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선일미(茶禪一味) 차와 선종의 만남
수행과 茶농사를 겸한 선종에 의해 차문화는 널리 퍼졌다
제다분야의 일등공신인 선종사찰은 차를 禪의 경지 깊숙이 들여놓았다
다선일미(茶禪一味) 청규(淸規)
선종 생활규정집 속 광범한 다례로 볼때 차생활 보편화 짐작, 선종의 승려가 일상에서 접하는 여덟가지의 일 중 하나로 지정
초기의 선종이 차를 얼마나 중히 여겼는가는 청규(淸規)를 보면 그 정황이 확연하다. 청규는 선원에서의 생활의 규정을 담은 법규집인데 8세기경 당(唐)의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가 처음으로 제정했다. 그런데 어떤 사정에서인지 백장의 청규는 당말(唐末) 오대(五代)의 시기를 거치면서 산일(散佚)되어버리고 북송(北宋)에 이르러 자각종색(自覺宗)이 당시의 여러 큰 사찰 등을 방문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참고하여 다시 찬술했다. 이것이 '선원청규(禪苑淸規)'라고 일컬어지는 것인데 결국 현존하는 청규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되었다.
다선일미(茶禪一味)끽다거
보태지도 빼지도 말라…그 자체로 행복이다, 만물에 나의 잣대를 들이댈 때 이미 삶은 꼬이고 뒤틀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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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선종에 뿌리 둔 일본 차 문화, 전래자 3인 모두 중국 다녀온 스님 15세기 이후 禪茶 모습 자리잡아
일본의 차문화는 불교 선종(禪宗)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일본 차문화의 최초 기록은 승려 사이초(最澄)의 행적에 보이는데, 그는 서기 804년 중국 천태산에서 천태종의 불법을 학습하고, 805년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차씨를 가지고 가 일본의 히에이산(比叡山)에 심음으로써 일본 최초의 차밭인 히요시다원(日吉茶園)이 이루어지게 했다. 비슷한 시기인 815년에는 승려 구카이(空海)와 에이추(永忠)가 사가천황(嵯峨天皇)에게 차를 바쳤으며, 천황이 이 차로 긴끼(近畿) 지역에 황실 전용 다원을 만들도록 했다고 한다. 좀 뒤인 1191년 민난에이사이(明庵榮西)가 천태산(天台山) 만년사(萬年寺)에 주석하던 허암회창(虛庵懷敞)으로부터 선을 배우고 인가증명서를 얻어 귀국했다. 그는 귀국할 때 선법과 다법을 아울러 얻어 와 일본에서 그가 주석하던 가마꾸라(鎌倉)의 수복사(壽福寺)나 교토(京都)의 건인사(建仁寺) 주위에 차를 심고 이 차로 말차를 만들었다. 만년에 그는 일본에서 최초의 독립된 차서인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를 지어 명실공히 일본의 다조(茶祖)가 되었다. 원래 이 책은 가마꾸라 막부의 3대 장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源實朝)가 병에 걸리자 지어 올린 것인데, 이 책을 보고 감명을 받은 사네토모가 차를 많이 마셔 병이 치료되자 에이사이는 일약 일본의 육우로까지 받들어졌다. 지금도 에이사이가 창건한 건인사에서는 매년 4월 20일 그의 탄신법요에서 헌다의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 초기의 차 전래자인 사이초나 구카이, 그리고 에이사이는 모두 스님들이며 세 사람 모두 절강성의 천태산으로부터 불법과 차를 받아 갔다는 점에서 일본차문화의 전래 역시 선종과의 인연에 기인하였다고 보겠다. 에이사이가 불법을 전수받은 허암회창은 선종 오가칠종 가운데 임제종(臨濟宗)의 일파인 황룡파(黃龍派)의 고승으로서 이 또한 강서(江西)의 마조도일(馬祖道一)과 백장회해(百丈懷海)의 맥을 이었다. 오늘날까지 행해지고 있는 에이사이의 탄신법요 의식에서는 4두목(頭目)과 8두목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이는 '백장청규(百丈淸規)'의 법식에 근본을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끽다양생기' 자체는 차와 선의 결합이기 보다는 중국 고대의 의·약학에 관한 문헌에 가깝다. 일본의 차문화가 명확히 선차(禪茶)의 모습으로 가닥을 잡은 것은 대략 15세기 이후의 일이다. 15세기 말 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교토의 동산(東山)에 은각사(銀閣寺)를 세움으로써 동산문화가 일어났는데 동산문화의 시대에는 관상(觀想)의 풍조가 생겨나 차를 마시는 것에서 정신적 사유를 구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선승 이큐 소쥰(一休宗純)이나 와비차의 시조인 무라다 쥬코(村田珠光) 등은 이 시대의 인물들이다. 일본 다도의 정신적 괘탑(掛塔)이라고 할 수 있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일구(一句)는 전하는 설에 의하면 남송의 선종 양기파(楊岐派) 대사인 원오극근(圓悟克勤)이 문하의 한 일본 유학승이 귀국할 때 써 준 글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제자가 일본에 도착하였을 때쯤 배가 전복되고 말았고, 이 글은 이리저리 전하다가 이큐 소쥰의 손에 들어갔다 한다. 이큐는 이 글귀를 보고 다도의 대의를 얻었다 하여 이 글은 일본 다도의 보물이 되었고 지금도 교토의 대덕사(大德寺)에 소장되어 있다. 대덕사는 이큐 소쥰이 사까에 상인들의 도움을 얻어 창건한 절인데 당시 이 절을 중심으로 사까에 상인들과 선승들 사이의 접촉도 많았고 차문화 역시 번창했다. 이큐의 제자 무라다 쥬코가 와비차를 창안하여 선차(禪茶)의 경계를 확립한 것은 이러한 환경적 영향에 기인한 바가 컸으며, 이후 다케노 죠오(武野紹鷗), 센노리큐(千利休) 등의 다도 정신으로 이어지는 선하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차문화계의 일각에서는 이 글은 원오극근의 진적(眞跡)이 아니라 후대에 제작된 것이라 하고, 심지어 원오극근이 그러한 글을 써 주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조차 의심을 품고 있다. 이 문제는 한·중·일 차문화의 우호관계도 걸려 있는 문제여서 단편적인 자료들에 의거하여 함부로 논평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일본 차문화의 정체성을 재정립한다는 점에서 객관성 있는 연구가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다선일미(茶禪一味) 일본 다도와 '와비차'
고적한 초암차실, 선차(禪茶)의 미의식 꽃피워, 지배계층의 과시욕 버린 다성(茶聖)들의 '와비차의 정신'
자유분방함 속 엄격한 日 다례 완성
일본의 차문화가 선차의 모습을 제대로 띠게 된 것은 '와비차'에 이르러서였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 처음 차문화를 들여온 것은 선승들이었고, 이것을 대중화한 것은 무사들이었다. 그러나 초기 차승(茶僧)들은 대부분 차의 약리적 효능에 집착하였고, 무사들은 차의 문화적 공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가마쿠라(鎌倉) 시대 이후 막부가 형성되고 장군이 권력을 잡게 되자 무사들은 문화적 인사로 변모했다. 그러나 무사들은 제대로 된 차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중국의 서원(書院)을 흉내 내어 당시 일본의 실정에 비추어 엄청나게 큰 집인 쇼인즈쿠리(書院造)를 짓고, 나중에는 건물의 안팎을 금과 은으로 장식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화려한 차실에서 개최되는 차회에서는 주로 중국에서 사 온 고가의 당·송 시대의 차 도구를 사용하였고, 차도 엄청나게 비싼 것들을 썼다. 무사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곧 문화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또한 찻자리의 참석자들은 앞사람의 차회의 화려함에 촉발되어 뒷사람은 더 화려한 차회를 개최하려고 분발했다. 무라다 쥬코(村田珠光)는 이러한 서원차를 와비차로 혁신하고자했다. 그는 우선 쇼인즈쿠리 내의 다다미 20첩 넓이의 차실 안에 다다미 4첩 반의 넓이로 축소된 차실을 병풍으로 둘러막아 조성했고, 아울러 당물(唐物) 대신 시중에서 조잡하게 만들어진 잡기류들을 차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차실에 도코노마(床の間)를 설치하고 선어(禪語)를 괘물(掛物)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그였다. '와비(侘び)'란 말은 원래 '외롭다', '시시하다'는 의미를 가진 일본의 서민적 정서를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쥬코는 이것을 새로운 일본 차문화의 미의식으로 적용시킨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무라다 쥬코는 진정한 일본식 선차 문화를 연 차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케노 조오(武野紹鷗)는 무라다 쥬코가 조성한 쇼인즈쿠리 내의 다다미 4첩 반 넓이의 차실을 아예 독립된 건축물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차실의 지붕도 기와를 사용하지 않고 나무판자나 나무껍질 등으로 이었고 벽은 흙으로 발랐다. 그 역시 쥬코와 같이 일반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잡기류를 선호하였지만 그는 그릇의 외형미보다는 내재미를 더욱 모색하였다. 조오는 일본 서민들이 사용하는 잡기류에 일본 서민들의 정신이 들어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쥬코가 시작한 와비차의 정신을 더 깊숙이 내면화하고 일본화시켰다. 다만 이 시기에는 당시까지 400년간 지속되어 오던 화려한 당물을 선호하던 풍조 대신 사카이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화인들 사이에서 조선의 문화와 기물을 중시하는 사조가 일어났는데 이런 시대적 분위기도 한 몫을 했다. 센노리큐(千利休)는 쥬코와 조오가 시작한 와비차를 완성시켰다. 리큐는 조오의 초암(草庵) 차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정형화시키고, 거기에서 행해지는 다례의 형식을 다듬었다. 리큐의 다법은 극히 자연스러움을 표방하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꽃은 한 송이만 꽂되 들에 피어 있는 것과 같이, 다실은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찻잔은 깨어지거나 금이 간 것도 소중하게 사용하고, 차회는 정해진 시간보다 좀 일찍 마치고, 언제나 자리를 함께 한 손님들에게 마음을 쓸 것' 등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평범한 리큐의 다법에는 이미 무애(無碍)의 경지에 이른 달인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이 느껴진다. 그가 야마자끼(山崎)의 묘희암(妙喜庵)에 지은 다다미 두 간의 조그마한 다실 다이얀(待庵)은 후인들은 이를 초암차실의 표본으로 여기고 있으며 '주옥(珠玉)의 소우주', 혹은 '일본미 중의 일본미'로 일컫고 있다. 쥬코나 죠오, 리큐와 같은 일본 와비차의 초기 창시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화려함보다는 고적함을 중시하는 선차(禪茶)의 미의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이것은 곧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미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평소에 이와 같은 와비차를 창안한 초기의 일본 차인들도 존경하지만 이를 계승하여 오늘날의 일본 다도를 확립한 일본의 차인들 모두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다. |
다선일미(茶禪一味) 일본 천가(千家) 다도
센노리큐 다도, 일본식 기물 채용하고 차실 규모도 크게 줄여
독창성 가미로 정신적 틀 형성, 초암차가 日 차문화의 대세로
센노리큐(千利休) 이후 일본의 차문화는 초암차(草庵茶)가 대세를 이루었다. 일본 차문화의 성격을 선차(禪茶)의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셈이다. 여기에는 내성과 관조를 중시하던 당시의 문화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무라다 쥬코나 다케노 조오 등과 같은 탁월한 와비차의 달인들이 크게 이바지한 바 있다. 그 가운데서도 센노리큐의 독창성이 가미됨으로써 일본 차문화의 정신적 틀이 이루어졌고 다도의 형식 또한 결정되었던 것이다. 센노리큐 다도의 미학은 대체로 다음의 몇 가지로 들 수 있다. 그는 우선 다석(茶席)에서 사용하는 기물 가운데 화물(和物)의 비율을 높였다. 당시에는 품위가 높은 찻자리일수록 당물(唐物) 유미(唯美)의 관념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 기물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리려 했다. 그는 또 다도의 형식을 일본의 민속에서 많이 채용했다. 예컨대 서원이나 사찰에 입장할 때 손을 씻는 관수(盥手)의 예법을 차실의 입장에도 채용한 것이나, 4시간의 차회 중에 세 번 숯과 물을 보충하는 '삼탄삼로(三炭三露)'의 행다법 등은 모두 민속의 예법 가운데 매우 엄숙한 형식을 찻자리에 도입한 것이었다. 그는 차실의 규모를 극도로 축소했다. 리큐는 무라다 쥬코가 고안한 다다미 4장반의 크기로 더욱 축소시켜 다다미 2장짜리 넓이의 차실로 만든 것이었다. 심지어 '니지리구찌(躓口)'라고 불리우는 다실의 출입문은 너무나 작고 좁아서 머리를 숙이고 몸을 웅크려야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것은 차실을 속세의 귀천을 잊고 누구나 겸손한 자세로 임하는 평등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그는 또 여러 가지 새로운 기물을 개발했다. 그는 앞이 트인 풍로를 창안하고 거기에 삼발이와 접시를 설치하여 '원산(遠山)' '쌍봉(雙峰)' '근산(近山)'을 로(爐) 안에 갖추었다. 그는 검고 투박한 일본식 '라꾸 차완(樂茶碗)'을 개발했고, 벽에 거는 대나무 마디 화병을 만들었다. 요즘 우리가 말차를 할 때에 대부분 쓰고 있는 대나무 차작(茶勺)도 그가 창안한 모습 그대로이다. 일화에 의하면 그는 길을 가다 지나가는 사람의 허리춤에 차고 있는 조롱박이 너무나 멋져 보여 그것을 억지로 사서는 거기에 꽃을 꽂거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민이 허리에 차고 있는 짚으로 짠 어롱(魚籠)을 사서는 거기에 다화(茶花)를 연출하는 등 그의 심미안에는 도무지 거침이 없었다. 리큐 이후 일본의 차인들은 그가 이룩한 다도의 정신과 형식을 법식으로 삼고 있다. 그의 다법은 그의 자손들에 의해 전수되었고 이들은 오늘날까지 몇 개의 다도 종가(宗家)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우라센케(裏千家) 오모토센케(表千家) 무샤노코지센케(武士小路千家) 등은 그 대종의 하나이다. 그들은 이들 종가의 종장(宗匠)인 이에모토(家元)를 중심으로 리큐의 다도를 사법(師法)으로 삼아 익히고 전수한다. 사법을 지키기 위해 이들은 사용하는 기물도 지정된 장인을 두고 있다. 천가십직(千家十職)이 이들이다. 도사(塗師) 표구사(表具師) 토풍로소물사(土風爐燒物師) 금물사(金物師) 부사(釜師) 죽세공병작사(竹細工柄杓師) 대사(袋師) 다완사(茶碗師) 일한장세공사(一閑張細工師) 지물사(紙物師) 등이 이들인데 이들도 역시 그 지위가 부전자전으로 세습된다. 다법과 기물의 통일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루어진 제도라고는 하지만 천황제를 모방한 이와 같은 가원(家元)과 천가십직의 세습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도 있다. 오늘날 일본의 차인들은 리큐를 다성(茶聖)의 지위에 올려놓고 그의 다법을 거의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상전한다. 센노리큐는 충분히 그런 대접을 받아도 좋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이 모두 그와 같이 가원의 자질을 갖춘 사람들로만 태어나는 것일까? 또 천가십직의 물건은 독과점적 납품 행태로 말미암아 오히려 그 질이 저하되는 법은 없을까? 이에 대해서는 의식 있는 일본인들 가운데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 일찍이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선생 같은 이도 이 문제에 대해 '차의 병폐'라는 일문(一文)에서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내 생각에도 센노리큐가 이룩한 일본의 선차문화가 이와 같이 고식적인 가원제도에 묶이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일까 하는 물음이 있다. |
다선일미(茶禪一味) 국내 차문화의 시발점
禪茶문화 이어받은 구산선문, 국내 차문화 효시 가능성
삼국유사에 신라 충담사 차 기록 전해, 신라 대렴說·가야 허황후說 근거 부족
우리나라 차문화의 시발을 어느 시점으로 보느냐 하는 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신라 충담사의 차다. 기록을 보면 삼국유사에 충담사(忠談師)가 매년 중삼(重三) 중구(重九) 일에 남산 삼화령에서 미륵세존께 차 공양을 올렸다고 한 것이 있다. 그러던 어느 해(765년) 삼짓날에 경덕왕이 삼산(三山) 오악(五岳)에 제사를 올리고 귀정문(歸正門) 누상에서 서성이던 중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충담사를 만나 차를 같이 했다 하고, 이때 왕이 안민가(安民歌)를 불러달라고 청을 하니 충담이 즉석에서 노래를 지어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에 부른 안민가의 가사까지 전하고 있으니 삼국유사가 정사(正史)가 아니라고 해서 이를 사실이 아니라고 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둘째는 대렴(大廉)의 차다. 삼국사기에는 흥덕왕 3년(828)에 "견당사로 갔던 대렴이 중국에서 돌아오며 차씨를 가지고 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入唐廻使大廉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고 한 기록이 있는데 차계에서는 삼국사기가 정사라는 이유로 이 기록을 가지고 우리나라 차문화의 시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 기사에 이어 "차는 선덕왕(632~647)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왕성하였다"(茶自善德王時有之, 至於此盛焉)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이 두 기사로만 상고해보더라도 우리나라에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는데 대렴이 차씨를 가져와 경작을 시작함으로써 차의 수확량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다는 의미쯤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렴을 우리나라 차의 중흥조쯤으로 여기는 것은 무방하나 시발로 보는 데는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에는 또 신문왕(681~692)의 아들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태자가 오대산 진여원(眞如院)에서 날마다 문수보살께 차 공양을 하며 성불을 기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사와 삼국사기의 선덕왕 운운한 기사와는 시기적으로도 상호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셋째는 가야 허황후의 차다. 삼국유사에 아유타 국의 공주 허황옥이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에게 시집오면서 차를 가져왔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일은 기원 48년의 일로서 만일 이 설이 사실로 밝혀지기만 하면 한국의 차문화를 선덕왕으로부터 600년, 대렴으로부터는 800년 가까이나 앞당길 수 있을 것이기에 대단히 주목을 끄는 설이다. 그러나 이 설에는 허황후가 시집왔다는 기록은 있으나 차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없고, 사실로 인정할 만한 유물 또한 없어 아직은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또 다른 차문화 시발설을 하나 제기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차, 혹은 차문화의 전래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성립과 매우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구산선문이란 나말여초에 이루어진 아홉 개의 선문(禪門)을 말하는데 이들 구산선문의 개산조들은 거의 모두가 중국 강서(江西) 홍주(洪州)의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구산선문의 개산조들 가운데 가지산문의 도의(道義)를 비롯하여 실상산문의 홍척(洪陟)과 동리산문의 혜철(慧哲)은 다같이 서당지장의 제자이다. 성주산문의 무염(無染)은 마곡보철의 법사(法嗣)이고, 사자산문의 도윤(道允)은 남전보원의 법을 받았고, 봉림산문의 현욱(玄昱)은 장경회휘에게서, 사굴산문의 범일(梵日)은 염관제안에게서 각각 법을 얻었다. 서당지장, 마곡보철, 남전보원, 장경회휘, 염관제안은 모두 마조도일의 고제(高弟)이므로 이상의 일곱 산문의 개산조들은 모두 마조도일의 법손(法孫)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서 홍주의 선종은 앞에서도 농선(農禪)이나 청규(淸規) 등을 들어 여기가 선차(禪茶) 문화의 본산이었다는 것은 이미 누차에 걸쳐 언급한 바 있으므로 중언부언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구산 가운데 칠산의 개산조들이 여기서 짧게는 십 수 년, 오래는 삼십여 년 동안 선법(禪法)과 아울러 다법(茶法)을 배워서 가져 왔다는 데 있다. 게다가 나중에 구산선문이 합쳐져 조계종이라는 거대 종단으로 출범하여 우리나라 불교교단의 중추가 되었으므로 여기서 행한 다법이 우리나라의 차문화, 혹은 선차 문화의 효시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전후사정으로 볼 때에 가장 자연스럽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다선일미(茶禪一味) 고려의 선차(禪茶)
연등회·팔관회 등 국가 의례때 중요 품목으로 사용
일반인의 생활에도 광범하게 보급, 승려들의 茶詩, 양적으로 中보다 많아
우리나라에서 차문화가 보편화된 것은 나말여초에 구산선문을 통하여 이루어진 선차(禪茶) 문화가 선도적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정황은 뚜렷하다. 고려조는 신라의 문화를 계승하여 불교를 숭앙하였으니 고려의 차문화는 더더욱 선차문화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리라. 그것은 고려의 가장 성대한 국가 의례의 하나였던 연등회와 팔관회에서도 헌다의 행사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연등회와 팔관회는 건국 초기 태조의 '훈요십조'(제6조)에서 "연등은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고, 팔관은 천령(天靈)·오악(五嶽)과 명산(名山)·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훗날 간특한 신하가 더하거나 줄이자고 건의하는 자가 있으면 꼭 그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하여 국가의 대사로 지낼 것을 훈유한 만큼 고려 일대에 걸쳐 엄격히 실행되었다. 이 행사들은 여러 날에 걸쳐 제1부 편전의식, 제2부 진설 및 좌정, 제3부 연회의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행사의 중심인 연회에서는 처음 국왕에게 차와 꽃과 술을 올리면 이에 답으로 왕이 연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차·꽃·술·봉약·과실을 하사하는 절차로 이루어졌다. 나중에는 이 부분이 부처님 전에 향·등·차·쌀·과일·꽃을 올리는 육법공양으로 발전되어 갔다. 고려시대에는 차가 이미 국가 의례의 중요 품목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들 국가 의례는 불교적인 색채만이 아니라 토속신앙의 영역과도 연계되어 있어서 이 부분은 다음에 선차(仙茶)와 더불어 다시 논하기로 하겠다. 고려시대에 차는 일반인의 생활에도 광범하게 보급되었고 특히 사대부와 승려들의 생활 속에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고려와 조선조의 승려들의 다시(茶詩)가 양적인 측면에서 중국보다 많다고 하는 연구서도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차문화에서 선차의 성격이 얼마나 강한가를 간접적으로 고증하는 자료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려 중기 진각 혜심(1178~1234)은 걸출한 차승이었다. 그는 한 시에서 '솥에는 녹차를 달이고/향로에는 안식(安息)을 사른다/돌! 돌! 돌!/어디 가서 선지식을 찾을까'라고 읊었다. 그는 차 달이고 향 피우는 일 외에 달리 어디에서 보리(菩提)를 구할 것인가고 묻고 있다. 고려 말 백운경한(1299~1374)은 시에서 '향상의 수단은 말할 것 없네/곤하면 편히 눕고 목마르면 차 마시네/임제와 덕산은 특별히 미혹하여/헛되이 방편 쓰되 방망이(棒)와 호통(喝) 썼네'라고 읊고 있다. 백운경한은 이 시에서 선종의 대표적 화두 가운데 하나인 임제의 '할'이나 덕산의 '방'을 유위(有爲)로 규정짓고 조주의 '차'를 오히려 '일상사'로 여김을 볼 수 있다. 원감충지(1226~1292)는 어떤 선객(禪客)과 선을 문답하는 자리에서 시로써 답을 대신하였다. '인시(寅時)에는 한 국자의 미음을 마시고/오시(午時)에는 한 발우의 밥을 먹고/목마르면 세 잔의 차를 마시니/유무(有無)를 알고 모르고는 상관이 없다'. 심지어 백운 이규보(1168~1241) 같은 이는 유자(儒者)이면서도 참선을 하였고, 또 차 달이는 일을 곧 참선의 일과 동일시하였다. '다른 날 초암에서 참선을 하며/서너 권 책 보며 깊은 뜻 새겨본다/내 비록 늙었으나 손수 물 긷기를 즐기니/한 사발 차는 바로 참선의 시작이로세'. 나옹혜근(1320~1376)은 한 게송에서 읊기를 '본래 그대로요 지어진 것 아니거니/어찌 수고로이 밖에서 따로 구할 것인가/다만 한 생각으로 마음에 아무 일 없으면/목마르면 차 달이고 피곤하면 잠을 자리'라고 하였다. 이들 몇몇 다시들을 보아도 고려조의 선승들이 도달한 경지가 어디인가는 이미 스스로 분명하다. 마음에 아무 일 없는 무애의 마음이 곧 선다일미(禪茶一味)의 곳이라는 것은 아무리 근기가 얕은 나 같은 사람이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사방 지고의 법희선열의 경지가 내 앞에 있는 차 한 잔에 있다고 하니 이 외에 또 무엇을 얘기할 것인가 |
다선일미(茶禪一味) 조선의 선차(禪茶)
박해 속에서도 꿋꿋이 이어온 禪茶 문화,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 위축
차재배 가혹한 세금 매겨 억압, 세속과 거리둔 선차 성격 짙어져
조선조의 차문화는 척박한 돌밭에 핀 아름다운 한 떨기 차꽃이었다. 조선조에 들어 숭유억불이 건국이념이 되고서 불교를 따라 차문화도 산속으로 들어갔다. 더욱이 차를 재배하는 농가에 가혹한 세금까지 매겨 차나무가 집안의 우환거리가 될 정도였다. 조선 중기 사림파의 영수였던 점필재 김종직(1431-1491년)은 함양 군수로 재임시 관내 주민들이 가혹한 차세(茶稅)에 허덕이는 것을 보고 관전(官田)에 차를 심어 거기서 나는 소출로 공차(貢茶)를 대신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준 것은 아마도 조선조 역래의 대표적 선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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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성격 극과 극 두 사람 茶 하나로 평생지기 인연
초의는 사대부에 선차문화 알린 주역, 저서 '다신전' '동다송' 소중한 문헌으로
조선 후기의 선차 문화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초의 의순(1786~1866)이다. 초의(草衣) 스님은 해남 대흥사에 주석하면서 직접 차를 만들었고 우리나라 역래의 가장 소중한 차 관련 문헌의 하나인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을 펴냈다. '다신전'은 중국 청대의 모환문이 역대 다서를 엮어 모은 '만보전서'의 '다경채요'를 등초한 것이지만 원저는 명대의 장원의 '다록'이다. '다신전'의 발문에는 "총림에 혹 조주의 풍이 있으나 다들 다도를 잘 알지 못하기에…"라고 발행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 말에 의거하면 당시에도 다도의 진면목에 대해서는 잘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셈이 된다. '동다송'은 17연으로 구성된 차에 대한 송가이다. 그는 이 글에서 육우의 '다경', 소이의 '십육탕품', 범증민의 '돈재한람', 장원의 '다록', 모환문의 '만보전서', 이백·소동파·노동·나대경 등의 다시, 다산의 '걸명소' 등 많은 고대 다서들을 참고하여 차의 내력에서부터 차를 달여 마실 때의 정신적 경지에 이르기까지를 읊고 있는데 그 문장이 마치 반짝이는 보석 마냥 아름답다. 초의는 또 이 저술에서 "육안차는 맛이 좋고, 몽산차는 약효가 뛰어난데 동차(東茶)는 둘을 겸한다"고 하여 우리 차의 우수함을 언급하고 있다. 그의 시에는 몽산차, 뢰소차 등의 유명한 차 이름을 거론한 시가 더러 있고, 시취 또한 매우 깊다. "선정에 깊이 들자 죽로가 식어/남은 불씨를 지피려 구리화로를 당기네"라고 읊은 시를 보면 그가 주로 하는 일이 선정과 음차인 것 같다. 또 다른 시 "새소리 들으려 저녁 예불도 쉬고/가벼이 노니는 옛 시내 언덕/…찻자리 파하고 고요한 물가에 앉으니/그윽한 심사 돌아갈 기약도 잊었네"를 보면 그의 본분사가 예불인지 찻일인지가 모호하다. 그가 지은 다섯 평 남짓한 차실 일지암(一枝庵)은 우리나라의 대표 차실로 인지되고 있다. 일지(一枝)는 원래 '장자'의 '소요유편'에 "박새가 깊은 숲속에 보금자리를 지으나 나뭇가지 하나에 불과하고, 수달이 강물을 많이 마셔도 자기 배를 채우는 데에 불과하다"는 곳에서 차인했으니 그가 이 차실을 지은 지취가 어디에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저명한 사대부 차인인 정약용이나 김정희, 홍현주 등에게도 선차의 영향을 끼치는 등 조선 후기의 선차문화의 핵심인물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후일 그의 다맥은 대체로 세 갈래 쯤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으므로 구체적인 언급은 다른 기회로 미루는 것이 좋겠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이자 글씨와 그림의 달인이었다. 일찍이 조선에서는 사귈 만한 친구가 없다하여 연경에 자주 가 주로 중국 석학들과 사귀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 동리 김경연의 주선으로 만난 동갑내기 시골뜨기 중 초의와는 필생의 지음(知音)이 되었고 10년 먼저 죽은 추사의 제문도 초의가 썼다. 당시의 객관적 조건으로 보면 이 두 사람은 친구가 되기에는 너무나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초의는 전남 무안군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일찍이 불문에 출가한 사문의 몸이요, 추사는 충남 예산군 월성위의 권문세가 집안에서 태어난 유가의 총명재질이었다. 신분의 차이로 치면 동해와 서해의 거리쯤 되랴. 성격도 추사는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오만방자한 편이었고, 초의는 조금 어눌하고 주로 남의 말을 듣는 축이었다. 그러나 이런 성격 차이가 오히려 두 사람을 끌어당기는 자석 역할을 하였는지 오만불손한 추사도 초의에게만은 온갖 투정을 하고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성격 탓 만이겠는가! 만약에 그들 사이에 차가 없었더라면 만남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현대의 차인들 가운데에는 이들의 관계를 심지어 동성연애쯤으로 보는 이도 있을 정도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추사는 차만 떨어지면 편지로 초의를 을러댔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보시게, 일지암 토굴 민대머리. 부처님을 모시는 몸이 그토록 신통력이 없는가. 꼭 말을 해야 아시겠는가. '초의차' 떨어져 못 마시니 혓바늘이 돋고 정신이 멍해지느니. 그러니 차를 빨리 안 보내면 내 당장 말을 몰아가서 일지암 차밭을 모두 짓밟아버릴 터. 그러나 원망하지 마시게. '초의차'에 중독시킨 죄값은 응당 그대의 몫이러니…" 이 정도 친구 사이가 되려면 차 아니면 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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