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미사일 위기 40주년인 2002년 10월 아서 슐레진저 박사(오른쪽) 등 존 F 케네디 정부에서 일했던 각료들이 쿠바 아바나의 ‘라 카바나 미사일 위기 박물관’을 방문하고 있다. [중앙포토]
1959년 새해, 쿠바에서는 피델 카스트로가 주도한 반란이 성공해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미국은 충격을 받았다. 플로리다 해안에서 불과 90마일(145㎞) 떨어진 곳에 공산정권의 교두보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흐루쇼프는 62년 9월 ‘소련·쿠바 무기원조협정’을 체결한 뒤 극비리에 60여 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42기의 중거리 미사일과 42대의 장거리 폭격기, 162기의 핵탄두, 5000여 명의 군인·기술자들을 쿠바로 이동시켰다. 10월 14일, 미국의 U-2 정찰기가 쿠바 서부지역에서 거의 완성단계에 있는 미사일 기지를 촬영했다. 이틀이 지난 10월 16일 국가안전보장회의 비상대책위원회(ExComm 위원회)가 소집되었다. 논의된 방안은 세 가지였다. 공중폭격, 육상침공, 그리고 해상봉쇄였다. 직접적인 무력수단으로 사태를 해결하자는 매파와 해상봉쇄를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하자는 비둘기파가 팽팽히 대립했다.
10월 22일 월요일 저녁 7시, 케네디는 TV와 라디오를 통해 차분한 어조로 대국민 연설을 했다.(작은 사진) “지난주, 쿠바에서 핵공격 미사일 기지가 건설 중에 있는 확실한 증거를 포착했습니다…미국은 쿠바에서의 미사일 기지 건설을 서반구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할 것이며, 소련이 미국에 공격을 가할 경우 미국은 소련에 대해 전면전도 불사할 것입니다….” 그러고선 쿠바에 무기를 운반하는 모든 선박에 대해 해상봉쇄를 단행한다고 선언했다. (당시 케네디의 표현은 ‘봉쇄’를 의미하는 blockade 대신 ‘격리’라는 뜻의 quarantine이었다)
또한 14일 이내에 쿠바에 설치된 미사일을 철수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소련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왔다. 흐루쇼프는 소련의 핵미사일 부대에 비상경계령을 내렸고, 쿠바로 향하고 있던 선박들에 멈추지 말고 계속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크렘린 최고간부회의를 소집해선 “이것은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쿠바에 건설 중인 미사일 기지가 그대로 있었다. 해상봉쇄로 미사일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백악관에서는 다시 강경론에 힘이 실리면서 무력으로 쿠바를 공격하자는 주장이 거세졌다. 10월 26일 케네디는 흐루쇼프로부터 한 통의 서신을 받았다.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미사일을 철수하겠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두 번째 서신이 도착했다. “우리는 터키의 미국 미사일 기지도 철수할 것을 원한다.”
이때 쿠바를 정찰하던 미국의 U-2기가 격추돼 조종사 루돌프 앤더슨 소령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비행기를 격추하지 말라고 명령했던 크렘린의 지시가 무시된 것이다. 소련에서도 군 통수권이 흔들리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강경파에 의해 쿠바에 대한 공중폭격이나 상륙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틀 후인 월요일을 D데이로 정해 대통령의 명령만 기다리는 상태였다.
보복하고 확전할 것인가? 하지만 케네디는 냉정하고 신중했다. 그리고 소련의 타협안 중 첫 번째 안을 받아들인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곧 소련의 대답이 날아왔다. “우리는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겠다.” 1962년 10월 28일이었다, 전 세계가 안도의 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흐루쇼프의 답신을 받은 케네디는 방송에서 위기의 종식을 알렸다. 전문가들은 만약 당시 핵전쟁이 벌어졌다면 6분 내에 2500km 반경의 미국 본토가 초토화되었으며, 미·소 양국에서 1억 명, 유럽에서도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위기 처리과정에서 주목할 두 가지 교훈을 보자. 첫째, 최종 결정권자는 고정관념에 빠져서 그릇된 판단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케네디는 인지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베를린 가설(假說)’ 혹은 ‘베를린 프레임(frame)’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기만의 가설이나 틀에 빠지면 벗어나기 어렵다. 똑똑할수록, 합리적일수록 이런 틀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더욱 어렵다. 케네디는 “베를린은 서구의 고환이다. 서구 국가들을 비명 지르게 하고 싶으면 나는 베를린을 쥐어짠다”고 외쳤던 흐루쇼프의 말에 주목했다. 베를린에서의 협상력을 강화하기 위해 쿠바 사태를 일으켰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흐루쇼프는 쿠바와 베를린의 사안을 별개로 생각했으며 사태 기간 중 단 한 번도 베를린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케네디는 마지막 회의에서까지 베를린 프레임을 버리지 못했다고 하니 한번 각인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둘째,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서로에게 겁을 먹고 있었다. 훗날 재클린 케네디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케네디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해 침실에서 횡설수설했다고 한다. 카스트로 역시 흐루쇼프를 ‘겁쟁이’라고 몰아붙였다. 결국 겁쟁이가 조금 덜한 겁쟁이에게 진 셈이다. 겁 없이 덤빈다고 해서 용기가 아니다. 오히려 겁은 나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굽히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진정한 용기다.
아랫사람 궁지로 몰면 위태로움 닥쳐
손자병법 군쟁(軍爭) 제7편에 보면 여러 경우에서 가장 현명하게 적을 다루는 방법을 기술하고 있다. 적이 높은 곳에 있으면 위를 향하여 싸우지 말아야 한다(高陵勿向). 언덕을 뒤에 두고 있으면 거슬러 오르면서 싸우지 말아야 한다(背丘勿逆). 거짓으로 달아나면 좇지 말아야 한다(佯北勿從). 사기가 왕성한 적은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銳卒勿攻). 병사를 미끼로 유인해서 싸우고자 해도 싸우지 말아야 한다(餌兵勿食). 손자의 이런 말들은 앞뒤를 살피지도 않고 무턱대고 적을 향해 공격할 것이 아니라 처한 상황에 따라 신중하게 대처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바로 뒤에 쿠바 미사일위기와 직접 관련되는 아주 중요한 어귀가 나온다. 돌아가려는 적은 막지 말아야 한다(歸師勿<904F>). 적을 포위했을 때는 한쪽 구멍을 터주어야 한다(圍師遺闕). 적이 궁지에 몰려 있으면 너무 모질게 다루지 말아야 한다(窮寇勿迫). 한 마디로 쫓기는 사람을 너무 궁지로 몰아넣지 말라는 말이다. 쥐도 몰리면 고양이를 물 수 있다. 사람을 너무 몰아세우면 어떤 돌출행동으로 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흐루쇼프는 그 전해에 유엔 석상에서 신발을 벗어 단상을 내리치는 등 돌출행동을 보였던 사람이 아닌가. 케네디는 마지막까지 흐루쇼프에게 굴욕감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가까스로 사태를 수습한 후에 미 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흐루쇼프에게 참을 수 없을 만큼의 굴욕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만약 흐루쇼프가 미국으로부터 커다란 양보를 쟁취했다고 자만하고 싶어 하거든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둡시다. 그것은 패자의 특권입니다.” 결국 케네디는 흐루쇼프의 자존심을 세워주면서 상생(相生)의 길을 돌파구로 찾았던 것이다. 궁지에 몰린 사람을 너무 몰지 말라고 하는 궁구물박(窮寇勿迫)은 궁구물추(窮寇勿追)와 같이 사용된다. 또 다른 말로 조궁즉탁(鳥窮則啄)이 있다. ‘새가 쫓겨 막다른 곳에 이르면 도리어 상대방에게 대들어 쫀다’는 말이다. 순자에 나오는 이 말에는 울림이 있다.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노나라 정공(定公)을 모시고 있을 때였다. 정공이 그의 마부 동야필(東野畢)의 말 부리는 솜씨를 칭찬했는데 안연이 수긍은 하면서도 동야필이 앞으로 말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정공은 몹시 언짢았는데 안연이 물러가자 주위 사람에게 '군자는 남을 비방하지 않는다더니 이제 보니 군자도 남을 비방하는군'이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동야필이 말을 잃어버렸다. 정공이 안연을 불러서 어떻게 미리 알았는지 묻자 안연은 이렇게 대답했다.
“새가 궁지에 몰리면 쪼고, 짐승이 궁지에 몰리면 할퀴며,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거짓을 부리게 됩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아랫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고서도 위태로움이 없었던 자는 없었습니다(鳥窮則啄 獸窮則攫 人窮則詐 自古及今 未有窮其下而能無危者也).” 토머스 홉즈는 “인간의 두려움은 결국 만인에 대한 무차별의 공격성으로 표출된다”고 말했다. 두려움과 불안감을 해소할 길이 없을 때 사람은 막다른 길에서 이성을 잃고 무차별 공격과 돌출행동을 보일 수 있다는 경고다.
손자가 말한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어떤 경우든 사람을 막다른 길로 몰고 가지 마라.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상생(相生)의 길을 찾아라. 위기일수록 진정한 용기로 승부하라.
세 얼간이 주연 최악의 졸전 ‘발라클라바 전투’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16> 때론 “No”라고 말하라
영국군과 러시아군의 전투 장면을 그린 ‘경기병 여단의 전투’. 리처드 케이튼 우드빌 2세(Richard Caton Woodville Ⅱ)가 그린 그림이다.
발라클라바(Balaclava) 전투는 무능한 리더가 높이 올라갔을 때 얼마나 조직에 악영향을 주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이 전투는 크림 전쟁 당시 1854년 10월 영국과 러시아가 벌인 전투다. 전투 과정에서 어이없는 경기병 여단 돌격 사건이 일어나서 훗날 ‘영국군 역사상 가장 졸렬한 전투’라고 기록되었다. 당시 영국은 매관매직이 합법적이었기 때문에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귀족들이 무분별하게 장교직을 돈으로 샀고, 전쟁 경험이나 지식도 없이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루컨 경인데 그는 무능할 뿐 아니라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평소 미워했던 매제 카디건 경을 직속 부하로 두기도 했다. 카디건 경은 오늘날 카디건(cardigan)이라는 옷을 유행시킨 장본인이다. 이들은 그저 멋진 군복과 반짝이는 훈장밖에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들을 지휘하는 총사령관 래글런 경이었다. 무능한 데다 국제정세에 대한 감각마저 없어 동맹국인 프랑스조차 적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지금부터 이 세 사람 래글런, 루컨, 카디건이 연출하는 해프닝을 주의 깊게 보기 바란다.
1854년 10월 25일 오전, 1만1000명의 러시아 보병 부대가 38문의 대포 지원을 받으며 발라클라바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해 왔다. 기병사령관 루컨 경은 래글런 경에게 급히 보고했으나 그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러시아군의 공격이 단지 속임수이고 주력부대는 세바스토폴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래글런 경은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장교 부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노닥거리며 소풍을 즐기러 온 사람처럼 행동했다. 다음날 아침, 러시아군은 상대적으로 약한 투르크군이 배치된 요새를 집중 공격해 7문의 대포를 빼앗았다. 러시아군은 발라클라바와 항구를 점령해 연합군의 보급로를 막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레글런 경은 전투 전체를 통해 네 번의 명령을 하달했다. 첫 번째 명령이다. “기병들은 투르크군이 있는 요새의 두 번째 열 좌측에 포진하라.” 그런데 그 명령을 받은 기병사령관 루컨 경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를 못했다. 레글런 경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때는 두 번째 열 좌측이 잘 보였지만 현지에 있는 루컨 경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잔뜩 짜증이 난 루컨 경은 심통을 부리며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기병대를 바깥쪽으로 이동시켰다. 명령은 명령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발라클라바로 들어가는 계곡의 입구는 기병대도 없는 겨우 550명의 스코틀랜드 제93 하이랜더 부대만 남았다. 러시아군이 공격하자 겁이 난 투르크군은 산으로 도망갔고, 역사에 ‘강철의 붉은 부대’로 기록된 제93 하이랜더 연대의 군인들은 그들을 맞아 용감히 싸웠다. 착검한 보병들이 서로 얽혀 난전을 벌였다.
이때 레글런 경은 두 번째 명령을 내렸다. “드래군 8개 대대를 급파하여 흔들리고 있는 투르크군을 지원하라.” 그러나 이 명령이 전달된 것은 투르크 군이 도망간 뒤였다. 그럼에도 드래군 대대의 스칼릿 장군은 이 명령을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그런데 군대를 이동시키려면 그들보다 열 배나 넘는 4000명의 러시아 기병 정면으로 가로질러야 했다. “전군 앞으로 돌격!" 300명의 영국군은 정신 나간 듯이 러시아 군의 대열 속에 뛰어들어 권총을 쏘고 칼을 마구 휘둘러 댔다. 혼전이었다.
그런데 불과 500m 지점에 있던 카디건 휘하의 영국 경기병대 600명은 그저 보고만 있었다. 말로 달려서 1분! 곧바로 지원했다면 전세는 확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상부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카디건 경은 수염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후일 그는 군사법정에서 “루컨 경이 어떤 일이 있어도 현 위치를 떠나지 말고 러시아 군이 공격해 올 때만 방어를 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러시아군이 공격해 오지 않아서 그대로 있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의외로 용감하게 싸우는 드래군 기병대의 기세에 눌려 러시아군은 코스웨이를 가로질러 뒤로 물러갔다.
이때 래글런 경은 이 기회를 살리면 요새를 탈환하고 잃어버린 7문의 대포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 루컨 경에게 세 번째 명령을 내렸다. “기병대는 이 기회를 살려 코스웨이 고지를 탈환하라. 이미 두 개의 전선을 형성하라는 명령에 따라 진격하고 있는 보병들이 기병대를 지원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명령이 루컨 경에게 도달했을 때는 문장의 형식이 달라져서 엉뚱한 의미로 전달되었다. 즉 기병대를 경기병대와 중기병대로 나누고, 노스밸리 쪽과 코스웨이 쪽의 두 전선으로 각각 진격하라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루컨 경은 우물쭈물하며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레글런 경은 러시아 군이 대포를 움직이는 것을 목격했다. 네 번째 명령이 떨어졌다. “기병대는 재빨리 전방에 있는 적군을 공격하여 대포를 운반해 가지 못하게 하라.” 다시 이 명령을 받은 루컨 경은 당혹스러웠다. 낮은 곳에 있었던 그에게는 러시아군도 보이지 않았고 대포 또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놀란 대위가 속이 터지듯이 퍼부었다. “적은 저기에 있습니다. 대포도 저기 있으니 즉시 공격해야 합니다.” 하급 장교의 성화에 자존심 구긴 루컨 경은 할 수 없이 부지휘관 카디건 경에게 경기병대를 끌고 노스밸리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그곳은 러시아군 보병 1만1000명과 60문 이상의 포대가 있는 데다 삼면이 포위된 공간이었다. 진격한다는 건 그야말로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는 자살행위였다.
그러나 루컨 경은 총사령관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대로 시행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기병 부대, 전방을 향해 진격!” 불과 673명의 기병이 직격(直擊)했다. 이것이 훗날 ‘영국군 역사상 가장 졸렬한 전투’로 기록되는 ‘경기병 여단 돌격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51%에 해당하는 기병 345명이 전사하고 결국 후퇴하게 된다. 불과 20분 만에 일어났던 참사였다. 연합군인 프랑스가 보다 못해 지원하여 겨우 전멸만은 면했다. 훗날 시인 앨프레드 테니슨은 ‘경기병대의 돌격(Charge of Light Brigade)’이라는 시로 그들을 기렸다. 군사청문회에서 래글런 경은 자신의 부관이 네 번째 명령을 잘못 받아 적었다고 책임을 회피했고 명령을 받아쓴 에어리 장군은 이렇게 답변했다. “전쟁에서는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전투명령보다 더 중요한 ‘싸움의 법칙’
손자병법 구변(九變) 제8편에 보면 여러 상황에 따른 장수의 분별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길이라도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다(途有所不由). 군대라도 치지 말아야 할 군대가 있다(軍有所不擊). 성이라도 공격하지 말아야 할 성이 있다(城有所不攻). 땅이라도 다투지 말아야 할 땅이 있다(地有所不爭). 그리고 군주의 명령이라도 듣지 말아야 할 바가 있다(君命有所不受).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마지막 어귀인 ‘군명유소불수’다. 군주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무서운 항명이다. 그럼에도 손자는 군주의 명령도 거부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떤 경우에 군주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가? 위에서 차례로 언급한 네 가지 경우, 즉 가지 말아야 할 길, 치지 말아야 할 군대, 공격하지 말아야 할 성, 다투지 말아야 할 땅에 대해 군주가 잘 모르고 명령했을 때는 듣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현지사정은 현장에 있는 지휘관이 잘 안다. 그런데 멀리 떨어져 있는 군주가 현지사정도 모른 채 기분 내키는 대로 명령을 내린다면 현장 지휘관이 듣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총사령관 래글런 경은 현장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전망이 좋은 높은 곳에 온갖 화려한 치장을 한 연단 위에서 멀찍이 전장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으로 직접 본 장면과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네 차례의 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특히 현장에 있는 지휘관의 판단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데 자신의 부대가 마구 유린당함에도 불구하고 총사령관의 명령이라고 루컨 경과 카디건 경은 곧이곧대로 이행했다. 전형적인 책임회피적인 행동이다. 잘못될 경우 그들은 ‘단지 명령대로 행했을 뿐’이라는 변명의 구실을 대려 했을 것이다. 무능의 소치다. 잘못을 알고도 ‘노’(No)라고 말할 수 없는 리더는 이미 리더가 아니다. 그저 생존을 위한 주구(走狗)다.
손자병법 지형(地形) 제10편에 보면 구변편에 이어 군주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이 다시 제시되고 있다. ‘싸움의 법칙(戰道)’에 비추어 볼 때 반드시 이길 수 있다면 비록 군주가 싸우지 말라고 해도 반드시 싸우는 것이 가하고, ‘싸움의 법칙’에 비추어 볼 때 이기지 못하면 군주가 반드시 싸우라고 해도 싸우지 않는 것이 가하다(戰道必勝 主曰無戰 必戰可也 戰道不勝 主曰必戰 無戰可也). 바로 이것이다. ‘싸움의 법칙’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돈으로 명예와 장교직을 샀던 래글런 경이나 루컨 경이나 카디건 경은 이런 ‘싸움의 법칙’을 알지 못했다. 때로 적보다 무서운 것은 내 편에 있는 무능한 지휘관이다. 발라클라바 전투는 이들 세 얼간이가 빚은 최악의 졸전으로 영국인의 기억에 깊이 남아 있다.
손자가 말한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지금 있는 그 자리가 능력에 맞는 자리인가? 만약에 능력에 버거운 자리라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빨리 그 자리를 떠나든지 아니면 불철주야 공부해서 능력을 높여라. 능력은 돈으로도 살 수 없지 않은가.
5만이 34만 섬멸…전쟁사 가장 현명한 '이중 포위'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17> 리더의 자리
말을 탄 베르킨게토릭스(왼쪽)가 카이사르를 찾아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고 있다. 1899년 리오넬-노엘 루와이예가 그린 그림이다.
“누구에게나 모든 게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밖에는 보지 않는다.” 카이사르의 유명한 말이다.
몽테스키외는 그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카이사르는 행운을 타고났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비범한 인물이 뛰어난 자질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결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그는 어떤 군대를 지휘했어도 승리자가 됐을 것이고,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도 지도자가 됐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다음의 다섯 가지다. 지성,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 지속적인 의지. 카이사르만이 이 모든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다.” 역사에는 수많은 영웅과 위인이 있지만 카이사르만큼 고른 평가를 받고 있는 이도 드물 것이다. 그가 치렀던 여러 전쟁 중 알레시아(Alesia) 공방전 하나만 보더라도 왜 이런 평가가 나왔는지 알 수 있다.
7년간 지속된 갈리아 전쟁은 기원전 52년 9월의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사실상 끝났다. 이 공방전은 카이사르의 5만 병력이 베르킨게토릭스가 중심이 된 8만의 농성군과 26만의 지원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다. 카이사르의 천재적 군사능력이 발휘된 전투이자 전사(戰史)상 전대미문의 이중포위망 구축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이 이야기는 카이사르가 저술한
알레시아는 현재의 프랑스 중부 디종과 오를레앙을 잇는 선상에서 디종에 좀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구릉지대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53년과 기원전 52년의 겨울 동안 이탈리아 북부에 머물면서 속주를 통치하고 있었다. 이때 갈리아 아르베니족의 새로운 족장으로 추대된 젊은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에 맞서 갈리아 부족 전체가 총궐기해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고 호소하며 세력을 규합했다.
성벽 두 겹으로 쌓는 이중포위망 전략
반란의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곧바로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들어가 반란군 축출에 나섰다. 기원전 52년 여름, 베르킨게토릭스는 8만 명을 이끌고 알레시아 요새로 철수해 농성전을 준비하는 한편 모든 갈리아 부족에 연락해 알레시아로 집결하게 했다. 카이사르는 즉각 알레시아 요새를 둘러싸는 포위망을 구축했는데 매우 특이하게 두 개의 성벽으로 구축했다. <작은 그림 참조>
첫 번째 성벽(내벽)은 농성군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 성벽(외벽)은 바깥에서 오는 지원군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두 성벽 사이의 120m 중간지대에 로마군이 위치했다. 어느 역사학자는 이 포위망을 두고 ‘전쟁 역사상 가장 현명한 포위공격 책략’이라고 평했다. 갈리아 기병들은 50개의 부족에서 25만의 보병과 8000여 기의 기병을 모았다.
다음 날 바깥의 갈리아군은 공성기구를 보강해 밤을 틈타 공격했지만 로마군의 강력한 포위망을 뚫는 데 실패하고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이때도 요새 안에서 농성군이 호응했지만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전투가 벌어질 때면 카이사르는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나타났고, 그가 모든 곳에서 다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10월 2일, 갈리아군은 로마군의 약점을 발견했다. 북쪽 성벽이 허술하게 연결돼 있었던 것이다. 갈리아군은 베르킨게토릭스의 사촌인 베르카시베라우누스에게 6만을 주어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게 했고, 정오에는 세 군데에서 동시다발적이고 파상적인 총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높은 망루에 올라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모든 사람이 보이도록 지휘했고, 부장 라비에누스를 북쪽의 약한 성벽으로 보내 공격을 막게 했다.
갈리아군의 총공세에 포위망의 몇 군데가 뚫렸지만 그때마다 카이사르가 시의적절하게 지원군을 보내 막을 수 있었다, 갈리아군의 한쪽 측면에서 약점을 발견한 카이사르는 직접 기병대와 보병대를 이끌고 성벽 밖으로 나가 그들의 측면을 공격해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북쪽 성벽의 갈리아군은 괴멸했고 베르카시베라우누스는 생포됐다. 기대했던 북쪽 전선이 패하자 바깥으로 나왔던 갈리아군은 다시 요새 안으로 들어갔고, 포위했던 갈리아 지원군도 퇴각하기 시작했다.
냉정한 카이사르였지만 이때만은 흥분해 이렇게 말했다. “만약 아군 병사들이 격투의 연속으로 기진맥진해 있지만 않았다면 적군 전체를 완전히 섬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1만2800명이 전사한 반면 갈리아군은 괴멸에 가까웠다. 5만도 안 되는 병력이 34만이나 되는 적을 괴멸시킨 것이다. 그것도 앞뒤 양쪽의 적을 상대해서였다. 이런 승리는 전쟁 사상 처음이다. 이튿날 베르킨게토릭스는 말을 타고 카이사르를 찾아와 무릎을 꿇었다.
카이사르의 리더십은 여러 각도에서 조명되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공명을 위해 부하들의 희생을 원하지 않았던 리더였다.
그는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피 흘리는 전투를 자제했다. 위기 시에 리더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말해준다. 전세가 불리할 때는 보병 방패를 직접 들고 나가 칼을 휘두르기도 했고, 백인대장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그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기도 했다. 붉은 총사령관 망토를 걸친 카이사르가 최전선을 누비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지만 그의 군단이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가 없는 전쟁터에서도 부하들은 “총사령관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스스로 전의를 북돋웠다.
자신의 말 매어두는
카이사르가 전투 중에 행하는 두드러진 행동이 있었는데, 그가 말에서 내려 말을 어느 한 곳에 매어두는 일이다. 그러면 휘하의 모든 장교도 그들의 말을 그곳에 매어둔다. 어떤 위기에서도 생사를 함께하겠다고 하는 일종의 예식이다. 손자가 말하는 ‘방마매륜’이다. 카이사르가 전례 없이 과감하게 양방향의 성벽을 쌓은 것에도 방마매륜의 깊은 속셈이 숨어 있다. 120m 폭의 좁은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 양방향의 적에게 완전히 포위된 느낌을 공유하며, 서로를 의지하고,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갖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과연 카이사르의 혜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리더도 그 죽음의 가두리 안에 함께 있다는 것이다. 부하들을 사지(死地)에 던져놓고 자신은 바깥에서 구경하는 리더가 있다면 그것은 방마매륜이 아니다.
카이사르의 이중 포위망에서는 북쪽 성벽이 취약했다. 그곳 레아 산의 경사면이 고르지 않아 성벽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여기에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설마 했던 것이다. 허점은 적이 먼저 아는 법, 과연 그곳을 노려 집중 공격한 갈리아군에 밀려 로마군은 무척 고전했다. 카이사르의 초인적 진두 지휘가 아니었다면 로마군은 오히려 참패할 수도 있었다. 지키는 것도 어렵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결정적 허점을 방치하지 마라. 그리고 방심은 언제나 금물이다.
손자가 말한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지금 어려움에 부닥쳤는가? 카이사르의 붉은 망토를 날려라. 단번에 눈에 띄는 망토는 무수한 화살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저 주목받고 자기 자신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면 된다. 축 처진 어깨의 부하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위기 시에 리더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려 한다면 어찌 화살받이가 되는 것을 마다하겠는가. 지금 이 시대는 용기 있는 리더를 원한다.
‘트로이 목마’ 같은 속임수, 노르망디 상륙작전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18> 전쟁과 거짓말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펼치고 있다. 이 작전은 복잡한 준비 과정과 치밀한 전략적 판단을 말해 주는 사례다. [중앙포토]
여자가 화장을 하는 것은 속임수일까? 대체로 남자들은 키를, 여자들은 몸무게를 속인다고 한다. 보이스피싱이 횡행하고 스포츠에서도 승부조작을 하는 세상이다. 카멜레온이 보호색을 바꾸는 것도 생존을 위한 속임수라 할 수 있다. 동물이나 곤충의 세계에서 암컷을 유혹하는 수컷의 온갖 기이한 행동도 종족 번식을 위한 속임수로 볼 수 있다. 거짓말과 속임수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속임수에 대해 연구한 샌타페이 연구소에서는 ‘고의성’ 여부를 두고 둘을 구분한다. 거짓말을 위해선 허위 사실을 여러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알리는 고의성이 필요하지만 속임수는 의도적인 거짓 행위가 없는 상태에서도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과 관점에 따라 구분과 경계가 애매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하나로 묶어 생각하기로 하자.
속임수도 개인 차원에 머물면 그 영향도 개인에서 끝나지만 범위가 확장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전쟁에서의 속임수는 국가 존망과 직결되는 속임수다. 그리스 신화 속의 ‘트로이 목마’는 군사작전에서 속임수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고전적인 예다. 수년에 걸친 전쟁이 단 한 번의 속임수로 끝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군사적 속임수에 대해 말했다. “어떤 행동이든 속임수를 사용하는 건 혐오스러운 일이지만, 전쟁 수행 과정에서 책략을 사용하는 행위는 칭찬할 만하고 멋진 일이다. 또 책략으로 적을 굴복시키는 사람은 무력으로 적을 굴복시키는 사람 못지않게 훌륭하다.”
가짜 건물 세우고 허위 라디오 메시지 송신
역사적으로 가장 거대한 규모의 군사적 속임수가 있었다. 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한 속임수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프랑스의 노르망디 반도로 미국·영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1944년 6월 6일 벌인 상륙작전이다. 작전명은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이다. 유럽 진공의 시작이었으며 소련 입장에서는 그들이 요구한 이른바
보디가드 작전은 다섯 개로 이루어졌다. 첫째, 포티튜드 노스(Fortitude North)작전이다. 노르웨이 상륙작전을 실행함으로써 연합군이 북쪽에서 덴마크를 경유해 독일을 공격할 것처럼 속이는 작전이다. 속아넘어간 독일군은 중앙유럽에서 20만 명이나 빼내 노르웨이에 주둔시켰다.
둘째, 포티튜드 사우스(Fortitude South) 작전이다. 프랑스의 파드칼레 지역으로 상륙할 것처럼 속이는 작전이다. 이 작전에 연합군은 특히 많은 신경을 썼다. 미군은 가짜 건물들을 만들고 영국군도 허위 라디오 메시지를 송신했다. 상륙작전을 수행할 주력부대로 알려진 가짜 부대의 사령관에 당시 독일군에게도 잘 알려진 패튼 장군을 내세웠다. 속임수를 더하기 위해 칼레에 집중 공습을 가해 독일군으로 하여금 상륙 목표가 칼레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또한 포티튜드 작전을 위해 스카이 작전이라는 또 다른 기만작전이 실시되었는데, 스코틀랜드에서 무선교신을 사용해 상륙지역은 노르망디 혹은 덴마크가 될 것이라고 독일로 송신했다. 이 속임수로 독일군 사령부는 혼란에 빠졌고 어디가 정확한 상륙 목표인지 고심했다. 결국 스카이 작전의 무선송신을 들은 독일군은 이를 칼레 상륙을 속이기 위한 연합군의 기만작전이라 생각해 노르망디보다는 칼레 방면의 수비를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이들 부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까지도 그 자리를 굳게 지켰다.
셋째, 체펠린(Zeppelin)작전이다. 이 작전은 지중해의 동부와 중부에 배치된 연합군의 규모를 과장함으로써 독일군을 그 지역에 묶어두어 실제로 상륙작전이 이루어지는 중앙유럽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속임수다. 이 작전도 성공해 당시 지중해의 연합군은 38개 사단이었는데 독일군은 끝까지 71개 사단으로 믿었다.
넷째, 벤데타(Vendetta)작전이다. 프랑스 남부에 가짜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에 있는 독일군으로 하여금 북쪽의 노르망디로 병력이 증원되는 것을 막았다.
다섯째, 아이언사이드(Ironside)작전이다. 프랑스 비스케이만(灣) 지역에 대한 가짜 상륙작전이다. 이 작전은 연합군의 제한된 능력과 물적 자원의 부족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더구나 비스케이만은 상륙지역으로는 부적합하다고 독일군 사령부가 판단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에는 이렇게 많은 속임수가 있었다. 적도 바보가 아닌 이상 결국에는 누가 교묘하게 속이며 누가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속임수 작전은 쌍방의 치열한 두뇌싸움이라 할 수 있다.
상대방 흔들어 허를 찌르는 14가지 속임수
손자병법 시계(始計) 제1편에 ‘전쟁은 속임수다’(兵者詭道也)라는 말이 있다. 전쟁 자체가 속임수(詭道)라는 뜻보다는 전쟁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속임수가 많다는 의미다. 이어서 14가지의 각종 속임수가 열거되어 있다. 이 내용을 깊이 이해하면 세상의 어떤 속임수에도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
①능력이 있으면서도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能而示之不能). ②사용하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用而示之不用). ③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近而示之遠). ④멀리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遠而示之近). ⑤이로움을 탐하면 이로움을 보여주어 꾀어낸다(利而誘之). ⑥혼란하면 그 틈을 타서 취한다(亂而取之). ⑦상대가 역량이 충실하면 대비한다(實而備之). ⑧상대가 강하면 피한다(强而避之). ⑨상대가 기세등등하면 격분시켜 흔든다(怒而撓之). ⑩상대가 낮추면 교만해지도록 한다(卑而驕之). ⑪상대가 편안하게 있으면 피곤하게 만든다(佚而勞之). ⑫상대가 서로 친하면 이간시킨다(親而離之). ⑬준비되지 않은 곳을 공격한다(攻其無備). ⑭예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나간다(出其不意).
여기에 열거된 14가지 속임수를 잘 보면 전부가 속임수만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상대방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직접적인 속임수도 있지만(①∼④), 상대방을 교란시켜 약화시키는 방법(⑤⑥⑨⑩⑪⑫), 그리고 상대방의 강점을 대비하거나 회피하는 방법(⑦⑧)도 동시에 제시된 것이다. 결국 최종 지향점은 이런 활동들을 통해 상대방의 판단을 흔들어 놓고 전혀 준비되지 않은 곳(⑬攻其無備)과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법(⑭出其不意)으로 공격한다는 것이다.
손자는 속임수를 합법적인 전쟁의 수단으로 보고 비중을 많이 두었다. 반면에 클라우제비츠는 속임수가 투자 대 효과 측면에서 실용적인 가치가 없다고 폄하하면서 “지휘관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자질은 잔꾀를 부리는 재주보다 정확하고 날카로운 이해력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속임수는 단지 ‘잔꾀’에 불과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미군 역시 군사적 속임수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중국의 마오쩌둥이나 북베트남의 보 구엔 지압은 손자의 가르침에 충실해 교묘한 속임수로 그들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런 점에서 손자의 통찰력이 클라우제비츠를 능가하고 있다.
전시 군사작전에서의 속임수와 평시 생활 가운데 사용되는 속임수는 동기와 목적부터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거짓말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는 악의적인 거짓말이다.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한 거짓말로 ‘Black Lie’라고 한다. 중상모략이 대표적인 예다. 둘째는 이타적(利他的) 거짓말이다.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거짓말이다. 포로가 되어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동료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셋째는 선의적인 거짓말이다. ‘White Lie’로 불리는 거짓말로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서나, 고통에 빠진 사람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거짓말이다. 이웃의 아기를 보고 별로 예쁘지는 않지만 “참 예쁘군요”라고 하는 것이나, 가짜 약을 진짜 약으로 믿어 병이 낫는 현상인 플라시보 효과의 경우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다고 우기는 사람은 어떤 유형의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세르반테스가 말한 ‘정직이 최선의 방책’임을 굳게 믿거나 거짓말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이 주는 효용은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땀 흘리는 수고도 없이 그저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확천금(一攫千金)의 모든 유혹은 대체로 속임수, 거짓말, 꼼수일 경우가 많다. 손자가 말한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속임수로 가득한 세상에서 속지 않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한 가지를 명심하라.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불변의 진리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19> 얼치기 리더가 되지 마라
1788년 9월 카란세베스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끼리 자중지란에 빠져 싸우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희대의 살인마 아돌프 히틀러는 한쪽 고환만 있는 성적(性的)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의 광기는 이런 콤플렉스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들에게는 대체로 ‘강한 남자 콤플렉스’가 있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돈 잘 버는 아내를 둔 남편들의 스트레스와 같은 것을 ‘강한 남자 콤플렉스’라고 규정한다. 이는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남성이 우월하고 높은 경제력과 지위를 가져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라 할 수 있다. ‘강한 남자 콤플렉스’가 개인 영역에 국한될 때는 별문제가 없겠지만 국가나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에게 작용할 경우 나라의 운명과 역사의 흐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를 25년간 통치한 요제프 2세였다. 요제프 2세는 계몽주의자 볼테르의 영향을 받은 계몽주의 옹호자였다. 교육제도의 정비, 농노제의 폐지, 법 앞에서의 종교적 평등, 언론의 자유, 유대인 해방 등 통치 전반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에겐 결정적인 콤플렉스가 있었다. 일종의 ‘강한 남자 콤플렉스’였다. 그는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처럼 전쟁에서의 천재라고 하는 이름을 날리고 싶은 것이었다. 그 욕망을 채우고자 당시 평화로웠던 유럽 대륙에 전쟁의 불길을 붙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카란세베스 전투는 1788년 9월 19일에 벌어졌다. 이 전투는 술 한 통 때문에 어이없이 패배한 전투로 역사에 남아있다. 이 전투가 있기 전의 상황을 살펴보자. 어느 날 갑자기 요제프 2세는 비잔틴 제국의 멸망 이후 투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던 발칸 제국을 구원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이 소식을 들은 주변국들은 황당했다. 이미 오래전에 멸망한 고대의 나라를 구원하겠다니! 그동안 겨우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유럽 각국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프리드리히가 극구 만류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는 곧 스웨덴과 군사조약을 맺은 다음 발칸 제국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6개 군단, 24만여 명의 보병과 3만7000여 명의 기병을 갖춘 막강한 군세였다. 이때 오스트리아 군대 역사상 가장 무능한 지휘관들이 각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중 쓸 만한 지휘관으로 라우돈 원수가 있었지만 너무 나이가 많았기에 후방으로 빼버렸다. 그리고 최고사령관으로 ‘예스맨’인 리치를 선택했다.
리치는 먼저 1788년 5월 16일에 베오그라드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기다렸던 러시아의 지원군이 끝내 오지 않았다. 결국 공격 하루 전날에 공격 계획을 취소하고 말았다. 홀로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철수명령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때 병사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발생했다. 말라리아·이질 등으로 병사의 태반이 고통받고 있었고 무려 3만3000명의 정예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설상가상으로 군수물자까지 떨어져 갔다.
적군 오기도 전에 아군끼리 총질로 자멸
기회를 만난 투르크군은 베오그라드에 증원군 9000여 명을 파병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군의 머리 하나당 금화 10냥을 준다는 공약을 걸었다. 위기를 만난 요제프 2세는 급히 후방에 있던 라우돈 장군을 불러들여 지휘권을 맡겼다. 라우돈은 프리드리히마저 쩔쩔매게 만든 명장이었다. 그가 7월 18일 부대를 지휘한 지 단 하루 만에 두비차 요새를 점령했지만 나머지 지휘관들의 무능으로 인해 전쟁의 대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베오그라드를 포기해야 했다. 그때 10만 명의 투르크군이 이동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오스트리아군에게는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투르크군을 치기 위해 오스트리아군은 카란세베스 부근에 진을 쳤다.
1788년 9월 19일 달빛도 없는 밤이었다. 오스트리아 경기병의 후사르 분견대는 전위대가 돼 카란세베스에 있던 티미스 다리를 건넜다. 강 맞은편에 도착한 그들은 수색을 했지만 투르크군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왈라키안 유랑족이 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기병대에게 시냅스 주(酒)와 여자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기병들은 신이 나서 말에서 내렸고 어울려 술을 퍼 마셨다.
몇 시간이 지나자 첫 번째 보병부대가 다리를 건너왔다. 그들 역시 눈이 휘둥그레져 그 자리에 끼려고 했다. 기병들은 술통 주위를 아예 요새처럼 둘러막고 보병들을 쫓아내려고 했다. 욕설이 오가고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누군가 발사한 총에 한 사람이 쓰러졌다. 잠시 당황하던 그들은 이내 서로 총을 잡고 마구 쏘기 시작했다. 자중지란(自中之亂), 같은 편끼리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그때 어떤 보병이 “투르크! 투르크!”라고 소리쳤다. 원래 의도는 투르크군이 몰려온다고 하면 술 취한 기병들이 놀라 도망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엉뚱하게도 보병들까지 그 소리에 놀라 혼비백산했다. 장교들은 이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뛰어다녔다. “멈춰, 이 자식들아, 멈추란 말이야!”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이 말 때문에 혼란은 더욱 증폭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헝가리인·롬바르디아인·슬로바키아인 등 다민족으로 구성된 군대였기 때문이다. 독일어를 쓰는 장교들은 “멈춰!”라는 뜻으로 “Halt!”를 외쳤으나, 독일어를 모르는 다른 민족의 군인들에게는 그 발음이 투르크군이 신봉하는 “알라!”로 들렸던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투르크군이 온 것으로 착각하고 소리 나는 방향으로 마구 총을 쏴댔다. 더욱이 진영 가운데 있던 군마들이 놀라서 울타리를 넘어 오스트리아군 진영을 짓밟고 다녔다. 이것을 투르크 기병대의 야습으로 착각한 포병 지휘관은 그곳을 향해 마구 발포를 해댔다. 당시에 대포는 890여 문이 있었고 포탄은 17만6000발이 있었다. 얼마나 쏴댔는지는 모르나 엄청난 포탄이 작렬했을 것이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도 쿨쿨 잠을 자고 있던 요제프 2세는 급히 외딴 마을로 피신했다.
이틀 뒤에 투르크의 대공이 이끄는 군대가 카란세베스 마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앞에는 오스트리아 군대 1만 명의 사망자들과 부상자들이 누워 있었다. 술 한 통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 서로 때리고 죽였던 오스트리아군 병사들이다. 대공은 그들을 보면서 한마디 던졌다. “정말 무언가 끔찍한 기습이 있었는가 보군.”
사람 잡는 헛똑똑이보다 바보가 나아
손자병법 행군(行軍) 제9편에 보면 평소 조직의 규율에 대한 의미 있는 말이 나온다. 장수가 평소에 행하던 대로 명령해 부하들을 가르치면 부하들이 복종할 것이다(令素行以敎其民 則民服). 그러나 평소에 행하지 않던 것을 명령해 부하들을 억지로 가르치려 한다면 부하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令素不行以敎其民 則民不服). 평소에 행하던 대로 명령을 하면 부하들이 기꺼이 복종하는 이유는 그들과 더불어 마음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令素行者 與衆相得也).
군대나 회사 같은 조직사회에는 나름대로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규율이 있다. 그런데 그 규율이 평소에 잘 지켜지도록 습성화가 되었다면 어떤 상황이 터졌을 때 구성원들은 무엇을 해야 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될 것인가를 명확히 구분해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 돌발 상황을 만나도 평소에 그러했던 것처럼 리더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하게 된다. 반면 평소에 전혀 지켜지지 않았던 어떤 행동을 갑자기 어떤 상황에서 강요하게 되면 구성원들이 그 말을 들을 리 없다. 그래서 평소에 규율을 지키는 것을 습성화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카란세베스에서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평소 병사들의 해이한 마음자세와 흐트러진 규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술과 여자에 대한 교육이 소홀했다.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많은 전쟁터에선 작은 유혹에도 쉽게 넘어갈 수 있다. 리더가 이를 잘 파악해 평소부터 엄격하게 군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금기사항을 교육시키고 습성화시켰다면 그날 밤의 추태는 없었을 것이다.
큰 일은 항상 작은 일에서 비롯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체로 남자가 실수하게 되는 원인은 술과 돈과 여자다. 이것만 이길 수 있다면 대부분의 큰 사고는 막을 수 있다. 패가망신(敗家亡身), 평생을 쌓은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술과 돈과 여자는 ‘강한 남자 콤플렉스’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아예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에겐 ‘강한 남자 콤플렉스’는 별 의미가 없다. 생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쓸데없는 짓은 안 한다. 대체로 이런 콤플렉스에 빠져들기 쉬운 사람은 스스로 어느 정도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우리말에 ‘얼치기’란 단어가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치를 말한다. 언제나 얼치기가 일을 낸다. 지도자 중에도 얼치기 지도자가 있다. 요제프 2세가 전형적인 사례였다. 이들의 특성은 엉뚱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분에 넘치는 일을 질러대는 것이다.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를 집필한 에릭 두르슈미트는 “평화로운 시절이나 나라가 서서히 쇠퇴할 때는 지도자들에게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얼치기 지도자는 일만 잔뜩 벌여놓고 뒷감당이 안 될 때면 슬그머니 빠져나간다. 그러면 아무런 권한도 없고 특별히 책임이랄 게 없는 국민들은 그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강한 자’는 어떤 자인가? 강자에게는 더 강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약해질 수 있는 자가 진짜로 강한 자다. 손자가 말한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진정한 의미의 강한 자가 되라. 그러나 얼치기는 되지 말라. 아주 똑똑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바보가 되라. 그게 자신과 여러 사람을 살리는 길이다.
번개 치듯…105초 만에 끝낸 엔테베 구출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20> 勢를 타라
세계를 경악하게 한 1976년 이스라엘 특공대의 아프리카 우간다 엔테베 공항 인질 구출작전의 상황을 묘사한 그림이다. 아래 작은 사진은 당시 엔테베 공항의 실제 모습. [JewishJournal.com]
모형 공항서 맹훈, 20m 초저고도 비행
여기서 동료 3명과 더 합류했다. 이들은 각국에 수감 중인 50여 명의 동료들을 석방해 달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리고 7월 1일 오후 2시까지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스라엘 정부를 더 압박하기 위해 유대인을 제외한 인질을 풀어주었다. 이때 풀려나던 프랑스인 기장과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보호하는 일이 자신들의 의무라며 비행기에 남았다. 이제 106명(승무원 12명 포함)이 인질로 남았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는 중요한 원칙이 있다. “테러리스트와는 어떤 협상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부 측은 테러범과 협상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애초부터 천명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내부에서 인명을 중시하자는 여론이 도는가 하면, 인질의 가족들이 격렬히 항의하며 총리실 난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이스라엘 정부는 인질범들과 협상을 시작했고, 협상시한은 7월 4일로 연장됐다. 동시에 내부에서는 국방장관 시몬 페레스의 총지휘 아래 엔테베 구출작전을 계획했다.
7월 3일 오후 3시30분 C-130 허큘리스 수송기 4대, 보잉 707 2대, 최정예 특공요원 100명이 출발했다. 작전명은 번개라는 뜻의 ‘선더볼트’. 계획 착수에서 집행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6일이었다.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불과 20m가 안 되는 초저고도로 홍해 위를 날았다. 이스라엘 공군사령관과 총참모부의 작전사령관이 다른 비행기에 타고 상공에서 이들을 지휘했다. 이스라엘 측은 협상에 따라 석방한 죄수들을 데려다주는 것이라고 속이고 특공대를 태운 C-130 허큘리스 수송기와 지원 항공기를 우간다 상공으로 진입시켰다.
이때 다시 한번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모든 조명을 끈 상태로 착륙했다. 조명 없이 시도하는 위험천만한 착륙은 프로토 타입의 야시경을 착용하고 시나이 반도에서 야간 착륙시험에 성공한 경험 덕택에 성공한다. 착륙한 뒤 깊은 밤을 틈 타 특공대는 재빨리 작전을 전개했다. 특공대는 검은색 벤츠 승용차와 4륜차 몇 대에 나누어 탔다. 그리고 마치 이디 아민의 행차인 것처럼 행세하고 인질이 있는 곳으로 접근하려 했다. 그러던 도중에 이디 아민이 자동차를 흰색으로 바꿨다는 것을 기억했던 우간다 경비병이 의심을 품었다. 이스라엘 특공대는 즉시 우간다 경비병을 사살하고 터미널로 달려갔다. 이때 터미널 외부에서 마주친 2명의 인질범을 사살했다.
공항의 전기를 끊어서 순간적으로 암흑 상태를 만든 후 이스라엘 특공대는 곧바로 터미널 내부로 돌입했다. 그곳에는 인질범과 인질들이 함께 있었다. 깜깜한 가운데 표적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이때 특공대는 유대인만 알아듣도록 헤브라이어로 소리쳤다. “엎드려!” 이때 특공대는 못 알아듣고 서있었던 인질범을 정확한 사격으로 쓰러뜨렸다. 경비병 사살로부터 내부의 인질범 소탕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분 45초! 이때 우간다의 경비병들이 몰려왔고 특공대는 이들을 향해 대전차 미사일과 기관총을 퍼부었다.
또한 특공대의 일부는 C-130 허큘리스 수송기에서 보병전투차량을 몰고 나와 우간다군의 미그 전투기 11대를 파괴했다. 추격을 우려해서였다. 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의 시간은 53분! 작전 중 특공대원 한 명이 전사했고, 우간다군은 40여 명이 죽었다. 유일하게 죽은 특공대원은 바로 지휘관 요나탄 네타냐후 중령이었다. 30세. 그의 동생은 현재 이스라엘 총리인 베냐민 네타냐후다. 이스라엘의 군대에는 ‘돌격’이란 명령이 없다. 오직 ‘나를 따르라’가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진두에서 지휘하다가 전사한 요나탄 네타냐후 중령을 기려 이 작전을 ‘요나탄 작전’이라 부른다.
“돌격” 대신 “날 따르라”…지휘관만 전사
엔테베 구출작전은 그야말로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작전이었다. 인질범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작전이었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손자병법 병세(兵勢) 제5편은 아주 빠르게, 아주 거세게 몰아칠 때 얻을 수 있는 세(勢)를 말하고 있다. 세차게 흐르는 물이 돌을 떠내려가게 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은 세다(激水之疾至於漂石者 勢也). 사나운 새가 공격을 해서 먹이의 뼈를 꺾는 것이 절이다(<9DD9>鳥之擊 至於毁折者 節也). 이러므로 잘 싸우는 자는 그 세가 험하고 그 절이 짧다(是故善戰者 其勢險 其節短).
중국 병법에서 세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세를 얻어야 승리하며 세를 얻지 못하면 패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세를 얻을까 고민하고 훈련한다.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인 ‘파죽지세(破竹之勢)’는 특히 유명하다. 세는 아주 거세고 빠를 때 나온다. 태권도 선수가 벽돌을 격파할 때처럼 아주 짧은 시간에 절도 있게 힘을 가할 때 세는 극대화한다. 즉 기세험(其勢險)과 기절단(其節短)이 동시에 딱 들어맞아야 한다. 엔테베 구출작전은 바로 이 두 가지가 정확히 들어맞은 전형적인 작전이라 할 수 있다. 정부조직의 신속한 대응(其勢險)과 과감한 결심(其節短), 그리고 작전부대의 치밀하며 집중적인 훈련(其勢險)과 민첩한 작전수행 및 치명적인 사격(其節短) 등이 작전의 성공요소다. 엔테베 작전에 투입된 특공대는 이스라엘 육군 최정예인 제35공수여단과 특수부대 ‘사이렛 매트칼(Sayeret Matkal)’ 등에서 선발한 대원들이었다. 이들의 훈련 수준은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이 작전에는 운도 따랐다. 특공대가 비행기로 이동할 때 케냐의 레이더망에 잡혔다. 그러나 우간다와 비우호적이었던 케냐는 이 결정적인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다. 정보가 우간다에 전해졌다면 구출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해외에서 억류된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군사작전은 해당 국가의 입장은 물론 국제적·외교적 파장도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사안이다. 이스라엘은 그러나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해야만 국가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600만 유대인이 학살될 때 당신네들은 어디에 있었는가”라고 묻고 있다.
이스라엘은 자국민을 보호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여론이 나쁘고 불가능의 난관에 닥치더라도 목숨을 건다. 한 명의 포로라도 구하기 위해 땅 끝까지 추적하며 무슨 일이든 하고야 만다. 자국민을 결코 포기하는 일이 없다. 이런 조국이었기에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당시에 미국 내 이스라엘 유학생 8000명을 비롯해 유럽과 호주·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이 서둘러 조국을 향해 달려갔다. 학생뿐만 아니라 직장인도 많았다. 런던의 지원자 창구로 사용되었던 렉스하우스는 수백 명의 직장 젊은이가 서로 조국으로 들어가려고 북새통을 이뤘다. 네타냐후 중령은 평소 이런 말을 즐겨했다. “나, 그리고 이스라엘의 청년들은 이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위대한 책임이다.”
연평도 피격사건 이후 한국청소년미래리더연합에서 전국 중·고생 2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참전한다 혹은 돕는다가 19.5%, 해외로 도피한다가 58.1%, 국내에 남는다 21.6%,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고 응답했다. 해외로 도피하려는 사람이 과반수다. 조국이 내게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조국이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곰곰이 씹어보게 하는 내용이다. 손자가 말한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구성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내가 구성원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를. 위기 시에 충성은 평시의 신뢰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