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국방개혁 실패의 역사

醉月 2012. 2. 20. 08:07

자료출처 : D&D Focus

 

1. 노태우의 레임덕을 악용 818계획 좌초시킨 육군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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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작전실패의 충격


1981년 미군의 이란 인질구출 작전, 일명 이글 클로우 작전은 8명의 미군이 사망하는 피해만 입고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처참한 실패였다. 미군은 이 당시 특수 작전을 통제하는 중앙집권화 된 사령부도 없었고, 다양한 임무들 간의 합동연습도 실시되지 않았으며, 어떤 군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지에 관한 아무런 생각 없이 작전을 진행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미 합참의 무능력과 비효율이었다. 이 당시 브라운 합참의장은 이듬해 퇴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내 부하는 여비서 한 명 뿐이었다. 나머지 장교들은 각 군에서 파견한 로비스트나 정보원에 지나지 않았다.”

미 합참조직의 처참한 실패는 1983년에 베이루트 해병대 막사에 대한 테러 공격, 그리고 그레나다 침공 작전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나약하고 무능한 합참은 같은 실패를 되풀이 하면서 각 군 간의 치열한 이권다툼의 무대로만 존재했다. 2차 대전 이후 미 육군과 공군은 동맹을 맺었고 해군과 대립했다. 투르만 대통령조차 “만약 육군과 해군이 서로 싸웠던 것처럼 적과 열심히 싸웠다면 우리는 전쟁을 훨씬 일찍 끝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세 번의 연이은 작전의 실패는 합참개혁에 대한 근원적 개혁을 촉구했다. 1986년의 ‘골드워터 니콜스 법’이 바로 그것이다. 2차대전 중 두 다리를 잃은 니콜스 상원의원은 휠체어를 타고 나와 의회에서 군 개혁의 당위성을 연설했다. 그러나 의회는 이에 우호적이지 않았음에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합참의장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 군 구조 개혁은 1947년 미국의 국가안보법 제정 이래 40년이 걸려서야 겨우 이루어졌다.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한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에 미국에서 터진 일련의 군사적 난맥상은 한국 군부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군 개혁에 크게 자극을 받은 노태우 대통령은 그가 집권한 1988년 초부터 한국군의 상부구조를 근원적으로 혁신하는 과업에 착수한다. 집권한 직후인 2월 15일. 노 대통령은 출범과 동시에 청와대 비서실 내 안보보좌관실을 신설했다. 최초 안보보좌관실에 참여한 인물은 김종휘 안보보좌관과 김희상 안보정책비서관, 민병석 외교안보비서관 3명. 6공화국의 안보정책인 818계획을 성안한 주역들이다.

 

안보보좌관실의 개혁의지와 구상이 처음 비춰진 것은 약 두 달 뒤인 5월 6일 오자복 국방장관 업무보고 시. 노 대통령은 이날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국방태세 전반을 점검하여 제2의 창군에 버금가는 자세로 대대적인 자기혁신의 노력을 기울여 달라”고 군 수뇌부에 주문했다. 안보보좌관실은 이미 이날 업무보고에 앞서 2시간에 걸친 상세한 대통령 보고를 가졌었고, 대통령의 ‘혁명적 개혁’이라는 특별한 지침을 얻고 있었다.

 

혁명적 개혁!

주한미군의 감군과 철수에 따른 국방태세의 근원적인 재정립을 촉구하는 국군통수권자의 강력한 의지를 담은 지침이었다. 이로부터 열흘 뒤인 5월 16일 국방부의 전력증강 업무보고와 7월 7일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의 초임업무 보고 시 다시금 확인됐다. 이어 7월 14일 최세창 합참의장의 장기합동 군사전력기획서 보고 당시 “제6공화국이 지향하는 바와 같이 국가목표를 마음에 새기면서 참된 합동 군사전략의 수립과 군 구조 개혁, 전력 배비 등이 포함된 장기 국방태세 발전방향을 수립하라”고 대통령이 지시하면서부터 장기 국방태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다. 바로 이 지시가 제6공화국 5년간에 걸쳐 추진될 국방개혁의 시발점이었다.


‘혁명적 개혁’ 추진 지시


1988년 8월 18일 오전 10시30분, 오자복 국방장관과 최세창 합참의장, 김종호 해군참모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약 1시간에 걸쳐 용영일 합참 전략기획국장의 ‘장기 국방태세 발전방향 연구계획’ 보고가 진행됐다. 이 자리에는 청와대 측에서 홍성철 비서실장과 김종휘 안보보좌관, 김희상 안보정책비서관, 이현우 경호실장 등도 배석하고 있었다. ‘장기 국방태세 발전방향 연구계획’이 일명 ‘818 계획’으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보고한 날짜를 지칭하고 있다.

용영일 소장이 이날 보고한 내용은 1988년 8월부터 12월까지 1단계로 합참이 군 구조 개편 등 장기 국방태세 발전방향을 연구해 12월에 결과를 보고하고, 이어 1989년 1월부터 12월까지 각 군이 2단계 연구를 진행한 후 합참이 종합 보고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보고를 받은 노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렸다.

 

“군 구조는 단일군제 또는 이에 가까운 통합군제가 타당하다. 계획 추진을 위해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818 연구위원회를 구성하되, 범군적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해군과 공군의 입장을 강화하고 해병대의 참여 기회도 부여하라. 또 연구위원회 운용 시에는 불필요한 통제나 너무 많은 지침을 줘 연구 분위기를 구속하지 말고 국방참모본부(현 합참)가 주관해 연구를 추진하되, 국방장관은 군정ㆍ군령의 조정과 방산체제, 연구개발, 국방본부의 조직개편(축소를 의미) 등을 검토하라. 특히 철저한 자기성찰과 혁신으로 제2의 창군을 이루어낼 수 있도록 각 군 및 부서 등의 개별적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말고 이를 초월하는 자세로 연구에 임해 주기 바란다.”

 

노 대통령은 육․해․공군 본부를 해체하고 통합군을 건설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구상은 후에 당시 평민당 등 야당으로부터 6공화국이 내각제 개헌과 더불어 장기집권을 하려는 음모의 일환으로 해석되는 등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군사정권 하에서 국방의 핵심권한이 국방참모총장 1인에게 집중되는 것에 대해 군의 정치적 중립이 훼손될 것이라는 정치권의 우려는 대단했다. 또한 해․공군으로부터는 통합군제도가 실시되면 육군이 핵심직위를 독식하며 해․공군은 더욱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또한 통합군제도는 김희상 안보정책비서관 등 일련의 육군 개혁 장교들이 이스라엘의 3차례 중동전쟁의 승리에 크게 감명받은 영향이 컸다. 김 비서관은 군에 널리 알려진 「중동전쟁」을 기술하면서 군내에 통합군제도를 전파하는 메신저였다.

 

애초 이 계획의 착수 당시부터 우려했던 것처럼 각 군 본부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육․해․공군의 이해가 얽히고,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과연 육․해․공군의 구분이 없는 통합군 제도가 한국군 제도의 원형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했다. 특히 육군 장교들의 인사권을 갖고 있는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출신의 군 수뇌부에 직ㆍ간접적으로 위축된 육군 위주의 818 연구위원들은 본질적 문제에도 접근하지 못한 채 청와대와 육본의 중간지대에서 애매한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보고 기일은 점차 임박했으나, 연구 상태가 부실해 도저히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준이 못되었다.

 

1988년 12월 13일, 안보보좌관실은 예약된 대면보고를 비대면 보고로 돌렸다.

“국방태세에 대한 근원적 개혁은 시대적 대세다. 이 과업을 이룰 수 없다면 차라리 위원회를 해체하라.”

818 계획을 계속해서 추진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던 노 대통령은 합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국방참모본부 휘하의 연구위원회를 해체하고 위원회의 위상을 한 차원 높인다는 명분하에 국방장관 직속으로 새로 구성하게 된다. 개혁에 집요하게 반발하는 각 군 총장의 간섭을 최대한 배제시켜 자율적ㆍ창의적 연구 여건을 보장하고자 한 것이다.


 

미래 한국군 군제는 ‘통합군’


12월 13일 비대면 보고에서는 그동안 연구위원회의 몇몇 의미 있는 연구결과가 보고되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 군사전략 측면에서 델브록(Delbruck)의 제한전 군사사상과 손자병법을 참조하여 부전승 억제개념, 군 작전의 유연진축성과 기동마비전 교리, 그리고 화전 양면 동시대비의 필요성이 반영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 제시되었고 ▲ 군사력 개선 측면에서는 종래의 북한의 수적 우세 따라잡기 식을 탈피하여 군사전략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목표지향적인 군사력 건설하며 ▲ 군 구조 측면에서는 3군 분권적 작전 및 지휘체계에 따른 부작용과 문제점을 해소할 수 있는 합동참모총장제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 연구가 미흡하다고 판단한 노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후속 연도 연구지침을 지시한다.     

 

“첫째, 상부구조 개편 시 국방참모본부의 장인 국방참모총장(현 합참의장)에게는 그 직위에 상응한 권한(군령권)을 부여하고, 보안사령부와 정보기능을 통합사령부로 구성하는 문제는 신중히 재검토하라. 또 육군 방공사의 공군으로의 전군 조치와 함께 3군 사관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의 조기통합도 신속히 추진하라. 둘째, 과도히 비대화된 국방부 본부 및 직할기관 조직을 축소 개편하면서 고급 사령부로부터 말단 전투단위 부대까지의 조직체계는 물론, 제대의 단위와 수 그리고 부대구조 무기체계 등 전반적인 사항을 검토하라. 셋째, 군 구조와 더불어 인력구조 및 인력운용 계획도 발전시키며, 끝으로 내년도 후속 연구계획을 조속히 보고하라.”

 

대통령의 조속보고 지시에 따라 이듬해인 1989년 1월 24일 오후 3시30분부터 후속 연구계획이 보고됐다. 비대면으로 보고한지 1개월 만에 급히 재보고하게 된 배경은 노 대통령의 지시도 있었지만, 안보보좌관실의 강경한 개혁의지와 구체적 지침이 기인했다.

이날 보고에는 이상훈 신임 국방장관과 최세창 합참의장, 이종구 육군참모총장, 김종호 해군참모총장, 서동열 공군참모총장, 김재창 합참 작전국장 등 주요 군 수뇌부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용영일 합참 전략기획국장이 818 추진계획을 보고했다.

 

특히 1시간 동안 진행된 보고는 지난 1988년 후반기 동안 구체적인 연구 성과도 없이 6개월의 허송세월을 보낸 것과 달리, 1개월만임에도 불구하고 연구안을 작성하며 그 안을 실천해 나가는 추진계획까지 보고됐다. 보고를 받은 노 대통령은 연구안의 기본개념과 방향을 승인하고 “가급적 조기에 818 위원회를 재편성 운영하며 계획을 적극 실천해 줄 것”을 당부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 방공사의 방공기능은 저고도 방공무기만 육군에 잔류시키고 중고고도 무기체계는 공군으로 전환시키는 2원적 분리방법을 검토할 것 ▲ 각 군 사관학교 및 대학의 교육체계를 재정비하여 합동교육을 확대하는 것을 검토할 것  ▲ 국방부 및 각 군 본부의 행정조직을 필수정책 기능위주로 재정비하고 방산 및 연구개발 체계도 효율성을 높일 것 ▲ 각 군의 제대별 군 구조 연구 시는 최대 전투력 발휘에 중점을 두고 경쾌하면서도 전투형 조직으로 발전시킬 것 등의 추가지침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성과가 없었던 1단계 연구가 마무리되고 2단계 연구위원회가 발족되었다. 그로부터 7개월 후인 1989년 8월 24일 오전 10시30분부터 약 1시간 반 동안 818 계획추진 중간보고가 진행됐다. 이날 보고에서는 이상훈 국방장관과 정호근 합참의장, 이종구 육군참모총장, 김종호 해군참모총장, 정용후 공군참모총장, 용영일 합참 전략기획국장이 보고하고, 홍성철 비서실장과 김종휘 외교안보보좌관, 김희상 안보정책비서관, 이현우 경호실장이 배석했다.

  
소아적 발상의 육군 총장


2단계 연구위원회는 국방장관 예하에 조정위원회 8명과 실무연구원 37명이 상주하며 3군의 의견을 조정했다. 또 각 군별로도 이에 상응한 별도 조직을 갖는 등 창군 이래 최대의 개혁논의가 조성되고 있었고, 이날이 바로 그동안 각 군에서 합의 도출한 연구내용을 보고하는 실질적인 첫 번째 날이었다. 818 추진계획의 최초 보고일자는 8월 18일이었으나, 군 수뇌부 및 818 위원회의 하기휴가를 보장하고, 을지훈련을 끝낸 다음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는 일부 인사들의 건의에 의해 8월 24일로 연기된 터였다.

 

당시 상부구조 개선문제에 있어 주요 쟁점은 육․해․공 작전기능을 통합한 국방참모본부에 군령권과 자체 인사권을 부여하라는 청와대 지침과 달리 각 군 총장들이 기존의 인사, 군수행정 기능을 전적으로 각 군 본부에서 행사하고, 국방참모본부의 군사력 소요제기 기능조차도 각 군의 영향력 하에 두려는 소아적 자세로 일관함으로써 끝없는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통합군 제도에 대한 계룡대의 집요한 반대가 이어졌다.

 

특히 이날 보고 시에는 비대한 상부조직의 축소를 위해 군령, 군정기능의 분리에 따라 중첩되거나 불필요한 기능을 과감히 재정비, 육ㆍ해ㆍ공군본부의 인력을 40% 감축하겠다는 818 위원회의 보고와는 달리 20% 감축(실제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은 2~3%로 축소를 보고했으나, 이상훈 장관이 보고 하루 전날 이를 확인하고 20% 감축으로 고쳐서 보고)으로 후퇴 조정되고, 국방참모본부의 육ㆍ해ㆍ공 비율도 2:1:1로 조정하는 것으로 보고돼 논란이 일었다.

 

더욱이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은 예하부대 구조개편 보고에 있어서도 자신의 주도 하에 경기갑사단 창설을 고집하고, 보병사단 개편 시 전차, 항공을 군단급 이상 제대로 전환시켜 사단을 전투위주의 경쾌한 조직으로 개편하라는 청와대 지침이 무색하게 했다. 또한 공군으로 전군 조치하기로 되어 있던 방공포대조차 오히려 대대로 증편했다. 또 수색대대를 기계화 대대로 개편함은 물론 전차대대, 통신대대, 정비대대, 공병대대를 증편하겠다고 보고했다. 뿐만 아니라 기동력이 없는 보병사단의 포병연대를 자주 장갑화하고, 3각 편제로 개편토록 지시된 보병연대는 오히려 4각 편제에 수색중대를 새롭게 창설하는 동시에 통신 중대와 전투지원 중대까지 증편한다고 보고함으로써 818 청와대 지침에 전면 배치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일대개혁을 추진해야 할 818 위원회는 육군본부의 무언의 압력에 계속 위축되어 최초의 개혁의지가 상당부분 후퇴해 있었다. 특히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의 군내 사조직 관리와 군 인사권 행사 때문에 818위원회 참여자들의 목소리는 점차 낮아지고 퇴색될 수밖에 없을 만큼 818 개혁은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외압적인 어려움이 전개됨에 따라 결국 818 개혁은 안보보좌관실의 개혁의지 여하에 따라 진퇴 여부가 가늠되는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 같은 내용을 보고 받은 노 대통령은 진노했다. 노 대통령은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각 군 참모총장 임명 시 개혁을 추진하라고 총장에 보임시켜 놨는데, 자군의 이익만 생각할 뿐 개혁할 의지가 없다면 모두 물러나야 한다.”


 

통수권자와 인사권자 사이


하나회를 기반으로 집권한 군사정권이지만 임기 내내 바로 그 하나회가 짐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육군본부를 주축으로 한 군 수뇌부는 노골적으로 노 대통령을 비하하면서 개혁에 저항하였고, 청와대 안보보좌관실과 818 위원회에 소속된 장교들은 수시로 협박을 받았다.

 

보고 직후 818 연구위원회는 그날 자정까지 대통령의 지침을 분석하는 등 이를 구현하기 위해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상훈 국방장관도 “연구위원회도 직접 내가 통제하고 인원선발도 내가 하겠다. 계획 전체를 다시 작성하라”며 강력한 계획추진의 의지를 표명했다. 반면 합참의 실무자들은 “마음이 후련하다. 그간 육본에 밀려 결국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놨는데, 차라리 일하기 편하게 됐다”고 반색하며 그동안 자신들의 상관 눈치 보기와 무소신을 질책하는 가운데서도 새로운 개혁의지를 가다듬었다.

 

공군 역시 보고 직후 부장급 이상 긴급회의를 소집한  가운데 정용후 총장이 “처음부터 사심을 버리고 임했어야 했다. 각하가 결정한 이상 공군은 이의 없이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등 분위기 일신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육군은 총장의 추종세력들이 보고결과에 대해 일체 함구함으로써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고, 다만 총장이 대통령에게 꾸지람을 들었다는 소문만이 돌고 있었다. 진노한 노 대통령의 의중이 알려지면서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청와대로부터 육군에 이르기까지 관통되고 있었다. 개혁에 드리워진 먹구름이 곧 천둥 번개로 내려칠 것 같은 분위기에서 대한민국의 장교단은 대통령과 인사권자인 육군 총장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8월 24일 818 계획추진 중간보고 후 818 연구는 세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나, 지상군과 관련한 제반문제는 약간의 수정만이 있었을 뿐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을 중심으로 한 육본 수뇌부의 본질적인 방향 전환은 거의 없는 답보상태였다. 이 때문에 이후 11월 중순까지 818 개혁은 가시화 된 것이 전혀 없었고, 더군다나 12월 장군 진급심사를 앞두고는 합참과 국방부의 개혁의지를 품은 장교들조차 자신이 불이익을 당할까봐 노심초사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렵 청와대의 최선임 현역장교는 신양호 국방행정비서관이었는데, 그의 이종구 육군총장을 추종하면서 대통령의 개혁의지를 구현하려는 안보보좌관실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청와대 내의 현역 장교들이 보수파와 개혁파와 분열되어 상당한 긴장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신 비서관은 김희상 대령의 장군 진급에까지 직접적으로 반대를 표명하는 등 청와대 안보보좌관실의 분위기 또한 극도로 암울했다. 당시 신양호 준장은 김희상 대령과 실무자인 윤일영 중령의 군복을 벗기겠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고, 육본에서도 “안보보좌관실의 김희상, 윤일영은 군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발언을 심심치 않게 하고 있었다.

 

1989년 11월 15일,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청와대 김종휘 안보보좌관과 김희상 안보정책비서관은 국방부에서 각 군 총장이 배석한 제5차 818 계획추진 대통령 중간보고를 전격적으로 취소시킨다. 대통령 앞에서도 노골적으로 육군이 개혁을 반대할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국방부와 합참이 이에 맞서 토론을 하는 지루한 논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특히 818 연구위원들의 연말진급이 크게 위협받고 있어 안보보좌관실에서 무리한 개혁을 요구할 경우 818 개혁 장교들이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점도 감안한 조치였다. 이렇게 육군에 밀려 중간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단지 안보보좌관실은 중간보고 내용을 요약하여 비대면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유학성 국방위원장의 무리수


이날 안보보좌관실의 보고 핵심은 818 계획 기본연구를 이 시점에서 끝내고 연구위를 해체시켜 장관 직속으로 1990년 1월부터 818 기획단 및 사업단을 구성, 운영하며 제반 창설 및 개편(국방참모본부ㆍ국군통신사령부ㆍ국군정보사ㆍ국방참모대 창설, 각군ㆍ국방부 본부 및 직할기구 개편)업무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무의미한 논쟁을 하지 말고 현재까지 연구된 결과만 갖고 실행단계로 이행하자는 의도였다.

 

2단계 연구의 핵심은 ▲ 군사전략 면에서 평시에 적정수준의 방위전력과 응징보복 능력을 보유하며 전면전시에는 입체기동전 개념이 도입되고 모든 전력과 수단을 유기적으로 통합한 충격과 마비효과 극대화 ▲ 자주적 방위전력을 단계적으로 확보하고 장기적으로 미국에 대한 의존을 넘어선 독자적인 억제력을 확보하며 한국적 작전환경과 가용재원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하이-로우 믹스’ 개념으로 군사력 소요 판단, 해․공군 비중을 높여 3군 전력의 균형화를 도모, 주한미군 대체전력에 우선순위 부여 ▲ 군 구조면에서 문민통제 원칙 하에 합동군제도를 시행하고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개혁하는 것이다.

 

보고를 받은 노 대통령은 연말 국회에 본 문제를 상정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홍보활동과 함께 국군조직법 개정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지금껏 문제가 돼왔던 지상군 개편문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연구한 뒤 개편할 것을 지시했다.

이러한 청와대 지침에 따라 국방부는 11월 16일부터 26일까지 야 3당 정책위원 등 6회에 걸친 대국회 로비와 역대장관 및 총장 등 군 원로들을 초청해 간담회를 개최하며 11월 27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국군조직법 개정을 상정했다. 하지만 각 당 간사 회의에서 상정을 유보키로 합의, 무의로 돌아갔고, 12월 5일 국방위 심의에 재상정했으나 또다시 전문위원 검토보고만 이뤄진 채 야 3당에 의해 거부되며 계류된 상태로 마감됐다.

 

청와대 안보보좌관실은 이후 국방부의 독자적 노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여당인 민정당의 힘을 빌리려 했지만, 민정당 역시 기타 정치현안 처리로 818 문제에 자신이 없다는 의견을 보내와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정치적으로 해결해 줄 것을 건의한다.

1989년 12월 23일 국방부는 청와대 지침에 따라 1990년도에 추진할 818 사업을 위해 장관 산하에 기획단 22명을 구성하고, 창설 모체요원들로 하여금 각 사업단을 1990년 1월 10일부로 편성, 창설업무를 진행시키겠다는 요지의 ‘818 기획 사업단 편성운영 계획’을 비대면 보고했다. 또 1990년 3월 12일 국방 국방위에 국군조직법 개정을 재상정해 이날 오후 2시18분 국군조직법을 통과시킨다.

 

당시 유학성 국방위원장은 이날 국방소위 심사활동 결과를 보고하면서 평민당 측 의견을 일부 수렴해 국방참모총장을 합참의장으로, 국방참모본부를 합동참모본부로, 차장 2명을 3인 이하로 정부안에 대한 수정안을 마련했다. 이로써 각 군에 대한 군령과 군정을 모두 장악한 국방참모총장제도 신설은 야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특히 야당은 12․12 군사쿠테타의 핵심인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하여 민정당은 이종구 개인을 위해 조직법을 개정한다는 위인설관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7월 1일오 예정된 합참 창설(이종구 총창의 법적 임기만료가 6월 중순이었음)을 10월 1일로 미루고, 특전사와 수방사를 육군총장 지휘 하에 둔다고 설명한 후 곧바로 개표를 제의했다. 하지만 평민당의 권노갑, 정웅, 조윤형 의원이 뛰어나가 의사봉을 빼앗았고, 유학성 의원은 손 주먹으로 의사봉을 대신하며 국군조직법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통합군 제도는 물 건너가고 엄격한 문민통제를 표방한 9차 개정헌법의 정신에 맞게 3군 병립의 합동군 제도가 사실상 한국군 제도의 원형으로 정립되게 된다. 사실 두 번의 군사 쿠테타를 겪은 우리 헌정사에서 군 권력의 집중은 자유민주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인식되었다. 적당히 비효율적이고 나약한 합참, 그리고 육해공군의 병립된 구조가 민주적 절차에 맞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유학성 의원의 돌발적 행위는 위헌 논란으로 정치 쟁점화를 증폭시키는 등 오히려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고, 7월 국회에 국군조직법을 재상정하기에 이른다. 당시 표결은 김영선 국방위원장의 진행 하에 찬성 11명, 반대 3명으로 번안 가결됨으로써 7월 12일 오전 10시10분 국회 국방위를 통과했고, 이어 7월 16일 본회의를 거쳐 국군조직법이 개정됐다.

당시 번안 내용은 3월 12일 제149차 임시국회에서 유학성 의원이 제기한 내용 중 특전사 및 수방사를 육군참모총장이 지휘한다는 내용이 삭제되고, 장관의 권한 및 합동참모회의에 관한 조항이 추가되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문민통제의 요건이 대폭 강화된 것이다.

 


하나회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제7차 및 8차 818 개혁추진 보고는 각각 1990년 8월 18일과 1991년 1월 15일 진행됐다. 제7차 보고에서는 이상훈 국방장관과 정호근 합참의장, 이진삼 신임 육군참모총장, 김종호 해군참모총장, 정용후 공군참모총장, 용영일 합참 전략기획국장이 보고했다. 이날 보고의 요지는 국방부와 합참, 각군 본부의 개편안에 관한 내용이었다.

 

특히 이종구 전 총장에 대한 국회의 강한 거부에 부딪힌 이종구 육군 총장이 임기만료로 퇴진함에 따라 818 개혁은 순탄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새로운 체제의 조기정착과 창설준비에 대한 준비, 최고 사령부인 합참을 중심으로 군이 단결할 것을 강조하고, 기본개념만 확립된 818 사업을 구체화하며 국방부 청사 이전, 전력배비의 재조정, 전력 및 인력구조의 개선 등을 지시했다.

반면 제8차 보고는 비대면으로 진행됐다. 당시 국군조직법의 국회통과로 40여 년간 유지되던 기존 국방조직에 일대혁신이 일고 있었고, 개정된 조직법을 근거로 3군 조직이 합참을 중심으로 한 통합부대의 창설과 3군 본부의 축소개편이 추진되는 등 상부구조 개편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와 달리 하부구조 개편은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었고, 상부구조 개편과정에서도 많은 불협화음이 생겨 보완소요가 발생했다.

 

이에 국방부는 이미 개편된 합참 등 상부구조의 조직을 조기 정착시킨다는 명분하에 평가단을 1단계로 편성하고, 2단계로 기본계획을 수립한 후 하부구조 개선사업단을 출범시켜 개편작업을 계속하겠다는 취지를 비대면으로 보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1991년 8월 17일, 818 후속조치 중간보고가 진행됐다. 이날 보고는 이종구 국방장관과 정호근 합참의장, 이진삼 육군참모총장, 김종호 해군참모총장, 한주석 공군참모총장, 천용택 합참 전략기획본부장이 보고했다.

 

보고의 주된 골자는 1년여의 군 조직개편 기간을 보내면서 나타난 문제점에 대한 보완방향으로, 상부구조의 경우 그동안 합참 창설에 비협조적이었던 각 군 본부가 오히려 통합군안을 제기하는 상황이 전개됐다는 점이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합참도 부분적으로 인사권을 가져야 한다는 청와대 측의 지침에는 각군 본부의 눈치를 보느라 감히 문구를 보고서에 넣지 못하는 촌극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발전적인 것은 합참의장의 임무기능을 세부 규정화시킴으로써 군령ㆍ군정의 한계를 명확히 하고, 한미야전사(CFA) 해체와 함께 전력배비 조정이 가시화되며 작전통제권 인수에 대비, 합참이 미군으로부터 지상군 작전통제권을 인수받는 방안 등이 구체적으로 논의됐다는 점이다.

 

반면 하부구조의 경우 지상군은 청와대 지침과 다소 거리가 있었으나 전략기동군사의 창설과 기동군단의 창설이 구체화 됐다. 하지만 차기 보병사단의 개편문제가 전혀 개선되지 않은 상태로 보고되는 등 여전히 육군본부의 개혁의지는 구태의연한 상태로 남아 있어 6공화국 내 육군의 전력구조 개편을 실현시키지 못할 가능성은 그만큼 더 커져갔다. 이는 이종구 육군총장에 이어 취임한 이진삼 총장 역시 전임자의 행태를 추종했기 때문이다.

 

각 군 군사령부 개편에 있어서도 이필섭 2군사령관만 개혁에 호응하고, 이문석 1군사령관과 신말업 3군사령관은 오히려 개혁에 배치되는 안을 올려 818 위원회의 젊은 장교들에게 거부감을 줬다. 해군의 경우 잠수함 전력증강에 맞춰 지휘 및 부대구조를 증편하는 기회로 삼고자 노력했고, 공군 역시 공군작전사령부 예하의 중간제대를 옥상옥으로 증편하는 것 등 자군의 이익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보여 논란의 소지를 남겼다.

 

특히 육군은 장교 계급구조를 818 하부구조 보고내용에 결부시켜 위관급 장교의 공석을 2000석 줄이는 대신 영관급 장교의 공석을 1000석 늘려 이들의 진급을 늘리려는 기회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나타내 818 위원회의 심한 반발을 샀다. 그러나 일부 진급을 앞둔 장교들이 부동뇌동해 보고서를 상정시킴으로써 결국 안보보좌관실과 육본이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고, 거대한 육군의 힘과 정치논리에 밀려 큰 결실을 보지 못한 채 미완의 개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좌절된 개혁


이 무렵 한국 군부에게 중요한 것은 적에 맞서는 게 아니라 내부의 경쟁자보다 더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공동체 안전의 실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보문제가 중요시되는 것이 아니라 군 내부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특정 군부가 일정한 위상을 점하기 위해 안보논리가 활용되는 것이다. 전쟁이 나면 아무런 전투력도 발휘할 수 없는 계룡대가 여전히 바위처럼 버티고 앉아서 개혁의 길목을 가로막는 기이한 현상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6공화국이 석양 속으로 사라질 무렵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이던 유효일 장군은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실의 김희상 대령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혁이라는 게 박정희 대통령 때도 못했던 것이고, 코끝으로 군을 움직이던 전두환 대통령 때도 안 된 일이다. 그런데 물태우가 그것을 하겠어?”

 

애초 818계획에 추구하고자 했던 취지, 즉 현재의 안보위협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미래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하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국방정책은 단지 연구수준으로 끝났다. 한편으로는 북한을 자극하여 대통령선거에서 ‘북풍’을 통한 영구집권을 도모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고급장교의 진급 공석을 늘려 군부를 팽창시키고 각 군의 기득권을 개혁의 태풍으로부터 지켜내는데 더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국적 국방현실에서 ‘비난을 받으면서도 변혁을 추진할 수 있는’ 장교단이 존재한다면 그들이 안보의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이다.

 

2. 김영삼의 군에 대한 무관심, 보고서 채택도 못한 21세기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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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구조개혁을 좌절시킨 인사

노태우 대통령의 마지막 해인 1992년 11월. 육군은 장교 정원을 대폭 늘린 새로운 장교 정원표를 가지고 진급심사에 임했다. 그러나 진급심사 결과를 받아 본 당시 김희상 안보정책비서관은 깜짝 놀랐다. 대령 정원이 대통령 지침과 달리 전부 보병병과 위주로 늘어났던 것이다. 격분한 김 비서관은 대통령 지침을 위반한 이유가 무엇인지 즉각 육군에 해명을 요청했다.

 

여전히 육군은 이진삼 참모총장에서 김진영 참모총장으로 이어지던 이른바 ‘하나회 전성시대’였다. 역시 하나회에 소속돼 있던 인사참모부장 안병훈 소장은 김 비서관에게 이렇게 반격했다.

“보병은 진급시키지 말라고? 그게 김희상 지침이지, 어떻게 대통령 지침인가? 그런 따위의 지침에 동의하지 않는다."

김 비서관은 육군의 이러한 퇴행적 행태를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나 대통령선거가 불과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사태를 바로잡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정권 말기까지 군사정부를 탄생시킨 실세들이 육군을 장악하고 있다 보니 더 이상의 개혁은 불가능했다. 결국 보병은 급격하게 팽창했고, 기갑은 약간 증가, 그 밖의 병과는 정체된 형태로 1993년부터 한국군의 새로운 영관급 정원 구조가 정착되었다. 명백히 대통령 지시사항 위반이자 반개혁적인 조치였다.

군 구조 개편이란 흔히 전쟁 양상이 새롭게 변화함에 따라 군의 싸우는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 군의 조직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통상 다양한 군종, 즉 병과 간의 구성비를 새롭게 조화시킴으로써 일련의 부대 편성을 재편하는 것이다. 전쟁 양상이 보병전에서 고속기동전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전쟁 양상이 달라지고 있으므로 보병부대를 줄이고 기갑부대를 늘린다면 당연히 보병병과 장교는 남아돌고 기갑병과 장교는 모자라게 된다. 자연스레 보병병과 장교는 진급과 보직에서 불이익을 받고 기갑병과 장교는 그 반대가 된다.

 

그러나 군은 일반 기업과 달리 그 인력 운용이 매우 비탄력적이다. 보병 장교가 남아돈다고 정리해고를 할 수도 없고, 기갑 장교가 모자란다고 군 외부에서 충원할 수도 없다. 이른바 ‘폐쇄형 인력운용’ 구조다. 이러한 경직성 때문에 군 구조 개편은 변화의 당위성이 있더라도 기존의 인력구조에 쉽게 변화를 줄 수 없는 속사정이 있다.

 

그런데 1993년에 군은 보병 위주의 장교단을 팽창시킴으로써 그 이상의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군이 싸우는 방법을 혁신하려고 해도 보병 작전 위주 장교단의 인력구조 자체가 바위처럼 떡 버티고 앉아 그것을 가로막는 주범이 되고 있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려웠다. 레임덕이 빨리 찾아온 6공화국에서 노 대통령의 개혁 의지는 군의 기득권에 자꾸만 밀리고 있었다. 앞서 육군이 진급 적체로 어려움을 겪자 정원 증원이라는 대안을 찾게 된 것도 1989년에 군 인사법이 개정되어 장교들의 정년이 크게 연장된 데 기인한다.

 

개정된 내용을 보면 소령은 43세에서 45세로, 중령은 47세에서 53세로, 대령은 50세에서 56세로 연장되었다. 이렇게 정년을 연장하다 보니 진급에서 누락되어도 남은 정년 기간을 다 채우고 나가려는 인원이 많아져서 후배 기수들의 진급 기회를 잠식해 들어가 2000년에 들어와서는 창군 이래 최악의 인사 적체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실상을 보면 준장 진급의 경우 한참 ‘물이 좋았던’ 육사 20기는 25%, 22기는 29%, 23기는 28%, 25기는 26%로 육사를 졸업한 자원의 최소 4분의 1은 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가 남긴 군 인사법의 유산에 따라 새로운 인력구조가 정착되고 난 뒤로는 29기 16%, 31기 14%, 32기 14%, 33기 13%로 절반 넘게 뚝 떨어지고 38기 이후로는 현재까지 13~15%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진급 기회 자체가 줄어드는 것뿐만 아니라 진급 시기도 문제였다. 육사 22기의 경우 41~42세면 장군이 되었지만 27기부터 29기까지는 44~46세, 30기의 경우는 47~48세, 38기의 경우는 50세에 장군이 되었다. 전성기에 비해 9년이나 진급이 늦어진 것이다.


‘관리형 군대’로 군 구조 왜곡

 
군은 오랜 인사적체와 병목현상으로 경쟁 시스템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다. 군 인력의 전반적인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지휘관의 체력이 허약해지고 젊은 패기도 병영에서 감소되기 시작했다. 진급 경쟁에 몰두하느라 장교단은 우울증 환자 병동같이 활기가 없이 창백해졌는데, 이는 2차대전 당시 비슷한 수준의 독일군에게 맥없이 무너진 프랑스 군대가 부활한 듯했다. 역사가 마르크 블로흐는 그의 저서 『이상한 패배』에서 "어제의 동기가 오늘의 경쟁자, 내일은 적이 되는" 프랑스 군대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린 군대 행정과 진급 경쟁에 골몰해서 줄서고 시기하는 장교단의 문화, 더 이상의 혁신을 거부하는 정체된 관료주의의 폐단 등 전형적인 ‘관리형 군대’로의 추락이었다.

 

비대화된 인력구조는 곧바로 군 구조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818 계획에서 꿈꾸어 왔던 경쾌한 군 구조와는 거리가 먼 군령과 군정으로 이원화된 상부구조, 그리고 군 사령부에서 말단 제대까지 다단계로 이어지는 복잡한 지휘 구조는 유사시 군의 지휘 효율을 크게 떨어뜨리는 ‘관리비만․전략결핍’의 한국 군대를 장기간 지속시켰다.

불필요한 조직과 직위도 마구 생겨났다. 90년대 중반 이후 지휘관들은 휘하에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선배인 진급 탈락자를 부지휘관으로 거느리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지휘관들은 부지휘관을 될 수 있는 대로 교육이나 연수를 보내 그 부담을 덜려고 했다. 국방부를 비롯한 합참이나 각 군 본부 등에 셀 수 없이 많은 각종 TF․위원회 등 비편제 조직의 역할이 무엇인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이렇게 한시적인 조직들은 국방 전반에 널려져 있는 ‘깨진 유리창’이었다. 적어도 진급 적기가 경과된 중령․대령이 30%를 넘어서면서 한국군은 점점 더 ‘관리형 군대’로 치닫게 되었다. 이처럼 818 계획은 철저히 왜곡된 군 구조를 탄생시켰다.

 

평시작통권 환수에 대비하여 합참이 창설되고 급격히 팽창되는 것과 더불어 90년대에 국군지휘통신사령부․ 국군정보사․ 국군수송사․ 국방참모대․ 국방군수조달본부 등 각종 상부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은 818 계획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부조직이 비대화되면 그에 상응하는 육․해․공 각 군 본부의 기능이 줄어들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818 계획 당시 이종구 육군총장을 비롯한 각 군 총장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상부의 기능이 강화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각 군에 유사한 기능이 폐지되지 않고 남아 있어 유사․중복되는 양상이 818 계획 이후 적어도 20년 이상 지속되면서 비효율이라는 군의 불치병은 더욱 깊어졌다. 적어도 개혁을 하려는 서울과 이를 거부하는 계룡대 사이에는 20년 넘게 해묵은 갈등이 있었다.

그래서 또다시 군 개혁 문제가 새로 출범한 정권에게 과제로 제기되었다.


북한의 군축공세에 대비


1993년,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문민정부가 출범했다. 정권 초기에 하나회 척결과 율곡비리 특감을 계기로 불어닥친 군 개혁 열풍은 국민의 높은 지지 속에 818 계획에 저항했던 다수의 하나회 군 장성들을 역사 무대에서 퇴장시켰다. 당시 40여 명의 고위 장성이 군복을 벗었고, 과거 정치자금으로 악용되었던 무기도입을 둘러싼 부패와 부조리가 낱낱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오랜 군사정권에 찌들어 있던 국민들은 새로운 정부의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군 개혁에 환호를 보냈고 다시는 안보문제가 정치에 악용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기를 학수고대했다.

문민정부 초기에 국방부는 미완의 818 계획을 완결짓고 "21세기 통일 대비 ‘신 국방태세’를 정비한다"는 목적으로 전군의 대령급 최정예 18명으로 구성된 ‘국방개혁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장관 직속으로 운영했다. 이 위원회의 위원장으로는 국방부 정책실장이 임명되었다. 앞서 80위원회나 818 연구위원회에 비해 다소 격이 떨어지는 소규모 연구위원회였다. 모두 세 명의 위원장이 거쳐 갔는데, 그 중에서도 3기 위원장으로 80위원회 출신인 조성태 장군의 활약은 눈여겨볼 만하다.

 

조성태 중장은 1군단장으로 부임한 지 불과 10개월 만인 1993년 10월에 권영해 국방장관으로부터 국방부 정책실장 임명 통보를 받았다. 권 장관이 문민정부 첫 국방장관으로 취임하여 의욕적으로 군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차관 재임 시 정책국장으로 근무했던 조 장군을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돌연 12월에 국방부 조달본부에서 포탄도입 사기사건이 터지면서 그 책임을 지고 권 장관이 물러났다. 후임으로 임명된 하나회 출신 이병태 국방장관은 전임 장관이 만든 국방개혁위원회를 해체하는 대신 "각 군별로 개혁안을 만들어 보고하는 것으로 대체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조 장군이 이병태 장관실로 들어가 "국방개혁위원회에는 육․해․공군의 최정예 자원이 모여 있으니 이들로 하여금 우리 군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존치하여 본인에게 그 운용을 위임해 달라"고 건의했다. 이 장관의 승낙을 받아 조 장군이 위원회 명칭을 ‘21세기 국방연구위원회’로 바꾸고 위원회의 미래기획 기능을 더욱더 보강했다.

 

당시 조 장관이 위원회를 통해 구현하고자 한 것은 통일 이후까지 내다본 한국군의 ‘군축’과 ‘감군’ 규모를 기획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조 장관이 이에 관해 구술한 내용을 그가 국회의원이었을 당시 보좌관이었던 여운모 씨를 통해 2010년 1월에 입수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1세기 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남북한 간에 군사적 신뢰가 구축되어 실제 감군을 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할 경우 우리 군의 규모를 얼마로 감군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가를 연구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의 김일성은 걸핏하면 ‘남북한 군을 10만으로 감축하자. 만일 그것이 어려우면 1단계 30만, 2단계 10만으로 감축하자’고 공세적인 제의를 해온 반면 북한의 적화야욕과 전략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우리 군은 으레 ‘북한의 대남적화 전략 포기가 선행되지 않는 한 감군은 있을 수 없다’며 거부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참으로 궁색한 논리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고 특히 명분에서 밀리는 형국이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문제의 ‘군축’에 관한 우리의 대안을 도출해야 했다."


국방비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이 연구위원회가 신국방의 개념과 적정 군사력 목표 설정, 국방 조직 정비, 주요 핵심전력에 대한 종합적 정비계획을 작성하고자 했던 취지는 앞서의 위원회들과 대동소이했다. 그러나 이전 정부에서 계속 군 개혁을 지체시킨 결과 국방개혁을 더 이상 방치할 경우 우리 군에 심각한 운용상의 문제가 초래된다는, 보다 절박한 위기의식이 작용했음이 주목된다.

그 위기의식의 실체는 이렇다.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가치관이 다원화되고 개인 욕구의 증가로 군 운용에서도 더욱 높은 수준의 직업성 보장과 복지가 요구된다는 것. 이럴 경우 군대의 운영유지비가 계속 올라가 지금과 같은 추세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2010년경에는 국방 예산이 전부 인건비․복지비․운영유지비로 소진됨으로써 더 이상 군 전력 증강에 소요되는 재원을 확보할 수 없게 되어 미래 전장에서 요구되는 첨단 핵심전력을 구비하기가 요원해진다는 것이다.

당연한 문제의식이었다. 그것은 앞선 정권들에서 계속된 군 개혁의 좌절로 군 구조가 방만해지고 인력이 팽창되면서 군 전반에 거품과 군살이 자꾸 늘어난 탓이었다.

 

이에 따라 자주국방 역량을 구축하기 위한 3대 전략이 천명되었다. 첫째, 독침 전략이다. 적의 도발 시에 응징하고 보복함으로써 분쟁을 조기에 방지하고 확전을 방지한다는 것이다. 둘째, 땅벌 전략이다. 즉시 반격하고 적지로 전장을 확대하여 우리의 국토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셋째, 고슴도치 전략이다. 수세적 방어가 아닌 공세적 방어로 침략 세력을 괴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억제력을 확보하는 것이 국방의 핵심 정책인데, 문제는 국방 재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군 구조였다. 1989년 당시에는 운영유지비가 61.9%였는데 그 후 계속 증가하여 1995년에는 70.1%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전력투자비는 같은 기간에 38.1%에서 29.1%로 감소하여 국방 예산의 태반이 인건비를 비롯한 운영유지비 위주로 짜여졌다. 전력투자비 중에서도 신규 사업 비율이 1989년 9.2%에서 1995년에 1.0%로 줄어들었다. 국방이 미래를 설계하는 장기기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병력과 장비 유지에 급급한 상황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연구위원회는 현재와 같은 구조가 지속된다면 미군이 철수할 경우 대체전력 확보가 곤란하고 자주국방 태세는 지연될 수밖에 없음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 과거 80위원회와 818 연구위원회가 다 같이 우려했던 상황이 발등의 불로 떨어진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80위원회를 통해 우리 군이 최초로 장기 국방 기획을 시도했던 1977년부터 국방의 발전 방향이 ‘자주적 억제력 확보’라고 수없이 외쳐 왔건만 어쩐 일인지 국방은 그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현재의 군 구조로는 억제력은커녕 비대한 몸집을 유지하기조차 벅찬 전형적인 비만형 군대로 추락, 한국적 국방 개념과 작전 개념이 무엇인지 갈수록 모호해지고 미국에 더욱더 의존하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전력을 제대로 증강하려면 병력을 줄이고 군 구조를 바꿔야 했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핵심적인 진리이지만 가장 외면당하는 진리이기도 하다. 연구위원회는 2002년까지 병력을 50만 명으로 10만 명 줄이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국방 조직과 기능을 과학화하고 정보․지식화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줄이는 방법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국방 예산 절감 효과는 순수하게 사병만 10만 명 감축할 경우 1070억 원, 사병과 간부를 군 비율에 따라 함께 감축하면 5528억 원 정도 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병력 감축에 상응하여 부대까지 감축할 경우 2조 9968억 원이 절감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부대가 감축되면 부대 장비와 물자, 시설 같은 각종 운영비용이 절감되기 때문이다.
 

통일 이후까지 고려한 군 구조

계속되는 조 장관의 구술 내용.

“21세기 위원회의 가장 큰 업적은 장차 남북 간에 병력 감축을 합의했을 때를 대비해 우리의 ‘50만 감축안’을 기획한 일이었다. 이는 수적으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해․공군 병력은 그대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육군을 56만에서 35만으로 감축․정예화해야 하는 안이었고, 이를 다시 구체적으로 기획해 보면 육군의 상비 사단을 12개로 절반 가까이 줄여야 하는 어마어마한 개혁안이었다. 이 기획안이 있었기에 후에 노무현 정부에서의 국방개혁 2020이 나오는 모태가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획안이 갖는 의미로는 우선 ‘비로소 우리도 북한의 상투적인 군축 공세에 실질적 대안을 갖고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전력보강 및 증강 과정에서 부대 위치 조정, 건물 신축, 신형 장비 교체 등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분야에서 장차 남북 간 군비축소 또는 통일 이후에도 유지․보유하게 될 부대․전력 위주로 투자의 우선순위를 획정할 수 있게 해주는 가이드라인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즉 예산의 낭비 방지와 효율적 집행을 가능케 해주는 지침서 역할도 가능했다."

 

이 연구의 핵심은 명확하다. 병력 감축과 함께 부대 숫자를 과감하게 줄여야 한다는 것. 특히 육군의 숫자를 감축해야 한다. 이와 함께 국군체육부대․간호사관학교와 같은 불요불급 부대를 폐지하고 보급․정비․복지․인쇄 등 육․해․공군이 공통으로 보유한 유사․중복 기능을 대폭 통폐합하며 민간에 아웃소싱하거나 민군복합으로 운영하는 군 운영 혁신안이 제시되었다.

군의 운영을 근원적으로 혁신한다고 할 때 그 핵심 방향은 무엇이었을까? 계속되는 조 장군의 구술 내용.

 

“그런데 군사력 유지 및 정비 차원에서 보면 우리 군내에 피해갈 수 없는 ‘마의 블랙홀’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부터 전력증강은 통일 이후에도 우리가 보유하게 될 전력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첨단화해야 하는바, 따라서 기존의 재래전력 증강에 추가적인 예산 투자는 철저하게 지양해야 한다. 예컨대 동원 및 향토사단의 편제 장비나 화생방 물자의 경우 규정상 내구연한이 도래하면 자동적으로 전부 폐기하고 새로 보충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데, 나는 이런 부분은 실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동원하거나 유사품으로 대체 가능한 부분은 과감하게 동원계획에 반영하면 된다고 본다. 재래 무기의 전형인 4.2인치 박격포탄의 경우 역시 확보 일수가 약간 부족하다고 해서 수백억 원씩을 투입하고 있는데, 이 역시 유사시 미국 또는 후진국으로부터 다소 비싼 가격에라도 사오면 된다는 생각이다. 하루빨리 첨단화․정예화해야 할 우리 군은 그런 재래식 전력에 돈을 쓸 여력이 없다. 특히 군축 또는 통일기에 해체 대상이 될 부대에 수리 부속은 물론 편제 장비 보충, 탄약 보충, 화생장비 교체, 박격포탄 기준량 확보와 같은 재래 전력을 증강하기 위한 예산을 편성한다면 이는 역사와 국민을 배신하는 행위나 진배없다.

 

문제는 이러한 구식 관행에 대해 ‘내가 책임질 테니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상당부분의 재래 전력에 대한 추가 투자는 그 명분이 너무나 현실적이고 논리적 하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소요가 무궁무진하여 마치 ‘마의 블랙홀’처럼 투자비를 무한대로 집어삼키는 특성을 갖고 있고, 따라서 불가불 얽매이다 보면 자칫 우리 군이 신예 전력 증강 집중을 통한 첨단화․정예화를 달성하는 데 장애물이 될 것이 분명하다. ‘자동으로’, ‘규정대로’ 재래 전력에 예산을 낭비하는 관행에 개혁 차원의 제동을 걸지 않는다면 우리 군의 미래는 없다."

 

1995년 3월에 조성태 중장이 대장으로 진급하여 2군사령관으로 부임하기까지 18개월 동안 군 구조 개편의 골격은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한편 위원회의 주축인 육군은 군 구조개편 문제에서 818 계획에서 완결 짓지 못한 육․해․공군의 실질적 통합, 즉 통합군 체제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위원장을 지낸 예상호 장군을 비롯해 이재달 장군, 장세용 장군, 임형규 대령과 그의 동기생인 김국헌 대령 등이 통합군제 관철을 위한 활동을 수시로 전개했다. 이들은 818 계획에 따라 작전은 합참의장, 군정은 각 군 참모총장으로 역할분담이 이원화됐는데, 이는 군사조직에 있어 ‘지휘 통일의 원칙(unity of command)’에 위배된다고 보고 각 군의 예하 부대가 상부 지휘권의 이원화로 혼선과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국방 현실을 격렬히 비판했다. 818 계획 이후 각 군의 예하 작전부대들은 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의 지휘를 동시에 받는, 말하자면 머리가 둘 달린 격이었다.

 

따라서 합참 기능을 통합작전 체제로 전환하여 3군에 대한 지휘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군 상부구조를 바꾸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각 군 본부는 총사령부 체제로 전환하고자 했다.

이러한 변화는 언젠가 작전권 행사에 대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1995년 연구위원회가 제출한 ‘21세기 국방태세 연구’에는 군 조직의 변화는 21세기 전에 전시작전권을 환수한다는 전제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이 명확히 제시되어 있다. 보고서 명칭처럼 21세기형 새로운 국방을 지향하는 핵심 모토는 바로 각 군의 전력을 실질적으로 통합하여 작전권을 단독 행사하는 자주국방의 위상을 확립하면서 동시에 남북 군축과 평화공존, 통일에도 대비하자는 원대한 취지였다.

 

해․공군의 반발로 보고서 채택 불발

 

그러나 조성태 장군이 야전으로 가고 난 이후에 통합군 체제에 대해 해․공군이 격렬히 반발하면서 결국 보고서를 채택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해․공군의 경우는 사실상 전 군의 육군화를 초래할 통합군 추진에 반대 의사를 명확히 밝히면서 육군의 군살부터 먼저 줄이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해․공군이 육군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 이해된다 할지라도 단순히 자군의 피해만을 의식하여 자주국방의 대의를 외면하는 것 역시 소아적 자세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위원회에 공군 대표로 참여했던 예비역 김성전 중령은 필자에게 한탄하듯 말했다.

 

“결국 95년에 21세기 국방연구위원회는 보고서마저 채택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연구를 종결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말은 21세기 통일한국의 위상을 지향하는 국방정책과 전략을 기획한다고 했지만 각 군 간의 갈등으로 제대로 된 연구가 진행될 수 없었고, 청와대나 국방부도 표류하는 위원회를 방치했다. 연구가 종결된 이후에 위원회의 해․공군 장교들이 배제된 채 육군 단독으로 국방장관에게 비밀리에 연구 결과를 보고하는 전횡과 독선이 나타난 것도 연구위원회의 순수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결국 연구위원회는 국방의 대의를 세우는 조직이 아니라 각 군 간의 기득권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전쟁터였으며, 이로 인해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국방개혁은 또 다음 정권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그러면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에 하나회와 율곡비리 척결 이외에는 실질적인 군 개혁과 자주화에 대한 논의가 거의 사라지고 연구의 명맥만 간신히 유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1993년에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는 등 핵 위협을 가중시키고 1994년에 ‘불바다 위협’ 등으로 안보 위협이 급격히 고조된 탓도 있겠지만 주한미군이 안정적으로 유지된 것도 하나의 요인이라는 점을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갑작스러운 주한 미7사단 철수라든지,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주한미군 3단계 철수 계획인 ‘넌-워너 수정안’ 같은 것이 문민정부 시절에는 전부 중지되었던 것이다. 한국군 자주화를 외칠 대외적 명분이 부족했던 기회를 틈타 한국 군부 내부의 기득권자들은 군 개혁에 대한 논의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했다.

한편 안보 위기 속에서 군에 대한 근원적 개혁에는 아예 무관심했던 정치권력의 위기관리는 최악이었다. 김영삼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하나회 숙정 이후 군에 대한 관심을 거의 끊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반도 위기관리 문제에 있어 한미 간의 불화도 지속되었다. 어떤 정치권력도 군 개혁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21세기 연구회라는 실낱같은 개혁의 흐름은 개혁을 결실을 맺기 위해 또 다른 정부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3.  김대중의 포괄적 개혁안, 기본정책서, 미군 반대로 구조개혁에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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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 담론 폐기 발언


문민정부 시절 간간이 이어져 온 국방개혁에 대한 논의들은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 시기에 가장 먼저 국방개혁 논의를 촉발시킨 계기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외환위기(IMF 위기)였다.

이것은 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과거 국방개혁의 의미가 주한미군의 급격한 철수에 대비하여 자주적 생존의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자주국방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면, 이 시기는 미국이 극동에서 10만 명의 미군을 장기간 주둔시키기로 하여 주한미군이 당분간 급격히 변환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즉, 자주국방이 개혁의 명분이 되지 못했다.

 

1월 21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인수위 업무보고 자리에서 "세계 각국은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고 있으며 미국도 자주국방이 사실상 안 되는데 우리만 유독 자주국방이라는 말을 현실과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임복진 인수위원은 "자주국방이라는 말은 배타적이고 국수주의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국방부 내부의 호응도 있었다. 당시 국방연구원(KIDA)에 재직하고 있던 권태영 박사는 "향후 국방의 지표는자주국방이 아니라선진정예국방으로 교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방에서 자주의 담론이 폐기되는 분위기에서 앞으로 국방개혁의 핵심은 국방 운영 전반에 만연된 거품과 군살을 제거하고 효율을 달성하자는 데로 모아졌다. 여기에 군부 일각에서 적극적인 호응이 있었던 것은 외환위기라는 국가 초유의 재정위기 상황에서 군이 먼저 개혁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당면한 외부로부터의 개혁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50년 만의 정권교체라고 말해지던 제15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외교․안보분과.

1997년에 국가 환란 사태를 겪으면서 경제를 망친 책임자가 명확했기 때문에 새로 칼자루를 쥔 정권은 개혁의 칼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다. 개혁을 표방하고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 대해 국민은 개혁을 바라고 있거나 적어도 용인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에 대한 구제금융의 대가로 기업의 구조조정을 비롯한 강도 높은 개혁을 주문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세력이 한국 정부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낭비와 비효율을 없애고 외국 투자가에게 개방적인 국가로 변화하라는 준엄한 요구를 들이댔다. 김대중 당선자 진영은 이에 적극 부응했다.

그 여파는 국방 분야에도 밀어닥쳤다. 국방 운영 전반에서거품군살을 빼고 작지만 강한 군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된 것이다. 당연히 과거 정권의 불요불급한 무기도입 사업을 재검토하고 군 구조조정과 같은 개혁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상한 방향으로 풀리기 시작했다. 시발점은 1998년 1월 22일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의 방한이었다.

그는 한국에 들어와 김대중 당선자를 만난 자리에서 "한반도의 특수상황을 감안해 국방 예산의 삭감은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이라는 권고를 했다. 이에 김 당선자는 자신의 튼튼한 국방에 대한 안보관을 제시하며 한․미 간 협력을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영향으로 당초 1조 5천억 원을 삭감하기로 되어 있던 국방 예산은 6200억 원만 삭감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세계화와 협력안보라는 국제주의가 한국 국방과 접목되는 과정을 보여준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었다. 경제에서 주권의 자율성을 IMF에게 상당부분 양보했듯이 국방에서도 동맹국의 요구에 적극 부응하면서 자주국방 담론 폐기 발언이 나온 것은 군사주권의 자율성도 보다 유연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맥락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세계화를 적극 수용한 김대중 당선자의 시장경제 철학이 국방에 접목됨으로써 국방이 외부 환경 변화에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운영되도록 그 기반을 마련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당시 국방부는 김대중 정부가 획기적인 군 개혁에 착수할 것으로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제15대 대통령직인수위가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12월 하순, 국방부는 삼청동의 대통령직인수위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하는 국방부 자체 연구위원회를 가동했다. 강도 높은 개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 인수지원팀에서 국방투자사업을 검토하던 김수영 박사는 매일 밤을 새고 있었다. 한국국방연구원(KIDA)에서 파견된 그는 국방투자예산 대폭 삭감을 전제로 한 국방투자예산 운용 방향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의 요체는 당시 방위력개선사업으로 불리었던 국방투자사업을 그동안의 병렬식에서 우선순위에 따라 정렬되도록 장기적 기획안을 작성한 것이었다. 사업 조정의 우선순위와 접근 방법이 정해짐에 따라 향후 국방 예산이 감축되더라도 국방이 신속하게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1998년에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된 해군의 공기부양정, 육군의 신형 박격포 등이 전력소요에서 삭제된 것도 바로 이런 접근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기득권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김 박사가 국방투자예산 삭감 계획을 작성한다고 알려지자 국방부 획득 부서 직원들은 그를 뱀 쳐다보듯 했다. 보고서가 제출되고 반려되기를 몇 차례 반복하더니 결국 거꾸로 된 지시가 내려왔다. 어떻게든 투자사업비를 늘려 잡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거꾸로 꿰맞추려고 하니 이번에는 정부의 예산 기조와 들어맞지 않았다. 결국 이 전문가는 연구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방운영의 개념도 못 잡는다며 인신모욕에 가까운 질책을 듣고 업무를 마무리해야 했다.

 


용두사미의 군 구조 개편안


합참의 군구조발전연구부는 오랜 기간 군 구조 개편 및 병력 감축 문제를 검토해 왔다. 연구위원회에 합참이 제출한 아이디어는 군 병력을 5만 명 이상 감축하고 지휘 계통도 단순화한다는 것. 더 나아가 국방부와 합참의 상부구조 권한을 재배분하고 정보부대의 분산된 지휘권을 통합하며 각종 군의 지원 기능을 민간으로 아웃소싱한다는 등 다양한 개혁안이 도출되었다. 국군체육부대와 간호사관학교도 폐지한다는 획기적인 안도 채택되었다. 이렇게 모아 보니 개혁 과제가 80여 개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종합적인 개혁안이 탄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갑작스러운 병력 감축은 국가 실업 사태를 악화시킨다는 논리가 삼청동 인수위 내에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놀란 측은 합참의 군구조발전연구부였다. 이들은 선거 직후부터 군 병력 감축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간의 연구결과를 종합한 군 구조 개편안도 거의 완성 단계에 와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인수위 측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모처럼 국방부가 자발적으로 준비한 군 개혁 방안은 인수위로부터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했고, 모처럼 연구한 보고서도 흐지부지 사장되고 말았다.

2월에 부임한 천용택 국방장관은 4월로 예정된 김대중 대통령의 국방부 방문시 보고할 국방개혁안을 성안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천 장관은 대통령에게 국방개혁안을 보고하도록 정책실에 지시한 바 있었다. 이에 대한 준비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정책실장 김인종 중장, 정책국장 이광은 소장, 정책조정과장 한민구 대령이 장관실로 들어갔다. 이 자리에서 국방개혁에 대해 아무런 개념이 없었던 위 3인이 천 장관으로부터 "엄청 깨졌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한민구 대령이 긴급히 국내정책과장인 윤우주 대령에게 도움을 청했다. 윤 대령은 인수위 시절 연구위원회를 이끌며 개혁 과제를 종합한 인물이다.

윤 대령은 이제껏 연구위원회에서 준비한 국방개혁안을 천 장관에게 보고했고, 이를 기초로 대통령에게 보고할 국방개혁안을 가까스로 만들었다. 그러나 벌써 이 무렵에는 국방개혁을 주도하는 윤 대령에 대해 획득국장 이원형 장군, 문두식 기무사 참모장 등 군내 새로운 호남 실세와 군 본부의 수구세력들이 응징을 벼르고 있었다. ‘국민의 정부는 처음부터 개혁의 주체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혁에 헌신한 개혁파 장교들은 그 직후 험난한 핍박과 보복의 비극적인 운명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수위 시절 국방부 연구위원회에 참여한 장교들 중에서 1998년 연말에 진급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개혁을 외치던 장교들에 대한 명백한 정치보복이었다.

개혁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취하던 천 장관은 재임 기간 내내 야당이 아닌 여당으로부터 "장관이 과거 정부의 잘못된 국방을 개혁하고 개혁의 길로 나아가기를 주저한다"며 내내 정치공세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을 받았다 할지라도 국방부가 개혁을 마냥 외면했던 것은 아니다. 천 장관의 지시로 국방부에는 국방개혁위원회가 설치되어 국방개혁 과제들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국방부 정책실은 지금까지의 개혁 과제를 종합한 새로운 국방 관리 지침인 『국방기본정책서』를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개혁의 매뉴얼 『기본정책서』


『국방기본정책서』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21세기 국방연구위원회가 성과를 내지 못하고 단명으로 끝난 이후 국방연구원(KIDA)에서 권태영 박사가 37명의 연구 인력을 동원하여 만든 「21세기 통일 대비 국방 발전 방향」의 모태가 되었다. 당시 이를 통제한 국방부 국내정책과장이 훗날 육군 인사참모부장을 역임한 윤일영 대령이다.

이를 바탕으로 각 군의 의견을 수렴하여 국방부 차원의 연구는 1996년 2월부터 11월까지 국내정책과장 신병호 대령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당시에는 군 원로와 언론인 등 민간 전문가들의 의견까지 대거 수렴되었는데 민간 전문가로는 김경원․나웅배․현홍주․박영철․김진현․이상우 등이었고, 군 출신으로는 강영훈․이재전․서진태․이종오․권태영, 언론인으로는 김대중․김영희 2명이 참여했다. 최초로 민간 전문가들에게 국방개혁의 청사진이 공개된 셈이다. 이때 국내정책과장은 윤우주 대령이었다. 이들의 자문 내용을 연구에 보강한 3차 연구는 1997년 7월부터 9월까지 진행되었다. 그러나 1997년 말의 외환위기와 정권교체로 국방 예산을 재판단하고 중기 기간 중 중점 분야를 보완할 필요성에 따라 4차 연구가 1998년 1월부터 2월 사이에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5차 연구는 정책화를 위한 의견수렴 단계였는데, 1998년 6월 26일에 차관 주재의 정책회의와 6월 29일에 장관 주재의 군무회의를 통해 기본정책서가 최종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국방기본정책서』는 이제껏 만들어진 모든 개혁 문서 중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체계와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1998년에 총 6회의 군무회의를 거쳐 탄생한 『국방기본정책서』는 우리 군의 핵심 정책들을 우선순위를 판단하여 체계적으로 정렬하고 각 세부 정책별로 고유번호를 부여했다. 그리고 단계별로 이행 목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각 군이 개혁의 매뉴얼로 활용하도록 했다. 적어도 국방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이 문서를 기본으로 하여 국방 재원 규모에 부합되도록 그때그때 속도만 조절하면 전체적인 국방개혁의 대의와 취지는 손상되지 않도록 한 정교한 장치였다.

 

그러나 이제껏 모든 정권에서 그랬듯이 이 작업은 계룡대로부터 아주 조직적이고 집요한 방해를 받았다. 군무회의에서 각 군 총장이 이 문서에 대해 토의를 하고 모두가 개혁에 승복하도록 설득해도 도무지 이에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 계룡대는 국방개혁이 각 군의 기득권을 훼손하고 국방부 본부의 영향력을 최대화하는 ‘대국방부 제도’로 나아가려는 것으로 의심했다. 개혁을 명분으로 내걸고 일을 하면 국방 차원의 통합성과 합동성을 증진하는 안을 제출하게 마련인데, 이렇게 되면 해․공군으로부터 "또다시 통합군을 만들려고 한다"고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유삼남 해군참모총장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다가 입장이 곤란해지면 총장들이 서명하게 되어 있는 ‘동의란’에 자신이 서명하기로 되어 있는 자리가 아닌 공군참모총장 란에 서명했다. 국내정책과장이 할 수 없이 해군본부에 다시 총장 서명을 받으러 갔지만 유 총장은 이번에는 서명하길 거부했다. 국방부에 대한 피해의식이 특히 강했던 해군은 이전과 같이 국방부 개혁안이 육군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수단으로 인식했다. 

 

한편 육군에서도 이상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애초 각 군 본부의 기능을 검토하려 했던 개혁안이 추진되던 무렵인 1998년 7월, 갑자기 국방부 개혁위원회에 육군 1군사령부와 3군사령부를 통합하는 안이 제출됐다. 이 구조개편안은 육군 교육사령부에서 연구해 온 것이다. 교육사령부의 군구조발전 연구안은 김관진 육군 전략기획처장이 국방부에 설치된 국방개혁위원회에 제출함으로써 비로소 공론화되었다. 육군본부의 기능이 손상되지 않고 단지 야전군 사령부만을 통합하여지상작전사령부를 창설하자는 개혁 방안이었다. 국방부는 한국군 상부구조를 개혁하려던 애초의 안에서 후퇴하여 이 안을 받아들였다.

 

한편 국방기본정책서가 만들어지고 있던 1998년 6월에 천용택 국방장관은 이와 별도로 생뚱맞게 ‘신국방정책’을 발표했다. 정권 초기에 군이 잦은 사고로 국민의 질타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아무런 법적, 정책적 권위도 없는 국방정책을 발표하여 혼선을 유발하는 동시에, 정권에 ‘국방개혁의 원조’라는 포퓰리즘에 영합하는 조치였다. 이 작업은 당시 차영구 정책차장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존치되어 있던 국방개혁위원회와 별도의 정책을 수립한 것은 무언가 보여주는 식의 정치적 행위일 뿐, 국방개혁에 기여한 바를 찾아볼 길이 없다. 

 

이렇게 해서 각 군의 의견수렴을 마친 『국방기본정책서』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된 때는 1999년 1월이었다. 장기국방 기본정책이라는 최고의 기밀사항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이 자리에는 극소수만 참석했는데, 청와대측에서는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이, 국방부 측에서는 천용택 장관과 김인종 정책보좌관, 이상희 정책국장이 참석했다. 이상희 정책국장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각종 도표와 그림으로 구성된비주얼한 30쪽짜리 보고서를 토대로 보고를 진행했다. 보고를 받은 김 대통령은 이 문서의 미래 예측과 문제의식, 그리고 체계적인 정책 구상에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렇게 미래에 대한 보고서를 만든 부처는 새 정부 수립 후 국방부가 유일하다. 오늘을 제2의 국군의 날이라고 생각하고 이 문서에서 제시한 정책을 차질 없이 추진하도록 만전을 기하라."


 

주한미군의 이의제기에 개혁 좌절


국방개혁안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음으로써 김대중 정부에서작지만 강한 군을 표방한 국방개혁이 비로소 권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또한 정부 부처 중에서 유일하게 국방부는 국방개혁위원회를 상시 기구로 운영하여 지속적으로 군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국방기본정책서』는 한국이 장기적으로 선진국방을 완결하는 시점을 2030년으로 구상했다. 그리고 중기 기간 중 1차로 국방개혁을 완결하는 시점을 2015년으로 잡았다. 이렇게 해서 최초로 나온 국방개혁안이국방개혁 기본정책 ’99~’15로, 2015년까지 병력을 50만 명으로 감축하고 군 상부구조와 각종 하부 기능에 대한 구조조정을 완결 짓는 것으로 되어 있다.

 

50만으로의 감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육군 병력과 부대를 감축해야 했다. 육군은 8개 군단에서 5개 군단으로 축소하고 사단은 50개 사단(상시 23개, 향토 13개, 동원 14개)을 대폭 감축하기로 했다. 이렇게 상비전력이 줄어드는 대신 동원전력을 상비전력의 보조전력에서 주전력으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이다. 육군의 점진적 감축으로 병력 점유 비율은 육군은 81%에서 71%로 줄어들고 해군과 공군은 각기 14.6%와 14.4%를 유지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러한 전력 조정은 현존 전력은 조정 및 보완 차원에서 정비하여 점진적으로 줄여 나가되 미래 핵심전력 7개 분야인 ▲정보전력 체계 ▲전략무기 체계 ▲기동전 체계 ▲해상․해중 체계 ▲공격편대군 체계 ▲유도탄방어 체계 ▲포병 체계를 중점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국방재원을 집중한다. 이렇게 해서 대북 억제에 있어 자주적 방위 역량을 강화하면서 미래전에 대비한 거부적 방위 역량을 확보한다는 것이 전력증강의 기본 방향이다.

나아가 2차 국방개혁의 목표 시점은 2020년으로 잡았다. 『국방기본정책서』는 이런 식으로 5년 단위의 계획을 모아 2030년까지 시기별로 달성해야 할 국방 목표를 정해 놓았다. 그렇다고 2030년이 끝이 아니다. 『국방기본정책서』는 별책 부록으로 통일 이후 단계의 군사력 운용에 대한 청사진을 첨부하여 갑작스럽게 통일이 될 경우에도 대비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주적 국방태세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다만 미래 국방이 현재의 남북 대치 상황을 넘어 평화공존기에 접어들고, 더 나아가 통일 단계까지 고려했을 때 한․미 군사동맹을 통일 전과 후로 구분했을 뿐이다. 작전권 전환 등 한미동맹의 지휘체계를 자주화하는 문제는 통일 이전에는 시행하지 않고 통일 이후에 추진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이전 정권이 주한미군의 급격한 감축에 대비해 자주국방을 서두른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주한미군, 개혁안을 불신

 

2015년까지 국방개혁의 기조는 현존 위협과 미래 위협에 동시에 대비한다는 것이다. 이 무렵 국방부는 북한의 재래식 현존 위협은 계속 감소하는 반면 핵․미사일 같은 비대칭 위협과 주변국의 잠재적 위협 같은 미래 위협은 계속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따라서 전력보강의 최우선 순위는 현존 위협과 미래 위협에 동시에 대비할 수 있는 전력이어야 했다.

 

예컨대 육군의 경우를 보면 재래식 보병 전력은 현존 위협 대비용이지 미래 위협에는 효용 가치가 적다. 따라서 육군은 기계화부대와 미래 포병부대를 주축으로 한 체제로 전환되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군의 기계화부대는 재래식 전차와 장갑차로 무장된, 말만 기계화부대이지 실질적인 전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이 전력이 현대화되어야만 육군은 감축된 병력으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기계화된 기동군단은 병력 수가 6만~7만 명이다. 보병 1개 군단이 12만~13만 명인 만큼 기계화로 전환하면 병력 수가 절반으로 줄어든다. 반면 현재 미국의 스트라이커 부대와 유사한 차기 전차와 장갑차 등 새로운 신형 전력을 보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육군의 전력을 기동전력 위주로 재편하게 되면 병력을 대폭 줄일 수 있다. 물론 보병부대는 감축한다.

해군과 공군 역시 제4세대급 무기라 할 수 있는 F-15급 전투기, 중대형 잠수함, 이지스급 구축함, 대형 수송함 등 억제전력 위주로 전력을 보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2015년까지 국방개혁을 완결하는 데 드는 재원은 모두 420조 원 정도로 산출했다. 

 

『국방기본정책서』에 따라 1999년에 군의 정보부대 지휘권이 정보본부로 통합되고 체제가 개편되었다. 또한 국군수송사령부가 창설되는 등 818 계획에 제시됐던 기능부대 창설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각 군 본부를 국방부가 흡수하고 합동성 위주로 군 체제를 개편하려는 시도는 드러나지 않았다. 당면한 문제는 육군의 군 구조 개편이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미군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얼마 못 가 폐기되었다. 군 구조 개편안이 미군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브레이크가 걸린 이유는 미군의 지휘통제체계인 전구지휘통제시스템(GCCS : Global Command Control System)과 한국군의 지휘통제체계인 C4I가 충돌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한국군의 지휘통제시스템을 믿지 않았고, 두 군사령부를 통합해 지상작전사령부 하나로 작전지휘할 수 있다는 우리 국방부의 주장에 강한 불신을 나타냈다.

결국 이 문제로 국방부와 미군이 몇 차례 의견을 주고받은 끝에 천용택 장관의 후임인 조성태 장관은 "군 구조 개편은 우리 군의 정보화 달성 이후로 미룬다"며 다음 장관에게로 개혁을 미루었다. 그것으로 애초 계획한 군 구조 개편안은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 장관 누구도 우리 군의 지휘통제체계를 발전시키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개혁의 핵심인 부대구조 개편이 그 추진동력을 상실하자 국방개혁은 자연스럽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폐지하기로 했던 국군체육부대와 간호사관학교도 슬그머니 되살아났다. 전력구조 개선도 답보상태를 겪으면서 굳이 개혁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도 아닌 일상적인 전력개선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한국군은 여전히 신경과 혈관이 허약하여 구조조정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마치 체력이 약한 환자가 수술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한국군에게는 수술조차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미군으로부터 나왔다. 일단 기본이 되어 있고, 스스로 지휘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야 군 구조를 과감히 바꿀 수 있는데 당시의 한국군에게는 그것조차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국민의 정부에서 군 개혁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각 군의 이해관계로 개혁 실패


한국이 C4I와 같은 현대전에 필수적인 지휘통제 능력을 등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전차․자주포와 같이 유형 무기를 도입하면 부대가 창설되고 보직이 늘어난다. 그런데 지휘통제 능력을 발전시킨다고 투자를 늘리면 군의 효율은 높아지지만 자리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육․해․공 각 군은 자신의 예산과 인력을 팽창시키는 데 관심이 있지 현대적인 면모로 군의 체질을 개혁하는 데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이와 같은 실태는 『국방기본정책서』가 제시하는 시대 상황에 군이 전반적으로 부응하지 못하는 심각한 결함을 드러냈다. 이런저런 이유로 개혁의 주체와 리더십이 형성되지 못했고, 현실에 안주하는 수구적 분위기로 말미암아 침체를 거듭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군의 C4I가 비록 미흡하다고 해도 이것을 이유로 미군이 군 구조 개편에 반대했다는 점은 석연치 않다. 군은 기본적으로 원시적인 의사소통만 되어도 전쟁 자체는 수행할 수 있다. 무전기도 변변치 않았던 한국전쟁 때 어떻게 유엔군과 합동작전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C4I를 내세워 조직적으로 미군이 한국군의 구조개편을 방해한 이면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윤우주 예비역 대령은 필자의 집요한 질문에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의 말이다.

 

“후에 주한미군 측 인사와 대화하면서 밝혀진 일이지만 미군은 한국군 지상군사령부가 창설되어 지상작전에 대한 한국군 장성의 일원적 통제 체제가 확립되면 향후 미 지상군이 한국군의 지휘를 받는 상황이 초래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록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인 한국군 장성이 연합사에 지상군구성군 사령관을 겸임하고 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합사령관의 통제에 들어와 있는 상징적 위상밖에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이와 별도로 한국군 내에 지상작전사령관이 생겨나면 미군의 위상이 제한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바에야 현재와 같이 너절너절하게 분산되어 통합적인 지상작전 지휘를 하지 못하는 현 한국군 체제가 미군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이것이 C4I를 명분으로 내세운 미군의 속셈임이 분명했다."

 

『국방기본정책서』는 한국 사회가 산업화를 넘어 민주화를 거친 새로운 정보화 시대에 진입했다고 진단했다. 정보화 시대에 걸맞은 개선된 군 구조와 효율적인 전력통합 운용 능력을 갖춘 군대로 한국군이 하루속히 전환되어야 했지만 군은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국방기본정책서』가 있다고 하지만 국방의 큰 그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각 군이 경쟁적으로 반영한 5년 단위 국방 재원 배분 계획인 국방 중기계획은 그 실효성이 보장되지 않았다. 여전히 실권이 없고 모호한 합참의 위상과 역할로는 각 군의 사업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도 어렵고 목표지향적으로 군사력을 키우기도 어려웠다. 참모총장을 정점으로 한 무소불위의 인사권,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되는 진급 인사, 그리고 지휘 통일에 위배되는 이원적 군 지휘 체계는 국방부가 아무리 개혁을 추진하려 해도 발목을 잡으며 각 군의 관성대로 국방이 운영되도록 했다.

 

4. 노무현의 ‘자주’의 기관차, 작지만 강한 ‘2025년 목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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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식 국방개혁의 영향


프랑스의 아름다운 여성 국방장관 미셀 알리오 마리가 향수 냄새를 풍기며 노 대통령에게 ‘프랑스의 국방개혁’에 대해 설명한 때가 2004년 12월이었다. 프랑스 방문 중 약 한 시간에 걸쳐 국방개혁에 대해 설명을 들은 노 대통령은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귀국한 직후 노 대통령에게 비서실은 영국의 데이비드 츄터 박사가 쓴 『국방개혁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Defense Transformation : Short Guide to the Issues)』를 요약해서 보고했다.

마리 국방장관의 브리핑에 이어 비서실의 보고서를 읽은 노 대통령은 2005년 1월 윤광웅 국방장관에게 이 책을 전했다. 그러면서 프랑스식 군 개혁을 한국에 적용하는 방안에 대해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노 대통령이 지시한 요지는 역대 정권마다 국방개혁을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국방개혁이 장기적이고 일관되게 지속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법과 제도에 기반하지 않고 군이 독자적으로 내부에서만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국방개혁은 국민적으로 공론화되어야 하며 법에 의해 추진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개혁의 고삐를 단단히 조이며 노 대통령과 윤 장관은 ‘협력적 자주국방’을 임기 중에 반드시 정상 궤도에 올려놓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2004년 8월 중순에 윤 장관은 노 대통령으로부터 ▲향후 10년 이내 독자적인 대북 억제력 구비 및 주한미군 의존 핵심전력 확보 ▲전시작전권의 조속한 환수 및 이를 주한미군 감축 협상과 연계 ▲주한미군의 점진적 감축 등 ‘협력적 자주국방’의 기본 전략 지침을 받아 이를 국방부 본부와 합참, 그리고 각 군 본부에 하달했던 적이 있다. 이어 8월 30일, 월간 군사상황 보고를 받은 윤 장관은 "9월 말까지 자주국방 5개년 추진계획을 작성하되, 각 군의 요구를 합참에서 잘 통제하고, 통합전력 건설 및 발휘와 대북 억제 전력을 보유하는 보다 큰 차원에서 접근하라"고 지시하여 국방개혁 2020이 탄생할 전조를 형성했다. 노 대통령이 직접 국방개혁을 강한 어조로 촉구한 때는 그 직후인 10월 1일 국군의 날에서다.

 

“국방개혁을 일관되고 강력하게 추진해 나가야 합니다. 과거에도 국방개혁을 위한 여러 조치들이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운용상의 개선만 있었을 뿐, 본격적이고 구조적인 개혁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군 스스로 강력한 혁신 의지가 필요합니다. 국방 조직의 전문화․문민화와 같은 혁신을 통해서 국방운영의 효율성과 합리성을 한층 더 높여야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정보화․과학화된 기술집약적 전력구조로 발전시켜 미래전 수행에 대비해야 합니다. 또한 한국군 주도의 작전수행이 가능하고, 통합전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해야 합니다. 국방개혁에 대한 각계각층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서 국방장관을 중심으로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해 주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협력적 자주국방 계획은 2004년 11월 8일에 발표되었다. 주한미군 핵심전력을 대체하는 ▲감시정찰 ▲지휘통제 ▲정밀타격 전력을 최우선적으로 확보하면서 2008년까지 GDP의 3.2%를 국방비로 확보한다는 목표로 4년간 99조 원의 국방비를 투입한다는 계획이었다. 협력적 자주국방 계획이 조영길 장관이 만든 ‘자주국방 계획’과 다른 점은 ▲전력증강 일변도의 과도한 국방 예산 팽창을 통제하려 했다는 점 ▲주한미군의 점진적 감축과 연계된 계획이라는 점 ▲국방의 제반 영역에서 민주적 가치와 효율화․투명성을 강화시킨 점 등이다.

윤 장관은 노 대통령의 지침에 따라 취임 이후 국방부 본부의 문민화, 3군 균형 발전 등 일련의 개혁 작업을 표명했고, 이들 개혁안을 법제화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2005년 9월 13일 국방부는 포괄적인 국방개혁안을 마련하여 공개했다. ‘21세기 선진정예국방을 위한 국방개혁 2020(안)’이라고 명명된 이 개혁안은 ‘국방 전반의 체질개선’을 통한 ‘효율적 국방 체제의 구축’을 목표로 ‘효율적인 선진정예강군’으로 만들기 위해 그동안 유지되어 온 한국군의 ‘양적 구조’를 ‘질적 구조’로 재편하겠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 개혁안이 나오기까지는 역대 정부의 군 개혁에 대한 연구가 큰 도움이 되었다. 2005년 초에 윤 장관이 국방부 본부를 문민화하고 3군의 균형 발전을 도모하며 병력을 50만으로 감축한다는 새로운국방개혁법초안을 안광찬 정책실장에게 주며 "이를 토대로 2020년까지의 국방개혁안을 성안하라"고 지시할 때만 해도 국방부 정책실은 눈앞이 캄캄했다. 적어도 3년 정도 기획만 해도 나올까 말까 한 포괄적 국방개혁안을 어떻게 단 몇 개월 만에 만들어내란 말인가?

 

바로 이때 국방부 정책실의 성우영 중령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을 냈다. 지난 김대중 정부 시절 만들어진 『국방기본정책서 ‘99~’15』를 원용하면 이 문제가 풀린다는 것이다. ‘국방기본정책 2015’라고도 불리는 이 문서에는 우리 군의 개혁 방향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와 기획이 담겨 있다. 개혁에 소요되는 기간도 비슷하고 게다가 50만 명으로의 감군이라는 목표도 비슷했다. 더군다나 당시 제시한 개혁안은 거의 실행되지 않아서 노 대통령이 가고자 하는 국방개혁의 방향에 적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개혁을 3단계로 구분한 접근 방식도 비슷했다. 각각의 개혁 완결 단계를 약간 보완만 하면 현 정부의 국방개혁안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선진국방의 청사진 탄생


이렇게 해서 과거 정부에서의 군 개혁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단 3개월 만에 국방개혁의 기본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 안을 기초로 추가적인 연구를 국방부 정책실에서 진행하고 가다듬은 결과 ‘국방개혁 2020’이 가시권 안에 들어왔다. 안광찬 실장이 직접 프리젠테이션 보고서로 바꾸고 나자 여름이 지날 무렵엔 개혁의 프레임이 거의 완성되었다. 이 보고는 2005년 6월에 이루어졌다.

두 번째 대통령 보고는 9월에 이루어졌다. 노 대통령은 군 병력을 감축하면서도 "고급 장교들의 숫자는 줄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장성들의 숫자는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이는 군 내부의 누적된 인사 적체에 대한 불만과 전역 장교들의 저조한 취업률을 고려한 결과였다.

그러나 군의 상부구조가 비대해져 고급 장성이 필요 이상 팽창되어 있는 군 인력구조의 불합리함을 개선하지 않는 국방개혁이란 애초부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완성된 국방개혁 2020은 국방개혁의 추진 방향으로 ▲ 국방의 문민 기반 확대(군은 전투 임무 수행 전념) ▲ 현대전 양상에 부합되는 군 구조/전력 체계 구축 ▲ 저비용․고효율의 국방관리 체제로 혁신 ▲시대 상황에 부응하는 병영문화 개선이라는 네 분야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국방부는 군 구조와 운영을 개혁하고 국방부 직위의 70%를 문민화하면서 군 규모를 2020년까지 50만 명 정도로 감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개혁을 추진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국방비를 연 11% 이상 증액하고, 타격 능력을 1.7~1.8배 향상시키며, 정보감시정찰(ISR) 및 지휘통제(C4I) 능력을 크게 확충하기로 했다. 또한 국방획득체계를 개선하고 방위산업구조를 효율화하며 국방 R&D를 국방비 대비 10% 이상으로 대폭 늘리고 방산 수출 지원 체제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또 이러한 국방개혁 방안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국방개혁 2020의 핵심 내용을 국방개혁기본법․방위사업법 등으로 입법화하겠다는 구상도 내놓았다.

 

『국방기본정책서』를 토대로 만들어진 이 계획에 따르면 군 구조 개편은 크게 3단계로 추진된다. 2010년까지 추진되는 1단계는 군 구조 개편 착수 및 본격화 단계다. 군의 상부구조를 우선 개편하고 개혁 기반을 구축하는데, 특히 전구 작전지휘가 가능한 방향으로 합동참모본부 개편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후 5년간 추진되는 2단계는 개혁 심화 단계로서 상부구조 개편을 완료하고 구조 개편에 따른 추가 전력을 확보한다. 이 시기에 한국군의 기동력․타격력을 보강하고 작전사령부를 개편하는 등 가장 활발한 변화가 일어난다. 구조 개편의 마지막 단계는 2020년까지 군 구조와 전력 구조를 완비하고 하부구조의 전력화 개편을 완료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합참은 한국군 전구사령부로서 그 능력과 위상, 규모가 변화하고, 현재의 1군사령부와 3군사령부가 통합된 지상작전사령부가 창설되며, 2군사령부는 후방작전사령부로 개편된다. 군단은 10개에서 6개로 줄어들고 사단은 47개에서 20여 개로 줄어든다. 병력은 68만 1000명에서 50만 명으로 줄어든다. ‘정보화․정밀화․동시통합성이 달성된 혁신된 군’으로 변환하기 위해 기동력과 타격력이 증강되고 정보․C4I(전술지휘통제)․화력지원 등 군 핵심전력이 대거 보강된다는 것이 구조 개편의 공식 방향이었다.

2004년에 표방한 ‘협력적 자주국방’이 자주국방과 한미동맹 변환을 상호 연계시킨 작품이라면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2005년의 ‘국방개혁 2020’은 본격적인 군 병력 감축과 구조 개편, 합참의 기능 강화, 군 내부의 운영 개선이라는 데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제껏 청와대가 주도해 온 자주국방의 담론을 바탕으로 구상된 국방개혁 2020은 전시작전권 전환 이후 한국군의 독자적인 작전능력을 갖추기 위해 감시정찰(ISR)․정밀타격(PGMs)․지휘통제(C4I)가 군사력 건설의 핵심임을 명확히 했다.

 

이제는 병력의 숫자로 말하는 재래전이 아니라 적의 핵심 시스템을 정확히 파괴하여 전체를 마비시키는 ‘효과중심작전’이 새로운 화두로 제기되었다. 이와 더불어 장사정 정밀교전, 정보전, 디지털 전쟁 같은 혁신적 개념과 기법들도 물밀듯이 군 내부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전시작전권 전환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한국 합참의장이 스스로 전역(戰役 : campain)과 ‘주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합참의 기능을 보완하고 능력을 갖추는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다.

 


자주국방 표상, ‘2025년 목표군’


국방개혁 2020에서는 2025년의 목표군이 ▲감시권 ▲방위권 ▲결전권 ▲보호권으로 설정된 방위 영역에서 각기 필요한 임무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개념화되어 있다. 이것이 국방개혁 2020을 통해 개혁을 성취한 한국이 달성해야 할 목표군의 대략적인 윤곽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해․공군과 정보력이 강화된 목표군은 새로운 합동성의 교리를 바탕으로 첨단 복합 네트워크 체계 하에서 미래 전쟁을 준비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2025년 목표군은 2000km 동북아 전역을 감시권으로 설정하고 이 범위 내에서의 분쟁 또는 위기 발생을 예방하고 억제하기 위한 전략적 억제능력을 갖춘다. 이 범위를 포괄하는 핵심 개념은 전쟁이나 위기 발생의 징후 정보를 수집하는 정찰감시능력이다. 그 핵심이 바로 글로벌호크․무궁화위성․조기경보기와 같은 정보전력이다.

 

방위권은 한반도 주변 500km 영역에서 국지전과 제한전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 범위 안에서 한국의 국익을 침해하는 세력에 대한 응징 보복 능력을 갖추자는 것이 그 요체다. 공세와 유연대응, 확전통제를 위한 신속대응전력과 전략적 억제능력을 갖춘다. F-15K, 이지스함, 잠수함, 크루즈미사일과 같은 제4세대 무기가 그 주된 수단이다.

한반도 결전권에서는 침략을 거부하고 국가 총력전으로 대응하기 위해 육․해․공군 기반 전력과 신속대응, 전략적 억제, 동원 전력, 우방국 전력까지 총동원하는 전력을 구비한다는 것이다. 당면한 북한 위협으로부터 전면전을 각오하고 총력 대응하는 한국 안보의 기본 영역이다. 보호권은 우주 영역을 지칭하는데, 향후 한국의 우주항공력이 진출해야 할 영역이다.

이러한 개념은 노태우 대통령의 818 계획 이래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계승․발전시켜 온 선진국방의 종합적 산물이었다. 비록 국방개혁 2020이 급조된 계획으로 세부적 검토가 부족하고 수정하고 보완할 부분이 많다 할지라도 그 대체적인 방향은 기존에 논의되었던 선진국방의 비전을 종합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국방개혁 2020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안정된 국방 예산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노 대통령은자주국방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 비용을 지불할 의지를 갖고 있었다. 적어도 박정희 대통령 이래 이처럼 국방을 중시한 정치 지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2020년까지 총 621조 원의 국방 재원을 상정한 이 계획이 작성되기까지는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


 

육군, 병력 감축 계획에 반발


국방개혁 2020은 미래 우리 군의 핵심전력으로 징후경보 수집(눈과 귀)과 지휘통제(신경과 혈관), 전략적 억제타격(펀치력) 같은 미래 전력을 구비하되, 병력 감축과 부대구조 개편을 통해 완전성을 갖춘 군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그 요체다. 장차 주한미군 감축에 대비하면서 스스로 억제력을 갖춘 선진군을 2020년까지 건설한다는 데 군 수뇌부는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밑그림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상황에 맞는 합동전장의 개념이 없었고 새로운 국방운영 기조가 정립되지도 않아 병력 감축과 부대구조 개편에만 집착했다는 중대한 결함을 갖고 있었다. 국방 예산도 안정적으로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기 체계 플랫폼에 집착함으로써 실현성이 의문시되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안고 탄생한 국방개혁 2020에 청와대와 NSC는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상희 합참의장을 비롯한 군 내부의 토론을 거쳐 자율적으로 합의한 결과였다. 결점이 많다 하더라도 국방개혁 2020에 이르러서야 우리 군도 지상군 중심, 병력 위주의 재래식 군 운영을 청산하고 모양을 갖춰 제대로 작전권을 행사하는 군대로 전환될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에 지나치리만큼 의존하면서 기형적으로 성장한 육군 위주의 군 구조를 대폭 손질한다는 군의 자기 혁신이자 선진화 운동이었다.

 

이상희 합참의장은 2005년 9월의 국방개혁 보고 당시에 개혁 완료 시기인 2020년까지 전력투자비가 271조 원 든다고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또한 김경덕 당시 합참 전투발전부장은 미래 군의 부대구조와 전력구조를 설계한 핵심 인물이었다. 이 두 사람은 국방개혁을 발표한 9월 13일, "우리가 설계한 국방개혁 2020은 ‘퍼펙트한 계획’이다"라며 미래 군의 전력구조를 설계한 국방개혁 2020은 더 이상 손볼 곳이 없는 완벽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랬던 두 사람이 훗날 이명박 정부 초대 국방장관과 국방개혁실장으로 임명되자 자신들이 설계한 계획이 잘못되었다며 국방개혁 2020을 수정하겠다고 나서 주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전 정권에서 자신이 만든 개혁의 목표와 비전을 전부 뒤집는 이중적 행태였다.  

 

안광찬 실장은 자신보다 육사 1년 후배인 이상희 합참의장이군 서열 1위라며 자신의 의지대로 국방개혁안을 주도하려 하자 "몹시 독선적"이라며 거북해했다. 개혁의 사령탑인 안 실장의 입장에서는 합참의 경직된 사고가 항상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안 실장은 자신이 이 장관보다 육사 선배라는 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합참의 장군들과 조정을 시도했고, 그런대로 절충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부담은 주한미군과 육군의 조직적인 반발이었다.

국방개혁 2020에서는 육군의 군단과 사단을 대폭 통폐합하고 기동력과 타격력, 생존력을 강화하기 위해 병력을 17만 명 감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국군 병력 감축에 대해 2006년 연합사령관으로 부임한 버웰 벨 주한미군사령관은 2007년 3월 7일 미 하원 군사위 청문회에 출석해 한국군의국방개혁 2020’에 따른 병력 감축과 병사들의 복무기간 단축 계획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벨 사령관은 이날 청문회에서 "한국군은 현재 현역과 예비군을 포함해 370만 명 수준의 병력을 오는 2020년까지 200만 명 수준으로 감축할 계획"이라며 "북한군이 유사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이 같은 대규모 병력 감축은 신중하게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라고 말했다.

 

국방개혁 2020 발표 당시부터 미국이 진정으로 우려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2001년 이후 미국 랜드연구소의 브루스 베넷 박사는 한미연합사의작전계획 5027’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침공을 격퇴한 후 북한 지역에 50만 명 이상의 병력이 상시 주둔해야 한다. 그래야 북한에 대한 효과적인 통치가 가능하다"고 예측한 연구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다. 이후로 미국은 이 수치에 계속 집착해 왔다.

국방부의 병력 감축 논리는 보병부대의 감축과 기계화부대의 창설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방개혁 2020에서는 어찌된 일인지 한국군의 대표적인 ‘거품’과 ‘군살’로 지적되는 총장 산하의 행정부대와 지원부대를 통폐합하고 아웃소싱한다는 내용은 강조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초기의 『국방기본정책서』와 비교해도 후퇴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전투 병력 구조조정을 통해 병력 감축을 도모하되 후방 지원부대의 병력 수에 변화가 없다면 우리 군은 전투를 하는 군이 아니라 행정과 관리를 하는 군으로 전락하고 만다.

 

한 예로 군은 골프장, 호텔 및 콘도, 복지회관 등 2000여 개 복지시설에 총 5000명의 현역병을 투입하고 있었다. 취사병만 해도 6000명이 넘는다. 일선 부대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 밖에도 정비창․보급창․인쇄창․경리단․병원․학교기관․군종병 등 각종 명목의 비전투병은 전투 기능이 떨어진다. 이 밖에도 연간 2만~3만 명의 입실 환자, 연간 6000건에 이르는 범죄자 등 각종 명목으로 전투 임무에서 제외되는 인력을 모두 빼고 나면, 실제 전투를 주임무로 하는 부대 병력 수는 상당히 줄어든다. 명목상으로는 68만 명의 대군이라지만 일선 부대는 언제나 병력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실제로 당시 국방부에 근무하고 있던 한 육군 대령은 "이렇게 되면 육군이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전투병은 10만 명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며관리형 군대로의 추락을 우려했다. 그러나국방개혁 2020’의 군 구조 개편은 병력 감축에 따라 전투병의 비율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제시하지 않았다.

이렇게 각 군 참모총장의 기득권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사실상 합참의장 관할의 작전부대 위주로 감축을 단행하는 것은 "국방개혁이 일선의 전투력을 약화시킨다"는 비난을 받을 소지마저 있었다. 개혁이란 군의 규모를 축소하면서도 전투력을 증강하는 것이 본래 취지인데 현실은 그 반대로 가는 것 아닌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된 데는 818 계획 이래 항상 개혁에 반대해 왔던 각 군 본부의 수구적 태도를 간과할 수 없다.


육군 장성, 윤 장관을 능멸


육군은 국방개혁 2020이 사실상 ‘육군 개혁’으로 가고 있는 것에 엄청난 불만을 가졌다. "해․공군에 대한 배려에만 치중하는 국방개혁"이라는 육군의 반발은 전방 부대 구조 개편과 병력 감축 문제로 모아졌다. 국방개혁 2020이 확정되면 2019년까지 육군은 부대 개편을 완료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매년 새로 작전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 혼란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2020년까지 병력을 감축해야 하는 국방개혁의 목표는 사회 병역자원 수급 여건상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 병력 감축에 착수할 수는 없다는 태도였다. 일단 현재의 병력 수준으로 최대한 버티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줄여서 그 목표를 충족시키겠다는 발상이다. 여기에서 선 전력화 후 병력감축이라는 대응논리가 육군으로부터 제기되었으나 이는 수용되지 않았다.

 

육군 정책처장이던 강한석 장군은 NSC 사무처에서 국방개혁 문제를 담당하던 임춘택 행정관에게 병력감축의 부당성을 설명하려 했으나 임 행정관은 만나주지도 않았다. 개혁의 최종 목표를 인정하되 중간 목표는 인정할 수 없다는 육군의 태도를 당면한 개혁 요구를 회피하기 위한 얄팍한 술책이라고 판단한 청와대와 NSC는 국방부에 더욱 확고한 개혁의 실행을 주문했다. 그 중간에 끼어 있는 윤광웅 장관은 심적 부담을 느꼈다. 육군의 고위 장성들은 사석에서 윤 장관의 직함을 빼고 이름만 부르며 노골적으로 장관을 능멸하고 비하했다. 반면 청와대는 "개혁의 특공대로 내려보낸 윤 장관이 제 역할을 못한다"며 불만스러워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병력이 감축되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끼는 육군의 전력 현대화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NSC의 한 실무자는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방개혁 2020은 청와대가 육군에 코가 꿰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부대 구조를 개편하고 병력을 감축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육군의 전력 현대화 요구를 전부 수용해 준 것이다. 이로 인해 국방개혁 2020에 지상 전력이 과도하게 반영되는 것을 NSC가 견제하지 못하고 합참에 끌려다녔다. 노 대통령까지도 이를 내심 불만스러워했으나 결국 군의 요구를 수용했다."

 

우리 군이 장기간 병력 위주의 군에 안주하면서 경직성 경비인 인건비와 유지비가 팽창되어 오는 동안 세계의 무기는 날로 첨단화되었고,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2020년까지 군을 선진화하려면 그야말로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다. 우리의 육․해․공군은 북한을 의식하기보다는 경쟁 관계에 있는 타군을 의식하며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했다. 서로 더 많은 무기 소요를 계획에 반영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경쟁했다. 그 바람에 각 군의 무기가 서로 중복되는가 하면 도입 규모를 늘리는 등 예산을 부풀리는 악습이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예컨대 한국군의 징후경보능력을 개선하기 위해 공군의 글로벌호크 고고도 무인정찰기 도입 계획이 채택되었음에도 육군은 사단급 중고도 무인정찰기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육군의 중고도 무인정찰기의 요구성능(ROC)이 과도하게 설정되다 보니 공군의 글로벌호크와 사실상 중복되는 결과를 빚었다. 명백히 작전영역이 중첩되는 무기들이었다. 또한 공군이 근접 항공 지원을 할 수 있는로우(LOW)급전투기를 개발하고 있음에도 육군은 대형공격헬기(AH-X), 또는 한국형헬기(KHP) 사업을 강행하려 했다. 이 두 사업 역시 작전영역이 서로 중복된다. 이렇듯 검증되지 않은 소요가 국방개혁 2020에 다수 반영되어 있었으나 당시 청와대와 NSC는 이를 검증할 능력이 없었다.

 

한편 육군의 장군들은 급격한 지상군 병력 감축으로 육군 전력이 시급히 보완되어야 함에도 해군이 한 척에 1조 원이 넘는 이지스함을 도입하고 공군이 대당 가격이 5000억 원이 넘는 조기경보기를 도입하는 등 해․공군에 국방 재원이 투자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전통적으로 육군은 한미동맹 체제 하에서 해․공군은 미국의 증원 전력에 의존하고 한국은 지상전 위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 값비싼 해․공군 전력은 미국에 의존하여 국방비를 절감해야 미군이 한국군에게 이양하고자 하는 지상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노 대통령은 국방개혁 2020을 법으로 만들어 장기적 일관성을 부여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힘입어 2006년에 ‘국방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개혁의 구체적 목표가 법으로 명기되었다. 그러나 참여정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개혁에 대한 육군의 반발은 새로운 정부 탄생을 기다리며 반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명박 보수정권 등에 업고, 육군 지상주의 부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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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따라 말도 바꾼 군 수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할 당시 표방한 국방정책의 방향은 이전정부에서 소홀히 했던 북한 핵, 미사일, 특수전 전력과 같은 소위 ‘비대칭 위협’에 대한 대비를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략적 수준으로 한․미동맹을 격상시키겠다고 다짐도 했다. 이명박 정부의 국가 선진화 국정기조에 부응하기 위해 우리 군도 선진화와 발전의 길로 가겠다는 거창한 비전과 다짐도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지난정부가 수립한 국방개혁 2020의 수정이 필연적이었다. 우리 국방의 목표와 방향, 군 상부구조와 부대구조, 전력구조에 대한 기본 설계도를 담은 포괄적 국방계획이 국방개혁 2020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새로운 국방태세를 정비하는 정책의 초점은 이를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에 모아졌다.  

 

그러나 실제로 국방개혁을 수정하겠다는 당사자는 다름 아닌 노무현 정부의 국방개혁안을 수립한 핵심인물들이었다. 이상희 국방장관은 2005년부터 합참의장으로 재직하면서 현재 국방개혁 2020을 직접 만들었다. 개혁 완료시기인 2020년까지 전력투자비 271조원 소요를 산출하여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한 당사자다. 국방부에서 국방개혁 수정을 주도하게 된 김경덕 국방개혁실장은 당시 합참 전투발전부장을 역임하면서 개혁안을 직접 설계한 인물이다. 한때 “더 이상 손 볼 것이 없는 퍼펙트 한 작품”, “세계 최고의 패러다임”이라고 그들의 국방개혁을 스스로 자화자찬하고 정권이 바뀌자마자 뜯어 고쳐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었다. 

 

이러한 의구심은 정치권으로부터도 왔다. 7월 23일은 한나라당 전당대회 다음날이다. 이날 아침 일찍 이상희 장관은 새로 선출된 박희태 대표 최고위원을 찾아왔다. 지난정부가 법제화한 ‘국방개혁기본법’을 수정해야하니 정치권이 협조해 달라는 취지의 방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날 이 장관이 박 대표에게 설명을 시작한지 얼마 안 돼 정몽준 최고위원이 대표실로 들어와 이 장관이 설명하는 것을 옆에서 듣게 되었다. 이 장관의 말을 들은 정 의원은 발끈했다. “지난 정부에서 국방개혁 2020이 잘 갈수 있게 해달라고 나에게 부탁한 이 장관께서 이제 와서 국방개혁 2020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까닭을 모르겠다”며 따지고 나선 것.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넘어갈 만 했다. 문제는 다음 날.

이 장관은 측근 참모를 불러들여 “어제 정몽준 최고위원으로부터 면전에서 모욕을 당했다, 이제껏 친척의 친구인 정몽준 최고위원을 지지해왔으나 오늘부로 그 지지를 철회한다”고 말하며 받아 적도록 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정 최고위원에게 직접 전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 장관의 메시지는 얼마 후 정 최고위원에게 전달되어 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핵심전력, 미국에 의존한다


국방부와 정치권이 충돌한 것은 이상희 장관의 국방개혁 재검토 의지가 그 이유다. 부임한지 채 한 달도 안 된 올해 2008년 4월초, 이상희 장관은 계룡대 워크숍에 내려가 국방개혁 2020에서 제시한 미래 핵심전력은 “미국에 의존한다”며 “현존하는 북한 위협에 대비하는 새로운 전력소요를 5월말까지 제출하라고 각군본부에 지시했다. 한국군이 보강하기로 한 핵심전력을 미국에 의존한다는 발상으로 전환된 배경에는 소위 '연계전력(bridge Capability)'이라는 개념이 제시되었다. 이 개념은 2006년 윤광웅 국방장관과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전시작전권 전환 시기를 두고 힘겨루기를 할 무렵에 처음 등장했다. 럼스펠드 장관은 “한국이 2009년까지 전시작전권을 가져가라”고 압박하면서 2009년도에 한국의 취약한 전력은 미국이 지원해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당시 미국은 전시작전권 전환 시기와 관련하여 한반도 작전을 구성하는 세 가지 전력요소, 즉 ▲전환시점까지 한국이 보강할 전력 ▲전환 이후 당분간 미국에 의존할 전력 ▲ 동맹이 있는 한(life of alliance) 미국에 영속적으로 의존할 전력으로 구분하여 제시했다. 이중 첫 번째가 바로 국방개혁 2020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징후정보수집, 지휘통제, 정밀타격, 공중우세 등의 기반이 되는 전력이다. 두 번째가 소위 ‘연계전력’으로서 한시적으로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정보력과 정밀 타격능력과 같은 것이다. 세 번째는 핵우산과 같이 한미관계에서 미국의 독점적 지위가 영속적으로 보장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이 장관은 우리 군이 보강해야할 핵심전력은 럼스펠드가 말한 취지와 달리 우리가 미국에 의존하는 연계전력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이 장관의 발언은 미국과 사전조율을 거친 것이라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러나 이 장관은 핵심전력을 공백으로 남긴 상태에서 육군 군단, 사단 작전능력을 증강한다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공격헬기, 신형전차, 자주포, 사단급 무인정찰기, 장갑차와 같은 육군 기동군단 전력에 소요의 우선순위를 부여되었다. 반면에 글로벌호크 무인정찰기, 해군 기동전단 전력, 미사일과 같은 해․공군 전력, 그리고 한국군 지휘통제를 효율화하기 위한 C4I 전력소요는 뒤로 밀렸다.

 


지상전력 증강 비밀 보고서


한편 이렇듯 다시 지상군 위주로 전력소요가 조정되는 배경에는 새로운 위협인식이 작용했다. 국방개혁 재검토 움직임에 불을 지른 것은 4월에 합참 작전본부가 이상희 국방장관에게 제출한 보고서 때문이었다. 비밀보고의 핵심내용은 “북한군이 기존의 군 구조를 수정하여 경보병부대로 재편되고 있고, 그 결과 북한 특수전의 위협이 괄목할만하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북한군 제2제대에 속해있던 특수부대가 제1제대로 통합됨으로써 경보병 위주의 특수부대로 재편되었다는 것을 그 골자다. 또한 북한이 전방군단에 경보병 사단을 추가로 창설하고 전방사단의 경보병대대를 연대급으로 증편하였다는 사실이 그 구체적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4월의 장관 보고회의에는 합참 작전본부와 정보본부 관계자들이 다수 참여했다. 보고서에서는 북한이 전방의 전 축선에서 압도적 무력을 바탕으로 한 대량전쟁의 틀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유사시 특수군으로 한국의 후방을 침투하여 일거에 교란작전을 하는 특수전을 병행하는 북한의 전략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 인해 북한의 재래식 지상전 위협은 크게 증가한 것으로 보고서는 결론을 내렸다. 이 보고서 한 건이 이명박 정부의 국방정책에 미친 영향은 심각했다. 섣불리 해․공군 전력을 증강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유별나게 대북 열세인 지상군 중심으로 국방정책을 전환해야 함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북한군 평가는 이듬해 2월 ‘국방백서’에서 북한의 특수군이 12만에서 6만 명이나 증가한 18만 명으로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새로운 북한 위협평가를 기초로 국방부는 북한 특수군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폐지하기로 한 예비군 동원사단을 존치하고 정예화하며, 기동 및 화력(전차, 다련장포, 자주포, 장갑차) 증강에 군비지출을 확대하는 것으로 국방개혁 기본계획을 수정하는 논리적 기반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국방백서의 북한 위협인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국방부는 11월로 완결되기로 되어 있는 국방개혁 기본계획의 대통령 재가를 앞두고 작년 10월에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비밀 보고서를 청와대에 제출한다. “북한군의 지상전위협에 비해 한국은 열세”라며, “현 국방예산 구조 하에서는 2020년이 되어도 북한과 대등한 지상전 전력 확보가 어려우므로 재래식 전면전 위협에 대비하는 전력 보강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향후 남북 간의 충돌은 대규모 지상전 교전의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므로 지상 전력을 보강하는데 국방재원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보고서에서는 밝히고 있다. 국방개혁 2020을 근원적으로 뒤집는 육군 특유의 논리였다.

 

그 직후부터 국방부는 2019년까지 50만명 수준으로 병력과 부대를 감축하기로 한 국방개혁 2020은 5년 정도 그 개혁 완결시기를 늦춘 ‘국방개혁 2025’로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상희 장관은 우리 군의 전력구조를 갖춤에 있어 “현존위협에는 작전적으로 대비하고 잠재적 위협에는 전략적으로 대비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여전히 재래식 전면전에 대한 대비를 우선시하는 태도였다. 육군 기동군단을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국방개혁 2025를 완성한 시점은 올 2008년 8월 1일, 국방부에서 개최된 ‘대장급 컴퍼런스’. 8시간 동안 진행된 이 회의에서 이 장관은 국방예산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상기시키며 기존에 계획된 전력의 우선순위를 조정한다고 말했다. 회의가 끝난 후 이어진 회식자리에서 이 장관은 참모총장들과 폭탄주를 돌리며 현 정부의 국방계획이 완결되었음을 자축했다.


 

육군 개혁 속도를 늦추는 시도


한편 국방부는 8월 14일로 예정된 이명박 대통령의 계룡대 방문 시점에 새로운 국방개혁안과 방위사업청 조직개편 등 중요 국방정책을 대통령에게 보고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방부의 동향을 관찰해 온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은 이날 이상희 장관의 대통령 보고를 차단했다. 무언가 국방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동향이 감지되었다. 특히 국방개혁의 모든 논의를 무력화하면서 육군의 개혁 속도를 늦추고 해․공군 전력 확충을 차단하려는 국방부의 수구적 태도에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을 비롯한 청와대 행정관 상당수가 격렬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현재 육군 군단의 작전범위는 가로 30km, 세로 70km다. 국방개혁 2020에서는 이것이 100km×150km로 확장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국방개혁 2025에서는 작전범위가 더 확장된 150km×250km로 작전지역이 설정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기존에 계획된 차기 UAV, 차기전차, 차기장갑차, 차기다련장, 자주포, 공격헬기의 소요를 반영함은 물론 미군의 스트라이커 여단이 보유한 기동 및 타격력을 갖추겠다는 계획이다. 육군 기동군단의 능력강화가 지상전을 주축으로 하는 한국적 국방태세의 본질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러한 육군 전력을 갖추기 전까지 병력감축도 전면적으로 유보해야 한다는 수구적 발상도 첨부되었다. 한편 개혁의 완결시기를 5년 늦추면서 개혁 기간 중 방위력개선비는 오히려 1조를 감축하는 270조원으로 예산을 계획했다. 이럴 경우 해군과 공군 전력소요는 막대한 차질이 불가피하다.  

 

이렇게 육군의 포병전력이 증강되면 포탄의 고도가 1만 피트를 넘어 2만 피트에 육박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현재 우리 군의 공중 공역관리에서는 1만 피트 이상은 공군 영역, 1만 피트 이하는 육군 영역이다. 육군의 무기체계가 공군의 영역을 침범함에 따라 작전이 중첩된다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그러나 합참의 입장은 단호했다. 공군의 근접항공지원이 육군 포병작전을 방해할 우려가 있으니 공군이 비켜나라는 것이다. 합참 전력부서의 한 회의에서 공군이 이에 대해 항의하자 “병력이 감축되는 당사자는 육군이다. 해군과 공군은 병력이 유지되니 말하지 말라. 전력증강은 육군 몫이다”라고 한 장성이 일축했다. 이 무렵 국방부 자문에 응했던 예비역 장군들 사이에서는 “우리나라 육군은 공군의 근접항공지원 필요 없다, 육군은 포병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확산되었다. 때마침 공군의 한국형전투기사업(KFX)의 추진은 경제성이 없다는 언론보도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공군의 임무를 육군이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 판명되면서 합참의 새로운 작전개념은 다시 재검토되었다. 고도로 작전범위를 나누는 것이 여의치 않자 이번에는 작전거리(km)로 나누자는 의견이 합참으로부터 나왔다. 군의 지상작전 계획에는 군 간의 각종 화력운용의 중첩을 피하기 위해 ‘사격협조선(CFL: Fire Coordination Line)이라는 것이 있다. 합참은 군단과 사단의 역할을 높이기 위해 이 선을 조정하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결국 육군의 기동․화력 전력증강을 먼저 결정하고 여기에다가 작전개념을 거꾸로 꿰맞추려고 하니까 이리 맞춰도 안 되고, 저리 맞춰도 안 되는 딱한 상황이 이어졌다.  


 

청와대의 전격적인 개입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현 국방부와 합참은 북한의 새로운 위협과 현대전의 추세와 맞지 않게 재래식 지상전에 한국군의 역할을 고착시킴으로써 국방의 위상을 한 단계 추락시키고 있다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결국 국방개혁 수정이 현 정부가 표방한 국방 선진화와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병력과 부대감축으로 불이익을 보는 육군에 대한 보상방안을 찾는 작업으로 전락해버렸다는 비판이다.  

  

8월 말, 김성한 외교안보수석 주재로 청와대에서는 새로운 국방개혁 2025에 대한 국방부 개혁실의 보고회의가 개최되었다. 김경덕 국방부 개혁실장의 브리핑을 마치고 토론 시간. 청와대를 자문해 온 국방연구원(KIDA), 국방과학연구소(ADD), 방위사업청 전문가들은 청와대와 기획재정부에 수시로 국방부의 국방개혁 수정에 대해 우려를 전달해 온 터였다. 이 자리에서 백승주 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방개혁 2025는 “미래 국방에 대한 시각이 결여된 정지된 시계를 보고 만든 계획”이라고 비판하여 파장을 일으켰다.

 

이미 국방부가 청와대에 국방개혁 수정안을 보고하기 이전인 정권 초기부터 기획재정부는 청와대 지침을 받아 ‘군 소요검증위원회’를 만들어 정밀하게 군 전력구조를 검토해왔다. 기획재정부의 재정기획관실에서는 방위사업청, 국방연구원, 국방과학연구소, 민간 군사전문가를 초빙하여 합참을 상대로 전력소요의 절차와 방법, 그리고 소요의 타당성에 대해 검토했다. 그 결과 6월에는 육군의 전력소요 중 차기전차는 현 재정여건상 어렵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위원회는 국방부의 소요결정 방식은 타당성이 결여되어 국책사업에서 흔히 사용되는 ‘예비타당성제도’를 무기소요에도 도입하자고 권유했다. 그러자 회의에 참석한 합참 관계자는 “중기국방계획은 대통령 재가 사항이므로 그런 절차는 필요 없다”고 버텼다.

 

김성한 외교안보수석은 이날 김경덕 국방개혁실장에게 “이제까지의 검토내용을 전면 백지화하고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지상군의 완전성을 도모하고자 하는 ‘이상희 독트린’이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이상희 장관은 8월말 국회 국방위 상임위에서 “9월까지 국방개혁 수정안을 국회에 보고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청와대와 계속되는 이견으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 장관은 10월 6일부터 시작된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국방개혁 수정은 “아직도 검토 중”이라며 말을 바꿨다. 이 장관의 리더십에 대해 국회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국방개혁이 좌초될지 모른다고 본 김장수 의원은 “선진 강군을 만들기 위한 국방개혁 시기를 연기하려는 시도는 절대 안 된다”며 상임위에서 공개적으로 이 장관을 비판했다.

 

그러던 중 10월 7일, 북한이 서해상에 10개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국회 국방위는 비공개로 그 내용을 보고받았다. 이 사건을 통해 국방위는 국방부가 북한의 새로운 위협에 대해 별다르게 대비하지 않고 있다는 불만을 갖게 되었다.

청와대와 국회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은 국방부는 애써 만든 국방개혁 2025를 포기하고 다시 노무현 정부가 만든 국방개혁 2020으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병력과 부대감축은 2020의 목표를 그대로 답습하되, 기동군단을 1개 추가한 2개의 기동군단을 포함하여 2020년까지 50만명 수준의 병력과 7개 군단수를 맞춘다는 것이 수정된 개혁안의 골자다.

 

1년을 허송세월 하면서 국방개혁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자 이전에도 여러 차례 국방예산 효율화에 대해 언급했던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1월 10일 열린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강한 어조로 국방예산의 효율화를 재차 강조했다. 

“이제껏 내가 국방예산을 효율화하는 방안을 여러 차례 지시했는데, 아직까지 이루어진 것이 없고 보고된 적도 없다. 재차 지시하니 제대로 만들어서 보고하라.”

이무렵 청와대의 관심은 열악한 재정여건을 완화하기 위해 국방비 규모를 얼마나 감축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청와대와 따로 움직인 국방부


해군과 공군은 이미 줄초상이 나고 있었다. 이미 집권 초에 국방부는 감시권을 정찰할 수 있는 미국의 글로벌호크 무인정찰기 구매를 취소하고 군단 작전에서 요구되는 중고도 무인정찰기를 독자개발 하겠다는 육군 위주의 정책을 결정한 바 있다. 글로벌호크는 공군이 2012년에 창설할 정찰비행단이 운용할 전력이고 중고도 무인정찰기는 육군 군단이 운용할 전력이다. 글로벌호크 무인정찰기, 금강․백두 정찰기, 조기경보기 전력을 통합한 전략정찰부대 운용계획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해군의 경우 3척의 이지스함과 함께 대형수송함과 여기에 탑재되는 항공전력의 구비를 통해 해양에서의 작전능력을 도약시키려는 꿈이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표면적으로는 국가 재정압박 상황으로 국방비가 줄어든다는 명분이 작용했지만 육군의 경우는 국방개혁 2020 당시보다 다련장포, 신형자주포 도입계획을 3년 정도 앞당기고 애초 계획에 없었던 차륜형 장갑차를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추가하였다. 특히 차기 전차, 자주포, 다련장, 장갑차에 소요되는 우선순위가 높은 지상전력에 46조원을 투입한다는 것은 핵․공군 전력 증강을 위한 재원을 육군으로 전환하겠다는 의도였다.

 

청와대의 거듭된 견제에도 불구하고 이상희 국방장관은 2009년 6월 26일에 마침내 그의 의도를 담은 ‘국방개혁 기본계획’을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재가 받는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이 대통령은 개혁문서에 서명하면서도 “국방예산에 관한 부분은 추후에 더 검토해보자”고 말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이 대통령이 국방부 계획을 전부 승인했다”고 발표하는 동시에 이제 육군 전력 확충에 더 이상의 장애물이 없다는 인식으로 경도되었다. 결국 대통령이 재가한 문서의 성격이 무엇이냐, 는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이 장관과 장수만 차관 사이에 가장 다른 인식이기도 했다. 장관과 차관 사이의 갈등은 ‘항명성 편지 사건’으로 유명해진다.

 

북한의 비대칭 위협을 강조하면서도 지상전 위주의 국방정책이 수립되는 상황을 제어하지 못했던 이명박 정부 초기는 2010년 3월에 천안함 사건이라는 중대한 분기점을 맞이한다. 천안함 사건은 그 이전과 이후로 국방의 역사를 확연히 가를 정도로 정치권력과 군대에 심각한 충격을 준다. 정권 초기의 모든 국방개혁 논의를 근원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를 마련한 천안함 사건에 이어 11월의 연평도 사건은 군 대응의 허점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이제 ‘합동성’이야말로 군 개혁의 절체절명의 과제라는 점을 명확히 부각시킨다. 이제 군 개혁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40년간 논의하다 제자리로 

한국군 개혁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한 시점은 베트남전 종전으로 파월 국군이 대거 귀국한 1971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을 위해 무리하게 확장했던 군사력을 다시 적정 규모로 재조정하고, 미국의 군사원조 중단에 따라 자주국방을 위한 새로운 기획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군 특명검열단을 통해 국방체제 개편을 지시하면서 크게 네 가지 지침을 부여했다. 군 지휘통솔의 용이성과 능률성, 통합된 전력의 발휘, 경제적인 군 운용체제, 북한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대응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군 군정과 군령의 기본체제를 재정비했고, 육군 3군사령부와 의무사령부, 해병대사령부 등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이후 40년 동안 역대 정권은 말을 조금씩 바꿔가며 그 나름대로 국방개혁을 추진했지만, 핵심 내용은 박정희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주적 방위력과 한미동맹이 서로 보완해 발전할 수 있도록 한국형 국방체제를 형성하려는 노력 자체는 이제껏 변함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개혁의 본론도 예나 지금이나 거의 다를 바 없다. 다만 자주국방 추진 시대(1972~89년)와 국방체제 발전 시대(1990~97년), 국방정책 전환 시대(1998~현재)라는 시기 구분이 개혁안의 서론만 바꿔 쓰게 하는 표면적 명분으로 작용했을 뿐이다.

 

이와 함께 지난 40년 동안 군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의존하려는 동맹세력과 자주적 방위력을 우선시하는 자주세력 사이의 갈등이 불거진 것도 언제나 유사했다. 시대환경에 맞게 군을 변화시키려는 정치 지도자와 현실을 고수하려는 군부 사이의 마찰,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하려는 육·해·공군과 해병대 사이의 갈등에 휘말려 개혁이 제대로 결실을 거두지 못한 일 역시 대동소이하다. 한 정권에서 좌절된 국방개혁이 다음 정부로 이월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한때 사회발전을 선도하던 군은 그 발전 속도에서 민간에 추월당한 지 이미 오래다.

 

발전의 사각지대로 내몰린 군이 사회로부터 불신당하는 요즘의 상황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80위원회’가 10·26사건 6개월 전에 발간한 ‘80년대 육군정책 발전방향’만 봐도 거의 똑같이 등장한다. 1980년대에 미군이 철수할 것이라 가정하고 한국형 군사제도로 전환하려고 시도했던 당시의 선구적 노력은 오늘날 한국군이 고민하는 군사제도와 국방기획에 관한 모든 고민을 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승화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 승인한 이 문서에는 80위원회 간사장인 임동원 준장과 총괄장교인 김희상 대령, 조성태 중령의 이름이 눈에 띈다. 국방 기획통인 이들은 오늘날 안보 분야에서 각기 진보와 중도, 보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박 대통령 시해 후 10년 세월을 기다린 끝에 추진한 국방개혁이 바로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818위원회’가 주도한 ‘장기국방태세발전방향 연구’다. 흔히 ‘818군제개편’이라 부르는 이 방안은 박 대통령 시절의 80위원회가 예견한 미군 철수 상황이 ‘넌 워너 수정법안’으로 구체화된 1988년 상황에서 마련한 거시적인 국방기획이었다.

 

 

하나회의 반발과 개혁안의 변질

 

흥미로운 사실은 818군제개편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법제과장을 맡았던 인물이 바로 지금 국방부 장관으로 국방개혁 추진을 책임진 김관진 당시 대령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당시 집권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의 장기집권계획이라는 의심을 받아 야당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치면서 국회 심의과정에서 크게 수정된다.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가 단식투쟁을 불사하면서까지 통합군제 창설에 반대하자, 개혁안은 군령과 군정을 일원화한 통합 국방참모총장제도 신설을 포기하고 그 대신 현재와 같은 육·해·공군 병립의 합동군 제도를 채택한다.

 

그러나 야당보다 더 큰 개혁의 걸림돌은 하나회가 장악한 육군본부였다. 이들은 미국으로부터의 작전권 환수를 반대해 보병 위주의 장교정원을 확대했다. 육군본부 인력감축에 저항해 거꾸로 증원을 단행하고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부대를 증편하는 등 반개혁적 태도를 보이면서 818위원회와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우여곡절 끝에 국군통신사령부, 국군정보사령부, 국방참모대학, 조달본부 등을 창설하고 각군 본부와 기구를 개편하긴 했지만, 새로 창설된 중앙기관만큼 각군 본부의 기능이 줄어들지 않아 기능 중복과 옥상옥 기관의 난립이라는 새로운 비효율을 양산했다. 초기의 순수성과 달리 완전히 변질되고 왜곡된 국방개혁이었다. 오늘날 전투형 군대가 아닌 관리형 군대, 행정 군대가 되고 말았다는 한국군의 문제점은 바로 이 시기에 태동된 잘못된 개혁에서 기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율곡비리 척결과 하나회 숙정이라는 초유의 군 개혁을 단행했지만 이후 집권기간 내내 군의 체질과 구조를 바꾸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당시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개혁이라는 단어는 군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군내 극소수였던 개혁 엘리트를 결집해 ‘21세기 국방연구위원회’(이하 연구위)를 구성하고 개혁 방안을 검토했다는 점 정도다. 여기서 활약한 국방부 정책실장 조성태 중장 등은 자본주의가 고도화하는 21세기에 대비해 2002년까지 50만 명으로 병력 감축, 상비사단 12개 감축 등 과감한 군 기능 및 규모 조정을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연구위 부위원장을 지낸 예상호 장군을 비롯한 다수의 육군 고위장성들은 국방개혁을 통합군제 시행 준비로 의심한 해군과 공군의 반발에 부닥쳤다. 그 결과 1995년에 이르러 연구위는 보고서도 채택하지 못한 채 전격 해체돼 국방개혁의 시계는 완전히 정지되기에 이른다. 이후에는 국방부 차원의 연구 작업만 이뤄졌는데, 당시 국방부 자문에 응한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이 이번 정부에서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과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방개혁 논의를 주도했던 이상우 전 한림대 총장이었다.

 

정작 국방개혁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시기는 김대중 정부 때다.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상황 속에서 군도 거품과 군살을 빼는 개혁에 체념적으로 협조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 국방개혁위원회는 2015년까지 50만 명으로 감군하는 방안을 포함한 개혁안을 ‘국방기본정책서’로 발간해 1999년 초 김대중 대통령의 승인을 받는다. 이때 대통령에게 개혁안을 설명한 사람이 바로 이번 정부에서 대통령 경호처장을 지낸 김인종 당시 국방부 정책실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상희 정책국장이다. 기본정책서를 작성하면서 육군 1군과 3군 통합안을 제출한 사람은 김관진 당시 육군 전략기획차장. 지상작전사령부 창설안의 개혁성을 육군 시각으로 완화시키는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 시절 국방개혁은 시행 초기부터 암초에 부닥쳤다. 1·3군을 통합하는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주한미군이 “지휘통제자동화체계(C4I) 여건상 문제가 있다”며 반론을 제시했고, 병력감축 계획에 대해서도 저항이 일어나기는 마찬가지였다. 해군과 공군의 반발은 여전했고, 그 결과 공감대 형성에 실패했던 국방개혁은 급속히 추진 동력을 잃었다. 이 무렵 부임한 조성태 당시 국방부 장관이 결국 “군 구조개혁은 정보화 추진 이후로 연기한다”고 발표하면서 그때까지 진행했던 개혁에 대한 논의는 송두리째 무너지고 만다.

 

또 한 번의 개혁 시도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프랑스를 방문해 미셀 알리오 마리 국방장관으로부터 프랑스 군의 개혁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시작됐다. 여성 국방부 장관의 열정에 감동받은 노 대통령은 특히 법과 제도에 의해 장기적으로 추진되는 국방개혁 방식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 2005년 ‘국방개혁2020’과 2006년 ‘국방개혁에 관한 법률’이다. 김대중 정부 시기에 나온 국방기본정책서의 개혁 목표 시기를 5년가량 연장하는 것을 기본 골격으로 삼은 이때의 개혁안을 완성한 사람이 현재 대통령실 위기관리실장인 안광찬 당시 국방부 정책실장과 이상희 당시 합참의장이었다. 2020년까지 ‘작지만 강한 군’을 위해 체질과 구조를 바꾸자는 개혁안이었다.

 

 

반복되는 표지 갈아 붙이기

 

이명박 정부 들어 두 사람이 요직에 진출함에 따라 안보당국 주변에서는 이전 정부 국방개혁안의 큰 틀을 이번 정부에서 계승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이상희 장관은 ‘재래식 전력을 축소하고 지휘통제, 감시정찰, 정밀억제타격을 중심으로 한 핵심전력을 보완한다’는 국방개혁2020을 백지화하고, 육군 재래식 전력 위주의 기동군단에 몰입하기에 이른다. 한때 “더는 손 볼 것 없는 완벽한 패러다임”이라고 자화자찬하며 자신이 만들었던 개혁안을 수정하면서까지 재래식 지상전으로 경도되자, 청와대는 격하게 반대하며 이상희 장관과 갈등을 빚었다. 이로 인해 임기의 절반을 소모적 논쟁에 허비한 이명박 정부는 김관진 장관이 부임하자마자 전격적으로 군 상부구조 개편과 합동성 강화를 골자로 한 새로운 국방개혁을 제시하게 된다.

 

지난 40년 동안 쏟아졌던 무수한 군 개혁 논의는 분명 그 나름대로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었다지만, 전체적으로는 제자리를 맴돌며 진화하지 못했다. 같은 이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개혁 추진 실무를 담당한 사람들의 면면마저 똑같았다. 그사이 50만 명으로 병력을 감축해 효율적인 군을 만들겠다는 목표시한은 2002년에서 2015년으로, 다시 2020년으로 연기됐고, 지금은 2030년까지 밀렸다. 정권이 바뀌면 목표시점도 따라서 지연될 뿐 같은 개혁안에 표지만 갈아 붙이는 형식적인 작업을 반복한 것이다.

 

이렇게 군 구조조정이나 정보화 추진이 계속 늦어지는 동안, 군은 과거의 관성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실패로 점철된 국방개혁의 역사가 가리키는 바는 명확하다. 국민이 국방개혁을 성원하지 않아 개혁이 좌절된 것이 아니다. 군 스스로 개혁을 부정해왔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상부지휘구조 개편이 통합군 시도 아니냐는 반발에 부닥쳐 개혁안 좌초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 2011년 국방부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김종대 편집장은 14대 국회 국방위원회 비서관으로 안보정책을 다루기 시작한 이래 16대 대통령직인수위 국방전문위원, 청와대 국방보좌관실 행정관, 국방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지냈다. 2007년 공직을 접고 외교안보 전문지 ‘D·D포커스’를 창간해 현재 발행인 겸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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