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김봉건과 함께하는 차문화 산책

醉月 2009. 3. 18. 09:39

 다선일미(茶禪一味) 차와 선종의 만남
수행과 茶농사를 겸한 선종에 의해 차문화는 널리 퍼졌다
제다분야의 일등공신인 선종사찰은 차를 禪의 경지 깊숙이 들여놓았다


 
  사진= 이경순(사진가·영광갤러리 관장)
차(茶)는 단순한 마실거리가 아니다. 차는 인체에 유익한 여러 가지 보건 기능을 지니고 있고, 다례 등을 통한 사회적 기능을 다하기도 하며, 또한 고도의 정신문화와도 관계하고 있다.

차의 보건 기능이나 다례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일별하였지만 차가 인간의 정신적 영역에 깊이 관여해 있는 것은 역대 문인아사(文人雅士)들의 차 노래 등을 통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차와 인간 정신의 보다 깊은 상호관계는 역시 불교, 특히 선종(禪宗)과의 만남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선종의 승려들은 처음 차의 보건 기능에 매료되었었다. 차가 선 수행시 정신이 맑아지고 또 수마(睡魔)를 퇴치하는데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선종의 승려들은 차를 사전(寺田)에 심어 가꾸어 생산했다. 선종의 승려들은 이전에 신도들의 보시에 의존하던 생활방식을 바꾸어 스스로 경작하여 거둔 곡식으로 생활하였다. 이와 같이 선수행과 농사를 함께 하는 생활방식을 농선(農禪)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농선을 통한 차의 자가생산은 역사상 차의 수확량을 획기적으로 증산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농선은 처음 인도에서 들어온 보시(普施)에 의존하던 승려들의 생활방식을 바꾸어 중국불교의 하나의 특징을 형성시켰다. 또한 수행과 생산 활동을 결합함으로써 선종사원의 자급자족식 경제적 기반을 이루게 했던 것이다. '백장록(百丈錄)'에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을 굶었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기록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철저히 이행되었던 가를 알 수 있다.

진대(晉代)의 저작인 '신이기(神異記)'에 보면 "여요(餘姚) 사람인 우홍(虞洪)이 산에 들어가 차를 따다가 물소 세 마리를 끌고 가는 한 도사(道士)를 만났다. 그 도사는 우홍을 인도하여 폭포산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단구자(丹丘子)라고 하오. 그대가 차를 잘 갖추어 마신다고 들어 늘 한 번 얻어 마실 수 있기를 바랬오. 산 속에는 큰 차나무가 있어서 그대를 도와줄 수가 있을 것이오. 그대에게 바라건대 다른 날에 차가 한 사발 남으면 내게도 남겨 주길 바라오'라고 하였다. 우홍은 그런 다음부터는 늘 단구자에게 차를 올리고 제사지냈다. 그런 뒤 가족들로 하여금 산에 들여보내면 언제나 큰 차나무를 얻곤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사를 보면 아직 진대에는 경작이 아니라 채취에 의해 차를 얻는 수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晉)에서 당(唐)에 이르기까지의 남북조와 오호십육국의 시기에 수(隋)를 합친 대략 300년 동안은 중국 역사상 극심한 분열과 혼란의 시기였다. 그러나 이 동안에도 차문화가 점진적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문인들의 기록을 통해서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의 차의 증산에 대한 특기할 만한 요소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중당(中唐)시기에 와서 육우는 그의 '다경(茶經)'에서 "차 마시는 일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풍속에 차츰 젖어들어 당나라에 들어와 성대하게 행하여졌다. 두 국도(國都)인 장안과 낙양, 그리고 형주(荊州)와 투주 지방에서 차는 집집마다 아끼고 즐기는 음료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와 같이 당나라에 와서 갑자기 차의 물량이 풍부하게 된 것은 어찌된 까닭일까? 나는 이것이 선승(禪僧)들의 농선에 의거한 차의 자가생산에 말미암은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 선종 사찰에서 생산된 차는 질도 매우 좋아서 후대에 "명산(名山)이 있으면 명찰(名刹)이 있고, 명찰이 있으면 명차(名茶)가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될 정도였다. 기실 송대(宋代)에 이르러 공차(貢茶)의 반열에 오른 것은 대개 이들 선종 사찰 주변에서 생산된 차들이 대종을 이루었다는 것을 보면 제다의 영역에 있어서도 선승들이 차문화에 기여한 공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다시 선종의 '청규(淸規)'가 제정됨으로써 차는 선종 사찰의 일상에 보다 깊숙이 스며들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선승들은 차를 정신 경계의 최상승인 선(禪)의 경지에 깊숙이 들여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다선일미'라는 관념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 청규(淸規)
선종 생활규정집 속 광범한 다례로 볼때 차생활 보편화 짐작, 선종의 승려가 일상에서 접하는 여덟가지의 일 중 하나로 지정

 
  사진= 이경순(사진가·영광갤러리 관장)

초기의 선종이 차를 얼마나 중히 여겼는가는 청규(淸規)를 보면 그 정황이 확연하다. 청규는 선원에서의 생활의 규정을 담은 법규집인데 8세기경 당(唐)의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가 처음으로 제정했다. 그런데 어떤 사정에서인지 백장의 청규는 당말(唐末) 오대(五代)의 시기를 거치면서 산일(散佚)되어버리고 북송(北宋)에 이르러 자각종색(自覺宗)이 당시의 여러 큰 사찰 등을 방문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참고하여 다시 찬술했다. 이것이 '선원청규(禪苑淸規)'라고 일컬어지는 것인데 결국 현존하는 청규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되었다.

'선원청규'는 열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제오장은 다시 열 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고 여기에는 오로지 다례로만 채워져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주지(住持)의 다례의식(点前) ▷승당(僧堂) 안에서의 다례의식(煎点) ▷지사(知事)와 두수(頭首)의 전점 ▷대중의 납차(臘次)에 의한 전점 ▷대중 가운데 특별한 분을 위한 전점 ▷대중 가운데 특별한 존장(尊長)을 위한 전점 ▷당두화상(堂頭和尙)을 특별한 분으로 모신 법춘(法眷)·입실제자(入室弟子)의 전점 ▷모든 대중에 통하는 전점과 소향법(燒香法) ▷공양시간의 예법 ▷차의 베풂에 사례함 등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당시의 선원에서 다례가 얼마나 광범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가를 대략이나마 엿볼 수 있다.

선원청규에서는 제오장 외에 제일장에서도 '차를 마시는 자리에 임하는 법(赴茶湯)'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제일장에서는 수계(受戒)의식, 호계(護戒)의식, 총림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도구의 분별, 행각(行脚) 시에 복장을 차려입고 입사(入寺)하는 법, 다른 절에 손님으로 갈 때의 예법, 괘탑(掛塔)의 절차, 공양하는 자리에 임하는 법 등과 같이 선종의 승려가 일상에서 접하는 여덟 가지 일 가운데 하나로 지정하고 있어서 이들에게 있어서 차 마시는 일이 얼마나 기본적인 일상사였던가를 가늠할 수 있다.

후일 14세기경 원대(元代)에 동양덕휘(東陽德輝)가 왕의 칙조(勅詔)를 받아 다시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를 편찬하였는데 여기서는 다례에 관한 사항들이 네 개의 장에서 스물다섯 개의 항목으로 더욱 번다하게 늘어나 있다. '칙수백장청규'에 있어서의 다례의식은 주지(住持), 양서(兩序) 등이 임무가 바뀔 때, 새로운 사람이 오고 갈 때, 계절이 바뀔 때, 각 승당(僧堂) 단위의 다례가 필요할 때 등 다양한 경우에 행해졌으며 그 행례의 절차도 매우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두 청규는 모두 백장의 '고청규'의 정신을 되살린다는 취지하에서 지어진 것이지만 '선원청규'는 '고청규'로부터 대략 200년, '칙수백장청규'는 '선원청규'로부터 다시 300년이라는 상거가 있기 때문에 시대적인 생활상의 변화가 반영되어 내용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특히 다례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후대의 '칙수백장청규' 쪽이 훨씬 세밀하게 분화되어 있는데 이는 차생활이 후대로 갈수록 선원 안에서 더욱 보편화됨을 반증하는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청규를 보면 당대(唐代)의 불교 사찰, 특히 선종의 선원에서는 차 생활이 이미 보편화되었고, 다례는 선원 내에서의 매우 중요한 기본사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송대(宋代)와 원대(元代)로 내려가면서 더욱 세분, 심화되고 있음도 아울러 알 수 있다.

원래 불교 승려들의 생활은 인도에서부터 신도들의 보시(布施)에 의거하였으나 중국에 와서, 그것도 선종에 이르러 승려들 스스로 경작하는 자급자족식 생활방식으로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수행과 생산활동을 결합한 독특한 중국 불교의 특징을 형성시켰던 것이다. 선종은 그 사상 내용에 있어서도 이전의 일체 교종(敎宗)의 사상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그들의 생활방식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이전의 종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이전과는 다른 그들만의 새로운 생활방식을 표방한 규정집이 바로 청규인데, 이 청규에 종교단체의 생활규정집으로서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다례에 관한 내용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선종과 차문화가 얼마나 특별한 관계에 있는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끽다거
"설법을 들으러 왔는가…그냥 차나 한잔 하게"
선종 조주스님의 일화는 전한다, 차 한모금에 깃든 禪味의 본질

 
  사진 제공 = 이경순(사진가·영광갤러리 관장)

청규를 보면 당대의 선종 사찰에서는 이미 차가 일상의 마실거리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는 수행자의 보건과 수행을 돕는 영양보조제였고, 대중 사이의 화해(和諧)를 돕는 매개물이기도 했다. 또한 각종 법요의식의 장엄구이기도 하고, 불보살에 헌공할 때의 청정한 예물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차가 선미(禪味)의 본질에 다가서는 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차는 당시 여러 선사들에게서 이미 화두(話頭)로 떠올라 있었다. '차 한 잔'이라든가 '식후에 차 석 잔' 등의 공안(公案)들이 회자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차를 선미의 본질과 확고히 연결시킨 사람은 바로 조주종심(趙州從諶)이었다. '조주록'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조주스님께서 새로 온 두 납자에게 물었다.

"스님들은 여기에 와 본 적이 있는가?"

한 스님이 대답했다.

"와 본 적이 없습니다."

"차나 한 잔 마시게."

또 한 사람에게 물었다.

"여기에 와 본 적이 있는가?"

"왔었습니다."

"차나 한 잔 마시게."

그러자 곁에서 이를 보고 있던 원주(院主)가 물었다.

"스님께서 우리 절에 와 보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차나 한 잔 마시라 하시고, 왔던 사람에게도 똑같이 차나 한 잔 마시라 하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스님께서 "원주야!" 하고 부르니, 원주가 "예!"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자네도 차나 한 잔 마시게."

조주는 이들 모두에게 그냥 차 한 잔 하라고만 했다. 그는 이들에게 진짜 본분사(本分事)로써 대했던 것이다. 원주는 조주가 아무 설명 없이 그냥 차나 한 잔 하라는 말이 좀은 답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때 만일 조주가 이들 학인들에게 그들과의 인연에 따라, 혹은 그들의 근기에 따라 일일이 논리적 구조 속에서 분별하여 지도하려고 했다면 아마도 그 역시 삼승(三乘) 십이분교(十二分敎)의 지리한 점학(漸學)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차나 한 잔 마시게."

오히려 여기서 차는 우리들 정신적 경계에 큰 한 자리를 잡았고, 그것도 일승(一乘)의 본분사라는 확고한 지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조주의 '차'가 백장의 '할(喝)', 덕산의 '방(榜)' 등과 함께 선종의 대표적 화두의 하나가 된 것은 실로 우연한 일사(一詞)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다.

처음 이곳에 온 사람도 차 한 잔 하고, 다시 이곳에 온 사람도 차 한 잔 하고, 오랫동안 이곳에 머무른 사람도 차 한 잔 하는 일승(一乘)의 그 차(茶)는 내면에서 입증되는 것이지 문자나 언어로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당하(堂下)의 나의 입 안에 있는 이 차 한 모금에 진실로 차미(茶味)가 존재함을 깨달아 지(知)·부지(不知)를 떠난 평상심(平常心)에 이르면 오히려 그때에 조주와 신회(神會)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 평상심
보태지도 빼지도 말라…그 자체로 행복이다, 만물에 나의 잣대를 들이댈 때 이미 삶은 꼬이고 뒤틀리는 것
 
  사진 제공 = 이경순(사진가·영광갤러리 관장)
수년 전 부산 수영구 남천동의 어느 차실에서 여러 차인들과 고전을 공부할 때의 일이다. 쉬는 시간에 한 동학(同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때가 가을이었던지 전화에서 그의 친구가 말했다. "마음이 텅 빈 것 같다." 웃으며 담소하는 그 말을 듣고 차실의 주인이 한 마디 거들었다. "와! 그 분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셨네." 그 말을 듣고 우리 모두 웃었다.

우리는 때로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무슨 뜻일까?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것은 무엇을 구별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는 말일 성싶다. 그것은 곧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과 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늘 쪼개고 비튼다. 그래야 제대로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무를 봐도 이것이 무슨 나무라고 해야 안다고 생각하고, 사람을 봐도 그가 어떤 사람이라고 파악해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이나 이론 같은 것으로는 결코 전체적인 세계를 볼 수 없다. 이런 것은 결국 하나의 대롱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일 뿐이다. 옛적에 장자(莊子)는 이런 것을 '소성(小成)'이라고 하여 오히려 "도는 소성에서 사라진다(道隱於小成)"고까지 말했었다.

얼마 전에 말기 암 환자들이 생활하는 요양소에서 얼마간 그들과 같이 지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차도 마시면서 우리 삶에서 진정 소중한 것들에 대한 새롭게 많이 인식했다. 평상시에 품고 있던 여러 가지 행복에 대한 열망들이 대개는 허망한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원망도 참으로 하릴없다는 각성도 했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에게는 돈을 얼마 더 벌고 싶다던가, 어떤 직책에 오르고 싶다던가 하는 따위는 참으로 한가하게 마음을 수고롭게 만드는 일일 따름이었다. 오히려 우리가 평소 아무 일도 않으면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빈둥빈둥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지냈던 그 의미 없이 보였던 시간들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던가 하는 사실을 비로소 자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을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늘 생각한다. 김 아무개는 사람은 좋은데 사치스러운 면만 좀 고치면 얼마나 좋을까, 이 모씨는 가진 것은 많은데 좀 베풀 줄만 안다면 얼마나 금상첨화일까 등등. 그러나 이런 생각들도 모두 하릴없는 것이다. 참으로 이 모두가 다 아무 생각 없는 평상심만 같지 못한 것이다.

"끽다거(喫茶去)"를 말한 조주스님이 스승 남전스님으로부터 심인을 얻은 것도 "평상심이 도"라는 말에서였다. '조주록'에 이런 말이 있다.

"무엇이 도입니까?" "평상시의 마음이 도이다(平常心是道)." "그래도 닦아 나아갈 수 있습니까?" "무엇이든 하려 들면 그대로 어긋나 버린다." "하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도를 알겠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고에 속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허망된 알음알이(妄覺)이며 모른다는 것은 암흑(無記)이니 이런 것은 모두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의심할 것 없는 도를 진정으로 통달한다면 태허와 같아서 확연히 트일 것이니, 어찌 애써 알고 모르고를 따지겠느냐?" 조주는 이 말 끝에 단박 깨닫고 마음이 달처럼 환해졌다고 한다.

나중에 조주는 자신의 제자가 또 자기에게 도를 묻자 이렇게 문답했다.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진실한 사람의 몸입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이다." "그리 말씀하시면 저는 알기 어렵습니다." "너는 나에게 진실한 사람의 몸을 묻지 않았느냐?"

행복한 때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실은 우리의 삶은 언제나 모두 행복한 때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 모습 그대로 완전하다. 어떤 사람은 낫고 어떤 사람은 못하고도 없다. 또 그 사람들이 이러저러하게 변화되어야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대로 모두가 완전하다. 만약에 내가 그를 이러저러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거나, 그것도 모자라 그를 변화시키려 한다면 이것은 모두 나로써 그를 비트는 것이다. 나를 못살게 구는 사람조차도 그 상태 그대로 완전하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원망의 마음을 품는 나도 그냥 그대로 완전하다. 모두 자연산(自然産)이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필경에는 초겨울 아침 햇살에 차 한 잔 다려 마시는 동안 중생의 마음속에 일렁이는 평상심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 일본 다도와 '다선일미'
불교 선종에 뿌리 둔 일본 차 문화, 전래자 3인 모두 중국 다녀온 스님 15세기 이후 禪茶 모습 자리잡아

 
  사진 제공 = 이경순(사진가·영광갤러리 관장)
일본의 차문화는 불교 선종(禪宗)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일본 차문화의 최초 기록은 승려 사이초(最澄)의 행적에 보이는데, 그는 서기 804년 중국 천태산에서 천태종의 불법을 학습하고, 805년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차씨를 가지고 가 일본의 히에이산(比叡山)에 심음으로써 일본 최초의 차밭인 히요시다원(日吉茶園)이 이루어지게 했다. 비슷한 시기인 815년에는 승려 구카이(空海)와 에이추(永忠)가 사가천황(嵯峨天皇)에게 차를 바쳤으며, 천황이 이 차로 긴끼(近畿) 지역에 황실 전용 다원을 만들도록 했다고 한다.

좀 뒤인 1191년 민난에이사이(明庵榮西)가 천태산(天台山) 만년사(萬年寺)에 주석하던 허암회창(虛庵懷敞)으로부터 선을 배우고 인가증명서를 얻어 귀국했다. 그는 귀국할 때 선법과 다법을 아울러 얻어 와 일본에서 그가 주석하던 가마꾸라(鎌倉)의 수복사(壽福寺)나 교토(京都)의 건인사(建仁寺) 주위에 차를 심고 이 차로 말차를 만들었다. 만년에 그는 일본에서 최초의 독립된 차서인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를 지어 명실공히 일본의 다조(茶祖)가 되었다. 원래 이 책은 가마꾸라 막부의 3대 장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源實朝)가 병에 걸리자 지어 올린 것인데, 이 책을 보고 감명을 받은 사네토모가 차를 많이 마셔 병이 치료되자 에이사이는 일약 일본의 육우로까지 받들어졌다. 지금도 에이사이가 창건한 건인사에서는 매년 4월 20일 그의 탄신법요에서 헌다의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 초기의 차 전래자인 사이초나 구카이, 그리고 에이사이는 모두 스님들이며 세 사람 모두 절강성의 천태산으로부터 불법과 차를 받아 갔다는 점에서 일본차문화의 전래 역시 선종과의 인연에 기인하였다고 보겠다. 에이사이가 불법을 전수받은 허암회창은 선종 오가칠종 가운데 임제종(臨濟宗)의 일파인 황룡파(黃龍派)의 고승으로서 이 또한 강서(江西)의 마조도일(馬祖道一)과 백장회해(百丈懷海)의 맥을 이었다. 오늘날까지 행해지고 있는 에이사이의 탄신법요 의식에서는 4두목(頭目)과 8두목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이는 '백장청규(百丈淸規)'의 법식에 근본을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끽다양생기' 자체는 차와 선의 결합이기 보다는 중국 고대의 의·약학에 관한 문헌에 가깝다.

일본의 차문화가 명확히 선차(禪茶)의 모습으로 가닥을 잡은 것은 대략 15세기 이후의 일이다. 15세기 말 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교토의 동산(東山)에 은각사(銀閣寺)를 세움으로써 동산문화가 일어났는데 동산문화의 시대에는 관상(觀想)의 풍조가 생겨나 차를 마시는 것에서 정신적 사유를 구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선승 이큐 소쥰(一休宗純)이나 와비차의 시조인 무라다 쥬코(村田珠光) 등은 이 시대의 인물들이다.

일본 다도의 정신적 괘탑(掛塔)이라고 할 수 있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일구(一句)는 전하는 설에 의하면 남송의 선종 양기파(楊岐派) 대사인 원오극근(圓悟克勤)이 문하의 한 일본 유학승이 귀국할 때 써 준 글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제자가 일본에 도착하였을 때쯤 배가 전복되고 말았고, 이 글은 이리저리 전하다가 이큐 소쥰의 손에 들어갔다 한다. 이큐는 이 글귀를 보고 다도의 대의를 얻었다 하여 이 글은 일본 다도의 보물이 되었고 지금도 교토의 대덕사(大德寺)에 소장되어 있다.

대덕사는 이큐 소쥰이 사까에 상인들의 도움을 얻어 창건한 절인데 당시 이 절을 중심으로 사까에 상인들과 선승들 사이의 접촉도 많았고 차문화 역시 번창했다. 이큐의 제자 무라다 쥬코가 와비차를 창안하여 선차(禪茶)의 경계를 확립한 것은 이러한 환경적 영향에 기인한 바가 컸으며, 이후 다케노 죠오(武野紹鷗), 센노리큐(千利休) 등의 다도 정신으로 이어지는 선하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차문화계의 일각에서는 이 글은 원오극근의 진적(眞跡)이 아니라 후대에 제작된 것이라 하고, 심지어 원오극근이 그러한 글을 써 주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조차 의심을 품고 있다. 이 문제는 한·중·일 차문화의 우호관계도 걸려 있는 문제여서 단편적인 자료들에 의거하여 함부로 논평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일본 차문화의 정체성을 재정립한다는 점에서 객관성 있는 연구가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 일본 다도와 '와비차'
고적한 초암차실, 선차(禪茶)의 미의식 꽃피워, 지배계층의 과시욕 버린 다성(茶聖)들의 '와비차의 정신'
자유분방함 속 엄격한 日 다례 완성


 
  사진제공=이경순(사진가·부산영광갤러리 관장)
일본의 차문화가 선차의 모습을 제대로 띠게 된 것은 '와비차'에 이르러서였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 처음 차문화를 들여온 것은 선승들이었고, 이것을 대중화한 것은 무사들이었다. 그러나 초기 차승(茶僧)들은 대부분 차의 약리적 효능에 집착하였고, 무사들은 차의 문화적 공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가마쿠라(鎌倉) 시대 이후 막부가 형성되고 장군이 권력을 잡게 되자 무사들은 문화적 인사로 변모했다. 그러나 무사들은 제대로 된 차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중국의 서원(書院)을 흉내 내어 당시 일본의 실정에 비추어 엄청나게 큰 집인 쇼인즈쿠리(書院造)를 짓고, 나중에는 건물의 안팎을 금과 은으로 장식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화려한 차실에서 개최되는 차회에서는 주로 중국에서 사 온 고가의 당·송 시대의 차 도구를 사용하였고, 차도 엄청나게 비싼 것들을 썼다. 무사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곧 문화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또한 찻자리의 참석자들은 앞사람의 차회의 화려함에 촉발되어 뒷사람은 더 화려한 차회를 개최하려고 분발했다.

무라다 쥬코(村田珠光)는 이러한 서원차를 와비차로 혁신하고자했다. 그는 우선 쇼인즈쿠리 내의 다다미 20첩 넓이의 차실 안에 다다미 4첩 반의 넓이로 축소된 차실을 병풍으로 둘러막아 조성했고, 아울러 당물(唐物) 대신 시중에서 조잡하게 만들어진 잡기류들을 차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차실에 도코노마(床の間)를 설치하고 선어(禪語)를 괘물(掛物)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그였다.

'와비(侘び)'란 말은 원래 '외롭다', '시시하다'는 의미를 가진 일본의 서민적 정서를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쥬코는 이것을 새로운 일본 차문화의 미의식으로 적용시킨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무라다 쥬코는 진정한 일본식 선차 문화를 연 차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케노 조오(武野紹鷗)는 무라다 쥬코가 조성한 쇼인즈쿠리 내의 다다미 4첩 반 넓이의 차실을 아예 독립된 건축물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차실의 지붕도 기와를 사용하지 않고 나무판자나 나무껍질 등으로 이었고 벽은 흙으로 발랐다. 그 역시 쥬코와 같이 일반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잡기류를 선호하였지만 그는 그릇의 외형미보다는 내재미를 더욱 모색하였다. 조오는 일본 서민들이 사용하는 잡기류에 일본 서민들의 정신이 들어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쥬코가 시작한 와비차의 정신을 더 깊숙이 내면화하고 일본화시켰다. 다만 이 시기에는 당시까지 400년간 지속되어 오던 화려한 당물을 선호하던 풍조 대신 사카이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화인들 사이에서 조선의 문화와 기물을 중시하는 사조가 일어났는데 이런 시대적 분위기도 한 몫을 했다.

센노리큐(千利休)는 쥬코와 조오가 시작한 와비차를 완성시켰다. 리큐는 조오의 초암(草庵) 차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정형화시키고, 거기에서 행해지는 다례의 형식을 다듬었다. 리큐의 다법은 극히 자연스러움을 표방하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꽃은 한 송이만 꽂되 들에 피어 있는 것과 같이, 다실은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찻잔은 깨어지거나 금이 간 것도 소중하게 사용하고, 차회는 정해진 시간보다 좀 일찍 마치고, 언제나 자리를 함께 한 손님들에게 마음을 쓸 것' 등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평범한 리큐의 다법에는 이미 무애(無碍)의 경지에 이른 달인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이 느껴진다. 그가 야마자끼(山崎)의 묘희암(妙喜庵)에 지은 다다미 두 간의 조그마한 다실 다이얀(待庵)은 후인들은 이를 초암차실의 표본으로 여기고 있으며 '주옥(珠玉)의 소우주', 혹은 '일본미 중의 일본미'로 일컫고 있다.

쥬코나 죠오, 리큐와 같은 일본 와비차의 초기 창시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화려함보다는 고적함을 중시하는 선차(禪茶)의 미의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이것은 곧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미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평소에 이와 같은 와비차를 창안한 초기의 일본 차인들도 존경하지만 이를 계승하여 오늘날의 일본 다도를 확립한 일본의 차인들 모두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다.

 

다선일미(茶禪一味) 일본 천가(千家) 다도
센노리큐 다도, 일본식 기물 채용하고 차실 규모도 크게 줄여
독창성 가미로 정신적 틀 형성, 초암차가 日 차문화의 대세로


 
  일본식 차실. 사진제공=이경순 부산영광갤러리 관장
센노리큐(千利休) 이후 일본의 차문화는 초암차(草庵茶)가 대세를 이루었다. 일본 차문화의 성격을 선차(禪茶)의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셈이다. 여기에는 내성과 관조를 중시하던 당시의 문화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무라다 쥬코나 다케노 조오 등과 같은 탁월한 와비차의 달인들이 크게 이바지한 바 있다. 그 가운데서도 센노리큐의 독창성이 가미됨으로써 일본 차문화의 정신적 틀이 이루어졌고 다도의 형식 또한 결정되었던 것이다.

센노리큐 다도의 미학은 대체로 다음의 몇 가지로 들 수 있다. 그는 우선 다석(茶席)에서 사용하는 기물 가운데 화물(和物)의 비율을 높였다. 당시에는 품위가 높은 찻자리일수록 당물(唐物) 유미(唯美)의 관념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 기물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리려 했다.

그는 또 다도의 형식을 일본의 민속에서 많이 채용했다. 예컨대 서원이나 사찰에 입장할 때 손을 씻는 관수(盥手)의 예법을 차실의 입장에도 채용한 것이나, 4시간의 차회 중에 세 번 숯과 물을 보충하는 '삼탄삼로(三炭三露)'의 행다법 등은 모두 민속의 예법 가운데 매우 엄숙한 형식을 찻자리에 도입한 것이었다.

그는 차실의 규모를 극도로 축소했다. 리큐는 무라다 쥬코가 고안한 다다미 4장반의 크기로 더욱 축소시켜 다다미 2장짜리 넓이의 차실로 만든 것이었다. 심지어 '니지리구찌(躓口)'라고 불리우는 다실의 출입문은 너무나 작고 좁아서 머리를 숙이고 몸을 웅크려야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것은 차실을 속세의 귀천을 잊고 누구나 겸손한 자세로 임하는 평등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그는 또 여러 가지 새로운 기물을 개발했다. 그는 앞이 트인 풍로를 창안하고 거기에 삼발이와 접시를 설치하여 '원산(遠山)' '쌍봉(雙峰)' '근산(近山)'을 로(爐) 안에 갖추었다. 그는 검고 투박한 일본식 '라꾸 차완(樂茶碗)'을 개발했고, 벽에 거는 대나무 마디 화병을 만들었다. 요즘 우리가 말차를 할 때에 대부분 쓰고 있는 대나무 차작(茶勺)도 그가 창안한 모습 그대로이다.

일화에 의하면 그는 길을 가다 지나가는 사람의 허리춤에 차고 있는 조롱박이 너무나 멋져 보여 그것을 억지로 사서는 거기에 꽃을 꽂거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민이 허리에 차고 있는 짚으로 짠 어롱(魚籠)을 사서는 거기에 다화(茶花)를 연출하는 등 그의 심미안에는 도무지 거침이 없었다.

리큐 이후 일본의 차인들은 그가 이룩한 다도의 정신과 형식을 법식으로 삼고 있다. 그의 다법은 그의 자손들에 의해 전수되었고 이들은 오늘날까지 몇 개의 다도 종가(宗家)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우라센케(裏千家) 오모토센케(表千家) 무샤노코지센케(武士小路千家) 등은 그 대종의 하나이다. 그들은 이들 종가의 종장(宗匠)인 이에모토(家元)를 중심으로 리큐의 다도를 사법(師法)으로 삼아 익히고 전수한다.

사법을 지키기 위해 이들은 사용하는 기물도 지정된 장인을 두고 있다. 천가십직(千家十職)이 이들이다. 도사(塗師) 표구사(表具師) 토풍로소물사(土風爐燒物師) 금물사(金物師) 부사(釜師) 죽세공병작사(竹細工柄杓師) 대사(袋師) 다완사(茶碗師) 일한장세공사(一閑張細工師) 지물사(紙物師) 등이 이들인데 이들도 역시 그 지위가 부전자전으로 세습된다.

다법과 기물의 통일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루어진 제도라고는 하지만 천황제를 모방한 이와 같은 가원(家元)과 천가십직의 세습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도 있다.

오늘날 일본의 차인들은 리큐를 다성(茶聖)의 지위에 올려놓고 그의 다법을 거의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상전한다. 센노리큐는 충분히 그런 대접을 받아도 좋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이 모두 그와 같이 가원의 자질을 갖춘 사람들로만 태어나는 것일까? 또 천가십직의 물건은 독과점적 납품 행태로 말미암아 오히려 그 질이 저하되는 법은 없을까? 이에 대해서는 의식 있는 일본인들 가운데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 일찍이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선생 같은 이도 이 문제에 대해 '차의 병폐'라는 일문(一文)에서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내 생각에도 센노리큐가 이룩한 일본의 선차문화가 이와 같이 고식적인 가원제도에 묶이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일까 하는 물음이 있다.

 

다선일미(茶禪一味) 국내 차문화의 시발점
禪茶문화 이어받은 구산선문, 국내 차문화 효시 가능성
삼국유사에 신라 충담사 차 기록 전해, 신라 대렴說·가야 허황후說 근거 부족


 
  삼국유사에는 신문왕의 아들 보천과 효명 태자가 문수보살께 차 공양을 하며 성불을 기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광갤러리 이경순 관장 제공
우리나라 차문화의 시발을 어느 시점으로 보느냐 하는 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신라 충담사의 차다. 기록을 보면 삼국유사에 충담사(忠談師)가 매년 중삼(重三) 중구(重九) 일에 남산 삼화령에서 미륵세존께 차 공양을 올렸다고 한 것이 있다. 그러던 어느 해(765년) 삼짓날에 경덕왕이 삼산(三山) 오악(五岳)에 제사를 올리고 귀정문(歸正門) 누상에서 서성이던 중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충담사를 만나 차를 같이 했다 하고, 이때 왕이 안민가(安民歌)를 불러달라고 청을 하니 충담이 즉석에서 노래를 지어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에 부른 안민가의 가사까지 전하고 있으니 삼국유사가 정사(正史)가 아니라고 해서 이를 사실이 아니라고 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둘째는 대렴(大廉)의 차다. 삼국사기에는 흥덕왕 3년(828)에 "견당사로 갔던 대렴이 중국에서 돌아오며 차씨를 가지고 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入唐廻使大廉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고 한 기록이 있는데 차계에서는 삼국사기가 정사라는 이유로 이 기록을 가지고 우리나라 차문화의 시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 기사에 이어 "차는 선덕왕(632~647)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왕성하였다"(茶自善德王時有之, 至於此盛焉)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이 두 기사로만 상고해보더라도 우리나라에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는데 대렴이 차씨를 가져와 경작을 시작함으로써 차의 수확량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다는 의미쯤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렴을 우리나라 차의 중흥조쯤으로 여기는 것은 무방하나 시발로 보는 데는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에는 또 신문왕(681~692)의 아들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태자가 오대산 진여원(眞如院)에서 날마다 문수보살께 차 공양을 하며 성불을 기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사와 삼국사기의 선덕왕 운운한 기사와는 시기적으로도 상호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셋째는 가야 허황후의 차다. 삼국유사에 아유타 국의 공주 허황옥이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에게 시집오면서 차를 가져왔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일은 기원 48년의 일로서 만일 이 설이 사실로 밝혀지기만 하면 한국의 차문화를 선덕왕으로부터 600년, 대렴으로부터는 800년 가까이나 앞당길 수 있을 것이기에 대단히 주목을 끄는 설이다.

그러나 이 설에는 허황후가 시집왔다는 기록은 있으나 차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없고, 사실로 인정할 만한 유물 또한 없어 아직은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또 다른 차문화 시발설을 하나 제기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차, 혹은 차문화의 전래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성립과 매우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구산선문이란 나말여초에 이루어진 아홉 개의 선문(禪門)을 말하는데 이들 구산선문의 개산조들은 거의 모두가 중국 강서(江西) 홍주(洪州)의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구산선문의 개산조들 가운데 가지산문의 도의(道義)를 비롯하여 실상산문의 홍척(洪陟)과 동리산문의 혜철(慧哲)은 다같이 서당지장의 제자이다. 성주산문의 무염(無染)은 마곡보철의 법사(法嗣)이고, 사자산문의 도윤(道允)은 남전보원의 법을 받았고, 봉림산문의 현욱(玄昱)은 장경회휘에게서, 사굴산문의 범일(梵日)은 염관제안에게서 각각 법을 얻었다. 서당지장, 마곡보철, 남전보원, 장경회휘, 염관제안은 모두 마조도일의 고제(高弟)이므로 이상의 일곱 산문의 개산조들은 모두 마조도일의 법손(法孫)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서 홍주의 선종은 앞에서도 농선(農禪)이나 청규(淸規) 등을 들어 여기가 선차(禪茶) 문화의 본산이었다는 것은 이미 누차에 걸쳐 언급한 바 있으므로 중언부언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구산 가운데 칠산의 개산조들이 여기서 짧게는 십 수 년, 오래는 삼십여 년 동안 선법(禪法)과 아울러 다법(茶法)을 배워서 가져 왔다는 데 있다. 게다가 나중에 구산선문이 합쳐져 조계종이라는 거대 종단으로 출범하여 우리나라 불교교단의 중추가 되었으므로 여기서 행한 다법이 우리나라의 차문화, 혹은 선차 문화의 효시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전후사정으로 볼 때에 가장 자연스럽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 고려의 선차(禪茶)
연등회·팔관회 등 국가 의례때 중요 품목으로 사용
일반인의 생활에도 광범하게 보급, 승려들의 茶詩, 양적으로 中보다 많아


 
  이경순(사진가·영광갤러리 관장)
우리나라에서 차문화가 보편화된 것은 나말여초에 구산선문을 통하여 이루어진 선차(禪茶) 문화가 선도적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정황은 뚜렷하다. 고려조는 신라의 문화를 계승하여 불교를 숭앙하였으니 고려의 차문화는 더더욱 선차문화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리라. 그것은 고려의 가장 성대한 국가 의례의 하나였던 연등회와 팔관회에서도 헌다의 행사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연등회와 팔관회는 건국 초기 태조의 '훈요십조'(제6조)에서 "연등은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고, 팔관은 천령(天靈)·오악(五嶽)과 명산(名山)·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훗날 간특한 신하가 더하거나 줄이자고 건의하는 자가 있으면 꼭 그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하여 국가의 대사로 지낼 것을 훈유한 만큼 고려 일대에 걸쳐 엄격히 실행되었다. 이 행사들은 여러 날에 걸쳐 제1부 편전의식, 제2부 진설 및 좌정, 제3부 연회의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행사의 중심인 연회에서는 처음 국왕에게 차와 꽃과 술을 올리면 이에 답으로 왕이 연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차·꽃·술·봉약·과실을 하사하는 절차로 이루어졌다. 나중에는 이 부분이 부처님 전에 향·등·차·쌀·과일·꽃을 올리는 육법공양으로 발전되어 갔다. 고려시대에는 차가 이미 국가 의례의 중요 품목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들 국가 의례는 불교적인 색채만이 아니라 토속신앙의 영역과도 연계되어 있어서 이 부분은 다음에 선차(仙茶)와 더불어 다시 논하기로 하겠다.

고려시대에 차는 일반인의 생활에도 광범하게 보급되었고 특히 사대부와 승려들의 생활 속에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고려와 조선조의 승려들의 다시(茶詩)가 양적인 측면에서 중국보다 많다고 하는 연구서도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차문화에서 선차의 성격이 얼마나 강한가를 간접적으로 고증하는 자료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려 중기 진각 혜심(1178~1234)은 걸출한 차승이었다. 그는 한 시에서 '솥에는 녹차를 달이고/향로에는 안식(安息)을 사른다/돌! 돌! 돌!/어디 가서 선지식을 찾을까'라고 읊었다. 그는 차 달이고 향 피우는 일 외에 달리 어디에서 보리(菩提)를 구할 것인가고 묻고 있다.

고려 말 백운경한(1299~1374)은 시에서 '향상의 수단은 말할 것 없네/곤하면 편히 눕고 목마르면 차 마시네/임제와 덕산은 특별히 미혹하여/헛되이 방편 쓰되 방망이(棒)와 호통(喝) 썼네'라고 읊고 있다. 백운경한은 이 시에서 선종의 대표적 화두 가운데 하나인 임제의 '할'이나 덕산의 '방'을 유위(有爲)로 규정짓고 조주의 '차'를 오히려 '일상사'로 여김을 볼 수 있다.

원감충지(1226~1292)는 어떤 선객(禪客)과 선을 문답하는 자리에서 시로써 답을 대신하였다. '인시(寅時)에는 한 국자의 미음을 마시고/오시(午時)에는 한 발우의 밥을 먹고/목마르면 세 잔의 차를 마시니/유무(有無)를 알고 모르고는 상관이 없다'.

심지어 백운 이규보(1168~1241) 같은 이는 유자(儒者)이면서도 참선을 하였고, 또 차 달이는 일을 곧 참선의 일과 동일시하였다. '다른 날 초암에서 참선을 하며/서너 권 책 보며 깊은 뜻 새겨본다/내 비록 늙었으나 손수 물 긷기를 즐기니/한 사발 차는 바로 참선의 시작이로세'.

나옹혜근(1320~1376)은 한 게송에서 읊기를 '본래 그대로요 지어진 것 아니거니/어찌 수고로이 밖에서 따로 구할 것인가/다만 한 생각으로 마음에 아무 일 없으면/목마르면 차 달이고 피곤하면 잠을 자리'라고 하였다.

이들 몇몇 다시들을 보아도 고려조의 선승들이 도달한 경지가 어디인가는 이미 스스로 분명하다. 마음에 아무 일 없는 무애의 마음이 곧 선다일미(禪茶一味)의 곳이라는 것은 아무리 근기가 얕은 나 같은 사람이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사방 지고의 법희선열의 경지가 내 앞에 있는 차 한 잔에 있다고 하니 이 외에 또 무엇을 얘기할 것인가

 

다선일미(茶禪一味) 조선의 선차(禪茶)
박해 속에서도 꿋꿋이 이어온 禪茶 문화,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 위축
차재배 가혹한 세금 매겨 억압, 세속과 거리둔 선차 성격 짙어져

 
  사진제공=이경순(사진가·영광갤러리 관장)

조선조의 차문화는 척박한 돌밭에 핀 아름다운 한 떨기 차꽃이었다. 조선조에 들어 숭유억불이 건국이념이 되고서 불교를 따라 차문화도 산속으로 들어갔다. 더욱이 차를 재배하는 농가에 가혹한 세금까지 매겨 차나무가 집안의 우환거리가 될 정도였다. 조선 중기 사림파의 영수였던 점필재 김종직(1431-1491년)은 함양 군수로 재임시 관내 주민들이 가혹한 차세(茶稅)에 허덕이는 것을 보고 관전(官田)에 차를 심어 거기서 나는 소출로 공차(貢茶)를 대신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준 것은 아마도 조선조 역래의 대표적 선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큰 사찰 주위에는 대개는 차밭이 있었던 모양으로 부산 근교의 범어사와 통도사도 예외가 아니다. 온천장에 있는 금강공원 주위의 옛 지명이 '차밭골'이었으며, 금강사 주지 혜성 스님도 절 근처에 예전에 차를 제조한 다소(茶所)가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아마도 범어사의 차밭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또 통도사의 사적기(事蹟記)에 보면 '절의 북쪽 돌산(冬乙山)에 다촌(茶村)이 있는데 이곳은 차를 만들어 절에 공납하던 곳이다. 절에 공납하던 차밭과 차샘(茶泉)이 지금까지도 전해져 뒷사람들이 이곳을 다소(茶所)의 촌락으로 삼고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생산된 차는 절에서 쓰기도 하였지만 상당 부분 조정에 공납되었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도 역시 과중한 세금은 예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통도사 박물관에는 종이를 만드는 닥 공출을 면제한다는 조선 말 헌종(憲宗)의 교지(敎旨)가 있는데, 차 공출 면제 교지는 없는 것을 보면 차의 공납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운암의 성파 큰스님 말씀을 들어보면 이러한 것이 바로 조선조의 불교 탄압의 한 방편이었다고도 한다. 절에서 어렵게 공출의 물량을 마련하여 진상해도 자꾸 불합격을 매겨 두 번 세 번 내게 하여 이를 배겨내지 못하고 결국 절을 떠나는 중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 속담에도 "염왕은 인자한데 잡신이 괴롭힌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조정의 정책에다 다시 지방 방백과 아전들의 혹렴이 더해져 더욱 견디기 힘든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 환경은 조선의 차문화로 하여금 더더욱 세속을 떠나게 했고, 아울러 더 한층 선차의 성격을 짙게 띄게 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 초 배불(排佛)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닥치는 가운데에도 함허득통(1376-1433년)은 '다게송(茶偈頌)'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한 잔의 차는 한 조각 마음에서 나왔고/한 조각의 마음은 한 잔의 차에 있나니/응당 이 차 한 잔 맛보면/무량의 즐거움 일어나리라'. 함허 선사가 만년에 도를 펼친 문경의 봉암사는 고려 초 도헌(道憲)이 개산한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이었으므로 말할 것도 없이 이 또한 선차의 맥이 깊은 곳이라 하겠다.

조선 중기의 차인 매월당 김시습(1435-1493년)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불교에 깊은 귀의가 있었다. 그는 '지로(地爐)' 시에서 '산방은 맑고 고요한데 밤은 어찌 이리 긴가/한가로이 등불 돋우며 흙마루(土床)에 눕는다/땅 화로(地爐)에 의지하니 홀로 배부르고/손님 오면 다시 일어나 차를 달인다'고 읊었다. 그는 사대부의 신분이었음에도 산간에 들어 흙바닥에 등을 대고 자면서 땅 화로에 물 끓여 달인 차를 마시는 일만이 즐거움을 준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 만일 먼 데서 찾아오는 이가 있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또 이럴 때면 어찌 차 한 잔 다시 끓이지 않겠는가.

율곡 이이(1536-1584년)는 젊은 시절 금강산의 절에서 불교와 선법을 공부한 적이 있었다. 이 시기에 그가 지은 '산중(山中)'이란 시에는 "약초를 캐다 홀연히 길을 잃고/사방을 쳐다보니 온 산이 단풍일세/산승(山僧)이 물 길어 돌아가는데/숲 끝에 차 끓이는 연기 오르네'라고 읊고 있는데 여기에는 산승과 차, 자연과 은일(隱逸)의 정취가 가득하다.

조선 중기에는 허응당보우 스님이나 청허휴정, 사명유정 스님들이 모두 뛰어난 차승들이었고, 수많은 선승들이 선기가 수승한 차시를 남겨 오히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조 보다 그 양이 많았으니 박해 속에 선차는 더욱 꽃을 피웠던 셈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 초의(草衣)와 추사(秋史)
신분·성격 극과 극 두 사람 茶 하나로 평생지기 인연
초의는 사대부에 선차문화 알린 주역, 저서 '다신전' '동다송' 소중한 문헌으로

 
  전남 해남군 대흥사에 있는 초의 스님 조상에 헌다하고 있는 부산의 차인들. 앞에 있는 비문의 '명선'은 추사의 글씨이다. 이경순 영광갤러리 관장 제공
조선 후기의 선차 문화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초의 의순(1786~1866)이다. 초의(草衣) 스님은 해남 대흥사에 주석하면서 직접 차를 만들었고 우리나라 역래의 가장 소중한 차 관련 문헌의 하나인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을 펴냈다.

'다신전'은 중국 청대의 모환문이 역대 다서를 엮어 모은 '만보전서'의 '다경채요'를 등초한 것이지만 원저는 명대의 장원의 '다록'이다. '다신전'의 발문에는 "총림에 혹 조주의 풍이 있으나 다들 다도를 잘 알지 못하기에…"라고 발행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 말에 의거하면 당시에도 다도의 진면목에 대해서는 잘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셈이 된다.

'동다송'은 17연으로 구성된 차에 대한 송가이다. 그는 이 글에서 육우의 '다경', 소이의 '십육탕품', 범증민의 '돈재한람', 장원의 '다록', 모환문의 '만보전서', 이백·소동파·노동·나대경 등의 다시, 다산의 '걸명소' 등 많은 고대 다서들을 참고하여 차의 내력에서부터 차를 달여 마실 때의 정신적 경지에 이르기까지를 읊고 있는데 그 문장이 마치 반짝이는 보석 마냥 아름답다. 초의는 또 이 저술에서 "육안차는 맛이 좋고, 몽산차는 약효가 뛰어난데 동차(東茶)는 둘을 겸한다"고 하여 우리 차의 우수함을 언급하고 있다.

그의 시에는 몽산차, 뢰소차 등의 유명한 차 이름을 거론한 시가 더러 있고, 시취 또한 매우 깊다. "선정에 깊이 들자 죽로가 식어/남은 불씨를 지피려 구리화로를 당기네"라고 읊은 시를 보면 그가 주로 하는 일이 선정과 음차인 것 같다. 또 다른 시 "새소리 들으려 저녁 예불도 쉬고/가벼이 노니는 옛 시내 언덕/…찻자리 파하고 고요한 물가에 앉으니/그윽한 심사 돌아갈 기약도 잊었네"를 보면 그의 본분사가 예불인지 찻일인지가 모호하다.

그가 지은 다섯 평 남짓한 차실 일지암(一枝庵)은 우리나라의 대표 차실로 인지되고 있다. 일지(一枝)는 원래 '장자'의 '소요유편'에 "박새가 깊은 숲속에 보금자리를 지으나 나뭇가지 하나에 불과하고, 수달이 강물을 많이 마셔도 자기 배를 채우는 데에 불과하다"는 곳에서 차인했으니 그가 이 차실을 지은 지취가 어디에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저명한 사대부 차인인 정약용이나 김정희, 홍현주 등에게도 선차의 영향을 끼치는 등 조선 후기의 선차문화의 핵심인물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후일 그의 다맥은 대체로 세 갈래 쯤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으므로 구체적인 언급은 다른 기회로 미루는 것이 좋겠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이자 글씨와 그림의 달인이었다. 일찍이 조선에서는 사귈 만한 친구가 없다하여 연경에 자주 가 주로 중국 석학들과 사귀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 동리 김경연의 주선으로 만난 동갑내기 시골뜨기 중 초의와는 필생의 지음(知音)이 되었고 10년 먼저 죽은 추사의 제문도 초의가 썼다.

당시의 객관적 조건으로 보면 이 두 사람은 친구가 되기에는 너무나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초의는 전남 무안군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일찍이 불문에 출가한 사문의 몸이요, 추사는 충남 예산군 월성위의 권문세가 집안에서 태어난 유가의 총명재질이었다. 신분의 차이로 치면 동해와 서해의 거리쯤 되랴. 성격도 추사는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오만방자한 편이었고, 초의는 조금 어눌하고 주로 남의 말을 듣는 축이었다. 그러나 이런 성격 차이가 오히려 두 사람을 끌어당기는 자석 역할을 하였는지 오만불손한 추사도 초의에게만은 온갖 투정을 하고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성격 탓 만이겠는가! 만약에 그들 사이에 차가 없었더라면 만남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현대의 차인들 가운데에는 이들의 관계를 심지어 동성연애쯤으로 보는 이도 있을 정도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추사는 차만 떨어지면 편지로 초의를 을러댔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보시게, 일지암 토굴 민대머리. 부처님을 모시는 몸이 그토록 신통력이 없는가. 꼭 말을 해야 아시겠는가. '초의차' 떨어져 못 마시니 혓바늘이 돋고 정신이 멍해지느니. 그러니 차를 빨리 안 보내면 내 당장 말을 몰아가서 일지암 차밭을 모두 짓밟아버릴 터. 그러나 원망하지 마시게. '초의차'에 중독시킨 죄값은 응당 그대의 몫이러니…" 이 정도 친구 사이가 되려면 차 아니면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