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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혁명가’ 정여립 자취 따라 강 흐르네

醉月 2008. 12. 29. 12:30

‘비운의 혁명가’ 정여립 자취 따라 강 흐르네

▲ 강은 산을 만나면 휘돌아 가고, 산은 강을 만나면 발거름을 멈춘다. 산과 강은 그렇게 어우러져 아래로 흘러간다. 산과 강은 결코 다투지 않는다. 천반산(왼쪽)과 죽도(오른쪽)는 구량천, 금강과 한바탕 우아한 휘몰이 춤을 추며 빙글 돌아간다. 가문 강물은 초승달처럼 실같이 흐른다. 몸을 서로 비비며 서걱댄다. 마른 나뭇잎 냄새가 구수하다. 정여립은 말을 타고 이 길을 달렸을지 모른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보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었을지 모른다. 진안 죽도= 김경제 기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에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전문>


 겨울 강은 배를 드러내놓고 있다. 모래밭이 항아리처럼 불록하다. 물은 한 모퉁이 조각달로 흐른다. 늙은 어머니의 빈 젖이다. 쪼글쪼글한 가슴이다. 더는 우렁우렁 콸콸 흐르지 않는다. 몸 푼 기억이 아득하다.


 겨울 강은 웅숭깊다. 속으로 흐른다. 푸른 하늘을 담는다. 산그늘도 담고, 새소리 바람소리도 담는다. 달그림자와 별똥별이 잠잔다. 짐승들은 목을 축인다.


 전북 진안군 죽도(竹島)는 육지 속의 섬이다. ‘물돌이 섬’이다. 강물이 사방을 에워싸고 흐른다. 하늘에서 보면 ‘강물에 떠 있는 삿갓’이다. 동북쪽은 덕유산에서 흘러내리는 구량천이 휘돌아 감고, 서남쪽은 금강 상류가 감싸 안는다. 죽도엔 산죽이 우우우 자란다. 겨울에도 흰 눈 사이로 푸른 댓잎이 청청하다. 구량천은 죽도를 지나자마자 금강 상류에 몸을 섞는다. 죽도가 곧 ‘두 물 머리’인 셈이다.


 죽도 앞은 천반산(天盤山·646.7m)이다. 천반산은 죽도를 향해 용머리를 내밀며 엎드려 있다. 소가 엎드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돌고래가 콧등으로 막 공을 쳐 올리려는 순간 같기도 하다. 공은 바로 그 앞에 있는 죽도이다. 천반산 콧잔등은 구량천 백사장 하나 사이로 죽도에 닿을락 말락 하다. 킁킁 콧김을 내뿜으며 냄새를 맡고 있다.


 2009년 새해는 기축년(己丑年) 소띠 해다. 기축년은 늘 바람꽃이 핀다. 바람 속엔 진한 ‘징후의 냄새’가 배어 있다. 뭔가 꿈틀거리고 요동친다. 거슬러 오르다가 미끄러지고,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선다.


 420년 전 기축년(1589년)엔 피바람이 불었다. 조선 선비 1000여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기축옥사(己丑獄事)가 바로 그것이다. 그 1년 뒤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이 있었고, 3년 뒤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20년 전 기축년(1889년) 언저리엔 나라 운명이 바람 앞 등잔불 신세였다. 5년 뒤(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불끈했지만, 곧이어 을사늑약(1905년)과 한일강제합방(1910년)의 치욕을 당했다. 60년 전 기축년(1949년)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 다음 해에 6·25전쟁이 터졌다.


정여립의 땀이 깃든 천반산 바위들
 기축옥사 한가운데엔 정여립(1546∼1589)이 있다. 그는 ‘누구나 능력에 따라 임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당시 조선 선비사회에는 벼락 치는 소리였다. 천둥소리였다. ‘왕후장상에 어디 씨가 따로 있느냐’는 것이다. 조선왕조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영국의 공화주의자 올리버 크롬웰(1599∼1658)보다도 50여 년이나 앞섰다는 것이다. 영국 공화정은 정여립 사후 60년 뒤 기축년(1649년)에 처음 실시됐다.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어찌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있는가? 누구든 섬기면 임금 아니겠는가!’, ‘인민에게 해가 되는 임금은 죽여도 괜찮고, 올바름을 실행하기에 부족한 지아비는 떠나도 괜찮다’, ‘백성과 땅이 이미 조조와 사마씨에게 돌아갔는데, 한구석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유현덕의 정통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정여립은 열혈아였다. 거칠 게 없었다. 선조 임금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피력했다. 이율곡도 주저 없이 그를 ‘당대 천재’라고 말했다. ‘선비들은 그를 한 번이라도 만나보는 게 소원(연려실기술)’이었다. 당대 최고 인기스타였던 것이다.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었다. ‘같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꿨다. ‘백성이 잘사는 나라, 모두가 잘사는 나라’를 바랐다. 양반 상놈 농민 노비 스님 등 그 누구든 뜻을 같이하면 계원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형제처럼 지냈다.


 그는 죽도에 공부방(書室·서실)을 차렸다. 매달 보름날에 대동계원들이 모여 무술 단련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눴다. 전라도뿐만 아니라 저 멀리 황해도에서도 참가자가 많았다. 1587년엔 나라의 요청으로 대동계를 이끌고 남해안을 침범한 왜선 18척을 물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정여립은 대역죄로 죽었다. 역사엔 그가 쫓기다가 죽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석연찮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뚜렷한 물증이 없다. 단 한 번도 저항한 흔적이 없다. 기거하던 전주에서 도주한 곳이 왜 하필 잘 알려진 죽도인가 하는 것도 의문이다. 대동계는 닥쳐올 임진왜란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조직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고은 시인은 암살당했다고 단언한다.


 ‘…주자는 다 익은 감이고 율곡은 반쯤 익은 감이고/또 누구는 숫제 땡감이라고 원조와 은사 할 것 없이/그리고 선배 따위 닥치는 대로 평가합니다/…어디 그뿐인가/인민에 해되는 임금은 살함도 가하고/인의 부족한 사대부 거함도 가하다/…한데 이 민족자결세력 늘어나자/조정의 정철은 대동계 일당과 선비 1천여 명을 검거합니다/천하 대역죄 먹여 홍살문턱 닳았습니다/ 정여립은 막판에 진안 죽도에서/아들하고 자결한 것이 아니라/서인 관헌 암살패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고은 만인보 1권 ‘정여립’ 부분)


 천반산 잔등은 평평하다. 사람이 살 만한 분지가 숨어 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복숭아를 받는 소반’ 같다고 해서 천반낙도(天盤落桃)의 땅이라고도 불린다. 트레킹하기에도 편안하다. 낙엽이 켜켜이 쌓여 있다. 사방은 시야가 툭 트였고 솔바람 소리 맑다. 저 아래엔 가문 강물이 구불퉁구불퉁 엎드려 있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파랗다.

 

 


 천반산 곳곳엔 정여립의 흔적이 남아 있다. 훈련할 때마다 천반산 제일 높은 곳에 ‘大同(대동)’이라는 깃발을 꽂았다는 깃대봉, 훈련지휘소인 한림대 터, 망을 본 망바위, 정여립이 말을 타고 뛰어넘었다는 30m 거리의 두 뜀바위, 연설대였다는 장군바위, 부하들의 시험무대인 시험바위, 정여립이 바둑 두었던 말바위 등이 있다. 금강 쪽엔 정여립이 목욕할 때 옷을 벗어 걸어두었던 의암바위도 보인다. 수백 명의 밥을 지었다는 돌솥은 전설로만 내려온다.


 천반산엔 송판서굴과 할미굴도 있다. 삼국시대 성터도 보인다. 송판서는 세종 때 예조판서를 지냈던 송보산을 말한다. 그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항의해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이 굴에서 수양했다. 할미굴은 그의 부인이 묵었던 굴.


선비의 못다 핀 꿈 댓잎 되어 겨울 강에 흐른다
 겨울 강은 담담하다. 펴지 않은 책이다. 뜯지 않은 편지다. 그 갈피에 삶이 담겨 있다. 역사가 있다. 봄물이 불면 찰랑찰랑 다시 웅얼댈 것이다. 책이 펴지고 편지는 읽힐 것이다. 새들이 포르르 날아갈 것이다.


 진안현감 민인백은 ‘토역일기’에서 말한다. ‘정여립은 칼자루를 땅에 꽂아놓고 자신의 목을 칼날로 찔러 자결했다. 그때 정여립의 목에선 마치 소가 우는 듯한 소리가 났다.’


 정여립의 처자식 사촌 처가 삼족도 씨가 말랐다. 그의 친구와 그를 따르던 사람도 모조리 죽었다. 정개청은 정여립 집터를 봐줬다가 죽기도 했다. 그의 집은 부서지고 그 터는 연못이 되었다.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다산초당)을 쓴 신정일 씨는 말한다. “16세기 말 개혁적 선비의 떼죽음은 결국 임진왜란 때 인재 부족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조선왕조 몰락의 결정타가 됐다. 선비들은 더는 바른 말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조선사회를 썩게 만들었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기축옥사를 ‘조선 500년 제일사건’이라며 한탄한다. “이것이 전민족의 항성(恒性)을 묻고 변성(變性)만 키우는 짓이다. 정여립의 이름은 300년 뒤에나, 500년 뒤에나 그 이름이 알려질 뿐이다.”


 그렇다. 정여립은 꽃을 피우지 못했다. 하지만 죽어서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꽃으로 피었다. 죽도의 흰 눈 사이 푸른 댓잎으로 남았다. 무화과처럼 ‘열매 속에 속 꽃’을 피웠다. 천반산 구량천 백사장 갈대들이 서걱대며 몸을 푼다. 천반산 밑 400여 년 된 당집의 느티나무들이 우렁우렁 싹을 틔운다.


 겨울 강은 저 혼자 깊어간다. 겨울 노을에 비낀 가문 강물은 소리 죽여 흐른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흐르는 물로 만나서,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봄은 언젠가 오고야 말 것이다.


화살보다 빨랐다는 정여립의 ‘용마’ 무덤 논바닥에 그대로
 전북 김제 금산사 부근엔 정여립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금산사는 후천개벽을 외치는 미륵신앙의 중심지. 정여립의 출생지는 ‘전주 남문 밖’으로만 되어 있어 정확한 위치가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금산사 아래 구릿골(동곡마을)에 살면서 이곳에서 처음으로 대동계를 조직했다. 그의 집터는 지금도 금평저수지 앞 제비산 월명암 부근에 남아 있다. 그가 죽은 후 조선시대 제비산엔 그 어떤 건물도 지을 수 없었다.

 

▲‘용마(龍馬)의 무덤’


 구릿골은 강증산이 ‘구릿골 약방’을 차려놓고 천하를 구제하던 곳이며 그 부근은 동학 김덕명포의 중심지였다. 또 녹두장군 전봉준이 그 인근 황새마을에서 청소년기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정여립이 타고 다니던 ‘용마(龍馬)의 무덤’(사진)이란 곳도 있다. 구릿골 아래 김제시 금산면 쌍룡마을 앞 논 가운데 무덤이 바로 그것이다. 정여립은 상두산에서 6km쯤 떨어진 김제 황산으로 활을 쏘았는데, 용마가 더 빠르게 달려가 그 화살을 물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화살을 쏘았는데 용마가 화살을 물어 오지 못했다. 정여립은 화가 나서 곧바로 그 용마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러나 나중에 살펴보니 화살이 용마 엉덩이에 꽂혀 있었다. 정여립은 크게 자책하며 그의 칼과 함께 용마를 그곳에 묻었다 한다.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그만큼 이 지방에선 정여립의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행정보

 

▼트레킹 안내 △A코스: 가막리 매표소∼당집∼서쪽 능선∼할미굴∼한림대 터∼성터∼마당바위∼깃대봉 정상∼동쪽 능선∼안부∼먹개골∼당집(송판서굴과 뜀바위는 한림대 터에서 왼쪽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나와야 함. 4시간 소요) △B코스: 천반산 민간 자연휴양림∼깃대봉∼마당바위∼한림대 터∼송판서굴∼뜀바위∼죽도 앞 백사장∼백사장 길 따라 자연휴양림(3시간 30분 소요)


▼교통 △대전∼통영고속도로 장수분기점∼장계∼(진안 방면)∼천천삼거리∼(국도 26호선)∼방고개 마이산 휴게소∼가막리 매표소 △전주∼진안∼장계∼(국도 26호선)∼방고개 마이산 휴게소∼가막리 매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