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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폭 그대로 ‘진경산수’ 완성터

醉月 2008. 12. 16. 20:57

연산폭 그대로 ‘진경산수’ 완성터 여기구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中 '내연삼용추' 두 장 가운데 하나.
위로부터 연산폭 관음폭 잠룡폭 등 세 폭포가 보인다.
 

관음-잠룡-연산폭포 그대로… ‘진경산수’ 완성터 여기구나


 조선 영·정조 때 풍속화가 단원(김홍도·1745∼?)과 혜원(신윤복·1758∼?)의 출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바뀐 세상의 소산이다. 당시 세상의 변화, 그 주역은 조선의 선비다. 실상과 배리된 중국 주자학을 가차 없이 발길질로 내차버린. 버리면 얻는다던가. 조선 성리학은 그렇게 태어났다. 나, 우리 자신, 우리 자연, 우리 생각이 요체다. 서양으로 치면 르네상스, 요즘 말로 하면 ‘시장주의 사상’ 아닐까. 세상사는 인과의 연속이다. 단원과 혜원의 그림도 같다.

 

 그 새로운 화풍의 문을 열어준 이가 있다. 바뀐 세상을 새로운 그림에 담아 보여준 겸재(정선·1676∼1759)가 바로 그다. 겸재가 없었던들 단원과 혜원이 있었을는지. 겸재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창시하고 완성한 한국화의 토대라 불린다. 그러나 ‘진경’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진경은 실경(實景)과는 다르다. 사물의 정밀모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화폭 속 자연과 인물 모두 같다. 진경의 핵은 거기에 담아낸 생각과 정신이다. 사물을 보는 시각, 자연을 대하는 자세, 세상을 보는 눈, 무엇을 보여주려는 의지 등등…. 겸재의 진경산수는 이런 것으로 점철된다. 새로운 준법(산과 바위를 붓으로 표현하는 방법)과 화법, 대담한 축소와 확대, 격한 대비와 과감한 구도.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를 들뜨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연을 우리 시각으로 담아냈다는 사실이다.

 

 ‘코리안 지오그래픽’은 2회에 걸쳐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현장을 찾아 떠나는 여행길로 안내한다. 그 현장은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완성된 ‘내연삼용추’의 포항 내연산 계곡, 진경산수화의 개막을 예고한 금강산 화첩 ‘해악전신첩’의 ‘삼부연 폭포’ 현장인 철원이다. 겸재도 알고 진경산수의 그림도 감상하는 새로운 화첩기행에 초대한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中 '내연삼용추' 두 장 가운데 나머지 하나.
 

▲내연산 - 내연삼용추. 겸재가 청하현감에 부임해 그린 진경산수화 '내연삼용추'의 현장인 내연산 용추계곡의 삼폭. 정면의 왼쪽 절벽이 비하대, 그 반대쪽이 학소대고 비하대 위의 소나무가 겸재송이다.

 

비하대 꼭대기엔 낙락장송 ‘겸재송’ 
 여기는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포항시내를 벗어나 국도 7호선을 따라 영덕으로 가는 도중이다. 산줄기와 바다가 남북으로 나란히 달리는 경북 동해안. 게서도 청하와 송라 이 두 면은 태백산맥의 산줄기 하나가 동해를 향해 잦아드는 형국의 산과 바다 사이 평지에 나란히 이웃한 고장이다.


 포항 내연산이 바로 여기, 청하면에 이웃한 송라면에 있다. 내연산은 겸재가 그린 폭포 그림의 현장. 아니 진경산수의 완성을 고한 그림 ‘내연삼용추’의 현장이다. 내연산 계곡을 찾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 열두 폭 폭포의 명성에 끌려 두 해 전 찾았었다. 당시 나는 그 계곡 풍경에 압도됐었다.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멋져서인데 설악에 못지않았다. 규모만 작을 뿐이지. 초입의 산사 보경사도 계곡의 풍치를 더한다.


 오늘 내게는 동행이 있다. 이곳 청하에 살며 나무와 식물, 꿈나무 아이들을 교육하는 식물학자이자 향토사가인 이삼우 원장(기청산식물원·청하중학교 재단이사장)이다. 겸재의 진경산수 현장을 찾아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내 말을 듣고는 선뜻 안내를 허락하셨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겸재송’을 찾아 세인에게 알려준 그분이었다.

 

▲내연산 - 내연삼용추. 겸재가 청하현감에 부임해 그린 진경산수화 '내연삼용추'의 현장인 내연산 용추계곡의 삼폭. 정면의 왼쪽 절벽이 비하대, 그 반대쪽이 학소대고 비하대 위의 소나무가 겸재송이다.

 
  ‘겸재송’이란 겸재의 그림에 등장하는 절벽 위 노송을 말한다. “10여 년 전이지요. 간송미술관의 학예연구원(현 최완수 연구실장)이 TV에 나와 여기 보경사와 연산폭포 아래 새긴 겸재 정선의 탐승각자(探勝刻字·명승지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행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 길로 이 원장은 겸재 그림에 등장하는 내연산 풍경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계곡을 따라 걷기 시작한 지 한 40분쯤. 겸재의 ‘내연삼용추’ 그림의 풍경을 빼닮은 절경 앞에 이르렀다. “이쪽이 그림에 암자가 깃든 선일대고 여기가 비하대, 저기가 학소대예요. 그리고 이게 관음폭포, 저 아래가 잠룡폭포고. 연산폭포는 바위에 갇혀 안 보여요. 겸재는 보이는 것처럼 그렸지만요. 저 구름다리 건너편 직벽 바위 뒤에 숨어 있어요.”


 노거수회를 이끌며 노거수보호 운동을 펼치느라 이곳 계곡의 지형을 훤히 꿰뚫고 있는 이 원장이다. 그는 그림 속 풍경 현장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짚어 주었다. 그러면 나는 기억 속으로 펼쳐둔 그림에서 하나하나 따라가며 그 현장을 추적했다. 겸재가 내연삼용추를 그린 것은 57세 때(1733년). 그러니 지금 나와 겸재 사이에는 275년의 간극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겸재의 그림을 따라잡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림이 너무도 생생하게 현장을 반영하고 내연산 계곡의 자연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어서다.


 구름다리를 건너 연산폭포로 다가갔다. 영하의 기온에서도 폭포는 여전히 물을 거침없이 내리쏟았다. 겸재의 탐승각자는 폭포 아래 바위벽에 있었다. 주변에 하도 많이 새겨진 데다 새김마저 오랜 풍상에 닳아 이 원장이 가르쳐주지 않았던들 도저히 찾을 수 없었을 이 글자. 두 줄로 ‘정선 갑인추’(鄭敾 甲寅秋·1734년 가을에 정선)라고 새겨져 있다.

 

▲내연산 - '탐승각자'. 내연산 계곡의 연산폭포 아래 바위벽에 '정선 갑인추'라고 1734년 새긴 탐승각자. 정선 부분만 흐릿하게 보인다.

 

▲내연산 - 겸재송. 내연산 용추계곡의 비하대 절벽 꼭대기에 있는 겸재 정선의 그림 속 소나무.
'겸재송'이라고 불리는 이 나무의 수령은 300~400년의 추정된다.

 연산폭포를 떠나 계곡 한가운데 관음폭포 앞에 앉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연삼용추’ 그림 그대로다. 똑같지는 않지만 이곳 이미지를 기막히게 담아내 둘이 하나로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소나무 한 그루를 찾고 있었다. ‘겸재송’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그 소나무는 그림 속에만 실재했다. 이 원장이 그 실체를 세상에 알리기 전까지. “저기(비하대) 꼭대기에 소나무 두 그루 보이지요. 저 나무가 겸재송이에요.”


 그 나무는 두 장의 그림에 등장한다. 하나는 ‘고사 의송관란도(高士 倚松觀瀾圖)’라는 부채그림이다. 한 도인이 소나무에 기대어 선 채 먼 산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노송은 한 그루인데 무척 정밀하게 그려졌다. 그리고 비하대 위의 노거수를 그대로 빼닮았다. ‘삼용추폭하유연견남산(三龍湫瀑下悠然見南山)’이라는 화제(畵題)가 노송이 비하대 것임을 말해준다.


 소나무는 ‘내연산 폭포’에도 등장한다. 그림은 이렇다. 기암절벽에 동그랗게 둘러싸인 계곡 한가운데 연산폭포가 걸쳐 있다. 그 뒤 왼쪽에 소나무 세 그루를 머리에 인 절벽(비하대) 이 불쑥 솟아 있다. 소나무 그림은 단순하다. 옆으로 위로 짧은 붓질 대여섯 번이 전부다. 그런데도 게서 낙락장송의 기개가 풍긴다. 실경에 내면을 담아내는 진경산수의 진수를 보는 듯했다.

 

▲겸재 정선의 '청하읍성도'


청하현감 재직 때 ‘청하읍성도’ 그려
 나는 그 소나무를 보러 비하대에 올랐다. 가파른 산길로 오르기를 10분. 소나무 여러 그루로 뒤덮인 천길 낭떠러지의 절벽에 다다랐다. 그중 가장 우람한 것이 겸재송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감동이 더욱 짙었다. 절벽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독야청청 선 모습, 거북 등처럼 갈라진 노송의 수피에서 전해진 세월의 무게 때문이었다. 이 나무의 수령(추정)은 300∼400년. 소나무 수피는 100년이 넘어야 이렇게 변한다는 게 이 원장의 말이다.


 조선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많은 산수화를 남긴 겸재. 그러나 그의 화업에서 청하 체류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진경산수가 예서 완성됐기 때문이다. 겸재 연구자 류영재(경주디자인고 교사) 씨의 견해는 이렇다. 최고 역작으로 평가받는 ‘금강전도’는 1734년 연산폭포에 탐승각자하던 그해에 그려졌는데 한 해 전 그린 ‘내연삼용추’에 나타난 진경산수의 매력이 극대화된 작품이라는 것이다(노거수회지 제 15호 중). 다시 말하면 ‘내연삼용추’에서 진경산수화풍이 발현됐고 ‘금강전도’에서 완성됐다는 평인데 이게 모두 청하 체류 2년간의 일이다.

 

▲겸재 정선의 청하읍성도에 등장하는 수령 500년의 회화나무. 청하면사무소 앞 주차장에 있다.


 청하에는 겸재 그림 속 풍경이 또 하나 남아 있다. 청하면사무소 앞에 있는 수령 500년의 회화나무다. 이 노거수는 겸재가 청하현감으로 있을 당시 그린 ‘청하읍성도’에 등장하는 두 그루 중 하나. 읍성은 사라졌지만 성벽 일부는 청하초등학교 담장 아래서 볼 수 있었다.


여행정보

◇찾아가기 ▽내연산=영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대구포항고속도로∼포항∼국도7호선∼흥해∼청하∼송라∼보경사 방향.


◇주변 여행지 ▽청하·송라면 △내연산 계곡: 향로봉(930m) 등 여섯 봉으로 둘러싸인 계곡으로 ‘작은 금강산’으로 불릴 만큼 절경. 보경사∼연산폭포 트레킹코스(2.3km)는 온 가족이 함께 걷기에 좋을 만큼 평이하다. 폭포 12개(낙차 7∼30m)가 있다. △보경사: www.bogyungsa.org 054-262-1117 △기청산식물원: 숲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정원처럼 조성한 식물원. 멸종위기 식물종의 안전한 보전을 돕기 위한 활동을 병행한다.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의 자생식물로 자란다. 한두 시간 새소리를 벗 삼아 산책하기에 좋은 호젓한 곳으로 해설프로그램도 있고 식물판매장도 운영 중. 겨우내 휴장. 청하중학교 옆. www.key-chungsan.co.kr 054-232-4129


▽포항시=www.ipohang.org △죽도어시장: 온갖 생선과 야채, 공산품을 파는 대규모 시장. 생선시장 골목에는 즉석 회식당이 즐비한데 자랑거리인 물회는 1만 원부터. △제11회 호미곶 한민족 해맞이축전: 31일 오후 5시∼1월 1일 정오, 호미곶 해맞이광장. 포항시 승격 60주년 기념으로 다채로운 행사 마련.

 

                                                                                    ▲김천회센터. 포항 죽도어시장내 김천회센터의 물회 상차림.
                                                                       1만원짜리 물회에 생선매운탕까지 딸려 나온다.
 
 ◇맛집 △춘원식당: 내연산계곡 입구 보경사 앞. 따뜻한 양지 녘 비닐하우스 식당에서 맛보는 칼국수와 손두부 맛이 일품. 054-262-5252 △김천회센터(죽도어시장): 물회(1만 원)를 시키면 생선매운탕은 덤. 054-244-0098, 010-5759-17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