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당신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

醉月 2009. 3. 16. 00:05
당신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
김현미│동아일보 출판팀장 khmzip@donga.com│
 
 

한국인에게 밥은 무엇인가 최준식 지음/ 휴머니스트/ 349쪽/ 1만5000원

일본인들이 한국인의 식습관 중에서 기겁을 하는 것이 빙수 먹기라고 한다. 잘게 부순 얼음 위에 단팥을 올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과일 조각, 아이스크림, 과자 등을 화려하게 장식한 팥빙수. 우리는 빙수가 나오면 숟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골고루 뒤섞어 잘 버무린 다음 살짝 녹은 상태에서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시원하다”라고 말한다. 여러 명이 빙수 한 그릇 놓고 숟가락질을 해대는 모습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

요즘처럼 입춘 지나고 김장 김치에 지쳐갈 무렵 봄동을 살짝 절였다가 겉절이를 한 다음, 큰 양푼에 밥과 함께 담아서 참기름 한두 방울 쳐서 썩썩 비벼 먹는 맛도 일품이다. 이때 밥을 덜어먹지 않고 양푼째 놓고 머리를 맞대고 먹어야 제맛이다.

그러나 일본에는 이렇게 뒤섞고 비벼서 함께 먹는 문화가 없다. 빙수뿐만 아니라 우리의 비빔밥과 비슷한 덮밥이나 카레라이스를 먹을 때도 일본인들은 전체를 뒤섞지 않고 위에서부터 조금씩 떠먹는다. 별것도 아닌 것 같지만 분명히 우리에게는 낯선 풍경이다.

기왕 먹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번에는 한국식 상차림과 서양식 상차림의 차이를 알아보자. 다음은 이화여대 대학원 한국학과 최준식 교수의 말이다.

공간형 상차림과 시간형 상차림

“왜 우리는 모든 게 두루뭉술한데 서양식은 맺고 끊는 게 확실하잖아요. 그들의 문화는 모든 게 이원론적인 사고 구조에 뿌리를 박고 있어 가르고 구분하길 좋아하지요. 음식문화에도 그런 경향이 반영되어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저 대충 여러 개 벌여놓고 전체적으로 먹는데(공간형), 서양 사람들은 순서로 나누어서 부분적으로만 먹습니다(시간형). 또 우리는 집단주의 문화라 같이 먹는 것에 익숙하고, 서양 사람들은 개인주의 문화 속에 있어 자기 접시를 갖고 혼자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것에 익숙하면 저들 식대로 하는 게 불편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쪽 것이 선진적이고 우리 것은 후진적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저는 서양음식도 우리 식대로 먹자고 그러거든요. 수프고 샐러드고 스테이크고 죄다 벌여놓고 먹자 이거예요. 또 이태리 국수(스파게티)도 이상하게 수저에다가 포크 대서 돌돌 말아먹지 말고 그냥 젓가락으로 먹자고 주장하거든요.”(‘한국인에게 밥은 무엇인가’, 휴머니스트)

몇 년 전 아버지 생신날 온 식구가 서울에서 꽤 유명하다는 한정식 집에 모였다. 한정식이어도 걸지게 한 상 차려 나오는 것이 아니라 코스별로 차례차례 내오는 집이었다. 그래서인지 먹어도 먹어도 상 위는 허전하기만 했다. 급기야 아버지는 “사람 불러놓고 차린 게 없다”며 민망해 하셨다. 그 뒤 뷔페식당에 갔다가 “돈 내고 얻어먹는 기분”이라고 하시는 바람에 우리 식구는 한동안 뷔페식당에 발길을 끊었다.

똑같은 음식이라도 한 상 차려서 먹는 것과 조금씩 순서대로 먹는 것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음식의 문제일까, 사람의 문제일까?

흐느적흐느적 보릿대춤이 정겨운 까닭

   

호모 코레아니쿠스 진중권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304쪽/ 1만3000원

서양 발레에서는 무용수들이 마치 중력을 거부하는 듯한 도약을 한다. 발끝으로 서고 손끝은 하늘을 향해 뻗치면서 더 높이 다가가려는 몸짓을 하다가 어느 순간 전력질주하며 하늘을 향해 비상한다. 누가 더 깃털처럼 가볍게 뛰어오르느냐가 발레의 관건이다.

그러나 한국춤에는 이런 동작이 없다. 신명난 무당이 엑스터시 상태에 이를 때도 무리한 도약과 같은 동작은 없다. 우리 춤의 발동작은 별 움직임도 없이 동동동 제자리를 맴돈다. 세계 어느 춤에서도 볼 수 없는 동작이라고 한다.

대신 한국 춤에서는 신명을 어깨로 표현한다. 신명이 고조에 달하면 주체할 수 없는 흥은 어깨에 실린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로 배우지 않아도 한국음악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적흐느적 보릿대춤을 춘다.

한국무용가인 김지원 박사는 ‘한국춤에 빠지다’(동아일보사)에서 서양춤은 수직의 춤, 한국춤은 수평의 춤이라고 정의했다. 한국춤의 어깨춤사위가 수평구조이기 때문에 장구와 같이 춤에 쓰이는 악기들도 위에서 아래로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깨와 평행선을 이루게 옆으로 두드리게 되었다고 한다. 듣고 보니 어깨에 메거나 손에 들고 치는 장구, 북, 소고, 꽹과리, 징까지 모두 수평운동을 한다.

그런데 어깨춤은 민속춤이라기보다 민족춤이라고 한다. 민족춤이란 어느 민족이 만들어낸 독특한 신체 움직임의 체계로, 인류학적 형질의 변화라든가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그 민족이 그럴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낸 자연발생적인 춤이라 할 수 있고, 민속춤은 생물학적 진화의 개념보다는 사회적 이슈나 역사까지 아우른 보다 넓은 개념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어깨춤은 한국인의 신체 속에 내재된 춤이다.

이 어깨춤이 엇박으로 이어진다. 엇박은 2002년 월드컵 때 응원박수를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한 번 듣고도 수만명이 하나가 되어 ‘짜짜아짝-짝-짝’ 박수를 치지만 외국인들은 그 리듬을 쉽게 따라하지 못한다. 어깨춤 동작을 외국인들에게 해보라 하면 로봇처럼 뻣뻣하게 어깨를 들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약 응원박수가 ‘짝-짝-짝-짝’ 하는 정박이었다면 그처럼 흥이 났을까.

한국인의 하비투스

한국춤에 빠지다 김지원 지음/ 동아일보사/ 248쪽/ 1만5000원

김 박사는 엇박이란 장단 사이에서 노는 고무줄과 같은 시간적 리듬이라고 말한다. 똑같은 공간에서 탄력 받은 시간들을 자유자재로 조율하면서 기막힌 호흡을 조절하는 박의 기교. 한국인이라면 따로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것이다. 여기에 절정의 순간 “얼씨구 좋-다”의 추임새까지 터져나오면 당신은 분명 한국인이다.

미학자 진중권은 ‘호모 코레아니쿠스’(웅진지식하우스)에서 ‘국민성’도 아니고 ‘정체성’도 아닌 ‘하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다. 국민성이라는 말 뒤에는 ‘인종주의 심리’나 ‘제국주의 논리’와 같은 편견이 숨어 있고, 정체성이라는 말에는 “한국인이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식의 이념적 가치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말로 흔히 ‘습속’이라 번역되는 ‘하비투스’는 특정 사회 성원들의 사고방식, 감정구조, 행동양식의 총합으로 한국인을 한 발짝 떨어져 낯설게 바라보는 데 적당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몸에는 타고난 자연의 바탕 위에서 사회적,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층위가 얹혀 있는데 이것이 ‘하비투스’라고 한다. 오랜 세월 농경사회에서 살아온 한국인의 습속이 약속에 좀 늦는 것을 당연시하고 또 너그러이 봐주는 ‘코리안 타임’으로 남아 있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여기서 하비투스라는 개념만 빌려서 한국인을 돌에 비유한 흥미로운 분석을 들어보자. 국립고궁박물관의 소재구 관장은 한국인을 가리켜 ‘돌의 민족’이라고 말한다. 돌로 쌓은 성, 돌담, 돌우물, 석탑, 석등, 석불상까지 우리나라에서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석조문화재는 전체 문화재의 30%가 넘는다. 왜 나무가 아니라 돌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지천에 널린 게 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산에도 바위가 없으면 명산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돌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영원함의 상징이다. 그런 돌과 함께 살면서 한국인은 어떻게 돌을 닮아갔을까?

돌처럼 거친 맛에 산다

소 관장이 첫손에 꼽는 것이 돌과 같은 거친 맛이다. 우리 조상들은 돌의 거친 속성을 간파하고 조각을 할 때도 반들반들하게 갈아내는 것이 아니라 거친 손맛을 그대로 표현했다. 석가탑, 다보탑, 정림사지오층석탑 등 국보급 문화재들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마지막 끝손질은 갈아낸 것이 아니라 두드려서 다듬었다. 매끈한 부드러움이 아니라 투박한 돌의 성정을 닮아 우리의 일상도 거칠다. 평소 하는 말에서도 “예뻐 죽고” “배고파 죽고” “기가 막혀 죽고”처럼 죽는다는 말을 거침없이 쓴다.

둘째, 돌처럼 제멋대로다. 우리 민족은 체질적으로 줄 맞춰 다니고 조용히 있는 것을 못한다. 농악놀이에 악보가 있던가. 태평소 날라리 악보 없이 잘도 맞춘다. 이렇게 각양각색 제멋대로 따로 놀지만 어느 순간 비빔밥처럼 모아져 오묘한 맛을 낸다.

셋째, 겉과 속이 똑같다. 돌을 쪼개면 무엇이 들어 있는가? 그냥 돌이다. 돌은 겉과 속이 같다. 그처럼 한국인은 속내를 감추지 못한다. 그래서 표정관리가 안 된다. 한국에서는 비밀이 통하질 않는다. 가슴속에 비밀을 묻어두지 못해 결국 누군가에게 얘기해버리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인은 나무와 같다. 나무는 한쪽이 타들어가도 한쪽은 아무렇지도 않다. 본심을 알 수 없다. 중국인은 흙과 같다. 그 깊은 속에 뭐가 묻혀 있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돌은 한쪽을 불에 달구면 금세 전체가 뜨거워진다. 이처럼 우리는 겉과 속이 같아서 단순하고 순박하다. 그러나 한번 달궈지면 쉽게 식지 않는다. 그래서 매사에 끝장을 보려 한다.

넷째, 정확한 것과는 담을 쌓았다. 돌의 특성이 정교하게 다듬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국보급 문화재라 해도 오차가 있다. 석탑의 사면을 재면 사면의 길이가 제각각이다. 돌끼리의 맞춤새는 정확할 때보다 부정확할 때 더 아름답다. 돌담도 듬성듬성해야 더 아름답다. 우리는 그런 오차를 즐기는 민족이다.

그럴듯한가? 그렇다면 당신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소 관장의 ‘돌을 닮은민족’ 이야기는 아직 한참 남았다. 이것은 소 관장의 강연 내용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이 내용은 아직 책으로 발표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