결정적으로 불리한 위치로 몰아넣었다. 그리하여 적에 의한 저항을 최소화시켜 가장 적은 전투와 최소의 희생으로 서울을 탈환했다. 간접접근 전략이 완벽하게 적용된 것이다. 통상적인 정면 공격 위주의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바꿔 간접접근으로 승리를 쟁취한 맥아더 장군의 탁월한 전략적 안목이 돋보인다.
만약에 인천으로 돌아가지 않고 무모하게 낙동강에서 정면 공격만을 고집했다고 하면 엄청난 피해는 물론 어쩌면 부산까지 모조리 점령당해 지금쯤 우리는 북한 인공기를 보고 살지도 모른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과 중공군은 전체 18개 군단급 부대 중에서 무려 9개 군단을 동해안과 서해안에 배치해야 했다. 왜냐하면 유엔군의 또 다른 상륙작전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공산군 측은 전력의 50%를 후방에 배치해야 하는 뼈아픈 처지에 빠져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인천상륙작전은 단 한 번의 작전 성공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전쟁 전체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 결정적 작전이었다.
이제 손자가 말하는 우직지계를 보다 쪼개어 알아보자. 손자는 우직지계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돌아감으로써 직행으로 삼는 이우위직(以迂爲直)과 근심을 이로움으로 삼는다고 하는 이환위리(以患爲利)다. 돌아감으로써 직행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은 여러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거리와 시간과 처세(處世)에 있어서의 적용이다.
먼저 거리의 개념이다. 돌아가는 게 실제로는 빨리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격 목표가 저 멀리 있는 백두산 고지라 하자. 그곳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가지다. 그런데 접근이 쉬운 가까운 길에는 이미 적들이 온갖 방어조치를 다해뒀다. 지뢰도 심어두고 철조망도 쳐놓고 적절히 병력도 배치해뒀다. 이렇게 되면 비록 가까운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이용하면 많은 피해를 보게 된다. 가까운 길이라고 해서 결코 가까운 것이 아니다. 이럴 경우에는 비록 멀리 돌아가지만 적의 장애물이 없는 길을 택하는 게 피해를 줄이고 실제로 빨리 가는 길이 될 수 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빠르고 쉬운 길만을 고집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둘째는 시간의 개념이다. 촉박하게 서둘러 일을 이루려고 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이 유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느림의 미학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피해 의주로 임금 행차를 모시고 피란을 가는 길에서 있었던 일이다.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졌다. 사람들이 비를 맞지 않으려고 앞을 다투어 뛰어가는 것을 보고 한음(漢陰) 이덕형은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뛰어가면 앞에 가는 비까지 맞을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혼자서 여유롭게 팔자걸음을 했다고 한다. ‘빨리빨리’ 문화에 젖은 우리에게 ‘이우위직’이 가르쳐주는 느림의 미학은 분초를 다투는 각박한 세상을 여유롭게 만들어 주는 좋은 처방전이 될 수 있다. 느리게 가다 보면 주변을 돌아보며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 소홀히 했던 사람들도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셋째는 처세의 개념이다. 돌아간다는 것은 때로는 손해도 보고 양보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삶의 방식은 당장에는 손해 보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에는 좋은 것으로 돌아온다. 선(善)의 부메랑이다.
돌아가지만 끝내 이기는 ‘曲卽勝’의 지혜
우직지계의 두 번째 큰 의미는 이환위리다. 근심을 이로움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개념이 있다. 첫째 의미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다. 전국시대 합종책(合從策)으로 6국의 재상을 겸임했던 소진(蘇秦)은 이런 말을 했다. “옛날에 일을 잘 처리했던 사람은 ‘화를 바꾸어 복을 만들었고’(전화위복) ‘실패한 것을 바꾸어 성공으로 만들었다’(인패위공·因敗爲功).” 아무리 어렵고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강인한 의지로 헤쳐 나가면 근심거리를 복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근심거리가 걸림돌이지만 현자에게는 근심거리가 디딤돌이 되는 것이다. 둘째 의미는 근심과 위협과 도전을 오히려 발전과 도약의 기회로 삼는다는 것이다. 전화위복과 비슷한 의미가 있지만 조금의 뉘앙스 차이가 있다. 토인비는 불멸의 저작 『역사의 연구』에서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설명했다. 파르테논 신전에서 도전과 응전이라는 메타포(metaphor)를 얻었던 그는 외부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전했던 민족이나 문명은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민족이나 문명은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토인비는 저술이나 외부 강연을 할 때면 청어 이야기를 즐겨 인용한다. 청어는 영국 사람들이 아주 좋아해서 거의 매끼 식사마다 식탁에 오르는 생선이다. 그런데 싱싱한 상태로 청어를 북해나 베링해협에서 런던으로 옮기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청어의 천적인 물메기 몇 마리를 수조에 함께 넣어두는 것이다. 그러면 청어들은 무시무시한 이빨을 가진 물메기에게 뜯기지 않기 위해서 사방팔방으로 도망 다닌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수산시장까지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동화
도도새처럼 게으르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그저 편하게 살려고만 하고, 발전을 위한 노력이나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모든 걸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도도새의 법칙’이라고 한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용하느냐에 따라 걸림돌도 디딤돌도 되는 것이다.
손자가 말한다. 가정과 기업, 국가의 존망을 책임지고 있는 세상의 리더들이여,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만이 능사(能事)라 생각하지 마라. 때로는 돌아가기도 하고 양보하기도 하고 손해 보기도 하라. 세상의 이치란 묘해서 빨리 간다고 반드시 이기는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돌아가지만 마지막에 이기는 ‘곡즉승(曲卽勝)’의 심오한 진리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다.
큰 그림 못 본 ‘용인전투’ 5만 대군 일패도지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14> 사람 공부를 하라
2005년 10월 미국 상원 의원이던 힐러리 클린턴은 한국인에게는 ‘역사 망각증(historical Amnesia)’이 있다고 지적했다. 주한미군사령관으로 내정된 버웰 벨 장군에 대한 인준청문회에서였다. 한국인들은 과거를 너무 빨리 잊는다는 것이다. 뜨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은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로마군에게 전멸당한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고 200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어린아이들까지 요새에 오르게 한 뒤에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마라(Forgive but not forget)”를 복창시키고 있다.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의 마지막 코너에는 동판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망각은 망국(亡國)에 이르고 기억은 구원의 비결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기병 300기에 조선군 4만 명(숫자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음)이 어이없이 패배한 쌍령전투는 생각할수록 안타깝고 분하다. 현명한 사람은 과거를 망각하지 않고 과거로부터 배운다. 그런데 당시 인조를 비롯한 지도층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쌍령전투 45년 전에 이와 판박이 같은 전투가 있었다. 바로 임진왜란의 용인전투다. 이때의 교훈을 잊지 않았다면 비극은 되풀이되지 않았을 것이다.
용인전투는 임진왜란이 발발된 지 두 달이 채 안 된 1592년 음력 6월 5일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 충청도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이 이끄는 5만 명의 조선군이 겨우 1600명의 일본군에게 참패한 전투다. 이 전투는 사료들이 서로 달라 정확한 경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 기회에 여러 자료를 대조하면서 다시금 정리해 본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졌다. 일본군의 침략은 물리적 측면보다 정신적·심리적 측면에서 충격을 주었다. 조선의 방어 거점들은 힘없이 무너져 갔다. 당시 일본군에 주목할 만한 장수가 있었는데 스모토 성주인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패권을 다툰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칠본창(七本槍)의 한 명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임란 당시 39세의 나이로 출전해 처음에는 해상수운과 수군 관련 업무를 맡았지만 원균의 경상해역이 쉽게 평정되자 곧바로 육전에 참가해 북상했다.
이광 거느린 ‘삼도 민병군’은 오합지졸
한양 탈환을 위한 반격작전은 전라도순찰사 이광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그는 급히 4만 명의 민병을 모아 북진계획에 대한 장계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순찰사에게 명령을 내려 전라도순찰사와 온양에서 합류해 한양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온양에서 합류한 군세는 전라도군 4만 명, 충청도군 8000명, 경상도군 1000명 등 약 5만 명이었다. 개전 이래 가장 많은 병력이 한꺼번에 모인 것이다. ‘일컬어 10만(號曰十萬)’이라 하여 얼핏 보기에는 위세가 당당했다. 군기와 무기와 군량미를 실은 수레의 행렬은 40∼50리에 달할 정도였다.
이광을 맹주로 삼은 삼도 민병군은 남도근왕군(南道勤王軍)으로 불렸다. 이때 권율은 광주목사(光州牧使)로서 전라도방어사 곽영(郭嶸)의 중위장으로 참전했다. 근왕군은 곧 북상하여 6월 3일에는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을 무혈 점령했다. 엄청난 규모의 조선군을 보고 겁먹은 일본군이 용인으로 도망간 것이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1600명 가운데 주력인 1000명은 한양에 주둔하고 있었고, 600명은 용인 부근의 북두문산(北斗門山)과 문소산(文小山) 등에 진을 쳤다.
용인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한 작전회의가 열렸다. 이때 권율은 “적진은 험한 곳에 위치하여 공격하기 어렵다. 한양이 멀지 않고 큰 적이 눈앞에 있다. 국가의 존망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으니 자중하여 만전을 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수의 적들과 칼날을 다툴 것이 아니라 오직 ‘조강’(임진강과 한강의 합류지점)을 건너 임진강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큰 그림을 제대로 본 전략적 판단이었다.
그러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결국 이광은 곽영에게 조방장 백광언(白光彦)과 이시지(李詩之)를 붙여 각각 1000명으로 선봉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게 했다. 이때가 음력 6월 5일이다. 조선군의 집요한 공격에도 일본군은 진지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때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서울에서 주력 1000명을 거느리고 용인에 도착했다. 그리고 기운이 풀려 나무그늘과 풀숲에서 쉬고 있는 조선군을 발견하고 동쪽 측면에서 기습 공격을 가했다. 백광언과 이시지가 전사하고 조선군은 놀라서 도망쳤다.
용인전투가 벌어졌던 문수성의 위치는 용인향토문화연구소에 따르면 오늘날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 일대 소실봉으로 추정된다. 다음날인 6월 6일에는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선봉부대가 무너지자 이광의 주력군은 수원 광교산에 진을 쳤다. 이들이 아침밥을 지어먹기 위해 불을 피워 연기가 올라갈 때 갑자기 일본군의 기병대가 급습했다. 일본군의 장수들은 얼굴에 쇠로 된 탈을 쓴 채 백마를 타고 마구 칼을 휘둘렀는데, 앞에 있던 충청병마사 신익이 너무 놀라서 도망치자 나머지 군사들도 앞다퉈 도망을 했다. 이광과 곽영, 경상도순찰사 김수도 지휘권을 팽개치고 냅다 도망쳤다. 지휘관이 다 도망간 것이다.
몇만 명의 군사들이 깔려 죽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는 참담한 광경을 선조수정실록에선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 듯하였다”고 기록했다. 결국 조선군 5만 명(일본 측 기록은 10만 명)은 겨우 1600명의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질서를 유지한 권율만이 부대를 보존하여 약 한 달 후 이치(梨峙)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훗날 행주대첩을 일궈냈다. 이광은 파직되어 유배되었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일약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곧잘 “조선의 장수는 어리석고 무능하다”고 멸시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곧바로 해전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이치전투에서 권율이 승리한 7월 8일 바로 같은 날에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에게 완패를 당하고 만다.
국가 지도층, 전략적 식견 반드시 갖춰야
이 땅에서 용인전투·쌍령전투의 재판(再版)을 막기 위해선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다.
첫째, 국가지도층은 전략적 식견을 가져야 한다. 이광이 군사를 모아 북진계획을 보고했을 때 숫자만 믿고 직접적 방법으로 일본군을 공격하도록 하지 말고 원정군의 약점인 보급품을 탈취하거나 게릴라전 형태로 적을 괴롭히는 간접적 방식도 고려해야만 했다. 코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술가는 많아도 큰 그림을 그리는 전략가가 적은 것이 언제나 문제다. 둘째, 어떤 경우든 훈련되지 않은 백성을 전쟁터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죄악이다. 조선의 민병들은 숫자만 많았지 호미나 낫을 들었던 농민이나 노비였다. 공자는
그러나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적어도 리더는 그들과 함께 도망가서는 안 된다. 리더가 훈련받지 못한 백성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이미 리더가 아니다. 같은 상황을 맞으면서 용인전투에는 이광·곽영·김수·신익과 같은 ‘인간’이 있는가 하면 권율 같은 ‘인물’도 있었다.
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물’이 있다. 과거나 오늘이나 그리고 미래에서나 인물이 해답이다. 그런데 문제는 제대로 된 리더는 하루아침에 육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의 1996년 국방연례보고서에 보면 아주 흥미 있는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신형 항공모함을 건조하는 데는 9년이 걸렸다. 신형 전투기를 개발하는 데는 10년이 걸렸다. 중대 선임하사관을 양성하는 데는 17년, 대대장을 양성하는 데는 18년, 대대 주임상사를 양성하는 데는 22년이 걸렸다. 기갑사단장을 양성하는 데는 28년이 걸렸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제대로 된 인물을 만드는 데는 적어도 이만큼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는 각 분야의 바닥부터 단계를 밟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낱 시류에 편승해 졸지에 능력에 넘치는 중책에 앉게 된다면? 평시에는 검증될 일이 적어 잘 모른다. 하지만 위기 발생 시엔 한계가 노출된다. 결국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가 영향력을 미치는 조직을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다.
손자가 말한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과거 역사의 쓰라린 경험을 잊지 마라. 그리고 ‘인간’과 ‘인물’에 대한 공부를 다시 시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