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침몰하는 국방개혁

醉月 2011. 12. 31. 08:31

제2 창군 ‘국방개혁’ 물 건너가나 국회 공전에 올해 안 법안처리 난망…

2015년 전작권 전환 준비 시간 턱없이 부족

5월 6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전군주요지휘관회의 결과를 보고받고 있다.

 

8월 25일 국회 국방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국군조직법 개정안을 포함해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국방개혁 관련 법률안이 상정된 이날 회의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자리였다. 언론을 통해 개혁안에 대한 철저 검증을 요구해온 김장수 한나라당 의원이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중동으로 출국한 것이 이틀 전. 유보적 태도를 견지했던 또 한 명의 군 출신 여당 위원인 한기호 의원은 정무위 소속이던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자리를 맞바꿨다. 회의를 앞두고 “법률안 통과를 위해 비판적인 여당 의원을 배제하려는 사전 조치”라는 뒷말이 나온 배경이었다.

 

 

MB도 직접 나섰지만 힘없는 메아리

 

4월 22일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한진텐진호 구출작전에 대한 결과를 보고 중이다.

 

그러나 이날 ‘거사’는 싱겁게 끝나고 만다. 국방부는 지역구 행사 참석차 지방에 머물던 의원을 군 헬기로 서울로 ‘공수’하기까지 했지만, 찬성 측 의원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다수 불참함에 따라 결국 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것. 국회 주변에서 ‘국방개혁안 통과 실패의 결정적 장면’으로 뽑는 이 해프닝은 여당 의원들조차 적극적으로 나서길 꺼린 추진과정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끝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대통령 본인이 수차례 나서서 필요성을 강조하고 장관을 비롯한 군 당국 고위층 전체가 총력을 기울인 사안이었다. 국군기무사령부는 상황 분석과 대책 마련을 위한 별도의 팀을 운영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본회의 상정은커녕 법안심사소위원회 문턱도 못 넘고 끝날 판이다.”

 

개혁안 추진에 관여한 전직 군 고위관계자의 토로다. 정부가 한국군의 상부지휘구조를 일원화 체제로 개편하겠다며 추진해온 국방개혁안이 국회 공전 상황에 휘말리면서 통과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은 그는 “정치권도 문제지만, 애초에 개혁안을 만든 메커니즘이나 정부가 일을 추진해온 과정에서부터 한계를 배태했다”고 못 박았다.

 

당초 정부는 12월 임시국회를 개혁안 통과의 마지막 고비라 판단하고 총력을 기울였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직접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의 출판기념회에 수차례 참석하고, 차관을 비롯한 고위관계자들이 시간 날 때마다 의원회관을 방문하는 등 다급한 행보가 이어졌다. 이명박 대통령도 직접 나서서 “국방개혁은 현대전을 위한 제2의 창군”이라며 여러 차례 힘을 실었다.

 

그러나 상황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강행 처리한 이후 여의도 정치 일정이 올 스톱한 데다, 청와대의 요청에 따라 개혁안 통과 주도의 총대를 멨던 홍준표 대표가 중앙선관위원회 디도스 공격 논란의 와중에 낙마했다. 여기에 한나라당 내부 사정이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수렁에 빠지면서 개혁안 처리 문제가 비집고 들어설 틈이 사라진 것. 예산처리를 위해 12월 중에 국회 일정을 재개한다는 여야 간 합의가 있었지만, 국방개혁안 처리는 논의 대상과 거리가 멀다.

 

 

3월 30일 국방부와 합참에 근무하는 대령급 이상 장교들이 국방부 대강당에서 한민구 당시 합참의장의 국방개혁안 설명을 듣고 있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측의 반대의사는 FTA 처리 이후 여야관계가 악화되면서 더욱 강경해졌다. 개혁안의 핵심은 합참의장의 군령권(작전지휘)과 각군 참모총장의 군정권(인사·작전지원)으로 이원화한 현재의 지휘체계를 합참의장의 지휘 아래 총장들도 군령권을 행사하는 일원화 체제로 개편하겠다는 것. 한 민주당 소속 국방위원 측은 “세부사항에 대한 이견이라면 조정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총장에게 군령권을 부여하는 핵심 쟁점 자체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승적 처리’란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원유철 국방위원장은 이미 11월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11월 29일을 심사기일로 정한다”고 선을 그어놓은 상태지만, 기일이 지났다고 해서 야당을 배제한 채 위원회를 개최한다는 시나리오는 상상하기 어렵다. 더욱이 대통령 탈당 요구가 나올 만큼 혼돈된 최근 여의도 상황에서 ‘청와대와 정부의 간곡한 요청’이라는 말은 여당 의원에게도 별다른 압력이 되기 어려워 보인다. 당내 주류세력으로 부상한 친박(친박근혜) 진영이 이 사안에 상대적으로 유보적 태도를 취해온 것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변수. 한 국회 관계자는 “개혁안이 법안심사소위→국방위 전체회의→법사위→본회의라는 길고 긴 개정 절차를 연내에 통과할 가능성은 1% 미만”이라고 선을 그었다.

 

올해를 그냥 넘기면 내년은 더욱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국방부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2월 임시국회가 열린다 해도 공천과 총선을 코앞에 둔 임기 말 국회가 이 사안을 처리해줄 확률은 제로에 가깝고, 총선 이후에는 야당이 다수당을 차지할 가능성이 큰 현재 분위기상 새 국회가 이를 통과시켜줄 리도 만무하다. 만에 하나 의석 판도가 크게 바뀌지 않는다 해도, 이미 제출된 법안은 모두 폐기되는 데다 새로 당선된 의원들과 원점에서 다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한 국방부 관계자의 말이다.

 

“문제는 2015년 말로 예정된 전시작전통제권(이하 전작권) 전환까지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지휘구조 개편에 관한 큰 그림을 확정해야 군무회의와 국방개혁심의위원회를 열어 기본계획을 수립할 수 있지만, 국회 통과가 무산될 경우 다른 우회로란 불가능하다. 쉽게 말해 이명박 정부의 국방개혁안 전체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 경우 전작권 전환 준비는 새 정부가 들어선 후에나 다시 논의할 수 있을 텐데, 이후 시간에 쫓겨 진행하는 준비 작업은 졸속으로 흐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합동성’이 다른 과제 발목 잡은 형국

 

10월 1일 계룡대에서 열린 건군 63주년 기념 국군의 날 행사. 이날 이명박 대통령은 ‘국방개혁, 현대전을 위한 제2의 창군’이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안보 분야 과제 중에서도 대통령 본인이 가장 신경 쓰는 이슈라던 국방개혁 문제가 이렇듯 좌초하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상황을 깊이 들여다보면 개혁안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對)국회 설득작업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청와대의 그간 행동방식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가장 먼저 나온다. 특히 집권 후반기 당청 관계나 여야 관계가 이렇듯 소용돌이치리라는 사실을 미리 염두에 두지 못한 부분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 3월 중순까지만 해도 청와대 안보라인 핵심 관계자들은 “국회가 청와대의 결심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공공연히 피력한 바 있다. 한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은 “‘여의도 정치’에 거리감을 느끼는 대통령 본인의 성향에 청와대 참모들도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본다”고 말했다.

 

더욱 냉정히 말하자면, 이명박 정부는 국방개혁과 관련해 집권 후 3년 가까운 시간을 허비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노무현 정부의 ‘국방개혁2020’을 수정해 작성한 ‘국방개혁 기본계획’을 대통령이 재가한 것이 2009년 6월. 국방개혁이라는 어젠다의 규모와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의 그물을 감안하면 최소한 이 시점에는 현재의 개혁안 수준의 큰 그림이 나왔어야 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이 대통령의 대선캠프에 참여했던 한 전문가는 “5년 단임제 대통령의 특성상 국방개혁 같은 과제를 수행하려면 인수위 시기부터 뚜렷한 원칙과 비전을 갖고 임해야 했다”고 말했다. 결국 모든 책임은 청와대를 향한다는 질책이다.

 

물론 정부 관계자에게도 할 말은 있다. ‘국방 분야의 경영 합리화’를 화두로 예산 효율화를 핵심으로 하는 국방개혁의 큰 그림을 초기부터 준비해왔지만, 지난해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거치면서 뿌리부터 흔들렸다는 것. 이후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와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 등 청와대가 주도하는 회의체를 통해 달라진 상황에 맞는 개혁의 핵심 얼개를 완성해가다 보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청와대 주도의 논의 과정에서 국회나 군 예비역 인사의 의견을 면밀히 청취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들의 자존심을 자극했고, 이 때문에 상황이 악화됐다는 지적 또한 만만치 않다. 실제로 군 고위관계자들조차 이들 회의체에 관여했던 인사들이 “현재의 한국군은 (전쟁이 벌어지면) 무조건 지는 군대”라는 식의 공개 발언을 쏟아낸 것에 대해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개혁안이 공개된 후 해·공군 예비역 인사를 중심으로 반대의견이 쏟아지면서 야당은 물론 여당의원들조차 선뜻 개혁안에 손을 들어줄 수 없는 구도가 만들어진 것 아니냐는 반문이다. 한 전직 군 최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합동성 강화’를 개혁의 모든 것인 양 치부한 게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천안함·연평도 사건에서 나타난 한계가 과연 합동성 부족 때문이었는지는 이견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를 통합군제 시도로 의심한 예비역들의 반대가 본격화하자 다른 개혁 어젠다도 한꺼번에 발이 묶여 꼼짝할 수 없게 됐다.”

 

 

 

“씻을 수 없는 과오로 기록될 것”

최근 국회 일각에서는 “무조건 이번 국회 임기 안에 처리한다고 능사가 아니다”라는 말도 나온다.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지만 여당 단독으로 개혁안을 통과시킨다 해도, 총선 이후 다수당이 된 야권이나 내년 대선 이후 들어설 새 정부가 이를 폐기하고 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소지가 크기 때문. 이렇게 되면 지난 4년간 국방개혁 문제를 둘러싸고 군 안팎에서 벌였던 갖가지 논쟁을 다시 한 번 반복할 수밖에 없고, 본격적인 전작권 전환 준비는 새 정부가 안정화되는 2013년 말에나 힘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충분한 합의 없이 진행하는 법안 통과는 아무런 실익이 없다는 의미다.

 

하나의 과제를 만들고 공론화한 뒤 한참을 표류하다 끝내 침몰하고 마는 일련의 흐름. 현재의 국방개혁안 동의 여부를 떠나 전문가 대부분이 정부와 청와대의 능력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다. 익명을 요청한 한 국책연구기관 전문가는 “대통령이 개혁을 선언했다면 어떻게든 국민이 납득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게 정권의 능력이고 참모의 존재 이유다. 이명박 정부 국방개혁안의 침몰은 두고두고 한국군에 큰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씻을 수 없는 과오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40년간 논의하다 원 위치!

정권 바뀔 때마다 국방개혁 추진…

큰소리 내고 얼굴 붉히다 결국 제자리

 

 

 

한국군 개혁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한 시점은 베트남전 종전으로 파월 국군이 대거 귀국한 1971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을 위해 무리하게 확장했던 군사력을 다시 적정 규모로 재조정하고, 미국의 군사원조 중단에 따라 자주국방을 위한 새로운 기획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군 특명검열단을 통해 국방체제 개편을 지시하면서 크게 네 가지 지침을 부여했다. 군 지휘통솔의 용이성과 능률성, 통합된 전력의 발휘, 경제적인 군 운용체제, 북한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대응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군 군정과 군령의 기본체제를 재정비했고, 육군 3군사령부와 의무사령부, 해병대사령부 등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이후 40년 동안 역대 정권은 말을 조금씩 바꿔가며 그 나름대로 국방개혁을 추진했지만, 핵심 내용은 박정희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주적 방위력과 한미동맹이 서로 보완해 발전할 수 있도록 한국형 국방체제를 형성하려는 노력 자체는 이제껏 변함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개혁의 본론도 예나 지금이나 거의 다를 바 없다. 다만 자주국방 추진 시대(1972~89년)와 국방체제 발전 시대(1990~97년), 국방정책 전환 시대(1998~현재)라는 시기 구분이 개혁안의 서론만 바꿔 쓰게 하는 표면적 명분으로 작용했을 뿐이다.

 

이와 함께 지난 40년 동안 군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의존하려는 동맹세력과 자주적 방위력을 우선시하는 자주세력 사이의 갈등이 불거진 것도 언제나 유사했다. 시대환경에 맞게 군을 변화시키려는 정치 지도자와 현실을 고수하려는 군부 사이의 마찰,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하려는 육·해·공군과 해병대 사이의 갈등에 휘말려 개혁이 제대로 결실을 거두지 못한 일 역시 대동소이하다. 한 정권에서 좌절된 국방개혁이 다음 정부로 이월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한때 사회발전을 선도하던 군은 그 발전 속도에서 민간에 추월당한 지 이미 오래다.

 

발전의 사각지대로 내몰린 군이 사회로부터 불신당하는 요즘의 상황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80위원회’가 10·26사건 6개월 전에 발간한 ‘80년대 육군정책 발전방향’만 봐도 거의 똑같이 등장한다. 1980년대에 미군이 철수할 것이라 가정하고 한국형 군사제도로 전환하려고 시도했던 당시의 선구적 노력은 오늘날 한국군이 고민하는 군사제도와 국방기획에 관한 모든 고민을 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승화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 승인한 이 문서에는 80위원회 간사장인 임동원 준장과 총괄장교인 김희상 대령, 조성태 중령의 이름이 눈에 띈다. 국방 기획통인 이들은 오늘날 안보 분야에서 각기 진보와 중도, 보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박 대통령 시해 후 10년 세월을 기다린 끝에 추진한 국방개혁이 바로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818위원회’가 주도한 ‘장기국방태세발전방향 연구’다. 흔히 ‘818군제개편’이라 부르는 이 방안은 박 대통령 시절의 80위원회가 예견한 미군 철수 상황이 ‘넌 워너 수정법안’으로 구체화된 1988년 상황에서 마련한 거시적인 국방기획이었다.

 

 

하나회의 반발과 개혁안의 변질

 

1966년 10월 베트남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국군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위). 1992년 5월 공군부대를 시찰한 노태우 대통령.

 

흥미로운 사실은 818군제개편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법제과장을 맡았던 인물이 바로 지금 국방부 장관으로 국방개혁 추진을 책임진 김관진 당시 대령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당시 집권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의 장기집권계획이라는 의심을 받아 야당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치면서 국회 심의과정에서 크게 수정된다.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가 단식투쟁을 불사하면서까지 통합군제 창설에 반대하자, 개혁안은 군령과 군정을 일원화한 통합 국방참모총장제도 신설을 포기하고 그 대신 현재와 같은 육·해·공군 병립의 합동군 제도를 채택한다.

 

그러나 야당보다 더 큰 개혁의 걸림돌은 하나회가 장악한 육군본부였다. 이들은 미국으로부터의 작전권 환수를 반대해 보병 위주의 장교정원을 확대했다. 육군본부 인력감축에 저항해 거꾸로 증원을 단행하고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부대를 증편하는 등 반개혁적 태도를 보이면서 818위원회와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우여곡절 끝에 국군통신사령부, 국군정보사령부, 국방참모대학, 조달본부 등을 창설하고 각군 본부와 기구를 개편하긴 했지만, 새로 창설된 중앙기관만큼 각군 본부의 기능이 줄어들지 않아 기능 중복과 옥상옥 기관의 난립이라는 새로운 비효율을 양산했다. 초기의 순수성과 달리 완전히 변질되고 왜곡된 국방개혁이었다. 오늘날 전투형 군대가 아닌 관리형 군대, 행정 군대가 되고 말았다는 한국군의 문제점은 바로 이 시기에 태동된 잘못된 개혁에서 기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율곡비리 척결과 하나회 숙정이라는 초유의 군 개혁을 단행했지만 이후 집권기간 내내 군의 체질과 구조를 바꾸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당시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개혁이라는 단어는 군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군내 극소수였던 개혁 엘리트를 결집해 ‘21세기 국방연구위원회’(이하 연구위)를 구성하고 개혁 방안을 검토했다는 점 정도다. 여기서 활약한 국방부 정책실장 조성태 중장 등은 자본주의가 고도화하는 21세기에 대비해 2002년까지 50만 명으로 병력 감축, 상비사단 12개 감축 등 과감한 군 기능 및 규모 조정을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연구위 부위원장을 지낸 예상호 장군을 비롯한 다수의 육군 고위장성들은 국방개혁을 통합군제 시행 준비로 의심한 해군과 공군의 반발에 부닥쳤다. 그 결과 1995년에 이르러 연구위는 보고서도 채택하지 못한 채 전격 해체돼 국방개혁의 시계는 완전히 정지되기에 이른다. 이후에는 국방부 차원의 연구 작업만 이뤄졌는데, 당시 국방부 자문에 응한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이 이번 정부에서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과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방개혁 논의를 주도했던 이상우 전 한림대 총장이었다.

 

정작 국방개혁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시기는 김대중 정부 때다.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상황 속에서 군도 거품과 군살을 빼는 개혁에 체념적으로 협조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 국방개혁위원회는 2015년까지 50만 명으로 감군하는 방안을 포함한 개혁안을 ‘국방기본정책서’로 발간해 1999년 초 김대중 대통령의 승인을 받는다. 이때 대통령에게 개혁안을 설명한 사람이 바로 이번 정부에서 대통령 경호처장을 지낸 김인종 당시 국방부 정책실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상희 정책국장이다. 기본정책서를 작성하면서 육군 1군과 3군 통합안을 제출한 사람은 김관진 당시 육군 전략기획차장. 지상작전사령부 창설안의 개혁성을 육군 시각으로 완화시키는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 시절 국방개혁은 시행 초기부터 암초에 부닥쳤다. 1·3군을 통합하는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주한미군이 “지휘통제자동화체계(C4I) 여건상 문제가 있다”며 반론을 제시했고, 병력감축 계획에 대해서도 저항이 일어나기는 마찬가지였다. 해군과 공군의 반발은 여전했고, 그 결과 공감대 형성에 실패했던 국방개혁은 급속히 추진 동력을 잃었다. 이 무렵 부임한 조성태 당시 국방부 장관이 결국 “군 구조개혁은 정보화 추진 이후로 연기한다”고 발표하면서 그때까지 진행했던 개혁에 대한 논의는 송두리째 무너지고 만다.

 

또 한 번의 개혁 시도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프랑스를 방문해 미셀 알리오 마리 국방장관으로부터 프랑스 군의 개혁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시작됐다. 여성 국방부 장관의 열정에 감동받은 노 대통령은 특히 법과 제도에 의해 장기적으로 추진되는 국방개혁 방식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 2005년 ‘국방개혁2020’과 2006년 ‘국방개혁에 관한 법률’이다. 김대중 정부 시기에 나온 국방기본정책서의 개혁 목표 시기를 5년가량 연장하는 것을 기본 골격으로 삼은 이때의 개혁안을 완성한 사람이 현재 대통령실 위기관리실장인 안광찬 당시 국방부 정책실장과 이상희 당시 합참의장이었다. 2020년까지 ‘작지만 강한 군’을 위해 체질과 구조를 바꾸자는 개혁안이었다.

 

 

반복되는 표지 갈아 붙이기

 

2000년 10월 1일 김대중 대통령이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건군 52주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열병을 하고 있다(위). 2007년 1월 29일 육군 5군단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정부 들어 두 사람이 요직에 진출함에 따라 안보당국 주변에서는 이전 정부 국방개혁안의 큰 틀을 이번 정부에서 계승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이상희 장관은 ‘재래식 전력을 축소하고 지휘통제, 감시정찰, 정밀억제타격을 중심으로 한 핵심전력을 보완한다’는 국방개혁2020을 백지화하고, 육군 재래식 전력 위주의 기동군단에 몰입하기에 이른다.

 

한때 “더는 손 볼 것 없는 완벽한 패러다임”이라고 자화자찬하며 자신이 만들었던 개혁안을 수정하면서까지 재래식 지상전으로 경도되자, 청와대는 격하게 반대하며 이상희 장관과 갈등을 빚었다. 이로 인해 임기의 절반을 소모적 논쟁에 허비한 이명박 정부는 김관진 장관이 부임하자마자 전격적으로 군 상부구조 개편과 합동성 강화를 골자로 한 새로운 국방개혁을 제시하게 된다.

 

지난 40년 동안 쏟아졌던 무수한 군 개혁 논의는 분명 그 나름대로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었다지만, 전체적으로는 제자리를 맴돌며 진화하지 못했다. 같은 이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개혁 추진 실무를 담당한 사람들의 면면마저 똑같았다. 그사이 50만 명으로 병력을 감축해 효율적인 군을 만들겠다는 목표시한은 2002년에서 2015년으로, 다시 2020년으로 연기됐고, 지금은 2030년까지 밀렸다. 정권이 바뀌면 목표시점도 따라서 지연될 뿐 같은 개혁안에 표지만 갈아 붙이는 형식적인 작업을 반복한 것이다.

 

이렇게 군 구조조정이나 정보화 추진이 계속 늦어지는 동안, 군은 과거의 관성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실패로 점철된 국방개혁의 역사가 가리키는 바는 명확하다. 국민이 국방개혁을 성원하지 않아 개혁이 좌절된 것이 아니다. 군 스스로 개혁을 부정해왔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상부지휘구조 개편이 통합군 시도 아니냐는 반발에 부닥쳐 개혁안 좌초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 2011년 국방부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김종대 편집장은 14대 국회 국방위원회 비서관으로 안보정책을 다루기 시작한 이래 16대 대통령직인수위 국방전문위원, 청와대 국방보좌관실 행정관, 국방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지냈다. 2007년 공직을 접고 외교안보 전문지 ‘D·D포커스’를 창간해 현재 발행인 겸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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