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도성 ‘서울성곽(城郭)’ 답사기 | |
'서울성곽’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그 중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이후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남산 쪽으로 몇 백미터 오르면, 성곽 일부가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 극히 짧은 구간이다.
성 안쪽모습으로, 전형적인 내탁(內托)축성법이다. 내탁축성법이란, 성 밖을 높게하고, 안쪽을 낮게하여 방어에 유리하게하는 공법이다.
그러나 갑자기 시대와 고증을 알수 없는 이상한 성곽이 나타나고 만다. 만화영화에나 나올듯한 성곽이다. 고증을 알수없는 돌에다 시멘트 마감이다. 보수공사 당시, 입안자와 시공자의 합작 창조물이 아닐 수 없다. 이거 보수공사 하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전부 뜯고 다시 해야하니 말이다.
봉화대는 봉화를 올리던 둑으로, 전국에 걸쳐 여러 개가 있었는데, 특히 남산은 각 지방의 경보(警報)를 중앙에 전달하는 국방상 중대한 임무를 전담하는 곳으로 다른 곳과 달리 다섯 개나 있다.
▲그러다 대로가 나오며 그만 성곽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모두 모른다는 대답이다.
▲여기는 자유센터건물이다. 나중에 조사하니, 이 벽이 성곽을 만들었던 돌이란다. 성곽돌 빼다가 건물벽 만들었단 얘기다. 한참을 헤메다 할수 없이 광희문으로 향했다. 광희문(남동쪽에 위치한 사소문 중 하나)에 도착하여 파출소에 물어보니 내가 걸어온 한 블록 다음에 성곽이 있단다. 다시 올라갔다가 오기가 힘들어, 반대로 여기서 출발해본다.
▲광희문 안쪽모습이다.
▲약 100m가량 보수되어 있었다.
▲ 성벽이 개인집 담장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우리 문화재 보호수준이다. 물론 해방과 전쟁의 격변기를 보내며, 어수선한 때에 제대로 관리가 될 수 없었겠지만, 이제라도 비용을 지불해서 보존할 것은 보존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하지 않을까?
▲장충체육관에 이르자 성곽이 제 모습을 보인다.
▲ 우리의 '물림쌓기'공법을 한눈에 알수있는 성곽이다. 이 공법은 아랫돌에 비해 윗돌을 1치3푼씩 뒤로 쌓아,전체적으로 성벽이 15도 기울어지게 쌓는방법이다. 그래서 성벽이 무너지지 않고, 오래 견딜 수 있다.
▲서울성곽이 이 수준으로 복원만 되어도 좋을 것 같다. 다만 주위환경이 수원화성처럼 되려면, 어마어마한 경비가 소요될 듯 싶다.
▲암문이 있어 들어가 보았지만, 사유지라 결국 성 안쪽모습은 볼수가 없었다.
약 1.7Km 정도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었으나, 주위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다닥다닥 붙은 달동네 건물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저분한 쓰레기와 주차장으로 쓰이는 성곽길 또한 조망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만다.
▲거의 끝부분은 아직 보수가 되지 않은 상태다. 이렇게 약1.7Km의 남산자락 장충동 성곽길이었다. 조금 더 가면 남산과 이어지는데, 길이 끊어져 있어서 도로 내려가야 했다.
▲성 안쪽을 보려고 신라호텔로 들어가 보았다. 호텔이라 그런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차라리 이것이 관리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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