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막걸리는 전체 술 소비량의 80% 이상을 차지하면서 ‘국민주’로까지 불렸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주류 제조장의 통폐합이 이루어지고 탁주 제조사들은 자신의 관할구역 안에서만 사업을 해야 하는 제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탁주를 생산해도 타 지역으로 확대를 할 수 없으니 대형화는 물론 시장경제 논리에도 맞지 않아 경쟁을 통한 발전적 성장을 할 수 없었다. 1999년에야 주세법이 개정되어 탁주의 독점판매제도가 폐지되고 신규 면허를 허용하며, 식물 약재를 탁주에 첨가할 수 있도록 하는 개선방안이 마련됐다. 2009년 우리의 막걸리는 긴 오해와 불신을 끝내고 새로운 부활을 꾀하고 있다. 새롭게 떠오르는 우리 술 ‘막걸리’를 집중 조명한다.
부활
이마트 판매율 작년보다 20~30% 신장
젊어진 막걸리, 여대생 술자리서도 인기
“어쩜, 색깔 너무 예쁘다. 꼭 딸기우유 같아.”
“여기 딸기씨도 떠 있잖아. 칵테일 소주보다 훨씬 맛있어.”
지난 12월 말 오후 숙명여대 앞 한 민속주점 안, 딸기 막걸리를 시킨 여대생들이 연방 감탄을 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대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언뜻 생각하기에 ‘막걸리와 여대생’은 참 안 어울리는 궁합 같은데, 웃음꽃을 피워내며 막걸리를 비우는 그녀들에게는 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
숙명여대 정치학과에 재학 중인 남은혜(23)씨는 친구들과 함께 이 주점에 자주 들른다고 했다. “술은 먹고 싶은데 소주는 너무 쓰잖아요. 소주에 비해 막걸리는 달달하면서도 맛있어서 여자 친구들과 자주 찾는 편이에요.” 옆에 앉아 있던 윤희(23·건국대 중문과)씨는 “원래 술을 잘 못하는 편인데 막걸리는 부담이 없어서 선호한다”며 “부드럽게 마실 수 있는 맛이 일품”이라고 거들었다.
막걸리가 다시 뜨고 있다. 막걸리는 중장년층은 물론 젊은층과 여성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21세기 들어 막걸리가 다시 주목을 받는 데는 첨단 과학과 다양한 변신의 공이 컸다. 예전에는 막걸리를 오래 보관하는 게 가장 큰 숙제였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무살균 상태의 막걸리가 제조되기 시작했고, 실온에서도 6개월~1년가량 보관이 가능한 팩이나 캔 막걸리가 출시되기 시작했다.
막걸리의 종류 또한 다양해졌다. 딸기막걸리·키위막걸리 등 칵테일 막걸리가 생겨나고, 인삼막걸리·더덕막걸리 등 건강에 좋은 재료가 들어가는 막걸리들도 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막걸리의 변화에 대중들은 “소비”라는 행동으로 답하고 있다. 2008년 5월 국세청에서 발표한 ‘국내 술 소비동향’을 살펴보면 막걸리 판매량은 지난 2002년 12만9000㎘부터 시작해 2007년 17만2342㎘로 4년 연속 상향곡선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주류 전체 소비량 중 5.2%를 차지하고 있는 탁주 소비량은 전년도보다 1.3%나 증가했다.
국세청은 “막걸리 원료가 백미로 바뀌면서 술의 질이 높아지고 복고문화의 유행과 체인점 활성화 등에 힘입어 2003년부터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이마트의 주류판매동향을 보면 11월의 막걸리 판매율은 전년 대비 31.7%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12월의 판매율은 전년 대비 27%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참고로 양주의 경우 12월의 성장률이 -6.9%다.
? 예전의 카바이트 막걸리
카바이트는 생석회와 탄소를 전기로에 넣고 가열하여 만든 공산품이다. 색상은 회색으로 물과 반응하여 아세틸렌 가스를 생성한다. 일부 영세업체들이 1950~1970년대에 발효기간을 줄이고 원가절감을 위해 물을 타서 생산량을 늘리거나, 하룻밤 새에 숙성시키는 급조 막걸리인 ‘카바이트 막걸리’까지 내놓으며 심각한 수준의 불법과 탈법을 저지르는 사태가 발생했다. 마시고나면 머리가 아픈 게 최대 문제로 지적되며 학창시절 카바이트 막걸리를 많이 마신 지금의 중장년층이 막걸리를 기피하는 원인이 됐다.
역사
1960년대 쌀 부족으로 양조 금지 이후 사양길
1970년대 통일벼 보급으로 증산되자 다시 허용
“하루치 막걸리와 담배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했던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막걸리는 일반 대중에게 가장 친숙했던 음료였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쌀의 명산지였으며 국민은 벼농사를 주요 생업으로 삼아왔기 때문에 자연히 쌀을 원료로 한 술이 나오게 됐다. 그만큼 술의 역사도 길다.
고려시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고구려 개국시조인 동명왕(기원전 37년~기원전 19년)의 건국담에도 술에 대한 기록이 보일 정도다. 그러나 좋은 일이나 슬픈 일이나 늘 우리 서민들의 곁을 지켜주던 막걸리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면서 고난을 맞게 된다. 1907년 7월에 조선총독부령에 의한 주세령의 강제 집행이 시작됐다.
1916년 1월에는 주류 단속을 강화하면서 전통주류를 약주, 막걸리, 소주로 획일화시켜 우리의 전통 고급주를 사장시켰고, 1917년부터는 주류 제조업 정비가 시작되면서 자가 양조를 전면적으로 금지, 각 고을마다 주류 제조업자를 새로이 배정하였다. 더욱이 일본은 주세징수에만 중점을 두어 품질개량은 소홀히 했으며, 일본 청주의 범람으로 우리의 탁주와 약주는 전혀 개량되지 못했다.
1945년 광복 후에도 일제치하의 주세 행정이 그대로 이어져 다양했던 전통 주류는 잠적을 거듭하였다. 특히 1965년 만성적인 식량부족을 이유로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쌀을 이용한 술 제조가 전면 금지됐다. 막걸리 역시 재료를 쌀 대신 잡곡을 사용하게 하여 맛과 질이 떨어져 대중에게 서서히 외면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77년 12월 8일 통일벼의 보급으로 쌀이 남아돌게 되자 드디어 쌀술이 허용되었다. ‘서울탁주’의 관계자는 “막걸리의 원료가 100% 쌀로 바뀌면서 잃었던 우리의 맛을 다시 찾게 되었고 제조공정도 과학화됨에 따라 더욱 향상된 맛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